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달빛유희

by  김태웅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등장인물 : 김 덕, 최 봉
    곳 : 산 속의 숲. 주인 없는 야트막한 무덤
    때 : 가을. 밤


    보름달
    간간이 구름
    풀벌레 소리
    소나무 두 그루
    간간이 떨어지는 낙엽

    덕과 봉은 헐떡거리며 올라온다. 덕은 다리를 전다. 목발을 짚고 있다. 봉은 삽과 짐을 들고 뒤따른다.

    김 덕 : (걸어 나오다가 무덤을 보고) 가만 있자... 여기가...

    최 봉 : (호흡을 고르며) 맞어? 요 밑에도 무덤 하나 있던데....

    김 덕 : (주위 지형을 살피며) 저기 옥녀봉, 그리고 저게 칼바위..... (소나무 근처로 가며)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소나무 두 그루! 맞다. 짐 내려.

    최 봉 : 확실한 거야?

    김 덕 : 너 이렇게 생긴 소나무 봤어? 짐 내려.

    최 봉 : (짐을 내리고 덕을 쳐다본다.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무덤 위로 올라간다) 와 우! 아 그래, 이게 무슨 횡재냐? 이 무덤 밑에... 얼마?

    김 덕 : 10억!

    최 봉 : 얼마라구?

    김 덕 : 10억 이상!

    최 봉 : 억이라! 억! 이거 최소한 10억이라고 쳐도 너랑 반까이해도 5억! 그걸 은행에다 집어넣고 이자만 따쳐먹어도 한 달에... 이리 와봐. (덕에게 다가가며 입맞춤하려고 한다) 으이구, 복덩어리!

    김 덕 : 왜 이래? 징그럽게.

    최 봉 :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하단 말이야. 말년에 운수 터진다고 하더니 바로 요고 보고 한 소리같다야. (삽을 잡으며) 그럼 이 몸 팝니다요.

    김 덕 : 그보다 먼저 할 일이 있다. 가서 꽃 좀 꺾어 와라.

    최 봉 : 뭐? 꽃? 지금 기집애들 소꿉장난하냐?

    김 덕 : 꺾어 와. 싫어?

    최 봉 : (아니꼽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삽을 놓으며) 형님이 어쩔 수 있나. 까라면 까셔야지. 10억이 생기는 판에 뭔 짓을 못하겠냐.

    김 덕 : 너, 이 일 끝날 때까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알았지?

    최 봉 :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갔다 오겠습니다. (가려한다)

    김 덕 : (다시 주의를 주며)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딴 생각하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잘못하다간 도루아미타불이니까.

    최 봉 : 아이고, 알아모시죠.



    봉은 꽃을 꺾으러 숲(관객)으로 간다.



    최 봉 : (관객들을 보고) 허벌나게 폈다. 들국화 맞지?

    김 덕 : 쑥부쟁이라는 거다.

    최 봉 : 뭐라고? 뭔 쟁이?

    김 덕 : 쑥부쟁이!

    최 봉 : 쑥부쟁이라! 여태 나는 들국환 줄 알았는데...

    김 덕 :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단다. 봉아. 좋으면 그만이지.

    최 봉 : 예, 알았습니다. 스님.

    김 덕 : 다 했느냐?

    최 봉 : 예, 스님.

    김 덕 : 그러면 와서 소주 좀 까시게.

    최 봉 : (다가오며) 스님, 소주는 삼가시죠.

    김 덕 : 다 쓸데가 있으니 너는 까라면 까시게.

    최 봉 : 예, 지금 소주 까는 게 문제닙까. 이 놈 더한 것도 까시겠습니다.



    봉은 꽃을 덕에게 준다. 그리고 소주병을 딴다. 덕은 꽃을 무덤 앞 상석(床石)에 올려놓는다. 술도 한 잔 올려놓는다.



    김 덕 : (절을 하며) 이거 실례 좀 범하겠습니다. (절하고 일어나며) 뭐해? 인사 올려.

    최 봉 :....

    김 덕 : 인사 안할 거야?

    최 봉 : 인사는 지미! 꼴갑 그만 떨어. 자식아. (삽을 잡으며) 어디야? 그냥 무덤을 다 파버려.

    김 덕 : 잡놈의 자식, 예의는 차려야할 거 아니야. 남의 무덤을 파헤치는 판에. 벌받는다. 벌받어.

    최 봉 : 나는 제사엔 관심 없네. 떡밥이나 챙겨 먹으면 그만이지.

    김 덕 : 급하게 먹으면 체한다. 절하면서 아무 탈없이 끝나게 해달라고 빌어봐.

    최 봉 : 그 자식, 누가 땡중아니랠까봐.

    김 덕 : 어허, 그 덕보는 게 누구냐?

    최 봉 : 알았다. 아니지. 아이고, 알았습니다.



    봉은 삽을 놓고 절을 한다. 덕은 소주를 무덤 주위에 뿌린다.



    최 봉 : (삽을 잡으며) 이제 파도 되겠습니까?

    김 덕 : 급하기는...

    최 봉 : 근데, 이 무덤을 다 파야 되는 건 아니지?

    김 덕 : 무덤 꼭대기 정 가운데부터 파 나가. 거길 중심으로 반경 1미터 안에 있을 거다.



    봉은 한 삽 뜬다.



    김 덕 : 조심해. 한 삽 한 삽 신중하게. 흠집 생기면 제값 받기 힘드니까.

    최 봉 : 10억이다. 10억! 떨린다. 떨려.

    김 덕 : (사이) 너 돈 생기면 뭐 할 거냐?

    최 봉 : (좋아서) 뭐부터 하지? 이거 정말 걱정되시네. 광부터 내지. 일단 안마시술소에 가서 사우나 한 방 때리고 애들 시켜서 손톱 발톱 때 좀 뺀 다음에 때깔 나는 최고급 양복으로 쫙 빼 입고 호텔 테라스에서 백포도주 한 잔 빤 다음, 마스타 플랜, 다시 말해 사업구상에 들어가야지.

    김 덕 : 사업?

    최 봉 : 내가 한 때 잘 나가는 사업가 아니었냐? 최사장!

    김 덕 : 끽해야 붕어빵이나 팔았겠지.

    최 봉 : 이 자식, 사람 정말 우습게 보네. 그래 니가 뼈저린 이 최사장의 과거를 알 리 없지. (사이, 진지하게) 나, 진짜 해보고 싶은 거 있다.

    김 덕 : .....

    최 봉 : 63빌딩이나, 서울역 고가도로 같은데 올라가서 만원 짜리 5백장을 그냥 공중에다 쫙! "씨발놈들아! 돈이다. 돈! 개를 줘도 안 먹는 돈!" 사람들이 돈 줍겠다고 개떼처럼 몰려들 거야. 볼만 할 거다. "이 개만도 못한 인간들아, 돈이다. 돈! 더 줄까? 더 줘." (사이, 우울해 하며) 그 때 천만 있어서도... 그 돈이 뭐라고... (덕의 어깨를 치며) 어때? 너 뭐 사업에 대해서 좀 아니?

    김 덕 : 땅이나 파.

    최 봉 : 이 돈이란 말이야 굴려야 커지는 거야. 백 원이 천 원되고 천 원이 만 원되고 만 원이 천만 원 되고 천만 원이 일 억 되고 일단 억 단위만 넘으면 돈이 돈을 벌어요. 그리고 자산이 5억 정도면 이곳 저곳에서 빌려서 사업자금 구하는 건 일도 아니지.

    김 덕 : 말로는 뭘 못하냐? 어서 귀동냥 한 건 있어 가지고...좋아하긴 아직 일러.

    최 봉 : 이르다니?

    김 덕 : 살 사람이 있어야지.

    최 봉 : 뭐? 그럼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김 덕 : 일본으로 가야돼. 국내 있다간 덜미 잡히기 딱 좋아. 배타고 일본에 가면 값도 더 받을 수 있고.. 일본 애들 물건 보면 환장할거다.

    최 봉 : 일본에...

    김 덕 : 걱정하지마. 이미 배편이랑 판로는 다 알아놨으니까.

    최 봉 : 역시, 역시....

    김 덕 : 아, 이 정도 갖고 뭘 그러십니까. 최사장.

    최 봉 : 겸손도 하십니다. 김사장.

    김 덕 : 계속 파시죠. 최사장.

    최 봉 : 물론 개구리 운동장이죠. 김사장. 하하.



    덕은 술을 마신다. 풀벌레 소리.
    달이 간다.



    최 봉 : (삽질을 하면서) 술 좀 작작 먹어라. 일도 마치기 전에 넘어가겠다.

    김 덕 : ......

    최 봉 : 너 어느 절에 있었다고 했지?

    김 덕 :....

    최 봉 : 너 도망쳐 나온 절간 이름이 뭐냐니까?

    김 덕 : 어, 공허사(空虛寺).

    최 봉 : 맞어. 공허사. 평창에 있다고 그랬나?

    김 덕 : 그래, 강원도 평창.

    최 봉 : 강원도 평창의 공허사라.

    김 덕 : 그 절 발칵 뒤집혔을걸. 나도 그때 아주 조마조마했다. 그걸 들고 야밤 도주하는데, 뭐가 보여야지. 이 다리도 그 때 삐끗해서... 그렇다고 잡힐까봐 어디 병원에도 갈 수 없고. 시간도 벌고 사태 돌아가는 거 살필 요량으로 이 무덤에다....

    최 봉 : 니 얘기는 물건을 들고 야밤 도주 중 다리를 다쳤고... 병원 갈 처지도 아니어서 이곳에 물건을 묻었다? 평창에서 여기까지는 다친 다리로 걸어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닌데...

    김 덕 : 걷다가 지나가는 차 얻어 탔지.

    최 봉 : 차를 얻어 타!? 검문 안 당했어?

    김 덕 : 아니. 그게 국보 몇 호였더라.

    최 봉 : (좋아서 삽을 놓고) 국보! 그럼 국보급이란 말이야?

    김 덕 :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통일신라거라지.

    최 봉 : 이거 완전히 봉잡았는데. 근데 그 정도면 신문에도 나고 경찰들이 쌍심지 켜고 돌아다니면서 난리 부르스쳤을 텐데 아무 일도 없었어?

    김 덕 : 그게 나도 이상하단 말이야. 근 2년 다 돼 가는데 잠잠하단 말이지.

    최 봉 : 혹시 엄한 거 들고 나와서 국보급이라고 뻥까는 거 아니야?

    김 덕 : 개 눈엔 똥만 보인다고 니 눈엔 내가 그런 병신으로 보이냐?

    최 봉 : 그럼. 왜 절간에서 조용히 있냔 말이야.

    김 덕 : 너도 생각을 해봐라. 국보급을 도난당했다고 해봐 절간 체면이 뭐가 되겠냐? 이건 내 추측인데 중 몇 명 풀어서 은밀히 나를 찾고 있을지도 몰라... (썬그라스를 쓰며, 하모니카를 꺼내 분다) 내가 이런 꼴하고 다니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걸. 아니면...

    최 봉 : 아니면?

    김 덕 : 아니면 (썬그라스를 벗으며) 큰스님이 워낙 호방하고 통쾌한 분이시라 그 정도 일엔 괘념치 않을 수도 있고. (주의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듯) 잠깐만. 가만 있어봐. 뭐가 움직이지? 쫓아오는 사람 없었지?



    덕은 후레쉬를 찾아 숲(관객)을 비친다.



    최 봉 : 니가 뒤에 왔잖아. 아니지. 내가 뒤에 왔나? 하여간 아무도 없었어.



    봉은 삽을 들고 숲쪽을 향한다.



    최 봉 : 누구냐? 나와봐. 자식아. 없냐?

    김 덕 : 저기!

    최 봉 : (덕이 후레쉬를 비치자) 어디? 돌이잖아.

    김 덕 : 저기!

    최 봉 : 어디? 이건 바윌세!

    김 덕 : 분명 뭐가 있었는데. 그림잔가?

    최 봉 : 아 자식은. 쫄았잖아..

    김 덕 : 힘들지? 좀 쉬었다 하자.

    최 봉 : 지금 쉴 틈이 어디 있어?

    김 덕 : 쉬었다 하자니까. 좀 쉬었다가 하면 있던 게 없어지냐?

    최 봉 : (앉으며) 술 좀 줘봐. 남의 무덤 파헤치려니까 약간 뜨시다.

    김 덕 : 고마워.

    최 봉 : 뭐가?

    김 덕 : 그냥. (사이, 풀벌레 소리. 달을 보며) 보름달이다. 조용해서 좋다. (사이) 여기 무덤 터 좋지?

    최 봉 : 좋다 뿐이냐. 팔자 고치게 생겼는데...(호주머니에서 복권을 꺼낸다) 인심썼다. 가져. 1억 짜리야. 싫어? (사이) 어떻게 내가 산 건 되도 꼭 500원 짜리만 되요? 남들은 천만 원도 우습게 되는데 말이야... 이것도 보나마나 꽝이다. 꽝! 그래도 이거 맞추는 재미에 살았는데 (꾸겨서 던지며) 사요나라다.

    김 덕 : 동해에 가고 싶다.

    최 봉 : 동해?

    김 덕 : 그래, 동해. 출렁거리는 물결.... 파도 소리....파란 하늘...

    최 봉 : 배타고 가면서 죽어라고 볼 텐데 뭔 놈의 바다야.

    김 덕 : 아니야, 꼭 가보고 싶어.

    최 봉 : 지금, 동해가 문제냐.

    김 덕 : (사이) 이봐. 오늘은 달이 무척 밝지. 그렇지?



    둘은 달을 쳐다본다. 풀벌레 소리. 구름이 달을 가린다.
    그렇게 달이 간다.



    최 봉 : (땅을 파면서) 땅 파면서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왜 가끔 신문 보면 사람 죽여서 땅에다 파묻는 사람들 있잖아. 그 사람들 바보 아니야. 이렇게 무덤 하나 골라서 묻어 버리면 감쪽같을 텐데 말이야. (삽을 놓고) 야, 이 화상 봐라. 야! (덕에게 다가가며) 누군 똥빠지게 일하고 있는데 잠을 자. (흔든다. 그래도 반응이 없다. 모자를 벗긴다. 그리고 자기가 쓴다) 어쭈!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흔든다. 칼을 꺼낸다. 그리고 죽일까 말까 망설이는 모습을 보인다. 칼을 쳐다보다 덕을 쳐다보다가 무덤을 본다. 봉은 칼을 들고 덕에게 다가간다. 덕의 작은 신음. 움찔하는 봉. 자기가 칼을 잡고 있는 것에 자기가 놀란다.



    최 봉 : (칼을 떨어뜨리며)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자기 뺨을 때린다) 이러면 안돼. 정신차려 이 놈아! 정신차리라고! 그래, 저 놈이 살아 있어야지 물건을 팔아먹을 거 아니야. 일본 가는 배편은 어떻게 마련하고 ...그리고 혼자 팔러 나갔다가 잡히면 절도죄에다... 어디서 났냐고 몰아붙이면 어떻게 둘러대야지. 난 찍소리 못하고 불고 말 거야. 그럼 시체 유기죄! 안되지. 안되는 말이지. 일본에 가야지. 일본에 가야할 거 아니야. 일본에 가서 뽀다구 나게 한 번 살아 봐야 할 거 아니야 이 병신아. (사이, 덕을 보며) 그 자식, 자는 꼬라지하고는 (봉은 옷을 벗어 덕을 덮어주고 흘러내린 침을 닦아준다) 으이구, 지저분한 놈!

    김 덕 : (손기운을 느끼며 일어나서 봉을 끌어안으며) 어머니, 어머니, 엄니, 엄니.....

    최 봉 : ....

    김 덕 : (비몽사몽간. 넋이 나가 있다)

    최 봉 : (사이) 야. 정신차려.

    김 덕 : (봉을 쳐다본다) 너도 거기 있었는데.

    최 봉 : 뭐?

    김 덕 : (주위를 둘러보며) 누가 막 쫓아왔어.

    최 봉 : .....

    김 덕 : 우리 여기서 뭐하는 거지?

    최 봉 : 이 자식이 지금 장난하나.

    김 덕 : (사이) 내 모자! (봉이 쓰고 있는 모자를 보고) 벗어. 빨리 벗어 자식아.

    최 봉 : 그 자식은 무슨 신주 모시 듯해요. (던지며) 줘도 안 갖는다 자식아

    김 덕 : (모자를 쓰며 오한이 나는지 술을 마신다. 사이. 일어나며) 뭐 좀 보여?

    최 봉 : 개코도 안 보인다. 자식아.

    김 덕 : (구덩이를 보고는) 여태 뭐했어? 더 파봐.

    최 봉 : 판다. 파. 김빠지게 자지나 마. 자식아. (삽을 잡고 땅을 파면서. 사이) 죽어도 말 못하는 비밀 있을 거야. 응? 뭐, 무덤에나 가져가는 비밀 같은 거 말이야?

    김 덕 : 무덤에나 가져가는 비밀?

    최 봉 : 가령 사람을 죽였다든지 왜 그런 거 있지 않겠어?

    김 덕 : 뭐 사람을 죽여? 너 누구 죽였구나!

    최 봉 : 이게 사람 잡네. 그게 아니라 사실은.....

    김 덕 : 사실은?

    최 봉 : 너 잘 때 ....아니다. 아니야. 사실은 나 엉덩이에 빨간 점있거든.

    김 덕 : 뭐라구? 하하하!

    최 봉 : 웃지마. 이건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 나만의 비밀이야.

    김 덕 : 대단한 비밀인데. 야, 그런 비밀이라면 나도 있다. 사실 난 콧구멍이 두 개거든.

    최 봉 : 하하하... (사이) 기분 영 그런데 재미난 얘기나 해봐. 이야기하면 또 너 아니냐?

    김 덕 : 이야기라... 거 말이야. 옛날에 거지가 한 명 살았는데, 너처럼 엉덩이에 빨간 점이 있었다나 없었다나... 이 친구가 꼴에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말이야. 이 여자가 어느 날 그러드래요. 해가 지기 전에 빨간 장미를 꺾어 오면 결혼해 주겠다고. 그것도 겨울에 말이지. 겨울에 장미가 어디 있겠어? 그래도 이 멍청한 친구는 빨간 장미를 찾아 나서긴 나섰나봐. 막막했겠지. 하루 종일 찾아 헤맸는데 장미 비슷한 건 눈 씻고 찾아 봐도 없더래요. 어쩐다? 시간은 자꾸 가고 그날 따라 눈은 펄펄 내리고. 그래 안되겠다 싶어 포기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느 집 담장 밑을 지나게 되었대요. 근데 이거 무슨 운명의 기적이란 말인가? 눈 쌓인 담장 위로 빨간 장미 하나가 고개를 내밀고 피어 있더래요. 이제 결혼할 수 있겠다 싶어 그 빨간 장미를 꺾었겠지. 손에 가시가 찔리는 것도 모르고 말이야. 좋아서 엄벙덤벙 그 여자를 찾아갔는데, 그 여자가 그러드래. "눈이 내리네요. 오늘은 해가 뜨지 않았어요" "뭐? 해가 뜨지 않았다고?" 가까운 곳에 바다가 있었다지. 그래서 이 친구가 미친 듯이 바다로 뛰어 갔대요. 그리고는 한 발 두 발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갔지. 뼈가 시려왔지만 죽고만 싶었던 모양이야. 물은 허리를 지나 가슴으로 차 오르고 가슴을 지나 목까지. 목을 지나 입까지. 그때 지나가던 사람들이 소리치는 거야. "사람 죽는다" 그 순간 바닷물이 팍! 워메 짠 거! 바닷물이 이렇게 짤 줄이야. 이 친구는 결국 죽지도 못했지. 바닷물이 너무 짜서 말이야. 그런데 살아야겠다고 걸어 나오는데..

    최 봉 : 이 친구 잠지가 발딱 서더래요. 그거 내가 해준 얘기잖아.

    김 덕 : 아니다. 내가 처음 하는 얘기다..

    최 봉 : (삽을 팽개치며 나오며) 내가 해준 얘기라니까.

    김 덕 : 아니라니까.

    최 봉 : 왜 자고 일어나니까 정신이 오락가락해?

    김 덕 : 뭐라고?

    최 봉 : 오냐오냐했더니 이제 사람을 속여먹으려고 그래. 내가 사람이 그렇게 좋아?

    김 덕 : 그래, 니가 사람이 그렇게 좋다. 왜?

    최 봉 : (멱살을 잡고) 이걸 그냥. 한 쪽 다리마저 분질러 줄까?

    김 덕 : 분질러. 돈도 생기겠다. 진작 좀 이렇게 나오지. 죽여. 죽여서 아무도 모르게 파묻으면 되잖아. 간단하네. 죽이라고. 죽여서 니 놈 혼자 챙겨 가면 될 거 아니야.

    최 봉 : (멱살을 놓으며) 으휴, 어쩌다 너같은 놈을 만나서...

    김 덕 : 만나? 죽자살자 쫓아다닌 게 누군데....

    최 봉 : (덕의 모자를 가로챈다) 씨발놈이, 머리는 다 빠져갔고...

    김 덕 : (덕은 삽을 잡고) 빨리 내놔.



    봉은 모자를 던져 버린다.



    김 덕 : 빨리 원상복귀시켜. 안 시켜.

    최 봉 : 못 시킨다면?

    김 덕 : (삽을 들고 봉의 목을 칠 기세로) 너 죽여 버린다.

    최 봉 : 찍어. 못 찍으면 병신이지.

    김 덕 : 빨리.

    최 봉 : 꼴 좋다.

    김 덕 : 열 쉴 동안 원상복귀시켜. 하나

    최 봉 :......

    김 덕 : 둘, 셋, 넷, 다섯

    최 봉 :.....

    김 덕 : 여섯, 일곱

    최 봉 : ....

    김 덕 : 여덟, 아홉.

    최 봉 : 잠깐, 원상복귀하는데 확실히 해둘 게 있다.

    김 덕 : 뭐야?

    최 봉 : 아까 그 얘기는 내가 먼저 한 거야. 알았지? 내가 먼저 한 거다. 응?

    김 덕 : (삽을 놓으며)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해 바보야.



    덕은 삽을 놓고 술을 먹는다. 봉은 모자를 가져다 덕의 머리에 씌워준다.
    달이 간다.



    최 봉 : (삽질을 하다가) 나온다!

    김 덕 : (다가가며) 뭐 나와?

    최 봉 : 야 후레쉬! (흙이 묻어있는 해골을 꺼내며) 생긴 게 벌써 물건 같다.

    김 덕 : .....



    봉은 흙을 떨어낸다. 그리고 후레쉬로 비춰본다. 인공 젖꼭지를 물고 있는 해골이다.



    최 봉 : 우아! (해골을 떨어뜨린다) 해골이잖아. (입에 물려있는 젖꼭지를 뽑으며) 이게 뭐지?

    김 덕 :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며)애들 물려주는 젖꼭진데...

    최 봉 : 젖꼭지? 그럼 어떤 씨바날 인간들이... (해골을 보며) .... 그럼 저게...하여간 똥물에 튀겨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 같으니라구! (사이) 왜 얘기 안했어?

    김 덕 : ...

    최 봉 : 아 왜 얘기 안했냐니까? 니가 이 무덤에다 숨겨놨다며. 그럼 무덤 팔 때 저 해골도 봤을 거 아니야?

    김 덕 : ....

    최 봉 : 이 자식은 갑자기 벙어리가 됐나? 야!

    김 덕 : 내가 팔 땐 없었어. 내가 파묻고 난 다음에...누가.. 하여간, 그땐 없었다구.

    최 봉 : 없었단 말이지. 가만.. 그럼 우리말고 누가..... 파다가....

    김 덕 : 나와 봐.

    최 봉 : 왜?

    김 덕 : 글쎄 나와봐.



    덕은 파 놓은 구멍에 들어가 본다.



    김 덕 : 그래, 들어와 보니까 알겠다. 가슴까진 팠고, 그리고 이거보다는 위쪽. 그렇지 저 위쪽을 파봐.

    최 봉 : 정말이야?

    김 덕 : 그렇다니까. 더 깊게 묻었어요.

    최 봉 : 확실하지?

    김 덕 : 확실해. 이 쪽에다 묻었으면 내가 봤겠지. 안 그래?

    최 봉 : (해골을 발로 차며) 나와.



    덕은 나오고 봉이 다시 들어가서 땅을 판다



    김 덕 : (사이) 힘드냐?

    최 봉 : 그걸 말이라고 해.

    김 덕 : 그럼 돈 버는 일이 그렇게 쉽냐? 그것도 한두 푼도 아닌데.

    최 봉 :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사이) 아 따가워! 이거 뭐야? 땅벌이다.



    봉과 덕은 이리저리 도망다니다가 비닐을 뒤집어쓴다. 비닐은 그들의 이불이다.



    최 봉 : (비닐을 쓴 상태로) 아 따가워. 뭐 되는 일이 없냐!

    김 덕 : 아, 가만히 좀 있어!



    봉과 덕은 그 상태로 한참을 있는다.
    달이 간다. (긴 사이)
    봉은 벌에 쏘여 한 쪽 눈이 부었다.



    최 봉 : (삽질을 하며) 거 드럽게 아프네! 하필 물어도 나만 무냐?

    김 덕 : 거 봐라. 처음에 인사 올리라고 할 때 고분고분히 하지. 벌이다. 벌.

    최 봉 : (나와서 허둥지둥 비닐을 뒤집어쓴다)

    김 덕 : (봉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이) 진짜 무서운 벌이다. 벌. 응?

    최 봉 : 아주 갖고 놀아라. 놀아.

    김 덕 : (사이) 고마워.

    최 봉 : 뭐가?

    김 덕 : 내 대신 벌에 쏘여줘서.

    최 봉 : 이걸 그냥. 너 나 지금 많이 참고 있다. 돈만 아니었으면 팍. (삽을 잡고 무덤 안으로 들어가다가 벌에 쏘인 곳이 아파서) 아! 아 씨발, 얼마나 파야 있는 거야?

    김 덕 : 이제 다 팠어. (무덤 안을 보면) 한 한 자만 더 파면 되겠다.

    최 봉 : (사이) 너, 확실히 중이긴 중이였냐?

    김 덕 : 그럼. 옴 바아라 바사가리 아나맘나 훔.

    최 봉 : 옴 바아라 바가사리...

    김 덕 :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다라니라고 들어 봤니?

    최 봉 : 뭐? 다라이?

    김 덕 : 알 리가 없지. 다나니라고 불가에서 외우는 주문이다. 아까 내가 외운 건 땅 속에 숨어있는 거 찾을 때 외우는 주문이고. 좀 배워라 배워. 배워서 남 주냐?

    최 봉 : 나는 필요 없네. 너나 많이 배우셔. 그건 그렇고 하나 물어 보자. 너 나 여기 데려온 이유가 뭐냐? 너 혼자 왔어도 충분하잖아. 장소 알겠다. 일본 가는 길 확보되어 있겠다. 5억씩 처발라서 나를 여기 데려온 이유가 뭐야? 혼자 다니기 무서워서? 혼자 다니다가 물건 뺏길까봐? 그거야? 아니면? 말해봐.

    김 덕 : 니가 좋아서.

    최 봉 :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하지마 자식아.

    김 덕 : (다리를 보여주며) 봐라 좀. 한쪽 발로 어떻게 삽질을 하냐? 그리고 삽질할 힘도 없고.

    최 봉 : 힘이 없어. 아까 나 치려고 할 때보니까 대단하던데. 그리고 한쪽 발로 삽질을 못한다고. 못 하나 볼까?

    김 덕 : 해봐라. 되나?

    최 봉 : (한쪽 발을 들고 삽질을 해보다 넘어진다) 어--어!

    김 덕 : (웃으며) 거 봐라.

    최 봉 : (삽을 잡고) 아까 뭐라고 했지? 옴바아라 바가사리...

    김 덕 : 옴바아라 바사가니 아나맘나 훔

    최 봉 : 아다 만나 훔. 아다 만나 훔



    봉은 되지도 않는 진언을 외우며 신이 나서 땅을 판다. 덕은 술을 마신다.



    최 봉 : 다 팠다 이거지. ( 파다가 좋아서) 이거 나올 것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상상해봐. 푸른 바다 가르며 현해탄 건너는 너와 나를. 기가 막힐 거야.



    구름이 달을 가린다.
    사이.
    덕과 봉은 돈이 생겼을 때를 상상하며 환상놀이에 취한다.



    최 봉 : (덕은 썬그라스를 끼고 술병으로 뱃고동 소리를 낸다) 뱃고동이 좆통수 부는 한 메니 설움 메니 부산 하버. 밤은 깊어 칠흑 같은데 조국을 등지고 밀항선에 몸을 던진 두 사나이가 있었으니 갈매기도 슬피 크라잉

    김 덕 : 갈갈갈.....

    최 봉 :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것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매어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김 덕 : 자 가자 희망의 나라로!

    최 봉 : "가자 가자 바다로 가자...... 푸른 꿈이 넘실대는 저 바다가 부른다. 저 바다가 부른다."

    김 덕 : 통통배는 물살을 가르며 전진 또 전진! 통통통통통 똥!

    최 봉 : 이게 웬 똥이냐? 기관고장이냐? 아니면? 어떻게 알았는지 덤벼드는 뱃놈들. 중개인이 놈들과 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끝날 수 는 없다. 한 쪽으로 몰리는 덕과 봉. (봉과 덕은 등을 맞댄다) 봉은 칼을 빼든다. 놈들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덤벼든다. 덕은 봉을 들어 봉을 보호한다. (덕은 목발로 막는 시늉을 한다) 그 틈을 이용 봉은 칼을 놈들의 옆구리에 담근다. (칼을 찌르는 시늉을 하는 봉) 한 놈, 두 놈, 서이, 너이.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녀석들. 이제 남은 건 배신자. (덕이 배신자가 된다) 배신자는 숨을 곳을 찾지만 뛰어 봤자 통통배! 그러나 배신은 있어도 용서는 없다. 봉의 칼이 배신자를 향하는 순간. 놈은 현해탄에 몸을 던진다.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덕) 풍덩! 거품을 일으키고 말이 없는 현해탄. 아 왜 현해탄은 검은 것일까? 남은 것은 둘뿐. 망망대해. 그들의 표류는 시작된다. 어디로 가는 걸까? 목이 탄다. 배고픔의 나날 (덕은 담배를 피운다. 그 불빛을 보며) 저것이 무엇이냐? 드디어 보인다. 드디어 보인다. 불빛이 보인다.

    최 봉 : (전화 거는 흉내를 내며) 어이, 김사장, 나 봉. 나 차 하나 빼려고 하는데 말이야. 벤츠가 어떨까? 뭐? 안전하기는 볼바가 최고라고. 그래 그럼 내 차 빼는 김에 같이 빼서 보내지. 아 그냥 주는 거니까 받어. 어떤 색이 좋을까? 아무래도 섹시하게 핑크색이 좋겠지. (사이) 이봐, 주말에 온천 어때? 거기 애들이 빨통이 죽인다고 하던데...

    김 덕 : .....

    최 봉 : 뭐? 몸보신이나 하자고. 그것도 좋지. 한국에서 직수입한 반달곰 쓸개 있다고. 알았어.

    김 덕 : (삽을 무덤 밖으로 던진다).

    최 봉 : (이리 저리 움직이며 낙엽들을 흩뿌린다) 5억을 쫙 깔아놓으면 이거 보다 수북할 거야.

    김 덕 : 자 이제 묻어.

    최 봉 : (기뻐하며) 뭐? 나왔다고?

    김 덕 : 나 좀 묻어 줘라.

    최 봉 : 뭐라고?

    김 덕 : 흙을 떠서 묻으라고.

    최 봉 : 뭘 묻어?

    김 덕 : 너 귀먹었어? 그 삽으로, 흙을 떠서, 나를, 묻-으-라-고.



    봉은 황당해서 어이가 없다는 듯이 가만히 있는다.



    최 봉 : 뭐라고? (사이) 이 자식. 너 술 먹고 어떻게 됐구나. 왜 구멍을 보고있으니까 죽고 싶어 죽겠어? (덕에게 다가가며) 나와.

    김 덕 : 둘러봐. 아늑하니 어머니 품 같은 게 벌써 명당 같잖아.

    최 봉 : 나와. 지금 장난 칠 시간 없어. 자식아.

    김 덕 : 저 소나무 좀 봐. 정말 멋있지?

    최 봉 : 꼭지 돌게 하지 말고 빨리 나와.

    김 덕 : 죽을 자리치고 이만큼 좋은 데도 없을 거다.

    최 봉 : (덕을 무덤에서 끄집어 내며) 나와, 자식아.



    봉은 삽으로 흙을 계속 파헤친다.



    최 봉 : 자식이, 다 된 밥에 재 뿌리나.

    김 덕 : 공허사!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가 막혀. "공허사에는 불상이 없다!"

    최 봉 : 주둥이 닥쳐 자식아.

    김 덕 : 그만해!

    최 봉 : (계속 파며) 말이 안되지. 일본 가야지. 돈 한 번 멋지게 뿌려봐야할 거 아니야.

    김 덕 : 그만해! 제발. 다 거짓말이야. 내가 다 꾸며낸 이야기라구!

    최 봉 : ...

    김 덕 : 아무것도 안 나와. 제발 헛수고 좀 하지 말고 나와.

    최 봉 :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

    김 덕 : ....

    최 봉 : (무덤에서 나와 덕의 멱살을 잡고) 너 지금 장난치는 거지? 말해봐. 그렇지? 혼자 챙겨 갈려고 수작떠는 거지?

    김 덕 : 다 거짓말이야. 나는 중도 아니었고 불상을 훔치지도 않았고... 일본에 간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야. 다 너를 여기까지 데려오려고 꾸민 새빨간 거짓말.

    최 봉 : 새빨간 거짓말? 그럼..

    김 덕 : ....

    최 봉 : 왜?

    김 덕 : (사이) 나도 무덤 하나 갖고 싶었어. 그래 나를 묻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구. 둘러 봐도 통 나를 묻을 줄 사람이 있어야지. 그리고 무덤이라도 하나 있어야지 죽고 난 다음에 너라도 찾아오지. 자. 너 아니면 누가 해주겠어? 그러니까 이러지 말고 삽을 잡어.

    최 봉 : 그래서... 나를...

    김 덕 : 시키는 대로 하기로 약속했잖아.

    최 봉 : 돈은? 돈은?

    김 덕 : .....

    최 봉 : (아직 미련을 못 버리고) 다른 데다 숨겨놨지? 그렇지? 우리가 장소를 잘못 찾은 거지? (멱살을 놓고 삽을 잡으며) 맞어. 요 밑에도 무덤 하나 있었어.



    봉은 올라오면서 본 무덤으로 달려간다.



    김 덕 : (사이) 꿈 깨. 없어. 없다니까.

    최 봉 : (돌아오며, 넋이 나가서) 없어?



    덕은 무덤에서 나온 해골을 봉에게 준다.



    김 덕 : 자 받아. 불상이라고 생각해. 다 갖다가 붙이기 나름이야. 자꾸 불상이라고 생각하면 언젠가는 .... 그래 우리가 찾는 불상이라는 게 알고 보면 그저 이런 해골만도 못한 건지 몰라. 다 갖다 붙인 거고 다 거짓말이야. 끝까지 속아 보는 거야. 어때? 괜찮지? 뭐해?

    최 봉 : (해골을 보며) 사람을 갖고 놀아. 이게 불상이라구....난 돈이 필요하지 이 따위 해골이 필요한 게 아니란 말이야. 이 개자식아!



    봉은 해골을 집어던지고 삽을 들고 덕에게 달려간다. 덕은 눈을 감는다.
    봉은 삽을 내리친다. 봉의 고함. 구름이 달을 가린다. 풀벌레 소리
    달이 간다. (긴 사이)
    덕은 조용히 하모니카를 분다. 무덤에 꽂혀 있는 삽. 아무 말이 없는 봉.



    김 덕 : (하모니카를 주며) 가져. 이걸 불 땐 눈을 감고 불려야 돼. 꼭

    최 봉 : ......

    김 덕 : 부를 줄 모르지. 배워. 배워서 나한테도 들려 줘. 찾아올 거지 응?

    최 봉 : ......

    김 덕 : 1년에 한 번씩만 오늘처럼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있고 달도 밝을 때. 와서는 꽃도 따다 바치고 노래도 들려주고...

    최 봉 : .....

    김 덕 : 그 전엔 찾아오면 안된다. 알았지?

    최 봉 : ....

    김 덕 : 낮에는 햇빛도 잘 들 거야. 지난 겨울은 무척 추웠지? (사이,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돈을 꺼내준다) 얼마 안돼. 받아.

    최 봉 : .....

    김 덕 : 침낭이라도 하나 사. 올 겨울은 나야지.

    최 봉: (해골을 쳐다본다. 어이없다는 듯이) 이게 불상이라구.

    김 덕 : 그건 다 끝난 일이야. 한 번 속아 줄 수도 있었잖아.

    최 봉 : 맞을래?

    김 덕 : 각본대로라면 너는 나를 죽여야했어. (사이) 너 내가 왜 이러는지 알고 싶지? 잘 들어라. 사실은 부처님이 보낸 사람이거든. 내가. 그러니까 부처님 사는 세상에서 온 사람이라 이 말이야. 거기서 보니까 이 최봉이라는 거지가 말이야. 혼자 먹지도 못하고 추위에 벌벌 떨고 있는거야. 부처님이 나보고 가서 말벗이나 해주고 와라. 그래서 이 몸이 거지로 변장을 하고 세상에 나온 거지. 저 무덤은 내가 나온 곳이야. 그리고 저리로 나왔으니까 저리로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겠지 안 그래? 시간이 됐어.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된 거야. (돈을 봉의 호주머니에 넣어 주며) 내가 가진 거 다 너 주고 가야하는 거라구. 알았어? 줄 게 별로 없어. 얼른 받아. 심각하게 생각할 거 없다니까.



    봉은 일어나서 덕의 싸대기를 사정없이 때린다. 내려가는 봉



    김 덕 : 어디 가? 묻어주고 가야지. 야 기다려. 개자식!



    사이. 덕은 무덤 안에 들어간다. 흙을 자기 몸에 뿌린다. 돌아오는 봉



    최 봉 : (무덤가를 헤매며) 이상하네. 어디 갔지?

    김 덕 : .....

    최 봉 : 여기다가 버린 거 같은데, 흙 속에 묻혔나?

    김 덕 : ....

    최 봉 : (무덤 속을 살피며) 안에 들어갔나? 나와 봐. 자식아.



    덕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



    최 봉 : 나와 보라니까.(사이) 괜찮아? (사이) 무덤 하나 갖고 싶어? 그거야? 그거면 걱정하지마 너 죽으면 고이 모셔다 여기에 묻어줄게. 싫어? (복권을 찾아 돌아다니며) 이렇게 사는 게 어때? 속편하겠다. 누가 뭐래? 즐겨, 이 생활이 어때서? 여기 있네. (복권을 잘 펴서 호주머니에 넣는다) 아 씨발, 1억 날릴 뻔했네. (목발을 주며) 내려가자. 너 바다 가고 싶다고 그랬지. 그냥 홀라당 벗고 냅다 바다로 뛰어 들어보는 거야. 혹시 알어? 니 말대로 잠지가 벌떡 슬지. (사이) 같이 가자. 내가 데려다 줄게. 싫어? (사이) 좋다. 인심 팍 썼다! 복권 당첨되면 한 3천 떼 주지.

    김 덕 : (모자를 벗으며) 아직도 모르겠어? 봐. 보라구.

    최 봉 : 죽을 일도 쌨다. 너같으면 대머리는 다 뒈져야 하겠다 새끼야. 도대체 뭐가 문제야?

    김 덕 : 뭐가 문제냐구? (덕은 무덤에서 나와 해골을 가져온다) 다 말해 주지. 그래 니 말대로 이건 무덤에나 가져가는 비밀이다. 나야. 이 애를 죽인 건 나라구. 젖꼭지 물려 그 어린 것을 파묻은 놈은 나라구. 보라구 이 꼴을 만든 건 나라구. 나! 어때 비슷하게 생겼지? 재미있지?

    최 봉 : 진짜 닮았다. (짐을 챙기며) 잔 말 말고 내려가자.

    김 덕 : 내려가서 뭘 어쩌라고?

    최 봉 : 내려가서....다시...



    덕은 자기 옷을 벗는다. 알몸이 된다. 봉은 그 몸을 본다.



    김 덕 : (모자를 씌워주며) 줄 게 별로 없어. (꽃을 들고 구덩이 있는 곳으로 간다) 이제 다 끝났어.

    최 봉 : .....

    김 덕 : 저 구멍에서 나를 부르고 있어. 나를 기다리고 있다구. (들어가 누운다) 뭐해? 삽을 잡어. 싫어? 최 봉 : (사이. 술을 마신다. 덕을 쳐다보다가 결심을 한 듯) 훔칠 게 없어 남의 무덤을 훔쳐. 그래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삽을 잡고 흙을 덮는다)

    김 덕 : 잘한다. 진작 그랬어야지.

    최 봉 : 내가 너 죽는다고 눈 하나 깜짝할 거 같냐 자식아.

    김 덕 : 우리 그래도 잘 놀았다. 너 지금 정말 묻고 있는 거지?

    최 봉 : 그럼 파냐, 자식아?

    김 덕 : 봉아, 죽기 전에 너한테 진짜 내 비밀을 말해주겠다. 이건 진짜 정말이야. 사실은

    최 봉 : ...

    김 덕 : 사실은 내가 콧구멍이 두 개다. 하하

    최 봉 : 뭐야? (삽을 들어서 치려하며) 개자식 끝까지 사람 갖고 놀아. 이걸 진짜.

    김 덕 : (기쁨에 차서 일어나며) 히히히! 찾아 올 거지. 와서 같이 논만큼만 울어 줘라. 한차례 비가 올 거야. 그러면 겨울이 오겠지. 바람이 불고 펄펄 눈이 내린다. 그래도 춥지 않을 거야. 봄, 봄이 온다. 눈은 녹아 내리겠지... 노란 개나리, 연분홍 진달래, 하얀 찔레꽃, 노오란 민들레, 연보라 제비꽃, 할미꽃... 새들이 지겹게 운다. 내 몸이 간질간질하다. 내 몸을 파고드는 뿌리들. 나는 내 몸의 물기를 다 내준다. 내 눈, 내 입, 내 코, 내 귀를 파고 들어오는 풀뿌리, 나무 뿌리, 뿌리 뿌리들. 그 수많은 잔털들... 비가 오겠지. 여름이다. 천둥이 치고 번개가 내 머리 위에 내리쳐도 나는 꿈적도 하지 않을 거야. 쑥부쟁이가 피어난다. 산들산들 바람이 불면 저어기 니가 온다. 저기 온다. 꽃을 꺾어들고 엄벙덤벙 웃으면서 니가 온다. 온다. 봉이 온다! 살아 있구나 이 놈 봉이! (사이) 그래. 그 삽으로 나를 쳐. 이번엔 확실하게.

    최 봉 : 치라면 내가, 내가 못 칠 것같애 자식아. 나도 한다면 해.



    봉은 삽을 높이 쳐든다. 그러나 치지 못한다.



    김 덕 : 어서. 저 꽃들이 보고 있어.

    최 봉 : ... (삽을 내린다)

    김 덕 : 제기랄, 해가 뜨고 있잖아! 어서.

    최 봉 : (삽을 다시 올린다)

    김 덕 : 너는 나를 버리지 않을 거고, 그리고 언젠가는 내 품에 안길 거고... 자 어서. 서둘러. 보라고 날이 새고 있다고. 어서!



    둘은 움직이지 않는다. 푸른 여명이 하늘에 가득하다.
    김태웅

    김태웅

    1966년 경기 남양주 출생

    서울대 철학과 졸업

    공연예술아카데미 수료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전문사 과정

  • <달빛유희>를 뽑고나서

    - 이윤택


    예년에 비해 응모작 편수는 늘어났지만 당선 대상 작품을 가려내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종이배' (강석현), '비철금속성' (여승현), '달빛유희' (김태웅) 세편은 '상투적 근대성'을 극복한 작품이다. '종이배'는 너무도 친숙한 우리의 설화, 그러나 잊고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 내었다는 점에서 놀라운 발견의 묘미를 준다. 그러나 극적 긴장과 충돌에서 실패한다. 다시 쓰기를 권한다. '비철금속성'은 공연성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이럴 경우 본인이 직접 연출하거나 극단을 찾는 수밖에 없다.

    '달빛유희'를 당선작으로 선택한다. 앞의 두 작품에 비해 덜 개성적이지만 그만큼 객관적인 연극성을 확보하고 있다. 상당히 현학적인 화두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었다는 점에서 작가의 연극에 대한 안목을 믿을 수 있었다. 살아남는 작가가 되기를 바란다.
  • 김태웅

    김태웅

    1966년 경기 남양주 출생

    서울대 철학과 졸업

    공연예술아카데미 수료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전문사 과정

    어느 해, 봄날 지리산 이름 모를 후미진 골짝을 찾아든 적이 있다. 물론 동행들도 있었다. 살랑이던 바람, 가지들 사이로 빠져든다? 그렇다. 끌려 들어간 느낌이 짙다. 어느 여울목 너럭바위 위에 걸터앉아 염소처럼 갓 고개를 내민 이름 모를 풀잎들 씹으며 매장된 역사, 매장된 전설을 생각해 보고 있었다. 일행 중 하나는 흐르라는 뜻을 오독했는지, 아니면 돌이 되고 싶었는지 물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의 팔다리가 없어진다. 그의 몸뚱이가 없어진다. 그의 얼굴만 남다가 그 얼굴도 없어진다. 그 얼굴이 없어진 자리, 그의 얼굴이 찢어놓았던 그 공간에 둥근 빛덩이 하나만 남는다. 겁이 난다. 그리로 빠져들 것만 같다. 그래도 본다. 그 빛덩어리가 타들어간다. 그것은 암흑이면서 빛이었다. 보이지 않던 까마귀 한마리가 이제 막 날갯짓을 치며 비상한다.

    돌아와 꿈을 꾼다. 왼쪽 넓적다리를 무언가 몹시 쪼아댄다. 넓적다리를 찢고 무언가 나온다. 그걸 손으로 끄집어낸다. 부리가 달린, 긴 머리의 여자다. 팔다리는 새의 그것이다. 그것이 까맣게 죽어서 내 손에 잡혀 있었다. 저기서 어머니가 광주리에 감자를 담아 내게로 오시는데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내가 어디 나인가? 주마(酒魔)가 될 잡놈을 연극의 길로 인도해 준 선생님들과 미술, 음악, 영화, 무용 형태는 다르지만 나의 육체적 정신적 토양일 된 학교의 분위기, 그리고 삶의 훈기를 느끼게 한 모든 사람에게 쑥스러운 고마움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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