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을 향하여”
-사무엘 베케트-
1
편혜영식 동물농장에서 목격되는 동물들의 목록은 대략 이런 것들이다. 개구리, 고양이, 쥐, 늑대, 개, 코끼리, 원숭이… 이들 동물들은 독자로 하여금 실로 처참하고 잔인하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이를테면 “터진 눈알에서 흘린 피로 몸을 물들”(1: 60)이는 개구리나 “불에 탄 고양이”(1:12), “사지를 늘어뜨리고 죽어있는 쥐”(1:213) 등으로 묘사된다. 그녀가 공들여 묘사하는 주된 공간이 악취가 나는 시궁창이나 하수구, 시체가 떠오르는 저수지 등의 음산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영민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토끼에게서 조차 “(그를) 불쾌하게 만”드는 -공포스러운- “빨간눈”을 포착해내고, -<토끼의 묘>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토끼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무덤’이라는 단어를 나란히 나열해놓는 이 작가의 기괴한 상상력은 그러므로 유일무이한 것이다.
편혜영의 첫 번째 소설집 ‘아오이 가든’과 ‘사육장 쪽으로’를 거쳐 최근 출간된 장편소설 ‘재와 빨강’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작품세계는 이렇듯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상상력”(신수정)으로 요약된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는 독자에게 그녀의 소설을 읽는 행위는 많은 평자들이 익히 지적했듯이 ‘그로테스크하고 엽기적’인 불편함/불쾌감으로 체감된다는 사실과 동궤로 이해된다. 그러니, 이 질감의 연원을 따져보는 일이야말로 편혜영의 소설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방법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어떤 점에서 편혜영의 소설은 지금까지 이미지의 진화를 겪어왔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한 작가의 고유한 작품 세계를 놓고 ‘진화’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이 망설여지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미지의 진화’라는 표현을 굳이 쓰는 까닭은 편혜영 소설의 불편함이 시종일관 비슷한 맥락에서 체감되지만은 않아서이다. 가령, ‘아오이가든’에서 “시커먼 개구리들이 비에 섞여 바닥으로 떨어졌다”(1:35)로 가공되던 이미지가 “…산은 덩치 큰 개처럼 시커멓게 누워 있다가 재빨리 짙은 그림자를 내밀었다”(51, ‘사육장 쪽으로’)를 거쳐, ‘재와 빨강’에 이르러서는, “쓰레기장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쓰레기가 타고 있을 때다”(117)라는 식으로 이전의 이미지와는 변별되는 지점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가 날것의 재료를 그저 불친절하게 툭 던져놓은 급박한 호흡에 가까운 것이라고 한다면, 후자에는 추에서 미를 발견해내는 어떤 정교함과 여기서 비롯되는 일말의 여유로운 호흡이 녹아 있다. 다시 말해, 이 두 문장에서 보이는 이미지의 간극이야말로 이 작가의 작품세계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명징한 단서인 셈이다. 서사의 논리적 동력보다는 오히려 이미지의 추동력이 서사를 압도했었던 것이 그녀의 초기작이라면, 이제는 이미지와 서사가 점점 균형을 이루는 방향으로 이 작가의 작품세계는 진행되고 있는 듯 하다. 이는 시체가 뒹굴던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점점 구체적인 경험세계로 이 작가의 포커스가 이동해오고 있다는 사실과도 연관을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꿔 말하자면, 이것은 독자에게 불쾌감을 선사하는 방식이 좀더 정교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의 진화과정 속에서 라이트 모티브처럼 일관되게 독자에게 불편함과 불쾌감을 주는 근본적인 작인은 바로 인간은 동물이라는 적나라한 등식이다. 우리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쥐, 개구리 등의 동물들이 사람과 동급으로 이해되는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들: “모든 살아있는 것. 그러니까 신생대 제3기 팔레오세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중략)…그때 인간은 아직 쥐였으니까”(1:199) 은 이러한 형편을 잘 보여준다. 그러니까 선험적으로 저급한 인간의 본성을 상정해두고,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사람은 동물이다’라는 이 등식이 불편함을 주는 것이다. 편혜영 작품의 독특한 질감은 바로 여기서 연유한다. 그렇다면 “감각의 유전자가 다른”(신형철) 이 작가의 세계는 어떤 토대 위에서 구축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심호흡을 길게 한 후, 그녀가 꾸며놓은 악취 나는 도시의 공간 속으로 일단 발을 내딛어야만 한다.
2
단편 ‘마술피리’에는 아크릴 상자에 담겨 단백질 결핍으로 죽어가는 실험용 쥐, 루루가 나온다. “설치류의 모든 특성을 잊은” 채 서서히 죽어가는 루루의 모습은 바로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에 대한 강력한 은유이기도 하다. “실험실에 들어오는 순간 운명이 결정되어있다”는 쥐의 실상처럼 인간의 삶 역시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편혜영의 소설 속 공간들의 대부분이 “도시 전체가 사육장”이라거나 “동물원”, “닭장같은 아파트” 혹은 “거대한 벌집처럼 칸칸이 나누어져있”(3:16)는 식으로 폐쇄적 질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만 하다. 더군다나 이들 공간은 주로 “편두통을 일으키며 혀가 아둔해지고, 코를 맹맹하게 만들며 끊임없이 구역질을 퍼 올리는 냄새”(1:36)나 “수백 마리는 될법한 개들이 일제히 짖”(2:45)거나 “시끄럽고도 소란스러운 거대한 차의 소음”(3:177)을 통해 채워진다. “미장센이 곧 메시지”(신형철)라고 편혜영의 소설적 특징을 요약한 한 평자의 말처럼 이 작가의 작품에서 공간은 또 하나의 작중인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작중인물들을 압도하는 것이다. 쓰레기가 범람하고 역병이 창궐하는 외부 환경을 염두에 둔다면 오히려 이같은 단절/고립/폐쇄의 공간은 인물들에게 그나마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하게 한다는 점에서 차라리 안전한 축에 속한다. (“자신을 제외한 사람들은 잠정적 병균이었으며 집밖은 바이러스가 부유하는 더럽기 짝이 없는 공간이었다”(3:180)) 물론 여기에는 인간으로서 누려야하는 어떤 최소한의 존엄은 삭제되어있다. “동물원의 탄생”이라는 한 작품의 제목이 이러한 공간 속에 놓여진 작중인물들, 즉 “철창에 갇힌 동물들”(2:137)의 실상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도로 읽혀지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기에 결국 편혜영의 세계에서 독자가 조우하게 되는 것은 동물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인간-동물원의 지옥도인 것이다. 아도르노의 저 유명한 동물원에 대한 정의, “동물원은 어떤 견본이나 어떤 쌍이 종으로서의 종의 불행을 이겨냈다는 것에 대한 알레고리다”라는 구절은 그러므로 편혜영의 소설에서는 인간을 설치류와 같은 동물로 강등시킨 다음, 그 눈높이에서 다시금 천천히 음미되어야한다.
이같은 공간적 함의를 중심으로, 인물들의 존재 방식은 주로 사라짐(외부)과 버려짐(내부)으로 구분된다. 이중에서도 특히 편혜영의 소설에는 유난히 ‘실종’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늑대가 사라지고, 코끼리가 사라지고, 가족이 사라지고, 급기야는 시체가 사라진다. 아예 제목이 “분실물”인 표제작이 있을 정도로 ‘사라짐’에 대한 이 작가의 관심은 집요한 편이다.
보통 서사의 도입부에서 제시되는 이 실종 모티브는 그 대상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그런 불가해한 상태, 즉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연시키면서 대상을 모호하게 남겨둔다는 점에서 그로테스크한 과잉의 이미지가 주를 이루는 이 작가의 소설에 일종의 여백을 마련해둔다. “(늑대는) 사라졌기 때문에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2:67)라는 구절에서 드러나듯 사라진 것이 오히려 관심의 대상이 되고, 더 나아가 공포가 되는, 일상의 역학 관계를 전복시키는 이같은 전략은, 지젝의 어법을 빌자면 현실의 불완전함을 드러내기 위한 기획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바디우의 표현을 빌자면 “공백(void) 으로부터 익명성의 사건”을 구획하는, 그리하여 독자에게 불편하게 체감되는 과잉 이미지에 깊이를 담보하는 편혜영 소설의 균형 감각이기도 하다.
외부 세계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대상의 사라짐을 통해 작품의 서사적 깊이를 마련한다면, 공간 내부에 놓여진 ‘버려진’ 인물들은 극한에 처한 인간 조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인물에 대한 정서적 깊이를 확보한다. 주로 (아동) 홈리스를 통해 드러나는 이 모티브는 유기, 감금 혹은 추방, 파견 근무 등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가족에 의해서건, 상사에 의해서건, 혹은 불가해한 무언가에 의해, 고의적으로 철저히 방치된 이들의 모습은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부조리한 것으로 상정하고 있는 인식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재와 빨강’은 이를 가장 극단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파견근무를 위해 C국에 도착한 주인공의 행로는 그가 자의와 타의에 의해 그가 꿈꿔왔던 일상에서 점점 멀어지는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가 전전하는 아파트, 공원, 소각장, 하수도를 통해 그의 전락을 보여주는 이 서사의 진행은, 현대 사회 속에 내던져진 인간 실존의 밑바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인공을 “생명정치 시대의 K”(차미령)와 동궤로 이해되게 한다. “역병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C국이라는 초국적 공간에 주인공을 몰아넣고, 그의 불행을 적나라하게 전시하고 있는 ‘재와 빨강’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오히려 편혜영의 여느 작중 인물보다 더욱 정서적 호소력을 지닌다.
주인공이 “아내의 부정에 대한 의혹”으로 “신경증적인 의심”(74)을 지닐 때, “그가 자신의 외로움을 얘기하지 못해 외로”(97)워 할 때, 쓰레기를 뒤지며 연명하는 그의 “생존을 위한 경쟁자가 부랑자들이 아니라 쥐라는 것을 실감”(118-19)할 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쥐가 자신과 경쟁할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119)을 때, 이 행간들에서 전해오는 실감이란 작중인물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인공, 이 쥐 잡는 사나이에게서, 닫힌 성문 앞에서 서성대는 K의 모습을, 아내에 대한 의심으로 아내를 죽이고 스스로를 파멸에 이르게 한 오셀로의 모습을, 영원히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베케트의 인물들의 모습과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이다’ 라는 편혜영식 명제가 이 작품에 이르러, ‘인간은 쥐/동물보다도 못하다’ 라는 극단으로까지 치닫고 있지만, 그럼에도 독자에게 정서적 울림을 형성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기서는 불쾌감/불편함 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자의식에 대해 스스로 당황해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오히려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는 절박한 상황에서조차 죽을 만큼의 통증이 아니라 사소하지만 지속적인 통증을 참지 못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122))
사라짐 혹은 버려짐으로 존재하는 편혜영의 작중 인물들은 극한의 세계에서는 극한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원천봉쇄당하고 “누군가에 의해 추방당한”(18) 저러한 한계 상황 속에서 중요한 것은 “어쨌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야만 살아남는다”(199)라는 절박한 삶의 전언인 것이다. 다시 말해, 편혜영의 동물원에서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으며, 그렇게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인 것이다.
3
외부의 공포와 위협에 노출된 편혜영의 인물들이 무엇보다도 온갖 힘을 다해 지켜내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일상이다. (“…돈을 벌어봤자 그들에게 다 빼앗길 테지만 일상을 지키는 것은 중요했다” (2:42))사실 이들에게 일상이란, 앙리 르페브르가 “일상성의 장소는 도시”라고 했을 때의 그 질감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앙리 르페브르가 지칭하는 ‘일상’의 개념이 문명화된 현대 사회에서의 평균적인 일상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손쉽게 이해한다면, 편혜영의 그것은 동물적 본능과 가깝다는 점에서 보다 절박하고 보다 처절하다. 편혜영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대개의 경우, 일상이란 “약탈과 노략질과 폭력과 쓰레기가 정당한 세계”(3:55)에서 지속되어야만 하는 “동물적 감각”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가 전력을 기울여야 할 일은 살아남는 것이었다”(3:87)라는 구절을 음미한다면, 이 작가가 묘사하고 있는 일상의 실감은 보다 분명해진다. 저러한 일상에 대한 이 작가의 통찰이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은 일상의 견고함을 드러내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높은 감염률과 높아져가는 사망률과 확보되지 않은 백씬 소식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면역력은 견고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직장에 출근하고 학교에 등교했으며 물건을 팔았다. 전염병이 도지는 시기라고 해도 배워야할 것이 있었으며 진학해야할 학교가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 다녀야할 학교와 학원이 있었다.…(3:178-79) (강조-필자)
그러나 일상의 견고한 면역력은 한편으로는 언젠가는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편혜영 작품의 주된 분위기를 이루는 공포와 불안의 작인이 된다. (“잠시만 내버려두어도 금세 균열을 만들고 깊은 틈을 벌리는 방식으로. 일상은 목을 가눌 수 없는 갓난아기와도 같았다. 평온히 엎드려 자는 듯 보이지만 언제나 돌연사의 위험을 안고 있는 갓난아기였다.”(3:179)) 그렇기에 편혜영의 인물들은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일상의 익명성에 대해 안심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는 게 오히려 그를 깊이 안도하게 했다”(2:54)) 한편으로는 그런 일상에서부터 “어떤 경고도 없는” “위험”에 대비하여, 끊임없이 일상을 ‘돌보는데’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이들에게 일상을 잃는다는 것은 -비록 일상에서 이들이 타인과 나누는 소통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오히려 폭력적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곧 “소통이 가능한 세계를 모두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3:41)이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여기서 말하는 ‘소통 가능한 세계’란 타자와의 교감을 전제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향한 자기 폐쇄적인 소통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그런 점에서 ‘밤의 공사’에 등장하는, 자신의 거주지를 보호하기 위해 “단단하고 갈라지지 않는 담, 그 무엇도 넘나들 수 없는 담을 쌓”(2:100)는 남자의 모습은 자발적인 고립을 선택함으로써 외부로부터 자기 세계를 지켜내고자 하는 인물들에 대한 아날로지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편혜영의 인물들이 이처럼 안간힘을 쓰며 견뎌내고 있는 일상이 그 자체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지만, 거기서 일단락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 작가의 서사의 흐름이 주로 작중인물들의 일상에 균열이 생기면서 (예정된) 파국을 맞는 것으로 종결되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어제와 오늘의 구분이 없는 무의미한 사무원의 일상이건, 매순간 적자생존의 피 터지는 싸움을 벌여야하는 홈리스의 일상이건 간에, 이들의 일상은 어떤 식으로든 지속되고 있지만, 여기에는 토끼의 충혈된 눈(‘토끼의 묘’)으로 대변되는 극심한 삶의 피로가 내재되어 있으며, 또한 여기에는 -비록 끊임없이 번식하는 쥐의 이미지가 종종 등장하고 있지만- 세대간의 재생산이 전적으로 휘발되어있는 것이다. 물론 이 작가의 몇몇 작품에서 (폭력과 직결된) 성적 이미지가 등장하고 있지만, 이는 대개의 경우, 시취와 악취가 진동하는 공간의 압도적인 분위기로 말미암아 생물학적 재생산의 불능으로 이어진다. 이를테면, 그녀의 작중 인물들은 고양이의 자궁을 드러내거나, 피를 흘리며 개구리를 낳거나(‘아오이 가든’), 혹은 임신한 상태에서 박물관 표본실의 박제가 되거나(‘맨홀’), 그도 아니면 실패한 성관계(‘재와 빨강’)로 귀결된다. 어린 아이들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개에게 처참하게 물리거나 (‘사육장 쪽으로’), 아니면 홈리스가 되어 겨우 목숨을 연명해 나가는 식이다.
이는 편혜영의 소설들이 “예고 없이 어디서든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3:22)는 위협에 노출된 작중 인물들의 “지독한 현실”을 통해 서사를 진행시켜나가지만, 그럼에도 이것이 서사의 정체감으로 체감되는 것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 작가의 작중인물들은 일상에 의해 반복적으로 소모되고 있지만, 생산이 불가능한 일종의 거세된 상태로 묘사되기 때문에 “미래가 없는 영원한 현재”(칼 하인츠 보러)에 머물러 있을 따름인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또한 현재의 고통이 “다가올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고통보다는 나으리라는”, “지금의 고통은 앞으로 닥칠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3:131)과도 연관을 맺고 있다. “경사진 지붕의 새하얀 단층집”(2:49)으로 대별되는, “수령이 보장된 고액보험증권처럼 여겨”(3:37)지는 미래의 희망은, 안타깝게도 편혜영의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이 순간을 제외한 모든 때가 행복했었다는 생각이 들”(3:126-27) 정도로, 파국을 맞이하게 하는 쪽으로 진행된다. 그런 이유로 이들에게 미래는 현재의 고통보다 훨씬 파급력이 큰 예정된 불행으로 간주된다. 그렇기에 이들은 차라리 현재의 ‘지독한 현실’에 정박되는 편을 택한다. (“지금의 인생에 어떤 미련이나 애착이 없는 그로서는 다시금 쥐 한 마리가 가져올 우연을 기다리며, 쥐를 잡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었다”(3:207))
이처럼 현재에 정박해있는 듯한 인물들의 모습은 “쓰레기를 뒤지러 갈 때가 아니면 여느 부랑자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벤치에 눕거나 앉거나 눕듯이 앉아서 지”(3:123)낸다는 사실을 통해 더욱 강조된다. “웅크리거나 누워 있었기 때문에 주검이나 주검에 가깝게 느껴”(1:36)지는 이들의 부동적 이미지는 출구없는 세계에 놓인 존재의 영도(zero degree)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편혜영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부분이 예기치 않은 사고에 의해, ‘다리’를 다치거나 저는 식으로 움직임에 방해를 받는다는 사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된다. 그렇기에 이들은 밤의 이미지로 대별되는 도시의 일상 속에서 “실재를 드러내지 않는 비형상의 존재인 유령” (3:18)처럼 머물러 있는 것이다.
4
“나는 내 자신에 대한 대가로/스스로를 고스란히 내놓아야 하며/ 인생에 대한 대가로 인생을 바쳐야한다”(3:71)
이것은 ‘재와 빨강’에서 언급되는 시 구절이다. 이 작가의 종말론적 세계관에 대한 선언처럼 다가오는 위의 인용문은 편혜영에게 소설이란 과연 무엇인가, 라는 물음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문장은 단순하게 보자면 “앞으로 좀더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각오를 담은 것에 불과하다고”(3:71)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지만 좀더 면밀히 이것을 들여다보면 그 의미는 보다 심층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다음에 이어지는 ‘작가의 말’의 한 대목은 이에 대한 직접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언젠가 한 노인이 내 이름을 풀어봐주셨다. 불과 나무가 너무 많아, 스스로 불타 없어질 이름이라면서 개명할 것을 권하셨다. 잠깐 다른 이름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스스로 불타 없어질 이름이라는 말은 두고두고 맘에 들었다… 노인의 말대로, 내 이름이 발화점이 되어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이 불타 없어진대도 즐거웠던 마음은 남을 테니, 그것으로 됐다. (‘아오이가든’의 작가의 말 중에서)(강조-필자)
‘편혜영’이라는 작가 자신의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를 언급하고 있는 위의 대목은 다름 아닌 이 작가의 소설에 대한 윤리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굳이 기계적인 도식을 이용해서 앞서 인용된 시 구절과 ‘작가의 말’을 연결지어보자면, ‘인생에 대한 대가로 인생을 바쳐야한다’ 라는 문장은 ‘스스로 불타 없어질 이름’이라는 작가의 이름이 주는 의미와 대응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포착되는 것은 ‘자신의 온몸을 던져, 그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한다’는 헌신과 희생의 질감이다. 그런 점에서 이는 공교롭게도 ‘재와 빨강’의 이미지와도 겹쳐진다. 결국 편혜영에게 소설 쓰기는 ‘내’가 활활 타 없어질 때까지 ‘나’의 전부를 쏟아 붓는 혼신의 작업과 동궤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 쥐 사나이의 몰락과 파국, 그리고 회생을 다루고 있는 <재와 빨강>의 전체적인 질감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이 작가가 한 노인에게 ‘개명’까지 권유당한, 자칫 불길해보일 수 있는 자신의 이름에 대해 ‘두고두고 맘에 들어’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여기에는 좀더 설명이 필요하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 남자가 “오래 전에 일어났어야 할 일이 지금에서야 일어난 것이라는 느낌이었다”(3:35)고 할 때, “부랑하는 처지라면 음식에 대해 어떠한 자의식도 가져서는 안 되었다”(3:120) 라고 하며, “자신은 그렇게 사소하고 볼품없이 서서히 죽어가는 게 마땅했다”(3:123))고 중얼거릴 때, 여기에는 자신의 불행이 당연한 귀결이라는 식의 강한 자책이 묻어나 있다. 즉, 편혜영에게 소설 쓰기란 다름 아닌 자기 처벌의 형식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나는) 이토록 처참한 지경이 되어도 마땅하다.’ ‘나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가질 자격이 없다’라는 인식은 모든 불행은 “전적으로 자신이 선택한 일이었다”(3:162)라는 사실에서 말미암는다. 이것은 편혜영식의 원죄 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아무리 세계가 나를 사라지고 버려지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궁극적인 파국과 몰락을 초래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인 것이다. (“세계가 냄새를 풍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냄새를 풍기는 세계가 된 것이다”(3:54)) 그러니 “자신이 모든 것을 망쳐 버린 것을 받아들일 수 없”(3:74)는 것이다. 그렇기에 편혜영에게 소설적 글쓰기란 반복해서 말하자면, 출구없는 세계에서 몰락을 자초하고 가중시킨 개인이 스스로를 단죄하는 자기 처벌의 행위다. 그리고 이것은 스스로를 (확실하게) 처벌하기 위해, ‘나를 전부 태워버릴 정도로’ 강렬한 것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 강렬함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오직 즐거움 속에서만이 가능하다. “자신을 혐오하는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작중 인물로 하여금 자신을 ‘재’가 될 때까지 몰고가는 자기 형벌은 오히려 즐거운 일인 셈이다. 그러니 바로 이것이 소설의 윤리이며, 소설가의 윤리가 아니겠냐고 편혜영은 ‘재와 빨강’의 세계를 통해 우리에게 다시금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작가의 모습에서 천형을 짊어진, 바위를 끊임없이 굴리는 행복한 시지푸스의 초상을 보는 것은 그러므로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편혜영의 소설에서 포착되었던 이미지의 진화에 대한 언급으로 다시 돌아가자,
그곳을 지나가는 방역차가 아니었다면, 방역차가 때마침 거대한 양의 소독약을 분사하지 않았다면, 구름처럼 피어오른 소독약이 그의 모습을 완전히 가려주지 않았다면 무리에게 잡혔을지도 몰랐다. 그는 약을 분사하기 위해 속도를 늦춘 방역차 지붕에 올라탔다. 또 한번 거대한 양의 소독약이 분사되었다. 방역차는 지붕에 그를 싣고 소독약 구름에 몸을 감춘 채 천천히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자신이 떠나온 곳을 돌아보았으나 흰 연기에 가려진 검은 쓰레깃더미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3:122)
위의 장면은 ‘재와 빨강’에 나오는 주인공 남자가 “형사라고 추측한 무리”를 피해 방역차에 몸을 싣고 도망치는 대목이다.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소독약 구름’의 주된 이미지는 흰 연기(소독약)/검은 쓰레기의 대비를 통해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세계 속에 내던져진 개인의 모습을 전경화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방역차에 실려 어디론가 가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은 건조하고 담담하게 서술되고 있는 행간을 비집고 나와 애상감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그럼에도 무언가 여전히 등 뒤에 남은 듯한 느낌”(3:35)으로 요약되는 편혜영식 공포와 불안이 어떤 방식으로 서정적 이미지로까지 형상화될 수 있으며, 얼마나 긴 여운을 남길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여운은 작품의 마지막에서 그가 “늦은 밤 방역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등대처럼 환하게 불을 켠 공중전화부스”에서, “공연히 떠오르는 이름들을” “동전을 넣지 않으면 어떠한 신호음도 떨어지지 않는 수화기”에 대고 말하는 장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유리상자 안에서 가볍게 공명”(3:234)하는 장면에까지 이어진다. 그러니까 이 작가는 ‘악취를 제거하는 소독약’을 가지고서, 이토록 서정적이면서도 시적인 이미지를 주조해낼 수 있는 감각을 지닌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재와 빨강’은 편혜영 고유의 그로테스크적 이미지처럼 이 작가 고유의 서정적 이미지로의 변화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어쩌면 이것은 편혜영의 또다른 문학적 서명의 조짐을 알려주는 건지도 모른다. 방긋 웃는 갓난아이에게서 돌연사의 위험을 감지하고, 길가를 배회하는 개나 고양이에게서 이들이 ‘귀신을 본다’라는 사실부터 먼저 떠올리는 이 작가. 21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불꽃 소리에서 전쟁의 총성을 느끼는(4:259) 이 작가의 기괴하면서도 예민한 감수성을 목도하는 것은 그러므로 불편하면서도 즐거운 일이다.
*여기서 사용된 편혜영의 소설집들은 다음과 같다.
‘아오이가든’, 문학과 지성사, 2005
‘사육장 쪽으로’, 문학동네, 2007
‘재와 빨강’, 창비, 2010
‘토끼의 묘: 이효석 문학상 수상집’, 2009
(본문 괄호 속 표기는 위의 소설집 순서대로 (수록 소설집: 페이지 수)를 따른다.
유정
본명 황유정
1977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철학과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학과 전문사과정 졸업
네덜란드 라이던대 한국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2006년 ‘연극평론’으로 등단, 연극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