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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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두 명만 죽이고 싶었다. 두 발이면 충분했다. 국내에서 합법적으로 총기 사용이 가능한 유일한 장소. 진화가 사격장을 드나들게 된 계기였다. 진화는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왼발을 반보 앞으로 내밀었다. 오른손으로 총목을 쥐고 왼손은 앞 덮개를 받쳤다. 개머리판은 어깨에 밀착했다. 견착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총구가 흔들렸다. 발사할 때 반동이 커서 겨드랑이가 멍들었다.
이제 가늠자에 집중할 시간이다. 고개를 비스듬히 숙여 가늠자와 가늠쇠를 수평으로 맞췄다. 개머리판 상단에 광대뼈 아래를 밀착해야 한다. 총이 볼에서 멀어지면 반동은 심해졌다. 불안정한 자세로 방아쇠를 당기면 광대뼈가 얼얼했다. 사랑니를 뺀 것처럼 치통을 겪는다.
눈과 총열과 가늠쇠를 수평으로 맞추면 조준 완료. 아! 신호를 보내면 접시가 날아오른다. 접시를 따라 총구를 위로 올린다. 진화는 가늠자 안으로 보이는 막대에 집중했다. 표적의 중앙이 가늠쇠와 일치하면 주저 없어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조준이 제대로 되었는지 의심하고 주춤하는 순간 총탄은 과녁을 빗나갔다.
진화는 숨이 멎을 만큼 적막한 상태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잡념이 사라지자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진화가 사랑하는 고요가 찾아왔다. 그토록 찾아 헤맨 평화의 순간이다. 적막을 뚫고 굉음이 나온다. 산탄은 35발로 나뉘어져 접시를 깨트렸다. 평화는 짧게 끝났다.
사격장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총성에도 새가 날아오르지 않았다. 산에 동물이 살지 않을 리가 없다. 진화는 새들이 청력을 상실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지난밤 골목에서 자동차에 치여 죽은 비둘기도 그랬다. 원룸 근처의 먹장어 숯불구이 집 앞이었다. 슬리퍼를 끌고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 오는 길이었다. 비둘기 서너 마리가 가게 앞에서 바닥을 쪼고 있었다. 자동차가 다가오자, 진화는 길가로 비켜섰고, 비둘기들은 날개를 펼쳐 날아갔지만 유독 한 마리는 그대로 있었다. 고개를 들어 딴 곳으로 날아가는 동족을 보며 두리번거렸을 뿐이었다. 녀석이 순간 진화를 쳐다봤고 잠깐 눈이 마주쳤다. 비둘기들이 날아간 쪽으로 방향을 틀던 녀석의 위로 타이어가 지나갔다. 깃털이 도로에 날렸다. 진화를 쳐다보느라 멈칫한 사이 사고를 당한 게 분명했다.
진화는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을 청산하고 싶었다. 우유부단함을 버리고 단호하고 명백해지고 싶었다. 변죽만 울리는 삶이 아니라 자신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주위에서 뭐라 떠들든 앞만 보고 나아가야 하는 곳. 단 한 방으로 깔끔하게 승패가 갈라지는 곳, 변방이 아니라 표적의 한복판에 집중해야 하는 곳. 우물쭈물하다가는 다치기 십상인 곳. 진화가 사격장을 동경하게 된 이유였다. 시작은 아마도 파리올림픽에서 본 김예지 선수였을 것이다. 예전 같으면 멋있다며 넘겼겠지만, 복잡한 심경이 사격장까지 이끌었다. 사대에 서면 진화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목표를 향한 집착은 중독성 있는 쾌감이었다. 정신의 결이 하나로 모이는 순간은 짜릿했다. 탄과 함께 진화도 과녁에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경험해 본 사람만 아는 전율이다.
정확히 조준한 뒤 흔들림 없이 쏘고, 방아쇠를 당겼으면 그것으로 끝인 행위. 되돌아볼 필요도 없고 주춤할 틈도 없으며, 쓸데없는 잡념이 끼어들 수 없는 선명한 행위의 연속선.
탄피가 쌓이는 만큼 자신도 단단해질 것이다. 단호한 행위가 몸에 밸 거라 기대했다.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고. 닮고 싶은 태도가 넘치는 곳에 가까이 있으면 자신도 변하리라는 믿음이었다.
총기 소지가 금지된 한국에서 일반인이 총을 만질 수 있는 곳은 총포사나 사격장이다. 총포사에 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진화는 사격장을 공략했다. 한 달에도 몇 번을 드나들다 보니 본의 아니게 주워듣는 정보가 있었다. 주황 조끼를 입은 자원봉사자들이 끊이지 않고, 녹색 조끼를 입은 안전요원은 아르바이트생이라는 사실이다. 안전요원끼리 하는 대화를 엿듣자니 공개채용 공고가 올라온 모양이었다. 공공시설관리공단 사이트를 뒤져보니 공고는 분기별로 올라왔다. 안전요원 보조의 계약기간은 3개월이었다. 총기를 외부로 빼돌리기 충분한 기간이다.
귀하는 2분기 체육시설운영처 한시적근로자 면접 대상자로 선정되셨습니다.
서류 전형을 통과했다는 통지는 문자로 왔다. 면접 장소는 공단 본사 7층이었는데 대기실은 직원 식당이었다. 백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였다. 테이블마다 한둘씩은 앉아 있었다. 진화는 빈 식탁을 발견하고 구석까지 걸어가 창문을 등지고 앉았다. 면접자들은 신분증 확인 후 대기하다가 호명되길 기다렸다.
면접관은 남자만 네 명이고, 면접자는 여자만 네 명이었다. 진화가 눈여겨본 흰색 정장 차림의 젊은 여자가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 옆으로 진화와 세련된 스카프를 걸친 중년, 나이가 가늠 안 되는 커트 머리가 차례로 앉았다. 바깥쪽에 앉은 지원자부터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건설사 사무실에서 경력을 쌓은 그녀는 말이 다부지고 여유로웠다. 현재는 잠깐 쉬면서 이직을 준비 중이었다. 면접관이 주중에 일하면서 주말에 나올 수 있겠냐고 물었을 때 면접자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그래선지 합격 통보를 받고 사격장에 출근했을 때 그녀는 없었다.
마지막 질문은 가장 젊은 면접관이 했다.
“도전을 즐기는 편인가요?”
사격장이 흔히 가는 곳이 아니기에 사실상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다. 커트 머리만 다르게 답했다.
“도전도 현실 문제가 해결되어야 가능한 거 아닐까요?”
진화는 자신이 도전을 즐기는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안정 지향형에 가까웠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즉답한 걸 보면 거짓말이 늘었거나 성향이 변해가는 과도기일 수 있다.
최종 합격자는 세 명이었다. 진화와 여주 그리고 커트 머리 류정이었다. 근무 첫날, 진화는 제시간에 도착했지만, 두 사람은 이미 와 있었다. 관리자는 진화와 여주를 여사님이라고 불렀다. 진화는 어색했지만, 여주는 익숙하다고 했다. 여주와 류정은 권총 사격장으로, 진화는 클레이 사격장으로 배치됐다.
모니터에 뜬 순서대로 손님을 불러 준비시키는 간단한 업무였다. 진화는 틈틈이 코치들을 살피며 주의 사항을 전하고, 보안경을 씌워 사대로 보냈다. 퇴근할 무렵, 카운트 직원이 진화에게 앞으로 클레이 사격장에 올 일이 없을 거라고 말했다. 한시직은 대부분 제1 매표소로 간다는 설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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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늠자 정중앙에 가늠쇠가 오도록 하고, 그 위에 표적을 올려놓아야 합니다. 총은 항상 전방을 향해 조준하고, 개머리판은 오른쪽 어깨에 단단히 고정합니다.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가볍게 쥔 상태에서 왼손으로는 총열 덮개를 감싸길 바랍니다.”
스크린 사격장에 배치된 진화는 설명에 집중했다. 수십 번 반복해 연습한 자세였다. 유튜브에서 사격 선수들의 영상도 찾아보았다. 격발할 때 호흡을 멈춰보라는 설명은 사격이 시작되면 해줄 것이다. 몸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호흡 조절이 필수였다. 선수들은 총구 위에 바둑돌을 올려놓고, 총구 흔들림을 점검했다. 관광사격장에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진화는 부지런히 배워 알려주었다. 하나를 설명하려면 열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진화의 가르치는 방식이었다.
진화가 자세 설명을 마치고 게임 방식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됐고. 그냥 시작해요.”
야구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말을 끊었다.
“여기 다 군대 다녀왔으니까. 버튼 누르면 시작하는 거죠?”
일행 하나가 진화를 흘깃거리며 비웃었다. 진화는 2인용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 뒤로 군대 운운하는 남자들에게 설명을 생략했다.
스크린 담당자라도 비비탄 사격장에 손님이 몰리면 도왔다. 비비탄 업무는 강도가 셌다. 안전 규칙을 설명하고, 탄창을 채우고, 공탄을 체크하고, 탄을 소진한 고객을 안전하게 내보내야 했다. 간혹 “장난감 총으로 너무 깐깐하네”라는 불만도 들어야 했다.
장난감 총이지만 사고가 가장 잦았다. 손님이 가늠자를 만지다 힌지를 건드려 부품이 얼굴에 튄 적이 있었다. 힌지가 풀리면서 총이 분리된 것이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사고의 가능성은 늘 있었다. 손님을 통제하지 못하면, 특히나 남자아이들의 호기심에 총은 곧잘 고장 났다. 네 대 가운데 절반만 돌리거나 아예 손님을 못 받은 날도 있었다. 아이들은 풀이 죽어 돌아갔다. 고장이 잦고 탄창을 매번 채워야 하는 비비탄은 일하기 까다로웠다.
“영점이 왜 안 맞는 거예요?”
야구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따졌다.
“표적에 집중해서 천천히 쏘아보세요.”
진화는 그렇게밖에 해줄 말이 없었다.
“이거 K2소총이지?”
남자가 옆자리 친구를 쳐다보며 말했다. 군대 추억을 소환하며 총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손님, 영점 조절은 완료된 상태니 다른 건 건드리지 마세요.”
진화가 전달받은 내용 그대로 전했다. 잠금장치나 개머리판 조절을 손님에게 맡기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다.
“안 되니까 그러죠. 못 믿겠으면 직접 쏴보세요.”
남자가 어이없다며 따졌다. 남자가 진화에게 총기를 내밀었다. 그날따라 표적이 안 맞는다는 손님이 많았다.
“한번 쏘아보세요. 되는지 보게. 그리고 서른 발 맞아요? 아닌 거 같은데……”
이렇게 말하는 손님도 있었다.
서너 시간 동안 쉴 틈 없이 손님을 치러내고, 한산해진 시간에 꾸안꾸가 말했다.
“오늘 왜 이렇게 진상이 많아요? 전에 내가 있을 땐 안 그랬는데.”
그 말에는 여러 뜻이 담겨있었다.
“아무래도 좀 그러네요.”
진화는 짐작되는 이유가 있었지만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꾸안꾸는 진화보다 6개월 먼저 들어온 대학생 한시직이다. 꾸민 듯 안 꾸민 듯 패션이 멋스러워 여주가 지어준 별명이다. 꾸안꾸와 친구들은 클레이나 권총 사격장에 더 자주 배치되었다. 진화는 손님이 없을 때 대학생들이 태블릿으로 과제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기사 자격증을 준비하는 걸로 봐선 졸업반인 듯했다.
“그런 거 같죠? 좀 무시하는 듯한.”
꾸안꾸의 말에 진화는 심란해졌다. 자녀뻘인 사수의 은근한 비하가 신경 쓰였지만,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나이 든 여자라서 얕보는 걸까요?”
진화는 꾸안꾸가 생략한 단어를 끄집어내 물었다. 꾸안꾸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된다고 생떼를 쓸 땐 보통 어떡해요? 손님과 맞서서 싸울 수도 없고……”
진화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이는 어려도 진화의 사수였다. 먼저 다가가는 어른스런 태도를 보이고 싶었다.
“저 같은 경우는 바로 말하는 편이에요. 장난감 총이라고. 군필자들은 무슨 말인지 알거든요.”
진화는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오기 전 중년 여성들이 왜 매번 일을 그만두었는지. 손님이 뜸한 틈에 여주와 류정이 일하는 곳으로 가서 속상함을 달랬다.
“아, 힘들다……”
진화가 한숨을 내뱉었다.
“오늘따라 더 그러네요. 류정 씨도 힘들었죠?”
여주가 류정에게도 동의를 구하는 투로 물었다.
“전 안 힘든데요.”
류정이 뭘 이 정도로 힘드냐는 투로 말했다.
“하긴,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 예전엔 훨씬 더 힘들었거든요.”
여주는 이전 직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을 돌렸다. 진화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어떤 일을 해왔기에 예전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걸까.
진화가 의자에 앉자, 여주가 손님이 계신다고 귓속말했다. 진화가 앉은 채 여주를 건너다보았다.
“그럼 제가 서 있을게요. 좀 앉아 있어요,”
여주가 진화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손님 있을 때마다 서 있으면 근무시간 내내 서 있는 날도 있었다. 손님이 끊임없이 들이닥치니 연차가 있는 한시직들은 설명이 끝나면 앉아 쉬었다.
“화장실 좀 다녀와요”
여주가 류정의 팔을 살짝 당기며 말했다.
“안 가고 싶어요.”
류정이 귀찮은 듯 대답했다. 화장실에 가라는 말은 손님을 벗어나서 쉬라는 뜻도 포함되었다. 네가 가면 그다음은 자기 차례라는 의미까지도.
“그래도 가요. 좀 쉬기도 하고.”
여주는 다녀오라고 한 번 더 권했다.
“안 가고 싶다는데 왜 그러세요!”
류정이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여주가 자기는 다녀와야겠다며 바쁘게 뛰어갔다. 여주는 본인이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상대에게 다녀오라고 말했다. 진화는 나중에야 그걸 알고 여주가 화장실에 가라고 하면 먼저 다녀오라고 말했다.
진화는 급하지 않아도 그냥 쉬려고 화장실에 가는 편이었다. 집 밖에서 타인과 격리된 혼자만의 공간은 화장실뿐이니까, 틈만 나면 다녀오려고 애썼다. 손님이 몰려들면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다. 참을 만큼 참다가 정 급하면 뛰어서 다녀와야 했다.
힘들지 않다는 류정은 사격장에서 일한 지 두 주 만에 지독한 목감기에 걸렸다. 목이 갈라지고 잠겨서도 손님이 오면 맨 먼저 나가 안내를 도맡았다.
“천성이 부지런한 사람인가?”
여주가 류정을 그렇게 평했다. 한 발만 늦추면 몸이 편할 텐데. 요령이 없는 건지, 타고난 성실함인지 늘 손님에게 먼저 다가갔다. 일 이외는 무관심했고, 사적인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오로지 일에만 에너지를 집중했다.
류정과 달리 진화는 힘에 부쳤다. 퇴근 후에는 기절하다시피 쓰러져 잠들었다. 간간이 앓는 소리를 냈고, 이상한 꿈에 시달리다 깨어난 적도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운전하는 꿈이었다. 눈을 뜨려 해도 눈꺼풀이 꼼짝하지 않았다. 고개를 흔들고 허벅지를 꼬집어도 소용없었다. 차는 정속으로 달렸다. 누군가 들이받기라도 한다면 끔찍한 순간이었다. 눈두덩을 비비기 시작했다. 눈을 뜨자마자 입으로 숨이 훅 들어왔다. 숨을 들이마신 것인지, 빠져나갔던 영혼이 돌아온 건지 알 수 없었다.
후훅, 숨이 몸 안으로 들어오고서야 완전히 눈을 떴다. 정말 영혼이 존재하는 걸까. 몸이 잠드는 동안, 영혼은 어디를 싸돌아다니는 걸까.
진화는 타이레놀을 물로 넘겼다. 한시직이 된 뒤로는 일하는 저녁마다 진통제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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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표는 이삼일 전에 단체 채팅방에 올라왔다. 사대마다 한두 명씩 들어갔고, 매표소는 직원이 담당했다. 실탄인 공기소총은 직원이나 연차 높은 한시직이 배치되었다.
신입 한시직은 비실탄 사격장에 배정되었다. 스크린 사격장은 매표소 로비에 있어 이용객 안내도 겸했다. 바쁠 땐 눈치껏 일을 찾아서 했다.
그리고 또 하나, 모의 전투는 덤이었다. 예약이 들어오면 서너 명으로 전투조가 배정됐고, 체험이 끝나면 각자의 사대로 복귀했다. 헬멧을 씌우고 조끼를 입히는 단순한 일이었는데 손이 많이 갔다. 총을 쥐여 주고 파우치의 전원을 켜서 조끼 뒤에 부착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하나씩 빠트리기 일쑤였다. 초등 고학년만 되어도 진화보다 커 헬멧을 씌우려고 까치발로 끙끙대야 했다. 손이 무딘 진화는 헬멧의 턱받침을 두 손가락으로 잡고 버클을 조이는 단순한 일도 지체했다. 버클을 돌리다가 턱살을 꼬집어 손님이 비명을 내질렀다. 직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눈 밖에 나는 실수가 속출하니 진화도 답답했다. 진화가 헬멧 뒤 버튼을 조이지 않아, 아이가 흘러내리는 헬멧을 붙잡고 뛰어다니기도 했다.
직원이든 아니든, 연차가 있든 없든, 모두 야외 모의 전투를 꺼렸다. 반면 체험객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불굴의 투지를 불태웠다. 특히 태권도 학원생들은 얼마나 전투력이 좋은지 전투를 돕기만 했는데도 패잔병보다 더 지쳐버렸다.
“왜 나한테만 전투 체험이 오는 거죠?”
햇빛 알레르기로 고생하는 여주가 진화에게 자주 투덜댔다.
“돌아가면서 시키겠지요. 크게 의미 두지 말아요.”
진화가 시무룩한 여주에게 힘내라고 덧붙였다.
“나도 그렇게 위로하는 날이 오면 좋겠네요.”
여주가 뿌루퉁하게 말했다.
한가한 오후 시간에 관리자가 주의 사항을 전달했다. 여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자기만 전투 체험에 자주 나간다고 하소연했다.
관리자는 신입을 골고루 배치했고 특별한 의도는 없다고 했다. 여사님들이 다른 분보다 배우는 속도가 느리니 연습해 보면 좋지 않겠냐고도 했다. 관리자는 여주와 진화를 여사님으로, 류정은 다른 분으로 불렀다. 이로써 2분기 한시직들의 업무력 서열이 정리되었다. 류정이 확실히 선두로 앞서갔다. 여사들 사이의 순위는 불명확한 상황에서 여주가 쐐기를 박았다.
“이분이 더 적게 했어요.”
여주가 두 손으로 정중하게 진화를 가리켰다. 혹시라도 여주에게 전투 업무를 몰아줄 계획이라면 애당초에 접으라는 뜻이었다. 진화는 내심 놀랐으나 태연한 척 고개를 주억거렸다. 앞에서는 무심한 듯 넘겼지만 돌아가서는 근무표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진화가 여주보다 두어 차례 적게 한 건 사실이었다.
여주의 말이 효력을 발휘했는지 그다음부터 업무는 순환하며 배당됐다. 건의 사항이 반영되는 걸 보니 합리적인 곳이라고 여주는 말했다.
여주가 체험에서 빠진 대신 진화가 이틀 연속 투입되었다. 한낮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날이었다. 야외 전투장에서 땀에 흠뻑 젖도록 일하고 나서 VR 체험장에서 헤드셋을 씌웠다. 진화의 눈높이가 가슴팍에 닿는, 키 큰 남학생이 헤드셋을 빼앗다시피 했다.
“제가 알아서 쓸게요.”
남학생은 얼굴을 찡그린 채 헤드셋을 썼다. 진화는 눈 흘길 힘도 없어 멍하니 남학생을 지켜봤다.
지나고 보니 그때 확실히 짚어둔 게 현명했다. 꽁하게 넘어가면 업무에 대한 불만은 쌓여갔을 것이고, 한시직들의 관계도 빠르게 균열했을 것이다.
여주는 또 다른 문제도 지적했다. 두 사람이 한 조로 근무할 때 팀 배정의 형평성 문제였다. 확실히 여주는 문제를 드러내는 데 재능이 있었다. 여주가 건의한 이후 한 달쯤 지났을까. 퇴근을 한 시간여 남기고 한가한 틈에 여주가 속에 묵혀둔 말을 꺼냈다.
“내가 가만히 보니까 말이죠. 진화 씨, 공단에 아는 사람 있어요? 혜택을 받는 거 같아서요.”
진화가 자주 능숙한 선임과 팀이 된다는 말이었다.
“진화 씨는 지난번부터 직원과 팀이 됐잖아요.”
능숙한 팀원은 일을 수월하게 했다. 총기 고장을 즉시 파악해 수리하니 고객 불만이 줄고 업무 부담도 줄었다. 다만 사격장을 오가며 일하다 보니 혼자 일해야 하는 시간이 길었다. 진화는 어이가 없었지만,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고 이쪽에 아는 사람도 없다고 구차하게 해명했다.
여주가 품은 의혹은 퇴근 직전에 해소됐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여주에게 데스크 직원이 퇴근하라며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백여주 여사님과 퇴근하세요.”
직원은 분명 여주를 쳐다보고 말했다. 여주를 진화로 안 것이다. 진화와 눈이 마주친 여주가 머쓱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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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 헤드셋을 쓰자 우주가 펼쳐졌다. 밤낮 없이 어두운 걸 보면 태양과 거리가 먼 행성이다.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 투명한 석영이 촘촘하게 박힌 곳. 지평선이 서너 걸음 앞에 보일 정도로 작은 행성이다. 발밑을 제외한 사방은 오로라와 별을 실컷 볼 수 있는 밤하늘이다. 오로라는 푸른 점과 붉은 점의 집합체로, 멍처럼 얼룩져 보였다. 진화는 이리저리 몸을 틀어봤다. 팔과 몸통 일부만 겨우 보였다.
손에 준 총 두 자루가 진화가 가진 전부였다. 총을 든 이상 싸울 수밖에 없다. 총을 내던질 용기도 없었다. 빈손으로 할 수 있는 건 없다. 우주 벌레가 진화를 향해 돌진했다. 쏘고 또 쏘아도 계속 날아들었다. 싸우기 싫어도 어쩔 도리가 없다. 진화 편은 셋이다. 진화와 거울에 비친 진화와 진화의 그림자. 생명체는 진화뿐인 행성이다.
진화가 손님이 되고 여주와 류정이 돌아가면서 게임을 설명했다. 진화는 정말 손님이 된 것처럼 게임에 빠져들었다. 가상현실은 처음이라 신기했다. 우주 벌레가 진화를 향해 돌진할 때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놀러 온 거 아니잖아요!”
진화는 총을 내려놓을 자리를 찾아 손을 더듬거렸다. 조종장치를 내려놔야 헤드셋을 벗을 수 있는데 앞이 보이질 않으니, 양손을 허공에 휘두를 뿐이다. 직원의 잔소리는 이어졌고 진화는 여전히 가상현실 속이다. 헤드셋을 벗겨주지 않으면 진화는 영락없는 우주 쓰레기였다. 세상에 오로지 혼자인 느낌을 교무실 이후 또다시 느꼈다. 차해의 아버지로부터 고소당한 뒤, 동료 교사들은 진화에게 말을 건네기도 조심스러워했다. 평범한 일상의 공간이 공포로 변했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지겹도록 나른한 일상이 그리울 정도였다.
돌이켜보면 교무실은 외딴 행성과 다를 바 없었다. 상대는 우주 벌레처럼 떼로 몰려들었다. 교감과 교장, 학생부장, 피해 학부모까지 진화를 탓했다. 구조선이 날아다녀도 진화만 피해 갔다. 싸움을 걸어오니 안 싸울 도리가 없었다. 자신의 편은 오로지 자신뿐. 진화는 외로운 싸움을 했다. 떼로 덤비는 상대에 맞서려면 집중력이 필요했다. 싸우는 순간만큼은 잡념이 사라졌다. 목숨은 두 개. 세 번 죽으면 게임 오버. 전투가 끝나면 진화는 축 늘어진 그림자를 쳐다봤다. 혼자인 행성에서는 그림자도 반가웠다. 게임을 다시 하겠냐는 문구가 나오지만, 헤드셋을 쓴 채 손님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끝내야 한다.
진화는 투명한 석영에 비친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금속 재질의 로봇 형상이 낯설었다. 거울 안에서 진화는 의지대로 움직였다. 헤드셋을 쓰면 자신을 볼 수 없으니 거울 속 모습이 전부다. 거울 속 자신이 진짜라면 어떨까. 진짜여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널 몰라? 헤드셋 쓰니까 강해진 거 같지? 피할 생각만 하는 네가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진화는 공격하는 말로 자책했다.
진화가 견디지 못하고 교단을 뛰쳐나왔을 때 남편은 호구가 따로 없다고 빈정댔다. 때려치울 거면 교육청에 투서라도 넣으라고. 들으라는 수업은 안 듣고 얻어 처맞은 게 학생 탓이지, 선생 탓이냐고.
수업 시간에 학생이 교실을 이탈하는 건 비상식적이지만 학교에선 흔해 빠진 일이다. 어딜 다녀오겠다고 허락을 구하면 예의 바른 녀석이다. 어디 가냐는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면 그나마 낫다. 호통을 쳐도 내빼는 녀석들이 부지기수. 반장을 따라 보내도 봤지만, 반장이 수업을 듣고 싶다는데 별수가 없었다. 차해는 배를 움켜쥐고 벌떡 일어났다. 창백한 얼굴로 진화를 바라보길래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화장실에 가려니 했다. 같은 시각에 다른 반 학생이 교실을 이탈한 것까지 알 도리가 없었다.
차해는 수업 시간에 화장실에서 발가벗겨져 폭행을 당했다. 조사관이 파견되고 학교폭력위원회가 열렸다. 학부모는 가해 학생뿐 아니라 교사의 관리 부실을 지적했다. 진화는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렸다. 수업 시간에 일어난 모든 사고는 교사의 책임이다. 교장실에 여러 번 불려 갔다. 교장보다 나이 많은 학생주임이 훈수를 두었다. 학생주임은 “선생님 왜 그러셨어요?”를 반복하며 피해자 부모와 합의를 독촉했다. 가해 학생과도 돈으로 합의를 본 차해 아버지는 담당 교사에게 천만 원을 요구했다. 교장은 진화가 합의금을 건네고 조용히 넘어가기를 원했다. 진화는 억울했다. 교육청에 전화해 익명으로 상담해 보니 교내에서 해결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문제를 키우지 말고 알아서 해결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진화는 적금을 깨고 대출받아 천만 원을 모았다. 돈으로 뭐든지 되는 세상이구나 자조하며 이렇게라도 차해의 상처가 낫기를 바랐다. 하지만 돈으로 다 되는 건 아니었다. 진화는 학생들과 눈을 마주치기 힘들었다. 수업 시간에도 벽을 보고 설명했다. 계산이 끝난 상황이니 당당하지 못할 것이 없는데 부끄러웠다. 천만 원은 하루에 얼마씩 진화를 갉아먹었다. 교사로서 지켜야 할 직업윤리와 독서로 다져온 지성, 균형 잡힌 합리적 사고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진화는 비겁함을 들킬까 봐 두려웠고, 그걸 기막히게 알아챈 차해가 진화의 곁을 맴돌며 소매를 걷어 학폭이 남긴 흉터를 보여주었다.
차해는 진화를 유독 잘 따랐던 학생이었다. 진화도 구석 자리에서 잠만 자는 차해가 신경 쓰였다. 교실은 생각보다 동물의 왕국이다. 사람이 모이면 생기는 알력이 교실에선 좀 더 원초적으로 드러난다. 진화는 사실 질투를 불필요한 감정으로 여겨왔다. 남을 헐뜯기보다 스스로를 돌아보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일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요즘은 1등급이 부와 외모, 재능과 통솔력까지 독점한다. 그들은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소수에 집중된 권력을 분산시킬 질투나 견제의 힘은 사라졌다.
저소득층 편부모 가정에서 자란 차해는 관심 밖에 머물렀다. 진화라도 그 아이의 편이 되어주고 싶었다. 차해가 진화에게 버릇없이 굴어도 애정의 표현으로 받아들였다. 동료 교사들이 그 또한 차별이라 조언해도 기를 살려주려 애썼다. 윤리 교사와 친하다는 차해 말이 사실이냐고 묻는 학생들에게도 차해를 두둔했다. 빽 하나 없는 아이에게 교사의 뒷배가 힘이 될 것 같아서였다. 늘 풀 죽어 있던 차해는 합의금을 뜯어낸 뒤 인사를 더 밝게 하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교무실을 들락날락하며 진화를 찾았다. 그리고 얼마 뒤, 차해 아버지에게서 추가 합의금을 요구하는 문자를 받았다. 차해가 다니는 정신과에서 상담 치료 처방이 나왔고 돈이 더 든다는 내용이었다.
진화는 기간제 경력으로 일자리를 금방 구할지 알았다. 남편과 헤어지기로 마음먹고, 가정법원을 들락날락하고 이사를 하느라 일 년 반 정도를 쉬었고, 다시 학교에 서류를 넣었지만, 단 한 군데도 소식이 없었다. 뭐가 문제인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력서가 성의 없어 보인 걸까. 특별한 경력이 없어서일까. 자신이 별 볼 없는 사람이라는 걸 다들 알아채 버린 것일까. 겉으로는 자상하고 차분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끓는 화를 누르는 가식을 들킨 걸까.
진화는 왜 겨우 천만 원으로 무너진 걸까. 크다면 큰 금액이지만, 진화는 그보다 비싼 아파트에 거주하고, 담보 대출하면 당장이라도 구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그 돈 때문에 무너진 걸까. 진화는 원인을 찾아 과거를 헤집었다. 기계를 분해하듯 자신을 뜯어보고 분류했다. 쓸모없는 것을 버리고 쓸만한 행동만 취했다. 한동안은 다른 사람처럼 행동했다. 말수를 늘리고 앞장서 걸었으며, 일부러 호탕하게 웃었다. 경청할 때는 눈빛을 가다듬고 다부진 표정으로 상대의 말을 빠르게 받아쳤다.
물론 남이 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타고난 성격이 쉽게 바뀔까. 새로운 행동에 집중하다 금방 딴생각에 빠져 행동이 엇나갔다.
“저기요?”
여주가 진화의 팔을 툭 건드리며 불렀다.
“손님 오실 거 같아요. 이러다 놀러 왔냐는 소릴 또 듣겠어요.”
여주가 진화의 손에서 조종장치를 가져가 테이블에 놓으며 속삭였다. 진화가 헤드셋을 내려놓으며 손님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들어오자마자 저기로 가더라고요.”
여주가 화장실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화장실 갔다는 손님은 다른 출구를 찾았는지 매표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5
비 오는 토요일 오전은 손님이 거의 없다. 휴일 아침부터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뚫고 와서 방아쇠를 당기고 싶다면, 그 상태가 온전하다고 보긴 어렵다. 그렇더라도 일하는 처지에서는 한 사람이 아쉬웠다. 직원 수가 손님보다 많으면 민망했다. 파마머리가 부스스하게 풀리고 코 피어싱 위치까지 똑같은 커플이 정문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안내원의 설명은 제대로 듣지 않고 키오스크 자판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려 실탄 사격 2회를 신청했다. 말은 거의 없었지만 움직임이 닮은 남녀였다. 접수대 앞에서 주머니를 뒤지는 모양, 고개를 돌리는 속도, 장전하는 손 모양까지 비슷한 리듬이었다.
그들이 떠나자 다시 조용해졌다. 진화는 심심해서 류정을 건너다봤다. 류정은 핸드폰만 들여다본다. 진화가 가까이 다가가자, 류정이 두 걸음 물러났다. 멀찍이 떨어져 말을 걸자, 조용해서 대화가 다 들릴 것 같다며 조심스러워한다. 손님이 없는 로비는 적막하다. 진화는 포털 뉴스를 읽기 시작했다. 세계 곳곳에서 터지는 사고 소식을 보며, 자신의 안온함을 실감했다. 안전함에서 오는 평온은 애써 의식하지 않으면 느끼기 어려운 감정이다.
할리우드에서 차가 돌진해서 마흔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운전자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는 목격자 증언이 나왔다. 경찰은 운전대를 잡은 남성이 의식불명이라고 했다가, 이후 상황을 알 수 없다고 말을 바꿨다. 경찰은 총격을 가한 히스패닉계 남성을 공개 수배했다. 한국과 달리 세계 곳곳에서 총기 사고가 비일비재했다. 총기가 사용 중인 사격장에서 이런 뉴스를 읽으며 짜릿함을 느꼈다.
진화는 밖에 나가 텅 빈 주차장을 바라보며 빗소리를 듣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와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손님이 하나도 없는 사격장은 너무 조용해 VR 헤드셋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쿵쿵 울릴 정도였다.
“아, 불편해.”
류정의 혼잣말이 들렸다. 진화가 류정을 쳐다보았다.
“손님이 너무 없는 것도 불편해요.”
류정이 맥없는 미소로 말했다. 진화는 그 말이 반가웠다. 좀처럼 먼저 말을 걸지 않는 류정이니 더 그랬다.
“난 좋아요. 어제는 넘 다리가 아팠거든.”
진화도 가시방석이었지만 편하게 쉬자고 말했다. 비가 멈추고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치면 손님이 몰려들 게 뻔하니까.
녹색 조끼를 입는 대학생 둘이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시험 기간인지 한가한 틈을 타서 태블릿으로 과제를 했다. 두 사람은 친구 사이였는데 다른 사람과는 말을 섞지 않았기 때문에 진화네와 친해질 틈이 없었다.
한시직은 출퇴근 시간이 다들 달랐다. 한시직에 여섯 시간 급료를 주면서 사격장을 여덟 시간 운영하려고 출퇴근 시간을 다르게 한 것이다.
“어머님 몇 시 퇴근이세요?”
직원이 진화를 어머님이라고 불렀다. 딸아이와 무관한 일터에서 들으니 낯설었다.
진화는 출근 첫날, 직원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물은 적이 있다. 한시직이 뭐라 불릴지도 궁금했지만, 대화가 거기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직원은 그냥 주임이라 부르라고 했다. 누가 직원이고 누가 아닌지를 일러주지는 않았다.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도 없었기에 한시직들은 눈치로 구분했다. 남색 티셔츠는 직원복으로 추측됐다. 시간이 지나자 기준이 분명해졌다. 매표소에 배치되면 직원이 확실했다. 매표 직원은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 한결을 매표소에 앉혀놓고 먼저 나갔다. 청소 미화원이 유난히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도 직원이었다.
한시직은 모두 녹색 조끼를 착용했고, 공통된 호칭은 없었다. 결원이 생길 때마다 한 번씩 오는 아르바이트생도 녹색 조끼를 입었기에, 한시직인 더 확실한 근거는 출근 명부였다. 단체 대화방에 근무표가 올라오고, 출근 명부에 사인하면 한시직이었다.
호칭에 대한 합의된 의견을 찾지 못했지만, 약간의 변화는 있었다. 한결과 얽힌 사건 때문이었다.
진화와 여주는 차에서 점심을 먹고 휴식을 취했다. 한낮 기온이 37도까지 올라가는 폭염이 계속되자, 서둘러 식사를 끝내고 사격장 대기석에서 수다를 떨었다. 점심시간에도 에어컨을 끄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한참 동안 떠들고 있을 때, 창고에서 한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이 창고인지는 그때야 알았다. 도핑실에서 쉬던 한결이 찜통더위를 피해 창고로 자리를 옮긴 것이었다. 두 사람에게 출입이 가로막힌 한결은 어쩔 수 없이 그 안에 갇혀 있었다. 진화는 자신이 한 말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어머님이라는 호칭이 거북하다고 했었다. 내가 제 어미도 아닌데 왜 마음대로 부르냐고.
그날 이후 한결은 한시직을 이분 혹은 저분, 이라고 불렀다. 봉사자들이 새로 오면 “큐알 코드는 반드시 이분에게 확인하라”는 식이었다.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하는 선은 계속 어머님이라고 불렀다. 그럼 “네가 내 아들이네”라고 농담하다 여주가 지은 별명이다. 처음엔 아들로 부르다가 다 큰 아들은 징그럽다며 영어로 선이라 불렀다.
호칭은 부르는 사람의 것이기도 하지만 불리는 사람의 것이기도 하다. 도대체 뭐라고 불러줄까를 묻는 주임도 있었다.
“뭐라 불러드릴까요? 여사님?”
“안전관리원은 어떨까요?”
“안전관리원은 따로 있어요. 권총이나 클레이 가르치는 분들 아시죠? 한시직은 안전관리원을 보조하는 업무를 하는 분이죠.”
계약서에 명시된 직종은 ‘안전관리원 보조’였다.
“차라리 이름으로 불러주시면 어떨까요?”
“제가 여사님들 이름을 어떻게 다 기억해요?”
직원들끼리는 한시직을 뭐라 부를지 궁금했다. 그러다 우연히 듣게 됐다.
“한시직들 있잖아?”
“한시직 누구? 대학생들?”
“아니, 2분기 한시직들.”
“키 큰 이모님? 아님, 커트 머리에 안경 쓴 거기? 아, 후덕한 아줌마?”
진화에게 한시직이 한심직으로 들렸다. 자신이 왜 그런 소리까지 듣게 됐는지 한심해라, 라며 한숨을 쉬었다.
2분기 한시직 세 사람은 대학생 둘을 포함한 선임자에게 교육받았다. 꾸안꾸는 진화에게 직접 설명을 시켰다. 자녀뻘인데도 긴장되어 목소리가 떨리고 말이 꼬였다. 설명을 다 듣고 수정할 부분을 짚어준 뒤, 될 때까지 반복시켰다.
이에 비해 한결은 엄격하지 않았으나 가르친 대로 하지 않으면 예민하게 굴었다. 대부분 교육은 한결이 맡았다. 대학생들보다 경력이 길었고 근무표 외 업무도 두루 소화했다. 두 사람분 일도 너끈해, 손님이 몰리는 곳마다 투입됐다. 매표소 업무도 예외는 아니었다. 직원이 점심을 먹으러 일찍 자리를 비우고 늦게 복귀할 때, 통화가 길어질 때, 화장실 갈 때도 한결을 대신 앉히고 다녀왔다. 돈이 오가는 매표소를 맡긴다는 건 신뢰의 표시였다.
진화네에게 업무를 가장 많이 가르친 사람도 한결이었다. 한결은 매표소 두 곳을 쉴 틈 없이 오가며 일했다. 총기 수리도 맡았고, 모의 전투에서 사용한 수건과 장갑을 세탁해 건조기에 돌리고 개켰다. 손님들이 몰리는 사대를 돕고, 한시직들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배분했다. 한시직 업무는 단순했지만 총이 고장 나면 속수무책이었다. 갑작스레 투입되어도 숙련도가 부족해 완벽한 대처가 어려웠다. 그러므로 그날 한결과 류정의 다툼은 예정된 일이었다.
그날따라 비비탄총이 잔고장이 잦았다. 총알이 표적을 자주 빗나가 손님들의 항의가 이어졌다. 탄이 나가지 않아서 퇴장시킨 손님의 탄창을 보면 탄이 남아있기도 했다. 한결이 있을 때는 괜찮다가 없으면 또 문제가 생겼다.
탄을 다 쓴 뒤와 공탄은 소리가 달랐다. 공탄 음은 둔탁했다. 서너 번 공탄이 나가면 사격을 멈추게 하고 공기압을 빼주고 15초 기다려라. 너무 빨리 쏘지 않도록 해라. 공기가 빠지면 단호하게 그만두게 하라. 힌지를 뒤로 빼면 총이 분리되니 절대로 만지지 말라. 한결의 지시 사항은 명료했지만, 총이 사람을 가리는지 한결 앞에선 잘 나가다가도 류정이 하면 도통 말을 안 들었다.
“그러니까 시키는 대로 했어요?”
한결은 답답하다는 듯이 계속 안 된다는 류정에게 쏘아붙였다.
“안 되니까 안 된다고 하죠. 되는데 안 된다고 할까 봐요?”
류정도 지지 않고 조곤조곤 따졌다.
“그럼, 공기소총 사대 맡아요. 내가 비비탄 할 거니까.”
한결이 류정과 업무를 바꾸자고 했다. 공기소총은 실탄이라 신입에게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업무였다. 실탄이라는 무게감은 크기만 업무 부담은 적었다. 14세가 넘는 손님만 대하니 우선 편했다. 그렇더라도 총기 지식이 없다 보니, 오류가 생기면 대응이 어려웠다.
그러면 또 한결에게 뛰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부하가 걸린 한결이 폭발했다.
“혼자서 못 하면 못 한다고 했어야죠!”
한결이 버럭거리며 언성을 높이자, 손님들이 눈이 동그래져 쳐다봤다.
“방법을 묻는 거잖아요.”
류정도 기분이 상하긴 마찬가지였다. 모르면 언제든 물어라, 문제가 있으면 해결해 주겠다더니 류정은 당황스러웠다. 한결이 화를 이기지 못하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진화와 여주에게 공기소총이나 비비탄을 완벽하게 할 수 있는지 물었다. 여주가 “할 수는 있지만……” 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솔직히 완벽하다는 단서가 붙으면 부담스럽다. 총기를 모르니 돌발 상황에 대처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다루는 법을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았고 알려준들 배울 자신도 없었다. 한결처럼 숙련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으로선 손님에게 총기 사용법을 설명하고 주의 사항을 전달하는 정도가 다였다.
일단은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진화가 공기소총 사격장에 투입되었다. 실탄을 만질 기회여서 진화가 하겠다고 나섰다. 류정은 가라앉지 않는 화를 삭이며 한가한 틈을 타 한결에게 따져 물었다.
“손님들 앞에서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거예요?”
류정은 차분하게 옳고 그름을 따지려 했으나, 다툼의 속성상 차분하기는 어려웠다. 매표소를 지키던 직원이 류정에게 다가가 상황을 물었다. 류정은 상황이 복잡해졌음을 직감했다. 직원이 개입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대충 상황을 마무리하고 나중에 한결에게 직원이 끼어들지 몰랐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 이후로 한결에게 도움을 구하는 횟수는 줄었지만, 급할 때는 한결 말고 대안이 없었다.
이후에도 한결과 류정은 두어 번 언성을 높였다. 한결이 류정에게 무례하게 군 때문이다. 한결은 진화나 여주에게 그런 적이 없었다. 류정에게 한결이 무례했다면 진화에게는 선이 그랬다. 선은 류정과 여주에게 무례하지 않았다.
다툼의 여지를 준 건 가르치는 사람마다 기준이 달라서였다. 안경을 쓴 고객의 보안경 착용을 두고 류정과 한결이 언쟁을 벌인 적이 있다. 평소엔 안경 위에 보안경을 씌우지 않고 진행했는데, 어느 날 한결이 보안경을 반드시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경 위의 플라스틱 보안경이 흘러내려 불편했다. 예전에는 안 썼는데 왜 강요하냐고 손님이 강하게 불평하기도 했다. 흠집이 많고 흐릿해서 가늠쇠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불만도 이어졌다. 진화는 손님을 설득하다 안 되면 내버려두었다. 실랑이가 귀찮아서 도중에 벗어도 모른 척했다. 한결이 그 모습을 보지 않기만을 바랐다. 한결이 손님 앞에서 진화를 나무라기도 했기 때문이다.
안경 위에 보안경을 쓰느냐 마느냐 논란을 한 번에 정리한 사람은 류정이었다. 류정이 주임에게 안경 쓴 고객은 보안경이 필요 없다는 답변을 얻어냈다. 한결은 더 이상 보안경을 고집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다가 태도를 바꾸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VR 게임의 난이도 설정 또한 눈치가 필요했다. 보통과 쉬움, 이렇게 두 단계뿐인데도 머리싸움을 해야 했다. 게임 좀 하는 아이에게 쉬운 단계를 설정했다가 게임기를 독점하면 대기 줄이 한없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손님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이다. 한결이 바쁠 때는 묻지 말고 보통으로 통일하라고 일렀다. 그래도 유료 게임을 최대한 즐기려는 이용자들은 쉬운 단계를 원했다. VR 초보라면 적응하다가 게임이 끝났기에 단체 손님이 없을 땐 쉬운 단계로 해주었다. 류정이 성인에게 쉬운 단계를 설정하자마자 한결이 다급하게 달려와 조종장치를 빼앗아 난이도를 재설정했다. 나중에 따로 주의를 주면 될 얘기였고, 굳이 손님 앞에서 할 필요가 없었다. 진화는 한결이 무례하다고 여겼지만 끼어들지 않았다. 성인들에게 보통 단계를 설정했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선이 진화에게 따지듯 물었다.
”이분은 왜 어려운 걸 하고 계세요?“
손님이 어렵다고 투덜대던 중이었다. 선이 손님에게 쉬운 단계로 바꾸겠냐고 물은 뒤 단계를 낮춰주었다. 당황한 진화는 손님이 선택한 난이도라고 우물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선이 신청받은 단체라 더 신경 쓰는 모양이었다. 진화 또래의 엄마와 자녀로 이루어진 단체였다. 자녀들은 딸 또래였다. 핸드폰에 빠져 지내는 딸과 달리 활기가 넘쳤다. 서글프기 전에 마음을 추슬러야 했는데 실패했다. 진화가 불편했는지 엄마들이 선 주위에 몰려들었다. 진화가 손님 응대에 실패했다고 이르는 것 같아 난처했다. 진화는 마음이 불편해지면 적절한 감정인지 따져보는 습관이 있었다. 속 좁은 감정이라면 모자란 자신을 탓했고, 상대방의 문제라면 완곡하고 솔직하게 표현했다. 대부분은 판단이 서지 않아 덮어두고 사그라들기를 기다렸다.
일하다 쌓인 스트레스는 뒷담화로 풀어내는 게 최고였다. 막무가내인 손님부터 차례로 도마에 올렸다. 언제부턴가 류정이 입을 다물었다. 류정 또한 불쾌한 일을 겪을 텐데 속내를 내비치지 않았다. 대화 시간 자체가 부족했고, 한결이 창고에서 불쑥 나온 뒤로 누가 들을까 조심스러웠다.
세 사람이 대화할 시간은 사무실에 서명하러 오갈 때와 퇴근하고 주차장으로 가는 짧은 길이 다였다. 주차장에 드문드문 사람들이 있었지만 터지기 직전까지 부푼 불만을 잠재울 수 없었다. 진화는 선이 손님 앞에서 컨트롤러를 빼앗거나 지적하면 참기 힘들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진화는 거의 울분을 토했다. 여주는 가만히 귀 기울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세 사람은 힘든 지점이 달랐다. 진화는 선임의 지적이나 손님의 무례함에 상처받았다. 여주는 속내를 툭 털어놓지 않았지만, 류정에게 불만이 있다고 넌지시 얘기했다. 류정은 팀워크가 별로였다. 여주나 진화와 한 팀이 되어도 자기 속도를 고집했다. 자신의 흐름대로 일하기를 원했고, 팀원을 걸리적거리는 대상으로 취급했다.
진화도 처음엔 마찬가지였다. 손발 안 맞는 팀원보다 혼자가 편했다. 어느 정도 손에 익으니 여유가 생겼고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진화의 일머리가 한 단계 진화한 것이다. 그것을 알려준 이는 대학생 한시직인 꾸안꾸였다. 그는 다음 차례의 손님과 이용 횟수, 특이 사항까지 공유했다. 처음에는 일을 떠넘기려는 건가, 혼자 알면 될 사실을 왜 알려주나 했지만, 진행 상황을 공유하니 동선이 꼬이지 않고 손님을 받아낼 수 있었다. 나이는 어려도 일에는 선배인 만큼 배울 게 있었다. 여유가 생겨야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선배랍시고 권위적으로 대하는 건 최악이었다. 가르쳐 준답시고 무시하는 선에게 불만을 토로하면 여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서 “그게 왜 기분이 나빠요?”라고 물었다. “난 책임 의식이 없어서 그런가? 그나저나 그게 어떤 느낌이에요?”라고도 했다.
손님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오후. 세 사람은 한결이 세탁기에서 꺼내온 수건과 장갑을 개켰다. 한결이 사격장에서 9년이나 일했다고 했고 여주가 대단하다고 추켜세웠다. 사격 솜씨가 빼어날 것 같다니 한결이 전혀 모른다고 했다. 세 사람의 질문 세례를 받던 한결이, “저도 여러분과 똑같은 알바예요”라고 말했다. 더 이상 질문하지 말라는 말처럼 들렸다. 당신들이나 자기나 마찬가지여서 돕는 일은 자기 임무가 아니라는 의미도 있었다.
“9년이나 일했는데도요?”
여주가 눈동자가 동그래져서 물었다.
“네, 한시직입니다.”
한결이 입꼬리에 힘을 주고 말끝을 경쾌하게 올렸지만, 어색하고 일그러져 보였다.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니고요?”
진화가 물었다.
“네, 여러분과 똑같아요.”
한결이 대답했다. 그는 그저 선임 한시직이었다. 다른 아르바이트생처럼 몇 개월마다 계약서를 쓰고 일했다.
“퇴직금을 주지 않으려 꼼수를 쓰는군요?”
류정이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진화는 경력을 인정받지 못해도 일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래도 계속 일할 수 있잖아요?”
여주가 한결의 선택에 이점이 있다고 말했다. 진화의 속마음을 읽은 듯 한결을 두둔했다.
“한 사람의 시간과 숙련된 능력을 훔치는 거죠.”
류정이 반박했다.
“훔치다뇨? 같은 말이라도 어쩜. 솔직히 말해서 3개월 뒤에도 여기서 일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어요. 안 그래요?”
여주가 물었다. 류정은 여주를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능숙함을 요구하면서 그에 맞는 대가를 주지 않는 건 분명 반칙이었다. 하지만 그런 반칙이 모두에게 통용되는 건 아니다. 능력과 신임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여길 나가면 다시 서류를 내고 면접을 봐야 한다. 낯선 일터에서 초보의 실수를 반복해야 하는 신세다.
한결이 같은 처지니 도움을 바라지 말라는 뜻은 아니었지만, 세 사람은 차츰 한결을 덜 찾게 되었다. 대신 주임에게 직접 물어보거나 부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 사람이 숙련된 이유도 있었다.
6
손님을 따라 들어온 나비가 출로를 잃고 날아다녔다. 문이 움직일 때마다 푸드덕 날개를 펼쳤다. 금세라도 날아갈 듯 퍼덕이더니 자동문이 여닫혀도 자꾸만 제자리였다. 유리문은 양쪽으로 갈라졌다가 망설임 없이 닫혔다. 유리문이 열리면 사람들은 낯선 사격의 문턱을 넘었다. 문은 손님의 발걸음에 맞추어 날갯짓을 했다. 비상하는 새처럼 경쾌하게 열렸고 착륙하듯 단호하게 닫혔다.
주황 조끼를 입은 남학생이 나비가 나갈 수 있도록 자동문 옆에 섰다. 졸업 요건을 맞추려고 온 간호학과 대학생이었다. 그는 수줍어하며 진화를 따라다녔다. 손님이 많을 때면 봉사자들이 사대에 배치되어 업무를 나눠했다. 주임은 요령껏 가르쳐 업무 부담을 줄이라고 말했다. 왼손의 위치가 부자연스러운 점을 빼면 특별할 건 없는 청년이었다. 왼손을 둘 곳을 찾지 못한 듯 가슴에 얹은 채 걸었다. 유심히 보면 양쪽 눈의 크기가 살짝 달랐다. 언뜻 보면 왼쪽 눈을 덜 뜬 듯했다. 그것도 자세히 봐야 알아챌 정도였다. 손님을 응대하는 법을 가르쳐 주자 적극적으로 나섰다. 어눌하지만 성실한 태도가 보기 좋아 그를 앞세우고 뒤에서 보조했다. 먼저 다가가 정성을 다하는 모습에서 선함이 느껴졌다. 진화는 손님이 없을 땐 의자에 앉으라고 일러주었다.
“아르바이트 좀 해봤어요?”
진화가 의자에 앉지 못하는 주황 조끼에 말을 걸었다.
“제가 경험이 별로 없어요.”
주황 조끼는 수줍게 말하고 난 뒤, 얼려서 비닐 팩에 담아온 생수를 들이켰다.
“봉사는 자주 해요?”
“최소 60, 최대 120시간이거든요. 대부분 120 다 채워요. 취업 때문에요.”
“너무 많은데요?”
“그래서 헌혈이 개꿀이에요. 꿀알바요.”
“그래요? 매혈이네요.”
헌혈하면 4시간 봉사 시간을 준다고 했다. 진화는 한시직이 된 뒤로 시급과 시간을 비교하는 습관이 생겼다. 커피 한 잔을 마시려면 삼십 분을 일해야 한다. 영화를 보려면 한 시간 반 일해야 하고,
“그것도 많이 못 해요. 최대 20시간으로 한정되어 있어서.”
헌혈이 꿀이라는 말이 놀라웠고 공부와 아르바이트, 봉사까지 챙기는 걸 보니 대견했다. 눈치를 보며 계속 서 있는 주황 조끼에게 앉으라고 몇 번이나 권했다.
“여기 좋네요. 할 일 없어서.”
주황 조끼가 슬쩍 자리에 앉았다.
진화는 딸에게 슬쩍 사격장 아르바이트를 권했었다. 방학 동안만 해도 용돈벌이로 충분할 텐데, 딸은 흘려들었는지 주말에 친구와 제주도 항공권을 예매했다.
“방학인데 평일에 여행 가도 되잖아?”
“계절학기 들었잖아.”
딸은 알바를 한다 해도 엄마와 같이는 안 한다고 쐐기를 박았다.
주황 조끼를 입은 회사원은 이렇게 좋은 일자리가 어딨냐는 말을 되풀이했다. 일 년에 여덟 시간이 필수인 회사인데 대부분 단체 봉사로 채우지만, 그때 시간이 없어 하루를 낸 남자였다. 그는 스크린 사격용 총이 군대서 쓰던 K1의 완벽한 모사품이라며 아는 체를 했다. 총을 이리저리 만지더니 안전장치 작동법을 알려주었다. 무늬만 잠금장치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작동했다. 잠금 설정을 하니 방아쇠가 움직이지 않는 걸 진화는 그때 알았다.
회사원은 일을 적극적으로 즐겼다. 어차피 여사님들은 총을 모르니, 라며 시키지 않는 일까지 나서서 했다. 아내와 딸에게도 시켜야겠다고도 했다. 아내가 60킬로그램이 다 되어간다고, 일면식도 없는 여자의 몸무게까지 들었다. 다시 만날 일 없는 사이라 사적인 이야기를 가볍게 나누었다. 회사원의 아내를 만나 진위를 확인할 수도, 그럴 필요가 없다.
진화는 풀썩 주저앉아 다리를 두드리며 갑자기 언짢아진 이유를 되짚었다. 쉬운 일이 아니라고 시위라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제만 해도 앉아 쉴 틈이 없었다. 지금은 한가한 편이라고 덧붙였다. 진화가 있는 동안 회사원의 아내와 딸이 온 적은 없었다.
봉사자들은 대략 네 부류로 나뉘었다. 졸업과 취업 요건으로 채우러 온 대학생, 실업급여를 받으려는 구직자, ESG 경영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 그리고 타인을 돕는 그 자체를 즐긴다는 자원봉사자. 마지막 부류는 순수한 의도를 가진 봉사자로 사격장에도 한 명이 있었다.
열 달째 출근하다시피 하는 자봉씨였다. 사격장 돌아가는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손님을 유쾌하게 대했다. 심지어 십 분씩 일찍 나와 청소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구석까지 물수건으로 닦았다. 돈 받고도 덜 성실한 한시직들은 “차라리 아르바이트하지”라며 수군댔다.
진화는 자봉씨의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그 나이에 순수한 마음일 리 없었다. 사회봉사 명령을 받았을 거라고 확신했다. 남편도 음주 운전으로 그런 적이 있었다. 남편은 건성으로 하던데, 자봉씨의 과한 성실은 오히려 의도를 숨기기 위한 치밀함으로 보였다.
자원봉사자가 한시직보다 더 열심이라 뒤가 켕겼다. 진화는 틈날 때마다 자봉씨를 도왔다. 그래도 돈 받는 녹색 조끼가 일해야지, 하면서.
녹색 조끼와 주황 조끼는 서로를 부르지 않았다. 서로 부를 일이 없기도 했다. 간혹 손님에게 안내하다가 지칭할 일이 생기면 진화는 ‘자원봉사자분’이라고 했다. 그에 비해 자봉씨는 진화를 ‘녹색 안전’으로 지칭했다. 녹색 조끼 뒷면에 커다랗게 ‘안전’이라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호칭은 아니었다. 녹색 조끼를 입은 안내원 정도면 좋았겠지만 따지고 들 일은 아니었다. 맡은 일을 제대로 했으면 그만이었다. 매표소 입구에 서서 손님들을 신속하게 안내하는 일이 자봉씨의 임무였다.
녹색과 주황으로 나뉘어 일하던 이들이 뒤섞인 날이 있었다. 조끼를 모아 세탁하는 날이었다. 조끼를 제작하고 세탁은 처음이라고 했다. 진화는 집에 가져가 빨아왔지만, 조끼를 벗어 세탁물에 얹어주었다. 새마을운동을 연상시키는 녹색 조끼를 벗어보고 싶었다. 계급장 떼고 일해보자는 심정이랄까. 진화는 마침 직원들과 비슷한 남색 티셔츠를 입은 참이었다.
빨래는 한결 담당이었다. 한결이 형님으로 부르는 주임이 지시한 일이다. 눈매가 매서운 주임은 한결을 포함한 녹색 조끼들의 업무를 적절하게 배분했다. 한결이 그의 지시를 따랐기에, 진화도 한결을 건너뛰고 그에게 묻는 날이 많아졌다.
사고는 조끼를 세탁하는 날에 일어났다. 노리쇠 사고는 잦은 편이긴 했다. 대여섯 살 아이가 노리쇠에 입술이 찢어지는 사고였다. 왼손잡이인 아이를 아빠가 뒤에서 껴안고 도와주고 있었다. 아이가 표적을 더 가까이 보려고 얼굴을 들이밀자마자 사고가 났다. 피까지 튀었다. 아이 엄마가 파르르 떨었다.
비비탄 담당은 진화와 여주였다. 진화가 줄곧 왼쪽 두 사대를 보고 있다가 사고 당시에는 대기 손님에게 주의 사항을 설명하던 중이었다. 손발이 잘 맞는 사이였다면 진화가 대기자를 챙기는 동안 사대는 여주가 봐야 했다. 물론 너는 사대, 나는 대기석으로 나누자는 합의는 없었지만, 그래야 일이 돌아갔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다. 사고를 수습하고 직원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여러 질문을 쏟아냈을 때, 여주는 내 손님은 아니었지만 잠깐 사이에 사고가 났다고 설명했다. 내 손님이라니? 진화는 당황스러웠다. 이곳이 마트 시식 코너도 아니고 네 손님이니 내 손님이니 따져가며 받았었나. 따져 묻고 싶었지만 결론 없는 질문이었다. 두 사람은 호흡을 맞춰야 하는 한 팀이었다. 그런데도 여주는 왜 사고의 책임에서 쏙 빠지려는 걸까. 얄미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날 오후 내내 진화는 기분이 상했고 일도 대충했다. 큐알 코드를 찍고 입장권을 돌려주지 않아 손님이 찾으러 다녔다. 매표소에서 사정을 설명하던 손님이 불친절한 직원이 가져간 거 같다고 설명했다.
“표정이 어두운 살짝 불친절한 직원이었는데.”
“자원봉사자요?”
직원이 자원봉사자를 지목했다. 일에 서툴러 불친절하게 보였을 거라 짐작한 것이다. 진화는 대화를 엿들었지만 나서서 자신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자원봉사자라고 오해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봉사자는 하루 일하고 가면 그만이지만, 재계약을 앞둔 진화에겐 직원 평가가 중요했다.
진화는 여주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감정은 옅어졌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았다. 출고 삼 년도 안 된 신차, 명품 가방, 여유로워 보이는 생활, 다양한 여행지를 누빈 경험담. 대체 왜 일하는 걸까? 암행 순찰을 하며 서민 행세를 하는 걸까. 고위직 지인에게 부탁해 경험 삼아 들어온 걸까? 그렇다면 재계약은 안 하겠지. 진화는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7
일요일 아침. 진화 방의 열린 창으로 함성이 들려왔다. 인근 운동장 조기축구회 소리였다. 휴일의 나른한 햇살과 함성은 삶의 여유를 전했다. 주5일제와 무관한 진화도 주말이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나른한 온기를 느꼈다. 주말에 일하는 사람은 크게 기대할 것 없는 삶을 산다. 주말에 약속할 수 없고, 원하는 모임을 나갈 수 없으며, 동창들과 여행을 떠날 수 없다. 주중이 있어도 벌이가 줄어드니 밖에 나갈 일을 덜 만들었다.
진화는 강변도로로 진입하기 위해 교량 아래로 우회할 때마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버드나무 가지가 우아하게 늘어진 길이여서 더 그랬다. 터널을 뚫고 강변도로에 오르는 순간 한시직으로 변신 완료. 강변을 달리는 사람들, 여유롭게 걷는 산책객, 꽃에 코를 박은 강아지, 방긋거리는 아기를 태운 유모차가 딴 세상 풍경으로 흘러갔다.
세 사람은 조금씩 친해졌다. 그렇다고 밖에서 만나는 정도는 아니었다. 대화는 주로 사무실을 오가며 나누었다. 출근 명부에 서명하려면 하루 한 번씩 사무실에 들러야 했다.
재계약을 앞둔 시점이라 주된 화제는 실업급여였다. 셋 중 유일하게 수급한 적 있는 류정에게 질문이 집중됐다. 여주는 한시직이 끝나면 신청할 예정이었다. 누군가는 나랏돈을 눈먼 돈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받으려고 보면 자격이 까다롭고 절차가 복잡했다.
“그러니까 나도 실업급여 대상자라는 거죠?”
여주가 확실하게 하려고 류정에게 재차 물었다. 여주는 십 년간 몸담은 직장을 그만두고 일 년 정도를 쉬다가 사격장에 왔다. 쉬는 동안 따놓은 자격증만 종잡아 서너 개가 되었다.
“아니, 제 말만 듣지 말고 직접 알아보셔야죠.”
류정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아는 사람이 류정 씨뿐이니까 그러죠.”
여주의 말끝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대화와 상관없이 세 사람이 걷는 속도는 일정했다. 셋의 중간에 있던 진화가 속도를 늦추어 반걸음 뒤처졌다. 류정이 중간에 서도록 비켜 걸었다. 진화와 여주는 류정의 대답을 기다렸다.
“실업급여 대상자인 건 확실하죠?”
“일하다가 쉬면 다 받는 거 아니었어요?”
“고용보험에 가입되어 있어야 가능해요.”
“그건 회사가 당연히 들어주잖아.”
여주는 류정의 질문에 당연한 듯 대답했다. 류정이 진화를 슬쩍 보더니 말을 이었다.
“고용보험 가입 기간과 나이에 따라 액수가 달라요. 언니는?”
류정이 여주를 언니라고 부르게 된 것도 관계가 발전한다는 증거였다. 근무 첫날, 류정은 점심을 같이 먹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선을 그었다. 세 사람은 굳이 부를 일도 없는 사이, 어쩌다 필요하면 저기요, 정도면 되는 사이로 지내왔다. 류정은 실업급여 수급 조건을 맞추기 위해 고용보험이 되는 일자리를 전전했고 수급기간이 채워지면 실업급여로 생활하는 패턴을 반복하고 있었다.
재계약을 앞두고 여주는 고민했다. 실업급여 대상자라면 굳이 일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그만둔다고 말해야 할까요?”
여주는 언젠가 진화에게 일하지 않아도 먹고살 만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여주는 군대 간 아들 용돈을 두둑이 챙겨주려 한다지만, 요즘 군대 월급은 한시직보다 높았다.
“계약서에 사인 안 하면 그만이라니 조금 더 고민해 봐요.”
류정이 그렇게 말했고 진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주가 화들짝 놀라며 따져 물었다.
“난 들은 바 없는데, 혹시 제가 모르는 대화방이 따로 있는 거예요?”
류정이 놀라며 진화를 쳐다봤다. 류정은 여주가 왜 저러냐고 눈빛으로 물었고, 진화가 어깨를 으쓱하며 모르겠다고 했다.
“두 사람이 저를 따돌리는 거 맞죠?”
확신에 찬 말투였다.
“아니에요. 그런 거.”
류정이 손사래까지 쳐가며 부인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아니라면 둘만 알고 왜 저는 모르는 거예요?”
진화와 류정이 같은 팀일 때 직원이 한 말이었고 잊고 있다가 전하지 않았을 뿐이다.
“직원과 나눈 정보는 무조건 공유해야죠. 지금까지 전 그렇게 해왔어요. 저한테 정보는 얻어가고 나누지는 않은 건가요?”
여주가 예민하게 따졌다.
“재계약 의사가 있으면 근무 마지막 날에 사인하면 돼요. 원치 않으면 안 쓰면 그만이고.”
진화는 직원에게 들었던 말을 최대한 기억해 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여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 그러네요. 해달라고 하지도 않고.”
여주는 우리가 싹 다 그만두면 어쩌려는지, 근무표 짤 때마다 머리 아플 텐데, 라고 말했다. 자봉씨 같은 봉사자가 있으니까요. 류정이 말했고, 여주가 그건 아니지, 라고 했다.
“우리보다야 젊은 대학생들을 선호하겠죠.”
진화가 류정을 두둔했다.
“우리요?”
여주가 반문했다. 오십 대인 진화와 사십 대인 여주는 다르다는 얘기다.
“미안, 미안요……”
진화가 금방 사과했지만, 여주의 구겨진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여주는 진화가 탐탁지 않았다. 여주가 먼저 남편 직업을 까발렸으면 당연히 진화도 응답해야지. 그것이 응당한 대화의 규칙인데, 진화는 유명 연예인도 아니면서 사생활 노출을 극도로 꺼렸다. 결국 여주만 남편 직업이며 자녀들의 학적을 터놓은 상태였다. 여주는 진화에게 털어놓을 기회를 여러 번 제공했다.
지난번에 진화에게 “타이어를 손봐야 할 거 같아요. 집에 가서 남편한테 봐달라 그래요. 꼭이요. 위험하잖아요.”라고 했던 말은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나누는 사이가 되자는 의미였다. 그런데도 여주는 아무 말 없이 다음날 타이어 앞의 고무판을 덜렁거리면서 나타났다. 세차를 언제 했는지 모를 정도로 내부는 불결했다. 차 안에서 점심을 먹을 때마다 불쾌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그래서 점심은 여주의 차에서 먹자고 했다. 메뉴는 대부분 빵과 커피였는데 빵부스러기가 시트에 떨어지는 건 용납하기 어려웠지만, 불결한 좌석에서 식사하느니 청소하는 수고가 나았다.
대화는 여주가 이끄는 편이었다. 전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 얘기를 하는 중이었다.
“잘난 체하는 사람보다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이 더 불편하더라고요.”
여주가 말했다.
“그래요?”
진화는 놀라서 쳐다봤다. 타인의 성향이 불편할 필요까지 있을까. 잘난 체와 자기연민을 두고 따지자면, 자기연민 쪽이 훨씬 개인적인 문제다.
“그게 사람을 더 갉아먹어요.”
여주는 자기연민이 더 나쁘다고 거듭 말했다.
“개인의 성향인데 상관…… 없지 않나요?”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었다. 진화는 그렇게 말하면서 혹시 놓친 부분이 있는지 생각했다.
“자기를 갉아먹는 게 제일 나빠.”
여주는 제 몸을 먹는 벌레가 눈앞에 기어다니는 듯 부르르 떨었다.
말하자면, 진화는 자기연민이 강한 쪽이었다. 욕심부리지 말고 가진 것에 만족하려고 노력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내세울 만한 것이 특별히 없기도 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면 삶은 배반하지 않을 거라고 학생들에게도 가르쳤다. 그렇게 노력해도 기간제는 기간제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기간제를 벗어나지 못하지, 라거나, 기간제가 속도 편하다는 말도 들었다. 기간제도 아닌 지금은 더 혼란스러웠다. 최선을 다했던 하루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성실함의 값어치가 싸구려 같았다. 속마음을 여주에게 들킬까 봐 조바심이 났다. 여주가 마냥 편하지 않은 이유였다.
여주는 정보의 불균형을 개선해야 직성이 풀리는 부류였다. 맏딸을 명문대학에 입학시킨 힘도 그것이었다. 치맛바람이 거센 학군에서도 딸이 기죽지 않도록 뒷바라지했다. 필요할 때면 여태껏 구축해 온 인력 망을 적절히 이용했다. 진화가 단서만 조금만 흘려도 전화 몇 통으로 발가벗길 텐데, 진화는 최근에 이사했다고만 할 뿐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차림새만 보면 특별한 것은 없어 보였다. 명품 하나 없는 걸로 봐선 사치스러운 취미가 없거나,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다. 구직에 적극적인 걸 보면 비빌 언덕도 없었다. 여주는 끊임없이 진화를 살폈고 그럴수록 진화는 자신을 더 숨겼다.
그만둘지 고민하던 여주는 3분기 구인 공고가 난 뒤 태세를 전환했다. 공고에 두 명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계약 만료는 대학생 한 명인데 모집인원은 그보다 많았다.
“우리 중 한 명은 재계약 안 될 거 같죠? 계약서 특약도 그렇고.”
여주가 어디서 들은 소문인지 아니면 본인 판단인지 모르는 말을 했다. 계약서에 명시된 특약사항이 여주의 추측을 뒷받침했다. 근무 동안 업무평가에 따라 재계약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문구였다.
“두 분은 어떡할 거예요? 류정 씨는 계속할 거고, 진화 씨는요?”
류정은 계속할 거라고 처음부터 말했다. 한여름 한 달 반만 열리는 물놀이장 안내요원 자리도 마다했다. 사격장보다 세 배나 더 벌 수 있었지만, 안정적으로 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화는 석 달 안에 일자리를 구할지 알았다. 시 교육청을 들락날락하며 구인 공고를 살폈다. 공무직 두어 곳에도 지원서를 넣었다. 기간제 교사든 공무직이든 되기만 하면 어디든 들어갈 생각이었다. 합격에 대비해 사격장에 정중하게 거절하는 방법도 고민해 두었다. 주임이 그만둘 거면 한 달 전에는 알려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재계약을 일주일 남겨 두고도 진화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지원서를 넣은 곳마다 약속이나 한 듯 연락이 없었다. 당분간 사격장을 다녀야 했다. 계약 의사를 밝혀야 하는 걸까. 아니면, 자동 연장되는 건가. 사무실에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계속해달라고 하면 고민하는 척하다가 승낙하고, 주중 일을 차차 구하면 될 터였다. 이렇게 되고 보니, 나이 든 아줌마를 원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결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아무래도 제대한 복학생을 선호한다고 남의 속도 모르는 말을 했다.
상황이 달라지니 조바심이 났다. 아쉬울 게 없다는 듯 사무실에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머뭇거리는 사이 버림당할 위기에 처했다. 출근부에 서명하러 갔다가 재계약 담당자의 연락처를 문의했다. 번호를 남기면 담당자가 연락하도록 조치하겠다는 답을 들었고, 여주가 번호를 남겼다. 여주는 실업급여를 받으며 새 직장을 구할 작정이었다. 담당자는 마지막 주에 계약서를 쓸 거고, 그때 서명을 안 하면 그만이라고 했다. 한 달 전에 알려달라던 말과 달랐다. 하나도 아쉽지 않다는 말투였다. 저토록 당당하니 도리어 불안했다. 진화는 마지막 주까지 전화통을 붙잡고 합격 통지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소식은 오지 않았다.
그만둘 것처럼 굴던 여주가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번에는 계약기간이 6개월이었다. 진화는 예상이 빗나간 것이 놀라서 마침 한 팀이던 류정에게 슬쩍 속내를 꺼냈다.
“난 계속할 줄 알았어요. 그 음료수 보고……”
류정은 여주가 음료를 돌리는 걸 보고 계속 다닐지 알았다. 매표소 직원이 종량제 봉투에 담긴 캔 음료를 하나씩 돌리며, “주임님이 샀어요”라고 했기에, 그날 근무한 다른 직원이 산 줄만 알았다. 예의상 인사라도 하려고 물어보려던 참에, 여주가 별거 아니라며 인사를 받았다.
“제가 마시고 싶어서 샀어요. 몇 개 더 산 것뿐이에요.”
진화는 음료를 마시며, 주임 소리 들은 값으로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8
매표소 안에 CCTV 화면이 있다. 진화가 오가며 확인한 모니터는 아홉 대 정도였다. 전투체험장에 최근 설치된 화면은 확인할 수 없었다. 한결을 제외하면 한시직은 매표소에 들어갈 일이 없었다. 지나가다 슬쩍 보는 게 전부였다. 나이 들면 눈이 먼저 늙는다더니 진화는 대기자 모니터도 가까이 가서 봐야 했다. 나이가 드니 불편함이 늘었다.
매표소 직원을 제외하면 제1 사격장은 한시직이 채운다. 한시직은 총을 관리하고 직원은 매표소를 지킨다. 한시직은 총을 가졌고 저들은 돈을 가졌다. 강도는 총으로 위협하면 돈을 빼앗긴다. 상식적으로 총은 돈을 이기지만 총은 돈을 위해 일한다. 돈을 벌기 위해 총을 닦고 탄을 채우고 손님들에게 공손하게 건넸다.
치열했던 고민이 무색하게도 두 번째 계약기간이 무심히 흘러갔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조금 능숙해졌다는 것 정도. 그 사이 어디에 투입되어도 그럭저럭 해냈다. 진화는 퇴근 후 아스피린을 먹지 않아도 되었고, 힘들다는 투정을 덜 했다. 함께 일하는 한시직들의 사생활을 조금 더 알게 되었고 주임의 이름을 몇 개 더 외웠다. 진화와 여주는 서로가 알아낸 정보를 교환하며 한 사람씩 알아갔다. 정작 서로에 대해서는 모르는 채였다. 그러다 가족 수당 조사에서 서로의 가족 사정이 드러났다. 사무실에서 가족 인원수를 묻는 문자가 세 사람에게 도착했다.
“가족 수당 문자 왔었죠?”
류정이 물었다. 난처한 내용이라는 표정이었다.
“가족 수당을 정말 주는 거예요?”
여주는 정말 주려고 보낸 건지가 더 궁금했다.
“아님, 뭐 하러 묻겠어요?”
류정이 말했다.
문자는 다음과 같이 왔다.
안녕하십니까. 사격장 사무실 ○○○입니다. 가족수당 관련하여 해당하시는 사항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주민등록등본상 세대를 같이 하고 거주하여야 합니다. 배우자, 본인과 배우자의 부모님, 만 19세 미만의 자녀, 본인과 배우자의 형제자매 중 장애가 있는 사람 중 해당하는 사항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없으면 없다고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여주는 기어코 진화가 별거 중임을 알아냈다. 사실은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집요하게 질문한 끝에 알아낸 결과였다. 여주가 자동차 수리를 진화 남편에게 맡기라고 했을 때, 진화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던 여주는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진화가 파주를 다녀온 얘길 하는데 여주가 훅 들어갔다.
“거기까지 운전해 갔어요? 거리가 멀어서 힘들었을텐데……”
진화는 북스테이를 떠올리며 아무 생각 없이 휘말렸다.
“그때는 남편이 운전했죠.”
진화는 말하다 멈칫했다.
“지금은 안 하나 봐요?”
여주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아이가 크니까 안 가게 되네요.”
그때는 그냥 눈치만 챘지만, 가족 수당 조사로 상황이 확실해졌다. 여주는 두 명, 류정은 한 명, 진화는 없었다. 진화의 딸은 올해 성인이 되었다.
*
새로 들어온 신입 한시직은 꾸안꾸의 친구였다. 제대한 복학생들은 일을 금방 익혔다. 진화가 두 주나 걸린 일을 하루 만에 습득했다. 지나고 보니 사격을 몇 번만 해보면 될 걸 외운다고 고생한 것이다.
진화는 전문성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려 노력했다. 사격장을 찾는 이들도 어리바리한 안내원을 원하지 않을 터. 진화가 그랬듯 딱 떨어지는 단호함과 만나고 싶을 것이다. 단 한 순간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무결점만이 이 공간과 어울린다. 진화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목소리도 일부러 굵게 내고 말끝을 명확하게 마무리했다. 평상시 말끝을 뭉개어 얼버무리는 버릇이 있었기에 특별히 신경 썼다.
진화는 사격장에서 교단의 희열을 다시 맛봤다. 진화의 설명에 따라 가늠쇠에 집중해서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사람들.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도움을 청하는 손님들도 있었다. 진화는 손님들에게 사용법을 설명할 때마다 자신이 교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깨달았다.
어느덧 세 사람은 실탄 사격장에도 3주에 한 번꼴로 투입되었다. 추석 연휴와 이어진 주말이라 손님이 많았다. 공기소총 대기자 모니터가 꽉 차도록 줄이 길었다. 진화와 한결이 한 팀이었고, 한결이 주도하고 진화가 도와주는 식으로 진행했다.
한결의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갈 때, 중국인을 포함해 열 명 아래로 손님이 줄었다. 한결이 퇴근 전에 최대한 대기자를 줄여준 것이다. 한결의 퇴근은 진화보다 한 시간 일렀다. 선이 들어와 업무를 조정했다.
“여길 혼자서 할 수 있겠어요?”
선이 진화에게 물었다. 의문형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진심으로 몰라서 하는 질문, 할 수 없음을 확인하는 질문. 못할 게 뻔하니 예의상 하는 질문, 바쁘니까 빨리 다른 사람과 교환하라는 지시. 진화가 듣기에 의견을 구하는 투는 아니었다.
진화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인지 잠깐 고민했다. 할 수 있다는 말의 속내도 다양하다. 손님을 쳐낼 수 있냐는 질문에는 오케이, 그 정도는 혼자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말 안 통하는 중국인이 세 명에다 손님들이 더 몰려올 수도 있는 상황에서 별 사고 없이 안전하게 해낼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할까.
“아니요.”
모든 변수를 치밀하게 고려하고 나온 답변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러면 비비탄으로 가세요.”
진화는 비비탄 사격장으로 가서 류정을 도왔다. 공기소총 사격장은 꾸안꾸가 맡았다. 류정은 진화에게 “아무래도 우리가 미덥지 않은 모양이에요.”라며 입술을 비죽거렸다. 할 수 있다고 해야지 왜 자리를 내주냐는 눈빛이었다.
류정이라면 끝까지 사대를 지켰을 것이다. 반면 진화는 알아서 비켜주었다. 진화는 빈 탄창을 손님에게 내미는 실수를 했다. 류정이 자기가 할 테니 좀 쉬라고 했다. 총기름으로 얼룩진 손이나 씻으려고 화장실에 갔다. 거울을 보며 잡풀처럼 올라오는 새치를 검은 머리카락으로 덮었다. 염색을 또 까먹은 것이다.
화장실에서 돌아오니 손님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비 한 마리가 공기소총 사격장 안으로 날아온 것이다. 총을 쏠 때마다 나비가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선이 사격을 중단시키고 안으로 들어가 슬리퍼를 휘둘렀다. 나비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선의 결정타에 바닥으로 곧장 떨어졌다. 선이 바닥을 세게 내리쳤다. 손님들 사이에서 짧은 탄식이 흘렀다.
미화원이 종량제 봉투를 들고 나타나 나비 사체를 비닐에 담았다. 진화보다 몇 살 더 많아 보이는 미화원은 직원과 담소를 나누고 갔다. 화장실에 ‘핸드 타올을 가져가지 마시오’라고 붙여 놓은 것도 그였다. 손님들은 이걸 가져가는 사람이 있냐며 혀를 찼다. 안내 문구는 미화원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핸드 타올이 제때 채워지지 않아도 미화원을 탓하기보다 또 누가 가져갔다고 여겼다.
9
전국 사격대회를 한 주 남기고 사격장을 폐장하고 대청소에 나섰다. 국가보조금이 삭감되어 연기되었다가 정권이 바뀌며 다시 열리게 된 대회였다. 진화는 청각장애 사격선수 김우림이 출전하는 남자 일반부 10미터 공기소총 경기를 이번에는 꼭 보리라 다짐했다. 두어 달 전에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땐 존재조차 몰랐다. 다음날 뉴스에서 선수의 금메달 소식을 듣고서야 눈앞에서 현장을 놓친 걸 알았다.
휴게실에 모인 인원은 직원과 한시직을 합쳐 15명이었다. 진화는 처음 와본 곳이었다. 휴게실은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나뉘어 있었다. 문을 열면 사무실인데 칸막이 뒤는 휴게 구역이었다. 냉장고와 소파와 전자레인지가 갖춰져 있었고, 컵라면과 과자, 음료가 쌓여 있었다. 목례만 나누던 미화원이 그날 할당된 작업을 설명했다. 보통 아줌마들은 금방 끝마치는 일이라고 했다.
“제가 보통 아줌마는 아니라서 잘할지 모르겠네요.”
여주의 말에 류정이 웃음을 터트렸다. 요령만 있으면 금방 끝나는 일이라고. 진화가 뭘 더 물어보려고 여사님이라고 운을 뗐다.
“그냥 주임으로 불러요. 설 주임이에요.”
설 주임에 따르면 직원은 모두 주임이었다. 진화는 직급에 무지했기에 그런가보다고 넘겼지만, 여주는 궁금한 게 있는 표정이었다.
설 주임이 매트부터 닦아야 한다고 일렀다. 진화는 사격장을 오가면서도 매트를 본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지하에만 있으면 안 돼. 한 번씩 위로도 올라와야지.”
설 주임이 말했다. 동서로 길게 뻗은 사격장의 정문은 1층이지만, 서쪽 끝에 자리한 제1 매표소는 지하에 해당했다. 진화가 지하에서 손님을 치를 때 설 주임은 대형 종량제 봉투를 들고 빠르게 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체구가 작은 그녀는 상반신을 15도 정도 내밀고 두 팔을 힘차게 저으며 걸었다. 금방이라도 앞으로 내리꽂힐 것 같은 자세인데도 걸음은 꼬이지 않고 일정했다. 엉덩이를 뒤로 빼고 팔을 휘저어 균형을 유지했다.
진화는 설 주임을 바지런하다고 여겼는데, 설 주임은 진화를 답답하다고 여긴 걸까. 우물 안 개구리처럼 처박혀서 똑같은 설명을 되풀이하는 한심한 족속.
“어서 50미로 갑시다.”
설 주임은 50미터 사격장을 50미라고 했다. 한 사람씩 늘어서서 매트를 펼쳐 닦았다. 성인 둘이 누워도 될 만한 크기였다. 벽에 붙은 안내문을 보니 소총 3자세 종목에서 사용하는 매트였다. 120발 사격에 2시간 45분이 주어졌다. 앉아쏴 40발, 엎드려쏴 40발 그리고 서서쏴 40발. 사격의 마라톤으로 불릴 만했다. 사격은 정신력 싸움이라지만, 세 시간 가까운 집중이 가능할까. 여주가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며 진화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진화는 매트를 철 구조물에 걸쳐서 닦았다. 관람석과 경기장을 가르는 칸막이였다. 손이 느린 진화가 미더웠는지 설 주임이 옆에 붙었다.
“그러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봐요.”
설 주임이 시범을 보였다. 윗면을 닦고 나서 매트를 펼쳐 양면을 닦았다. 그다음에 닦은 면이 마주 보도록 접은 뒤 마지막 면까지 닦으면 완료. 그렇게 하니 두툼한 매트를 걸치느라 끙끙대지 않아도 되었다. 설 주임이 도와주니 일이 금방 끝났다. 류정은 혼자서 하겠다며 도움을 거절했다. 칸막이에 걸치는 방식으로도 속도가 빨랐다.
진화는 여주에게 설 주임의 방식을 전파했다. 여주의 몫은 진화의 두 배였다.
“누군 쏘고 누군 치우고……”
여주가 닦는 손놀림에 맞춰 중얼거렸다.
“어지르는 사람 따로 치우는 사람 따로. 먹는 사람 따로 설거지하는 사람 따로……”
설 주임까지 추임새를 넣으며 거들었다. 진화는 몸 쓰는 일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예전에는 몰랐던 사실이다. 동료나 친구들도 알려주지 않았다. 학생부장은 진화에게 느리지만 꼼꼼하다고 했다. 진화는 장점으로 받아들였지만, 사실은 느림에 방점이 찍힌 것이다. 느려터졌다는 속내를 완곡하게 드러냈는지도. 돌이켜보면 말의 이면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몰랐을 뿐이다. 진화는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이면을 의심하는 버릇이 생겼다. 일하다 보니 꼼꼼함이 장점만은 아니었다. 할당량을 끝내지 못하면 도움이 필요했다. 한 마디로 민폐를 끼쳐야 했다.
50미터 사격장은 실내도 실외도 아니었다. 관람석과 사대는 천장이 있지만, 사대와 표적 사이는 뚫려 있었다. 폭염경보가 내려진 날이었고 에어컨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비지땀이 턱을 타고 떨어지고 속옷까지 폭삭 젖었다.
힘들었던 대가로 점심시간은 두 시간이었다. 서둘러 도시락을 먹고 차로 십 분 거리의 빙수 가게로 달려갔다. 사격장에 들어온 후 첫 나들이였다. 가는 길이 막혀 세 사람은 조바심이 났다. 수산물시장에 몰린 차량 때문이었다. 진화는 그동안 수산물시장이 가까운 줄 몰랐다. 사격장 위치가 외곽이라고 여겼는데 북적이는 시장을 보니 그런 것도 아니었다.
정산을 맡은 류정이 만 원씩만 달라고 했다. 운전비까지 고려해서 백 원 단위를 뺀 금액이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정확하게 해요. MZ세대는 계산도 정확하다잖아요?”
운전대를 잡은 여주가 백미러로 류정 씨를 보며 말했다.
“에이, 류정 씨가 무슨 MZ세대예요?”
진화가 농담처럼 물었다.
“저 MZ 맞아요!”
류정이 불쾌한 기색을 띠며 발끈하며 말했다.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진화는 사십 대가 MZ세대란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조용히 검색해 봤다. 놀랍게도 류정의 말이 사실이었다.
오후에 간 곳은 10미터 사격장이었다. 실내라 시원하겠다고 기대했는데, 일하다 보니 땀범벅이었다. 사대와 표적판 사이에 깔린 매트를 청소기로 돌리고 빗자루로 한 번 더 쓸어냈다. 표적판 아래에는 찌그러진 납탄과 탄가루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표적판과 양동이는 관으로 연결돼 있었다. 탄이 관을 통해 양동이로 배출되는 방식이었다. 대청소가 아니었다면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직원들은 낡은 표적판을 뜯어내고 새 것으로 교체했다. 한시직은 플라스틱 양동이에 담긴 납탄 찌꺼기를 한군데 모았다. 탄 찌꺼기를 작은 포대에 담아 밖으로 옮겼다.
“대청소는 얼마 만에 하는 거예요?”
젊은 직원이 팀장에게 물었다. 직원들은 청소를 총괄하는 직원을 형님이나 팀장이라 불렀다. 진화가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다. 체육복 차림의 한두 사람을 빼면 남색 쿨링 셔츠를 입고 있었다.
“5년 만에 하는 것 같은데……”
팀장이 말했다. 옆에서 듣던 여주가 “자주 하는 편은 아니네요?”라고 묻자, 팀장이 땀이 맺힌 인중을 움직이며 대답했다.
“이번엔 유독 일꾼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류정이 허리 높이의 사격대를 넘어 탄 찌꺼기를 밖으로 꺼냈다. 단번에 넘으려고 도움닫기를 하다 결국 한 다리를 걸쳐 넘었다.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매번 도움닫기를 했고, 그걸 보고 여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 잘하죠?”
“뭘요?”
“못 하는 거요. 난 못 하는 거 잘하거든요.”
뭐든 자신감 넘치던 류정이 농담까지 하니, 점심을 함께 먹은 덕분인지 한층 편해진 듯했다.
난이도 최상급은 50미터 표적의 뒤편인 감적호였다. 작업에 들어가기 전 역할을 분담했다. 선발대가 표적지를 분리하면 후발대가 부산물을 수거하기로 했다. 마스크가 지급되었다. 부족한 마스크를 가지러 직원이 뛰어나갔다. 나이가 지긋한 직원이 반드시 마스크를 끼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몇몇은 그냥 들어갔다.
표적의 뒤편으로 들어가는 문이 드디어 열렸다. 자물쇠를 따자마자 경고음이 울렸다. 위험 상황이니 사격을 중지해 달라는 안내방송이 반복되었다. 몸을 움츠러들게 하는 고음이었다. 긴 복도를 지나니 또 다른 문이 있었다. 문 뒤로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가 이어졌다.
감적호는 오래된 건물 특유의 먼지 냄새와 거미줄이 뒤엉킨 곳이었다. 선발대가 거미줄을 걷어내고 창문을 열었다. 곧이어 투입된 직원들이 상자를 열고 표적지를 꺼냈다. 롤 형태의 종이 표적지를 류정이 수거했다. 여러 개가 모이니 꽤 무게가 나갔다. 진화와 여주는 단단한 재질의 표적판을 수거했다. 뚫리지 않은 판은 재활용하도록 그대로 두었다. 표적판이 걸린 방향으로 움직이며 하나씩 떼어 노란 플라스틱 바구니에 넣었다. 이삿짐센터에서 사용하는 수거용 바구니였다. 표적판을 모아 밖으로 옮기고, 빈 통을 들여와 다시 채웠다. 한 번에 들기에 무거워 나눠서 옮겨야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를 몇 번이나 왕복했다. 표적판은 특수 재질로 만들어져 깨지지 않고 녹아내린 듯 구멍이 뚫렸다. 수많은 탄을 받아낸 판은 가운데가 텅 비어 있었다.
직원들이 표적판을 새것으로 교체했다. 표적과 외벽 사이의 긴 수거함에 탄가루가 쌓여 있었다. 대학생들이 수거함을 열어 탄가루를 포대에 옮겨 담았다. 한 삽씩 옮기니 속도가 나지 않아, 바닥에 부어놓으면 진화네가 쓸어 모았다.
쉬는 시간에 진화가 검색한 납중독 뉴스를 본 뒤여서 여주는 마스크를 두 겹씩 썼다. 전문가들은 방독면과 방진복까지 갖췄지만, 여긴 반팔에 마스크 하나뿐이었다. 청소를 마치고 보니 팔에 붉은 반점과 긁힌 자국이 드문드문했다.
폐기물을 밖으로 꺼내고 바닥까지 쓸고 나오는데, 설 주임이 진화네를 불러 세웠다. 감적호를 밀대로 닦아야 하는데 사람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청소 알바를 서너 명 뽑았지만 한참 모자란단다. 한결이 해본 적 있는데 일당이 한시직보다 세다고 귀띔했다. 류정이 알았으면 자기도 했을 텐데 아쉬워했다.
팀장이 마무리됐으니 쉬었다 퇴근하라고 했다. 류정이 설 주임의 지시를 말하자, 팀장이 난처한 얼굴로 수고하라고 했다. 류정은 밀대로 닦기 시작했고, 여주와 진화는 걸레를 구하러 갔다. 수돗가에서 아주머니 하나가 비를 맞으며 걸레를 빨고 있었다. 걸레를 짜서 밀대에 끼워 오니, 류정이 “팀장이 바깥만 닦으라네”라고 전했다. 팀장이 설 주임과 만나 중재한 모양이었다.
“우리가 바깥을 닦을 테니, 안쪽으로 가시겠어요?”
진화가 그렇게 말했지만, 아주머니는 혼자 일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자리를 맴돌며 걸레를 빨러 간 동료를 기다렸다. 그사이 걸레질을 끝낸 류정과 여주가 먼저 자리를 떴다.
“왜 저 사람들 그냥 가?”
걸레를 빨고 온 동료 아주머니가 물었다.
“여기만 닦고 간다네.”
“우리 둘이 이걸 어떻게 다 해?”
진화가 걸레를 어디에 놔두고 가야 하는지 물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하랬는데 남자한테 말하니 하지 말라잖아.”
마치 남자 상사의 힘을 빌려 해야 할 일을 피한다는 말처럼 들려서 진화는 불쾌했다.
“저희는 안쪽까지 다 쓸고 왔어요.”
진화가 한마디 던졌다. 비슷한 연배인 생면부지의 상대도 가만있지 않았다.
“저희도 지금까지 일했어요.”
진화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학생부장을 떠올리게 하는 낯선 그들 앞에서 밀대를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밀대는 여기 두면 되죠?”
“우리도 안 쓸 거니까, 갖다 놓으세요,”
그들은 진화를 보지도 않고 무심히 말했다.
“너무 길어서 우리 둘이선 못해요. 한 사람 더 안 와야 해요.”
그러곤 대걸레를 벽에 기대어 놓고는 일을 멈췄다. 진화는 걸레를 야외 개수대에 가져다 두었다. 비는 여전히 멈출 줄 몰랐다. 화장실에 가니 그들도 와 있었다. 설 주임이 올 때까지 버티려는 눈치였다. 진화는 그들의 태도가 거슬려 모른 척했다.
“어우, 땀에 젖어서 바지가 안 내려가.”
화장실 안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화는 손만 씻고 얼른 나왔다. 여주와 류정은 휴게실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주가 왜 이렇게 늦었냐고 물었다.
“아줌마가 걸레를 갖다 놓으래서요.”
“그럴 땐 기세로 나가야죠. 걸레를 탁 놔두고 와야지. 탁!”
여주가 ‘탁’을 강하게 말했다. 진화는 평소 호칭에 예민하게 굴었지만, 그들에게는 별 고민 없이 아줌마라고 불렀다. 그들도 진화를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들을 때는 듣는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고 하곤 막상 부를 때는 마음 내키는 대로 불렀다. 세 사람이 휴게실로 들어가자, 땀을 식히던 직원들이 수고했다는 말을 건넸다. 구석 자리만 비어 있었다. 세 사람은 가장 안쪽 테이블에 가 앉았다.
“다양한 일자리를 전전하니 피곤하네요.”
여주가 종아리를 주무르며 속삭이듯 말했다. 여주는 주중에 친척이 운영하는 주간보호시설에서 일을 도왔다.
“할 만해요?”
“여기가 더 나아요.”
“그만큼 힘들어요?”
“여긴 몸이 피곤하고, 거긴 심신이 다쳐요.”
“무슨 일 있었어요?”
진화가 묻자, 여주가 손사래를 치며 목소리를 더 낮췄다.
“쉿! 더 알려고 하지 마요, 다쳐요.”
여주가 속삭이듯 낮췄는데도, 류정이 만류했다.
“우리 목소리가 제일 커요.”
류정은 말만 하려고 하면 엄지를 인중에 댔다. 복도에서도 “쉿, 여기서 얘기하면 다 들려요.”라고. 딱히 비밀은 없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 다들 핸드폰에 고개를 파묻었다.
대청소의 마지막은 각 사대에 의자를 배치하는 일이었다. 선수들이 시합 중간에 앉아 대기하는 의자였다. 국가대표 선발전이니 비뚜름한 의자를 불운의 징조로 여기지 않도록 50개를 반듯하게 정리했다.
사대와 과녁 사이 잔디밭에 비가 내렸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사대를 덮은 목조 처마 끝에서 빗물이 떨어졌다. 푸른 잔디와 짙은 갈색 목재의 대비는 관리가 잘 된 유적지를 떠올리게 했다. 고궁의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보던 풍경과도 흡사했다. 진화가 비 오는 풍경을 영상으로 찍자, 직원들이 무슨 일이라도 생겼냐며 흘깃거렸다. 별것도 없는데 뭘 찍느냐는 표정이었다. 여주가 하여튼 특이하다며 싱긋거리고 지나갔다.
*
대회 첫날은 날이 화창했다. 한시직들은 전투체험장에서 잡초를 뽑았다. 폭염이 가시지 않은 9월 초. 햇볕 아래 쪼그려 앉으니 땀이 주르르 흘렀다. 김우림 선수의 시합을 완전히 잊을 정도였다. 진화는 안경에 떨어지는 땀을 소매로 닦아냈다. 렌즈가 부옇게 되어 시야도 흐려졌다. 제초 작업을 하는 건지 잡초에 땀을 주는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제사가 있어 휴가를 낸 여주가 부러웠다.
오후에는 클레이 사격장으로 배정됐다. 사격장 둘레길을 걸어서 이동했는데 진화는 처음 가보는 길이었다. 한산한 아스팔트 도로의 끝에 동굴 입구가 나타났다. 트럭도 드나들 만큼 큰 통로였다. 활짝 열린 철문을 지나 어두운 구간을 통과하니 길이 다시 넓어졌다. 피전을 쏘아 올리는 방출기가 계단 위에 있었다. 옛날에는 비둘기를 쏘았다지만 지금은 피전을 겨냥한다. 산으로 둘러싸인 사격장에서는 총성이 나도 새가 날아오르지 않는다. 그 대신 붉은 흙으로 빚은 피전이 날아오른다.
표적을 채우는 작업은 대학생들이 해왔기에 진화는 이날이 처음이었다. 소나기가 내리는데도 기온이 내려가지 않아 후텁지근했다. 진화는 깨진 조각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흙으로 빚은 피전은 날카롭고 무거웠다. 빗자루질 한두 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퇴근 무렵에는 대회가 끝난 경기장에서 탄피를 쓸었다. 모니터와 전선 사이에 흩어진 금빛 탄피를 모았다. 빗자루로 쓸어내기 어려워서 손으로 한 줌씩 주웠다. 경기를 끝낸 학생들이 옆에서 짐을 챙기고 있었다. 진화가 매트 옆에 널브러진 귀마개 솜을 치우려 다가가자, 학생이 막아섰다.
“제가 치울게요!”
방에 들어오지 말라며 짜증 내던 딸의 얼굴이 겹쳤다. 진화는 뒤돌아서며 젖은 셔츠를 들어 올려 냄새를 맡았다. 땀에 젖었다 마르기를 반복한 셔츠에서 시큰한 냄새가 났다. 허리가 쑤셔와 쓰레받기에 한 손을 의지하고 빗질을 했다. 하루가 너무 길고 고되었다.
“오늘은 일당만큼 일한 거 같죠?”
언제부터인지 진화는 습관적으로 류정에게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 힘들다는 말을 듣고야 말겠다는 집념까지 일었다. 그 말을 들어야만 고된 하루를 인정받는 것 같았다. 몇 번을 물었지만, 류정은 단 한 번도 진화가 원하는 답을 하지 않았다.
“일당 9만 원 치고는 괜찮죠.”
도대체 어떤 일을 해왔길래 이 고된 작업도 괜찮다는 건지, 9만 원에 적합한 노동이란 얼만큼인지, 진화는 가늠하기 힘들었다. 주 5일을 일하면 한 달에 200만 원 남짓. 이 정도의 일을 매일 해야 그 돈을 번다는 뜻인데, 진화는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앞으로 먹고 살 일이 막막했다. 불안정하게 떠도는 삶을 이어갈 수 있을까. 쉬엄쉬엄하자며 추임새를 건네던 여주까지 없는 탓에 쉴 타이밍을 놓쳤고 결국 기진맥진했다.
처음 여길 오면서 세웠던 목표인 ‘단 두 발’은 색이 바래가고 있었다. 목적만 이루면 그만두려 했지만, 그 생각도 희미해졌다. 사격장을 그만두면 생활비를 어떻게 감당할지 그 생각뿐이었다. 다른 일을 알아봐도 죄다 단기 근로뿐이었다. 사격장을 박차고 나간다 한들, 또 다른 사격장뿐이다. 벌어먹는 비루한 굴레에서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았다.
10
단체 손님도 어느덧 끝이 보였다. 하니 안 하니 실랑이를 벌이던 소년도 사격을 시작했다. 옆자리에서 두세 명이 바뀌는 동안 한 자리를 지키는 아이였다. 한껏 경직되어 발사될 때마다 경기를 일으켰다. 진화가 그만하겠냐고 물어도 방아쇠만 당겼다. 교단의 경력 때문인지 진화는 가르치는데 욕심이 있었다. 명중률이 낮은 아이 옆에 붙어서 개머리판이 어깨에 밀착하도록 견착 자세를 고쳐주고, 총구 높이를 조절해 주었다. 반복해서 설명해도 소년은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느낀 진화가 소년의 눈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총을 쏠 때마다 경련을 일으켰다. 한결이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진화가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굳이 다 하지 않아도 돼요.”
진화가 그만하라고 해도 소년은 나지막하게 수를 세며 방아쇠를 당겼다. 소년을 인솔해 온 태권도장 부관장이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뭐 하냐? 안 쏴?”
부관장이 고함을 질렀고 대기석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순서를 기다리던 아이들이 “저 쫄보 자식이”라며 비아냥거렸다.
여덟 발을 쏘았을 때였다. 소년이 갑자기 뒤돌아섰다. 자물쇠로 잠겨있어야 할 공기소총을 버쩍 들렸다. 총구가 대기석을 향했다. 한 아이가 “야! 괜찮아 장난감 총이야”라고 했고, 다른 아이가 “시발! 공기소총은 실탄이야”라고 소리쳤다. 소년이 부관장을 쳐다봤다. 총구가 부관장에게로 이동했다. 부관장은 소년의 한 걸음 앞에 있었고 그 옆이 진화였다. 장난감 총이라도 치명상을 부르는 거리였다.
“왜 이래? 이 새끼, 아니… 진정해. 안 쏘고 싶으면 안 쏴도 된다고.”
소년이 부관장에게 한마디 했다.
“제 이름 알아요?”
“이 상황에서 그런 게 왜 중요하냐? 총 내려놓고 말로 해.”
소년이 총을 들고 부관장에게 더 바짝 다가갔다. 사용 전인 납탄을 점퍼 주머니에 넣었다. 부관장이 쏴보라며 가슴을 들이밀었다. 소년이 부관장의 가슴을 겨누었다가 천장으로 쏘았다. 천장에 납탄이 꽂혔다. 부관장이 소년을 칠 기세로 다가갔다. 뒷걸음치던 소년이 총을 들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탄창은 비었지만, 주머니에 열두 발이 들었다. 직원들이 놀라서 따라가고 손님들이 우왕좌왕했다. 소년은 주차장을 지나 옹벽을 기어올라 산으로 들어갔다. 뒤따라가던 부관장은 옹벽 앞에서 멈춰서 숨을 몰아쉬었다.
사격장은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시와 도 경계 지역으로,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 산림이 제법 넓었다. 산 너머에 사찰과 수녀원, 총포사가 있었고 그곳들로 연결된 산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소년이 산속으로 사라지자, 관장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관장은 전투체험장에서 초등학생들을 인솔했고, 중학생들은 부원장이 데리고 다녔다. 한결이 줄곧 지키다 잠깐 화장실 간 사이에 사달이 난 것이다. 원장은 소년을 찾아오지 않으면 사격장을 관리 소흘로 고소하겠다고 협박했다. 119에 신고하고 직원들이 소년을 찾아 산으로 들어갔다.
진화는 어리둥절해하며 자리를 지켰다. 단톡방에 메시지가 줄줄이 올라왔다. 총기 관리자를 색출하는 중이었다. 누가 자물쇠를 채우지 않았나? 총기를 세팅하면서 빠뜨렸거나, 점검하다 잊었을 수도 있다. 근무표를 샅샅이 뒤지던 직원들이 한시직이 있는 단체대화방임을 깨닫고 나가달라고 했다.
곧이어 한시직은 새로운 대화방에 초대받았고, 비밀로 해달라는 당부를 받았다. 조사 중인 사안이니 외부에 새 나가지 않게 해달라고 강조했다. 어쩌다 실수가 커져 버렸고, 재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그렇게 일이 덮어질지 모르겠지만, 소년이 장전이라도 한다면 그래서 누군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실수나 불운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수렵 허가 기간이라 산은 위험했다. 경찰과 소방관이 출동해 산을 수색했다. 산을 잘 아는 포수들이 동원되었다. 멧돼지가 출몰하는 지역이라 비관적인 추측이 나돌았다.
소년을 찾으러 올라간 사람들까지 길을 헤맸다. 흐린 날이라 다섯 시인데도 벌써 어둑해졌다. 직원 서너 명을 따라간 류정 또한 돌아오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 되어도 소년은 행방이 묘연했다. 퇴근을 지시하는 직원도 없었다. 진화와 여주는 류정을 두고 퇴근하기도 어려웠다. 류정의 경차인 레이 주위를 서성였다. 차는 칠엽수 아래 주차되어 있었다. 와이퍼에 떨어진 열매를 여주가 휴지로 싸서 멀리 던졌다.
“겉모양은 밤이지만 독성이 있어요.”
여주가 손끝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으며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진화가 혹시나 하면서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문은 열려 있었다. 내비게이션과 오디오 시스템은 그냥 봐도 최신형이었다. 뒷자리는 평평한 바닥으로 개조했고 책 몇 권이 널브러져 있었다. 코펠과 버너가 갖춰져 있어 생활한 흔적이 다분했다.
*
산에는 새들이 살지 않는다. 류정은 총성에도 새들은 날아오르지 않는 산속이 늘 궁금했다. 산에 사는 새는 귀가 사라진 변종뿐이리라. 귀가 사라진 건 동물만이 아니었다. 류정은 소년을 따라나섰다. 소년은 처음부터 위험해 보였다. 소년에게서 류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총을 두려워하면서도 강해진 느낌에 도취한 소년을 보았다. 울면서도 방아쇠를 당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총성이 주는 쾌감 때문이다. 류정은 그 순간의 쾌감을 기억한다.
사건이 일어난 그날 밤, 친구들과 만나 중심가의 뒷골목을 걸었고 담배를 피우며 걷는 남자와 어깨를 부딪쳤다. 남자는 담배를 떨어뜨렸고 류정이 그걸 밟았다. 골목은 으슥했고 지나가는 이도 없었다. 녀석은 류정의 머리를 휘갈겼고 무차별적인 폭력이 이어졌다. 얼굴을 집중적으로 공격당한 류정은 엉망으로 부었다.
녀석은 유치장에 들어갔다가 나온 게 다였다. 쌍방 폭행을 주장한 거였다. 녀석은 셔츠가 찢기고 손톱으로 할퀸 자국으로 전치 6주 진단서를 제출했다. 류정의 상처는 전치가 불가능해서 저울질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법의 천칭은 불합리했다. 탄원서를 제출하고 고발도 해봤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러니 직접 나설 수밖에. 류정은 단도와 총을 들고 그의 단골집 앞에서 기다렸다. 칼을 들이댔을 때 그는 재밌다는 표정이었다. 녀석이 류정의 손을 쳤다. 칼이 쨍그랑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류정은 크로스백에서 총을 꺼냈다. 총 앞에서 파르르 떨며 비굴하게 어깨를 오므리던 모습이란. 류정은 그걸로 됐다 싶었다. 그때 진화는 한 발을 앞으로 내밀고 개머리판을 오른쪽 어깨에 밀착시켰다.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쥔 상태에서 왼손으로 총열 덮개를 감쌌다. 조준하는 동안 류정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류정은 방아쇠를 당기는 대신 개머리판으로 녀석의 어깨를 밀쳤다. 남자가 가슴을 쥐고 통증을 호소하다 기분 나쁘게 웃었다.
“장난하냐?”
“장난 같냐? 너는 나한테 벌써 죽었어.”
“뭐?”
“넌 사라진 사람이라고.”
“어디서 장난감 총 가져와서는 뭐?”
“상종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니 탄이 아깝지. 부족하면 얘기해. 진짜로 죽게 해줄게.”
11
사격장을 발칵 뒤집은 소년은 진화에게 차해를 생각나게 했다. 총기를 반출해 소동을 일으킨 소년은 자신의 행동이 불러온 결과에 당황해했다. 소년은 집으로 가고 싶었고, 총을 둘 곳이 없어서 가져갔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집 앞에 몰려있는 사람들을 보고 놀라며 순순히 총을 반납했다. 소년은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규정상 심신상실자는 실탄 사격이 금지됐다. 일일이 확인하지 못한 사격장도 잘못이지만, 규정을 공지받고도 따르지 않은 학원 측의 책임도 컸다. 게다가 미성년자였다. 상황이 복잡해지자 조용히 넘어가자는 분위기가 되었다. 쉬쉬하는 사이 차츰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다만 진화만이 서늘한 꿈에 시달렸다. 시작은 죽은 비둘기였다. 진화는 자기를 쳐다보지 말고 날개를 펼치라고 소리쳤다. 새가 날아올랐다. 안개가 산 위에서 내려왔다. 그 순간, 누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차해였다. “샘!” 차해가 진화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진화는 진정하라며 달랬다. 차해가 원망하는 투로 뭐라고 했는데 들리지 않았다. 차해가 몰고 온 수증기가 성큼성큼 움직였다. 총구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진화는 오랜만에 동료 교사에게 전화해 안부를 물었다. 슬그머니 차해 얘기를 꺼내 소년원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기가 당한 그대로 친구를 발가벗겨 팼는데, 아버지는 합의금을 내주지 않았다. 피해자는 가정 형편이나 교우 관계나 차해와 처지가 비슷했다.
그날 이후로 죄수복을 입은 차해가 진화의 꿈에 찾아왔다. 차해는 진화에게 총구를 겨누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돈이 아니라 벌을 주지 그랬어요.” 총알이 진화의 심장을 꿰뚫었다. 가슴을 부여잡고 새벽마다 깨어났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딱 두 발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두 발로는 부족했다. 총구 끝에 놓고 싶은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그러다 진화는 한 발만으로도 가능한 묘안을 생각해 냈다. 자신만 끝내면 되는 싸움이었다. 이상하게도 편안해지면서 피로가 몰려왔다.
“왜 그렇게 힘이 없어 보여요?”
여주가 진화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진화는 예전 같으면 손님이 있을 땐 되도록 서 있으려 노력했지만, 이제는 주저 없이 앉았다. 여주는 여전히 손님이 있으면 앉지 않았다. 고객에 대한 예의를 고집했다.
가을이 깊어지자, 직원이 류정에게 재계약 의사를 넌지시 물었다. 진화와 여주에게는 묻지 않았다. 류정의 차 문을 열어본 뒤로 류정에게 말할 수 없는 사연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물어보지 못했다. 차를 몰래 엿본 것도 설명하기 어려웠고 물어본들 류정의 성격상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 뻔했다. 다들 자기 코가 석 자기도 했다.
여주는 삼촌이 운영하는 주간보호시설에서 주중 이틀을 시간제로 일했다. 조카가 해외에 거주한다고 했다. “혹시 알아? 나한테 물려줄지”라며 사격장 일에 지장을 주지 않으려고 이틀만 일했다. 여주는 친척이라 눈치를 덜 봐도 된다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끈하다고 했지만 지쳐 보였다. 틈만 나면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만 봐도 알았다. 예전에는 손님을 다 처리하고 나서야 화장실에 뛰어가던 여주였으니까.
진화는 학점은행제로 사회복지학과 2학기를 마치고 실습 장소를 알아보고 있었다. 한 달 실습을 마쳐야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딸 수 있었다. 자격증은 따려면 실습과 한 학기 수업을 더 이수해야 하지만, 벌써 구인 광고를 찾아보고 있었다. 40대 이하로 나이를 제한하는 곳이 많았다. 인터넷 카페를 보면 50대 학은제 출신은 사복 취업이 어렵다는 경험담이 많았다. 사복은 사회복지사, 학은제는 학점은행제의 줄임말로 카페에서 공공연히 사용되는 용어였다. 진화는 교육대학원까지 마쳤지만, 고학력과 취업 가능성은 무관했다. 새로 작성할 이력서에도 관련 경력란은 텅 비어 있을 것이다.
직원이 공단 사정상 당분간 인력 충원이 없다고 밝혔다. 세 사람과 재계약은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진화는 채용 사이트를 더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교육청뿐 아니라 시청, 구청 홈페이지를 뒤지고 ‘나라 일터’를 틈만 나면 들어갔다. 자격 조건이 까다롭지 않은 일이면 지원서부터 넣고 봤다. 보건소 민원 안내원은 서류 접수도 줄을 설 정도로 지원자가 많았다. 대기실 옆자리서 기다리던 지원자가 자기도 무경력이지만 지원해 본다고 했다. 귓속말로 내정자가 있을 거란다. 진화는 공립학교 경력서를 제출했다. 공공기관 경력이 일 년 이상이면 가산점이 5점이었다. 담당자가 진화의 서류를 훑어보더니 가산점 없음에 표시했다. 관련 업무가 아니라는 이유였다. 진화가 관련 업무가 뭐냐고 물으니, 담당자가 민원 전화를 받고 서류를 떼주는 일이라고 답했다. 진화는 서류전형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사는 일이 전쟁인데, 굳이 돈을 들여 체험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날씨가 선선해지자, 모의 전투 예약이 부쩍 늘었다. 진화는 연일 체험장에 투입돼 진이 빠질 대로 빠졌다.
사무실에서 사인을 하고 평소처럼 복도를 걸어가는데 여주가 쉬어가자고 했다. 사무실 앞에 조성된 잔디 공원이었다. 여주와의 대화가 늘 그렇듯 결국 앞으로 먹고 살 궁리로 흘러갔다.
“요새는 N잡러가 되라잖아요.”
남편의 퇴직을 앞두고 여주도 고민이 깊었다.
“말이 좋아 N잡이지, 한시직 여러 개 돌란 말이잖아.”
진화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한시직도 오래 할 수 있으면 그것도 괜찮지 않아요?”
여주가 진화를 쳐다보며 말했다.
“한결처럼?”
진화가 한결을 말하자 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같이만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주말 한시직을 굳건히 지키는 한결은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
뒤늦게 온 류정이 웬일로 옆에 와 앉았다. 세 사람이 바깥에서 나란히 앉아보기는 처음이었다. 커피라도 마시면 좋을 텐데, 사격장에는 자판기 하나 없었다.
“이 동네는 참, 아무것도 없다.”
진화가 말했다.
“민가가 없으니까 사격장이 들어섰겠죠.”
류정이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 말했다.
“우리 동네는 순 아파트 단지인데.”
여주가 플라타너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성당의 첨탑이라서 좋아요.”
진화가 두 손을 공손히 모으면서 말했다.
“우리 동네는 목욕탕 굴뚝!”
류정의 말에 세 사람이 웃었다. 개미가 빠른 속도로 나무를 기어오르고 내려왔다. 진화는 고개를 돌려 나뭇잎의 뒷면을 살폈다. 햇빛을 받는 앞면보다 연한 초록빛이다.
“참, 뉴스 봤어요?”
여주가 무슨 대단한 소식이라도 전하려는 듯 말했다.
“무슨 뉴스요?”
진화와 류정이 동시에 물었다.
“어제저녁 뉴스 보니까 낯익은 얼굴이 나오라고요. 이것 좀 봐요.”
여주가 자원봉사 대상 시상식 사진을 확대해서 보여주었다. 자봉씨였다. 못 보는 사이 얼굴에 살이 붙어 있었다. 기사에 따르면 자원봉사자에도 등급이 있고, 최고 등급은 우수 봉사자이다. 일 년에 50시간을 채우면 우수 봉사자증을 받는다. 보상에는 관심 없다던 자봉씨는 ‘최우수 봉사자’ 패널을 흔들며 헤실거렸다. 진화는 VR 체험관에서 놀러 왔냐고 핀잔을 줬던 직원이 떠올라 웃었다. 그 직원이 자원봉사자였다는 사실보다는 덜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우리도 사진 한 장 찍을까요?” 진화가 물었다. 류정이 “전 별로요.”라고 잘라 말했고, 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진화가 대답했다.
세 사람은 사격장에서의 마지막 달을 보내고 있었다. 석 달로 시작한 일이 계절이 바뀌고도 이어졌다. 진화는 이제 정규직을 꿈꾸지 않는다. 애초에 한 번도 발 딛어보지 못한 영역이었다. 계약직에 만족하자는 다짐도 착각이었다. 수없이 이력서를 넣었지만, 약속이나 한 듯 묵묵부답이었다.
류정은 주민센터에서 행정 보조를 잠깐 했지만, 지금은 사격장만 다닌다. 여주는 주부습진이 악화해 요양원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 세 사람 모두 주중 일자리 전쟁에서 고군분투하다 사실상 패배했다.
모의 전투라면 총을 맞아도 죽지 않는다. 기지로 달려가 리스폰 버튼만 누르면 살아난다. 현실에도 그런 버튼이 있다면 어떨까. 여주가 운을 떼면서 재벌가 막내딸로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진화는 욕심이 과하다며 생활비가 따박따박 입금되는 건물주면 더할 나위 없겠다고 했다. 여주가 요즘 같은 불경기에 과욕이라며 투덜댔다. 가만히 듣던 류정이 정규직만 일하는 직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여주와 진화가 동시에 왜? 라고 반문했다. 겨우, 고작, 기껏, 그까짓 것과 리스폰을 바꾸겠냐는 의미였다. 류정의 속을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류정은 일보다 공정한 대우가 중요한 사람이었다.
“하긴 되살아났는데 한시직이면 서글프겠다.”
진화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공감대가 이뤄진 덕분인지 류정의 말이 편안해졌다. 류정은 독립을 위해 집에서 나와 생활하지만, 조만간 모아둔 돈으로 전셋집을 구할 거라고 했다. 언젠가는 레이를 타고 대륙을 건너는 것이 꿈이라고. 이렇게 조금씩 벌어서 언제 이뤄질지 모르겠다며 쓸쓸히 웃었다.
진화는 두 발이면 될 것 같던 계획을 미루기로 했다. 권총을 빼내는 데 성공한다 치자. 집 앞에까지 간다고 해도 그다음 상황이 그려지지 않았다. 방아쇠를 당기고 피가 흥건한 상황을 두 차례나 겪을 자신도 없었다. 두 발이 힘들면 한 발이어도 괜찮으리라. 차라리 자신을 겨누면 이 꼴 저 꼴 안 보고 효율적이지 않은가. 진화는 혜안을 발견한 뒤 묵은 체증이 내려갔다. 진화는 남은 기간을 헤아리고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계약기간이 끝날 때까지 한 달이 남았으니 서두르지 않아도 됐다.
하늘에서 시작된 총소리가 산에서 메아리처럼 울렸다.
“직장이 전쟁터네요.”
류정이 말했다.
“세상이 전쟁터지. 인생은 전쟁이고.”
여주가 말했다. 시간 날 때마다 전자책을 읽더니 제법이다. 세 사람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주의 말에 동의했다.
“어디서 총소리가 나는 거지?”
진화가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클레이 사격장보다 더 가까이서 들리는 것 같아서였다.
“언니는 목소리가 너무 커요.”
류정이 진화를 쳐다보며 말했다. 총소리가 연달아 났고 점점 더 가까이서 들렸다.
“총소리가 더 크잖아요?”
진화의 말에 여주가 손을 귀에다 붙이고 총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류정이 그만 일어서자고 말했다. 점심시간이 이십 분이나 남았다고 해도 늦는 거보다 낫다고 서두르자고 했다. 하나도 놓치면 안 된다, 철저한 일 처리는 몸값을 높인다던 류정의 말을 떠올리며. 그래봤자 최저 임금보다 기껏 조금 더 많은 한시직이지만, 치열하고도 처연한 그들의 일을 위해 잠깐의 휴식을 마치고 사격장으로 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