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푸른 잎새와 검은 고통
-삶은 난감한 것이다.
친목 야유회에 모인 몇몇이 떠들썩한 좌판을 벌인다. 시냇가 한쪽에서 풀을 뜯는 염소 두 마리의 입에선 흰 이빨이 빛나고 있다. 친목회 회장님 말씀에 박수치는 사람들 옆에선 비누와 수건, 식칼과 도마 등속이 햇빛에 반짝거린다. 얼마 후 누군가가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르고 있고 좌판 군데군데 염소 수육의 살점이 흩어져 있다. 노래 부르는 사람의 입 안에 염소의 피냄새가 그득하다. 죄인가? 이 장면은 2003년에 출판된 이성복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에 실린 시 「그날 우리는 우록에서 놀았다」(117)의 정경을 재구성한 것이다. (이하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이 글에서 인용한 시의 출처는 모두 이 시집이며 각 시에 붙여진 일련번호로 제목을 대신함) 염소의 도륙과 좌중의 흥취는 윤리적으로 아무런 상관관계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실은 서로 무연한 세계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런 사정은 서로 입장이 뒤바뀐 경우에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실상, 그 어떤 누구의 고통도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 이성복 산문집,『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문학동네, 2001, p244. (이하 특별한 언급 없이 페이지 번호가 붙은 것은 모두 이 산문집에서 인용한 것임.) 하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도륙된 염소의 죽음과 좌중의 흥취가 윤리적 상관관계를 갖지 않는 것처럼 나뭇잎의 푸르름과 인간사의 세세한 고통들 역시 각기 다른 세계에 속한 것들로 보이며 이 두 세계를 운용하는 원리들 역시 각기 다른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으로 족한 것인가? 웬 미친놈이 학교 가는 사내애에게/ 황산을 끼얹었다/아이 얼굴은 새까맣게 탔다// 푸른 잎새 넘실거리는 보리밭에서/ 깜부기를 뽑을 때처럼/ 삶은 난감한 것이다 (120 부분) 예컨데, 라이프니츠와 같은 철학자처럼 우리 삶의 모든 국면들이 미리 필연적으로 정해진 것이라는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혹은 그런 견해를 받아들이기 힘들 만큼 삶 자체가 ‘폭력적’으로 보이는 순간들이 있다.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폭력”(118)과 같은 이런 사태들에 직면하고는 삶이란, 우연의 미필적 고의에 의해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는 사태들로 구성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사태가 낳는 상처들과 그로 인한 고통은 어찌 보면 다른 그 무엇보다 확실하게 우리네 인생의 기본 조건이 된다고 할 법하다. 인용된 시에 제시된 사건은 그 한 예이다. 이성복은 웬 낯선 사내가 등교길의 한 아이에게 황산을 끼얹은 사건에 대해 난감해 하고 있다. “대체 무거운 죄 있을 리 만무한”(「잠」, 『호랑 가시 나무의 기억』) 이 아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왜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를 자문하는 시인에게 “삶은 난감”하기만 한 것이다. 푸른 잎새 넘실거리는 보리밭의 아름다움과 아이의 검게 타버린 얼굴의 고통은 염소의 도륙과 좌중의 흥취만큼이나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것으로 보이고 이는 원망 혹은 체념을 낳는다. 그러나 사태가 조금 더 복잡해지는 곳까지 바라보는 이는 묻는다, 이 고통은 어떻게 설명되는가? 물론, 우리는 이 사태에 대해 다음과 같은 형이상학적 설명을 마련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이성이 악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 전체의 질서와 법칙에 대해서는 악이 아니며 동떨어져 있는 우리들의 본성의 법칙에 대해서만 악이다 (스피노자, 『국가론』). 이 해법은 삶의 비극적 정황에 대한 우리의 심려에 다소간의 위안을 제공해 준다. 이처럼, 삶의 세계의 우연성과 무질서 그리고 그에 따르는 세세한 고통들 역시 저 높은 곳에 있는, 보이지 않는 어느 지평에 속하는 자명한 세계 운용의 질서에 준하는 것일 뿐이라는 ‘대범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 한 우연의 세계에 항상 일어나는 이런 사건들을 설명해내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태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과 심리적 위안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고통’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필, “사물이 복잡하고도 슬프게 되는 곳까지 들여다보” 토마스 만 지음 ? 안삼환외 옮김 「토니오 크뢰거」『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 민음사, 2000, p27. 토마스 만은 이 소설에서 근대 예술가란, 전혀 교란되지 않는 눈빛을 가진 사람들과 달리 “사물이 복잡하고 슬프게 되는 곳까지 들여다 보는” 눈을 가진 존재라고 설명하고 있다. “처음도 끝도 관찰! 너는 ‘눈’이다‘”(산문집, p204)라고 말하고 있는 이성복의 시선 역시 그런 운명을 자처한다고 할 수 있다. 는 것을 존재의의로 삼은 시인에게 이 황망한 사태란 무엇인가? “삶은” 참으로 “난감한 것이다”.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은 이 황망함을 풀어보기 위한 이성복의 고투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가 오랜 공백 끝에 발표한 시집『아, 입이 없는 것들』은 저 자연 전체의 질서와 우리네 삶의 세계의 구체적 현상들의 관계 그리고 그것이 낳은 이 ‘난감함’에 주목할 때 그 요체가 파악되는 시집이다. 시인 스스로 머리말에서 “지난 세월 씌어진 것들을 하나의 플롯으로” 엮었다고 말하고 있는 이 시집,『아, 입이 없는 것들』의 ‘플롯’과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들여다 보자. 사물이 복잡하고 슬프게 되는 지경까지 보는 눈, 그 눈이 없으면 없었을 고통 앞에서, “처음도 끝도 관찰, 너는 ‘눈’이다”(p204)라고 말하는 것이 이성복의 출발점이다.
2. 두 세계와 그 접경에 대한 관찰
- 너는 눈이다.
이 시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자명한 자연의 질서와 법칙에 의해 이 세계에 얼굴 내민 것들의 아름다움에 시선을 빼앗긴 시인의 표정이다. 1998년 1월 2일 선산에서 상주로 통하는/ 25번 국도에서 개나리 덤불이나 관목 숲,/ 하다못해 갈대까지(… …)// 그것들/ 너무 아름다워 내 눈이 나도 모르게 웃었다/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미치게 아름다운 것,/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전속력 전방위적으로/ 아름다운 것, 왜 어떻게 아름다우냐고/ 물으면, 왜 어떻게 아름답다고 대답할 뿐,/ 코팅한 입으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85 부분, 강조는 인용자) 자명한 세계가 있다. “왜 어떻게 아름다우냐”는 질문에 전혀 응답하지 않는, 아니 응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듯 보이는, 그저 때 되면 “한 잎의 결손도 없이” “꽃들을 다 불러들”(72)이는 봄과 같이 무심하되 정연한 저 자연의 세계가 있다. 이 세계의 것들은 있고 없음, 아름다움과 흉함과 같은 어떤 존재론적, 심미적 범주를 타고 나지 않을뿐더러 자신들을 이 세계에 내어 놓은 원리에 대해서 굳이 덧말을 붙이지 않는다. 이 원리는 말 없는 저들끼리 통용되는 것이다. 시인은, “왜 어떻게 아름다우냐”는 질문을 일거에 군말에 붙이는, 저 “입이 없는 것들”의 세계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다. 급기야 시인은 “한창 잔치를 여느라 정신이 없는/ 저 꽃들에게도,/ 잔치를 열어주어야겠다”(53)라고, 이 아름다운 것들을 저 먼 지평으로부터 우리의 눈에 보이는 곳으로 밀어낸 자연의 힘에 대해 그 공로를 ‘치하’하는가 하면 “눈 앞에 돌연” 나타난 겨울 흰 꽃들에게는 “그것들 한번 보려고 사람은/ 사는 것이다”(84)라고 최상의 찬사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정점에 달한 시인의 이 경탄이 배음과 같은 쓸쓸함의 정조를 동시에 환기시킨다는 것이다. 왜일까? 하루종일 토하고 밤에는/ 잠 못 이루는 어머니,/ 찬물 속에 떠 있는 도토리묵처럼/ 말씀 없으시다 가,/ 인제 겁 안난다, 살 만큼 살았으니……// 살얼음 낀 우물을 들여다보듯/ 한 고통이 다른 고 통을 들여다본다 (87 부분, 강조는 인용자) 고통은 그 해법과 달리 구체적이다. 고통에 대한 형이상학적 설명과 처방-예컨데, 앞서 살펴본 한 철학자의 처방과 같은-과 달리 고통은 항시 구체적이다. 그리고 몸은 그 구체적 고통의 구체적 진원지이다. 더욱이, 그것이 어머니의 경우라면 그것을 들여다보는 이의 고통도 그리 가벼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 실상, 시인의 눈을 끄는 ‘저곳’의 아름다움은 ‘이곳’의 이런 구체적 고통과 나란히 놓인 것이다. 국도 한 구석에 핀 겨울 흰 꽃들이 주는 서늘한 아름다움과 우리네 삶의 세계의 신열과 같은 슬픔은 나란히 놓인 것이다. 이때, “그리움이나 슬픔 그런 빗나간 느낌도 없”(80)는, 저 “입이 없는 것들”이 무심히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과 고통을 들여다 보는 시선은 선명히 대비된다. 따라서 아름다운 것들을 응시하는 이성복의 표정 속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삶의 세계의 광막한 슬픔의 배후지를 꿰뚫는 시선 역시 존재한다는 것이다.
3. 초월이냐 경계냐
-빨래집게의 풀어진 힘으로 우리를 묶어두는 삶
저 자명한 질서에 의해 운용되는 아름다움의 세계를 감지해내고 그 세계에 내접한 삶의 세계의 세세한 현상들에 예민한 시인은 이 두 세계의 낙차를 어떻게 견딜 것인가? 가장 손쉬운 해법은 수직적 초월을 택하는 것이다. 이는 저 높은 곳의 질서,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원리를 삶의 소소한 영역에까지 적용하여 일상의 구체적 현상들을 설명하고자 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 해법은 명쾌하나 공소하다. 한 시인이 이처럼 저 보편적 질서의 세계에서 ‘이곳’의 현상들을 태연하게 내려다 보는, 혹은 그렇게 상상된 시선을 취하게 될 때 종종 구체적 현상이, 먼 시선이 그리는 지형도의 밑으로 숨어버리고 그 결과, 시가 시들해지는 경우를 최근 우리는 종종 보아왔다. 이성복의 미덕은 저 위의 보이지 않는 지평 속에 시지각의 근원을 ‘상상적’으로 투사하는 것을 문제의 해법으로 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즉, 이 시집에서 그의 미덕은 수직적 초월이라는 손쉬운 해법을 택하지 않고 “어떤 이득도 없이” “이 삶을 긍정한다”(p240)는 데 있다. 삼월의 바람은 출정하는 배들의/ 돛폭처럼, 흰 기저귀 하늘로/ 밀어올리고 뒤뚱거리는 새댁의 모습 귀지처럼 가볍게 눈앞에 떤다// 다만 삭은 빨래집게의 풀어진/ 힘으로 우리를 이곳에 묶어두는/ 삶, 여러 번 살아도 다시 그리운, (41 부분) 시인은 비록, “이 몸 일찍이/몸부림 바깥을 벗어난 적 없”(45)다고 탄식하고 세상에 대해서는 “욕하고 엿 먹이고/내 안의 에이즈 균을 다 퍼주”고 “세상에 침 뱉고 누런 가래/억지로 끌어올려 마구 퍼부”(125)을지언정 저 높은 곳의 질서가 주관하는 세계로의 수직적 초월을 꿈꾸지 않는다. “출정하는 배들의 돛폭”을 밀 듯, 우리를 둥실 떠미는 삼월의 바람은 상승과 초월을 부추기지만 시인은 “다만 삭은 빨래집게의 풀어진 힘”, 꼭 그만한 힘으로 “우리를 이 곳에 묶어두는” 것이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일찍이 몸부림 바깥을 벗어난 적 없”(45)어 괴로워하던 시인은 놀랍게도 이 시에서, 우리를 이곳에 묶어두는 삶이 “여러 번 살아도 다시 그리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과정을 거쳐야 “검은 돌로 쌓은 장방형의 무덤”(29)에 갇혀 몸부림하던 고역의 삶이 그리운 것이 되는가? 시인은 여기에 어떤 ‘플롯’을 숨겨두었을까? 이성복은 한 산문에서 “극복할 수 없는 아픔에 대한 위안은 그래도 우리가 그 아픔을 ‘앓아낼’ 수 있다는 믿음에 있다”(p251)고 말하고 있다. 이런 “믿음”은 저 위나 바깥이 아니라 ‘진흙’ 냄새 나는 고통스런 삶의 대지가 바로, “초월이나 내세를 믿지 않을 때 일어나는 생의 불꽃놀이”(p52)의 현장임을, 우리가 뛰어야 할 로두스임을, 이 시집 3부의 부제처럼, “진흙 천국”임을 인정하기 위한 기본 전제가 된다. 이 “믿음”을 디딤돌 삼아 실마리를 풀어보자. 시집의 1부에 ‘마라’ 이야기라는 일종의 “전희(前戱)” 이성복은 『문학과 사회』 2003년 가을호에 기고한 「작가의 편지」에서 제1부는 제3부의 전희(前戱)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시집 전체의 구조를 생각해 볼 때, 그의 이 설명은 눈여겨볼 만하다. 가 요청되고 3부에 ‘동곡’의 “상징적 지도”(112)가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4. 마라, 고통의 은총
-왜 이렇게 가슴 뛰느냐고
이성복은 「물집」이라는 부제하에 묶인 1부의 몇몇 시에서 ‘마라’라는 낯선 기표를 등장시킨다. “마라, 나를 사랑하지 마라”(26), “(마라) 나를 믿지 마라”(28), “마라, 눈을 떠라”(30)가 그 예이다. 이성복이 시집의 머리말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지난 세월 씌어진 것들을 하나의 플롯”으로 엮으며 만들어내고 있는 이 시집의 지주(支柱) 이미지들 즉, 물집, 백치임신, 가상임신 그리고 진흙천국이라는 이미지들을 풀어내는 키워드가 되는 ‘마라’란 무엇인가? ‘마라’라는 기표는 우리말 어법에서 금지형 부정 동사(~마라)로 쓰이고, 불교에서는 욕계(欲界)의 중생을 유혹하는 존재(mra)를 뜻하며 범어(梵語)로 ‘고통의 은총'이라는 뜻을 가진 신(mara)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처럼, ‘마라’라는 기표는 금지와 유혹, 고통과 은총이라는 상반되는 의미론적 자질들을 동시에 내포한다. 이를 고려할 때, 이성복이 이 시집의 1부에서 소환한 ‘마라’라는 기표는 반대되는 벡터들을 갖는 힘들이 한 곳에 작용하면서 발생하는 어떤 사태를 설명하기 위한 상징적 기표로 간주될 수 있다. 이 ‘마라’가 시집 전체 의 일종의 “전희(前戱)” 부분인 1부에 소환된 이유는 그것이 3부「진흙천국」에 제시된, 생에 대한 시인의 최종 유권해석을 유력하게 뒷받침해주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1부 ‘마라’ 이야기의 상징적인 전사(前史)가 우리 삶의 모습과 어떻게 실감있는 관계를 갖는지 살펴보기 위해, 이성복이 이 시집이 발간된 직후 가진 한 인터뷰 내용의 일부를 인용해 보자. 이번 시집을 구성하는 네 개의 기둥은 생과 사, 性과 食이다(… …) 생성하고 변화하고 소멸해가는, 色 자체인 삶을 사람들이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시집 3부 <진흙천국>에서 다룬 <가상임신> <백치임신>등 극단적인 경우를 통해서 고통스러운 삶의 진실에 도달하곤 한다. 색을 그 자체로 보지 못하고 인간의 관념이 개입해 환상이 생기는 게 문제다. (중앙일보 2003. 7. 29. 문태준 시인과의 만남에서) 인용에서 보듯 시인은 삶이란 생성, 변화, 소멸해가는 “色 자체”일 뿐이며 생사성식(生死性食)을 낳는 기운이 들고 빠지기를 반복하는 속 없는 ‘물집’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글의 앞부분에 인용된 시들에서처럼 그저 자연의 아름다움에 탐닉하거나 인간사의 소소한 고통에 몸부림하는 것 이외에, 삶의 다른 형식이란 없는 것인가? 우리 삶을 구성하는 것이 생사와 성식이라는 원초적 생명 현상이라 해도 이것들의 대립과 보합이 낳는 구체적 현상이란 예측불가능한 것이다. 실상, 어떤 형이상학도 우리가 현상에 부여한 관념일 뿐 현상 자체를 적실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성복에 의하면 비극은 여기서 생겨난다. 우리의 “비극은 우리가 세계에 준 관념을 세계라고 생각하는 데”(산문집 p185) 있기 때문이다. 어떤 형이상학적 기대와도 상관없이 생사성식의, 색(色) 자체인 삶을 주관하는 기운은 인간의 몸에도 똑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여기엔 면목이나 이해관계가 없다. 인간세계에 일어나는 윤리적 불가사의들을 설명해내려는 보편의 의지도 우연한 현상들 모두를 자연전체의 질서와 법칙으로 포괄하려는 체계의 의지도 없다. 오, 육체가 없었으면 춥지 않았을 것을 (2) 오, 육체가 없었으면 없었을 구멍 (3) 그저 삶이 “생성하고 변화하고 소멸해가는, 色 자체”라면, 그리고 비록 ‘추위’를 낳는 육체지만 그 “육체가 없었으면 없었을 구멍” 통해 우리의 몸에 그 기운이 넘나드는 것이라면, 세계는 우리가 세계에 준 관념이 아니라 몸이 만들어내는 “상징적 지도”(112)에 의해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한 핵심이 있다. 바로 여기가 수직적 초월의 태도와 이성복의 태도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그 어떤 윤리적 당위도 자연 전체의 질서나 법칙이 주관하는 원리도 없이 삶이 그저 생사성식의 기운 들었다 빠지며 “부풀고 꺼지고 되풀이”(122)하는 ‘물집’과 같은 것일 뿐이라면 오히려 거꾸로, 생사성식의 기운이 넘나드는 우리의 몸이야말로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세계를 구조화하는, 세계의 시원(始原)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지평은 ‘저 너머’가 아니라 몸이 관계하는 세계 안에 위치하게 된다는 것이 이 시집의 득의의 전언이다. 그렇다면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시인이 생사성식의 모순된 현상들을 주관하는 힘을 ‘고통의 은총’이라는 뜻을 가진 ‘마라’라는 상징적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고 할 때, 이제 고통은 어떻게 되는가? ‘추위’로 비유되는 그 인간적 고통에 어떤 은총이 깃드는가? 달포 전 아침부터 토하고/ 설사해 정밀 검사 받아보니 간에도 폐에도 암은/ 퍼진 지 오래여서, 그래도 그 엄마 울고불고/ 수술은 해야겠다기에, 거의 배꼽 근처까지 장을/ 잘랐다는 아이, 잣죽이나 새우깡 부스러기 먹는/ 족족 인공 항문으로 쏟아내고, 또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미치겠다고 제 엄마 볼라 매점 보내고/ 나서, 아이는 베개 한쪽에 뺨을 묻고 노래부른다/ 왜 이렇게 가슴 뛰느냐고, 왜 이렇게 행복하냐고/ 6인 병실 처음 들어오던 그날, 왜 내가 죽느냐고/ 왜 나만 죽어야 하냐고, 그리 섧게 울던 그 아이는 (94, 부분) 이 시는 ‘고통의 은총’이 형이상학적 차원이 아니라 몸의 차원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인간의 고통과 괴로움에 무연한 듯 보이는 세계, 스스로의 자명한 이법을 따르는 세계에 내접한 우리 삶의 세계의 접점은 몸이다. 따라서 이 시집에 몸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 시집 전체를 통해서 볼 때, 몸은 크게 두 가지 이미지로 나타난다. 우선, 몸은 구체적인 고통의 장소로 나타난다. ‘어머니’의 발병을 비롯해서 이 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몸의 탈남’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의 물리적 속성을 고스란히 따르는 몸이 구체적인 고통의 장소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빈번하게 등장하고 생생하게 묘사되는 몸 앓이 장면의 효과는 구체적 고통에 대한 어떤 ‘환(幻)’적인 설명도 배제시킨다는 것이다. 인용된 시에서 “새우깡 부스러기 먹는 족족 인공 항문으로 쏟아내”는, 암 걸린 아이의 고통은 식에서 배설에 이르는 시간의 짧음만큼이나 직접적으로 독자에게 전달된다. 심지어 이 앞에서는, “오, 육체가 없었으면 춥지 않았을 것을”(2)이라는 탄식마저 한가로워 보인다. 그런데, 이 사실과 더불어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시에, “거의 배꼽까지 장을 잘랐다는” 아이의 고통만큼 직접성을 갖는 것이 또 하나 있다는 것이다. “새우깡 부스러기”와 “아이스크림”의 미감이 그것이다. 몸이 직접적인 고통의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한편 그것은 순간적인 쾌감과 그것이 낳는 열락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먹는 족족 인공항문으로 쏟아내”야 하는 예견된 고통을 목전에 두고도 어쩔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감각의 직접성과 그것이 만드는 순간적 열락이다. 한 몸에 같이 사는 이 고통과 열락, 죽음을 목전에 두고 “왜 이렇게 가슴 뛰느냐고, 왜 이렇게 행복하냐고” 묻게 만드는 이 ‘어이없는’ 감각의 열락. 여기에 이 시의 비밀이 담겨있다. 손 앞의 미감이 주는 쾌락을 가로막는 예견된 고통 앞에서 오히려 그 고통을 젖혀두게 만드는 구체적 감각의 열락, 여기서 시인은 찰나적으로 생의 본질을 보고 있다. 잎 사이에 꽃 솟게 하고 푸른 잎에 꽃의 붉은 색을 물들이는 힘(26), 민들레 포자에 죽음의 신호 보내 홀씨 날리게 하는 힘(46)과 “새학기에 고3이 되어야 할 여자아이”의 온 몸에 암을 퍼뜨리는 힘, 그리고 그 아이로 하여금 아이스크림 식욕 돋게 하는 힘 모두 같은 ‘마라’의 기운이라 할 때, “먹는 족족 인공항문으로 쏟아내는” 아이의 손에 놓인 아이스크림, 그것은 금지와 고통, 유혹과 쾌락이 하나의 ‘구멍’에 통해 있다는 사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징표이다. 비록 몸 전체가 고통 속에 놓여있을 망정 그 몸에 와닿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감각들이 불러일으키는 낱낱의 즐거움들, 그리고 우선 그것에 충실한 삶, 그것이 “다만 삭은 빨래집게의 풀어진 힘”만큼으로 “우리를 이곳에 묶어두는 삶”(41)의 속내임을 이성복은 이렇게 보여주고 있다. 바로 그런 삶의 모습이 시집의 3부에 실린 일련의 시들에 제시된, 이성복이 만든 “상징적 지도” 속 어딘가에 있는 ‘동곡’에 펼쳐진다. ‘동곡’은 가히, “범성애적 충동”(45)에 의한 생의 저인망식 구인의 광경을 보여주는 현장이라고 할 법하다.
5. ‘동곡’, ‘마라’의 우듬지 혹은 내륙의 지평
-동곡엔 가지 마라
메를로 퐁티식으로 풀자면, 몸의 지각을 통한 세계의 (재)구조화라고 설명될 수 있을 이성복의 이런 태도는 ‘시쓰기란 무엇인가’ 라는 그의 문제의식과도 직결된다. 그가 이 시집의 뒤표지에서 직접 표명하고 있듯이, 시인은 “겉똑똑이 머리를 잠재워두고 몸속 깊은 곳을 들락거리며 쉬임없이 연상의 물질”을 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구체성의 상실, 혹은 구체성에 대한 감각의 상실”(p250)이야말로 시인의 “타락”임을 강조하는 이성복의 이런 태도는 결국 어떤 선험적이고 보편적인 질서가 있어 그것들이 구체적 현상들을 규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이라는 것이 구체적 현상들의 종국에 있는 것이라는 태도로 귀결된다. 이때, 시쓰기란 현상들 너머가 아니라 현상들의 내륙에 있는 지평을 더듬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유컨데, 이성복의 시쓰기란 생의 저인망식 구인을 위한 구체성으로의 “물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시를 보자. 석쇠 엎어놓은 듯 갈라터진 촌로들의/ 손등이여 상하고 껍데기 까져도 의연한/ 국숫집 상다리여 상다리 사이사이/ 꼬부라진 陰毛 몇 개가 만드는 상징적/ 지도여 온몸이 슬퍼서 아플 데가 없는/ 무척추 동물의 한가로움이여 기억의/ 패총이여 패총에서 솟아오른 대숲이여/ 늘어진 돼지 불알의 힘없는 주름처럼/ 잔잔하고 그윽한 동곡의 저녁이여,/ 돼지도 생전에 제 안뽕을 알았을까 (112 전문) 이 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상징적 지도”에 주목해 보자. 이 상징적 지도가 중요한 것은 이성복이 이를 통해 보편과 현상, 혹은 비가시적인 것과 가시적인 것이 형성하는 단순한 수직적, 형이상학적 위계 구도를, ‘생사성식(生死性食)’의 4방위로 구성되는 상징적 지도로 바꾸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복이 3부 「진흙천국」에서 현실의 지명을 빌어 “상징적 지도”(112) 속 어딘가에 지정하고 있는 ‘동곡’의 모습은 가히, 구체적이고 단단한 것들이 열어 보이는 내륙의 지평의 모습이라고 할 만하다. 한 시집에서 “촌로들의 손등”, “국숫집 상다리”, “꼬부라진 陰毛”, “안뽕”같은 것들이 “양달개비꽃”, “측백나무”, “현사시나무” 등과 이렇게까지 동등한 대접을 받았던 적이 있었던가? “삶이라는 연옥의 두 접경” 즉,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숨쉬는 ‘신비의 세계’와 아수라장 같은 ‘현실 풍경’을 “‘나’를 통해 하나로 잇”(p255)고자 하는 시인의 꿈은 “국숫집 상다리” 위에 놓인 “돼지 머리”, “안뽕”, “봉긋한 흰 밥”, “구운 꽁치”(111) 같은 것들로 치르는 고통의 ‘푸닥거리’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 ‘푸닥거리’에는 “돼지머리와/ 안뽕을 내오는 외지인 아줌마”, “오일장 설 때마다 쌀튀밥과/ 토끼 새끼 내다 파는 중절모 사내”, “식칼과 도끼 함께 벼리는 염소 수염/ 할배”, “삶은 황소개구리 육질을/ 심심찮게 찢는 젖통 큰 과부”(114) 등이 가담한다. ‘동곡’은 이 생활세계의 ‘강자’들이 “내장이 터진 생”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는 곳이다. 시인은, 생사성식의 원초적 기운이 성한 이 ‘마라’의 우듬지, ‘동곡’을 둘러보면서 몸이 지각하는 구체적인 것들로의 ‘물질’을 감행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슬픔 많은 생의 구체적 해(解)를 구해보고 있다. 시인은 ‘동곡’을 배경으로 한 일련의 시들 즉, 〈동곡엔 가지 마라〉,〈어떤 풍경은〉,〈매화산 어깨 빠지도록〉과 같은 시들에서, 우리의 감관에 와 닿으며 몸지각에 직접 호소하는 사물들과 생활 세계의 ‘강자’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관찰한다. 시인의 이런 관찰과 애정은 시인이 한 시에서 “백년 후 혹은 이백년 후”에 태어나도 변함없을 것이라고 한 현재의 “범성애적 충동”(45)과 관계 깊다. 몸지각의 전면적 개방을 요하는 이 범성애적 충동을 통해 구체적이고 단단한 것들을 답사해가며 세계의 내적 관계망을 형성해 갈 때, 비로소 시인은 비가시적인 보편을 향한 수직적 초월에 버금가는 가시적인 현상들의 수평적 ‘연대’를 이 세계 내에서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시인이 ‘몸부림’의 테두리 내에서 슬픔을 가누는 방식이다.
6. 생의 저인망식 구인
-속정 깊은 생이여
‘동곡’을 답사한 시인은 비로소 생에 대한 해석을 구한다. 저 많은 암컷들의 배는 하늘의 달처럼/ 구령도 없이 부풀고 꺼지고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122) 속정 깊은 생이여,/ 여느 궃긴 동네 잔치판 빼놓지 않는 마당발이여,/ 빠닥한 만 원짜리 몇 장 입에 물고/ 좋긴 한데, 쪼끔 부끄럽다고 호호 웃는 돼지 머리여 (121) 이성복은 이 시집의 뒷부분에서 백치임신과 가상임신이라는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이 시집의 말미에 그가 제시하고 있는, 이 시집의 지주 이미지격인 백치임신과 가상임신이란 생사성식의 4방위 안의 한 쪽 극단들의 이정표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데, 백치임신이란 생(生)과 성(性)의 기운이 성한 현장의 이정표이며 가상임신이란 죽음과 성의 현장의 이정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이 “암컷들의 배”처럼 “구령도 없이 부풀고 꺼지고를 되풀이하는 것”이라는 그의 이 최종 유권해석은 사물이 복잡하고도 슬프게 되는 곳까지 들여다보는 것을 존재의의로 삼은 시인이 “난감한 생”에 대처하는 자구책으로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이 유권해석은 형이상학적 위안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한 산문에서 이성복은 백치임신과 가상임신이라는 두 이미지가 “생의 완벽한 상징”(「작가의 편지」, 문학과 사회, 2003, 가을)이라고 전제한 뒤 생명이란 “병아리를 삼킨 뱀의 긴 몸뚱이처럼 부풀고 꺼지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같은 글)이라고 밝히고 있다. 형이상학적 탐문 속에서 생이 난감하고 고통에 찬 것이었다면, 생사성식의 기운 속에서 그것은 그저 부풀고 꺼지기를 반복하는 물집과 같은 것일 뿐이다. 시인이 이 시집의 3부에서 “동네 잔치판 빼놓치 않는 마당발”처럼 쉬지 않고 구체적인 것들로의 저인망식 ‘물질’을 감행하는 것은, 저 스스로 아무 목적없이 부풀고 꺼지기를 반복하는 삶을 구인하여 가까스로 “속정 깊은 생”으로 바꾸어 “진흙천국”에 대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것이 형이상학에 시위하는 시의 위의(威儀)임은 물론이다.
조강석
1969년 전북 전주 출생
1993년 연세대 영문학과 졸업
2004년 연세대 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연세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