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디아스포라

by  이형초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우리에게 박물관이 생긴다면

    입구는 화물차처럼 만들자 좁은 열차에 갇혀 초원을 가로질렀던 순간처럼 긴 철로를 지나 부모를 만나러 가고 싶다 척박한 평야에서 씨앗을 뿌리고 토굴을 짓고 새를 잡아먹으며 봄이 오기를 기다렸던

    먼 사람들의 이야기
    흠뻑 젖은 곡괭이와 밤의 나뭇가지들

    따뜻한 진열창에 넣어두자 우연한 행인처럼 그곳을 지나치며 우리의 역사래,
    러시아어로 중얼거릴 것이다 유리창 사이로 언어와 계절이 바뀌고

    러시아인도 카자흐인도 한국인도 아닌

    무국적자의 밤이 쌓이는 곳 비가 오든 눈이 내리든 자신들만의 농장을 만들었답니다, 말하던 큐레이터는 사실 그들의 가족이고, 새벽마다 불을 밝히는 경비원은 자기 이름 대신 그들의 이름을 외우던

    가득 찬 박물관 모두 연결된 사람들
    텅 비어 있어도 가득 찼다고 믿으면
    어디든 둘러볼 곳은 있지
    결국 우리는 같은 출구로 나갈 테니까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에서 사람은 늘 몰려든다 어디에서 불어온 눈바람이 머리가 되고 어디에서 쌓인 눈송이가 몸이 되는지

    몰라도 좋은 박물관, 다 사라져도 기억해 주는 이야기, 우리에게 박물관이 생긴다면
    이형초

    이형초

    2001년 목포 출생

    단국대 문예창작과 졸업

  • 정호승 시인·조강석 문학평론가(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번 본심에는 특이사항이 2개 있었다. 첫째, 이례적으로 응모작이 많이 늘었다고 들었으나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이 예년에 비해 썩 만족스럽지만은 않았다. 그래서인지 심사위원 두 명이 최종 고려 대상으로 들고 온 2명의 작품이 처음부터 일치했다. 다른 응모자들의 작품과 현격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명의 작품은 충분히 수일했다. 최종적으로 검토된 것은 ‘눈사람’ 외 4편과 ‘디아스포라’ 외 4편이었다. 둘 중 어느 작품이 당선작이 되더라도 충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 심사위원들은 재독과 숙고를 거듭했다.
    ‘눈사람’은 깊은 사유와 단정한 문장이 인상적이었고 “사람을 안으면 자꾸만 녹았습니다”라는 마지막 구절이 시 전체를 잘 마무리하며 시적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는 점에서 당선에 근접했다. ‘디아스포라’는 활달한 상상력과 더불어 사유를 시적 플롯을 통해 알맞게 조직하는 데 있어 숙련된 솜씨를 선보였다. 매끄럽지 않은 대목이 없었고 시 전체가 환기시키는 디아스포라적 상상력 역시 생경한 관념이나 강변 없이 적실하고 진중하게 전달되었다.
    심사위원들은 두 작품 모두 당선에 값한다는 판단을 공유했지만 역사적 상상력에 가닿는 시적 상상력의 규모와 넓이, 그리고 예컨대, 시의 제목과도 맥락이 닿는, “우리에게 박물관이 생긴다면//입구는 화물차처럼 만들자”라는 표현에 담긴 재기 역시 손색이 없다는 것에 동의하면서 ‘디아스포라’를 올해의 당선작으로 내밀기로 결정했다. 만족스러운 마음 그리고 큰 기대와 더불어 축하의 악수를 건넨다.
  • 이형초

    이형초

    2001년 목포 출생

    단국대 문예창작과 졸업

    작년 겨울, 이사를 했습니다. 화분을 들이고 새 커튼을 달며 집 안에 온기를 채웠습니다. 고향을 떠나 낯선 세상을 마주하는 일은 외롭지만, 동시에 감사한 일이기도 합니다. 나를 더 새롭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텅 빈 세상 앞에 서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시를 썼습니다. 가득 찼다고 믿으면, 어디든 다시 둘러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제 소식을 듣고 저보다 더 많이 울어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큰 축복일까요. 나의 기쁨을 온전히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 꿈은 결코 혼자 이룬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길을 닦아주었기에 저는 전력을 다해 달릴 수 있었습니다. 저와 이별했던 사람들에게도 다시 한번 손을 내밀고 싶습니다. 함께, 각자의 자리에서 잘 살아가고 싶습니다.

    언제나 저를 믿어주신 천수호 선생님과 안도현 선생님께 가장 먼저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몇 번의 실패 앞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2023년 12월, 서로의 편지를 나눠 읽으며 펑펑 울었던 수진, 은지, 민이 그리고 스터디 멤버들. 앞으로도 저와 계속 글을 써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선 연락을 받았던 날, 어머니의 꿈에 할아버지가 나오셨다고 합니다. 두꺼운 봉투 속에 편지가 여러 장 들어 있었다고요. 아마도 지혜롭게 살아온 어머니의 삶이 적혀 있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 제일 감사합니다. 부모님의 따뜻한 언어 속에서 저는 시인이 되었습니다.

    잘 쓸 자신은 없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을 자신은 있습니다. 부끄럽지 않게, 그러나 멈추지 않고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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