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개기월식

by  곽은영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밤의 문이 열렸어요 이 세계를 견디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는 800kcal 가게 문을 열고 누가 왔어요 저녁을 먹다간 입가 훔치며 정육점 여자는 일어섭니다 반쯤 닫힌 문틈으로 둥근 밥상 가장자리가 보여요 오늘은 개기월식이 있겠습니다 어린 딸 리모콘을 눌러요 채널을 바꿔요

    여자는 손님에게 웃어보이지요 붉게 물든 장갑을 끼고 비닐장갑을 또 끼고 차가운 살덩어리 하나 척 베어서 저울에 올려요 200g 중력이 달랑 하늘에서는 쓱쓱 사라지는 하얀 달조각 여자는 능숙하게 고기를 썰어요

    엄마 나 쉬 마려 칭얼대는 딸 탁탁탁 도마에 칼을 부딪치며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해요 마지막 한 조각까지 쓸어모아 검은 비닐에 담아 들려보내요 달랑 떠 있던 마지막 달 조각이 사라졌어요

    달이 밟고 가는 모든 길에 검은 비단을 깔고 바람은 휙휙 채찍질 구름마저 쫓아버렸어요 이제 무엇을 바치오리까 보셔요 은빛 가면 벗고 강림하신 핏빛 달님 여자는 장갑을 벗고 선지 한 그릇 뚝 떠내요 스테인레스 밥그릇 안에 오늘은 핏덩어리 달이 잠겨요

    36.5 365일
    달님의 체온은 몇 도인가요

    엄마 나 정말 쉬 마려 발 동동 구르는 딸 여자는 계집애 팔 잡고 한 볼기 때리고 바지를 까내리고 엄마 한 번 쳐다보고 제 오줌줄기 한 번 쳐다보고 바람이 보듬어가는 어린 것의 지린내 윤기나는 밤의 비단에 싸서 달님 앞에 내려놓아요 하얗고 새초롬한 아가씨 얼굴로 돌아오는 달

    동그란 밥상에 둘러앉아 여자와 아이가 다시 밥을 먹어요 리모콘을 눌러 채널을 돌려요 달은 개기월식 궤도를 완전히 벗어났어요 그녀 힐끔, 가게 문을 쳐다보아요
    곽은영

    곽은영

    1975년 광주 출생

    1997년 전남대 교육학과 졸업

    2001년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 최승호(시인), 김혜순(시인)

    예심을 통하여 본심에 합류한 시들은 산문성이 농후하였다. 시는 다른 장르의 특징을 시적인 것으로 포용하여 그 장르적 영토를 변용시켜온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 쓰기 방법은 시를 다른 장르, 산문에 복속시켜 버리게 되는 위험성 또한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본심 작품들 중에서 세 사람의 작품을 최종적으로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이운성의 '황금나무 밑을 간다' 외 4편의 시는 대상을 집요하게 관찰하는 시각, 그에 따른 해석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시적인 표현보다는 대상을 설명적으로 묘사하거나 산문적 전개가 거슬렸다.

    주영중의 '시조새' 외 6편의 시는 응축된 이미지들의 전개로 하나의 국면을 조성하는 형상화 능력이 뛰어났다. 특히, 응모된 여타의 시들에서 읽을 수 없었던 낯설고 신선한 표상을 시적으로 구현해내고 있다. 그러나 시적 언술이 전개되는 중에 이미지가 비약하거나 소홀히 처리되고만 시들이 지적되었다.

    곽은영의 '양철인형' 외 5편의 시들은 치밀한 표현, 선명한 이미지, 그 이미지들을 능숙하게 서사적 전개 속에 배치하는 형상화 능력들이 눈에 띄었다. 아울러 응모된 작품들 모두가 완성도가 높고, 수준이 골랐다. 우리는 응모된 모든 시들 중에서 '개기월식'을 당선작으로 정하는데 쉽게 합의하였다. '개기월식'은 정육점 여자, 살코기, 월식중인 달과 아이의 요의와 배설이 중첩되거나 흩어지면서 먹고, 먹히며, 배설하는 풍경 속에 숨은, 생의 비의 하나를 그려내고 있다.
  • 곽은영

    곽은영

    1975년 광주 출생

    1997년 전남대 교육학과 졸업

    2001년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일곱 명의 왕자가 있었지요 마녀가 그들을 백조로 만들어버렸는데
    차가운 밤바람 불어요 생각들은 얇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웅크리고 돌아눕네요

    집집마다 꿈 한 자락 배달 나온 달이 가볍게 노크하는데 고양이가 꼬리에 한 가닥 감아말고 저 너머로 사뿐 사라지네요
    저 너머로 쫓겨난 왕자들에게는 어린 여동생이 있었어요 어린 공주는 쐐기풀로 실을 자았는데요

    묘지에서 자란 쐐기풀은 침묵의 푸른 옷이 되어 차곡차곡 어두운 바구니에 담깁니다
    빈 밤거리 거역할 수 없는 붉은 문장 같은 정지등이 가득해요
    규칙적으로 찾아오는 금지와 가능의 경계가 거북하네요
    마녀에게 씌웠던 모자만큼이나 큰 낙엽들 몇 장이 굴러와요
    어린 공주는 화형장으로 끌려갔지요 일곱 벌의 옷을 미처 완성하지 못했는데
    요란한 머플러 소리를 내며 오토바이가 지나가요 덜컹이는 수레에 실려가는 공주를 보세요
    몇몇이 공주의 손에서 남은 쐐기풀을 앗아갔어요 대신 욕설과 침을 던져 주었죠
    12시 시계바늘처럼 화형목은 서 있고 시간은 이제 자정을 지나려 합니다
    어린 공주 푸른 옷 높이 던졌고 일곱 마리 백조는 날개소리로 그녀의 침묵을 받아들였어요
    흰 깃털 목이 메이도록 사방에서 쏟아져 내리며 쓰는 이야기
    딸들이 더 어리신 따님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한쪽 날개 그대로 간직한 왕자가 하늘을 나는 대신 날개팔로 공주를 안아주었어요
    바람이 새로워요
    신호가 바뀌었네요 고마운 이름을 휘파람처럼 불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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