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울음산

by  이우상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실종의 정체는 무엇일까. 자발적인 도피, 집단의 이지메로 인한 쫓겨감, 거대한 힘에 의한 존재의 소멸 등 몇 가지 규정을 들추어 보았지만 금무하의 사라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마뜩하게 집히는 게 없었다. 실종과 상실은 동의어일까. 무쇠솥 바닥에 남은 물기가 사라지듯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빈도가 차츰 줄어들더니 실종되었다는 선언을 최종 판결처럼 내렸다. 선언이래야 거창한 의식을 치른 것도 아니고 더 이상 관심을 쏟을 의욕이 없다는 암묵적 의사가 전부였다. 모든 것이 궁극에는 하나로 남겠지만 존재를 존재로 있게하는 것은 또다른 하나의 존재일 것이다.

    박찬술이 금무하를 찾아나선 것은 그의 직업 근성에서 연유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전직 검사, 변호사 사무실이 입주할 적합한 건물을 알아보거나 머쓱하게 이력서를 들고는 이미 팀을 꾸려 돌아가는 합동법률사무소의 문턱을 드나들며 조금은 허둥거려할 시간임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체국 상자의 밑바닥에서 수 년간 묵어있다가 날아든 엽서처럼 빛바랜 금무하의 실종 소식을 접하고는 갑자기 발작처럼 그를 아리게 했다.

    불순한 색깔로 분류하는 그 월간지에 금무하가 사라졌다는 기사가 흡사 추도사처럼 곡진한 문체로 실려 있었다. 그 바닥에서 덕망과 논리를 두루 갖춘 한 이론가의 상실을 아쉬워하는 장문의 기사였다. 금무하가 사라졌다는 것은 그동안의 정황으로보아 객관적 심증이 그려지지 않는 일이었다. 거대한 힘이라는 것이 실재한다해도 무하는 이미 그렇게 가볍게 처리할 정도의 물건이 아니었다. 이미 그 세계에서 명성과 지위가 어느 정도 확보된 인물이었다. 단순 변사로 처리하기에도 버거운 존재로 성장한 그였다. 그간 드문드문 그의 근황이 소개되고 격문같은 그의 글귀를 접할 수 있었는데 실종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규정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신념같은 게 박찬술의 등을 떠밀었다.

    사람 찾는 일, 더 정확하게 말하면 피의자를 찾는 일이라면 지난 10년 8개월동안 그것은 그의 밥이요, 공기요, 술이요, 혈액이었다. 삶과 그것이 등식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작은 티끌만 포착하면 솔솔 당겨 나오는 것이 그짓이었다. 핀셋으로 집은 솜털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그 끝에 매달린 거대하고 흉폭한 핏덩어리를 캐내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러한 능력이 윤기를 낼수록 그의 머리에는 유능한 검사라는 화관이 하나씩 덧씌워졌다. 그 화관의 뒤꼍에 팽개쳐진 격리와 폐쇄, 단절과 파괴, 절망과 포기의 무더기들은 그가 관심 기울일 문제가 아니었다. 앞으로, 앞으로만 목청컷 외친 시간들의 연속이었으니까.

    10여년간 연마한 그의 도력을 이제 자신을 위해서 써야겠다는 결의가 부시시 일며 그는 나그네가 되었다. 금무하를 찾아 제자리에 놓는 것이 그가 남긴 어린 남매를 위해 그리고 박찬술의 아슴한 기억 속에 굳은 딱지로 붙어있는 부채를 갚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심지어 금무하까지도 부채로 여기지 않을, 아니 까마득히 잊어버렸을 그것을 위해 길을 나선 것이다. 삶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 그들 사이 관계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라는 의문이 갑자기 쏟아지는 여름날의 해비처럼 솟구쳤다. 영원히 돌아가지 않기로 일찌감치 기억에서 굳게 도배질한 그곳을 찾게한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박찬술에게 그곳은 결코 고향이 아니다. 20대말 이전의 세월들은 썩뚝 잘라 화장터 화덕 속에 던져 넣은 지 오래다. 뻘밭을 헤치고 나아가는 길에 한치의 유익함도 제공하지 않았던 공간이 고향이라는 이름이었다. 일찌감치 본적지마저 서울로 옮겨버렸다. 은밀한 부끄러움과 치욕과 이를 앙다물게 하는 증오의 땅이 어찌 고향이 될 수 있을까.

    "뉘기고? 뉘긴데?"

    낡은 폐가를 지키고 있는 무하의 노모는 머리만 풀면 귀신의 형상이었다. 툇마루의 판자는 군데군데 함정처럼 허물어져 있었다. 우람한 소슬대문과 기와집 지붕에 무성한 잡초가 힘들게 버티고 있는 권위를 말해주고 있었다. 방문을 반쯤 밀치고 움푹 들어간 눈으로 찌푸리며 바라보는 노파가 무하의 노모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20여년의 세월이란 주름살만 잔뜩 얼굴에 퍼부었을 뿐 달라진 것이 없었다.

    "뭐시, 니가 찬술이라꼬? 왜 왔노? "

    노인네의 역정에 개의치 않고 찬술은 큰절을 올리려 마루로 올라가려고 신발무새를 만졌다.

    "어디, 어딜 올라올려고! 여기가 어디라고, 당장 나가거라, 이놈!"

    인적마저 끊어졌을 덩그런 고가를 외로이 지키는 늙은이답지 않게 금방이라도 작대기를 휘두를 듯이 서슬이 퍼랬다. 세월은 강철도 녹이는 힘이 있다는 말이 빈말이었다. 전신에 우지직 힘이 솟는 듯 벌떡 일어나 방문이라도 뜯어 집어던질 기세였다. 찬술을 저주하기 위해 힘을 축적해둔 듯 노파의 사지는 뿌직뿌직 소리를 내며 삭은 혈관이 꿈틀거렸다. 예상은 했었지만 참담한 벽에는 진행형의 덩쿨이 칼퀴처럼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아니다 아니다라고 부정의 깃발을 콘크리트 덩이에 꽂은 지 이미 오래였다. 그러나 고향이 아니다라는 확고한 정의와는 별개로 그는 지금 여기에, 유년 시절을 온통 검정 숯덩이로 얼굴을 칠해버린 금무하의 집 안마당에 와 있다. 해질 무렵 돌아갈 곳이라고는 여기밖에 없었던 그 마당에 다시 섰다.

    "니같이 모질시런 놈, 난 모른다. 썩 눈앞에서 없어져라."

    무하의 소식에 대해서는 운도 못떼고 길거리에 내다놓은 이삿짐처럼 난처하게 섰다가 낡은 장승같이 서있는 대문을 삐걱 밀고 다시 나와야 했다. 마당에 엎드려 큰절을 올릴 때 무하의 노모는 강풍이 후려치듯이 방문을 탁 닫아버렸다. 잊혀진 땅에 작은 풀씨 하나 심는 심정으로 잡초 무성한 마당에서 찬술은 곡진하게 절을 올렸다. 서늘하게 닫혀진 방문을 향해 오래묵은 그리움으로, 돌아온 탕아처럼 끈끈한 아픔을 가슴으로 토해내며 느리게 큰절을 올렸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빈손을 땅바닥에 짚으며 오래 엎어져 있었다.

    "배은망덕한 노오옴!"

    키의 두 배도 넘는 소슬대문을 밀고 나오는 찬술의 뒷통수에 무하 노모는 짙은 가래처럼 응어리진 말을 뱉았다. 인위적으로 잊혀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이승의 질서인가보다. 박찬술이 그토록 부정하며 몇겹씩이나 억센 풀칠을 하며 도배질했던 이곳의 존재와, 금방이라도 꼬꾸라질 것같은 삭은 육신을 근근히 버티고 있는 무하의 어머니가 간직한 찬술에 대한 증오는 결국 형체만 달리한 같은 얼굴인지 모른다.

    잊기로 작정한 것에 대한 업보라도 되는 듯 읍내에는 아는 얼굴이 없었다. 아니 몰래 잡입하여 금무하의 실종에 대한 단서를 잡으려는 박찬술의 소극적인 접근이 아는 얼굴을 찾기 어렵게 했다. 하천가에 펼쳐진 상설시장에라도 가서 선거 유세를 하듯이 열두 살까지 살았던 기억들을 공개적으로 떠벌리면 이리저리 연결되는 인연들이 줄줄 닿을 것이지만 그렇게는 할 자신이 없었다.

    찬술에 대한 어렴풋한 소식들은 작은 읍내에서 굴뚝 위에 솔솔 풍기는 연기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특히 박찬술이 사법 고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은 작은 읍내를 술렁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 술렁임은 진정한 축복 속에 놓여있지 않았다.

    "양조장하던 무하네 집에 얹혀 살다 도망간 그놈아가 무신 큰 벼슬한다메?"

    "큰 벼슬은 무신 큰 벼슬, 옛날로 치믄 과거에 급제한 택이제."

    "그기 그기지. 과거에 급제했으믄 이제 곧 큰 벼슬할끼구먼."

    "그래봐야 니한테 무신 국물 있다데?"

    "아따, 국물 되게 좋아하네. 그렇다는 말이제."

    "그나저나 무하네 어메는 기뻐할 긴가, 배아파 할긴가?"

    "부처가 아닌 다음에야 열통 터지겠제. 무하란 놈은 서울가서 선생질한다드먼 빨갱이가 되었는지 순사들이 수시로 저거 집에 드나드니. 감옥에 갔느지 갸 어메가 서울가는 폼이 옥바라지 하는 보따리같드먼."

    "이참에 찬술이란 놈한테 빽을 쓰믄 되겠네."

    "갸 어메가 차마 그렇게 할 위인인가? 한 번도 살갑게 거둬주지 않아 도적질해서 야반도주한 놈한데 굽신거려?"

    "그놈이 쬐그맣다고 불쌍히 봤다가 큰코 다쳤제. 장롱 속에 있는 금붙이를 싹 털어 가버렸다지 아메. 호랑이 새끼를 키운 셈이었제."

    그렇게 식은 밥덩이처럼 찬술에게 던져졌던 소문에 대한 보복이라도 하듯 찬술의 이력서에는 이 읍내에 관한 기록은 삭제되어 있었다. 서울 출생, 검정고시 출신이 그의 성분으로 공식화되어 있었다.

    찬술은 경찰서 앞에 있는 다방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민망할 정도로 시설이 허술했다. 그 민망함을 더욱 당혹케 하는 것은 소읍에 어울리지 않게 벌건 다리통을 쫙쫙 벌린 늘씬한 미인들이 분주히 들락거리는 것이었다. 조금씩 시려오는 날씨에도 아랑곳없다는 듯이 엉덩이 부분의 속살이 보일락말락한 짧은 치마와 허리살이 드러나는 셔츠를 입고 보자기에 싼 쟁반을 들고 여닫이 출입문을 사이에 두고 피스톤처럼 분주한 왕복운동을 해대고 있었다. 실내에 앉은 유일한 손님에게는 관심도 없는 듯 그 흔한 인사말조차 없었다. 고향이란 그것이 설령 아픔으로 덕지덕지 점철된 공간이라할지라도 변화하지 말아야 할 곳, 케케묵은 인분냄새가 코를 찌를지언정 그냥 그대로 성소처럼 남아있길 원하는 곳이다. 변화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더듬어도 형체를 알 수 있는 근원적 형상으로 늘 거기 그렇게 존재하길 바라는 소박한 욕심의 표적지에 고향이 놓여 있어야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온갖 검불과 물살이 주변을 덮고 일렁거리게 할지라도 바위처럼, 보석처럼 꿈쩍않고 바닥에 앉아있는 사랑이 참사랑일 것이다. 세상은 너무 많은 치장에 혼이 팔려 포장지가 본질인 줄 알고 참으로 흔하게 분노하고 좌절하고 배신감에 치를 떠는 것은 아닐까.

    "뭘좀 물어볼려고 하는데 누구 말상대해 줄 사람 없나요?"

    간이역의 창구처럼 생긴 주방 입구를 향해 약간 언성을 높였다. 카운터와 주방을 분주하게 왔다갔다하는 중년 여자가 들으라고.

    "아가씨와 시간보낼려면 티켓 끊어야 해요. 근데 지금은 안되겠네요. 예약이 밀렸어요."

    더 이상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은 스스로를 능멸하는 것 같아 황급히 커피 한잔을 마시고 나와버렸다.

    "죄송합니다. 이곳 분이 아니신가본데 저녁 때 여관으로 차주문 하세요. 예쁜 아이 보내드릴께요."

    고향은 역시 관념 속에 존재하는 허상인가보다. 그래, 겁내지 말고 아는 얼굴을 찾아보자. 이곳을 지키고 있는 유년 시절 동무 중 한 녀석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고향이란 스스로를 위해 인위적으로라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첨단 문명의 시대에 구시대의 왕조를 고수하는 축들도 따지고 보면 왕조란 결국 자신들을 위한 장치일 것이다. 여왕과 천왕이란 얄궂은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스스로 존귀해진다는 착각, 자기 위안을 위해 그것을 고수한다. 그것은 목숨바쳐 지킬 제도는 결코 아니다. 단지 남들이 그것을 부정할 때는 버럭 화를 내는 정도의 장치일 뿐이다.

    양조장도 없어져 버렸고 극장도 사라졌다. 양조장은 폐차장처럼 낯선 기계들을 수북히 쌓아둔 야적장이 되어있고 군민회관으로 근근히 명맥을 이어가던 극장은 이제 용도를 찾지못한 폐허가 되어버렸다. 아련한 몇 가지 기억들이 그것들 위에 겹쳐졌으나 그 현장은 거미가 살지않는 거미줄처럼 생기가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폐허가 존재의 본질까지 지우지는 못했다.

    무하네가 주인인 양조장 마당에는 수시로 구수한 고두밥 냄새가 높은 담을 너머 마을에 자욱하게 퍼지곤 했다. 철대문 틈새로 보이는 마당에는 여러 장 늘어놓은 멍석 위에 하얀 고두밥이 싸락눈처럼 질펀하게 널려있곤 했다. 찬술의 고통은 풍성한 눈더미같은 고두밥을 길다란 대나무 작대기를 들고 지켜야 하는 것에 있었다. 담넘어 습격을 감행하는 아이들로부터 이 재산을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찬술로 하여금 무하네 집의 식객으로서 붙어있게 하는 의미였다. 나른한 하오의 봄볕 가운데 길다란 대나무 작대기를 들고 고양이, 쥐, 참새는 물론 그보다 더 지능적으로 습격을 감행하는 동네 아이들로부터 고두밥 더미를 지키는 것이 어린 목숨을 연명하게 하는 수단이었다. 자칫 그 책무를 소홀히 하다가는 양조장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외팔이 영감에게 혼쭐이 난다. 찬술에 대해 가혹한 형벌을 내리는 것이 자신의 책무에 대한 충실도를 나타내는 것인양 은빛 갈퀴를 휘두르며 법석을 떨곤했다. 무하의 아버지 즉 양조장 사장님의 안색이 펴질 때까지 혹독함을 멈추지 않곤 했다. 그러나 그 형벌의 원인은 고양이에게도, 새떼에게도 있지 않았다. 담장을 넘어 들어와 고두밥 더미 위로 발자국까지 흉하게 남기며 보급투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한움큼씩 약탈을 감행하는 동네 아이들 때문이었다. 그들로부터 고두밥을 온전히 지킨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했다. 그들의 기습이 전격적이기도 하지만 그들을 인솔하여 전광석화처럼 작전을 감행하는 선두에는 늘 무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보여준 동지적 유대를 강조하는 눈빛 앞에 찬술의 대나무 작대기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신속하게 목표물을 탈취하여 시한폭탄이 터지기 전에 진지를 탈출하길 성원하는 내부 동조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진두 지휘하는 무하는 물론 우르르 몰려온 아이들 역시 당장 내일이면 학교에서 얼굴을 부딪쳐야 하는 동무들었으니까. 그리고 찬술 자신은 게거품을 흘리며 외팔이 영감에게 얻어터지는 일을 남겨놓곤 했다. 그것이 왠지 무하에 대한 예우같기도 하고 그가 베푼 호의에 대한 사례같기도 했다.

    "호로노무 새끼! 고양이 새끼 한 마리 지키지 못하고, 그라고도 밥을 쳐먹을라 카나."

    외팔이 영감의 분노는 진심에서 우러나는 충정이었다. 고두밥이 흩뭉개진 것이 자신의 상처라도 되는 듯 치를 떨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너무 진지하여 그를 증오할 어떤 명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외팔이 영감이 얕은 동정심으로 그를 위로하고 눈물이라도 닦아주었다면 얼마나 허약하게 술수를 익히며 커갔을까. 자신의 책무에 불같은 열정이 세상을 지탱하는 기둥일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준 외팔이 영감이었다.

    동지들과 함께 고두밥을 한뭉치씩 입과 주머니에 쑤쎠넣고는 황급히 개구멍으로 탈출하면서 무하가 보여주었던 애틋한 눈빛, 적진에 동지를 떨구고 떠나는 병사의 안쓰러움같은 눈빛이 남아있는가 싶어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방직공장에서 옮겨 놓은 이상한 쇳덩이들만 마당에 그득했다.

    극장 집 아들이었던 지호가 읍내에서 택시 기사를 한다는 소식을 얻은 것이 큰 소득이었다. 낯설지는 않으나 편치않은 큰길을 따라 우체국을 지나 아시거랑을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 지금까지 남아있는 신사양복점 영감이 지호의 근황을 알려주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흔치 않았던 활동사진 광고에서 멋을 한껏 부리며 치수를 재고 재단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중년 사내가 이젠 등굽은 늙은이가 되어 신사양복점의 낡은 간판을 지키며 여태 거기에 졸며 있었다.

    버스 정류장 부근이 집합소인양 택시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정류장 입구에서 동전 놀음을 하고 있는 기사의 무리들에게 지호를 물으니 뒤쪽을 향해 이름 대신 차량 번호를 외쳤다. 지호가 다가왔다. 누구에게나 낯설고 두렵고 죄지은 것같은 무거운 부채의식, 그것이 박찬술의 가슴을 무겁게 윽박지르고 있었다. 지호를 향해 손을 쳐들고 뛰어가 손을 잡고 마구 흔들고 오랜만의 해후에 감격해하는 정경을 펼칠 수 없는 근원적인 아픔이 질기게도 남아 있었다. 밝고 다감한 목소리는 항상 타인의 몫이었다. 자신 이외의 존재에게서 적의가 없다는 너그러움이 표출되어야만 그제서야 안심이 되어 자신도 그와 정서와 정감의 높이와 깊이를 조절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 소읍에서는 지금도 자신을 향해 알 수 없는 화살들이 햇빛처럼 내리쪼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전신을 옥죄게 하는 사슬이 여태 치렁치렁한 덩쿨식물처럼 살아있는 것 같았다.

    피의자들에게 그토록 가혹했던 것은 그들이 내뿜는 적의 때문이었을까. 검찰청 주변의 분위기를 아는 피의자들은 박 검사에게 걸렸다하면 생똥이라도 쌀 각오를 해야했다. 그리고 그러한 각오를 가지게 하는 것만으로도 박찬술 검사는 동료의 누구보다도 유능한 수사관으로 추앙의 화관을 덧씌워갔다. 모든 피의자는 100% 거짓말장이이다. 이러한 소신이 흔들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한 잣대가 크게 어긋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 엄살과 변명만큼 가증스러운 것이 어디 있을까. 그러한 술수에 현혹된다면 그의 책무 수행은 갈팡질팡한다는 것을 일치감치 굳혀버렸다. 그리고 그러한 술수는 약자들이 즐겨쓰는 방법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폭력은 어떤 언어의 기술보다 더 훌륭한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것도 현장에서 체득했다. 죄를 규명하는 일에 언어를 동원한 설득이란 무기력하고 허무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주변 정황이나 정상 참작 따위는 재판부의 몫이지 검찰의 몫이 아니라는 신념도 확고했다. 거짓과 기만으로 중무장한 것들과의 처절한 싸움이 자신의 일상이라는 화두에 견고하게 묻혀 있었다.

    지호가 다가왔다. 택시 기사를 한다고 했을 때 이미 그의 모습을 상상했지만 상상력이 잠시 무색해졌다. 반쯤 벗겨진 머리에 앞니가 몇 개 없었다. 20여년의 세월이 귀티나던 부잣집 도령을 참혹하게 삭아지게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집에서 경영하던 극장이 창고로도 쓸 수 없게 지붕마저 뻥 뚫린 것처럼. 처음 극장이 신축되었을 때 온 읍내는 떠들썩했다. 몇몇 날리는 가수들이 직접 내방하여 쇼판을 벌일 때면 극장 앞은 파시처럼 화사했다. 미처 입장하지 못한 처녀 총각들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극장 앞에서 들뜬 흥분을 가누지 못하고 헐떡거리고 있었다. 옷깃이라도 잡으면 극장 출입이 자유로운 깃발과 같은 존재가 지호였다. 지호와 한 무리임이 시각적으로 확인되면 극장 입구에 버티고선 덩치좋은 사내가 등을 치며 입장시켜 주었다. 무하와 찬술, 다른 아이들도 큰 고통없이 그 대열에 합류했던 달콤한 기억들이 있다.

    장미 다발에서 장미꽃을 한 송이씩 뽑아 아이들에게 던져주었던 지호가 빠진 이빨자국을 희죽희죽 보이며 다가왔다. 어제 저녁에 함께 술을 마시고 아침에 다시 만난 것처럼 대수롭잖다는 표정으로. 전신에 용을 쓰고 있는 것은 찬술 자신이었을 뿐이다. 근육과 뼈가 아직 이렇게 꼿꼿이 서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분명 이제는 더 잃을 것도, 더 채울 것도 없다는 확신이 서서 길을 나선 것인데. 거대한 건물이 순식간에 폭삭 내려앉아 먼지처럼 사라진 그의 아내와 두 딸을 존재의 원점으로 보내버리고 나선 걸음인데, 아직 잃을 것이 더 있어서 이렇게 근육이 굳어있단 말인가. 움켜쥘 무엇이 있어 손아귀가 아린단 말인가. 매운 먼지와 물범벅, 절규와 고함, 쉴새없이 들려 나오는 시신들, 하나씩 시신이 들려나올 때마다 뱃전에 쏠리는 인파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던 유족들, 무질서의 극치를 보여주었던 사고 현장의 매케한 냄새를 이제 잊은 줄 알았는데.

    500여명의 사상자를 낸 그 백화점의 붕괴사고에 대한 분노와 절망 중 최후의 기대와 절망은 박찬술의 것이었다. 15일 17시간을 버틴 끝에 극적으로 구조된 처녀의 빨간 발톱 메니큐어는 아름다운 인간 승리였다. 죽음과 맞서 물한모금 마시지 않고 버틴, 의학적으로도 규명하기 힘든 드라마같은 기적이 박찬술에게는 나타나지 않았다. 짓뭉개진 몰골이나마 시신을 찾은 이들은 아픔을 잠글 열쇠나마 마련한 셈이다. 신체의 한부분이 망가졌어도 들것에 실려 구급차를 탄 이들은 또다른 생성을 기대할 수 있다. 분명 그 속에 있을터인데 흔적하나 나타내지 않고 먼지되어 허공으로 떠난 박검사의 아내와 두 딸은 정체가 무엇이었단 말인가.

    99일 동안 사지가 뭉개지도록 밀림 속을 헤매였건만 그의 아내와 딸들은 오롯이 저들만의 세계로 산화했다. 장마비도 멎고 난민촌 철거현장처럼 굉음과 울음소리도 멎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굴삭기도 자신들의 잠자리로 가버렸다. 사고현장은 역사의 유물처럼 포장으로 둘러쳐지고 더 이상 캐낼 것이 없는 폐광처럼 모든 열정들이 떠나갔다. 분명히 이 속에 있다는 박검사의 신념을 증명할 그 무엇, 생전 처음 갈색으로 염색했다고 부끄러워하던 퍼머넌트한 아내의 머리카락 한올도 발견되지 않아 그도 결국 마지막 삽질을 놓아야했다.

    "그건 인재야, 인재!"

    "그런 구조물이 세상에 어딨어. 기둥 하나 없이 넓은 광장같은 매장에 물건을 잔뜩 늘어놓고 사람들을 불러모았으니."

    "언제 무너져도 무너질 건물이었어."

    "무너지는 순간까지 안내방송도 안했다고."

    "돈보다 더 소중한게 없는 치들이지."

    "극적으로 살아나 그 처녀 총각은 커플 맺으면 좋겠다. 땅속에서 맺은 인연들이 아니겠어."

    후일담과 평가에 능통한 것이 세상의 인심일 것이다. 그러한 입담이 가슴에 담담하게 담긴다고 느꼈을 때 박찬술 검사는 낡은 교복의 명찰을 뜯어내듯 사표를 냈다. 그 엄숙한 의식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금무하의 실종 소식이 그에게 새로운 일거리나 되는 것처럼 이 소읍을 찾았다. 추억과 기억이 그의 발바닥 군살 어디쯤 아픈 못으로 각인되어 있는 이곳으로.

    지호의 대답에는 신뢰의 무게가 실려있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그의 계산된 의도는 아닐 것이다.

    "우리도 잘 모른다. 전에는 글마 집에 형사들이 수시로 드나든다 카드라만은 요새는 잠잠한가보드라."

    영업용 택시라면 시간이 돈일텐데 지호는 일을 끝내야겠다면서 찬술을 태우고 유천교 밑으로 갔다. 포장마차의 변형쯤되는 음식점들이 몇 개 있었다.

    "개인택시니까 괜찮다. 그나저나 니참 오랜만이다. 영영 안 올 줄 알았는데. 판산가 검사한다는 소문은 들었다. 지금도 하제? 무하네나 우리집은 대충 망했다. 망한 것도 없지. 그냥 먹고 사니까. 요샌 집집마다 텔레비 천지인데 극장이사 벌써 문닫았다. 극장이 택시 한 대 된 셈이다. 근데 무하는 왜 찾을라카노? 글마도 고향하고 인연 끊은지 오래다. 저거 아부지 돌아가시고 양조장 문닫고. 뭘 하는지."

    과잉동작 없이 그를 맞아주는 지호가 고마왔다. 자기자리에서 일인분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대견했다. 사실 찬술의 내심 아주 부끄러운 곳에는 나이가 좀더들면 이곳 지청으로 지원하고픈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것이 좀처럼 떨구어지지 않는 아픈 기억을 한순간에 씻어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져보기도 했다. 그 기억이 카바이트 덩어리처럼 고약한 냄새를 피우는 것이라면, 이 소읍에 부임하여 새파란 영감님으로 행세한다면 순식간에 부시식 소리를 내며 녹아버릴 것이라고 비시시 웃음을 흘리며 상상하기도 했었다.

    "정 찾을라믄 니사 경찰을 통해서라도 수배를 해볼 수 있지 않겠노? 좁은 땅에서 죽지않았다면 뛰어야 벼룩 아이겠나. 무하네 집에는 가봤나? 무하네 어메가 혼자 큰집을 지키고 안사나."

    무하네 집에서 있었던 일을 여과해서 간단히 전했다.

    "그 할마시는 아즉도 꿈속을 해매제? 이웃 노인들도 잘 찾아가지 않는다. 나도 그저 그쪽으로 빈차로 지날일 있으믄 드문드문 들릴 뿐이다. 참 한골 사는 용섭이 알제? 글마가 언젠가 무하 얘기 한 번 하드라. 저거 집에 하루 자고 갔다든가. 그기 벌씨로 맻년 됐다. 니 하여튼 당장 갈꺼 아이제? 저녁에 아-들 좀 불러모아서 이바구 들어보면 무슨 꼬투리가 나올끼다."

    덤덤하게 술술 풀려나오는 지호의 말투에 찬술은 괜히 코끝이 찡했다. 서늘한 냉기와 니코틴 진액같은 긴장만 늘상 자욱했던 그의 사무실에서는 맡을 수 없는 냄새가 그에게서 풍겨왔기 때문이다. 아니 자신의 사무실에 이 소읍과 인연의 끈이 연결된 그 누가 찾아왔을 때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쌀쌀맞음에 대한 가상의 상황에 대한 아린 회한 때문이었다. 먼 인연도 아닌 바로 지호가 혹은 무하가 가쁜 숨을 쉬며 똥마려운 표정으로 들어섰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1층 현관에서 출입증을 달고 어렵사리 8층까지 올라온대도 살가운 눈빛을 나눠주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이 소읍의 인사들이 청탁과 관련된 방문이라면 매몰차게 뿌리칠 결정은 다른 누구한테보다도 견고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모른다, 아니다, 잘못왔다 혹은 입구에 앉아있는 서기와 얘기하라 등의 배척의 말들은 넉넉하다. 잊혀진 소인국 아니 존재하지 않았던 영토가 이 소읍이어야 했다. 그 소읍에서, 잿불 속에서 고구마 익는 냄새같은 지호의 말을 더듬더듬 맡고 있는 것이다.

    "우리 집에 가자. 촌에도 인자 아파트라는기 생겨서 거기 산다. 마누라는 니도 알기다. 동수 동생 미교다 아이가. 가시나 배우 된다고 까불락거리더니 극장집 아들한테 시집왔다아이가. 지금은 택시 운전수 마누라가 되어뿌맀지만. 아-는 아들만 둘이다. 니는 어떻게 되노? 참 니 동수네 누부야 알제? 어릴 때 무하네 집에 니가 있을 때 닐 참 이뻐했는데, 생각나나?"

    아, 동수네 누나! 미주 누나! 찬술은 소리를 지를 뻔했다. 뭉뚱그려 묶어서 던져버린 이 소읍에 대한 기억의 보따리 속에 안타깝게도 미주 누나마저도 함께 섞여 있었다. 그래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이름, 미주 누나! 침을 발라가며 머리카락 하나 남기지 않고 철저하게 끌어담아 묶어버렸던 이 소읍에 대한 기억의 철상자에 미주 누나마저 갇혀버렸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하고 억울하다는 회한이 하혈처럼 터졌다. 혈혈단신이었던 찬술에게 모성애로 다가와 그녀의 젖무덤에 묻히도록 안아주던 미주 누나였다. 동수가 시기할 정도로 자애로움으로 찬술의 언몸을 녹여주려 애쓰던 미주 누나였다. 긴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또다른 세계의 존재에 대해 희망을 섞어 얘기해주곤 했다.

    "촌동네에선 인물 아이랬나. 우리 마누라는 같은 동수 어메 뱃속에서 태어났지만서도 그 누부야한테 대면 한참 빠지제. 그런데 그 누부야 죽었다아이가. 서울로 시집갔는데 교통사고로 죽었다. 저거 신랑이 운전을 했는데 애들하고 엄마만 죽었다. 운전했던 저거 남편은 다치기만 했다카드라. 미인박명이란가 뭐 그런거 있제."

    그것이 언제 였는지 고의로 낸 사고는 아니었는지, 사고라면 가해자측인가 피해자측인가, 피해자라면 보상은 충분했는가, 가해자는 보험에 가입했는가, 사고조사는 정확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졌는가, 고의성이 있다는 냄새를 맡고 출입기자들이 집적거리지는 않았는가 따위의 허망한 사유는 일절 찬술의 의식에 끼어들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소읍에서 유일한 동지였던 미주 누나였기 때문에.

    일들이 끝난 저녁 시간에 지호가 동무 여럿을 모을려는 것을 간곡히 만류했다. 그리고 그의 집으로 가자는 것도 정중히 거절하고 역전 부근에 있는 여관에 숙소를 잡았다. 무하를 만난 적이 있다는 용섭이에게만 연락해줄 것을 부탁했다. 특수작물을 재배하며 농사를 짓고 있다는 용섭이가 지프차를 타고 나타났다. 그의 정서도 지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고마왔다.

    "아메 그게 3년전 여름이었제. 나는 농장 한복판에 집을 짓고 산다. 한골 동네에서도 외딴집이다. 밤중에 느닷없이 무하가 찾아왔드라. 배낭을 메고. 배낭에는 소주를 가득 담아왔데. 둘이서 그걸 밤새 다마셨다. 이슥해서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일어나더니만 해장술을 찾드라. 참 술 쌔드라."

    용섭이는 술 마신 얘기만 무용담처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지호가 눈치를 챈 듯 찬술이 궁금해 하는 것을 대신 물어 주었다.

    "서울서, 선생은 선생인데 정식 선생은 아이라카드라. 강산가 뭐 그런건가보드라. 그런데 하여튼 글마 양조장집 아들 아이라칼카봐 말술이드라 말술. 우리 마누라가 기가 질려 입을 딱딱 벌렸제."

    용섭이는 무하의 술솜씨가 못내 부러운 듯 술얘기의 끈을 놓지 못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냉장고에 있던 댓병 소주를 큰컵으로 맻 잔 마시더니 간다고 하더니, 갔다. 붙잡고 자시고할 형편이 아니드라. 그라고도 속이 배겨나는지, 참! 그건 글코 찬술이 닌 잔 받아놓고 제사지내나 뭐하노? 잔 좀 비워라. 니 이름이 술이아이가 술. 거뭐 있잖아 학교 때 줏어들은 문짜,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낙혼가 뭔가. 맞긴 맞나?"

    "무슨 얘기 했노? 밤새 입다물고 술병만 빨았을기 아이잖아? 찬술이가 무하를 찾는다는 것은 좀 심각한 문제 아이겠나. 갸들 집에서 국민학교까지 졸업했으니까 회한이 안있겠나. 지금이사 여기 서장도 벌벌 싸는 처지다 이거 아이가."

    지호는 엄지 손가락을 불쑥 쳐들었다. 그들의 사심없는 선망을 듣고 앉아있기가 찬술에게는 고통스러웠다. 사표를 내고 모든 것을 다 잃고 자신의 삶의 원점인 이곳으로 간신히 기어든 한 마리 개똥쥐바퀴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과시할 그 무엇도 없었지만 더 이상 비하시킬 그 무엇도 가진 게 없었다.

    "특용작물 재배에 대해 조금 묻더라. 내가 하고 있는 당귀 따위의 약초재배에 대해서 조금 묻고 농장에 십여마리 키우고 있는 염소에 대해서도 묻더라. 그러나 지도 한 번 해보겠다는 진지한 자세는 아닌 것 같더라. 글마가 무신 농사꾼 묵기는 아이잖아."

    불현 듯 나타나 자기가 필요한 부분만을 잘라 가지겠다는 찬술의 의도가 그 자신이 생각해도 벗들에게 송구했다. 지호와 용섭이가 비록 심지가 깊은 벗들이긴 하지만 불쑥 그들의 삶의 현장에 나타난 찬술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지 않았다. 술잔이 여러 순배 돌고 취기가 오를수록 인내나 겸손의 옷을 벗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더구나 박찬술 검사와 대작하고 있다는 벗들의 자부심을 무너뜨릴 마땅한 장치가 없었다. 2차, 3차 술값을 몽땅 내겠다는 호기로 그들의 우정에 값하려 했다가 오히려 울화를 터뜨리는 꼴이 되어버렸다.

    "이 자슥이! 고향 친구들을 뭘로 보노? 수십년 만에 고향을 찾은 친군데 대접은 당연히 우리가 해야제. 니 까불면 변소 뒤로 데불고 가서 줘 패뿌린다, 하하하! 근데 찬술이 니 마누라는 어떤 사람이고? 보나마나 대단한 미인이제? 고시 패스했으믄 집안 좋고 인물 좋은 팔등신 미인들이 줄줄이 섰다카든데."

    그래, 그래, 그렇지. 찬술은 그들의 상상력에 한껏 맞장구를 쳤다. 그것이 또한 이 자리를 빛내주는 소품이 될 것이다. 야학에서 만난 여공 출신이라는 진실을 말한다면 이들의 실망이 얼마나 크겠는가. 너거 집도 꽤 으리으리하겠다는 말에도 대등한 수위로 대꾸했다. 15평짜리 아파트에서 네 식구가 오글오글 살았노라는 진실 역시 덮어두기로 했다. 그것이 지금 진실로서 어떤 가치를 지닐 것인가. 지금 순간만은 술맛 떨어지게 하는 대사를 의식 속에서 삭제하기로 작정했다. 그것이 묵은 그리움을 간직한 벗들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술병이 쌓여가자 찬술도 조금씩 흔들렸다. 막혔던 물꼬가 트이듯 말수도 많아졌다.

    "야! 우리 경찰서 정문 앞에 가서 오줌 한 번 싸자. 보초가 지랄하믄 찬술이 니 글마들 호통칠 수 있제?"

    "야, 임마! 보초들 상대하게 생겼나. 중앙에서 영감님이 오셨는데 서장이 요강들고 쫓아나와야제. 안그런나?"

    소박한 벗들이여! 변하지 않은 고향의 음성을 듣는 것 같아 찬술은 콧등이 시큰거렸다. 오줌이 아니라 볼기를 까고 똥이라도 싸라고 말해주었다. 두 녀석은 그 자리에서 엉덩이를 까는 시늉을 하며 웃어재꼈다. 지호에게는 평생 교통 위반을 해도 딱지를 끊지 못하는 증명서를 발부해 주겠노라고 말해 주었다. 지호는 찬술에게 그 자리에서 넙죽 큰절을 하며 흥을 부추겼다.

    "찬술이 니 미주 누나 보고 싶제. 죽은 사람이 살아돌아올 수는 없지만 보고 싶긴 보고 싶을끼다. 그 누부야도 참 박복하제. 좀 참았으면."

    "참았으면 우쨌다는기고?"

    "우째되긴 이자슥아. 나하고 동서 되는기지."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기 될말이가."

    "두 살 차인데 왜 안되노? 서울서 사업인가 뭔거 한다는 자슥한테 시집가드먼 5년만에 황천객이 됐뿌맀으니. 사업 좋아하네. 술집하는 자슥인데 사업한다고 사기 안쳤나. 인젠 처가하고는 완전히 결별했다. 새장가가서 잘산다드먼. 죽은 사람만 불쌍치. 아무래도 그기 미심쩍다 말이야. 지는 말짱하고 누부야는 즉사하고. 찬술이 니 올라가서 재조사 한 번 해봐라. 뭔가 미심쩍어."

    찬술은 내일 당장 그놈을 구속시키겠다고 호기를 부렸다. 보나마나 보험금을 노린 자작극이라고 단호하게 지껄여줬다. 끝날쯤 되는 여름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몇차례 자리를 옮겨가며 너스레와 호기와 추억을 섞어 게걸스럽게 마셔도 남은 것의 양이 엄청났다. 퍼내도 퍼내도 자꾸 넘쳐나는 장마철의 우물같았다. 바닥을 보일 생각도 하지않는 넋두리와 하소연과 아련한 추억들이 포장을 찢으며 미어져 나오는 밀가루 반죽 같았다. 천방지축으로 사방을 휘저으며 입안에 쑤셔넣어도 지천에 깔린 눈덩이 같았다. 인위적으로 유리시킨 시간의 골에는 분류되지 않고 정돈되지 않은 보석들과 낙엽들과 검불들이 참으로 뻑뻑하게 뒤엉켜 있었다. 그것들을 껴안고 그것들에 묻혀서 끝물 무렵의 여름밤은 급행열차처럼 씩씩거리며 잘도 달렸다.

    숙소로 돌아온 찬술은 먼 우주여행에서 돌아온 것처럼 전신이 녹초가 되었다. 시간을 알 수 없도록 여인과의 격렬하고도 회한없는 정사를 끝낸 것처럼 늘어졌다. 그리고 참으로 오랜만에, 아내가 사고를 당한 이후 처음으로, 아니 태어나서 기억을 지닌 시간의 토막으로는 처음 편하고 곤한 잠을 잤다. 그것은 만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만취 상태라면 지난 세월 온갖 구실로 빈번한 행사였으니까. 그날 찬술이 거둬들인 무하에 대한 소득이라면 용섭이를 통해서 얻은 기연미연한 정보였다. 발길을 끊다시피한 무하가 자기 집에 1년에 한 번은 밀정처럼 나타나는 것 같다는 것이다. 바로 자기 아버지의 제삿날밤에는 슬그머니 나타나 외아들의 허약한 도리를 하고는 빨치산 잔비처럼 어둠이 자욱한 밤길로 총총히 사라지는 것을 이웃들의 수근거림으로 전해들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추석을 앞둔 보름전쯤이 무하 아버지의 기일이니 잡복근무를 해서라도 체포하겠다고 용섭이가 호언을 했다. 잡복근무니 체포니 하는 익숙하지 않은 용어에 더욱 힘을 주어 말하는 용섭이의 우정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알알했다.

    무하를 만나야겠다는 생각 이외에는 찬술을 고단하게 하는 것이 없는 포근한 시간이었다. 한달 남짓 남은 무하의 출현에 기대를 걸며 무하네 집을 축으로 해서 동심원도 그리고 타원도 그리고 삼각뿔, 원뿔 등을 그리며 아예 이 소읍에 눌러 앉기로 했다. 척추와 근육은 물론 손등의 솜털까지 곧추세우며 살아왔던 세월에 대한 억울함과 박탈감과의 화해의 예감이 곰실곰실 피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존재하는 것은 정의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기관지의 바닥에 달라붙은 굳은 가래가 긁혀나오듯 숨소리를 맑게 했다.



    찬술이 가출 아니, 탈출에 대한 의사를 처음 그리고 암묵적으로 표명한 상대는 무하였다. 햇살을 처음 보는 것같은 찡그림의 순간이 빈번해진 것이 그것이었다. 같은 또래라는 이유말고도 무하에게는 신뢰가 있었다. 단순한 불평이나 신세타령이었다면 무하를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부터는 상당히 어른스럽다는 의식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어른들의 가치체계보다 훨씬 넉넉하고 대범하며 진취적인 기상을 흠모하는 배짱이 있다고 서로 부추겼다. 무하는 주인집 아들로서의 야만스러움을 보이지 않았고 찬술은 노예근성을 무하에게만은 비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물론 그 노력이 쉽지는 않았다. 관계의 평형감각을 위해 무하가 노력하는 것만큼은 애써야 한다는 압박감을 극복하려고 숨이 찼다.

    지난 해 겨울방학 때 일만해도 그렇다. 중학교에 합격한 무하와 아예 입학시험을 치르지도 않은 찬술은 졸업식만을 남겨놓고 조금은 무료한 시간 속에 놓여 있었다. 중학교라는 낯선 세계에 진입한다는 무하의 설레이는 희망과 양조장 새끼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찬술의 절망이 얼음장 속의 개울물처럼 갈림길을 향해 바쁘게 흘러가는 시점이었다. 다가오는 불길한 운명에 대한 사육제처럼 무하는 찬술에게 여행을 제의했다. 여행이란 용어가 보편화되기 이전 시절이라 잠시의 가출을 `오입간다'라고 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거쳐야하는 유행병처럼 빈번했다. 마을에서 슬그머니 사라지면 그놈 오입갔구나하며 어른들은 혀를 끌끌찼다. 청년들에게는 오입간 전과가 낙인처럼 으레 몇 개씩 붙어있었다. 고인 웅덩이와 같은 작은 마을에서 바깥 세상에 대한 동경은 대책없는 열병이긴 했으나 좀체 식을 줄 몰랐다. 드물게 영영 돌아오지 않는 이도 있었지만 거개는 열흘쯤 종적을 감추었다가 거지 꼬락서니가 되어서 동구 밖에서 쭈빗쭈빗 거리다가 대문없는 집 헛간에서 하룻밤 자고는 어른들에게 들켜서 작신하게 두들겨맞는 코스가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다시 고삐 묶인 소처럼 고인 웅덩이에서만 반경을 그리며 살아야 했다.

    집을 나간다는 것은 어른들의 시각에서는 배은망덕이요 역모였다. 실패와 능멸만 온몸에 걸치고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어른들은 알고 있었다. 그것 역시 그들의 청년 시절 경험의 일부에서 나온 결론이었으리라. 그러나 후체험은 선체험의 이해와 용서, 격려를 수반하지 못했다. 실패에 대한 확고한 결론만을 지니고 살아가는 어른들은 오로지 역모의 싹을 없애는 것이 책무인 것처럼 돌아온 탕아에게 가혹했다. 거지꼴로 돌아온 자식에게 그들의 어머니만 눈물을 찍어내며 몰래 식은밥 덩이를 건네주는 아량이 있을 뿐 늙은 할아버지마저 지팡이를 휘두르며 `저놈 죽여라'라고 칼날을 세웠다. 돌아온 탕아는 마을의 미풍양속을 파괴한 파렴치범 취급을 당해야 했다. 특히 젖퉁이가 뭉실뭉실해진 열대엿 살 처녀의 가출은 조상과 가문에 대한 불명예라는 이유가 겹쳐져서 반병신이 되도록 얻어맞을 용기가 필요했다. 뼈대있는 가문이라고 내세울만한 변변한 집도 없으면서 오입간 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가혹했다. 오입간다라고 명명되어진 가출은 어른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 정돈된 질서에 대한 파괴로 간주되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목마름과 모색, 앉은 자리가 너무나도 시리고 축축하다는 것을 이해해주는 어른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오입가는 행렬의 맥은 꾸준히 이어졌다. 복날 개잡듯이 처참히 두들겨 맞는 장면을 선연히 목격하면서도 자폭의 순서를 정해놓은 가미가제처럼 은밀히 전염되어 갔다. 너무나 빤히 보이는 내일에 대한 절망, 가끔씩 안개 너머에서 들려오는 신기루같은 성공담이 마약같은 유혹이자 안달이었다. 마을은 계란 껍질 속같이 답답한 폐쇄회로였을 뿐이다. 그 절망의 무게가 무하보다 찬술에게 더 기울어져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무하가 찬술에게 제안했다. 찬술의 눈빛을 읽은 무하의 배려였다. 오입가는 밤열차에 몸을 싣기에는 왜소한 덩치들이었지만 그 전염병에는 연령제한이 없었다.

    "우리도 오입 한 번 가자."

    찬술의 가려운 부위는 손이 닫지않는 등의 어깨죽지 사이였는데 무하가 먼저 나서서 가려운 곳을 긁어 주었다. 찬술의 의식 속에는 이미 탈출의 음모가 가뿐 숨을 쉬며 자라고 있었다. 초상집 개처럼 처량한 몰골의 오입 전과자들이 불쌍하기보단 표적지를 잘못 맞추고 잠시 돌아온 용사일 뿐이었다. 논리도 없이 무지막지한 폭력을 앞세운 어른들의 훈계는 두려움이긴 했으나 포기하게하는 경계가 되질 못했다. 오히려 지사적 충동심이 잿더미 속에서 타고있는 속불처럼 은밀히 커가고 있었다. 그래서 찬술은 무하의 무모한 제안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

    "어디로 갈라꼬?"

    두려움이 앞서긴 했으나 반론이 아니라 이미 합의가 된 듯이 방향을 물었다.

    "오입간다카믄 서울로 가야된다아이가."

    "서울에는 깡패가 많다카든데."

    찬술의 허약한 이의제기였다.

    "부산이나 대구는 볼끼 뭐 있겠노. 깡패는 서울에만 있는 줄 아나? 부산 깡패가 얼매나 무서븐데."

    무하의 단호함에 찬술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울행 오입은 결행의 날만 남게 되었다. 환상과 두려움, 도전과 탈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레임으로 그들은 며칠 밤을 떨며 보냈다. 그 떨림의 강도는 무하보다 찬술이 더 격렬했던 것은 물론이다. 결코 돌아오지 말자. 지옥과 같은 이 고인 웅덩이에서 탈출하자. 사십도 되기 전에 이빨이 듬성듬성 빠진 채 술통을 자전거에 매달고 비틀거리는 늙은이로는 살지 말자. 관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물꼬를 터준 무하가 한없이 고마왔다.

    돈 2천원과 쌀 한자루를 준비해서 결행 전날 기차역 근처 풀밭에 숨겼다. 물론 무하가 그의 집에서 훔친 것이다. 장롱 셋째 서랍 바닥에 어머니가 곗돈을 넣어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던 무하는 그중 일부를 빼냈던 것이다. 고두밥을 찌기위해 쌀은 양조장 창고에 넉넉히 있었다. 밤중에 무하가 몰래 퍼서 개구멍으로 밀어주는 것을 찬술이 받아 그것을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기차역 부근까지 메고 갔다. 그리고 이튿날 찬술이 그것을 쌀집에 팔았다. 아이가 메고온 쌀자루를 미심쩍어 하면서도 형편없이 값을 쳐주는 재미로 쌀집 주인은 그런 일에 익숙한 듯 선뜻 육백원을 주었다. 2천6백원의 공작금을 천삼백원씩 나누어 가슴에 품고 그들은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공작금의 일부도 보태지않은 찬술이었지만 무하의 배려는 자상했다.

    여덟 시간이 걸린다는 서울행 열차는 용맹스런 검은 대가리에 미카 351이라는 표시를 달고 어기차게 들어왔다. 작년 수학여행 때 타보고 두 번째로 기차의 몸통 속으로 들어가는 설레임은 차라리 두려움이었다. 빽빽히 들어찬 인파들 틈에 낀 두 꼬마의 설레임과 두려움은 오로지 그들만의 몫이었다. 통로를 비집고 다니는 장사로부터 무하는 넉넉하게 먹을 것을 샀다. 출입문과 바싹붙은 의자의 등받이와 벽사이의 공간에 실려가는 강아지 두 마리처럼 그들은 서로를 밀착하며 입이 쉴 틈이 없도록 먹었다. 백원의 가치가 그렇게 큰 것인 줄, 작은 배가 헐떡거리며 먹을 수 있도록 많은 것을 살 수 있다는 위력에 서로 눈을 반들거리며 놀라와했다.

    낯선 거리에 던져진 무하와 찬술은 돌개바람처럼, 강물 위에 던진 종이배처럼 정신없이 때로는 유유히, 발길 닿는대로 걸었다. 무하의 피로가 조금씩 짜증으로 쌓인 일, 종업원 구함이란 쪽지가 붙은 중국집 앞에서 찬술이 한참 멈췄던 일, 구두닦이 아이들에게 붙들려 함께 두들겨 맞은 일, 오뎅을 사먹으면서 이제 돈이 모두 떨어졌다고 서로 확인한 일, 그러면서도 찬술은 바지주머니 끝에 꼬깃꼬깃 접어서 남겨둔 2백원을 끝내 고백하지 않은 일 등이 그들이 거둔 오입의 결과물들이었다.

    닷새째 되던 날, 가게 앞에 수북히 쌓아둔 식은 만두를 두 개씩 훔쳐 입에 쳐넣으며 땀을 빨빨 흘리며 부랴부랴 그리고 엉겹결에 찾아간 곳은 무하 고모네 집이었다. 신촌역 바로 앞에 있는 빨간 대문집이란 막연한 정보를 무하는 알고 있었다. 그 허약한 정보는 산과 들을 마음껏 싸돌아다닌 덕분에 그들에게 가뿐한 것이었다. 잠시 쏟아지는 소낙비를 피하기위해 들어선 그 대문 안에는 그들이 예상치 못했던 사나운 짐승의 아가리같은 환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이곳에도 포위망의 사슬이 쳐져 있었다. 무하 고모가 잔뜩 차려주는 음식을 먹고 씩씩거리며 그것을 삭이고 있을 무렵 시골서 달려온 무하 부모에게 그들은 개처럼 질질 끌려 내려갔다. 그리고 무하나 찬술 모두에게 가슴 아픈 역모에 대한 진상규명의 재판이 벌어졌다.

    무하는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것은 단호하고 적극적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작대기를 들고 무자비하게 달려와도 그는 당당했다.

    `지가 그랬습니더. 지가 가자 캐서 갔심더. 찬술이는 죽어도 안갈라카는데 지가 자꾸자꾸 가자캐서 갔심더."

    무하는 마구 휘둘러지는 작대기를 엉금엉금 피하며 찬술이가 맞는 것을 몸으로 막았다. 모여든 동네 사람들은 모두 찬술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아-가 아이라 여수다 여수! 아니 능구렁이다 능구렁이! 순한 무하가 먼저 꼬득였을 리는 없제. 암, 택도 없는 일이제."

    "찬술이는 돈도 없어 못간다카는거 지가 쌀을 퍼서 가면 된다고 했심더."

    그러나 인간에 대한 절망은 참으로 순조로왔다. 그것은 무하네 양조장이 마을의 여러 사람들을 먹여살리는 역할과 무관하지 않은 듯했다. 특히 외팔이 영감과 쌀집 주인의 증언은 소스라치는 절망으로 찬술에게 다가오기에 충분했다. 찬술이 양조장의 쌀창고 부근을 기웃거리는 것을 보았다는 것과 쌀을 팔러온 놈이 바로 저놈이었다는 것이다. 한마디씩 거드는 그들의 증언은 아무래도 정확성에 근거를 둔 것 같지는 않았다. 눈섭이 유난히 짙검은 양조장 주인인 무하 아버지의 심기에 초점을 맞춘 응원가인 듯 했다. 궁핍한 마을에서 양조장의 주인은 거대한 성의 영주나 다름없었으니까. 할아버지 때부터 세습되고 있는 그 영주의 인색함이나 몰인정에 대해 대놓고 저항하는 세력은 읍내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여든 사람들이 불러대는 응원가와 완벽한 증거 앞에 무하의 항변은 철지난 옷처럼 초라했다.

    "못된 놈!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 알(아이를) 꼬드겨 오입을 가. 길가에 버려진 게 불쌍해서 친자식처럼 거둬줬더니만, 호랑이 새끼를 길렀어."

    무하 어머니는 전신을 부르르 떨며 이아린 소리를 내뱉았다.

    "못된 종자는 일찌감치 잘라 뿌리야 된다."

    무하 할아버지의 음성인지 이웃 노인의 것인지 늙은이의 카랑카랑한 쇳소리도 들렸다. 그날 찬술은 돌아누울 때마다 뿌지직 소리가 나도록 작신하게 맞았다. 무하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그날부터 할아버지 옆방에서 무하와 찬술이가 둘이 자는 잠자리는 폐쇄되었다. 무하는 할아버지 방으로, 찬술이는 소마굿간 옆에 딸린 헛간으로 쓰는 행랑방이 숙소가 되었다.

    강제로 격리된 그들은 저마다 또다른 음모를 꿈꾸며 달콤했던 밤열차의 추억을 자양삼아 낯선 시간의 터널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결단의 방식에는 늘 무하가 단호했다. 무하와 찬술이 심호흡을 하며 결의를 했던 정미소 뒤꼍에서의 마지막 악수를 한 날, 그날밤엔 달이 유난히 밝았다. 추석을 한달 앞둔 보름날 밤이었다. 그날도 무하가 주로 말을 했으며 찬술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끔 가로저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다시 서울에 가고 싶지?"

    똑같은 시행착오는 겪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가 짙게 배여 있었다.

    "니먼저 가 있그라. 나도 꼭 뒤따라 가꾸마."

    빈말이 아님을 강조하려고 무하는 꼭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우리 고모네 집 근처는 얼씬도 하지마라. 지난 번에 우리가 왜 거길 찾아갔는지. 참내!"

    푸줏간 고기덩이처럼 멱살을 잡혀 대롱대롱 매달려 끌려 돌아왔던 기억이 못내 분하고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노자는 내가 넉넉하게 마련해볼게. 우리 둘이 고생 덜하고 지낼만큼."

    이번에는 찬술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가로젓지도 않았다. 심상치 않은 그날 밤엔 덩그런 보름달마저 숨을 죽이고 눈빛만 이글거렸다. 정미소에서 풍겨오는 쌀겨냄새마저 구수했다. 그리고 사흘 후 찬술은 그때와 똑같은 시간에 밤열차에 올랐다. 무하가 마련해준 무명 신발주머니에는 제법 묵직한 것들이 들어 있었다.

    "이건 바지 속에 넣고가서 꼭 서울가서 풀어봐라. 가는 중에 풀어보면 니 문디 된데이. 차비는 여기 따로 있다. 나도 며칠 있다가 가꾸마."

    그러나 그 언약이 얼마나 부실한 것인지 찬술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밤열차를 타기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시골 역사는 제법 북적거렸다. 그 속에서 같잖은 어린 것들이 익숙하지않은 석별을 벌이고 있었다.

    "인자 곧 추버진데이. 그래서 두꺼운 옷도 하나 가져왔다. 가져가라. 시장터 사는 병식이 삼촌이나 새동네 한수네 형은 서울 가서 성공해서 산다고 안카드나. 내사 중학교도 가기 싫다. 공부해봤자 양조장에서 배달나가는 술통이나 시알리고(세고) 있을낀데뭐."

    그렇게해서 그들은 헤어졌다. 어색한 악수를 나누며 무하가 씩 웃었다. 찬술도 따라 웃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무하에 대한 예의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아니 예의니 배려니 따위의 어려운 말들은 그들은 알지 못했다. 개찰구를 나서며 돌아보는 찬술에게 무하는 혀를 쑥 내밀며 메롱하는 동작으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그꼴을 본 찬술은 소리를 내서 킥킥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그것이 오랜 이별 혹은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할 무거운 격리의 시작이라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가끔 물놀이를 가는 유천교 근처의 큰거랑에서 찬술이가 먼저 옷을 벗어던지고 풍덩 물에 뛰어들어 건너편을 향해 헤엄쳐가는 사소한 일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무하가 들려준 묵직한 무명 신발주머니에는 꼬깃꼬깃 접은 2천원과 몇 개의 금반지, 금목걸이, 금팔찌 등이 들어 있었다.

    인간은 자신이 혐오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모순을 지닌 동물인지 모른다. 작고 약한 것에 강해지고 힘없는 존재들의 파닥거림에 대해 발끈 분개하고 그것들을 기어이 패대기쳐서 바르르 떠는 꼴을 보고 쾌감을 느끼는 악마성이 있다. 작은 것들에게 가혹해지는 습관은 이내 면역성이 강해진다. 점점 고단위 처방을 요구하는 그 질서가 너무 아름다웠다. 806호실, 박찬술 검사가 그랬다. 빗자루로 쓸 듯이 혹은 단칼에 베듯이 그것은 신명과 갈증을 해소하는 쾌감을 동시에 제공했다. 그 10년 8개월의 세월동안 그는 자신을 강철처럼 단단하게 만드는 풀무질에 잠시도 소홀하지 않았다. 열두 살까지 어둠과 그늘로 존재했던 그 소읍에서의 기억과 들추고 싶지않은 도회에서의 십여 년 세월을 함께 꽁꽁 묶어 영원히 떠오르질 않을 무게의 바위덩어리와 함께 심해 부근에 던져버렸다. 어느날 갑자기 검사 박찬술로 당차게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다짐을 거듭했다. 그 다짐의 확인을 위해 그는 매섭고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그에게 주어진 일들에게 냉혹했다. 세상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은 것이 없다라는 신념 때문에 나누어 주어야할 여백에 대해서는 고민할 필요성이 없었다. 뿌리조차 알 수 없는 자신의 출발로부터 늘 습기찬 그늘과 뱃가죽을 괴롭히는 허기만을 제공했던 세상이라는 것은 마음껏 쳐부수어도 좋을 베를린 장벽과 같은 것이었다. 그 벽에 촘촘이 박힌 인간들이란 벌레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벌레를 잡고 죽이는 일은 참으로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그일에 이력이 붙을 즈음 그는 그것을 즐기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흠칫 놀라기도 했으나 그건 질주하는 열차가 궤도의 이음새를 지나면서 잠깐 덜컥거리는 충격에 불과했다. 이음새를 지날 때마다 덜컥거렸지만 충격을 흡수하는 요령도 늘어가고 서서히 그것을 충격으로 느끼지 않고 적당한 리듬으로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탐조등이 비추는 지점을 정확히 간파했고 빛이 발사되는 출구의 이동경로까지 정확히 예측하는 촉수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왠만하면 가작이었다. 공안검사실 806호는 손수건을 접어 비둘기를 만들어 내기도하고 종이를 입에 물고 벌건 불을 토해내기도 하는 재주의 산실이었다. 새로운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박수와 환호가 터지고 그에겐 화관이 씌여졌다. 시기적으로 적절한 작품은 그 상품가치가 더욱 화려하게 빛났다. 거대한 응원단은 항상 대기상태였다. 때로는 게으르게 졸고 있다가도 신제품이 출하되면 갑자기 부산하게 일어나 환호를 보냈다. 군중의 환호를 받는 쾌감은 받아본 사람만이 안다. 그것은 은밀한 공간에서 몰래 투약하는 마약에 비할 바가 아니다. 모든 땀과 상처와 숙취가 한꺼번에 씻겨내려가 버리고 정사의 절정보다 더 위대한 열락 위에 놓이는 몽환의 순간이다. 그 방에 들어오는 것들은 신념이라는 것을 낡은 장대 위에 깃발처럼 펄럭이며 용맹스러워 하지만 자기 기만이란 정직함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더욱 가증스러웠다. 특히 상대성을 인정하지않는 신념을 사이비 종교의 맹신도처럼 걸치고 발악을 할 때는 창녀가 정조를 지키려고 앙탈하는 것처럼 치졸했다. `머리 좋은 것은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은 발 좋은 것만 못하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하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이 관계의 최고형태이다'라고 오히려 그에게 설교를 하려고 달려드는 것들이 가장 가증스러웠다. 포승줄에 묶여있는 놈이 그를 단죄하려는 칼 앞에서 입장의 동일함 운운하는 폭언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배반이었다. 장래성과 정상참작이라는 자투리 여백마저 스스로 짓뭉개버리는 교활한 것들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영웅의 반열에 올려 놓으려는 극히 교활한 것들이었다. 거기에 현혹될만큼 806호실이 어리숙하지도, 그방 주인인 박검사가 지닌 경험의 타래가 빈약하지 않았다. 그들이 떠드는 구호가 얼마나 공허하고 현실감이 없는지, 그것이 얼마나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혹세무민하는 지를 그는 너무나 훤히 알고 있었다. 어둠의 질곡 속에서 질척거려 보지도 않고 그 어둠을 무서운 것이라고 소문만 퍼뜨리는 무책임한 것들, 그것들에게는 가혹한 형벌의 담글질이 그들을 아끼는 마음이라고 여겼다. 심해 속에 가라앉아 있을 자신의 기억의 보따리를 건져올려 그들에게 풀어헤친다면 감히 사치스런 설교를 해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박검사는 굳이 그럴 필요성까지 느끼지 못했다. 하찮은 오만과 객기를 가르치려고 스스로 치열한 노력을 해야할 필요성이 없었다. 적당한 폭력이면 그들을 능멸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폭력이란 얼마나 정직한 지 현란한 논리로 수를 놓으려는 그들을 순식간에 뭉개버릴 수 있었다. 겸손함으로 따지자면 언어보다 행동이 훨씬 진솔한 것이다. 언어라는 것이 온갖 어지러운 장치들로 미혹케 하는 검불이라면 행동은, 더 정확하게 말해서 폭력은 직선처럼 담백하고 어항 속처럼 투명하여 내부를 직시할 수 있다. 장식으로 들여놓은 몇 가지 소품들은 내부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그리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폭력 앞에 비굴해지는 그들의 모습은 조그만 동정심도 자아내지 못했다. 세치 혀로만 견고성을 떠들던 그들이 파리처럼 싹싹 손을 비비는 그들의 표리부동은 박검사로 하여금 더욱 가학적 충동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버린다는 것이 저토록 옹졸할 바에는 차라리 지니지 말았어야 했다고 충고해주고 싶었다. 부정과 성찰의 과정이 없이 함부로 남을 가르치려드는 것은 기만술책에 불과하다고 오히려 그들에게 설교하고 싶었다. 그 방에서 황제는 그였다. 칼과 경전을 함께 든 황제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황제의 권위는 존중되고 화사하게 추앙되었다. 인디안으로 살고 싶다는 그들을 향해 도회의 강렬한 빛을 쪼이고 자발적인 격리가 교만이라는 것을 익히도록 배려했다. 이 방의 주인이 되기까지 그가 거쳐왔던 역정을 약술해주고 싶은 충동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것을 들을만한 적당한 물건을 만나질 못했다. 눈물젖은 빵 운운하는 교만에는 침을 뱉고 싶었다. 특히 불우한 이웃, 그늘진 곳, 민중을 운운하는 작태에는 그들의 능글맞음을 향해 손에 집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으로 사정없이 후려치고 싶었다. 침묵을 배우지 못하고 말을 먼저 배운 그들이 세상을 위해 기여한 것이 무엇인가. 격랑을 홀로 헤치고 올라온 체험도 없으면서 이웃을 위한다는 자기기만으로 허세를 늘리는 재주만 능한 그들이 아닌가. 그들의 노력으로 상처가 낫고 아픔이 덜어진 이웃이 어디 있는가. 존재하지 않는 관념을 위해 무모한 병졸들을 제물삼아 그들은 또다른 권력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세상 전체가 그들에게 기만당한다해도 박찬술 검사는 결코 속지않겠다는 결의를 위해 날마다 날을 벼리었다. 정조와 순결을 운운하면서 집단 혼숙과 혼음의 향연을 벌이는 그들의 이중성과 기만성을 안다. 국가와 민족이란 추상명사가 소도의 성물이나 되는 것처럼 남용하는 술책도 알고 있다. 창녀를 혐오하는 듯하면서도 창녀를 찾아 그들의 감상주의를 자극하여 공씹을 즐기는 그들의 현란한 술수를 알고 있다. 창녀를 향해 형제라고 나팔을 불면서도 거룩한 연회에 참가할 파트너는 항상 별도로 준비되어 있다. 일을 하지 않아도 날선 굶주림의 창 끝에 서지 않는다. 싸움의 법칙을 그들은 알고 있다. 잘게 나누어 싸워야 이긴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표적물을 분할하지 않는다. 이기기보다는 싸움이 지속되어야 자신들의 존재가치가 늘 찰랑거리는 수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겨야한다는 신념은 밀쳐두고 싸움의 구호는 항상 민중과 자유이다. 그것만큼 반감기가 오랜 원소가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진다는 것이 이긴다는 것도 알고 있고, 지는 척하는 것이 더많은 눈물의 응원군을 부를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박검사는 그들에게 가혹했다. 가혹하게 대접해주는 것 이외에 그들에게 바칠 마땅한 헌사가 없었다. 그 헌사 중 가장 효력이 적극적인 것이 물리적 폭력이었다. 그것이 그들에게나 박검사 자신에게나 가장 정직한 명함이었다. 그 정직성을 지키는데는 적잖은 도덕적 수수료가 필요했다. 일체의 유혹과 변칙으로부터 자신을 지키자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의연해야 한다는 것이다. 산후 조리가 빈약하여 늘 어지럼증에 시달리는 아내에게는 정신력의 위대함만을 강조했지 너그러운 보약 한첩 사주지 않았다. 도전이 있으면 저항력이 길러지는 것은 인체의 기본적인 생존원리라고 아내에게 역설했다. 적금과 세금을 제외한 본봉은 사교계에 드나들 여유를 허용하지 않았다. 주변 동료나 업무상 관계를 맺은 이들과의 교류마저 굳게 잠궈버렸다. 사교의 자리에서 너스레를 떨 여유와 능력을 익힌 바 없는 박검사 부부였다. 집과 사무실과의 직선거리가 우주였다. 토큰과 도시락이 소지품의 전부였다. 많이 가진 자가 적게 가진 자의 도움을 받고 쌀 살 돈을 겨우 마련한 친구가 항상 술값을 먼저 낸다는 이승의 윤리를 그는 체득했다. 외나무다리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비적거리며 외다리로 걸음을 옮겨 놓는 것같은 10년 8개월의 시간이었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적도 없는 염치를 끝내 벗어던지지 않았노라고 자부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세상에 대하여 받은 것이 없기에 베풀어야 할 의무도 없다는 엄격함에서 조금도 비켜서지 않았다.



    무하의 출현을 기다리며 그의 집을 중심점으로 해서 파문같은 동심원을 그리며 종이 비행기처럼 노니는 생활이 찬술에게는 한없이 즐거웠다.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는 줄 알았는데 딱지를 뜯어내면 하얀 속살이 고스란이 남아있는 곳곳의 풍경이 코끝을 찡하게 했다. 거칠게 그리고 완벽하게 도배질했다고 믿었던 유년의 뜰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선명했다. 인위적으로 소멸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아니 억지로 묻으려했던 것들은 주검에 붙은 금니처럼 시간을 이겨내고 정체를 잊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를 찾아가 보았다. 여러 동의 신축건물이 건강미를 뽐내는 틈새에 기름먹인 판자를 벽에 붙인 그때 그 건물이 남아 있었다. 손바닥만한 유리창도 그대로였다. 단지 북새통을 이루며 아이들이 오글거렸던 교실이 지금은 창고로 변해 있었다. 쓸모가 별로 없는 교보재들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제멋대로 편한 자세로 널려 있었다. 운동장을 가로지른 건너편에는 철봉대와 그 옆에는 모래판도 그대로 있었다. 교실에서는 아이들의 소리가 갯돌이 파도에 쓸리는 것처럼 가끔 까르르까르르 잘그락잘그락거렸다. 찬술은 느린 걸음으로 철봉대까지 걸어갔다. 그곳에서 벌였던 난장이 금바우와의 아린 결투의 순간이 바로 엊그제 일인 양 선명하게 솟구쳐 올랐다. 금바우는 지금 어디서 뭘할까. 서커스단에서 재주를 부리고 있을까, 나비 넥타이를 메고 영등포 어느 술집 현관에서 해적선 뿔고동같은 목소리로 어서옵쇼라고 외치고 있을까. 이미 소식이 끊어진 지 몇 십년이 넘었는데 죽었을 거라는 소문도 있다고 했다. 서커스단에서 도망쳐 집으로 오다가 어떻게 되었다는 소문도 있다고 했다. 모래바닥에 묻혀있던 흑백사진을 줏어 곰삭은 먼지를 툭툭 털어버리니 몇 군데 금이 죽죽 그어지기는 했으나 거울처럼 맑은 장면들이 선연히 드러났다.

    여남은 명의 아이들이 여름날 저물녘까지 철봉대 옆 모래판에 몰려 있었다. 걱실걱실한 오륙학년들이 중심이 되어 씨름판이 한창이었다. 찬술이같은 1학년짜리들도 두엇 있었지만 구경꾼에 불과했다. 천하장사라도 뽑으려는 듯 힘깨나 쓰는 아이들이 씩씩거리며 씨름판은 걸죽하게 어우러졌다. 개중엔 이미 학교를 졸업하고 뉘집 새끼머슴으로 일하고 있는 녀석도 있었다. 주은 담배꽁초에 불을 붙여 연기를 뻑뻑 뿜어대기도 하는 축이었다. 건장한 아이들의 통제로 대충 실력이 판가름나고 서열이 정리되었다. 경기의 절정이 끝나고 재미가 시들해질 무렵 누군가가 금바우와 찬술이를 붙여보라고 제안했다. 몰려섰던 아이들이 깔깔 웃었다. 꽤 재미있는 구경거리일 것이라는 웃음이었다. 찬술은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그 제안을 거부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이들은 신명이 난 듯 소리를 지르고 손뼉을 쳐대고 있었다.

    "어이, 양조장집 꼬맹이! 할꺼야 말꺼야?"

    상당히 위협적이었으나 찬술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금바우 니는?"

    찬술이 선뜻 대답을 않자 금바우도 머뭇거렸다. 찬술은 이미 몇 가지 결론이 머리 속에 어른거렸다. 그 결론 중 으뜸에는 그가 이겨도 웃음거리를 면치 못한다는 것이었다. 키가 겨우 찬술의 턱밑까지밖에 차지않는 난장이에게 이긴다고 한들 무슨 영광이 될까. 그 경기를 제안한 큰놈들이 미웠다. 그러나 그들을 째려보고 항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그놈들의 장난감이 되어 있었다. 찬술은 금바우에게 진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전신이 잘록잘록하고 똥똥한 반토막 난장이에게 진다는 것은 상상이 되질 않았다. 다만 이겨도 웃음거리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 뻔해 그것이 분했다.

    "쟈가 난재이 금바우하고 씨름해서 이겼나? 하하하!"

    "장하다 장해! 허허허!"

    "양조장집 줏어온 아-가 금바우하고 씨름해서 이겼다고? 어이쿠, 기특해라."

    "볼만했겠네."

    달려가 주먹으로 치고 싶은 이죽거림이 마구 들려오는 듯 했다. 그것은 분노와 울화에 가시를 돋게하여 안으로만 웅크리게하는 파충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진물같은 것이었다.

    "우짤끼가? 할래 말래?"

    "빈정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큰놈들이 다그쳤다.

    "안하믄 겁쟁이다."

    "겁쟁이는 가시나들하고나 놀아라."

    최후의 자존심을 긁는 말까지 거침없이 나왔다. 판을 무마시키는 양심은 어디에도 없었다. 무하가 그 자리에 있었대도 힘이 되질 못했을 것이다. 그도 같은 또래 1학년짜리 꼬맹이였으니까.

    "할끼가 말끼가?"

    머뭇거림이 길어지자 위협조로 윽박질렀다.

    "해라 해. 난재이하고 못할끼 뭐있노?"

    꼬맹이축에 끼는 것들까지 분위기를 부추겼다. 금바우는 찬술의 눈치만 살폈다. 금바우는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음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가 보인 온유한 눈빛이 오히려 찬술을 주눅들게 했다. 씩씩거리며 덤벼들기라도 했으면 찬술 또한 온갖 것들에게 겨누었던 적개심을 뭉쳐서 금바우에게 달겨들어 내동댕이쳤을 것이다.

    "자, 하자."

    아기 손같이 작으나 통통하고 군살이 백힌 손으로 금바우가 먼저 찬술의 손을 잡았다.

    "그래 그래, 어서 시작해."

    "심판은 내가본다."

    "삼시판이다."

    새로운 구경거리를 즐기려는 아우성들이 숭어 새끼를 둘러싼 말미잘과 불가사리떼처럼 무성했다. 찬술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판단했다. 금바우의 허리춤을 잡으려면 몸을 무척 낮추어야 했다. 금바우는 아기가 매달리듯이 찬술의 허리춤에 머리통을 들이밀었다. 딱딱한 지렛대의 지렛목이 허리에 걸린 느낌이었다.

    "자아-시이자아악!"

    심판의 구령이 떨어졌다. 다소 과장하면 고목나무에 매미가 붙어 달랑거리는 꼴이 펼쳐졌다.

    "이겨라! 이겨라!"

    누구에게 보내는 환호인지도 모를 함성이 엉겨붙어 있는 그들을 향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야야, 바싹 들어서 집어던져뿌리라."

    "다리 걸어, 다리."

    "뒤집어 넘겨, 뒤집어."

    둘러선 무리들의 응원과 지도가 담쟁이 넝쿨처럼 무성하게 엉켜붙었다. 금바우는 단단했다. 찬술은 악을 썼지만 쉽게 던질 수도, 넘어뜨릴 수도 없었다. 굵고 짧은 등걸토막처럼 금바우는 탄탄했다. 서로 용을 쓰며 모래판을 돌았다. 찬술의 허리춤에 틀어박힌 금바우의 머리통이 무쇠덩이 같았다. 쉽게 거꾸러지지 않자 찬술은 당황했다. 용을 쓴 탓도 있지만 예기치 못한 당혹감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금바우는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도무지 찬술이 힘을 집중할 가닥이 없었다. 오히려 금바우의 어깨에 찬술이 들썩들썩 들려지기도 했다. 단번에 결판이 나리라는 예상이 비틀리자 찬술은 오줌이라도 찔끔 쌀 지경이었다.

    "와! 금바우 쎄다. 넘겨삐라, 넘겨!"

    금바우가 선방하자 아이들은 그를 마구 응원했다.

    "금바우 잘한다! 난재이 잘한다!"

    "금바우 이겨라! 난재이 이겨라!"

    응원가의 함성이 금바우에게 꽃다발처럼 던져졌다. 그 함성이 치욕적인 조롱으로 찬술의 귓전을 마구 할퀴었다. 가슴에서 울컥 토해내듯 찬술은 젖먹던 힘까지 다해 겨우 금바우를 모래판에 엎고 그의 위에 쓰러졌다.

    "야아! 금바우 아깝다. 이길 수 있었는데."

    "또 붙어라. 삼세판이다."

    "이번엔 금바우가 이길끼다."

    세 판을 치러야 하는 것도 피할 수 없는 규정이 되어버렸다. 이미 씨름판은 벌겋게 달구어져 있었다. 모래판에서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버둥거리는 금바우를 찬술은 일으켜 세워주지 않았다. 알타리무같이 잘룩하고 통통한 자신의 팔다리로 금바우는 일어났다.

    "빨리 붙어라. 빨리."

    "금바우야, 허리감아서 뒤로 넘겨삐리라. 알았제."

    찬술과 금바우는 가증스런 관객들의 기호에 충실해야 하는 노리개였다. 둘째, 셋째 판에도 찬술이 이겼다.

    "에이! 아깝다."

    "에이, 한 판은 금바우가 이길 수 있었는데."

    "한 번 더하믄 금바우가 꼭 이긴다."

    "그래, 한 번만 더해라."

    관객들은 금바우가 이기는 모습을 봐야겠다는 꼴들이었다. 찬술의 승리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됐다. 약속대로 삼세판 다 했다. 씨름 끝!"

    분위기를 통제하던 덩치큰 놈의 선언으로 행사는 종료되었다.

    "야, 이제 밥 묵으로 가자."

    "그래, 인자 집에 가자."

    마지막 볼거리가 사라지자 아이들은 서둘러 넓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주위는 어느새 어둑어둑해졌다. 땟물이 흐르는 꾀죄죄한 얼굴로 모래판엔 찬술과 금바우만 남았다.

    "금바우야, 고맙다."

    찬술은 조약돌같이 작고 단단한 금바우의 손을 잡았다.

    "뭐가 고맙노?"

    가는 뱃고동 소리같은 음성으로 그가 반문해왔다.

    "나는 너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니가 일부러 져줬제?"

    "아이다. 나같은 난재이가 우째 니를 이길 수 있겠노?"

    "아이다. 나는 니를 넘어뜨릴 수 없겠드라. 한참 용을 쓰다가 니가 일부러 넘어져 준 거 나는 다 안다."

    "아이다카이. 인자 우리도 밥 묵으로 가자. 우리 어메가 수제비 한솥 끓인다고 카던데 같이 가서 한 양푼이씩 잔뜩 묵자."

    "그래, 배가 고파 밥맛 좋겠다. 그제?"

    "두 그릇이라도 비우겠다."

    완전히 어두워진 운동장을 그들은 손을 잡고 걸어나왔다. 한낮의 무더위가 어스름에 스멀스멀 풀이 죽고 있는 여름 저녁이었다. 가끔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자비로운 보살의 손길처럼 진득진득한 등짝의 땀을 식혀 주었다.

    금바우는 죽지 않았다. 그는 어느 사원의 양지녘에 석불이 되어 서 있을 것이다. 작고 아담한 석불이 되어 은은한 웃음을 웃고 서 있을 것이다. 철없는 손길들이 가끔 쥐어 박아도 빙그레 웃으며 창연하게 서 있는 석불이 되어 있을 것이다. 금바우의 불멸을 찬술은 꼭 믿고 싶었다. 이 소읍이라는 무대의 존재 이유에서 튼튼한 배경과 소품 중 하나가 금바우이기에.

    기다림을 알아야, 기다림 속에 놓여보아야 스스로 견고해지는 것일까. 무하의 출현을 기다리는 그 시간의 알알함이 찬술에게는 새로운 체험이었다. 유폐시키고자 안달했던 시간의 토막에 대해서, 그 정체의 본질에 대해서 사색할 수 있었다. 인위적인 것의 껍질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도 알 수 있었다. 정직하지 못한 부정이 자신을 무참하게 왜곡시키는 인자였음도 어렴풋이 인식할 때쯤 무하가 돌아왔다. 낡은 고가에 무하네 친지들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제삿날 밤에 무하는 그의 옛집에 지명수배자처럼 기어들었다. 어둠의 자락을 물살처럼 밀며 자정이 가까워져서 열려진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배낭을 멘 남루한 차림에서 단박 그가 무하임을 알 수 있었다. 잡복 형사처럼 논둑 건너 거름무더기에 몸을 숨긴 찬술은 얼굴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형체를 보는 순간 찡해졌다.

    "제사만 모시고 곧 나올끼다. 하루라도 묵은 적은 없다카데. 하여튼 이상하게 되어버린 놈이야. 고향에 무신 포한이 졌다고."

    찬술과 동행해 준 지호와 용섭이가 한숨을 지었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할 아픔이나 슬픔 같은 것이 무하에게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대단히 깊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것을 그에게 던져준 것들은 무엇일까.

    안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무하가 나왔다. 흡사 새벽녘에 사창가를 나오는 취객처럼 그의 행동은 부자연스러웠다. 뿌리치는 듯, 힐난하는 듯한 소리를 등뒤에 남기고 일인분의 자유만 달랑 안고 그는 솟을대문을 나왔다. 그리고 짧은 귀향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를 그대로 두는 것이 나에 대한 최대의 예의일 것이다. 진정한 자유의 냄새를 조금씩 맡으며 지내는 지금의 생활을 누군가가 깨트릴까봐 조마조마하다. 위태롭지만 무척 행복하다. 찬술이 네게 돌려주어야할 것이 있어 한 번은 꼭 만나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난 지금 자신을 다스리고 정돈하는 것이 우선 급선무인 것 같다. 이제 겨우 외로움과 무서움을 다스리는 법을 체득했을 뿐이다. 다행히 이곳에서 나는 두 분의 스승을 만났다. 과분한 복이지. 헛된 지식과 왜곡된 논리와 이념으로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속였던 것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부르르 떨리고 진땀이 난다."

    "처소의 이름이나 하나 지어야겠구나."

    사색의 늪이 꽤나 깊어진 것같아 찬술은 무하의 말을 끊었다. 사람이 사는 흔적이 애매한 외딴집이 무하의 숙소였다. 무하의 옛집 앞에서 벗들을 따돌리고 찬술이 차를 몰아 무하가 은거하고 있는 처소에 온 것이다. 동행을 거부하는 무하에게 찬술은 자신에게 일어났던 최근의 역사를 간단히 설명했다. 그것만이 무하가 뿌리칠 수 없는 처방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속적으로 성공한 인사가 자신의 허기진 부분을 채우기위해 옛마을을 찾아왔다는 오해를 방치한다면 무하는 또 여린 깃털처럼 사라져버릴 것이 뻔했다.

    겨울의 문턱이 저만치 다가온 계절에 그들은 오래 묵은 세월의 켜를 한 껍질씩 벗기며 재촉이 없는 시간 속에 앉았다. 외로움과 두려움을 다스리는데 다소의 에너지가 소모되었다는 무하의 말이 허튼 관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야반도주하듯 혹은 사자에게 끌려서 밤길을 달려올 때는 찬술에게 별다른 분석의 생각이 없었다. 돌아보면 금방 빈자리가 되어버릴 것같은 옆자리에 앉은 무하의 동태에 온신경을 쏟으며 그가 지시하는 대로 굽이굽이 길을 따라 전조등의 불빛을 착암기의 보습처럼 달고 어둠과 미지를 뚫고 나가기에 바빴다.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마저 끝나고 풀숲이 우거진 비포장 산길로 가자고 가리켰을 때까지도 무섭지 않았다. 도무지 마을이 있을 것같지 않은 산길이었다.

    "여기서부터 비포장길이 4Km이다. 울음산으로 들어가는 초입이지. 조심해서 가면 승용차도 갈 수 있다."

    자신이 거처하는 처소가 울음산이라고 불리는 곳의 겨드랑이쯤 된다고 헛기침까지 곁들이며 말했다. 어둠 속에서 확인되는 공제선으로 보아 거대한 규모는 아니나 시각을 압도하는 위엄을 풍겼다. 그것은 낯설음에서 비롯된 것일 거라고 찬술은 생각했다.

    "집이 있기는 있는거냐?"

    "내가 귀신이 아닌 다음에야 비바람을 피할 움막이라도 있겠지."

    "나올 때는 어떻게 나왔냐?"

    "두 다리가 성하니 걸어서 왔지. 버스 타는 곳까지 1시간이면 족하다."

    옆걸음으로 겨우 자죽을 옮겨야하는 벼랑처럼 길은 좁고 위태로왔다. 경운기가 겨우 지나다님직한 농로였다. 그를 만나야 한다는 알 수 없는 마력이 아니었다면 전진을 포기하고픈 행로였다. 암매장터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마저 드는 밤길이었다. 군데군데 움푹 팬 곳이며 바위가 버티고 선 곳, 장마철이면 아예 통행이 불가능할 곳 등을 예고해주는 걸로봐서 무하에겐 이 길이 익숙한 길임을 알 수 있었다.

    "차가 갈 수 있기는 있냐?"

    "이래뵈도 이 골을 따라 한창 때는 80여호가 살았다더라."

    "지금은?"

    "3가구."

    "널 포함해서?"

    "물론."

    "너도 이골짜기 주민이냐?"

    "인정받도록 노력하고 있지."

    "인정받는 절차가 있냐? 이런 산촌에 사람이 그리울텐데."

    "질서는 그리움보다 훨씬 상위개념이지."

    정확히 비포장이 4Km이라던 무하의 말이 거짓일 리는 없었지만 초행의 산길이 찬술에겐 100리는 되는 듯 진땀이 흘렀다. 핸들이 제멋대로 휙휙 튕기고 자동차의 뱃가죽에선 연신 앓는 소리를 냈다. 길이 끝난 지점에 이르러도 여기 사람이 있다라고 손을 쳐드는 불빛은 없었다. 걸어서 작은 능성이를 넘어서니 무하의 토굴이 나왔다.

    "정식으로 임대한 집이다. 1년에 콩 두 말."

    "살아주는 것만도 오감타고 하지않던?"

    "정식으로 임대했다니까. 임대기간은 무한대."

    벽에 걸린 석유램프를 켜고 잠자리를 정돈해서 누웠다. 산중의 밤은 벌써 겨울이 성큼 다가온 것처럼 바닥에는 냉기가 무성하고 코끝마저 시려왔다.

    "피곤하니 우선 자자. 쌓인 말들을 한꺼번에 풀면 보따리가 터진다."

    무하는 누운 자세를 고치며 잠을 청하려 했고 찬술은 정신이 자꾸 또렷해져갔다.



    "누구, 손님이 오셨는가? 낯선 차가 아래 있네."

    열려진 사립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앞을 막고 있는 산이 높아 아직 햇살은 보이지 않았지만 훤해진 아침녘이었다. 무하가 부시럭거리며 일어나 방문을 열고 인사를 건넸다.

    "어른 내려오셨니껴?"

    "고추 끔(값)이나 알아볼라꼬 장에 가네. 누가 오셨는가?"

    "친구가 왔심더. 안골 어른하고 같이 안가십니껴?"

    "허어, 그놈하고 장에 같이 가능거 봤는감."

    목소리로 보아 앞니가 몇 개는 없는 듯했다. 방문을 닫고 무하는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이 골 이름이 갈골이다. 울음산의 중심 계곡을 따라 이어진 골짜기를 그렇게 부른다. 칡이 많이 나서 붙은 이름인가보더라. 하기야 갈골이란 이름은 수두룩하다지."

    "갈골은 그렇다치고 울음산이란 이름이 요상하네. 무얼 위해 운다는게냐? 하루 일과는? 언제 여기에 닻을 내렸나? 가족들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찬술은 궁금한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채찍을 들고 쫓아오는 시간의 사자도 없는데 몸에 밴 습관인양 참지 못했다.

    "얼마나 머물거냐? 변호사 개업하자면 이런 곳에서 퍼질르고 오래 있을 수는 없겠지. 일이 사람을 찾아다니지는 않을 테니까. 바득대며 파고들지 않으면 잊혀진다는 것도 잠깐일테고."

    찬술은 화면에 떠올리고 싶지 않은 현실을 일깨워주는 무하가 야속했다. 그러나 주변의 풍경만은 어쩌면 유년의 십수년을 그대로 당겨올 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여기에 간판 걸면 안될까? 심산유곡법률사무소라고."

    "농담인 줄 안다만 최후의 패잔병들만 남아있는 골짜기에 법률이 필요할까. 하루도 싸움을 그치는 날이 없지만 최씨와 박씨에겐 세상의 법률과 조정이 통하지도 않고 필요도 없다. 골밖에서나 통하는 서툰 발상은 이곳에서 소용이 없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머물꺼니? 먹고자는 문제는 걱정을 안해도 된다만."

    "마땅히 갈 곳이 없다. 너를 만나야겠다는 목적이 성취되고 나니 허탈하네. 나무는 겨울을 지내야 나이테가 하나 더 새겨진다지."

    무하의 잠적에는 만만치 않은 눈금들이 가로세로 얽혀 있을 것이라는 짐작과 함께 찬술은 아예 겨울을 지낼 각오를 했다. 다시 자신의 좌표에 바늘을 꽂을려면 그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것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묵언수행 중인 수행자들처럼 서로의 노출되지 않은 부위에 대해서는 들쳐보지 않는 것을 암묵적으로 합의했다.

    "이 집은 금씨들의 재실이다. 골짝붙이긴 하지만 딸린 전답도 있고 이 일대 산이 그들 문중 소유이지. 뒤로 가면 산소가 10여기 있다. 벌초하는 것도 내몫이다."

    "고향을 두고 문중 일을 보러 들어온 갸륵한 산지기구먼. 장한 후손 하나 났네. 그게 네 일의 전부는 아닐테지."

    "일들이야 많지. 도합 3가구이지만 세상이 갖추어야할 것은 모두 있다."

    거대한 세상을 향해 포효하던 기상은 물살이 잦아들어버린 모래벌처럼 무하의 말투에는 끈적거리는 것이 없었다. 햇살에 드러나는 미세한 사금이 군데군데 반짝거린다고나 할까.

    "금의원, 금의원 안에 있는가? 손이 오셨나?"

    발자국 소리와 헛기침이 들리더니 방문 앞이 약간 수선스러웠다. 무하가 방문을 밀치자 새옷인듯한 점퍼의 쟈크를 목밑까지 채운 노인과 보퉁이를 머리에 인 안노인이 사립문 안쪽에 서있었다.

    "안골 어르신 내려오셨니껴? 장에 가실라니껴?"

    "자넨 뭐 필요한거 없는가? 같이 안갈란가? 대목장을 볼라믄 아즉 두어 장 밑이지만 시세나 볼겸."

    무하가 필요한 것이 없다는 인사말과 최씨 어른이 좀전에 장에 간다며 내려갔다는 얘기를 전하니 내외는 입을 삐죽거리며 가버렸다. 영감은 뒷짐을 지고 앞서고 안노인은 보퉁이를 이고 굽은 산길을 따라 그림처럼 멀어져갔다.

    "금의원이라니 무슨 소리냐? 여기서 국회의원하냐?"

    "영감들이 임의로 붙인 호칭이야. 교통사고 낸 안골 영감 아들을 응급처치해준 것, 도회지에서 공장에 다니다가 미쳐서 내려와서 집에 틀어박혀 있는 최씨 영감 딸내미를 보살펴 준답시고 말좀 건넨게 전부인데 나보고 의사 선생이란다. 도망을 온다고 왔는데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더라."

    무하의 말투에는 초겨울 햇살같은 애잔함이 묻어 있었다. 그것이 삶에 대한 절망같기도 하고 한편 희망같기도 했다.

    "역할의 변화는 좋은 일이 아닐까? 더구나 대가를 바라지 않는 봉사같기도 하고. 불가에서도 무주상보시를 최상의 가치로 친다던데."

    "하긴 변화를 위한 모색이 지금의 화두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할이란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을 떨치기 위한 노력의 일부가 지금인지도 몰라. 두 영감과 그 가족 그리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서 모두 떠나가버린 이 골짜기가 나의 스승이다. 여기서 나의 정직성이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면 나는 또 어디를 헤매야할 지 모르겠다. 심장이 잠시도 멈추지 않는 것처럼 살아있는 동안 삶은 진행형이다. 그러나 자신이 아닌 누구에게 영향을 미치겠다는 것은 진행형이 될 수 없다. 역할이 끝나면 의상을 벗고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 관객도 없는 무대에서 혹은 어리숙한 새로운 관객을 끌어모아 분장만 약간 바꾼 대사와 연기를 고집하는 것은 천박한 욕심에 불과하다. 하물며 심장의 운동마저 멎어버린 주제에 낯선 세대들에게까지 빛이 되고자 과욕을 부리기도 하지. 그 빛은 이미 자외선의 성분조차 없다는 것도 모르고. 드물게 성자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은 그 빛의 원천이 깊어 오래도록 자양을 제공하기도 하지. 하지만 허술한 삶의 부분을 비슷한 부류로부터 학대받았다는 것을 불멸의 보석인양 이마에 달고 다니는 것은 자신에 대한 학대일 것이다. 감옥 몇 번 들락거린 것이 훈장이 될 수 없겠지. 보상을 받겠다는 것은 깨어진 노름판에서 본전을 내놓으라는 격이지. 거름의 역할과 뿌리의 역할, 줄기의 역할 그리고 꽃의 역할이 제각기 별도로 존재한다. 거름의 역할을 했다고 열매를 꼭 움켜쥐어야겠다고 과욕을 부린다면 거름의 공적마저 희화화시키고 걸죽했던 향기를 독한 화공약품 냄새로 변질시켜 버린다. 나는 내가 맡았던 부분의 역할의 의미가 손상되지 않길 염원하며 여기서 맑은 숨을 쉬며 있을 뿐이다. 역할의 변화란 거창한 구호로 이 골짜기의 처녀성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다."

    늦은 아침을 먹고 찬술은 무하를 따라 나섰다. 무하의 일상에 동조하고 동행하는 일 이외에는 찬술에게 별도로 마련된 일과가 없었다. 무하는 이곳을 안내할 책임이라도 있다는 듯이 앞장을 섰다.

    "우선 동지들과 상견례를 하지."

    무하는 낡은 등산화의 끈을 묶으며 찬술에게 헌 군화를 한컬레 내주었다. 산에 오를 품새였다.

    "산속에 최후의 빨치산들이라도 숨어있나?"

    동지들 운운하는 말에 찬술이 너스레떨 듯 가볍게 물었다.

    "왜 겁나냐? 이곳의 지세로 보아 2차대전 때 패잔병이라도 남아 있을 법하지. 순결한 신념이 아직 남아 있다면야. 최후의 빨치산은 네가 본 그 영감들이지. 누가 어느 측인지 불분명하지만 맨날 싸우는 주제가 그거야. 서로 자기가 의로운 편이었다고. 그것만은 죽을 때까지 양보할 수 없는 최후의 양식인가 보드라. 네가 한 번 명쾌하게 피아를 구별해서 판정을 내려보지."

    "빈정거리지는 마시고."

    "검불에 걸리지 않도록 두꺼운 잠바도 걸쳐라."

    집뒤로 좁은 계곡을 따라 산길이 있었다. 발목을 적실 정도의 개울물이 흐르는 계곡에는 아-치를 만들며 머루, 다래 넝쿨이 무성했다. 건포도알 크기만한 머루송이와 풋대추만한 다래알이 적당하게 익어 있었다. 필요하면 내려올 때 한움쿰 따라고 무하게 일러주었다. 먹고 싶으면이라고 하지않고 필요하면이라고 말하는 무하의 말이 찬술에게는 무슨 금기처럼 들렸다.

    "이곳이 그래도 족보는 있는 지역이다. 비록 자투리 부분이긴 하지만 백두대간의 자락이다. 백두대간이 눌러앉은 엉덩이의 꽁무니뼈가 바로 울음산이다. 한 30분만 올라가면 된다."

    "누가 있는데? 산신령이 있냐, 미처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선녀를 숨겨놨냐?"

    "빨치산보다는 많이 부드러워졌네. 내 동지들, 좀 정직하게 말하면 자유의 실험에 참가한 나의 도반들이 있지. 궁시렁거리지 말고 가기나 하지. 꽁무니가 가장 응집력과 수축력이 강하니 허튼 생각으로 영산의 정기를 어지럽히면 빨판으로 흡입해버릴지도 몰라."

    산중턱쯤 올라가니 넓지않은 평지에 화훼단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치형 막사가 있었다. 두터운 천으로 지붕을 가린 짐승의 우리였다. 노린내가 조금씩 풍겼다. 컴컴한 실내에는 삭은 피마자알같은 염소똥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네 도반이 염소인가보이. 실망인걸. 수염이 무성한 최후의 레지스땅스의 후원자인줄 기대했는데. 아직도 자신이 꿈꾸는 세계에 대한 확신을 부동의 장승처럼 부여잡고 있는 노병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줄 알았는데."

    "왜 서운하냐? 한껀 하고 싶어서."

    "놀리지 마라. 난 이제 25년 전으로 돌아온 양조장집 도련님의 방자일 뿐이다. 다만 네가 치루는 수업료가 턱없이 비쌀까봐."

    "난 도련님인 적이 없었는데."

    "한껀 하고싶다는 발상에 대한 보답일 뿐이다."

    "수업료에 대한 고민을 안한 건 아니지. 세상은 자의든 타의든 적잖은 수업료를 요구하는게 사실이야. 그것을 지불함으로써 스스로 견고해지는 보상을 받지.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수업료의 쓰임새는 한결같이 불신을 확인하는 과정에 소요되는 경비일 뿐이다. 인간에 대한 불신을 확인하는데 요구되는 비용이 수업료이다. 되도록 일찍 그리고 액수를 늘릴수록 인간은 믿어서는 안될 존재라는 명쾌한 결론을 얻을 수 있지. 납부 기일을 넘기거나 타이밍이 맞지 않는 경비는 낭비이기 십상이다. 경제학원론이 분노하기에 적합한 처신이지. 최소경비로 최대효과를 얻어야할 것인데, 최대경비로 최소효과도 건지지 못하는 투자는 경제학에 대한 모독이야."

    염소는 묵은 똥부스러기만 남겨놓고 한 마리도 없었다. 주변엔 철책도 보이지 않았다. 염소 특유의 방정맞은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설해목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기에는 아직 이른 계절이라 서러운 단풍만이 시린 가을을 흔들고 있었다. 찬술은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물고 무하에게 한 개피를 권하니 그는 끊은지 오래 되었다며 받지 않았다. 염소떼가 모두 사라져버린 빈 우리로 끌고와서 무하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분명한 현실과 증거와 증명에 익숙했던 습관이 남아 찬술의 눈에는 무하의 눈빛이 조금씩 이상하게 보였다.

    "겨울을 여기에서 난다면 네게 보여주마. 자유와 평등의 의미를 실제적 실험물을 통해서. 내 확신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하지 마라."

    무하에게서 얻으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가. 무하를 찾아서 무엇을 증명하고 확인하려 했던가. 갑자기 찬술은 맥이 빠지며 허기가 느껴졌다. 명백한 물증이 아니면 가치가 인정되지 않는 세월을 살았던 시절이 문득 그리워졌다. 무하도 결국 허튼 소리로 민심을 흉흉하게 하는 그 징한 무리 중에 일부일 뿐인가. 그것이 아님을 확인하러 단절을 뚫고 그 소읍에 갔고 이렇게 낯선 골짜기에 온 것은 아니었던가.

    무하는 하루에 한 번씩 동지들을 만난다며 그 빈우리에 올라갔다가 내려오곤 했다. 뒤쫓아 닦달하지 않는 시간에 익숙하지 않은 찬술은 온갖 생각들로 그 빈 여백을 채우기에 바빴다. 사무실에 앉아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지르고 주먹으로 상대를 후려갈기는 꿈을 꾸다가 깨어나기도 했다.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에 깔려 까마득한 곳에서 들리는 구조대의 망치 소리를 향해 머리를 부딪치는 꿈을 꾸기도 했다. 아내와 딸은 허공에서 애드벌룬을 타고 지하에 갇힌 자신을 향해 무어라고 소리치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몸부림을 치다가 잠에서 깨면 허리를 걷어차였는지 무하도 깨서 일어나 앉곤 했다.

    "무슨 이를 그렇게 갈면서 자냐. 뭘 맛있는 거 먹는 꿈이라도 꾼게냐. 씹어야 할 것이 뭐 그리 많냐. 물이나 좀 마시고 자라."

    무하는 허리를 문지르며 다시 잠을 청하곤 했다. 멀리서 들리는 산짐승의 울음소리와 마당 가운데 서있는 살구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쓸리는 소리가 겹쳐서 찬술은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1Km 정도 간격을 두고 최씨 영감과 반장인 안골 영감의 집이 있었다. 80여호가 촌락을 형성하며 살았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주거의 흔적은 뜸했다. 사람이 떠나버린 빈집은 금방 폐허가 되어 아이들이 만든 바닷가 모래밭의 두꺼비집처럼 형체가 소멸되어 가고 있었다. 집터라고 무하가 알려주지 않으면 약간 높은 밭둑이라고 여겨지는 흔적들이 갈골의 유산이었다.

    산비탈 약간 평평한 곳에 있는 최씨 집의 어귀를 들어서자 가마솥이 걸린 소마구간에딸린 아궁이에서 불을 지피던 최씨의 딸이 힐끔 돌아보았다.

    "문자야, 아버지 계시냐?"

    철에 맞지 않은 두껍게 누빈 외투를 입고 불을 지피느라 연기를 덮어쓰고 앉은 처녀에게 무하가 정감을 섞어 말을 건넸다. 힐끗 돌아보는 하얀 얼굴에 그을음과 땟물이 듬성듬성 모자이크 되어 있었다. 무하를 보자 수줍은 듯 배시시 웃으며 왼손으로 입가를 가리더니 낯선 찬술을 보더니 금방 표정이 굳어졌다.

    "쟤가 최씨 영감 딸이냐, 미쳤다는?"

    "그래, 언제 달려들지 모르니 걸음을 조심해서 옮겨라."

    무하는 사나운 맹견 곁을 지나가는 것처럼 조심하는 동작을 과장했으나 찬술의 눈에는 머리를 아궁이에 쳐박고 연신 후후 불어대는 쪼그려 앉은 처녀의 뒷모습이 측은하게 보였다. 힐끗돌아보는 싸늘한 눈빛이 섬짓했지만 한갈래로 묶어 등을 타고내린 긴 머리단이 왠지 우수의 다발처럼 보였다. 집모퉁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던 검둥이가 방문객 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허공을 향해 실없이 컹컹 짖었다.

    "어이구! 금주사, 어서오시게."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법한 낮은 방문을 열고 최씨 영감이 맞았다. 찬술은 익숙하지 않은 각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방안에는 십수년도 넘은 것같은 신문지로 도배되어 있었다. 잡다한 것들이 걸려 있는 방안을 오래된 역사의 기록물이 지키고 있는 것같았다. 그들이 방안에 들어서자 노인은 초면인 찬술을 향해 큰절을 하는 자세를 취해 찬술은 순간적으로 깜짝놀라 맞절을 했다. 도시에서는 까맣게 잊고 있는 상견례의 인사법이 보존되어 있었다. 불가에서는 친소를 불문하고 서로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예를 표하는 의식이 상존한다. 찬술은 문득 외딴 암자에 들른 느낌이 들었다.

    "금주사 친군가 보이. 우째 이런 벽촌에? 금주사한테도 지인이 있긴 있는가보이. 3년을 지내면서 찾아오는 사람 꼴을 못봤는데. 뭐 하는 양반이신가?"

    "잠시 쉬러 왔심니더. 몇 십년 만에 연락이 돼서. 지난 장에 가서 제수는 준비했니껴?"

    "제수는 무신! 객지에 나간 새끼들이 저거 어마이 생각나믄 들어와서 제사상 차릴끼고. 내사 저거 하고 굶지 않고 지내믄 그만이지."

    노인은 멋쩍은 듯이 어린애처럼 머리를 긁적거렸다. 수줍음을 처리할 마땅한 화제를 찾지 못한 듯 노인은 방문을 열고 과장된 고함을 질렀다.

    "야, 문자야! 뭐하노? 손님오셨는디 부석에 가서 감자 좀 삶아라."

    "딸내미는 요새는 좀 어떠이껴?"

    "아따 인젠 다 나았지러. 다 금주사 덕분이구먼. 저러다 또 언제 대가리 짤린 달구새끼처럼 날뛸지 알 수 없지만 다 나았지러. 인자 겨우 스물 서인데. 망할 년!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는 가랭이 찢어진다는 거 모르고. 그냥 공장에서 고분고분 일이나 했으믄 지금쯤 솔가해서 아-나 기르고 있을낀데. 지가 무신..."

    최씨는 만사가 죄스러운 듯 연신 머리를 긁적이며 민망해하는 표정이 몸에 밴듯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이가 지어보이는 죄스러운 표정, 찬술은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뻔히 보이는 잘못을 이리감추고 저리덮으려고 열을 올리고 낯짝의 근육을 실룩거리던 지난 날 그의 억지 도반들의 얼굴이 생각났다. 사방은 이미 시멘트벽으로 둘러쳐진 폐쇄된 공간인데 거기서 빠져나가겠다고 모퉁이를 찾고 능력의 한계 밖인 벽을 기어오르다가 그냥 떨어지는 쥐새끼같은 그들의 얼굴과 최씨 영감의 쑥스러움이 자욱한 표정이 이승과 저승의 모습으로 함께 다가왔다.

    "안골 반장 어른 댁에 같이 안가실랑교? 이 친구 인사도 드려야하고."

    "어허, 금주사, 왜 갑자기? 내가 그 인간 삽짝에 발들여 놓는 거 봤는감. 반장 어른은 무신 썩어자빠질 반장 어른! 젊은 금주사가 이골에 들어와 둥지를 트기로 했으믄 젊은 사람한테 넘겨줘야제, 그게 무신 큰 벼슬이라고 맻 십년 웅켜쥐고 안놓는기여. 쥐를 때릴라캐도 독 깨질까봐 못 때리고 내가 참는기지. 그놈 이력에 반장이 당키나 하는 감. 댁들이나 댕겨오게. 문자야, 이년 뭘 그리 꾸물거리노! 감자 다 삶았나, 퍼떡 가져오이라."

    수줍음으로 얼굴에 패인 주름들이 보송보송한 여울물결같다고 느꼈던 얼굴이 안골 영감 얘기가 나오자 금새 억새 대궁이처럼 불룩거렸다. 방안이 그만 냉랭해졌다. 무하도 무안한 듯 벽면에 도배된 신문지에서 알아볼 수 있는 글귀를 몇 개 주섬주섬 주워섬겼다. 잠시 후 방문 앞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처녀가 거멓게 변색된 작은 대광주리에 김이 모락모락나는 감자를 수북히 담아 공손하게 방안으로 내밀었다. 찬술은 그 때 그 처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처음 보았다. 그 사이에 세수를 했는지 그을음과 땟물은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투박한 겨울 외투를 벗어버리고 헐렁한 티셔츠 차림이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두 손으로 바구니를 내미는 처녀의 손이 무척 가늘고 하얳다. 스물 세 살이라고 보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여의고 병색인 얼굴이었다. 식욕잃은 삼십대 중반 여인이라고나 하면 적당한 몰골이었다. 허리를 굽히며 바구니를 내미는 사이로 셔츠 너머로 처녀의 가슴팍이 얼핏 보였다. 작고 허약한 젖가슴이 아련한 슬픔처럼 매달려 있었다. 스물 셋을 잃어버린 아픔처럼 납죽하게 쳐진 젖무덤이 안간힘처럼 붙어 있었다. 찬술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원치 않은 작은 풍경을 보아버린 회한에 낯이 화끈거렸다.

    아무런 감미료를 첨가하지 않았으나 감자는 담백하고 구수했다. 호호 불어가며 두어 개씩 먹고 방을 나왔다. 처녀는 마루에 걸터앉았다말고 놀란듯이 화들짝 일어섰다.

    "문자야, 저녁 지어야지. 약도 꼬박꼬박 잘 먹어라. 알았지?"

    무하는 어린애 타이르듯이 등을 토닥여주며 자상한 말투로 처녀를 쓰다듬었다. 찬술은 자신을 바라보는 처녀의 눈빛이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불안해 하는 것 같기도하고 경계하는 것같기도 하고 혹은 증오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집을 나서면서 무하에게 그런 느낌을 말해 보았다.

    "고깝게 듣지마라. 몸에 밴 습이 아닌가 한다. 저능아나 정신질환자는 정상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동물적 감각이 발달하는 수도 있다. 호의와 경계에 대한 판단이 신속하지. 근데 너한테는 상당히 호의적인 것 같던데. 걔를 만나 오늘처럼 진중한 것을 본 적이 없다. 발길로 한 번 걷어차이고 나와야 후련한데."

    길죽하게 이어진 최씨네 마당을 다 빠져나올 때쯤 인사말이 뒤따라왔다. 그럼 건너가게라고 최영감이 문지방을 집고 손을 젓자 처녀가 까르르 웃었다. 조용한 산중의 적막을 찢는 괴기스런 웃음소리였다. 호감과 능멸이 터질 듯이 실려있는 웃음소리 같았다.

    "기어이 한 껀 하시누먼."

    무하가 중얼거렸다. 뒤돌아보니 최영감이 마굿간 앞에 세워놓은 싸리빗자루를 들고 딸애를 후려치는 동작을 취했다. 처녀는 통치마를 펄럭거리며 뒤꼍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농사보다 힘든게 자식 치닥거리이겠구먼."

    찬술이 중얼거리자 앞서가던 무하가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어느덧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오르막 산길 모퉁이를 돌아가니 옆으로 갈라진 계곡 안쪽에서 먼 곳의 산불처럼 가는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안골 어른 혹은 반장 어른이라고 불리는 집에서 저녁을 짓는 연기였다.

    "끼니 때를 맞춰 남의 집 문턱을 들어서는 것 같네. 다음 날 인사하면 안될까?"

    찬술이 낭패스러운 듯 무하의 의사를 물었다. 끼니를 신세지는 일을 꺼려한 오랜 습관 때문이었다.

    "걱정마라. 인사치레가 하루라도 늦으면 난처해질 일이 일어날지 몰라. 안골 영감네 안노인은 신고 정신이 투철한 할머니야. 수상하게 이 골을 어정거리면 당장 달려가 신고해버려. 환갑 넘긴 노인인데 날렵하기가 다람쥐야. 끼니를 신세진다는 걱정은 안해도 된다. 실성한 딸과 둘이 사는 최씨 영감이나 교통 사고로 불구가 된 아들 녀석을 상전처럼 받들고 사는 안골 영감 내외에게 이상한 습관을 발견했다. 한 때도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 밥을 한그릇 더 준비해 둔다는 것이다. 겨울에는 이불속 아랫목은 늘 뚜껑 덮힌 놋그릇 차지이다. 이 궁벽한 산골에 찾아올 이가 누가 있겠나. 그러나 평생 그 습관을 간직하며 살고 있다. 내가 그 혜택을 가장 많이 입고 가끔 들르는 우체부가 두 번째쯤 될게다. 약초나 산삼을 찾아 다니는 이들, 여름엔 무명 자루를 들고 다니는 땅꾼, 때로는 번쩍번쩍하는 엽총으로 무장한 사냥꾼들도 한끼씩 얻어먹지. 그러나 그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지. 임자 없는 식은 밥을 먼저 먹고 더운 밥은 다시 그릇에 담아 묻어둔다. 습관이라 해야할 지 미덕이라 해야할 지. 이런 걸 빈곤의 악순환이라고 하지 않나, 하하하!"

    모퉁이를 돌아서자 저만치 거리에서 집이 보였다. 오두막집의 처마를 둘러가며 장작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영감은 마당에서 장작을 패고 안노인은 문짝이 없어 안이 훤히 보이는 부엌에서 밥을 짓고 있었다. 무하와 찬술이 인사를 건네며 들어서자 사람이 그리운 것인지 평소의 습관인지 객지에서 사위와 딸이 온 것처럼 반겼다. 민망할 정도의 환대였다. 장작 패던 일을 중지하고 방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렇잖아도 내 금의원 양반 찾아가려든 참인데, 어이쿠 이거 직접 오셨네. 어서, 어서 들어오게. 어이, 할망구, 달구새끼 한 마리 잡게. 금의원 친구 분도 오셨응께. 보아하니 예사 분이 아닌 것 같으이."

    영감은 잠시를 가만히 있지 못하고 문지방을 들락거렸다. 플라스틱 통에 담긴 댓병 소주도 가져왔다. 눈매가 약간 매섭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거칠고 투박해진 손을 보니 일로 평생을 살아온 삶이 그려져 조금은 숙연해졌다. 정식으로 나누는 인사법은 아래 최씨 영감과 똑 같았다. 깜빡 잊고 있는 찬술에게 무하가 옆구리를 쿡쿡 찔러 영감에게 큰절을 했다. 영감은 민망하다는 말을 연신 반복하며 맞절을 했다.

    "후철이는 좀 어떠이껴?"

    무하가 옆방 쪽을 바라보며 교통사고를 당한 영감 아들의 안부를 물었다. "떨어져나간 다리 한쪽이야 없었던 요량하믄 되지. 요샌 그놈 팔자가 칠월 송아지라네. 무신 귀신이 씌여서 오밤중에 잘 자고 있는 에미 애비한테 온다고...술이 웬수지."

    안노인은 몸에 발동기라도 장착한 듯 솜씨가 재발랐다. 담배 몇 대 피운 사이에 그럴듯한 술상을 차려왔다. 그새 어떻게 닭을 잡았느지 볶아서 양푼이에 그득하게 담아 상위에 올라왔다.

    "소금밥에 정붙는다고 찬은 없어도 많이 드이소오."

    나이에 걸맞지 않게 간드러지는 안노인의 말투에 찬술은 크륵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금의원이 아니었으면 저놈은 그길로 끝장났제. 기적이우 기적. 그 때 금의원이 지나가지 않았다면 이 산중에 누가 있어 구했겠소. 평생 갚아도 그 은혜를 다 못갚지."

    "후철이도 건너오라고 하제요?"

    옆방을 향해 소리를 치니 목발을 짚은 청년이 건너왔다. 더부룩한 머리칼이 얼굴을 덮다시피 했다. 흉한 상처를 가리려 일부러 머리칼을 앞으로 쓸어내린 듯했다. 목발을 세우고 자리에 앉는 자세가 아직 서툴렀다.

    "인사드려라. 이쪽은 금의원 친구시다."

    청년이 다시 일어서려는 걸 무하가 말렸다. 지난 봄날 어느 저녁, 녀석은 거의 만취가 되어서 트럭을 몰고 이 골짜기로 들어오다가 무하가 거처하는 집에서 멀지않은 개울에 쳐박혀 부상을 입었다. 막차를 타고와서 밤길을 걸어오던 무하가 그걸 발견하여 구조했다. 사고가 난 시간과 무하가 발견한 시간의 차이가 크게 벌어진 듯 피투성이의 몰골이 굳어지고 있는 시점이었다. 안면과 갈비뼈 부상은 그런대로 회복이 되었지만 오른쪽 다리의 골절은 정도가 심해서 끝내 절단해야 했다. 트럭 하나 장만해서 도회지에서 무슨 장사를 했는데 트럭과 사람이 한꺼번에 망가져버려 이 골짜기의 희박한 인구밀도를 약간 돋구어 준 것이다.

    "아래 최씨 영감님네도 들렀다가 오는 길이시더. 이 친구가 아무래도 올 겨울은 여기서 나야할 것같아 어른들께 인사를 드려야할 것 같애서."

    "그놈 뭐하고 있등가? 미친 딸년 때문에 손님이 놀라셨겠구먼."

    가시가 돋친 말투에 푸짐한 산골 음식상에 입맛이 떨떠름해졌다.

    "문자가 삶아주는 감자도 먹고, 그랬니더."

    "감자? 그 놈은 곰을 잡아도 웅담없는 곰만 잡을 놈이야. 귀한 손에게 촌구석에 흔해빠진 감자라이. 그라고 미친 아-가 감자를 삶아? 솥에 뭘 집어 넣는 줄도 모르고. 지난 번에도 야-가 가서 부엌을 삐끔히 들다보니 감자고 똥묻은 신발짝이고 거 뭐시기 처마에 걸어놓은 코뚜레까지 한꺼번에 집어넣고 푹푹 삶더라고 그러데."

    찬술은 갑자기 속이 매슥거렸다. 허연 감자알에 묻어있던 검불이 어른거렸다. 무하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지 않았다면 바깥으로 나가 웩웩 거리고 싶었다. 똥묻은 신발짝 운운하는 것도 그렇고 적막한 산촌에 외로움을 서로 부비며 살아도 모자랄 판에 자욱한 증오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것이 더욱 역겨웠다. 그러나 무하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단련이 된 것인가 아니면 그 영역은 아예 관심을 끊어버리기로 작정한 것인가. 덤덤한 무하의 표정 역시 찬술의 역겨움을 더욱 휘저었다. 정갈하지는 않았지만 푸짐한 술상이 무색했다. 큰 사발에 소주를 따라 마시는 것이 이곳의 풍습인 것같아 찬술도 그렇게 서너 사발을 거푸 마셔버렸다. 두 영감님은 마치 닭과 지네같네요, 닭 싸움에도 텃세를 한다지만 두 어른은 모두 여기서 태어나고 자라고 함께 말년을 보내는 유일한 동지인 것 같은데 왜들 그러시는지요, 술하고 친구는 묵을수록 좋다는데 무슨 포원이 그렇게도 깊으신가요 등등 찬술의 목젖을 간지럽히는 말들이 처마끝의 빗물처럼 연신 준비되었지만 꾹꾹 참았다. 하나를 보고 열을 안다고 떠드는 도시의 지혜를 여기에 적용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무하는 반장 영감이 퍼질르는 최씨 영감에 대한 무수한 비난과 영감 자신을 슬쩍슬쩍 들어올리는 찬사의 말 어디에도 맞장구를 치지않고 묵묵히 듣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대단한 인내심이었다. 거의 만취 상태가 되어서 그들은 그 집을 나왔다. 늙은 내외가 삽짝까지 따라 나와 정중하게 배웅했다. 함께 몇 잔을 마신 아들 녀석도 목발을 집고 비틀거리며 따라 나왔다.

    "낙심하지 말고 다른 살 궁리해보자. 다리 하나 없는 게 큰 불편은 아이다. 성한 양팔로 할 수 있는 일도 많다. 방안에만 쳐박혀 있지말고 농사일도 도와드리고 산책도 해라. 자꾸 움직여야 된데이. 나중에 차를 새로 하나 마련해서 약간 개조하면 운전도 할 수 있을끼다."

    사립문을 나서면서 무하는 문자에게 건넸던 말과 비슷한 분량의 희망과 위로를 후철이에게도 건네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산길을 내려오며 그들은 참으로 오랜만에 어깨동무를 했다. 아니 어쩌면 처음인지 모른다. 어린 시절 그들 둘이 어깨동무를 하고 골목을 쏘다니기에는 곱잖은 시선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 꼴을 무하 어머니가 직접 보거나 간접적으로 귀에 들어가더라도 그들이 치러야 하는 대가가 적잖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찬술에게 가해지는 문책이 더 가혹할 것이고. 이름값도 못하는 달맞이꽃이 지천에 널려 있는 산길을 내려오며 어깨 동무를 하고는 콧노래를 불렀다. 사랑도 명예 운운, 끝내 이기리라 운운하는 그런 노래였다. 등성이를 넘어 다른 마을로 이어지는 고개마루에는 무엇을 밝히기 위함인지 벌건 가로등 하나가 외로운 산골에 등대처럼 서 있었다. 한때는 골짜기에 부표처럼 널려 80여호가 살았다는 것을 증언하는 징표처럼 가로등은 장한 모습이었다. 어둠이 슬슬 내려오는 밤이면 어김없이 사람이 살고 있다는 의미를 함성처럼 내뱉는 벌건 가로등 하나가 갈골의 현대사였다. 전신주를 두어 개 박으면 전기를 끌어올 수 있을 것같은데 무하는 유난을 떠는건지 석유램프와 손전등, 등산용 버너 등이 살림살이였다.

    가설극장의 포스터처럼 어색한 꼴로 이 골짜기에 무하가 들어온 것은 3년전이었다. 자성의 몫을 다듬기 위함인지 대책없는 증발이었는지 그 이유는 명확치가 않다. 살아온 날들의 부끄러움이 여름날의 해비처럼 쏟아지는 순간 그는 간단한 짐을 꾸려 무작정 집을 나왔다. 자신이 이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이 세상에 대한 예의일 것같은 묵직한 예감이 산맥처럼 그의 등을 밀었다. 또다시 변신을 꾀하고 채색한 변설을 늘어놓는다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에 대한 기대와 실망을 적절하게 체득한 아내는 남매를 데리고 친정으로 가버렸다. 딱한 이론가의 가족으로 살아가는데 인내심의 바닥이 보일 시점이었던 같다. 친정이라해서 열차를 타고 댓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반도의 끝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7년전 풍요의 꿈을 가득 싣고 남반구의 대륙으로 이민을 가버린 처남의 가족에게로 장인 장모가 합류해버림으로써 남반구의 항구 도시가 처가 동네가 되어버렸다. 곡선미를 자랑하는 바닷가의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이 아내와 남매의 안녕을 확인하는 증거였다. 정리가 되는대로 따라가겠다는 허약한 약속을 했지만 정리할 무엇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신념과 확신이라는 상표를 붙이고 무수하게 날려보냈던 종이 비행기는 이미 쓸어담을 수도 없이 저마다 낯선 기항지에서 혹은 무른 토양의 종착역에서 밑줄이 쳐지고 실한 안주가 되어 밥상에 오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독이 될 수도, 마약이 될 수도, 남루한 푸념꾼으로 운명지우는 서서히 녹는 에테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각의 시간을 단축시킨다는 단맛은 유혹의 포장지에 불과했다는 자괴감이 그를 먼 변방으로 내몰았다.

    갈골은 그의 아슴한 기억 속에 매우 흐린 하나의 점이었다. 그나마 점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늘상 두려운 존재였던 그의 아버지와 가장 먼길을 동행한 덕분이었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당도한 것이 갈골에서 십리 떨어진 면소재지였다. 면소재지였지만 우시장 하나는 꽤나 번창한 곳이었다. 무하의 아버지는 집안에서는 폭군이었고 지역에서는 인색한 졸부였다. 풍류와는 거리가 멀었던 위인이었다. 읍내에서 유일한 양조장의 주인인지라 그의 오만과 방자, 횡포와 거들먹거림이 별 저항없이 수용되었다. 세무서와 경찰서의 관리들을 적당히 다루는 노력 이외에는 다른 곳에 마음 쓸 일이 없었다. 자전거를 타고 읍내의 선술집과 주막을 돌며 배달꾼이 미처 거둬들이지 못한 밀린 수금을 하는 것이 일이자 즐거움이었다. 술단지를 걷어차며 으름장을 놓아 돈을 받아내는 것이 그의 우람함을 지탱하는 도구였다. 서너 장을 걸러서 한차례씩은 며칠 동안 출타를 했다. 소달구지를 앞세워 고두밥을 찔 쌀을 두어 수레씩 사오기도 했고 누룩을 한짐 진 짐꾼을 앞세워 오기도 했다. 활량으로 놀기에는 아예 그릇이 안되는지라 빈번한 출타에 대해 무하 어머니마저 이렇다 말이 없었다.

    작대기에 꿴 개나리 봇짐처럼 일곱 살백이 무하를 앞세운 그 외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를 데리고 며칠 다녀온다는 말에 꽤나 심심한가보다라는 반응들이었다. 목적도 모르는 낯선 곳을 향한 여행이라 무하는 두려움만 꾹꾹 삼키며 따라 나섰다. 더욱이 꾸어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붙임성이 없는 아버지는 내내 말이 없었다. 드문드문 사다안기는 엿이며 사탕, 찐빵 등을 우물거리는 것이 낙이었다. 해질 무렵이 되어서 도착한 그 소재지는 장날의 파장이었다. 소장수들이 여러 마리의 소를 일렬로 대열을 지어 슬슬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하의 아버지는 시장 어귀에서 잠시 두리번거리며 주춤거리더니 페인트가 뱀허물처럼 듬성듬성 벗겨진 봉성옥이란 간판 앞에 섰다. 일찍 전을 거둔 장꾼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바깥까지 들렸다. 그날 무하에게는 몇 가지 기억이 새겨졌다. 아버지에게서 일어난 몇 되지않는 딱한 모습이어서 작은 점으로나마 기억되었는지 모른다. 여타의 숱한 것들은 의도적으로 지워버리기로 작정했던 터이다. 그 몇 가지 기억 중에 비교적 선명한 것은, 사용 중인 화장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처럼 아버지가 봉성옥 앞에서 우물쭈물 했다는 것, 무하의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안에 있는 누구를 불러오라고 했다는 것, 서부 영화의 주점처럼 왁자지껄한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안에 있는 아무 여인에게 누구의 이름을 대자 치마에 끈을 허리에 동여맨 그가 마침 당사자였다는 것, 그녀는 화다닥 밖으로 나와 몹시 심한 말로 아버지에게 삿대질을 해댔다는 것, 무하를 힐끔 보더니 한 번 껴안고 뭐라고 훌쩍거릴려고 하는데 술냄새가 몹시 풍겼다는 것, 이어서 따라나온 텁석부리 사내의 손에 끌려 들어가 버렸다는 것이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의 전부였다. 평소에 술통을 나르는 배달꾼들이 연신 굽신거리는 걸로 봐서 아버지는 꽤 크게 보였는데 그날 아버지의 모습은 무하에게 너무 왜소했다. 용건이 무엇인지 몰라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한 것이다. 그리고는 면사무소 옆에 있는 작은 방에서 잠을 자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갈골 어귀까지 걸어왔다. 자갈길이 십리라 수월찮은 거리였지만 첫버스가 다닐려면 늦은 아침을 먹고서야 탈 수 있었기에 걸어서 당도한 갈골 입구에서 아버지는 무하에게 몇 마디 별 확신이 없는 훈시를 했다. 이골 안이 전부 우리 성밭이네 문중 땅이다더라, 십리쯤 들어가면 몇 대조 할배들의 산소도 있다더라, 나중에 커서 한 번쯤 들러보거라, 나는 문중 일과 거리가 멀다, 자손이 잘되야 조상도 있는 것이지 문중은 무슨 얼어죽을 문중이냐, 손이 귀한 것도 집안 내력이라면 조상들이 무심한게지, 거름 무더기에 개똥참외 하나 달랑 열리듯 몇 대째 내리 외아들 뿐이니 따위의 훈계를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던 것같다. 그 훈계가 무하에게 양질의 자양으로 담겨지기는커녕 아버지를 더욱 작아보이게 했다. 아버지처럼 살지는 않아야겠다는 설계의 기초가 서서히 윤곽이 잡힌 것도 그 즈음이었다. 무하의 아버지는 인색의 차원을 넘어 옹색을 운명처럼 지고 다닌 위인이었다. 나눔과 베품에 대해서는 아예 코드가 입력되어 있지 않았다. 십여명이 넘는 술배달꾼들은 이유도 모른 채 거의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갔다. 배달꾼들의 일상이란 주막에 배달가면 더위를 식히라고 주모가 한사발 퍼주고 배달 한 번 나갔다가 오면 작은 산봉우리만한 술단지에서 한 바가지 덥석 퍼마시는 것의 반복이었다. 눈은 늘상 충혈되어 있고 연륜에 따라 코끝의 홍조는 농도를 더해갔다. 자전거의 짐칸에 네 말, 양쪽 뒷바퀴 옆으로 두 말씩 해서 여덟 말의 술통을 매달고 인력거꾼처럼 사타구니가 닳도록 자갈길, 골목길을 잘도 다녔다. 그렇게 7-8년씩 부지런을 떨다가 어느 날 방구석에 누워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갔다. 가족들마저 그놈의 술병 때문이라고 망자를 욕해댔다. 양조장 사장은 시효가 끝난 나사를 갈아끼우듯 새사람을 썼다. 형편없는 급여였지만 고정급을 받을 수 있는 술배달꾼 지망생은 넘치고 넘쳤다. 퇴직금이니 위로금이니 조문이니 하는 용어는 만들어지지 않은 시절이었는지, 사용할 줄을 몰랐는지 무하는 아버지로부터 들은 바 없다. 입에 풀칠하게 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망극해하는 위인이었다.

    적대자와의 동일시에 대한 거역을 화두로 삼겠다는 의지가 무하의 실핏줄에 조금씩 침투한 것도 그런 일이 반복되던 시점이었다. 마음 속으로 분노와 적대감을 갖고 있는 사람과 자신도 모르게 닮아가는 무서운 현상으로부터 도피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힌 것은 찬술이의 등장과도 무관하지 않다.

    아버지의 삶이 세상에 보상해야 할 것이 적잖을 것이라는 화두가 그의 아련한 지표로 산정의 깃발처럼 꽂혀 그곳을 향한 항해로 공부의 방향을 잡았다. 근대경제사연구라고 경제구조의 일단을 건드린 그의 학위 논문은 옹졸한 촌부(村富)에 불과했지만 그의 아버지에 대한 저항이 발심의 계기가 되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일련의 그의 이론은 진보적 성향의 집단과 운동가연하는 부류들의 심심찮은 갈채가 있어 보람의 일단으로 삼았다. 그러나 선두에 서서 갈채를 유도하던 박수꾼들은 또다른 명분을 축적하여 재빨리 변신을 도모하여 사무실의 간판을 바꿔달곤 했다. 작업복과 연회복을 별도로 마련하여 적절히 갈아입는 능력도 있었다. 이데올로기나 신념도 하나의 상품에 불과하다는 자각과 자신의 이론이란게 또다른 아편이라는 자괴감이 거의 동시에 다가왔다. 논리란 태생적으로 불순물을 함유하기 마련인데 이쪽의 논리나 저쪽의 논리나 순수성에 있어서 상당량의 불순물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문제점의 지적에 대한 항변의 적극성보다는 고백의 진지함에 차별성이 있을 뿐이다. 특히 순일한 언어에 대한 오도와 능멸은 그를 더욱 못견디게 했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란 의미의 동지란 말이 남발되고 분해되어 버리기도 했다. 그 뜻이란 준열하고 순결함이 오롯한 정신일진데 이익이란 냄새가 풍기기는 어디에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익을 위해 잡은 손이라면 이쪽도 동지요 저쪽도 동지였던 것이다.

    이론이란 어차피 행동이 아니다. 행위에 대한 정리와 예측이 그 사명일 것이다. 고고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면서 그의 공부는 한치 앞을 손가락으로 가르키지 못했다. 억울함과 착취와 부당성에 대한 외침만 강했다. 그것의 뒷면에는 자신의 같잖은 유족함에 대한 고해성사였는지 모른다. 노동과 자본은 대등한 것이며 자본의 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의 위대성을 외치는 기수였다. 소비와 향락마저 대등하게 누려야 한다고 외쳤다. 노동의 가치와 필요성은 자본이 소멸되어도 살아남을 절대가치라고 외쳤다. 자본의 환상을 지적하지 못하고 노동의 소멸은 이론의 표적에도 없었다. 이론가가 선지자는 아닐지라도 사태의 추이를 조감하는 안목이 있어야 할 것이다. 자유시장 경제에 대한 복종을 최고의 미덕인양 강요했다. 노동이 소멸되고 대량의 잉여존재가 쓰레기 더미처럼 적체된다고 예고하지 못했다. 움직이는 힘에 대한 실체 파악보다는 당장의 구호와 현수막의 제작에 골몰했다. 착취당할 기회조차 상실한 노예시장의 출현에 대해서는 둔감했다. 일시적인 부의 편재와 고용의 재창출을 부르짖는 사이에 스스로의 아랫도리가 허물어지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이용당할 기회마저 박탈당한 것을 두려워하지 못하고 절대 평등만을 위한 투사가 되라고 부추겼다.

    그의 학문의 깊이에 바닥이 보이고 예고를 감춘 바람이 진양조로 춤사위를 시작하려는 무렵 무하는 그 바닥을 떠났다. 그와 유사한 무리들이 재빠른 변신으로 가사를 바꾸어 노래를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갈골에서 만난 최후의 척탄병들이 벌이는 진행형의 전쟁을 통해 그는 조금씩 자신의 때를 벗는다고 위로했다. 그를 마을 주민으로 접수해준 그들의 애정이 지상에 남은 마지막 예의같아 가슴이 뭉클했다. 물론 그들이 처음부터 돌아온 탕아를 반기는 아비처럼 쌍수를 들어 맞은 것은 아니었다. 남루하기 짝이없는 생활이었지만 그곳은 그들의 삶터이자 활화산으로 진행 중인 전장이었고 우주였다. 낯선 틈입자에게 경계와 거부의 손바닥을 보이는데 적극적이었던 것은 반장 박씨였다. 씨알의 굵기에 따라 뽑혀 나간 것인지 아니면 뿌리 내린 곳이 푸석푸석한 땅이었는지 80여호가 성성한 마을 이루며 살았다는 깊은 골짜기에는 그들 두 가구만이 폐가를 지키는 늙은 구렁이들처럼 또아리를 틀어 서로를 옥죄며 살고 있었다. 마을에 상서로운 일이나 변고의 조짐이 있으면 멀리는 들리는 범종소리같은 산울음이 우렁우렁 들린다는 울음산의 울음이 멎어버린 지도 오래였다.

    "굳이 이곳에 살고 싶다면 저아래 금씨네 재궁이 그래도 문짝이나 해달믄 비바람은 피할 수 있을 끼시더. 이골짝에 누가 댕기는지 문짝이고 제기고 뭐고 싸그리 줏어갔두만요. 이웃이래야 말만 이웃이제 한참이나 떨어진 빈집을 돌볼 수가 없어서. 추석 때 성묘는 한 번씩 댕겨가는 갑습디더. 종손이란 양반이 일꾼 하나 달랑 오토바이에 싣고 와서 벌초하고 제사도 지내는 모양이디더. 그 양반도 몰골이 우리나 진배없는 걸로봐서 살기가 딱한가 보디더. 내한테 전화번호는 있으이까 연락해보고 거길 거처로 해보소. 다른 빈집들이야 그기 어디 집이라 할 수 있겠능교. 사변 전엔 그래도 그 재궁이 이 골에선 대궐같앴는데 후손이 안돌보니 인제사 비맞은 초상집 개꼴이 되어 버렸니더."

    최씨는 이웃의 도리를 못한 것이 죄스럽다는 듯이 연신 목 뒷덜미를 감싸며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골 패인 늙은 얼굴의 물무늬같은 어린 수줍음은 어딘가 서러워 보였다. 반장 박씨의 반응은 대조적이었다. 움막이나 다름없는 오막살이에 묵은 발톱처럼 삐져나온 툇마루에 다리를 꼬고 앉아 마당에서 쭈빗거리는 무하에게 앉으라는 말도 없이 아래 위를 훑어보며 바싹 타들어가는 꽁초를 연신 빨았다.

    "여기 사람 될 어른이 아닌 것 같은데. 우째 금씨네 종손캉 촌수가 닿는교? 똑똑한 인간들 다 떠나고 구신같은 늙은이들만 산다고 아무나 들어와서 퍼질르고 누워도 되는건 아이제. 근데 뭐하는 양반인교? 보아하는 똥장구니 져본 양반은 아인데. 우예 여기에 온천물이라도 펑펑 쏟아진다는 낌새라도 있어서 그러능교? 세상 천지가 투긴가 뭔가 들쌀을 해도 여긴 땅보러 오는 가랑개미 한 마리 없어. 그저 하나 심어 하나 파먹는 땅에 괜히 헛바람을 넣을라그덩 아예 가소. 아래 영감탱이한테 한테 무신 말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세상 이치란 뻔한 거 아이겠소. 들온 돌이 괸돌 빼고, 헛바람 넣어서 헛배 부르게 한다꼬 시장기가 면해 지는감."

    전당포 주인같은 눈매가 몹시 거북스러웠지만 무하는 인내심을 가지고 설득을 했다. 설득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노인에게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이해될 것 같지도 않은 고도의 관념적인 언어 몇 개와 아래 사는 최씨를 은근히 비방하는 몇 마디였다. 알 수 없는 회귀본능에 이끌렸다느니 소박한 공동체적 삶을 실현해 보고 싶다느니 아랫집의 따님은 아무래도 정상이 아닌 것 같다는 것 따위가 그것이었다.



    산골의 가을은 참으로 짧았다. 울음산 마루에서부터 물든 단풍이 큰물이 넘치듯 금방 산아래까지 밀려 내려오더니 겨울이 성큼걸음으로 뚜벅뚜벅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무하는 염소막에 오르내리는 일과 밤나무와 떡깔나무 낙옆을 긁어모아 건초랍시고 비축하는 일, 등걸을 지고와서 장작을 패는 일에 골몰했다. 별다른 도움을 청하지는 않았지만 갈쿠리로 낙엽을 긁어모아 마대에 넣어 발로 밟아 압축을 시켜 처마밑에 가지런히 장작과 함께 쌓는 일은 찬술이 맡았다.

    "염소가 곧 내려 올 것 같다. 낯선 염소똥이 군데군데 염소막 속에 수북하다."

    염소막에서 내려온 무하가 상기된 표정이 역력했다.

    "어디서 내려온다는 거냐? 하늘에서?"

    찬술은 시덥잖게 받아쳤다.

    "자유에서 자유로. 이제 멀잖아 눈이 내리면 그들에겐 자연의 먹이가 없다. 추운 겨울엔 나무 그늘이 오히려 고통이지.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찬술은 무하가 말하는 염소타령에 대한 저간의 경위를 소상하게 들어보기로 했다. 상상을 현실인양 맹신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말대로 도대체 무슨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을 숨기는 일 즉 외부로부터 단절이 견고해졌다고 여겨질 때쯤 바로 금년 초봄에 무하는 염소를 샀다. 반장 박씨 영감을 앞세워 여러 곳을 누벼서 50여마리를 트럭에 싣고 갈골로 들어왔다. 그리고 화훼단지의 비닐하우스같이 만든 우리에 집어 넣었다. 사흘간 사료를 먹이며 공간에 대해 인식하게 했다. 그리고 출구를 활짝 열었다. 염소떼는 터지는 화산을 피해 달아나는 것처럼 사정없이 사방팔방으로 뛰쳐나갔다. 그것이 무하가 염소를 키우는 방식이었다.

    "염소가 연어의 사촌쯤 되냐?"

    정확성에 길들여진 찬술은 맹랑한 만화를 보는 것같아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마라. 30%만 돌아오면 성공이고 절반이 돌아오면 대성공이다. 더덕, 송이, 산삼을 마음껏 뜯어먹은 걸출한 염소 한 마리 잡아주마. 우리 속에 갇혀서 항생제 덩어리를 먹고 자란 눈깔이 노란 염소와는 비교가 안될거다."

    "숲 속의 새가 모두 네 새구나. 하여튼 믿어보지. 지금 그걸 믿는 것이 가장 보람된 일일테니까. 때늦게 흙장난에 골몰한다고 누가 비웃을까 겁난다."

    "장난이 아니지. 이건 나의 상품이자 생계의 방편이다. 평생 혹시나 하는 기대로 나란 존재에게 끝없이 투자만 하다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지."

    "아버지를 이해한다는 거냐?"

    "이해의 차원이 아니라 보답의 차원이야. 손아귀가 저리도록 거머쥐기만 하다가 죽은 영감을 이해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아. 이젠 낡은 고가와 양조장터밖에 없으니 더 이상 털어먹을 것도 없다. 너에게 나눠 줄 그 무엇도 변변찮다. 비록 내입에 사탕 하나 집어넣지 않았다해도 나는 그저 끝없이 소비만 했으니까."

    "왜 나에게 나눠 줄 그 무엇을 걱정하냐?"

    "노랭이 영감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언젠가 너를 찾거든 내 맘이 허용하는 만큼 밭뙈기를 떼어 주라고 했다."

    "어른도 참! 여남은 살까지 거둬준 것만도 눈물겨운 노릇인데."

    "그게 아냐."

    "아니면?"

    "참회의 면죄부를 사고 싶었던 게지. 노랭이 영감, 죽음 앞에서는 두려웠을거야."

    "암호풀이 그만하고 무슨 사건이야?"

    "여기까지와서 사건타령이냐? 그래 사건, 사건이지. 사건번호 7788 친자확인 고해성사건쯤 되겠구나. 옹색한 늙은이 덕분에 판결문까지 읽어야 하다니 고약한 팔자다. 자손 귀한 집에서 진작 떳떳하게 밝혀도 흠될 일이 아니었건만 돈이 아까웠던게지 돈이. 하기야 술통 달고가다가 도랑에 쳐박혀 갈비뼈가 부러져도 다친 배달꾼만 혼쭐이 나고 모가지가 잘렸으니까."

    찬술의 뇌리에서 몇 가지 정황과 심증이 섬광처럼 퍽퍽 터졌다. 목의 깊숙한 부분에서 무언가 울컥 넘어오다가 목구멍을 콱 막는 것 같았다.

    "진작 내가 너를 찾아야 하는데 네가 나를 찾았으니 미안하다. 간간이 보도를 통해서 힐끗 본 네가 벌이는 사냥이 맘에 들지 않기도 했고 너와 길이 달라 코끝만 보기에 바빴다."

    무하는 찬술 앞에 놓인 담배갑에서 담배 한 개피를 꺼내 서투른 솜씨로 담배를 물었다. 쓴물을 뱉듯이 연기를 뱉으며 천정을 응시했다.

    "딱한 영감이야, 이렇게 어려운 정답풀이를 나한테 낭독하게 하다니."

    "괜찮아 편하게 말해. 이 산중에서 누구 눈치를 보겠냐."

    "감은 잡았구나. 내 비록 대리인이긴 하지만 결격사유는 없겠지. 마을에서 알려진 것처럼 찬술이 너는 소달구지에 실려있던 쌀가마니 위에서 주워온 아이가 아니다. 당당한 아버지의 혈육이지. 옹졸한 영감이 그걸 떳떳하게 밝히지 못했을 뿐이다. 치사한 일이지. 한 살림 떼서 따로 살림을 차려도 될 여유가 있었지만 옹색하게 굴다가 던지는 배추포기받듯이 너를 안고 집으로 온거다. 네가 치루어야했을 객지에서의 참담한 생활을 생각하면 영감이 지은 업이 크고도 크다. 멀쩡한 형제를 물 위에 뜬 기름덩이처럼 이상한 관계로 만들어버리고. 네가 내보다 다섯 달 늦게 태어났다드라. 그 말을 안하고 갔더라면 영감의 업이 더 커질 뻔 했지."

    시린 밤공기를 뚫고 쏟아져 내리는 무수한 별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그들은 그날 밤 크게 취했다. 1리터들이 플라스틱 소주병을 두어 개는 비운 것 같다. 부등켜 안고 짐승처럼 크륵크륵 울기도 하고 팽팽한 풍선이 연거푸 터지듯 헛웃음을 쿡쿡 웃기도 했다. 태풍에 바닷물로 쓸려들어간 담수어처럼 그들은 요동을 치면서 서로를 부비며 세차게 꼬리를 저었다. 멀리서 들리는 설해목 넘어지는 소리처럼 저린 오열이 들리기도 하고 오래 묵은 저수지의 물꼬가 터진 듯 끈적한 물살 소리도 났다. 사내 둘이 뒤엉켜 울음과 웃음이 뒤섞여 꺼이꺼이 내지르는 포효가 울음산 전체를 들썩거리게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무하에게 지난 세월에 대한 억울함이나 본전 생각이 들지 않은 것처럼 찬술 역시 마찬가지였다. 겨울을 재촉하는 골바람 소리가 팽팽한 철사줄을 튕기듯 가끔 위이잉 거리며 방문 앞을 재빨리 지나가곤 했다. 늙은 곰이 새끼를 낳는 신음같은 울음에 외딴 집의 삭은 기둥들이 들석거렸다.



    몇 발의 예광탄처럼 싸락눈이 거뭇거뭇한 대지를 슬쩍 덮었다.

    "염소가 몇 마리 내려왔네. 건초를 좀 갖다줘야겠어."

    러시아 병사처럼 벙거지를 눌러쓰고 염소막에서 내려온 무하가 희색을 띄며 대견한 말투로 외쳤다.

    "정말? 몇 마리나 내려왔는데?"

    찬술은 믿기지 않은 기적을 본 것처럼 덩달아 흥분했다.

    "예닐곱 마리는 되는 것같은데, 녀석들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덩치가 왠만한 송아지 만해졌네."

    "설마 염소가 송아지만하기야 할라고?"

    "허풍을 좀 섞었지. 하여튼 걱실걱실한 놈들이 움막 속에 웅크리고 있드만. 본격적으로 눈이 내리면 결국 모두 내려올거다. 겨우내 먹일 건초가 모자라지나 않을 지 모르겠다."

    무하의 손놀림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최씨 영감, 반장 박씨 영감에게도 수시로 올라가 품을 팔아 최씨의 경운기에 건초를 잔뜩 싣고 내려오곤 했다. 마대에 꾹꾹 눌러 담아서 지게에 싣고 부지런히 염소막까지 옮겼다. 마대를 어깨에 지고 무하를 따라 염소막에 올라가 본 찬술은 무하의 말이 빈말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을 경계하느라 우르르 몰려들지는 않지만 수백 미터 거리를 두고 초병처럼 우리 쪽을 바라보는 염소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여긴 눈이 온다는 것이 어떤 건가를 확실히 보여준다. 2-3미터는 족히 내린다. 콩알 하나 없는 빈산에서 녀석들이 겨울을 어떻게 견디겠나. 자연도태되지 않은 놈들은 모두 여기로 모일거다."

    무하가 벌이는 짓거리가 어울리지 않은 유희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워낙 그의 확신이 단호하고 얼굴에 도는 핏기가 파릇파릇해서 찬술은 궁색한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뿌옇게 내뱉는 입김마저 뜨거웠다. 과연 그랬다. 어스름 무렵 하늘이 슬슬 허옇게 변하더니만 사나운 기색도 보이지 않은 채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리 사흘 동안 고른 곡조로 부르는 노래처럼 쉬지않고 내렸다. 집이란 눈만 빠끔 내어놓은 아이처럼 보잘 것 없는 형체가 되어 버렸다. 숨쉬고 살아있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이 위대하게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무하, 네가 추구하는 절대 평등의 세상이 왔구나."

    "네가 잇빨 아리게 싸웠던, 엉뚱한 깃발로 혹세무민한다는 인간들을 골라낼 필요도 없는 세상이지, 찬술아."

    여름 내내 자양을 체내에 잔뜩 축적한 곰처럼 잠을 자거나 깊숙한 구멍 속에서 끊임없이 바스락거리며 지내는 두더지가 되는 길밖에 없었다. 서로의 등을 대고 잠만 자기에는 그들의 정신이 아직 정적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생활을 최대한 간소화시키고 만년설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오랜 해후를 건조식품인양 조금씩 뜯으며 그들은 그 겨울을 보냈다. 갇히는 것이 이런 것일까. 이러다가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이 집이 폭삭 내려앉으면 우리는 그냥 이 속에서 영원히 잊혀지겠지. 바깥에 남겨둔 허약한 이름 석자야 금새 먼지처럼 날아가 버리겠지. 아내와 딸들도 이런 생각을 하며 소멸되어 갔을까. 히말라야의 만년설 빙벽에서 추락한 숱한 산악인들은 천년의 꿈을 꾸고 있을까, 천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을까. 메케한 먼지와 악취가 풍기는 빗물 속을 그렇게 헤맸건만 아내와 딸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단풍나무가 그려진 아내의 스카프와 분홍색 레이스에 진주알처럼 생긴 구슬이 달린 딸애의 머리띠조차 왜 발견되지 않았을까. 새로운 세대의 시조가 되고자 무리하게 강행했던 억척스러움을 시기한 보이지않는 손이라도 있단 말인가. 폭설 속에 갇힌 찬술의 어깨를 산하를 뒤덮은 눈더미가 암석덩이처럼 지긋이 눌렀다.

    "영감들도 우리처럼 이렇게 웅크리고 있겠지?"

    "그렇지는 않을꺼다. 그 어른들은 긴 겨울을 나는 방법도 알고 있다. 오는 이 없어도 길을 치우고 추수한 약초를 다듬고 봄에 심을 씨앗을 고르고 죽을 때까지 다 때지 못할 장작이라도 패고 있을거다.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무서운 노동력이지."

    "그런데 그 영감들 사이가 왜 그렇게 껄끄럽냐? 이 산골에 누가 있다고 그렇게 아웅다웅하냐? 서로를 아껴주어도 남은 시간이 모자랄 것인데."

    "나도 처음에는 그것이 참 궁금했다. 이 척박한 마을에서 태어나서 이곳에서 늙고 죽어갈 두 늙은이가 앙숙처럼 지내는 것을 보고 분노하기까지 했다. 아는 것이라고는 등짝이 멍에처럼 휘도록 일하는 것 뿐인데 무슨 살이 끼어는가라고 생각했지. 서로 내세우는 명분은 전쟁 때의 역할이래. 무지랭이 집안의 장정으로 전쟁에 끌려가서 그저 시키는대로 했겠지. 양푼이에 담긴 삶은 감자를 퍼먹는 것보다 군대에서 주는 보리밥과 씨레기국이 더 났드라고 하더군. 이리 밀고 저리 쫓기고 하면서 서로 편이 갈리기도 했었는가봐. 아군과 적군의 의미나 색깔이 이들에게 분명하게 각인되었을 리 없었겠지. 수시로 마을을 들쑤시는 토벌대나 밤중에 걸귀처럼 산에서 내려와서 씨감자라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무장대가 그들에겐 똑같은 분량으로 두렵고 똑같은 분량으로 낯익은 것같은 얼굴들이었을 뿐이었다. 선과 악의 대립이란 개념은 그들, 그 마을 사람들에게 통하지 않는 암호였겠지. 입대라는 절차를 거쳐 새로운 가치의 틀이 형성되자 두 사람의 틈이 벌어진 것 같애. 지금도 진행형의 전투를 치르는 저변에는 서로 상대에 대한 불신이 자리잡고 있더군. 서로 적에게 동조했다는 게야. 적이 누구인지 자신들의 신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규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드먼."

    "반장 박씨가 좀 약살빨라 보이던데 그 영감에게 문제가 있는게 아닐까? 공비의 프락치를 해도 너끈히 할 수 있는 위인같던데? 이 지역의 길잡이 노릇같은 것 정도?"

    "그렇지도 아닐 지 몰라. 최씨 영감도 의뭉스런 구석이 있어.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규명하고 판단하는데는 관심이 없다. 너라면 한 시간만 대질신문하면 흑백이 가려지겠지. 그래 흑백이 가려진 다음은?"

    "나는 현역에서 은퇴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시게, 금선생!"

    "괜히 해본 소리야, 찬술거사. 그 영감들은 한날 한시에 같이 죽을거야. 누가 먼저 죽든 한사람이 죽으면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남은 한사람도 그 자리에서 잠옷이 흘러내리듯 숨이 끊어질거야. 지극한 인연들이지."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들은 서로에게 비춰지는 볕살을 차단시키며 서 있는 얼음조각들이지. 이 마을을 마을의 이름으로 남아있게 하는 최후의 용사들이야. 희로애락애오욕이 없다면 사람 사는 곳이 아니겠지. 천국이나 극락에는 그런게 없다지. 어쩌면 나라는 물건은 여기서도 그렇게 썩 필요한 존재는 아니야. 서로를 긴장하게 하는 에너지가 바로 삶의 활력인데 내겐 그런게 없어. 그런데 영감들은 끊임없이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어. 허술한 위인인 나를 사이에 두고 과분한 부지런을 떨고 계시지."

    "넌 어부지리를 챙기면 되겠네, 흐흐흐!"

    "벼락맞을 소리!"

    "그냥 해본 소리야. 과민반응하시지 말고."

    "사랑도 서로에게 긴장의 에너지를 제공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일방적인 베품, 무조건적인 시혜, 상류에서 하류로 흘려보내는 물 같은 거, 수직으로 내려오는 폭포같은 거, 구석구석 비추고자하는 햇빛 혹은 빗줄기 따위, 그건 사랑이 아니고 고단수의 자기만족을 위한 술수이지. 인간의 능력을 망각한 오만이지. 가증스런 오만."

    "네 자신의 얘기를 하는거냐?"

    "역시 눈치가 빠르시네. 그래 그렇지, 나의 고해성사지."

    "눈치밥 먹은게 몇 십년인데. 무하 거사!"

    "예리하시다는 말일세. 찬술 선생!"

    "그게 울음산 귀퉁이 갈골에서 건진 깨달음인가? 나는 무엇을 건져야 밥값을 하지?"

    "조바심 말게. 폭설에 갇혀 아궁이에 불이나 때며 수직으로 연기를 피워 올리는 것도 장한 일이지. 찬술이 너 이름을 양조장 경비 보던 외팔이 영감이 지어준거 모르지? 참으로 무책임한 야박한 우리들의 아비의 계략이었어."

    "내 이름자에도 계략이 있다고?"

    "백설이 만건곤한 마당에 못할 말이 무어 있겠냐. 당신의 씨앗을 외면하기 위한 술수였겠지. 서너 살 무렵에 외팔이 영감에게 넌지시 부탁해서 박찬술이란 이름을 지었댄다. 수족을 못쓰게 될 지경에 이르러서 아버지가 내게 털어놓더군. 박씨라는 성은 외팔이 영감의 성씨이긴 하지만 박바가지라는 의미로 붙였댄다. 목욕탕만한 양조장 술단지에 둥둥 떠 다니는 그 바가지 말이다. 찬술이란 이름은, 참 가관이지. 그때가 여름이어서 시원한 막걸리가 요긴하던 계절이었다더군. 그래서 두레박을 늘여뜨려 우물 속에 담궈둔 시원한 막걸리, 그거나 실컷 먹으라고 찬술이라고 했다더라. 양조장일이나 부려먹을 심산이었겠지. 열두살에 줄행랑을 칠 위인인 줄 모르고. 어때 개명이라도 해야겠지?"

    찬술은 웃음이 나왔다. 행여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를 박씨 가문에 대한 엉뚱한 미련이 깨끗이 소멸되는 허탈감에 맥빠진 웃음이 나왔다. 어미의 성씨 정도는 되리라는 허약한 기대마저 사찰의 해우소에 떨어진 똥덩어리 마냥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나의 어미에 대한 언급은 없었냐?"

    "없었다."

    집히는 구석이 없지 않았지만 무하는 반사적으로 그리고 단호하게 없다라고 말해버렸다. 그건 무하에게 아직 남아있는 포용과 배려라는 이름의 오만의 찌꺼기였다.

    "겨우내 눈은 녹지 않겠지?"

    "물론 굳어진 눈더미 위에 새눈이 내려 몇 켜를 이룬다. 아무 생각없이 설국의 풍경을 감상하기에 벅찬 시간이야."

    " 최씨 영감의 딸은? 절룩거리는 박씨 아들 녀석은 무얼하고 지낼까?"

    "궁금하면 가봐."

    "내가 탐험가냐? 이 눈더미를 파헤치고 가게."

    "걱정마라. 두 영감들이 길을 낸다. 며칠이 걸리든, 쉬지 않고 눈이 내려도 사람이 다닐만큼은 눈을 친다. 저 아래 포장도로 입구까지 10리길을 치운다. 집념이 개제되었다면 무서운 집념이지."

    "이 눈더미 속을 누가 다니는데?"

    "아무도 안다닌다. 그냥 길이니까. 글쎄, 객지로 나간 자식들이 올까 그러는지 모르지만 그길을 이용하는 이를 본 적이 없다. 봄이 될 때까지 웅크리고 있는 이 공간이 우주일 뿐이다."

    과연 그랬다. 넙적한 가래로 몸하나 지나다닐 폭으로 길이 만들어 지고 있었다. 지표를 긁으며 지나간 두더지 자국처럼 꼬불꼬불한 길의 흔적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사흘이 멀다하고 내리는 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산아래 쪽으로 까만 점선이 부지런히 만들어지고 있었다. 밤새 폭설이 내리면 흡착지처럼 그 까만 점선을 삼켜버렸지만 다시 산허리 부근에서부터 금이 그어져 내려왔다. 두 노인이 광부처럼 눈길을 파고 있는 것이다. 봄이 되어 대지가 거대한 방문자를 모두 빨아들일 때까지 그 작업은 느리게 그러나 쉼없이 이어졌다. 눈을 치우는 일 그리고 척박한 비탈에 씨를 뿌리고 거둬들이는 작업에 관한한 그들은 서로의 품앗이를 간절히 존중하는 도반이었다. 누가 거기에 그들이 있노라고 확인시키는 신호가 없어도 그들은 그곳에 있는 명백한 목숨들이었다. 멀리 있는 것들을 경멸하는데 힘을 쏟지도 않고 누군가 다가와 잊혀지고 버려진 듯한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분개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 살뜰한 그리움으로 달려올 그 누구도 없지만 하얀 눈가루를 풍성하게 덮어쓰며 가느라란 길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도록 부지런히 눈을 쳤다. 봄은 그렇게 말없는 부지런의 정기를 따라 소리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산골의 봄은 기지개를 켜는데도 매우 느렸다. 봄이 왔노라고 호들갑을 떠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그라져가는 얼음장 밑으로 물소리가 조금씩 커지는 것이 유일한 신호였다.

    "최씨 영감이 두문불출하며 끙끙거리고 있더군."

    마실을 다녀온 무하가 밝지 않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아직 시리기는 하지만 봄볕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왜? 눈더미 속에 묻혔던 휴전 협정의 시효가 끝나서?"

    "그런건 아닌거 같고, 딸년이 이상하대나."

    "본래 정상이 아니었잖아. 겨울 한철 나고 더 심해졌나? 아니면 그 지경으로 만든 곳으로 다시 가겠다는건가?"

    "하여튼 같이 가보자. 이 골에 있는 사람들은 관련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니까."

    겨우내 면도나 머리 손질을 안하고 지냈던 터이라 찬술의 모습도 어느덧 텁수룩한 나뭇꾼같았다. 껍질의 변화가 내부의 장치도 무디게 하는지 바깥 세상의 일들이 수백 년 지난 전설처럼 멀고 아슴프레하게 느껴졌다.

    최씨의 딸 문자는 여전히 해쓱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눈에 뛸 정도로 배가 불러 있었다. 최씨 영감의 늘 수줍어하는 듯하던 표정은 간곳 없고 하늘이 무너진 듯 낭패감이 흥건한 컴컴한 방안에서 짐승처럼 끙끙 앓고 있었다. 별다른 말을 찾지 못하기는 무하나 찬술의 능력이 똑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가벼운 목례만 남기고 산길을 거슬러 반장 영감네 집으로 갔다.

    반장 박씨네 안노인은 달은 가마솥을 디디고 선 것처럼 호들갑이 어지러웠다.

    "아이고! 금의원님요. 인자 우리 갈골은 망했꾸마. 세상에 우째 이런 일이 다 있능교. 망신을 당할려믄 뜨물에도 아이 밴다고 했지만 우째 이런 일이 다 있능교. 농담하다가 할망구 씹한다는 말은 있어도 미친 딸년을 애비란 기, 우째 이런 일이 다 있능교, 우째! 인자 이 울음산이 벼락을 한 번 칠끼구먼요."

    안노인은 자기 자식이 당한 것 이상으로 분개하며 치를 떨었다. 금새 깔딱 넘어갈 듯이 전신을 떨며 장작으로 땅바닥을 내리쳤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이 한치의 오차도 없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쪼글쪼글한 눈자위가 벌개지도록 눈빛을 이글거렸다.

    "동네가 망할려면 첫정월에 암탉이 운다더니, 도회지에서 무신 짓을 하다가 미친년이 되서 집으로 돌아와서는 애를 배!"

    박씨 영감은 바지에 똥을 싼 것처럼 엉거주춤 서서 곰방대만 뻑뻑 빨며 혀를 찼다. 아들 녀석은 방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찬술은 좀더 지켜보자는 말과 가끔 지나치는 약초 캐러 다니는 인간들이나 땅꾼들의 소행일 수도 있다는 말과 병원에라도 데리고 가봐야 하지 않겠냐는 허약한 말들을 마당에 떨어뜨리고 내려왔다. 심상치 않은 돌풍이 이 골짜기를 한바탕 휘저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그득하게 안고 그들은 내려왔다.

    "여기도 무릉도원은 아니지? 한철 났으니까 이제 슬슬 거동할 때가 되지 않았냐? 어디에서 개업할꺼냐? 전관예우를 없앤다고 난리를 피우더니만 요새는 잠잠하네. 아무래도 놀던 물 근처가 좋겠지."

    "너의 빈정거림이 깨끗이 씻겨질 때까지는 있어야겠다. 어디서 어떻게 시작을 할 것인지는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 어쩌면 전혀 다른 길을 갈 수도 있고. 너는 어떻게 할거냐?"

    "나? 난 이곳 주민인데 더 이상 뭘 추구하겠어. 뿌리가 견고해지고 그것이 교활한 사치가 아니라는 증명을 해야겠지. 욕심을 부추키는 것도 죄다. 무슨 교사죄 이런거 있지? 최씨 영감은 어떻게 하지? 또 딸애는? 난폭한 도시에서 폭격맞고 망가져서 고향에 왔는데 여기도 지옥이긴 마찬가지라는 인식이 박혀서야 되겠냐."

    "크게 걱정 안해도 될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직감이지. 직업적으로 터득한 순간적 판단력이랄까. 아직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남은 습이기도 하겠고."

    "그래서?"

    "위험하기는 하지만 좋은 조짐이 보인다."

    찬술은 갓돋아난 더덕순처럼 여리게 싱글그리며 참으로 오랜만에 풋풋하게 웃고 있었다. 두꺼운 겨울의 장막을 뚫고 사방에서 새싹들이 햇강아지가 낑낑거리듯 존재를 알리는 계절이기도 했다.

    "문자 처녀도 좋아질거다. 고문의 후유증이 무섭기는 하지만 절망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이런 공간에서 유년의 기억과 현실을 접합시키면 고통의 순간이 소멸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안정을 취하며 뱃 속의 아기가 잘 자라도록 주변의 도움이 문제일 뿐이다. 아이의 아버지는 그녀석 후철이다. 내 판단이 어긋나지 않았음이 곧 판명될꺼다."

    "다행이네. 난 자네가 주위를 얼씬 거리다가 빈집 헛간에서 문자를 만난 줄 알았는데, 하하하!"

    헛웃음을 슬쩍 곁들였지만 무하의 가슴은 깊은 천식같은 아픔으로 얼얼했다.

    "사람! 싱겁기는! 문자에게는 나같은 사람을 경계하는 본능적인 감각이 있던 걸. 포마드 냄새보다 더 지독한 습의 때가 문제는 문제다."

    "아직 다 씻겨지지 않았다면 몇 년 더 묵어라."

    "글쎄다. 그래야 할까부다. 바깥 세상은 지금 선거로 난리겠지. 요란한 구호 뒤에 숨긴 음모를 모른 채 불쌍한 민초들은 또한번 희망을 걸겠지."

    "희망이란 아름다운 거 아냐? 그것마저 갖지 못한다면 살아있는 것들의 의미가 너무 삭막하겠지."

    "허나 희망을 기만하는 축들은 용서하기 어렵다. 정치를 희화화하는 것을 원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기득권을 위해서는 어떤 술수나 전략도 그들에겐 아름답게만 보일거다."

    산 아래 쪽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트럭 소리가 들렸다. 비행기 소리는 가끔 들리지만 바퀴달린 것들의 기계음은 이곳에선 낯설다. 시골 소년들처럼 무하와 찬술은 방문을 열고 길이 보이는 곳까지 걸음을 옮겨 구경이 난 것처럼 목을 뺐다. 장롱의 끄트머리가 나풀나풀 보이더니 이삿짐을 싣고 뒤뚱거리며 올라오는 트럭의 모습이 보였다. 몇십년 만에 보는 산골 마을의 이색 풍경이었다. 쓰레기같은 보따리를 어설피 싣고 유목민처럼 마을을 떠나는 풍경은 그간 더러 있었다. 그것도 십여년 전 미류나무 옆집이 떠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비록 깃발은 달지 않았으나 골짜기 속으로 진군해 들어오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직 물이 오르지 않아 거뭇거뭇한 겨울옷을 입고 있는 온산의 수목들이 구경이나 난 것처럼 머리를 쳐들고 와스락거렸다.

    "낙향하는 박씨나 최씨의 아들인가보다. 콘크리트 바닥에 뿌리를 내리기가 쉽지 않았겠지."

    찬술은 산골에 어울리지 않는 장식품처럼 마당 귀퉁이에 폐차처럼 세워둔 자신의 승용차에 올라 시동을 걸어보았다. 몇 번 가래끓는 소리로 갈갈거리다가 아예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되어 버린 모양이다.

    "기다려봐. 트럭이 올라갔으니 짐을 부리고 내려오겠지."

    두어 시간 후에 트럭이 내려왔다. 운전석 옆에 후철이가 타고 있었다. 이 골을 벗어나고 싶다고, 이제 목발을 짚고 걸을만하니 답답해서 여기선 못살겠다고, 형님 내외가 들어왔으니 자기는 나가야겠다고 터진 물꼬처럼 빠르게 주절거렸다. 몸이 불편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트럭 기사를 밀치고 배터리를 연결하는 작업을 하며 울분을 터뜨리듯이 주절거렸다. 간신히 시동을 걸렸다. 트럭은 후철이를 태우고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갈골을 빠져 나갔다. 지레 방어를 하듯이 묻지도 않은 말들을 쏟아내듯이 던지고 가는 그를 바라보며 찬술은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스르르 쥐며 어금니를 지긋이 물었다. 곁에선 무하를 힐끗 바라보니 그는 그저 덤덤한 표정이었다. 입안이 텁텁했다.

    "가야겠다. 이제 할 일이 무엇인가 어렴풋이 윤곽이 잡혔다. 무하야, 일단 타라. 산소에 참배나 하고 올라가게. 나는 영감님 묘소의 위치도 모르잖아."

    "그러자. 자손이 귀하다고 불평만 할 줄 알았지, 정리정돈에는 서투른 영감이었지만 뒤늦은 잔이나 올리자. 안으로 오그라지기만 할 줄 아는 그놈의 욕심 때문이지."

    바깥 세상으로 나갈수록 봄빛이 더욱 완연했다. 큰길까지 나가니 상춘객을 싣고 달리는 대형 관광버스의 행렬이 드문드문 지나갔다. 여학생들을 잔뜩 싣고 수학여행인지 소풍인지 어딘가를 향해 바삐 달려가는 관광버스는 함빡 웃음과 파도에 쓸리는 갯돌같은 재잘거림을 아스팔트에 자르르 뿌리며 지나갔다. 무하는, 봉성옥에 대한 기억은 후일 털어놓을 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고, 찬술은, 응어리와 분노만을 안고 폐가를 지키고 있는 무하 어머니에 대한 위로와 인사를 위해 언제쯤 별도로 날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또다른 화두들에 대해서는 서로 내색하지 않았다. 그것은 소모적인 한바탕 분란을 야기하기에 충분한 것들이기에 지금은 때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도시로 들어가서 찬술은 낯익은 법률의 잣구와 싸우되 바라보는 곳이 다른 변호사의 길을 걷겠다는 것이 그것이었고, 무하는 찬술이 지닌 직감이란 판단이 때로는 크게 어긋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 그것이었다. 문자 처녀의 뱃속에 자라고 있는 아기는 무하가, 살아온 날들에 대한 회한의 절규처럼 그녀를 껴안았던 결과라는 것을. 자신의 정직함을 견고히 확정짓기 위해 비내리는 지난 여름날 밤 무하의 거처를 찾아온 문자의 목덜미에 끈끈한 눈물을 적시며 그녀를 껴안았다는 것을. 홈뻑 젖은 몸으로 산길을 내려온 문자가 빨래처럼 그에게 쓰러져 자신의 몸안에 암세포처럼 붙어있는 온갖 독기와 증오와 공포를 털어 내려는 듯 격렬했었다는 것을.
    이우상

    이우상

    1955년 경북 의성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진선여고 교사 역임

    불교문학 현상공모 장편소설 당선

  • <울음산>을 뽑고나서

    - 도정일, 이문열

    예심을 통해 넘어온 9편 중에서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울음산', '요요의 아파트', '죽음공장', '시간의 방향', '카인의 도시' 5편이었다. 그러나 '카인의 도시'와 '시간의 방향'이 먼저 제외되고 논의는 주로 나머지 세작품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죽음공장'은 문장도 잘 읽히고 끌어들인 관념들도 빛나는 데가 있다. 그러나 미래소설 혹은 가상소설적 요소가 한계가 되어 다시 마지막 숙의에서 빠졌다.

    '울음산', '요요의 아파트'는 어떤 면에서는 극히 대조적인 작품이다. '울음산'은 주제에 접근하는 태도의 진지함과 성실성으로 감동을 주었고 '요요의 아파트'는 현대성과 세련된 감각이 단연 돋보였다. 흠도 비슷했다. 하나는 구투의 장중함이 뻔함으로, 다른 하나는 신세대적인 가벼움이 어떤 공소함으로 심사위원을 불만스럽게 했다. 거의 한시간을 두 작품만 두고 논의를 하다가 끝내는 진지함과 성실한 쪽으로 표를 몰았다.

    신춘문예 당선작은 수많은 문학청년들에게 단순한 참고를 넘어 전범의 구실을 한다. 이미 문학작품을 형식과 내용으로 분리해 보려는 것은 무의미해졌다지만 그래도 내용적인 면과 형식적인 면이 우위를 다툴 때는 내용적인 면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게 심사위원들의 생각이었다. 당선도 낙선도 모두 정진의 계기 되기를 바란다.
  • 이우상

    이우상

    1955년 경북 의성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진선여고 교사 역임

    불교문학 현상공모 장편소설 당선

    거두절미하고 우리 시대의 화두는 정직성의 회복이다. 마르쿠제의 지적대로 1차원적 사유가 이 시대의 논거가 될 수 없다. 같잖은 풍요가 이성을 도구화해버린 현실이 참상인줄 모르고 참으로 낯선 혼주의 시간을 살았었지. 더큰 문제는 그것을 지적하는 화살도 바늘도 타령도 없었다는 회한이 이제 우리에게 부채로 안겨졌다.

    막차타는 즐거움이 어느덧 습관이 되어버렸다. 선착순에는 영 자신이 없어 늘 뒷자리, 조명을 피한 뒷줄에 서길 좋아했다. 그러나 어쩌랴. 얼굴 내밀기보다는 뒷줄에서 쭈빗거리는 걸 즐기는 팔자인데. 피곤과 설레임을 동시에 싣고 떠나는 막차의 풍경, 나는 늘 그속에 실린 남루한 익명이었다. 그것도 이력이 붙어 익명의 자유를 은근히 즐기는 축이었다. 그러나 그 자유 속에는 서둘러 앞서간 이들의 어지러운 발자국을 선연히 볼 수 있는 재량이 있었다. 양심과 불순을 판별하는 눈이 있었다. 문학이 가야할 길이 이런 것은 아닐 것이다. 허나 정직성을 일깨우는 찬물이 된다면, 등대가 아닌 닻고리를 매는 부두의 쇠말뚝이라도 된다면 크게 후회할 게 없다.

    IMF가 1년만 먼저 터졌어도 나는 사표를 던지지 못했을 것이다. 참으로 아찔하고 아슬아슬하다. 십수년 애증이 쌓인 교단에 지금도 그냥 서서 허술한 고뇌를 팔고 있을 것이다. 활기와 정직을 쏟아내지 못하는 또다른 막차의 승객이었을 것이다. 고통스럽게 문학의 이름을 매도하며 월급날만을 기다리는 부끄러움을 반추하고 있을 것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백수는 선민이었는데 이젠 아닌 것같다. 우울한 동지들에게 힘을 내자는 말을 하고 싶다. 뭔들 못하랴. 재래식 화장실에 대한 불편 따위는 하루만 견디면 냄새가 구수해진다. 화장지가 없으면 신문지로, 그마저 없으면 짚단인들 어떠랴.

    본격 문학의 행진에 20세기의 막차를 탔다. 승차를 허락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동아일보사에 감사드린다. 비록 보통권의 승차권이지만 부실한 암표는 아니다. 무던하게 지켜봐주신 홍기삼 선생님, 한용환 선생님, 김윤환 형, 정찬주 형의 편달은 감사하다는 말이 부족하다. 그리고 능글능글하게 백수의 도(道)를 닦고 있는 것을 싱글거리며 돕고 있는 아내, 새나라의 어린이답게 씩씩하게 자라고 있는 딸 하은이, 자식이라는 부끄러운 화관을 쓰다듬어 주시는 부모님, 문학이 한 근에 얼마인지도 모르지만 늘 살갑고 고마운 윤, 일, 동, 덕, 순 등 고향 마을의 벗들에게도 우러나는 감사를 전한다. 1999년의 냄새, 심상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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