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오란씨

by  배지영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그믐이다. 국도의 어둠을 밝히는 것은 그가 몰고 있는 15톤 덤프트럭의 헤드라이트 불빛 뿐이었다. 편도 1차선의 왼쪽편은 깍아지른 듯한 산이고 오른편은 밭이었다. 이 시간이면 다른 차량은 몰라도 ㅍ시 공장 부지 확장 공사로 들어가는 트럭들이 줄을 이어야 옳았다. 가장 삼엄한 파업 첫 날이라 그런지 트럭 뿐 아니라 어쩐지 자동차 한 대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백미러를 보았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아주 멀찌감치서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순희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정말 욱하는 심정으로 따라나선 거였다. 그러나 얼마 쫓지도 못한 채 녀석들의 뒤꼭지는 보이지 않았다. 사실상 녀석들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일단 회사로 들어가야 했다. 앞에 달린 디지털 전자시계의 빨간 숫자를 보았다. 8시 25분.

    어음 할인한 돈을 받으려면 10시까지는 들어가야 했다. 지금이라도 속도를 내면 그 시간까지는 들어갈 수 있었다. 신씨는 오늘까지 남은 할부금을 갚지 않으면 차를 넘겨 버리겠다고 으르렁댔다. 그는 신씨가 야속했다. 5년 넘는 기간동안 그는 이자도 잘 쳐서 돈을 갚아나갔다. 그동안 한 달이나 두 달 정도 밀린 적은 있었지만 이번처럼 3개월 넘게 밀린 경우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번 할부금은 마지막이 되는 셈인데 신씨는 그걸 못 참아주고 걸핏하면 상소리 섞인 전화를 해댔다.

    왼쪽 눈이 따끔거렸다. 녀석들에게 얻어맞은 눈에 실핏줄이 터진 모양이었다. 눈물은 자꾸 줄줄 흘러내렸고 머리는 욱신거렸다. ㅍ시가 50km 남았다는 초록색 표지판이 보였다. ㅍ시는 형이 간다고 했던 곳이다. 형에 대한 생각이 미치자 그는 다시금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그는 양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때다. 정말 땅에서라도 솟은 듯 오토바이 한 대가 그의 앞으로 불쑥 나타났다. 그는 경적을 울리며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어든 오토바이는 녀석들의 것은 아니었다. 125cc 구형 오토바이였다. 오토바이 위엔 둘이 타고 있었다. 작은 몸피의 사내가 운전을 하고 있었고 사내의 허리를 꽉 잡은 이는 여자였다. 여자의 헬멧 아래로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따라 휘날렸다.

    새끼가 죽으려고 아주 환장을 했군, 그는 길게 경적을 울렸다. 구형 오토바이는 그러든지 말든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처 앞으로 내달렸다. 문득 오토바이도 남자와 여자도 낯설지 않았다. 다시 눈이 아파왔다. 시야 옆으로 별처럼 반짝이는 섬광이 빠르게 스쳐 지났다. 피곤할 때마다 나타나는 증세였다. 그는 눈을 부비고 다시 앞을 봤다.

    기가 막힐 노릇이네.

    땅으로 꺼졌나, 오토바이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유난히 한갓지고 어두운 국도만이 그의 덤프트럭 헤드라이트 불빛을 받아 하얗게 빛날 뿐이었다. 헛것을 보았나, 그는 두 눈을 끔벅거렸다.

    그때 그의 귀를 찢는 굉음이 들렸다. 백미러를 보지 않아도 녀석들임에 분명했다. 오토바이 두 대가 지그재그 지랄선을 만들어 가며 편도 1차선을 점령하듯 다가왔다. 하야부사가 그의 덤프 트럭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하야부사 위엔 두건을 쓴 녀석이 운전을 하고 있고 빨간색 가죽 잠바를 입은 녀석이 그 뒤에 타고 있었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두건을 쓴 녀석의 뱀처럼 박박 민 머리 정수리엔 똬리를 튼 뱀 문신이 있다. 순희를 밀어 붙이면서 두건이 흘러내렸을 때 그는 녀석의 뱀 문신을 보았었다.

    하야부사가 그의 덤프트럭 옆을 지나치자 앞으로 내달렸다. 빨간 가죽잠바는 괴성을 지르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양 손 모두 중지를 내밀고 흔들어댔다. 하야부사가 지나자마자 그 뒤를 닌자보스가 바짝 붙었다. 닌자보스엔 머리를 회색으로 염색한 녀석이 운전을 하고 있었다. 회색 머리 역시 요란스러운 굉음을 울렸다. 쇼바를 잔뜩 올린 닌자보스는 하야부사보다 더 요란했다. 밀테면 밀어보라는 본새다.

    얼핏 보면 누가 누굴 따라 붙는지 알 수 없었다. 덤프트럭이 오토바이를 따라 쫓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오토바이가 덤프트럭을 따라 붙는 것 같아보이기도 했다.

    교차로에 들어서자 하야부사와 닌자보스, 두 대의 오토바이가 그의 덤프트럭 양 옆으로 붙어 속도를 맞추듯 따라붙었다. 그는 창문을 내려 고개를 뺐다. 침이라도 뱉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럴 새도 없이 두건은 그에게 퍽큐를 날리고는 쏜살같이 앞으로 내뺐다. 그는 약이 올랐다. 속도를 높여 그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그는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껏 그들을 잡을 수 없는 무의미한 추격전으로 두 시간 넘게 국도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지 않았던가. 차라리 고속도로로 들어섰으면 좋았겠지만 어디서 조합원들이 나타날지 몰라 그럴 수도 없었다. 오늘은 파업 첫 날이었다. 하야부사와 닌자보스는 또다시 그의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오늘 그는 횡성에 있는 공사장에서 자갈을 실은 후 안양에 있는 레미콘 회사에 부려놓았다. 그 다음 다시 ㅅ대학 공사 현장의 폐기물을 화천으로 실어 날라야 했는데 고속도로를 통과해야 했다. 그러나 눈치가 빤한 조합원의 트럭들이 진을 치고 있을 게 뻔했다. 조합원들은 고속도로의 휴게소나 톨게이트마다 그리고 공사장 입구마다 기다리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돌아가더라도 국도를 이용해야 했다.

    그처럼 일찌감치 기름밥을 먹은 이도 요즘 같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데모를 하는 이유도 결국엔 한 푼이라도 돈을 더 벌 수 있게 하자는 건데 그로서는 그 방법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운전대를 놓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그러는 사이 한 탕이라도 더 날라야 했다. 욕을 먹더라도 파업 하는 때가 그에겐 가장 큰 성수기였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출을 했다. 형이 그랬던 것처럼 아비의 오토바이와 염소 할멈의 돈을 훔쳤다. 그때부터 그는 ‘의리’라는 것하고는 담을 쌓았다.

    그가 처음 간 곳은 운송회사였다. ‘숙식 제공’이라는 광고 문구만 보고 무작정 운송회사를 간 것이다. 거기서 그는 조수석에 앉아 온갖 허드렛일을 하고 정비 조수 일도 보았다. 그러나 월급은 곧잘 밀렸고 가끔 떼이기도 했다. 그래도 어디 하소연할 때가 없었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뛰쳐나가 주유소로 들어가기도 했다. 주유소는 더 심했다. 먼저 들어온 선배의 텃세와 기합에 시달려야 했다. 또 그게 싫어 뛰쳐나가 얼마간 노숙을 하다가 다시 운송회사로 들어왔다. 그러면 또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눈치 보고 아부 하며 신임을 얻어내야 그나마 잠자리나 밥이라도 얻어먹으며 일을 배울 수 있었다. 그는 꼬리를 바짝 내린 개처럼 참아 지냈다. 아무리 발길질을 해도 주인에게만은 꼬리를 흔드는 개 모양 그는 악착같이 회사에 붙어 지냈다. 거기서 그는 어깨 너머로 운전을 배웠다. 그에게 있어 차는 호사스런 집이나 다름없었다. 차만 있으면 누울 자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최소한 노숙을 하지 않아도 됐고 돈도 벌면서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어 좋았다. 특히 도로를 누비는 덤프트럭의 위용찬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제 아무리 고급 외제차라도 덤프트럭 운전석에서 내려다보면 별게 아니었다. 그가 속도를 내면 차들은 알아서 비켜주었고 섣불리 가까이 오지도 않았다.

    그는 만 20세가 되자마자 운전면허를 땄다. 그렇다고 당장 자기 트럭을 몰 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화물을 몰기엔 보험에 대한 부담이 너무 컸다. 처음에는 트럭으로 시내를 도는, 시내바리를 시작했다. 새벽 같이 일어나 오전에 한탕, 오후에 한탕씩 날라 댔다. 돈 맛을 본 그는 본격적으로 지방을 뛰었다. 여관비를 아끼려 트럭에서 새우잠을 잤다. 그러다 학원 봉고차도 마을버스도 몇 개월씩 몰았다. 하지만 그는 한번도 돈을 제대로 모으질 못했다. 꽤 많은 돈을 모으기도 했지만 대부분 도박판을 기웃거리며 탕진했다. 그는 빈털터리가 되어서야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그러던 그도 도박에서 손을 털었다. 고향을 다녀오고 난 후부터 였다. 그는 아비의 부음 소식을 듣고 고향인 모래내를 찾았다. 염을 하기 전 마지막 본 아비의 얼굴은 천수를 누리지 못해 억울하기라도 하다는 듯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아비는 보신탕을 먹다 급체로 죽었다고 했다. 아비의 누이이며 그의 고모인 염소 할멈은 십여 년 만에 찾아온 그를 보자마자 멱살부터 대뜸 잡았다. 가출할 때 집어간 돈과 늬 아비 장례비를 내놓으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는 가슴에 품어 두었던 두툼한 지폐다발을 할멈의 얼굴에 던졌다.

    모래내를 찾기 전날 밤, 그는 제법 큰 노름판에 끼게 됐다. 어찌된 일인지 떼는 패마다 기막힌 꽃패였다. 그는 판돈을 쓸어 담았다. 평소와 달리 그는 꾼들에게 개평까지 넉넉하게 나눠 주었다. 바로 그렇게 딴 돈을 염소 할멈에게 내던진 것이다. 그는 이를 갈았고 발길을 돌렸다.


    부와와 왕 부와왕 왕 와와왕.

    하야부사와 닌자보스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엔 그의 덤프 트럭이 올 때까지 헤드라이트를 끄고 기다리고 있다가 갑자기 옆에서 튀어나왔다. 순간적으로 그는 핸들을 옆으로 돌리며 속도를 줄였다. 가드레일을 가볍게 박은 채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었다.

    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야부사는 자신들의 계획에 잘 넘어가준 그의 덤프트럭 주위를 겅충대며 맴돌았다. 회색머리의 닌자보스는 곡예를 하듯 오토바이 뒤를 뽀족하게 내밀며 어지러이 흔들어대며 도망을 쳤다. 멀어지는 녀석들의 모습은 흡사 궁둥이를 내밀고 희롱하는 것 같았다.

    그는 후진 기어를 넣고 덤프트럭을 출발시켰다.

    퍽, 퍽, 퍽.

    한동안 잊었던 소리가 또 그의 귓전을 때리듯 울려왔다. 퍽, 퍽, 퍽, 팡팡팡.

    이른 가을 해질녘, 옥상에 널어놓은 눅눅한 카시미론 이불을 빗자루로 터는 소리처럼 그 소리는 무심하고도 나른했다. 어쩌면 그 시절로부터 들려오는 폭죽 소리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소리만으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살인을 하기 위해 몽둥이질을 하는 소리도 멀리서 들릴 때는 평화로울 수 있다.

    개를 잡고 있었다. 개를 잡는 일은 모래내에선 낯선 광경이 아니다. ‘원산지 충남 청양’ 글자가 인쇄된, 노란 고추씨가 껴있는 나일론 자루 안엔 개 한 마리가 들어있다. 흑염소집 간판이 걸려 있는 기둥 아래로 버둥거리는 자루가 매여 있고 부대 위쪽은 초록색 나일론 끈이 단단하게 묶여있다. 머리를 짧게 깍은 소년은 손에 잘 익은 팔뚝 두께의 몽둥이로 부대를 퍽퍽 쳐댔다. 사람들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빙 둘러 서서 구경을 했다. 무표정한 낯빛의 소년은 힘도 그리 쓰지 않았다. 흡사 배팅 연습이라도 하는 듯 보였다. 소년은 그의 형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의 이복형이지만 그를 낳은 어미도 형을 낳은 어미도 없기에 똑 닮은 둘의 얼굴은 이복 형제라는 사실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형의 눈은 가늘었고 이마는 명민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단단하게 다물어진 약간 돌출된 입매와 광대뼈로 형의 표정은 더욱 매워보였다. 그런 형의 곁엔 복이 저절로 빠져나갈 것 같이 축 처진 입꼬리를 가진 노파가 신경질적인 눈매로 정육점 마크가 인쇄된 하얀색 나일론 자루를 손에 들고 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바짝 마른 노파는 그들 형제의 고모였지만, 고모는 그들 형제의 이름을 한번도 부른 적이 없었다. 걸핏 하면 ‘개새끼’였고 ‘미친 놈’이고 ‘시러벨놈’이었다. 그들 형제 역시 고모를 ‘고모’라 부른 적이 없었다. ‘할매’라 불렀고 고모가 없을 때엔 ‘할멈’이거나 ‘염소 할멈’이었다.

    그는 구경꾼들 틈에서 감탄의 눈빛으로 형을 쳐다보았다. 구경꾼들은 더러 땅바닥에 침을 쩍 뱉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능숙하게 개를 잡는 형에 대한 시시껄렁한 농을 치고 있었다. 더러 저 소년은 흑염소 집 손자인지 아니면 부리는 아이인지 궁금증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겐 이런 구경꾼들의 반응이나 모습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에겐 프로다운 것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는 형과 형의 몽둥이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들릴 듯 말 듯 낮은 탄성을 지으며 거칠게 버둥거리다가 형의 잘 다듬어진 몽둥이질 몇 번에 금세 축 늘어지는 자루 안에서 눅진눅진 부드러워질 개의 살코기를 생각했다.

    일이 다 끝나자 형은 아무 말 없이 몽둥이를 내려놓더니 구석에 있는 노란색 빈 플라스틱 상자를 발로 밀었다. 상자엔 ‘오란씨’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형은 상자 위로 올라가서는 자루의 끈을 풀어 내렸다. 두 팔을 치켜들고 뒤꿈치를 살짝 들고 있는 형의 모습은 앳되어 보였다. 열일곱 형의 보송보송한 귀밑 털이 바람에 흔들렸다. 짧게 깎은 형의 상고 머리털 사이 하얀 두피가 언뜻 보이고 그 위로 땀방울이 흘러 내렸다. 할멈은 넋을 놓고 서 있던 그를 불렀다. 그는 다람쥐처럼 달려가 할멈의 맞은편에 서서 정육점에서 얻어온 자루의 귀를 마주 잡았다.

    형은 이미 불긋하게 피가 새나오는 포대를 번쩍 들어 정육점 마크가 새겨진 자루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때였다. 안에 있던, 죽었으리라 예상했던 개가 별안간 강한 힘으로 버둥거렸다. 예기치 않은 반응에 형은 놀랐다. 형의 발 밑에 받쳐 있던 오란씨 플라스틱 상자가 옆으로 기우뚱 기울어지면서 개의 몸뚱이가 자루 밖으로 비집고 나와 바닥으로 털썩 떨어졌다. 구경하던 무리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1.5초나 됐을까. 짧은 순간, 땅바닥은 피로 물들었다.

    할멈은 소리를 질렀다.

    “똑바로 하지 못해?”

    할멈의 목소리는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카랑카랑했다. 자루 밖으로 반쯤 몸뚱이를 드러낸 개의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한쪽 눈알은 빠진 채 피가 흘렀고 콧잔등은 뭉개져 있었다. 비루먹은 듯 윤기 잃은 듬성듬성한 누런 털은 피로 뭉쳐 엉겨 붙어 있었다. 날카로운 송곳니 밖으로 길게 늘어진 빨간 혀가 부글거리는 침 아래로 펄떡거렸다.

    비릿한 핏내가 그의 콧속을 타고 올랐다. 형에겐 실수란 없었다. 형이 왜 이런 실수를 했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형은 몽둥이를 손에 쥘 수 있을 무렵부터 개를 잡았다. 주로 모래내의 개천 다리 아래나 뒷산에서 잡곤 했다. 형의 개잡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형을 잔인한 놈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형은 다만 힘이 좋을 뿐이었다. 그런 형에겐 떨치기 힘든 유혹이 일찌감치 들어 왔다. 모래내엔 매미집만큼이나 스탠드바니 성인 나이트, 디스코텍들이 많았다. 그에 맞춰 출입문을 지키는 기도나 웨이터가 필요했다. 웨이터야 어느 정도 교육만 받으면 누구나 할 수 있었지만 기도는 그렇지 않았다. 평소 형의 주먹 실력을 눈여겨보던 88스탠드바의 영업실장은 형을 볼 때마다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고 형 또한 그를 보면 허리를 굽혀 넙죽 인사를 하곤 했다. 시간 문제였다. 싸움깨나 한다는 모래내 소년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형 또한 그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의 아비는 변사장이었다. 물론 아비의 성은 ‘변’씨가 아니다. 다름 아닌 유료 공중 변소의 사장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아비를 변(便) 사장이라 불렀다.

    집마다 변소가 없는 인근 시장 상인들이나 가정집에서 달거리로 돈을 대며 변소를 이용했다. 거기서 나오는 수입이 없었다면 그와 형은 일찌감치 거리로 나가 구걸로 연명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 삶이 넉넉한 건 아니었다. 기실 늘 쪼들렸고 정부미도 풍족하게 먹질 못했다. 원래 변소는 그의 형을 낳은 어미가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그를 낳은 어미는 그를 낳자마자 도망갔다. 이에 반해 형의 어미는 아비가 염치없이 바람까지 피워 낳은 자식인 그까지 거둬 주었다. 시장 사람들은 이런 형의 어미를 ‘보살’이라 불렀다. 하지만 보살은 술 취한 아비에게 늘 얻어맞았고 머리를 심하게 맞은 어느 날부터는 시름시름 앓다 죽고 말았다. 온몸에 든 울긋불긋한 멍자국에도 불구하고 어미의 사망진단서는 급성 뇌출혈이라 기록되었을 뿐 아비는 아무런 혐의도 받지 않았다. 보살이 죽을 당시 형의 나이는 열 한살이었고, 그의 나이는 다섯 살이었다. 그는 당연히 기억할 수 없었으나, 형은 아비가 어미를 때려죽인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흑염소집 할멈과 아비도 내력인 양 배가 달랐다. 그러나 그와 형과는 달리, 그들은 형제애도 뭣도 없었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서로를 이용하며 살아갔다.

    아비는 보신탕을 자주 해다 먹었고 그 대가로 형은 흑염소집의 허드렛일이나 막일을 해야 했다. 그 바람에 형은 줄곧 개를 잡게 되었고 가끔 아비와 함께 길 잃은 개나 남의 집 마당에 묶어놓은 개를 훔쳐오는 일에 투입되곤 했다.

    그해는 88올림픽이 있던 해였다. 대통령은 개고기를 금지함으로써 미개한 한국인들의 의식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리려고 했다. 그리하여 많은 개고기 집은 흑염소나 사철탕으로 간판을 바꿔야 했고 한 켠에 마련되었던 한 평 남짓한 개 도살장도 대외적으론 없애야 했다. 그렇다고 개고기를 먹는 사람이 줄어든 건 아니었다. 오히려 매스컴에서 난리를 치니까 도리어 값은 올랐고 장사는 더 잘 됐다.

    모래내 시장은 재래식 시장으로선 남대문 시장이나 동대문 시장 다음으로 큰 시장이었다. 하지만 워낙 좁고 불쑥불쑥 나 있는 수많은 좁은 길들이 제멋대로 얽혀 있는 데다 연관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잡화상들과 노점상들이 마구 뒤섞여 있어 명성도 개성도 찾아볼 수 없었다. 속옷 가게가 있다 싶으면 그 옆으로는 일산서 온 할매들이 오종종 앉아 각자의 텃밭에서 농사를 지은 상추며 풋고추며 오이며 가지 등속을 보자기나 골판지 박스 위에다 펼쳐놓고 팔았다. 일산 할매들이 있는 그 길을 따로 ‘일산시장’이라 불렀다. 일산시장을 뒤돌아가면 비단 두루마리가 울긋불긋 세워져 있는 한복집들이 즐비하게 나왔다. 옷을 파는 곳인가 싶으면 별안간 순대나 떡을 파는 먹거리 노점상들이 나왔고 맞은 편에는 미제 물건이나 액세서리를 파는 성낭갑같이 네모 반듯한 노점상들이 나왔다. 이렇듯 모래내 시장은 난데없고 어처구니없었으며 이것저것 마구 팔아대는, 특성 없는 재래시장이었다. 시장 구석마다 자리한 가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신기할 정도로 모래내 시장길은 미로같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러다 모래내와 인접한 시내에 백화점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모래내 시장은 위기를 맞았다. 깔끔하고 주차시설이 완비된 백화점으로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1988년도를 맞이하면서 모래내 시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분주해졌다. 올림픽 개최 국민이라는 자긍심을 갖기 충분할 만큼 경기가 좋아졌고 백화점 가격이 약간 부담스러운 이들에게 얼추 비슷한 물건을 비교적 싸게 구입하기에 모래내 시장은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비탈길로 접어들면서 차 뒤쪽에서 들리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며칠 전에 한 과적 때문인지 바퀴가 또 나갔다. 바퀴 하나 값으로 50만원이나 써야 했다. 정비소에선 뒷 바퀴 모두 쇼바가 나가서 바꾸라고 했지만 돈이 없었다. 새차나 다름없다던 신씨의 덤프트럭은 걸핏하면 고장을 일으켰다. 대출금을 다 갚고 나면 또 다시 신차를 뽑아야 할지 몰랐다.

    IMF 직후 부터다. 회사는 별안간 지입차를 요구했다. 제 돈 내고 차를 구입해서 기름비며 보험비를 자비로 충당하라는 거였다. 그는 보험접부비에 대한 부담 때문에 차주에 부과되는 세금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한때 그의 덤프트럭 사수였던 신씨의 도움으로 빚을 얻어 그의 중고 15톤 덤프트럭을 받아냈다. 신씨는 사고로 다리 하나를 다쳤는데 제때 치료를 안 받은 바람에 절름발이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신씨는 덤프쟁이들이 한참 수입을 올릴 때 여러 대를 굴려서 이미 작은 슈퍼가 달린 3층 건물의 소유주가 되어 있었다. 신씨는 덤프쟁이 수입이 막 하향 곡선을 긋기 시작할 때 차를 팔았고 마지막 남은 차마저 그에게 적지 않은 가격으로 넘겼다. 신씨는 기막히게 운이 좋은 셈이었다.

    신씨에 반해 덤프쟁이로 가까스로 막차를 탄 그는 회사 차를 임대하여 몰고 다닐 때보다 더 열심히 운전을 하는 데도 갈수록 빚이 늘었다. 신씨의 중고차 할부금을 갚기 위해 다달이 붓는 대출금과 이자도 벅찬 데다, 그나마 비수기에 받던 지원금이나 장거리 뛸 때마다 기름값으로 받던 추가 운임금도 없어져 버렸으니 죽을 맛이었다. 경유비와 고속도로 통행료는 하루가 다르게 올랐다. 그런데도 운임은 자꾸 덤핑이 됐다. 빈차로 돌아갈 수 없어 알선소나 운송사를 통해 배차를 받아야 했는데 거기로 들어가는 지압료가 수입의 절반은 되었다. 일거리는 계속 줄어드는데 수금까지 안됐다. 손바닥에서 고린내가 날 정도로 핸들을 잡았는데도 그의 빚은 늘어만 갔다.

    오늘부터 파업 디데이다. 분회장이 내린 지침은 2년 전보다 더욱 단호했다. 덤프트럭 앞머리에 파업 포스터를 붙이고 국회로 가야 했다. 만일 파업에 참여하지 않으면 더 이상 운전대를 못 잡게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고작 며칠 운전대 놓고 그 시절 대학생들 마냥 데모를 해봐야 달라질게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게다가 그저께 받아낸 어음만 할인하면 밀린 할부금도 갚을 수 있게 됐다. 이제 그의 나이, 보험접부비의 부담을 더는 만 26세가 되는 마당에 파업 투쟁같이 골치 아픈 일엔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바야흐로 15톤 덤프트럭의 온전한 명의자. 그의 평생 꿈 아니던가.

    그는 모든 게 순조로와 보였다. 한 가지만 제외하고, 바로 여자 문제였다. 한때 도박에 빠졌던 것 이상으로 그는 여자를 사는 데 열중했다. 그가 주로 갔던 곳은 매미집이었다. 묵은 맥주 곰팡내가 피어오르는 허름한 방석집은 걸핏하면 바가지요금을 씌워대기 일쑤였다. 하지만 허연 살을 드러내놓고 술을 따르는 통통한 여자가 있는 붉은 조명의 매미집을 가야 그의 남성은 제 힘을 발휘하곤 했다. 가끔 그는 술에 취하면 백보지 여자가 있는 곳을 찾아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까다로운 그의 남성은 백보지 앞에선 한없이 진지해지고 우울해져서 하염없이 그곳을 쓰다듬다가 욕을 얻어먹고 쫓겨나곤 했다.

    그에게 있어 매미집은 미상불 고향집 같은 곳이었다. 아비의 공중변소 옆으로는 두 사람이 어깨를 맞대야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이 있었다. 그 길로 십 미터만 들어가면 매미집촌이 나왔다. 매미집은 밤이면 붉은 전구로 불을 밝혔고 맥주와 양주를 팔았다. 네모 반듯한 가게 안에는 언제나 맥주 썩는 시큼한 냄새가 싸구려 향수 냄새와 섞여 났다. 엉덩이가 큼지막한 중년 여자들이 부석거리는 파머 머리를 긁적이며 방석에 앉아 술을 팔던 그곳은 1988년도가 시작되면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젊은 여자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과부집’, ‘촛불’ 두 곳에 불과했던 그곳은 ‘오란씨’, ‘에티켓’, ‘첫사랑’이 개업을 하면서 분주해졌다. 그곳은 시장통 상인들보다는 뜨내기 객이나 노가다꾼, 휴가 나온 군인들이 들르곤 했고 가끔 흑인과 백인들도 드나들었다.

    그즈음 오란씨에 엄청난 미인이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여자는 어느 지방 미스코리아 대회에서 입상했는데 전국 미스코리아 예선에서 아슬아슬하게 고배를 마셨다고 했다. 여자가 떨어진 이유는 다름 아닌 보지에 털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마도 미스코리아 수영복 심사 전에 은밀하게 털이 있는지 없는지 살피는 규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이름은 설희였다. 설희는 이름처럼 눈같이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설희에게 정말 털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여자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신사로서 지켜야 할 당연한 에티켓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오란씨’ 바로 옆엔 ‘에티켓’이 있었다. 어쩌면 설희에게 털이 없다는 소문은 ‘에티켓’에 있는 노랑머리 여자가 지어낸 것인지도 몰랐다. 노랑머리는 ‘오란씨’에 새로 들어온 미스코리아 예선 탈락자, 설희 때문에 죽을 맛이었다. 쪽 찢어진 눈, 심술보가 덕지덕지 묻은 축 늘어진 볼, 왼쪽에 털이 숭숭 나있는 콩알만한 검정 점이 박힌 노랑머리 얼굴은 가히 밉상이었다. 술집에서 남는 맥주로 머리를 감아 노랗게 염색했다는 노랑머리는 그런데도 인기가 좋았다. 거대하게 출렁거리는 젖 때문이었다. 자신의 젖가슴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노랑머리는 머지않아 강리나나 이보희처럼 예술을 표방한 에로 영화에서 멋진 배역을 따낼 수 있다고 자신했다. 사실 노랑머리는 영화에 잠깐 출연하기도 했다. 나연희가 나오는 ‘매춘’이라는 영화였다. 거기서 노랑머리는 그녀 자신이 제일 자신 있어 하는 매춘녀의 역할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고 했다. 비록 영화에는 편집이 되어 얼굴은 나오지 않았지만 육감적인 몸만은 무려 5초 동안이나 나왔다고 했다. 촬영장에서 때마침 분장을 고치고 있던 배우 나연희가 그녀의 연기를 보고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는 것이 노랑머리의 가장 큰 자랑거리였다. 믿을 수 없었으나 어쨌든 그런 소문은 노랑머리 입을 통해 돌았고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는 항상 가슴을 불쑥 내밀며 걸어 다녔다. 시장 사람들은 잠에서 덜 깬 노랑머리가 변소를 가기 위해 좁은 길을 지날 때면 꼭 그 앞에다 지갑이나 담배 따위를 떨어뜨렸다. 노랑머리가 몸을 숙여 물건을 집어 올려주면 사내들은 젖이 너무 커서 메리야스 가게의 비비안 아저씨한테 미제를 따로 부탁한다는 그녀의 거대한 젖가슴을 넌지시 들여다보곤 했다. 더 짓궂은 사내들은 일부러 노랑머리와 정면으로 부딪혀 그녀의 가슴을 슬쩍 만지거나 몸을 안기도 했다. 형은 노랑머리가 술집여자가 된 것은 운명이라고 했다. 그런 여자애들은 어렸을 때부터 젖이 너무 크기 때문에 분명 동네 양아치들의 눈에 띄었을 것이고, 머리 나쁜 노랑머리는 그러는 걸 자기가 좋아서 그런 줄 알고 몸을 함부로 굴리다가 결국 술집으로 빠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형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노랑머리는 변비가 심해서 남들보다 오랫동안 변소에 앉아있어야 했다. 그래서 노랑머리는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는 가장 구석진 변소칸을 자주 이용하곤 했는데 그 칸은 시멘트가 갈라진 벽 틈 사이로 안이 보이는 곳이기도 했다. 노랑머리는 그 틈으로 눈을 바짝 대고 들여다보는 까까머리에서부터 헐떡거리며 자위를 하는 아저씨들에게까지 뭇남성들의 좋은 눈요깃감이 된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공중변소는 남녀공용이었다. 남자들이 소변을 보는 곳은 시멘트로 칸을 발라 만들었고 문이 있는 변소의 맞은 편이었다. 남자들이 소변을 볼 때 이용하는 변소엔 문이 따로 있지 않았다. 소변을 보는 남자의 뒤가 보여도 모래내 여자들은 거리낌 없이 남자의 뒷통수를 지나 맞은편에 자리한 변소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 오줌통 뒤편이 주로 여자들이 사용하는 변소인데 역시 하늘색 페인트가 칠해진 다섯 개의 나무문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시멘트로 바른 직사각형의 구멍을 낸 재래식 변소가 있었다. 똥을 누다가 아래를 내려다보면 부글거리며 끓는 똥과 하얗게 오글거리는 구더기가 보였다. 달거리로 돈을 내지 않고 변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겐 소변을 볼 땐 30원, 대변은 50원을 내야 했다. 휴지도 따로 팔았다. 두루마리 휴지를 넉넉하게 끊어서 비닐에 넣고 50원에 팔았다.

    아비는 술을 먹으러 돌아다니기 일쑤여서 화장실을 지키고 있는 것은 대개 그와 형이었다. 30원만 내고 소변을 보는 척하다가 똥을 누러 들어가는 남자를 잡아내야 했고 무엇보다 달거리 사용료를 내지 않는 뜨내기들이 그냥 들어가는 것도 잡아내야 했다.

    소변을 본다고 들어간 여자들이 똥을 누는지 오줌을 누는지 확인하긴 힘들었지만, 시간을 계산해서 너무 오래있다 싶으면 20원을 더 달라고도 했다. 50원을 내고 들어갔다가 변비여서 똥을 누지 않았다며 20원을 거슬러 달라는 치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번 받은 돈은 절대 뱉어내지 않았다.

    노랑머리가 변소에 들어가면 그는 재빨리 뛰어가서 전직 공무원이었던 치킨집 아저씨나 고등학교 1학년인 국수집 아들에게 일러주었고 그들에게 500원을 받고 네번째 칸에 들어가게 했다.

    국수집 아들과 나이가 같았던 형은 노랑머리에겐 관심이 없었다. 그에겐 형이 우상이었기에 형이 좋아하는 것만 좋아해서 내심 무관심한 척했으나, 몇 번 노랑머리의 커다란 궁둥이를 엿본 적은 있었다. 물론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노랑머리의 궁둥짝도 여자를 엿보는 일에 도 모든 관심을 끊었다.

    형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오란씨였다. 오란씨는 오렌지 맛만 내는 환타와는 달랐다. 환타처럼 오렌지 맛을 내면서도 파인 향이나 애플 향이 났다. 오란씨가 등장하면서 당시 가장 잘 팔렸던 환타의 타격이 가장 컸다. 오란씨 광고에 나오는 청순하고 하얀 피부의 모델은 인기가 좋았다. 긴 머리카락을 내려뜨린 얼굴은 누구보다도 청순했으며 허리를 돌리며 하와이언 춤을 출 때면 오금이 저릴 정도로 섹시했다. 그러나 형은 누구를 좋아한다고 해서 남들과 다르게 유별나게 구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 남자답지 못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형은 국수집 아들처럼 영화 ‘위험한 정사’의 글렌 클로즈 사진이나 붙여놓는 놈들이나 아비처럼 벌거벗은 거나 다름없는 비키니 여자들 달력을 걸어놓는 치들도 우습게 보았다.

    “자고로 여자는 오란씨 같은 거야. 맛있게 먹고 이렇게 버리는 거지.”

    형은 오란씨 캔을 바닥에다 버리곤 발로 뭉갰다. 그러면 오란씨에 그려진 여자의 얼굴도 따라서 뭉개졌다. 그랬다. 오란씨 캔은 맥주 캔과 달리 쉽게 찌그러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형은 늘 쉽게 캔을 우그려 뜨렸다. 형의 엄청난 힘에 대해선 누구나 다 인정하는 바였다. 형을 화나게 해선 안됐다. 형은 화가 나면 흡사 두 얼굴의 사나이처럼 괴물이 되어 버렸다. 아이들은, 아니 어른들조차 형을 함부로 화나게 하진 않았다. 그러나 모래내에서 힘이 좋다는 것은 가랑이를 잘 벌리는 창녀나 다름없었다. 그저 그런 뒷골목으로 늪처럼 빠질 가능성만 커지는 것이었다.

    원래 모래내는 깨끗하고 하얀 모래가 많은 냇가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했다. 그의 아비가 그의 형을 낳은 어미와 결혼할 때만 해도 믿기지 않지만 모래내 개천엔 정말 깨끗한 물이 흘렀다. 아이들은 내에서 멱을 감았고 부녀자들은 빨래를 했다. 가재나 송사리 같은 것도 잡았으며 모래내의 하얀 모래 위에 자리를 펴고 앉아 찌개도 끓여먹었다. 그리고 그땐 형을 낳은 어미가 그와 형을 위해 따뜻한 밥과 역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찌개를 삼시 세끼, 밥상 위에 올려주었다. 그 시절엔 그런대로 살만했다. 형도 그럭저럭 귀여움을 받았으며, 아주 가끔은 김밥 같은 것도 싸서 가까운 능이나 공원으로 놀러가기도 했다.

    믿을 수 없는,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라고 어린 그는 생각했다. 그가 태어나면서 모래내 개천은 시커먼 기름이 둥둥 떠 있는 똥물이 흘러넘쳤고 알수 없는 고약한 냄새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얗던 모래는 부석부석한 먼지와 흙, 끈적한 기름으로 범벅되었다. 그러나 모래내가 더러워진 이유에 대해서는 궁금해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 모래내 사람들은 모두 개천의 모래만큼이나 더러워졌고 어디서나 그런 대접을 받았다.

    개천 다리 아래엔 부랑자들이 살았다. 그들은 쓰레기를 줍거나 시장을 돌면서 종이 박스나 병을 얻어다 팔았고 더러는 구걸을 했으며 가끔은 아이들이나 부녀자들의 돈을 뺏곤 했다. 그러다 불어 닥친 사회정화운동은 이들의 자취를 감추게 했다. 형은 거반 병신이 되거나 바보가 되어 돌아와 시장을 돌며 구걸을 하는 이를 가리키며 그에게 말해주었다.

    모래내의 다리를 건너고 언덕배기를 하나 넘으면 연희동이 나왔다. 연희동은 대통령이 줄줄이 나온 곳이어서 사람들은 ‘연궁(宮)’이라 불렀다. 언젠가 연궁을 다녀왔던 형의 이야기를 듣고 그는 절대 연희동으로는 걸음하지 않았다. 약간이라도 수상쩍은 사람이 출몰하면 숨어있던 경찰과 군인들이 튀어나와 검문을 했고 조금이라도 불량해 보이면 그대로 어디론가 끌고가 고문을 한다고 했다. 그는 불량했고 가난했고 늘 수상쩍어 보였기 때문에 더욱 두려웠다.

    연궁엔 으리으리하게 큰 저택마다 에스컬레이터가 있고 텔레비전 만화영화에서나 보는 털이 복실복실한 커다란 강아지가 있다고 했다. 미국 대통령이나 탄다는 링컨 타운카가 즐비하고 쓰레기통에는 한 번 입다 버린 옷이며 한번 베어 물다 버린 외제 과자가 잔뜩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 전 해까지만 해도 모래내 사는 아이들은 인근 대학에서 매일같이 터지는 최루탄 때문에 죽을 맛이었다. 멀쩡하던 사람도 일단 대학에만 들어가면 간첩과 내통하여 김일성을 찬양하게 되고 순진한 노동자들을 속여 파업을 하게 만들어 나라를 망치는 데 앞장선다며 아비는 핏대를 세웠다. 연궁도 과연 이 매운 맛이 전해졌을까 의문이지만, 모래내는 날마다 최루탄 가스로 눈물 흘려야 했다. 하지만 88올림픽은 데모도 잠재웠다. 대학생들은 화염병 대신 스포츠 신문을 집어 들었으며 낮이고 밤이고 텔레비전 수상기 앞으로 모여들었다. 극장에선 약속이나 한 듯 에로영화들이 넘쳐났으며 사내아이들은 담벼락마다 붙여놓은 영화 포스터 앞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있었다.

    아비는 대학생들과 걸핏하면 파업을 한다고 을러대는 노동자들을 욕했다. 공부를 시켜봐야 머리에 빨갱이 물만 들어 데모나 한다고 말했다. 애국심이 많았던 그의 아비는 그런 까닭으로 형을 딱 중학교까지만 공부시키려 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형은 그나마 중학교도 중퇴를 했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그 역시 중학교까지만 다니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교육에 관한한 아비의 선택에는 만족했다. 학교란 그를 고통스럽게만 하는 곳이었다.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구구단이었다. 그는 한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한 단씩 겨우 외워 3학년이 끝날 무렵에야 3단을 외웠다. 4학년이 되어서는 모든 게 더 힘들어졌다. 다른 애들처럼 구구단을 노래 부르듯 하질 못하고 더듬더듬 자신없는 목소리로 외우곤 했다. ‘네가 이러는걸 늬 부모는 신경도 안쓰니?’ 선생은 깍쟁이 같은 목소리로 지휘봉을 까닥이며 혀를 찼다.

    그는 운전을 하다가 종종 구구단을 외곤 했다. 특히 졸릴 때는 거꾸로 구구단을 외웠는데 나름대로 구성진 가락을 곁들이면 잠이 달아났다. 동료들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평소 셈이 정확하고 빨라서 웬만한 계산은 암산으로 했다. 중학교 1학년이 돼서야 겨우 구구단을 외웠던 과거를 동료들은 알지 못했다.

    셈이 정확하고 빠른 그는 덤프트럭 할부금을 부어가고 수리비와 지압료를 내가며 수지를 맞출 수 없다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어쩔 때는 많이 날라댈수록 나가는 돈이 더 많을 때도 있었다. 그냥 차를 세워두고 노가다라도 할까 하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아까웠다. 할부금을 내가며 마련한 덤프트럭이 아까웠고 면허를 따기까지의 설움이 아까웠다. 그렇게 견뎠던 그다.

    이제 마지막 밀린 3개월치 할부금만 부으면 그의 차가 됐다. 그러나 갑자기 돈이 딱 떨어졌다. 도저히 돈을 마련할 여력이 없었다. 그는 똥줄이 탔다.

    그러던 차에 하늘이 도왔을까. 운비를 안 주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던 업주가 밀린 돈을 어음으로 끊어주었다.

    어음깡을 하게 되면 남은 할부금을 다 치뤄낼 수 있었다. 그러고 나면 그는 ㄷ휴게소에 있는 순희를 데려가겠다고 식당 여주인에게 말할 작정이었다. 얼마의 돈만 쥐어주면 식당 주인은 쌍수를 들고 반길 터였다. 순희도 말끔하게 씻기고 집에 앉혀 놓으면 저대로 알아서 빨래도 하고 김이 설설 나는 밥도 지을 것이다. 오히려 약간 모자라니까 몇 년 전 동거했던 술집 계집처럼 그의 통장을 들고 도망갈 일도 없어 좋았다.

    그는 순희 앞에서는 이상스럽게도 순해지고 너그러워졌다. 순희가 계모인 식당 주인 여자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식당 앞 개똥나무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그의 마음도 따라 우울해졌고 그러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밝게 웃는 순희의 얼굴을 보면 순희는 영락없이 백치구나, 싶으면서도 기분이 좋아졌다.

    “울다가 웃으면 거시기에 털 난다고 하든디.”

    순희는 저 혼자 이렇게 말하고는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크윽 크윽 트림 같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즐거워했다.

    순희는 식당에 들어오는 손님들을 볼 때마다 콜라 사달라, 껌 사달라, 아이스크림 사달라 졸라대곤 했다. 순희 때문에 식당 여주인은 난처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 식당은 앵벌이를 고용해 놓고 있는 거냐며 항의하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서른은 좋이 되어 보이는 야릇한 여자가 식탁 주위를 맴돌며 교태부리는 모습에 놀라 기겁하는 손님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순희를 적당히 놀리면서 콜라나 껌을 미끼로 그녀의 숙성된 몸을 더듬는 치들도 많았다. 대개 트럭이나 레미콘, 고속버스를 운전하는 이들로 식당의 단골이었다. 식당 여주인은 그들이 순희의 허벅지나 엉덩이를 더듬거나 가슴을 은근슬쩍 만지는 것을 보고도 굳이 말리려 하지 않았다.

    처음에 그는 순희에게 콜라나 껌을 사주면서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왜 낯선 사내들에게 교태를 부리며 군것질거리를 조르면 안 되는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어휘와 표현을 총동원해서 점잖게 타일러도 보고, 윽박질러 보기도 했다. 그러나 순희에겐 통하지 않았다. 순희는 그가 무슨 말만 하면 해벌쭉 웃어대기만 했다. 이제 그는 외려 순희가 콜라를 마시며 가늘게 눈을 뜬 채 맛을 음미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걸 즐겼다.

    순희에게 콜라를 사주기 위해 그는 멀리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부러 ㄷ휴게소로까지 오곤 했다. 이미 밥을 먹고 왔어도 그는 식당에 오면 국과 밥을 시켜서 아주 천천히 식사를 했다.


    그의 15톤 덤프트럭은 ㅅ인터체인지에서 좌회전을 하고 0번 국도로 향했다. 더 이상 반응이 없는 그의 트럭에 흥미를 잃었는지 오토바이 두 대는 속도를 높이더니 마침내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 시간만 참자, 그는 속으로 그렇게 다짐했다.

    그가 ㄷ휴게소 화장실에서 오토바이 폭주족에게 싸움을 건 것은 이제까지의 그의 인생에서 흔치않은 일이었다. 그는 싸움엔 젬병이었다. 우락부락한 외모와는 달리 그는 헛스윙의 대가였고 솜주먹의 대명사였다. 기사들끼리 친목 도모를 위해 가끔 하는 축구 경기에서는 개발의 달인이기도 했다. 공은 늘 예측불허의 방향으로 새나갔다. 그러나 그는 오기가 있어서 공만은 악착같이 쫓아 다녔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개’였다. 그는 술을 마시면 얌전했던 적이 거의 없었다. 오바이트를 하고 싸움을 걸고 지랄을 했다. 천상 미친 개였다. 그러다 싸움이라도 날라치면 그는 솜주먹과 헛스윙으로 저 혼자 쇼를 하다가 진탕 얻어맞거나 혹은 개처럼 열심히 뛰어 도망치곤 했다. 잔뜩 웅크리고 자는 모습도 천상 ‘개’같았다. 그의 얼굴은 깨 정도는 콕콕 박힐 정도의 시커먼 모공으로 늘 지저분했고 개기름이 줄줄 흘렀다. 그렇지만 그도 일단 오기가 발동하면 제어하기 힘들었다. 그는 비장의 무기인 ‘이’를 사용하곤 했다. 상대의 어디든 그는 꽉 물고 절대 놓칠 않았다. 아무리 상대가 억센 힘으로 귓방망이를 날리고 발로 차고 주위에서 잡아 뜯어도 그는 놓치질 않았다. 그 모습 역시 ‘개’였다.

    형이라면 오토바이 폭주족에게 어떻게 했을까. 문득 형이 국수집 아들을 멋들어지게 팬 기억이 떠올랐다. 형의 엄청난 팔의 괴력을 만방에 보여주었던 그 일은 당시 원양어선을 타던 국수집 아들의 아비가 멍청한 아들을 위해 보내온 나이키 운동화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나이키 운동화는 모래내 아이들에겐 말도 안 되는 사치였다. 모래내 아이들은 기껏해야 까발로나 프로스펙스를 흉내낸 스펙스 운동화 아니면 언뜻 나이키 운동화와 비슷하게 보이는 페가수스 운동화를 신었다. 나이키 운동화 가격은 그들에겐 천문학적인 숫자였다. 제 아무리 미스코리아 예선 탈락이라는 화려한 이력을 지닌 오란씨 설희라도 몇 날 며칠 거기가 문드러지도록 가랑이를 벌리고 있어야 살 수 있었다. 국수집 아들은 말도 안 되는 호사를 부리는 주제에 핀토스 청바지까지 입고는 거들먹거렸다. 그런던 차에 그가 우연히 국수집 아들이 빨아서 널어놓은 나이키 운동화를 보게 되었다. 국수집은 일산시장을 따라 신작로를 향해 있는 길을 바라보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통로를 따라 국수집 주인 아줌마는 빨랫줄을 만들어 놓았는데, 여자는 시장 사람들이 줄기차게 드나드는 그곳에 버젓이 자신의 팬티며 커다란 브래지어를 거리낌 없이 널어 말리곤 했다. 국수집 여자는 원양 어선 탄다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집을 비우기 일쑤인 남편을 둔 데다가 입담도 좋고 육덕도 좋아 시장 사내들의 은근한 관심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런 까닭에 국수집 여자는 수상한 소문들로 시장 여자들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리곤 했다. 어쨌든 국수집 아들이 바로 그 통로 빨래줄에 여보란 듯 깨끗이 빨아놓은 나이키 운동화를 집게로 꽂아놓은 것이었다.

    어린 그에겐 눈처럼 하얗게 빛나는 나이키 운동화를, 그것도 모래내 아이들 모두가 탐내는 그 운동화를 거기에 널어놓은 국수집 아들의 행위는, 보는 사람이 임자니 아무나 집어가시오, 라는 뜻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예 경우가 없지는 않아서 단지 신어보기만 했다. 훔쳐갈 생각도 아니었고 문득 저걸 신으면 어떻게 보일까 궁금했을 뿐이었다. 국수집 아들의 나이키 운동화는 생각보다 컸다. 몇 발짝 앞으로 걸어가던 그는 형의 발보다 국수집 아들의 발이 훨씬 크다는 걸 알았고 또 몇 발짝 앞으로 걸어가 보니 그의 아비 발보다 국수집 아들 발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았다. 문득 목욕탕에서 본 국수집 아들의 시커멓고 축 늘어진 성기가 떠오르면서 ‘발이 크면 좆도 크다고 하더니 그게 사실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별 의미 없이 한발짝 한발짝 신작로 쪽을 향해 걸어가던 그는 별안간 뒤통수를 맞고 말았다. 순간 엄청난 통증이 몰려왔다.

    “개백정 새끼. 이게 어디 내 신발 갖고 토낄려구 그래?”

    국수집 아들은 주먹으로 그의 가슴과 배를 사정없이 갈겼다. 그는 숨이 턱 막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신어본 것뿐이라는 변명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가슴을 움켜 쥔 채 앞으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숨을 쉴 수 없었다. 그의 머리 속이 노래졌다. 단지 5초 동안 숨을 쉬지 못했을 뿐인데 이렇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똥통에 빠진 새끼가 감히 더러운 발을 집어넣고 지랄이야. 좆같은 새끼.”

    그는 똥통에 빠진 치욕스런 경험이 있었다. 그가 88올림픽을 간절히 기다렸던 이유 중의 하나도, 아이들이 올림픽 경기에 경도되어, 더 이상 그 사건을 입에 올리지 않으리란 희망 때문이었다. 88올림픽 전야를 화려하게 수놓는 폭죽 소리에 그의 똥통사건에 대한 기억도 묻혀지는 듯했다. 아이들은 88올림픽에서 우리나라 금메달수를 예측하기 바빴다. 서울에 온 쟁쟁한 세계 선수들, 그러니까 수영의 그리스틴 오토, 트랙의 패션스타 그리피스 조이너, 루마니아 체조 선수 도브레와 소련의 슈슈노바 그리고 세기의 대결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칼 루이스와 벤 존슨의 대결을 예측하고 파악하는 데 바빠 더 이상 그의 똥통 사건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88올림픽이 없었다면, 매양 사건에 굶주린 모래내 아이들은 그의 똥통 사건을 입에 오르내렸을 것이다. 아비의 매질이나 선생의 잔소리와 차별, 변소집 아들이란 놀림은 참을 수 있었지만, ‘똥통에 빠진 새끼’라는 말은 치욕 중의 치욕이요, 수치 중의 수치였다. 죽은 듯 널브러져 있던 그가 움찔하는 것을 본 국수집 아들은 그가 거짓으로 누워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나이키 신발 밑창으로 그의 뺨을 마구 갈기며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욕을 해댔다.

    “좆도 새끼, 갈보년 뒤꾸녕 닦는 새끼, 에미도 없는 거지같은 새끼.......”

    그러다 갑자기 국수집 아들은 손에 들고 있던 나이키 신발을 떨어뜨렸다. 그는 분명히 봤다. 국수집 아들 뒤에 서있던 형의 커다란 주먹 그리고 형의 머리 위로 솟아오르던 분노의 오로라를. 분노의 오로라를 품고 있던 형은 국수집 아들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내리쳤고 국수집 아들은 ‘억’ 소리와 함께 쓰러진 것이다.

    좆도 아닌 녀석은 바로 국수집 아들이었다. 그의 형은 국수집 아들이 떨어뜨린 나이키 운동화를 마구 짓밟았다. 그러고도 성에 안 찼는지, 손아귀 힘이 엄청나게 센 형은 손으로 나이키 운동화를 종잇장처럼 갈기갈기 찢어버린 것이다. 비록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았으나 그는 분명히 봤다. 형의 손, 형의 머리와 몸으로 타오르듯 분출되던 분노의 오로라를, 그리고 엄청난 힘을.

    역사적인 사건이란 대개 하루에 하나씩 일어나는 법인데 그날은 달랐다. 형의 괴력과 오로라를 발견한 날인 동시에 88올림픽이 개막한 날이기도 했다. 개막과 함께 폭죽이 터지고 하늘 가득 비둘기들이 날아올랐다. 억세게 운 좋은 일곱 살짜리 굴렁쇠 돌리는 남자 아이는 전 세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88올림픽 잔디구장을 누비며 굴렁쇠를 돌렸다.

    88올림픽이 되자 가장 활개를 친 사람은 류형사였다. 류형사는 술집을 순례하며 새로 들어온 여자들을 부지런히 개시했다. 그뿐 아니었다. 상납금 챙기는 데도 부지런했다. 보자기 펼쳐 놓고 파는 일산 상추 할매들뿐 아니라 포장마차에서부터 비교적 규모가 큰 디스코텍이나 카바레까지 각각의 규모에 맞게 착실히 상납금을 챙겼다. 한때 류형사의 좆이 엄청나게 크다는 소문이 돌았다. 같이 2차를 간 여자들은 그가 엄청난 크기로 쉴새없이 요구해 대는 바람에 견디질 못해 뛰쳐 도망갔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돌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근거없는 소문이었다. 여자들이 도망친 것은 사실이나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였다. 노랑머리에 의하면 류형사는 갖가지 도구를 집어넣기도 하고 마구 때린다고도 했다. 그의 이러한 취미 때문에 더러는 죽어 나자빠지는 여자가 한둘이 아니라고 했다. 류형사는 무소불위였다. 한때 모래내 양아치들이 싹 사라졌을 때 류형사는 평소 상납에 미진했거나 근거없이 개기던 치들도 함께 적당한 이유를 둘러대 잡아넣었다. 류형사에겐 든든한 줄이 있다고 했다.

    “저 새끼가 아비도 풀어줬잖아.”

    언젠가 형은 예의 감정이 묻어나지 않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미가 아비에게 맞아 죽은 것은 온 동네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류형사 덕분에 아비는 무혐의로 풀려놨다고 했다.

    “왜?”

    “개고기 공짜로 얻어먹는 재미지. 우리 같은 사람은 죽어봐야 개 값만도 못한 거야.”

    고작 개고기를 공짜로 먹는다는 이유 하나로 아비는 어미를 죽여도 멀쩡했고, 결국은 그들 입으로 들어갈 개나 흑염소 잡는 일에 형은 혹사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그로서도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세상은 이미 어긋난 채 굴러가는 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가끔 그는 형의 인생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을 낳은 어미를 기억하고 어미의 정을 그리워하는 형이 부럽기도 했다. 그를 낳은 어미는 그를 낳자마자 언젠가 국수집 아들네에서 읽은 선녀와 나무꾼의 선녀처럼 도망갔다고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날개 같은 수많은 제 옷만 챙겼을 뿐, 아들은 두고 간 것이다.

    설희도 오란씨에 오자 얼마 안돼 류형사와 2차를 가야 했다. 류형사와 2차를 간 다음 날이면 설희는 피가 번진 붕대로 다리며 팔을 친친 동여매어 나타났다. 반바지를 입어 드러난 다리에는 온통 멍이 들어있었다. 목까지 졸렸는지 깊숙이 패인 듯한 손가락 자국도 보였다. 그런데도 설희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그와 형에게 큰 목소리로 “안녕” 인사를 하고는 변소 안으로 들어갔다.

    “저 년은 저러고도 뭐가 좋다고 웃을까?”

    그와 형은 동전을 받기 위해 만든 변소의 두 평 남짓한 쪽방에 있었다.

    “년이 뭐냐? 누나한테......”

    형은 그의 머리를 쥐어 박았다. 형이 살짝 쥐어박았을 뿐인데도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다. 노랑머리에겐 같이 욕도 하고 그랬는데 같은 매미집 여자인 설희에겐 형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치, 왜 그래? 머리 나쁜 년이니까 이런 데서 몸 팔게 되는 건 당연한 거라며.”

    그는 형의 동의를 구하고 싶었으나,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형은 설희가 들어간 변소칸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담배연기를 바라보기만 했다.

    “형, 술집 여자는 왜 모두 담배를 피울까?”

    그가 불쑥 형에게 물었다. 형은 약간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술집 여자 아니라도 불행해지면 담배를 피우게 돼. 널 낳은 어미도 날 낳은 어미도 다 담배를 피웠다.”

    그의 마음은 참으로 쓸쓸해졌다. 냄새나는 화장실에 쭈그려 앉아 보글거리는 똥 위를 바득바득 기어나오려는 구더기들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것. 그것은 똥 같은 세상에 구더기처럼 살아야 하는 인생의 한 단면이었다. 인생을 바라보며 지난 밤의 고통을 담배 연기로 씻어내 버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비애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는 조금 눈물이 나왔던 것도 같다. 어떻게 보면 변소와 매미집은 비슷한 면이 많았다. 누구든 얼마의 돈만 내면 배설의 욕구를 채워주었던 곳이었고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하찮은 대우와 무시를 받으며 끈덕진 구린내를 달고 나오는 곳이었다.

    그때 아비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니들 돈통에 손 댔지?”

    아비는 여느 때처럼 돈통에 동전을 박박 긁어 전대에 집어넣었다. 어이가 없었다. 아비는 거스름돈을 줘야 할 목적으로 있는 50원짜리 동전 묶음과 10원짜리 동전 묶음 외엔 천원짜리나 오천원짜리 지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세서 챙겨갔고 10원 하나 허투루 새어나가지 못하게 했다.

    “넌 왜 여깄냐? 가서 일하지 않고?”

    아비는 형을 보자 눈을 부라렸다. 형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사실 그 방에 세 사람이 같이 지낸다는 것은 서로에게 힘든 일이어서 형은 언제부터인가 할멈네 가게서 잠을 자곤 했다.

    아비는 술 냄새를 풍기며 벌렁 드러누웠다. 그는 폈던 다리를 가슴까지 끌어당겨 앉았다. 아비는 금새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았다. 콧구멍 밖으로 들쭉날쭉 흔들리는 털이 나왔다 들어갔다 했다. 흐흐흡흡 퓨 커커커. 아비는 숨을 들이마셨다가 몇 초 동안 죽은 듯 있다가 늦게서야 숨을 몰아 내쉬었다. 가끔 그는 아비가 저렇게 잠을 자다 죽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아비의 코에 귀를 들이대다가 제트기처럼 내뿜는 콧바람에 귀청이 떨어질 뻔했던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아비는 잠을 자다가,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사타구니를 북북 긁다가 손을 뺐다. 손톱 사이에 꾸불꾸불하고 시커먼 음모가 껴 나왔다. 그때 설희가 공중변소로 들어왔다. 그는 그걸 보면서 아비의 엄청나게 북실북실한 음모가 생각났다. 그는 문득 징그러운 그것이 없는 설희야말로 정말 눈처럼 깨끗한 여자라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설희의 하얀 다리, 파란 멍, 그리고 짧은 반바지 안에 있을 살구빛을 띠었을 그것. 그것을 상상하다 보니, 그는 자꾸 자지가 가려워졌다. 그는 얼른 설희가 들어간 변소칸을 쳐다보았다. 설희는 에티켓 노랑머리가 자주 들어갔던 바로 그 다섯 번째 변소칸을 들어갔던 것이다.

    그는 침을 꼴깍 삼켰다. 갑자기 다급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는 발이 걸리는 대로 아무거나, 아비가 끌고 다니는 갈색 슬리퍼를 발에 꿰차곤 어기적 어기적 네번째 변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곤 엉덩이를 하늘로 솟구쳐 들고는 시멘트 벽면 사이로 난 틈으로 눈을 바짝 들이댔다. 사실 그 자세는 키가 작은 그로서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쪼그려 앉아 보기엔 틈의 위치가 다소 높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아비의 커다란 슬리퍼를 신고 나온 터라 발 위치를 잡기가 더 힘들었다.

    가까스로 자리를 잡아보았지만 아쉽게도 타이밍이 너무 늦고 말았다. 마침 설희는 일을 다 보았는지 엉덩이를 들어 올려 바지를 올리던 중이었다. 너무 짧은 순간이었던지라 놀랍도록 하얗고 두루뭉수리하게 큰 엉덩이를 슬쩍 보았을 뿐 진짜 보고 싶었던 그 부분은 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자지는 딱딱해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고 이상한 기대감에 달떠 틈 가까이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똥통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심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국수집 아들이, 그리고 닭집 아저씨가 이 짓에 집착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숨이 거칠어지면서 어쩐 이유인지 그의 다리에도 힘이 빠져나갔다. 그러다가 그의 발보다 훨씬 컸던 갈색 슬리퍼의 낡은 밑창이 발바닥에서 밀려 나가고 만 것이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의 아비는 슬리퍼조차 도움이 안 되었다.

    그는 ‘악’하는 비명조차 내지르지도 못한 채 마치 몸이 빨려들어 가듯 똥통 속으로 쑤욱 빠져 버리고 말았다. 간신히 두 팔로 입구를 잡았지만 너무 늦었다. 뜨뜻미지근하고 물큰한 똥통으로 그의 두 다리는 허벅지 아래까지 쑤욱 빨려 들었다. 초여름에 분뇨차가 왔던 이후 겨울에야 차를 부른다고 했던 아비의 말이 떠올랐다. 아비는 똥이 가득 차지 않으면 분뇨차 새끼들이 통에 똥을 덜 채운 채 한 통값을 받는다면서 변소에 똥이 가득 찰 때까지 부르지 말아야겠다고 했었다. 이대로 손에 힘이 빠지면 아무도 모른 채 똥물에 빠져 질식해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제서야 비명을 질러댔다. 설희마저 이곳을 나간다면 그의 비명을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중변소는 상가와도 뚝 떨어져 있는데다가 그나마 가까이 붙어 있는 매미집은 늘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있기 때문에 그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술이라도 마시면 가뜩이나 잠귀가 어두운 아비가 그의 소리를 들을 리 없었다.

    자신을 구할 이는 ‘오란씨’의 여자, 설희밖에 없다는 생각이 미쳤다. 그는 사내답지 못하게 계속해서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오줌 이끼가 잔뜩 낀 시멘트 바닥은 말할 수 없이 미끄러웠다. 더 이상 손바닥으로 바닥을 잡고 버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차츰 몸은 아래로 아래로 빠져 내려갔다. 그는 절망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이 자신에게 벌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형이라도 있었다면 단번에 그를 꺼내 주었을 텐데. 그는 마침내 훌쩍거렸다.

    그때 문이 확 열렸다.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은 설희가 아닌 에티켓의 노랑머리였다. 에티켓 노랑머리는 그의 뒷덜미를 잡아 끌어 올렸다. 노랑머리 뒤에 서있던 ‘오란씨’ 설희는 사슴같이 커다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멍하니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 노랑머리는 힘도 좋았다. 목덜미가 집힌 그는 허우적거리며 노랑머리의 젖을 덥썩 잡고서야 겨우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다리에 온통 똥을 묻힌 채 처참한 몰골로 바닥에 널부러졌다. 노랑머리는 그가 젖을 잡았을 때부터 미친 듯이 웃어대더니 그가 벌레처럼 바닥으로 기어 나오자 더럽다며 비명을 질러댔다. 발을 동동 구르고 가슴까지 출렁거리며 저 새끼가 똥 묻은 손으로 내 가슴을 만졌다며 지랄을 했다. 가뜩이나 웃음이 흔한 설희는 노랑머리보다 더 크게 웃어댔다. 잠을 자던 아비는 그제서야 일어나 문을 열어 보았다. 그는 몸을 일으켜 똥을 잔뜩 묻힌 맨 발로 변소 바닥에 섰다. 그 꼴을 본 아비란 작자는 얼른 뛰어내려와 어떻게 된 것이냐, 다친 데는 없느냐, 놀라지는 않았느냐, 무슨 좋은 구경났다고 웃어대냐, 노랑머리와 설희에게 핀잔주지 않았다. 놀랍게도 같이 웃어대더니 바깥으로 뛰어나가서는 마침 변소 앞을 지나가던 정육점 주인을 불러 세웠다. 정육점 주인은 뱃살을 출렁이며 웃어댔다. 아비는 시장 길 건너까지 뛰어 나가서 건어물 장씨 아줌마와 국수집 아줌마마저 불렀다. 건어물 장씨 아줌마는 또 비비안 아저씨를 불렀고 비비안 아저씨는 고추가게집 꼬마 녀석을 불러서는 너도 조심하지 않으면 저 꼴이 된다며 주의를 시켰다.

    그렇게 하여 똥칠을 한 채로 서서 거반 모든 시장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서야 아비는 그의 등짝을 찰싹찰싹 때리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옷을 홀딱 벗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비의 호통에 기가 질린 그가 옷을 벗자, 아비는 변소 앞에 붙어있는 수돗물을 틀어 호스 입구를 납작하게 누른 다음, 그의 몸에 물을 세차게 뿌려댔다. 열 한살의 그는 창피해서 어쩔 줄 몰라 손으로 밑을 가리며 몸을 움츠렸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이미 똥 묻은 더러운 꼴을 봐서 그런지 그의 알몸엔 그다지 큰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국수집 아줌마는 똥독은 물로는 가시지 않으니 소주로 닦아보라고 건의 했고 아비는 그 아까운 걸로 더러운 이 새끼를 닦아 내느니 똥물을 내가 받아먹겠다는 어처구니없는 농을 부렸다. 그는 이런 상황에 농담을 지껄이는 아비가 말할 수 없이 증오스러웠다.

    그 뒤의 시간은 언젠가 그가 학교에서 배웠던 일제시대 독립투사가 받았다던 오욕과 치욕보다 더한 일들로 채워졌다. 차라리 그때 똥통에 빠져 죽었다면 더러운 동정이라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똥간집 아들, 개백정 동생, 거기에 똥통에 빠진 얼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다행히도 올림픽이 시작되자 치욕의 시대는 끝이 났다. 아이들은 더 이상 어둡고 냄새나는 그의 과거로 즐거움을 찾지 않았다. 상무 체육관에서 벌어진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결승전에서 악바리 김영남 선수가 첫 금메달을 따면서 아이들도 어른들도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고 즐거워했다. 그들은 단순했다. 이기면 열광적으로 기뻐했고 지면 세상이 끝난 것처럼 화를 냈다. 축구의 강호 아르헨티나와의 게임에서 한국은 2:1로 패했고 어른들은 피를 토해내듯 한숨을 내쉬며 술을 마셔댔다. 그러나 그와 또래들은 미국의 칼 루이스와 캐나다의 벤 존슨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는 벤존슨이 이기길 염원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벤 존슨 예선 기록이 칼 루이스보다 부진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의 불길한 버릇 중 하나는 늘 질 것 같은 팀만 응원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생이 가뜩이나 별 볼일 없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어쩌면 그런 버릇에서 파생되는 일종의 나비 효과인지도 몰랐다. 어린 그에게 있어 이길 것이 예상되는 팀을 응원한다는 건 어쩐지 무의미했다. 질 것이 예상되는 선수나 팀을 응원하다가 역전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그에겐 낙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런 기쁨을 누리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일말의 희망을 갖기도 전에 터무니없는 점수나 기량차로 지기 일쑤였기에 그는 경기를 늘 신경질적으로 관람하곤 했다.

    칼 루이스나 벤 존슨의 대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벤 존슨이나 칼 루이스는 둘 다 엄청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며 방송이나 신문도 제각각 다르게 결과를 점쳤으나, 전체적으로 칼 루이스에게 후한 점수를 주었다. 그것이 그의 심사를 뒤틀리게 만들었다. 또한 벤 존슨의 뭉뚝뭉뚝하고 사내다운 얼굴 생김이며 ‘칼 루이스는 내 상대가 못 된다’고 호언장담하는 남자다움도 그의 마음에 들었다. 칼 루이스는 스타트가 늦었지만 70미터 이후부턴 속도가 나는 스타일이었다. 검은 탄환 벤 존슨은 폭발적인 스피드로 유명했지만 뒷심은 칼 루이스에게 밀렸다.

    학교에선 올림픽 비인기 종목 경기 표를 아이들에게 팔았고 거길 다녀온 아이들은 어깨를 들썩이며 으시댔다. 형은 이때 중학교를 중퇴한 것을 매우 아쉬워했다. 하지만 바보 같은 소리였다. 설령 형이 중학교를 다녀서 비인기 종목 경기라도 갈 수 있는 상황이 되어봤자, 그의 아비가 표값을 주며 보내줄 리 없었다.

    모래내 아이들의 손이 바빠졌다. 국수집 아들은 소련의 엘레나 슈슈노바와 루마니아의 다니엘라 실리바스의 체조를 보면서, 형은 안으로 말려 들어간 수영 팬티 빼내는 여자 수영선수들의 엉덩이를 보거나 그리피스 조이너의 독수리 발톱 같은 긴 손톱이 제 등판을 할퀴는 상상을 하며 손운동에 열중했다.

    올림픽 9일째가 되는 날, 드디어 벤 존슨과 칼 루이스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내기를 걸었다. 그러나 그는 동참하지 않았다. 물론 내기에 걸 돈도 없었지만, 벤 존슨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경기 시작 몇 시간 전부터, 방송사마다 벤 존슨과 칼 루이스의 경기 스타일을 계속해서 소개했다. 과연 누가 이길 것인지, 세계 신기록을 깰 수 있을 것인지가 관심의 초점을 이루었다.

    출발선에 치타처럼 몸을 웅크린 벤 존슨과 칼 루이스가 전세계의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스타트를 기다렸다. 정적이 흘렀다. 그도 따라 숨이 막혔다. 레이스의 시작은 이렇듯 숨이 막히는 것이다.

    그랬다. 그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벤 존슨이 이긴 것이다. 백미터 결승선을 끊기 직전 벤 존슨은 자신이 일으킨 먼지를 뒤집어 쓴 칼 루이스를 흘낏 돌아보았다. 육상 경기를 진행하는 앵커는 벤 존슨이 막판에 뒤돌아보지만 않았어도 더 놀라운 기록을 세울 수 있었을 거라 흥분하며 떠들어 댔다. 하지만 이미 벤 존슨의 기록은 세계 신기록이었다. 9초 79. 벤 존슨은 경기 초반부터 뛰쳐나오기 시작, 칼 루이스에게 역전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1백 미터를 48걸음 만에 주파한 것이다. 칼 루이스는 이보다 훨씬 늦은 9초 92였으며 거리도 1미터를 넘게 훨씬 뒤졌다. 9초 8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기록의 벽이었다. 그는 너무 기뻐서 좁은 방 안에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벅차오른다는 걸 난생 처음 알았다. 그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짐승같이 소리를 질러댔다. 우 우 오오아 와아와아아.

    한국팀이 금메달을 따고 선전하는 것도 좋았지만 벤 존슨의 금메달 획득만큼 기쁘지 않았다. 왠지 그도 이제 그동안의 온갖 오명을 벗고 일인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어처구니 없는 자신감마저 들었다. 그때 문득 설희가 떠올랐다. 설희에게 가서 이 지긋지긋한 모래내를 같이 떠나는 게 어떠냐고 말해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말하면 설희는 그를 데리고 갈 것도 같았다. 구더기같은 아비가 잠든 틈을 노려 지긋지긋한 똥간에 확 불을 지를 수도 있을 것도 같았다.

    그는 개천가를 뛰었다. 그때 다리 아래에서 설희와 형이 거의 말라버린 개천의 물줄기를 바라보며 나란히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한껏 고양된 자신감으로 형과 설희에게 달려 내려갔다. 무슨 일로 형과 설희가 텔레비전도 안 보고 그토록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지 그때까지만 해도 궁금하지 않았다.

    “형.”

    형은 아주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형의 얼굴은 매우 낯설었다.

    그가 생각하는 가장 남자답고 어른스럽다고 생각하던 형이었건만 어쩐지 놀랄 만큼 아름답고 어리게까지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왜?”

    평소의 무뚝뚝하던 목소리도 아니었다. 어딘지 모를 따스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형, 벤 존슨이 금메달을 땄어. 칼 루이스를 제치고. .”

    “그래?”

    옆에 있던 설희는 간밤에 또 류형사에게 맞았는지 볼에 벌건 손자국이 보였다.

    “칼 루이스가 이기는 게 좋지 않아? 그래두 칼 루이스는 미국 선수잖아.”

    설희는 류형사에게 맞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음 띤 목소리로 말하였다.

    “에이, 벤 존슨이 더 멋지지.”

    “그래봐야 둘 다 깜둥인데 뭐.”

    설희는 역시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여자라고 그는 생각했다.

    “나두 너만한 동생이 있는데......”

    “아, 그래? 여자야, 남자야?”

    “너처럼 이쁜 남자애.”

    남자는 이쁘다고 표현하는 게 아니라 멋있다거나 터프하다고 말해야 한다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그는 가만히 있었다.

    “이거, 너 먹어.”

    설희는 손에 쥐고 있던 파인애플맛 오란씨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옆에 서 있던 형은 바보같이 계속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는 설희에게 받은 오란씨를 그 자리에서 마시지 않았다. 그는 그걸 가만히 들고 있다가 아무도 보지 않는 변소에 들어가 쭈그려 앉은 채 한 모금 한 모금씩 음미하며 마셨다. 하두 오래 쥐고 있었는지 오란씨는 미지근했으나 톡 쏘는 맛은 여전했으며 달콤한 파인애플향이 나는 오렌지 맛은 오래도록 혀끝에 남아 돌았다. 이상하게 오란씨는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더 말랐다. 그는 오란씨의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털어 마시고는 캔에 새겨진 설희를 닮은 모델을 오래도록 쓰다듬으며 바라보았다.

    그날 밤 아비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형과 단둘이 있을 수 있었다. 형은 그를 미친 놈이라고 했지만 콧노래를 멈출 수가 없었다. 이건 모두 벤 존슨이 금메달을 땄기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벤 존슨의 1등은 얼마나 달콤한가. 이긴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뭔가 더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까지 남기는 일등이란 얼마나 환상적인가. 아득바득 열심히 해서 일등을 채우려드는 인간과는 전혀 별다르다는 점이 그의 남성적 허영심을 만족시켰다.

    “새끼가 실성을 했나?”

    형은 그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형은 벤 존슨이 이긴 게 기쁘지 않아?”

    “그래봤자 둘 다 깜둥이에 양놈인데, 뭐가 기뻐?”

    결국 형도 설희와 같은 소리를 했다.

    “난 벤 존슨이 좋아. 칼 루이스는 웬지 호모 같잖아.”

    “호모가 뭔지도 모르는 자식이.”

    맞다. 호모가 뭔지 그는 몰랐다. 그냥 남자답지 못한 남자를 가리켜 그렇게 이야기 한다는 정도로만 알았던 것이다.

    “근데 설희는 몇 살이야?”

    “나보다 한 살 많아.”

    그렇다면 그보다 일곱 살이 많았다. 그 정도는 충분히 극복 가능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류형사가 아직도 괴롭힌대?”

    형의 시선이 어렴풋이 흔들렸다. 그리곤 형은 곧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실은 나 딱지 뗀다.”

    “딱지?”

    “아니다. 임마. 네가 알 바는 아니고.”

    형은 벌렁 뒤로 누웠다. 딱지를 뗀다...... 그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오후 나타난 아비는 개를 훔쳐오겠다며 오토바이를 끌고 나갔다. 형은 그에게 천원짜리 다섯장을 그에게 쥐어주며 나가서 맛있는 걸 사먹고 놀라고 했다. 생일도 설날도 아닌데 오천원이라는 거금이 생기다니, 그는 형에게 이게 무슨 돈이냐고 물어보려다 괜히 그러다 도로 뺏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받았다. 아비가 하듯 다섯 장의 지폐를 똘똘 말아 양말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그는 지폐를 한 장씩 꺼내, 입에 넣으면 톡톡 튀는 오렌지 맛이 나는 사탕과자와 오색찬란한 색소가 잔뜩 들어있는 쫀드기와 불량 식품들을 샀다. 과자를 주머니에 쓸어 넣고는 개천가를 어슬렁거리는 녀석들과 말뚝박기를 하며 놀다가 하나씩 꺼내 먹곤 했다. 알코올램프 위에 올려놓은 소금처럼 톡톡 튀어 오르는 달콤한 사탕과자를 입에 넣고 마음껏 음미했다. 그는 그렇게 개천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그는 오락실을 들러 동전을 수북히 쌓아놓고 그동안 돈이 없어 구경만 해야 했던, 자칼과 올림픽 게임을 했다. 그러나 그날따라 재미도 없고 지루했다. 동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지만 그는 자꾸 집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만 들었다. 오락실을 뒤로 한 그는 사탕과자를 입천장 위로 살살 굴려 돌리면서 공중변소 방문 앞에 섰다. 돈을 받는 창문이 꼭 닫혀있었다. 게다가 여자 슬리퍼가 문 앞에 있는 게 이상스러웠지만 그러나 그뿐 별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그는 그만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두 평 남짓한 공중변소에 딸린 바로 그 방에서 설희의 하얀 살과 형의 가무잡잡한 살이 엉켜 있었다. 땀에 젖은 형은 설희의 몸에서 일어나 그에게 나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는 우두커니 서서 형과 설희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설희가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 슬쩍 그는 설희의 사타구니를 보았다. 소문보다 더 깨끗한 조가비 같은 살구빛을 띄었다. 역시 설희였다. 형은 옆에 있던 베개를 그에게 던졌다.

    “나가 있으라니까 내 말 안 들려?”

    그제서야 그는 귀가 뚫린 듯 했다.

    “혀엉.......흐흐흐”

    그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돌아섰다. 그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남자는 괴로운 상황에서 웃는 거야.’ 언젠가 했던 형의 말을 떠올려봤지만 도무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달리기 시작했다. 모래내의 개천 둑방길. 피어오르는 역한 물내를 맡으며 벤 존슨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역사적인 불행은 하루에 한 가지만 있는 법인데 88올림픽은 모든 것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가장 사랑하는 형이 하필이면 설희와 그 짓을 하는 걸 그가 목격했고 그리고 그의 영웅, 벤 존슨이 약을 먹고 달린 사실이 발각되고 말았다. 벤 존슨 목에 걸렸던 빛나는 금메달을 칼 루이스에게 건네주게 됐다. 남자답지 못한 칼 루이스가 얼마나 징징댔으면, 별도의 시상식도 치러 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벤 존슨은 약물 복용 때문에 캐나다 대표팀으로부터도 영원히 제명당해야 했고 평생 체육연금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벤 존슨은 명예도 돈도 금메달도 빼앗겨야 했다. 그리고 그를 열광적으로 따랐던 어린 소년의 마지막 환희와 자신감마저 잃게 했다. 후에 ‘나만 약물을 먹은 게 아니다. 그것은 미국이 캐나다의 금메달을 뺏으려는 음모였다’는 벤 존슨의 말에 일면 수긍이 가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잃었던 금메달이 그리고 어린 날의 환희가 되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날 이후 형은 그에게 자꾸 먹는 걸 주었다. 멍하니 앉아 있는 그의 목덜미 뒤로 오란씨를 쑥 집어넣기도 했다. 차가운 기운에 화들짝 놀라 펄쩍 뛰면 형은 웃지도 않고 그냥 뒤돌아서서 갔다. 아비에게 얻어맞아 눈물을 짜고 있으면 형은 또 그의 앞으로 뜨거운 물을 부은 사발면을 밀어넣고 갔다.

    ‘씨발, 내가 이걸 먹을 줄 알아?’

    속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입 가득 고인 침을 참을 수 없던 그는 형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후루룩 국물부터 마시곤 했다.

    형은 그에게뿐 아니라 설희에게도 음식을 해다 날라댔다. 아비와 할멈의 눈을 피해 보신탕을 만들어 주기도 했고 어쩔 때는 미꾸라지를 사다가 직접 갈아서 추어탕을 만들어서 주기도 했다. 어디서 그런 걸 배웠는지 형의 음식 솜씨는 제법 좋았다.

    형은 솥 가득 추어탕을 해서는 공중변소 곁방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쳐다보지도 않고 묵묵히 창문 앞에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앉아 있었다.

    “너 나랑 말 안 할 거지?”

    그는 아무 말도 안했다. 말을 안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어쩐지 어색했다. 방 안 가득 들큰한 추어탕의 냄새가 진동을 했다. 형은 솥을 아비의 목침 위에 올려놓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설희가 마침 변소로 들어왔고 형은 설희를 불렀다.

    “내가 들어가도 될지 몰라.”

    설희는 히죽거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형은 숟가락 세 개를 솥에 꽂았다.

    “밥도 다 말아왔어. 퍼 먹으면 돼”

    형은 그에겐 먹으라는 말도 않고 설희와 둘이 김을 후후 불어가며 수저질을 했다. 그의 입안으로 가득 침이 고였다.

    “와서 먹어. 니 숟가락도 가져왔어.”

    형의 그 한마디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는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까봐 부러 헛기침을 하며 천천히 뒤 돌았다. 설희가 수저를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내가 성격이 좋으니까 참는 거야.”

    뭔가 한마디 하지 않으면 어쩐지 자신이 더 우스워질 것 같아 그는 한마디 했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형과 설희는 배를 잡고 깔깔대고 웃어댔다.

    “아씨, 웃지마”

    그는 수저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깔깔하고 부드럽게 씹히는 건더기와 구수한 국물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새끼야, 먹을 거면서 뭘 튕겼냐?”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눈물이 났다.

    “어라, 너 왜 울어?”

    설희가 그의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이씨, 저리 치워.”

    그는 설희의 손을 잡아 뗐다.

    “너 설희 좋아했던 거 아니야?”

    갑자기 형이 깔깔대며 웃었다. 그의 얼굴이 벌개졌다. 형과 설희가 큭큭거렸다. 그들의 작태에 기분이 나빠져야 옳았으나 그는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따뜻한 밥과 국물이 목구멍을 넘어가니까 그런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쨌든 그는 웃다가 울면서 마지막 남은 밥 한톨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그날 이후 그에게 따뜻한 밥과 국을 해주었던 사람은 없었다. 기껏해야 그가 드나드는 얼굴도 모를 식당의 주방 아줌마들 뿐이었다. 그러던 그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ㄷ휴게소 식당을 다니면서 지능이 모자란 순희를 알게 된 것이다. 순희는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도왔다. 옷도 아무렇게나 입고 다녔고 잘 갈아입지도 않았다.

    순희는 카운터 뒤편이나 식당 앞 화단에 앉아 있다가 그가 오는 걸 발견하면 쪼르르 달려와 넙죽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꼭 자기네들이 따로 퍼 먹는 밥솥에서 밥을 떠 그에게 가져다주곤 했다. 순희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가 미리 콜라를 주었기 때문인지, 어느 날부터인가 먹을 것을 사달라고 조르지도 않았다. 순희는 그가 사준 콜라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맞은 편 의자에 앉아 그가 밥 먹는 걸 구경하곤 했다. “밥 잘 먹는데.” 순희는 어린 애 같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그가 밥을 다 먹을 때가 되면 또 쪼르르 식당 주방으로 들어가 역시 저들 식구들이 먹는 슝늉을 따뜻하게 데워다가 가져다주었다. 계산을 치룬 후에 그곳 휴게소 공중 화장실을 갈 때도 순희는 그를 따라가 앞서 기다리다가 그가 나오면 종이컵에 담긴, 역시 김이 나는 따뜻한 커피를 내밀어 주었다. 그가 차에 올라 탈 때까지도 순희는 그를 따라다녔고, 그의 덤프트럭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댔다.

    귀찮을 법도 했지만 순희가 그렇게 따라붙는 것에 대해서 그는 좋다 싫다 내색하지 않았다. ‘순희 신랑 오네’라는 식당의 주방 아줌마들의 농치는 소리나, ‘언제 우리 순희 데리고 가려냐’는 주인 여자의 뚝뚝한 말에도 ‘순희가 자식은 못 낳아도 살림도 여자노릇도 잘 한다’고 은근슬쩍 흘리는 말에도 난처해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그런 말이 있던 전부터 순희와 사는 자신의 모습을 머릿 속에 그리곤 했다.

    오늘 그는 평소보다 좀 늦게 ㄷ휴게소에 내렸다. 일단 순희와 식당 여자에게는 넌지시 이야기를 꺼내볼 요량이었다. 해가 진 식당은 유난히 조용했고 순희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밥을 다 먹고 나서 식당 주방을 기웃거리며 순희를 찾다가 화장실에 들렀다. 일을 보면서 여느 때처럼 거울을 통해 뒤편 잡풀이 우거진 뒷산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낮게 내려앉은 뒷산 덤불 위로 그림자가 어룽거렸다.

    “아, 씨. 저리 가. 싫어, 싫어. 아 씨. 아파.”

    순희 목소리다. 그는 눈을 크게 떴다. 빨간 색 가죽잠바를 입은 녀석과 회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녀석이 밝은 가로등 불빛 아래 서 있었다. 은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 두건을 쓴 녀석이 일어서다가 두건이 흘러 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바지춤을 올리고 있었다. 뱀대가리처럼 박박 민 머리통 위엔 똬리를 튼 뱀모양의 문신이 보였다.

    그는 화장실에서 급히 나와 덤불숲으로 달렸다. 20대 남짓한 바로 그 녀석들이 그의 곁을 지났다. 순희의 훌쩍거리는 울음 소리가 들렸다. 다가가 보니 순희 옷은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었고 머리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를 본 순희가 그대로 오줌을 싸는지 가랑이 밑으로 오줌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휙 돌아서서 세 놈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넌 빨리 옷 입고 식당으로 가서 알려. 알았어?”

    그의 말에 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시시껄렁한 농을 주고받는 세 명의 청년들에게 바짝 다가갔다.

    “야,야,야......이,이,개,개,새끼야.”

    “뭐야?”

    빨간 가죽잠바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니들, 니들 감,감히 순희를 건드려?”

    그는 갑자기 말을 더듬거렸고 저도 모르게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런 그의 모습이 우스웠던지 셋은 서로 곁눈질을 하며 빙그레 웃었다.

    “지가 먼저 해달랬거든요.”

    회색 머리는 주머니에서 잭나이프를 꺼내 그의 목 주위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입술을 엇물고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술이 떨렸다.

    “아저씨, 너무 긴장하네.”

    회색 머리는 잭나이프 등으로 그의 입을 꾹꾹 눌렀다.

    “왜 너도 꼴려? 하고 싶으면 너두 해.”

    뱀대가리가 옆에서 서서 한마디 거들었다. 셋은 히히덕댔다.

    언제 다시 왔는지 순희가 그의 뒤에서 소매춤을 잡고 흔들었다.

    “콜라 사준다고 하더니 나 때렸어.”

    순희는 치마를 벌렁 들어올렸다. 허벅지에 멍 자국이 울긋불긋 했다.

    “저 봐. 저 년 하는 짓 좀 봐. 한 번 더 해달란다.”

    회색머리는 낄낄거렸다. 순희 허벅지의 멍을 보자, 그는 더욱 화가 났다.

    “니들, 니들......우리 순희를 때렸어?”

    “호, 뭐냐. 저년 서방이라도 돼?”

    뱀대가리는 그에게 아래턱을 내밀었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헛스윙의 대가인 그는 이를 악물었다.

    “한 대 칠 기세다, 너.”

    뱀대가리가 머리를 그의 턱 밑으로 들이댔다. 그는 눈을 꼭 감고 주먹을 날렸다. 조준을 잘 못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이쿠 하며 뱀대가리 옆에 있던 빨간 가죽 잠바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뱀대가리와 회색 머리가 당황하는 틈을 노려, 이번엔 둘의 정강이를 구두 끝으로 사정없이 걷어찼다. 개발의 달인인 그답지 않게 정강이를 정확히 맞추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셋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고 이어 그를 패기 시작했다. 뱀대가리가 먼저 헤딩으로 그의 얼굴을 날렸다. 코가 시큰거릴 틈도 없이 뜨거운 코피가 흘러내렸다. 그가 코 아래를 주먹으로 닦아내며 몸을 비틀거리자 회색머리가 그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그가 맥없이 바닥으로 벌렁 나자빠지자 빨간 가죽잠바가 그의 가슴 위로 올라탔다. 두 다리를 버둥거리자 회색머리가 양쪽 다리를 붙잡았다. 뱀대가리가 서서 그의 얼굴이며 가슴이며 사타구니며 정강이며 발로 차고 짓밟았다. 옆에 있던 순희는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은 채 끄윽끄윽 트림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주위를 깡충깡충 뛰었다. 그는 숨을 쉴 수가 없어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주먹 세례가 끝날 듯 하면 구둣발이 날라 왔고 구둣발이 그치는가 싶으면 주먹이 날라 왔다.

    “씨발 새끼, 재수없게.”

    그들은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그에게 침을 뱉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누워있었다. 순희가 다가와 그의 얼굴을 만졌다. 바들바들 떨며 그의 볼을 쓰다듬는 순희의 손이 차가웠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시큰거리는 얼굴을 쓸어내리고 잇새로 피침을 뱉었다. 그는 경찰에 신고할까도 생각했다. 실제로 112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사고 경위를 말하고 이름을 말하고 전화번호를 말하는 절차들이 어쩐지 두렵게 느껴졌다. 게다가 그동안 보아온 바로는 경찰은 저 자식들을 혼내주지도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에선 순희가 저런 식으로 당하는 걸 알면서도 묵인해 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폴더를 닫고 주차해 놓은 그의 15톤 덤프트럭 앞으로 절둑거리며 걸어갔다. 순희는 그의 뒤를 자분자분 쫓아왔다. 그는 순희의 발소리를 들으며 덤프트럭 위로 올라가 문을 닫았다. 사이드 미러로, 덤프트럭 뒤에 서있는 순희의 모습이 보였다. 순희의 머리엔 나뭇잎과 흙덩이가 묻어 있었고 치마는 반쯤 말려 올라가 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쌍거풀 없는 커다란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으며 입술은 터져 있었다. 순희는 언제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활짝 웃으며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두 대의 오토바이가 다시 보인다. 회색 머리의 닌자보스가 맞은편에서 돌진하며 중앙선을 넘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내처 헤드라이트를 끈 채 달려왔는지 중앙선을 넘는 순간 헤드라이트를 밝힌다. 놀란 그는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옆으로 꺾었다. 하마터면 가드레일을 박을 뻔했다. 오토바이 녀석들의 낄낄거리는 웃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가 후진 기어를 넣으며 심장을 쓸어내렸다. 녀석들은 그의 옆으로 바짝 붙더니 또 다시 퍽규를 날렸다.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문다. 휴대폰이 울린다. 액정 위로 뜬 전화번호는 총무과의 이씨다. 폴더를 열자마자 이씨의 새된 목소리가 쏟아졌다.

    “어디야, 왜 안 들어와?”

    “아니 급한 건 난데 왜 소리를 질러요?”

    “신씨가 회사로 차 판 건 알고 있지?”

    “신씨가? 신씨가 차를 팔아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신씨가 말하지 않았어? 남은 할부금 우리가 대주기로 하고 신씨가 회사로 넘겼어.”

    “내 참, 남은 할부금이 얼마나 된다고 그딴 식으로 차를 넘겨? 내 돈 있잖아요. 어음 할인 해준 거, 그거 신씨 주면 깔끔하게 마무리 되는 거란 말에요. 지금 괜히 저 놀리는 거죠?”

    “어음? 그래 말 잘했다. 어디서 부도 어음이나 갖고 와 놓고선. 그거 모르고 받아다 내줬으면 큰일날 뻔 했잖아.”

    “부도? 부도가 났다구요?”

    그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믿을 수가 없었다.

    “신씨도 요즘 어렵대. 사채 끌어 쓰는 거 같은데, 지금 차압 들어오고 난리도 아니라면서. 어쨌든 차 갖고 들어와. 신씨 일은 둘이 알아서 하고.”

    아무리 할부금이 밀렸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차를 팔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확히 오늘까지 차갖다 놓지 않으면 도난 신고할 테니 그리 알아. 알았어?”

    “신고? 그래 할 테면 해봐. 내가 몇 년을 부었는데 그깟 석달 밀렸다고 차를 넘겨? 이런 똥차를?”

    그는 소리를 지르고는 휴대폰을 옆 좌석 쪽으로 던져버렸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휴대폰 바테리가 분리되어 떨어져 나갔다.

    결국 그의 오기가 발동되고 말았다. 그는 경적을 울리며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오토바이는 그제서야 신이 났는지 지랄선을 만들어가며 멀찌감치 달아났다. 그는 지구 끝까지라도 녀석들을 따라가 밀어붙이고 싶다. 먼저 저 녀석들을 뭉갠 후 신씨를 찾아 낼 것이다. 인간이 낼 수 있는, 15톤 덤프트럭이 낼 수 있는 가장 위압적인 힘을 보여주리라. 인간 탄환의 모습을, 검은 포탄 트럭의 모습을 보여주리라. 그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다.

    좋아, 레이스를 시작하자.

    그는 엑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마치 벤 존슨처럼. 그는 이를 악물었다. 우선 표적을 정하기로 했다. 빨간 잠바든 뱀대가리든 한 놈을 집중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지막 동정심을 발휘하여 혼자 타고 가는 회색머리의 닌자보스를 노렸다. 덤프의 속도를 줄이며 회색 머리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트럭은 코너에서 위험하지만 오토바이는 교차로에서 위험하다. 그는 이빨을 감추고 있는 하이에나처럼, 먹잇감을 노리는 치타처럼 덮칠 기회를 노렸다. 닌자보스는 잡힐 듯 잡힐 듯 하더니 갑자기 속도를 올렸다. 시속 200km가 넘는 듯했다. 회색 머리는 앞바퀴를 들어 올린 채 미끄러지듯 쭈욱 앞으로 나갔다. 그리곤 시야에 벗어날 듯 하다가 다시 앞바퀴를 든 채 되돌아왔다. 회색머리는 한밤중의 텅빈 도로를 질주하며 온갖 재주를 다 부렸다. 뱀대가리와 빨간 잠바도 질세라 그의 덤프트럭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는 뱀대가리와 빨간 잠바가 같이 탄, 아무래도 하중이 무거운 하야부사를 밀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브레이크를 살살 밟으며 속도를 줄이는 바람에 뱀대가리의 오토바이가 차체의 옆면에 슬쩍 스치듯 부딪혔다. 뱀대가리와 빨간 가죽 잠바가 공중으로 붕 떴다가 시멘트 도로 위로 떨어졌다.

    그는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그들을 바라보며 ‘이 새끼야. 그러니까 까불지 말라니까’라고 소리를 지르며 낄낄거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두 놈은 곧 몸을 툭툭 털고 일어섰다. 빨간 잠바가 뱀대가리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고 뱀대가리는 다시 핸들을 잡는 모습이 백미러를 통해 작게 비쳤다. 그는 어느 정도 본때를 보여줬다고 믿었다. 이번엔 회색 머리 오토바이가 그에게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앞바퀴를 들지도 않았고 뒷바퀴로 갖은 쇼를 보이지도 않는다. 지그재그로 달리며 지랄 짓도 하지 않는다. 짜증이 돌기 시작했다. ‘자꾸 이러면 정말 죽여 버린다, 그 새끼 류형사처럼.’ 그는 낮게 신음 소리를 냈다.


    류형사는 술을 진탕 마시고 변소에 빠져 죽었다. 류형사가 변소에 빠졌을 당시, 아비는 술에 취해 사타구니나 긁으며 자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의 형은 흑염소 집에서 잡일을 돕다가 흑염소 할멈과 말다툼이 있어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고 했다.

    그 역시 류형사가 빠져 죽었을 즈음 똥을 누고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류형사가 평소보다 많은 술을 마시고는 평소와는 달리, 팁을 두둑하게 주고 휘청휘청 나갔다는 오란씨 마담의 진술이 이어졌다.

    류형사가 발견된 것은 류형사가 똥통에 빠진 지 이주일이 지난 아침이었다. 변비가 있는 ‘에티켓’의 노랑머리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다섯 번째 변소칸에 들어가 힘을 주고 있는데 어디선가 계속 구루루룩 구루룩 끓어오르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라고 했다. 평소보다 더 고약한 냄새 때문에 코를 쥐고 있던 노랑머리는 밖에서 나는 소리라고 생각하며 계속 힘을 주었다. 그런데도 계속 구루룩 구루룩 기분 나쁜 소리가 나더란다. 기분이 좋지 않아서 밑을 닦고 휴지를 똥통에 버리려는 순간 반짝하는 류형사의 잠바 어깨 위 견장과 눈을 홉뜬 채 그녀의 엉덩이를 노려보는 류형사의 얼굴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노랑머리는 공중변소가 아니, 모래내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마침 아비에게 머리를 맞고 있던 그와 아비, 그리고 공중변소 수돗가에서 쌀을 씻고 있던 형이 노랑머리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눈치없는 노랑머리가 옆 칸 벽 틈으로 자신을 엿보고 있는 어떤 놈의 존재를 이제야 눈치챘나보다고 생각했다.

    노랑머리가 팬티를 올렸는지는 그녀가 무릎까지 내려오는 면으로 된 나시 원피스를 입고 있었으니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어기적 밖으로 뛰어나와서는 얼굴도 머리만큼 노랗게 되어 “시...시...시...체......” 라는 말을 되풀이했고 약 5분이 지나서야 노랑머리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게 된 이들 부자는 경찰에 신고를 했다. 하지만 그날 마침, 모래내에는 또 다른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탈주범 지강헌 일당이 인질극을 벌인 것이었다. 지강헌 일당의 인질극 소동 때문에 모래내 경찰들이 모조리 출동했기에 이들 부자의 신고를 받고도 경찰은 아주 늦게야 도착했다.

    류형사의 죽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충격적이었다. 모래내 사람들은 다 알고 있던 사실이 충격적이었다는 것이 그로서는 믿기지 않았지만, 아무튼 그렇다는 기사가 신문지 한 켠에 마련된 ‘휴지통’에 났다고 했다.

    류형사는 오랜 기간 상습적으로 주변 유흥업소에 뇌물을 받았고 창녀들의 화대까지 갈취했으며 유흥업소 간의 세력 싸움에도 관여하는 등 일대 조직과도 깊은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봐서 그의 죽음도 이와 같은 비리에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고 했다. 사람들은 이미 패거리들에게 진탕 맞은 채 변소로 몸을 피했다가 실족사한 것 같다고 말했다.

    똥통에서 건진 류형사의 시체는 형이 몽둥이로 때려잡은 개보다 더 처참했다. 류형사의 몸은 똥물에 퉁퉁 불어 있었고 눈에서는 구더기가 기어 나왔으며 귀와 입으론 누런 똥이 흘러 나왔다. 동네 사람들은 류형사는 그동안 살아왔던 대로 죽을 때도 적합한 장소에서 가장 정직한 방법으로 죽었다며 수군거렸다. 이제 더 이상 설희를 괴롭히는 류형사가 없다는 사실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류형사의 죽음에 비해 지강헌의 죽음은 감동적이었다. 지강헌은 텔레비전 중계를 원했고 드라마틱한 인질극을 벌였다. 한가지 아쉬웠던 것은 그가 원했던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아닌, 가 스콜피언스의 홀리데이가 울렸다는 것이지만, 그래도 가장 드라마틱하게 권총으로 자살했다. 형은 텔레비전으로 지강헌이 죽는 걸 보더니 가만히 가방을 메고 일어났다.

    "이건 너만 알아라. 나, 군대 간다.”

    “중학교 중퇴도 군대가?”

    형은 잠깐 머뭇거렸다.

    “새끼야. 중퇴나 졸업이나 그게 그거야”

    “어디로 가는데?”

    형은 또 다시 머뭇거렸다.

    “ㅍ시로 가. 너만 알아. 아버지한텐 절대 말하지 말구.”

    그게 형의 마지막 말이었다.

    다음 날, 아비는 류형사와 너무나 닮은 형사를 집으로 데려왔다. 아비는 류형사에게 그랬듯이 그 형사에게도 쩔쩔 맸다. 형사는 신발을 신은 채 무작정 방으로 들어와 다짜고짜 그의 멱살을 잡았다.

    “네 형 어디 갔는지 알지?”

    “구,군,군대 가,가,간다고 했어요.”

    그는 덜덜 이를 떨며 말을 더듬었다.

    “영장도 안 나왔는데 무슨 군대를 가. 중학교도 안 나온 새끼가.”

    그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 어디로 간다고 하디?”

    “모,몰,몰라요. 그,그,그냥 구,군,군,군대 간다고 했어요.”

    형사는 구둣발로 어린 그의 무릎을 탁탁 찼다.

    “그래. 어디 있는 군대?”

    “모,몰,몰라요.”

    그는 자꾸 땀이 흘렀다. 갑자기 똥도 마려웠다.

    “너 제대로 말 안하면 삼청교육대 보낼거야, 이놈아, 삼청교육대 얼마나 무서운지 텔레비전으로 봤지? 거기서 얼마나 많은 새끼들이 죽어 나자빠졌는지......”

    아비는 한 술 더 떠 그에게 종주먹질을 해댔다.

    “어서 말해. 이 애비 죽는 꼴 보기 싫으면......”

    아비는 그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다.

    “너 나한테 죽어볼래?”

    그는 몸을 움츠렸다. 형사는 허리에서 은색 수갑을 꺼냈다.

    “이게 뭔지 알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뭔데? 말해봐.”

    “수,수,수갑이요.”

    그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여전히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근데 너 왜 이렇게 말을 더듬지? 여봐, 자네 새끼 원래 말더듬이야?”

    “아닙니다, 아닙니다요. 이 자식이 원래 이러지 않는데......”

    “뭔가 숨기는게 있으니까 말을 더듬는거 아니겠어? 안 그래?”

    형사는 수갑으로 그의 입술을 꾹꾹 눌렀다.

    “이놈아, 너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수갑 차고 영창 들어가는 거야, 알아? 형사님한테 어서 다 불어.”

    아비는 그의 등을 때렸다. 형사는 빙글거렸다.

    “거짓말 탐지기 알지? 그거면 거짓말 하는 거 다 들통나.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그는 약물 도핑 검사를 받는 벤 존슨이 된 기분이었다. 진땀이 흘렀고 항문이 넓어진 듯 했다. 갑자기 아랫도리가 축축 해졌다.

    “이게 무슨 냄새야? 이 자식 똥 싸는 거 아니야?”

    형사는 갑자기 코를 막았다. 그는 아래를 내려다 봤다. 바지춤 아래로 설사가 기어나왔다.

    “너, 거짓말 하는 거 맞구나. 똥 싸는 거 좀 보래.”

    형사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아비는 그의 뺨을 찰싹찰싹 갈겼다.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형이 말한 거 죄다 말해. 어서.”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는 ‘ㅍ시’를 말했다. 형을 낳은 어미가 살았다던 바로 그 ㅍ시를.

    그날 밤, 형은 흑염소 할매에게 도둑으로 몰렸었다. 수금한 돈에서 만원이 빈다는 것이었다. 억울했던 형은 개 잡는 몽둥이로 가게 간판을 때려 부수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때 마침 벽을 잡고 토하고 있는 류형사를 발견했다. 이미 류형사는 누군가에게 실컷 두들겨 맞은 후였다. 류형사는 형을 불렀고 형은 류형사를 부축해 주었다. 한 손에 몽둥이를 쥔 채로......

    형은 할멈의 도살장으로 류형사를 데리고 갔다. 류형사는 잇새로 침을 찍찍 내뱉으며 형의 부축을 받으며 절룩거리며 걸어갔다. 형은 류형사에게 가게로 들어와서 해장을 하라고 권했다. 먼저 경찰서로 가서 녀석들의 몽타쥬를 작성해야겠다고 말했지만 익히 형의 음식 솜씨를 알고 있던 류형사는 순순히 형을 따랐다. 형은 류형사에게 가장 신선한 고기를 내주겠다고 말하며 가게 한 켠의 도살장으로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노란색 ‘오란씨’ 상자 위에 류형사를 앉히고 형은 도살장의 무거운 철문을 닫았다. 그리곤 류형사 앞으로 개 주둥이를 막는 마스크를 가지고 나와 보여줬다. 류형사는 그런 마스크를 처음 본지라 신기한 듯 만지며 나중에 설희와 이차갈 때 이걸 좀 빌려달라고 말하며 히히덕거렸다. 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같이 비싯 웃어주었다. 그리고는 아주 재빠르게 그 마스크로 류형사의 입을 막았다. 류형사는 고개를 흔들며 형의 허리를 잡고 늘어졌다. 형은 류형사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그리곤 류형사의 양 팔을 등 뒤로 제껴 버렸다. 우두둑 팔이 꺾이는 소리가 났다. 류형사의 양 팔은 마치 날개처럼 하늘로 비죽 솟았다. 바닥에 쓰러진 류형사는 구둣발로 형의 정강이를 찼다. 그러자 형은 옆에 있던 몽둥이로 류형사의 발목을 내려쳤다. 오도독 오도독 소리가 나며 두 개의 복숭아뼈가 차례로 뭉개졌다. 류형사는 날개가 꺽인 닭모양 헐떡 거리며 엎어져 있었다. 형은 류형사를 번쩍 들어 자루 안에 집어 넣었다.

    마침 할멈은 올림픽 폐막식을 보고 있었다. 이미 형은 할멈에게 행패를 부린 것을 사과했고 낮에 들여온 개를 잡아 다음날 오전 단체 손님 음식을 준비해 놓겠다고 말했다. 형은 류형사가 구겨진 채 들어있는 자루를 기둥 고리에 걸었다.

    팡 팡 팡.

    경쾌한 소리는 멀리서 들리는 폭죽 소리와 더불어 한층 더 평화롭게 들렸다.

    한참의 매질이 있은 후 형은 류형사를 자루째 번쩍 들쳐 메고 시장의 미로를 지나 변소로 향했다. 마침 시장의 어두운 길엔 아무도 없었다. 올림픽 폐막식의 감동을 맛보기 위해 그날따라 상인들은 일찍 문을 닫았기에 밤의 시장은 무덤보다 더 어둡고 조용했다. 형은 자루를 풀어 변소의 똥통으로 류형사를 밀어 넣었다. 그때 죽은 줄 알았던 류형사가 자루에서 버둥거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공중변소는 너무 외진 곳인 데다,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매미집에선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가 크게 울리고 있었고 텔레비전엔 16일 동안 열렸던 올림픽 폐막식이 진행되고 있어서 아무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다만 그만이 바로 옆 칸에서 똥을 누고 있었고 틈으로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었다. 형의 몸에선 분노의 오로라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형은 버둥거리는 류형사를 발로 밟아, 똥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 살짝 밟았을 뿐인데 류형사는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고도 형은 개를 잡던 몽둥이로 그의 머리통을 꾹꾹 눌렀다. 마치 로드롤러로 땅을 다지듯 그의 머리를 눌러댔다. 이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형은 그렇게 선 채 말을 했다.

    “그냥 넌 거기 있어. 아무 것도 못 본거야.”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있다가 형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의지하고 겨우 밖으로 나왔다. 방에선 아비가 세상 모르고 잠을 자고 있었다. 형은 수돗가에서 몽둥이를 씻었다. 달빛이 형의 등허리 위로 내려앉았다.

    “개를 잡은 것뿐이야.”

    그의 형은 다시 돌아가서 개를 잡았고 그리고 아침이 밝았다. 우연일까, 형이 군대를 간 날, 설희도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어린 그는 너무 쉽게 모든 걸 다 말해버렸다. 정말 시시했다. 귀찮은 일에 얽매여 봐야 좋지 못하다는 것을 어린 시절 체득하고 만 것이다. 지강헌은 끝까지 저항을 하다가 홀리데이를 듣고 장엄한 죽음을 맞이했건만 그는 단 한 차례의 협박에 모든 것을 다 말해 버린 것이다.

    형은 설희와 함께 아비의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정말 운전미숙이었는지, 경찰의 추격을 받아 그랬던 건지 알 수 없었으나 형과 설희는 벼랑 아래로 떨어져 시신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가끔 그는 어딘가 형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했으나 어쨌든 형과 설희는 그 뒤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 뒤에도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오란씨’ 마담이 변소로 찾아와서 설희한테 댄 돈을 갚으라고 그의 아비를 들볶았고 아비는 아비 나름대로 착하고 성실한 아들을 살려 놓으라며 ‘오란씨’에서 행패를 부렸다. ‘오란씨’ 마담은 아비에게 맞았고 아비는 또 ‘오란씨’ 마담의 기둥서방에게 맞았다. 그리곤 사건은 마무리 됐다.


    그는 회색머리의 닌자보스를 향해 속도를 높혔다. 마침내 회색머리의 닌자보스를 밀어냈다. 회색머리는 하늘로 올라갔다가 도로 위로 떨어졌다. 둔탁한 충격음이 발 끝으로 전해지는 것 같다. 회색 머리는 죽은 듯 엎어져 있다. 그는 회색머리와 닌자보스를 깔아뭉개기 위해 유턴을 했다. 회색 머리는 고개를 살짝 들어 그의 트럭이 오는 걸 보더니 몸을 일으켜 절룩거리며 중앙선을 건너 반대쪽 차선쪽으로 도망쳤다. 그는 쓰러져 있는 회색 머리의 닌자보스를 덤프트럭으로 잘근잘근 밟듯이 밀어 붙였다. 건너편에 서 있는 회색머리는 비명을 질러댔다.

    이제 뱀대가리와 가죽잠바가 탄 하야부사를 찾아 그들을 깔아뭉개는 일만 남았다. 이번엔 반드시 그들의 머리통도 함께 깨트려 버릴 것이다. 심장을 납작하게 만들 것이다. 그의 덤프트럭은 굉음을 울리며 힘차게 달렸다. 그의 헤드라이트 불빛 속 저만치 오토바이 한 대가 보였다. 그는 속도를 올렸다. 희끔희끔 그의 헤드라이트 불빛을 받으며 질주하는 오토바이는 높이도 턱없이 낮고 이미 한물간 스타일의 구식 오토바이다. 하야부사도 닌자보스도 아닌 아까 잠깐 그의 시야에 나타났다 사라졌던 바로 그 오토바이다. 오토바이 뒤에는 여전히 긴 머리의 여자가 있다. 처음에는 여자를 뒤에 태운 그렇고 그런 10대 남자아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여자의 뒷모습이 아무래도 낯이 익었다. 그는 오토바이 옆으로 바짝 붙어 창문 너머로 내려다봤다. 그는 입을 떡 벌렸다. 툭 튀어나온 이마며 짧은 스포츠 머리, 그리고 약간 돌출되어 있으면서도 굳건해 보이는 입매.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있는 남자는 바로 그의 형이었다. 그는 눈을 부비고 다시 내려다봤다. 텅빈 도로에는 차선 하나를 가득 메운 그의 차체만 보일 뿐이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창문을 조금 내렸다. 차가운 바람이 그의 이마를 때렸다. 갑자기 그의 눈 앞으로 반짝거리는 섬광이 지나갔다. 가끔 피곤할 때면 나타나는 증세다. 바람이 불면서 그의 머리카락이 눈을 찔렀다. 그는 창문을 올리다가 말고 탄성을 낮게 내뱉았다. 형이 맞다. 형 뒤에는 팽팽하고 가느다란 허리, 바람이 흩날릴 때마다 드러나는 하얀 목덜미와 짧은 반바지 아래로 도자기처럼 매끈한 다리와 그 위에 얼룩덜룩 푸른 멍이 잎새처럼 드리워져 있는, 영락없는 설희다. 형과 설희는 그 시절 모습 그대로다. 형은 설희를 태운 채 ㅍ시의 진입로를 향해 달리고 있다. 바로 그때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그의 덤프트럭 뒤로 경찰차 한대가 좇아오더니 그를 추월하고 형의 오토바이를 바짝 따라잡았다. 그러나 형은 솜씨좋게 요리조리 피하며 속도를 냈다. 뒤이어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달려드는 두 대의 경찰 오토바이도 형이 곡예 같은 운전솜씨로 따돌렸다. 형은 마치 벤 존슨처럼 살짝 뒤를 돌아봤다. 그때 그는 형과 눈이 마주쳤다. 형은 동생의 얼굴을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기억 속의 형이 저렇게 어렸던가 놀라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형의 얼굴은 땀으로 번질거리는데다 두 눈은 형형하게 빛났다. 그와 눈이 마주친 형은 그만 뒷 바퀴가 옆으로 미끌어 지면서 균형을 잃고 말았다.

    “형, 조심해.”

    그는 소리를 질렀다.

    형의 맞은 편으로 굉음을 울리며 화물 트럭 한대가 달려온다. 형이 간신히 오토바이 핸들을 고쳐 잡아 반대편으로 꺾는 순간, 오토바이의 뒷 바퀴가 화물 트럭의 앞 바퀴와 슬쩍 부딪히면서 오토바이는 마치 하늘을 비상하듯 튕겨 솟구쳐 올랐다. 형은 두 팔을 번쩍 하늘 위로 뻗어 올렸다. 두 눈을 꼭 감은 설희는 형의 허리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그때다. 분노의 오로라와는 사뭇 다른 빛깔의 아름다운 오색의 오로라가 솟아올랐다. 아름다웠다. 그가 본 형의 오로라 중 가장 눈부셨다. 형은 한쪽 손을 내리더니 설희의 어깨를 꼭 잡았다. 설희는 감았던 두 눈을 뜨고는 믿겨지지 않는 상황이 놀라운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형은 그에게 여유로운 미소를 띠우며 손을 흔들었다. 설희도 옆에서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도 형에게 한 손을 높이 들고 흔들었다. 형의 뒤를 쫓던 경찰차와 오토바이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형의 몸에서 솟아오르는 아름다운 오로라를 그리고 형과 설희를 올려보았다. 경찰들도 손 차양을 만들어 입을 벌린 채 형과 설희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그들은 맑은 물 속을 헤엄치는 두 마리의 잉어처럼 유연하게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형의 오토바이는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으나 형과 설희는 그렇게 높이 높이 날아올랐던 것이다.

    “그럴 줄 알았어. 형이 살아있을 줄 알았어.”

    그는 기쁨에 몸을 떨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를 실은 덤프트럭은 이미 가드레일을 받은 채 형의 오토바이가 떨어졌던 바로 그 벼랑 아래로 떨어져 내려가고 있었다. 하야부사를 탔던 뱀대가리와 빨간 잠바가 저 혼자 벼랑을 향해 전력 질주하는 그의 덤프트럭을 바라보며 서있을 뿐 이었다. 그의 차는 벼랑 아래로 곤두박질해 내려갔다. 그의 머리로 피가 몰렸다.

    그는 형처럼 하늘을 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차창 위로 별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별이 쏟아져 내렸다.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 손에 담아드려요. 오오 오란씨.’

    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자는 자고로 오란씨 같은 거야 이렇게 먹고 버리는 거야. 그치만 딱 한 사람한테는 별도 따주고 모든 걸 다 주는 거야. 그게 남자야.’

    그는 목이 말랐다. 왜 그날 설희가 준 오란씨는 먹으면 먹을수록 목이 말랐는지 알 거 같았다. 파인애플 향이 나는 오렌지 탄산음료 오란씨가 못 견디게 마시고 싶었다.
    배지영

    배지영

    1975년 서울 출생

    1997년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현재 CBS 라디오 '김종휘의 문화공감' 구성작가

  • 권영민(서울대 국문과 교수) 조성기(소설가)

    중편 최종심에 오른 작품들은 주제와 기법의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새로운 실험을 준비하고 있는 작가 지망생들이 많다는 것이 다행스럽게 생각된다. 최종 심사에서 논의 대상이 됐던 작품은 '오란씨' '정크 노트' '안녕, 악어' '나의 선녀, 마레끼아레!' '하루키 읽기' 등이다. 이들 중 '나의 선녀, 마레끼아레!'와 '하루키 읽기'가 먼저 제외됐다. 전자는 서사 구조의 불균형이 문제로 지적됐고, 후자는 하루키 풍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이 있었다.

    당선작으로 '오란씨'를 뽑은 것은 '정크 노트'와 '안녕, 악어'의 약점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안녕, 악어'의 경우는 매우 흥미 있는 소재를 다루고 있다. 개인의 본능적 욕망과 충동을 입체적으로 조명한 이 작품은 좀더 조직화된다면 잘 짜여진 단편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주제의 성격 자체가 중편이 요구하는 양식적 요건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닌가 한다. 서사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정크 노트'는 작품에서 다룬 주제의 무게와 작중 화자의 진술이 불균형을 보인다. 소재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이겨낼 수 있는 작중화자의 설정이 필요하다.

    '오란씨'에는 패기가 있다. 사회 상황과 병치되는 개인의 욕망이 이야기의 긴장을 끝까지 지켜낸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하강적 서사구조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가 겪은 광기와 어둠을 조명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신뢰를 안고 있는 작가 정신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장면들을 극화하는 데 동원된 다채로운 언어가 우리 소설 문체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 배지영

    배지영

    1975년 서울 출생

    1997년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현재 CBS 라디오 '김종휘의 문화공감' 구성작가

    길을 밟는다.
    길을 걷는다.
    길을 헤맨다.
    그러다 보면 또 다시 길이다.
    내게 길은 정글이다. 길은 미로다. 늘 다니던 길도 어느 순간 새롭고 낯설다. 나는 길을 밟다가 때로는 넘어지고 가끔은 주저앉기도 하고 대개는 헤맸다.
    나는 자주 길을 원망했지만 그래도 길은 선뜻 자신을 열어주었다.
    반가움도 원망도 후회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가끔 길은 내게 위로의 말도 던지고 작은 쉼의 자리도 펴준다.
    두렵고 떨린다.
    앞으로 또 어떠한 길 위의 말들을 만나게 될지,
    어떤 길의 시간 속에서 심연의 눈과 마주치게 될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바늘 끝을 떨고 있는 나침판의 지남철만이 살아있듯
    내 길 위의 시간과 말들도 예민하게 갈고 닦아야겠다.
    아. 이제 또 길이다.

    미욱한 작품을 뽑아주신 조성기 선생님과 권영민 선생님 그리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내게 소설을 눈 뜨게 해주신 박범신 선생님, 그리고 '소설가는 성실한 목수 같은 사람'이란 것을 알게 해주시고 도전을 갖게 해주신 나의 스승 조동선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내게 문학의 빛을 보여준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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