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아일랜드 행 소포

by  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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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이
    아픈 남자
    목소리들(남자 목소리 여러 명, 앵커톤의 여자 목소리 하나)

    무 대

    밀항선 지하 창고 안

    짙은 어둠
    깊은 고요
    먼 세상의 별처럼 하나 둘 밝아오는 불빛
    풍경은 단조롭다
    무대 위의 인물 슬로우모션의 속도로 진행
    어린 누이 빈 유리어항을 가슴에 안고 콧노래를 부르며 등장
    박수를 치며 날아오르는 희고 작은 새들
    누이와 새, 춤추는 듯한 동작
    이때, 어수선하게 다가오는 여러 명의 발자국 소리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시끄러운 사이렌 경보음
    낙엽처럼 바닥으로 떨어지는 새들
    불안한 표정으로 죽은 새들을 유리어항 속에 주워 담는 누이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조명으로만 상황의 긴박감을 표현하여야 한다
    관객이 마치 귀머거리가 되어 눈과 몸으로만 느낄 수 있도록
    조명을 최대한 강렬하고 몽환적으로 비추어야 한다
    또한 혼란스러운 상황이 급격하게 진행될수록
    무대 위의 인물은 밧데리가 다 닳은 카세트 테잎처럼
    느릿느릿하고 서투른 몸짓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러다 갑자기 음악이 뚝 끊기듯 멈추어야 한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무대 위의 인물과 혼란을 비추는 조명 동시에 정지하면
    다시 짙은 어둠
    다시 깊은 고요
    이전과는 또 다른 불빛이 흐릿하게 밝아오면
    소리 없이 밀려오는 연기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저기 곳곳에 쌓여있는 나무 상자들
    나무 상자들이 가득 들어 찬 창고 안은 단순하게 어둠으로 처리하고
    다만 좁고 답답한 느낌이 들도록 두 사람은 계속 불편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서로 등을 보이고 나무 상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는 두 사람

    나 : (몸을 일으키며) 형, 들었어?
    형 : (잠꼬대하듯) 뭘
    나 :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
    형 : (무신경하게) 무슨 소리
    나 : 새!
    형 : (대답에 상관없이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
    나 : (홀린 듯이) 새 소리를 들었어
    형 : (쳐다보며) 빌어먹을. 새?
    나 : 응. 새
    형 : 글쎄, 난 못 들었다
    나 : 분명 새였어
    형 : 꿈을 꾼 거다
    나 : (허공을 가리키며) 저쪽 어디쯤이었는데
    형 : 넌 지금 정상이 아니야
    나 : 알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형 : (외면하며) 상한 밀가루 빵 때문에 네 머리에 탈이 난 거다
    나 : (약하게 반박) 형도 상한 빵을 먹었잖아
    형 : 빌어먹을. 나도 정상이 아니야
    나 : 난 밀가루 빵이 그렇게 빨리 상하는지 몰랐어. 어머니가 어렵게 구한 밀가루였는데
    형 : 음식은 상하게 되어있어. 한번 상하고 나면 모두 비슷한 맛을 내지
    나 :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틀림없이 새 소리를 들었어
    형 : 여긴 썩은 냄새만 진동하는 배 밑바닥일 뿐이다. 그런 건 없어. 정말 새였다고 해도 살아남긴 힘들어
    나 : 왜지?
    형 : 우리가 이 배를 탄지 얼마나 되었지
    나 : (두 손을 펴고 손가락 몇 개를 구부리다가) 오늘이 몇 번째 밤이더라. 아니 몇 번째 낮인가
    형 : 이곳은 산소도 부족하고 공기도 뜨거워. 우린 며칠동안 상한 밀가루 빵만 먹으며 배 밑바닥에서 생쥐처럼 숨어 지냈어.
    나 : (단추를 풀며) 난 배에 타던 순간부터 숨이 막혔어
    형 : (어둠을 바라보며) 그건 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살아있는 새가 있었다면 누군 가 벌써 잡아먹었을 거야. 저 사람들도 정상이 아니니까. 네가 해야 할 일은 잠을 자 는 것 뿐이야
    나 : (우울한 듯) 지금은 자지 않겠어
    형 : 시간을 보내기엔 잠이 제일이다
    나 : 어두운 곳에서는 잠이 안 와
    형 : 여태 그 버릇을 못 고쳤구나
    나 : 아직도 가끔 악몽에 시달리는 걸. 형들이 날 우물 속에 가두고 가버리는 꿈
    형 : 그건 장난이었어. 그땐 다들 어렸으니까.
    나 : 알아. 난 단지 이곳이 꼭 그 빈 집 우물 같아서 그래. 그때처럼 메마른 우물 속에 혼자 버려진 느낌이야
    형 : 이 어둠은 아주 잠깐이면 사라져. 우리가 진짜 무서워해야 할 어둠은 따로 있다 구
    나 : 그래도 여긴 정말 기분 나빠
    형 : 정상이 아니야. 이곳의 어둠조차도
    나 : (머리를 쥐어뜯는다) 머리가 아파. 형 말처럼 상한 빵을 너무 많이 먹었나봐. (손가락을 풀며) 하지만 다시 새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형 : 잊었어? 우린 지금 여행을 가는 게 아니다. 그런 얘긴 여기선 어울리지 않아
    나 : 가슴이 답답해. 무슨 말이든 해야겠어
    형 : 공기가 점점 줄고 있어. 말을 많이 하면 너만 힘들 뿐이야

    이때, 멀리
    어둠으로부터
    어수선하게 다가오는 여러 명의 발자국소리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시끄러운 사이렌 경보음
    조명의 격렬한 움직임으로 혼란스러운 무대 분위기 조성
    이 모든 것이 배 위에서 들려오는 사실적인 소리라기보다
    두 사람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나타내듯 다소 몽환적이게 처리해야 한다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가는 한차례의 소음
    두 사람, 처음엔 귀를 기울이며 동요의 몸짓을 보이지만 이내 숨죽이고 조용해지기를 기다린다
    다시 고요
    다시 어둠
    두 사람, 긴장된 표정이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느리게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나 : (형을 살핀다)
    형 : (불편하게 앉아 있다)
    나 : 형, 자?
    형 : 응
    나 : (우울하게) 난 잠이 안 와
    형 : 단속이 심하다고 들었다. 도착하기도전에 들켜 되돌아가기 싫으면 조용히 하고 잠이 나 자
    나 : (어깨를 웅크리고) 사실 난 오히려 가끔 저런 소리가 들려오는 게 좋아. 마치 이 배가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 같거든
    형 : 나한텐 배가 앓는 소리로 들릴 뿐이다. 상한 음식을 삼켰으니 앓을 수밖에
    나 : 이 배가 무엇을 삼켰지
    형 : 스물 다섯 명의 밀입국자. 배에 탄 순간부터 우린 소화불량을 일으키는 신세로 전락해버린 거야. (바닥에 드러누우며) 난 이제 자겠어. 더 이상 떠들 기운도 없 다
    나 : (체념한 듯) 형 말이 맞아. 역시 자는 게 낫겠지

    잠시 침묵
    두 사람 서로 등을 보이고 불편하게 누워있다
    숨쉬기가 괴롭다
    무척 더운 듯 계속해서 손등으로 땀을 훔치고 마른기침을 내뱉으며 몸을 뒤척인다
    이때, 새 우는 소리
    멀리서 바람처럼 지나간다

    나 : (놀라서) 형, 들었어?
    형 : 뭘
    나 : (귀를 기울이며) 저 소리
    형 : 무슨 소리
    나 : 새
    형 : 또 꿈을 꿨구나
    나 : 새소리였어
    형 : 꿈을 꾼 거야
    나 : (확신에 찬 듯) 분명히 들었어
    형 : 빌어먹을. 난 여기서 나가면 평생 다시는 밀가루 빵 따위는 먹지 않을 거다
    나 : 새가 어떻게 날아들어 왔을까
    형 : 난 새가 싫다
    나 : (문득 생각난 듯) 그 새는 어떻게 되었어?
    형 : 노인네와 같이 땅 속에서 상한 음식처럼 변해갔겠지
    나 : 두 날개가 없었지
    형 : 쓸모없는 새였어
    나 : 난 사실 형 할머니가 나타나면 도망부터 갔는걸. 다짜고짜 만나는 사람마다 욕을 늘어놓았잖아
    형 : 삭정이처럼 마른 노인네가 성질만 고약했었지
    나 : 그런데 날개가 없어 날지도 못하는 새한테 그토록 정성을 들일 줄이야. 항상 웃 옷에 조그만 주머니를 만들어 가슴에 품고 다니셨잖아
    형 : 노인네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새를
    나 : 알에서 나올 때부터 날개가 없었을 뿐이야
    형 : 그 새를 보고 있으면 중국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내 신세가 떠올라서 싫어
    나 : 세상엔 날지 못하는 새도 많아
    형 : 그 놈의 새 이야기는 더 이상 꺼내지마. 재수 없으니까
    나 : (우울하게) 하지만, 난, 분명
    형 : (단호하게) 넌 스무살이야. 그런 얘긴 그만 집어 치워
    나 : (생각난 듯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밀가루 빵을 꺼낸다) 난 걱정이 돼
    형 : (힐끗 쳐다보며) 어린애처럼. 벌써 집 생각이 나는 거야?
    나 : 사람이 지나치게 많이 울면 죽을 수도 있대. 아버지와 누이가 병이 들어 약 한번 못 먹어보고 그렇게 되었을 때부터 어머니는 늘 울기만 하셨어. 난 겁이 나. 어머니 몸 속의 물이 다 빠져 나갈까봐
    형 : 네 어머닌 잘 지내실 꺼다
    나 : (밝은 표정) 형, 아일랜드엔 뭐든 있겠지?
    형 : 글쎄
    나 : 그곳은 잘 사는 곳이니까 분명 눈물이 멈추는 약을 구할 수 있을거야
    형 : 넌 쓸모없는 생각을 지나치게 많이 해. 잘 들어. 아일랜드에 가면 우린 불법 체 류자가 될 뿐이야. 난 집 생각 따위는 벌써 지워 버렸다. 5년만 버티면 돼. 5년. 그땐 식당 주인이 되어 있을 거다
    나 : (슬그머니 밀가루 빵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형, 또 내가 싫어진 거지
    형 : 너야말로 정말 이곳에 새가 있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
    나 : 난 분명히 들었어
    형 : 잘못 들었어
    나 : 고장난 환풍기 쪽에서 들려왔었어
    형 : 파도 소리야
    나 : 새였어
    형 : (화난 듯이) 뜨거운 공기 뿐이야
    나 : 주위를 한번 둘러봐. 새가 보일지도 모르잖아
    형 : (외면하며) 빌어먹을, 난 원래 밤눈이 어두워
    나 : (눈을 크게 뜨고) 난 보고 말겠어
    형 : 지금까지 쥐새끼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나 : (가부좌 자세로 고쳐 앉아) 다시 듣고 말겠어
    형 : (등을 보이며 드러눕는다) 난 잔다

    잠시 침묵
    이때, 가까운 곳에서 휘파람 소리
    단조롭게
    가늘게
    위태롭게
    두 사람 서로 마주보며 놀란다

    나 : (주위를 둘러보며) 형, 들었어?
    형 : (당황하여) 꿈이야
    나 : 들었구나
    형 : 난 아무 말도 않겠어
    나 : 그런데 달라
    형 : 같은 꿈을 꾼 거야
    나 : 이상해
    형 : 빌어먹을. 정상이 아니니까
    나 : 방금 들은 건 새 소리가 아니야. 지금도 들리잖아
    형 : 아주 나쁜 꿈이야
    나 : 형, 저기 좀 봐
    형 : 난 보이지 않아. 보지 않겠어
    나 : (손을 들어 가리키며) 저기
    형 : (잠꼬대 하듯) 나빠, 아주 나빠
    나 : 누군가 울고 있어
    형 : (고개를 돌려 확인하며) 저 사람도 나쁜 꿈을 꾸는 모양이지
    나 : 그게 아니야

    두 사람 다가가면 한 남자 누워있다
    조명이 켜지면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듯 남자를 보여준다
    남자 몸을 부들부들 떨며 휘파람을 분다
    그러다 생각난 듯 다시 흐느낀다

    나 : (남자의 몸을 흔들며) 이봐요, 괜찮아요?
    형 : 이봐
    아픈남자 (휘파람을 멈추고 고통스럽게) 숨, 숨이 막혀
    나 : (남자의 이마를 만지다가 놀란다) 형, 어떡하지? 이마가 굉장히 뜨거워
    형 : 어쩔 수 없지. 배가 도착할 때까지 견디길 바라는 수밖에
    나 : 약 가진 것 있어?
    형 : (어깨를 으쓱하며)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나 : (일어서며) 기다려 봐
    형 : (큰소리로) 어디 가는 거야

    나, 대답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잠시 후 지친 표정으로 나타난다

    나 : (풀이 죽어) 약은 구하지 못했어. 다들 상한 음식만 갖고 있었어
    형 : 또 쓸모없는 짓을 했구나
    나 : 저 위엔 약이 있을 테지
    형 : (굳은 표정) 너, 설마
    나 : 여길 나가야겠어
    형 : 벌써 잊었어? 그 작자가 우리를 짐짝처럼 이곳에 몰아 넣으며 했던 얘기
    나 : 그 작자 입 냄새까지 기억나
    형 : 당신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절대로 밖으로 나와선 안 된다. 배가 도착할 때까지는 꼼짝 말고 숨어 있어야 한다. 들키게 되면 육지에 발을 내딛지도 못하고 다시 강제 송환 될 것이다
    나 : 그리고 많은 돈을 받아 챙겼지
    형 : 난 빚을 많이 졌어. 아일랜드에 가서 여러 사람의 목숨과 바꾼 돈을 벌어야 해
    나 : 알아. 목숨을 되찾아야지. 그건 이 사람도 마찬가지야
    형 : 우린 나무상자일 뿐이야. 누가 꺼내 주기 전에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어
    나 : 그 사람을 찾아야겠어. 나가서 말을 하겠어. 설마 바다 속에 빠뜨리진 않겠지
    형 : 더 이상 쓸모없는 짓 말아
    나 : 이 사람에겐 맑은 공기가 필요해
    형 : 나무상자는 보고 듣고 느껴서도 안돼
    나 : (가슴을 움켜쥐며) 이대로 있다가 숨막혀 죽을지도 몰라. 형도, 나도
    형 : 아니, 나무 상자보다 훨씬 못해
    나 : (상자를 발로 찬다) 우린 상자가 아냐!
    형 : (상자를 앞으로 끌어당긴다) 여기 도장 찍힌 거 보여?
    나 : 그건 가짜잖아
    형 : 물론 가짜지. 그런데 넌 이런 도장 가지고 있어?
    나 : (씁쓸히 웃으며 빈손을 내보인다) 아니
    형 : 이런 도장이라도 찍혀 있으면 최소한 속일 수는 있겠지
    나 : 누가 우리에게 그런 걸
    형 : 아무도 우리에게 도장을 찍어주지 않아
    나 : 어딜 가든지 도장만 찍히면 안심일텐데
    형 : (똑바로 쳐다보며) 감나무 집 영감 큰아들 기억나?
    나 : 그 집 영감이 매일 자랑했었던 큰아들?
    형 : 그래
    나 : 한국에 갔다고 들었어
    형 : 그런데 네가 모르는 게 하나 있다
    나 : (고개를 들며) 내가 모르는 것?
    형 : 그 집 큰아들이 얼마 전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 왔어
    나 : 떠난 지 겨우 일년 밖에 안되었잖아
    형 : 죽어 돌아왔어
    나 : 그 집 큰아들이?
    형 : 불법 때문이었지
    나 : 불법?
    형 : 종이 공장에서 일하다 검은 피를 토했다더군
    나 : 병원에 갔겠군
    형 : (고개를 저으며) 가지 못했어
    나 : 소문에 많은 돈을 벌었다던데
    형 : 병원에 가면 불법 체류자를 고용한게 들통나게 되고, 그럼 벌금을 물게 되니까 사장이 말린 거지
    나 : (믿지 못하는 표정) 이해가 안돼
    형 : 감나무 집 영감이 직접 유해를 전해 받았다더라
    나 : (중얼거리듯) 난 사실 한국에 가고 싶었어. 늘 궁금했었거든
    형 : 그는 도장을 받았어. 작은 상자 속에 갇힌 채로
    나 : 다시 자유를 찾은 거야
    형 : (우울하게) 가장 쓸모없는 자유지.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유
    나 :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아일랜드는 다를꺼야
    형 : 그러니까 내 말은 여기서 나갈 생각 따윈 하지도 말라는 거야
    사이
    남자, 부들부들 떨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두 사람 놀라서 쳐다본다
    나, 남자를 부축한다

    아픈남자 (쉰 목소리로) 목, 목이 말라
    나 : (물통을 들고) 어서 마셔요

    남자, 목을 뒤로 젖혀 물통의 물을 마시지만 이내 바닥이 난다
    두 사람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남자의 모습을 초조하게 바라본다

    아픈남자 (물통을 내려놓으며) 부, 부탁이 있어
    형 : 말해
    아픈남자 (윗 주머니에서 종이를 천천히 꺼내며) 우리 집 주소야
    나 : (쳐다보며) 이건 왜
    아픈남자 (남자 눈가의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혹시 내가 잘못 되면 대신 편지를 써 줄 수 있소. 잘 있다고... 무사히 도착했다고... 어머닌 글을 모르니까 내 글씨 가 아니어도 알아채지 못하실 테니까
    나 : 그런 말 말아요
    아픈남자 부탁이오
    나 : 당신은 괜찮아요
    아픈남자 내게서 소식이 오지 않으면 어머닌 매일 밤 부서진 의자처럼 쪼그리고 앉은 채 로 주무실 거요
    형 : 기운을 내요
    아픈남자 저, 소리. 저 소리
    나 : (바짝 다가가) 무슨, 소리요?
    아픈남자 (눈을 감고 휘파람을 분다)
    형 : (고개를 저으며) 정상이 아니야
    아픈남자 뜨거운 공기 사이로 (손가락으로 어둠을 가리키며) 저, 저기서 들려. 어릴 적 어 머니 무릎에 누워 들었던 소리. 저기서, 그 소리가 (말을 잇지 못한다)

    두 사람, 남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본다
    어둠 사이로 굳게 닫힌 철문만 보일 뿐이다
    흐릿한 불빛으로 어느 새 연기가 자욱하다
    어둠 속에서 몇몇 사람들 비틀거리며 기어 나온다
    배우 없이 목소리로 처리해도 좋다
    여기저기서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
    두 사람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고 손으로 입을 막으며 힘들어한다
    남자, 어둠을 가리키던 손가락을 뻣뻣하게 세운 채 몸을 부들부들 떤다
    떨면서 마른기침을 격렬하게 토해내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나 : (몸을 기울여) 이봐요!
    형 : (뺨을 때리며) 이봐, 정신 차려!
    나 : (결심한 듯) 그 사람을 부르겠어
    형 : (노려보며) 그만 해
    나 : 이대로 있으면 모두 위험할지도 몰라
    형 : 바깥도 마찬가지야
    나 : 내 얼굴을 좀 봐. 찐 감자처럼 푹 익어 버렸다구
    형 : 말했잖아. 난 밤눈이 어둡다고
    나 : (애원하듯) 난 우리가 걱정 돼. 모든 게 다 정상이 아니야
    형 : 빌어먹을!
    나 : 여기서 나가겠어!
    형 : (나가려는 나를 붙잡으며) 안돼!
    나 : (뿌리치며) 차가운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싶어. 상하지 않은 음식과 물도 필요해

    사이
    나, 철문으로 다가가 두 주먹으로 세차게 두드린다
    철문 꿈쩍도 하지 않는다
    형, 뭐가 알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가만히 바라 볼 뿐이다
    철문은 보이지 않아도 된다
    무대의 한쪽 벽을 이용해도 좋다
    인물의 동작에 맞추어 철문 두드리는 소리만 들려주어도 된다
    어둠 자체가
    가득 쌓여 있는 상자이며
    굳게 닫힌 철문이며
    산소가 부족한
    고온의 창고 안이다
    나의 행동을 말리는 상대는 목소리나 배우 둘 중 상관없다
    여기서부터 무대 위의 인물들은 졸린 듯 숨이 찬 듯 호흡이 가쁜 듯 말해야 한다
    나는 문을 두드리고 있고 형은 자신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목소리1 이봐, 미쳤어?
    목소리2 그 놈은 틀렸어. 하지만 우린 달라. 끝까지 살아남아야 해
    목소리3 곧 배가 도착할거요. 벌써 일주일이 넘었으니까.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나 : (무시하고 계속 문을 두드린다)
    형 : (아무도 듣지 못할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소용없다
    나 : (어둡게) 문이 꿈쩍도 안 해
    형 : 여긴 배 밑바닥이야
    나 : (문을 응시하며) 우린, 갇혔어
    형 : 여긴 출입금지 구역이야
    나 : (기운이 빠져 주저앉는다) 그 작자 이 배의 갑판장이라고 그랬지. 그럼 다 알고 있을 것 아냐
    형 : 알고 있겠지
    나 : 고장난 환풍기도
    형 : 뜨거운 공기도
    나 : 숨막히는 어둠도
    형 : 전부 다
    나 : (부정하며) 지금쯤 우리를 걱정하고 있을거야
    형 : (굳은 표정) 그는 오지 않아
    나 : (호흡이 가쁘다) 차라리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했으면 좋겠어.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어
    형 : (숨이 차 가슴을 쥐어뜯으며) 여긴, 아무도, 오지 않아
    나 : (점점 더 호흡이 가쁜 듯) 그럼, 저, 사람을, 그냥, 놔 둘 거야?
    형 :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신경질 적으로 닦으며) 빌어먹을! 빌어먹을!
    나 : (비틀거리며) 시, 심장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
    형 : (뭔가 대답하려다 느릿느릿 상자를 끌어안는다) 기다려. 잠깐이면 아일랜드에 도착 해
    나 : (상자를 밀치며) 우, 우린 상자가 아, 아냐. 우린, 살아있어
    형 : (다시 상자를 잡는다)
    나 : (상자를 발로 찬다)
    형 : (기어가 상자를 잡으려다 그대로 쓰러진다)
    나 : (놀란다) 형, 형!

    여기서부터 다시 슬로우모션으로 모든 것이 진행
    나, 쓰러진 형을 흔들어 깨운다
    사람들, 아우성을 내지른다
    나, 굳게 닫혀 있는 철문으로 달려가 두 주먹으로 세차게 두드린다
    처음의 상황과 비슷하다
    급작스럽고 혼란스러울수록 무대 위의 인물은 더욱 서툴고 느릿느릿해져야 한다
    조명 또한 마찬가지이다
    느리지만 최대한 강렬한 느낌으로 무대의 혼란을 보여주어야 한다
    여러 명의 다급한 발자국 소리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사이렌 경보음
    서서히 다가와 자욱하게 깔리는 연기
    어느 순간부터 모든 소리는 정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극도의 혼란과 소음은 오히려 정적과 통한다
    따라서 관객들은 마치 귀머거리가 된 듯한 착각이 일도록 해야 한다
    무대 위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눈과 몸으로만 느낄 수 있도록
    조명으로만
    최대한 고요하게
    최대한 격렬하게
    표현해야 한다
    철문을 두드리던 나, 어느새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다
    다시 고요
    다시 어둠
    잠시 침묵
    가까운 곳에서 가늘고 투명한 노랫소리 들려온다
    먼 세상의 별처럼 하나 둘 밝아오는 불빛
    따뜻한 조명 아래 어린 누이 희고 작은 새 한 마리를 가슴에 안고 서 있다
    나,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꿈꾸듯 누이를 바라본다
    여기서부터 무대 위의 인물들 짧고 조용하고 잔잔하게 움직이고 말할 것

    누이 : 아, 드디어 깨어났다
    나 : (꿈꾸듯 일어난다)
    누이 : 오빠, 나야
    나 : (흠칫 놀라며) 네가 어떻게
    누이 : 보고 싶어서
    나 : (자신의 볼을 꼬집는다)
    누이 : (한 손을 내밀며) 자
    나 : (잡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상한 밀가루 빵 때문에 정말로 머리가 이상해 진 건가
    누이 : (보다가 가볍게 새를 날린다)

    희고 작은 새
    두 사람 머리 위에서 박수를 치며 난다
    두 사람, 새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는다
    나선형을 그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새

    나 : (누이를 바라보며) 새야
    누이 : (나를 바라보며) 새야
    나 : 내가 잘 못 본 거니?
    누이 : (고개를 젓는다) 아니
    나 : (말을 잇지 못하고) 하, 하지만 넌, 넌, 주, 죽
    누이 : (손가락을 세워 자신의 입술에 대고) 쉿!
    나 : (다시 자신의 볼을 꼬집는다)
    누이 : 보고 싶었어. 오빠
    나 : (쳐다보다가) 이젠 안 아프니?
    누이 : (고개를 젓는다) 안 아파, 가슴
    나 : 약을 안 먹었는데도?
    누이 :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나 : 잘됐구나
    누이 : (웃는다)
    나 : 난, (머뭇거리다가) 아일랜드에 가는 중이야
    누이 :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나 : 돈을 많이 벌꺼다
    누이 : (역시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나 : 어머니에게 드릴 약도 살꺼야. 눈물이 멈추는 약
    누이 : (슬프게 웃는다)
    나 : 난 할 일이 많아
    누이 : 그곳은 멀어
    나 : 곧 배가 아일랜드에 도착 할 꺼야
    누이 : (말이 없다)
    나 : (웃으며) 걱정하지마
    누이 : (슬프게 웃는다)
    나 : (자신 있게) 오빤 이제 스무 살이잖아
    누이 : 그곳은 멀어
    나 : 거의 다 왔어
    누이 : (고개를 저으며) 시간이 없어
    나 : 배는 곧 도착해
    누이 : (슬프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때,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새
    두 사람을 향해 날아온다
    두 사람 새를 눈으로 쫓는다
    누이는 가만히 서 있고 나는 새의 움직임을 쫓아 꿈을 꾸듯 움직인다
    따라 가다보면 벽이다
    멍하니 벽을 바라본다
    여기서의 벽은 어둠이고 철문이고 나무 상자이고 허공이다

    형 : (잠에서 깨어난 듯 두리번거리며) 어, 어디 있는 거야
    목소리1 어떻게 된 거지?
    목소리2 배가 도착 한 건가
    목소리3 도대체 우린 언제 나가는 거야

    형이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면 사람들, 하나 둘 웅성대며 일어난다
    사람들은 목소리만으로 처리해도 좋다
    형의 모습 보인다
    형에게 다가가려다 문득 뒤돌아보면 누이는 흐릿하게 사라지고 있다
    누이의 퇴장은 조명으로 처리한다
    이때 누이를 비추는 조명은 몽환적인 느낌이 들도록
    여러 차례 깜빡이면서
    그러다가 서서히
    숨을 내 쉬듯 나가야 한다
    나, 연기처럼 사라지는 누이를 향해 팔을 뻗다가 그대로 멈춰 선다
    누이 완전히 사라지면 나와 형의 얼굴에 차가운 조명 비춘다
    여기서부터 이전과는 다른 색의 조명이어야 한다
    고온과 산소부족으로 무대 위의 인물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다
    그 사실을 관객이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도록
    차갑고 희미하고 딱딱하게 표현해야 한다
    나, 멍하니 서 있으면 어느새 형이 다가와 있다

    형 : (어깨에 손을 올리며) 괜찮아?
    나 : (꿈을 깨듯 흠칫 놀라며) 응? 응
    형 : 내가 언제 잠이 들었지?
    나 : (걱정되는 듯) 형은 어때?
    형 : (머리를 만지며) 빌어먹을. 아직도 머리가 아파

    이때, 육중한 소리를 내며 철문이 열린다
    두 사람 동시에 같은 방향을 쳐다본다
    여러 갈래의 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온다
    두 사람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사이 나 : (놀라며) 문이!
    형 : (눈을 가렸던 손을 천천히 내리며) 아일랜드야!
    나 : (신이 나서) 사람들이 나가고 있어!
    형 : (재촉하며) 우리도 어서 나가자

    빛을 향해 다가가는 두 사람
    이때 무대 위의 인물은 처음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조심스러워야 한다
    또한 밖으로 나가는 인물들에 대해 관객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킬 수 있도록 조명은 서서히 꺼져야 한다
    배에서 완전히 내려 다른 공간에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무대 위의 인물들은 반대 편 방향에서 걸어 나온다
    두 사람 걸어 나오면
    뱃고동 소리
    바다새 소리
    항구임을 알 수 있는 활기찬 소리들 한차례 훑고 지나간다
    두 사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관객들은 무대 위 인물들의 시선과 표정을 통해 항구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어야 한다

    나 : (손을 들어 가리키며) 나, 나무 상자야
    형 : (같은 곳을 쳐다본다)
    나 : (여전히 같은 곳을 쳐다보며) 저 대머리가 서류에 뭘 적는데?
    형 : 상자들이 갈 곳을 확인하는 거겠지
    나 : (손을 확성기 모양으로 둥글게 말아 입가에 대고) 상자들아! 잘 가거라!
    형 : (실려나가는 상자를 바라보며) 상자는 잊어버려
    나 : (고개를 돌려) 그런데 우린 어디로 가는 거야
    형 : (정신이 든 듯) 브로커가 오기로 되어 있어. 그를 기다려야 해
    나 : 여기가 아일랜드가 맞는거야?
    형 : 그, 글쎄. 나도 모르겠다
    나 : (그다지 멀지 않은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저 사람들한테 한번 물어볼까
    형 : 관둬. 말도 통하지 않을텐데
    나 : (생각 난 듯) 그들은 어디 있지. 배에 함께 타고 있었던
    형 : 그들은 (말하다가 멈춘다. 뭔가 이상하다.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려 뭔가를 찾는 시늉)
    나 : (함께 찾는 시늉)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아
    형 : 기다려. 곧 다들 모일테니
    나 : (우울하게) 우리가 정말 아일랜드에 온 걸까
    형 : (초조한 듯) 상자를 실어내는 걸 봤잖아
    나 : (그제서야 밝은 표정) 맞아, 전부 아일랜드 행 도장이 찍혀 있었지
    형 : 그랬지
    나 : 형
    형 : 왜
    나 : 이제 숨막히지 않아서 살 것 같아
    형 : 어둡지도 않지
    나 : 뜨겁지도 않고
    형 : 나쁜 꿈에서 깨어 난 거야
    나 : 난 이젠 밝은 곳에서만 잠을 잘 꺼야
    형 : 빌어먹을 밀가루 빵 따윈 절대로 먹지 않을 꺼다
    나 : 바람이 불고 있어

    두 사람 온 몸으로 바람을 느끼려는 듯 그대로 서서 눈을 감는다
    그러다 다시 눈을 뜨고 불안과 호기심에 찬 시선으로 주변을 쳐다본다
    어디선가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듯 지직거리는 소음 들려온다
    음악소리, 웃음소리, 빠른 말투의 이국적인 말소리가 뒤엉킨 잡음이 들쑥날쑥이다
    마침내 제대로 잡힌 주파수
    뉴스 채널이다
    하이톤의 여자 앵커 목소리
    단, 무대 위의 두 사람은 라디오 소리를 듣지 못한다
    관객들만 라디오 청취가 가능하다
    관객들이 라디오 뉴스를 듣는 동안 무대 위의 두 사람은 자신들의 행동에만 몰입해야 한다
    손을 이마에 대고 먼 곳을 바라보는 시늉을 하고
    머리를 쥐어박으며 서로 몸 장난을 하고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는 등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이 들도록 표현해야 한다

    목소리 마지막으로 사고 소식입니다. 오늘 아침 여덟 시경 아일랜드 항구에 지난 10일 중국에서 출발한 밀항선이 적발되었습니다. 이 배의 지하 창고 안에는 중국 국적을 가진 스물 다섯명의 조선족과 중국인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밀입국자로 전원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해양 경찰 당국은 이들의 사망원인을 고온과 산소부족으 로 전해왔습니다. 다음은 오늘의 날씨입니다

    나 : (가까운 곳에서 뭔가를 발견한 듯 다급하게) 형, 저길 봐!
    형 : 뭘
    나 : (답답하다) 저기!
    형 : (턱짓으로) 저 대머리?
    나 : (입에 침이 말라서) 아니, 대머리가 방금 손으로 툭툭 치던 나무상자
    형 : 그건 왜
    나 : 새!
    형 : 새?
    나 :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무상자에 뚫린 구멍에서 새가 빠져 나왔어
    형 : (고개를 들며) 어? 저건

    두 사람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나 : 새야
    형 : 빌어먹을. 정말 새로구나
    나 : 우리와 함께 배에 탔던 새야
    형 : 저 새가, 어떻게 살아 남았을까

    두 사람의 머리위로 희고 작은 새가 나선형을 그리며 난다
    새 우는 소리가 휘파람소리를 닮았다
    무대 위의 인물은 무대 위의 새를 직접적으로 보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관객들에게 보이지 않는 자신들만의 새를 보고 있다
    무대 위의 새는 오히려 관객들에게 잘 보이도록 조명을 비추어야 한다
    따라서 관객들이 보는 새와
    무대 위의 인물들이 보는 새는
    같은 새일 수도 있고
    다른 새일 수도 있다
    이오

    이오

    본명 오주희

    1972년 부산 출생

    2001년 서울예술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3년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1년 명지대 백마문학상 소설부문 당선

    2002년 중앙대 의혈창작문학상 소설부문 당선

  • 시적 언어로 문학-연극성 갖춰

    한태숙(연출가)
    박근형(연출가)



    70편이 넘는 희곡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당장 무대에 올려도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한 우수한 작품이 여럿 보였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전개가 빠르고 재치 있는 작품이 많았지만 삶에 대한 깊은 성찰보다는 시트콤적인 가벼움으로 일관한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세상살이의 어려움 때문인지 실업자의 좌절이나 생활고의 어려움을 얘기하는 예비 작가도 많았다.

    그 중 이병일의 ‘견딜 수 없네’와 이진의의 ‘춘설’, 그리고 이오의 ‘아일랜드행 소포’를 놓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견딜 수 없네’는 저승사자의 오판으로 인해 벌어지는 생사의 갈림길에 선 부모의 심정을 잘 드러낸 수작으로, 자칫 상투적으로 흐를 수 있는 이야기를 아기자기하게 풀어 따뜻한 부모애를 느낄 수 있게 한 희곡이었다.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깊이 있게 잘 나타나 있으나 참신성이 부족했다.

    ‘춘설’은 감칠맛 나는 대사와 섬세한 여성심리로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모녀관계를 절실히 그려냈다. 인생의 깊이와 연극적 상황을 잘 포착했으나 딸이 집을 떠나는 상황이 좀더 구체적으로 묘사됐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남았다.

    ‘아일랜드행 소포’는 시적이며 함축적인 언어로 문학성과 연극성을 두루 갖추었으며 분단 조국의 오늘의 현실과 역사를 은유적으로 잘 표현했다. 살아남기 위한 사투 속에 구원에 대한 상징성을 ‘새’를 통해 잘 나타냈으며 죽음과 삶에 대한 일루전을 극대화해 나타내고 있다. 갑작스러운 누나의 등장이 매끄럽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 이오

    이오

    본명 오주희

    1972년 부산 출생

    2001년 서울예술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3년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1년 명지대 백마문학상 소설부문 당선

    2002년 중앙대 의혈창작문학상 소설부문 당선

    남산으로 오르는 외진 산책길. 그곳에는 나만 아는 7번 가로등이 있다. 최초의 소설을 완성하던 날 불이 켜지지 않는 7번 가로등을 발견했고 그 아래에 돌멩이 하나를 심어놓았다.

    그 이후로 연애에 실패했을 때에도, 방을 구하지 못해 학교 양호실에서 몰래 잠을 자야 했을 때에도, 돈이 너무 없어 한 계절 내내 아침 점심을 굶었을 때에도, 수업을 빼먹고 혼자 낙엽을 줍다가도, 세 개 이상의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항상 글 쓸 시간에 쫓겨야 했을 때에도, 지하방으로 이사간 지 두 달 만에 수재민이 되었을 때에도 나는 잊지 않고 7번 가로등 아래 돌멩이를 심어놓았다.

    돌멩이를 심으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던 남자의 심정으로 나는 나와 약속한 것이 있다. 명동을 떠난 후로 오랫동안 7번 가로등을 찾지 못했다. 이제 나는 그곳에 또 하나의 비밀을 심어 놓을 생각이다.

    늘 그리운 서울예대 선생님, 성질 나쁜 애인, 문학의 바지자락 잡고 절대 놓아주지 말라고 일러주신 박범신 선생님, 부족한 글에 마음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성질 나쁜 애인을 가진 여러 문우들, 지하철 1호선에 사는 모르는 남자 용이, 그리고 가족들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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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사평
  • 당선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