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레고로 만든 집

by  윤성희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부엌 창으로 달빛이 어렴풋이 들어온다. 옆집 옥상에 볼품없이 솟아 있는 굴뚝이 달빛에 비춰 부엌 쪽으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나는 그 그림자의 끝을 바라본다. 그림자 끝이 전자밥솥의 그림자와 한데 어우러진다. 전자밥솥에서 보온을 알리는 불빛이 깜빡거리고, 나는 그 불빛 주기에 맞춰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다. 다섯 번 정도 숨쉬는 사이에 냉장고 모터소리가 한번씩 끼여든다. 나는 몸을 오른쪽으로 움직여 한쪽 귀를 냉장고에 바짝 댄다. 냉장고의 흔들림이 심장으로 전해진다.

    안방에서 아버지의 마른 기침소리가 들린다. 냉장고가 조용해지고, 창에 드리운 그림자가 조금 흔들리는 것 같다. 나는 일어나 창 쪽으로 걸어간다. 옆집 옥상에 우뚝 서 있는 굴뚝이 사람처럼 보인다. 그 굴뚝이 우리 집을 넘겨다보는 것 같아 가슴 한끝이 잠시 섬뜩해진다. 무엇에 쓰였을지 모를 나무 조각들과 문짝 떨어져나간 농이 보이고 그 위로 가지만 남은 포도넝쿨이 볼품없이 엉겨 있다.

    또 한번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집안을 울린다. 그 소리를 이기려는 듯, 냉장고가 크게 윙 하고 울린다. 소리의 간격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나는 몸을 돌려 부엌을 둘러본다. 창문은 닫혀 있지만 어디선지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개수통 안에는 며칠째 쌓아놓은 설거지 거리가 가득하다. 맨 위에 있는 접시를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져 모두 깨져버릴 것 같다. 어둠 속에서 나는 그 접시들을 헤아려본다. 계란 프라이를 담은 그릇 때문에 개수통 주변은 기름으로 얼룩졌을 것이고, 김치찌개를 끊였던 냄비는 가장자리가 새까맣게 타 있을 것이다.

    등뒤에서 조심스럽게 문여는 소리가 들린다. 천천히 문고리를 비틀고 숨죽이며 방문을 미는 오빠의 동작이 보이는 듯 하다. 문에서는 쇳소리가 난다. 오빠는 매번 그 소리에 놀란다. 그토록 주의를 기울이는데도 소리가 난다는 사실이 오빠는 혼란스러운 것이다.

    "왜, 화장실 가려고?"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면서 말을 한다. 오빠는 자신 때문에 내가 깼다고 생각하는지 대답대신 머리를 긁적인다. 그리고는 가랑이 사이에 한 손을 끼운 채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화장실 문은 뒤틀려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 틈으로 오줌소리가 새어나온다. 그 소리에 바람이 느껴진다. 나는 몸을 움츠린다. 사방이 뚫린 곳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 든다.

    "추워"

    화장실에서 나온 오빠는 몸을 웅크리며 말한다. 나는 방문을 열어주며 오빠에게 자면 따뜻해질 거라고 대답한다. 방문을 열자 아까 느꼈던 한기를 조금은 녹여줄 수 있을 정도의 온기가 느껴진다. 아버지 깨지 않도록 조심해서 들어가. 오빠는 내 목소리에 귀가 간지러운지 얼굴을 한쪽으로 흔든다. 나는 보일러 온도를 조금 올리고, 부엌에 펼쳐 논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꽁치 조림 냄새가 좁은 부엌에 그득하다. 불을 줄이고 냄비 뚜껑을 조금 열어놓는다. 그 사이 오빠를 깨워서 화장실로 디밀고 재빨리 이불을 갠다. 눈을 크게 뜨고 나의 행동을 보고 있는 아버지에게 눈을 마주치지 않고 목을 꾸벅댄다. 가스레인지에 데운 물을 대야에 담아 방으로 가지고 오자 아버지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다. 아직은 쓸 수 있는 왼쪽 팔 덕분이다. 나는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드린다. 그 사이 부엌으로 달려가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고, 다시 방으로 와서 목과 팔을 꼼꼼히 닦는다. 주먹을 꼭 쥐고 있는 오른손 손바닥은 그대로 놔둔 채.

    "나 카레, 카레 먹고 싶어"

    오빠는 숟가락을 흔들면서 말한다. 나는 오빠의 말을 못 들은 척 하며 콩나물국과 꽁치 한 토막을 아버지 앞으로 디민다. 꽁치를 아버지 밥그릇에 올려놓으며 날이 쌀쌀해졌어요, 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아무 대꾸 없이 소처럼 천천히 밥알을 씹는다. 그 사이 오빠는 콩나물을 꺼내서 밥상 위에 올려놓고는 장난을 친다. 콩나물 줄기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모양을 만들어놓고 오빠는 좋아한다.

    부엌 창문을 열고 옆집 옥상으로 먹다 남은 꽁치 한 토막을 던진다. 고양이들이 그 냄새를 맡고 달려나온다. 지난 달, 어미 고양이는 만삭이 되어 옆집 옥상으로 이사를 왔다. 문짝 떨어져나간 농이 그의 잠자리가 되어주었고, 바닥에 뒹구는 낙엽들이 그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어미 고양이는 그곳에서 털 색깔이 똑같은 다섯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다섯 마리의 새끼들이 옥상 위를 걸어 다니는 것을 본 날, 나는 슈퍼마켓에서 꽁치 통조림을 사왔다.

    개수통에 아침에 먹은 빈 그릇들을 담가둘 틈이 없다. 나는 그릇 두 개와 숟가락 두 개를 물에 대충 헹군 다음 다시 상위에 놓고는, 나머지 그릇들을 싱크대 한쪽에 내려놓는다. 그릇을 싱크대에 내려놓는 순간, 개미들이 우왕좌왕 퍼져나간다. 나는 다시 그릇을 들어 싱크대를 본다. 동전 만한 크기의 얼룩 주위로 개미들이 모여 있다. 나는 손으로 얼룩을 만져본다. 끈끈하다. 개미들을 손가락으로 꾹 누른다.

    콩나물국을 다시 퍼 놓고, 김치도 조금 덜어 상위에 놓는다. 밥은 밥통에 있어. 알았지. 오빠는 응, 대답한다. 손가락에 붙어 있던 개미가 콩나물국으로 떨어진다. 가스레인지의 중간밸브를 잠그고 오빠에게 불장난하지 말 것을 여러번 당부한다. 아침마다 반복하는 내 잔소리에도 오빠는 짜증 한번 내지 않는다. 나는 한없이 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오빠의 표정을 보기 싫어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고양이들이 생선을 먹고 있는지 보기 위해, 발뒤꿈치를 들어 옥상을 내다본다. 나는 입술에 침을 바른 후, 모기장에 입을 바투 대고는 야옹, 야옹 소리를 낸다. 야옹. 고양이들이 가느다랗게 대답을 한다. 오빠는 그 소리에 놀란 듯 나를 쳐다본다. 나는 오빠에게 옆집 옥상을 볼 수 있게 자리를 비켜준다. 오빠는 내가 했던 것처럼 창밖을 향해 소리를 낸다. 내가 냈던 소리보다 더 크게.

    "야옹, 야옹."



    내가 일하고 있는 복사가게는 이 도시 유일한 종합대학의 정문에 위치해 있다. 사장은 자신의 가게가 이 대학만큼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긍지로 삼고 있다. 인쇄소로 시작한 사장은 한쪽에 복사기계를 들여놓고 아들에게 대를 잇게 했으며, 그 아들이 말없이 자신의 가업을 이어준 것이 자신 삶에 있어서 가장 큰 성공이라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아들이 이 가게에 출근하자 사장은 오랫동안 앓아왔던 위장병이 낳았다고 했다.

    나는 오늘 오전까지 해주기로 한 책을 펼쳐든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집이 표지에 보인다. 하늘을 향해 뻗은 지붕이 웅장하다. 옆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가 그 집 지붕위로 그늘을 만든다. 나는 350페이지 책을 복사하면서 350번 그 집을 본다. 처음에는 집 전체를 보다 100페이지, 200페이지 넘어가면서 눈길이 구석으로 향한다. 대문에서 현관까지 향하는 길에 놓인 자갈들과 작은 꽃나무들을 본다. 커다란 나무 밑에 그네를 매달면 좋을 텐데. 현관에 새집을 닮은 우편함을 만들면 어떨까. 나는 그 집을 부수고, 다시 짓기를 반복한다.

    복사기가 작동할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빛에 눈이 시큰거리고 눈물이 맺힌다. 나는 그 빛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빛은 잠시동안 나를 낯선 세계로 이끌어준다. 나는 복사를 하면서도 빛에 눈을 찡그리지 않으려 애쓴다. 매캐한 공기가 감도는 건조한 복사실에서 견딜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빛 덕분이다. 처음 복사 일을 시작했을 때에는 종이사이로 새어 나오는 이 빛을 잠시도 쳐다보지 못했다. 그래서 일일이 복사기의 뚜껑을 닫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일은 더뎌질 수밖에 없었고, 사장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빛에 따스한 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빛이 오른쪽 눈을 지나 왼쪽 눈으로 옮겨질 때 느껴지는 열기가 좋아지기 시작하면서, 복사하는 일이 재미있게 여겨졌다.

    "내년에는 복학해야죠?"

    등을 맞대고 일하는 사장 아들이 내게 묻는다. 두 대의 복사기는 서로 등을 맞대고 일할 수 있게끔 설치되어 있다. 둘이 일할 때에는 서로 등이 부딪쳐 불편하기도 하지만, 혼자 일할 때에는 더없이 좋은 구조이다. 몸만 돌리면 두 대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열 페이지를 복사할 동안 이십 페이지는 넘게 복사를 하는 그의 팔놀림이 왼쪽 어깨에 전해진다. 나는 내 팔이 그의 허리에 달까봐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무슨 과라고 했죠?"

    나는 뒤돌아 연신 복사기의 초록색 단추를 누르는 그의 팔을 바라본다. 토시 안에 감춰져 있는 팔뚝의 근육이 보이는 듯 하다. 나는 사장 아들이 물어볼 경우를 대비해서 교수들 이름까지 외우고 있는 과 이름을 댄다.

    "경영학과요."

    "그래요."

    사장 아들은 더 이상 말이 없다. 복사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좁은 가게 안에 요란하게 들린다. 나는 경영학과라 여자 친구들이 별로 없을뿐더러 일찍 휴학을 해서 더더욱 아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준비해두었지만 말하지 못한다. 그래요, 라고 말하는 그의 말투에는 어떤 궁금증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그가 조금만 더 높은 억양으로 그래요, 라고 해주었더라면 준비해두었던 말들을 했을 것이다. 경영학과는 적성에 안 맞았으며, 교수님들은 하나 같이 고루했다고. 나는 침을 삼킨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들을 가슴속으로 다시 디민다.

    점심시간이 되자 나는 학교 구내식당으로 향한다. 식당을 들어서자 뿌연 안개가 앞을 막는다. 나는 서리 낀 안경을 닦으며 배낭을 맨 남학생 뒤에 줄을 선다. 키가 큰 그 학생이 움직일 때마다 배낭이 내 얼굴에 닿는다. 배낭에는 이 학교 로고가 찍혀 있다. 가만히 보니 그 앞에 서 있는 학생도 내 뒤에 서 있는 학생도 똑같은 배낭을 메고 있다. 색깔만 다를 뿐, 모두 같은 배낭을 메고 있다. 저, 이 가방 어디서 사요. 나는 앞에 서 있는 남학생에게 묻는다.

    아무도 없는 빈 테이블로 가서 한 가운데 앉는다. 한 쌍의 남녀가 내 쪽으로 와서는 테이블에 식판을 내려놓는다. 그들이 막 앉으려고 할 때 다른 테이블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든다. 그들은 가방을 다시 메고는, 식판을 들고 그쪽 테이블로 옮겨간다. 그들이 간 후, 점심을 다 먹도록 아무도 내가 있는 테이블로 와서 앉지 않는다.

    마지막 숟가락질을 마쳤을 때, 긴 머리를 한 여자가 테이블 가장자리에 앉는다. 여자는 점심을 먹는 대신 여러 권의 책을 펴들고는 노트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는다. 나는 일어서려다 말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여자를 본다. 여자는 이따금 흘러내리는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손을 올리는 것 말고는 노트에서 손을 떼지 않는다. 나는 엉덩이를 조금 들고 여자의 노트를 바라본다. 내 눈길을 느꼈는지 여자는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본다.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여자는 내 미소를 보기도 전에 다시 고개를 숙여 책으로 눈길을 돌린다.

    학교 중앙에 위치한 도서관은 이 학교의 자랑거리이다. 이 도시는 물론 이 근방 다른 도시에서도 이처럼 큰 도서관을 가진 학교는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도서관으로 향하면서 뒷주머니를 만져본다. 딱딱하다. 도서관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출입카드. 나는 뒷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사각형의 학생증을 꺼낸다. 입구에 서 있는 직원이 유난히 나를 쳐다보는 것 같다. 나는 카드를 얼굴에 대고 두어 번 흔들며 그에게 웃음을 보인다. 카드는 무사통과다. 잃어버린 학생이 아직 분실신고를 안한 것이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은 다음 열람실로 향한다. 바둑판에 올려진 바둑알처럼 사람들의 머리통이 질서정연하게 놓여져 있다. 나는 몇 번을 기웃거린 다음 세 자리가 나란히 비어 있는 최적의 자리를 발견한다. 한 자리는 비어 있고, 나머지 두 자리는 주인이 자리를 비운 상태다. 나는 그 가운데 앉아, 들고 온 커피를 내려놓는다. 반쯤 풀다 만 문제들이 펼쳐져 있다. 국사 예상문제집. 공무원이 되기 위해 새벽 6시에 집을 나서는 이 자리의 주인을 잠시 상상해본다. 기말고사 기간에도 공무원 준비를 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따분하다. 게다가 자리에는 국사 예상문제집처럼 따분한 책들만 놓여져 있다.

    옆자리를 힐끔 넘겨본다. 책상 위는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고 한쪽에는 책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다. 그 옆에는 3시까지는 자리를 비웁니다, 라고 자상하게 메모가 되어 있다. 자리 주인이 누군지 마음에 든다. 가끔 이렇게 친절한 학생이 있기도 하다. 3시까지 이 자리는 내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점심시간은 정해져 있다. 나는 옆자리의 책들을 훑어본다. 초록색의 하드커버가 눈에 들어온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재빨리 검지손가락으로 책을 뽑는다. 나는 열람실을 나올 때까지 그 책을 가방에 집어넣지 않는다. 원래 내 책인 것처럼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으로 들고는 앞뒤로 흔들면서 열람실을 나선다. 화장실에 가서야 제목을 확인하고, 가방에 집어넣는다.



    퇴근길에 슈퍼마켓에 들른다. 양파가 아직 남아 있는지 가늠을 해본다. 냉장고에 껍질을 벗겨 논 양파가 있을 것이다. 나는 감자와 당근을 사고는 오빠를 위해 맵지 않은 카레가루를 고른다.

    상에는 콩나물 줄기가 달라붙어 있다. 나는 손가락으로 상에 있는 콩나물 줄기들을 긁어낸다. 손톱사이로 고춧가루가 낀다. 오빠는 문지방에 앉아서 레고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다. 오빠는 항상 저 문지방에 앉아 내 쪽으로 몸을 향하게 한다. 아버지에게 등을 보이고 앉는 것은 오빠의 오랜 습성이다. 아버지는 늘 부릅뜬 눈으로 오빠를 대했고, 오빠는 그 보복으로 아버지에게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아버지에게는 리모콘을 누를 힘밖에 없지만 오빠의 가슴에는 그 옛날 아버지 모습만이 남아 있어, 아직도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오빠는 바퀴가 세 개 달린 자동차를 들고 레고가 들어 있는 상자를 뒤적인다. 쇠로 만들어진 둥근 상자에 레고 조각들이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낸다. 그 소리가 시끄러운지 아버지는 TV 볼륨을 높인다. 오빠는 상자를 뒤집어 레고 조각들을 바닥에 쏟는다. 좁은 부엌이 레고 조각들로 더 좁아진다.

    "바퀴 하나가 없어졌어."

    오빠는 흩어진 레고 조각들을 손으로 헤치면서 말한다. 그리곤 화가 나는지 바퀴가 세 개 달린 자동차를 휙 집어던진다. 자동차는 내 복사뼈를 맞추고, 조각들로 흩어진다. 눈물이 핑 돈다. 나는 눈에 힘을 주고 양파를 썬다. 눈물이 양파 위로 떨어지지만, 나는 양파 써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오빠의 화는 금방 풀린다. 몇 개의 레고 조각을 집어던지는 소리가 들리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썰어 논 양파를 버터에 볶고는, 감자와 당근을 썰어 같이 볶는다. 대신 다른 걸 만들면 되잖아. 집이라든지 뭐 그런거. 오빠가 잠잠해지자 나는 달래듯 말한다.

    "나중에 바퀴 찾아줘야 해."

    오빠는 던졌던 레고 조각들을 다시 주워모으며 말한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카레가루를 푼다.

    움푹 패인 그릇에 밥을 푸고는 그 위에 카레를 붓는다. 그리고 부엌 창문을 열고 그 아래 그릇을 내려놓는다. 창문을 연 김에 옆집 옥상에 살펴본다.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다. 뜨거운 김이 한풀 꺾인 다음 나는 상을 들고 방으로 간다. 오늘 저녁에는 카레를 했어요. 이미 냄새로 아버지는 알고 있을 터였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을 내가 다시 말하자 아버지는 얼굴을 찡그린다. 그 정도는 알고 있어. 아버지는 표정은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는 보고 있던 TV를 끄고는 숟가락을 든다. 식사할 때를 빼고 아버지의 왼손에는 늘 리모콘이 쥐어져 있다. 아버지는 고개를 숙여 입으로 바람을 낸다. 식혀왔어요. 내 말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입을 문다. 집을 날리고 쓰러졌을 때, 아버지가 잃어버린 것은 손과 발뿐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15평 아파트 전세금을 가지고 사라졌을 때, 아버지는 말문을 닫아버렸다. 하루에 한 두마디가 고작이고, 며칠 동안 한마디도 않을 때도 있다.

    "고양이 ... 우는 소리가 ... 들려."

    마지막 한 입을 우물거리면서 아버지는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린다. 네? 내 대답에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이 없다. 아마 옆집 옥상에 있는 고양이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나는 아버지가 숟가락을 내려놓자마자 상을 들고 부엌으로 나온다. 나는 기름과 콩나물 국물과 꽁치 비린내가 한데 섞인 그릇들을 닦는다. 방에서 가수들의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손이 시리다. 이제 찬물로 설거지를 하기엔 날씨가 너무 추워졌다. 온수가 나오지 않는다. 보일러는 작동하고 있지만 뜨거운 물은 나오지 않는다.

    오빠는 부엌 바닥에 레고를 늘어놓고 만들기에 열중이다. 넓은 레고로 바닥을 다지고 그 위에 조금 두꺼운 레고로 사각형의 틀을 만든다. 집이야? 오빠는 만화 주제가를 흥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무엇이 생각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아 참, 어떤 아저씨가 고양이 내쫓았다."

    나는 창문을 열고 옥상을 바라본다. 농 속에도, 나무 조각들 틈에도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다. 야옹, 야옹. 몇 번을 불러봐도 아무런 대꾸가 없다. 창문을 닫자 어디선가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린다. 나는 다시 창문을 열고 옥상을 내다본다. 여전히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꽁치 통조림을 따서 한 토막을 창 밖으로 던진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울음소리는 들리는데 고양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주의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정도로 가냘픈 소리이다. 냉장고 소음에 가려 잘 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일단 한번 소리를 듣고 나니, 그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리기 시작한다.

    어른거리를 굴뚝 그림자도 전자밥솥의 깜빡거리는 불빛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고양이 울음소리는 벽을 뚫고, 냉장고 소음을 뚫고 내 귀로 들어온다. 나는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그 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운다. 누워서 시계를 본다. 3시 15분쯤. 바늘들이 모두 3시 방향에 있다. 나는 일어나 플래시를 찾는다. 창문을 열자 기침이 난다. 까치발을 하고 플래시를 옆집 옥상에 비춘다. 어미 고양이도 다섯 마리의 새끼들도 보이지 않는다. 울음소리는 굴뚝 근처에서 들린다. 나는 싱크대에 올라가 한발을 창틀에 대고, 굴뚝 쪽에 플래시를 비춘다. 아무도 없다. 가늘게 떨고 있는 울음소리에는 간절함이 배여 있다. 소리는 굴뚝 안에서 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애절한 소리와, 가까이에서 들리는 듯하면서도 감이 멀게 느껴지는 것이 굴뚝이 틀림없다. 나는 창문을 닫는다. 굴뚝으로 고양이가 떨어졌다면 어쩔 수 없다. 고양이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쓴다. 그리곤 냉장고에 얼굴을 바짝 갔다 댄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에 맞추어서 숫자를 세기 시작한다.



    "댁의 굴뚝에 고양이가 갇힌 것 같아요."

    남자는 대답 대신 어깨를 한번 으쓱한다. 충혈된 눈을 남자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고개를 들고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말한다.

    "굴뚝에 고양이가 갇혔어요. 밤새도록 울어서 한잠도 못 잤어요."

    "신경쓰지 마세요. 굴뚝에 갇혔다면 못 꺼내요."

    남자의 말투는 무뚝뚝하다. 각진 턱이 그 말투와 너무 잘 어울려 나는 그의 말투에도 기분이 상하지 않는다. 그는 고개를 한번 숙이고는 집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거실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 예쁜 여자아이가 서 있는 것을 본다. 남자와는 전혀 닮지 않았다. 남자는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여자아이를 번쩍 들어 안는다. 그 풍경을 보자, 굴뚝에 떨어진 새끼를 버리고 간 어미 고양이와 나머지 네 명의 새끼고양이가 떠오른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도록 별다른 일거리가 들어오지 않는다. 친척 결혼식에 간다고 사장이 나가자, 사장 아들은 말없이 자리를 비웠다. 바쁘지 않기에 그가 없어도 전혀 아쉽지 않다. 기말고사가 끝나가면서 복사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기말고사가 끝나면 일거리는 더더욱 줄 것이고, 나도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학교 주변에서 일거리를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방학이 시작하면 학교 앞은 한산해지고, 북적거렸던 가게들도 모두 일손을 줄일 것이다.

    한 남학생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게문을 연다. 급한 거라며, 금방 찾으러 오겠다고 다급하게 주문을 한다. 안경은 김이 끼여 앞이 안 보일 정도였지만 학생은 닦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별다른 일거리도 없었으면서도 나는 그 학생에게 한시간 후에 찾으러 오라고 한다. 기말고사 기간이라 복사 주문이 많아요. 그렇지만 다른 것들보다 먼저 해드리죠. 특별히. 나는 특별히, 라는 마지막 말에 힘을 준다. 김이 조금 옅어지면서, 안경에 뿌연 테두리를 만든다. 뿌연 테두리 안에 그의 검은 눈동자가 보인다. 그는 내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서, 그 검은 눈동자를 깜빡거린다.

    학생은 한시간이 지나고 두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나는 복사한 종이를 꺼내 읽는다. 중국철학사. 한글보다 한문이 많아서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 나는 사장 책상으로 가서 옥편을 꺼낸다. 사장의 책상에는 건강다이제스트가 놓여져 있다. 사장이 정기적으로 구독해보는 유일한 책이다. 나는 가방에서 연필을 꺼내 한문 위에 한글로 토를 단다. 한 장을 끝내는 데 30분이 넘게 걸린다. 하지만 다음 장으로 넘어갈수록 속도가 조금씩 빨라진다.

    친척 결혼식에 간다던 사장은 오후 늦게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전화를 한다. 그의 말에는 술 냄새가 느껴진다. 아들의 안부를 묻는 사장에게 나는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갔다고 둘러댄다. 중국철학사를 맡긴 학생은 찾으러 오지 않고, 적은 양의 복사거리만 들어온다. 나는 한 대의 복사기 전원을 끈다. 나는 손가락마다 가느다랗게 나 있는 금을 들여다본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한 후로 몇 번이나 종이에 손을 베었을까 생각한다. 손가락 베는 일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게 되자, 방학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손바닥을 복사기 화면에 펴고 초록색 복사 버튼을 누른다. 종이를 올려놓았을 때보다 더 많은 빛이 얼굴에 느껴진다. 나도 모르게 흠칫 눈이 감긴다. 손금이 선명하게 찍힌 왼손이 나온다. 나는 계속해서 복사 버튼을 누른다. 왼손이 10장이 된다. 20장이 된다. 다시 오른손을 올려놓고 왼손으로 복사 버튼을 누른다. 오른손에 나 있는 손금은 왼손보다 생명선이 조금 더 길고, 진하다.

    나는 복사기에 얼굴을 대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버튼을 누른다. 따뜻한 빛이 얼굴을 스친다. 눈을 꼭 감은 얼굴이 종이에 찍혀 나온다. 미간의 주름이 선명하다. 꼭 감은 두 눈이 깊은 웅덩이처럼 보인다. 거기에 손을 대본다. 그 검은 동굴 안으로 손이 빠질 듯 하다. 나는 복사기에 얼굴을 대고 눈을 뜬다. 복사기가 작동하자 저절로 눈이 감긴다. 절대 눈을 감으면 안 돼. 주문처럼 몇 번을 중얼거리고는 다시 복사기에 얼굴을 댄다. 빛이 눈을 통과할 때 온몸이 저절로 움찔거린다. 잔뜩 힘을 준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나는 눈물이 흐르도록 그냥 둔다.

    복사되어 나온 내 얼굴은 무엇인가에 잔뜩 놀란 모습이다. 내 얼굴이 이처럼 초라하게 보일 때가 없었다. 이처럼 낯선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흰자만 보이는 눈동자는 누구와 금방이라도 싸울 듯한 기세다. 미처 내가 몰랐던 내가 거기 들어있다. 나는 바닥에 얼굴을 내려놓고 그 옆에 오른손과 왼손을 놓는다. 내가 나를 노려본다. 나는 한 발을 들고 두 눈을 지그시 밟는다. 꽉 다문 두 입이 내게 뭐라 말하는 듯 하다. 나는 발을 뗀다. 나를 노려보고 있는 내 눈이 그대로 거기 박혀 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라이터로 종이에 불을 붙인다. 턱이 타들어가고, 코가, 눈이 그리고 이마가 타들어간다. 불은 오른손으로, 왼손으로 옮아붙는다.



    싱크대 안쪽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책들을 본다. 어제 가져온 초록색 하드커버가 맨 위에 놓여 있다. 천문학에 관련된 책이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지난번 가져온 물리학 책은 너무 어려워서 몇 장 읽지 못했다. 4학년 책이었던 것이다. 이번 책은 1학년 것이다. 98로 시작하는 학번이 선명히 찍혀 있다. 나는 그 책을 꺼낸다. 무엇인지 끈끈한 것이 손에 느껴진다. 책 앞뒤를 살펴본다. 뒷면에 개미들이 붙어 있다. 나는 그 책을 올려놓았던 책을 꺼낸다. 그 책 앞면에도 개미들이 붙어 있다. 싱크대 안으로 음식찌꺼기들이 새고 있었다. 책들은 눅눅해졌고, 끈끈한 액체가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책들을 모두 꺼내 유리 닦는 액체를 표지에 뿌린 후, 마른걸레로 문지른다. 그리고 눅눅해진 책들은 보일러 선이 들어오는 곳에 일렬로 놓는다. 그 책 사이로 나는 눈에 익숙한 숫자를 본다. 98로 시작하는 그 학번은, 어제 가져온 초록색 하드커버에 써 있는 학번과 비슷했다. 나는 두 책을 나란히 놓는다. 학번이 같다. 9자를 영어 알파벳 g와 비슷하게 쓰는 글씨체도 같다. 같은 사람 책을 가져오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한번 책을 읽어버려서인지, 어제 가져온 책에는 먼저 책보다 더 크게 학번이 적혀 있다. 책 윗면과 옆면에 적었을 뿐만 아니라, 표지에도 적혀 있다. 나는 두 책을 나란히 펴놓고 한 장씩 넘긴다. 모든 필기가 파란색으로 되어 있다. 나는 자리에 누워 두 권의 책을 번갈아 가면서 읽는다.

    전화벨 소리에 눈을 뜬다. 부엌과 방에 모두 불이 켜져 있다. 책을 읽다 그냥 잠든 것이다. 전화기 저편에서는 한숨 소리만이 들린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펼쳐 논 책들을 접어 한쪽으로 민다. 그리고 수화기를 끄지 않은 채 바닥에 내려놓고는 방으로 간다.

    TV를 켜둔 채 아버지는 잠들어 있다. 이불을 목까지 덮어주고 TV를 끈다. 앞집에서 손자를 엎고 거실을 서성이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저처럼 앞집이 환희 들여다보이는데 우리집은 얼마나 자세히 보일까. 나는 재빨리 커튼을 친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다. 한달도 넘게 목욕을 못한 아버지 몸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나지만, 냄새가 앞집으로 퍼져갈 것 같아 창문을 열지 못한다. 나는 부엌으로 나와 바닥에 놓여져 있는 수화기를 집어들지만 이미 전화는 끊어져 있다. 전화기를 내려놓자, 오늘 하루종일 잊고 있었던 고양이 울음소리가 다시 들린다.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그 소리는, 감이 멀다.

    변기 물이 잘 내려가지 않는다. 나는 흰색 꼭지를 다시 한번 내린다. 소리만 요란할 뿐, 물은 내려가지 않는다. 화장실이 말썽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 나는 대야에 물을 가득 담아서 변기에 쏟아 붓는다. 조금 내려간다. 변기 속이 깨끗해질 때까지 물을 쏟아 붓는다.

    아버지가 쓰러지고 난 후, 집안 물건은 하나씩 고장이 나고 있다. 지난주에는 가스레인지가 고장이 나서 3만원이나 주고 고쳤다. 10년을 넘게 쓴 세탁기도 이젠 삐걱대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빨래를 하면 중간에 멈춰버리곤 한다. 세탁기를 고치는 비용이 중고 세탁기를 사는 만큼 든다는 말에 엄두도 못 내고 있다. 그런데 이번엔 화장실이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면 아르바이트도 끝나는데.

    2층에 사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다용도실로 향한다. 그 옆에는 우리 집 석유보일러가 있다. 나는 보일러의 석유통을 발로 툭 찬다. 퉁, 소리가 울린다. 나는 고개를 숙여 석유가 얼마 남았는지 확인한다. 통 옆으로 나 있는 흰 호수에 석유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본다. 밑바닥으로 눈길을 내리자 석유가 보인다. 다리 힘이 풀리고, 나도 모르게 주저앉는다. 이 정도로는 오늘밤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다용도실 안으로 들어가서 하수구 뚫는 도구를 찾는다. 김장 김치를 담아둘 커다란 항아리 옆에 검은색 고무가 삐죽 나와 있다. 나는 그것을 빼서, 화장실로 간다. 변기에 움푹 패인 고무를 집어넣고 펌프질을 한다. 변기에서 쿨럭거리는 소리가 나고, 나는 동작을 멈추지 않는다. 변기에 담겨 있는 물이 출렁거릴 때마다 조금씩 눈물이 난다. 석유가 떨어지면 보일러가 고장날 수도 있다고 했는데. 나는 고무장갑을 끼고, 변기에 깊숙이 손을 집어넣는다. 좁은 구멍에 손이 꽉 찬다. 도대체 이 안에 무엇이 있는 거야. 나는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잠시 내가 지른 소리에 놀라 변기에 손을 집어넣은 채 가만히 있는다. 손끝에서 무엇인가가 만져진다. 딱딱하다. 나는 놀라 주춤거린다. 심호흡을 몇 번하고는, 가운데 손가락에 힘을 주어 그것을 끌어당긴다. 조금만 더. 마침내 그 물체는 변기 안으로 빠져나온다. 오빠가 잃어버린 바퀴 달린 레고 조각이다.

    바퀴가 달린 레고를 들고 부엌으로 향하다 무언가를 밟는다. 오빠가 레고로 만든 집이다. 오른발에 레고 모형마다 박혀 있는 둥근 모양이 찍혔다. 레고로 만든 집은 내가 밟아서 한 층이 완전히 무너졌다. 현관문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부엌으로 짐작되는 곳과 방이 부서졌다. 나는 발로 그 조각들을 한쪽 구석으로 민다.

    나는 창문을 열고, 모기장을 연 다음 바퀴가 달린 레고를 던진다. 발바닥이 조금 얼얼하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수화기를 집어든다. 더 이상, 전화하지 말아요. 아무도 엄마를 기다리지 않아요. 엄마가 쓰던 세탁기도 냉장고도 모두 고장나고 있어요. 띠, 띠 수화기는 규칙적으로 소리를 내며 내 넋두리를 삼킨다. 수화기 저쪽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수화기뿐 아니라 냉장고에서도 고양이의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들린다. 전화기 코드를 뽑는다. 냉장고의 코드도 뽑는다. 냉장고 소리가 멈추자 시계초침에서 그리고 방에서 가늘게 새어나오는 코고는 소리에서도 모두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사다리는 다용도실 가장 안쪽에 놓여 있다. 나는 바닥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물건들을 헤치고 사다리가 있는 쪽으로 간다. 사다리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팔에 있는 대로 힘을 주고는 사다리를 힘껏 들어올린다. 사다리의 끄트머리가 항아리와 부딪히더니 순식간에 굵직한 금을 만들어 놓는다. 나는 항아리의 금이 보이지 않도록 다른 물건을 그 옆에 바짝 갖다 댄다.

    눈짐작으로는 창문에서 옆집 옥상까지 거리가 얼마 되지 않을 것처럼 여겨졌는데, 사다리를 놓고 보니 생각보다 틈이 많이 벌어져 있다. 1층이 반 지하로 되어 있는 2층집이었기 때문에 옆집 옥상과 층이 많이 지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흔들리는 사다리를 손으로 눌러 튼튼한지 확인하고는 창문 위로 올라선다. 먼저 다리를 내밀고 기어가듯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다. 가지만 남아 있는 넝쿨이 바람에 흔들려 서걱서걱 소리를 낸다.

    굴뚝 위에는 몇 개의 벽돌이 엉성하게 놓여 있다. 고양이가 떨어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공간은 벌어져 있다. 나는 벽돌을 들어내고 어두컴컴한 굴뚝 속을 바라본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플래시를 안 가져온 것을 후회했지만 다시 가지러 올라가지는 않는다. 달빛을 가리지 않기 위해 몸을 움직여보지만 일미터 정도만 눈에 보일 뿐, 아래쪽은 모두 암흑이다. 나는 발뒤꿈치를 들어 귀를 굴뚝에 대본다. 아주 희미하게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하지만 그것이 바람소리인지 울음소리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벽돌 한 조각을 굴뚝 속으로 던진다. 돌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에 섞여 고양이 울음소리가 얇게 흔들리고 있다. 나는 벽돌 조각들을 굴뚝 속으로 마구 밀어 넣는다. 마지막으로 던진 커다란 벽돌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가만히 굴뚝을 들여다보니, 그 안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보이는 듯 하다. 낮에 보았던 내 얼굴, 복사기에 찍힌 내 얼굴이 굴뚝 속에 있다. 흰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 미간의 주름도 선명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꽉 다문 아래턱이 서서히 지워진다. 그리고 코가, 눈이, 귀가 서서히 지워진다. 지워지는 게 아니라, 불타고 있다. 다 탈 때까지 눈동자는 나를 노려보는 것을 거두지 않는다. 내 얼굴이 지워지자 오빠가 만든 레고 집이 보인다. 그 집이 서서히 무너진다. 2층 방이 무너지고 아래층 창문이 하나 둘씩 떨어진다. 정원에 매달려 있는 그네가 위태롭게 흔들린다. 현관문이 무너지기 전에 나는 굴뚝에서 눈을 거둔다.

    발 밑에서 무엇인가가 반짝인다. 나는 허리를 숙여 그것을 본다. 바퀴 달린 레고다. 멀리 집어던진 것 같은데, 고작 여기 떨어져 있다니. 나는 발끝에 힘을 주고, 그것을 밟는다. 으스러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윤성희

    윤성희

    1973년 경기 수원 출생

    청주대 철학과,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 <레고로 만든 집>을 뽑고나서

    - 박완서, 박범신

    최종대상에 오른 작품은 '헤드라이트' (김순희), '무면허' (김단), '내 마음의 괘종시계' (안덕훈), '레고로 만든 집' (윤성희) 네 편이었다.

    '헤드라이트'는 내면화엔 성공하고 있으나 불균형한 구성과 감정의 지나친 노출이 결함으로 지적됐다. '무면허'는 미래소설이면서도 주제가 특별히 새로울 것 없다는 결함이 지적됐다.

    최종적으로 남은 작품은 '내 마음의...'와 '레고로...' 이었다. '내 마음의...'는 월북한 남편을 그리며 살고 있는 이모를 통해 분단의 비극을 수채화처럼 잔잔하고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과장없는 이야기 전개와 무리없는 문장, 잔잔한 터치가 호감을 주었으나 추신 부분이 문제가 됐다. 작가의 최종 위치가 선연히 확인되는 추신 부분의 대사는 전체구조와 개연성을 확보하지 못했을 뿐더러 너무 돌출돼있어 오히려 작품 전체에 대한 신뢰감을 결정적으로 깨뜨리고 있다고 보았다.

    깊은 토론 끝에 최종적으로 '레고로...'을 선택했다. 이 작품은 부진아인 오빠와 칩거하는 아버지를 부양하는 젊은 여자의 희망없는 삶을 섬세한 필치로 군더더기 없이 그려내고 있다. 복사기로 얼굴을 떠내는 장면이나 죽어가는 고양이의 울음소리 등은 절망에 찬 세기말적 우리의 자화상으로 읽힌다. 특히 감상에 빠질 함정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잘 여며서 바느질하듯 한땀 한땀 화자의 내면을 그려낸 솜씨가 높이 살 만하다. 주문이 있다면 이 작가가 좀더 새로워지고 힘있어지길 바라는 것이다. 작가의 정진을 바란다.
  • 윤성희

    윤성희

    1973년 경기 수원 출생

    청주대 철학과,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나는 부산행 기차에 있었다. 당선을 알리는 전화가 집으로 걸려왔을 때, 나는 기차 안에서 잠을 자거나, 책을 읽거나, 음료수를 마시거나 했을 것이다. 정확히 그 시간에 무엇을 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몸을 뒤척일 때 가슴 속을 무엇인가가 따끔거리며 지나가지 않았고, 지나가는 풍경이 유난히 살갑게 보이지도 않았다. 만약 기차를 타기 전에 당선을 알리는 전화를 받았다면, 그 풍경들은 어떤 의미로 내게 다가왔을까.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나는 하루에 12시간 이상을 걸었다. 가만히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들여다보면, 그 모습이 참 외로워 보인다. 한쪽 발이 땅에 닿는 동안 다른 한쪽 발은 허공에 떠있어야 하는 '걷다'라는 행동은 나를, 사람들을 외롭게 만든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우리들은 서로 어깨를 기대고 서 있어도, 얼구렝는 혼자라는 표정을 지우지 못한다. 언제나 외발일 수밖에 없는, 무심한 표정으로 어깨를 스치며 지나가는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을 내 마음 속으로 끌어오고 싶다. 앞으로 내가 쓴 소설은 '걷는 중' 이었으면 좋겠다.

    졸업을 하고도 한동안 서성거려야 했던 명동의 조그만 그 학교와 교수님이 아니었으면 어찌 내가 소설을 쓸 생각을 했을까. 부모님과, 박기동교수님 그리고 초라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 드린다.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