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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복수한다. 고로 존재한다-〈친절한 금자씨〉와〈오로라 공주〉를 중심으로’

by  이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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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스크린 속에서 사라진 여성들이 다시 출몰하고 있다. IMF 금융 체제 이후 쏟아져 나온 무수한 한국 영화들은 남성 주체들을 위로하듯, 점점 구석으로 내몰리는 문제적 남성들을 그들의 영화장으로 불러왔다. 심지어 적대 관계인 남성 주체들은 그 영화장에서 남성 동성 사회속의 남성 연대로 무장하거나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웰컴 투 동막골> 그리고 아마도 <태풍>까지) 경쟁에서 밀려나 좌절한 남성들은 그들의 상실과 회복 혹은 이의 불가능성에 대해 토로한다.(<파이란>에서 <달콤한 인생>까지) 이때 여성 주체들은 한국 영화장에서 다만 미치거나(<웰컴 투 동막골>), 비천하거나(<너는 내 운명>), 남성들의 교환 대상으로 스쳐지나갈 뿐 그녀 자신의 목소리를 온전히 낼 수 없었다.

    '억압된 것은 회귀한다'는 프로이트의 오랜 문구처럼 지금 한국 영화장에는 이 사라진 여성들이 하나 둘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자신들이 비워둔 자리를 되찾겠다는 듯 복수의 칼을 품고. 박찬욱 감독의 이른바 복수 3부작 완결편인 <친절한 금자씨>와 방은진 감독의 데뷔작 <오로라 공주>는, 아니 이금자와 정순정은 그리하여 더욱 특별하다. 복수의 양상과 전개는 다르지만 이 두 영화는 모두 여성이 복수를 수행하는 이야기이다. 또는 <친절한 금자씨>와 <오로라 공주>는 결국은 아이(유괴)를 사이에 두고 펼쳐지는 여성(엄마)의 이야기이다. 즉 <친절한 금자씨>의 이금자가 복수의 수행 중에 딸 제니를 되찾으면서 모성을 회복한(만들어가는) 경우라면, <오로라 공주>는 엄마 정순정이 딸 민아의 상실을 복수로 애도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친절한 금자씨>, <오로라 공주> 이 두 영화를 가로지르는 것은 그러나 어쩌면 '여성 복수극'이라는 외피보다는 차라리 어떤 정서 즉 '상실'이다. 이는 '복수욕'의 상실일 수도 있고, '모성'의 상실 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면「슬픔과 우울증」에서 프로이트가 지적한 대상 상실로 인한 반응 기제로서의 우울증은 이 여성 복수극을 추적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밑그림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라캉을 경유한 지젝을 통하여 그녀들의 복수를 '환상 스크린'으로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친절한 금자씨>와 <오로라 공주>의 그녀들은 그녀 주변의 집단 혹은 사회의 누군가가 그녀들이 저지르는 복수(범죄) 수행을 바라보기를, 알아차릴 것을 귀띔한다. "난 당신을 내 범죄에 끌어들이고 있어요"라고 선언하듯, 자신들의 복수(행위 과정 혹은 결과)를 전시하며 관객을 초대하는 그녀들의 복수극. <친절한 금자씨>와 <오로라 공주>가 손짓하는 그 잔혹 극장 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1. 복수는 그녀가 꾸는 꿈 - <친절한 금자씨>

    박찬욱 감독에게 있어 복수는 죄의식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자 의지의 표명이다. 유괴로 시작된 복수의 연쇄를 통해 부조리한 계급 문제와 현실을 묵직하게 포착한 잔혹 비가(悲歌) <복수는 나의 것>. 멈출 수 없는 폭주 기관차처럼 복수를 향해 돌진했던 비정한 가족 로망스 <올드 보이>에 이어 박찬욱 감독은 <친절한 금자씨>에서 여성 복수극의 표방과 함께 구원과 속죄를 통한 복수라는 윤리 문제를 건드리고자 한다. 3부작으로 이어지는 이 복수극의 행보에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 복수를 주고받으며 '복수'를 통한 인간관계 그리고 사회를 보여준다.

    '복수'를 향하여 절박하게 혹은 정당하게 고군분투했던 이전작의 복수씨들과는 달리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는 우아하게 복수를 '수행하고자' 한다. 커다란 선글라스, 복고풍 패션 그리고 하이힐로 무장된 그녀는 이 자체가 제의인 양 서두르지 않고 또각또각 복수를 향해 걸어 나간다. 심지어 '착하게 보일까봐' 바른 빨간 색 아이섀도 역시 그녀의 여성성을 위악적으로 과장하고 있지만, 그래도 금자는 여전히 예쁘다. 이런 그녀이기에 금자는 감방 동기에게 총을 건네받을 때에도 "무조건 예뻐야 돼"라며 복수 과정에서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보이는 이러한 장식성은 세트 미학이라 할 수 있는 박찬욱 감독 특유의 스타일 과잉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두 전작들과는 달리, 이번에는 감독 스스로가 '여자'가 치르는 복수극이라는 것을 의식한 나머지 그 방점을 과잉 여성성으로 잘못 설정한 우이기도 하다. <친절한 금자씨>는 그리하여 복수까지 삼키는 거대한 장식성에의 욕망으로 환원된다.

    전작의 복수씨들과는 달리 금자에게 있어 복수는 일단 미적 쾌/불쾌의 재료이다. 이렇게 보면 교도소의 여성 공동체를 위협하는 마녀라는 존재는 미적 쾌락을 추구하는 금자와 완전한 대척점을 이루는 미적 불쾌의 표본이다. 마녀는 바람난 남편과 정부를 죽여 그 인육을 먹고 교도소에 수감된 비천한 존재이다. 그로테스크한 몸과 육식성의 이미지에 걸맞게 마녀는 폭력과 가학, 살해충동 등의 공격 성향을 드러내는데 이는 친절한 금자씨가 절대적으로 피해야 할 복수 방법론처럼 묘사된다. 금자가 보여주는 폭력성은 다만 교도소 출소 후 자신이 유괴한 아이 원모의 부모를 찾아가 스스로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는 다소 엉뚱한 자해뿐이다.

    이는 금자의 복수가 처음부터 구원과 속죄를 그 출발점으로 하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친절한 금자씨>는 금자에게 이 미적 쾌라는 강박을 부여하면서, 복수를 수행하는 그 과정 자체에 그 한계를 미리 설정한다. 즉 금자에게는 '그를 죽여야 한다'라는 복수의 당위보다는 그를 어떻게 '미학적으로' 죽일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즉 금자는 제니와의 이별(백 선생의 죄) 그리고 자신의 유배로 인한 우울증의 그림자를 복수라는 그녀의 미적 취미로서 지우려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복수는 나의 것>, <올드 보이>가 복수만을 향해 질주하던 우직한 복수극이었다면 <친절한 금자씨>는 오히려 잔혹동화에 가깝다. '하얀 눈이 내리는 설국(雪國)의 빨간 구두 아가씨는 과연 그녀를 악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개(백 선생)에게 어떻게 복수하여 아이를 되찾을 것인가'를 장식적으로 보여주는 잔혹동화.

    빨간 구두 아가씨 금자는 <복수는 나의 것>의 동진처럼 아이를 잃었지만(그러나 살아있는), 그리고 <올드 보이>의 오대수처럼 그녀의 과거를 저당 잡혔지만(그러나 그녀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그녀는 이들처럼 복수 자체로 끝장을 보려하지 않는다. 금자는 오히려 복수의 가속도를 늦추어 전혀 다른 길로 들어선다. 즉 그녀는 한창 복수를 진행시킬 찰나에 딸 제니를 데려오면서 그 속도에 제동을 가하고, 백 선생의 또 다른 범행을 확인한 순간 돌연 복수의 기회를 양보하면서 그 방향을 선회한다.

    이로서 <친절한 금자씨>는 교도소에 있었던 과거와 복수를 준비하는 현재가 씨줄과 날줄처럼 뒤섞이며 흥미롭게 진행되던 전개를 뒤로 한 채, 제니의 등장과 함께 복수의 지연을 예비하는 한편 모성애를 제기한다. 13년 만에 제니와 재회한 금자가 처음에 취한 제스춰는 그러나 그 흔한 눈물의 포옹이 아니라 그저 덤덤함이었다. 심지어 "what do you call mom in korean"이라고 묻는 제니에게 금자는 엄마가 아닌 '금자씨'라고 대답한다. 어머니의 자리를 비워두고 애증으로 어머니를 기다리는 제니에 비해 금자는 아직은 그 어머니라는 자리가 서툴다. 그러나 금자는 제니에게 자신의 죄, 백 선생의 죄(자신을 죄인으로 만든 죄)를 고백하고, 어쨌든 죄인을 처단한다(그녀가 직접 집행하지 않았지만). 그리고 마침내는 전도사가 전해주는 두부가 아닌 그녀가 손수 만든 케익으로 제니 앞에서 속죄한다. 그리하여 금자는 복수의 양보라는 우회로를 택하여 복수로써 그녀의 죄를 속죄하고, 이 복수극을 어머니 되기의 제의로 완성해낸다.

    <친절한 금자씨>는 또한 금자의 이 어머니 되기로 인해 교도소 동기들의 연대에 의한, 여성 집단의 카니발적 복수극으로 흐를 수도 있었을 도발적인 전개를 피해간다. 즉 교도소 동기들이 단순히 기능적으로 등장한 채 사라지면서 그녀들의 연대는 이내 폐기되고, 금자는 결국 제니와 그의 어린 연인 근식에게로 안착한다. 이 영화에서 이상한 점은 제니가 이처럼 애타게 어머니를 찾는데 반해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아예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아버지 자리는 완전한 공백, 아니 무인데 영화는 이에 대한 질문이나, 이로 인한 분열과 혼란은 전혀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제니에게 있어 금자는 어머니이자 아버지이다. 혹은 폐교에서 근식이 제니에게 '오빠' 대신 '아빠'를 가르쳐주었듯, 금자와 제니 그리고 근식은 이미 유사 가족을 형성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문제시되는 것은 바로 폐교에서의 심판 장면이다. 이는 금자가 비로소 복수 행위를 완성해야 할 찰나에 이를 희생자 집단에게 떠넘기면서 그 동안의 전개를 뒤집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토록 복수를 준비하던 금자는 왜 자신의 복수를 희생자 가족에게 양보한 것일까. 이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어쩌면 이 복수극은 금자가 꾸는 꿈이라는 것이다. 금자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때는 어쩌면 교도소에서 나와 복수를 집행하는 그 순간이 아니라 복수를 준비하던 순간 즉 복수를 꿈꾸던 13년간의 감옥 생활일 것이다. 눈벌판에서 개가 된 백 선생을 총으로 쏘는 금자의 인상적인 환상 장면은 말 그대로 꿈이지만 사실 이미 이때 금자의 복수는 실현된 것이나 다름없다. 또는 그래서 금자는 복수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금자는 속죄인 동시에 자신의 쾌락인 그 복수의 즐거움을 좀 더 연장하고자 자신이 응당 해야 할 복수를 지연시키거나 유보한 것이다. 혹은 그녀의 복수는 어찌 보면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금자는 그녀의 복수에 대한 욕망을 희생자 집단 즉 타자가 대신 실연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복수라는 꿈을 계속 꾸면서 자신의 삶을 연장하려 한다.

    즉 금자에게 있어서 복수는 그녀의 존재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실재의 조각이라고 할 수 있다. 금자는 굳이 자신이 복수해야 할 이유를 찾지 않는다. 혹은 금자는 자신이 백 선생에게 복수해야 한다고 믿고 있지만, 그의 '어떤 것을' 복수해야하는 지는 모르고 있다. 따라서 그녀는 오히려 이 복수라는 대상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대신 복수의 미학, 복수의 유희에 집착하면서 정작 자신의 복수를 양보해 버린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금자의 복수 의지는 그녀에게 즉각적인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백 선생의 또 다른 희생자 비디오를 보고 다시금 되살아난다. 이 순간 금자가 여기에서 한발 물러나 복수를 떠넘기는 것은 '복수' 자체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금자의 백 선생에 대한 애증병존의 감정에서도 느낄 수 있다.(금자가 백 선생과 재회했을 때를 떠올려보라. 그때 금자는 물론 백 선생을 쓰러뜨리지만, 이내 쓰러진 백 선생에게 다가가 입가에 묻은 밥풀을 떼어주기도 하는 미묘한 순간.) 금자는 이 복수가 자신의 상실감을 치유하지는 못할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그녀는 결정적 순간에 주저하면서 머뭇거린다.

    이러한 복수의 양보, 자리이동은 금자를 복수극의 관객이자 감독으로 만들기도 한다. 백 선생에 대한 심판 장면에서 금자는 여전사처럼 스스로 처형을 집행 할 듯, 검은 가죽 재킷과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희생 제의의 연극을 우스꽝스럽게 패러디한다. 이때의 금자는 구원을 갈망하는 우울한 수난자로서의 뱀파이어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는 복수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제의의 잔혹극을 '보는' 혹은 '연출하는' 존재이다. <친절한 금자씨>는 결정적인 순간에 또 다른 희생자 가족을 등장시킴으로서 금자 개인의 복수극에서 갑자기 희생자 집단의 제의극으로 변모해버린다. 즉 금자는 법의 수호자이자 집행자여야 할 무기력한 형사를 증인으로, 다른 희생자들의 부모들을 주연으로 하는 잔혹 연극(그 연극적인 미장센!)을 연출해낸다. 냉정하게.

    금자는 그리하여 복수라는 이름의 이 제의극의 제 1 관객이자 예술 총감독이 된다. 그리하여 이 제의가 끝난 후 싸늘하게 죽은 백 선생의 얼굴에 금자는 그녀의 낙관을 찍듯 총을 쏜다. 이로서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는 자신의 복수 행위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행위 예술로서 그것을 통과한다. 그리고 금자는 어머니로서 다시 태어난다. 이 대단원은 그러나 어떠한 별다른 카타르시스를 남기지 않으며, 다른 의미화의 가능성을 열지도 않는다. 이는 그 자체로 괄호 쳐진, 닫힌 프레임으로 기능할 뿐이다.

    2. 슬프거나 복수하거나 - <오로라 공주>

    <복수는 나의 것>, <친절한 금자씨>도 그러했지만, <오로라 공주>의 그녀에게 있어서 문제적인 것은 아이의 상실(혹은 유괴)이다. 한국 영화에서 어머니라는 자리가 할당된 여성 주체에게 있어서 가족 그리고 아이와의 관계 설정과 태도는 곧 그녀를 설명하는 주요 잣대이다. 여기서 잠시 <바람난 가족>의 호정의 상황으로 거슬러 가보자. 호정의 아들은 우편배달부에게 납치당해 그야말로 집어던져진다. 늘 자신의 몸을 즐겁게 운용하며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했던 호정은 아들을 잃어버린 상처와 상실감을 산을 오르면서 혹은 그 슬픔과 울분을 고등학생과의 섹스를 통해 토해내면서 치유했다. <바람난 가족>의 이 충격적인 유아 살인 장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시에 장면화되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최근 영화의 대답이 바로 여성 복수극이다(자기 아이에 대한 왕따의 책임을 어머니(서윤희) 스스로가 살인으로서 묻는 형사 스릴러<6월의 일기>도 여기에 묶을 수 있다).

    아이를 기억하기 위한 혹은 스스로 책임을 묻고자 하는 이러한 '어머니 잔혹극'은 모성 이데올로기의 변화를 보여준다. 숨죽여 우는 어머니가 아닌 어머니의 이름으로 칼을 내리꽂는 어머니. 즉 <오로라 공주>는 어머니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복수의 태피스트리이다.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가 끝까지 금자씨임을 고수하려 했던 것과는 달리 <오로라 공주>의 정순정은 오민아의 어머니임을 연쇄 살인극으로서 증명한다. 다시 말하자면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가 그녀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복수극이었다면 <오로라 공주>는 어머니 정순정이 아이를 애도하기 위한, 애도하지 못한 슬픔을 살인으로 상연하는 퍼포먼스이다.

    여성 주체의 좌절된 욕망과 상실을 통해 여러 사회 문화적 모순을 가시화하는 서사, 그것이 바로 멜로드라마이다. 그동안 멜로드라마에서는 여주인공의 이러한 상실을 눈물과 함께 극대화하면서 여주인공을 피학적으로 그려내었다. <오로라 공주>의 정순정은 이와는 정반대이다. 이 어머니, 약자는 이 원한 의식을 내부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 기꺼이 표출한다. 즉 정순정은 아이의 상실에 직면했을 때 가학적인 폭력을 사회로 분출한다. 아이의 상실(모성)을 회복하려는 정순정의 필사적인 노력, 그것이 바로 연쇄 살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어머니'로서의 정순정이다. 이로서 <오로라 공주>는 피해자들 간에 어떤 연관도 찾을 수 없어 미궁에 빠진 연쇄살인극이라는 스릴러 장르의 외피 속에 과잉적인 모성이 기입된다. 특히 택시기사 살해 장면에 이르면 그동안 형식적으로 스릴러의 서사였던 <오로라 공주>는 모성에 그 방점을 옮긴다. 정순정은 이때 갑자기 자신의 딸 민아의 목소리를 복화술처럼 쏟아내면서 어머니의 자리를 확고히 한다. 그리하여 <오로라 공주>는 스릴러와 멜로 혹은 모성멜로와 모성복수극 사이를 누비면서 분열한다.

    한편 변호사 김우택은 정순정에게 "자기는 그 예쁜 몸을 무기로 하지 않아서 좋아"라며 짐짓 정순정의 모든 것을 안다는 듯이 말한다. 이때 김우택은 이를 '자신의 여성성을 담보로 해서 그녀의 욕망을 충족하려하지 않는다'는 의미로서 말했을 것이다. 이는 그가 그녀에게서 정순정의 자족성 즉 그녀의 나르시시즘을 보았기 때문이다. 뭔가 무료한 듯 복수 이외의 욕망에 심드렁해 보이는 미적 나르시시트 금자씨처럼 정순정도 민아의 복화술이 있기 전까지는 자기애로 충만해 보인다. 그러나 <오로라 공주>는 여성의 자족성을 나르시시즘에서 찾은 프로이트처럼 이 나르시시즘인 여성을 길들이는 한 방식으로 모성을 예약해둔다. 이로써 정순정은 숭고한 어머니와 모성 괴물의 사이 그 어딘가에 있는 존재가 된다.

    라캉을 경유한 지젝이 지적한 '두 개의 죽음'처럼 정순정의 딸 민아는 상징계 속에서는 이미 죽어버린 존재다. 그러나 살인 현장에 남겨진 오로라 스티커처럼 정순정이 민아의 죽음을 기억함으로서 민아는 실재계 속에서 여전히 계속 존재한다. 그리고 이 두 죽음 곧 실재적 죽음과 상징적 죽음 사이의 간극에 출현한 괴물이 바로 어머니이면서 민아인 정순정이다. 더구나 정순정은 프로이트의 우울증 기제를 행간 그대로 행동에 옮기면서 정신 분열 자체를 의도적으로 연기한다. 이는 상실한 대상(민아)을 자신(정순정)에게 합체시킨다는 상실 대상과의 동일시 전략, 즉 우울증 전략의 적극적인 차용이자 노골적인 상연이다.

    정순정은 민아의 복화술로서 민아의 죽음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사람들을 처단하는 복수 전략을 구사하는데, 이는 곧 복수를 수행하고 있음을 전시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이 분열과 오열의 전략은 물론 정순정이 정신 감호소에 들어가 진정으로 복수할 상대에게 복수하기 위해 짜낸 고안이다. 이를 통해 민아를 자기 안에 통합시킨 아니 오히려 민아에 의해서 삼켜진 정순정은 최후의 궁극적인 복수 수행 후 민아(정순정)의 두 번째 죽음(실재적 죽음)을 스스로 맞이한다. 무엇보다 정순정이 행하는 민아의 복화술 자체는 위장된 정신 분열전략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녀는 실제로 민아와의 분열이 성공적이 않았기에(민아의 상징적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분열적인 모성 괴물(폭력적이고 응징적인 어머니)로 남겨진다.

    해소되지 않은(못한) 슬픔의 침전물로서의 분노는 또한 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볼 수 있다. 슬픔이 발화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는 한, 이 상실에 대한 분노는 부인되면서도 오히려 남아 있으면서 점점 배가될 수 있다. 문제는 이 분노를 어떻게 공적으로 처리할 것인가이다. 즉 이 슬픔을 집단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집단적인 제도화가 필요하며, 이 요구로 인해 탄생한 것이 곧 법이다. 이러한 분노와 슬픔의 조절은 주체의 생존에 핵심적인 것이며, 나아가 주체들 간의 관계 유지를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그러나 이 슬픔을, 분노를 다스리기 위한 그 법 제도에서 정순정은 구멍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정순정은 이 구멍 자체를 연쇄살인극으로서 패러디함으로서 해소되지 못한 자신의 분노를 피로 물들이면서 처리해나간다.

    자신의 죽음까지 포함하는 <오로라 공주>의 이 신파적 복수 플롯은 정순정이 사회 자체를 무대로 연출한 거대한 잔혹극이다. 목사를 꿈꾸는 아버지-형사는 정작 자신의 딸은 물론 아내였던 정순정의 구원은 커녕 정당한 법의 구현자체에도 실패한다. 이 아버지-법이 실패한 자리에서, 혹은 사회가 방기한 자리에서 어머니 정순정은 법을 조롱하며 그녀의 목적을 위해 오히려 법의 처벌을 의도한 것이다. 그러나 정순정의 이 정신분열은 단순히 위장된 광기가 아니라 연출하려는 욕망이기도 하다. 그녀는 단순히 무대 위에 선 배우가 아니라 자기가 어떻게 보일지를 아는 그래서 자신의 의도대로 보일 수 있도록 만드는 연출가이기도 하다.

    서울의 이곳저곳을 피로 물들이면서 도심 자체를 하나의 기이한 풍경화로 만들었던 <텔미 섬딩>처럼 <오로라 공주>는 백화점에서 쓰레기 매립장까지 도시 전역에 걸쳐서 정순정의 범죄를 전시한다. 심지어 정순정은 TV 매체까지 불러 법 앞에서 애도하지 못한 슬픔을 살인 퍼포먼스로 상연하며 오열한다. 즉 정순정은 모성이라는 도덕적 정당성을 등에 업고 일부러 법에 저항하는 행위를 저지르면서 허점투성이인 법 체제를 조롱하는 가면무도회를 벌이고 있다.(눈물 젖은 얼굴을 한 채 얼굴 한 켠에 하얀 마스크를 들고 있는 엄정화가 메인인 <오로라 공주>의 포스터는 그리하여 얼마나 제격인가!)

    그러나 모성이라는 실로 꿰매진 이 복수 퍼포먼스 <오로라 공주>에서 이상한 것은 바로 민아가 자주 불렀던, 그래서 정순정이 범죄를 행할 때 마다 끊임없이 울려 퍼졌던 민아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민아가 좋아했다던 오로라 공주의 주제가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금 거기에 없는 아빠를 부르는 노래이다. '이제 난 알아요. 아빠의 마음을. 인생은 혼자라고.' 굳이 아버지의 빈자리에 대해 묻지 않았던 <친절한 금자씨>와 달리 <오로라 공주>는 아버지 존재를 항상 상기시키면서 부성의 증거를 끈질기게 요구한다. 이는 싱글맘 정순정이 민아의 입을 통해 민아의 아버지-오성호(형사)를 향해 부르는 복화술이다. 즉 민아의 노래는 실종된, 공백의 아버지를 애타게 찾아 메우려는 정순정의 속삭임인 것이다. 응징적인 어머니 정순정은 이 결핍된 부성의 징후로 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버지 오성호는 이 노래에 화답하듯, 무기력한 허점투성이 법과 종교 모두를 버리고 복수의 길에 뛰어든다. 이로서 이 셋은 비로소 완전한 가족임을 확인하면서 이 여성 복수극은 또 하나의 가족 서사로 마무리된다.

    나오면서

    한동안 한국 영화장에서 사라진 혹은 주류 서사에서 삐져나온 그 비천한 여자들이 '여성 복수극'을 통해 귀환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억압된 것이 어디로부터, 어떤 양상으로 회귀하느냐?'일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친절한 금자씨>와 <오로라 공주>는 그동안 남성 서사만 진열되던 한국 영화장에서 여성들을 전면에 내세운 복수극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 두 영화 속의 금자씨와 정순정은 아버지라는 이름의 법을 교란하고 방해하는 얼룩으로서의 아마조네스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친절한 금자씨>와 <오로라 공주>의 그녀들은 가부장적 질서의 세계를 물어뜯고, 남성들만의 세계에 흠집을 내고, 그들만의 세계를 마음껏 휘저으면서 그녀들만의 카니발을 벌일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그녀들의 우울증을, 상실감을 폭력에 실어 내보냈을 뿐이다.

    물론 사회로부터 배제된 자로서의 슬픔과 분노는 멜로드라마에서의 눈물이 그러하듯 적절한 배출구가 필요하다. 그녀들은 눈물 대신 분노와 폭력으로서 사회가 실패한 자리를 언뜻 가리키고 있는 듯 보이지만 이 영화들은 정작 그만큼 통렬한 복수의 길을 걷고 있지는 않다. 자신의 복수를 외면하면서 어머니의 자리로 안착한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나 어머니라는 존재 증명을 위해 복수를 선택한 <오로라 공주>의 정순정의 복수는 자기 쾌락 혹은 사적 복수로서만 기능할 뿐 사회구조적 결함을 가시화(<복수는 나의 것>이 그러한 것처럼)하지는 않는다. 즉 <친절한 금자씨>와 <오로라 공주>의 그녀들은 사회적 실패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우울과 상실을 단지 상연할 뿐이다. 그리하여 그녀들은 전복을 꿈꾸는 복수씨라기 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연극을 무대에 올린 예술가에 가깝다.

    이러한 복수의 실패 혹은 부족은 영화의 구조적 분열에서도 드러난다. <친절한 금자씨>는 백 선생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그 시점이 아니라 오히려 제니가 등장한 순간 복수극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다시 시작한다. 또한 <오로라 공주>는 민아의 복화술이 울려 퍼지는 순간 정순정이 어머니라는 위치로 고정되면서 모성멜로라는 장르로 변질된다. 그런 의미에서 상실이 빚어낸 이 복수극은 남성 주체들이 여성 주체들을 지워버리면서까지 자신들의 좌절과 상실의 회복 혹은 이의 불가능성에 대해 털어놓았던 기존 남성 영화들의 여성 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복수를 완성하게 됨으로 인해 사라지게 될 것들에 대한 상실감을 자족적으로 그린 것이 <친절한 금자씨>라면, 이미 사라진 대상에 대한 상실감을 모성이라는 자기 증명을 통해 응징적으로 재연한 것이 <오로라 공주>인 것이다.

    혹은 어쩌면 사회가 그리고 한국 영화장이 그녀들에게 복수극이라는 하나의 수행의 장을 구성한 것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녀들은 그 속에서 적당한 상징적 위임이 아니라 그저 역할들을 취하고 있을 뿐이다. 모성의 과잉이나 결핍 혹은 여성성의 과잉이나 결핍이라는 결점을 가진 채 복수하는 상실의 존재라는 역할을. 그리하여 그녀들은 그 자신을 무법자로서 체험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녀들은 극단적인 순응주의자가 된다. 즉 <친절한 금자씨>와 <오로라 공주>에서 허용된 복수라는 게임의 규칙은 그녀들이 그 밖(사회 자체)을 위협하지 않는 한, 그 안에서 몇 명을 죽이든 상관하지 않는 체제 수호적인 방패막이인 것이다. 물론 이금자는 희생자들에게 복수의 기회를 제공하며, 정순정은 자신의 분노를 밖으로 힘껏 표출한다. 그러나 이는 사적 복수의 자장 안에 머무르는 것이며,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모성의 장렬함 혹은 다시금 가족으로 환원한다는 한계를 품고 있는 제한된 복수이다.

    따라서 현재 한국 영화장의 상황은 아직은 억압된 것의 회귀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경계의 유리벽은 여전히 굳건하다. 이 작은 출몰이 거대한 물꼬를 트기 위해서는 오히려 억압된 것의 회귀들, 반란이 주류 서사의 틈새를 보다 벌리고 늘리고 헤집으면서 그들의 낮은 목소리까지 온전히 낼 수 있는 보다 대담한 카니발을 벌여야 한다. 그 비천한 존재들에게 정당한 자리를 내어줄 때까지, 그들을 우리의 역사 안으로 껴안을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은 그 회귀를 몇 번이나 계속 반복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족적인 위로로서의 복수, 혹은 애매한 분노로서의 복수가 아니라 다른 타자들을 제대로 노출시킬 수 있는 또 다른 분노를, 또 다른 복수극을 이것이 실패한 자리에서 기다려본다.
    이환미

    이환미

    1980년 충남 홍성 출생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이론과 졸업

  • 전찬일 영화평론가 김영진 영화평론가

    우선 가작에 그쳐야 했던 2005년과는 달리 2006년은 당선작을 낼 수 있어 반갑다. 응모작은 작년에 비해 13편이 줄어든 28편에 불과했으나, 응모작들의 전반적 수준은 외려 다소 향상되었기에 가능했다. 그 점은 단평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지난해 만족할 만한 단평이 부재했다면, 올해는 인상적인 몇 편이 눈길을 끌었다. 제법 강렬하게. '비주얼과 사운드가 불러일으키는 매혹, 서사의 간극을 채우다'라는 요지의, 이환미의 영화 '형사' 단평도 그중 하나였다. 김영진은 '지나치게 무난하지 않느냐'며 왕자웨이 감독의 '2046'을 '크리스마스 이브에 따뜻한 뭔가를 바라는 이들에 관한 필름'으로 규정한 함돈균의 '주목할 만한' 단평을 적극 밀었으나, 영화 매체의 속성에 대한 고려나 글쓰기의 완성도 등에서 이환미가 한 수 위라고 판단해 당선작으로 최종 결정했다. 그 단평은 마치 영화 '형사'를 문자로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시청각적 묘사가 출중하다.

    짐작했겠지만, 심사위원들은 심사의 무게중심을 단평 쪽에 두었다. 변별력에서도 그렇지만, 향후 평론가로서의 활동에 대중적·저널(리즘)적 글쓰기를 지향해야 할 단평이 긴 호흡의 본격비평보다 더 중요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본격비평 쪽에 방점을 찍었다면 또 다른 선택이 나왔을 지도 모른다. '친절한 금자씨'와 '오로라 공주'를 내세워, "한동안 한국영화의 장에서 사라진 그 비천한 여자들이 '여성 복수극'을 통해 귀환하고 있다"고 주장한 이씨의 본격비평이 단평의 경지엔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년에 비해 텍스트나 주제 선택에서 한층 더 다양하고 풍요로워진 응모자들에게 감사하면서 심사평을 마친다.
  • 이환미

    이환미

    1980년 충남 홍성 출생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이론과 졸업

    돌아보면, 영화는 언제나 내 우울을 그리고 절망을 멈춰주는 진정제와도 같은 존재였다. '영화이론'이라는 새로운 길을 선택할 당시에도 그랬다.

    '추락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다만 어떻게 착륙하는 것이 나을까를 생각할 뿐.'(마티유 카소비츠 감독의 '증오' 중에서) 이 울림은 성장통의 한복판에 있는 나를 흔들면서 그 길을 가도록 독려했다. 창작으로서의 비평과 영화 창작과의 간극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요즘, 영화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무언가를 끌어내는 것만큼이나 조용한 좌절이었다. 글을 쓸라치면 인상주의 비평에 머무르는 건 아닐까 하는 자괴감이 밀려오곤 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나날들 속에 걸려온 뜻하지 않은 당선 소식은 끝난 줄 만 알았던 꿈이 다시 등 뒤로 다가온 듯, 부끄러움과 함께 묘한 기분마저 들게 했다.

    이명세 감독의 '형사'는 나로 하여금 다시, 영화라는 매체가 던지는 매혹의 황홀경에 빠질 수 있도록 한 영화였다. 그 멋진 찰나의 향연을 선사한 이명세 감독님과 이에 못 미치는 부족한 나의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어른 사회에 동화하지 못하는 나를 늘 안타까워하시고, 지켜봐주시는 부모님께 가슴 깊이 감사드린다. 또한 여러 영화들에 대한 생산적이면서도 재기발랄한 장을 펼칠 수 있게끔, 즐거운 소통의 장을 마련해주신 영상원 영상이론과 은사님들과 선배님, 후배님,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감사드린다.
    끝으로 얼마 전 한국을 다녀간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말로서 이 벅찬 소감을 대신한다.

    '잊지 않고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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