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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아틀란티스, 또는 텍스트의 운명

by  변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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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라진 아틀란티스, 또는 텍스트의 운명
    - 최윤의『겨울, 아틀란티스』론-


    1. `세상의 모든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소설

    1988년 여름. 최윤의 처녀작「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가 세상에 나오던 때는 국외적으로는 동구권 사회주의가 한 세기의 역사를 채 끝내기도 전에 벌써 마감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나라 안에서는 `군부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범국민적 항의가 날로 거세어지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역사적 변혁기라면 누구나 겪음직한 극도의 불안과 설레임이 그 무렵의 일상에 배어 있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리고는 머지않아 전개된 새로운 정세 속에서, 우리의 '80년대와 '90년대 사이에는 일대 정신사적 전환의 표지라 할 만한 굵직한 경계선 하나가 불현듯 그어졌었다. `자본주의/사회주의'라는 이분법적인 이념의 대치가 완화된 자리에 이념과 거대 서사 자체에 대한 회의의 싹이 돋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오랜 데카르트적 사유전통과 더불어 그토록 신뢰해 마지않았던 `이성의 빛' 속에 숨겨진 마각을, 양대 세계대전의 쓰라린 경험 속에서 자각한 현대 서구정신의 흐름과도 크게 무관하지 않은 것이었다.

    '80년대의 특수한 정치적 정황 속에서 성행했던 리얼리즘 계열이 퇴조하면서 나타난 '90년대 문학의 새로운 징후란, 이를테면 `근대 주체의 분열 양상에 대한 탐구', `삶의 세부적 국면에 대한 감각의 확충', `섬세함을 추구하는 문체의 개발', 그리고 `가볍고도 재기발랄한 신세대적 감수성의 구현' 같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같은 '90년대적 특징의 일부는 최윤의 첫 소설「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와 같은 한 소설적 시도에서도 벌써 드러나고 있었다. 대체로 `현실 고발'과 `현실변혁에의 열망'이라는 문학적 모토 위에서 다루어지기 마련이었던 `광주민중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이 소설에서는, 사뭇 이색적이게도, 철저히 배경으로 물러나 있는 것이다. 특히, 그 `거대한' 사건으로부터 상처받은 한 어린 영혼의 아픈 광기가 소설의 렌즈에 의해 집중적으로 그리고 다분히 자학적으로 비추어지고 있을 때, 이것이 하나의 작은 문학사적 함의를 지니는 사건임을 알아차리기란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더욱이, 이후 최윤이 내놓은 여러 작품들( 예컨대「회색 눈사람」,「워싱턴 광장」,「문경새재」,「그의 침묵」,「속삭임 속삭임」등)이 한결같이 `드러난 거대 역사'와 `그 뒤안길에 숨겨진 개인의 내밀한 삶의 정서'를 작가 특유의 세련된 필치로 접목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최윤의 문학적 방향을 좀더 분명히 짐작하게 한다. 말하자면 이미 종이 위에 씌어졌거나 아니면 앞으로 씌어질 역사가 결코 담아내지 못할 삶의 미세한 주름들, 그 작은 틈새들을 그녀의 소설들은 그 섬세한 문체의 살갗으로 만져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그녀가 채택하는 서사 전략이란 자주 `기억하기'와 `상상하기', 그리고 `속삭임'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 작가에게 있어 삶이란 어차피 "무수히 변주되는 기억의 교통정리 작업"(「그의 침묵」)이고, `기억하기'는 본질적으로 `현재'라는 허구적인 시간선상에서 이루어지는 또 하나의 환상이며, 그 점에서 그것은 충분히 `상상하기'의 다른 이름일 수 있는 까닭이다. 더욱이 "세상의 모든 장소가 숨은 얘기를 속삭이는 착각"(「집, 방, 문, 벽, 들, 장, 몸, 길, 물」)속에 사는 그녀가 그 숨은 얘기를 끄집어내기에 어울리는 방식이란 아무래도 `속삭임'의 형식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윤 소설의 이러한 특징들로부터 감지하게 되는 것 중의 하나는, 언어 또는 텍스트 자체의 의미를 묻는 작가의 민감한 자의식이다. 작가가 글을 쓴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가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동원하는 언어들의 정체, 그리고 그 언어들로 구성된 소설이라는 이름의 텍스트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또, 한 독자가 타인의 언어, 타인의 텍스트를 만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사건인가. 텍스트를 향한 독자의 좀처럼 절제할 수 없는 감정이입, 그리고 그가 텍스트에 대해 지니는 흥미와 호기심의 근원은 무엇인가. 특정 텍스트에 대해 왜 어떤 독자는 열렬히 반응하고 다른 독자는 그렇지를 못하는가. 무슨 까닭으로 그 다른 독자는 오히려 다른 텍스트에 더욱 공명하는 것인가.

    최윤의 장편소설『겨울, 아틀란티스』(1997)는 바로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작가의 고심의 흔적이 역력히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그녀의 다른 소설들이 대체로 그러했듯이, 이 작품은 우선 작가 특유의 지적인 사유구조가 한껏 절제된 형태로 침착하게 녹아 있는 서정적 문체의 아름다움을 독자에게 선사해 준다. 그러나 독자를 향한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유인소(誘引素)는 무엇보다도 소설 곳곳에 잠복해 있는 수수께끼들, 곤혹스러움과 해독의 욕망을 동시에 자극하는 `암호'들일 것이다. 이 때, 가장 유력하게 추정되는 핵심적인 해독의 지표는 이 암호들이 근본적으로 언어와 독자, 그리고 글쓰기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판단이 그르지 않다면, 이 작품이 함축하고 있는 최윤의 소설 쓰기는 단연 `텍스트 이론의 소설화'라고 명명될 수 있으며, 동시에 작가 또는 독자로서의 작가 자신과 언어를 탐구하는 철저히 자의식적인 작업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본고는『겨울, 아틀란티스』를 대상 삼아 최윤이 소설 형식을 통해 탐구하고 있는 독서와 글쓰기의 문제들을 집중 추적해 보고자 한다. 이는 어쩌면, 우리 문학이 그 동안 간과해 왔거나 아니면 적어도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텍스트성'의 문제를 재고함은 물론, 기왕의 그녀의 중단편 소설들이 보여준 고도의 미학적 품격과 그 깊이의 연원을 투시해 보는 데에도 유용한 렌즈 하나를 제공받는 길이 될는지 모른다. 불가피하게도, 언어는 언어와, 그리고 텍스트는 텍스트와 이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낡은 집', 부재와 우연의 공간

    이 소설이 크게 세 개의 장(章)으로 나뉘어져 있고, 그것들이 각각 <낡은 집>과 <K산장>, 그리고 <푸른 방>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주목해 볼 만한 사항이다. 연인의 실종에 상처받고 `낡은 집'에서 거처하고 있던 주인공 `이학'이 기이한 사건에 휘말려 `K산장' 주변을 맴돌게 되고, 종국에는 `푸른 방'을 꿈꾸게 된다는 식의 특이한 공간이동의 구조는, 그 자체가 이미 이 소설이 심상치 않은 입사식담(入社式談)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화두는 벌써 던져지고 있는 셈이다. 입사식의 기점에 놓여 있다 할 `낡은 집'이 표상하는 삶의 정황이란 어떤 것이며, `푸른 방'으로의 이행을 위한 통로로서의 `K산장'에서 주인공 이학이 경험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녀가 꿈꾸는 `푸른 방'이란 또 어떠한 함의를 지니는 공간인가.

    대학원을 갓 졸업한 스물 여덟 살의 여성 이학이 잠시 거처하고 있던 `낡은 집'은 표현 그 대로 고독과 황폐함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이 곳에서 그녀는 예기치 않게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애인 Z의 부재를 그저 막막히 견뎌 나간다. 아니, 사실 그녀는 그를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수많은 것들이 부재하는 아픔을 겪어왔다고 할 수 있다. 교통사고로 인한 부모의 비명횡사, 아이러니칼하게도 그렇게 해서 얻어진 보상금으로 대학을 다니고, 한 때 잡지사의 인터뷰 기자 생활을 했으나 대학원 졸업 후 실직 상태에 놓인, 그리고는 마침내 애인마저 잃어버리게 된 그녀. 이것이 외로운 그녀의 간략한 프로필이다.

    그렇다고 이학이 앓는 이 부재의 아픔이 어떤 주체할 길 없는 감정의 과잉으로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녀가 갈망하는 것들, 소통하려는 것들과의 `아득한 거리감'의 표출이라는 극히 절제된 형식으로 드러날 뿐이다. `모르스 부호 같은 잡음'이 이는 낡은 전화선, "거기 지구 맞습니까?"라고 아주 먼 거리에서 되묻는 듯한 대화 상대자들, 마지막 남은 재산의 일부를 털어 결연히 사들인 생소한 이름의 열대식물 `자르기나타', 낯설고도 신비한 중앙아시아 대륙의 사막을 담은 사진에 대한 회상. 그리고 Z가 가버린 곳으로 추정되는 아프리카라는 이름의 머나먼 대륙. 이들은 저마다가 서로의 무연성(無緣性)을 가장하듯 그렇게 태연히 텍스트의 이곳저곳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 그러나 은연중에 그것들은 어떤 아득한 거리감을 이학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감염시킨다. 언제나 무수한 종류의 거리 속에 놓이게 마련인 존재의 비극성을 시적(詩的)으로 상기시키는 힘 같은 것이 이들 사이에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학은 `우연성'이라는 또 하나의 삶의 속성을 이 세계로부터 감지해 낸다. 아무렇지 않게 `문득' 닥쳐오지만 결정적으로 많은 돌이킬 수 없는 운명들을 배태하곤 하는 그 불가해한 힘. 그녀 자신 순전히 우연한 사고로 고아가 되어 버렸던 것이고, 그녀의 세 친구들 또한 단지 `어쩌다' 색깔 있는 성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저 낯모르는 초라한 여자가 기차표 삯을 빌려주면 상경하고, 그렇지 않으면 남으리라' 식의 장난기 어린 시험으로 이루어진 Z와의 첫 만남, 그리고 `편지봉투를 물에 담가 보아 잉크가 물에 풀리지 않으면 읽으리라'는 이학의 심산은 또 얼마나 철저히 우연성에 기대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해서 이학은 연인 Z의 잠적에 대하여도 비현실적이리만큼 절제되고 건조한 태도를 보일 수 있게 된다. 그녀에게 있어 그가 사라진 이유 따위는 길 가던 그녀를 우연히 가로막고 선 `장애물 표지판' 정도로나 간단히 해석될 뿐이다. 우연성이란 우리에게 자주 참을 수 없는 불행을 가져다주지만, 그에 대한 믿음은 때로 실존적 고통을 견디게 하는 심리적 방어기제로 작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삶 속에 깃들인 결핍과 모호성이란 그 자체가 우리에겐 하나의 커다란 생의 `의문부호'로 다가오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 의문부호야말로 이 소설이 수수께끼적인 구성을 취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근거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지루하리만큼 반복되는 길걷기나 미로 이미지, 그리고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많은 `의혹'들은 삶의 모호성을 지시하는 상징적 장치들로 쓰이고 있는 셈이다. 특히 이 소설이 최초로 던지는 `Z'의 실종에 대한 의문은 서사 전체에 잠복해 있는 주요 수수께끼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기묘한 것은, 서사의 어느 지점에서부터선가 이에 대한 독자의 호기심이 서서히 희미해져 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쩌면 중요한 것은 Z가 사라진 이유나 장소 따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심증을 우리는 문득 지니기 시작한다. 그런 것들이 중요하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의 `우회'와 `한눈팔기'를 이 소설은 감행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3. 텍스트, `소설 큐피트'의 마법(魔法)

    이 소설이 채택하고 있는 `우회'와 `한눈팔기'의 서사전략은, 이학이 저 `낡은 집'이라는 불행한 공간을 견디기 위해 선택하는 방식에서부터 벌써 감지된다. 끊임없는 `언어의 운용(運用)'―. 불행한 느낌이 들 때 그녀는 누군가의 시를 공책에 베껴 쓰고 이를 암송한다. 그러면 그녀의 `개인적인 비극은 쉽게 사라져 버리'고 금세 `유쾌해지'는 것이다. 심지어는, 극한의 상황마다 앓는 `고속비만증(高速肥滿症)'도 다름 아닌 탐정소설을 탐독하면서 그리고 녹음기를 통해 약장수의 사설을 들으면서 원상복귀된다. 그다지 믿기지 않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어떻든 흥미로운 일 아닌가. 이쯤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언어의 마력'을 지각하고 있는, 그리하여 마치 마술을 부리듯 그것을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운용하는 한 `언어적 존재'이다. 철저히 타인의 것이면서 한 사람의 불행과 슬픔을 위무하는 힘을 발휘하는 언어. 그리하여 저마다의 슬픔과 슬픔, 저마다의 절망과 절망, 저마다의 고독과 고독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다리를 놓아주는 신비한 언어의 힘.

    이학의 언어 운용은 또 구직편지 형식의 `글을 쓰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가 쓰는 구직편지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처지를 `반영'하고 동일한 내용을 반복적으로 기록하는 정도의 상식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지 않다. 그녀가 시도하는 것은 이를테면 다양한 얼굴의 수신자를 상상하고 그 얼굴에 따라 경력을 조금씩 바꾸어 쓰는 일인 것이다. 누군가의 공감을 유도해 내기 위하여 갖은 상상과 기억을 동원하는 허구화 작업이라니, 도대체 이것은 그 자체가 이미 `소설 쓰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뿐만 아니라, 그녀가 눈에 띄게 자주 벌이는 갖가지의 `상상하기'와 `회상하기' 또한 언어 운용의 한 방식으로 채택되고 있다는 점은 확실히 흥미롭다. 조용하고 규칙적인 직장 생활을 보내고, 다달이 받은 월급으로 여행을 하며, 아프리카 여행 안내서를 보면서 잠들 것을 `상상하기'. Z와 들른 적이 있는 모든 장소들을 탐사하면서 그와 공유했던 과거의 순간들을 `기억해 내기'. 의식 또는 사고 행위 자체가 이미 부단한 언어의 조직화 과정이며, 심지어 무의식조차 언어적 구성물에 다름 아니라는 현대의 언어관에 의거한다면, `상상하고 기억하는' 이학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우리는 언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초상을 확인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결핍과 상실, 그 아픈 부재의 공간을 `언어의 감옥' 속에서 무병(巫病) 치루듯 앓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 같은 것 말이다.

    한진영의 소설 읽기도 예외는 아니다. 그녀는 어떤 면에서 이학보다도 훨씬 강력하게 언어의 마력에 사로잡혀 있는 여인이다. 한 유명작가 장기영이, `고진'이라는 소설가와 자신의 과거를 `훔쳐' 글을 쓰고 있다는 이상한 심증(心證) 속에서 떠도는 그녀. 그녀가 끝도 없이 들춰대는 `모방'의 증거들을 대하다 보면, 독자들은 누구나 조금쯤은 흥분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는 물을 것이다. ―대체 장기영의 `범죄'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그러나 이에 대해 이학이 제출하는 견해는 엄정하기만 하다. 한진영은 소설을 현실 모사의 산물로 착각하고 있는 `광기'의 소유자라는 것. 한진영이 처해 있는 실제적 정황에 대해서는 막연히 암시만 할 뿐 사실상 입을 다물고 있는 이 소설은, 그러나 바로 그러한 전략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여러 방식의 추정에 동참하게 한다. 그녀는 연인의 배반이 남긴 상처로 심각한 정신적 공황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일까. 아니면, 모종의 사고로 특정 기간의 기억을 상실한 그녀가 자신의 애인을 곁에 두고도 그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일까. 그도 저도 아니라면 차라리 한진영과 고진의 애정행각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사건이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녀는, 누구에게나 소중한 존립 근거로 기능하기 마련일 사랑의 경험을 전혀 가져보지 못한 일종의 `결핍증' 환자일 수 있다. 이학도 벌써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중략>… 공허했다.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짓지 않으면 안 되는 기억의 성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삭제된 과거, 존재하지 않은 과거를 어떻게 존재케 할 것인가. (213-214)

    하지만 이것이 비단 한진영의 경우만은 아닐 것이다. 생각해 보면 모든 독서란 본시 그런 것이 아닐까. 가령, 그녀를 두고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고 판단하는 이학조차도 그녀와 아주 흡사한 상태를 경험하게 되지 않는가 말이다. 장기영의 소설 속에서 엉뚱하게도 자신의 애인 Z를 찾고 있는 이학의 모습이란, 어쩔 수 없이 한진영과 동일한 미망에 빠져든 자의 그것일 수밖에 없다. 이는 독서 직후, 소설의 `바깥'을 대면하는 그녀의 인식과 감각이 소설 `내부'의 지평에 의해 크게 지배받게 되는 모습에서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 나도 어느 새 한진영처럼, 종이로 된 우주 속으로 서서히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나 아닌지(169-170)

    …갑자기 `현실감이 꿈처럼' 나를 덮쳤다. 어느 새, 나는 방금 읽은 한 문장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182)

    장기영의 소설은 이렇게 스스로의 언어의 마력을 두 여인에게 강력히 행사한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그녀들의 시선이 닿는 `소설 바깥'의 사물들이 다른 어떤 것에도 영향받지 않은 `순수한'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는 법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언제나 그녀들이 앞서 `읽은 공간'에 의해 이미 얼마간은 오염되어 있다. 그녀들은 결코 자신들이 `방금 읽은 한 문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사물들을 바라보는 그녀들의 의식 세계는 이미 `소설 큐피트'가 쏜 화살의 `마법'에 걸려 있는 상태, 즉 장기영 소설의 `흔적'이 묻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4.밑줄 긋기, 언어와 욕망의 접점

    그렇다면, 텍스트에 그토록 가벼이 미끄러져 들어가는 한진영과 이학의 심리 저변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그 곳에는 다름 아닌 그녀들의 `욕망'이 있다. 그 어떤 구체적인 내력을 지니고 있든 한진영의 미망에는, 장기영과 그의 소설에 대한 비난이나 분노가 아니라 오히려 그녀 자신의 은밀한 욕망이 깔려 있는 것이다. 지난 시절 연인과 나누었다는 사랑의 경험을 오늘에 와서 재생하고픈 욕망, 또는 극심한 정신적 결핍을 철저히 가상적인 현실에 기대어 메꿔 보려는 욕망. 특히, 무심코 선택되는 한진영의 산책로들로부터(90-97), 그리고 장기영의 소설 속 도망자의 무의미한 도주로로부터(197-199) 애써 모종의 기호나 법칙 따위를 도출해 내려는 이학의 시도는, 결코 간단히 요약될 수 없는 삶의 미세한 기미들을 어떤 식으로든 도식화해 보려는 총체성 지향의 눈멂 같은 것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독자는 언제나 각자가 지닌 욕망과 기억과 경험의 `흔적' 위에 서 있을 뿐이다. 이 경우, 이 소설은 독서 행위를 결국 이렇게 정의하고 있는 셈이다."한때 존재했으되 지금은 사라져 버린 것, 또는 애초에 부재했던 것을 상상하기를 통해 존재화하는 욕망 충족의 작업."

    앞서 필자는 언어 또는 소설을 선뜻 `큐피트'라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짓궂은 사랑의 신과는 상이한 속성을 보인다. 신화 속의 큐피트는 상대방의 욕망 따위는 아랑곳없이 자신이 원하는 목표물을 향해 겨냥할 뿐이다. 그러나 소설 큐피트는 독자 개개인의 고유한 욕망과 충분히 물밑 교섭하고 대화함을 통해서만 화살을 쏜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 누구에게 화살을 쏜다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부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화살을 쏘는 주체는 실제로는 어디에도 없으며, 오직 어딘가로부터 날아와 공중을 가로질러가는, 그리하여 어쩌다 서로 부딪혀 현란한 춤을 추기도 하는 화살들, 그 `흔적'들의 부단한 영향관계만 중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설에 새겨진 언어의 화살과 독자의 욕망이 맞부딪히는 바로 그 지점에만 오직 `밑줄'이 그어진다는 사실이다. 동일한 장기영의 소설을 읽는 데도 불구하고 한진영의 밑줄과 이학의 그것이 전적으로 동일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독자에 의해 `그어진 밑줄', 다른 종이에 `베껴 씌어진 문자'는, 그러므로 서로 다른 욕망과 경험과 기억의 총화들인 작가와 독자, 그리고 텍스트와 독자의 정신적 만남이 이루어지는 다양한 지점들을 지시하는 기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진영은, 모든 독서란 얼마간은 나르시시즘적인 욕망과 얽혀 있게 마련이며 그렇기 때문에 특정 소설로부터 느끼게 되는 생생한 핍진성이나 공감(共感)이라는 것은 많은 부분 독자 자신의 숨겨진 욕망에 기인한다는 점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실제 현실을 그토록 감쪽같이 모사했다고 믿어지는 소설이라는 것도 기실은 현실을 구성하는 무수한 파편들 중 몇 가지를 선택하고 조합해 낸 교묘한 `조작'의 소산이며, 그리하여 작가가 빚어낸 환상이 독자 자신의 욕망과 만나는 지점에만 그 신비한 울림이 생겨나는 것임을 그녀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간과되어서 안 될 것은, 이 소설이 이 같은 맹점을 안고 수행되는 한진영의 독서 방식을 단순히 `광기'와 `착오'가 개입된 독서 태도로만 몰아 부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독서 방식은 오히려 `모든 열렬한 독서의 일반적인 본질'임을 이 소설은 은밀히 속삭인다. 그녀의 독서경험이 "한 작가의 작품이 한 개인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 베풀어진 것"(227)이라는 이학의 진단이 가능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같은 관점은 흥미롭게도 이 소설이 열렬한 독서 체험을 사랑의 문제와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고도의 몰입 속에서 이루어지는 독서 경험의 저변에는 무엇보다도 `고진'이라는 기표로 표상되는 연인에 대한 사랑의 갈망이 잠복해 있다. 게다가, 타인의 작품이 스스로의 삶을 모방한 것이라 믿을 만큼의 철저한 몰입을 감행하고 있는 한진영의 심리적 상황은, 무엇인가에 사로잡힌 듯 집요하게 애인을 추적하는 사랑의 열정과 무엇이 다른가. Z가 남긴 암호투성이의 메모에 대해 한때 이학이 발휘했던 저 `해독의 인내력'(108) 이라는 것도 사랑이라는 이름의 그 맹목적인 집착과 호기심이 아니라면 또 어떻게 얻어질 것인가. 극도의 나르시시즘적인 몰입과 구제할 길 없이 빠져드는 감정이입으로서의 열렬한 독서행위는 사랑의 감정과 매우 유사한 속성을 지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학이 한진영에게 `자신이 꾸며낸' 한진영과 고진의 `이야기'를 해 주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인 대목이라 할 수 있다.(213-226) 결국 그것은 문학의 본질에 대한 이학 자신의 자각의 반영이며 실천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동안 한진영의 산책길과 독서 이력을 부단히 좇아왔던, 그리하여 다만 `보는 자', `읽는 자'로만 존재해 왔던 이학이 이제 몸소 `이야기하는 자', 즉 `소설가'로 변모해 있는 것이다. 장기영 소설의 소재들을 자유로이 `조합'해 가면서, 그리고 필요하다면 슬쩍 얘기의 방향을 선회하기도 하면서…. 지금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은, 소설이란 현실의 모사물이 아니라 한판의 기호 놀이임을, 그리고 독자란 무의식적으로 또는 이를 충분히 의식하면서도 놀이를 또 하나의 현실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진지한 놀이자'임을 한진영에게 인식시키는 일이다.



    5. 텍스트, 흔적과 유예의 삶

    `낡은 집'에서 `푸른 방'으로 가는 길목의 `K산장'이 이학에게 부여한 깨달음은 그녀로 하여금 마침내 본격적인 독서에 착수하게 한다. 하지만 그녀의 새로운 독서는 한진영의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수행된다. 타인의 밑줄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밑줄을 그어가며 읽는, 그리고 텍스트에의 감정이입이 아니라 글쓰기 작업 자체에 대한 냉정한 분석과 투시가 개입되는 독서인 것이다. 이는 이학이, 언어와 문학에 대한 한층 심도 있는 이해와 그녀 자신의 글쓰기를 향하여 이제 막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이 소설의 후반부는 장기영 글쓰기의 `비밀'을 파헤치는 이학의 관찰과 분석 과정에 온전히 바쳐지고 있다.

    이학이 장기영 소설에서 발견하는 것은 놀랍게도 `분열'과 `단절'의 징후 그리고 `이미 존재한 문장들의 변조'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당황한다. 동일 작가가 쓴 동일 소설 내부의 문장들에 나타나는 단절이라니,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낸 그의 소설이라는 것이 기껏 모방과 표절의 산물이었단 말인가. 그러나 이학은 그것들이 `글의 문맥에 하도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들어가 있어 전혀 다른 분위기와 의미를 발한'(229) 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이학은 글쓰기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영향'의 소산임을, 즉 글쓰기란 언제나 이미 존재했던 다른 누군가의 인식이나 문장의 `흔적' 위에 자신의 무엇인가를 덧칠하는 `창조적 베껴쓰기'임을 자각한다. 한 작가의 소설은 어떤 식으로든 순전한 작가 자신만의 독자적이고 자기동일적인 언어구성체가 되지 못한다. 소설 `바깥'에 대한 독자의 인식 내용이 늘 소설 `내부'의 언어에 의해 앞서 오염되어 있듯이, 작가의 언어 역시 이미 `다른' 작가의 언어에 오염되어 있는 것이다.

    `숨은 작가'에 대한 이학의 추적과 이본(異本)설은 그러므로, 모든 글쓰기가 운명적으로 내포하는 `영향과 흔적의 역사'에 대한 은유적인 명제들로 읽혀진다. 이 주제는 특히 장기영 소설들의 짤막한 줄거리 속에 다양하게 변주, 반복되고 있어 주목된다. 주인공이 자신의 분신이라 할 만한 어떤 그림자 같은 존재에 의해 서서히 먹혀버린다는 이야기, 무명화가인 친구의 그림에서 얻은 영감으로 성공한 한 화가 이야기, 또, 어느 삼남매의 생활에 잠시 틈입하여 이들의 삶에 흔적을 남기고 떠난 한 남자 이야기 등. 이 이야기들은 모두 상호동일한 성격의 이항대립쌍을 안고 있다. `드러난 작가/숨은 작가', `주인공/그림자', `성공한 화가/무명화가', `남매/한 남자'. 이 때 전자는 `드러난 것, 현존하는 것, 중심적인 것, 자기동일적 자아 또는 주체라고 믿어지는 것'을, 후자는 이에 대응되는 `숨은 것, 부재하는 것, 주변적인 것, 주체의 외곽에 존재하는 타자'를 대변한다. 이 때 주목되는 바는 다른 쪽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근원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 후자라는 사실이다. 말없이 숨어 있거나 부재한 듯하면서도 상대방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마침내 무서운 힘으로 그것을 지배하는 것, 그것은 단연 `숨은 타자', 또는 시간의 물결 속에 거품처럼 사라져 `지금 여기에 부재하는 타자'이다. 결국 장기영의 소설들은 이 `타자'의 비의적인 힘을 주요 테마로 삼고 있는 셈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이학이 자각하고 있는 텍스트의 본질과 독서의 의미가 어느 새 `데리다'의 사유방식에 근접해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좀 무리하기는 하지만 `차연의 논리' 정도로 최대한 요약될 수 있을 그의 세계관은, 한진영과의 만남을 통해 그리고 장기영의 소설을 읽으면서 진행되는 이학의 사유과정에 쉽게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자끄 데리다는, 거대한 우주 공간의 한가운데에 뿌리박고 있는 유일한 `중심'과 개체들의 `현존'을 가능케 하는 궁극적인 `기원'이라는 것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이들에 대한 믿음은 그에게는 플라톤 이래 서구 철학이 온갖 다양한 형태로 변주, 온존시켜 온 한갓 환상에 불과하다. 세계는 오직 개체들의 부단한 상호작용이 빚어내는 매순간의 새로운 관계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매순간의 새로운 영향 관계만 있을 뿐이므로 물론 현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저자'와 `원본'에 대해 그가 내리는 사형언도 또한 철저히 이 같은 인식에 의거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기원과 중심이 부재하는 세계 속에서 장기영의 `비밀'을 캐어 보려는 이학의 시도가 좌절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리하여 소설은 `장기영의 죽음', 그리고 `이본과 마지막 소설의 실종'이라는 형태의 극화를 통해 `기원과 중심의 부재' 또는 `숨은 타자의 힘'을 드러낸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한때 백지에 뚜렷이 존재했을 푸른 문자들의 사라짐, 그리고 푸른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서서히 죽어가는 장기영의 모습이란 얼마나 섬뜩한 것인가. 그것은 그대로, 저 고대 어느 시기에 화려한 은성(殷盛)을 누렸으나 이내 자취도 없이 해저에 가라앉아 버렸다는 환상의 섬 아틀란티스가 아닌가. 이 허망하고도 섬뜩한 아름다움 앞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모든 텍스트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본다. 무슨 본능과도 같이 근원으로서의 저자, 이본 따위를 부단히 찾아 나서는 우리들. 그러나 자꾸만 중첩되는 흔적과 유예의 삶.



    6.부재 위에 씌어지는 글쓰기

    그런데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이 소설이 부재의 시학을 `비밀 은폐하기'라는 서사 전략을 통해 가동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이 소설이 수수께끼 규약을 서사의 중심축으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리소설 일반의 범주에는 포함될 수 없는 중요한 근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가령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Z는 왜 사라졌는가. 한진영과 최모는 어떤 관계인가. 그들은 똑같은 노크소리를 내는, 말하자면 서로 습관이 같았던 연인들인가. 그리하여 한진영이 말하는 고진이란 최모를 일컬음인가. 최모는 한진영에게 상처 입힌 죄의식 때문에 이학을 고용하여 그녀를 돌보게 한 것인가. 그렇다면 최모와 장기영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최모야말로 장기영에게 소설의 소재를 제공해 준 장본인인가. 그러나 이 소설이 명백히 해명하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 우리는 저으기 놀란다.

    게다가, 어떤 독자들은 끝내 비밀을 파헤치지 못하는 고통과 갖가지 추정들을 생산하는 즐거움의 교차 속에서 모종의 불안을 경험할 수도 있다. 이 경우의 불안이란 많은 부분 이 소설이 채택하고 있는 서사 기법상의 문제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틀림없다. 예컨대, 까다로운 독자라면 누구나 주인공 이학이 보이는 불성실하고 모호한 태도를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녀는 왜 한에게 최와의 관계를 정면으로 묻지 않는가. 왜 그녀는 그토록 쉽사리 궁금한 것들을 `묻지 않기'로 결심하는가. 한진영의 독서에 관한 지극히 사적인 정보를 그녀는 과연 어떻게 알아낼 수 있었는가. 물론 이것은 작가가 <K산장> 부분을 굳이 1인칭 시점으로 전환시킨 사정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인칭 화자는 3인칭 시점의 경우와는 달리 `비밀을 말하지 않을 권리'를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을 단지 `고백하지 않는' 것과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아무튼 가능했다'고 `시치미 떼는' 것은 다르지 않겠는가. 리얼리티 측면에서 볼 때 이학의 이런 태도는 이런 식으로나마 비밀을 유지해 가려는 작가의 그리 세련되지 못한 전략으로 보이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이론 또는 관념의 서사화 작업'이라는 것이 얼마나 정교한 작업을 요구하는가를 반증하는 일례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수수께끼를 던져 놓고 이를 풀어내려는 독자의 노력에 충분한 보상을 하지 않는 것 자체가 이 소설이 기용하고 있는 의도적 서사 전략의 하나라는 사실만큼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어떻든 이 소설은 `비밀 은폐하기'의 서사전략을 통해 정체 파악이 끝없이 지연되는 삶의 본질, 또는 저 `차연의 논리'를 온몸으로 구현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기호와 지시대상 사이, 기표와 기의 사이엔 언제나 그들의 일치를 가로막는 `장벽'이 존재한다는 소쉬르의 명제는 `현실 모사'로서의 글쓰기라는 한진영의 믿음을 깨뜨린 최초의 이론적 계기였다. 또, 언어란 사물의 `죽음'을 딛고 그 위에 `대신' 들어서는 것이라는 라깡의 언술 역시 현실과 소설의 관계를 재정립시켜주는 중대한 이론적 근거로 작용해 왔다. `언어의 감옥'을 벗어나오지 못하는 우리에게 현실은 좀처럼 그 전모를 드러내지 않는다. 현실을 언어의 그물로 포획했다고 우리가 기뻐하는 순간, 그것은 어느 새 그물들의 틈새를 빠져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도 언어와 사물 사이, 언어와 현실 사이, 존재와 존재 사이에 비집고 들어서 있는 `거리'를, 그 아득한 `부재'의 심연을 정복할 수가 없다. 실로 언어란, 현실이라고 믿어지는 것들의 죽음 바로 곁에서만 피어나는 가혹한 아름다움인 것인가. 그러나 이에 대한 쓸쓸한 자각이야말로 이학으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지극히 역설적이다. 누군가 이미 뱉어낸 언어들의 흔적 위를 덧칠하여 씌어지지만, 다음 순간에는 다른 누군가의 덧칠 속에 사라지고 말 언어들. 그리하여 스스로의 죽음을 향해 한 발짝씩 나아가는, `독약'으로 쓰는 글쓰기, 오로지 부재 위에만 씌어지는 글쓰기의 이상한 역설을 우리는 목격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부재가 지니는 비밀스런 힘을 자각한다.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기억하게 하고 상상하게 하며 마침내 글을 쓰게 하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부재'의 심연이다. 아틀란티스의 저 거대한 부재, 존재 증명의 그 영원한 불가능성이야말로 아틀란티스를 존재케 하는 근원적인 힘인 것이다. 일찍이 이학이 공책에 베꼈던 시「울므로 가는 길」(10-11)이 노래한 것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울므'에 가보고 싶은 자가 `카페 울므'에 들러야 하는 까닭은 그 곳이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카페 울므'로 `명명된' 공간, 그 허구적인 텍스트의 공간을 창출하는 것은 울므의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부재'인 것이다. `어떠한 경계도 없이 시야를 무한히 확장시키'는 `푸른 방'이라는 상상적 공간이 창출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안개', `유리벽' 따위의 경계들 투성이인 현실에는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침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부재 위에 흔적들로 새로이 짜여져 가는 언어의 그물들이 되는 셈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이학의 글쓰기가 어떤 것이 될 것인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적어도 그것은 `모든 텍스트의 운명을 분명히 의식하면서 행해지는 글쓰기'임이 틀림없다. 글쓰기란 `부재 속의 꿈꾸기'이며, 부단히 미끄러지면서 자유로이 조합되는 기호들의 발랄한 움직임 속에 스스로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변지연

    변지연

    1965년 전남 장성 출생

    동국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경기 성남시 수내중학교 교사

  • <사라진 아틀란티스, 또는 텍스트의 운명>을 뽑고나서

    - 김성곤


    최종심사 대상작은 박은경의 '아버지를 향산 실험', '이경의 '악몽으로의 초대', 안미영의 '육체적 담론을 통한 화해의 도정', 그리고 변지연의 '사라진 아틀란티스, 또는 텍스트의 운명' 이었다.

    '아버지를...'은 장정일 소설의 부권 전복과 성별문제를 여성독자의 시각으로 탐색한 것은 좋았지만 다소 줄거리 해설식으로 흘러 주제가 희석되는 점이 아쉬웠다. '악몽으로의 초대'와 '육체적...'은 둘 다 상당한 수준의 문장력과 논리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바흐친적인 시각과 인식으로 주제를 이끌어 나가는 솜씨가 돋보이는 수작들이었다. 특히 몸 담론을 펼친 '육체적...'은 비록 논지와 주제가 충분히 복합적이지 못해 아깝게도 당선작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려의 대상으로 남아 있었다.

    '사라진 아틀란티스...'는 최근의 독서이론에 입각해 저자와 독자 그리고 독자와 텍스트와의 관계를 복합적으로 탐색한 평론이다. 텍스트의 분석도 줄거리 요약에 그치지 않고 심도있게 진행되고 있으며 현대 비평의 주요 곤심사들인 유희, 수수께끼, 부재, 흔적, 욕망, 우연, 지우기와 밑줄긋기 등의 모티프도 적재적소에서 논의되고 있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정도의 역량이라면 앞으로 좋은 글을 쓸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 당선작으로 뽑는다.
  • 변지연

    변지연

    1965년 전남 장성 출생

    동국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경기 성남시 수내중학교 교사

    흐린 겨울날, 무슨 깃털과도 같이 가볍게 날아든 당선 소식에 한참을 어리둥절해야 했다. 기쁨인지 두려움잊니 모를 복잡한 감정이 흡사 하늘로 솟는 새떼처럼 가슴을 휘젓고 지나간다. 사는 일에 유독 불안이 많았고 그래서 끝없이 소심했던 나에게, 삶은 이렇게 문득 문 하나를 열어 보이는 것인가. 이 문이 과연 나를 어떤 곳으로 이끌고 갈 것인가를 나는 미처 알지 못한다. 오직, 비긋이 열린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낮은 목소리를 또렷이 들을 수 있을 뿐이다. - 더욱 치열하고 정직하게 삶과 문하게 투신할 것!

    그동안 내 곁에는, 어설픈 내 문학수업이나마 다사로운 애정으로 다독여 주신 많은 분들이 계셨다. 늘 새로운 시각과 열정으로 문학의 깊이와 외연을 확장할 것을 깨우쳐 주신 한용환 교수님, 작은 가능성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찾아내어 알뜰히 격려해 주신 홍기삼 교수님, 남다른 관심으로 '조용한' 나를 흔들어 깨우신 김인호, 채명식 선생님 및 동국대 국문과 선후배 여러분, 그리고 생각만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생태문화연구회' 가족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어쩌면 문학에 아내를 빼앗겨 버렸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그럼에도 짜증 한번 내지 않고 든든히 지켜보아 준 남편, 공부한답시고 자주 '직무를 유기하는' 며느리에게 한없이 관대하셨던 시부모님께도 그간의 송구했던 심경을 이 자리를 빌어 털어놓고 싶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도 어느 누구보다도 열렬히 자식을 후원해주신 나의 부모님께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 나오는 경의를 표한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글을 과감히 뽑아 주시어 '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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