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간에 떠도는 말 중에 바둑판은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고 보면 등산, 낚시, 음악, 연애 등등 인간이 즐기는 놀이치고 인생의 축소판이 아닌 것이 어디 있겠냐만, 성석제는 [고수]에서 바둑을 통해 인생의 여러 단면을 스케치하고 있다. 성석제가 도박, 음주, 춤 등 유희의 여러 장르로 사람살이의 이모저모를 그려 왔던 작가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그가 바둑을 통해 인생사를 통찰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은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면 이 소설에 묘파된 사람살이의 단면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 고수"는 프로 바둑 기사가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기 바둑의 세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그는 프로 바둑과 자신의 바둑-내기 바둑을 다음과 같이 비교한다. "처음에는 같은 실력이라고 해. 가는 길이 서로 다른 거야. 시간이 갈수록 내 바둑은 불순해지고 그 사람들 바둑은 순수해지지. 그런 식으로 실력 차가 나면 영원히 극복할 수 없어." 이는 사람살이의 주목할 만한 진실을 포착하고 있는 진술이다. "고수"가 내기 바둑을 시작한 이유가 순전히 '우연'에서 비롯되었듯이, 사람들은 끝없이 갈라진 길들에서 '우연히' 어떤 길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 우연은 필연의 무서운 시작이다. 한번 길을 접어들면 사람들은, 춤을 멈출 수 없는 분홍신을 신은 소녀와 같이, 그 길이 인도하는 대로 끌려 다녀야 한다. 이러한 사정은 내기 바둑에서 프로 바둑으로의 전회가 어렵다는 사실과 마찬가지이며, "보통 사람처럼 살려고 해도 바둑판을 떠나는 게 무서운 거야"라는 고수의 고백에서도 확인된다. 그렇게 반(反)자의적으로 길을 가다가 도달한 지점은 처음에 짐작했던 곳과 다르게 마련이고, 그 때 사람들은 자신이 아니라 '길 자체'가 자신을 이끌었음을 깨닫고 망연자실하기도 한다. 선택의 우연성과 선택한 길의 회귀 불능성은 사람살이 진실의 한 단면이며, 이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과연 얼마나 주체적으로 주도하고 있는가 묻게 된다.
한편 "고수"는 내기 바둑에 빠진 이유를 묻는 화자의 질문에 "빠진다, 끌려 든다가 아니야. 심심했어"라고 대답한다. 이 말 또한 인생의 한 진실한 단면을 포착하고 있다. 사람이 하는 일치고 권태와의 싸움에서 비롯되지 않은 일이 얼마나 될까? 연애거나 학문이거나 적금 통장 따위는 그 자체로 절대적인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조차 하지 않기에는 너무 "심심"하니까, 사람들은 "심심" 혹은 권태를 잊기 위해 "놀이"에 몰두할 뿐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정열은 절대적 기원을 가진 근엄한 것이라는 외피를 벗는다. 정열의 기원은 권태에 대항하기 위해 고안해 낸 고육책일 뿐인 것으로 축소된다.
이 소설에서 가장 주목되는 성찰은 "허무"에 관한 것이다. 가난한 생활을 영위해왔던 "고수"는 어느 날 어마어마한 큰돈을 따게 되는데, 그 때 그의 심정은 "그런데 아무 생각이 없어. 머릿속에서 계속 바람 소리가 나는 거야.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고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하지." "허무했어. 죽도록 허무했어. 내가 원한 게 이거였나. 정말 이 돈가방이 단가." 라는 진술로 묘사된다. 그러면서 고수는 그 큰돈을 나흘 동안 도박장에서 모조리 탕진하는데, 그 때의 심정을 "머릿속이 아주 깨끗해. 한겨울에 시퍼렇게 꽝꽝 언 얼음판처럼"이라고 표현한다. 간절히 소망했던 것을 성취한 후, 밀려드는 허무감과 성취한 그 대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버릴 수 있는 심정은 웬만한 성인에게 낯익은 정념일 터이다. 꿈을 가진 적이 있었던 자들은 모두 알 것이다. 이루어진 꿈이 얼마나 그 주인을 배반하는지. 꿈은 실현되는 순간 그것의 무의미한 반면(反面)을 드러낸다. 애착했던 모든 것은 언젠가는 그것의 끔찍한 무의미성을 드러낸다. 그러한 잔혹한 사정은 실현된 꿈의 절정에서 더욱 유효하다. 인간은 지극한 소망을 성취했을 때 그것에 대한 만족보다는 환멸에 더 익숙한 존재인 듯 하다. 늘 결핍되어 꿈 꿀 여지를 마련하며 비어 있는 상태가 인간에게는 더 편안할지 모른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환멸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혹은 "내게는 구멍이 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 역시 인생의 진실을 담지하고 있지 않을까.
박수현
1974년 전남 보성 출생
2004년 고려대 서양사학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석사 과정 재학중
조남현(서울대 국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이번 응모작들이 내보인 문제점으로는 비평대상의 부적합성, 텍스트의 비개성적 분석, 학술논문 형식에의 고착 등을 들 수 있다. 단편 한 편만을 집중적으로 분석한다든가 이미 명작으로 자리 잡은 것을 논의대상으로 삼는 경우에는 이런 문제점들이 보다 쉽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위하여'(홍삼득)는 재미있게 읽히는 장점을 지녔지만 도구성/비도구성 논리로 대상작품을 끝까지 몰아가는 단순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현실과 신화의 경계지점으로서 '몽고반점'"(표정옥)은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치밀하게 분석함으로써 신뢰감을 주었으나 여러 이론을 풍문을 끌고 오듯 해서 신뢰감을 떨어뜨렸다. '역사에 대한 세 개의 주석'(양윤의)은 김훈의 '칼의 노래', 성석제의 '인간의 힘', 김연수의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을 서사담론이라든가 역사의식의 측면에서 비교한 것이다. 소설에 대한 관점을 제대로 갖춘 것이 돋보이긴 하나 서술과정에서 전지적 제스처를 취한 것이 결정적인 흠으로 남고 말았다. 이 글은 최근 평단에서 유행하는 서술방법과 용어들에 지나치게 민감했던 사례가 된다.
'삼계화택에서 해탈에 이르기 위한 구도'(박수현)는 박민규의 장편과 단편들을 삼계화택, 유아독존, 색즉시공, 낙천과 같은 불교이론을 끌어들여 재해석의 경지를 보여 준 만큼 비평주체로서의 제 목소리를 성공적으로 낸 것이 된다. 이런 상식화된 설법은 활용도가 높은 반면 비평에 적용할 경우 엉성하다든가 부자연스럽다든가 하는 반응을 사기 쉽다. 어떤 이론이든지 공부는 최대한으로 하고 활용은 최소한으로 하는 '비경제적인'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울림이 큰 비평을 쓸 수 있다. 앞으로, 박수현 씨에게 울림이 큰 비평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박수현
1974년 전남 보성 출생
2004년 고려대 서양사학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석사 과정 재학중
십 년 동안 문학에 목을 매달았으니 죽을 고비도 없지 않았다.
삶이 극적이어야 한다는 강박 아래 자행된 연기(演技)의 치졸함이 부끄러워지고 열정의 근원이 허영심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무렵, 마침 들려오는 풍문은 휘청거리는 발걸음에 아예 태클을 걸었다.
키도 다 크기 전에 마법을 걸어왔던 세계 명작 전집, 한국 대하소설들, 도스토예프스키와 버지니아 울프의 전기를 모두 원망하고 있었을 때, 나를 구원해 준 이는 고마운 이웃들이었다. 현경 언니, 영애 언니, 재림 언니, 연진이, 소현이는 풍문의 근거 없음을 일러 주었고, 내 절망이 게으름에 대한 구차한 변명일 뿐이라며 질책해주었다. 그들이 옳았다. 나는 비겁했고 무능했다. 시지프를 흉내 낼 각오를 다지던 내게 이 소식은 사실 때 이른 낭보다. 훌륭하신 분들을 두고 먼저 호명된 이 행운 앞에서, 나는 한없이 송구스러워진다.
좌충우돌하고 황당무계한 제자를 은은한 사랑으로 지켜봐주신 지도 교수님과 윤석달 선생님, 고려대의 은사님들께 감사드린다.
부족한 글을 고심하며 읽어주신 조남현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대책 없던 문청 시절 서로를 키웠던 고대 문학회의 재주 많던 친구들에게 그립고 미안한, 애잔한 마음을 전한다. 나는 순전히 그들보다 이기적이기 때문에 문학의 언저리에 더 오래 머무를 수 있었을 뿐이다.
사랑과 이해로 보살펴주신 할아버지, 어머니, 두 동생과 올케들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