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가위

by  류은경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당신은 가위를 집는다. 길이가 5인치인 커트용 가위다. 엄지와 검지를 손가락 구멍에 각각 끼운다. 서너 차례 가위를 움직여 본다. 엇갈린 날이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너무 가볍다. 가위를 벌리고 날을 살핀다. 당신이 미용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그가 사준 가위다. 날이 눈에 띄게 마모되어 있다. 짧은 머리를 기본으로 했을 때 날이 무뎌지는 가위질 횟수는 2400번에서 2800번이다. 당신의 가위는 오래 버틴 셈이다. 무뎌진 날은 모발의 커팅을 방해한다. 모발이 굵은 손님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자칫 잘못하면 두피에 상처를 낼 수도 있다. 당신은 고개를 들어 정면의 거울을 쳐다본다.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다.

    당신과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머리를 쓸어 넘긴다. 하하. 습관이 참 무섭네요. 남자는 짧은 머리카락을 벅벅 문지른다. 당신의 미용실을 처음 찾아왔을 때 남자의 머리는 귀 밑을 덮는 장발이었다. 그 뒤로 일주일이나 열흘 건너 남자는 오고 있다. 오늘도 다듬기만 하실 건가요? 당신은 가위를 잡지 않은 손으로 분무기를 집으며 묻는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고슴도치처럼 바짝 일어선 남자의 머리칼에 분무기에서 품어져 나온 물이 이슬방울처럼 매달린다. 머리칼이 충분히 젖은 것을 확인한 후 분무기를 내려놓는다.

    당신은 빗을 집는다. 한쪽 면은 살의 간격이 좁고 반대쪽은 살이 굵은 붉은색 빗이다. 왼손 엄지와 검지로 말아 쥐듯이 빗을 잡고 남자의 옆으로 가서 선다. 귀 바로 위 두피에 새끼손가락을 댄다. 두피를 통해 남자의 체온이 전해진다. 당신의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미용 일을 시작하고 나서 요즘처럼 손의 떨림이 심한 적이 없다. 눈을 질끈 감고 남자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숨을 들이쉰다. 가위가 손과 따로 놀 때면 더욱 신중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귀를 자를 수도 있다. 잠깐 떼었던 새끼손가락을 다시 남자의 두피에 갖다 댄다. 위치를 고정한 후 빗의 삼분의 일 지점에서 가위질을 시작한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가위 날이 벌어졌다 도로 좁혀진다. 잘려진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진다.

    당신은 남자의 옆에서 뒤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당신의 동선에 따라 눈썹 길이의 머리카락이 꼬리가 되어 쫓아온다. 스포츠형의 헤어스타일인 경우, 뒷머리는 얼마 안 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미세한 손놀림이 필요하다. 너무 각도를 올리면 머리가 잘리지 않는다. 당신은 손을 멈추고 빗의 각도를 가늠한 후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간다. 정수리의 머리를 빗어 올리려는 찰나, 당신의 젖가슴에 남자의 뒤통수가 닿는다. 가위의 움직임이 딱 멈춘다. 심장의 박동이 빨라진다. 젖가슴 사이에 땀이 솟는다. 남자의 머리는 당신의 가슴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당신은 가위질하는 손을 느리게 움직인다. 남자는 불평을 하지 않는다.

    이따금 당신은 거울을 본다. 커트된 머리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다. 그때마다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다. 거울 속의 남자는 할 말이 있다는 표정이다. 당신은 얼른 고개를 돌리고 남자의 왼쪽 옆머리를 본다. 귓바퀴에 달려있는 이어링이 눈에 띈다. 와이셔츠 단추만 한 금색 이어링이다. 당신은 그를 떠올린다. 그는 자주 단추를 잃어버리고 실밥만 남은 와이셔츠를 입은 채 당신을 만나러 왔다. 당신은 미용실 사장의 눈치를 보며 다른 직원보다 십 분 일찍 가게를 나섰다. 당신과 그는 마지막 버스를 타기 위해 뛰었다. 한번 버스를 놓치면 만원이 넘는 택시비를 지출했다. 겨우 버스를 탄 날이면 둘은 금세 머리를 맞댄 채 잠이 들었다. 그러나 당신의 방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그는 당신을 안았다. 새 단추는 당신이 비번인 날에야 달 수 있었다. 괜찮아. 누가 내 와이셔츠만 보나. 속상해 하는 당신을 그는 위로했다. 그는 자동차 세일즈맨이었다. 단정한 의복 상태는 세일즈맨의 기본이다. 당신을 집까지 바래다주고 돌아가는 그의 모습은 항상 후줄근했다. 우리, 결혼해요. 십만 원을 더 준다는 미용실로 세 번째 자리를 옮겼을 때 당신이 먼저 프러포즈를 했다. 그날부터 그는 당신의 방에서 당신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앞머리를 다듬기 위해 당신은 남자와 마주 선다. 남자의 숨결과 시선이 가슴에 와 닿는다. 초점을 종이에 맞춘 해경처럼 남자의 시선이 집중될수록 당신의 심장이 커다랗게 고동친다. 남자와 당신 사이의 간격은 불과 20센티 정도 떨어졌을 뿐이다. 브래지어 속에서 유두가 꼿꼿하게 일어선다. 휴일이 언제냐고 남자가 빠르게 묻는다. 갈라진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다. 당신을 올려다보는 남자의 눈빛이 뜨겁다. 머리 감게 일어나세요. 손가락을 가위 손잡이에서 빼며 가게 한켠의 칸막이를 가리킨다. 칸막이 뒤에는 두 개의 세면대가 있다.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남자가 일어선다. 거울과 맞닿은 벽면에 수납식으로 만들어놓은 진열대를 지나고 세팅기기를 지나 남자는 칸막이로 향한다. 남자의 뒷모습을 쫓던 당신의 눈길은 칸막이와 진열대 사이의 공간에서 멈춘다. 안으로 움푹 들어가 있는 그곳에는 살림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당신의 눈빛이 잠깐 흔들린다.

    손을 뻗어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튼다. 손바닥으로 물의 온도를 맞춘 후 뒤로 머리를 젖히고 있는 남자에게로 상체를 기울인다. 젖가슴이 밑으로 쏠린다. 남자의 입술 바로 위다. 눈을 수건으로 가린 남자를 내려다본다. 선이 굵은 남자의 콧대와 콧망울, 인중을 지나쳐 약간 벌리고 있는 도톰한 입술로 시선이 움직인다. 조금 더 몸을 숙인다면 어떻게 될까. 당신의 뺨에 홍조가 든다. 칸막이 옆의 문 쪽에서 물건이 바닥에 부딪혀 튕기는 소리가 요란하게 난다. 뭘 던진 거죠? 남자가 놀라서 묻는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당신은 주전자를 내 던진 소리임을 알고 있다. 또 한번 소리가 들린다. 이번에는 요강이다. 머리 감는 걸 사양하고 남자가 미용실을 나설 때까지 살림방 문 안에서는 멈추지 않고 물건이 어딘가에 부딪히거나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당신은 살림방 문을 향해 간다. 물기가 마르지 않은 손으로 손잡이를 돌린 후 몸 쪽으로 잡아당긴다. 문이 열리자마자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숨이 턱 막힌다. 당신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한 발 안으로 들여놓는다. 문 바로 앞의 바닥은 직사각형 모양의 공간이다. 아이보리 색깔의 정사각형 타일이 각각 석 장씩, 윗줄과 아랫줄에 박혀있다. 좌측 벽면에 상하로 기다란 신발장이 있다. 벽과 신발장 사이의 좁은 공간에는 휠체어가 접힌 채 끼워져 있다. 당신은 오른쪽 신발을 벗는다. 그런 당신을 노려보는 눈이 있다. 조도 낮은 조명 속에서 맹수처럼 두 개의 눈이 번쩍인다. 기저귀 갈아 드려요? 현관으로 올라온 당신은 발치에 엎어져 있는 요강을 들어 올리며 묻는다. 요강은 오늘도 텅 비어 있다. 숙였던 상체를 펴는 각도에 따라 방안 여기저기 어지럽혀져 있는 물건들이 눈에 들어온다. 주전자는 싱크대에 평평한 밑 부분을 댄 채 모로 서 있다. 뚜껑은 텔레비전 받침대 앞에 굴러가 있다. 보리물이 방바닥에 흘러나와 있다. 물이 쏟아진 모양은 아메리카 대륙을 닮아있다. 사고가 나기 한 달 전이 떠오른다. 당신과 그는 미국 대사관에 있었다. 비자를 받기 위해서였다. 미용 기술이 있으니까 아무 기술 없는 사람보다는 나을 거야. 나도 뭐든 할 수 있고. 그는 당신의 어깨를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하지만 비자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한 시간 넘게 버스에 시달리며 당신은 출퇴근을 계속했다. 세수를 하려고 하면 코피가 줄줄 흘렀다. 결혼을 하기 전보다 몸무게가 8킬로나 줄어있었다. 차를 사자고 한 건 당신이었다. 퇴근하면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그를 나무라기도 했다. 그는 잠자코 당신의 불만을 들었다. 일을 끝내고 가게 밖으로 나오던 당신은 그가 새 자동차에 앉아 클렉션을 울리는 걸 봤다.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당신은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사고는 차를 산 지 보름째 되던 날 일어났다. 다급한 원장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당신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택시를 타고 가면서 당신은 계속 중얼거렸다. 별일 아닐 거야. 그래, 별일 아닐 거야. 응급실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는 당신을 향해 군청색 잠바를 입은 낯선 남자가 다가왔다. 보험회사 직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사고 경위를 설명하며 폐차해야 한다고 말했다. 폐차할 정도면 운전사가 어느 정도 부상을 입는지 당신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보험회사 직원은 당신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상대방 운전사를 찾는 시늉을 했다. 새벽까지 기다린 후에야 담당 의사로부터 그의 두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당신은 의식을 잃었다.

    당신은 그의 바지를 벗기기 시작한다. 단추를 끄르고 지퍼를 내린다. 그의 팔을 어깨에 걸치고 엉덩이를 들어올린다. 그가 소란을 부리는 동안 납작하게 눌려 엉덩이 밑에 깔렸던 바짓단이 보인다. 옷장에 개켜놓은 바지를 보는 것 같다. 그는 요강을 거부하면서도 바지는 고집했다. 두 장의 바짓단을 빼낸 후 그의 허리춤으로 손을 옮긴다. 그가 당신을 노려보며 괴성을 지른다. 화가 났다는 표시다. 그는 다리와 함께 말까지 잃어버렸다. 의사는 정신적 쇼크 때문일 뿐 뇌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정신적 쇼크든 뭐든 사고 때문에 말을 못하게 됐고, 게다가 상대방 과실이 크니 보험금 타는 액수가 만만치 않겠어요, 다행입니다. 응급실에서 봤던 보험회사 직원은 말했다. 직원의 목소리가 너무 밝아서 병문안이 아니라 축하 인사를 하러 온 사람 같았다. 당신은 직원의 얼굴을 갈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보험금이 입금된 통장을 보고 다행이다, 라고 말하는 당신을 발견했다.

    그날 당신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리와 말을 잃은 대신 무서울 정도로 예민한 육감을 갖게 된 그는 당신의 피가 뜨거워지는 걸 귀신처럼 알아맞혔다. 당신은 고개를 숙인 채 그의 허리에 감겨 있는 기저귀로 손을 가져간다. 팬티 모양으로 생긴 성인용 기저귀다. 서른다섯의 나이에 기저귀에다 변을 봐야 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생각해 보지만, 자신은 없다. 그가 당신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손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것에 대해 화를 내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자신이 없다. 보험금으로 내실이 딸린 미용실을 얻었다. 그러나 다섯 달 동안 혼자 힘으로 그를 건사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휠체어도 타지 않으려 했다. 당신이 남자 손님의 커트를 할 때면 그는 그의 주변에 있는 물건을 집어던졌다. 보조 미용사들이 질색하며 그만두었다. 그녀들의 심정을 당신은 충분히 이해했다. 변이 묻은 기저귀를 빼고 물 티슈로 그의 엉덩이 사이를 닦는다. 티슈는 금세 더러워진다. 새 티슈를 뽑아 앞쪽을 닦다가 쪼그라든 성기를 본다. 그의 손이 당신의 젖가슴을 움켜쥔다. 당신은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눈물이 찔끔 나온다. 당신은 그의 손을 잡아떼며 밀어젖힌다. 그는 당신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나가떨어진다. 허공에서 종아리 없는 그의 허벅지 두 개가 버둥거린다. 당신은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온다.

    미용실 문을 열고 밖에 나와 서서 당신은 눈을 훔친다. 한숨을 쉬고 고개를 들어 앞 건물을 본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미용실 맞은편은 오피스텔 건물이다. 일층에는 부동산 중개업소와 그릇 도매점이 있고 이층 전면이 통유리로 된 피트니스 클럽이 있다. 통유리 앞에는 러닝머신이 횡렬로 늘어 서 있다. 저녁 시간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그 위에서 운동을 한다. 남자도 그곳의 회원이다. 남자는 일층 부동산 중개업소의 직원이다. 퇴근 후 운동을 하고 건물 위층에 있는 자신의 오피스텔로 올라갔다. 당신은 남자를 찾는다. 반팔 면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미용실이 내다보이는 유리 앞에서 달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건강하게 실룩거린다. 당신은 오른손을 들어 앞으로 내민다. 피트니스 클럽의 유리가 손끝에 걸린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에서 남자의 다리가 분주히 움직인다. 당신은 그 다리를 쓰다듬는다. 가운뎃손가락이 남자의 사타구니와 겹치자 살그머니 손가락을 오므려 쥐는 시늉을 한다. 옆을 보며 러닝을 하던 남자가 고개를 돌리자 당신은 황급히 미용실 안으로 들어온다. 귓불까지 빨개진 당신의 얼굴이 거울에 비치고 있다. 두 손으로 뺨을 감싸고 고개를 숙이며 살짝 웃다가 가위를 발견한다. 남자의 머리를 자르고 채 정리하지 못한 가위다. 당신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다. 당신은 가위를 집는다. 그가 사준 가위다. 일을 끝내고 난 후엔 날이 상하는 걸 막기 위해 항상 날을 닦았다. 나사 부분이나 촉점(觸點), 천신(賤身) 등 각 부위에 기름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관리를 꼼꼼하게 했어도 가위의 날은 마모되고 있었다. 가위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당신은 벌린 두 개의 날을 하나로 모은다. 동그란 손잡이를 밑으로 내리고 보니 발기한 성기와 그 밑의 고환을 닮은 것도 같다. 천천히 가위를 든 손을 앞뒤로 움직여 본다. 조금 속도를 빨리 한다. 당신은 히쭉 웃는다. 천을 꺼내 가위를 닦으면서도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기름칠까지 끝낸 가위를 가위집에 끼워 넣는 당신의 표정은 어둡다.

    셔터를 내린 후 방으로 향하는 당신의 걸음걸이가 무겁다. 살림방의 문을 천천히 연다. 조금 전까지 조용했던 방안은 당신이 들어가자마자 텔레비전 소리로 시끄러워진다. 벽에 세로로 세워놓은 쿠션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그가 당신을 힐끔 본다. 그의 손에는 리모컨이 들려있다. 그가 급하게 비디오 채널로 바꾼다. 중년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이 파란 화면으로 바뀐다. 그가 비디오 리모컨의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불규칙한 흑백 선이 네모난 모니터 안에 가득 찬다. 뜨거운 불판에 고기를 올려놓았을 때 들릴 법한 소리가 난다. 그 소리는 잠시 뒤 익숙한 음악으로 바뀐다. 모니터에는 다리 위에서 소년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플레이되고 있다. 푸른 셔츠에 진청 반바지를 입고 황색 모자와 머플러를 두른 소년이다. 소년은 두 손을 어깨선까지 올려 옆으로 쭉 뻗는다. 손끝에서부터 어깨에 이르는 선이 파도처럼 출렁인다. 굵고 기다란 물뱀 두 마리가 몸통을 흔들며 움직이는 모습을 닮기도 했다. 소년이 춤을 추고 있는 다리 정면에는 연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다. 하얀 해말이 인다. 수평선 저 멀리에서부터 시작된 바람이 소년의 머플러를 날린다. 허공에 뜬 머플러가 소년의 팔처럼 물결친다. 소년은 방향을 바꿔 왼쪽으로 발을 옮긴 후 이번엔 왼쪽 팔을 올리고 흔드는 동작을 반복한다. 특별한 테크닉이 필요 없는,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단순한 춤이다. 제자리에 서서 엉덩이를 뒤로 빼고 빙글빙글 허리를 돌리는 소년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당신은 소년의 엉덩이에서 눈을 뗀다. 곧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이라는 번역판 자막이 나올 것이다.

    당신은 신발을 신경질적으로 벗는다. 신발 한 짝이 등 뒤의 문에 가 부딪치고 현관 바닥에 툭 떨어지며 뒤집어진다. 당신은 굳은 얼굴로 방을 가로질러 벽걸이를 향해 간다. 블라우스를 벗어 옷걸이에 거는데 자꾸 떨어진다. 허리를 굽히고 옷을 주워 들려다 말고 바닥에 힘껏 던져버린다. 안에서 입는 티셔츠를 건성으로 입고 돌아서다 그의 눈과 마주친다. 일그러진 눈이다. 당신은 천천히 몸을 숙이고 블라우스를 집어 옷걸이에 건다. 매일 밤 그는 당신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똑같은 영화를 틀었다. 당신은 그가 그 영화에 집착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 영화에서 소년은 어려서부터 미용사와 결혼하는 것이 꿈이었다. 소년은 나이가 들어 아름다운 미용사와 사랑에 빠지며 그 꿈을 이룬다. 그러나 둘의 사랑이 절정에 달한 순간, 미용사는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다리 위에서 투신자살을 한다. 그녀는 유서에 죽음으로써 남편과의 완벽한 사랑을 간직하겠노라고 적어 놓았다. 미용사가 죽고 난 후 텅 빈 미용실을 지키는 그녀의 남편은 손님이 미용사를 찾자 곧 돌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장면을 몇 번이나 반복재생했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당신도 저 남자처럼 날 잊지 않을 거야? 비디오테이프 수집광인 동료 미용사가 결혼 선물로 준 테이프를 처음 봤던 날이었다. 당신이 묻자 대답 대신 그는 당신을 꼭 안아줬었다.

    샤워를 마친 당신은 침구를 내려 바닥에 깐다. 그의 요에서 다섯 뼘 정도 떨어진 곳이다. 불을 끄고 요를 향해 간다. 그의 눈은 당신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탐색하듯 보고 있다. 당신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눕힌다.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색색의 빛들이 어둠을 잘게 부순다. 등을 모로 세운 채 벽에 일렁이는 빛깔들을 본다. 볼륨이 높아진다. 당신은 이불을 머리 위로 뒤집어쓴다. 볼륨이 더 커진다. 당신은 한숨을 쉬며 이불을 내리고 몸을 돌린다. 당신은 영화를 본다. 그제야 볼륨이 낮아진다. 영화는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다. 미용실의 정사 신이다.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당신의 눈은 미용사 남편과 젊고 아름다운 미용사의 육체적 사랑에 집중한다. 미용사의 남편이 가운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젖가슴에 입을 맞추는 장면, 손님이 있는데도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팬티를 끌어내리는 장면에서 당신은 슬그머니 이불 속으로 손을 밀어 넣는다. 새로 갈아입은 팬티 밑 부분이 축축이 젖어 있다.

    엔딩 장면을 연거푸 되돌렸던 그는 가볍게 코를 골고 있다. 그의 손에서 리모컨을 빼내 비디오를 끈다. 방안은 어둠에 잠긴다. 당신은 소리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이불을 빠져나온다. 컴컴한 벽을 더듬어 미용실 전등 스위치를 찾는다. 세 개의 전등 스위치 중 하나만 올린다. 남자가 앉았던 자리 부근이 환해진다. 당신은 그 의자에 가서 앉는다. 목 뒤로 양손을 돌리고 샤워를 할 때 뒤통수에 묶었던 머리를 푼다. 헤어밴드에서 자유로워진 머리칼이 어깨 위에서 출렁인다. 영화 속의 격정적인 정사 장면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남자는 당신의 웨이브 있는 헤어스타일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남자의 방문이 잦아지면서 머리 손질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남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남자는 당신과 동갑이거나 한두 살 정도 어려 보였다.

    한달 전, 당신이 셔터를 내릴 때 불쑥 남자가 당신 앞에 나타났다. 어디 가서 얘기 좀 해요. 당신의 손을 잡으며 남자가 말했다. 남자의 손이 뜨거웠다. 제 차로 가죠. 남자는 당신을 태우고 한참을 달렸다. 특별히 급한 일이 있거나 남자가 머리를 깎는 날을 빼고 한 시간에서 두 시간에 걸친 한밤의 드라이브는 계속 되었다. 당신은 가위를 집는다. 머리칼을 한 움큼 잡고 가위를 가져간다. 벌어진 두 개의 날 사이에 머리카락이 위태롭게 낀다. 그 자세 그대로 한참 거울을 노려보다 힘없이 가위를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간다.

    잠을 자던 당신은 이상한 느낌에 눈을 뜬다. 어둠 속에 뭔가가 웅크리고 앉아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당신은 화들짝 놀란다. 긴장한 채 형체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사물들이 어렴풋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에게 등을 돌리고 앉은 형체는 바로 그다. 그의 앞에는 당신의 옷가지들이 흩어져 있다. 스커트와 블라우스는 당신이 낮에 입었던 옷이다. 당신은 분명히 벽걸이에 그것들을 걸어놨었다. 그는 당신의 옷을 하나씩 들어 코에 대고 냄새를 맡고 있다. 잠자다 말고 도대체 무슨 짓이에요. 사내 냄새라도 나면 어쩌겠다는 건가요. 당신은 소리치고 싶다. 그러나 소리는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당신은 숨을 죽이고 그의 행동을 지켜본다. 하나하나 집요하게 옷의 냄새를 맡던 그가 당신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당신은 급하게 눈을 감는다. 가라앉은 방안의 침묵을 뚫고 무엇인가 바닥과 마찰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진다. 눈을 살짝 뜬다. 벌레처럼 기어오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당신의 발치 쪽에 다다른 그가 손을 뻗어 이불을 들춘다. 헉헉, 그의 가쁜 숨이 발목에 닿는다. 소름이 돋는다. 그의 손이 이동하는 방향에 따라 당신의 종아리와 허벅지, 엉덩이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불을 허리까지 올리고 난 후 이번에는 당신의 치마를 끌어올리기 시작한다. 발목을 벌리는 그의 손이 느껴진 순간 당신은 눈을 꾹 감는다. 개처럼 킁킁대는 소리가 들린다. 당신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히스테리를 부리던 그였지만 이런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제발, 이젠 좀 그만해요. 당신은 벌떡 일어나며 소리친다. 옷장에서 급하게 코트를 꺼낸 후 핸드폰과 지갑을 챙겨 들고 방을 나선다. 깜깜한 미용실을 가로질러 출입문을 열고 셔터를 반쯤 올린다. 몸을 굽혀 셔터 밑으로 빠져나온 후 셔터를 내리고 잠근다.

    밖은 어둠에 잠겨있다.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 때문인지 코끝에 콧물이 고인다. 코트를 제대로 입고 오피스텔 건물을 올려다본다. 드문드문 불이 켜져 있다. 언제든 놀러오세요. 남자는 복사한 열쇠를 내밀며 말했었다. 열쇠 홀더에 호수가 적혀있었다. 당신은 열쇠를 받지 않았다. 남자가 알려준 방을 찾는다. 하지만 어딘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당신은 길을 건넌다.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당신은 자꾸만 주위를 살핀다. 오피스텔 건물 입구에 다다른다. 당신은 오락가락 할 뿐 차마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핸드폰을 꺼낸다. 손가락이 익숙하게 12개의 숫자를 찾아 움직인다. 손님이 없을 때면 당신은 수도 없이 남자의 번호를 눌러봤었다. 그러나 늘 통화 버튼에서 머뭇거렸다. 숫자를 모두 누른 후 통화 버튼으로 손가락을 가져간다. 거기서 당신의 손은 한참 멈춰 있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경비실 문이 열린다. 당신을 볼 때마다 기특해하던 경비의 얼굴이 보인다. 당신은 도둑질 하는 사람처럼 그늘진 벽에 찰싹 달라붙는다. 큰길 쪽에서 차의 굉음이 들려온다. 경비는 도로 문을 닫고 들어간다. 당신은 서둘러 길을 건너 미용실 쪽으로 온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솟았던 땀이 들어가는지 추위가 밀려든다.

    찜질방을 나오는 당신의 얼굴이 푸석하다. 핸드폰을 열고 시간을 본다. 열 시 삼십오 분이다. 미용실 문을 열려면 서둘러야 한다. 그러나 당신은 천천히 길을 따라 걸어간다. 미용실과 반대 방향이다.

    정기휴일은 한 달에 두 번, 둘째 주와 넷째 주 수요일이었다. 그러나 보조 미용사를 쓰지 않고부터 매상이 현저히 떨어져서 휴일을 챙기지 않은지가 꽤 됐다. 그의 뒷바라지와 가게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하는 동안 당신의 가위처럼 당신도 마모되어 갔다. 당신은 이제 가위를 버릴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사거리에 서 있다. 10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에 농협이 있다. 미용 기자재 전문점은 농협이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나 있는 길을 끼고 돌면 나온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열한 시가 가까워 오고 있다. 셔터가 내려져 있는 미용실의 모습이 머리에 가득하다. 어디선가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바닥과 벽에 부딪쳐 튕겨 오르는 살림 도구들이 내는 소리다. 당신은 고개를 흔든다. 어젯밤 당신의 치마를 들추던 그를 떠올린다. 당신은 농협을 향해 빠르게 걷는다.

    판매원이 진열대에서 꺼내 놓은 가위는 가격과 디자인이 여러 종류의 것들이다. 당신은 그 중에서 그가 사 준 가위와 다른 디자인을 들어올린다. 날 선을 살핀다. 반대쪽보다 등이 튀어나오면 손에 상처를 줄 염려가 있다. 손가락 구멍의 크기나 감촉이 편해야 가위를 쓸 사람과 맞는다. 고가의 가위를 구입하는 대신 당신은 미용 기자재 영업 사원이 들고 다니는 가위를 열심히 구경했었다. 당신에게 가위를 팔기 위해 세세하게 가위 선택법을 설명하던 영업사원은 지쳤는지 언제부턴가 오지 않았다. 당신은 손가락을 구멍에 천천히 끼운다. 손에 쏙 들어오지 않고 낯설다. 가위를 잡은 손에 힘을 준다. 곧 가위는 당신에게 친숙해 질 것이다. 그가 사준 가위도 곧 익숙해졌듯이. 포장해 드릴까요? 당신이 내려놓은 가위를 집어 들며 판매원이 묻는다. 당신은 카드를 꺼내 판매원에게 건넨다.

    사거리를 거꾸로 올라온다. 당신의 걸음이 빠르다. 새 가위를 샀어요. 내 돈으로 처음 산 가위죠. 새 가위를 사면 맨 처음 당신 머리를 자르고 싶었어요. 당신은 남자에게 할 말을 속으로 연습한다. 걸을 때마다 쇼핑백 끈이 손가락을 간질인다. 저만치 오피스텔 건물이 보인다. 의식하기도 전에 미용실로 눈길이 향한다. 좀 전까지 밝았던 당신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주위를 살핀다. 길을 사이에 두고 건물이 죽 늘어서 있다. 행인이 수시로 그 길을 건너고, 지나가고 있다. 상가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밖으로 나와 자동판매기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있다. 거리는 활기에 차 있다. 당신은 고개를 돌려 상점들을 하나씩 본다. 셔터가 내려져 있는 곳은 당신의 미용실뿐이다. 헤드폰을 머리에 쓴 젊은 남자 한 명이 그 앞을 지나간다. 신나는 음악을 듣는지, 머리를 까딱거린다. 가볍게 몸을 흔들기도 한다. 그뿐이다. 미용실은 조용하다. 만약 무슨 일이 있었다면 저렇게 조용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안심을 하고 미용실로 향한다.

    미용실은 불을 켜지 않아 환한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실내가 어둡다. 당신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얼굴을 셔터의 중간 즈음에 가까이 댄다. 살림방 문이 활짝 열려있다. 방안은 깊은 우물 같아 깜깜하게만 보일 뿐이다. 당신은 셔터를 열기 위해 무릎을 구부리고 앉는다. 그때 당신은 출입문 바로 앞, 바닥에 엎드려있는 그를 발견한다. 출입문을 두드리다 의식을 잃었는지 그의 손바닥이 바닥과 유리 사이에 걸쳐져 있다. 여, 여. 그를 부르려는데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는다. 자물쇠의 구멍에 열쇠가 자꾸 헛들어간다. 다섯 번 만에 자물쇠를 푼다. 앞으로 밀게 되어있는 출입문은 그의 몸 때문에 꼼짝도 않는다. 당신은 두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있는 힘껏 민다. 그의 머리가 뒤로 밀려나면서 반밖에 남지 않은 다리도 차츰 뒤쪽으로 이동한다. 틈이 벌어진다. 당신의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를 살핀다. 바지는 축축이 젖어있고 변 냄새도 난다. 그렇지만 아직 따뜻하다. 당신은 고개를 돌려 밖을 본다. 길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이 지나가고, 웃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당신은 진저리를 친다.

    당신은 가위를 집는다. 길이가 5인치인 커트용 가위다. 엄지와 검지를 손가락 구멍에 각각 끼운다. 서너 차례 가위를 움직여본다. 엇갈린 날이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너무 가볍다. 가위를 벌리고 날을 살핀다. 당신이 미용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그가 사준 가위다. 날이 눈에 띄게 마모되어 있다. 무뎌진 날은 모발의 커팅을 방해한다. 모발이 굵은 손님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자칫 잘못하면 두피에 상처를 낼 수도 있다. 당신은 고개를 들어 정면의 거울을 쳐다본다. 휠체어에 앉은 그가 당신을 보고 있다. 금방 끝낼 테니까 불편해도 좀 참아요. 당신은 그의 머리를 자르기 시작한다. 이따금 당신은 길 너머에 있는 오피스텔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부드럽게 웨이브 진 당신의 머리가 어깨 위에서 출렁인다.
    류은경

    류은경

    1971년 충남 천안 출생

    1998년 계간 ‘작가세계’단편소설로 신인상 수상

    2004년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예정

  • 아내가 남편 머리 깎아주는 끝장면 감동적

    김윤식(명지대 석좌교수·문학평론가) 복거일(소설가)
    (예심=심상대 조경란 윤성희)


    본선에 오른 아홉 작품들 중 여섯 편이 좋은 평가를 얻었다.

    ‘기수의 조건’은 경마장의 모습을 잘 그려서 뛰어난 현실감을 얻었다. 아쉽게도, 이야기의 여러 가닥들이 끝내 하나의 실로 엮이지 않았다. ‘붉은 색을 먹다’는 세상의 붉은 색을 빨아들이는 사람에 관한 우화인데, 착상도 신선하고 전언도 뚜렷하다. 그러나 세상의 붉은 색이 모두 한 사람에게로 빨려 들어간다는 상황이 그럴 듯하게 여겨지는 마법적 공간을 만드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독백의 사용법’은 이 세상을 살아 나가기 힘든 조건을 지닌 청년의 비극을 다루었다. 주인공에게 다가오는 세상의 부조리를 잘 그렸지만, 뚜렷한 이야기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응급실이 있는 카페’는 소녀들이 여인들로 자라나는 모습을 잘 그렸다. 아쉽게도, 끝 부분이 너무 갑작스럽고 앞쪽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 첫 단락도 차라리 없는 편이 나았을 터이다.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로바니에미의 산타마을’과 ‘가위’는 둘 다 ‘소중한 것을 잃은 충격에 사이가 멀어진 부부가 화해하는 이야기’가 주제다. 모두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다. 다만 ‘로바니에미의 산타마을’은 부부가 화해까지 이르는 데 따른 준비가 좀 부족하게 그려졌다는 점이 아쉬웠다. 미용사의 일하는 모습과 심리를 차분히 그린 ‘가위’는 흠 잡을 데가 없는 작품이다. 특히 끝맺음이 뛰어난데, 아내가 새로 산 가위로 남편의 머리를 깎아주는 장면은 자연스럽고 감동적이다. 작품의 중요한 요소들이 융합되어 하나의 유기체를 이룬다.
  • 류은경

    류은경

    1971년 충남 천안 출생

    1998년 계간 ‘작가세계’단편소설로 신인상 수상

    2004년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예정

    꽤 돌아서 온 길이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소설이라는 것에 덤벼들었다가 호되게 상처를 입고 물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한순간도 소설을 잊은 적은 없었다. 하고 싶은 말, 쓰고 싶은 글을 쓰지 못했을 때 나는 늘 머리와 가슴이 아팠다. 아픈 건 비단 나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눈에 비친 사람들의 삶은 기쁨이나 행복보다는 아픔과 슬픔, 외로움으로 더 얼룩져 있다. 말주변이 없는 나로서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도, 그들을 대신해 항거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어쩌면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점쟁이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일지 모른다. 점 보러 온 사람이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 정말 듣고 싶어 하는 게 뭔지 읽어내고 긁어주는 점쟁이처럼 소설가도 그런 역할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솔직히 앞으로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은 없다. 하지만 내 자신이 아프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쓸 수 있을 때까지 쓸 것이다.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를 드리고, 소설의 핵심을 볼 수 있게 도와주신 박기동 최창학 교수님, 문학의 매력을 알려주신 김혜순 심석구 교수님, 언제나 믿음으로 지켜봐 주시는 부모님과 가족들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S, 당신이 없었다면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겁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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