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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음을 미적분하기: 탈진실 시대의 영화론

by  최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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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믿을 수 없음을 미적분하기: 탈진실 시대의 영화론
    ― 〈괴물〉, 〈추락의 해부〉, 〈괴인〉을 중심으로



    밤하늘의 테트리스


    이 세계와 별세계의 이야기로 시작하자.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인 시대, 별빛이 그 길들을 훤히 밝혀주는 시대는 복되도다”라고 게오르크 루카치는 썼다. 익히 알려진 바처럼, 이는 근대에 이르러 영혼과 세계의 총체성을 잃어버린 개인에게 소설이라는 장르가 새로운 삶의 방향을 모색하는 이정표가 되어줄 수 있겠다는 20세기의 시대정신을 함축한다. 『소설의 이론』의 기념비적인 첫 문장을 돌이켜보면서, 우리는 지난 세기가 바로 영화의 시대이기도 했고, 어둠 속에서 빛으로 영사되는 영화가 문자 그대로 밤하늘과 닮은 서사예술임을 떠올릴 수 있다. 아울러 도시의 광(光)공해로 별빛이 희미해진 시대, 각자도생하는 개체들이 ‘갈 수 있는 길’을 찾아 헤매는 시대, 거대서사의 종언과 함께 ‘가야만 하는 길’은 더욱 구태의연한 것이 되어버린 시대에 조금은 유치한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 왜 달이 아니라 별이었을까?
    별은 여럿이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성좌는 별의 위치를 정하기 위해 밝은 별을 중심으로 천구(天球)를 나눈 것을 뜻한다—현대 천문학에서 합의된 별자리는 88개다. 천구가 곧 관측자가 설정한 가상의 구이고, 별자리가 곧 지구인의 관점에 따라 별들을 모아서 붙인 이름이므로, 성좌는 곧 별들이 차지하는 공간을 어떻게 경계지을 것인가 하는 인간의 선택적 인지작용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별자리가 더 이상 지도가 될 수 없다면, 예컨대 기준점이 되는 별을 분간할 수 없다면, 혹은 관측자가 저마다의 천구를 조망하고 있다면, 혹은 인공위성과 별이 엇비슷하다는 견해가 빗발쳐서 천체라는 범주마저 흔들리는 중이라면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고 얘기해도 괜찮은 것일까. 어쩌면 루카치가 은유한 ‘별’에는 근대인의 소외뿐 아니라 현대인이 마주하는 정보의 홍수와 파편화라는 화두까지 점지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탈진실(Post-truth): 객관적 사실보다 개인적 감정과 믿음에의 호소가 여론을 형성하는 데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상황.’ 2016년 옥스퍼드 사전에 올해의 단어로 선정돼 2026년 현재까지도 빈번히 호출되고 있는 개념이다. 물론 뜬소문의 유포가 21세기만의 일은 아니지만, 거짓이 진실을 왜곡하거나 실제적 허구를 창조하는 것을 넘어 사실과 거짓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현상은 예사롭지 않다. 대수학의 기호를 끌어와서 오늘날 사실과 거짓의 가치는 절댓값으로 치환됐다고 등식화해 보자면 이렇다. ‘|사실| = |거짓|’ 문제는 정보가 무한히 확산되고 증식한다는 조건 자체보다는, 기존의 데이터와 알고리즘에 기반해서 맞춤화된 정보만을 제공받는 우리에게 공통된 현실감각이 사라져간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온/오프라인을 불문하는 혐오와 분열과 배제의 정서는 나에게 익숙지 않은 목소리를 무의미한 소음으로 치부해 버리는—〈돈 룩 업〉(2021)과 〈화이트 노이즈〉(2022)를 상기하자—전 지구적인 사태와 긴밀하게 연동된다.
    인간의 모든 의사소통은 무엇을 믿(지 않)게 할 것인지 조정하려는 발신자와 어떻게 믿(지 않)을 것인지 선택하려는 수신자 사이의 역동적인 줄다리기다. 영화 역시 특정한 믿음을 포개거나 허물어트리는 주체들의 상호작용이며, 이때 관객의 머릿속은 곧 한정된 공간에 무작위로 떨어지는 블록을 쌓아 올리다가 어떤 순간에는 그 블록들이 소멸하기를 반복하는 테트리스 게임으로 비유될 수 있다. 영화의 본질은 조작이다. 첫째, 어둠과 빛, 색과 구도, 이미지와 사운드를 질료로 삼아 영화적 우주는 생성된다(操作). 둘째, 영화는 인간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거기에 귀속되지 않는 환영적인 세계, 즉 폴 리쾨르가 말했던 ‘마치 그런 것처럼(as-if)’의 영역을 구축한다(造作). 셋째, 영화는 허구적 ‘사실’의 투명도와 속도를 조절하면서 관객의 시점에서 서사적 ‘진실’이 짜맞춰지는 순간—테트리스의 수평선이 완성되는 순간—을 통제하려는 의도적인 배열의 결과다.
    여기 세 편의 영화가 있다. 초 단위로 명멸하는 숏폼 콘텐츠가 지배화된 시대에 각각 127분, 152분, 136분의 러닝타임을 채택하고도 들쑥날쑥한 블록들을 남겨둔 채 게임 오버를 선언하는 영화들. 그러면서 믿음과 진실 같은 것이 때로는 남루하고 대체로 요원하지만 연약하고 외로운 존재들이 버텨내기 위해서는 여전히 필요하다고 속삭이는 영화들—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2023), 쥐스틴 트리에의 〈추락의 해부〉(2024), 이정홍의 〈괴인〉(2023). 관객의 불신을 서사적 동력으로 취하다가 되레 거기에 혼돈과 균열을 일으키는 이들을, 최단 경로인 직선을 마다하고 이곳저곳을 에둘러 가는 포물선의 영화라고 불러도 좋겠다. 이 글은 바로 그 포물선의 면면에서 쏟아져 내렸던 블록들을 복기하며 영화 안팎에 잠재되어 있던 마찰과 파동의 궤적을 연산하는 또 하나의 포물선이 될 것이다.


    정화되는 숲: 〈괴물〉의 경우

    ‘괴물(Monster)’은 ‘입증하다(demonstrate)’라는 단어와 어근을 같이한다. 타오르는 건물을 틸트업하는 오프닝 시퀀스에 붉은색 타이틀 ‘괴물’이 떠오를 때 자연스레 우리는 밤중에 풀밭을 홀로 거닐던 소년의 얼굴이 궁금해진다. 그러나 캔들라이터의 진짜 주인을 확증하기 위해서는 각기 주인공을 달리하며 일부러 관객을 함정에 빠뜨리는 3막의 구조를 거쳐야 한다. 이른바 가족영화의 성질을 띠고 있다는 점 외에도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의 기차나 〈태풍이 지나가고〉(2016)의 기후처럼 고레에다의 전작에서 동원되어 온 모티프들이 〈괴물〉에는 적잖이 발견된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괴물〉이 특별한 위치를 점하는 이유는 ‘구조’의 영화가 빠지기 쉬운 도식성을 본인의 주특기인 ‘인물’의 영화로 너끈히 돌파해내는 고레에다의 연출적 지평을 새롭게 입증하기 때문이다.
    1막과 2막의 주인공인 사오리(안도 사쿠라)와 호리(나가야마 에이타)는 서로의 적수이자 짝패다. 아들이 학교폭력의 가해자로 지목당하자 걸스바에 다니는 당신이 곧 방화범이 아니냐고 사오리는 공격한다. 본인이 편모 가정에서 성장했음에도 싱글맘은 극성이기 마련이라는 성별화된 고정관념을 호리는 재생산한다. 불확실한 소문과 배타적인 통념, 압축하자면 잘못된 믿음은 자기를 보존해야 하는 자들의 무기이자 흉기가 된다. 나날이 첨예해지는 진실 공방, 호리의 일상을 파고드는 언론과 오물, 막간에 배치된 화재와 폭우에 이르기까지 온 동네가 거대한 미궁에 휘말리는 형국을 영화는 고요히 응시한다. 그동안 ‘괴물’은 “몬스터”(선생이 사오리에게), ‘비인간’(사오리가 선생들에게), “외계인”(아이들이 요리에게)이란 별칭들로 디제시스를 유유히 순환한다.
    하지만 〈괴물〉은 누가 괴물인지보다 무엇이 비/인간을 규정하는지를 묻는 영화이고, 더욱 정확하게는 “평범한” 존재만을 규범적 인간으로 승인하는 사회가 얼마나 비좁고 갑갑한 틈바구니로 구성원들을 몰아넣는지 현시하는 영화다. 사오리가 주차하는 장면이 세 차례나 삽입된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두 번째 방문부터 정장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세 번째 방문에 이르러 “흰 선”을 맞추지 못하고 충돌한다. 일찍이 어빙 고프먼이 사회적 상호작용을 공연에 유비했듯, 개인은 일상에서 남들에게 자신을 표현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제어한다. 사회가 기대하는 틀에 걸맞게 자아를 연기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우리는 사회화라고 부른다. 사오리와 호리가 계단을 오르는 쇼트가 반복해서 제시되는 것은 첫째, 싱글맘과 초임교사의 고단함을 부각하기 위해서고, 둘째, 상승에서 하강으로 전환될 위치 에너지를 비축하기 위해서다. 거추장스러운 페르소나를 내던지고서야 그들은 아이들의 심연에 도달한다.
    행복(幸福). 3막의 주인공들에 관해 얘기하기 전에 삐딱하게 접근해 볼 낱말이다. “행복을 이 세계를 형성하는 하나의 형식으로 생각해 본다는 것은 행복이 어떻게 세상을 소위 올바르다고 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만드는지를 생각해 본다는 것이다.”(사라 아메드) 행복의 각본을 가르쳐서 ‘올바른 사람’으로 키우려던 어른은 가정과 학교로부터 아이가 밀려나는 데 일조하고 만다. 대신에 미나토(쿠로카와 소야)와 요리(히이라기 히나타)는 땅 밑으로 향한다. 그들의 손길로 말미암아 버려진 열차가 다시 태어난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는 아이들을 순진무구한 천사로 묘사하지 않으며 불민한 어른들을 단죄하는 데 몰두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교장(타나타 유코)이야말로 사오리와 호리를 농락하는 구심점이겠으나 두 소년의 허물을 덮어주고 핵심적인 대사를 발화하는 인물도 그녀다. “몇몇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건 행복이라 부르지 않아.” 불행한 이들의 만남은 경직된 행복의 형식을 재구성한다.
    요컨대 〈괴물〉이 취하는 입장은 아무래도 진실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이 아니다. 오히려 진실, 행복, 미래 같은 추상적인 관념들에 얽매여서 눈앞의 구체적인 현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영화는 강조한다. 분명히 신호가 있었다. “나는 아빠처럼 될 수 없어”라는 나직한 고백, ‘돼지의 뇌를 고쳐 놓겠다’는 요리 아버지의 엄포. 일상을 지연시키는 태풍은 재해이지만 일상이 재난이었던 이들에게는 몸과 마음을 씻어내는 세례가 된다. 2.39:1의 시네마스코프와 탁월히 어울리는 엔딩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괴물〉의 조성은 다르게 들린다. 하나는 잡음과 뒤섞여 전달되는 소음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더 많은 생명을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단조의 비가(悲歌). 다른 하나는 남들보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 혹은 그것을 기어코 통과해서 살아남은 퀴어 아이와 어른을 향한 장조의 찬가(讚歌). 내가 지지하는 결말은 후자다.


    작가들의 법정: 〈추락의 해부〉의 경우

    일상과 용례를 달리하는 법률 용어로 선의(善意)와 악의(惡意)가 있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착한 마음을, 후자는 나쁜 마음을 뜻하지만, 법학에서는 전혀 다르다. 간단히 말하면 선의는 모르고 한 일이고 악의는 알면서 한 일이다. 그런데 법률에서도 악의가 윤리의 문제로 다뤄지는 예외가 있는데 바로 이혼 사유를 다투는 경우다. “배우자가 악의로 다른 일방을 유기한 때”(「민법」 제840조 제2호). 부부 일방 혹은 쌍방의 법적-도덕적 과실을 가리는 일, 나아가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과 법정이라는 공적 영역을 겹쳐놓는 일은 세계영화사에 극적인 순간들을 부여해 왔다. 〈레베카〉(1940), 〈검찰 측 증인〉(1957),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 〈결혼 이야기〉(2019)…. 목록을 열거하자면 과히 길어질 테니 이렇듯 쟁쟁한 부부 법정물의 계보 가운데 〈추락의 해부〉가 어떤 변별점을 갖는지 살피는 게 좋겠다. 예고하건대 이 영화는 컨텍스트의 층위를 포괄해서 논할 때 비로소 그 진가를 드러낸다.
    먼저 오토 프레밍거의 〈살인의 해부〉(1959)를 인유하는 제목을 눈여겨보자. ‘살인’의 자리를 대체한 ‘추락’은 두 가지 차원의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물리적 추락. 물론 이는 사고인지 자살인지 살인인지 불분명한 사뮈엘(사뮈엘 테이스)의 추락사(死)를 일컫는다. 둘째는 상징적 추락. 이때 추락의 주어는 둘이다. 생전에 사뮈엘은 가부장적 권위를 잃었고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산드라(산드라 휠러)의 명예는 재판으로 실추된다. 공교롭게도 두 배우와 배역의 퍼스트 네임이 같다는 점, 산드라가 오토픽션의 저자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작중 TV 쇼에 나와 ‘작가의 남편 살인이 어느 교수의 자살보다 훨씬 흥미롭다’고 말하는 논자의 정체를 확인하자. 그는 감독 트리에의 실제 파트너이자 공동 각본가인 아르튀르 아라리다—트리에와 아라리는 일과 가정의 양립에 관한 인터뷰를 남기기도 했다. 이쯤에서 우리는 의심해야 한다. 〈추락의 해부〉는 법정물의 외피를 쓴 메타-오토픽션인가?

    “궁금한 게 뭐야?” […]
    “독자에게는 불편해요. 실화잖아요.
    오직 경험한 일만 써야 하나요?”

    사실 〈추락의 해부〉는 첫 장면에서부터 자신의 패를 절반쯤 내보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드라의 성적 지향이 조에(카밀 루더포드)와의 미묘한 긴장을 통해 암시될뿐더러, 둘의 대담은 이 영화가 진실과 허구와 실재, 그리고 스토리텔링에 관한 것임을 알려준다. 현상학자 데이비드 카의 언급처럼 “이야기는 실제 삶으로서 겪는 가운데 말해지며 말해지는 가운데 실제 삶으로서 겪어진다. 삶 가운데의 행위와 고통들은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말하는 과정, 그러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과정, 그리고 그것을 실행하거나 겪어 나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밖으로도 흐른다. 〈추락의 해부〉의 법정이란 이야기를 말하거나 듣거나 실행하면서 자신과 타인의 고통을 심화하거나 경감시키는 인간 사회의 축소판과도 같다. 여기서 피고인, 증인, 검사, 변호사는 공통된 임무—사법적 ‘진실’로 판정될 만한 가장 개연성 높은 ‘픽션’을 빚어내기—를 수행한다. 즉 그들은 작가다.
    이처럼 문자언어의 역학을 다루면서도 영상언어가 자못 정교한 편인데 산드라와 다니엘(밀로 마차도 그라너)의 장벽을 구현할 때가 유달리 그렇다. 타국어로 스스로를 변호하려 애쓰는 산드라의 입술을 클로즈업하거나, 보이지 않는 어머니를 향해 곤두서 있는 다니엘의 청신경을 오버 더 숄더 쇼트로 포착하는 식이다. 더불어 영화의 초점은 스토리텔링[이야기하기] 못지않게 이야기되는 자들의 고통에도 맞춰져 있다. 연일 사생활이 파헤쳐지는 산드라의 압박감은 두말할 나위가 없으며 사뮈엘의 죽음을 시뮬레이션한 뒤에는 다니엘의 착잡한 표정이 덧붙는다. 그러나 인생의 서사를 고쳐 쓸 수 있기에 트라우마가 시나브로 회복되기도 한다. 이를 다니엘은 조금 빨리 또 혹독하게 배운다. 그가 연주하는 구원가(歌)는 아버지의 언어를 대리하는 보이스오버로 청각화되고, 어머니와 동일한 프레임 안에 잡히는 구도로 시각화된다.
    한편으로 〈추락의 해부〉는 다니엘의 성장물이다. 부모의 일방적인 보호 대상이던 그는 ‘어떻게’보다는 ‘왜’라는 문학적 영역을 탐색해서 최선의 시나리오를 마름질하는 작가로 거듭난다. 다른 한편으로 〈추락의 해부〉는 포스트진실 시대의 영화적 대응이다. 매회 만석이던 방청석이 다니엘의 최종 증언일에만 텅 비었음을 잊지 말자. “법적 상황의 피로감을 오늘날의 하이퍼미디어적 조건에 대한 성찰과 결부”(김신)시킴은 이미 지적된 바지만 여기에 나는 주목 경제란 조건을 더하고 싶다.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허물어 텍스트의 레이어를 다층화하는 트리에-아라리의 전략이 과포화된 관심 경쟁 시장에 참전하는 모종의 전술처럼 여겨지는 건 왜일까. 둘의 실재에 근접할 수 없으므로 이런 의혹은 어디까지나 (법적인 의미에서) 선의이겠으나 〈추락의 해부〉가 탈진실 시대 극영화의 최전선이라는 점만은 확실해 보인다.


    출렁이는 집: 〈괴인〉의 경우

    누군가는 수평과 수직의 운동성을 활용하는 공간 구조에서 〈기생충〉(2019)의 흔적을, 억눌린 히스테리와 교묘한 미스터리를 접목하는 계급 구도에서 〈버닝〉(2018)의 흔적을, 찌질한 남자들의 만담과 어딘지 서늘한 여자가 합세한 술자리에서 〈북촌방향〉(2011)을 비롯한 홍상수의 흔적을 읽어낼 것이다. 그러나 〈괴인〉이 2020년대에 발표된 가장 독창적인 한국영화 중 하나라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할 것이다. 단일한 장르나 도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괴인〉은 나름의 고유한 흐름에 따라 복잡한 행위들의 연속체를 꿰어내고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미지의 세계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비유하건대 이 영화가 일으키는 물결이란 주위에서 흡입한 에너지로 서서히 진폭과 전체 에너지를 요동시키는 불안정파(destabilizing wave)다.
    분리와 연결, 지연과 생략. 앞에 쓴 두 단어는 〈괴인〉 속 주택의 테마이고, 뒤에 쓴 두 단어는 영화의 주된 화법이다. 지연은 이런 식이다. 비스듬한 선분 위에 놓인 역삼각형도 구형도 아닌 모양의 돌을 길게 보여준다. 한밤중에 자전거를 타는 남녀 곁에는 풀벌레 소리가, 기홍(박기홍)과 현정(전길)이 떠난 마당에는 개 짖는 소리가 잔존한다. 모두가 어떤 틈에 끼어 있고 영화는 그 틈을 소슬히 좁힌다. 그러면서도 이른바 주변부 노동의 단면들을 줄곧 프레임 내부로 불러들인다. 사다리에 올라서 조명을 매만지는 전기 기사를, 손님이 떠난 도로에서 홀로 체조하는 택시 기사를, 하나(이기쁨)가 들어간 건물에서 곧이어 나오는 배달 기사를 말이다. 망설임 끝에 전송되지 못한 메시지를 낱낱이 펼쳐두면서 하나를 뒤쫓아간 기홍이 어떤 말을 건넸는지는 정작 생략하는 〈괴인〉은 쉬이 언표되지 않는 인간사의 미미한 편린들을 영화적으로 가시화한다.
    흥미로운 것은 방어적인 태세를 취하는 관객일수록 영화의 리듬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기 쉽다는 점이다. 버나드 딕은 『영화의 해부』에서 신뢰할 수 없는 등장인물의 예시로 〈시계태엽 오렌지〉(1971)의 알렉스(말콤 맥도웰)를 들었다. 물론 폭력과 살인을 예사로 일삼는 알렉스와 비등하진 않으나, 무례함과 사려깊음을 왕래하는 기홍에게 최소한의 정감을 갖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예상보다 기홍이 평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실로 종잡을 수 없는 정환(안주민)이 나타난다. 게다가 학원에 다시 가보자고 부추기는 대목에서 그는 정지화면에 가까운 상태에 붙박여 있다. 우리는 묻게 된다. 왜 야밤에 거길 가자고 할까? 왜 자꾸 술을 마시자고 할까? 왜 세입자를 구했을까? 하필 왜 기홍을 집에 들였을까? 이처럼 〈괴인〉을 본다는 것은 물음표의 연쇄와 조우하는 일이다. 마침표와 느낌표를 지양하는 영화는 쉼표와 물음표로 스스로를 지탱한다.
    영화가 급격한 커브길에 접어드는 때는 하나가 (재)등장하는 장면일 것이다. 차량에서 제일 약한 지붕에 문자 그대로 뚝 떨어져 내린 그녀는 모두가 어지간히 외로운 〈괴인〉에서 가장 불안정한(precarious) 캐릭터다. “쉼터”와 “가출청소년”이 발화될 때 〈거인〉(2014), 〈꿈의 제인〉(2016), 〈박화영〉(2017) 등이 스쳐가지만, 자기와 타인의 연민을 공히 거부하는 하나는 독특한 페이스로 영화의 자장을 휘젓는다. 이는 해소되지 못한 콤플렉스를 끌어안고 남의 인정을 갈구하는 기홍이나 정환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다만 둘을 그저 동질화하는 것은 기홍에게 꽤 가혹한 처사일 테다. 적어도 그는 옆과 뒤를 살핀다. 마트에서 정환은 와인의 상표를 묻지만 기홍은 와인의 가격표를 확인하는 것처럼. 강자는 약자를 고찰하지 않지만 약자는 강자를 분석한다—〈괴인〉이 〈버닝〉, 〈기생충〉과 같은 궤에 놓이는 이유다. 그나마 덜 타산적인 하나조차 집주인이 누구인지는 파악하지 않던가.
    생계의 마디는 저마다 다른 시간성을 만들어낸다. 현정의 친구는 카페를 올해에 차리든 내년에 차리든 상관없지만 기홍은 하루라도 빨리 공사를 따내야 한다. 대개의 주거 계약은 월이나 연 단위로 체결되지만 하나는 일 단위로 잠잘 곳을 걱정해야 한다. 그렇기에 하나 이마의 흉터에 머무르던 기홍의 눈길이 소중하다. 그의 우려는 일전의 잡기 놀이가 사냥과 다름없음을 자각했기 때문이고 남에겐 소일(小一, 消日)인 것이 내게는 너무나 별일일 때의 서글픔과 비참함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정환은 손톱을 물어뜯는다는 버릇에서 애정결핍의 징후를 추출한다. 무릇 상처에 대한 반응은 인간의 본바탕을 드러낸다. 현정의 경멸을 감지하지 못한[않는] 정환은 그녀의 외도가 단지 기홍과 ‘쿵짝이 잘 맞아서’가 아님을 전연 깨닫지 못할 것이다.
    둘이 살던 집은 셋이 되고, 잠시 ‘하나’였다가 넷으로 출렁인다. 이정홍은 “모두가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설령 자각하지 못할지언정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믿어보려 했다”고 말했다(《씨네21》 1430호). 물론 감독의 진술을 표면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그것이 영화에 고스란히 반영됐다고 치부할 만큼 우리는 순진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발가락이 간질거리는’ 지각변동을 휘발시키지 않는 데서 〈괴인〉의 개성과 리듬이 연원한다는 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런 리듬은 미세한 부대낌을 관조하는 게 이색적이라고 느낄 만큼 거기로부터 멀어져 있는 관객의 지각작용에서 비롯된다. 돌연한 파경이 아닌 애매한 수면으로 닫히는 결말은 의뭉스러운 공존의 찰나를 아침까지 붙잡아 두려는 일말의 전복성일지도 모른다.


    비행과 재생, 그리고 ‘픽션’

    별이 비추는 밤하늘에서 출발했던 우리는 어스름한 새벽에 이르기까지 세 편의 영화를 거쳐왔다. 떠나기 전에 던져야 하는 물음은 이런 것이다. 왜 이 영화들은 그토록 돌아가는가? 그러니까 왜 명료한 직선을 거부하고 관객을 의심과 불안에 빠뜨리며 한사코 구부러져 비행하는가? 가장 손쉬운 대답은 일정한 러닝타임이 견인될 서스펜스를 확보하기 위해서, 라는 고전 스토리텔링 작법서 같은 제언일 것이다. 하지만 거듭되는 의심과 불안의 끝자락에는 미해결된 잔해들이 도사리고 있기에 이런 답변은 불완전하다. 그 대신 영화가 창조하는 주관적 세계(허구적 사실)와 관객이 구성하는 주관적 세계(서사적 진실) 사이의 접면으로부터 끊임없이 이야기가 창발한다는 아이러니한 가능성에 주목해 보자.
    영화를 만든 이와 영화를 보는 이는 상호주관적인 세계를 열고 닫는 공동체다. 이를테면 파편화된 이미지와 사운드를 들이밀다가 끝내 정답지를 쥐여주지 않는 〈추락의 해부〉, 인물의 속내도 오늘의 혼돈도 내일의 형세도 예견치 못하게 하는 〈괴인〉은 종국까지 포물선을 그어가는 관객-플레이어—서두에 나는 영화 관람을 테트리스 게임으로 비유했다—의 수고로움이 합치해야만 비로소 완성된다. “세계는,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시나리오 〈괴물〉의 첫머리에 고레에다는 이같이 첨언했다. 세상의 살아있는 것들과 죽어가는 것들, 혹은 움직이는 것들과 가만있는 것들은 서로 연루되어 있다. 이를 내용과 형식 양자의 차원에서 매개하는 영화는 무작위로 존재하는 일이 무의미해 보일지라도 나란히 덜컹거리자고 은밀하게 요청하곤 한다.
    마지막 질문이 남았다. 왜 영화인가? 아니, 왜 영화여야 하는가? 결국 이 물음은 왜 허구를 통해 현실을 수선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로 바꾸어 적을 수 있다. 나는 ‘fiction(픽션)’의 철자를 하나 비틀어 ‘fixtion’이라 부르고 싶다. 이야기의 그물망을 새롭게 짜는 일이 손상된 세계를 수리하는 바늘땀을 뜨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다. 영화는 지구의 물리적 흔적—빛, 소리, 입자—을 보존하는 동시에 허구를 작동시킨다. 태초부터 이 행성에 맴돌고 있던 물질을 결합해 빚어진다는 점에서 그것은 언어예술인 소설과는 변별되고, 지나간 실재의 잔여를 편집으로 복원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연행예술인 연극과도 변별된다. 무엇을 고쳐(fix) 어디까지 만들며(fict) 날아가게 될지 포물선의 시초에선 도무지 예측 불가능한 영화는 영영 완결되지 않는 프로젝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 실재의 구원에 관여하려는 ‘픽션’의 욕망이 시대착오적이거나 가당치 못하다고 일축하기에는 섣부르다. 오히려 영화는 허구와 실재를 관통하는 지층에 침투해서 현실을 정비하는 대안적인 장소가 되어왔다. 다른 이야기를 이야기하려면 어떤 이야기를 갖고 이야기할 것인지가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이 시대의 지배적인 허구를 흩트리기 위해서는 믿(을 수 없)음의 벡터를 증폭시키는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괴물〉과 〈괴인〉, 〈추락의 해부〉는 어리거나 취약한 자들에게 서사적 변곡점을 할애했고, 이들이 상상하는 재생(regeneration)의 희망은 그다음 영화를 재생(replay)하거나 멈췄던 현실을 재생(restart)하는 관측자에게 넘겨진다. 다른 이야기를 짓는 일은 곧 세계의 파동을 재편성하는 심급이며, 허구의 틈새에서 믿음은 갱신된다. 이것이 세 편의 영화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진실이다.
    최우정

    최우정

    1996년 경기 수원시 출생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학부·석사 졸업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 김시무 영화평론가

    관객들이 영화평론을 읽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뭣보다 한 편의 영화를 인상 깊게 본 관객이라면 그 작품에 대한 해석을 읽으며 새로운 이해를 얻을 수 있길 기대한다. 그래서 자신만의 시각으로 쓴 평론은 독자 지지를 얻는다. 이는 평론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필요조건이다. 하지만 여기에 머문다면 좋은 평론가로 성장할 수 없다.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까지 갖춰야 비로소 평론가란 이름값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믿을 수 없음을 미적분하기: 탈진실 시대의 영화론’이란 제목의 평론은 두 조건을 모두 충족시킨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 쥐스틴 트리에의 ‘추락의 해부’, 이정홍의 ‘괴인’을 묶어 믿음과 진실의 문제를 해부했다. 평자가 세 편을 선택한 이유는 “믿음과 진실 같은 것이 때로는 남루하고 대체로 요원하지만 외로운 존재들이 버텨내기 위해서는 여전히 필요하다고 속삭이는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평자는 ‘괴물’을 “평범한 존재만을 규범적 인간으로 승인하는 사회가 얼마나 비좁고 갑갑한 틈바구니로 구성원들을 몰아넣는지 현시하는 영화”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진실은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 같은 추상적인 관념들에 얽매여 눈앞의 구체적인 현실을 놓치지 말아야 함을 강조한다”고 파악한다.
    이 평론은 별이 ‘총총한 밤하늘’이란 루카치의 명문을 화두로 삼아 논의를 전개한다. 하지만 이 영화들을 이해하려면 결국 ‘어스름한 새벽’이란 긴 우회로를 거칠 수밖에 없다. 이 영화들은 명료한 직선을 거부하고 관객을 의심과 불안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자는 “왜 영화인가?”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영화란 허구(fiction)를 통해 현실을 수선(fix-tion)해야 하기 때문이란 답을 제시한다. 세 작품이 상상하는 재생(regeneration)의 희망을 관측해 현실을 재생(restart)하는 건 평자의 몫이었다. 평자는 세 편의 영화에서 탈진실의 시대에 진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 최우정

    최우정

    1996년 경기 수원시 출생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학부·석사 졸업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비평이라는 것을 쓰는 계기는 대개 두 가지다. 첫째, 무엇이든 남기고 싶은 텍스트를 만났을 때. 둘째, 어떻게든 건네고 싶은 메시지가 생겼을 때. 전자에겐 텍스트에 대한 직관을 해명할 임무가, 후자에겐 메시지와 닿는 작품을 발견할 과제가 주어진다. 그런데 위의 두 계기가 맞물리는 경우도 가끔 일어난다. 우연히 다가온 텍스트와 메시지가 저절로 이야기를 펼쳐놓는 때다. 당선 소식을 듣고는 받아쓰기를 마쳤다는 느낌을 받았고, 앞으로도 ‘진짜와 가짜’로 말놀이를 하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2025년 한 해 동안 몇 편의 글을 발신했다. 그것의 형식과 내용을 막론하고, 사람의 마음이 타인의 마음에 수신된다는 것은 언제나 놀라운 일이다. 평생 네가 글을 쓰길 바란다고, 자주 당신의 글을 읽길 원한다고 격려했던 분들의 눈빛과 음성을 기억한다. 비평을 쓰는 행위가 이따금 외롭지만 그럼에도 괴롭지 않은 이유는, 나보다 나를 더 믿어주는 존재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그곳에서 써야 했던 글, 지금 이곳에서 읽힐 만한 글을 쓰고 싶다. 앞에 적은 문장을 초심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극예술 연구의 도정을 열어주신 이상란 선생님, 키네마(kinema)의 매혹을 알려주신 백문임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닮고 싶은 스승을 두 분이나 만나는 건 공부하는 이에게 흔치 않은 행운이다”라고 밝힌 적이 있는데, 이보다 정확한 표현을 짓기는 어렵기에 다시 인용한다. 즐겁게 쓰인 원고에 기대를 걸어주신 심사위원께 감사드린다. 17년 전 TV에서 들었던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하고픈 일을 신나게 해내는” 딸을 응원하실 부모님께, 더딘 삶으로 종종 기쁨을 드리기를 상상해 본다.
    나를 거쳐 간 모든 책, 영화, 사람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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