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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나를 쓴다면

by  박주영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1

    누군가 내게 어디로 휴가를 떠나고 싶으냐고 묻는다. 나는 아프리카라고 대답한다. 그는 의외라는 듯 이유를 묻는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동물의 왕국이나 사파리를 이야기한다. 아프리카 케냐의 마사이마라에 가면 새벽잠에서 깨어나는 사자, 한낮의 뙤약볕을 피해 풀을 뜯는 버팔로, 물을 찾아 이동하는 수십만 마리의 누우떼를 치타가 쫓는 장면을 볼 수 있다고. 그는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이런 내 대답을 정말 나를 안다는 사람들이 듣는다면 어이없어 할 것이다. 살아서 움직이고 피 흘리고 그리고 병들고 마침내 죽어가는 건 내겐 사람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누군가 말했다. 유럽이 인간의 예술이라면 아프리카는 신의 예술이라고. 아프리카…… 늘 그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곳에 가보고 싶은 또 한 가지 이유는 아직 그곳에 가보았다는 사람을 아무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2

    어깨를 툭툭 부딪히는, 옆 사람들의 몸놀림이 느껴지는 한 사람이 서 있을 수 있는 적당한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나는 버티고 있다. 지하철은 한산하지도 복잡하지도 않다. 하지만 굳이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차라리 복잡한 쪽이다. 옆 사람과의 신경전이 끝나자, 앉아갈 수 있을까, 택시를 탈 걸 그랬나, 얼마를 더 가야 하나, 그런 생각들이 떠오른다. 무료하다. 이럴 때를 위해서 나는 언제나 음악을 준비한다. 어깨에 아슬하게 걸려 있는 핸드백을 열고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 MP3 플레이어를 작동시킨다. 에너지 컨트롤의 표시 칸의 네 개 중 두 개가 들어온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요즘은 모든 게 이런 식이다. 절반이면 안심한다. 전에는 완전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심하지 않는 그런 아이였는데, 언제부터인가 나는 절반쯤이면 충분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내게 그걸 가르치려 들었고, 어느새 날 그렇게 밖에 대접해주지 않는 세상에 적응이 되고 있다. 요즘 나는 운이 나쁘다. 한마디로 되는 일이 없다. 뭐가 되길 바라는 지도 잘 모르겠지만 나를 두고 돌아가는 형편이 좋질 않다. 그렇다고 딱히 낭패한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때때로 이게 도대체 뭐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고 짜증이 나고 견디기가 힘들어 악 소리라도 질러야 하는 때가 있다. 나는 포기가 빠른 편이다. 한두 번 하다가 잘 안되면 그 즉시 그만두어버린다. 어쩌면 그 중에는 세 번쯤에는 분명 잘 되었을 것도 몇 개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후회 같은 건 안 한다. 그런 일들은 모두 실은 세 번까지도 시도해볼 수 없을 만큼 내게는 무의미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포기가 빠른데다가 또 변명도 많다. 늘 그럴 듯한 이유로 다른 사람뿐 아니라 나까지 설득하기 때문에 이제까지는 두고두고 억울해할 일은 없었다. 앞으로? 앞으로도 물론 그런 자세로 살아갈 것이다. 지금부터 간단히, 아주 간단히 내 소개를 하겠다. 사실 나는 별로 소개까지 할만한 그럴싸한 이력이나 사연이 있는 인간은 아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아 슬슬 걱정이 될 정도로 형편없는 인간이다. 너무 겸손했나. 사실 그렇지도 않다. 이름은 박지훈. 대한민국에 출고된 지 25년 8개월 되었으니, 우리 나이로 스물일곱 살이다. 대학을 나왔고 전공은 실생활에 아무 도움도 안 되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걸로 했다. 잠깐잠깐 아주 별 볼 일 없는, 별 볼 일 없기에 더욱 견디기 힘든 직업들을 가졌었고, 지금은 아주 완전히 푹 쉬고 있다. 흔히 말하는 백수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역은…… 아, 이제 내려야 한다.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약속시간이 30분 지나가고 있다. 기다리다가 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상관은 없다. 어차피 만나봐야 우두커니 마주 보며 정말은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그래, 나도 알아, 나도 그래, 다 그렇고 그런 거지, 라고 거짓위로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는 버릴만한 용기도 없고 싸울만한 배짱도 없는 사람들끼리 또 닳고 닳은 타협안을 내놓고는 또 그런 우중충한 기분을 떨치려고 말을 쏟아내고 노래를 쏟아내고 해야 할 테니까. 이제 모든 것이 뻔하다. 대충 어떻게 될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모를 투항의 그 날까지는, 그래도 파닥거리는 저항의 몸짓을 보여야 한다는 것. 그래야, 먼 훗날 자기 자신에게 순순히 항복하지는 않았다고, 나름대로는 끝까지 저항하다가 여기까지 끌려온 거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남들 하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남들 하는 대로만 해도 좋은 것이다.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이제까지는. 남들 하는 대로 그럴 듯하게 흉내는 내어왔으니까. 지나온 시간보다 앞으로 올 시간은 더 쉬울 지도 모른다. 선택은 보다 보편적이 될 테니까. 더 큰 집, 더 큰 자동차, 더 많은 돈…… 모든 것이 귀찮아질 때가 있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삐걱대며 끝내는 돌아갈 것이고 나 없으면 죽을 것 같다던 사람들도 언젠가는 나를 잊고 살아갈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매일 재깍재깍 돌아가던 내 삶을 헝클어버리고 싶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 어떻게? 이렇게 말고 다르게. 웃기는 군. 그렇지만 오늘은 하던 대로 하자. 내리자. 늦기 전에.

    3

    오전 10시. 전화벨이 울린다. 이건 엄마 전화일게 틀림없다. 받고 싶지가 않다. ─ 지훈이니? 내가 너 때문에 편안할 날이 없구나. 가시방석이다. 아버지 알면 어쩔려구, 그러니? 또 그 말만 열댓 번 엄마는 신들린 사람처럼 반복하고 나는 수화기를 귓전에서 떼어놓으며 딴 짓을 할 것이다. 아버지가 알면 어쩔 거냐고? 뭐, 어쩌겠어. 아버지가 뭐 어쩌는 사람이었나.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뒷짐 지고 있는 아버지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건 엄마의 호들갑일 뿐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내 일에 관심도 없다. 아버지는 내게 거창한 걸 바란 적이 한번도 없었다. 물론 엄마도 그렇지만. 부모님의 기대뿐 아니라 온 집안의 관심이 온통 큰오빠에게만 쏠려있었다. 직업군인으로 떠도는 아버지로 인해 오래도록 우리 삼남매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유독 큰오빠를 편애하셨다. 먹을 것이 있으면 그걸 제일 먼저 먹어야 하는 것도 큰오빠였고 손님들이 들고 오는 선물 중 제일 먼저 고를 수 있는 권리도 큰오빠의 것이었고 다 가지겠다고 해도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심지어는 텔레비전의 채널 선택권도, 하루 식단의 선택권도 큰오빠에게 있었다. 나와 작은오빠는 언제나 큰오빠보다 낮은 수준의 기대만을 받았고, 덜 인정받고 덜 사랑받는다고 느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지 않다는 걸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불리한 위치에 서있으면 더 노력하면 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불리한 위치에 있으면 더 쉽게 포기하게 된다. 작은오빠가 그랬다. 작은오빠는 어릴 때부터 큰오빠와는 반대편으로 나아갔다. 학교성적도 엉망이었고, 툭하면 싸움질에, 정서가 불안하다고, 선생님이 부모님을 학교로 부르곤 했다. 선생님과의 면담을 마치고 돌아오면 엄마는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 내가 저 놈 때문에 못살아. 창피해죽겠어. 저걸 뭐 하러 낳았나, 몰라.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퇴역하고 회사의 중역이 되고 어머니가 매일 집에서 머물면서 그럭저럭 정상적인 가족구성원으로 살게 된 이후부터 작은오빠는 전처럼 심하게 엉망으로 굴진 않았다. 사실 할아버지나 할머니, 또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스스로 무엇을 어떻게 왜 잘못했는지 뉘우칠 때까지 용서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표 나게 큰오빠를 특별대우하지도 않으셨다. 아버지 앞에서는 큰오빠도 잘못을 하면 똑같은 벌을 받았다. 아버지에게서 조금이라도 특혜를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였다. 아버지는 내가 어리고 또 여자라고 매를 들지는 않으셨다. 그 대신 나는 엄마가 큰오빠에게 해주는 것 같은 위로는 받아보질 못했다. 아버지의 매를 피해가는 대신 며칠씩 엄마의 신경질적인 잔소리를 들어야 했고 벌로 엄마 일을 도와야했다. 그래서 차라리 똑같이 한 대 맞고 마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 엄마의 기준으로 한다면 엄마를 창피하지 않게 살아주고 있는 사람은 우리 삼남매들 중 아마도 작은오빠뿐일 것이다.

    4

    재작년에 몇 개월 동안 고향집에 있었던 적이 있었다. 내가 첫 일자리를 때려치우고 빈둥거리는 기간이 길어질 기미가 보일 때 아버지가 퇴역한 후부터 줄곧 다니던 회사를 나왔다. 어머니는 한번도 쉬어본 적 없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퇴직이 청천벽력처럼 생각되었는지 더 이상 나에게 생활비를 올려 보낼 수 없다고 통보하고 직접 올라와서 내 방을 빼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스무 살에 떠났던 고향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떠나있던 동안 단독주택이었던 우리 집은 어느새 5층짜리 건물이 되어있었고 내 방이 사라졌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창고처럼 쓰던 방을 써야 했다. 서울의 아파트에 있던 내 짐들을 모조리 구겨 넣은 어설프게 축조된 내 방. 그 어설픈 내 방처럼 모든 것이 어색했다. 어떻게 하면 떠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렇게 줄곧 떠날 궁리만 하며 지내다가 마침 작은오빠가 제대를 하고 마지막 남은 한 학기를 위해 복학을 하면서 서울에 새 집을 구했다. 작년 봄이었다. 나는 그 틈을 타서 다시 일을 한다는 핑계로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나는 회사를 세달 다니고 또 그만두었다. 한 달은 참을 만했고 두 달 째는 억지로 견뎌냈고 세달 째는 마침내 미칠 지경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아직 내가 또 회사를 그만둔 것을 모르시는 것이 틀림없다. 알게 되면 당장 올라오셔서 나를 끌고 내려가실 것이다. 아니, 점잖게 앉아서 어머니를 안절부절 못하게 득달하실 지도 모른다. 아무튼 좋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속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조만간 나는 고향집으로 내려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엄마의 계획대로 몇 번 시시하기 그지없는 남자들과 선을 봐주어야 할 것이고 그러다가 결국 포기하고 그들 중의 하나와 결혼을 하여 적당히 안락해질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결혼? 그건 물론 엄마의 계획일 뿐이다. 엄마는 내가 결혼 따위는 우습게 여긴다고 말하지만 사실 나는 결혼을 아주 대단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처럼 적당히 대충 남들 하는 것처럼 할 수가 없다. 나에게 결혼이라는 건 언제든 내 편이 되어줄 단 한사람을 죽을 때까지 가진다는 의미이다. 내가 옳고 그르건 간에 그는 타인을 향해서는 언제든 내 편이 된다. 그러나 나는 언제든 내편이 되도록 누구든 설득할 수 있다. 그게 내 유일한 장점이고 재능이다. 필요한 사람을 필요한 순간에 내 편으로 만들 자신이 있는 나에게는 그러므로 단 한 사람의 그런 무지막지한 동지는 사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에게도 내가 그런 식의 동지가 되어야 하는 게 싫다. 따지기 좋아하고 비관적인 나에게 그런 절대옹호의 대상이 나타날 리도 만무하지만, 결혼을 하고 한 남자에게 얹혀살게 되면 그건 아버지에게 얹혀사는 거랑 뭐가 다른가. 내가 어찌해도 유전자로 묶인 아버진 아버지이지만 남편은 아니다. 언제고 전남편이 될 수 있다.

    5

    어제는 술을 너무 마셨다. 정말 오래간만에 필름이 끊겼다. 내가 잘 하는 건 아무래도 술 마시는 것, 노래 부르는 것, 춤추는 것, 계속해서 쉴 새 없이 떠드는 것, 그렇게 사람들을 매우매우 즐겁게 해주는 것이다. 성우, 그 자식만 아니었다면 어제 술자리는 매우 기분 좋게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아쉬움 없이 진탕마시고 뒤끝도 남지 않고. 그런데 그 자식이 결정적으로 내 기분을 상하게 했다. 언제나 성우가 문제다. 친구들은 아마도 성우와 내가 문제라고 생각할 테지만. 오래전부터 성우와 나는 만나기만 하면 싸웠다. 처음에는 잘 짜여진 핑퐁게임처럼 말장난이 오가는 정도여서 우리 둘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흥미진진해할 그 정도였는데. 그게 계속되더니 이제는 험악한 수준까지 진행되었다. 성우, 그 자식 이야기를 주절주절 되새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까지도 그 말이 귀에 뱅뱅 돌고 있다. ─ 예쁜 여자애들은 모두 술집에 있지. ─ 그건 예쁘기만 한 애들이지. 난 그냥 예쁘기만 한 게 아니거든. 나는 그렇게 기세 좋게 대꾸했다. 어제 성우의 주장의 요지는 예쁜 여자들은 하나같이 머리가 비었거나 좀 머리가 있다 싶어도 도무지 깊은 생각이라곤 없고 하나같이 다루기에 비용과 노력이 많이 든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여자는 그냥 예쁘기만 하면 됐지, 거기에 또 뭔가 갖추면 남자를 힘들게 하고, 잘나면 잘날수록 사는 게 피곤해진다고까지 했다. 그리고는 이혼한 꽤 유명한 여자아나운서와 작가를 예로 들면서, 그렇지 않느냐고 뻔뻔스러운 얼굴로 내게 동의까지 요구했다. 나중에 나타난 성우의 친구인가 뭔가 하는 남자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좀더 험악한 지경에 이르렀을 지도 모른다. 이전의 어떤 날처럼 피가 튀기는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때 피를 흘린 사람은 물론 내가 아니었다. 성우에 대해 설명을 좀 해야 할까. 말하기도 싫지만. 한때 어떤 락 그룹의 드러머였다는데 확인할 길은 없다. 보컬도 아니고 화려한 기타리스트도 아닌데, 제일 뒷자리에 있는 드러머까지 누구 쳐다보나. 이런 나한테 사람들은 말한다. 그게 바로 내 문제라고. 그러면 내가 항상 하는 말은 이거다. 그러니까 니가 드러머하라고, 내가 보컬할 테니까. 그리고 난 끝까지 이렇게 우긴다. 그래도 보컬이 제일 중요해. 그렇잖아, 안 그래? 누구도 안 그렇다고 말하지는 못하리라. 자신들도 제일 먼저 보는 것은 보컬이면서. 좀 솔직해지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세상에는 진짜 멋진 드러머도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하물며 무대 근처에는 가지도 못하는 작곡가나 엔지니어, 심지어는 관객, 그런 사람들 없이는 아무 것도 안 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난 언제나 보컬 외의 다른 건 되고 싶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이젠 그것도 다 옛날 옛적의 철없던 박지훈의 이야기이다. 아직도 나는 보컬 외의 다른 건 시켜줘도 안 한다고 입으로는 말하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게 다 무슨 소용 있어, 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중심은 나, 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아직도 그 말을 무슨 신조처럼 여기는 철없는 애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세상의 중심이 되기엔 처음부터 내 위치가 너무나 불리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 조차 따져보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내게서 그 기회를 거두어 가버린 자들을 증오한다. 그래서 나는 세상을 위해서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인간이 되기로 했다. 그냥 있는 걸 마구 소모하며 이다지도 허무하게 살다가 갈 것이다.

    6

    세상에서 제일 어정쩡한 시기가 대학을 졸업한 이후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누구누구의 딸로도 충분하지 않고 무슨 학교 몇 학년 몇 번도 아니고. 나처럼 백수일 경우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기에 난 이러이러한 사람입니다, 라고 설명하기가 무척 곤란하다. 고등학교 동창인 설희가 생각난다. 며칠 전 전화해서 설희가 말했다. ─ 대학까지 나와서 집에 있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다 바보로 알더라고, 그래서 속이 상한다고 엄마가 말했어. ─ 사람들이 널 바보로 안다고 니가 바보가 되는 건 아냐. ─ 나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젠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난 지금도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그러면 무얼 해. 현실 속의 나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늘 이기기만 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어쩌다 한번 지는 것을 염려하진 않았다. 사람들은 늘 이기기만 하는 사람을 턱없이 미워하니까. 하지만 이제 그렇게 생각한 내가 웃긴다는 생각이 든다. 난 졌다. 아니, 질지도 모른다. 난 그렇다고 해도 설희는 아니다. 설희는 내가 아는 여자 중에서 아니, 인간 중에서 가장 똑똑하고 성실하고 게다가 착하다. 그런 설희가 패배한다면 세상이 잘못된 거다. ─ 설희야, 그런 말에 신경 쓰고 마음 상하지 마. 넌 바보가 아니야. 그 사람들이 바보일거야. 언젠가 그 사람들은 모두 널 알아보지 못한 걸 후회하게 될 거야. 그때 좀 친해둘 걸 하면서. ─ 넌 아직도 내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니? ─ 물론이야. ─ 내가 뭘 해서 그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지? 불안한 목소리로 설희는 그렇게 말하고는 한참을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 갑갑해 죽겠어. 그냥 갑갑해. ─ 그러다가 곧 괜찮아져. 백수경력으로 보자면 더 오래된 내가 그렇게 말했다. 정말 그럴까? ……괜찮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건 설희나 내가 처한 상황이라는 게 나아져서가 아니다. 상황은 아마도 점점 더 나빠질 것이다. 서서히 자기 자신을 달래게 된다. 잘 될 거야, 잘 될 거야. 무기수가 넌 살아나갈 수 있을 거야, 있을 거야, 하고 말하는 것과 비슷할까. 그런 것을, 겨우 그 따위 것을 희망이라 여겨도 되는 걸까.

    7

    주말이라 집으로 온 작은오빠는 운동을 하고 있다. 쉴 새 없이 운동을 한다. 그래서 작은오빠는 꽤 좋은 몸을 가지고 있다. 솔직히 저렇게 열심히 운동을 해대는 건 내가 보기엔 일종의 콤플렉스다. 작은오빠는 큰오빠보다 키가 5센티미터 정도 작다. 다 자란 어른이 되고 나서의 키가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내내 작은오빠가 큰오빠보다 5센티미터 정도쯤 작았던 것 같다. 큰오빠는 아버지를 굉장히 많이 닮았다. 생김새며 걸음걸이, 목소리나 말투까지. 큰오빠는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아버지라고 말할 정도였고 아버지처럼 살고 싶다고 말했었다. 아버지가 큰오빠의 모델인 것이다. 하지만 작은오빠는 아니었다. 아버지를 싫어하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 나는? 난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세상의 여자들은 도대체 뭐를 한 것인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 이건 너무 광범위하다. 엄마처럼 사는 것, 그 한 점을 제외한 광활한 가능성. 내가 아는 가까운 여자들의 삶에는 제대로 된 모델이 없다. 젊었을 때는 록 허드슨 닮았다는 소리를 들은 아버지를 닮아 이목구비가 뚜렷한, 누가 봐도 미남형인 큰오빠와는 달리 작은오빠는 얼굴선이 흐린 편이다. 그래서 귀엽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큰오빠의 얼굴이 그의 인간성처럼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는 반면 작은오빠의 얼굴은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작은오빠는 그런 자신의 부드러운 이미지들을 싫어했다. 작은오빠는 약해보이지 않으려고 어릴 때 태권도부터 시작해서 쿵후며 권투며 격투기 종류를 주로 했었고 대학 때 이후로는 웨이트트레이닝을 해왔다. 여자애들이 줄곧 다이어트에 연연하는 것처럼 남자들은 근육에 연연하는 걸까. 타고난 몸매 이상의 것을 바래본 적도 없고 그걸 위해 어떠한 노력도 한 적 없는 나는 솔직히 저러는 작은오빠가 이상할 때가 있다.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저렇게 인상을 쓰고 애쓰는 건 아무래도…… 그렇지만 솔직히 자랑스러운 건 사실이다. 저렇게 땀 흘리며 노력하는 것을 옆에서 줄곧 보아 온 나로서는 보기 좋은 몸이 곧 작은오빠의 성실함을 말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작은오빠는 아주 성실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지훈아, 이리 와서 앉아봐.” 운동을 마친 작은오빠가 샤워를 하고 나오면서 말했다. “왜?” “이리 와서 앉아보라니까.” “도대체 왜 그래?” 나는 누가 내게 뭔가를 요구하면 단번에 하지 않고 언제나 이런 식으로 한번 비튼다. 단번에 이유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하면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다. 타인을 대하는 이런 방식이 절대로 나를 손해 보게 하지 않을 작은오빠한테까지 저절로 튀어나온다. “냉장고에 맥주 있니?” “있어.” 작은오빠는 냉장고로 가서는 맥주를 꺼내왔다. “어쩌다가 들킨 거야?” “뭐?” “회사 그만둔 거 말이야.” “어떻게 알았어? 그런데 그만둔 게 아니고 짤린 거야.” “엄마한테 전화 왔었어. 널 어쩌면 좋겠냐고.” “어쩌긴 뭘 어째? 하여튼.” “어쩌다가 들킨 거야? 너같이 약은 애가?” “몰라. 그런데 오빠는 꼭 알고 있던 사람 같은 투인데.” “그래, 난 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나한테 아는 체 안한 거야.” “내가 그때 너한테 그러지 말라고 했으면 너 어떻게 했을 거 같아. 가방 싸가지고 어디로 튀었을 거다. 안 그래?” “그래서 입 다물고 있었던 거야.” “아무튼 지금 문제는 내가 알고 모르고가 아니잖아. 집에서 알게 됐으니 어쩔 거야?” “뭐 어쩌긴 어째? 이렇게 그냥 막 버티는 거지. 아니면 또 취직하고. 또 때려치우고.” “엄마 계획은 그게 아닌 모양이던데. 집에 내려와서 선을 보게 해서라도 결혼을 시키겠다던데.” 작은오빠가 걱정스런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정말 미쳐. 내가 미쳐. 그런데 아버지까지 아신 건 아니지?” “너도 아버지가 무섭긴 무서운 거니?” “그냥 아무 말 안하고 가만 계시니까 대꾸할 것도 없고……아무튼 곤란하잖아.” 작은오빠는 냉장고에서 꺼내온 맥주캔을 이제서야 땃다. 경쾌한 소리가 났다. “너도 마실래?” “응.” 작은오빠는 자기 손에 들려있던 맥주캔을 내게 넘겨주고는 다시 주방으로 갔다. 나는 작은오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작은오빠가 몹시 외로워보였다. “잘 생각해봐. 뭘 하고 싶은지. 어떻게 되고 싶은지.” 우리는 맥주를 마시며 계속 이야기를 했다. “난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농담하지 말고.” “농담을 시작한 건 오빠가 먼저야. 되긴 뭐가 돼. 그냥 이렇게 사는 거지. 되고 싶은 거 그런 거 없어.” “정말이니?” 내 장래희망은 오랫동안 우주비행사였다. 그 전에 꿈이 뭐였는지 알 수 없지만 철들고 나서부터는 쭉 장래희망란에 우주비행사라고 적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우주비행사가 되려고 노력해본 적도 없고, 진짜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었던 적도 한번도 없었고, 내가 우주비행사가 될 거라고는 꿈속에서조차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늘 내가 장래희망란에 그렇게 적어온 것은 진짜 내가 뭐가 되고 싶은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우주비행사는 물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일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 여태 그걸 해냈다는 사람은 없다.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자신의 현실과 미래를 가늠해보면서 우왕좌왕하는 대신 실현가능성이 희박한 장래희망을 적음으로써 일찌감치 현실적인 나의 미래로부터 이탈해버렸다. “그러는 오빠는?” “나야 뭐” 작은오빠가 약간 망설였다. “진짜 내 꿈이 뭐였는지 아니? “글쎄.” “진짜 꿈 말이야. 어릴 적에 아무것도 모르고 막 미치도록 그러고 싶은 거 있잖아.” “오빠한테 그런 게 있었어? 대통령 아냐? 남자애들은 다들 그런 꿈 한번은 갖는다더라. 아니면, 육백만불 사나이? 슈퍼맨? 아니면 배트맨?” “대통령도 좋고 슈퍼맨도 좋지. 하지만 그건 그냥 남들도 다 꾸는 꿈이지. 자질이나 능력에 관계없이. 내 꿈은 야구선수가 되는 거야.” 어릴 때 작은오빠는 인근 지역에서 야구를 가장 잘 했었다. 작은오빠가 투수와 4번 타자를 겸하던 우리 동네 팀은 무패행진을 계속했었다. 그래서 한동안 말썽꾸러기 작은오빠가 자랑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왜 야구선수가 되려고 하질 않았어? 오빠, 야구 잘 했었잖아.” “야구를 하면서는 말이야. 계속 형보다 한수아래일 것만 같았어.”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그래서 야구를 그만두었던 거야." “그래, 너라면 그런 식으로 말할 줄 알았어. 하지만 난 말이야……” 작은오빠가 무슨 말을 하는지 물론 안다. 모든 사람들이 오랫동안 인정해온 그런 것이 있다. 학교 다닐 때는 공부 잘하는 애가 뭐니 뭐니 해도 최고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잘 버는 사람이 최고이고, 그리고 우리 집에서는 큰오빠가 최고였다. 큰오빠가 잘하는 공부가 최고 가치였지, 작은오빠가 잘하는 야구 같은 건 아무 가치도 없다. “자꾸 실패하는 것도 그다지 나쁜 건 아니야. 부모님이 나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으니까. 이제는 제발 제대로 살아만 준다면 그 정도로. 만약에 형이라면 형이 이러겠다고 했으면 아버진, 그리고 어머니는 어떡하셨을까. 그런 생각을 언제나 나도 모르게 하게 돼. 형이였다면 달랐겠지만 내가 야구를 한다고 했어도 부모님 반대하진 않으셨겠지.” “그런 식으로 반대를 극복하는 방법도 있구나. 계속 조금씩 실망을 시켜드려서 마침내는 제발 뭐라도 해라, 그렇게 만드는 거. 큰오빠한테 그 방법 좀 가르쳐주지 그랬어. 그랬으면 그렇게 갑자기 충격적인 선언 같은 건 안 했을 거 아냐.” “지훈아, 넌 어때?” “나?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에게나 반대가 있는 거지, 아무거나 괜찮은 사람에게는 그렇지도 않잖아. 그렇지 않아?” “너더러 무슨 직장을 가질 것인지, 어디서 일할 건지, 그런 걸 생각해 보라는 게 아니야. 니 인생에 대해, 그러니까 어떤 행로를 택할 것인지 좀 진지하게 생각해보란 말이야. 난 지금 야구선수가 되긴 너무 늦었잖아. 더 늦기 전에 이룰 수 있는 꿈이 혹시 있는지 찾아봐. 미치도록 하고 싶은 것이 아니더라도 저러고 살면 정말 재밌겠어, 라든지 저런 건 정말 부러워, 그런 거 혹시 있는지.” 작은오빠와 나의 대화는 그런 선에서 끝났다. 갑자기 작은오빠가 부지런하고 성실한, 게다가 진지하기까지한 개미처럼 느껴졌다. 한때는 작은오빠도 나처럼 배짱이였는데. 더 늦으면 불가능해지는 꿈…… 서른 살이 넘어서는 야구를 시작해도 야구선수가 될 수 없다. 가끔이라도 부러운 사람들……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가수, 여러 사람의 인생을 살아볼 수 있는 배우,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랩퍼. 지금부터 노력하면 혹시 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사람과 결혼을 하고 어떤 인생을 살고 그런 것이 계획이나 노력에 의해서 되는 걸까. 우연히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닐까. 혹은 어떻게 해도 그렇게 살게 되는 운명이라는 것이 있거나. 희망하고 애쓰고 실패하고 절망하고 다시 도전하고 그렇게 복잡해지는 게 싫어서 나는 노래를 부른다. ……나는 개미랑은 거리가 먼 배짱이. 나는 비관적인 배짱이. 자존심이 있으니 겨울이 오면 개미 집 문을 두드리지 않고 그냥 얼어 죽고 말 배짱이…… 하지만 아직 겨울까지는 시간이 남아있어. 그러니 아직까지 노래를 불러도 좋을 거야. 노래를 불러도 괜찮을 거야. 그럴 거야.

    8

    근래 들어 어떤 날보다 일찍 일어났다. 하지만 할 일은 없다. 지난 주말 작은오빠가 대청소를 해놓고 장까지 봐놓은 덕분에 할 일이 더 줄었다. 사람들은 오빠와 산다고 하면 살림의 몫은 대개 내가 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우린 그렇지 않았다. 작은오빠는 아무리 사소한 것도 시키는 법이 없다. 뭐 가져와, 이거 해, 저거 해, 그런 말, 절대로 안 한다. 시킨다고 할 나도 아니지만. 전화벨소리. 혹시 설희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얼른 수화기를 낚아챈다. “여보세요.” “저, 안녕하셨어요.” “……” 남자다. 영 낯선 목소리. “저, 혹시 기억나십니까? 저 진우 친굽니다.” “진우요?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 “박지훈 씨 아닙니까?” “네, 맞는데요.” “저, 전날 뵌 적이 있는 데요……” 남자는 자신이 나를 보게 된 경위를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제서야 내 머리 속을 스치는 사람이 있었다. 아, 싸움 말리던 그 사람. “성우 친구 분이세요?” “성우라면?” “윤 성우 모르세요?” 남자는 어쩌면 성우의 친구가 아닐지도 모른다. 거기에 있던 성우의 친구의 친구였는지도. 그러니 남자는 거기에 있던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의 이름을 댔던 것이겠지. 그런데 내 기억에는 진우라는 사람은 없었다. “저어, 괜찮으십니까?” “뭐가요?” “저, 그러니까……” “아, 그거요. 괜찮아요.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난 또, 성우가 내가 걱정돼서 대신 전화라도 걸게 했나, 했네. “진우, 아니 성우가 일 때문에 죄송하기도 하고…….” “아무튼 전 괜찮거든요. 뭐, 또 할말 있으세요.” 그날의 일은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다시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그날처럼 심하게 싸운 것은 어쩌다 한번이지만 성우와 내가 시끄러운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오래 통화하고 싶지 않았다. “하여튼 그날 죄송했습니다.” “뭐 그쪽이 저한테 죄송할 거까지야 있나요.” “그래도……” “정 그렇게 죄송하시면 혹시 성우 만나실 일 있으세요?” “예. 오늘 만날 겁니다.” “잘 됐군요. 그러면 저 대신 그 잘난 면상이나 한대 갈겨 주시죠.” 그러고는 나는 전화를 끊었다. 성우의 친구인지, 친구의 친구인지, 그날 뒤늦게 나타나서 뭐라 뭐라 자기소개를 하긴 했었는데 이름도 성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굉장히 신사처럼 구는군. 그래 봤자 지만. 그런데 도대체 왜 전화한거야. 자기가 무슨 성우가 대변인인가, 해결사인가. 나는 그 남자가 처음에 말한 이름 진우가 누구일까 조금 궁금해 하다가 그만두었다.

    9

    성우를 만나는 게 아니었다. 아예 <나비구름>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피해, 하면서 갔다가 결국 또 이 지경이 되고 말았다. 성우가 내게 싸움을 걸었다. “박지훈, 너 뭘 믿고 그렇게 까부는 거니?” “날 믿고 까분다. 왜? 믿을 거라고는 나 밖에 없다.” 그렇게 나는 기세 좋게 댓구는 했지만…… 속으로는 믿을게 나 밖에 없다고? 이제는 별 이상한 거짓말까지 다하는 군, 하고 생각했다. 내게는 부모님이 있고 오빠들이 있다.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지만 실제로도 나는 아마 중산층이거나 그 이상일 것이다. 이 나이에 놀고 있어도 내 생존을 위협받지 않으니까. 부모님과 작은오빠 없이는 이보다 한참은 더 비참한 꼴을 하고 있을 거면서 믿을게 나밖에 없다고. 참 뻔뻔스럽기도 하구나. 내가 너무 당당히 말해서인지 이번에는 성우가 내가 읽고 있던 책을 가리키며 시비를 걸었다. “이런 책을 왜 읽니?” “이게 뭐 어때서? 굉장히 재미있어.” “그래, 물론 재미있겠지.” 성우는 내 취향을 무시하듯 말했다.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 내가 물었다. “너, 이거 읽었니?” “아니.” “읽지도 않고 잔소리야.” “나보다 똑똑한 작자들이 읽고 쓴 걸 봤지.” “그래. 그런데 이걸 읽고 쓴 그 똑똑한 작자는 도대체 몇 살이고 어디서 어떻게 자랐고 차를 타고 다닐 땐 어떤 음악을 듣고 노래방에선 어떤 노래를 부를까. 나이트클럽은 어딜 제일 좋아하고 무슨 신문을 읽을까. 요컨대 그 똑똑한 작자랑 난 비슷한 물에서 놀지 않았다는 얘기야. 취향이 다르다는 거지. 고상한 것만 읽고 느끼라는 법이 어딨어.” “역시 박지훈, 넌 너무 잘났어.” “좋은 소설이야. 이걸 읽으면 30년을 살아온 새 친구를 사귀는 기분이야. 이 소설 속의 인물이 이 세상에 진짜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게 유감이야. 같이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할 말이 많거든.” “야, 너 그렇게 놀지만 말고 책이나 한권 써라.” “웃기지마.” “니가 입으로 떠드는 거 10분의 1만 써도 꽤 흥미로울 거야. 적어도 27년을 살아온 특이한 친구 하나를 새로 사귀는 기분일 거잖아. 좋잖아.” “내가 하라면 못할 줄 알아.” “그렇게 맞받아칠려고만 하지 말고 들을만한 얘길 하면 마음에 한 10분이라도 좀 담아줄래.” “제발, 너나 그래.” “그래, 관두자. 관둬.” 들을만한 얘길 하면 마음에 10분이라도 담아보라고. 책을 써? 내가? 다 쓸데없는 일이야. 불가능해. 나는 쓸데없는 일은 하지도 말고 불가능한 희망은 갖지도 말고 그렇게 살라고 배워왔다. 그러나 나는 늘 쓸데없는 일에 불가능한 희망에 한눈을 팔아왔다. 그래서 내 삶이 언제나 직선주로가 아니라 곡선주로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열심히 성실히 집중해서는 나랑 상관없는 세계였다. 나는 산만하고 삼십분을 가만히 앉아있질 못했다. 오래 한 가지 일을 하게 되면 미리 한숨부터 나왔다. 한때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내 삶이 한편의 소설이 될 거라고. 하지만 내 삶이 이토록 지리멸렬할 뿐이라면 내가 쓰는 것도 괜찮겠지. 모두 확 뜯어 고쳐버리는 거야. 신나겠군. 윤 성우, 이제 10분이 지난 것 같으니까, 이 이야기를 내 마음에서 비워도 되겠지.

    10

    머리를 오렌지색으로 물들였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나는 꼭 제5원소에 나오는 리루─밀라 요보비치처럼 보인다. 눈가를 시커멓게 강조하고 입술을 하얗게 칠한 나는 몸에 쫙 달라붙은 바디와 검은색의 미니스커트를 입고 긴 롱부츠를 신고는 어깨를 기우뚱거린다. 그리고는 거리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미쳐보고 싶다. 제대로 한번. 막 나가고 싶다. 갈 수 있는 데까지. 일어나 보니 시계가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창이 작은 이 방에선 낮인지 밤인지 구별할 수가 없다. 거울을 보았다. 내 머리칼은 여전히 치렁치렁한 검은색이었다. 꿈이었구나. 정말. 집에 돌아오면 언제나 이 따위 꿈을 꾸게 된다. “지훈이, 니 인자 일어나나? 니 참말로 너무 한다.” 나는 엄마의 말을 중간에서 자르며 안방을 흘깃거리며 묻는다. “아버진?” “시계 좀 봐라. 지금이 몇 신데 니 아버지가 집에 있을 양반이가. 나가셨다.” “어디로?” “그걸 니가 알겠나. 내가 알겠나.” 직장을 그만두고 내가 고향집에 내려와 있었을 때 아버지는 퇴직을 하고 3개월째에 접어들고 계셨다. 나는 집에서 하루 종일 아버지 얼굴을 마주하고 있게 되면 어쩌나, 지레 걱정을 했고 취업준비를 합네, 하며 외국어학원에 등록을 해서 매일 집을 나갔다. 대학 때도 안 다니던 외국어학원을 졸업까지 하고 다니게 되다니. 아침잠이 많은 내가 이른 아침반을 끊었을 리 만무했다. 선천적으로 사람들의 밀도가 높은 것을 싫어하는 나는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제일 널널할 것 같은 오전 마지막 반을 끊기로 했다. 내가 취업을 핑계로 비싼 학원비까지 내면서 놀고 있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결코 빈둥거리지 않았다. 나보다도 일찍 매일 아침 어디론가 나가셨다. 나는 아버지가 어디에서 시간을 보내는지 궁금했다. 나처럼 학원이라도 다니시는 걸까. 아버지도 어딘가에서 나처럼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던가. “니 밥 안 먹을 기가?” 부엌에서 엄마가 큰소리로 물었다. “생각 없어.” “그러니까 그렇게 빼빼마르지. 생전 밥풀 구경이라곤 못한 것 같은 꼴을 해가지고. 니가 무슨 영화를 볼라꼬 서울서 그라고 있노. 이 참에 그냥 내려오그라. 니 아버지랑 둘이서 얼굴 마주 보고 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젠 지엽다 지여워. 지훈아. 어떻노. 니도 이제 실실 시집갈 준비해야 안 되겠나?” 나는 얼른 욕실로 피신한다. 티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여진 반들반들한 거울을 본다. 생전 밥풀 구경이라곤 못한 것 같은 꼴을 한 빼빼마른 여자가 하나 서 있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본다. 피부에는 윤기가 없다. 확실한 건성피부. 여자 나이 스물다섯부터 피부노화가 시작된다고 했던가. 내 청춘은 한번도 제대로 피지 못한 채 시들어가고 있다. 엄마는 내가 욕실을 나오길 기다렸다가 말한다. “내일 니 뭐할 거고? 내캉 시장이나 가자.” “시장은 왜?” “니 증조할머니 제사가 다 되어 안가나?” 제사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음력으로 된 그 많은 날짜들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외우고 미리미리 준비를 하는 엄마, 놀라울 지경이다. “안돼. 약속 있어.” “누구랑?” “친구” “친구. 누구?” “있어.” “니 친구들은 다 시집 안 갔나. 지난 봄에 지영이도 가고, 나리도 가고, 영희도 가고. 아직 남은 아가 있나.” “엄마는 우리 나이가 지금 몇 살인데 시집을 다 갔겠어.” “너는 니 나이가 적을 줄 아는 모양인데 방심하고 있으면 서른이 코 앞일기다. 마음 턱 놓고 있을 시간 없대. 서른이 다되어서 모아둔 돈도 한 푼 없고 변변한 남자도 하나 없고 그러면 니도 참 헛살았다는 생각 들기다.” 돈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는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 그게 현실이다. 내가 아무리 내가 잘 낫다고 우겨도 돈 한 푼 벌 수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거다. 그런 거다. 현실이란 세상이란 그런 거다. “그러는 엄마는? 엄마도 돈 못 벌긴 마찬가지 아냐.” “나야 돈 많지. 니 아버지, 돈이 다 내 돈 아니가.” 정말 그럴까. 아버지 돈이 다 자기 돈이라면서 자신을 위한 옷 한 벌도 제대로 못 사입으면서. 이백 만원 하는 냉장고 하나 사면서도 일일이 아버지 결재를 받으면서. “하긴 이혼하면 반은 엄마꺼지.” “야가 무슨 그런 험한 소리를 하노. 나는 돈 욕심 없다.” 엄마가 저럴 때마다 제 밥그릇도 못 챙기는 것 같아 화가 날 지경이다. 외할머니가 남겨놓으신 땅이 도로에 포함되어 보상금이 나왔을 때도 엄마는 외삼촌 등쌀에 돈 한 푼 받지 못했다. 그렇게 깨끗이 자기 몫을 포기한 댓가로 외삼촌이 사이판으로 여행을 보내주었을 때 엄마는 너무 감격해했다.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남매들끼리 재산 싸움하는 것도 보기 좋은 일이 아닌 거 알지만 엄마의 양보심은 답답한 데가 있다. 하지만 내가 따져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엄마는 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람 인정이 그런 게 아니다. 니 것 내 것이 어딨노. 우리 때는 다 그라고 살았다. “그래, 친구 누굴 만날 긴데?” “설희 만날 거야.” “설희? 설희라카면 그래, 가는 요새 뭐 하노? 대학원은 졸업했겠네.” “몰라.” “야가요. 와 신경질은 내고 그라노? 설희가가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참 잘했재. 니가 그때 안 그랬나. 니 친구 중에 설희가가 제일 똑똑하다고. 하긴 계집애가 똑똑해봐야 다 그게 그거지. 집에 들어앉아 살림하게 되면 다 똑같은 거지, 뭐. 그래도 설희 가는 참말로 아깝대. 뭐가 되어도 될 줄 알았는데. 그냥 그러고 있나. 내 딸이나 남의 딸이나 한심하다. 한심해.”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을 때 정말로 화가 난다. 나도 설희는 뭐가 되어도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직 체념하기에는 이르다. “엄마는 서른도 안됐는데 벌써 인생이 다 끝났어.” “하긴 그것도 그렇다. 내가 남의 딸 걱정하게 됐나. 내 딸도 모자라는 것 하나 없는데 이러고 있는데. 하긴 넌 넘쳐서 탈이지.” 엄마의 말은 언제나 턱없는 기대, 아니면 과도한 체념이다.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추락시킨다. 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내가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다 생각하고, 그래서 그걸 더 공격해댄다. 정말 지겨운 싸움이다. 나도 상처 입는다. 겉으로 태연한 체 하기 위해 내가 속으로 얼마나 나를 힘겹게 붙들고 있는지 그들은 모른다. 세상 속의 내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느끼면 슬프다. 그리고 그 정도밖에 내가 인정받을 수 없음에 당당한 얼굴로 항의할 수 없어 비참하다.

    11

    대학 다닐 때도 집에 오기만 하면 설희를 만나곤 했었다. 그때는 아무 일 없이도 즐겁고 행복했었다. 우리는 그때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미래, 그런 건 저절로 오는 건줄 알았다. 1학년이 지나면 2학년이 되고 또 3학년이 되고 그런 것처럼. 대학을 벗어난 지 겨우 몇 년 사이에 설희는 현실이라는 전쟁터에서 싸우다 지친 패잔병 같았다. 그렇다면 내 모습은 싸워보기도 전에 도망치고 나중에 변명이나 해대는 병역기피자쯤 될까. 설희가 말했다. “사실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은데 아무도 시켜주질 않아. 나는 뭐든 할 수 있는데 말야. 세상에 내가 못할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데도 말이야.” “기회가 올 거야.” “정말 그럴까. 기회라는 것이 내게 있기나 한걸까. 기회가 오길 너무 오래 기다리고만 있는 느낌이야.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어.” “너 고시공부 하는 거 어때? 난 그거 하는 사람들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생각해보니까 단번에 그것도 남의 도움 없이 해낼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잖아. 게다가 어쨌든 아주 공정하잖아. 정답만 맞추면 되는 거잖아.” 내 말에 설희는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러는 넌, 뭘 할 건데?” “나도 꼭 뭐 해야 하는 거니?” “만약에 그래야 한다면 말이야.” “나, 음, 글이라도 쓸까?” “뭐?” “왜 그렇게 놀라냐?” 마음속에 꼭꼭 숨겨둔 이야기를 꺼내자 나는 조금 두려워졌다. 그런 내게 진지하게 설희가 말했다. “그래, 써. 넌 쓸 수 있을 거야. 니가 소설가가 되면 참 좋겠다.” 진지하게 깊이 들어가 지금 당장 내가 무언가를 쓰고 소설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 나는 웃으며 말했다. “관두자. 관둬. 내가 이 나이에 뭘 새로 시작한다는 게 말이 되냐? 아, 머리 아퍼.” “너도 내가 잘 하는 게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하지?” “어?” “학교 다닐 때 내내 나는 공부 잘하는 아이였어. 늘 1등이었지. 그러니까 어쩌면 공부만 잘하는 아이였는지도 모르겠다. 학교 다닐 때는 그거면 됐는데 지금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재능이 있는 지훈이 네가 부러워.” “내가 무슨 재능이 있냐? 그리고 왜 니가 공부만 잘 하는 애냐? 너 못하는 거 없는 애잖아. 그래서 학교 다닐 때 너 싫어한 애 진짜 많아.” “지훈아, 넌 아주 특별해. 꼭 특별한 사람이 될 거야. 난 예전에도 그렇게 믿었고 지금도 믿고 있어.”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마주보고 있었다. 설희도 나도 희망이라는 것에 지쳐가고 있었다. 다만 버티기 위해서 자신을 다독거리는 것만으로 온종일 진이 빠졌다. 그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삶 속에 지금 우리가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12

    내려오라고 엄마가 그렇게 닥달을 할 때는 절대로 안내려갈 것처럼 버티던 나는 내려와서는 아버지께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이실직고하고 다른 걸 시작할거라는 말씀부터 드렸다. 이것저것 괜찮은 말들을 섞어서 희망차게 패기 있게. 아버지는 그래, 해봐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 며칠동안 아버지는 일찍 나가셨고 엄마는 내가 일어나길 기다렸다는 듯 나를 붙잡고 같은 얘기를 반복했다. 텔레비전 연속극 같이 지루하고 누추한 이야기. 그러나 그게 삶이라고밖에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 지겨워. “지훈아, 니 참말로 애인 같은 거 없나? 없으면 이 참에 중매나 보고 가그래. 지금보다 나이 더 먹으면 값만 떨어진대.” “엄마는 내가 무슨 가판에 올려놓은 생선인 줄 알아. 값이 떨어지게.” “그라먼 니는 니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값나가는 골동품인줄 알았나. 니가 암만 많이 배우고 똑똑해도 내가 살면서 겪은 세월을 당하겠나. 그라고 연애를 해도 제대로 해야지, 니 큰오빠처럼 그라먼 내 억장이 무너져서 죽고 만대. 민이는 사귀는 여자 정말로 없는 눈치 드나?”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같이 살면서 그걸 어째 모르노.” “연애는 프라이버시야.” “프라이버시? 가족간에 프라이버시가 어딨노?” “엄마는 하여튼……” “니도 니지만 민이도 결혼시켜야 할텐데. 어디 참한 여자가 붙어서 도와줘야지. 내는 민이 생각만 하면 아직도 불안하다. 너희들 끈을 다 붙여야 내 할 일을 다한 것 아니겠나.” 작은오빠에게 잘 지내는 여자가 있다고 말하면 엄마가 한 시름 놓을까. 엄마 바램대로 참하고 똑부러지는 여자라고. 너무 똑부러지는 여자라고. 하지만 나는 작은오빠의 그 여자가 싫다. 전업주부들이 소위 캐리어우먼이라는 여자들을 시기하는 것처럼 그건 괜한 자격지심일 뿐이란 걸 나도 안다. 하지만 그렇게 완벽한 모습으로 겸손한 척하면서 이런 건 누구나 노력하면 할 수 있는 걸요, 라고 말하는 듯한 그 여자가 싫었다. 그리고 사실 그녀는 별로 겸손하지도 않았다. 작은오빠가 입사하고 가끔 나는 그녀의 전화를 받은 날이 있었다. 그녀는 작은오빠랑 동갑에다가 상사였다. 여자로서의 직감 같은 것이 정말 있는지 나는 그녀가 작은오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연애는 쉽게 시작되지 않았고 내가 그녀의 존재를 감지한 후 거의 7개월이나 지나서야 나는 비로소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 지훈씨, 어떤 분인지 정말 궁금했어요. 웬 인사치례. ─ 민씨가 그랬어요. 집에 있는 여자가 워낙 대단해서 나 정도는 우스웠다고요. 나는 좀 기분이 나빠졌다. 한수 위의 사람이 아래 사람을 너그럽게 보아 주는 그런 느낌 때문에. 이것마저도 자격지심인가. ─ 회장님 따님이세요? ─ 무슨? ─ 아니면 어떻게 그렇게 빨리 그 자리까지 오른 거죠? 그녀는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미사여구, 미모의 재원에다가 대단한 적응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 우리 오빠, 어디가 좋아요? 페미니스트라서요. ─ 아니요. 민씨는 페미니스트라기보다는 휴머니스트죠. 굳이 표현하자면. 그녀는 작은오빠에 대해 좀 아는 듯 했다. 어쩌면 가족이라는 나보다도 더. 사랑이란 게 정말 희한한 데가 있다. 20여년을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르게 자란 남자와 한 집에서 사는 꿈을 갖게 만들고. 사랑하는 남자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지고. 그 잘난 여자가 나의 푸대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하는 남자의 여동생이라는 이유 때문에 생글거리고 있으니. 그리고 또 우리 엄마 같은 사람에게 무보수 봉사활동을 억울한 줄 모르고 하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엄마는 아버지를 사랑할까. 아직도. 그리고 아버지는? 우리 엄마란 사람은 너무 무능하다. 잘하는 거라곤 살림 밖에 없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살림 외에 모든 일을 아버지에게 밀어버린다. 나머지 모든 것을, 너무 많은 것을 아버지에게 결정하도록 한다. 솔직히 우리 엄마란 사람, 그렇게 형편없지 않다. 살림,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이전에는 몰랐지만 자취하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엄마처럼 착착 순조롭게 생활이라는 것이 굴러가도록 하는 것, 그것도 자기 한사람이 아니라 온 가족이 편안하게 살도록 하는 것. 그 능력의 10분의 1만이라도 엄마가 다른 일에 쏟아 부을 수 있었다면 지금쯤 우리 엄마는 꽤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아무튼 난 엄마같이 살기는 싫다. 내가 보기에 아직도 이 세상에는 우리 아버지 류의 남자들이 많다. 더더구나 그들은 가증스럽게도 우리 아버지 류는 아닌 것처럼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다. 게다가 우리 아버지 시대의 남자들보다 요즘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바란다. 살림도 하고 돈도 벌고, 살림을 덜 하려면 그걸 벌충하도록 더 많이 벌고. 나는 영악하기 때문에 그런 것에 속지 않는다.

    13

    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모레 올라갈 건데 내일은 좀 그렇고 오늘 시간 있니?” “백수가 시간 없다는 게 말이 되냐? 어디서 볼까?” 놀이공원이라는 곳이 백수한테 어울리는 곳일까. 안 어울리는 곳일까. 나와 설희는 지금 놀이공원에 와있다. 롤러코스터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린다. 어릴 때 꼭 한번 저걸 타보고는 다시는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았다. 남들은 내가 간이 크다고, 겁이 없을 것 같다고 말하지만 난 사소하게 겁이 많은 편이다. 저 롤러코스터에 올라앉았다간 꼼짝없이 심장마비로 죽거나 적어도 한참동안은 까무라칠 것 같다. 그리고 저렇게 빙글빙글 쾌속질주하지 않아도 지금 내 삶은 너무나 어지럽다. 내 마음의 속도와는 관련 없이 흐르는 지금 내 삶의 속도, 그 어긋남. 나는 너무 느린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 너무 느려서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고 불안해하면서도 일단 출발했으니 뒤돌아갈 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다. 제 속도를 찾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멈춰서 있다는 것이 때때로 죄악처럼 느껴진다. “난 안 탈래.” 설희와 매표소 앞에 줄을 서 있다가 내가 말했다. “참, 너 이거 못 탄다고 그랬었지. 그러면 어쩌지?” “롤러코스터 탈려고 온 거니까, 너만 타. 난 저기 앉아서 보고 있을게.” “괜찮겠어?” “안 괜찮을 게 뭐 있어?” 그러는 동안 우리 차례가 왔고 설희만 표를 끊었다. 설희는 롤러코스터를 연거푸 몇 번씩이나 탔다. 나는 벤치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칠 때까지 롤러코스터를 탄 설희와 함께 놀이공원을 나와 근처의 카페에서 한숨을 돌리기로 했다. 설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번에 니가 한 얘기 생각해봤는데.” “무슨 얘기?” “소설 쓸까, 그랬었잖아.” “아, 그거 농담이야. 소설은 아무나 쓰냐?” “그래, 난 니가 그 아무나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이런 말 하는 거야. 해보지 않고 뭐든 할 수 없다고 말해선 안 되는 거잖아. 그리고 해보지도 않고 난 저런 것쯤은 우스워, 하는 것도 웃기는 거고. 난 니가 해봤으면 좋겠어.” 스물일곱 살이라는 적잖은 나이에도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세상의 기준으로 하자면 말이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서고 싶은 생각은 정말 없다. 세상이라는 전쟁터에서 한번도 내 진지를 구축해보지도 못한 채 백기를 흔들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싸움은 이길 확률이 몹시 희박하다. 그래도 하고 싶다면 하는 거지, 뭐. 싸우게 된다면 나는 철저히 내 방식으로 싸울 것이다. 이길 수 없다 해도 절대 그들의 방식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14

    “안녕하셨어요?” 오후 3시쯤 <나비구름>에서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혼자 멍하니 앉아있는데 누군가 인사를 한다. 이곳에서는 언제든 혼자되기가 싶질 않다. 나는 인사하는 목소리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저, 성우 친구입니다.” “아, 예. 그 친구.” “한동안 안 보이시더군요.” 그는 계속 내 앞에 서있다. 앉으라고 말해야 앉을 모양이다. “고향에 갔다 왔어요.” “여기 자주 오세요?” “예. 그런 편이죠.” 그는 아직도 서있다. “전에 통 못 뵌 것 같은데.” “제가 원래 좀 그래요.” “네에?” “사람들 눈에 잘 안 띄죠. 있으나 없으나 별로 상관없는 그런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계속 그렇게 서 계실 건가요?” “아, 예, 실례가 됐군요. 그럼 전……” “앉으세요.” “예?” “보아하니 일행도 없는 것 같은데, 아니면 아직 기다리는 사람이 안 왔거나. 아무튼 거기 앉으시란 얘기예요.” “예, 그럼.” 그는 그제서야 앉는다. 이런 사람은 정말로 익숙하질 않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런 식으로 예의를 차리고 격식을 다하고 그렇게 한꺼풀씩 겨우겨우 벗고 한걸음씩 한걸음씩 다가오는 그런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한번만 만나도 그 다음부터는 쓱싹 친한 척하기 시작하는, 그래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겉으로 보면 우리는 언제나 웃고 떠들고 요란하게 친밀감을 표시하지만 사실은 절대로 내어 보이지 않는 너무나 단단한 자기를 가지고 있다. 내어놓을 수 있는 것과 절대로 내어놓아선 안 되는 것들이 어떤 사람을 만나기 전부터 정해져 있는 사람들. 하나의 기호만 일치하면 한꺼번에 꺼풀들을 벗어던지지만 절대로 내어놓지 않을 것 또한 미리 정해져 있다. 누구를 만나든 마찬가지이다. “성우랑 정말 친구세요?” “제가 많이 좋아했지요. 옛날부터요. 오래된 특별한 친구지요.” 오래된 친구? 이상하군. 옛날부터 알고 지낸 오래고 특별한 친구, 그런 게 성우에게 있다고. 신기한 일이군. “고등학교 동창이세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군요.” “그게 무슨 뜻이죠?” “성우 형이랑 동창입니다. 대학까지 쭉.” “성우한테 형이 있어요?” “네.” 내 눈 앞의 이 남자랑 친구라면 성우의 형이라는 사람은 성우랑 아주 다른 종류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끼리끼리 논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의미로 나랑 성우는 친구일까, 아닐까. 우린 분명 친구가 아니지만 이런 남자의 시선으로 본다면 성우랑 나는 그 끼리끼리 모인다는 친구가 아닐까. 나는 성우의 형에 대해 조금 궁금해졌지만, 가만히 있었다. 이 남자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성우가 꼭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닌 것만 같다. 그렇게 한참을 그와 나는 침묵을 지켰다. 더 이상 불편하기 싫어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말했다. “이곡 참 좋죠.” 그제서야 나는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밥 말리였다. “밥 말리를 좋아해요?” “예.” “의외군요.” “왜요?” “일종의 편견이겠지만 레게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러니까…… 적어도 레게 파머 정도는 어울릴 그런 사람일 거라고.” “록커가 머리카락을 기르는 것처럼요.” 이 남자는 농담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러면 말이 조심스러워진다. 그가 계속 말한다. “성우도 록커지만 머리를 안 기르잖아요.” “성우가 로커면 난 랩퍼게요?” 성우의 친구가 갑자기 큰소리로 웃었다. 나에게는 성우처럼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대등하게 싸우려드는 게 낫다. 너그럽게 봐주는 것처럼 저러는 건 정말 구역질난다. “성우가 그러더군요. 지훈씨는 모험가라고.” “제가요?” “예.” “성우가 농담은 좀 하죠. 걔는 놀고 먹는 걸 모험이라고 생각하나봐요. 그쪽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노동이란 본래 라틴어로 실패와 추락을 뜻하지요. 성경이 암시하듯 일해야 하는 건 신이 인간에게 내린 저주였지요. 네 이마의 땀으로 밭을 갈고 손의 노고로 먹으라고 아담에게 내린 벌로 여겨지던 노동이 은총으로 변모한 것은 불과 2백여년 전이었죠. 이후 노동은 시대의 필요에 따라 악에서 미덕으로 의무에서 권리로 가치관을 바꿔왔을 뿐이예요.” “하지만 이제 노동은, 아니, 일이란 건 사회성원으로서의 능력과 자질을 가늠하는 존재의 이유, 그 자체 아닌가요?” “지훈씨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어쩌면 그 결과로 인간은 다양한 능력 중 생산능력만이 강조된 기형인이 되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나요. 고대 그리스만 해도 소유보다는 존재의 풍요함이 훨씬 중요했었지요.” 이 남자의 정체가 슬슬 궁금해진다. 그리고 여기서 이런 식의 얘길 하고 있는 나도 낯설다. “도대체 뭐 하시는 분이신가요?” “지훈씨는요?” “제가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놀고 먹는다고. 더 쉽게 말할까요. 백수예요.” “백수란 아마도 미래에 더 크게 도약하기 위해 무언가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 아닌가요? 아예 꿈도 희망도 없이 정말 놀고 먹는 사람은 뒤에 건달을 붙여야지요.” 이 남자의 얘기를 듣다보니 나는 그동안 정말 백수건달이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은. 이제 슬슬 그 생활도 지겹고, 건달 빼고 백수나 되어볼까. “책을 쓸까 생각 중이에요.” 누구를 만나든 미리 정해져 있는 털어놓아선 안 되는 것. 그 경계를 나는 그냥 넘어버렸다. 지금 이 남자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버렸다. 나, 왜 이러는 거지. 이 남자는 저절로 마음속을 털어놓게 하는 재주를 가진 거 아닌가. “정말이예요? 어떤 거요? 소설요? 그렇죠? 소설이겠군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아무런 준비가 안됐어요.” 이렇게 말하다 보니 진짜 그러고 싶어진다. 쓸 수만 있다면 진짜 소설이란 걸 쓰고 싶다. “마르케스가 그랬다죠. 작가는 태어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일 뿐, 단지 필요한 건 글을 쓰는 방법을 배우는 일이다.” “그래요? 하지만 전 뭐든 배우는 건 신통찮아요. 아주 게으르거든요.” “성우가 그러더군요. 지훈씨는 굉장한 사람이라구.” “설마. 성우가 그랬을라구요. 크게 일을 낼 계집애다. 그랬으면 몰라도.” 그의 표정을 보니 성우가 정말 그렇게 말한 모양이다. “잘못 이해하신 거예요. 그건 말 그대로 크게 사고를 칠 거라는 얘기예요. 멋진 일을 해낼 거란 얘기가 아니예요. 그런데 성우는 요즘 왜 안 보이는지?” “성우가, 보고 싶으세요?” 그는 너무나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그렇게 물었다. “아니요. 내가 왜 걔가 보고 싶겠어요.” 그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생각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소설이 대단하고 위대한 무엇일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소설이 모험이다. 나는 모험가가 되고 싶다. 나는 모험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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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짜 계산을 해보았다. 오빠와 이야기를 하고 고향에 다녀오고 무언가 쓰자고 결정하고 어느덧 그렇게 한 달쯤 지났다. 똑똑, 노크소리. “지훈아, 아직 안 자니?” 작은오빠이다. 지금 몇 시일까. 새벽 1시가 넘었는데. 무슨 일인지 휴가를 낸 오빠는 어제부터 집에 와있다. “들어가도 돼니?” “응.” “아침에 너 자고 있을 때 어머니한테서 전화왔었다.” “엄마가 뭐래? 나, 당장 내려오래?” “아니, 너 너무 마르지 않았냐고 걱정하더라. 보약 한재 지어 보내신다, 그러던데.” “나, 약 싫어.” “엄마가 보내봤자, 너 또 그냥 가만히 놔뒀다 버릴 것 같아서 내가 좋은 한약방 아니까 알아서 지어 먹인다고 했으니까, 어머니가 전화하면 실수하지 말고 약 잘 먹고 있다고 얘기해.” “오빠, 고마워.” “그런데 정말 너, 너무 마르는 거 아니니?” 내가 말랐나. 그런 것 같진 않은데. 너무 집에만 있어서 그런가. “지금까지 뭐한 거야?” “글쎄.” “대답이 뭐가 그래.” “저번에 오빠가 내준 숙제를 하고 있는 중이라면 괜찮은 대답이 될까.” “불충분한데.” “아직은 뭘 할 건지 말하고 싶지가 않아. 그걸 말하면 내 마음이 너무 급해지고 이상해질 것 같아. 어색하기도 하고.” “뭔지 모르지만 잘 하겠지. 난 널 믿어. 그리고 힘든 거 있으면 말해. 오빠가 도와줄 테니까.” “그러는 오빠는 무슨 일이야? 여태 잠도 안자고 무슨 고민 있어? 힘든 거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도와줄 테니까.” 나는 작은오빠 말투를 흉내내어 똑같이 말했다. “나, 결혼해야 되겠지.” “결혼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회사에 그 여자랑.” 작은오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그 여자 사랑해?” “왜?” “그럼 왜 결혼하려는 거야?” “결혼을 하려면 사랑을 해야 하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그런 소리 안할 줄 알았는데.” “나이가 됐으니, 그리고 꽤 괜찮은 여자가 나타났으니 결혼을 하겠다?” “결혼이란 젓가락처럼 하나로는 불완전하기 그지없는 인간들이 자기랑 똑같은 불구를 찾아내 난 완전해, 그렇게 외치는 거라고 또 말하고 싶은 거니?” “그건 큰오빠 약 좀 올리려고 그랬던 거지.” 큰오빠가 느닷없이 이상한 여자를 데리고 와서 결혼한다고 통보했을 때 내가 그렇게 말했었다. 큰오빠가 이 여자가 너무 불쌍해서 구원해줄려고 그래요, 라고 금방이라도 말할 듯 거룩한 표정을 짓는 것이 구역질이 났다. 그래서 큰오빠도 그 여자만큼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으로 그렇게 말했다. 누가 누군가를 구원하고 희생하고 그러는 건 없다는 걸 잘난 큰오빠에게 꼭 말해주고 싶었다. “날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대. 결혼을 해야 한다면 둘 중 어느 하나라도 간절히 원하는 게 낫잖아. 난 젓가락 같은 인간이라서 혼자 살 자신 없어. 세상과 혼자 싸우고 싶지 않아. 스크럼을 짜는 거지. 직장이 세상과 싸우는데 내 바리케이트인 것처럼. 간단하지.” 저런 식으로 사람들은 결혼을 결심하는 걸까. 저런 복잡하고 슬픈 이유로. “걱정하지마. 나도 그 여자 사랑하고 있어. 그리고 그 여자와는 얘길 할 수 있어. 내 말을 알아들어. 더 이상 혼자서 중얼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거 좋잖아.” “그래, 좋겠어. 그 말 들으면 그 여자 아주 행복해하겠어.” 나는 약간 빈정거렸다. “힘들게 하지는 말아야지.” 힘들게 하지 않겠다는 그 말이 사랑한다는 말보다도 더 믿음이 간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멀고 먼 인생의 과정에 동행자로, 그리고 심지어는 그 짐을 나누어지거나 귀찮은 건 알아서 맡고 있으라고 계산속으로 결혼하려는 사람들은 정말 질색이다. “힘들게 하지는 않을 거고, 적어도 오빠는 지금 그 여자를 사랑하고, 또 그 여자는 오빠를 너무 사랑하고. 됐네. 그런데 도대체 표정이 왜 그래? 아무 문제도 없는데.” “넌?” “나?” “그래, 니가 혼자 남게 되잖아.” 내가 혼자 남는다고. 그래, 그렇군. 작은오빠가 새로운 동지를 구하면 난 다시 혼자가 되는 거지. 그래, 그래서 내 마음이 이런 거로군.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난 포크 같은 인간이야. 젓가락이 아니라구. 알겠어.” 난 그렇게 또 큰소리를 쳤다.

    16

    정말 오래간만에 <나비구름>에 갔다. 그리고 성우의 그 친구를 만났다. “소설은요?” 그가 물었다. “쓰긴 썼죠. 별로 신통치가 않은 가봐요. 소식이 없네요.” 사실은 이럴까봐, 이렇게 될까봐 두려워서 미루었던 거겠지. 나는 실패가 두려웠나보다. 뭔가 노력하고 결과를 기대하는 세상의 일들이 싫었다. 자아실현? 성취? 위대해지고 보람을 얻고 하는 이 세상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런 일, 나는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고 그래서 진심으로는 어떤 실패도 겪지 않은 사람으로 무책임하게 사라져버리고 싶었던 거겠지. 애정을 가진 일과 시간과 정성이 드는 일에 실패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를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결국 이 길을 원한다는 생각도 한다. “저 혹시 읽어볼 수 있을까요?” “예?” “지훈 씨가 쓴 그 소설이란 걸요.” “랩 하실 줄 아세요? 욕은요? 제 소설은 아마 랩이나 욕, 둘 중의 하나는 할 줄 알아야 이해할 수 있을걸요.” 나는 아무렇게나 말해버렸다. 이렇게 말해야 그가 다시 내게 소설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는 사람 중에 출판사 쪽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지훈 씨 이야기를 했더니 관심을 갖더군요. 제가 연결시켜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참 다양한 사람이랑 친분이 있으시군요. 로커에다 출판인, 또 혹시 아시는 영화감독이나 그런 사람은 없어요? 레코드사 사장이나 매니저도 괜찮구요. 이왕에 덕 좀 보려면 그런 걸로 하죠.” “……” “왜 그런 일 하는 사람은 모르시나봐요? 바쁘세요?” “아니요.” “그래요? 전 좀 바쁘거든요. 먼저 일어날게요. 맥주 오면 혼자서 시원하게 드시고 잘 가세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그를 내버려두고 <나비구름>를 나왔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그것도 자기 딴에는 내게 도움을 주겠다고 저러는 건데. 이러는 내가 정말 싫다. 난 벌써 지친 모양이다. 희망을 붙잡아두는 일에.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내 글이,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온전한 나만의 내가 내 삶을 역전시킬 것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며 위로이다. 나는 누구의 딸로, 누구의 돈으로,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저 나만으로 해낼 것이다. 나는 그럴 수 있을 것이다.

    17

    토요일 오후 3시. 작은오빠는 결혼식을 한다. 아파트의 임대계약이 내년 2월까지로 되어 있어 당장 고향으로 쫓겨 내려갈 형편까지는 아니었다. 나는 통장에 있는 돈을 생각했다. 겨울, 그리고 어쩌면 다음해 봄까지는 견딜만한 금액이었다. 약간의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여름까지도 견딜만했다. 새 옷도 안사입고 습관적으로 끌어 모으는 악세사리도 안 사고 그런다면 더 오래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앞으로 내 시간들을 챙겨보니 작은오빠의 자리가 꽤 크게 느껴졌다. 작은오빠의 그 여자는 어깨가 파진 공주 같은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속눈썹까지 붙이고 마치 인형 같아 보였다. 너무 긴장한 작은오빠의 굳은 표정. 행복해 보이는 신부. 둘은 잘 어울렸다. 큰오빠 내외도 왔다. 새언니는 한국말이라고는 아직도 인사말밖에 하지 못했다. 머리칼이 노리끼리하고 눈이 연한 갈색인 내 조카도 왔다. 큰오빠가 말했다. “써니, 고모야. 인사해야지.” 나는 내 조카를 안아주었다. 이름이 선이라는 그 아이는 떠듬거리지만 저희 엄마보다 한국말을 훨씬 잘 했다. 한때 나는 큰오빠가 가족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어, 그리고 또 이 나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서둘러 그런 결혼을 한 거라고 생각했었다. 큰오빠가 다른 시대에 태어나 대학을 다닐 수 있고, 아니 적어도 그런 현실을 외면할 수만 있었더라도 다른 모습을 하고 살고 있겠지. 세속적 의미의 출세를 하면서. 그랬다면 나는 큰오빠를 더 미워했을까. 하지만 큰오빠의 정의는 아버지를 곤란하게 했고, 또 무기력하게 했었다. 그때 이후 나는 아버지가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여전한 아버지의 단정함이나 단호함은 다만 껍데기일 뿐이라고. 자신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선처를 호소하고 편법을 써서 빼내고. 그렇게 또 아들은 살아오면서 내내 믿었던 영웅을 잃어버렸다. 큰오빠는 어쩌면 아직 가족을 벗어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받아주기만 한다면 돌아오고 싶은지도. 하지만 아버지, 어머니는 화해에 서투른 사람들이었다. 써니를 한번도 안아주지도 않았고 새언니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큰오빠 가족들은 결혼식 다음날 다시 돌아갔다. 떠나는 큰오빠 가족들의 모습이 내내 잊혀지지 않았다. 몇 번씩이나 내가 서있는 쪽을 뒤돌아보던, 아무리 너그럽게 보아도 더 이상은 젊다고 말할 수 없는 큰오빠의 모습은 내게 난생 처음 연민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옛날의 그 어이없을 정도로 자신감에 넘쳐 오만하기 이를 데 없던 큰오빠의 얼굴이 생각나 한숨이 다 나왔다. 큰오빠가 대학교 1학년 때였을 것이다. 나를 따라 다니던 남자애가 있었다. 나는 나대로 그런 놈들을 떨어내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대로 내버려둔 걸 보면 어린 내 눈에 정말 꽤 괜찮아 보이는 남자애였던 모양이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그애의 단순함이 좋았다. 뭐든 복잡하게 따지기 좋아하는 나와는 달리, 좋아하고 그걸 표현하면 어떻게 될지, 아니 표현자체를 어떤 식으로 해야 효과적일지 조차도 따지지 않는 그 멍청하고 진지한 단순함. 그런데 그애의 단순함 때문인지 학교와 동네에 소문이 났다. 그 남자애는 작은오빠와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작은오빠가 몇 번이나 내게 어떻게 해줄까, 라고 물었지만 나는 그냥 놔두라고 했다. 그런데 방학 때 내려온 큰오빠는 그 남자애를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간단히 해치웠다. 큰오빠는 그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너 내가 누군지 알지. 지훈이는 내 동생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지? 나중에 대학에 가서 그애를 만났다. 그애는 꽤 그럴듯한 대학생이 되어 있었고, 큰오빠의 안부를 궁금해했다. 그리고 그날 큰오빠를 만나서 자기 인생이 변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애 말은 큰오빠 때문에 어리석은 시절을 접고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갔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대학생이 된 주제에 잘난 체는. 나는 어리석은 그 시절의 그애가 더 좋았다. 그 투명한 단순함이. 하지만 멀쩡하고 평범한 대학생이 된 그애에게는 그 투명한 단순함을 찾을 수 없었다. 그애는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가느라고 자신만의 독특함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큰오빠에게 고맙다고. 그래, 고맙겠지. 네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삶이 남들하고 똑같이 사는 거라면. 그애를 만나서 나는 다시 깨달았다. 나는 박현의 여동생이었다. 이대로 살다가는 언제나 큰오빠 박현의 여동생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큰오빠를 박지훈의 오빠로 불리게 만들고 싶었다. 방법은 물론 알 수 없었지만 그런 열기가 끓어올랐다. 그랬었는데, 그런 전의가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을지도 모르는데. 아주 오래간만에 만난 적이 생각보다 훨씬 약해져있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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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비구름>에서 성우의 친구를 만났다. “저번에는 제가 죄송했습니다.” 그는 사과했다. 과연 내가 그에게 사과를 받아야 할 일인지 몰라서 그냥 있었다. 그리고 다시 내가 지난 한달 동안 썼던 소설이 떠올랐다.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사실은. 내가 쓴 글이 아직 읽혀지지도 않은 채 어딘가에 내팽겨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면 영원히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몇 줄씩 건너뛰어 읽고는 별거 아니군, 하고 금방 덮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만두고 싶지는 않다. 그런 식으로라도 이 지루하고 무료한 시간을 견뎌내지 않으면 안 되기에. 나는 내가 포기해 버릴까봐 두렵지만 아마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내 삶에 진로를 바꿀만한 결정적인 일은 한번도 없었다. “지훈 씨는 성우에 대해 모르는 게 많은 거 같아요.” “제가 성우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하나요?” “알고 싶지 않으신 건가요?” “전에는 그런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는데 이제는 좀 궁금해지네요. 그쪽이 자꾸 궁금하게 만들고 있잖아요.” “제가 그랬나요?” “예.” “성우한테 형이 있어요.” “그건 저번에 얘기하셨잖아요.” “형 이름이 진우입니다. 그리고 둘은 쌍둥이입니다. 성우가 지훈 씨에게 한번도 형 얘기를 한 적 없었나요?” “없었어요. 우린 가족 이야기는 하지 않아요.” “그렇군요. 이 사진 좀 봐주시겠습니까?” 그는 내게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아주 단정하고 멀끔하게 생긴, 소년을 갓 벗어난 젊은 남자였다. “알아보시겠습니까? 성우입니다.” “네?” “정확히는 성우가 사라지기 전의 진우, 지훈 씨가 성우로 알고 있는 진우의 사진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한 장의 사진을 더 내밀었다. 그 사진 안에는 아주 닮은 두 청년이 있었다. 하지만 둘은 확연히 달랐다. 분위기나 느낌, 색깔 같은 것이. 누가 보아도 둘은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내게 성우와 진우 쌍둥이 형제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같은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은 스무 살이 되면서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다고 한다. 한 명은 집안의 대를 이을 의사의 길로, 또 한 명은 스스로가 원하고 즐기는 록커의 길로. 그러면서 두 사람은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록커인 성우가 실종되었고, 그 뒤부터 의사인 진우는 성우와 진우의 인생을 동시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진우란 사람이 지금 정신적으로 약간은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진우는 저랑 같은 병원에 있었습니다.” “의사세요?” “누구요? 저요?” “예.” “의사예요.” “정말이예요?” “의심이 많으시군요.” “의사 선생님이 왜 이렇게 한가한거죠?” “지금은 쉬고 있어요.” “진료과목이 뭐예요? 내과? 정형외과? 아님, 성형외과?” “저는 정신과예요. 진우랑 저랑은 성장배경이 비슷하지요. 진우 아버님이랑 저희 아버님이 한 병원에서 근무하셨지요. 저는 병원 언저리를 떠나본 적이 없어요. 부모님이 두 분 다 의사시거든요. 할아버지도, 외할아버지도 의사시죠. 그래서 저도 그냥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의사가 됐지요. 저희와 진우 집안을 통틀어 의사를 모으면 웬만한 종합병원은 될 겁니다. “어릴 때부터 다른 꿈 한번도 없이 의사가 되고 싶으셨어요?” “그랬던 것 같아요.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걸로 알았어요.” “그럼, 방황이나 좌절 같은 건 없으셨겠군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군요. 방황도 좌절도 없었던 사람에게 방황과 좌절을 어찌하면 좋을지를 말하려고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어떨 거 같아요? 우리 이런 얘기는 그만하죠. 지훈 씨는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예요?” “정신과 의사로서의 질문은 아니겠죠. 제가 정상이 아닌 건 알지만. 이 참에 상담 한번 받아볼까요?” “그건 제가 사양하겠습니다.” “유감이네요. 어디 멀리 떠나고 싶어요. 그냥 떠났으면 좋겠어요.” 나는 한번도 이 위치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견딜만한 실망과 여지가 있는 무책임한 희망을 남겨두는 일, 그렇게 내 삶은 오래도록 멈추어있었다.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거 나도 알아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그냥 답답하고 여기 있으면 계속 이어서 맴을 돌고 있는 기분 밖에 들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럼, 그건…… 이를테면 탈출이군요.” 탈출이라…… 시간이 가고 있다. 젊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 그리고 스물일곱의 내가 할 수 있는 일. 민감하게 나이를 계산해내는 이 초조함으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제발. 성우의 친구 때문에 머리 속이 온통 거미줄처럼 엉켜버렸다. 성우와 나는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온 걸까. 성우를 처음 알게 된 날이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내 친구 중의 한 명과 성우가 아는 사람 중의 한 명이 연인 사이였던 것 같다. 그 둘이 누구였는지도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정작 우리를 묶은 그 두 사람은 지금 흔적도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이름을 말하면서 하는 그런 정식 소개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격식 없이 어쩌다보니 나는 그를 윤성우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윤성우는, 한때는 드러머였고 지금은 백수이고, 성질이 더럽고, 희망 없는 지루한 표정을 가지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윤성우는 그게 전부이다. 내가 그동안 윤성우라고 알아온 인간 어디에서도 그 남자가 말하는 윤진우는 없다. 그러니까 내가 그 남자의 말을 믿을 이유는 없다.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이 윤성우든 윤진우든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가 한때 드러머였든, 의사였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나는 지금 내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듯하다.

    19

    설희가 서울에 왔다. 보고 싶다고 말하면 한두 시간 후면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지금 설희가 있다. 나흘 전에 설희로부터 이모 집이라는 전화를 받았다. 급한 마음에 나는 언제 내려가는지부터 물었다. ─ 좀 오래 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내일이나 모레쯤 내려가야 할지도 모르고. 설희는 그렇게 애매모호한 대답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까지도 만나지 않았다. 전화통화만 하면서 ‘만날까’ 했다가도 이내 ‘날씨가 안 좋은 것 같아’,‘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하면서 내일로 또 미루었다. 분명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설희가 보고 싶었다. 거리를 두고 전화통화를 하면서 우리는 항상 ‘지금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했었다. 그런데 지금 당장 만날 수 있는 거리에서는 전화통화만 하고 있다. 설희와 나는 만나지 못하는 거리에서 사실은 언제나 같은 이야기만 했었다. 너랑 직접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다면…… 하지만 직접 만나서 할 그 이야기가 우리에겐 없었다. 설희에게도 나에게도 새로운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직접 만나 이야기했던 그때로부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매일 매일이 새로웠던 예전과는 이제 다른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방구석에 자신을 구겨두는 것에 점점 더 이렇게 익숙해져가는 우리. 자신에게 미안해하지도 않고 자책하지도 않고 할 수 없지 뭐, 라고 말하는 우리. 난 무섭다. 이렇게 형편없는 것이 정말 우리일까 봐. 모든 것이 포기하고 싶어질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에 설희가 포기하고 싶다고, 다 그만둬버리고 싶다고 말한다면 그때 나는 뭐라고 말할까. 그래, 그만둬버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천천히 설희를 타이르지 않았을까. 그냥 위로가 아니다. 설희는 포기하고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아깝다. 내가 이렇게 말해도 설희는 내 말을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점점 더 믿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점점 더 희망에 지쳐가고 있으니까. 그런데 설희는 무엇 때문에 온 것일까. 설희에게 새로운 일이 일어난 걸까. 나는 내게는 없는 그런 기대를 설희에게 해본다.

    20

    역이라는 설희의 전화를 받고 사흘이나 지났다. ― 지훈아, 너 아프리카에 가고 싶다고 했었지. ― …… ―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두 개의 사파리 기차가 있대. 블루 트레인과 로보스 레일. 이 두 기차는 아프리카 대륙의 남쪽 끝인 케이프 타운에서 남아공의 수도인 프레토리아를 거쳐 우간다, 케냐, 탄자니아가 국경의 인접지인 동 아프리카 빅토리아 폭포까지의 같은 구간을 달리는데 성격은 다르대. 국철인 블루 트레인은 완벽한 현대적 편리함과 시속 120킬로의 스피드를, 사철인 로보스 레일은 옛 증기선 방식으로 칙칙폭폭 달리는 추억과 낭만을 느낄 수 있대. ― 그걸 다 외웠냐? ― 외우려고 한 거 아닌데 외우고 있네. 나, 머리는 아직도 좋은가봐. 기차시간까지 20분 정도 남았어. 지금 가서 표를 물리고 집으로 가는 이 열차가 아닌 다른 열차를 타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혹시 내 인생이 달라지지 않을까. 설희는 그렇게 말하고는 킬킬거리다가 전화를 끊었다. 설희가 집으로 돌아갔을까. 여태 아무 소식이 없다. 나는 전화 한통이면 확인될 사실을 자꾸만 미룬다. 설희가 혹시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을까. 집으로 가는 열차표를 물리고 금방 떠나는 다른 열차표로 바꾸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열차에 몸을 실어버리는 설희의 모습이 떠오른다. 설희는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곳으로 가버렸다. 어느 날 그곳에서 설희는 내게 전화를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희는, 내가 아는 성실하고 착한 설희라면 당연히 집으로 무사히 돌아갔을 것이다.

    21

    오늘은 조금 일찍 일어났다. 어차피 또 자게 될 테지만. 평소 때와는 다른 리듬의 날이다. 할인매장을 들러서 온 작은오빠 내외는 내가 앞으로 한 달을 이 집 안에 가만히 갇혀있어도 아무런 불편이 없을만한 것들을 준비해왔다. “아가씨, 이거 어디 두면 되지요?” 부엌으로 간 새언니가 내게 물었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작은오빠가 부엌으로 가서는 식료품들을 챙겨 냉장고에 넣을 건 넣고, 그런 식으로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챙겨주었다. “오빠, 앞으로 이러지 않아도 돼.” 작은오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물건들을 다 챙겨 넣은 작은오빠는 그래도 잊은 게 있다고 나갔다. 새언니와 나는 아직도 어색하다. 올케와 시누이란 관계는 약간 미묘한 데가 있는 것 같다. 학교 같은데서 만났더라면 우린 아마 좋은 친구가 됐을지도 모른다. “아가씨, 저 커피 한잔 마시고 싶은데 어쩌지요?” 새언니가 웃으면서 말했다. “기다리세요.” 내가 부엌으로 가서 커피 물을 올리자 새언니가 따라왔다. “뭐 더 필요한 거 있으세요?” “그게 아니라, 제가 가만히 앉아있으면 안될 것 같아서요.” “새언니답지 않게 왜 그래요. 합리적으로 생각하세요. 여기는 우리 집이고 새언니는 어쨌든 손님이에요. 제가 하는 게 당연하죠. 이런 걸로 공연히 시누이 노릇하게 하지 마세요. 나,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생각해 봐요. 우리가 만약에 학교 선후배나 회사 선후배 그런 걸로 만났으면 꽤 통하지 않았을까요? 둘 다 꽤나 잘난 체 하는 편이잖아요.” “굉장한 라이벌이 됐을지도 모르지요.” “새언니 지는 거 싫어하죠. 목표로 한 거 못해본 적 없죠.” “아가씨, 정말 못 말리겠네요.” “제가 보기엔 새언니도 마찬가지예요. 그냥 하던 대로 하세요. 시댁 식구라고 눈치 보지 말고 당당하게. 안 어울리는 짓 하면 보는 사람이 더 불편해요.” 작은오빠는 어디까지 갔는지 나타나질 않았다. 일부러 두 여자를 버려두고 간 건가. 설마. 새언니와 나는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계속 희희덕거렸다. 새언니는 처음에 작은오빠를 어떻게 좋아하게 되었으며 작은오빠의 반응이 너무 시큰둥해서 자존심이 상했었다는 얘기며 자기가 먼저 결혼하자는 얘기도 꺼냈다고 하면서 또 이것저것을 털어놓았다. “아가씨, 오빠랑 저랑 결혼조건이 뭐 였는 줄 알아요?” “결혼해도 일은 계속한다, 가사분담은 절반씩 한다, 그런 거요.” “아니예요. 아기를 갖지 않기로 했어요.” “뭐예요? 새언니 정말 대단하네요. 그렇게 일이 좋아요? 그렇게 성공하고 싶어요?” “아니예요. 그건 오빠가 제시한 결혼조건이었어요. 난 아기 갖고 싶어요. 일이 가져다주는 성공, 그거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겠어요. 최초의 여성, 몇 번째 여성 뭐 그런 거요? 굉장한 걸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한테는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되고 싶은 게 있어요. 그게 엄마예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전 아기를 선택하겠어요.” 새언니가 아주 낯설어 보였다. 저 여자는, 내가 생각해온 저 여자는 저런 식으로 얘기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그걸 위해서는 다른 건 어찌되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당당해져도 되는, 그것이 꽤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그래야 하는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갖는 게 자신의 최상의 가치라고, 그래서 다른 건 다 포기할 수 있다는 그런 어리석은 얘기를 하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어쩌면 새언니는 지금 아이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저런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질 수 없는 것의 가치는 가지고 있는 것보다 절실하게 느껴지니까. 작은 오빠가 아이를 가지고 그래서 일을 포기하라고 했다면 새언니가 저러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그런 말 새언니에게 하지는 않았다. 사랑에 미쳐 있는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나도 새언니처럼 가질 수 없어서 더 가지고 싶은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새언니처럼 어리석어지고 싶지는 않다. 그 하나를 얻기 위해서 나머지는 다 포기하겠다고 아무 상관없다는 식으로 굴지는 않겠다. 나는 본래가 약은 인간이고, 그러니 가장 유리한 지점까지 어찌되었든 나를 끌고 갈 것이다. 그런데 내가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조금씩 지금의 내가, 소설과의 무방비의 사랑에 빠진 내가 두려워지고 있다. 이미 멈추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아가씨, 아가씨가 오빠 좀 설득해주세요.” 새언니에게 나는 아무 것도 약속해줄 수 없었다. 그들이 아이를 갖고 안 갖고의 문제가 내가 설득해서 되고 안 될 그런 문제이냐는 차원을 떠나서, 나는 작은오빠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작은오빠 박민이라면. 작은오빠가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그걸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가장 사랑하는 것을, 게다가 나를 고스란히 닮은 것을 세상에 내어놓아 나처럼 상처받게 하고 싶지 않다. 작은오빠도, 그리고 나도 그랬다.

    22

    나는 통장을 펼쳐놓고 잔고를 점검해보고 있다. 이 집의 전세계약이 끝나는 날까지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무슨 핑계를 대고 계속 여기에 남아있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는 생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할 시점이 왔다. 은행의 잔고가 바닥이 난 다음에는 기꺼이 어떠한 노동이라도 할 생각이다. 불필요하다 여겼다 대학교육을 통해 내가 익힌 것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그렇게 다행일 수 없었고, 그것으로 부족하다면 육체노동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고, 이 나이의 나를 고용해줄 데가 없다면 지인을 동원할 생각까지 하고 있다. 이 점이 내가 소설을 쓰면서 달라진 점이다. 인내하고 애쓰고 아득바득거리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식의 삶의 원칙을 오래전부터 세워놓은 내가 소설을 쓰기 위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으니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것도 충분히. 소설을 쓰는 것보다 회사에 들어가 얌전히 일하는 것이 훨씬 수입 면에서 안정적이라는 것도, 덜 힘들다는 것도, 덜 고통스럽다는 것도. 그 모든 걸 다 알고 있어도 하는 수 없는 것. 그 모든 걸 감수하고도 기꺼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 하고 싶은 것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 그렇다. 사랑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전제가 붙은 애정의 대상이 내 인생에 생겨날 줄은 몰랐다.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저, 진우 친굽니다.” “아, 네. 성우 친구요.” 나는 내가 그동안 알아 온 것들을 알지도 못하는 남자 말만 믿고 수정할 생각이 없다. 그가 꽤 그럴 듯 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런데 그는 무슨 목적으로 내게 그런 거짓말을 한 걸까. 뭐 특별한 이유가 있겠는가. 심심하고 무료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스스로는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가 알려주고 싶어 하는 진실이라는 것이 내 인생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거다. 그 남자는 시간을 좀 내달라고 했다. 꽤 정중한 요청이어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내 나름대로 그에게 성우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나비구름>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는 나에게 성우와 진우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둘은 그 부모님의 유일한, 아니 유이한 자식들이고, 아들로서 어른으로서 남자로서 책임져야할 것들이 있고, 언제까지나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 없다는 걸 알았지요. 그래서 한 명은 인생의 책임과 의무를, 또 한 명은 인생의 자유와 즐거움을 최대한 누리기로 한 거죠. 둘이 서로에게 느끼는 동질감이 워낙 컸기 때문에 이를테면 네가 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과 똑같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 거지요. 그런 것이 과연 가능한가, 혹은 둘 사이에 균형을 이루면서 살 수는 없는 건가, 하는 문제는 지금 지훈 씨와 제가 논의할 건 아닙니다. 아무튼 그건 성우와 진우가 스무 살 이후의 자신들의 인생의 몫을 나눈 것이었으니까요.”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에 나와 똑같은 인간이 하나 더 있다면, 그래서 어떤 것을 미루거나 혹은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었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무엇을 맡겼을까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이 세상이 바라는 가장 바람직한 자리에 그를 대신 세워두고 나는 철저히 자유로워지고 싶어졌을 것이다.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어떠한 구속도 거부하고 파멸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삶 속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걸어 들어갔을 것이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삶이 더 바람직한가에 대해서 결론내릴 수 없다. 그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지훈 씨, 저번에 탈출하고 싶다고 하셨죠?” “네.” “아직도 그 마음이 유효하신가요? 난 지훈 씨에게 다른 식의 탈출을 제안하고 싶군요. 그것이 불법이라면 이건 합법이죠. 난 지훈 씨를 도와줄 수 있어요. 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으려는 거죠? 이 세상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아무 댓구도 할 수 없었다. “지훈 씨 우리 결혼합시다.” “네에?” 그가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결혼합시다. 언젠가 결혼할 거라면 지금 저와 하는 것이 어떤지 묻고 있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청혼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편리를 위해 결혼하는 남자들처럼 나도 결혼을 선택할 수는 있다. 이를테면 아주 무거운 물건을 들어줄 남자라든가, 돈을 벌어다줄 남자라든가, 늙으신 부모님의 걱정을 잠시나마 덜어줄 수 있는 그럴듯한 남자라든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나을지 모를 그런 기능을 위해 결혼을 할 수는 있다. 독립적이지 못하다고? 그러나 독립적이 되어서 나에게 돌아오는 건 이중의 짐일 뿐이다. 그러므로 아주 싸가지 밥 말아먹은, 그래서 빌붙어서 살아도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인간이랑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 인간이 날 때부터 세상에서 받은 온갖 혜택을 내가 마구 소비해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므로 사랑은 결혼의 조건도 기준도 될 수 없다. 그렇지만 이렇게 밖에 물을 수 없었다. “저를 사랑하나요?” “예.” 그는 조금의 틈도 없이 그렇게 대답한다. 저 확고한 눈빛. 어떻게 저렇게 자신의 마음에 대해 확신할 수 있을까. “어떻게요? 어떻게 절 사랑할 수가 있죠? 저에 대해 뭘 알고 있죠?” “저는 지금 제가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이가 없었다. 성우인지 진우인지가 아니라 이 남자야말로 제 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내가 이 남자에게 어떻게 보였기에 결혼하자는 말을 하는 걸까. 하긴 결혼이 뭐 그리 대단한 건 아니지. 이 세상의 모든 일들처럼 아니면 언제든 그만 둘 수 있는 거니까. 나답게 즉흥적으로, 아주 나답게 가볍게 생각하자. 나는 내게 청혼한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 남자는 영감을 불러올 타입도, 함께 놀기 좋은 상대도, 고귀한 정신을 가진 사람도, 그렇다고 잠자리 상대로도 그리 좋을 것 같아 보이지 않다. 다만 그럴듯한 사회적 지위와 너그러운 태도만이 그런대로 참아줄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회적 지위나 너그러운 태도에 혹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그런 상대는 구하려고만 한다면 이 남자 말고도 많을 것이다. 어쩌면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다른 여자들처럼 조건 앞에서는 사랑을, 사랑 앞에서 조건을 핑계 대는 그런 회피주의자인지도 모른다. 나는 둘이 하나가 되는 새로운 가족을 만들기 싫은 것이다. 지금 있는 가족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제한받고 있다. 체면을 죽음보다 중시하면서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무릎 꿇을 수도 있는 아버지나, 가족을 위해서라면 불구덩이에라도 기꺼이 뛰어들 목숨 건 사랑을 하는 어머니나, 얄밉도록 이해 타산적이고 논리적이면서도 부모님을 생각하면 언제나 멈칫거리는 큰오빠나, 다만 가족에게 부끄럽지 않고 최소한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꿈을 포기한 작은 오빠.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은 제가 아닌 것 같군요.” “거절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나요? 기다리죠.” 저 남자와는 어떤 꿈도 꿀 수 없을 것 같다. 어떤 모험도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지루하고 권태로울 것만 할 것 같다. 나는 그런 거 싫다. 그러나 내게도 탈출구나 비상구 혹은 에어백 정도는 필요한 거 아닌가. 나는 그 남자를 두고 그런 쪽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기다린다고 하지 않는가.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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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언니가 해외 출장을 갔다. 그래서 작은오빠와 오래간만에 둘이서 있다. 결혼한 이후로 마치 정말 젓가락처럼 작은오빠 부부는 함께 움직였다. 언제나 둘이서 같이 내 집으로 왔고, 밖에서 만나도 둘은 항상 같이 나왔다. “오빠, 나 결혼할까?” “그렇게 집으로 내려가기 싫은 거니?” 작은오빠는 내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내게 결혼의 첫 번째 의미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음이었다. 그런 이유로 결혼이란 걸 해도 될까. “이게 죽도록 하기 싫어, 저걸 하고 언제까지 그렇게 피하면서 살거니?” 피하면서 살고 있다고? 그럴지도 모른다. 나 자신에 대해서만은 지나치게 영악한 구석이 있었던 나는 내가 이렇게 쉽게 나가 떨어지고 말 것을 알고, 그동안 맞딱뜨려야할 그 무엇이 삶에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우겨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맞딱뜨릴 수밖에 없는 막다른 길 같은 것. 조건, 자격, 선택, 그리고 한계. 막다른 길에서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서 그 길을 계속 가는 것이나 그 길을 돌아나오는 것, 아니면 그 자리에 멈추어 서 버리는 것이겠지. “지훈아, 어릴 때 형 그 프라모델이 부서졌던 것 기억나니? 형이 내가 그랬다고 막 난리 부리고 그랬었지.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심지어는 며칠 뒤에 돌아오신 어머니도 내가 그랬다고 생각했고 형한테 잘못했다고 사과하라고 그랬지. 그때 니가 작은오빠는 절대로 그럴 사람 아니라구. 아무도 날 안 믿어주는 데 너는 끝까지 날 믿어줬어.” “난 기억 안 나는데.” “그래서 생각했지. 너한테 부끄럽지 않은 오빠가 되어야겠다고. 너한테 뭐든 내 힘으로 해줄 수 있는 그런 오빠가 되어야겠다고.” 작은오빠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그 일. 큰오빠가 몇 달을 걸려 만들었던 탱크와 군함, 헬리콥터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 일이 있었다. 그때 큰오빠와 한 방을 쓰고 있던 작은오빠가 의심을 받았다. 큰오빠는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까지 모조리 작은오빠가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 혼자서만 작은오빠가 안 했다면 안 한거지, 다들 왜 그러느냐고, 작은오빠의 편을 들었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걸 망가뜨린 사람은 나였다. 그것도 실수가 아니었고 고의였다. 작은오빠나 나는 손도 못 대게 하는 것, 그것을 만드는 동안 내내 잘못하면 큰일 난다고 조심시켰던 것. 그때 내 눈에는 우리보다도 그것들이 큰오빠에게 더 중요해보였다. 무슨 일이었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일로, 아니 그동안 쌓여왔던 불만 때문에 나는 큰오빠가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그가 만든 세계를 부셔버린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작은오빠에게 아직까지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때 내가 그랬다고 말하진 않았다. 물론 나는 그때도, 지금도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양심의 가책이란 걸 느낀다. 이제 내가 고백을 하면 아마도 그 짐을 덜게는 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잃게 되는 것이 또 있을지도 모른다. 작은오빠는 이해하고 아마 충분히 용서해줄 테지만 이제껏 작은오빠를 지탱해왔던 소중한 믿음 하나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다고 일어서면서 작은오빠는 나에게 작은 상자 하나를 주었다. “이게 뭐야?” “비타민.” “너 요즘 얼굴색이 안 좋은 거 같아서.” “나 약 먹는 거 싫어하는 거 알면서.” “그래도 그건 괜찮을 거야.” 작은오빠가 가고 나서 나는 그 상자의 포장지를 벗겼다. 하늘색, 분홍색, 노란색, 연두색의 갖가지 동물 모양을 한 비타민. 어린아이들이 먹는 그런 비타민. 뭐라고 하고 이런 걸 산걸까. 나는 웃었다. 그런데 자꾸 눈물이 나왔다. 우리 가족들만이 겨우 참아줄 수 있는 나. 그래도 어찌해도 무얼 해도 나를 사랑해줄 그들. 지금 이 시간에 최선이라는 것을 다하고 내가 될 수 있는 나를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런대로 괜찮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걸 이루고 안 이루고로 내가 없는 이 세상의 나는 결정적으로 구분될지도 모르겠지만 여전히 살아가는 나는 하나를 이룬 것으로 분류되어 전혀 다른 길을 가진 않을 테니까. 가족들처럼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언제고 나는 이런 나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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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간만에 간 <나비구름>에는 반가운, 아니 반갑지 않은 얼굴이 있었다. 성우였다. 모른 척 해버릴까,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건 일종의 곤란함이었고, 그건 명백히 성우 때문이 아니라 성우의 친구라는 그 작자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작자는 아직도 자신의 청혼에 대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까. “어이, 박지훈.” “왜?” “왜 피해?” “피하다니? 누가?” “지금 나를 발견하고 너, 약 3초, 아니 5초간 망설이다가 지나쳐가려고 했잖아.” “……” “너 발소리 무지하게 요란하고 특이해. 몰랐니?” 하는 수 없이 나는 성우의 옆에 앉았다. 약간 민망하기도 하고 또 곤란하기도 해서 멍하니 성우의 앞에 놓여진 메모지에 시선을 두었다. 거기에는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가지고 가야할 것, 버리고 가야할 것, 정리해야 할 것, 그렇게 쓰여져 있었다. “뭐하는 거야?” “어?” “가지고 가야할 것, 버리고 가야할 것, 정리해야 할 것……너, 어디 가니?” 성우의 낙서를 가리키며 내가 물었다. “그래, 어디로 갈까해.” 남의 일에 무슨 상관이냐며 짜증을 부릴 거라 생각했던 성우가 의외로 순순히 대답을 했다. “어디? 멀리?” “멀리.” “정말?” “돌아다니다가 어디선가 네가 있을 곳은 여기며 네가 할 일은 바로 이것이니라, 라는 목소리가 들리기를 기대하는 거지. 그런 곳에서 영원히 살까해.” 성우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성우의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다. 우린 그렇다. 정말 마음 속 깊은 담겨진 이야기는 더 농담처럼 얘기한다. “부러운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니?” “풍경, 소리, 냄새가 다른 곳에서 산다는 거 새로 태어나는 기분일거야.”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라. 너, 이상한 소리 하는구나. 너답지 않아. 적어도 넌 새로 태어나고 싶다던가 하는 맥 빠진 소린 평생 안할 것 같은 사람처럼 보였는데. 너도 가고 싶으면 같이 가자.” “뭐?” “그렇게 부러우면 너도 같이 가자구? 너도 떠나면 되는 거잖아. 간단한 거 가지고 왜 그렇게 힘 빼냐?” “난 너처럼 단순하질 않아.” “알아. 너, 복잡한 거. 왜 정리해야 할 게 그렇게 많아? 버리고 가야하는 것이 생길까봐, 두려워?”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행운이란 것이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아주 특별히 운 좋은 그 사람은 내가 아니다. 이젠 그런 것들이 점점 더 확실해지고 있다. “떠나는 것보다 머무는 것이 안전하지 않을까 해서.” “안전이라고 했니?” “그래.” “오늘 뭐 잘못 먹기라도 했니?” “왜 또 시비야?” “안 어울리는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남들처럼 안전하게 살고 싶었다면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은 거 아니니? 성질 조금만 죽이면 그런대로 괜찮은 직장에서 안전하게 돈 벌면서 살 수도 있고, 그래, 너 정도면 꽤 괜찮은 남자를 만나서 충분히 편안하게 살 수도 있잖아." “그래서 나도 결혼을 할까해.” “뭐?” “누구 하고 하는지 안 궁금하니?” “사람하고 하겠지. 사람 외에 다른 거랑 결혼하는 사람 아직 못 봤으니까. 그런데 너라면 어쩐지 사람 아닌 다른 거랑 할 거 같은 생각도 드는데.” “……” “그런데 어쩌자고 그 딴 걸 할 생각이 들었니?” “다른 건 할 게 없기도 하고, 마땅한 희생자가 제 발로 순순히 나서기도 하고 해서 한번 해보는 게 어떨까 생각해본 거야. 일종의 타협 같은 거지. 나도 이제 어른이잖아. 괜찮은 해결책 같지 않니?” “너의 말대로 결혼이 그런 타협이라면 내가 너의 그 타협의 대상이 되는 건 어떻겠어?” “뭐?” “손해 보는 짓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니? 그렇지만 손해는 아니야. 왜냐하면 어차피 누군가와 타협하고 일종의 희생 같은 걸 해야 한다면 적어도 마음에 드는 상대와 하는 것이 낫지 않겠니?” 성우까지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정말 다들 미쳤군.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기만하고도 눈 깜짝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나였지만 적어도 성우에게는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건 그래, 솔직히 인정하자. 성우가 내게 그런 것처럼 나도 성우가 마음에 들었다. “솔직히 말하겠어. 나는 그렇게 바람직한 타입이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용감하지도 않고 씩씩하지도 않고 어쩌면 이 세상의 평균적인 여자들보다 훨씬 의존적일지도 몰라. 그리고 무엇보다 아주아주 이기적이지.” “이미 아는 얘기야.” “아는 얘기라고? 넌 사태를 아주 단순하게 보고 있는데. 니가 조금 전에 한 것이 청혼 비슷한 것이라면 말이야 넌 나를 제대로 볼 필요가 있어. 난 좋은 동지가 되지 못해.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네가 내 친구이기 때문에 특별히 알려주는 거야.” “고마워. 친구. 하지만 어쨌든 내 제안도 고려해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친구가 솔직히 나오니까 나도 솔직히 말하겠는데 결혼이 뭐 그리 대단한 거냐? 그냥 이렇게 마주보고 계속 투닥거리면서 한 세상 살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 같지 않냐?” “생각해볼게.” 성우의 친구라는 작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우에게도 나는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기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성우는 나를 난처하게 만드는 귀찮은 문제를 해결해줄 남자가 아니다. 내 짐을 더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짐을 함께 지고 가야할지도 모르고, 그것보다 훨씬 복잡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갑자기 궁금해졌다. 성우의 정체가, 아니, 이게 말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성우가 성우인지 진우인지. 그 정신과의사라는 작자의 허황된 얘기의 실체를 성우로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너 도대체 누구니?” “얘가 왜 이래?” “네 이름이 뭐니? 아니, 내가 널 뭐라고 부르면 되는 거니?” 그때였다. 우리 옆 테이블의 한 남자가 쓰러졌다. 카페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모두들 쓰러진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남자는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고, 누군가 빨리 병원으로 연락하라고 했다. 성우가 벌떡 일어나서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능숙하게 무언가 조치를 취했다. 남자의 경련이 조금씩 잠잠해졌다. 잠시 후 요란한 엠블란스의 소음과 함께 구급대원들이 나타났다. “함께 가겠습니다.” 성우가 말했다. 나도 성우와 함께 엠블란스에 탔다. 병원에 도착했고 쓰러진 남자의 보호자가 나타나고 나서야 성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우가 말했었다. 돌아다니다가 어디선가 네가 있을 곳은 여기며 네가 할 일은 바로 이것 이니라, 라는 목소리가 들리면 그곳에서 영원히 살 거라고. 성우는 어딘가로 떠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성우가 있어야 할 그곳이 아주 분명하게 보였다. 성우가 나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집에 가야지.” “그래.” 찬바람이 부는 병원 앞길에서 누군가가 타고 내린 택시 뒷자리에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이제 더 이상 무얼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그는 내가 알고 있었던 지나간 밴드의 드러머가 아니었고, 처치곤란의 백수도 아니었고, 그러므로 윤성우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 남자를 모른다고 아니, 몰랐다고 할 수 있을까. “집이 어디야?” 성우가 물었고, 나는 택시 기사에게 내 집의 방향을 가르쳐주었다. 내 옆에 앉아 있는 남자의 이마에 작은 금이 보였다. 그건 오래전에 내가 집어던진 유리잔에 맞아 찢어진 상처였다. 니가 윤성우인지 윤진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눈앞에 오래 전부터 있어 온 그 사람이 맞긴 맞군. 솔직히 말하면 아까 성우가 아주 다르게 보였다. 그는 하나도 한심해보이지 않았고, 어느 때보다 명료해보였으며, 그는 살아있었고 날아 다녔다. 이런 우스운 표현은 하고 싶지 않은데 정말 멋있었고 빛이 났다. 땀에 젖어 엉망으로 구겨진 셔츠를 입고 머리카락이 흩어진 남자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니 친구 말이야. 그 정신과의사인가 하는 사람. 그 사람 어떤 사람이야?” “무슨 뜻이야?” “아니. 그냥.” “한마디로 괴짜야. 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자격정지중이니까, 그 녀석 상담 받을 생각은 하지 마. 그 녀석은 사람을 다그쳐. 예를 들면 니가 어떤 문제로 갈등하고 있다면 그 문제를 상쇄할 만한 다른 문제를 제시하는 거야. 양손에 떡을 쥐고 있으면 어느 쪽이 진짜인지 더 잘 알 수 있다는 거지. 가짜를 만나면 진짜가 보다 분명해진다는 건데, 꼭 그런지는 잘 모르겠고, 그건 또 사람마다 다른 거지. 아무튼 상대하지 마. 너를 대상으로 어떤 실험을 할지도 모르니까.” 어쩐지 그 정신과의사의 실험대상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조금 불쾌하기도 하고, 그래서 확 결혼해버리겠다고 해서 그 남자가 어떻게 나오는지 두고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참기로 한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손해를 본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게 해서 나에게 무언가가 아주 분명해졌으니까. “우리 어떻게 만났는지 기억나니?” 성우가 물었다. “우리 나비구름에서 처음 만난 것 아니었니?” “기억 못하는구나.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니. 고스트 월드 기억 안나니?” “고스트 월드? 인터넷 사이트 말이니?” “그래. 우리 거기서 만난 거야? 그런데 거기선 만날 수가 없잖아.” 고스트 월드는 거짓말쟁이들의 모임이다. 자신의 성도 나이도 신분도 경험도 모두 가짜이다.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신나게 거짓말을 해대는 가상공간이었다. 나는 오늘 어디 어디에 갔었고, 누구를 만났는데 무슨 일이 있었다, 그런 일상적인 일들을 모두 거짓말로 꾸며대는 것이다. 내가 보낸 하루와는 전혀 다른 하루가 생겨나고 나는 그곳에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흰 펠리칸이란 닉네임을 썼던 넌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아주 효율적으로 했지. 다른 사람들처럼 너와는 전혀 다른 사람을 만들어내는 대신 너 자신을 그대로 활용했고 네가 갔던 곳을 그대로 썼지. 다만 거기서 내가 한 말이나 행동이 실제와는 달랐겠지. 내 말이 맞지?” 하는 말이 모두 거짓이긴 하지만 각자가 일관된 어떤 다른 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오늘 남자였던 사람이 내일 여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 인물의 프로필 아래서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가상공간에서 내가 어제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래서 오늘도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잊어버려서는 안 되었다. “비슷해. 그래서?” “어느 날 우연히 네가 말한 나비구름이란 곳이 진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혹시 흰 펠리칸도 거기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 그리고 유심히 그곳에 온 사람들을 살피게 되었지.” “어지간히 할 일도 없었던 모양이군.” “그래, 그때는 참 할 일이 없었고 나도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고 싶었어.” 성우는 틀렸다. 나는 그 가상공간에서도 나였다. 단 한 번도 나는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그 누구도 부러워한 적이 없었다. 나보다 더 가진 것이 많다는 이유로, 나보다 더 똑똑하고 예쁘다는 이유로, 나보다 더 사랑받는다는 이유로. 나는 언제나 나인 채로 만족했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그 가상공간에서도 나는 나로서 살았다. “그래서 어떻게 나를 찾아낸 거지?” “찾아낸 게 아니라 알아본 거지. 이 세상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멀쩡하게 살아있더군.” “뭔가 불공평하지 않아? 너는 나를 다 알았는데 나는 너를 몰랐다는 얘기잖아.” “과연 그럴까?” “그럼?” “가상공간에서도 현실에서도 너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그래,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게 너는 아니잖아. 진짜 네 모습을 보여줘. 혹시 아니? 내가 그 모습에 반해서 목숨을 걸지.” 그런데 거기 모였던 사람들은 지금 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가수도 있고, 탤런트도 있고, 영화배우도 있고, 화가도 있고, 미스코리아도 있었고, 재벌 3세도 있었다. 그리고 멋진 남편과 아이를 가진 예쁜 미시도 있고, 자유로운 싱글도 여럿이었고, 연애상담을 해주는 할머니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곳에 멋지고 행복한 사람들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거지도 있었고, 소매치기도, 연쇄살인범까지 있었다. 당연히 그들을 쫓는 형사도 있었다. 신분으로 치자면 그곳에서도 나는 현실과 다름없는 천하태평의 백수였다. 하지만 아무리 거짓말을 해대어도 가끔 진짜를 말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 “……” 성우는 잠자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쑥스러운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너 혹시 나 사랑하니?” “걱정하지 마. 난 절대로 널 사랑하지 않을 테니까. 이제 됐지?” “그래. 됐다. 나도 너 사랑 안 해.” “알고 있어. 그리고 상관없어. 넌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하지 않으니까.” “그걸 어떻게 알아?” “글쎄. 내가 잘못 안거니?” “글쎄. 난 사람이 아니라 다른 걸 사랑해.” “그게 뭔지 물어보면 안 되겠지?” “당연하지. 그걸 알면 넌 상심하게 될 거야.” “왜?” “도저히 너랑은 상대가 안 되거든.” “그래?” “그렇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어. 아직은 내 짝사랑일 뿐이니까.” “안 어울리는 짓을 하고 있군.” “그래. 나도 알아. 그래도 할 수 없어.” “그렇지. 그런 게 사랑이지.”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직 사랑만 믿는다. 이제 그 사랑이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25

    버지니아 울프의 피로한 생을 1시간 만에 읽어치우고 라디오 헤드의 크립을 계속해서 듣고 있다. 새벽 3시 45분. 잠이 오는 건지, 안 오는 건지. 그저 나른하고 어지럽고 그런 상태. 목구멍에서 기어 올라오는 구토. 머리 속이 잔뜩 엉클어진 방같이 산만하다. 시디플레이어가 계속 헛돌고 있다. 슬픔도, 기쁨도 날아가 버리지 않고 찐득하니 눌러 붙어 산뜻하질 않다. 오래도록 찾아오지 않는 서른, 희망 없는 스물의 그림자에 아직도 시달리고 있다. 겨울이 끝났다. 날짜 상으로는 적어도 그렇다. 새 봄이 미룰 수 없고 오고 더 이상의 희망은 생겨나주지도 않고 그래서 미리 두려운 3월. 지금 내게는 집주인이 주고 간 전세금과 국제민간구호기구의 지원서가 있다. 내게 선택하라고 한다. 더 이상 피하지 말라고 한다. 뭐든 해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생각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워해도 좋을 만큼 시간은 또 지나갈 것이다. 그러면 지금의 이 무기력한 시간들도 그리워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젊고 아름다웠으며 행복했었다고 웃으며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아니, 차라리 잊을 수 있을까. 그렇게 숨죽이며 힘겨웠던 시절은 없었다고, 그랬었던 적은 없었던 것처럼 잊어버릴 수 있을까. 아직도 나는 그 시간과 합의가 끝나지 않았다. 지금 협상이 진행 중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스물아홉 살에 자신의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상황을 약간은 절망적으로 표현했다. 스물아홉 살에 아직 결혼도 안 하고 ─청혼도 거부하고─ 아이도 없고─ 게다가 정신병이 있고─ 작가도 아니고. 나는 스물여덟 살에 아직 결혼도 안 하고 청혼도 거부하고 아이도 없고 그리고 작가도 아니다. 그러나 그때의 버지니아 울프보다 나는 한 살이나 젊고 게다가 정신병도 없으니 아주 절망적이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스물아홉 살이 될 때까지는 살아보겠다.

    26

    나는 성우와 함께 국제민간구호기구에 지원했고 성우는 의사로 나는 다큐멘터리 작가로 선발되었다. 솔직히 내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무엇을 선발기준으로 삼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학실력이나 체력조건, 경력 등등이 나에게 그다지 유리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인터뷰에서 면접관들은 내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고, 나는 내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껏 대답했다. 이를테면 그들은 다른 지원자에 비해 당신이 나은 점은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나는 여기 어떤 사람들이 지원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나처럼 단시간에 여러 직장을 전전하지는 않았을 것 같고 나보다 더 잘 놀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어냐고 물었고, 나는 물론 놀고 즐기는 거라면 2등이 되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들은 이 일을 통해 당신이 궁극적으로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으며 이 일은 그런 종류의 일처럼 보인다고 했다. 그들은 이 일을 통해 당신이 받게 될 댓가가 상상보다 적을 수 있다는 걸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내가 이 일을 통해 마침내 이루게 될 것이 상상보다 대단한 것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 인터뷰를 하기 전까지 나는 내 인생이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터뷰를 끝냈을 때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내 시간을 낭비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낭비한 시간들은 나만의 글이 될 것이다. 공항에서 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설희 어머니가 받았지만 나는 그냥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설희에게 급히 편지를 썼다. 너에게서 연락이 없은 지 꽤 되었다. 난 아무 일 없고. 그리고 잘 있다. 내가 그렇듯이 너도 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지낸다. 특별한 일, 굉장한 일, 중요한 일이 일어나면 전화를 하겠지. 너는 별일 아니라 생각해서 느낄 수 없겠지만 색깔이 다른 목소리로 말이다. 어느 날 아침에는 문득 그런 기대를 가져보기도 한다. 나, 드디어 아프리카에 간다. 내가 아프리카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두 개의 사파리 기차가 있다는 얘기를 나에게 했었지. 블루 트레인과 로보스 레일이었던가.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너를 나의 아프리카로 초대하고 싶다. 그때는 블루 트레인…… 로보스 레일…… 두 열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우리의 아프리카에서의 시간이 유유히 흘러갈 수 있을 것이다. 너무너무 되고픈 게 있다면, 너무너무 사랑하는 게 있다면, 너무너무 갖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것이 내 문제였다는 걸 이제는 알겠다. 예전에는 우리가 함께 다니며 웃을 수 있었을 그때에는 모르긴 몰라도 그런 게 있었던 것 같다. 그 비슷한 거라도. 이렇게 떠나면 되고픈 거 사랑하는 거 갖고픈 게 생겨날지도 모른다고 기대를 한다. 어쩌면 지금 내가 두고 떠나는 그 모든 것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추신. 아프리카 부족어로 사파리는 가서 무언가를 얻고 돌아온다는 의미래. 지훈이가
    박주영

    박주영

    1971년 부산 출생

    1997년 부산대 정치외교학과 대학원 졸업

  • 성실한 저력 작가 가능성 보여

    최원식(인하대 교수·문학평론가) 송기원(소설가)
    (예심=신수정 함정임 김연수)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중편부문에서 당선작을 내지 못하고 말았다. 두 해에 걸쳐 심사를 맡은 선자(選者) 중 한 명은 어쩔 수 없이 자괴에 빠지고 말았다. 이렇다 할 서사구조도 없이 단편을 길게 늘인 듯 무성의한 구성에서부터 주인공들의 불필요한 말장난, 현실의 재구성이라는 허구의 참뜻을 망각한 채 사실성 없이 펼쳐지는 사건 전개 등이 눈에 박히듯 아팠다. 대저 문학의 기본이란 무엇인가. 뭔가 밖으로 토해내지 않으면 차라리 죽을 것만 같은 강렬하면서도 광적인 내면의 표현 욕구가 아닌가. 그런 표현 욕구가 문학이라는 형식을 빌려 마침내 설득력을 얻고 감동을 불러일으키면 바로 훌륭한 작품이 될 터이다. 글을 쓰려는 이들은 모름지기 한번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볼 일이다. ‘글을 쓰지 않으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가?’ 만일 쓰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대답이면 마땅히 그만두어야 한다. 아니면 말고 식은 정말로 안 된다. 소설을 포함한 문학 전체가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는 비문학(非文學)의 시대이다. 그만큼 작가로 사는 일도 힘들어졌다. 이런 비문학의 시대일수록 죽을 둥 살 둥 필생으로 매달리는 외길의 작가정신이 필요하다. 선자(選者)들은 바로 이 중편부문에서부터 그 희망이 생기기를 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푸른 방이 불온하다’ ‘파워나모드’ ‘변종 캥거루 가족’ ‘시간이 나를 쓴다면’ 4편이었다. 이 중에서 ‘시간이 나를 쓴다면’을 아쉽지만 가작으로 뽑는다. 문장이며 구성이 많이 허술하지만, 백수라는 일상적 무력감을 주제로 삼아 끝까지 뒤쫓아 가는 성실한 저력에서 작가로서의 어떤 가능성을 보았 때문이다.
  • 박주영

    박주영

    1971년 부산 출생

    1997년 부산대 정치외교학과 대학원 졸업

    매번 나는 내 선택에는 정당한 그것도 순수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했고, 어떤 면으로는 그것이 운명이라고 믿었다. 작가가 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인정하는 작가가 아니라 내 스스로 작가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작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몰랐다. 소설을 쓴다는 이유로 한없이 나태해질 수 있었던 나.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은 내가 읽고 싶은 소설이었다. 이 시간을 반영하고 이 시간을 초월하는 소설. 나를 잊고 나를 만나는 소설.

    글쓰기에 관해서라면 내게는 선생님도 문우도 없었다. 그러므로 내가 그동안 읽어온 책들에 그리고 그 책들을 써온 모든 작가 분들에게 감사한다. 나는 그들을 읽으면서 즐거워했고 행복해했으며 그리고 때로는 그들을 험담했으며 그러면서도 그들을 사랑했다. 내가 읽어온 그들처럼 앞으로 나도 내 소설을 읽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의 든든한 울타리였던 사랑하는 부모님과 동생들, 돌아가신 이모, 남편과 나를 위해 늘 기도해 주시는 시어머님, 내가 소설을 쓰지 않을 때에도 작가가 될 수 있으리라 믿어주고 답을 준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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