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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화택(三界花宅)에서 해탈에 이르기 위한 구도(求道)’-박민규론

by  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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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지배 욕망과 프로의 세계, 三界火宅

    불타고 있는 집, 화택(火宅)은 법화경에 쓰인 유명한 비유이다. 늙은 부자가 수백 명의 식솔이 살고 있는 넓고 호화로운 집을 가지고 있었다. 그 집의 하나뿐인 문은 좁고 작았다. 어느 날 부자가 밖에 나와 보니, 자신의 집이 불에 타고 있었다. 그런데 수십 명에 달하는 부자의 아들들은 집 안에서 노는데 정신이 팔려 불타고 있는 집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부자가 아무리 나오라고 외쳐도 아들들은 듣지도 않았고, 집이 불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이야기에서 화택(火宅)은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우비고뇌(憂悲苦惱)로 점철된 이 세상을 뜻한다. 이 세상, 즉 삼계(三界)를 태우는 또 하나의 중요한 불길은 지배욕이나 소유욕과 같은 '욕망' 혹은 '집착'이다. 대개의 인간은 그 대상이 재물이 되었건 권력이 되었건, 소유를 향한 정열에 자신을 투기한다. 그런데 그러한 정열은 본래진면목(本來眞面目)과 무관한 가상(假相)을 향해 투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자신의 정열의 허구성을 모르는 인간들이 구성하는 세계란 불타고 있는 집에 다름 아니며, 자신의 정열이 자신을 파멸시키리라는 지엄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이란 자신을 삼켜버릴 불이 시시각각 다가옴을 모르는 채 놀이에 몰두하는 아이들과 같다.

    박민규가 바라보는 세계는 '화택(火宅)'에 다름 아니다. 박민규는 그의 소설들에서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정열 혹은 욕망의 허구성을 간파하고, 그 세계에서 참답게 살아가는 지혜에 대해 능청스럽게 이야기한다. 박민규는 정열-욕망의 정체, 즉 진여(眞如)가 아닌 가상(假相)인 그것의 본질에 대한 통찰에 이르기에 앞서, 우선 세계의 지형을 탐사하고 있다. 박민규의 관찰에 의하면 세계는 지배 욕망으로 점철되어 있고, 인간을 소유 욕망의 총화인 거대한 "프로"의 세계로 몰아넣으며, 이런 강요에 머뭇거리는 인간들을 고단하고 처량한 삶을 영위케 함으로써 단죄하는 곳이다.

    박민규의 등단작 {지구영웅전설}은 자주, 미국 산(産) 만화 캐릭터들을 서사의 전면에 부각시킴으로써 미국의 세계 지배 전략을 파헤치는 소설이라고 논의된다(이러한 논의의 대표적 사례로 도정일, 이인성, 남진우의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심사평과 김영찬, 황호덕의 평론을 들 수 있다). 하지만 하성란과의 인터뷰에서 작가 스스로 "지배하는 놈들에 대한 반감"([그는 중심을 파고드는 인파이터다])에서 이 작품을 집필했다고 밝히고 있듯이, 이 소설은 '미국'이라는 국지적 현실보다는 인간의 보편적 속성이라 할 수 있는 '지배 욕망'에 대한 탐사의 기록이다. {지구영웅전설}에서 인간의 지배욕은 '마운틴'이라는 행위로 표상된다. "마운틴"은 "원래는 침팬지들의 무리에서 우두머리가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취하는 행동을 일컫는 말"인데, "수컷암컷을 가리지 않고 엉덩이를 내밀게 한 다음 뒤에서 섹스의 동장을 취하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로빈의 시각에 의하면, "'마운틴'은 일종의 통치행위"이다. 로빈이 바나나맨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현실에서 대단한 재력을 가지고 있는 배트맨은 슈퍼맨이 무력으로 정복한 세계에 "한 무더기의 돈을 들고" 나서서 돈으로 그 세계의 주민들을 굴복시킨다. 배트맨의 목표는 "'마운틴'의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고 "그 가장 좋은 방법이 돈을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아쿠아맨으로 구성된 "수퍼특공대"의 리더가 배트맨인 이유 또한 의미심장하다. "돈이 힘인 세상"이므로 이 세계의 돈의 대부분을 가진 "놈이야말로 최고의 영웅"인 것이다.

    배트맨의 지상 목표는 세계를 "마운틴"하는 것, 즉 세계에 자신을 최고의 지배자로 등극시키는 것이다. "돈"은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한 가장 유용한 수단이다. 여기에서 독자는 '물질 소유 욕망'보다도 강력한 '지배 욕망'의 위력을 보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지배 욕망'이 악당으로 묘사된 배트맨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배트맨의 본색을 폭로하며 '정의의 사도'다운 포즈를 취하던 로빈은 울분에 젖는데, 그 울분의 이유는 "예전엔 모든 게 내 것이었단 말이야!"라는 그의 진술에서 명백하게 밝혀진다. 로빈의 울분은 '헤게모니를 상실한 지배자'로서의 원한에 다름 아니었고, 이러한 로빈의 원한이 그 역시 '지배 욕망'의 소유자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참으로 '지배 욕망'이란 그것에 이르는 힘을 소유한 자나 박탈당한 자 모두에게 공유되는 인간의 보편적 속성이라 할 만하다.

    단편 [헤드락]은 인간의 '지배 욕망'의 구체적 자질들에 대한 다각도의 통찰을 내포하고 있다. 주인공은 미국 유학시절 2미터 11센티의 거한(巨漢)에게 헤드락을 당한 이후, "미친 사람처럼 바벨을 들어올렸고, 프레스를 하고, 푸시업을 했다." 소망하던 '건장한 체격'이 완성되자, 그는 "이 세계가 어느 정도 헤드락을 묵인하거나 권장한다는 묘한 암시"를 받으며 "253차례의 습격"을 감행한다. '헤드락' 역시 '마운틴'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배 욕망'을 현현하는 행위이다. 거한에게 헤드락을 당함으로써 타인의 지배 욕망의 먹이가 되었던 주인공의 내부에 곧바로 그 자신의 지배 욕망이 발아한다. 주인공의 지배 욕망은 또 다른 타인들에게 헤드락을 가하는 행위로 표출된다. 이렇듯 인간은 타인의 지배 욕망의 희생양이 되자마자 자신의 지배 욕망을 계발한다. 즉 피해자는 가해자의 지배 욕망을 모방·학습하면서 또 다른 가해자로 둔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지배 욕망은 끊임없이 악순환되며, 세계는 곧 지배 욕망의 교사(敎師)에 다름 아니다. 한편 귀국한 주인공은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게 되자 헤드락을 잊는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로 출장을 가게 된 그는 순전히 쾌락을 목적으로 원주민들에게 헤드락을 감행하게 된다. 미국에서 행해진 헤드락은 어느 정도 트라우마의 치유 방식 혹은 생존 차원에서의 요구로 볼 여지가 있지만, 인도네시아에서의 헤드락은 순전히 "습격의 쾌감"만을 위한 것이었다. 이렇듯 지배 욕망이란 한 번 그것을 소유한 자에게 잊을 수 없는 쾌락으로 기억되며, 그것의 생존 차원에서의 필요가 사라진 후에도 저항 불가능한 노스탤지어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미국에서의 헤드락은 '열패감 극복'이라는 기의와 '타인 지배'라는 기표를 두루 갖춘 것이었다면, 안정된 생활을 누림으로써 '열패감 극복'이라는 기의를 추구할 필요가 없어진 주인공의 인도네시아에서의 헤드락은 오직 그 기표의 매혹에 굴복한 결과였다. 이렇듯 지배 욕망은 애초에 기의와 기표의 맞물림에서 발아하지만, 그것은 생장(生長)하면서 기의를 망실한 기표에의 무한 추구로 변질된다. 지배 욕망의 이러한 속성은 성(性)이 애초에 자손 번식이라는 필요-기의의 산물이었지만, 나중에 그 기의가 망실된 기표-쾌락만이 동경과 추구의 대상이 된 사실과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배 욕망이라는 보편적 속성을 보유한 인간들이 구성하는 세계의 양태는 어떠한가. 단적으로 그것은 "프로"라는 어사로 규정된다. 박민규의 출세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소위 "프로의 세계"에 대한 다각도의 탐사를 수행하고 있다. 프로의 세계에서 인간은 "평범한 삶을 살아도 눈에 흙을 뿌려야 할 만큼 치욕을 당"하게 된다. 프로의 세계에서 인간은 "소속"과 "계급"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자신의 진실한 욕망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계에서 구획 짓고 있는 "위치"들 중 더 우월한 자리를 점유하기 위해서 필요 이상의 정열을 바쳐야만 한다. "사람들이 모두 돼지 발정제를 마신 것"처럼 보일 정도로 프로 세계의 정열은 종종 수위를 넘는다. "프로" 대열의 후미에 놓인 사람들의 삶은 "고시를 패스하는 것보다 힘"들고([갑을고시원 체류기]), "열렬히 키스와 애무를 하면서도, 퐁당퐁당 퐁당 발로는 페달을 젓"([아, 하세요 펠리컨])는 행위로 표상되는 "저렴한 인생"([아, 하세요 펠리컨])이며, "수학" 정도도 필요 없이 "노예들의 산수"([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에서 끝장인 삶이다. 생활고로 푸시맨 아르바이트를 하는 소년은 출근 시간 지하철에서 "아버지의 흉곽에서 어떤 미약한 소리 같은 것이 새어나오는 듯"([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느끼면서도 아버지를 "아주 거칠게" 밀어 넣어야 한다.

    이렇듯 통제가 어려운 지배 욕망으로 구성된 세계는 개인에게 필요 이상의 정열을 요구한다. 그 요구에 성공적으로 응답한 편이나 발 빠르지 못하여 뒤쳐진 편 모두 견딜 수 없는 삶을 영위해야 하는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삶의 틀에서 해방되지 못할 때, 인간은 자신의 몸을 태워버릴 불길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이런 화택(火宅)인 삶의 틀로부터 해방이 가능하기는 한가? 가능하다면, 어떠한 전략으로 해방에 이를 수 있는가? 박민규는 해방의 구체적 가능성과 그 전략을 모두 제시하고 있다.

    2. 세계 바깥에서 교체된 시각과 무한자유, 天上天下 唯我獨尊

    박민규가 제시한 '화택 탈출 전략'의 제일 단계는 '바깥에 서기'이다. 박민규 소설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지구 탈출'과 '다른 존재 되기' 모티프는 세계의 '바깥'에 서려는 전략의 일환이다. 세계의 '바깥'으로 이동하게 되면, '눈과 마음의 자유'가 가능해진다. 즉 '바깥'에 서 있는 인간은 세계가 요구하는 제반 덕목들을 풍문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고유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 가치를 재단하게 된다. 자유로운 눈과 마음의 주인만이 "세계는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구성해 나가는 것"({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지엄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세계의 제반 사항을 검토하고 그 가치를 판단하는 유일한 준거가 되어야 하며, 이 지점에서 '이 세상에 오직 나만이 존엄하다'('天上天下 唯我獨尊)라는 유명한 경구는 존재론적 성찰이 아니라 윤리적 제안으로 다시 해석된다.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는 아예 '지구 탈출' 모티프가 서사의 주된 축이다. 이 소설에서 통념과 달리 유일하게 지구를 보았다고 인정되는 "버즈"는 "자신의 우주는 자신이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그에 의하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조차도 "우주에서 보면" "빨판이 달린 한 마리의 기생충"일 뿐이다.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지구 밖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명심해야할 사항은 "지구에서의 방향 감각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구 밖에서 사람들이 본 것은 바로, 알려진 바대로의 구형(球形)이 아니라 "생소하고 난감한 자신의 평면"을 보여주는 "한 마리의 거대한 개복치"일 뿐인 지구이다. 이 소설에서 보듯이, '지구 안'에서 진리로 믿어지는 것들은 '지구 밖'에서 더 이상 그 진리성을 주장할 수 없다. '지구 밖'은 '지구 안'의 제반 가치와 윤리를 전복하는 공간이며, 이러한 전복은 시각의 교체에 의해 가능해진다. 여기에서 '지구 밖'으로의 여행이 절실한 이유는 "자신의 우주는 자신이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만의 고유한 윤리를 가지기 위해서 '세계 밖에 서기'라는 전략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 밖에도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화성인들은 좋겠다" "금성인들은 좋겠다"는 주인공의 독백 역시 지구 밖으로 탈출하고 싶은 소망의 발현인데, 이 소망 역시 지구 밖에서는 교체된 시각으로 삶의 신산(辛酸)을 초월하기가 가능하다는 어림을 전제하고 있다.

    자유로운 인식과 판단의 조건이 되는 '시각의 교체'는 '다른 존재 되기' 전략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에서 궁핍한 생활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는데, 이듬해 봄에 주인공은 지하철역에서 기린으로 변한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기린-아버지는 "전체적으로 다소곳하고 무신경한 느낌이었"고 옆에 앉은 주인공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기린-아버지는 "무관심"한 눈동자로 물끄러미 주인공을 바라보다가, 아버지임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주인공에게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끝내 아버지임을 부정한다. 여기에서 아버지가 "기린"이 된 이유는 신산스러운 현실의 족쇄에서 탈피하기 위해서이다. 기린-아버지의 "무신경"과 "무관심"은 현실의 굴레를 벗어버린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미덕이다. 여기에서 작가는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 되기'가 인간의 우비고뇌(憂悲苦惱)에서 해방되기 위한 한 전략임을 보이고 있다. 즉 인간의 만난(萬難)과 신고(辛苦)는 인간이라는 범주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적 범주 내던지기'는 해방의 전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단편 [카스테라]에 등장하는 "냉장고"의 의미는 매우 흥미롭다. 주인공은 "특출"한 "소음"을 내는 "냉장고"를 구입하게 된다. 그 소음을 줄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주인공은 "소중하거나, 세상의 해악인 것"을 냉장고에 집어넣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그는 세상의 거의 모든 것들-학교, 동사무소, 벤처기업, 미국, 중국, 아버지, 어머니 등등-을 냉장고에 넣어 버린다. "평소보다 큰 소리로 냉장고가 울어대던 세기의 마지막 밤"이 지나고 다음날 아침, 주인공은 냉장고 안에서 "반듯하고 보드라운" "한 조각의 카스테라"만을 발견한다. 소중하거나 해악인 모든 것들은 다 사라져버린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인간은 세계에서 강요하는 바대로가 아니라, '탈(脫)-세계'로 갖게 되는 자신만의 자유로운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인식하고 판단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는 경구의 의미가 새로워진다. [카스테라]에서 "냉장고"는 '자유로워진 눈과 마음' 혹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존엄한 나만의 인식 체계'를 의미한다. "소중하거나, 세상의 해악인 것"은 개인이 살아가면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거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중하지도 않고 증오하지도 않는 대상이 개인의 인식 체계에 들어올 까닭은 없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개인이 살아가면서 관심을 가지게 되는 모든 것은 "냉장고", 다시 말해서 '개인의 자유로운 인식 체계'에 들어오면 더 이상 그 외피(外皮)를 유지하지 못한다. 진실로 자유로운 눈과 마음을 가진 개인이라면 그것을 자신만의 잣대로 변형시키게 마련인 것이다. 이 소설에서 "냉장고"는 만물(萬物)을 "카스테라"로 변형시켰다. 이는 소중하거나 증오스럽거나, 인식 체계에 들어온 모든 것을 "따뜻하고 부드"럽게 감싸 안겠다는 태도를 반영한다. 이 소설은 "나는 눈물을 흘렸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주인공이 "카스테라를 씹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만물을 따뜻한 시각에서 바라보겠다는 태도가 쉽게 얻어지지 않았고 만난(萬難)과 신고(辛苦)를 겪은 후에야 습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하이틴로맨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긍정적인 인식 태도는 치열한 고난과 부정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현현된 것이기에 설득력이 없다. 하지만 만난신고(萬難辛苦)라는 대가를 지불하고 얻어진 '자유로운 시각'의 성격이 '따뜻함'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눈물"에 값한다. 한편 "냉장의 역사는 부패와의 투쟁"임을 알게 된 주인공은 "냉장의 세계에서 본다면 이 세계는 얼마나 부패한 것인가"라고 뇌인다. '개인의 자유로운 인식 체계'를 뜻하였던 "냉장고"는 여기에서 그 의미가 새로워진다. "냉장고"를 거치지 않은 세계는 "부패한 것"이다. 즉 소중하거나 증오스러운 만물을 '개인의 자유로운 인식 체계'라는 매개 없이 세상에서 부여한 외피(外皮) 그대로 바라본다면, 그것은 세계를 '부패하도록 방기'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래서 "냉장고"를 통해서 보면 "세상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지며, "이 세상은 각자가 <냉장고>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즉 탈(脫)-세계의 자유로운 시각에서 본다면 만물은 그 외피를 벗고 각 개인이 해석하는 바대로의 진면목(眞面目)을 현현하며, 그 개인의 자유로운 시각의 양태에 따라 각기 다른 진면목(眞面目)을 노출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냉장고 사용법"이다. 달리 말해 '화택(火宅)'에서 빠져 나오려면 '유아독존(唯我獨尊)' 해야 한다.

    3. 허물어지는 경계, 色卽是空 空卽是色

    인구에 회자되는 '色卽是空 空卽是色'은 반야심경에 나오는 경구이다. 이 경구에 대한 탈자본주의적·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이 가능하다. 우리의 애착과 집착의 대상은 자주 그만큼의 값에 미치지 못한다. 우리는 대부분 자본주의적 세계관에 함몰된 채로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의 집착도 대개 자본주의적 가치에 부착되게 마련이다. 흔하고 오랜 인류의 꿈인 부귀영화(富貴榮華) 입신양명(立身揚名) 따위가 자본주의적 가치를 반영한다는 사실은 두말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탈(脫)-세계의 자유로운 시각에서 본다면 인류의 오랜 그 꿈은 무가치해진다. 이것이 '色卽是空'이라는 경구의 탈자본주의적 해석이다. 자본주의적 가치가 탈색된다면, 무엇이 가치 있는가? 우리가 평소에 '쓰잘 데 없다'고 여겼던 것이 실상 행복의 원천 혹은 참존재의 순간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예로 어린 아이의 미소, 나뭇잎들을 애무하는 바람 소리, 우연히 들려온 모차르트 아리아의 한 소절 등등 여러 가지를 거론할 수 있거니와, 박민규의 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낙천(樂天)'과 '즐거움의 원칙'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런 것들은 평소에 '주변적인 것'으로 치부되나, 축복 받은 한 순간 그것은 존재의 행복을 무한하게 고양시킨다. 이 순간의 진실을 '空卽是色'이라는 경구로 표현한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통상적으로 '중심/주변'의 구분으로 만사를 규정지으려 하는 태도는 무의미해진다. 이 지점에서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경구는 '경계 없음'을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한 지류와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의 주인공은 고무동력기의 소음을 듣고 정신을 잃는다. 이틀이 지난 후 깨어난 주인공은 자신의 병명이 "잠수병"이었음을 알게 된다. 주인공은 "손에 물 한 번 적시지 않았"기 때문에 "잠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납득하지 못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의 "폐와 위에선 실제로 다량의 바닷물이 검출"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아담 앨드린은 주인공이 "코스모를 잘 느끼는 체질"이라고 논평한다. 한편 주인공은 열일곱 살 때 처음으로 섹스를 했는데, 상대 여자가 "어때 코스모가 느껴져?"라고 물어봤던 일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코스모"의 의미는 흥미롭다. 주지하다시피 "코스모cosmo"는 '우주, 조화'를 뜻하는 영어 전치사이다. 이 단어에서 '경계가 허물어진 세계'라는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이 손에 물 한 번 적시지 않았지만 폐와 위에 바닷물을 가득 담은 채 잠수병에 걸린 사실은, 육지와 바다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섹스 역시 타인들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행위로 간주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지구 밖'에서 지구가 "개복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주인공, 즉 자유로운 시각으로 "지구적" 가치들을 전복할 주인공은 만물의 경계가 무의미할 것임을 예감하고 있다. 경계란 어쩌면 무지(無知)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 '경계 흐려짐'의 표지는 도처에 산재한다. 주인공은 수족관 주인에게 "죽은 거북의 이름은 <궁>"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얼마 후 독자에게 "사실 죽은 거북의 이름은 <우>"라고 말한다. 독자는 실제로 죽은 거북의 이름이 무엇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이렇게 주인공이 사물의 진위(眞僞)에 집착하지 않는 이유는 "이미 세계는-어떤 거짓말을 해도 그렇고 그렇게 들릴 만큼, 그렇고 그런 곳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코스모를 잘 느끼는 체질"이라는 진단을 받은 주인공은 진위(眞僞)의 경계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어림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소설의 서술 방식은 '중요함'과 '중요하지 않음'의 경계가 무의미하다는 작가 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작가는 듀란을 이야기하다가, 삼위일체-> 버뮤다 삼각지대-> 나오미 켐벨 순서로 그 서술 대상 사이를 마구 건너뛴다. 그 각 대상 사이의 연결 고리는 매우 약하며 각 대상에 대한 지나치게 긴 설명은 납득이 되지 않을 정도로 불필요해 보인다. 여기에서 서사의 초점을 스스로 흐려 버리는 이러한 서술 방식 자체가 탈중심화 전략이며, '중심'과 '주변'의 경계를 불신하는 작가 의식의 소산이다.

    거칠게 말하면,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色에 함몰되어 있던 인간이 色이 空임을 깨닫고 이윽고 空으로 보았던 사소함을 곧 色으로 인지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일류대 출신으로 외환 위기 직후인 1998년 회사에서 퇴출당한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 그는 세계에서 주입하는 자본주의적 사고 방식을 "냉장고"([카스테라])의 여과 없이 외피 그대로 수용하고 그것에 순응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혹은 "프로" 세계의 요구에 의심 없이 휘둘리던 그는 회사에서 밀려나자 자연스럽게 절망을 느낀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시각으로 세계를 다시 보려 하는데, 그렇게 "재구성된 지구"는 "그 전체가 완벽한 '나'로 이루어진 보기 드문 세계"였다. 獨尊한 唯我가 된 그의 깨달음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회사를 그만두면 죽을 줄 알았던 그 시절도, 실은 국수의 가락처럼 끊기 쉬운 것이었다. 빙하기가 왔다는 그 말도 실은 모두가 거짓이었다. 실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 죽은 것은 회사를 그만 두면 죽을 줄 알았던 과거의 나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지고한 가치를 대변하는 "회사"의 실제 가치는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것이었다. "빙하기가 왔다는 그 말"은 프로의 질서에 더욱 순응하라고 재촉하는 자본주의의 프로파간다이다. 주인공은 그 프로파간다의 거짓됨도 깨닫는다. 이 깨달음의 순간이 色으로 알려진 것들이 空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이제 주인공은 "개구리밥", "야쿠르트 아줌마", "무성한 나뭇잎", "하늘", "두 개의 글러브" 등 이전에 가치 없다고 치부하였던 것들의 무한한 가치를 발견하는데, 이 때를 空이 色임을 깨닫는 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은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이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고 설파한다. 잘 알려진 바대로 자본주의적 사고 방식의 해악 중 하나는 그것이 수반하는 '잉여 가치의 폐해'이다. 지배 욕망이 발전하면서 그 기의를 망실한 기표만 무한 증식시키듯이([헤드락]), 욕망이란 여과-반성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필요 이상" 즉, 잉여적으로 증대한다. 이러한 잉여적 욕망으로 구성된 세계는 언뜻 매혹적으로 보이지만, 주인공의 전언대로 그러한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도 色卽是空이라는 진실을 확인할 수 있다. 자본주의 법칙에서 소외된 장소인 "삼천포"를 주인공이 "진짜 인생"이 존재하는 곳이라고 호명한 사실은 다시 空卽是色에 대한 자각의 발현이다. "삼천포"는 또한 "인간의 여러 가지 기준을 한순간 달라지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고 언급되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세계의 바깥에서 자신만의 고유하고 자유로운 시각으로 세계의 기준을 다르게 보기'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 한편 [갑을고시원 체류기]의 주인공이 곤고한 생활 속에서도 끝내 지키려고 애써왔던 <386 DX-Ⅱ> 컴퓨터는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버려졌다." 그가 빠져나올 수 없는 굴레로 생각했던 "빚"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사라졌다." 애착하거나 옭아매는 것들은 언젠가 '저절로 사라진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色卽是空이라는 경구를 떠올리게 된다.

    4. 樂天, 해탈(解脫)의 한 방법(道)

    마르틴 부버에 의하면 "사물 중의 하나가 사물로부터 해방되어 나와서 하나의 생명 있는 존재로 되어 나에게 가까이 와서 말을 거는 시간, 다시 말하면 '그것'이 나에게 있어 완전한 '너'가 되는 시간처럼 짧은 것은 없다."(마르틴 부버, {나와 너}) '내'가 '그것'을 '너'로 자각하는 순간이 진정한 충일의 순간이라고 부버는 말한다. 이 진술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낳지만, 여기에서 이 말을 '인식'의 경우에만 적용시켜보자. 예를 들어 인구에 회자되는 경구를 수만 번 듣는다 해도, 그것을 '그것'으로 받아들이는 주체에게 경구는 의미 없는 상투어일 뿐이다. 하지만 어떤 깨달음의 순간 주체에게 그 경구는 '너'로 변신한다. 그 순간은 부버의 말처럼 매우 짧아서, 불가(佛家)에서는 이를 찰나(刹那)라고 일컬을 것이다. 경구가 주체에게 풍문으로서의 의미가 아닌 뼈저린 깨달음을 개시(開示)할 때, 그 때 현현된 의미를 '육체적인 의미'라고 부를 수 있을까.

    박민규는 나름대로 해탈(解脫)의 방법을 제시한다. 사실 天上天下 唯我獨尊이나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유명한 경구의 육체적인 의미를 깨닫는 순간, 해탈의 가능성은 이미 존재한다. 이밖에도 그의 소설에서 해탈에 이르는 여러 갈래의 길이 발견되지만, 그 여러 길(道) 중 '낙천(樂天)' 혹은 '즐거움의 원칙'이 특히 주목된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주인공은 치유의 시간 동안 "하늘을 즐겨가면서" "점점 낙천적(樂天的)인 인간으로 변해"간다. 空卽是色을 깨달은 주인공은 새로이 발견한 가치, 즉 空으로 보였으나 色으로 다시 인지하게 된 그것을 "즐거움"이라고 명명한다. 이제 주인공은 "언제나 새 치약의 퉁퉁한 몸통을 힘주어 누르는 기분으로" "시간을 향유"한다. '樂', '즐거움', '향유'는 이제 그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가 된다.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에서 "너구리"는 "즐거움 그 자체"이며, "신이 인간을 위해 내려준 것은 결국 너구리뿐"이다. 한편 "너구리"는 프로의 법칙에 순응하기 위해 남색가인 부장에게 엉덩이를 내어주고 슬픔에 빠진 주인공의 등을 밀어준다. 너구리-즐거움은 치유와 위로의 담당자, 따뜻함의 전령인 것이다. 이처럼 "즐거움" 혹은 "즐기기"란 화택(火宅)인 세계에서 해탈을 가능하게 하는 한 가지 전략이 된다.

    박민규가 인지하는 세계는 화택에 다름 아니다. 세계 밖으로의 탈출, 시각의 교체, '나'로 지구를 재구성하기, 낙천(樂天) 등은 화택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론이자 전략이다. 이러한 방법론 혹은 전략을 해탈에 이르는 도(道)라고 불러도 좋다면, 박민규는 화택인 세계에서 해탈에 이르는 길(道)을 구(求)하는 구도자인가? 그가 발견한 도(道)의 심오함이나 진정성에 대한 판단은 아직 유보적이지만, 그의 세계 인식과 창작 태도가 가볍기만 하다는 일부의 지적은 이제 재고(再考)를 요한다.
    박수현

    박수현

    1974년 전남 보성 출생

    2004년 고려대 서양사학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석사 과정 재학중

  • 조남현(서울대 국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이번 응모작들이 내보인 문제점으로는 비평대상의 부적합성, 텍스트의 비개성적 분석, 학술논문 형식에의 고착 등을 들 수 있다. 단편 한 편만을 집중적으로 분석한다든가 이미 명작으로 자리 잡은 것을 논의대상으로 삼는 경우에는 이런 문제점들이 보다 쉽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위하여'(홍삼득)는 재미있게 읽히는 장점을 지녔지만 도구성/비도구성 논리로 대상작품을 끝까지 몰아가는 단순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현실과 신화의 경계지점으로서 '몽고반점'"(표정옥)은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치밀하게 분석함으로써 신뢰감을 주었으나 여러 이론을 풍문을 끌고 오듯 해서 신뢰감을 떨어뜨렸다. '역사에 대한 세 개의 주석'(양윤의)은 김훈의 '칼의 노래', 성석제의 '인간의 힘', 김연수의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을 서사담론이라든가 역사의식의 측면에서 비교한 것이다. 소설에 대한 관점을 제대로 갖춘 것이 돋보이긴 하나 서술과정에서 전지적 제스처를 취한 것이 결정적인 흠으로 남고 말았다. 이 글은 최근 평단에서 유행하는 서술방법과 용어들에 지나치게 민감했던 사례가 된다.

    '삼계화택에서 해탈에 이르기 위한 구도'(박수현)는 박민규의 장편과 단편들을 삼계화택, 유아독존, 색즉시공, 낙천과 같은 불교이론을 끌어들여 재해석의 경지를 보여 준 만큼 비평주체로서의 제 목소리를 성공적으로 낸 것이 된다. 이런 상식화된 설법은 활용도가 높은 반면 비평에 적용할 경우 엉성하다든가 부자연스럽다든가 하는 반응을 사기 쉽다. 어떤 이론이든지 공부는 최대한으로 하고 활용은 최소한으로 하는 '비경제적인'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울림이 큰 비평을 쓸 수 있다. 앞으로, 박수현 씨에게 울림이 큰 비평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 박수현

    박수현

    1974년 전남 보성 출생

    2004년 고려대 서양사학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석사 과정 재학중

    십 년 동안 문학에 목을 매달았으니 죽을 고비도 없지 않았다.

    삶이 극적이어야 한다는 강박 아래 자행된 연기(演技)의 치졸함이 부끄러워지고 열정의 근원이 허영심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무렵, 마침 들려오는 풍문은 휘청거리는 발걸음에 아예 태클을 걸었다.

    키도 다 크기 전에 마법을 걸어왔던 세계 명작 전집, 한국 대하소설들, 도스토예프스키와 버지니아 울프의 전기를 모두 원망하고 있었을 때, 나를 구원해 준 이는 고마운 이웃들이었다. 현경 언니, 영애 언니, 재림 언니, 연진이, 소현이는 풍문의 근거 없음을 일러 주었고, 내 절망이 게으름에 대한 구차한 변명일 뿐이라며 질책해주었다. 그들이 옳았다. 나는 비겁했고 무능했다. 시지프를 흉내 낼 각오를 다지던 내게 이 소식은 사실 때 이른 낭보다. 훌륭하신 분들을 두고 먼저 호명된 이 행운 앞에서, 나는 한없이 송구스러워진다.

    좌충우돌하고 황당무계한 제자를 은은한 사랑으로 지켜봐주신 지도 교수님과 윤석달 선생님, 고려대의 은사님들께 감사드린다.

    부족한 글을 고심하며 읽어주신 조남현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대책 없던 문청 시절 서로를 키웠던 고대 문학회의 재주 많던 친구들에게 그립고 미안한, 애잔한 마음을 전한다. 나는 순전히 그들보다 이기적이기 때문에 문학의 언저리에 더 오래 머무를 수 있었을 뿐이다.

    사랑과 이해로 보살펴주신 할아버지, 어머니, 두 동생과 올케들에게 감사한다.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