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뿌연 증기가 걷힌다. 콩을 삶고 두부를 굳히느라 흩뿌려진 수분이 공장 안을 채웠다가 사라지면, 어느새 화면은 제사 준비가 한창인 옛 한옥으로 옮겨간다. 〈장손〉은 표정이 없는 영화다. 하지만 앞에 쓴 문장이 이른바 얼굴의 부재를 뜻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 영화의 느린 풍경에 생동감을 입히는 건, 힘껏 울고 웃고 분노하는 김씨 일가의 얼굴이니까. 여기에 클로즈업을 멀리하는 카메라—풀숏과 롱테이크—가 더해지면, 그런 얼굴을 관조케 하는 거리감이 마련된다. 이쯤에서 감독 오정민의 언급을 짚어두자. “한껏 미워했던 윗세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었다.”(《연합뉴스》, 2024년 9월 8일 자) 사람의 이해는 가끔 오해로 치닫거나, 결국 화해에 이르거나, 그 어느 쪽도 아닌 곳에 머무른다. 〈장손〉의 무표정은 셋 중 마지막 지점, 즉 오해도 화해도 아닌 어딘가를 향해 열려있다.
구세대의 유산과 신세대의 전략. 독립영화 〈장손〉에 관한 호평은 대개 두 가지를 가리킨다. 이를테면 “나를 뒷바라지해준 영화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정당한 계승자”(김철홍)는 전자에 속하고, ‘관객의 판단을 기다릴 뿐 어떤 주장도 하지 않기에 급진적인 영화지만 편안하게 볼 수 있다’(정희진)는 후자에 해당한다. 그러나 〈장손〉은 무표정한 얼굴로 몇몇 은밀한 주장을 하는 영화다. 흔한 가족 드라마가 빠지는 함정은 ‘보는 사람만 없다면 몰래 내다버리고 싶다’(기타노 다케시) 식의 냉소와 ‘당신 없이 못살지만 당신과는 못 살겠다’ 식의 통속을 반복하는 것인데, 〈장손〉은 이런 양가적인 통념에 기대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뒤에 쓸 이 영화의 전략—보류와 은폐—을 더듬다 보면, 우리는 〈장손〉이 물려받은 유산 역시 되짚게 된다. 입 밖에 나온 말보다 입 속에 가둬진 말이 중요할 때가 있다. 영화도 예외가 아니다.
첫째, 할머니의 죽음. 성진(김승호)은 그녀의 영정사진을 찍지 않는다. 분향실 안에도 곧바로 들어가지 않는다. 한국식 상례와 제례를 세밀히 재현하되 그것을 가족 통합의 의례로 환원치 않음으로써 영화는 임권택의 〈축제〉(1996)를 변주한다. 감독의 자전성—대구의 대가족 출신 영화인—이 투영된 인물이 어중간한 관찰자의 위치를 점한다는 설정은 박철수의 〈학생부군신위〉(1996)와 닮은꼴을 이룬다. 좀 더 유쾌하고 현대적인 장면도 있다. 뱃속 아기부터 80대 노인까지 4대가 모인 가족사진에는 포토샵으로 끼어든 한 남자가 시선을 붙잡는다. 말녀(손숙)의 장례식은 빈소 벽면의 두 글자—‘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의 ‘ㅅ’과 ‘ㅂ’—가 빠진 채로 유유히 흘러간다. 이 모든 게 부질없다는 조소일까? 그보다는 충실한 문화기술지의 역할을 해내면서도 소소한 유머와 재치를 새겨 넣으려는 개성의 표현일 것이다.
둘째, 큰고모 부부와 부채(감). 이번엔 고모부의 병실에 들어가지 않는 성진을 혜숙(차미경)이 맞이한다. 자신의 졸업식에 오다가 사고를 당해 “가만히 누워있는” 고모부, 그런 남편을 간병하다가 이젠 집도 통장도 잃어버린 고모. 꽃가루 알러지가 있는 환자에게 생화를 가져갈 만큼 성진은 무(관)심하다. 이두용의 〈장남〉(1984)에서 노부모를 모시려던 주인공이 곧 전통적인 가족관의 담지자이자 ‘자수성가한 현대인의 표본’(정민아)이라면, 40년 후의 20대 장손에겐 결혼도 안정적인 미래도 아득히 먼일일 뿐. 아마 혜숙이 재산을 되찾게 될 확률은 미미한데, 이는 단지 성진의 처지가 군색해서만은 아니다. 기울어진 특권에 편승해 온—사회학자 래윈 코넬의 용어로는 가부장제의 배당금을 묵인해 왔던—자는 결국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 공산이 크다. 상경하는 택시 창밖으로 깃든 아침 햇살에 그가 눈을 가리는 시퀀스가 암시하듯이.
셋째, 조부와 친부의 외상. 방문 옆에 ‘국력배양 통일성취’가 적힌 액자를 걸어둔 승필(우상전)은 걸핏하면 불호령을 내리는 완고한 노인이다. 하지만 손자에게 기저귀 심부름을 시킬 만큼 육신은 쇠약했고, 유년기의 외상(trauma)은 레드 콤플렉스란 강박으로 말년까지 영속한다. 승필의 부모는 보도연맹 사건에 휘말려 몰살당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어쩌면 “글 한 자도 모르는 사람들”은 쌀 한 됫박이나 비료 한 포대를 얻고자—〈태극기 휘날리며〉(2004)의 영신(이은주)처럼—이름뿐인 맹원이 됐을지도 모른다. 한편, 학생운동에 가담하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절게 된 태근(오만석)의 외상(injury)은 한층 직접적이다. 그럼에도 그의 술주정과 승필의 잠꼬대를 듣기 위해, 보다 정확히는 공식적인 역사에 누락된 증언을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선명치 못한 음성에 귀 기울이고 어둠에 묻힌 눈동자들을 상상해야 한다. 평생의 외상을 꺼내놓는 두 캐릭터의 얼굴이 감춰지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정리하자. 〈장손〉은 별 표정 없이도 아픈 얼굴로 가득한 영화다. 동시에 가족영화의 유산을 승계하고, 가부장제의 유산을 응시하며, 대항기억의 유산을 전승한다. “오늘 제사는 다들 일찍 지내네.” 황혼 녘에 이웃 할아버지가 건네는 이 대사는 마을 전체가 같은 비극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베트남으로 이민을 떠나는 막내 고모의 에피소드는 또 다른 민간인 학살의 역사와, ‘저렴한 인건비’의 명목으로 자행돼 온 초국가적인 착취를 환기한다. 2024년 12월,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작가 한강은 이렇게 말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적어도 억지로 치르는 제사처럼, 타인의 노동과 헌신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산 자는 죽은 자를 도울 수 없다. 하지만 오해를 거듭하거나 화해에 실패할지라도, 상대의 고통을 이해하려 애쓰고 나눠 가짐으로써 산 자는 죽어가는 자를 살릴 수도 있다.
앞에서 운을 띄웠던 영화의 “은밀한 주장”은 이 정도로 요약되는 셈인데, 〈장손〉의 백미라 불릴 법한 라스트 신에 관해 부연하는 게 좋겠다. 기묘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는 자신의 임계를 이미 알아버린 조로(早老)한 자의 어떤 예감으로 읽혔다. 거시사의 몫이 한쪽 성별에게 할당된 〈장손〉의 편향성—막 태어난 늘봄이 4대의 첫 딸이자 마지막 증손주일 수도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을 이미 오정민은 인지했던 게 아닐까. 만일 이것이 맞다면, 개인사와 영화사를 섬세히 엮으며 후일의 관점에서 본인의 뒤까지 앞질러 돌아보는 이 야심 찬 신예의 다음 행보를 기대하지 않을 도리가 나에게는 없다.
최우정
1996년 경기 수원시 출생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학부·석사 졸업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김시무 영화평론가
관객들이 영화평론을 읽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뭣보다 한 편의 영화를 인상 깊게 본 관객이라면 그 작품에 대한 해석을 읽으며 새로운 이해를 얻을 수 있길 기대한다. 그래서 자신만의 시각으로 쓴 평론은 독자 지지를 얻는다. 이는 평론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필요조건이다. 하지만 여기에 머문다면 좋은 평론가로 성장할 수 없다.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까지 갖춰야 비로소 평론가란 이름값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믿을 수 없음을 미적분하기: 탈진실 시대의 영화론’이란 제목의 평론은 두 조건을 모두 충족시킨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 쥐스틴 트리에의 ‘추락의 해부’, 이정홍의 ‘괴인’을 묶어 믿음과 진실의 문제를 해부했다. 평자가 세 편을 선택한 이유는 “믿음과 진실 같은 것이 때로는 남루하고 대체로 요원하지만 외로운 존재들이 버텨내기 위해서는 여전히 필요하다고 속삭이는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평자는 ‘괴물’을 “평범한 존재만을 규범적 인간으로 승인하는 사회가 얼마나 비좁고 갑갑한 틈바구니로 구성원들을 몰아넣는지 현시하는 영화”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진실은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 같은 추상적인 관념들에 얽매여 눈앞의 구체적인 현실을 놓치지 말아야 함을 강조한다”고 파악한다.
이 평론은 별이 ‘총총한 밤하늘’이란 루카치의 명문을 화두로 삼아 논의를 전개한다. 하지만 이 영화들을 이해하려면 결국 ‘어스름한 새벽’이란 긴 우회로를 거칠 수밖에 없다. 이 영화들은 명료한 직선을 거부하고 관객을 의심과 불안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자는 “왜 영화인가?”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영화란 허구(fiction)를 통해 현실을 수선(fix-tion)해야 하기 때문이란 답을 제시한다. 세 작품이 상상하는 재생(regeneration)의 희망을 관측해 현실을 재생(restart)하는 건 평자의 몫이었다. 평자는 세 편의 영화에서 탈진실의 시대에 진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최우정
1996년 경기 수원시 출생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학부·석사 졸업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비평이라는 것을 쓰는 계기는 대개 두 가지다. 첫째, 무엇이든 남기고 싶은 텍스트를 만났을 때. 둘째, 어떻게든 건네고 싶은 메시지가 생겼을 때. 전자에겐 텍스트에 대한 직관을 해명할 임무가, 후자에겐 메시지와 닿는 작품을 발견할 과제가 주어진다. 그런데 위의 두 계기가 맞물리는 경우도 가끔 일어난다. 우연히 다가온 텍스트와 메시지가 저절로 이야기를 펼쳐놓는 때다. 당선 소식을 듣고는 받아쓰기를 마쳤다는 느낌을 받았고, 앞으로도 ‘진짜와 가짜’로 말놀이를 하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2025년 한 해 동안 몇 편의 글을 발신했다. 그것의 형식과 내용을 막론하고, 사람의 마음이 타인의 마음에 수신된다는 것은 언제나 놀라운 일이다. 평생 네가 글을 쓰길 바란다고, 자주 당신의 글을 읽길 원한다고 격려했던 분들의 눈빛과 음성을 기억한다. 비평을 쓰는 행위가 이따금 외롭지만 그럼에도 괴롭지 않은 이유는, 나보다 나를 더 믿어주는 존재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그곳에서 써야 했던 글, 지금 이곳에서 읽힐 만한 글을 쓰고 싶다. 앞에 적은 문장을 초심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극예술 연구의 도정을 열어주신 이상란 선생님, 키네마(kinema)의 매혹을 알려주신 백문임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닮고 싶은 스승을 두 분이나 만나는 건 공부하는 이에게 흔치 않은 행운이다”라고 밝힌 적이 있는데, 이보다 정확한 표현을 짓기는 어렵기에 다시 인용한다. 즐겁게 쓰인 원고에 기대를 걸어주신 심사위원께 감사드린다. 17년 전 TV에서 들었던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하고픈 일을 신나게 해내는” 딸을 응원하실 부모님께, 더딘 삶으로 종종 기쁨을 드리기를 상상해 본다.
나를 거쳐 간 모든 책, 영화, 사람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