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아닌 곳에서만 가는 길이 보인다고
외발 수레바퀴 끌고 오는 눈발 따라
그림자 뒷걸음치며 마른풀을 밟는다.
여기 아무도 모른 낯선 세상에 내가 있듯
악보에는 없는 음표 호흡을 조절하며
얼음장 빗금 친 파도 겨울 바다를 건넌다.
앞선 사람 대신 좁혀오는 바람처럼
지상의 문을 여는 미지의 열쇠구멍 속에
발자국 찍힌 눈꽃이 꽃망울을 터뜨린다.
이석구
1960년 충남 청양 출생
성균관대 한문학과와 교육대학원 졸업
2004 ‘월간문학’ 신인상 시조부문 당선
현재 안양 백영고 교사
동백을 현대적 이미지로 빚어
이근배 (시조시인)
정일근 (시조시인)
시조를 쓰는 것은 시의 정수를 찾는 일이다. 시 속의 시를 찾는 일이다. 시조부문 응모 작품에는 대학생부터 80대 할아버지까지 그 열기가 뜨거웠다. 세 차례의 심사를 거치며 다섯 작품이 최종심에 남았다.
‘안단티노 알레그로토로’(정행년)와 ‘소록도 해돋이’(이태호)는 소재와 주제의 신선함이 뛰어났으나 명품을 만든다는 정성이 다소 부족했다. 시조시를 빚는 자신감과 운율을 휘어잡는 힘을 가지길 부탁한다.
‘이중섭 미술관’(김희천)은 보기 드문 건강한 작품이었다. 제주의 바다 내음과 화가 이중섭의 세계가 건강하게 표현되어 좋은 점수를 얻었으나 운율이 불안했다. 징검다리가 놓인 강을 편안하게 건너는 것이 시조의 운율이라면 자연스러운 보폭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징검다리에 대해 좀더 고민하길 바란다.
‘나비경첩’(이윤호)과 ‘마량리 동백’(이석구)은 어떤 작품을 당선작으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를 오래 고민하게 했다. ‘나비경첩’은 어머니가 남긴 제기함 나비경첩을 통해 아름다운 사모곡을 빚었고 ‘마량리 동백’은 동백을 현대적인 이미지로 빚어냈다.
‘나비경첩’은 너무나 익숙한 작품이었다. 그 익숙함이 신인을 뽑는 자리에서는 작은 흠이 되고 말았다. ‘마량리 동백’도 첫째, 둘째 수의 자연스러운 호흡법과는 달리 셋째 수에서 호흡이 흔들렸다.
신춘문예는 완성된 작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신인을 찾는 일이기에 ‘마량리 동백’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함께 투고한 작품에서 보여준 다양한 실험정신이 당선의 영광을 받는 데 가산점이 되었음을 밝힌다. 시의 정수를 뽑아 시조시를 빚는 명품 명장으로 남길 바란다.
이석구
1960년 충남 청양 출생
성균관대 한문학과와 교육대학원 졸업
2004 ‘월간문학’ 신인상 시조부문 당선
현재 안양 백영고 교사
원고를 보내고 며칠 동안 아무런 생각 없이 보내다 당선 통보 전화를 받았다. 망치로 뒤통수 한 대 얻어맞고 명치끝에 무엇인가 울컥 얹힌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아내, 두 딸이 생각났다. 항상 죄송하고 고마운 어머니, 감사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불평과 불만을 내색하지 않고 맨 먼저 원고를 읽고 평해 준 아내가 고맙다. 두 딸들아!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길을 걸어왔다. 늘 길 위에서 나는 곧은길로만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돌아보면 그 길은 직선이 아니었다. 그러나 햇빛은 굴곡에 상관없이 모든 길 위에 고루고루 빛을 내려주고 있었다. 그 빛을 따라서 앞으로도 길을 걸어가야 한다.
내 타고난 성격 탓이 크지만, 시조는 항상 흥에 취해 혼자 쓰고 며칠 뒤에 원고를 들여다보고 지우고 버리는 작업이었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시구를 얻더라도 제한된 글자에 운율을 맞추고 현대적 감각을 더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단어 하나에 의미를 찾다가 단 한 줄뿐인 글을 쓰는 더딘 걸음을 하는 발자국이 될지라도 그 길을 직선으로 여기며 앞만 보고 걷겠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동아일보와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