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 속에서 정체성은 유린당한다. 한 나라, 한 개인의 정체성은 스스로의 언어를 포기한 채 받아들인 또 다른 언어의 어눌함으로 규정되어 그들 각각의 국가적 정체성을 따지기 어렵게 만든다. 그들 입으로 어디에서 왔다고 말하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방가’(김인권)의 출신지인 ‘부탄’은 바로 그러한 정체성의 무의미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적 지명일 뿐이다. 그들은 오직 자신의 가치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 한다. 단지 그 뿐이다.
이 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이다. 그들의 정체성은 일단 그렇게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공론화 할 수 없다. “이 우즈벡 새끼가” 라는 ‘마이클’(에숀쿠로브 팔비스)에 대한 ‘알리’(칸 모하마드 아사두즈만)의 폭언은 그들의 정체성이 무의미를 넘어 폄하의 모습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방가를 바라보는 ‘배타적’ 시선은 그래서 누가 누구를 배타적으로 보는 것인지 혼동된다. 이 혼동은 서서히 ‘그들과 우리의 관계’에서 ‘나와 우리의 관계’로 진행될 수 있게 만든다. 심지어 용철(김정태)조차 ‘방태식’(김인권)과의 관계를 끝까지 숨겨야 하며, ‘장미’(신현빈)가 한국에서 낳은 아들조차 한국 사람임을 인정받지 못한다. 이런 슬픈 연결 고리는 존재와 정체성의 경계에서 ‘그들’과 ‘우리’를 구분 짓지 못하는, 아니 구분 지을 수 없는 암세포의 전이처럼 우리와 그들을 아프게 한다.
이 아픔은 “돈벌러 왔지 일하려고 왔냐?”라는 ‘마이클’의 말처럼 노동력과 ‘임금(wage)’의 관계 역시 명확하게 틀 짓지 못하게 한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임금은 노동을 망각하게 하고, 그 노동은 우리의 존재가치를 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자신들이 ‘개새끼’로 분류된다는 사실 조차 무감각하게 만든다. ‘개새끼’는 망각된 정체성을 지칭하는 극단적 이름이다. 그래서 ‘여기서 일하려면 이런 말에 기분 나빠하지 마’ 라는 ‘장미’의 충고는 우리가 받는 임금과 자본이 우리의 정체성을 얼마나 무가치하게 만들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방가’는 이미 이러한 사실을 초월해 있다. 그가 한국인으로서 한국사회에 설 곳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화기 너머에 계시는 어머니에게 ‘방태식’이 해줄 수 있는 말은 실질적으로 모두 가상이며 허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정체성마저 가상으로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노동력으로 자신의 정체성이 규정되는 현대사회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겪어야하는 과정을 내밀하게 묘사한다. 현대 사회에서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는 자기를 가상으로 규정하는 임의적 정체성으로만 넘쳐날 뿐 나의 존재가치를 드러나도록 만들어주는 요소는 하나도 없다. 노동력에 의해 규정되는 임의적인 정체성이 비단, 방가와 ‘그들’의 문제만은 아닌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가의 가상의 정체성, 임의적 정체성은 오히려 한국인이라는 실체적 정체성과 만났을 때 빛을 발한다. 부탄 출신 외국인이라는 임의적(가상) 정체성으로 인하여 방가는 한국어 강의를 할 수 있게 되고, 외국인 노동자들의 대변인 노릇을 할 수 있게 된다. 그가 제공하는 노동력은 역설적이게도 정체성을 망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방가는 사회에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방가는 한국 땅을 밟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간다.
이것은 결국 노동 제공으로 규정되는 우리의 정체성의 문제는 바로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가상 또는 임의적 정체성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제공하는 노동력은 나의 진정한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진심으로 고민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정체성은 가상의 배타적 경계를 벗어나 실존의 문제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방가와 방태식은 우리에게 바로 그 문제를 짚어주는 슬픈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지승학
1974년 경기 의정부 출생
대진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홍익대 대학원 사진학 석사
고려대 대학원 영상문화학과 박사과정 수료
이상용 영화평론가
영화평론 응모작은 2010년에 소개된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다수의 평문이 ‘시’,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악마를 보았다’, ‘옥희의 영화’를 거론하였다. 이외에 박찬욱,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포함하면 젊은 평론가들이 비평적 경배를 바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짐작케 한다. 하지만, 상당수의 글은 한두 편의 영화를 단락으로 연결하는 영화잡지의 기획특집 기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기존의 비평적 견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도 많아서 엇비슷한 주장을 반복적으로 읽게 되는 아쉬움도 생겼다. 다행스럽게도 손경민 김아름 지승학 씨의 평문은 주제를 다루는 글 솜씨와 더불어 주제를 이끌어가는 힘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시’에 대한 지승학 씨의 평론이었다. ‘알레테이아’(진리 혹은 비은폐성 혹은 드러냄으로 번역된다)라는 개념을 내세운 평문은 영화 속에서 은폐된 것과 드러내는 것의 변증법적 관계를 흥미롭게 서술하면서 이창동 영화의 전체 흐름을 조망하고 있다. 단평의 산만한 전개가 거슬리기는 하지만 영화의 의미를 집어내려고 하는 평자의 애정에 마음이 갔다. 앞으로 좋은 비평의 담론을 이어가주기를 소망하며, 저널적인 평론 쓰기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면 한다.
지승학
1974년 경기 의정부 출생
대진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홍익대 대학원 사진학 석사
고려대 대학원 영상문화학과 박사과정 수료
영화와 영화 비평의 간극은 넓었다. 비평은 일방적 소통이 아닐진대 왜 그 간극은 채워지지 않을까 고민했다. 하나의 영역과 또 하나의 영역이 대립할 때 배타적인 경계는 그 틀을 더 단단히 하는 법이란 걸 깨달았을 때 오히려 용기가 생겼다. 그 간극을 좁히리라. 무모한 시도로 시작된 내 글은 당연히 미숙하다. 그 속에서 흐릿한 가치의 흔적을 발견해주신 심사위원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글을 쓸 때 영화를 보는 시간만큼 즐거웠다. 영화는 좋아하기보다 사랑해야 할 대상인 것도 느꼈다. 그 사랑을 몸으로 느끼는 사람들만큼 나도 영화를 사랑했다 말할 수 있길 소망한다. 영화라는 이미지 속에 떠다니는 사람 냄새를 놓치고 싶지 않다. 그것은 비평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방대한 그 몫에 나도 한 부분 일조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 가슴이 벅차다. 앞으로 영화 속 가치를 건져내어 대중에게 열어 밝히는 평론가가 되고 싶다.
당선통보를 알리는 전화 후 정신이 멍해졌음에도, 직접 전화로 이 소식을 알려드린 분들은 진정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다. 특히 김성도 이경률 교수님께 가슴 깊이 감사드리고 학교 동기 동료 친구 후배들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끝으로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 형용할 수 없이 고맙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