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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의 가치를 생각하다 -이창동 감독의‘시’

by  지승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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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시’ 초반, 무엇인가 열심히 찾던 한 아이는 마치 아름다운 작은 새소리에 이끌리듯 바라본 어느 강가에서 ‘시(屍)’를 발견한다. 이창동의 친필로 알려진 ‘시’의 타이틀은 처참한 주검의 등장 이후에 ‘시’라는 단어로 나타난다. 몇 초 안되는 이 순간만큼은 명백히 시는 ‘시(屍)’다. 그러나 잠시 후 대리 보충적인 ‘Poetry’라는 단어로 인하여 비로소 ‘시(屍)’는 ‘시(詩)’로 바뀐다. ‘시는 죽었다’는 영화 속 김용탁(김용택)시인의 말은 ‘시(詩)가 죽었다’라기 보다 ‘시(屍)는 죽은 것이다’라는 정언(定言)으로 들린다. 영화 ‘시’는 바로 ‘시’라는 단어 속에 잠재해 있는 시(屍)와 시(詩)의 ‘공존재(共存在)의 문제’를 통하여 숨겨진 진실의 가치를 묻고자한다.

    영화 ‘시’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묻는 질문은 “시(詩)는 무엇을 드러내는가?”이다. 이 질문을 위해 영화 ‘시’의 미자(윤정희)는 은폐와 폭로 사이에 엉켜있는 ‘그 무엇’을 시(詩)로써 끄집어내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폭로는 운명적으로 ‘대상을 은폐로부터 끄집어내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알레테이아(Aletheia)란 대상의 숨겨진 진리를 끄집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알레테이아는 대상의 진리에 이르는 방법이기도 하다. 특히 이런 진리의 발견은 우리 스스로 가진 존재가치의 발견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로써 인간은 알레테이아를 통하여 대상의 진리에 다가 갈 수 있고, 대상의 존재가치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시’에서 미자는 이 알레테이아를 시(詩)로써 구현하려한다. 미자가 겪는 혼란과 울음은 표면적으로 입막음과 말맞추기 진술인 ‘은폐의 의지’에 의한 좌절에서 시작되지만 궁극적으로 폭로를 자신의 존재가치의 발견으로 이어가려는데 그 목적을 둔다. 그래서 미자는 자신이 접한, 숨겨지고 은폐된 대상을 폭로하려는 알레테이아와 자기 발견을 위해 시(詩)를 쓴다. 영화 ‘시’는 그런 미자의 자기성찰 과정과 시(詩)쓰기 과정을 조용히 뒤따른다.


    순수음성 그리고 초월적 관계


    이창동 감독은 그의 전작(全作)을 통하여 알레테이아의 문제를 ‘발화’의 문제, 즉 ‘말하기’로 접근하려 한다. 그러므로 이창동 감독의 ‘말하기’는 엄밀히 말해서 음성에 의해 성립되는 ‘알레테이아’다. 일치와 말맞추기로서 실행되는 ‘은폐의 대화’가 아닌, 폭로를 위한 ‘말하기’인 것이다. 이창동 감독이 기도, 노래, 절규, 울음, 혼잣말 등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말하기’를 자주 등장시키는 이유는 이 들이 모두 어떤 대상의 진실을 폭로하기 위한 말하기로서 사회적으로 일치된 진술의 가치보다 인물 내면에 위치한 ‘알레테이아’에 우위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폭로를 위한 말하기는 인간이 실행한 가장 순수했던 시원적 언어로서의 목소리에서 시작한다. 시원적 언어로서의 목소리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몸(목)을 통해서 자신의 몸(귀)으로 회귀하는 본성을 소유한다. 데리다는 이를 ‘순수음성’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자기 독백, 자기 고백, 등 자아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질료가 되어 주체성 확립에 큰 기여를 한다. 결국 순수음성의 자기 회귀는 ‘새로움’ 그 자체로 거듭나는 ‘영원회귀’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영원회귀의 가치는 폭로에 의한 생성에 있다. 생성은 세상을 항상 ‘의지(意志)’한다. 그래서 이창동 감독은 자신의 모든 영화에 알레테이아를 위한 ‘순수 음성의 자기 회귀’를 절규와 울음 그리고 기도와 혼잣말을 ‘폭로의 의지’로 상정하여 곳곳에 장치해 두었다. 영화 ‘시’에서도 순수음성의 자기 회귀가 갖는 생성의 문제를 미자가 쓰고자 하는 시(詩)를 통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를 실행하는 미자는 혁명적 에너지로 가득 찬 인물이 아니다. 특히 영화 속 현실의 미자의 모습과 전작(全作) 주인공들의 모습은 무기력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무모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 미자가 영화 보는 내내 관객에게 미묘한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를 따지기에 앞서 미자가 지닌 폭로의 의지는 먼저 공적 사회에서 집단적으로 일치시킨 진리이해에 대한 태도에 대하여 커다란 변용을 충동질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비록 이 변용을 위해 제기된 폭로의 의지가 오히려 그들을 자폐적으로 만들어 버릴지라도 말이다.

    ‘초록물고기’에서 미애(심혜진)가 혼잣말로 무언가를 중얼대는 모습, ‘밀양’에서 신애(전도연)의 혼잣말과 절규하는 모습, 특히 등장인물들 간의 의사소통에서 볼 수 있는 귓속말이나 전화기 또는 휴대폰의 지속적인 사용은 항상 자폐적 관계 속에 매몰되어 폐쇄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초록물고기’에서 막동(한석규)은 큰형(이호성)에게 절규하며 전화를 끊지 못하게 한다. 미애는 배태곤(문성근)에게 늘 귓속말로 말한다. 그들의 관계는 서로에게 ‘벗어날 수 없는’, 서로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는’ 관계다. 막동이 저지른 살인을 은폐하기위해 막동의 배에 칼을 꽂은 태곤의 행동은 결국 아무도 알지 못한다. ‘박하사탕’에서 영호(설경구)는 혼수상태의 순임(문소리)에게 쉼 없는 인생을 돌고 돌아 자신이 돌아왔음을 말한다. 그의 말은 순임에게 전달되지만 대답은 소리 없는 눈물을 통해 드러날 뿐이다. ‘밀양’은 신애와 종찬(송강호)과의 전화통화로 시작한다. “밀양은 어떤 곳이에요?”라는 신애의 독백에 가까운 질문은 남편의 죽음으로 시댁에서 소외된 신애가 일상에 대하여 물을 수 있는 최소한의 질문이었다. 신애의 곁을 맴도는 종찬은 영화 대부분을 휴대폰으로 호명이전의 누군가와 끊임없이 대화하다가 정작 신애와의 대화에서는 자기감정의 골에 휘감겨 버리고 만다. ‘오아시스’에서 종두(설경구)가 공주(문소리)에게 물어본 첫 번째 질문은 “말할 줄 알아요?”다. 말할 줄 아는 공주를 확인하는 순간 종두는 공주에 대한 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그들의 사랑이 깊어지는 것은 만남을 통해서라기보다 그들만의 전화통화에서였다. 그들은 단 둘만의 대화에는 늘 성공하지만 문화적 지표인 가족사진에서는 소외되고, 합리성의 힘, 보편적인 힘인 법질서 앞에서 종두는 가해자가 되고 공주는 피해자가 된다. 이들 대부분은 사회/문화적 소통으로부터 소외되고 외면되는 운명을 그대로 떠안는다. ‘시’에서의 미자 또한 그러한 모습을 답습한다. 김노인과 메모로 진행하는 수기 대화, 희진의 어머니를 만나서 해야 했던 강요받은 대화 등에서 보여주는 미자의 표정과 행동에는 무력함과 유약함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순수음성의 폭로의 의지와, 폐쇄적 관계의 소통은 영화 속에서 재현되는 현실 속에서만 무기력해질 뿐이지, 그 힘의 연속성은 오히려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는 강력한 ‘훈향’을 느끼게 한다. 그 이유는 인물들을 통한 ‘순수음성의 자기 회귀’ 차원은 실재 현실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의 가슴속에 움트는 미묘한 감정을 강하게 충동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충동은 언어의 물리적 발화를 넘어 서로간의 감정을 건드리는 ‘초월’의 문제로 이어진다. 영화 ‘시’ 자체가 관객에게 그러한 감정의 기분을 초월적으로 촉발할 수 있게 된 이유는 인간 내면의 순수음성이 서로에게 내밀하게 연결되기 때문이고 이를 계기로 숨어 있던 감성이 폭로되기 때문이다.


    ‘찾기’의 시학


    영화 ‘시’에서는 극 전체를 관통하고, 특히 초반 10분여간 집중 부각되는 커다란 ‘행동’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찾기’다. 강가에서 노니는 아이들은 쉼 없이 무언가를 찾았냐며 서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미자는 병원에서 큰 소리로 울리는 핸드폰을 찾고자 가방 안을 온통 뒤진다. 미자는 머릿속에서 떠나버린 ‘지갑’이라는 단어를 찾고, 동시에 손에 들린 지갑을 찾기 위해 가방 속을 또 다시 뒤진다. 진료실에 들어간 미자는 자신의 증상을 표현하기위해 머릿속에서 멀어진 ‘명사’를 찾는다. 병원을 나서는 미자의 눈에 들어오는 넋을 잃은 한 여인은 딸아이를 찾고, 남의 손길이 필요한 김노인은 전화를 두 번씩 해가며 간병인을 찾는다. 미자는 김용탁 시인이 말한 시상을 찾고자 질문하고, 합의금 오백만원을 전달하고 나오는 길에 손자 종욱(이다윗)을 찾는다. 미자의 딸은 미자를 찾는다. ‘시’에서 ‘찾기’는 내내 이어진다.

    ‘찾기’란 공존 가능성 속에서의 멂과 가까움의 은폐 싸움이다. 미자의 머릿속과 가방 속은 그 싸움장의 은유다. ‘멀리 있음’은 ‘가까움’을 은폐한다. ‘가까움’은 ‘멀리 있음’을 은폐한다. “찾았어?”를 끊임없이 묻던 아이들이 찾은 것은 정작 가까이 있던 어떤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서 멀리 있던 익명의 여학생 시체였다. 미자가 찾는 핸드폰은 받을 필요가 없었고, 찾던 지갑은 자신의 손에 이미 들려 있었다. 늘 가까이 있던 딸아이를 찾는 엄마는 팔레스타인의 아들을 잃은 엄마처럼(TV 화면에서 나타난) 영원히 멀어진 딸을 맞이해야 한다. 김노인(김희라)도 미자를 찾는다. 더불어 미자는 머릿속에 늘 품고 가까이 하던 ‘명사’와 멀어진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의 명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까움에 의해 은폐되었던 명사의 ‘멀리있음’이 비로소 자신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녀는 알츠하이머란 병명 속으로 사라져가는 것이 아니라, ‘멀리 있음’의 진리가 폭로되는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러한 순간이기에 미자는 자기 병으로 인하여 결코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자는 희진의 죽음이 은폐되는 것에 더 크게 슬퍼한다. 미자는 종욱의 학교 교장선생님과 다섯 명의 학생 아버지들과의 대화 속에서 발설 금지를 암묵적으로 강요당하면서 말맞추기를 통하여 은폐될 위기에 처한 희진의 죽음을 처음으로 경험한다. 미자의 이 낯선 경험은 죽은 희진의 위령미사 장소로 미자를 이끈다. 미자는 위령미사 참여에 망설일 때 그 곳에서 우연히, 아니 필연적으로 희진의 사진을 본다. 미자는 희진의 사진과 희진 또래의 여학생들과의 시선교감을 통하여 은폐되어있던 ‘희진의 죽음’을 감지한다. 희진의 죽음은 희진 그 자체다. 결국 ‘희진의 죽음’과 위령미사에서 만나게 된 희진 또래의 여학생들과의 시선 교감 사이에서 미자는 희진에게 서서히 감화된다. 샤워기 소리에 묻힌 울음소리와 물과 눈물이 뒤섞인 미자의 몸은 그래서 희진에게 감화된 몸이다. 미자는 집으로 돌아와 종욱에게 질문한다. “왜 그랬어?, 왜 그랬어?”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이 질문은 미자의 질문이자 희진의 질문이며 미자의 울음이 희진의 절규로 변한 것이다. 미자의 손자 종욱은 이불 속으로 자신을 숨기고, 미자는 그런 종욱을 끄집어내려한다. 결국 미자가 끌어내어 찾으려는 것은 ‘멂의 진리’가 드러난 ‘명사’를 통하여 ‘가까움의 진리’가 은폐된 ‘희진의 죽음’이다.

    그러나 ‘시’에서 ‘찾기’란 또 다른 본성을 지닌다. 그것은 우연성과 필연성이다. 찾기는 노력에 의해 찾아지지 않고, 우연히 다가온다. 그러나 그 우연은 미자에게 만큼은 필연적이다. 미자가 우연히 발견한 땅에 떨어진 살구는 동백꽃이 고통을 담고 있듯 미자의 희생을 담고 있다. 아니, 미자의 희생을 예고하는 희진의 죽음을 담고 있고 미자가 희진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자신의 병 때문에 좀 더 큰 병원을 찾아야 했던 미자가 우연히 발견한 가짜 동백꽃은 이후 희진 어머니를 만나려던 중에 우연히 찾은 희진의 액자 사진 속 동백꽃과 맞물린다. 동백꽃, 땅에 떨어진 살구는 모두 우연으로 다가오지만 미자에게 만큼은 필연적으로 알레테이아를 일깨워준다. 사실 은폐는 폭로에게 쉽사리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알레테이아는 일치와 대응, 그리고 인과 관계로 설명되지도 않고 나타나지도 않는다. 무의지적 이거나 무의식적으로 출현하는 생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박하사탕’에서 영호는 순임이 준 카메라 속에서 필름을 발견하지만, 그 필름 속 이미지는 청년 영호의 순수함이 잠재된 이미지였다. 그러나 영호는 이내 그 필름을 뽑아 버린다. 영호의 순수함이 잠재된 사진 이미지가 표면화되었다고 해서 청년 영호의 순수함이 반작용으로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잠재된 이미지를 담은 필름은 결국 현상 되지 못한 채 사라지고 영호의 울음소리는 기차소리에 파묻힌다. 결국 영호의 순수함을 상징하는 사진 이미지는 잠재태에서 현실태로의 생성이 은폐되어 사라진다. 미자는 질문한다. “어떻게 해야 시를 쓸 수 있어요?” 영호가 뽑아 버린 필름의 이미지처럼 미자의 이 질문은 시(詩)를 오히려 사라지게 할 뿐이다.


    변질된 언어를 버리다


    적어도 ‘시’에서 시(詩)는 명사와 동사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된다. 그래서 처음에 미자도 ‘시’에 접근하기 위해 전적으로 규정적이고 한계 지어진 언어를 사용하고자 노력한다. ‘맨드라미는 방패’, ‘동백꽃의 빨간색은 고통’이라는 꽃말은 아름다움을 규정하는 언어의 규정성을 나타낸다. 바로 이 규정된 언어로의 접근, 규정된 기호로의 접근은 기하학적 사고, 논리적 사고, 인과적 사고로 대표되는 이성의 전초이며, ‘진실’이란 진술이 그것의 대상과 어찌됐든 일치하기만 하면 옳다고 여겨지는 전통적인 사유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이런 이성적 사유는 그동안 인간이 언어로 표현 못했던 수많은 것들을 잃게 만들었다. 인간의 감성은 사라지고, 인간 고유성은 그저 물질로 전락한 채 뿔뿔이 찢겨져 흩어졌다. 그러나 시(詩)는 그 옛날 언어의 순수한 숨결, 손상되지 않은 생명의 목소리로 인간을 자연에게로 열어 밝혀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변질된 언어는 이성적 기호가 되어 시(詩)가 가질 수 있었던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무한의 가능성을 변질시키고 오염시켰다.

    영화 ‘시’는 바로 이러한 이성적 사유로 인해 흠집 난 상처와, 잃어버린 순수음성의 자기 회귀를 미자가 쓰려는 시(詩)의 문제로 재조명하고자 한다. 더욱이 미자는 규정성, 명증성을 본질적으로 체득한 명사와 동사를 서서히 멀리할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나. 결국 미자가 진정으로 멀어져야 하는 것은 시(詩)의 존재 가치를 희석시킨, 언어의 순수한 생명을 잃은 변질된 기호다. 그러므로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시 쓰기’는 규정적 기호의 작용과 반작용으로 나타나는 시(詩)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들뢰즈는 단순한 작용과 반작용에 의한 반응은 생명 반응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지각이 행동으로 그대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생명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생명력은 즉각적 반응이 아니라 작용과 반작용 사이에 필연적으로 ‘지체(遲滯)’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지체(遲滯)’란 인간 내면의 감화 작용을 말한다. 내면의 감화 작용이란, 어떤 대상의 보이지 않는 공명을 자각하는 일이다. 만약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로서 즉각적으로 시(詩)가 출현한다면 그것은 ‘생명의 시(詩)’가 아니라 ‘죽은 시(屍)’로서의 기계적 반응일 수밖에 없다.

    ‘박하사탕’에서 청년 영호가 들고 있던 들꽃은 “이쁘죠?” 라는 순임에게 던진 말보다 그 의미를 훨씬 초월한다. ‘오아시스’에서 공주의 눈에 보이는 비둘기의 날갯짓과 나비의 너울거림은 문화가 오랜 시간에 걸쳐 정제한 ‘언어’의 영역을 초월한다. ‘초록물고기’에서 막동이 누워서 바라보던 능수버드나무는 무슨 이유에선지 그를 사유하게 만든다. ‘밀양’에서 교도소를 다녀온 후 교회에서 했던 신애의 몸부림은 변질된 기호의 한계를 표현하는 몸부림이다. ‘박하사탕’에서 영화 마지막 청년 영호의 눈물은 과거와 미래의 서사적 개념으로 설명될 수 없는 그런 눈물이다. 그래서 막동, 신애, 영호의 눈물은 내면의 침묵과 공명으로 인해 언어의 규정성을 넘어선 순수음성의 목소리로 울거나 절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자가 써야하는 ‘시(詩)’는 바로 이들의 눈물처럼 규정적 언어를 초월한 순수음성으로서의 시(詩)여야 한다. 미자의 시(詩)는 ‘죽은 시(屍)’로서의 기계적 반응 대신 ‘희진의 죽음’을 생성시킬 생명의 시(詩)여야만 하는 것이다.

    침묵과 미자의 상상력


    내면의 깊은 감화와 순수음성으로서의 침묵의 공명은 사실상 인간 고유성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성적 기호가 아닌, 손상되지 않은 순수음성은 감정 또는 정념을 야기 시켜 ‘변용의 능력’을 이끌기 때문이다. 이 변용의 능력은 인간만이 가진 인간 고유성을 완성한다. 변용의 능력이란 기호 차원의 ‘언어’의 건조함을 ‘순수음성의 풍요로움’으로 승화시키는 능력이다. 루소가 ‘고독한 산보자의 꿈’에서 언급한 ‘상상력’은 ‘연민의 정’을 인간화한 변용의 능력이다. 인간화한 연민의 정은 자신을 타인의 죽음과 죽음의 공포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따라서 상상력이란 타인의 죽음을 자신과 연결시킬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자는 희진이 느낀 죽음과 죽음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어야 비로소 희진의 죽음을 폭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미자는 희진이 몸을 던진 다리 위를 찾아간다. 순간, 바람에 의해 미자의 머리를 떠난 모자는 희진의 신체가 되어 물결을 맞이한다. 미자의 머리를 떠난 그 모자는 미자에게서 멀어져야하는 변질된 기호들이자 생명력 잃은 희진의 죽은 몸이다. 여기서, 흘러가는 물결 위의 모자와 다리의 난간을 화면의 위아래 배치한 장면은 그 시선이 ‘희진이 바라본 시선’과 ‘미자가 바라본 시선’이 시간을 초월한 채 동시에 존재하고 있음을 암묵적으로 강조한다. 이 장면은 희진에 대한 미자의 상상력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상상력을 우리는 목격한다.

    미자의 노트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역시 미자가 희진을 상상함으로써 얻어진 진정한 감화로서의 빗물이다. 마치 눈물처럼 보이는 이 빗물은 미자 노트의 여백 공간을 ‘풍요의 침묵’으로 채워주며 번지기 시작한다. 그 빗물에 젖은 미자의 모습은 샤워기 물과 자신의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던 이전의 자신보다 훨씬 더 희진의 알레테이아에 다가간 모습이다. 살구의 희생은 이미 여기서부터 예고되기 시작한다. 김노인을 찾아간 미자는 희진이 죽기 전 겪었을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떠안으려는 듯 김노인이 원하던 성관계 요구를 스스로 들어준다. 이것은 살구의 희생을 통해 상상력의 본질을 깨달은 미자의 희생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미자와 희진은 서로 만난 적이 없다. 더욱이 희진은 죽었다. 서로 만난 적이 없는 미자는 부존재로의 희진에게 어떻게 연민의 정으로서 감화되고 동화될 수 있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는가? 자크 라깡은 언어 없이는 ‘주체와 주체의 순수한 만남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존재와 현존재 간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이 정의는 미자와 희진에게 만큼은 비켜간다.

    이에 대해 폴 리쾨르는 ‘내면적 말하기’와 ‘외면적 말하기’를 구분한다. 외면적 말하기는 경험을 통해 말해지는 세속적 양상의 사회적 대화를 뜻하고, 내면적 말하기는 세계의 풍요로움 그 자체인 ‘침묵’을 내면으로부터 깊이 공감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내면적 말하기는 영화 속 미자와 희진 그리고 관객과 연결되는 ‘초월’의 다른 말로서 결코 은폐가 아닌 생성의 문제며 폭로를 충동하는 순수음성으로 말하는 것이다. 미자는 희진과 소통언어 즉, 외면적 말하기를 통해 접근할 수 없다. ‘죽은 희진’은 미자의 말을 듣지 못하며, 희진의 주체를 대리하는 ‘희진의 사진’도 미자의 말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자의 외면적 말하기는 필연적으로 내면적 말하기로 전환되어야 하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상상력을 통하여 대상 그 자체가 품고 있는 진실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제 비로소 미자는 희진을 향한 상상력으로 희진의 알레테이아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드디어 시(詩)를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살아있는 시의 용기


    “이제, 이대로 다 끝난 건가요? 완전히?” 미자의 질문은 절망에 가깝다. 미자의 절망은 ‘희진의 침묵은 영원히 가려져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비롯된다. 손자 배속에 밥 들어가는 것을 제일의 미덕으로 삼았던 미자가 손자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린 한 여중생의 여정을 함께 걷고, 고통을 찾아가 시(詩)를 완성할 수 있게 되었지만, 미자는 희진과의 내면적 말하기를 통해 얻은 또 하나의 그 질문, ‘희진의 죽음을 세상에 내놓을 수는 없는가?’라는 의문은 해결하지 못한 상태다. 그렇게 미뤄온 현실적 대답을 미자는 우연히 순창 아버지(민복기)에게서 듣게 된다. 미자의 체념과 절망은 우연히 던진 질문 속에서 필연적인 해답으로 완성된 것이다. 스스로에게 희진의 죽음을 알레테이아로 호명한 미자는 시(詩)의 완성과 더불어 사회/문화적 은폐의 의지에 저항하는 폭로를 감행하려 한다.

    그러나 시(詩)와는 달리 사회를 향해 던져야 하는 폭로는 또 다른 초월의 문제를 야기한다. 내면적으로 이해한 희진의 죽음을 또 다른 외면적 말하기로 승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희진의 죽음은 내면적 말하기로 인해 미자에게 시(詩)로 다가갔으나, 외면적 말하기를 통하여 희진의 죽음을 인식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문제는 사회/문화적 은폐의 담론과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훨씬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만든다.

    그러나 미자는 순창 아버지에게서 듣게 된 모든 방법을 실행하기 위해 경찰 비리 폭로자인 ‘김형사’(김민재)에게 모든 사실을 알린다. 우연히 만나게 되는 김형사 역시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인물로서, 미자의 시(詩)를 진정한 완성으로 이끈다. 이렇게 미자의 시(詩)는 ‘자식들의 미래’를 위한 가치와 ‘한 여중생의 불쌍한 죽음’이라는 사실 간의 갈등 속에서 결국 희진의 죽음에 대한 폭로의 의지로 완전히 이동했음을 알린다. 그래서 미자는 합의금 오백만원을 다른 부모와 달리 다섯 명의 남학생의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희진을 위해서 준비한다.

    이렇게 시(詩)쓰기의 알레테이아와 이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직후에 미자와 희진은 비로소 ‘아네스’로 거듭난다. 아네스는 희진을 위해 자신을 버린 미자다. 그래서 희진의 세례명보다 그 의미를 훨씬 초월한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살구의 희생을 통해 실질적인 희생이란 자신의 소멸임을 미자가 깨달았기 때문이다. “미자야, 미자야” 어린 시절 미자를 부르던 언니의 목소리를 회상하면서 부르짖는 미자의 절규에 가까운 ‘울음’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희진에게로 떠나야하는 미자의 마지막 'Swan song'이자, 순수음성이다. 이렇게 희진의 알레테이아는 미자에 의해 시(詩)로 재 현전되어 세상에 폭로 된다.


    finale


    우리가 ‘시’ 마지막 까지 미자의 눈물과 시(詩)에 대하여 혼동과 허무를 지속적으로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사회적 합의 속에서 은폐된 사실들에 대하여 철저히 무감각해진 우리 스스로의 감각 때문이다. “시 때문에 우세요?” 라는 질문은 그래서 우리의 질문이 된다. 미자의 눈물이 과연 ‘시’ 때문이었던가? ‘시’에서는 미자를 이해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다섯 명의 아버지들은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미자를 ‘개념 없는 할머니’로 만드는 다섯 명의 시선이 우리의 시선으로 쉽게 대치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알레테이아에 대한 우리의 무딘 반응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진리의 가치로 믿고 사는가? 공적 가치를 만나 건조한 침묵으로 방관하는 모습은 과연 누구를 위한 침묵이고 누구를 위한 방관인가? 우리는 일상의 대상에 대하여 진지하게 접근해 본적이 있던가?

    여기에 대해 미자는 일종의 반성자가 되어 우리 대신 고민한다. 그 고민이야말로 시(詩)의 출발점이고 진실의 출발점이다. 미자가 써내려간 시(詩)의 가치는 바로 이렇게 우리 스스로를 돌아봄으로써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생성과 폭로의 의지에 있다. 그 생성은 자폐적 반복에서 새로움을 잉태하는 영원회귀의 형태를 취한다. 그래서 영화 ‘시’에서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강물소리가 하나의 고리를 형성할 때 맞닿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희진의 ‘앞모습’이 영화 초반 희진의 죽은 ‘뒷모습’과 연결되는 연관성과 맞물리면서 영화 전체가 끊임없이 돌고 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순환이 돌고 돌기만 하는 폐쇄적인 고리 형태인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그 순환은 나선의 형태로 열린 순환을 통해 돌고 도는 모습일 것이다. 그래야만 생성의 가치와 새로움의 가치가 폭로에 의해 의미를 생성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미자가 깨닫게 되는 시(詩)의 가치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詩)의 가치와는 너무도 달랐던 이 가치는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의 가치란 무엇이었는가를 반성하게 만든다. 미자와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에 대한 간극은 결국 은폐와 폭로 그리고 침묵과 공명의 간극에 의해서 감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고민, 그 공존, 그리고 그러한 모든 양립가능성을 통해 영화 ‘시’는 우리의 마비된 감각, 세상 모든 공허한 침묵이 회복되길 기대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야만 모든 존재가치는 새로움의 연속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래야만 우리의 삶과 일상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 영화 ‘시’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지승학

    지승학

    1974년 경기 의정부 출생

    대진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홍익대 대학원 사진학 석사

    고려대 대학원 영상문화학과 박사과정 수료

  • 이상용 영화평론가

    영화평론 응모작은 2010년에 소개된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다수의 평문이 ‘시’,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악마를 보았다’, ‘옥희의 영화’를 거론하였다. 이외에 박찬욱,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포함하면 젊은 평론가들이 비평적 경배를 바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짐작케 한다. 하지만, 상당수의 글은 한두 편의 영화를 단락으로 연결하는 영화잡지의 기획특집 기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기존의 비평적 견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도 많아서 엇비슷한 주장을 반복적으로 읽게 되는 아쉬움도 생겼다. 다행스럽게도 손경민 김아름 지승학 씨의 평문은 주제를 다루는 글 솜씨와 더불어 주제를 이끌어가는 힘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시’에 대한 지승학 씨의 평론이었다. ‘알레테이아’(진리 혹은 비은폐성 혹은 드러냄으로 번역된다)라는 개념을 내세운 평문은 영화 속에서 은폐된 것과 드러내는 것의 변증법적 관계를 흥미롭게 서술하면서 이창동 영화의 전체 흐름을 조망하고 있다. 단평의 산만한 전개가 거슬리기는 하지만 영화의 의미를 집어내려고 하는 평자의 애정에 마음이 갔다. 앞으로 좋은 비평의 담론을 이어가주기를 소망하며, 저널적인 평론 쓰기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면 한다.
  • 지승학

    지승학

    1974년 경기 의정부 출생

    대진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홍익대 대학원 사진학 석사

    고려대 대학원 영상문화학과 박사과정 수료

    영화와 영화 비평의 간극은 넓었다. 비평은 일방적 소통이 아닐진대 왜 그 간극은 채워지지 않을까 고민했다. 하나의 영역과 또 하나의 영역이 대립할 때 배타적인 경계는 그 틀을 더 단단히 하는 법이란 걸 깨달았을 때 오히려 용기가 생겼다. 그 간극을 좁히리라. 무모한 시도로 시작된 내 글은 당연히 미숙하다. 그 속에서 흐릿한 가치의 흔적을 발견해주신 심사위원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글을 쓸 때 영화를 보는 시간만큼 즐거웠다. 영화는 좋아하기보다 사랑해야 할 대상인 것도 느꼈다. 그 사랑을 몸으로 느끼는 사람들만큼 나도 영화를 사랑했다 말할 수 있길 소망한다. 영화라는 이미지 속에 떠다니는 사람 냄새를 놓치고 싶지 않다. 그것은 비평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방대한 그 몫에 나도 한 부분 일조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 가슴이 벅차다. 앞으로 영화 속 가치를 건져내어 대중에게 열어 밝히는 평론가가 되고 싶다.

    당선통보를 알리는 전화 후 정신이 멍해졌음에도, 직접 전화로 이 소식을 알려드린 분들은 진정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다. 특히 김성도 이경률 교수님께 가슴 깊이 감사드리고 학교 동기 동료 친구 후배들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끝으로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 형용할 수 없이 고맙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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