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제까지 살아 있는 사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들의 두 개의 무덤을 넘어
마지막 날이 예고된 마야 달력처럼
뚝 끊어진 길을 건너
돌아오지 않을 숲 속엔
정수리에서 솟아난 나무가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수많은 손바닥이 흔들린다
오늘의 얼굴이 좋아 어제의 꼬리가 그리워
하나하나 떼어내며 잎사귀 점치면
잎맥을 타고 소용돌이치는 예언, 폭포 너머로 이어지는 운명선
너의 처음이 몇 번째인지 까먹었다
톡톡 터지는 투명한 가재 알들에서
갓난 내가 기어 나오고
각자의 태몽을 안고서 흘러간다
물방울 되어 튀어 오르는 몸에 대한 예지
한날한시에 태어난 다른 운명의 손가락
눈물 흘리는 솜털들
나이테에서 태어난 다리에 주름 많은 새들이
내일이 말린 두루마리를 물고 올 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점괘엔
나는 어제까지 죽어 있는 사람
권민경
1982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재학
이시영 시인·이광호 문학평론가
예심을 통해 올라온 작품들 중에서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작품은 네 사람의 것이었다. 임춘자 씨의 ‘주유소의 형식’ 등 6편은 안정된 표현력과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한연우 씨의 ‘그늘의 위대한 고집’ 등 6편은 언어에 대한 수사적 능력에서 장점을 보여주었다. 류성훈 씨의 ‘저녁의 진화’ 등 5편은 어법의 상대적인 참신함이 인정되었다. 권민경 씨의 ‘대출된 책들의 세계’ 등 5편은 시적 언어의 능력과 상투성을 비껴가는 감각이 돋보였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것은, 작품들 사이의 편차가 적었던 임춘자 씨와 권민경 씨의 시들이었다. 임춘자 씨의 작품들이 가진 안정감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들은 평가할 만한 것이었으나, 설명적인 부분들이 감상적인 의미 안으로 시를 가두었다. 권민경 씨의 시는 묘사와 표현의 감각이 청신했다. 당선작이 된 ‘오늘의 운세’라는 작품의 경우, 개인적 운명과 삶의 시작을 둘러싼 시적 해석이 세밀하고 다채로운 이미지들을 통해 펼쳐지고 있었으며, 생의 아이러니를 포착하는 방식도 흥미로웠다. 심사위원들은 시간의 아이러니에 살아있는 이미지를 부여하는 능력을 중요한 가능성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
권민경
1982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재학
왁! 하고 놀래주고 싶어요. 간질이고 꼬집고 싶어요. 점점 더 철없어질 거야. 그건 자신이 있어요. 무서운 게 없지만 못난 시 쓸까 봐 두려웠어요. 이제 즐겁게 걱정할래요. 마음껏 뛰어 다닐래요.
책과 한 우리에 넣어준 엄마 아빠께 감사해요. 그게 아니었다면 뭐가 되어 있을까. 늑대소녀 정도가 아닐까. 늦은 입학에 등록금 보태주신 할머니, 쓰니와 우리 공사판 인부님들, 예대 동기 언니들과 멋진 형부님들, 사리와 엉식 식구들, 발상 스터디원들과 심화과정 학우들, 고맙습니다. 이효영 군의 소설은 제일 재밌어요. 효와 함께 걸어갈 생각에 즐거워.
김혜순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아무 것도 쓰지 않았을 거예요. 황병승 선생님의 “네 목소릴 내라”는 말씀은 잊지 않고 있어요. 청강생으로 받아주신 이원 선생님은 “시인은 예언의 지점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어요. 저 자신을 예언하자면, 오래오래 철없는 시인이 될 거예요. 박성원 선생님은 단점보다 장점을 살려주셨어요. 글을 써도 되겠다는 자신감은 그때 생겼답니다.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려요. 도망치지 않고 오래 서 있겠어요. 못생긴 저를 예쁘게 길러주신 조동범 선생님. 기쁨이 되는 제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철없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해서 미안해요. 이제 막 태어난 어른이에요. 어느 시에서처럼,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