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미스터리 존재방식

by  정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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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로그램 미스터리

    핸드폰도 죽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까? 가끔 파란색 화면과 함께 PC를 껐다 켜야 하듯이 핸드폰도 처리할 수 없는 예외상황을 만나면 마찬가지다. 그러나 예외상황을 만난 핸드폰은 스스로 조용히 꺼졌다 켜진다. 누군가의 주머니 속에서, 누군가의 머리맡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었다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러나 개발 시료라고 불리는 출시 전 핸드폰들은 그럴 수 없다. 예외 상황을 만나면 파란색 화면과 함께 모든 동작을 멈춘다. 원인 분석을 위해서 문제가 발생한 그 순간의 상태를 보존하는 것이다. 죽은 것도 살아 있는 것도 아닌 상태. 나 같은 개발자들은 그때의 메모리를 다운로드 받아 무엇이 문제였는지 분석하고 해결한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파랗게 질려 있는 핸드폰이 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긴급 분석 요망’이라고 쓰인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고 김 과장의 이름이 아랫부분에 적혀 있었다. 최종 검사가 진행되고 있는 요즘 발생하는 문제는 모두 긴급이니 김 과장의 메모는 불필요했지만 급히 흘려 쓴 필체에서 평소와 다른 다급함이 전해졌다.

    “장 대리님 뭐예요?”

    눈치 없이 김 대리가 묻는다.

    “죽었나 보네.”

    “김 과장이네요?”

    모니터를 켜고 이메일을 확인하려는데 뒤 쪽에서 잰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김 과장이 틀림없다.

    “장 대리 원인 나왔어?”

    “아뇨. 지금 막 와서요.”

    “이번에 딜레이 되면 진짜 큰일 난다. 생산 다음 달로 넘어가는 거 알지? 이 문제 잊을 만하면 나오네?”

    김 과장은 핸드폰의 파란 화면을 들여다본다. 김 과장이 거기 나와 있는 메시지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왜 항상 유심히 들여다보는 척할까.

    “네.”

    대답과 함께 손을 내밀어 김 과장이 유심히 보고 있던 핸드폰을 다시 받아왔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의식적으로 모니터만 쳐다봤다. 김 과장이 발걸음을 돌린다.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속으로 꾹 참고 있겠지.

    CSI 수사대의 광팬인 나는 파란 화면의 개발 시료를 대할 때마다 CSI 수사대가 된 것처럼 상상한다. 그러면 똑같은 책상이 줄지어있는 이 따분한 사무실은 순식간에 실험실로 변한다. 검시대 위에는 미모의 시체가 누워있고 카메라가 원 샷으로 나를 잡고 있다. 죽은 그녀는 자신을 죽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증거를 통해서만 이야기한다. 머리카락 한 가닥, 실 한 올, 항상 사소한 것들 속에 사건의 열쇠가 숨어 있다. USB 케이블을 그녀에게 꽂고 메모리를 다운 받기 시작했다. CSI에서 가장 좋아하는 그리섬과 워릭이 한마디씩 한다.

    ‘워릭. 사인은 언디파인드 인스트럭션(Undefined Instruction)이야. 그녀에게 이해할 수 없는 명령어가 내려온 것이지.’

    ‘그리섬. 이해할 수 없는 명령어라뇨?’

    ‘그래 맞아. 프로그래머가 입력할 수 있는 것은 아냐. 무언가 그녀의 명령어들을 훼손했겠지.’

    긴급이라는 제목이 붙은 메일에 문제의 발생 경로가 있었다. ‘게임 중 문자메시지 수신하여 팝업창 뜬 상태에서 전화 수신함. 동시에 알람 발생‘. 문제 발생 빈도는 1회. 누군가 게임을 하는데 문자메시지가 수신되어 새 메시지가 왔다는 창이 떴고, 마침 그때 다른 사람이 전화를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가 알람을 맞추어 놓은 시간이었다. 복잡한 경로에 수많은 테스트 중 단 한 번 발생한 문제다.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분석 결과가 빨리 나오지 않으면 김 과장이 죽은 핸드폰 마냥 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를 찾아올 것이다. 핸드폰의 메모리가 PC로 저장되는 파란색 눈금이 천천히 올라가는 것을 보며 목을 뒤로 젖혔다.

    한 가지 위안거리라면 어색할 것 같았던 김 대리네 돌잔치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과 같이 앉아 밥을 먹는 점심시간 20분 동안에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늘 망설여진다. 그런 내게 한 시간이 훨씬 넘는 돌잔치는 큰 부담이었다. 더구나 돌잔치 장소가 회사 근처라 변명도 마땅치 않았다. 그러나 금요일 밤 사무실에 남아 있는 것도 싫다.



    혜연은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경찰서 신세를 지게 만든 여자이기도 했다. 동아리 후배 진희가 예쁜 디자이너가 있는데 소개팅 한 번 하겠냐고 했을 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내게 오는 기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할까? 그런 심정이었다. 서른다섯이 지나자 그런 기회마저도 거의 없었으니까. 그러나 막상 만나기로 한 날이 되자 설렘과 기대보다는 의무감과 번거로운 것이 싫다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에 나갔다.

    그녀를 처음 보고 느낀 감정은 당혹스러움이었다. 그 날 난 역삼역 파스쿠치에서 입구와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에 앉아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아름다운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입구 쪽은 사람들로 붐볐지만 그녀는 단연 눈에 띄었다.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몸짓이었다. 입구 쪽은 사람이 붐볐지만 그녀의 반경 2미터의 원은 한가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한 번 그녀에게 멈추면 벗어날 줄 몰랐다. 그 시선은 또 다른 사람을 전염시켜 그녀를 향하는 시선은 점차 늘어갔다.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돌리던 그녀는 카메라가 들었을 것 같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하였다. 진동이 막상 내 주머니에서 울리자 깜짝 놀랐다. 여보세요라는 말을 어색하게 했을 때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내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당혹스러웠다. 그녀가 테이블로 걸어오는 동안 그 곳의 모든 남자들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박주임에게 그녀를 설명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피부가 눈부셨어. RGB로 표현하면 0xFFFFFF의 순수한 백색. 투명해보이기 까지 하니 색상 값에 알파 값도 추가해야 할까? 얼굴 크기는 한 손에 들어오는 스마트폰 정도였고, 얼굴에 어떤 포토샵 처리도 안한 것이 분명했어. 눈은 얼마나 컸는데, WVGA화면에서 256 X 256 위젯 만했다고 생각하면 돼.’ 그녀와 가벼운 통성명을 하고 다시 자리에 앉을 때에 비로소 내가 벌떡 일어서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후광이 비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서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30대 후반의 배 나온 나를 그녀가 어떻게 생각할지 뻔했다. 진희가 외톨이인데다 말주변까지 없는 나에게 왜 그녀를 소개시켜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의 표정과 몸짓에서 나를 싫어하는 기색을 찾느라 분주했다. 그녀는 나를 한동안 똑바로 쳐다보기만 했다. 미술관에서 이해할 수 없는 추상화를 대하듯이. 그녀의 눈이 참 깊다는 생각을 했지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먼저 말을 건 것은 그녀였다.

    “원래 말이 없으세요?”

    감추고 싶었던 부분을 들킨 듯 수치스러웠다.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입안에 맴도는 모든 이야기가 식상하거나 아니면 처음 만나 이야기하기에는 어색할 것 같았다. 그녀가 진희에게 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지 떠오르니 마음 한구석이 쓰라렸다.

    그 순간 문득 오늘 이후에 그녀와 만날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이러고 있는 것은 주제 파악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오늘 하루의 행운을 즐기자고 몇 번을 되뇌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나를 만나려 했을까? 그녀의 가방으로 눈이 갔다.

    “그건 뭔가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가 대답했다.

    “카메라요. 취미에요.”

    “언제부터 찍으셨어요?”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딴 쪽을 본다.

    “한 2년 정도요?”

    “주로 무엇을 찍으세요?”

    “이것저것이요. 그렇지만 풍경과 인물 중 하나를 고르라면 인물이죠.”

    그녀와의 만남이 오늘 뿐이라고 생각하니 신기하게 평소보다 말이 더 잘 나왔다. 묘한 탐색전도, 스펙에 대한 추가 확인도 필요 없었다. 그녀는 내가 묻는 말에 짧게 답할 뿐 주로 듣기만 했는데 그렇다고 싫은 내색을 보이거나 지루해 하지는 않았다.

    “재미없을지도 모르지만…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드릴까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시작도 하지 않은 내 이야기에 그녀가 미소 지었다.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그녀는 그 미세한 미소로도 앞에 앉은 남자의 마음을 저리게 할 수 있었다. 우선 내가 하는 일을 간략히 설명한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죠. 검증팀에서 문제를 하나 잡았는데 붕어빵 게임을 열 판까지 다 깬 후 화면이 적색으로 변한다는 거였습니다. 그때부터 개발자들이 모여 앉아서 그 게임을 하기 시작했죠. 부장님이 삼십분마다 와서는 몇 판 깼는지 확인했습니다. 아니 언제 열판까지 깰려고? 라고 물어보고 가는데 정말 모든 부서원들이 처절히 게임했었습니다. 아. 지금 웃으시겠지만 얼마나 심각했는데요. 그래서 제 동료들은 그 게임은 이제 다 깰 줄 압니다. 제가 제일 먼저 깨서 뻘건 화면을 만들어 부장님한테 칭찬 들었죠.”

    사실 직접 겪은 이야기지만 당시엔 재미있었던 일인지 몰랐다. 다만 한 쪽 구석에 앉아 있던 신입사원이 나중에 술자리에서 깔깔대며 이야기했을 때야 그것을 알았으니까. 그녀의 웃는 모습에서 간혹 나에 대한 호의가 느껴질 때도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식사를 마지막으로 헤어졌다. 다음 날 애프터 신청은 생각지도 않았고 주선자인 진희에게 나에 대한 의견을 묻지도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남았던 것은, 그녀에게 사진 한 번 찍어도 되겠냐는 말을 끝내 꺼내보지도 못한 소심함이었다. 그러나 며칠 뒤 진희에게서 왜 연락 하지 않느냐는 메시지가 왔을 때는 정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메시지를 보자마자 나답지 않게 박 주임에게 그녀 이야기를 꺼냈다. 만약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한 번 보여주겠다고 약속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자살하기 전까지 다섯 번을 만나는 동안 사진은 단 한 장도 찍지 못했다. 혜연은 5월의 마지막 금요일에 자살했다.



    부서 사람들이 미안해하는 듯이 퇴근한지도 벌써 두 시간이 지났지만 원인은 찾을 수 없었다. 김 과장은 정말로 얼굴색이 파란색으로 조금씩 변해가며 몇 번을 찾아왔는데 그런다고 핸드폰이 스스로 죽은 이유에 대해 말할 리도 없었다. 사무실은 점점 조용해져 갔다. 일렬로 늘어선 책상들 위의 전등은 하나 둘씩 꺼지고 조금 있으면 정말 카메라 원 샷을 받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왜 입력되지도 않은 정체불명의 명령어가 생겼냐는 것이다. 애초에 프로그래머가 존재하지도 않는 명령어를 입력했다면 실행파일이 나올 수도 없다.

    ‘그리섬. 범인은 누굴까요? 게임? SMS? 아니면 알람?’

    ‘워릭. 지금 확실한 것은 그들 중 하나가 그녀의 내부를 훼손했다는 것뿐이야.’

    ‘우습게도 모두 알리바이가 없어요.’

    그들 모두 공범일 수도 있을까? 숫자들이 나열된 모니터를 보고 있는데 어깨 위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실력 좋기로 유명한 박 대리다.

    “잘 안 돼? 김 과장이 가보라데?‘

    김 과장 꽤나 답답했나보다. 박 대리는 우리 프로젝트 멤버도 아니다. 그녀의 사인 분석에 또 다른 수사팀이 붙었다. 누가 먼저 그녀의 사인을 찾느냐에 수사대의 자존심이 걸리게 됐다.

    “장 대리. 메모리 뽑아 낸 것 좀 보내봐. 나도 한 번 볼게.”

    박 대리는 여기서 나보다 먼저 원인을 찾아내면 홈런이고 가만히 있어도 조력자 역할을 하는 위치니 부담이 없다. 안타깝게도 나는 정반대의 상황이 됐지만.

    “네.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김 과장님이 그러셨어요? 하필 금요일 밤인데…….”

    “뭐 할 수 없지. 나중에 밥이나 한 번 사. 그나저나 손등은 왜 쓰다듬어? 어디 안 좋아? 틈틈이 스트레칭 좀 해줘. 나처럼 고생한다.”

    마음에도 없는 말들이다. 평소에 그는 내 손등 따위에 신경 쓴 적이 한 번도 없다. 보통의 경우 누가 문제를 해결했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는 해결한 사람의 이름이 자연스레 알려진다는 것을 우리 둘 다 안다. 씨익 웃고 돌아서는 그의 등을 잠시 쳐다봤다. 그리섬과 워릭은 더 이상 한가하게 수다나 떨 시간이 없다. 그리섬답지 않게 워릭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쪼아댄다. 현장에 한 번 더 가봐, 빠진 게 없는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겠다. 재현을 하며 로그를 받기로 했다. 메모리를 통해 받은 것은 핸드폰이 죽었을 때의 상태뿐이다. 마치 엑스레이처럼 그 순간의 상황만을 포함한다. 그 이전에 핸드폰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면 로그가 필요하다.

    로그란 개발 시료가 현재 어떤 상태인지 알려주기 위해 개발자가 심어둔 메시지이다. 이 메시지들을 모두 모아 놓으면 비행기의 블랙박스처럼 내부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핸드폰은 비행기처럼 이 자료를 내부에 저장할 용량이 없다. 따라서 문제를 재현하며 로그를 받아 내부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케이블을 연결하자 침묵을 지키던 핸드폰이 갑자기 내면의 고백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두 대 더 준비했다. 알람을 세팅해 놓고 문자메시지 예약 전송을 건 다음 다른 핸드폰으로는 전화 걸 준비를 한다. 그리고 게임을 시작했다. 지금처럼 전화와 문자메시지 게임 등이 동시에 수행되면 정신없이 메시지들이 쏟아져 나온다. 푸른 낯빛을 하고 죽을 때까지 이 과정은 모질게도 반복될 것이다. 컴퓨터에서는 핸드폰에서 출력되는 메시지들이 쉴 새 없이 스크롤되며 올라가고 금요일 밤은 조용해져만 갔다.



    5월의 마지막 금요일, 혜연은 나와 헤어지고 난 뒤 집으로 돌아가 17층 그녀의 방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창문 아래에는 발을 딛고 올라갔었을 나무 의자가 벽에 기대어 있었고 유서는 없었다. 새벽 두 시였다. 아파트 경비는 자신의 초소 위로 퍼억 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부터 사람이 떨어졌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토할 것 같았다고 했다. 막상 2층으로 올라가 초소 지붕 위에 떨어져있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자 본격적으로 토하기 시작했고 119에 전화를 하는 중에도 계속됐다. 난 새벽 다섯 시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자살할 이유가 없다던 그녀의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만난 나를 의심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하는 거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어요?”

    그러나 말과 달리 형사의 눈빛이 날카롭다고 느꼈다.

    “네. 강남역 토니로마스에서 저녁 먹고 극장에서 영화 보고는 헤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열시 반이었다는 거죠? 그 이후로 어디 계셨나요?”

    “지하철 타고 집에 갔습니다.”

    “혼자 사신다고 했는데? 몇 시쯤 집에 왔는지 혹시 말해 줄 사람이 있나요?”

    “아니요.”

    “네… 그리고 육체적 접촉은 전혀 없었다?”

    형사의 눈이 얇아졌다.

    “네. 전혀요.”

    그때 어떤 나이 지긋한 남자가 경찰서로 뛰어들었고 경찰서 내부를 훑어보고는 혼자 조사받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너야? 혜연이가 만난 남자가?

    “그게 저.” 하고 어정쩡하게 일어나는데 그는 달려와 다짜고짜 내 멱살을 잡고 밀었다.

    “너 인마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우리 애한테 무슨 짓을 했냐고?”

    그의 눈에는 슬픔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나는 순식간에 어찌 해 볼 틈도 없이 경찰관 책상으로 밀려 엎어졌고 내 앞에 앉아 있던 경찰관이 혜연의 아버지를 억지로 떼어놨다. “살려내. 이 자식아 살려 내”라고 울부짖는 그녀의 아버지는 끝내 경찰관 앞에서 주저앉아 버렸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부모는 마침 지방에 있는 친척을 병문안 갔고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새벽 세 시쯤 연락을 받았는데 그녀가 자살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그녀의 부모들은 몇 번을 까무러쳤다.

    경찰서의 흰 벽을 마주보고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에 대한 나의 생각은 조금씩 바뀌었다.

    “자기 이야기를 다섯 번 만나는 내내 한 번도 안했어요. 주로 제 얘기를 듣기만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해요. 제 나이 또래에요, 누구 소개로 해서 다섯 번이나 만나는 게 쉽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그것 치고는 자기 이야기를 너무 안했어요. 가끔 어둡고 우울한 표정이 보였던 것 같기도 하고요.”

    나 역시 왜 그녀가 자살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궁금증보다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내 앞에 있던 형사는 나 들으라는 식으로 왜 혜연이 나 같은 남자를 만났는지 모르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 질문의 대답은 나도 궁금했다.

    점차 그녀를 만나 느꼈던 가슴 저림은 부담스러움과 어색함으로 변했다. 심장을 쿵쿵 뛰게 했던 그녀의 애프터 신청은 그녀에게 비정상적인 면이 있다는 증거였다.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먼저 연락을 해왔다는 것부터 그녀에게 이해할 수 없었던 사실들을 빠짐없이 말했다. 형사는 내 말을 몇 번이나 듣고는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

    “장현우씨. 그런데요, 한 가지 이상한 게 나왔어요. 김혜연씨 죽기 전에 장현우씨한테 전화 걸려고 했더군요? 발견되기 10분전에. 조회해보니 바로 끊어서 장현우씨한테 연결은 안됐지만요. 참 이상하죠? 왜 죽기 전에 장현우씨한테 전화를 하려했을까요?”

    형사와 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혹시 무심코 통화버튼을 잘못 눌러서 이전 통화기록으로 연결된 것은 아닐까요?”



    그녀의 부모는 부자이기도 했지만 경찰에도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잘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끝까지 나를 의심했다. 그녀와 만났던 다섯 번의 만남을 시간대별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몇 번이고 진술해야 했다. 그녀의 부모는 시신의 부검은 원하지 않았지만 성폭행의 흔적이 있었는지 조사를 요청했다. 물론 그녀는 깨끗했다.

    나에 대한 혐의가 벗어지게 된 것은 생각지도 않게 저장해 둔 택시 번호 때문이었다. 택시 운전사는 빼어난 미모의 그녀를 어렵지 않게 기억했고 택시를 태워줄 때의 내 모습도 기억했다.

    “잘 모셔주라고 신신 당부하면서 택시비를 넉넉히 줬어요. 뒷좌석 아가씨한테 푹 빠진 게 한 눈에도 보였죠. 네? 아가씨와 남자 분 사이에 이상한 점은 없었어요. 헤어질 때 아가씨도 웃으면서 인사했으니까요. 분당에 내려드릴 때까지도 별 이상한 기색은 없었구요. 참 나 정말 이쁜 아가씨였는데. 뭔 일인지?”

    택시 운전기사의 증언, 그녀가 집에 들어갈 때 보았다는 경비아저씨, 아파트의 CCTV도 그녀가 자살한 날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결국 그녀가 왜 뛰어내렸는지 알 수 없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하다못해 동전을 던졌을 때 앞면이 나오는 것도 이유가 있다. 튕긴 힘의 세기와 지구의 중력 그리고 공기의 마찰력을 계산해보면 앞면이 나온 원인을 밝힐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프로그래밍의 세계를 좋아하는 것도 원인과 결과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입력과 출력, 참 아니면 거짓, 1+1은 항상 2인 세계에서 나는 편안하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종종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어색할 때가 많다. 얼굴을 대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메신저로 이야기하는 것이 편하고 메일로 이야기할 때 좀 더 명확하게 말한다. 내게 속한 무엇인가가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가끔 용기를 내서 왜냐고 물으면 그들은 그런 것을 못 느꼈다고 대답한다. 그들은 불편한 표정으로 대답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나보다.

    뒤 쪽에서 또 잰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열 신데 뭐 진척된 사항 없어? 상무님이 또 물어보신다.”

    김 과장의 얼굴에 심각함이 느껴진다. 상황이 어떤지 나 역시 잘 안다.

    “네. 아직”

    “아니 지금까지 원인 분석도 안 되면 어떻게 해. 수정은 언제 하고 테스트는 또 언제 하게? 박 대리한테 좀 가봤어? 이거 늦어도 새벽 세 시까지는 나와야 프로그램을 검증팀에 시간 맞춰 보낸다. 알지?”

    “…”

    김 과장은 눈을 한 번 흘기고는 내 자리를 떠나 회의실 옆을 지난다. 박 대리에게 가는 것이리라. 새벽 세 시라. 핸드폰을 꺼내 알람을 맞추어 놓는다. 알람이 울리기 전에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담배를 챙겨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 문을 열고 나가니 밤바람이 시원했다. 난간을 등지고 바람을 막아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이고 깊게 들이마셨다. 김 과장이 초조해 하는 이유를 안다. 벌써 2년째 진급에서 누락한 그에게 이번 프로젝트는 결정적이니까. 그래도 김 과장이 나와 상의 없이 박 대리에게 먼저 이야기한 것은 불쾌하다. 나를 좀 더 믿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는다.

    재현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프로그래머는 어떤 입력이 들어오면 어떤 연산을 하라는 것을 모두 지정해 놓는다. 모든 입력 값과 출력 값이 짝을 이루게 된다. 문제가 발생한 핸드폰과 동일하게 입력조건을 맞추어주면 동일한 문제가 발생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핸드폰에 똑같은 프로그램이 들어가 있다. 그러니 어떤 핸드폰에서 발생한 문제를 다른 핸드폰에서 똑같이 재현하려고 할 때 재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다. 담배를 힘껏 빨아들였다. 박 대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자리로 돌아가기 전 박 대리 자리 쪽으로 가봤다. 박 대리 책상에는 피자 박스가 두 개 놓여 있었고, 박 대리 말고도 세 명이 근처 책상에서 재현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그 쪽 프로젝트에 할당된 외주 검증팀이었는데 얼굴만 아는 사람들이었다. 예산이 넉넉한 박 대리 팀에는 검증과 재현만 전문적으로 하는 외주업체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네 프로젝트도 아닌 일을 부탁하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그것도 금요일 밤에. 실력 좋은 박 대리는 수완도 좋은 듯 했다. 저러니 인정을 받지.

    재현팀은 핸드폰을 직업적으로 죽이는 사람들이다. 노트북에 세 대의 핸드폰을 올려놓고 정신없이 움직이는 그들의 손가락을 보면 한 개 한 개가 별도의 생명체 같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핸드폰이 죽는가를 잘 알고 있다. 모든 조건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고 프로그래머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을 본능적으로 찾아내는 것이다. 그들은 직업적으로 핸드폰을 죽이고 우리의 임무는 그들의 테스트를 이겨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짜는 것이다. 박 대리는 한가하게 의자를 반쯤 뒤로 젖히고 게임을 하고 있었다. 아니 즐기고 있어 보였다.

    “아. 장 대리. 이거 재현 안 되네.”

    “네. 저도 잘 안되더라고요.”

    “너무 걱정하지 마. 밤새면 다 나오게 되어 있어.”

    “그런데, 왜 똑같이 조건을 맞추었는데, 재현이 안 될까요?”

    박 대리는 뒤로 한껏 젖혔던 의자를 똑바로 하고 나를 쳐다봤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말했다.

    “우리가 모르는 게 숨어 있는 거지.”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로 돌아갔지만 박 대리가 한 말은 틀렸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없어야 한다. 우리가 그녀를 프로그래밍 했으니까. 자리로 돌아온 나도 다시 재현을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제 내 책상에만 불이 켜있다.



    혜연의 장례식 장소를 들었지만 차마 가볼 수 없었다. 가 볼 면목이 없었다. 그리고 곧 잊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례식이 끝나고 한 달이 지나도 문득문득 그녀 생각이 났다.

    7월의 첫 번째 일요일, 나는 그녀를 꿈에서 보았다. 두 번째로 만나 사진전에 갔던 날이다. 혜연과 만나고 그 다음 주 진희가 왜 연락하지 않느냐고 연락이 왔다. 헤어진 뒤로 문자 한통 보내지 않았던 나는 혜연에게 실례를 했다는 것을 알았고 미안한 마음에 서둘러 연락해서 무작정 그 주 토요일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혜연을 만나 무엇을 해야 할 지 고민이었다. 나는 진희에게 슬쩍 혜연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묻고 그녀의 취미가 사진 찍는 것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만약 그녀 몰래 사진전을 알아봐 데리고 간다면 그녀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진전의 장소가 만나기로 한 장소 근처라면 미리 계획했던 것처럼 보여 더욱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열리는 사진전은 없었다. 며칠 동안 알아보던 중 우연찮게 발견한 블로그에서 약속 장소 근처에서 사진전이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름이 알려진 사진작가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진전의 주제는 ‘회귀’였다. 그러나 전시회는 볼품없었고 엉망이었다. 더구나 며칠 사진에 대해서 공부한 뒤 어쭙잖게 그녀 앞에서 잘난 체를 했었다. 그 날 망신을 당했지만 그녀는 묵묵히 내 옆에 머물러 있었다. 고마웠다.

    사진전이 꿈에서 나온 뒤 한 번쯤은 그녀를 찾아가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월요일 아침 평소에 입지 않던 양복에 넥타이까지 다 차려 입고서도 현관 앞에 선 채 한참을 망설였다. 결국 갔다 와야 매듭이 지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 김 과장에게 몸이 안 좋다는 문자를 보냈다.

    생각대로 월요일의 납골당은 텅 비어 있었다. 들은 대로 그녀는 그 납골당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있었다. 사진 속의 그녀는 저 멀리 바다를 내다보고 있었고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보자 또 가슴이 저려왔다. 처음 만난 날 그녀의 미소를 보았을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저려왔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그 사진을 담았다. 순간 찰칵 소리가 부담스러워 주위를 둘러보았고 죄지은 사람마냥 손에 들고 있던 꽃 한 다발을 급히 올려놓았다.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은 좀 복잡했다. 왜 하필 나를 만나고 난 다음이었냐는 원망스러움과 자살한 이유에 대한 궁금함 그리고 그녀가 나를 보며 미소 지었을 때 느꼈던 가슴 저림이 뒤섞여 있었다.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을 때 오히려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이 궁금해졌다. 왜 몸을 던졌으며, 왜 나를 마지막으로 만났는지 알아야 했다. 나를 만난 것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아니면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인지, 그걸 알아야만 매듭이 풀릴 것 같았다.



    주선자였던 진희에게 연락했을 때 그녀는 만나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다. 부서 이동을 해서 정신없이 바쁘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혜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몇 번을 연락한 끝에 그녀의 회사 지하 커피숍에서 잠깐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잘 지냈어? 상품 기획 쪽으로 옮겼다고? 축하한다. 개발자 끝이구나.”

    “선배. 야근하는 건 똑같아요. 어떻게 보면 개발직이 속편하구요. 자기 일만 딱 하면 되니까 눈치 안 보고”

    “그렇구나. 거기도 힘들겠지.”

    “그나저나 어쩐 일이에요? 점심시간에 여기까지 오고……. 하기야 선배 정도면 그 정도 여유는 부릴 수 있나? 진급 언제죠?”

    “글쎄 내년인가? 벌써 그리 됐네.”

    잠시 망설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혜연씨. 혹시 뭐 들은 거 있나 해서.”

    “다 끝난 얘기를 뭐하러요.”

    진희는 얼굴이 확 굳어졌다. 진희의 굳어진 표정을 보자 그녀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혜연씨 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야? 그 날 보니 아버지가 성질이 좀 급해 보이기도 해서.”

    진희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젓기만 했다.

    “아니면 디자이너 생활은 어땠어? 그 쪽도 스트레스 엄청 받는다던데?”

    혜연에 대한 질문을 몇 차례 던졌지만 그녀는 반쯤 비워진 투명한 물 잔을 빙빙 돌리기만 했다. 내가 만나자고 했을 때 몇 번이나 거절했던 그녀가 떠올랐다. 갑자기 내 목소리가 크게 튀어나왔다.

    “말 좀 해봐. 우리끼리 이야기로 하고. 내가 어디 가서 혜연씨 이야기할 사람도 아니잖아.”

    내 목소리에 나도 놀랐다.

    진희는 잠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가만히 있었다.

    “참 나.”

    그리고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그 웃음에 갑자기 당황스러워졌다.

    “선배 좀 웃긴 거 알아요?”

    “응? 뭐?”

    그녀는 빙빙 돌리던 물 잔을 들어 한 모금 깊게 마셨다. 그리고 다시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나 들었어요. 선배가 경찰서에서 혜연이에 대해 이야기한 거. 좀 이상한 구석이 느껴졌다고 한 거부터… 이것저것 다요. 혜연이 아버지가 경찰하고도 잘 알거든요. 꽤 자세히 들었어요. 선배 이야기 듣다보니 좀 그러네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리고 잘 몰랐나 본데요. 우리 집 혜연이네 집이랑 잘 알아요. 나는 선배보다 혜연이랑 더 가까웠구요. 그러니까 우리끼리 이야기네 뭐 그건 좀 그렇구요. 이제 와서 뭐 순애보 흉내라도 내보게요? 그렇게 안 봤는데 좀 구리다, 선배. 이제 와서 물어 보는 것도 좀 웃기지 않아요?”

    진희가 왜 만나기를 꺼렸는지 이해가 갔다.

    “선배. 솔직히 말하면요, 나도 혜연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그 집 부모님들이요? 진짜 교양 있고 좋으신 분들이에요. 혜연이도 아무 문제 없었거든. 디자이너 생활? 색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서 그 쪽에서는 이름도 있었어. 오히려 혜연이네 집에서는 아직도 선배가 무슨 짓을 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고 있어. 그 집 부모님들이 나한테 선배는 어떤 사람이냐고 몇 번이나 물어본 거 알아요? 난 이유도 없이 그때마다 죄송스런 생각이 들었어요. 몰라요 왜 그랬는지. 그리고… 그건 솔직히… 아니야 나도 잘 모르겠어.”

    그녀는 말끝을 얼버무리고 창 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렇게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있기 부담스러웠다. 둘 사이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나는 경찰서에서의 내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고 그녀는 그녀대로 다른 생각에 잠겨있는 것 같았다. 고맙게도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진희였다.

    “회의가 있어서 올라가봐야겠어요.”

    그 말이 고맙기도 아프기도 했다.

    “어 그래. 바쁜데 미안했어.”

    순간 궁금했던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왜 나를 소개시켜 줬어?”

    그녀는 자리에 일어선 채로 대답했다.

    “내가 아니예요. 혜연이었어요. 사진들 보고 고르라니까 선배를 고르더군요.”



    진희를 만나고 얼마 후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혜연의 주위 사람들과 대학 동창들이 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찰에서는 혐의를 잡지 못했지만 내가 그녀를 자살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혜연이 나를 다섯 번이나 만났다는 것부터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불쌍해서 만나 주었다는 사람도 있었고, 내가 집요하게 쫓아다녔다는 사람도 있었고 협박을 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혜연의 죽음에 대한 소문은 나를 가운데 두고 점점 퍼져갔다. 어느 대학 동창 결혼식에서는 혼자 밥을 먹고 체한 채로 약국을 찾기도 했다. 회사에서도 저녁 시간에 홀로 밥을 먹게 될 때나 담배를 피러 가자고 했을 때 벌써 피고 왔다는 대답을 들으면 회사에까지 소문이 퍼진 것은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다. 그 사실을 안 이후 그녀가 미치도록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가끔 혼자 있으면 핸드폰으로 찍은 그녀의 사진을 보곤 했다. 왜 나를 만나려고 했는지 묻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그녀를 웃음 짓게 만들었던 기억이 내 속에서 무엇인가를 꿈틀거리게 했다. 그것이 내 안에 남이 있는 유일한 꿈틀거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 사진을 본다면 혜연을 스토킹했다는 소문이 굳어질 것이다. 지워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끝내 지울 수 없었다. 난 혜연이 왜 죽었는지 알아야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왜 나를 만나려고 했는지. 그녀의 집까지 찾아간 적도 있었다.

    그 날 근무였던 경비는 죽기 전의 그녀에게서 특이한 점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가 자살한 뒤의 기억만 생생했다. 그녀가 떨어졌던 초소 옥상도 살펴봤다. 아파트 현관 옆으로 높게 자란 나무들 사이로 햇빛이 쏟아져 둥그런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회색 페인트가 새로 칠해져 번들거리는 그곳에 그녀가 누워있는 모습을 그려 보려 했다. 분명히 일어났던 일이지만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한 시가 조금 넘고 슬슬 머리가 멍해질 때쯤 모니터 한쪽에 메신저 창이 떴다. 박 대리 자리로 오라는 김 과장의 메시지다. 박 대리가 원인을 찾았구나. 그리섬과 워릭은 다음 시즌에 딴 곳에서 일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박 대리의 자리로 가면서 조금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원인이 궁금하기도 했다. 자리로 갔을 때 외주 검증팀은 이미 퇴근했는지 보이지 않았고, 김 과장과 박 대리만 있었다. 김 과장이 나를 보고 입을 열었다.

    “장 대리 어때? 뭣 좀 나왔어?”

    박 대리도 실패했나? 해결했다면 내게 이렇게 묻지는 않았겠지.

    “아뇨. 재현이 안 되네요.”

    “외주 검증팀이 2000번 재현 시도해서 재현되지 않았고, 검증팀에 재현되지 않았다는 리포트를 작성하기로 했어. 그리고 장 대리는 현재 상태에서 수정이 어렵다는 테크니컬 리포트를 좀 작성해. 그걸로 내가 검증팀하고 협의해 볼게.”

    “그런데 벌써 두세 번 나온 문제인데요? 만약에 지금 원인을 밝혀내지 않고 또 한 번 문제가 나오면 그때는 정말 생산 딜레이 됩니다.” 김 과장이 박 대리를 쳐다보았다. 그래 수완 좋은 박 대리 생각이었겠지. 박 대리가 입을 열었다.

    “외주 검증팀이 2000번 해서 안 나오면, 정말 다시 재현되기는 힘들어. 알지? 그 아저씨들 실력. 그렇다고 마냥 이렇게 죽치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냥 최악의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는 걸 말씀드리는 거에요. 당장 내일 오후에 문제가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까요? 문제가 수정된 것은 아니니까요.”

    “버전 업 되면서 우리가 모르는 부분에서 문제가 수정됐을지도 모르잖아. 검증팀에서 문제가 나온 뒤로 프로그램은 계속 바뀌었으니까.”

    “그걸 어떻게 확신하시는데요?”

    “2000번 테스트로. 내일 검증팀이 테스트 했을 때 몇 번이나 테스트 할 것 같아? 500번? 1000번? 아까 그 아저씨들은 2000번 풀로 재현해봤어. 내가 옆에서 봤으니까. 사실 난 지금 상황도 고려했었거든. 그럼 장 대리는 대안이 있어? 내일 아침까지 몇 시간 안 남았어. 7시에는 프로그램을 검증팀으로 보내야 된다고. 그때까지 문제 재현하고 원인 분석하고 수정하는 게 가능할 것 같아? 장 대리 자신 있어?”

    박 대리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김 과장을 쳐다봤다.

    “검증팀에게 협의한다고 받아줄까요? 과장님 이런 경우가 있나요? 문제가 수정되지도 않았는데요? 만약 시장 나가서 문제 나오면 그때는 누가 책임지는데요? 검증팀에서 책임진대요?”

    내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싫었다.

    김 과장은 콧등위로 안경을 슬쩍 밀어올리고서는 아까와는 좀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래. 지금 생각해보니 박 대리 이야기에도 문제가 좀 있긴 하네.”

    순간 박 대리의 시선이 나를 떠나 김 과장에게 꽂혔다. 김 과장이 말을 이었다.

    “아마 2000번 재현해서 이상 없다고 해도 검증팀에서 OK해 주지 않을지도 몰라. 그리고 OK해 준다고 해도 검증팀은 이 문제를 가지고 엄청나게 테스트를 하겠지. 핸드폰은 2000대가 아니라 수 만대가 팔려나가니까.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수만 번 재현할 수도 없지. 그 과정에서 재현이 되면 정말 일정은 딜레이야”

    김 과장은 잠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눈을 얇게 뜨며 웃었다.

    “장 대리. 근데 박 대리가 헛수고 한 것은 아냐. 빈도수를 파악해 봤으니까. 장 대리 뭐 꼭 원인을 찾기보다, 그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가상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봐. 그리고 그 원인에 대한 방어 코드를 좀 넣고. 그리고 수정했다고 하자. 박 대리가 확인한 것은 2000번 테스트로 문제 발생 빈도를 확인한 것이지. 만약 자네가 수정했다고 하면 내일 검증팀이 이 문제를 가지고 몇 천 번씩 테스트 할 것 같진 않아.”

    결국 김 과장 이야기는 담당자인 나보고 거짓으로 수정한 코드를 넣고 문제를 해결했다고 하라는 이야기다. 그 거짓말이 먹혀들 확률은 박 대리가 어느 정도 확인했다는 이야기고.

    “그러다 문제 나오면 누가 책임져요?”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면서 좀 커졌는데 그 질문에 갑자기 김 과장의 목소리가 확 높아졌다.

    “야! 장현우. 그건 어쩔 수 없지. 박 대리 말대로 다른 대안 있어? 내 말대로 하는 게 가장 문제가 안 나오게 할 방법 아냐? 정말 내일 아침 일곱 시까지 문제 재현하고 수정해서 테스트 마쳐주겠다는 약속 해 줄 수 있어? 그러면 나 별말 없이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게. 어차피 담당자는 자네야.”

    대답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내 입에서는 한숨이 터져 나왔고. 김 과장과 박 대리는 둘 다 내 입을 쳐다봤다.

    결국 한 시간 뒤 김 과장의 말대로 의미 없는 수정을 한 뒤 가상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원인과 해결 방법을 등록했다. 그녀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어떤 입력이 들어왔을 때 어떤 동작을 할 것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도 누구나 납득할 만한 사인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다. 불분명한 사인은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원인은 타이밍으로 돌렸다. 그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서는 안되는 것이었고, 몇 만분의 1초의 타이밍으로 게임이 다른 어플리케이션과 공유하는 리소스를 훼손시켰다고 등록했다.

    근처에 괜찮은 24시간 사우나 생겼으니 몸이나 풀고 해장국이나 먹자는 김 과장에게 혹시 모르니 좀 더 재현을 해보겠다고 하고는 담배를 챙겨 옥상으로 올라갔다. 박 대리의 눈빛에서 괜한 자존심이라는 야유조의 감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박 대리 그건 아니야.



    혜연과 육체적인 접촉이 없었냐고 경찰관이 물었을 때, 단호히 없다고 했다. 거짓말이었다. 그 느낌은 꿈에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아직도 생생하니까.

    마지막 금요일에 본 영화는 맘마미아였다. 박 주임에게 혜연과 영화를 보겠다고 추천 좀 해달라고 했을 때 그는 주저 없이 맘마미아를 꼽았다. 이제 막 사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딱 좋은 영화인데 밝은 분위기인데다가 로맨틱하며 아바의 감미로운 목소리도 최고라고 했다. 또 영화가 끝나고도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니 자기 말만 믿으라고 했다. 난 그 말을 믿지 못하고 미리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서야 박 주임 말에 동의했다.

    미리 본 탓도 있겠지만 혜연 옆에 앉으니 영화에 몰입할 수 없었다. 더구나 혜연이 재미 없어하면 어쩌나 걱정되어 힐끗 힐끗 곁눈질로 그녀의 반응을 살펴야했다. 그러나 얼마가 지나지 않아 그녀의 표정이 환해지고 영화에 몰입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웃을 수 있었다.

    그녀와 팔꿈치가 닿은 것은 영화가 중반을 지나고 메릴 스트립에 비해 피어스브로스넌이 너무 노래를 못한다는 생각을 하며 자세를 바꿔 앉을 때였다. 그때부터 영화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는데 혜연이 팔을 빼지 않고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다.

    박 주임이 다섯 번 만났으면 이제 슬슬 진도 나갈 때 되지 않았냐고 슬며시 웃음을 지을 때 아직 그런 사이 아니라고 하며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소개팅에서 다섯 번의 만남이 쉽지 않다는 것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어느 새 나의 웃음소리는 다른 관객들보다 한 두 박자 늦게 시작했고 소리도 작아졌다. 그러다 내 심장소리가 쿵쿵 울리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팔을 들어 그녀의 팔 옆으로 나란히 붙였다. 팔이 맞닿았는데도 그녀가 가만히 있자 나의 아랫도리는 팽팽해져오고 심장은 더 강하게 뛰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손을 잡아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무안해 할까봐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영화에 몰입해서 팔이 닿은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난 계속 그녀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고 이런 고민을 하는 내 자신이 바보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상체는 그녀의 반대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팔만 손잡이로 올라가 있어 아마 앞에 앉은 사람이 뒤를 돌아보면 무척 우습게 보일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먼저 손을 잡은 것은 혜연이었다.

    그녀는 내 손등을 부드럽고 따스하게 감쌌는데 퍼뜩 놀라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 마침 관객들도 웃고 있었고 그녀도 정면을 보고 웃고 있었다. 재빨리 나도 정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내 손을 감싸고 있었다. 정면을 보고는 있었지만 영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혜연은 내 손등을 가볍게 세 번 두드리고는 팔을 뺐다. 그녀의 동작이 멋지게 느껴졌다. 날 거부하지는 않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고 다시 영화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두드림의 여운은 잔잔히 내 속에서 물결치고 있었고, 피어스브로스넌의 노래도 두 번째 들어서 그런지 들어줄 만했다. 꿈에서조차 그때 손등의 감촉은 생생했고 그 순간이 떠오를 때면 무의식적으로 왼손으로 오른 손등을 쓰다듬기도 한다.



    나와 만나고 있는 동안 혜연은 그 날 밤 자신이 뛰어 내릴 것을 알고 있었을까? 경찰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녀는 나와 헤어지고 난 뒤 아무 일도 없었다. 통화 내역도 그녀의 엄마와 단 한통화가 있었을 뿐이다. 지방에서의 병문안이 늦어 친척집에서 자고 다음날 들어간다는 내용이었다. 이메일을 열어 보지도 않았고 집으로 걸려온 전화도 없었다. 33층 아파트에 17층 그녀의 집에 다른 사람이 침입한 흔적도 없었고, 모든 정황은 자살이 분명했다. 그럼 그녀는 나와 만나고 있었을 때 이미 자살하는 것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날 밤 내가 놓친 머리카락 한 가닥, 실 한 올은 무엇일까? 처음 만난 순간부터 택시를 타고 웃으며 손을 흔드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몇 번이고 되돌려 봐도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왜 마지막 순간 나에게 전화를 하려고 했을까?

    기억을 되돌리고 나면 곧 경찰서에서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 모습과 진희가 내게 말하는 장면도 같이 떠오른다. 그러면 가슴 한 구석이 아픈데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실재하는 고통으로 느껴졌다. 나의 손을 잡을 때 그것은 도와달라는 뜻은 아니었을까? 만일 내가 알았다면 그녀를 구할 수 있었을까?



    그리섬과 워릭은 증거를 찾지 못할 때 사건을 재현해보곤 한다. 재현 시도의 목표는 어떤 조건이 갖추어지면 재현 시료가 스스로 뛰어 내릴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비록 재현 시료의 차이가 있지만 재현 시도의 횟수가 차이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뛰어 내리기 바로 직전의 장 대리의 상태를 통해 그녀를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재현 시료에게 입력된 값이 사건이 발생할 조건을 갖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섬과 워릭은 로그를 뽑기 시작했다.

    로그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김 과장과 박 대리에 대한 분노였다. 옳지 못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지만 다른 대안을 제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무력감도 나타났다. 사람들은 박 대리가 문제를 정리했다고 하겠지. 그것도 재현 시료를 우울하게 만들고 있었다. 입사 초기에 주목받던 재현시료는 자기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흘러갈수록 자신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으니까. 내년에 진급할 수 있다고 쳐도 4년 뒤의 대한 불확실성은 늘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때 재현 시료는 지금과는 영 다른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드웨어는 더 노후되어 머리숱은 더 없을 테고 배는 더 나왔겠지.

    이제 그리섬과 워릭은 상황을 좀 더 진행시킨다. 재현 시료는 구두를 신은 채로 발등을 옥상 담벼락의 벽과 의자 사이에 집어넣는다. 발등이 의자와 벽 사이에 단단히 고정된 것을 확인하고 몸을 옥상의 바깥쪽으로 천천히 숙인다. 무릎이 옥상 벽 끝에 맞닿은 채 서서히 몸이 옥상 난간을 넘어 바깥쪽으로 기운다. 재현 시료의 시선이 옥상 벽을 서서히 넘어서고 옥상 벽에 가려 안보이던 지상의 잔디밭과 주차장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러자 손끝과 발끝에 전기가 흐르고 바이킹을 탈 때처럼 아랫배가 꾸욱하고 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귀로 들리고 묘한 흥분도 로그에 나타난다. 조금 더 상체를 밀어 본다. 종아리가 팽팽해진다. 여기서 다리에 힘을 뺄 수만 있다면 재현은 성공이다. 담배를 한 모금 더 깊게 빨아들이고 내쉬었다. 저 아래 쪽에서 바람이 불어 올라와 담배 연기를 위쪽으로 걷어 올렸다.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상상해 본다. 자유낙하의 순간, 무중력을 경험한다는데… 재현 시료는 반원을 그리며 아래를 향해 떨어질 것이다. 손발을 휘저어도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다는 것은 자유스러움과 동시에 서글픔이겠지?



    그리섬과 워릭은 오늘도 재현에 실패할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늘 의아하게 생각한다. 재현 시료에 입력된 상황을 혜연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재현에 성공했어야 한다.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고민을 나눌 대상이 없는 좁은 인간관계, 더구나 이제 사람들은 성폭행범이나 스토커로 보기도 한다. 이름 붙이면 거창한 것들이고 재현 조건은 완벽하게 갖추어진 셈이다. 그러나 재현을 실패하게 만드는 것은 늘 사소한 것들이다. 바닥에 닿을 때 아플 것 같다는 생각이나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될 것 같은 생각도 든다. 통장 잔고가 아깝게 여겨지며 주말에 보려했던 영화도 떠오른다. 그러면 슬그머니 내려와 담배 한 대를 더 피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럴 때 마다 사건의 원인이 그녀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인지 외부에서 입력받은 것인지 늘 혼란스럽다. 그녀 내부에 원인이 있었다면 장 대리로 사건을 재현하는 것이 가능할까? 재현 시료는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아 들였다. 벽에 맞닿아있는 무릎이 아리긴 했지만 이렇게 아래를 보며 피는 담배 맛은 특별하다.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왼 손으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폴더를 열었다. 진동은 김 과장의 문자 메시지 때문이었다. ‘재현 그만 하고 와. 괜히 고생하지 말고. 장 대리 것도 주문해 놓는다.’ 재현 시료는 갑자기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김 과장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타이밍과 메시지의 내용이 귀신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현 시료는 김과장과 박대리와 해장국을 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문자의 답을 보내려고 한 손으로 메시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알고 있던 곳이 맞는지 아니면 저기 회사 뒤편에 새로 생겼다는 집인지 확인해야 했다. 한 손으로는 담배를 들고 한 손으로는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는데 갑자기 진동이 울리며 핸드폰이 떨린다. 새벽 세 시에 맞추어 놓았던 알람이다. 입력하던 메시지가 사라질까 핸드폰을 잡고 있는 왼손으로 알람을 해제하며 담배 한 모금을 깊이 빨아들였다. 재현 시료가 손에 강한 통증을 느끼고 움찔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손가락에 끼고 있던 담뱃불이 끝까지 타 들어왔던 것이다. 그때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리며 구두가 벗겨졌다.



    로그에서는 처음 입력되는 무중력에 대한 메시지가 정신없이 출력되고 있었다. 후욱 하는 바람이 머리 위를 스쳐지나가고 시선은 건물을 아래부터 훑어 옥상을 지나 하늘로 향했다. 아까 떠올렸던 통장의 잔고와 주말에 보려 했던 영화에 대한 아쉬움도 출력된다. 결국 사건이 재현되었지만 혜연의 사건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씁쓸했다. 그리고 이 짧은 순간 무슨 생각을 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일 아침 사람들이 찾은 사건의 원인은 실제와 영 다를 것이라는 점이었다.







    2. 미스터리 프로그램

    의자 위로 한 걸음 올라선다. 지상도 한 걸음 가까워진다. 뒤를 돌아보니 방 안의 모든 것은 색이 사라지고 희미한 밝기만이 남았다. 발을 딛고 있는 창 아래만 겨우 색을 구분할 수 있다. 아래를 내려 보며 유리창에 이마를 대자 바람의 울림이 전해진다. 입김 때문에 지상의 세계는 부옇게 변한다. 창문을 열자 갑작스런 바람에 몸이 흔들린다. 방안의 공기가 바람이 되는 순간이다. 몸을 내밀어 오른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안는다. 무릎 위로 차가운 창틀이 닿자 손바닥에 습기가 돈다. 바람의 색은 무엇일까? 영사기에서 나온 빛이 스크린에 영상을 뿌리듯, 한 줄기 빛이 저 바람 불어오는 곳에 여러 색을 만들고 있다.



    색의 세계로 초대한 사람은 존 갈리아노였다. 화가가 아닌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고등학교 때 갈리아노의 패션쇼 화보를 보는 순간이었다. 모델의 피부는 짙은 파란색 페인팅으로 칠해졌다. 실크 소재의 원피스는 화려함의 극치였다. 빨강 마젠타 오렌지는 하나만 써도 튄다. 그 화려한 색들을 마음대로 썼지만 유치하지 않았다. 빨강을 중심으로 둔 채 오렌지와 마젠타가 서로 으르렁거렸다. 인접색이지만 보색대비만큼 돋보였고 뇌쇄적인 경지까지 갔다. 보통 사람은 쓸 엄두도 못내는 색들을 자유롭게 구사하며 그 색 모두를 자신의 발아래 두고 있음을 과시했다. 아이들은 화보를 이해하지 못했다. 갈리아노는 나에게만 속삭였다. 한 눈에 그가 말하고 싶은 바를 알았으니까. 마음 한 구석이 뜨거워졌다. 화가가 되려했던 마음을 버리는 순간이었다.

    첫 남자는 울트라마린이었다. 울트라마린은 화가들에게 가장 비싼 색이다. 물감의 원료가 준보석인 청금석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집트인들에게 하늘의 신을 둘러싸고 있는 파랑은 신성했다. 파랑은 차가운 색이다. 이성의 색. 하늘과 바다를 표현하는 광활함의 근원. 첫 남자였던 물리 선생이 고등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젊어서만은 아니었다. 큰 키에 눈매가 서늘한 잘생긴 얼굴 때문도 아니었다. 그는 수업시간을 정복하고 있었다. 당당한 모습으로 치열하게 가르쳤고 자신에게도 엄격했다. 말 잘 듣는 학생보다 어려운 질문을 하는 학생의 이름을 기억했다. 학생들이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선생이었다. 파랑은 후퇴해 보이는 성질 때문에 늘 거리를 두고 있어 보인다. 그래서인지 영국에서는 정절의 색이기도하다. 하지만 그가 나를 볼 때마다 그의 눈 속에서 다른 빛깔을 느꼈다. 물리 선생과의 만남은 그 색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했다.

    졸업식 며칠 후에 그에게 연락을 했다. 나는 질문을 한 적이 없지만 그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는 흔쾌히 좋다고 했다. 만나기로 한 날은 그 해 가장 추운 날 중의 하루였다. 나는 연극이 시작할 시간이 되서야 집에서 옷을 입기 시작했다. 어설픈 화장 따위는 하지 않았다. 대신 따뜻하고 귀여운 느낌을 주도록 밝은 분홍과 흰 색이 섞인 울 소재의 터틀넥을 입었다. 그리고 짙은 감색의 짧은 모직 스커트를 걸쳤다. 그리고 치마를 지나 무릎까지만 내려오는 검정 반코트. 높은 힐 따위는 신지 않았다. 집 바깥으로 나가자 바람이 매서웠다. 그가 얼마나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그와 만났을 때는 연극이 한 시간 정도 지난 후였다. 그는 코끝이 빨갰다. 왜 늦었냐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미안하다고, 저녁을 사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잠시 잠자코 있었다. 곧 됐다고 했고 TGIF에서 저녁을 샀다. 식사 시간 내내 대학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교했다. 이야기는 따분했다. 그러나 그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은 지루하지 않았다. 눈빛에서 분홍에 대한 갈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갖지 못한 색에 대한 끌림은 본능이다. TGIF를 나서자 바람에 손이 시렸다. 그의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의 손은 차갑고 매끈했다.

    파랑은 그림에서는 비싸지만 옷에서는 싸구려 색이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교회에서 입을 옷을 정하면서 파랑을 쓰지 못하도록 했다. 너무 흔해서였다. 인도에서 수입된 파랑의 원료인 인디고는 저렴했다. 물리 선생과 헤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부르면 언제나 달려왔고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구해 주었다. 손에 쥔 바닷물에서 파란 빛깔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더 이상 울트라마린의 화려함을 찾을 수 없었다. 헤어지자고 말한 것은 대학 1학년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이었다. 내 말을 듣자 그의 눈은 분홍이 되었다. 그가 열망하던 색. 난 그에게 분홍을 주고 파랑의 자유를 얻었다. 그를 통해 윤리나 도덕 따위와 상관없이 내 본능에 충실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노랑의 남자를 만난 적도 있다. 노랑은 색 중에서 가장 명도가 높다. 명랑하고 밝은 색. 하지만 명도가 높다는 것은 가볍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에 밝음만이 있는 줄 아는 철부지. 키는 작지만 귀엽고 곱상하게 생긴 남자였다. 노랑이 황금의 색이듯 부유했다. 그의 스포츠카는 검정이었다. 노랑은 검정을 경외하니까. 노랑이 갖고 있지 못한 진지함과 엄숙함에 대한 콤플렉스이다. 그는 어느 날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워있는 채로 나에 대한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았다. 자신이 지금껏 만나던 여자와 다르다는 둥. 사실 그는 나에 대한 찬양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남자인지를 말하고 싶어 했다. 게다가 착각하고 있었다. 난 웃으며 그의 볼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네가 아니고 내가 널 찍은 거야. 귀여워서.” 그의 표정이 변했다. “걱정 마. 아직은 귀여우니까.” 그는 이후로 연락하지 않았다.

    노랑은 배신의 색이기도 하다. 노랑은 가장 밝은 동시에 다른 색이 조금만 섞여도 색이 우중충하게 변한다. 예수를 배신한 유다의 옷은 노란색으로 칠해졌다. 16세기 스페인에서는 종교재판에 오르는 이단자는 노랑 망토를 걸쳐야 했다. 정수는 남성의 배반자였다. 비뇨기과의 남 간호사였던 정수는 남성의 치부를 폭로하는 재담꾼을 자청했다. 남자들이 갖고 있는 가장 유치한 콤플렉스와 튜닝이라고 불리는 온갖 방법에 대해 고해바쳤다. 그와 술을 마시는 밤은 쉴 새 없이 웃을 수 있었다. 퉁퉁한 몸매에 넙대대한 얼굴로 간호사 복을 입고 있는 그를 상상하면 웃음이 나왔다. 뭐하나 내세울 것 없었지만 넉살 좋음과 입담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여자를 기쁘게 할 줄도 알았으니까. 그러나 얼마 후 나 역시 정수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배신감을 느낀 것은 그를 마지막으로 본 다음 날 조간신문을 보았을 때이다.

    현우를 처음 만나기 전까지 그의 색이 노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정수와 착각할 정도로 닮았기 때문이다. 진희의 집에서 현우의 사진을 보았을 때 이름을 물어볼 정도였으니까.



    현우를 만나기 위해 파스쿠치를 향하는 마음에는 옅은 열기가 있었다. 분노와 회한, 이제는 정수와의 일을 담담히 떠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섞인 불분명한 색깔이었다. 파스쿠치의 현관에 다다를 때도 그것이 어떤 색인지 명확히 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금요일 저녁 사람이 붐비는 커피숍 정문에서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문을 밀고 들어가는 순간 2년 전 장면이 떠오른 것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밝은 귤색 조명과 경쾌한 음악 소리가 나를 감싸기 시작했지만 막상 보이는 장면은 파리한 형광등 불 빛 아래의 지하철역이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것은 어둠을 향해 깊게 뚫린 검은 터널이었고 축축한 공기의 질감이 뺨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앉아 있던 의자에서 나던 옅은 니스 냄새가 커피 향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파스쿠치는 붐볐다. 눈이 마주치는 남자는 많았지만 현우는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을 꺼내 그에게 전화를 했고 구석에서 손을 들며 엉거주춤 일어나는 남자가 보였다. 정수와 닮았지만 어두웠다. 그가 서있는 테이블까지 갔을 때 사진보다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노란 남방과 베이지 색 바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간단한 통성명을 한 뒤 자리에 앉았다. 현우는 입을 열지 않았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주위만 둘러보았다. 2분이라는 시간은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처음 만난 사람들이 아무 말 없이 서로 마주보고 앉은 시간으로는 영원과 같은 시간이다. 그 영원에 가까운 시간은 테이블 오른쪽으로 검은 터널을 불러왔다. 모든 색을 빨아들여 아무것도 구분할 수 없는 그곳.

    지하철 플랫폼 맨 끝에서 터널을 보고 앉아 있었다. 문득 반대편 플랫폼에 시선이 간 것은 갈색 때문이었다. 아무 색이나 섞으면 갈색이 된다. 빨강과 녹색을 섞어도, 파랑과 주항을 섞어도 아무 색에 검정을 섞어도 갈색이다. 본래의 빛깔과 열정이 제거된 색의 퇴락. 남자의 한 쪽 구두에는 갈색 진흙이 범벅이었다. 반대편은 깨끗이 닦아져 있었다. 내 시선은 갈색 구두를 지나 깨끗한 검은색 정장 바지를 따라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원래 말이 없나요?”

    현우에게 던진 말이다. 하지만 기억의 역류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게 던진 말이기도 했다. 그는 모습만 닮았을 뿐 완전히 다른 색의 남자였다. 한 눈에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남자였다. 단지 정수와 외모가 닮았을 뿐인 현우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무심코 던진 나의 말에 그의 표정은 변했다. 이곳저곳을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던 현우는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시선의 초점은 사라졌고 그의 얼굴에 나타난 것은 터널의 어두운 그림자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엇인가 번뜩였고 어둠 속에 숨겨진 새로운 색을 예감했다.

    잠시 후 현우의 표정은 편안하게 바뀌었다. 표정이 바뀐 이유가 궁금했지만 곧 알 수 있었다. 그는 나에 대한 체념을 통해 자신의 겸손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거기엔 자학적인 면이 있었지만 그 나름의 호의라는 것도 알았다. 나에 대해서 이것저것을 묻기 시작했다. 대화는 따분했다.

    “재미없을지도 모르지만…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드릴까요?”

    진희를 대학교 동아리 후배로 알고 있다는 화제 다음으로 생뚱맞았다. 현우가 이야기하는 방식은 말하기에 앞서 말하려는 것에 관계된 모든 배경 사항을 먼저 말하는 타입이었다. 상대방으로부터 공격당하기 싫어하고 항상 완벽하게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스타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그가 개발하고 있다는 프로그램이란 어떤 것이며 검증이라는 것은 어떤 과정이라는 것을 한 동안 설명해야했고 로그와 재현이 무엇인지도 이야기했다. 그러나 웃을 수 있었다. 재미있는 이야기에 앞서 한동안 진지하게 배경설명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처절하게 게임하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이 앞에 앉아 있었으니까. 현우는 들떴다.

    웃음이 잦아들면서 씁쓸해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정수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고 시답잖은 이야기나 듣고 있는 것이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현우는 계속 말을 이어갔고 나에 대해서도 많은 질문을 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몇 번은 상기된 얼굴로 내 생김새를 은근히 치켜세우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그의 웃음이 보기 싫었다. 몇 번 더 미소를 지은 것은 옅게 깔려있다 치밀고 올라온 분노를 덮기 위해서였다. 그 이후로 현우와 헤어질 때까지 관심이 간 것은 오직 어두운 터널 속에서 희끗 지나간 색의 잔상이었다.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루를 불이 꺼진 채로 놔두고 방에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옅은 피로감과 함께 멈추었던 기억의 역류가 다시 시작됐다.

    시선은 진흙투성이의 구두를 지나 검은 정장 바지를 따라 올라갔다. 진흙투성이였지만 양말은 깨끗했다. 그렇다면 저 진흙투성이 구두는 오늘 망친 것이 아니다. 아침에 어떤 정신으로 저 신발을 그냥 신고 나왔을까? 그런데 검은색 정장 바지에는 구김 하나 없다.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때 눈에 익은 얼굴임을 깨달았다. 정수였다. 피부는 꺼칠했고 머리는 이발할 때가 지나 덥수룩했다.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고 있었지만 아무런 감정도 얼굴에 나타나지 않았다.

    노랑의 밝음은 불안정하다. 명도가 밝다는 것은 주위 색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정수의 변화는 심했다. 어느 날부터 끝도 없이 우울해하다 또 미칠 듯이 행복해했다. 그리고 집요하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활기찬 노랑의 기운이 사라지는 것과 함께 밝고 쾌활한 재담꾼도 사라졌다. 둘이 어디론가 떠나자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도 했다. 그의 치근거림은 불쾌하고 끈적였다. “벌레 같은 자식. 꺼져.” 집 앞에서 기다리는 그를 내쳤다. 수은등 아래서 돌아서던 그의 뒷모습은 갈색이었다. 그리고 한 동안 연락이 끊긴 후 다시 나타나 건너편 플랫폼에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는 것이다. 정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하철 계단을 통해 이쪽으로 건너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사람들 뒤로 가 줄을 섰고 더 이상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그의 얼굴을 보게 된 것은 지하철이 들어온다는 안내가 들렸을 때였다. 그에게만 들리는 배경음악에 사이드 스텝을 밟듯 줄 옆으로 비켜섰다. 사람들은 지하철이 들어오는 터널 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정수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잠시 후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입모양만으로 말했다. ‘잘 봐’ 그리고 성큼 성큼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순간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하는 검은 터널과 정수에게 번갈아 눈이 갔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폭발하듯 열차가 들어왔고 정수는 앞으로 점프했다. 열차가 그를 물고 지나간 것은 순간이었다. 선로와 사람들 모두에게서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사라진 곳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다 몰려드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 개찰구를 지났다. 지상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몇 번의 계단을 더 거쳐야했고 오직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계단을 올라오는 동안 소음은 아련하게 귀를 떠나지 않았다.

    지상으로 나온 순간 숨이 찬 것과 동시에 발견한 것은 주위가 고요해졌다는 것이다. 잠시 동안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과점 안에는 엄마와 딸이 케이크를 고르고 있었다. 길옆으로 세워져 있는 차의 조수석에는 여자가 의자를 뒤로 한껏 젖히고 잠들어 있었다. 운전석의 남자는 창문을 내린 채 한 손을 바깥으로 내밀고 있었다. 양산을 받쳐 든 할머니가 천천히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지상의 사람들은 아무 일없이 자신들의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그 고요한 풍경의 중앙에는 화려한 붉은 화단이 있었다. 맨드라미는 마젠타였다. 빨갛고 구불구불한 꽃줄기, 촘촘히 박혀있는 융털들은 동물의 소화기관에나 어울릴 법했고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그것들은 화단에 빼곡히 박힌 채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다음 날 신문에는 모 비뇨기과 남자 간호사가 에이즈로 인해 신병을 비관하다 지하철에 투신자살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검정은 색일까? 사람들이 검정을 보는 것은 검정이 모든 빛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빛의 세계에서 모든 색의 합은 백색이지만 색의 세계에서는 모든 색을 섞으면 검정이 된다. 빛의 부재이자 모든 색의 합. 절대적인 검정을 만드는 법은 없다. 그 검정은 빛이 존재하지 않는 우주 공간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단지 빛의 부재를 나타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검정은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존재이기도 했다.

    정수가 사라지고 3개월 뒤 시외의 한 병원을 올라가고 있었다. 어스름한 저녁이었고 시멘트 냄새가 매캐했다. 손잡이는 군데군데 떨어져나가 가파른 계단은 위험해 보였고 계단의 전등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익명으로 에이즈 검사를 해주던 병원을 나서 다시 계단을 내려올 때는 이미 해가 진 뒤였다. 형광등은 수명이 다 된 듯 껌벅였다. 2층을 돌아내려가자 그 층은 불이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컴컴한 어둠속에서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내려가는 사이 천천히 검정이 내 몸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손끝과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파고들어 심장과 머리를 향했다. 검정이 스며들기 전에 빨리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둠은 벌써 계단과 허벅지까지 차올라와 발과 계단을 구분할 수 없었다.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었다. 노란 백열등 아래에서 갈색으로 퇴락했던 정수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나의 뒷모습도 천천히 탁하고 어둡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원색을 쓰는 것이 어색해졌다. 의상실에서는 내가 즐겨 쓰는 원색의 대비가 식상하다는 평을 전해왔다. 보색의 강한 대비는 빠르게 변하지 않으면 쉽게 질린다는 말이었다. 새로운 색을 찾을 수 없었다. 싼 티가 난다는 사람도 있었고 유치하다는 사람도 생겼다. 패션쇼에서 내 옷이 등장하는 순서가 바뀌더니 결국 한 회 걸러 나오기 시작했고 그마저도 잠시였다. 색에 대한 자신감이 사라졌다. 어떤 색을 써도 새롭지 않았다. 한 번도 주위에 내 디자인에 대해서 묻지 않았던 내가 처음으로 디자인 초안을 옆 동료에게 물어봤을 때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좀 그러네.”그는 그렇게만 답하고 소리 없이 웃었다.

    매일 아침 출근길 정수가 서있던 곳을 보지 않으려 늘 역의 맨 뒤에 섰다. 무심코 그 자리를 지날 때마다 치밀고 올라오는 것은 분노였다. 나의 색이 변질된 것에 대한 분노. 그러나 분노의 대상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사실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도 분노의 대상과 함께 사라졌다는 것도 깨달았다. 누구에게도 병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잘 봐’였다. 함께 할 수 있던 마지막 사람이 사라지는 장면을 잘 보라는 것이었을까? 그토록 매달리던 자신을 내쳤던 것에 대한 복수였겠지. 그 생각을 하면 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현우와 헤어질 때 그가 다시 연락하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았다. 그는 회색에 가까웠다. 가장 특성이 없는 색. 우울함의 색이자 삶의 기쁨과 정반대의 색. 그는 생김새만 닮았을 뿐 정수와는 다른 색이었다. 그를 만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우에게는 정수의 넉살좋음도 입담도 없었다. 그러나 잠시 스쳐지나갔던 색의 잔상이 문득 떠올랐다.

    회색의 불투명함에 덮여 있는 색. 그 색에 대한 궁금증은 새로운 색에 대한 기대로 이어졌다. 현우가 초점을 잃고 나를 쳐다봤던 표정이 정수가 마지막으로 쳐다보던 표정과 닮았다는 생각도 했다. 현우와 헤어진 다음 주 그가 애프터 신청을 하지 않았다고 진희에게 문자 메시지를 남겼다. 현우는 토요일에 시간이 되냐는 문자를 보내왔다.



    아직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 전인 5월 초였지만 한 낮의 햇살은 따가웠다. 현우가 새로 산 옷을 입고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검정색 티셔츠의 어깨와 배 부근에는 희미한 줄이 어색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줄처럼 현우도 어색해했다. 처음 만난 날보다 더 긴장해 있었다.

    “사진이 취미시기에… 근처에서 열리는 사진전이 있더라고요.”

    그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사진전이 현우의 깜짝 선물이었고 내가 놀라며 기뻐하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 그의 기대를 무시했다. 현우는 좀 풀이 죽은 듯했고 사진전이 열리는 곳을 찾기 위해 미리 인쇄해온 종이를 주섬주섬 펼쳤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끄덕여 따라오라는 몸짓을 한 후 두 발자국 정도 내 앞에 섰다. 그의 뒤를 말없이 따랐다. 그에게서 왜 어두운 터널을 떠올렸는지 알 수 없었다. 회색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회색은 다른 색에 비해 범위가 넓다. 보통의 색은 차가운 느낌과 따뜻한 느낌 중 어느 한가지에만 해당된다. 그러나 회색은 따뜻한 회색과 차가운 회색도 있다. 회색은 흰색과 마찬가지로 모든 색을 반사한다. 다만 모든 색을 공평히, 흰색보다 적게 반사할 뿐이다. 그래서 광채가 나는 도료로 회색을 덮으면 빛에 따라 숨어 있는 색을 보기도 한다.

    “여기서 한 10분 정도 걸어야 된답니다.”

    현우는 이따금씩 뒤를 돌아 내가 있는 것을 확인했고 묻지도 않은 말에 혼자 대답을 했다.

    “유명한 사진작가는 아닌 것 같더라구요.”

    “의외로 사진전이 열리는 곳이 많지 않던데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어차피 현우와 만나서 무엇을 하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전시장은 외진 곳에 있는지 현우는 대로변에서 약국을 끼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몇 분 걷지도 않았는데 현우는 땀을 흘렸다. 오른쪽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훔쳤다. 남색 손수건이었다. 몇 번 더 방향을 틀자 골목은 일방통행으로 바뀌었고 오르막길이 되었다. 현우가 걸음을 멈춘 것은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두 번 정도 이야기하고 난 다음이었다.

    “길을 잘못 들어왔나? 이 근처인데 여기가 우림빌딩이니까 잠깐만요.”

    현우는 붉어진 얼굴로 나를 스쳐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이 나와 있는 시간이 좀 더 길어졌고 아예 오른 손에 쥐고 다닐 때가 되었을 때는 20분이 넘게 걸은 뒤였다. 그가 당황했고 표정은 고통스럽게 변했다. 그 모습을 보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분노의 빨강으로 하루하루를 칠하던 어느 날이었다. 꿈을 꾸었다. 꿈에서 내가 서있는 자리는 플랫폼 맞은 편 정수의 자리였다. 지하철 역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 대신 역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맨드라미였다. 그것들은 역 안을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내가 서있는 자리만 동그랗게 남겨두었을 뿐. 그런데 자세히 보니 줄기위에 매달린 것은 꽃이 아니었다. 피에 물든 뇌수였다. 초록색 줄기 끝에는 주먹만 한 뇌가 달려있고 그것은 선명한 붉은 피를 머금은 채 핏방울들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맨드라미에게서 떨어지는 핏방울의 소리는 조용한 지하철역을 건조하게 울렸다. 바닥은 피로 흥건한듯했다. 핏물이 천천히 내가 서있는 자리로 서서히 넘어오기 시작했다. 그때 터널 안쪽에서 울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울림은 점점 커져갔다. 때를 놓치기 전에 앞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손을 뻗어 맨드라미 사이를 벌렸다. 손에 닿는 축축하고 끈적이는 느낌. 그 사이로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발자국도 미끈하고 끈적였다. 갑자기 터널 속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고 잠에서 깼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떠오른 기억은 정수와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던 순간이다. 그는 무표정했다. ‘잘 봐’ 그가 나에게 했던 말은 복수의 단어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내게 쉽게 탈출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탈출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 있다는 것도.

    지하철역에서 기다리는 자리가 바뀌었다. 정수가 사라질 때 서있던 자리에 다시 섰다. 그리고 정수가 있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는 그 사람의 차림새에서 눈의 띄는 색을 통해 그날의 운세도 점쳤다. 의외로 잘 맞았다. 보통은 평범한 색이었다. 그러나 귀걸이의 화려한 퍼플이 기억에 남던 날 유명한 여배우가 처음으로 내 옷을 사갔다. 흰 와이셔츠의 갈색 얼룩이 끔찍했던 날 패션쇼에서 내 옷을 입은 모델이 넘어졌다. 그러면 구름 위 누군가 나를 생각하며 어떤 여자의 펜던트 색을 고르고 어떤 남자의 넥타이의 색을 고르는 모습이 상상되곤 했다. 그리고 진희의 집에서 정수를 속 빼닮은 현우 사진을 보았을 때 저 위의 누군가가 내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생각도 했다.

    차츰 시선은 플랫폼을 거슬러 올라 터널 안의 검정에 더 머물기 시작했다. 그 어둠의 입구가 나의 내면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둡고 굴곡져 있으며 모든 색과 소리를 빨아들여 웅웅대는 곳. 가끔씩 응어리가 열차처럼 폭발하듯이 뿜어져 나오는 것도 비슷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색이 시작됐다.

    나의 디자인은 원색을 벗어났다. 검은색과 무채색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보였다. 갈색과 검정의 중간인 고동색의 탁함에 끌렸다. 파랑과 붉음의 기운을 동시에 품고 있었고 모호함은 명쾌함보다 깊이가 있었다. 지루하고 따분해 보이는 디자인이 오히려 미묘하고 신비스러움을 간직할 수 있었다. 탁함은 불투명함이고 무엇인가를 감출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원색의 채도를 낮추어 고동색이나 갈색 같은 탁함 속에 가두자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주위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패션쇼에서 걷는 내 작품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서도 빛나지 않았다. 하지만 볼수록 새로운 색을 발했다.

    병도 공부할 수 있었다. 5년이나 10년이 지나도 발병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도 알았다. 가끔 삶이 더 풍요로워졌다고 자위하는 순간도 있었다. 삶이 5년 혹은 10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때론 자유를 뜻하기도 했다.

    그리고 현우를 처음 만난 날, 그의 얼굴에서 다시 한 번 새로운 색을 예감했다.



    현우는 사람이 드물게 다니는 골목을 몇 번이나 지나서 사진전이 열리는 건물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차라리 건물을 못 찾는 것이 나을 뻔 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건물은 전시회가 열리는 건물이 아니라 후줄근한 일반 사무실 건물이었다. 달랑 입구에 붙어 있는 사진전 포스터 한 장을 떼버리면 이곳에서 사진전이 열리는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포스터는 한눈에 보더라도 개인이 직접 PC를 통해 인쇄한 조잡한 것이었다. 그 포스터 옆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쪽으로 화살표가 붙어있었는데, 그 화살표는 A4용지에 파란색 매직으로 사람이 직접 그린 것이었다. 현우는 땀을 닦던 손수건으로 잠시 입을 가리고 있었다. 현우는 내가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꼈는지 짐짓 자연스레 계단을 내려가려 했다. 하지만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천장에 붙어있는 회청색 바탕에 흰색 글씨의 ‘도레미 노래방’간판에 계속 눈이 갔다. 그를 따라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현우는 한걸음 내려갈 때 마다 주춤주춤 했고 이 상황이 좀 우습기도 했지만 아무런 표정 없이 그를 따랐다.

    지하로 내려가자 철제문 위에는 또 ‘도레미 노래방’이란 간판이 붙어있었다. 다행히 철제문에 사진전 포스터가 벽에 붙어 있어 실제로 사진전이 열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회귀’라고 명조체로 인쇄된 글씨는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강물 사진을 배경으로 쓰여 있었다. 작가 이름과 전시 기간이 그 아래 조그맣게 인쇄되어 구색을 갖추었다. 비록 그 포스터가 2월의 신곡 포스터 위에 덧붙여있긴 했지만.

    카운터에 앉아 있는 경비는 나이가 젊은 편이었다. 슬쩍 고개를 들고는 다시 보던 스포츠 신문을 넘기기 시작했다. 실내는 이젤과 비슷한 받침대 위에 사진들이 놓여 있었다. 의외로 많은 사진들이 있었다. 첫 번째 사진은 골목 안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이 흑백으로 인화되어 붙어 있었다. 반팔 반바지 차림의 남자 아이는 조금 긴 머리를 들썩이며 뛰고 있었다. 사진 뒤 쪽에는 인기 트로트 100선 포스터와 주류 반입 금지 플라스틱 푯말이 차례로 붙어있었다. 현우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빛을 철저히 괴리시킨 지하 노래방에서의 사진전이네요. 작가가 독특하죠? 이게 포스트모더니즘인가요?”

    나와 경비는 동시에 현우를 쳐다보았다. 잠시 후 현우는 말없이 다른 사진을 향했다. 다음 사진은 광각으로 찍힌 사진이었다. 빈 그릇을 오토바이 뒤에 싣고 막 출발하기 위해 시동을 거는 배달원의 모습이었다. 시동을 걸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크림색으로 염색한 머리가 옆으로 내려와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빈 그릇들이 회귀하려 하네요. 이 전시의 주제죠.”

    나와 경비는 또 다시 현우를 쳐다보았다. 현우는 머뭇거리며 다시 사진을 보았다. 그 사진 옆으로는 룸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고 문 위에는 타원형으로 생긴 딸기색 플라스틱 판에 ‘1’이라는 흰색 글자가 있었다. 그리고 유리창 안으로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현우는 더듬더듬 이야기했다.

    “자 그럼 1번 룸으로 가실까요?”

    현우는 자신이 이야기해놓고도 그 말을 무척 어색해 했는데 카운터에 앉아있던 경비가 혼잣말을 하며 일어섰다.

    “노래방 주인도 시답지 않더만 참 나. 이 아저씨는 가게 맡기고 도대체 어딜 간 거야? 장사나 잘하지. 회귄지 괴긴지 이건 뭐…”

    그리고 경비는 밖으로 나갔다. 현우의 표정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나는 굳은 표정이었지만 우스웠다.



    마지막 룸에서 나의 표정은 진심으로 굳어졌다. 사람들이 많은 장터의 사진이었다. 나물이며 옷가지며 온갖 물건을 파는 사람들을 크게 인화한 사진이었는데 내 시선을 묶어 놓은 것은 오른쪽 아래에 가슴 위부터 찍힌 남자였다. 그 남자는 지하철 플랫폼 반대편에 앉아 있다 열차와 함께 사라진 남자였다. 사진에서 걸음을 뗄 수 없었다. 정수의 얼굴은 검게 죽어있었고 카메라는 의식하지 않았다. 고개를 반쯤 숙이고 있었지만 넋이 나간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 역시 사람들 속에 있었고 사진 속의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내게는 그의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검은 터널이 있었다. 현우가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진 속의 정수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음 사진으로 지나가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 어둠 속 안을 들여다봐야 했다. 현우가 그 사진으로 한 발자국 다가섰다. 그제야 걸음을 뗄 수 있었다.

    사진을 다 보고 나갈 때야 노래방으로 내려오던 계단이 병원의 계단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시멘트 냄새가 났다. 현우가 앞장 서 지상으로 올라갔지만 구멍 속에서 차가운 바람 소리가 들렸다. 한걸음, 한걸음 지상으로 올라온 뒤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이후 현우가 무엇을 이야기하던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사진 속에 있는 터널이었다. 집중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사진전을 다시 찾아야 했다.



    다음 날 도착했을 때는 벌써 어둑해진 뒤였다. 어제와 달리 사진전에는 몇 몇 사람들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고 대부분 서로 아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노래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대화를 멈추고 잠시 나를 쳐다보았다. 자기들끼리 눈이 마주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눈빛들은 이리 저리 움직이다 한 남자로 쏠렸다. 그것으로 보아 사진작가이자 이곳의 주인임에 틀림없을 그 남자는 천천히 내게 걸어왔다. 비대한 남자였다. 목은 보이지 않았고 검은 색 뿔테 안경을 썼는데 관자놀이의 살이 안경다리를 덮으려 하고 있었다. 머리위로 살짝 걸쳐 쓴 야구 모자는 보통 사이즈가 분명했지만 그의 큰 머리통 때문에 무척 작아 보였다. 게다가 곱슬머리였다.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편하게 둘러보세요.”

    비대한 남자는 안으로 안내하듯 손을 펼쳐서 사진 쪽을 가리켰다. 동시에 흰자위가 유난히 많은 그의 눈길이 내 이마 콧날 입술 그리고 목을 차례로 쓰다듬으며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비대한 남자 쪽을 쳐다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노골적인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편하게 둘러보라는 말과는 달리 사람들은 계속 나를 힐끔거렸다. 장터의 사진이 나왔던 룸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제도 여기 한 번 왔었는데요,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요.”

    “네? 어떤.”

    비대한 남자가 한걸음 다가왔다. 그가 다가온 한걸음이 지나치게 크다고 생각하며 뒤로 물러나 방향을 돌려 어제 봤던 장터 사진이 있는 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비대한 남자를 한 번 쳐다보자 그가 따라왔다. 남자가 기름진 입술을 혀로 한 번 훑는 것이 고개를 돌리기전 시선에 들어왔다. 나는 장터의 사진을 보았던 룸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사진 앞에 섰다

    “이 사진, 언제 어디서 찍은 거죠?”

    “가만있자. 한 2년 전인가? 여기가 어디더라”

    비대한 남자는 옆으로 바짝 다가와 섰다. 그리고 생각하는 자세를 취하기 위해서 인 듯 양 손을 허리춤에 얹었는데 그의 팔꿈치와 내 팔 사이는 정확히 5cm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양 갈색 천 소파 쪽으로 얇은 시선을 보냈다. 룸 안에 있는 소파는 갈색 천 소파였고 여기 저기 정체를 알 수 없는 누런 얼룩이 있었다.

    “맞다. 횡성. 횡성 가기 얼마 전이었는데 육회 먹으러 갔었지. 거기 마을 이름이 뭐더라. 하여튼 횡성 근처에요. 거기 육회가 진짜 제대론데 그거 아세요? 육회가 진짜 맛있으려면 소를 잡을 때부터 다르게 해야 한다는 거? 잡을 때 마취 시켜서 정신을 잃게 하면 안 되거든요. 자기가 무슨 일을 당할지 알게 될 때 피에 뭐라더라? 무슨 성분이 나오는 데 그게 육회의 맛을 다르게 만들거든요.”

    비대한 남자는 이제 살짝 더 방향을 튼다. 그리고 비대한 남자의 털이 수북한 팔뚝은 내 팔 쪽으로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사진 속 동굴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의 시선을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꿈틀꿈틀 다가오는 징그러움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혹시 작품 파나요?”

    “아… 사실 아는 사람들한테 하는 전시회라 판매는 생각지 않았는데요. 사실 마음에 드신다면 그냥 드릴 수도 있어요.”

    육회가 생각나서 그랬을까? 자신의 엄지손가락으로 기름진 아랫입술을 한 번 훑었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입안으로 넣어 쑥 한 번 빨았다. 비대한 남자는 자신이 어떤 행동이 어떤 느낌을 주는지 의식조차 못하는 듯했다. 이제 그의 팔꿈치와 내 팔 사이는 닿을락말락했다. 그의 눈을 바라보며 .검은 눈동자가 작아진 것은 흰자위에 지방이 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십만 원이면…?”

    그는 이제 다른 종류의 관심사가 생겼는지 작은 눈동자가 잠시 위를 향했다. 그리고 팔꿈치는 가까워지는 것도 잠시 멈췄다.

    “여기서 횡성이면 좀 거리가 되죠?”

    “그럼 십오만 원?”

    “아. 네. 뭐 그럼”

    그의 팔꿈치가 내 팔에 닿기 바로 전 방향을 틀고 룸 바깥으로 나갔다. 비대한 남자는 장터의 사진이 들어있던 액자를 들고 따라 나왔다.

    “아. 이 사진 어디가 마음에 드셔서 사 가신다는 거예요?”

    비대한 남자는 자신의 사진이 돈을 받고 팔린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듯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사진을 보며 스스로 말했다.

    “장터의 모습이 좀 생동감 있게 잡히긴 했죠. 인물들도 표정이 좋고.”

    그의 손가락은 비대하고 짧았다. 그는 액자 뒷면의 조임 쇠를 풀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는듯했다. 사진을 들고 어서 나가고 싶었고 벌써 지갑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의 굵은 손가락의 움직임이 답답했다.

    “줘 봐요.”

    액자를 카운터 위에 올려두고 조임 쇠를 돌렸다. 네 개의 조임 쇠가 모두 풀리고 사진을 고정하던 뒤판을 들어냈다. 드디어 사진을 빼는 순간, 그것은 칼날이 되어 내 오른손 엄지를 깊게 파고들었다. 붉고 뜨거운 피였다. 마음은 차갑게 식었다.

    “어이쿠. 조심하시지.”

    비대한 남자는 그 순간을 놓칠 새라 덥석 내 손을 잡았다. 피가 흐르는 것도 개의치 않고. 싸늘한 마음으로 그의 두꺼운 손을 바라보았다. 털이 수북한 손등에 가려 내 손은 보이지 않았다. 카운터 책상위에는 화장실에서 쓰는 두루마리 휴지가 있었고 그는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은 채로 한 손으로 휴지를 돌려 자르려 했다. 그리고 내 손을 놓는 대신 굳이 휴지를 겨드랑이에 낀 채 끊었고 그 휴지를 뭉친 손으로 나의 오른손 엄지를 꾹 눌렀다.

    “깊게 베이셨네.”

    그가 손을 잡도록 놔둔 채로 잠자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대한 남자의 눈동자는 아까 훑다가 말았던 목을 지나 쇄골에 잠시 멈추고 그 아래로 깊숙이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손을 잡은 채로 그가 말했다.

    “이거 초면에 실례인 줄은 아는데 혹시 모델 한 번 돼 주실 수 있나요? 이거 미모가 워낙 출중하셔서.”

    “놔.”

    어느 새 주위에 있는 남자들이 내 주위로 모여들어 있었다. 지금 육회 이야기를 꺼내면 이 남자가 자신도 모르게 피가 묻은 오른 손을 입 속으로 쑥 넣었다 뺄 것 같다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그의 입안에 상처가 있다면, 그리고 피가 스며든다면…. 아무 말 없이 손을 빼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 카운터에 둔 뒤 사진을 말아 노래방을 나갔다. 벌써 어두워진 하늘 때문인지 계단을 딛는 발끝이 보이지 않았다. 발을 딛고 올라가야 하는데 걸음을 내딛을 수 없었다. 그리고 철제문 뒤의 무엇인가가 나를 아래로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검정에 가까운 남색이었다.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지상으로 올라와 뒤를 돌아 계단 아래를 보았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자리에 누울 때까지 비대한 남자를 머릿속에서 떠나보낼 수 없었다. 그의 손에 상처 자국은 없었다. 그러나 손바닥 안에도 없었을까? 혹시 손목에는?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가 아무리 작은 눈동자를 갖고 있다고 해도, 그의 입술이 아무리 기름지다 해도, 그의 팔꿈치에 아무리 털이 수북하다고 해도, 룸 안에 있던 천소파의 얼룩이 모두 그의 것이라고 해도, 그가 육회를 생각하며 내 가슴을 쳐다봤더라도, 나의 피를 그가 입으로 빠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과 같은 일이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것은 아무리 조심해도 때로는 막을 수 없는 것이며 되돌릴 수도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마음이 싸늘해졌다.

    인생은 우연의 연속이라고 생각해왔다. 내 인생에서 중요한 일들은 대부분 그냥 벌어진 일들이었으니까. 아름답게 태어난 것, 부모가 부유했던 것, 그리고 정수를 만난 것까지. 그런 일이 우연한 일이 아니고 누군가에게 책임이 있는 일이라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진희의 집에서 정수를 닮은 현우의 사진을 보게 된 것이나 현우를 처음 만난 날 정수에게서 낯선 색을 떠올린 것, 현우를 따라간 사진전에서 정수의 사진을 보게 된 것은 우연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현우가 이야기했던 프로그램 마냥 모든 일들이 미리 계획되어 있던 것 같다. 모든 경우의 수가 계산된 후 진행 경로가 정해져 있는 프로그램. 그러나 어떤 목적을 위해서인지 어떻게 진행될지는 미스터리했다. 집에서 펴본 장터의 사진 속에는 여전히 검은 터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터널 안에서 나지막한 진동이 들려오는 듯했다.



    현우와 영화를 보기로 한 날은 5월의 마지막 금요일이었다. 현우는 다들 영화가 재미있다고는 하는데 막상 재미있을지는 모르겠다며 특유의 자신 없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그날 아침에도 정수의 자리에는 누군가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볼 수 없었다. 어떤 여자가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회색 스커트에 검정 와이셔츠 차림의 정장이었다. 꼿꼿이 서서 지하철이 들어오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는 짧게 말아 올렸고 화장도 거의 하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미인이었다. 아무런 장신구도 하지 않았는데도 눈에 띄었다. 얼굴은 작고 단아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어느 한 가지 색도 집어 낼 수 없었다. 시선 역시 열차가 들어오는 곳을 바라보고 있을 뿐 한 치의 미동도 없었다. 곧 열차는 도착했고 열차가 지나간 뒤 플랫폼 반대편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후에 잠시 한가한 시간이 생겼다. 눈을 감고 처음 현우를 만날 때 희끗 보았던 색을 떠올려보려 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 색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졌다. 문득 핸드백 속의 진동이 울렸다. 엄마의 문자 메시지였다. 외삼촌이 아파 서산으로 병문안 간다는 건조한 문장. 늘 몸이 안 좋다던 삼촌이라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그 색이 희미해지는 이유는 원래의 색에 내가 바라는 색을 덧칠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극장에 도착했을 때는 영화가 시작한 후였다. 현우는 환한 얼굴로 매표소 옆에서 표를 흔들어 보였다. 청바지에 노란색 티셔츠 차림이었다. 촌스러웠다. 그는 아직 광고 중일 거라는 말과 함께 검표하는 곳을 지나 상영관으로 향했다. 현우는 6이라고 쓰인 상영관 앞에서 좌석을 확인했다. 앞쪽 가운데 좌석이어서 스크린과 가까웠다. “자리가 좀 앞쪽이에요.”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 뒤로는 어두운 통로가 있었다. 아직 영화는 시작하지 않은 듯했고 다른 영화의 광고가 한창인 듯했다. 광고하는 영화는 액션물인 듯 터지는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그러나 어느 순간 광고가 끝난 듯 고요해졌다. 티브이 볼륨을 줄인 듯했고 나지막한 이명이 웅웅거리며 빈자리를 채웠다. 어둠 속에서 사물은 더 뚜렷해졌다. 앞에 걸어가는 촌스런 노란 티셔츠가 허공에서 홀로 움직이는 듯했다. 구부러진 통로를 따라 왼쪽으로 돌았다. 좌석 맨 뒤쪽으로 연결되어 있어 좌석으로 가기 위해선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현우가 앞장섰다. 그런데 아직 암순응이 시작되지 않아. 발끝과 계단을 구분할 수 없었다. 이명 때문일까? 주위의 사물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시외의 한 병원을 내려오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무심코 들어선 골목에서 늘 피하고 싶던 사람과 눈이 마주친 것과 같이. 손끝과 발끝에서 스멀스멀 심장과 머리를 향해 파고들던 검정의 느낌이 생생했다. 이명이 고막과 고막 사이 어디선가 들려왔고 구토의 예감이 들었다. 현우가 자신의 오른쪽 허리 뒤로 핸드폰을 켠 것은 그때였다. 작고 시린 불빛 하나가 내 발 밑쪽을 비추었다. 그리고 촌스런 노란 티셔츠가 한 손을 허리춤을 댄 채 뒤뚱 뒤뚱 내려가기 시작했다. 난 묵묵히 그의 뒷모습을 보며 계단을 내려갈 수 있었다.

    좌석에 앉자 영화는 곧 시작했다. 영화의 시작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바다였다. 화면은 조금 밝아지더니 한 여자가 배에 타고 있는 것이 어스름하게 보였다. 달빛 때문인지 화면은 푸르스름해지며 좀 더 밝아졌다. 배는 달빛을 받은 울트라마린이었다. 여자는 홀로 노를 저었다. 다음 장면은 여자가 혼자 걷고 있었다. 차가운 파우더블루의 달빛 속에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노란 우체통에 편지를 넣었다. 음악의 시작은 극적이었고 이명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영화는 빛과 색의 향연이었다. 모든 색은 햇빛 아래서 온전히 자신을 드러냈다. 빛으로 가득한 바다. 색을 감추거나 계산하지 않았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의 감정에 충실할 뿐이었다. 유치하더라도 솔직한 감정. 바다는 빛으로 가득했다. 잊었던 감정들이 살아났다. 원색의 즐거움. 초월했다고 여긴 것들은 내 안에 억눌려 있었을 뿐 그대로 살아있었다. 영화는 즐거웠다.

    현우의 팔이 닿은 것을 느낀 것은 피어스브로스넌의 노래가 형편없다고 느낄 때였다. 몸이 닿을 것을 조심하던 평소와 모습과 달리 팔꿈치를 댄 채 가만히 있었다. 그를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무척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숨소리가 팔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 진폭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현우는 어색하게 내 팔 옆에 가지런히 그의 팔을 내려놨다.

    문득 다시 궁금해졌다. 왜 현우에게서 어두운 터널을 보았는지. 여전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지하철 플랫폼 맞은편에 정수가 서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갈색 구두와 양말, 바지, 와이셔츠, 그의 모습은 늘 선명했다.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줄 뒤로 가서 서는 모습. 줄 뒤에 서있지만 퉁퉁해서 옆모습이 슬쩍 보인다. 그리고 배경 음악에 스텝을 밟듯 슬쩍 옆으로 한 걸음 비껴서는 것은 정수가 아니라 현우로 오버랩 되었다. 현우의 표정은 무뚝뚝하지만 정면을 쳐다보고 있다. 터널 속에서 진동이 들려온다. 원래대로라면 현우는 나를 한 번 쳐다봐야 한다. 그러나 그럴 기미도 없다. 그냥 정면을 쳐다보며 성큼성큼 걸어 나온다. 그리고 터널에서 들리는 소리는 점점 더 커져간다. 열차가 폭발하듯 튀어나오는 순간. 가만히 현우의 손등을 감쌌다.

    손바닥 안에서 전해지는 그의 떨림은 소박했다. 만약 모든 사실을 그에게 털어놓으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현우라면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이해해줄 것 같기도 하다. 영화에서는 노래가 다시 시작됐고 스크린을 채우고도 흘러넘친 밝은 빛은 잠시 나와 현우를 따뜻하게 감쌌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잠시 후 그의 손등을 가만히 세 번 두드렸다. 그것은 다짐의 표시였다. 현우를 믿지 못하기보다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는 해피엔딩이었고 영화관을 나서면서 현우는 무척 들떠 있었다. 그런 그가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는 택시를 잡아주고 잘 모셔달라는 부탁을 몇 번이나 하고는 기사에게 택시비를 건넸다.



    택시는 도심을 지나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택시가 부수고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의 파편은 택시 안으로 흩날렸다. 그 시린 파편은 극장 계단에서 발밑을 비추던 불빛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촌스런 노란 티셔츠도. 영화의 엔딩 장면은 산꼭대기의 교회당에서 열리는 결혼식이었다. 딸의 결혼식에 초대된 하객들은 딸 대신 엄마가 결혼하는 것을 축복하게 된다. 딸은 결혼 대신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피어스브로스넌이 메릴스트립에게 무릎을 꿇고 청혼하는 장면에서 전화가 울렸다. 엄마였다.

    “여기 아직 서산인데. 오늘 못 올라갈 것 같다.”

    “응.”

    “외삼촌이 많이 안 좋다. 골수 이식이 필요하단다. 가족들부터 모두 검사를 받아보기로 했어.”

    “그래. 알았어.”

    역시 건조한 전화 통화였다. 전화가 끊어진 후 장면은 계속됐다. 그러나 귓가에 잔잔하게 울리던 아바의 노래 소리는 이미 사라졌다. 하객들은 여행을 떠나기로 한 딸과 새로 탄생한 부부를 축복한다. 하지만 음악이 사라진 그 장면은 현실감이 없었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거실의 불은 켜지 않고 어두운 채로 놔뒀다. 늘 하던 대로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화장대 앞에 앉아 화장을 지웠다.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은 뒤 옷을 벗고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을 틀고 가만히 머리를 가져다 댔다. 머리를 타고 등을 지나 다리로 향하는 물줄기를 가만히 느꼈다. 어떻게든 골수 이식 검사는 피해야 했다. 핑계가 마땅치 않으면 그냥 싫다고 하자. 억지로 끌고 가서 검사를 받게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열차에 들고 탈 물건들을 챙기지 못했는데 벌써 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가 들리는 듯했다. 아직은 아니다. 한동안 그러고 있자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샤워를 마친 뒤 거울에 몸을 비춰보았다. 얼굴에는 잔주름도 그 흔한 기미의 흔적도 아직 없다. 목과 어깨 가슴과 배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몸 어디에도 군살은 없다. 내 몸 어딘가에는 발병을 기다리는 타이머가 있겠지만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뒷모습을 보기 위해 뒤를 돌아 거울을 보는 순간 등 가운데 빨간 씨앗들이 보였다. 거울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자세히 살폈다. 그것은 발병의 신호인 카포시 육종과 일치했다. 연자주색 구진형 육종. 그 씨앗은 자라 싹을 틔우고 결국 맨드라미로 변해 나와 내 주위의 사람들의 색도 물들일 것이다. 화려한 마젠타의 맨드라미가 욕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나를 위한 배경음악이 계속 들리고 있었는데 못들은 척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은 이미 시작됐고 더 이상 박자를 놓치면 영영 춤을 못 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식 웃음이 났다.



    의자 위로 한 걸음 올라선다. 지상도 한 걸음 가까워진다. 뒤를 돌아보니 방 안의 모든 것은 색이 사라지고 희미한 밝기만이 남았다. 발을 딛고 있는 창 아래만 겨우 색을 구분할 수 있다. 아래를 내려 보며 유리창에 이마를 대자 바람의 울림이 전해진다. 입김 때문에 지상의 세계는 부옇게 변한다. 창문을 열자 갑작스런 바람에 몸이 흔들린다. 방안의 공기가 바람이 되는 순간이다. 몸을 내밀어 오른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안는다. 무릎 위로 차가운 창틀이 닿자 손바닥에 습기가 돈다. 바람의 색은 무엇일까? 영사기에서 나온 빛이 스크린에 영상을 뿌리듯, 한 줄기 빛이 저 바람 불어오는 곳에 여러 색을 만들고 있다. 그 색은 이제 영상을 만들기 시작한다.

    사진전의 현우도 등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적으로 회귀하려던 빈 그릇들, 그리고 1번 룸을 가리키던 그의 어색한 표정과 남색 손수건도 보인다. 계단을 내려가던 노란색 티셔츠도. 문득 현우에게 할 말이 있다고 생각한다. 전화기를 들어 통화 버튼을 누른다. 하지만 곧 종료 버튼을 다시 누른다. 너무 긴 이야기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무엇이 생각난 듯 문득 아래쪽을 쳐다본다. 여름을 앞둔 나무들은 잎들이 무성하고 경비실 위의 세 그루의 나무는 나뭇잎들을 모아 동그란 모양의 구멍을 만들고 있다. 그 터널은 경비실 지붕에 칠한 페인트 때문은 아니더라도 잠시 밝아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신비한 색이 번뜩인다. 가만히 그곳으로 손을 뻗는다.



    * 색의 상징과 역사, 성격에 대한 대부분의 내용은 에반 헬러 ‘색의 유혹’ 1,2에서 참고하였습니다.

    ** 색의 표현에 대한 내용은 최경원의 ‘붉은색의 베르사체 회색의 아르마니’를 참고하였습니다. 특히 존 갈리아노의 의상을 표현한 부분, 무채색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낸 부분이 해당됩니다.
    정재민

    정재민

    1976년 서울 출생

    서강대 컴퓨터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 조남현 문학평론가·이승우 소설가

    예심을 거쳐 올라온 소설 가운데 우리가 주목한 작품은 세 편이었다.

    ‘버퍼링 중입니다’는 속도감이 있고 이야기 전개에 무리가 없었다. 유년 시절의 상처를 지닌 청소년 상담사를 등장시켜 생명의 고귀함을 환기시키고 인간의 연계된 삶과 도리에 대해 성찰하게 하는 주제가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드라마의 대본을 연상시키는 대화 위주의 서술과 평범한 문장은 마음에 걸렸다.

    ‘포르노에 대한 생물학적 지평에서의 인상비평’은 이색적인 소재에 대한 성실한 자료 수집과 독특한 시각이 시선을 끌었으나 넘치는 정보가 서사 속에 용해되지 못해 소설이라기 보다 보고서를 읽는 느낌을 주었다. 분량이 늘어나더라도 인물들이 벌이는 풍부한 사건을 앞세워서 소설을 진행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미스터리 존재방식’은 핸드폰 프로그래머인 남자와 디자이너인 여자의 시선을 교차해가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일목요연하게 설명될 수 없는 삶의 신비를 밀도 있게 추적하고 있다. 전문 분야에 대한 취재도 신뢰를 준다. 느슨하지 않은 추리적 구성과 우연과 신비까지도 애초의 프로그래밍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인식을 유도해내는 차분하고 진지한 보폭도 믿음직스러웠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미스터리 존재방식’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합의했다. 축하를 보낸다.
  • 정재민

    정재민

    1976년 서울 출생

    서강대 컴퓨터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으면 두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방법을 알 수 없을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면 걷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한심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시간을 멈출 수 없는 까닭은 불현듯 찾아오는 특별한 순간 때문입니다. 어슴푸레한 형체들이 움직이며 씨줄과 날줄을 엮어 본모습을 드러냅니다. 제 속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지만 낯선 것들입니다. 짓는 사람인 동시에 목격하는 사람이 됩니다.

    아내와 두 아이를 생각하면, 남과 같이 달려야 할 이 시간에 걷는 것이 사치스런 행동 같았습니다. 그런데 심사위원 선생님들이 등을 두드려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기쁘게 걷겠습니다. 더 많이 낯선 것들을 불러오겠습니다.

    이 땅 위에 발을 디딜 수 있도록 해주신 아버지 어머니 늘 존경하고 감사드립니다. 박상우 선생님, 존경할 수 있는 스승님을 곁에서 뵐 수 있다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소행성 B612 문우들과 같이 배우는 시간은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든든한 동생 내외에게도 기쁨을 전하고 싶습니다. 문학의 근처도 가보지 않았던 제가 갑자기 소설을 쓰겠다고 했을 때 선뜻 그러라고 했던 사람. 저보다 더 저를 믿어준 아내에게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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