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목소리

by  방동원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한국에서 불법체류 상태로 근무하고 있는 파키스탄인 노동자 시논은 한 달 전, 작업 중 사고로 인해 손가락 두 개를 잃었다. 시논은 병원에서 3주간 물리치료를 할 것을 권유받고는 회사 측에 치료비를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이후 시논이 일하고 있던 공장의 사장은 인권센터 소장으로부터 시논의 사고에 대해 노동부에 산업재해로 처리하고자 요양 신청을 하겠다는 연락을 받는다. 사장은 산재처리를 하게 되면 다음 공사를 수주 받는데 큰 지장이 생긴다는 생각에 시논을 사장실로 부른다.

    사장은 이제까지 그래왔듯 시논의 마음을 사서 문제를 쉽게 해결하고자 한다. 그는 먼 타국에서 어렵게 노동 중인 시논의 처지를 이해한다며 급하게 술자리까지 마련하지만 회교도인 시논은 술과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이는 사장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소주잔만 비워나가던 사장은 시논과 시논의 나라, 시논의 종교 등에 대한 몰이해와 비난을 드러내면서도 듣기 좋은 말로 시논을 회유하려 하지만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시논에게 사장의 은유적인 화술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수수께끼 같기만 하다.

    술자리가 이어지면서 상황은 조금씩 뒤틀려간다. 자신의 현명한 대처 덕분에 세 개 잃을 뻔한 시논의 손가락을 두 개밖에 안 잃게 되었다는 이야기라거나, 돈을 벌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이야기, 먹고 싶은 거 다 참아가면서 자수성가한 이야기 등등을 늘어놓으며 ‘못 사는 나라’의 ‘근면하지 못한 사람’인 시논에 대해 절대적인 우월의식을 보이던 사장은 어느 순간부터 그에 대한 묘한 열등의식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결제대금을 독촉하는 거래처의 전화와 아내의 잔소리까지 반복되면서 빨리 일을 마무리 짓고자 하는 그의 시도는 조급해진다. 뿐만 아니라 그가 시논을 설득하기 위해 하는 말들은 시논의 어눌한 한국어로 인해 옆길로 새나가기 일쑤다.

    결국 사장은 회사가 어려우니 산재처리를 하지 말아달라고 직접적으로 부탁하면서 돈이 든 봉투를 내민다. 시논 역시 산재처리가 되면 자신도 강제 출국해야 하는 것을 알기에 사장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인권센터 소장에게 충고 받은 대로, 그에 대한 구체적인 보상금을 요구한다.

    사장은 마지못해 시논에게 돈이 든 봉투를 추가로 내밀며 한 가지를 더 제안한다. 그는 회사가 어려운 지금의 시점에서 입찰한 공사를 못 따내면 아주 힘들어질 수밖에 없으니 경쟁업체의 공사 입찰가격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다. 그 경쟁업체는 시논이 전에 일했던 곳이자 최근 한국 국적을 취득한 파키스탄 친구가 본사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장은 그 친구를 통해 정보를 빼내오길 원하지만 시논은 단번에 제안을 거절한다. 그 친구뿐만 아니라 회사의 모든 직원들이 그 사장을 존경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이다. 경쟁자와 비교 당했다는 느낌이 들자 사장은 이제껏 참아왔던 감정이 술기운과 함께 폭발한다.
    등장인물
    사장

    시논
    경리
    사장의 공장 사무실.

    무대 중앙으로 책장이 있고, 그 옆으로 문이 하나 있다.

    무대 오른쪽으로는 사장의 책상이 있고 그 안쪽 벽으로 조그만 냉장고 하나가 있다.

    무대 왼편으로는 작은 탁자와 의자 세 개가 있다.

    막이 열리면 작업복 차림의 사장이 의자에 앉아서 코를 드르렁거리며 자고 있다.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사장이 깜짝 놀라 잠을 깬다.
    사장 네.
    작업복 차림의 시논이 들어온다. 시논의 한쪽 손가락에는 붕대가 감겨져있다.
    사장 아, 시논씨. 어서 와요.

    시논 (앉는다. 잠시 사이)

    사장 요즘 어때요?

    시논 (붕대가 감겨진 손가락을 만진다) 조금 아파요.
    (사이)
    사장 그래도, 할 만하죠?

    시논 아니요. (잠시 사이)

    사장 한국에 온 지는 얼마나 됐어요?

    시논 일 년…

    사장 한국에서 생활하는 거 힘들죠?

    시논 네.
    (사이)
    사장 가족들 많이 보고 싶겠네. 아직 결혼은 안 했죠?

    시논 했어요.

    사장 스물다섯이라고 하지 않았나?

    시논 맞았습니다.

    사장 애는 아직 없죠?

    시논 열 명…
    (사이)
    사장 부인이, 그렇지, 네 명까지…

    시논 아셨습니다. (잠시 사이)

    사장 다른 건요?

    시논 예?

    사장 그러니까 다른 건 괜찮으냐고요?

    시논 다른 건 없습니다.

    사장 거, 왜, 그러니까… 아, 그 손가락은요?

    시논 (붕대가 감겨진 손가락을 만진다) 지금 세 개 있습니다. (잠시 사이)

    사장 음식은 어때요?

    시논 먹었습니다.

    사장 아니, 음식은 입에 맞느냐고요?

    시논 예? 아, 음식 크기 다 다릅니다.

    사장 (잠시 고민하다가) 아, 그러니까, 처음에는 다들 음식 때문에 고생을 좀 하죠. 그래도 참고 먹다보면 괜찮아질 거예요. (잠시 사이) 한국 음식이 몸에 얼마나 좋은데. 김치 같은 것도 그렇고.

    시논 김치 알아요. 처음엔 커요. 자르면 입에 맞아요.

    사장 여태까지 먹어본 것 중에서 뭐가 제일 맛있어요?

    시논 커리.

    사장 아니, 한국 음식 중에서?

    시논 소고기 불고기 맛있어요. (잠시 사이)

    사장 요즘은 불경기라 자주 못했지만, 예전엔 직원들 회식 하나는 끝내주게 했지. 이번 수주만 따내면 그동안 고생한 직원들 밀린 월급도 주고 보너스도 줄까 생각 중이지만, 회식도 옛날처럼 자주 할 거예요. 그래야 금방 친해지거든. 삼겹살에 소주도 한 잔 마시면서 고민도 얘기하고. 그리고 다 같이 2차로 노래방 가서 신나게 노래도 부르고. 노래방 좋아요?

    시논 파키스탄 노래 없어요.
    (사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경리 (들어온다) 사장님. 전화 왔는데 돌려드릴까요?

    사장 핸드폰으로 하라 그래.

    경리 안 받는다는데요. (사이)

    사장 내가 언제 안 받았다는 거야? (핸드폰을 꺼내서 확인하더니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그러니까 하여튼 어디까지 얘기했지? 응, 그래, 2차까지 갔지. 그리고 3차에 가서 시원한 생맥주…

    경리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사장 3차에 무슨 밥이야, 밥이?

    경리 저녁 식사 말이에요.

    사장 어허, 그땐 벌써 새벽이라니까. 아아, 그래 먹어야지. (잠시 사이)

    경리 그럼 시킬까요?

    사장 어, 그래, 그래.

    시논 (일어난다) 저…

    사장 (시논에게) 왜요?

    시논 퇴근해야 해요.

    사장 아니, 더 있다 가요. 저녁 먹어야지.

    시논 집에 가면 먹을 겁니다.

    사장 가면 안돼요.

    시논 왜요?

    사장 기다려요. 잠깐만 기다려요.

    경리 어떤 걸로 시킬까요?

    사장 보쌈? 보쌈 먹을까? 족발은 어때?

    시논 안녕히 계세요.

    사장 시논씨는 뭐가 좋아요? 족발이 좋아요, 보쌈이 좋아요?

    시논 그거 몰라요.

    경리 보쌈으로 할까요? (잠시 사이) 그럼 족발로 시킬게요.
    (경리는 문 밖으로 나간다. 사이)
    사장 족발 어때요?

    시논 발?

    사장 앉아요. 서 있지 말고.

    시논 (머뭇거리며 앉는다)

    사장 족발 먹어봤어요?

    시논 아니요.

    사장 잘 됐네. 같이 먹어요. 족발 맛있어요.

    시논 같이 먹어요?

    사장 그래요, 같이 먹어요. 더 있다가 가도 되죠? 다른 약속 있어요?

    시논 약속 없어요.

    사장 잘 됐네. (잠시 사이) 그래, 요즘은… 뭐, 괜찮아요?

    시논 발 좋아요.

    사장 아니, 그 발 말고. (시논의 붕대 감긴 손가락을 가리키며) 조금 아프다고요?

    시논 조금 아파요. 그리고 물리치료 해야 해요.

    사장 어, 알아요. 알고 있어요. 내가 해줘야지. 걱정 말아요.

    시논 감사합니다.

    사장 뭘, 괜찮아요. (잠시 사이) 한국에 온 지가 얼마나 됐다고 그랬죠?

    시논 일 년.

    사장 아, 일 년. (잠시 사이) 힘들겠네. 집에 가고 싶죠? 파키스탄에.

    시논 (붕대가 감겨진 손가락을 만진다) 가고 싶어요.

    사장 지금은 힘들어도 그래도 내년만 되면 괜찮아질 거예요. (잠시 사이) 잠깐만요.
    (사장은 핸드폰을 꺼내서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사이)
    사장 우리 회사에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사고가 나서 매우 안타까워요. 그래도 모른 척 하고 그러는 회사도 아니고 또 내가 그럴 사람도 아니니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경리 (들어온다) 사장님. 전화 왔는데 돌려드릴까요?

    사장 핸드폰으로 하라 그래.

    경리 안 받는다는데요. (사이)

    사장 내가 언제 안 받았다는 거야? (핸드폰을 꺼내서 확인하더니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그러니까 하여튼 어디까지 얘기했지? 응, 그래, 하여튼 내가 모른 척 할 사람도 아니고…

    경리 어떻게 할까요?

    사장 어, 가라고 그래. 아니, 얘기 중이라고 그래.

    경리 네. (문 밖으로 나간다)

    사장 (일어나서 냉장고 쪽으로 간다) 보드카 알아요?

    시논 네, 알아요.

    사장 러시아의 보드카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서민들의 술이 바로 소주예요. 한국 사람들이 제일 많이 먹는 한국 술이 바로 이 소주지. 한잔 할래요?

    시논 안 마셔요.

    사장 아, 그럼 맥주로 할래요? (다시 일어나서 냉장고 쪽으로 간다)

    시논 안 마셔요.

    사장 왜요? 나랑 술 마시는 게 불편해요?

    시논 저 술 안 마셔요.

    사장 그래요. 술을 강요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사장은 맥주를 한 잔 따라 마신다. 사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경리 (들어온다) 사장님.

    사장 핸드폰으로 하라 그러라니까.

    경리 아니, 그게 아니라…

    사장 얘기 중이라고 그래.

    경리 족발 왔는데요.

    사장 누가 와? (잠시 사이) 어, 여기다 놔.

    경리 (족발을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사장 시장할 텐데 우선 먹으면서 얘기합시다. (경리에게) 너도 앉아.
    (사장은 경리에게 글라스 잔에 맥주를 따라준다)
    사장 (시논에게) 들어요.

    시논 (사장의 글라스 잔을 든다)

    사장 아니, 먹으라고. 허허.

    시논 감사합니다.

    사장 뭘, 이게 바로 족발이에요.

    시논 발.

    사장 그래요, 발. 허허. (족발을 한 점을 먹어보는) 맛있다. 먹어요.

    시논 (족발을 한 점 먹으려다 냄새를 맡아보고는 슬며시 내려놓는다)

    사장 맛 어때요? 왜 안 먹어요?

    시논 안 먹어요.

    사장 까다롭네. (경리에게) 너는 어때?

    경리 저도 족발은 별로…

    사장 보쌈으로 시킬 걸 잘못했나?

    경리 보쌈 하나 더 시킬까요? (잠시 사이. 전화벨 소리) 잠깐만요.
    (경리는 문 밖으로 나간다. 사이)
    사장 시논씨.

    시논 네.

    사장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아요. 다들 고생하는 거 내가 다 아니까.

    시논 감사합니다. (잠시 사이)

    사장 이봐요, 시논씨, 요즘 알죠? 다들 불경기라서 힘든 거.

    시논 시논, 힘들어요.

    사장 그거야 나도 알죠. 아무튼, 요즘은 나도 너무 어려워요.

    시논 사장님 힘들어요?

    사장 힘들어요.
    (사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경리 (들어온다) 사장님. 전화 왔는데 돌려드릴까요?

    사장 핸드폰으로 하라 그래.

    경리 안 받는다는데요. (사이)

    사장 내가 언제 안 받았다는 거야? (핸드폰을 꺼내서 확인하더니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그러니까 하여튼 어디까지 얘기했지?

    경리 어떻게 할까요?

    사장 얘기 중이라고 그래. (시논에게) 그러니까 하여튼 어디까지 얘기했지?

    시논 사장님 힘들어요.

    사장 응, 그래, 나도 요즘은 정말 죽겠어요. 힘들어요.

    경리 얘기가 언제쯤 끝나실 거냐고...

    사장 (버럭) 대충 끊고 빨리 와서 먹어.

    경리 네.

    사장 거참, 힘들다, 힘들어.
    (사이. 경리는 문 밖으로 나갔다가 잠시 후 들어와서 앉는다)
    사장 (경리에게) 수고했어. 앉아.

    경리 네.

    사장 너도 어서 먹어. (족발 뼈다귀를 하나 들고 뜯는다) 나도 젊었을 땐 공장에서 일했었는데, 거기에서는 일 년에 한 놈씩은 꼭 손가락이 잘려 나갔다고. (입으로 뜯지만 힘들다)

    경리 사장님, 잘라 놓은 걸로 드세요. 그건 나중에 뜯으시고.

    사장 어, 그래. 고마워. (뼈다귀를 내려놓는다) 두 달이나 해야 된다고 그랬다며?

    시논 세 달 해야 해요.

    경리 뭐가요? (잠시 사이)

    사장 물리치료를 세 달이나 해? (시논에게) 병원에서 하란다고 다 할 필요 없어요. 그냥 뜨거운 물에 손 담그고 주물럭거리면 그게 물리치료지. 병원에서도 다 그렇게 해요.

    경리 아, 그래요?

    사장 시논씨야 항상 열심히 하니까 내가 언제고 보답할 날이 있을 거요.

    시논 감사합니다. (잠시 사이)

    사장 이봐요, 시논씨.

    시논 네?

    사장 내가 하는 말이 틀린 것 같아요?

    시논 사장님 틀렸어요?

    사장 아니, 내가 한 말이 이해가 되냐고? 알겠냐고?

    시논 몰라요. (잠시 사이)

    경리 (족발을 한 점 먹는다. 잠시 사이)

    사장 갑자기 그 생각나네.

    경리 네?

    사장 그 날 말이야. 시논이 손가락 다친 날. 아, 너는 그때 없었지?

    경리 갑자기 그게 왜요?

    사장 사고가 났다기에 뛰어가니까 시논씨가 새파랗게 질려서 울고 있더라고. 보니까 손가락이 세 개나 잘려 나갔어요. 내가 시논씨를 업고 병원에 데리고 가려고 차를 탔는데 손가락이 하나도 안 보인다는 거야. 모두 그걸 찾고 있는데, 시논씨가 피를 너무 많이 흘리니까 우선 데리고 빨리 병원부터 가라고 했지. 손가락은 내가 찾겠다고 그러고. (시논에게) 그때 기억나요? 뭐 워낙 경황이 없었을 테니까.

    시논 다 기억나요. (잠시 사이)

    경리 손가락은 찾았어요?

    시논 (경리에게) 못 찾았어요.

    경리 왜요?

    사장 찾기는 찾았지. (잠시 사이) 미안해요, 하나만 찾아서.

    시논 알아요.

    경리 그래서 하나만 들고 병원으로 바로 가신 거예요?

    사장 그럴 때는 그냥 가져가면 안 돼. 절단된 부위를 깨끗한 붕대 같은 걸로 잘 싸서 큰 타월로 두른 다음에 비닐봉지에다가 넣고 밀봉하는 거야.

    경리 아, 맞다. 얼음에 넣어 가야죠?

    사장 얼면 또 잘 안 붙어. 가능하면 냉장 상태로 보관해서 가야 돼.

    경리 아.

    사장 얼음과 물을 1:1 비율로 섞은 용기에 밀봉된 비닐봉지를 담아서 냉장온도를 유지 시켜. 그래서 그 상태로 환자와 함께 병원으로 가면 돼. 원래는.

    경리 그래서 그렇게 하고 병원으로 바로 가지고 가신 거예요?

    사장 아니.

    경리 왜요?

    사장 냉동실 안에 있는 것을 다 끄집어냈는데도, 겨울이라 그런지, 냉동실에 얼음이 하나도 없더라고.

    경리 그러면 얼음은 어디서 구했어요?

    사장 마침 돼지고기 얼린 게 있어서 그걸로 했지.

    경리 돼지고기요?

    사장 삼겹살. 냉동실에 있던 거.

    경리 아…

    사장 그때 얼음 구하러 다녔으면 시논씨 그 한 손가락마저 못 붙였다고.

    경리 그나마 다행이었네요.

    사장 의사가 조금만 늦었어도 수술이 힘들 뻔 했다고 얼마나 다행스러워하던지. 그날 이 후부터는 냉동실에 고기는 꼭 얼려둔다고. 시논씨, 삼겹살 한번 먹어야죠?

    시논 삼겹살, 돼지고기예요?

    경리 맞아요. 돼지예요. 이 족발은 돼지 발 이고. 이거는 손인가?

    사장 (족발을 한 점 먹는다) 시논씨도 한번 먹어 봐요. 얼마나 맛있는데.

    시논 (갑자기) 안 돼요. 먹으면 안 돼요.
    (사이)
    경리 채식주의세요?

    사장 아니, 불고기는 제일 좋아한다며?

    시논 불고기 맛있어요.

    사장 (잠시 사이) 물론 돼지 보다야 소고기가 더 좋지. 그래도 조금이라도 먹어 봐요.

    시논 돼지고기 안 먹어요. 소고기 먹어요.

    사장 아, 허허 까다롭네.

    경리 아, 회교도시죠?

    사장 회교도? 이슬람?

    시논 네.

    경리 파키스탄에선 모두 회교도신자잖아요.

    사장 그런데?

    경리 거기선 돼지고기와 술은 금하고 있죠. (잠시 사이)

    사장 정말이요, 시논씨? 돼지고기랑 술은 먹으면 안 돼요?

    시논 안 돼요.

    경리 제 말이 맞잖아요. (잠시 사이)

    사장 그 나라도 웃기는 나라네.

    경리 왜요?

    사장 아, 잘 살지도 못하면서 소고기만 먹겠다는 거잖아.

    경리 돼지고기만 빼고는 다 먹어요. 닭고기나 양고기 같은 거. 제 말이 맞죠, 시논씨?

    시논 네. 맞았어요.

    사장 아, 그러면 차라리 스님들처럼 아예 고기를 먹지 말든가. 무슨 종교가 고기를 골라 먹어?

    경리 인도의 힌두교도 소고기는 안 먹어요.

    사장 돈 없는 나라가 잘 됐네. 그런 게 현명한 종교라고. 누가 소고기 맛있는 거 모르나? 그래도 잘 살기 전에는 다 먹고 싶어도 참는 거라고. 시논씨도 지금 안 그래요?

    시논 네?

    사장 시논씨도 한국에 와서 먹고 싶은 거 다 먹어요?

    시논 아니요.

    사장 한국 음식 먹기 싫어도 참고 먹죠?

    시논 먹고 싶은 건 소고기 불고기예요. 다른 건 배고파서 먹어요.

    사장 그렇죠? 먹기 싫어도 배고파서 먹는 거죠? (잠시 사이) 나 어렸을 땐 소고기라는 말 만 들었지 무슨 맛인지 아무도 몰랐다고. 그저 쇠고기 라면이 그 맛이려니 했지. 커서야 소 뼈 꼬리 우려낸 국물이나 몇 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했지, 살코기는 구경도 못했어.

    경리 돼지고기는요?

    사장 돼지고기? 이 족발도 이게 얼마나 비싸?

    경리 이만 오천 원이요. (잠시 사이)

    사장 그 땐 소고 돼지고 닭이고 살코기는 무조건 먹을 기회가 없는 거야. 그나마 월급 받는 날에나 한 번 닭 창자 구워먹는 집에서 기름기를 보충하는 거지. (시논에게) 닭 창자 먹어 봤어요?

    시논 네?

    사장 치킨 내장. 요 안에 있는 거, 꾸불꾸불. 창자.

    시논 아, 알아요.

    사장 파키스탄에서 닭은 먹는다며? 그 내장도 먹어요? 요 안에 있는 거, 꾸불꾸불.

    시논 안 먹어요.

    경리 그걸 어떻게 먹어요?

    사장 그렇다니까. 쟤들이 배고픈 줄 모르고 골라 먹으니까 아직까지 나라가 가난한 거지. 우리나라가 쟤들 보다 훨씬 잘 살아도 지금까지 뭐 하나 골라 먹는 거 있어? 각종 내장에다, 뼈까지 고아서 몇 날 며칠을 먹고 있잖아. 이런 사람은 한국 사람 밖에 없을 거야. (시논에게) 한국 사람이 그렇게 지독하다고. 그래서 이 만큼 잘 살게 된 거예요.

    시논 잘 살아요.

    사장 파키스탄에서도 유명하죠? 한국 사람들 지독한 거?

    시논 알아요. (잠시 사이)

    사장 그러니까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가 이만큼 잘 살게 된 거지. (잠시 사이)

    경리 인도에서는 소를 신처럼 생각해서 안 잡아먹는다는데, 거기에서는 돼지를 신처럼 생각하나 봐요?

    시논 코란에서 돼지, 나쁜 동물이에요. 먹으면 안 돼요.

    사장 아니, 그럼 양은 착해서 잡아먹는 건가? (잠시 사이) 하긴, 뭐 양고기도 비싸니까. (경리에게) 나가서 냉장고 좀 뒤져 봐.

    경리 왜요?

    사장 뭐 소고기 얼린 거라도 있나 뒤져보라고.

    경리 (일어나 냉장고 쪽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연다)

    사장 그거는 냉장고고, 그거 말고 밖에 냉장고. 냉동실 있는 거.
    (경리는 문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온다)
    경리 나가서 사올까요?

    사장 없어?

    경리 돼지고기만 있어요.

    사장 그러지 말고, 그러면 우선은 시킨 거니까 이거만 먹고 나가서 먹자.

    경리 소고기 드시게요?

    사장 (시논에게) 양념 치킨 먹어봤어요? 안 먹어봤죠?

    시논 양…치킨?

    사장 양고기가 아니고… 닭고기, 치킨.

    시논 치킨 돼요.

    사장 그런 치킨은 한국에서나 먹어 볼 수 있을 테니까. (경리에게) 너도 어때? 시원하게 생맥주나 마실 겸.

    경리 (잠시 사이) 사장님, 전화 왔는데요.

    사장 어, 받고 와.

    경리 아니요. 사장님 핸드폰.

    사장 거참, 얘기 중이라니까. (핸드폰을 꺼내서 확인하더니 급하게 받는다) 어, 여보. 그래? 못 들었어. 어, 그랬어? 중요한 얘기 중이라서. 어, 사무실. 저녁 먹었어? 이따 먹으러 가야 돼. 애들은? 알았어. 일찍 들어갈게. 어.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그러니까 하여튼 어디까지 얘기했지?

    경리 사장님, 전화 왔는데요. 핸드폰.

    사장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서 확인하더니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경리 안 받으세요?

    사장 얘기 중이잖아. (잠시 사이) 그러니까… 하여튼… 어디까지 얘기했지?
    (사이)

    사장 군대는 갔다 왔어요? (잠시 사이) 시논씨.

    시논 네?

    사장 군대요, 군대.

    시논 군대?

    경리 army.

    시논 아… army. 알아요.

    사장 파키스탄에 있을 때 army 갔다 왔냐고?

    시논 안 가요.

    사장 안 가요?

    시논 안 가요. (잠시 사이)

    사장 파키스탄 남자들은 군대에서 안 불러요?

    시논 가고 싶은 사람 가요.

    사장 어, 지원제구만. 파키스탄에 살면 좋겠네.

    시논 파키스탄 좋아요.

    사장 비싼 고기만 먹고. 군대도 안 가고.

    시논 아.

    사장 부인도 여럿 데리고 살고.
    (사이)
    사장 난 젊었을 때 베트남에 갔었어요.

    시논 어디요?

    경리 (시논에게) Vietnam.

    시논 아, Vietnam.

    경리 (사장에게) 군대 갔다 오셨어요? 월남전이요?

    사장 어, 군대 있을 때. (잠시 사이)

    경리 와, 멋있다.

    사장 뭐 거기도 가고 싶은 사람만 간 거지. 나도 돈 벌려고 갔고.

    경리 아.

    사장 월남에 간 사람들은 다 돈 벌려고 간 거야. 군인이나 민간인이나.

    경리 아.

    사장 (일어나서 냉장고 쪽으로 간다) 나랑 같이 베트남에 간 동료들이 스무 명 있었는데 두 명은 죽고 두 명은 병신이 됐어요. 젊었을 때 돈 몇 푼 더 벌려고 갔다가 병신만 돼 와서는 평생을 가난 속에서 헤매더라고.

    경리 술 없어요. 사올까요? (잠시 사이. 전화벨 소리) 잠깐만요.
    (경리는 문 밖으로 나간다. 사이)

    사장 (책장 앞으로 가서 먹다 남은 고량주 한 병을 꺼낸다) 나라에서 나오는 연금이야 서민들에겐 쥐꼬리만 하지, 한창 나이인데도 몸이 그러니 취직도 안 되지, 우리나라에서 정상인 아니면 어디 사람 취급이나 받나? (잔을 비운다) 안 그래요? 한 잔만 받아요.

    시논 술 안 먹어요.

    사장 내가 취했다고 생각해요? (잠시 사이) 그래요. 술을 강요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아무튼 시논씨도 많이 힘들겠지만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아줘요. 다들 고생하는 거 내가 다 아니까. (잔을 비운다) 그거 알아요?

    시논 몰라요. (잠시 사이)

    사장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요즈음 시논씨 때문에…
    (사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경리 (들어온다) 사장님. 전화 왔는데 돌려드릴까요?

    사장 핸드폰으로 하라 그래.

    경리 안 받는다는데요. (사이)

    사장 내가 언제 안 받았다는 거야? (핸드폰을 꺼내서 확인하더니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그러니까 하여튼 어디까지 얘기했지? 응, 그래, 시논씨는 잘 모르겠지만..

    경리 어떻게 할까요?

    사장 어떻게 할지 나도 고민이에요. 정말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경리 아니, 그게 아니라. 술이요.

    사장 (버럭) 얘기 중이라 그러라니까.

    경리 더 사올까요? 술이요.

    사장 알아서 해. (잠시 사이) 치킨 집에 전화해서 배달 시켜.

    경리 양념 치킨이요?

    사장 (버럭) 알아서 하라니까. (잠시 사이) 두 마리 시켜.

    경리 네.

    사장 (잔을 비운다) 술도 좀 사오고.
    (경리는 문 밖으로 나간다. 사이)
    사장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아요. 다들 고생하는 거 내가 다 아니까.

    시논 사장님 힘내세요.

    사장 힘내야죠. 나한테 한 얘기요? (잠시 사이) 아무튼 고마워요. 요즈음은 나도 너무 어려워서 그래요. 그래서 말인데, 지금 시점에서 산재 처리가 되면 이번 수주 따는 게 아주 힘들어져요. 내가 지금 무슨 말하려는지 알겠어요?

    시논 수주, 몰라요.

    사장 수주? 그러니까… 음… ‘수주’라는 거는.. 주문을 받는 걸 말하는 거예요. 음… 그러니까, 생산업자가 제품의 주문을 받는 일을, 쉽게 말하자면 내가 일거리를 다른 사람이 아닌 시논씨에게만 주면 그걸 ‘시논씨가 나한테 수주를 따 냈다’라고 하는 거죠. ‘산재’도 뭔지 모르죠? ‘산재’라는 거는 ‘산업재해’를 줄여서 말하는 건데… 그러니까 시논씨가 일을 하다가 저번처럼 손가락이 다쳤어요.

    시논 산재, 알아요.

    사장 어떻게 알아요?

    시논 인권센터 소장님, 잘 말해줬어요.

    사장 (잠시 사이) 어, 그러면, 나보다 잘 알겠네?

    시논 잘 알아야 해요.
    (사이. 사장은 잔을 비우고 일어나서 책상으로 간다. 책상 서랍에서 무엇을 꺼내서는 돌아와 다시 자리에 앉는다. 사장은 시논에게 돈이 들어있는 봉투를 내민다. 잠시 사이)
    사장 받아요.

    시논 (봉투를 받는다)

    사장 미안해요, 지금에야 줘서.

    시논 감사합니다. (잠시 사이. 봉투 안을 본다)

    사장 시논씨, 그래서 말인데, 인권센터에 가서 산재 처리가 안 되도록 잘 얘기해 줄 수 있겠어요? 시논씨도 산재처리가 되면 강제 출국 당할 수밖에 없고 또 내가 치료비랑 다 줬으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어때요?

    시논 돈 더 있어야 해요.

    사장 (잠시 사이) 모자라요?

    시논 물리치료 세 달하고, 일 못한 동안 한 달 월급, 그리고 보상금 다 계산해야 해요. 산재, 잘 알아야 해요. 소장님 말해줬어요.

    사장 (잔을 비운다) 파키스탄으로 돌아가려고요? (잠시 사이) 그 소장이 산재처리 되면 강제 출국 당해야 된다는 것도 말해줬어요?

    시논 돈 받아서 들어가라 했어요. 안 그러면 돈 못 받고 쫓겨난다 했어요.

    사장 그래서 정말 갈 생각인 거예요?
    (긴 사이. 사장은 힘들게 일어나 비틀거리며 책상 쪽으로 간다. 책상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사장은 책상 서랍에서 무엇을 꺼낸다. 사장은 힘들게 일어나 비틀거리며 돌아와 시논에게 돈이 들어있는 봉투를 내민다. 잠시 사이)
    사장 받아요.

    시논 (봉투를 받는다)

    사장 이거면 될 거예요.

    시논 (봉투 안을 본다. 잠시 사이) 감사합니다.

    사장 이제 됐죠?

    시논 네. (잠시 사이)

    사장 좋아요. (앉으려다가 일어난다) 이젠 시논씨가 알아서 해요. 나는 잠을 자야 돼요.
    (사장은 비틀거리며 책상 앞으로 가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잠시 사이. 사장은 의자에 뒤로 기댄 채 눈을 감는다. 침묵)
    시논 파키스탄 안 가도 돼요?

    사장 가고 싶어요? (잠시 사이) 글쎄, 가든 말든 알아서 해요.

    시논 저…

    사장 얘기해요.

    시논 저, 보낼 거예요?

    사장 잠은 좀 자요? 집으로 보내줄까요? (잠시 사이) 글쎄, 잠은 집에서 자야 된다니까.

    시논 (잠시 사이) 산재, 안 할래요.

    사장 하든 말든 이제는 알아서 하라니까. (잠시 사이) 내가 취했다고 생각하겠죠? 잠을 못 자서 그래요. (잠시 사이) 그게 얼마나 괴로운지 상상이 안 가죠?
    (침묵)
    사장 (일어난다) 내가 요즈음 시논씨 때문에 밤마다 계속 잠을 못 자요. 시논씨 손가락 그거 두 개를 늦게 찾아서, 미안해서, 그래서 잠을 못자요. 그게 얼마나 괴로운지 상상이 안 가죠? (잔을 비운다. 사이) 내가 취했다고 생각하겠죠? 잠을 못 자서 그래요.
    (사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경리 (들어온다) 사장님. 전화 왔는데 돌려드릴까요?

    사장 핸드폰으로 하라 그래.

    경리 안 받는다는데요. (사이)

    사장 내가 언제 안 받았다는 거야? (핸드폰을 꺼내서 받는다) 전화 받았습니다. (잠시 사이. 일어나서 책상 쪽으로 간다) 그랬어? 어? 안 찍혔는데? 맞아, 지금이 처음 찍힌 거야. 그래. 뭐라고? 어, 아니, 아까부터 중요한 손님이랑 얘기 중이라서. 미안해. 그래. 줘야지. 그래. 이 달 말까지? 그래, 고마워. 꼭 넣어줄게. 이 달 말까지. 그래. 알았어. 어떻게든 해볼게. 아니, 꼭 해줄게. 그래. 미안해.
    (침묵. 사장은 탁자로 돌아와 앉더니 고량주를 따라 연거푸 몇 잔을 마신다. 사이)
    사장 (경리에게) 그 집에 시켰지?

    경리 네? 그 집 전화 안 받던데요.

    사장 닭은 그 집이 싸고 맛있는데. 두 마리에 만 오천 원.

    경리 한번 가 볼까요?

    사장 놔 둬. 전화 받기 싫은가 보지. (잠시 사이)

    경리 다른 집에 시킬까요?
    (사이. 경리는 조용히 문 밖으로 나간다. 침묵. 사장은 고량주 병과 잔을 들고는 힘겹게 일어나 비틀거리며 책상 쪽으로 걸어간다)
    사장 이봐요, 시논씨.

    시논 네?

    사장 한국에서 생활하는 거 힘들죠?

    시논 아니요. (잠시 사이)

    사장 할 만해요?

    시논 다들 힘들어요. 그래도 힘내서 해요. 한국사람 지독해요.

    사장 그래요. 네. (잠시 사이) 거짓말이지?

    시논 아니요. 정말이에요.

    사장 정말 할 만해요? 할 수 있겠어요?

    시논 네, 할 수 있어요.

    사장 안 힘들겠어요?

    시논 네.
    (사이. 사장은 비틀거리며 책상 앞으로 가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잠시 사이. 사장은 잔을 채우고는 의자에 뒤로 기댄 채 눈을 감는다. 침묵)
    사장 이봐요, 시논씨.

    시논 네?

    사장 아무튼 고마워요. 또 미안하고. 요즈음은 나도 너무 어려워서 그래요. 그래서 말인데, 지금 시점에서 이번 공사를 못 따내면 아주 힘들어져요. 내가 지금 무슨 말하려는지 알겠어요?

    시논 잘 몰라요.

    사장 (잠시 사이)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뭐 별로 어려운 거는 아니에요. 지금 문제가 뭐냐 하면 시논씨가 저번에 일한 그 건설 회사 있죠? 그 회사의 응찰 가격을 좀 알아줬으면 해요. 그러니까 이번에 우리가 따내야 되는 공사를 그 회사도 따내려고 하는데 공사 가격을 얼마를 써내는지 그것만 알아오면 돼요. 이봐요, 시논씨. 그 회사 본사에서 일하는 파키스탄 친구 있죠? 저번에 한국 국적까지 땄다는. 둘이 많이 친한 것 같은데. 아직도 주말마다 만나서 성당도 다니고, 그 인권센터 소장도 그 친구가 소개해 준 거 다 알아요. 그러니까 시논씨가 일했던 그 회사가 공사 가격을 얼마나 써냈는지 그 친구한테 몰래 알아봐 달라고 해서 그걸 나한테 얘기해주기만 하면 돼요. 어때요? 할 수 있겠어요?

    시논 안 할 거예요. (잠시 사이) 친구가 안 할 거예요. 안 돼요.

    사장 걱정 말아요. 당연히 수고비는 내가 알아서…

    시논 그 친구가 사장님을 많이 좋아해요.

    사장 나를 알아요?

    시논 아니, 거기 회사 사장님. 거기 사장님 좋아요. 그래서 그 친구뿐만 아니라 거기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사장님 존경해요. 그래서 그런 짓, 안 할 거예요.

    사장 그런 짓이라니? 아, 그 파키스탄 친구는 사장님을 존경해서 배반 같은 짓은 못 할 거다. 그럼 시논씨는? 그런 거예요? 나랑은 같이 술 마시는 것도 싫고, 그 회사 사장은 존경하고, 거기 사장님 좋아한다면서? 물론 나는 존경 받을 가치도 없고, 나랑은 술도 한잔 같이 마시고 싶지 않겠지만, 뭐 상관없어요. 나는 돈밖에 모르는 나쁜 사장이니까. 모두들 앞에서는 사장님 소리를 하며 머리를 조아리지만, 속으로는 존경할 가치조차 없는 돈벌레라고 생각하겠지. (잠시 사이) 파키스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시논 저, 보낼 거예요?

    사장 한국에 온 지는 얼마나 됐다고요?

    시논 일 년…

    사장 일 년 만에 파키스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돈 벌러 왔으면 돈이나 많이 벌어서 돌아가면 되지, 멀리 한국까지 와서 한창 젊은 나이에 멀쩡한 손가락을 두 개나 잃어버리고, 억울하지도 않아요? 달랑 보상금 몇 푼 받고 돌아가서, 뭐 할 건 있나? (잠시 사이) 가만있어 봐. 혹시 스파이 짓하러 나한테 보낸 거 아닌가? 그 사장이 우리 회사에 기밀을 알아내려고 시논씨를 보낸 거 아니에요? 내 말이 틀렸어요?

    시논 사장님 틀렸어요?

    사장 아니, 내가 한 말이 사실이냐고? 맞느냐고?

    시논 사장님 맞았어요? (잠시 사이)

    사장 도대체 몇 번을 얘기해야 알아 쳐 먹는 거야? 그 따위로 들어 쳐 먹으니까 안전교육을 몇 번이나 반복해도 손가락이 잘리는 거라고. 한국에 돈 벌러 올 거면 한국말을 제대로 배워서 오든가. 일은 제대로 못하면서 편하게만 하고 싶고, 돈은 또 많이 가져가고 싶지? 새파랗게 젊은 놈이 그 따위 썩어빠진 생각이나 갖고 있으니까 니들 나라가 그 모양 그 꼴로 사는 거라고. 지들 나라에서도 안 되는 놈들이 무슨 부자 나라 간다고 뭐가 될 줄 알아?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이나 하고 다니는 놈들이 어디 간들 뭘 할 수 있겠어? 자기가 못 나서 안 되는 건데도 병신같이 지 탓은 안 한다고. 부모 때문에 안 되네, 가난 때문에 안 되네, 학벌이 없어서 안 되네, 경제가 안 좋아 안 되네, 정치하는 놈들 욕심 때문에 안 되네, 나라가 썩어서 안 되네, 제기랄 왜 지 탓은 한 번도 안 생각 하는 거냐고. 그 생각 한 번 만 했어도 다른 나라 가서 손가락이나 잘리고 돈도 제대로 못 벌면서 병신같이 살지는 않겠다. (잠시 사이) 내가 취했다고 생각해요? 나는 어떻게든 회사를 살려보려고 하루하루가 괴로워서 죽을 맛인데 시논씨는 자기 생각만 하지. 모두들 나한테 돈을 토해놓으라고만 해. 누구 한 사람도 나를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아. 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거지. 하지만 내가 망하면 누가 책임져 주지? 회사가 문을 닫으면 너희들은 떠나겠지? 밀린 월급을 토해놓으라고 윽박지르면서 결국 어떻게든 돈을 챙겨 받아 갖고는 모두들 떠나겠지? 그렇지만 나는? 내 옆에는 누가 있지? 돈이 없는 나한테 누가 붙어있지? 나는 어디로 가지? 나는 누가 위로해주지? (사장은 무너져 내리듯 의자 하나에 주저앉는다. 그는 시논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은 채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한다. 잠시 후 진정이 되어 시논을 쳐다보며 다시 부드럽게 얘기를 시작한다) 파키스탄으로 돌아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그러니까 나를 떠나지는 마. 술은 같이 안 마셔도 괜찮아. 그래, 술을 강요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제발 나를 떠나지는 마. 제발..
    (사장은 서서히 눈물을 흘리며 누그러진다. 시논의 가슴에 이마를 댄다. 사이. 잠시 후 사장의 흐느낌은 조금씩 코고는 소리로 바뀌어 울려 퍼진다. 시논은 잠시 참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사장의 머리를 책상 위로 놓아 준다. 시논은 소리 나지 않게 일어나 문 쪽으로 조용히 나간다)
    암전.
    방동원

    방동원

    1974년 전주 출생

    한양대 안산캠퍼스 국어국문학과 졸업

    극단 ‘여기’ ‘연어’에서 연극배우로 활동

  • 박근형 극작가 연출가·김명화 극작가 연극평론가

    ‘Theatrum mundi’, 극장이 곧 세상이라는 말이 있다. 극장은 여러 타자들이 만나는 공간이고, 희곡은 타자들과 공유하고 함께 고민해야 할 세상과 인간에 대한 글쓰기여야 한다. 신춘문예에 지원한 희곡을 읽으면서 기분이 좋았던 것은 그 전제가 일정부분 확보되었고. 작품도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아졌다는 점이다.

    올해의 당선작인 방동원 씨의 ‘목소리’는 불법체류자인 노동자와 사주의 대화를 통해 다문화된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군더더기 없는 대사로 재치 있게 표현하였다. 단순히 이주노동자의 문제만이 아니라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빚어낸 소통의 문제점을 포착한 것이 적절했고, 이런 구체성이 아직은 관념적이거나 모호한 여타의 후보작들과 비교할 때 단단하게 느껴졌다. 첫 출발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마지막까지 거론된 후보작은 차재영 씨의 ‘아버지의 여름’으로 짧은 여름밤을 배경삼아 죽음과 탄생, 어긋난 삶의 여정을 함축적으로 담아낸 수작이나 연극성의 결핍이 채워져야 할 것이다. 그 외 삶의 폭력성을 낯설면서도 산뜻한 감각으로 그려낸 강현선 씨의 ‘낡은 서랍 속의 바다’, 고단한 샐러리맨과 뿔 잘리는 사슴을 병치한 정소정 씨의 ‘뿔 자르는 날’이 함께 거론되었다.
  • 방동원

    방동원

    1974년 전주 출생

    한양대 안산캠퍼스 국어국문학과 졸업

    극단 ‘여기’ ‘연어’에서 연극배우로 활동

    ‘누구에게나 꿈이 있다’고 배웠습니다. 막 성인이 되었을 무렵에는 누구에게나 있어야 할 그 꿈이 나에게는 없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충격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있는 것처럼 얘기하거나 적당히 넘어가는 방법에 익숙해졌다고나 할까요. 나에게는 이런 꿈이 있어요, 라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애드립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말하는 꿈이라는 것을 알 것 같습니다. 크지는 않아도 절실하다면 그게 바로 나의 꿈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 살아서 오래오래 웃으면서 같이 지낼 수 있기를 바라는 그런 절실한 마음이 바로 나의 꿈! 희곡의 매력을 알게 해주시고 좋은 희곡을 쓸 수 있도록 많은 사랑과 가르침을 주시는 영산대 연기뮤지컬학과 김재권 교수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 때문에 고생하시는 사랑하는 부모님과 형, 형수님, 조카 소윤이와 소준이, 든든한 예술적 지원군 삼선교 작은 이모님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미완성으로 장롱에 있던 작품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준, 그래서 이렇게 빛을 받을 수 있게 결정적 역할을 해준, 사랑하는 연인이자 예술적 동지인 지후, 고맙습니다.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