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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연대기: 멸망 이후에도 살아남는 세 가지 시적 방법

by  박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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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나 연대기: 멸망 이후에도 살아남는 세 가지 시적 방법
    ―고선경, 신이인, 변혜지의 첫 시집을 중심으로―




    1. 멸망 이후의 수잔(들)

    『사자와 마녀와 옷장』으로 시작하는 C. S. 루이스의 판타지 아동문학 시리즈 ≪나니아 연대기≫(1950~1956)에는 나오지 못한 마지막 권이 있다는 설이 있다. 루이스의 이른 사망으로 그가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에 흔적만 남았다던 그것은 지금의 완결작 『마지막 전투』 후의 이야기, ‘나니아의 수잔Susan of Narnia’이다. 수잔은 누구인가? 그는 줄곧 주인공 격이었던 4남매(피터-수잔-루시-에드먼드) 중 둘째로, 이중 마지막 전투로 나니아가 ‘멸망’한 후에도 새롭게 아슬란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한 유일한 인물이다. 오직 수잔만이 열외된 까닭은 그가 더 이상 나니아를 ‘믿지 않아서’다. “나일론과 립스틱, 초대장에만 관심이 있”고 “늘 어른이 되려고만 안달했다”던 수잔은 이제 나니아란 “유치한 어릴 적 놀이”일 뿐이라며 다른 남매들을 면박 주기까지 한다. 그래서 나니아를 위해 용감히 싸운 남매들이 사후 아슬란의 나라에서 영생과 명예를 누릴 때 수잔만은 홀로 현실의 런던 거리에 남겨진다. 나머지 남매들은 대형 열차 사고로 잃은 것이며, 자신이 옷장 속으로 들어가 직접 체험했던 나니아라는 나라는 어릴 적 상상일 뿐이라 믿은 채로.
    ≪나니아 연대기≫가 실은 성서의 알레고리이며 아이들의 기독교 교육을 위해 기획되었음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지금 여기로부터 70년은 더 된 영국의 기독교적 아동문학을 2020년대 한국 시를 다룰 이 글에서 길어올린 까닭은 그러나 루이스의 질문과 같은 데서 출발한다: 수잔은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가? 멸망 이후를 살아가는 수잔(들)의 거취는 지금 여기 우리의 시대에서도 여전히 발견되는 듯하다. ‘믿을 만한’ 것들이 사라진다. 어릴 때나 믿던 환상과 기대 같은 것은 접어두고 ‘어른’의 세계에 편입된다. 이걸 ‘멸망’이라 불렀으나 실은 그것도 거창한 듯싶다. 멸망 이후 우리에게 찾아온 것은 으레 연상되듯 심판의 지옥불이라든가 무법지대 아포칼립스 따위가 아니라 그저, 현실의 자질구레한 일상일 따름이다. 나일론과 립스틱, 초대장 말고는 딱히 빛나는 것도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무언가 분명한 포즈를 취하지 못한 채, 있던 것이 없어진 줄도, 있어야 할 게 없는 줄도, 멸망이 멸망인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

    “자, 이번에는 금지어 미션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는 단어는 시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세계, 미래, 사랑, 기계, 영원, 천사, 바다, 숲, 여름, 겨울, 비, 눈, 유령, 죽음!”

    습작생들은 탄식했다 심하게 좌절한 습작생의 경우 상담 치료를 신청하기도 했다

    A는 세계, 미래, 사랑, 기계, 영원, 천사, 바다, 숲, 여름, 겨울, 비, 눈, 유령, 죽음을 모두 사용하여 프로그램을 비판하는 시를 썼고 퇴소라는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 A를 제외한 대부분의 습작생은 다행히 세계, 미래, 사랑, 기계, 영원, 천사, 바다, 숲, 여름, 겨울, 비, 눈, 유령, 죽음을 대체할 단어를 찾았으나 I는 마지막까지 사랑을 잃지 못했다
    (…)

    *

    미미한 투표율에도 극적으로 K가 최종 우승자로 뽑혔다 K는 많은 축하를 받았다 여러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으며 각종 문예지에 시를 발표했다 K의 시는 재치 있는 발상과 첨예한 감각이 돋보인다는 평을 받았다 우승 상금 일억원은 큰 액수였으나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는 아니었고 인생을 뒤바꿔줄 액수도 못 되었다 세금을 제하면 더욱 그랬다 K의 블로그 방문자 수가 늘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러나 이제 곧 K의 시집이 출간된다고 한다 곧

    출간된다고만 한다
    - 고선경, 「스트릿 문학 파이터」 부분 (63~70)

    무언가 분명 멸망했다. 근데 그게 도통 뭔지 알 수가 없다. 그러한 감각이 2020년대 시에 들어서는 “세계, 미래, 사랑, 기계, 영원, 천사, 바다, 숲, 여름, 겨울, 비, 눈, 유령, 죽음!” 같은 시어들로 건져올려지는 듯하다. 위 시에서 “세계 최초 시 서바이벌 오디션”을 표방한 가상의 프로그램 ‘스트릿 문학 파이터’에서 이 단어들을 모조리 금지하자 습작생들이 “탄식”하고 “심하게 좌절”하는 모습은, 이들이 이제 우리 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재가 되어 버렸단 점을 농담스럽게 보여주지만 동시에 우리는 왜, 언제부터 이런 시어들에 기대게 되었는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전에 비해 최근의 젊은 시인들, 그러니까 2010년대에 활동을 시작한 대체로 1990년대생 시인들의 시에서 ‘세계’, ‘미래’, ‘신’, ‘죽음’ 등의 시어가 마치 난립하듯 많이 나오는 현상이 하나의 시류를 형성할 정도임은 이미 한 차례 주목된 바 있다. 마찬가지로 2020년대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시대감각은 상실 이후, 세상에 대한 기대 자체가 사라져버린 시대의 무능감을 체화하는 데서 시작하는 듯이 보인다. 현실의 세목은 감당하기 어려워지고 세계, 신 같은 거대한 시어들의 의미는 가벼워졌다. 우리는 무엇을 잃었는가? 굳이 사회학적인 논의를 길게 덧붙이지 않더라도, 무언가 열심히 노력하면 삶이 달라질 거란 믿음이 곳곳에서 사라지고 있는 시대. “투룸 신축 빌라 보증금 이천 월세 구십”(「샤워젤과 소다수」)같이 지금 여기의 일상을 사는 중인 고선경의 화자들은 대개 어른은 되었으나 “어른스러운 어른”은 되지 못해서 불안을 느끼고 있는 존재들이다(「땅콩다운 땅콩」). 그 일상을 채운 주된 정서는 “매년 연장되는 여름처럼”(「연장전」)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지긋지긋함이다. 그러니 그들이 “교수님이 무서워서 돌연사! / 인생이 너무 심심해서 돌연사! / 애인이 생기지 않아서 돌연사!”(「살아남아라! 개복치」)처럼 일상의 순간순간 돌연 ‘돌연사!’를 꿈꾸는 데 밑에는 단순히 농담뿐이 아닌 무언가 더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고선경의 농담들이 파괴적인 까닭은 그것들이 동시대 청년들의 당사자성을 띠고 시대의 난관을, 또 나아가 시의 난관을 적극적으로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위 시 「스트릿 문학 파이터」에서, Mnet 여성 댄스 크루 서바이벌 <스트릿 우먼 파이터>를 패러디하며 처음에 농담처럼 시작했던 시의 분위기는 프로그램의 저조한 시청률이 드러나면서 점차 어두워지다 못해 인용된 대목에 와서는 아주 까마득해지기까지 한다. “처참한 시청률과 대중의 무관심” 속에 “심사위원과 습작생 모두 알 수 없는 무력감에 젖어 있”는 프로그램 최종화의 분위기는 분명 예전 시대의 시 쓰기와는 무언가 다른 감각이다. 여기서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울면 “[시 쓰라고] / [누가 칼 들고 협박함?]”이란 냉소가 돌아오는 시대, 아무리 열심히 시를 써도 “블로그 방문자 수가 늘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현실만을 확인할 뿐이라면.
    이것은 정말로, 멸망한 시대다. 하지만 70년 전 루이스가 그랬듯이, 우리가 여전히 남겨진 자들의 거취를 묻는 한 멸망이 멸망으로서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같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수잔은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가? 우리는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가. 혹은 될 것인가.


    2. 우리 모두 조금씩은 이인증을 앓고 있다

    멸망 이후를 묻기 전에 그 전까지의 과정을 잠시 되짚어본다. 앞 장의 논지, 그러니까 최근 시에서 주체의 영향 범위는 더욱 좁아졌고 주체는 그 좁은 영역만이 전체 세계라고 상상하게 되었다는 진단에 더하여, 2000년대 이후의 한국시는 주체가 ‘해체’되고 ‘줄어드는’ 과정이었다고 거칠게 요약해 볼 수 있겠다. 아예 근대 이전부터로 본다면 ‘세계와 일치하는 주체-시대와 대면한 주체-일상 속 주체-해체된 주체-줄어드는 주체-(…)’ 등으로 ‘나’의 자리가 현격히 좁아지는 현상은 더욱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주체의 영향 범위가 좁아지다 못해 이제는 ‘자기 자신’보다도 더 좁아지는 정도에 이르렀다면, 그래서‘나’보다 미만한 지점에 선 주체가 자기동일성과 통합체로서의 주체를 해체하고 자기 안의 타자화된 영역과 대면한다면,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이질감과 낯선 감각이 2020년대 최근 시의 한 경향성을 이루고 있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이런 증상이다. 너무나 낯설고 나조차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나. 내 안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모멸감을 느끼고 감추고 싶은 나. 어느 정도는 자기혐오에 기반한, 하지만 그래서 나밖에 알아봐줄 사람이 없는 나가 있다. 우리는 그러한 나-나의 분리 감각을 최근 시의 이인증(離人症, 자기가 낯설게 느껴지거나 자기로부터 분리, 소외된 느낌을 경험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지각하는 데에 이상이 생긴 상태)적 주체라고도 불러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체-타자의 자리는 재조형된다. 2000년대의 주체가 ‘타자 되기’의 미학을 실험했고 2010년대의 주체가 ‘타자 되지 않기’의 윤리를 지켰다면 2020년대의 주체는 이제‘주체 안에서 타자(성)를 마주치는’, ‘내 안의 타자(성)를 발견하기’에 왔다는 한 가지 다른 대답이 가능해진다. 최근 시의 특징 중 하나로 ‘메타적 자아의 중층화’ 등이 거론되는 연유도 이렇게 주체의 후퇴와 이인증적 주체로써 읽어낼 수 있다면, 이제 주체가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타자’라는 (불)가능성의 영역은 다름 아닌 주체 그 안에 살아, 공존한다.

    밉다. 미워해. 이런 말은 모서리도 둥글고 또 귀엽게도 보여서
    나는 나를 설명할 때 그런 스티커를 자주 썼다

    오래된 스티커를 떼 내면 끈적하고 시커먼 자국
    경멸해

    화장실 타일마다 기분 나쁘게 끼어서
    빡빡 닦아도 안 닦이는 애들
    거기 있으라 하고
    두는 수밖에 없었지

    매번 그런 애들 앞에서 팬티를 내렸다

    네가 어디를 제일 부끄러워하는지
    어디를 공들여 씻었는지를 알고 있어

    머리카락이 너무 길다고 귀신 취급을 받을 때 많았지만
    할 수 없었지
    나는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려야 했다

    -신이인, 「검은 머리 짐승」 전문 (111~112)


    신이인의 시에서 ‘나’가 가장 주요한 그리고 문제적인 키워드인 까닭은 ‘내가 나에게서 떨어져 있는 감각’ 혹은 ‘내가 나 바깥에 존재한다는 감각’ 때문이다. 그것은 때로 “몸 안의 몸이 주춤하는 기분”인 멀미의 감각으로 형상화되기도 하고(「멀미와 소원」) “액자에 걸린 용의자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 “누나, 이거 거울인 거 알아?””(「스톡홀름 증후군」)처럼 거울을 사이에 둔 나와 나의 대치 장면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나를 나로부터 빠져나가게 / 해봐 / 해봐 / 해 봐 / 진심이야 해 봐”(같은 시) 등등 신이인의 시에서 자주 나와 나를 소격하려는 시도가 발견되는 것은 “내가 나인 이상 알 수 없는 기분이 존재”(「외로운 조지-Summer Lover」)한다는 이러한 이인증의 감각과 연동되어 있다.
    “밉다. 미워해 (…) 경멸해”라는 다소 직설적인 자기혐오로 시작하는 위 시 「검은 머리 짐승」은 그러한 감각을, 더 나아가 ‘검은 머리 짐승 사전’이라는 이 시집의 표제를 설명하는 실마리다. 오른쪽 정렬된, 자신이 붙였던 화장실 바닥 스티커 자국의 시점으로 발화하는 부분은 또다시 ‘나’를 관찰하는 ‘나’ 구도를 만들어낸다. 이들은 화자가 “제일 부끄러워하는” 동시에 “공들여 씻는”, 내 가장 숨은 안쪽의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 이처럼 신이인에게 ‘검은 머리 짐승’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나 자신의 모습을, 그 짐승을 기록한 ‘사전’은 나를 설명한 시집을 뜻하는 메타적인 메타포다. 표제작 「검은 머리 짐승 사전」에서 “이 사전을 출판하게 되기까지의 일들을 헤아려 봅니다. 나는 내가 아는 가장 큰 짐승에 대해 말하려고 했어요. (…) 천천히 둘러보세요. 페이지마다 기념할 만한 품종을 재현해 두었습니다.”라 말하는 것과 같이, 시집 도처에 깔린 ‘나방’, ‘고슴도치’, ‘뱀’, ‘그리마’, ‘코끼리거북’, ‘바다바퀴벌레’ 등 다양한 품종의 ‘짐승’들은 비유적으로 ‘나’를 지시한다 볼 수 있다. 신이인의 화자들은 자신을 낯설게 여기고, 때로는 경멸하며, 또 그것을 ‘짐승’으로 적극적으로 타자화한다.

    오리너구리를 아십니까? / 오리너구리, 한 번도 본 적 없는 // 고아에게 아무렇게나 이름을 짓듯 / 강의 동쪽을 강동이라 부르고 누에 치던 방을 잠실이라 부르는 것처럼 // 나를 위하여 내가 하는 일은, / 밖과 안을 기우는 것, 몸을 실낱으로 풀어, 헤어지려는 세계를 엮어, / 붙들고 있는 것 // 그러면 사람들은 나를 안팎이라고 부르고 / 어떻게 이름이 안팎일 수 있냐며 웃었는데요 // (…) // 요괴는 그런 식으로 탄생하는 겁니다 // (…) // 잊을 수 없다 / (…) / 안에도 밖에도 속하지 못한 / 실오라기 / (…) / 불을 켜세요 / 외쳐 보는 겁니다 / 아, 이상해.
    - 「작명소가 없는 마을의 밤에」 부분 (15~17)

    이인증적 주체, 즉 나와 나 사이에서 낯섦과 이상함을 감각하는 존재는 따라서 안과 밖 사이에 있는 존재, 안과 밖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 그래서 ‘안팎’이란 감각에 기민할 수밖에 없는 존재일 것이다. 신이인의 시편들에서 유독 ‘안팎’을 가진 시어들이 많이 발견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소리 내며 저절로 열리는 서랍”(「투성이」), 흙이 들어있는 화분(「멀미와 소원」), 도자기와 도자기 속 물(「폴터가이스트」), 여러 잡동사니들이 들어있는 가방(「왓츠인마이백」),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안쪽”을 가진 의류수거함(「의류수거함」) 등, 이들은 안쪽의 것이 누출되거나 보여서는 안 되는 것들이지만, 대개 신이인의 시에서는 종국에는 이것들이 깨지거나 열리거나 빠져나오는 식으로 대상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문다. 그러니 위 시 「작명소가 없는 마을의 밤에」에서 화자가 다름 아닌 “안팎”으로 명명된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오리너구리”처럼 대상의 표면적인 특성만으로 손쉽게 본질을 명명짓는 사람들과 달리 오리너구리는 실제로 오리에도 너구리에도 속하지 못하며, 따라서 안팎이라 불리는 화자 역시 “안에도 밖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다. 화자의 이런 ‘이상함’은 결국 “요괴”로 현현하여 세상에 대고 “아, 이상해”라고 외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이인증의 감각, 자신에 대한 혐오와 자학, “모멸감”(「올드 앤드 뉴 트라우마」) 등은 이 시집의 핵심 정서이자, 나와 나가 쉽게 화해할 수 없는 지금 시대의 공통 감각이기도 하다.


    3. 독자讀者이나 결코 독자獨子는 아닌

    멸망 이후 세계에 대한 상상력, 그리고 나-나로 분리된 이인증적·복수태적 주체로서의 감각. 이제 살펴볼 변혜지의 시집은 지금까지의 논지를 일순 통어하면서도 또 하나의 방법론을 제출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 표제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에서 보듯이 그는 멸망 이후 세계를 상상함과 동시에 멸망 후의 실존에 대하여 묻는다. 그런데 시인이 직접 밝혔듯, 이 제목의 원전은 따로 있다. 2018년 1월 6일부터 약 2년간 문피아 등에 연재되며 메가 히트를 기록한, 본편만 551화에 달하는 싱숑 작가의 판타지 장편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이하 ≪전독시≫)에 등장하는 가상의 웹소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하 <멸살법>)이 그것이다.
    여타의 시집과 달리 한 편 시의 분량이 대체로 일정하며, 몇 부로 분절되지 않고 첫 시부터 끝 시까지를 한 호흡에 읽는 이 시집은 기실 웹소설과 마찬가지로 서사를 가지고 연재되는 한 권의 연작시집과 같다. 이 시집이 《전독시》와 여러모로 세계관을 공유하면서 그것을 거울 텍스트로 삼고 있는 이상 그 내용을 잠시 짚고 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전독시》의 주인공 ‘김독자’, 그 이름은 혼자서도 강한 남자가 되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지어주신 것이지만 그는 지친 퇴근길 지하철에서 웹소설 한편 읽는 게 낙인 평범한 28세 청년이다. 그가 읽는 웹소설은 총 연재 횟수 3149회로 무려 10년간 연재된, 하지만 사실상 김독자만이 유일한 독자인 인기 없는 웹소설, <멸살법>이다. 그런데 어느 날 <멸살법> 속 이야기가 갑자기 현실이 되면서, 김독자는 이제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 그 세 가지 방법(회귀, 귀환, 환생)으로 재앙에 맞서 게임을 플레이해야 한다.
    이후 이어지는 《전독시》의 방대한 세계관을 여기 다 옮기진 못할 일이나, 중요한 건 김독자는 (<멸살법>의) ‘독자’이며 (《전독시》의) ‘주인공’이자 또한 (나중에 밝혀졌듯 <멸살법>의 모든 세계관을 탄생시킨) ‘작가’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야기 그 자체인 이 세계를 지속시키는 힘은 그 이야기를 읽는 ‘독자’임을 유념하면서, 《전독시》라는 거울 텍스트로 이 시집을 읽을 때 또한 이 글의 논지를 잃지 않고 이 시집이 멸망한 시대의 우리에게도 유의미한 방법론을 일러준다고 읽을 때, 이 시집은 그저 난해하거나 별 의미 없이 언어적 유희만을 일삼는 최근의 가속류 시집을 넘어서 더 풍부한 의미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도 완벽한 엔딩에 실패했다고 / 신은 실망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린다. // (…) // 전생에 손에 쥐었던 낙엽이 뺨을 스쳐서, 나는 자꾸만 얼굴을 긁는다. // (…) // 시스템을 초기화하겠습니까?
    -변혜지, 「누군가 또다시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다」 부분 (28~29)

    나의 신은 육체노동을 하느라 바쁘다. / 취업 정보 사이트의 구인 공고란에서는 파트타임으로 근무할 신을 찾고 있었다. // 사무직 / 시급 9,620원 / 정규직 전환 가능 // (…) // 종종 과도한 업무로 주의력을 잃으면 화면 너머의 사람들과 // 눈을 마주친다. // 바지를 벗고 반신욕하는 사람의 영상을 나는 재빨리 넘긴다. // 가끔 나를 마주치기도 한다.

    -「Enter the World」 부분 (71~72)
    신을 뒤집으며 시작한다. 위 시들에서 볼 수 있듯 신은 “완벽한 엔딩”을 만들어내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육체노동” 혹은 “파트타임”을 하는 사무직 근로자다. 첫 시에서 “또다시 손가락을 움직”여 “시스템을 초기화”하는 신의 모습이나, 컴퓨터 키보드의 “Enter”키가 연상되는 두 번째 시 제목을 보았을 때 신은 컴퓨터 시스템을 코딩하는(《전독시》에서는 독자가 플레이할 게임을 만드는) 개발자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니 이 시집의 시적 공간은 주로 가상공간의 모습을 하고 있고, ‘꿈’은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며 시점을 전환하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두 번째 시에서 “바지를 벗고 반신욕하는 사람”은 바로 그 전에 배치된 시의 내용을 받아들고(「숏츠」), “가끔 나를 마주치기도 한다”라는 서술은 바로 그 다음 시(「무해한 놀이」,“아무리 가지고 놀아도 나는 아직 많이 남아 있다”)와 이어진다. 즉 여기서 신은 내가 처한 게임 속 상황을 만든 개발자이며, 시적 주체 ‘나’는 이 시뮬레이션을 넘나들면서 현실-가상, 주체-관찰자, 캐릭터-플레이어 등의 경계를 해체하는 일종의 메타픽션적 주체다.
    그런데 신이 그저 한 인간과 다름없는 존재로 격하되어 그려진다면, 한 인간인 ‘나’도 신과 같이 세계를 창조하거나 구원하는 존재로 그려질 수 있다는 뒤집힌 상상 역시 가능하다. 이 시집에서는 《전독시》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신의 역할을,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의 역할로 상정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 신이 멸망하도록 프로그래밍해 놓은 세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비로소, “말씀과 상관없는 삶이 시작”된다(「말씀과 삶」).

    이 세계를 네가 구했어. //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나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린다. 폐허가 된 도시에 둘러싸여서, 꿈속의 나는 아름다웠다. // (…) //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건 네가 아니야. 내가 꿈속의 나를 향해 소리치자 //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일제히 나를 노려보았다. // (…) // 비로소 이 꿈의 구성 방식을 알 것 같았고, // 나는 이 세계에 두고 나가야 할 것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 「언더독」 부분 (59~60)


    따뜻한 빵을 손에 쥔 사람들이 영원히 배고프지 않은 세계입니다. (…)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나는 자꾸만 잊어버리고, 얼굴을 잃어도 마음이 계속됩니다. 이것은 지속 가능한 사랑이에요…… 그런 말을 중얼거리다가 책을 펼치면, 페이지 속의 모든 단어가 바뀌어 있어요. 너를 주고 이 세계를 샀습니다.
    - 「탑독」 부분 (101)


    “때때로 나를 복수複數로 칭하는 버릇”(「원 히트 원더」)이나 “가족들은 내가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 가끔 서로를 깨뜨리면서 나는 내가 될 것이다.”(「내가 태어나는 꿈」) 같은 시구에서처럼 나-나를 분리하는 복수태적 주체는 변혜지의 시집에서도 주되게 등장한다. 이것이 첫 시 「언더독」에서는 ‘나’가 ‘꿈 속의 나’를 바라보는 구도로 그려지고 있다. “내가 꿈속의 나를 향해 소리치”고 “화관花棺에 누운 내가 나를 보며 웃고 있”는 장면을 볼 때, ‘나’(편의상 ‘주인공’)는 이미 세계를 구한 뒤 전사한 영웅이며 이 시는 그 뒤 주인공이 꾸는 꿈이다. 그런데 중간에 분위기가 반전되며, “사랑하는 이들이 일제히 나를 노려보”는 것을 보아하니 이 구세救世가 완전히 해피엔딩이 되진 않은 것 같다. 이에 주인공은 “이 세계에 두고 나가야 할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이 꿈에서 이탈하고자 하며, 그것이 이 꿈의 “구성 방식”이다.
    사실 이러한 환생과 회귀 모티프는 게임이나 웹소설에서 흔히 쓰는 설정이자, 《전독시》에서 죽음 후 부활을 기다리는 김독자의 스토리를 일부 연상케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글의 논지를 놓지 않고 볼 때 더 중요한 것은 이를 두 번째 시와 짝지어 읽는 일이다. 즉 변혜지의 시집이 서사를 가지고 연재되면서 시집 중반부 「언더독」이 마지막 「탑독」으로 변모했다면, 따라서 “이 세계를 네가 구했어”라는 전자의 선언이 “페이지 속의 모든 단어가 바뀌어”, “너를 주고 이 세계를 샀습니다”라는 후자의 엔딩으로 이어졌다면, 전자에서 주인공이 ‘이 세계를 두고 나가는’ 이유이자 그가 맞는 결말이 곧 후자의 “지속 가능한 사랑”이라 말해볼 수는 없을까. 그렇게 언더독이 탑독으로, 약자가 강자로, 열세가 우세로 ‘뒤집힐 때’ 우리가 만나는 것은 이 시집 전반을 관류하는 사랑의 테마다. 우리는 그것으로 다음 제목,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에 대한 이 시집의 답변을 가늠한다.

    손꼽아 기도하던 날이 도래하였고, 그리하여 모든 이들이 엽총과 포도 한 송이를 손에 쥐고 세계를 떠났다. (…)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바람에 이번 시도 실패할 것이다. (…) 그러는 동안에도 읽는 사람들이 있다. (…) 멸망한 세계에 너무 많은 자들이 남아 있어서 세계는 반쯤 질려버릴 것이다. 그러는 동안 그리고 또 그러는 동안…… 나는 눈으로 길러낸 것들을 다시 눈 속으로 넣겠다. (…) 그 말을 들은 나는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고, 그것은 이야기가 끝나버려서 더 이상 적지 못한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부분 (37~38)

    이 시는 눈동자에 남반구 식물을 심게 된 경위를 다루고 있다. 나는 내가 깨달은 것을 기록하기 위해 앉아 있었다. (…) 모든 게 끝나버렸어. 그렇게 말하면 날이 밝는다. 가자. 전부 버리고 떠나 버리자. 침통하게 말하던 사람이 직장에서 돌아와 배달 음식을 고르고 있다. (…) 눈동자 속의 나무를 가꾸는 일은 어렵지는 않아요. 눈을 감고 지켜보기만 하면 되니까요. 이 고요한 파수杷守의 행위는 사랑이 아니지만 사랑 같았다.

    -「절대 멸망하지 않을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부분 (39~40)

    변혜지 시에서 이 사랑은 결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 ‘살아남다’의 주체가 결코 하나의 단독자일 수 없음은, 이 시집의 ‘나’가 때로는 이야기 속 주인공을, 때로는 작가를, 때로는 독자를 겸임하면서 이 자체가 텍스트 간 경계를 해체하는 하나의 메타 실험이 될 때 다시 한번 드러난다. 첫 번째 시의 ‘나’가 이야기를 완결지은 작가라면 두 번째 시의 ‘나’는 그것을 밤새 완독한 독자로 대응된다. 즉 전자의 이야기가 “엽총과 포도 한 송이”로 대표되는 판타지적 멸망의 세계라면, 후자는 “직장에서 돌아와 배달 음식을 고르”는 일상의 세계다. 하지만 “눈에서 길러낸 것들을 다시 눈 속으로 넣”거나 “눈동자에 남반구 식물을 심”는 일처럼, 두 ‘나’가 하나의 깨달음으로 공명할 때 절대 만나지 못할 것 같던 두 세계가 한 눈 안에서 조우한다. 그것이 변혜지 시가 말하는 작가-주인공-독자의 존재론 혹은 생존론이다. 즉 첫 시에서 “이야기가 끝나버려서 더 이상 적지 못한” 것을 이어 적는 것은 다름 아닌 다음 시의 읽는 이의 몫이며, 그렇게 “멸망한 세계에 너무 많은 자들이 남아 있”는 한 세계는 완전히 멸망하지 않는다. 독자가 다시 작가로서 이야기의 생성에 참여할 때 이제 단일한 주체성은 해체되며, 작가-주인공-독자는 서로의 주체성이 교호되는 자리에서 서로가 서로의 생존을 보호하는 순환 구조를 만들어낸다. 그 중심에 있는 “고요한 파수把守의 행위”로서의 사랑은 결국, “실패”한 이야기일지라도 계속해서 읽는 일, 그리고 쓰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에 변혜지의 시집은 뒤표지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절대로 멸망하지 않을 세계를 살아가는 // 독자讀者이자, // 독자獨子는 결코 아닌”. 또한, 《전독시》에서 독자가 다시 주인공이자 작가가 되면서 끝내는 텍스트 안팎의 경계마저 해체되듯이, 변혜지의 시집 또한 지금 이 표지 바깥에 있는 독자들을 직접 호명하면서 복수적인 새로운 주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니 (이 시집의) 독자이자 (멸망한 시대를 사는) 주인공으로서 또 (새로운 사랑에 참여하는) 작가로서 우리는 멸망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말하게 된다. 어쩌면 그뿐만 아니다. 《전독시》 세계관에서, 오직 <멸살법>의 결말을 아는 독자만이 생존할 뿐 아니라 그 결말로 이 세계를 구할 수도 있게 됨을 기억하며 한발 더 나아가자. 마지막에 온 우리가 이 연대기로부터 더 읽어낼 것이 있다면 이 생존론을 구원론으로 바꾸는 힘이다.


    4. I는 마지막까지 사랑을 잃지 못했다

    다시 나니아와 고선경으로 돌아가 본다. 어쨌거나 ≪나니아 연대기≫에서 수잔이 맞는 결말 중 하나는 그도 결국 아슬란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었다고 보인다. “결국 수잔만의 방식으로 아슬란의 나라에 갈 거라 생각한다”던 루이스의 편지에서, 이는 성서의 알레고리로 따지자면 종말 이후 신이 현실의 인간들을 구원하는 묵시록적인 이야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신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 우리는 이러한 결말을 다시-쓰기 해볼 필요가 있다.
    멸망 이후의 세계에 일상이 남았다면, 지금까지 살펴본 세 시인의 주체들이 단지 그것에 무력하게 고립된 작은 주체로서만 소진되지 않음은 분명해 보인다. 세 시인의 시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재구성하는 방법론은 농담이며(고선경), 이인증이거나(신이인), 판타지였다(변혜지). 하지만 이 세 시집을 면면히 읽어보면 공통으로 발견되는 내용적인 요소가 있을 것이다. 또 한번의 진부한 그러나 필요한 이야기가 있다. 그러니까 신이 없이도 멸망으로부터 구원받을 방법에 대해 상상하는 일은 다시금 인간의 일로 돌아간다. 그것은 앞선 고선경의 「스트릿 문학 파이터」에서, ‘세계, 미래, 기계, 영원, 천사, 바다, 숲, 여름, 겨울, 비, 눈, 유령, 죽음’ 같은 시어가 절멸해도 잃지 못할 어떤 것이다. 이제 “마지막까지 사랑을 잃지 못했다”던 “I”에 대해 해명할 때가 왔다.

    너에게서는 멸종된 과일 향기가 난다

    투룸 신축 빌라 보증금 이천에 월세 구십, 어떻게 해야 너
    를 웃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두 시간 동안의 폭우, 일주일
    동안의 아침, 유리병 속 무한히 터지는 기포

    현관에 놓인 신발의 구겨진 뒤축이 웃는 표정을 닮았어 너
    는 침대에 누워 있고 바람이 많이 부는 청보리밭에 가고 싶
    다 멸종된 기억을 가지고 싶다 너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
    날릴 때 나는 사라진 언어를 이해하게 된다

    아침의 어둠이 이젠 익숙해
    그래도 같이 씻을까
    산책을 갈까

    세상에서 가장 느린 산책로
    쓰러진 풍경을 사랑하는 게 우리의 재능이지

    - 고선경, 「샤워젤과 소다수」 부분 (17~19)


    죽을힘을 다해 살아야 하지 죽을힘으로
    죽으면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아

    거짓말

    나는 살아남아
    시인이 됐다

    처음으로
    뭔가가 되어봤다
    - 「숨어 듣는 명곡」 부분 (153~156)

    『샤워젤과 소다수』가 최근 가장 큰 호응을 받은 중 시집 중 하나인 까닭은 이 시집 전반을 흐르는 유머 감각 그리고 과거의 향수와 결합한 감각적인 이미지 등과 더불어 곳곳에 사랑을 향한 의지와 각오가 보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 “세상에 없는 농담”처럼 우리는 멸망한 세계를 바라보며 “쓰러진 풍경을 사랑하는 게 우리의 재능이지”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첫 번째 시, 「샤워젤과 소다수」에서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멸종된 과일 향기”, “사라진 언어” 같은 멸망의 이미지를 읽어낸다. 멸망과 생활, 일상과 비일상이 묘하게 섞인 전경에서 ‘나’는 그럼에도 “같이 씻을까 / 산책을 갈까”라고 말한다. 이것이 시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도무지 전망 없는 이 세계에서 사랑하자거나 희망을 갖자는 말은 오래전 멸망한 무언가를 되살리려는 판타지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는 게 가장 어려운 시대에서 그럼에도 같이 씻고, 산책을 가는 일상은 그러니 단순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획득하는 것이다. 그렇게 고선경 시의 주체들이 “제일 잘하는 게 뭐야? 물을 때, / 일상이라고 대답하는 네가 좋았다”(「여름 감기」)와 같이 말할 때 일상은 하나의 수행적 개념으로서 우리 앞에 놓인다.
    이것은 고선경의 시가 동시대와 강력히 접합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두 번째 시, 「숨어 듣는 명곡」에서 “살아남아 / 시인이 됐다”는 말은, 이미 ‘되어 있는’ 것의 단순한 확인이 아니라 발화하는 순간 주체를 시인으로 구성하는 하나의 사건에 가깝다. 즉 고선경 시의 주체들은 언뜻 평범해 보이는 이 일상과 쓰기와 사랑이 배경처럼 먼저 와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을힘을 다해” 일상을 살고, 글을 쓰고, 사랑을 지속하며 ‘살아남는’ 일임을 아는 존재들이다. 이 살아남기의 과정에서, 주체 역시 매순간 ‘나’를 수행하며 성립한다. 신이인 시의 주체들이 자기 안(밖)의 짐승들을 경멸하면서도 사랑하면서, 그 모든 것들을 끌어안고 “나는 인간을 한다”(「영매」)고 말할 때, 변혜지 시의 주체들이 이 “고요한 파수의 행위”에서 사랑의 지속 가능성이라는 결말을 끌어낼 때 우리가 보는 것도 그 동력이다. 무위해 보일지라도, 그것이 더 이상 무력하지는 않다는 점에서 그것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독자들의 생존론이자, 죽을힘을 다해 세상을 무너지지 않게 하는 구원론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나’, 메타적 자아의 중층화라는 말 대신 이렇게도 바꿔 보자. 우리 모두 마음 한쪽에는 무언가를 혐오하는 내가 있고 한쪽에는 사랑하는 내가 있다. 고선경 식으로 바꾸면, 한쪽에는 “돌연사!”를 꿈꾸는 내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살아남아 / 시인이 됐다”는 내가 있다. 이 두 가지의 선택지에서 우리는 자주 널을 뛰며 갈팡질팡하게 되겠지만 고선경의 시집은 우리가 이 둘을 왕복하며 조금씩 단단해진다고, 또 이왕이면 사랑 쪽으로 기울어질 거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고선경, 신이인, 변혜지 세 시인으로 본 2020년대 젊은 시인들이, ‘젊은’으로서든 ‘시인’으로서든 멸망한 시대에서 살아남는 법도 이와 같다. 사랑은 단지 어떤 대상을 향한 정열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태도 자체임을 기억하면서 그리고 그것을 나와 나의 연대기라 부를 수도 있으리라 가정하면서, 이를 우리의 방법으로도 말하기 위해, 앞선 고선경의 시구에서 조심스럽게 ‘I’를 ‘나’로, ‘못했다’를 ‘않았다’로 고친다. 나는 마지막까지 사랑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이왕이면, 앞으로도 부디, ‘않겠다’라고.
    박지민

    박지민

    2000년 출생

    고려대 국어교육과 졸업,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수료

  • 신수정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김영찬 계명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응모작의 편수가 많이 늘진 않았지만 수준이 예년보다 크게 향상됐다. 문학평론이 인기 없는 주변 장르가 돼 버렸다는 세간의 인식에도 불구하고, 비평적 글쓰기에 대한 열망과 공력은 그에 반해 한층 높아지고 있다는 방증이겠다.
    최종 논의 대상에 오른 것은 ‘올드 앤 슬로우-강성은 시의 환상적 스토리텔링’, ‘‘정신머리’ 없는 감각, 말해지지 않는 문장-박참새 시의 말하기’ 그리고 ‘나-나 연대기: 멸망 이후에도 살아남는 세 가지 시적 방법-고선경, 신이인, 변혜지의 첫 시집을 중심으로’ 등 세 편이다. 이 작품들은 비평적 소양과 문제의식, 충실한 작품 해석과 안정적인 문장 등에서 다른 응모작들에 비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올드 앤 슬로우’는 유행에 휩쓸리지 않는 심지, 시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고 살려주는 문학적 감수성이 돋보였다. 그러나 ‘아우라’의 회복이라는 문제 설정이 상투적이고 해석도 지나치게 전형적이었다. ‘‘정신머리’ 없는 감각’은 ‘실패한 주체의 시학’이란 문제 설정의 맥락을 개괄하고 논증하면서 논리를 구축해 나가는 안정성이 돋보였다. 그러나 시의 특이성을 천착하는 분석보다는 담론과 주장이 앞선다는 문제가 있었다.
    당선작으로 뽑은 ‘나-나 연대기’는 멸망 이후 시적 주체의 가능성을 묻는 글이다. 세상에 대한 태도로서의 ‘사랑’을 강조하는 결론이 언뜻 상투적인 듯하면서도 거기에까지 이르는 비평적 논리를 축적하고 구축해 나가는 솜씨가 돋보였다. 무엇보다 이 글에는 발견의 기쁨을 설득해 나가려는 비평의 미덕이 있었다. 아직은 거칠지만 우리는 응모자의 ‘사랑’에 대한 기대와 가능성을 믿어 보기로 했다.
  • 박지민

    박지민

    2000년 출생

    고려대 국어교육과 졸업,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수료

    지금 생각하면 아주 섣부르게도, 제가 가진 사랑이 모두 끝난 것 같다고 생각한 적 있었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이상해지고 타인은 알다가도 모르겠고 글쓰기는 병 주고 약 주고도 아닌 약 주고 병 주고를 반복하는 것 같고…. 물론 지금도 자주 그렇지만, 이제는 그 혼란 덕에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말하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배우라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부족한 글에서 가능성을 봐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신춘에 제 이름을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반평생을 신문과 살아온 우리 아빠, 아빠가 사랑하는 지면으로 등단할 수 있어 기뻐요. 푼수데기 딸에게 늘 한결같은 사랑과 지지를 보내 주는 우리 엄마 그리고 귀여운 두 동생들 모두, 고마워. 늘 친구같이 응원해 준 삼촌도 얼른 봬요. 으레 그렇듯 친할수록 이상한 이름의 단톡방을 갖게 되는, 환멸 귀뚫 용현지 내 친구들 내 사람들에게, 얘들아 나 신문 나왔어! 학교에서 만난 분들께도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이 글이 출발할 수 있게 해주신, 늘 문학적인 행운을 가져다주시는 김종훈 선생님, 또 수업 때 만난 작은 인연을 잊지 않아 주신 이현승 선생님 감사합니다. 같이 성장하는 대학원 연구방 동학들 같이 있어서 진심으로 기뻐요.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앞에서 날 끌어준 소연 언니, 또 내가 가장 먼저 가져본 문우 사랑하는 국교 보름회! 그리고 ‘책에 남아 영원히 남는 사람이 되렴’이라 말해준 모 동기까지 모두, 고마워. 그 문장을 읽고서야 그게 내 꿈이었구나 생각했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아주 당연한) 생각이 듭니다. 이번엔 운이 따랐으며, 저는 사랑을 말하는 다른 텍스트들에 제 많은 것들을 빚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고, 그 갈팡질팡과 왕복의 과정마저 사랑 같다는 첨언을 남겨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그 말이 맞다면, 사실 저에게 모든 글은 사랑의 시도라는 점에서 같았습니다. 그 사랑을 계속 증명할 수 있길 바라며 더 읽고 쓰겠습니다. 다시 한번 모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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