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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주관하는 두 개의 원리, 경계선의 미학 -박찬욱과 김기덕 영화의 원리와 지평-

by  강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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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찬욱과 김기덕의 영화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의 영화에는 늘 “경계선”이 존재한다는 것일테다. 이를테면, 박찬욱의 출세작이었던 <공동경비구역 J. S. A>는 남한과 북한의 군사 경계선에 관한 이야기였고, <올드 보이>는 어떤 점에서 아버지와 딸, 누나와 남동생이라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에 대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즉 누나와 남동생 사이의 경계를 월경(越境)했기에 <올드 보이>의 내러티브는 잉태되었고 <공동경비구역 J. S. A> 역시 이수혁이 남한과 북한의 경계선을 넘었기에 시작된 이야기였다. 이는 <복수는 나의 것>의 서사적 질문이 한편으로는 빈부(貧富)의 경계선, 고용주와 피고용인 그리고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의 경계선에 대한 질문이었다는 점에서도 입증된다. 그렇다면 김기덕의 영화에서는 어떠한가? <해안선>은 제목 그대로 해안의 군사경계선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였고, <나쁜 남자>는 한 여자를 소유하는 것의 경계, 나쁜 남자와 좋은 남자의 경계선에 대한 질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하듯 <해안선>은 경계선 이탈이라는 소재로 출발했지만 결국 강상병의 광기로 귀결되고, <나쁜 남자>는 나쁜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여자라는 의아한 결론으로 수렴되었다. 이는 곧 김기덕이 다루고 있는 경계선이 단순히 물질세계의 경계선이 아니라 광증과 정상, 도덕과 패륜과 같은 좀 더 근본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질문은 딸아이와 원조교제를 한 자들에 대한 처벌을 자임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인 <사마리아>와 가시와 미시의 지평이 구획하는 경계를 문제 삼은 근작 <빈 집>에 와서도 일관적으로 지속된다. 박찬욱 감독과 김기덕 감독이 문제삼는 경계선이란 지젝의 말을 빌자면 상징계와 실재계 사이의 경계선이며 좀 더 상식적인 수준에서 말하자면 일상과 일탈의 경계선, 도덕과 범죄, 개념과 실재의 경계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경계선에 차이가 있다면 박찬욱이 상징계적 일상의 질서를 존중하는 척 긍정하면서 실재계의 공포와 음모를 노출하는데 반해 김기덕 감독은 위악적으로 상징계 즉 언어와 교설의 차원에서 경계선의 존재를 외설적으로 문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곧 두 감독이 다루는 경계선의 문제가 매우 유사해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교조적 언어로써 관객에게 피드백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이 두 감독은 모두 경계선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일까? 이처럼 역방향으로 진행되는 경계선의 문제는 두 감독의 어떠한 철학적 지평을 반영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렇듯 경계선을 문제 삼음으로써 드러나는 동시대 문화의 실제와 본질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미학적 실재로 전경화되는가? 이 글은 이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1. 두려운 진실과의 조우를 매개하는 “사제”로서의 영화: 박찬욱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도덕과 패륜의 경계선을 잔혹하게 노출한다는 점에서 신랄한 거부 혹은 맹목적 찬탄의 대상이 되는 데 비해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소재의 외설성이라는 비판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 그런데 어떤 점에서 이상하지 않은가? 누이의 가슴을 빨고 딸아이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것은 사랑하는 여자를 사창가에 팔아넘기는 것보다 훨씬 외설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박찬욱 영화의 지나친 외설성과 폭력성에 대해 쉽게 언급하지 못한다. 왜일까? 그것은 바로 박찬욱 감독이 건드리는 혹은 교란하는 경계선이 바로 우리의 무의식 내부에 은닉되어 있는 욕망, 바로 실재계에서부터 새어나온 욕망이라는 사실과 관련된다. 즉, 누구나에게 은폐되어 있지만 은밀한 규약으로 모르는 척 눈감기로 한 그 음모를 전제로 박찬욱은 우리에게 말을 건네 오는 것이다. 이에 박찬욱 영화의 공포스럽고 잔혹한 폭력성은 우리가 숨겨두었던 은밀한 것들과의 조우를 매개하는 일종의 제의가 된다. 아무도 몰랐던 일인 듯 혹은 철저하게 허구적인 듯 제시하는 그의 영화적 문제들은 실은 너무도 오랫동안 인류의 역사를 거쳐 반복되어 왔던 그러나 누구도 함부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바로 그 문제들인 것이다.

    1)내러티브의 운명, 외디푸스적 조우를 향한 여정

    마치 박찬욱 감독은 세헤라자데처럼 이야기 아니면 죽음이라는 게임의 세계로 관객을 안내한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면 곧 죽음을 맞게 될 세헤라자데처럼 <올드 보이>의 시작 장면은 팽팽하게 당겨진 넥타이 끈에 매달린 한 남자에 대한 클로즈업으로 시작된다. 그는 자신이 명줄을 쥐고 있는 사나이에게 “좀 있다 죽어라”라고 말한다. 이 말은 곧 “아직 나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거든? 그러니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살아 있어줘야 하겠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즉 자살 직전의 그 남자는, 오대수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 한, 엄밀히 말해 오대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대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 실패한 남자가 결국 추락사하는 것은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자들, 슐탄의 호기심을 유발할 수 없었던 여자들이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음을 맞아야 하는 원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대수에게 매달려 있는 사내라는 <올드 보이>의 오프닝 시퀀스는 호기심을 통해 생사여부가 결정되는 모든 영화적 서사의 운명을 암시한다. <올드 보이>의 주요 내러티브와 하등 상관이 없이 끼어든 자살하는 남자라는 오브제는 바로 관객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영화에는 죽음밖에 없다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관에 대한 아날로지임에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대수가 팽팽하게 조여진 넥타이 끈으로 쥐고 있는 자는 한편으로는 관객이기도 하다. 우리가 만약 그 첫 시퀀스에서 호기심을 느꼈다면, 우리는 오대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영화)를 끝까지 살려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대수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어떤 점에서 <올드 보이>의 오대수는 자기 자신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채 자신을 수배하는 외디푸스 왕의 적자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와 동침하고 동생이자 아들을 낳은 범인이 자신인 줄도 모르고 그 도덕적 패륜아를 찾으라고 수배를 내린 외디푸스처럼 오대수는 결국 자기 자신이 행한 도덕적 오류를 스스로 알기 위해 그 길고도 집요한 추적을 지속했기 때문이다. 이는 감독이 건드리는 경계선이 바로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은밀한 욕망이라는 사실과 동궤를 이룬다. 우리는 오대수의 내러티브를 따라가면서 결국 오대수의 욕망이나 과오가 아닌 우리가 외면해왔던 실재계적인 공포 그리고 거부하고 싶지만 언젠가 저질렀을 법한 그 간음의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오대수가 자신의 혀를 잘라내는 장면은 결국 자기 자신이 범인임을 알게 된 외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송곳으로 찌르는 장면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나 김우진의 자지가 아닌 너의 혓바닥이 우리 누나를 임신시켰단 말이야”라는 우진의 절규에서 알 수 있듯 여기서 오대수의 혓바닥은 이미 생성과 잉태를 가능하게 하는 남근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미 그 남근, 아버지는 창조적인 생산이나 아름다운 질서의 근간이 아니라 한 여자의 생명을 앗아가는 거짓과 위선, 폭력의 근간일 뿐이다. 이 쯤 되면 왜곡되고 부패한 남근으로 잉태되어 유지되고 있는 현실의 세계, 상징계란 부패한 위선으로 운영되는 허영적 이미지의 공간으로 규정될 형편이다. 중요한 것은 오대수의 혀가 잉태시킨 아이가 단지 언어적 기호체계 속의 아이 즉 소문이자 헛것, 이미지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한 여고생을 자살의 늪으로 이끌고 들어간 상상 임신, 상징계적 족쇄에 불과했다. 이는 한편, 우리의 일상과 질서를 고작 부풀린 소문밖에 잉태하지 못하는 왜곡된 혓바닥의 세계 즉 허위로 비관하는 박찬욱의 시선이기도 하다. 흔히 상징계란 아버지의 질서 즉 규칙과 법, 금지가 규율하는 이성적이고 선조적인 현실세계의 질서를 상징한다. 그에 비해 실재계란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미지계, 즉 현실적 존재의 중요한 결함이 간직되어 있는 블랙박스라고 할 수 있다. 존재의 비밀이 간직된, 영원히 알 수 없는 세계라는 점에서 실재계는 위선으로 운영되는 상징계에 뚫린 검은 심연이자 블랙홀이며 혼란의 유인자이다. 박찬욱 감독이 혼란의 유인자로 끌어들인 세계는 바로 존재의 심연으로서의 근친상간의 욕망 즉 오래도록 금기라는 이름으로 은닉되어왔던 인류의 오래된 욕망이다. 이 오래된 욕망이 다만 은닉되어 있었을 뿐 누구나에게 내재되어 있는 치명적인 실재계라는 사실은 오대수가 최면술 치료를 통해 기억을 망각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좀 더 분명하게 제시된다.

    2) 경계란 단지 형이상학적 이념(idea)일 뿐

    오대수는 죽은 줄 알았던 딸아이와 섹스를 나누었다는 죄책감으로 상징계적 현존감을 위협받고 혼란스러워한다. 그가 죄책감을 이기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바로 “망각”이다. 오대수는 최면술사에게 그가 동침한 여자가 “딸”이라는 사실 그 한가지만을 지워 달라고 요구한다. 오대수는 최면술사의 도움으로 눈위를 걸어 그가 잊고자 했던 기억을 지워내고 미소를 짓는다. 이 장면은 곧 우리가 도덕이니 윤리라고 부르는 것들 혹은 죄책감이나 죄의식으로 부정하는 것들이 단지 기억의 차원에 불과하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가령, 이렇다. 딸과 아버지가 섹스를 나누고 어머니가 아들의 아이를 낳아도 기억만 하지 않으면 문제될 것이 없다. 마치 외디푸스가 자신의 아내가 어머니라는 것, 자신의 아이들이 누이동생이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전혀 갈등을 겪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는 한편 우리가 금지하고 지키고 있는 금기라는 것, 즉 상징계적 질서 혹은 법이라는 것이 단지 “기억”과 “망각”의 차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이러한 전복적 상상력은 기억을 지워버린 오대수와 달리 금단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는 수아와 우진이 자멸하고 만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수아는 죽음의 순간에 조차 우진의 카메라 셔터를 눌러 자신들의 도덕적 위반을 기록하고 이우진은 자신의 팬트 하우스 곳곳에 누이 수아의 사진을 걸어둠으로써 위반의 기억을 보존한다. 즉 이우진은 자신이 사랑한 대상이 누이였다는 사실을 단지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자멸한 셈이다. 사진이 상징계의 법이자 위반의 증거라는 사실은 오대수가 자신의 근친상간 사실을 미도의 앨범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데서도 반복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알고도 사랑했어, 과연 너희도 그럴 수 있을까”라는 이우진의 독설은 “우리는 남매라는 것을 알고 사랑했기에 죽을 수밖에 없어. 그러니 너희는 기억을 지워”라는 역설적인 회유로 해석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박찬욱 감독의 행로는 점차 보이는 경계에서 보이지 않는 경계선의 존재와 그 정당성이라는 문제로 옮아왔다. 그가 <공동경비구역 J. S. A>에서 문제 삼았던 경계선은 전적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경계선이었다. 그것은 외부에 존재하는 경계선인 한편 매우 이념적인 형태 즉 현존하지만 결코 실체가 없는 “국가”라는 형이상학을 구분하는 경계선이었다. 박찬욱 감독은 쉽게 넘나들 수 있고, 우정을 쌓을 수 있는 남과 북의 경계선, 인간의 존재 그 근원과 하등 상관이 없지만 강건하게 실재하는 경계로 인해 죽어야만 했던 영혼들을 통해 “국가”라는 개념의 폭력성과 허위성을 고발했다. 어쩌면 남한과 북한 초소에서 그들이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던 외부의 경계선은 결코 보이지 않는 이념의 것, 삼각형이나 원과 같은 도형처럼 머릿속에서만 존재할 뿐 결코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경계선이라고 할 수 있다. 비가시의 경계선을 가시적인 절대적 지표로 상정하는 것은 바로 광인의 분열증적 징후이다. 즉 박찬욱에게 보이지 않는 경계를 절대시하며 소중한 인명까지 훼손하는 현 국가적 대치 상황은 분열증적 사태에 가깝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절대적인 것으로 고수하고자 하는 두 국가의 허위성을 고발함으로써 그 하위에 종속된 모든 것 남한과 북한의 지배이데올로기 및 정치적 경계선의 무위를 폭로한다. 한편, 그의 두 번째 작품인 <복수는 나의 것>에서 경계선은 고용자와 피고용자, 부와 빈이라는 좀 더 구체적인 생활세계의 경계선으로 형상화된다. 국가와 국가간의 경계는 수많은 군인들을 통해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지켜짐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실체가 모호한 것과 달리, 빈과 부, 고용자와 피고용자라는 경계선은 그 간극을 없애려고 하면 할수록 구체적인 차이로 현현한다. 마치 부자가 곳간을 채우듯 빈자들의 생활에는 구체적이면서도 감각적인 고통들이 채워진다. 부자와 빈자의 경계선은 우리가 모르는 척 외면하고 보지 않지만 그 어떤 경계선들보다 뚜렷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올드 보이>에서 다루고 있는 경계선은 바로 부모와 자식, 누이와 동생이라는 누구나 인정해야만 하는 최소한의 경계, 가족이라는 사회의 최소규모가 유지되는 그 질서와 경계이다. 박찬욱 감독은 과연 경계라는 것이 그토록 절대적인 것인가, 기억되지 않는 한 용인될 패륜이란 무엇인가라고 도덕적 상식의 잣대를 넌지시 건드린다. 중요한 것은 <올드 보이>의 경계선 허물기가 경계의 패륜과 부패를 보여주지만 그 무위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치 망각을 위해 걸어갔던 눈 길 위에 남겨진 발자국처럼 망각조차도 흔적을 남긴다. “눈 위를 걷지 마세요, 눈 위엔 발자국이 남으니까요.”라는 영화 〈율리시즈의 시선〉의 한 대사처럼 눈 위에 남겨진 발자국은 박찬욱이 제안하는 망각이라는 방법이 교조적인 선동이나 절대적인 해답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 셈이다. 망각은 잠시 우리가 지켜나가야 하는 상징계적 억압을 잊게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는 것이다.

    2. 새로운 공간을 창조해내고자 하는 “신”으로서의 영화 - 김기덕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과잉된 스타일과 잔혹함에 대한 하드보일드한 감각으로 눈길을 끌었다면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은 그 스타일의 잔혹함보다 소재의 일탈성으로 인해 늘 화제가 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김기덕의 영화가 관객과 평단에 충격을 주었던 까닭은 감독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소재에 대한 도착적 이미지의 나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낚시터에서 몸을 파는 창녀라는 이미지는 낯익지만 여자의 질에 낚시 바늘을 넣는다는 행위는 괴이하다. 이러한 김기덕 감독의 도착적 상상력은 일종의 징후로 읽힐 만 한데, 그것은 점막 강박증과 자상 증후군으로 범주화할 수 있을 것이다. 〈수취인불명〉에서 아들은 어머니의 가슴에 칼을 들이대고, “지흠”은 날카로운 연필심에 눈을 찔린다. 한편, <나쁜 남자>의 “한기”는 삼각형으로 날카롭게 잘린 유리로 가격하고 <섬>의 여자는 질에 낚시 바늘을 집어넣는다. 이제 자상의 이미지와 점막에 대한 강박증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임을 증명하는 일종의 작가적 날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듯 과감한 이미지와 폭력을 통해 김기덕 감독은 관객에게 일탈의 세계 일상적 현실 너머의 초월적 세계로 우리가 초월할 것을 종용하고 있는가? 대답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김기덕 감독만큼 우리가 살고 있는 상징계가 허술한 봉합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아는 자도 없지만 김기덕 감독만큼이나 그 상징계적 허술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자도 없다. 오히려 김기덕은 상징계적 현실이 허술한 봉합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에 김기덕 만의 새로운 법의 세계를 창조해내고자 한다. 이에 그의 영화는 “신”이 되고자 하는 영화라고 부를 수 있다.

    1) 여자라는 기호, 질서를 창조하는 남성적 판타지의 무대

    어떤 점에서 김기덕의 영화는 상징계적 질서와 법의 영역 안에서 해소할 수 없는 남성적 판타지의 무대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맘에 둔 여자를 유인해 창녀로 만들고 그 창녀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에게 투항하도록 하는 것(<나쁜 남자>), 타인의 아내인 여자와 동거하며 남편으로서의 의무는 휘발시킨 채 사랑만 나누는 것(<빈 집>), 여인의 점액을 손상하는 것 혹은 유린하는 것(<섬>). 이 모든 것은 상징계의 질서 내에서 법의 이름으로 금지된 영역이지만 김기덕은 그의 영화적 내러티브의 문법 안에서 이러한 환상을 가시적인 현실로 재현해준다. 즉 남자들의 은밀한 욕망은 김기덕의 영화를 통해 구체적으로 상징화된다. 따라서 김기덕의 영화에서 여자들은 인물이라기보다 그가 새롭게 직조해나가야 할 세계의 모습을 담고 있는 일종의 기호라고 할 수 있다. 김기덕의 페르소나들은 여자라는 기호를 통해 세상을 읽고 여자라는 기호를 통해 환상을 실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마리아>의 “재영”이나 “여진” 역시 세상의 사악한 풍경을 전경화하는 일종의 기호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사마리아>가 십대 소녀의 원조교제라는 소재로 시작되었지만 결국 한 남자의 복수를 다룬 로드 무비로 끝나는 까닭이기도 하다. 비록 <사마리아>의 소재는 10대 소녀들의 원조교제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사마리아>는 한 남자의 복수에 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사마리아〉는 〈바수밀다〉, 〈사마리아〉, 〈소나타〉라는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 <바수밀다> 장은 몸을 팔아서 세상을 정화시킨 불교의 인물, “바수밀다”를 자칭하는 소녀, 재영의 매춘이야기이다. 그리고 두 번째 장, 〈사마리아〉는 재영의 죽음에 복수를 다짐하던 여진이 오히려 그들에게 화대를 고스란히 돌려줌으로써 재영을 미워했던 스스로와 화해하고 재영을 이용했던 남자들을 용서하는 내용이다. 재영의 아버지, “영기”는 <사마리아> 편에서부터 등장한다. 영기는 딸아이가 매춘을 하는 것을 발견하고 남몰래 그녀의 뒤를 밟으며 그녀의 몸을 샀던 남자들에게 복수를 한다. 그렇다면 왜 영기는 딸아이 몰래 복수를 하는가? 이는 영기가 주인공으로 초점화되는 세 번째 에피소드의 제목이 <소나타>인 것과 연관된다. 여기서 “소나타”는 일차적으로 영기의 자동차를 의미하지만 한편으로는 ‘기악을 위한 독주방식’을 뜻한다. 여기서 영기는 마치 ‘소나타’를 연주하는 연주자처럼 독단적으로, 딸아이와 정사를 나눈 남자를 단죄한다. 여느 아버지처럼 딸아이를 혼내거나 그들을 상징적 체계인 법에 의존해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영기는 스스로 죄의 질을 가늠하고 그것에 부합하는 형량을 손수 실행한다. 그 형벌의 방식은 양심의 가책을 느낄만한 자에겐 위협을 그리고 힘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자에게는 폭력을 한편 그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는 살인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영기는 기존의 세계에 존재하는 상징계적 규율, 법과 규칙의 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형벌의 체계를 위계화하고 실행함으로써 법의 창조자이자 집행자가 되고자 한다. 여기에 막상 피해자로서의 딸 여진은 배제되어 있다. 영기는 딸 때문에 법이라는 경계를 위반하며 복수한다기보다 오히려 딸을 빌미로 자신의 법을 제정하고 실행해나갈 뿐이다. 어린 여자아이의 구멍을 비집고 들어가는 짓을 단죄하는 그의 행위는 딸아이를 유린한 자에 대한 복수라기보다 사랑하는 연인을 빼앗긴 자의 복수와 닮아 있다. 어머니가 없는 집안에서 여진과 영기의 관계는 부녀지간이라기 보다 연인사이처럼 묘사된다. 영기는 아침마다 여진을 태워다 주고 해외토픽을 전해주며 자고 있는 딸아이에게 이어폰을 꽂아준다. 여진을 미행하는 영기의 모습은 외도하는 아내를 쫓는 남편의 시선과 중첩된다. 어떤 의미에서 영기와 여진의 모습은 왜곡된 부부의 모습과도 같다. <사마리아>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다. 영기는 딸을 데리고 여행을 떠난다. 여행의 마지막 날 아버지는 개울가에 노란색 안전선을 그려주고 딸에게 그 안에서 운전연습을 해보라고 떠민다. 아버지는 노란 안전선을 따라 위태롭게 운전을 하는 딸을 두고 잡혀간다. 여기서, 아버지가 그려준 노란 안전선이란 부정하고 부패한 사회로부터 딸을 지켜줄 영기만의 윤리, 도덕, 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내내 반복되는 노란색의 이미지, 노란 은행 단풍잎, 노란색 경고선과 같은 이미지는 김기덕이 지켜내고자 하는 일상적 상징계를 의미한다. 김기덕이 제시하는 법이란 부패한 대상 그 근원을 완전히 도려내는 방식으로 구체화된다. 실상 영기가 진심으로 딸에게 하고 싶었던 단죄는 어떤 점에서 여진의 꿈이 보여주는 근친살해라고 할 수 있다. 여진의 꿈속에서 아버지, 영기는 딸아이를 강가에서 교살하고 죽은 딸아이의 귀에 이어폰을 꽂아준 채 묻는다. 꿈의 형식을 빌어 김기덕은 부패한 현실의 상을 모두 제거하는 판타지를 실현한다. 즉, 김기덕 감독은 자신만의 고유한 경계선을 영화라는 판타지를 통해 실현하고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마리아〉를 보면서 김기덕이 관객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소재에서 벗어나 상식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로 회귀했다고 판단하지만, 그것은 오해에 불과하다. 김기덕의 페르조나라고 볼 수 있을 영기는 일단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상징계적 규율이 왜곡되고 허술한 것임을 발견하자 그 경계를 과감히 넘고 자신만의 체계를 세워 버린다. 이미 영기에게 경계선의 개념 즉 사회적 규범이나 상징계적 규율은 중요하지 않다. 이에 부패한 아버지와 순수한 자식이라는 도식은 법을 지키려는 아버지와 그 법을 훌쩍 위배하는 딸이라는 전도된 공식으로 교체된다. 따라서 <나쁜 남자> 나 <악어>, <빈 집>과 같은 영화에서 등장하는 일탈과 위반은 기존 규율과 상징계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경계선을 설정하고자 하는 일종의 도그마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김기덕은 “나쁜 남자”와 “좋은 남자”의 경계에 대해서 질문하지만 그의 대답은 “나쁜 남자”에 대한 기존의 체계와는 전혀 다른 김기덕 만의 정의이다. 이렇듯 김기덕 감독의 일탈이 도그마적 차원이라는 사실은 그가 주로 일정한 “공간”을 통해 영화적 전언을 형상화한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가령, 〈악어〉는 한강 다리 밑이라는 공간, 그리고 〈파란대문〉은 새장 여인숙, 〈나쁜 남자〉는 사창가,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은 저수지 위에 떠 있는 사찰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만 진행된다. 즉 김기덕의 영화는 김기덕만의 새로운 “공간”을 창출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김기덕이 자신만의 “법”을 정립하고자 한다는 점은 그의 영화에는 유독 개연성이 휘발된 환상적인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에서도 입증된다. 새장 여인숙의 사진이 완성되는 〈나쁜 남자〉의 장면이나 감쪽같이 남편을 속이고 남의 아내와 동거하는 〈빈 집〉의 태석과 같은 캐릭터는 현실성의 잣대로는 이해될 수 없고 공감될 수 없는 영역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김기덕 감독의 영화적 법, 그의 법칙을 인정하지 않고는 그의 영화적 공간에 초대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에 “공간”은 비단 현실의 지평 위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감독 김기덕이 조형하고자 하는 일종의 미적 세계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기덕 감독이 마초적이며 남성중심적이라는 의미는 그 만의 새로운 상징계적 법칙을 새로이 창조하고자 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가 남성중심적인 것은 그가 여성을 홀대하거나 학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적 규칙을 경쟁적 남성으로 이해하고 스스로 그것에 대척되는 남성으로서 새로운 율법을 창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2) “영-제도”로서의 경계

    김기덕이 문제삼고 있는 경계는 축약하자면 가시적 세계와 비가시적 세계의 경계가 갖는 당위성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김기덕이 <빈 집>을 통해 새롭게 정립한 개념은 바로 존재하기에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지각되기에 존재하는 자로 인정되는 존재들의 역설이다. <빈 집> 이전에 김기덕 영화에 등장하는 자들은 거의 모두가 일정한 공간에 폐칩된 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창가(<나쁜 남자>), 낚시터(<섬>), 한강(<악어>), 물 위에 뜬 사찰(<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처럼 그들이 살아가는 특수한 공간은 어떤 점에서 그들에게 허용된 유일한 공간이다. 이방인으로 취급을 받는 이들은 한편 이방인으로 묘사됨으로써 사회적 대타자로서 배제되고 일상의 경계선 너머의 유령으로 전락한다. 이는 한편 김기덕이 지금껏 창조해왔던 공간이 김기덕만의 고유한 법의 공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징계적 현실에 구체적으로 작용하지 못하는 소외된 환상의 차원이었음을 보여준다. <빈 집>의 새로움은 바로 일상의 경계선 너머에 있던 이방인과 타자를 일상 그것도 가정이라는 사회의 근본적인 토대 안으로 깊숙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있다. 김기덕은 어느 곳에도 붙박히지 않은 진정한 유령을 통해 우리의 일상에 침투한다. 태석은 “빈 집”이라는 개방된 “공간”을 자유롭게 유영(遊泳)하며 합리적 세계관이 지닌 폭력성을 자연스럽게 노출한다. 이제 태석이라는 감독의 페르소나는 일상 너머 소외된 자가 아니라 일상과 상징계적 규율의 봉합을 균열케 할 혼란의 유인자로 전회한다. 마치 첫 시퀀스, 태석이 고쳐놓은 장난감 총의 탄환처럼 태석은 일상적 안정에 파멸의 징후를 불러온다. 보는 각도마다 동일한 상을 제공하는 것이 곧 보편이고 객관성이라면 선화에게만 보이는 존재로 자신의 몸을 바꾼 태석은 객관적 존재에서 주관적인 존재 즉 특정한 자의 시선에 의해서만 포착되는 존재로 뒤바뀐다. 이는 무소불위하면서 가시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김기덕이 새롭게 창조해 낸 공간은 비어 있는 없음의 공간이다. 이는 곧 눈에 보여야만 그리고 공간 속에 일정한 물리적 자리를 차지해야만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받는 상징계적 현실에 대한 전복이라고 할 수 있다. “사창가”, “낚시터”, “사찰”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비일상 혹은 환상의 영역에서 현실을 주조하던 김기덕의 영화문법은 여기서 철저하게 현실적인 장소로 전도된다. 이러한 전도는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장소야 말로 실존적 인간의 존재감을 허약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객관적 존재였던 태석은 일상의 규율과 법칙체계 아래서 단지 빈집털이범이나 파렴치범 정도로 규정될 뿐이다. 상징계적 현실에서 태석에게 허용될 수 있는 공간은 “감옥”밖에 없다. 태석에게 현실이 곧 감옥인 셈이다. 따라서 스스로를 비가시적 존재로 대치함으로써 그는 자신에게 허용된 공간을 새롭게 재구성한다. 태석은 타자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자 기존의 법과 질서를 교란하는 혼란의 유인자, 카오스의 핵이 된다. 태석은 눈에 보이지 않음으로써 진정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둘이 함께 올라선 체중계의 눈금이 “0”을 가리키는 것은 그들의 존재가 우리의 일상적 상징계의 법칙과 다른 법칙 아래 속해 있음을 보여준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영-제도(zero-institution)처럼 그들의 존재는 상징화를 넘어선 존재 자체의 사건이 된다. 어떤 점에서 체중계의 눈금이란 결코 상징화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존재를 공간에 붙박아 놓는 일종의 허위에 불과하다. 즉 90이란 숫자를 가리킨다 해도 그것은 그들 존재의 진정성과 하등 관계없는 눈금 위의 숫자에 불과하다. 그들의 몸무게가 “0”이라는 것은 그들의 존재가 비가시적인 것이기에 유령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존재가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고유한 것임을 암시한다. 그들은 상징계적 현실 즉 원근법적 투사가 적용되는 현실에 있어서는 소실점이 제거된 유령이지만 반원근법 즉 환상과 초월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 분명 실존한다. 이제 김기덕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방의 공간에서 상징계의 폐허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계적 존재로 화하여 아무 일 없어 보이는 일상에 금을 내고자 한다. 김기덕이 보기에 일상이란 이렇듯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실을 숨긴 채 지탱되는 허약한 지반이다. 따라서 김기덕은 관객에게 새로운 시선으로 배우를, 영화를 그리고 관객 스스로를 응시할 것을 요구하는 셈이다. 관객은 “0”을 가리키는 김기덕의 고유한 상징계적 질서와 법을 허용할 때 그의 판타지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3. 현실을 주관하는 두 개의 원리

    그렇다면 김기덕이 새로이 정립한 경계선은 인정할 만 한 것인가? 어쩌면 아직 김기덕의 경계선은 시공간성이 모호한 계곡에 영기가 그려놓은 노란 경계석들처럼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인 지도 모른다. 이러한 의구심은 박찬욱에게도 가해질 수 있다. 박찬욱은 인간의 근원적인 죄의식을 상징계의 봉합을 터뜨리는 매개로 활용하지만 그로 인해서 상징계적 세계의 구속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는 한편 점점 근원적인 존재론의 문제로 삼투해 들어가는 감독의 주제의식이 구체적인 생활세계와의 접점을 잃어간다는 비판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감독이 보여주는 경계선과 경계선에 서서 그것을 위반하거나 일탈하는 자들의 이야기는 분명 현실의 황막함을 가시적으로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인정받아야만 한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황폐한 상징계 너머에 “진정한 현실”이 존재한다는 편집증적 환상에서 자유롭다는 것이다. 김기덕과 박찬욱에게는 유한한 세계 너머에 진정한 세계가 있다는 믿음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환상으로 묘사된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적 내러티브에 있어서의 현실성과 사실감을 존중하며 즉 상징계적 일상의 질서를 존중하는 척 긍정하면서 철저한 미장센을 통해 실재계적 공포와 음모를 상징계적 일상에 유입한다. 그에 비해 김기덕 감독은 위악적으로 상징계 즉 언어와 교설의 차원에 놓인 경계선의 존재를 교조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그 문제를 외설적으로 노출한다. 박찬욱 감독은 실재계의 영역에서 상징계의 허위를 고발함으로써 우리의 현실을 지탱하는 현실이 오래된 폐허의 축적임을 가시화한다. 한편 김기덕 감독은 상징계와 현실의 문제를 동일한 상징계의 차원에서 이데올로기화된 상징계의 규율을 낯설게 하고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창조, 대치함으로써 현실의 황폐함에 도전한다. 이렇듯 실재계와 상징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두 감독의 인식적 사고는 미장센과 판타지라는 고유한 영화 미학으로 구체화된다. 완전한 허구인 영화를 통해 필연적인 현실의 한계를 깨닫는 영화 고유의 내러티브가 가진 미학이 두 감독을 통해 일종의 지평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강유정

    강유정

    1975년 서울 출생

    1998년 고려대 국어교육과 졸업

    2002년 고려대 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고려대·극동대 강사

  • 개성적 상상력-통찰력에 점수

    심영섭(영화평론가)
    전찬일(영화평론가)

    총 39개 응모작 중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8편 중 6편이 한국 영화나 감독을 다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에코페미니즘으로 분석한 진은경과 박찬욱의 영화를 소리와 빛의 상호작용으로 분석한 김만석은 신선했으나 단평에서 저널적 감수성이 결여됐다. 고대권은 ‘도그빌’을 시선의 문제로 통찰했고, 김려실은 김기덕 영화 속 폭력의 문제를 징벌에 대한 교환과 대속이라는 틀로 풀었지만 이론적 착상이 흐릿했다.

    한편 ‘범죄의 재구성’을 ‘케이퍼’라는 범죄 장르의 관점에서 푼 유지이는 장르 자체에 대한 탄탄한 이론이 아쉬웠다. ‘올드 보이’와 ‘빈집’에서의 폭력의 기원을 폭력의 인식론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고동우는 단평과 장평 모두 동일 주제를 택해 걸림돌이 되었다.

    심사위원들은 박찬욱과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경계선이라는 개념으로 풀어낸 강유정의 글을 당선작 아닌, 가작으로 선정했다. 강유정은 두 감독의 영화 미학을 내러티브와 공간, 여성이라는 관점을 가로지르면서도 ‘경계’라는 논지를 힘 있게 밀고 나갔다. ‘주홍글씨’에 대한 단평 역시, 트렁크 시퀀스를 제왕절개로 비유하는 등 개성적 상상력과 통찰력이 심사위원의 마음을 움직였다. 경합을 벌인 이수정의 김기덕 감독론은 시선의 문제와 페미니즘 모두가 기존의 김기덕 감독론에서 빈번히 다루어졌다는 점이 지적됐다. 영화 평론의 토대인 영화를 영화 매체로 접근하는 응모작들이 매우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마치 시나리오를 대상으로 하는 것 같은 영화평, 지식들로 가득 차 있는 인문학적인 서랍장 같은 영화평들이 횡행하고 있다.
  • 강유정

    강유정

    1975년 서울 출생

    1998년 고려대 국어교육과 졸업

    2002년 고려대 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고려대·극동대 강사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는 내게 영화 ‘아마데우스’ 표를 주면서 “보고 오너라”고 말씀하셨다. 내 생애 최초로 혼자 본 영화였다.

    영화란 늘 나의 몸속 어딘가를 건드려 뭔가를 말하게끔 간지럽혔다. 난 영화를 보고나면 평가 비슷한 개념들을 설정하기 시작했고 나름대로 지도를 그려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문학 전공자인 내게 영화는 늘 가까이 할 수 없는 오마주(숭배)의 대상이었고 난 주변의 평범한 관객이었다.

    2003년 ‘올드 보이’를 처음 보았을 때, 영매처럼 그 세계가 전하는 언어에 포획당해 버렸다. 자의식의 간섭 끝에 망설이다 어느 불면의 밤 그 생각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비로소 글로서의 꼴을 갖추게 되었다.

    강유정이라는 평범한 관객마저도 비평가로 만들어 준 두 감독, 박찬욱 김기덕 감독에게 감사한다. 좋은 텍스트가 없었더라면 나의 글은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내 곁에서 나보다 더 힘들어하고 안타까워하시며 인문학자라는 어려운 길을 돌봐주시는 부모님에게 감사한다. 게으른 제자의 방만한 행보를 관대한 기대로 일관해 주신 이남호 선생님과 윤석달 선생님, 고려대 은사님들에게 감사드린다. 이건 시작이다. 이제, 물꼬는 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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