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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세계,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

by  심은진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1.
    이정향 감독의 「미술관 옆 동물원」은 무엇보다도 영화에 관한 영화이다. 우리에게도 흔하지는 않지만 영화에 관해 질문을 던진 영화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만큼 집요하게 그리고 일관성 있게 이 문제를 파고든 것은 없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영화 속에서 스스로 실천하려 한다.

    모든 존재론적인 질문들은 항상 무겁다. 인간이 무엇이고, 우리의 삶이 무엇인가, 우리의 사랑은 어떤 것인가? 그러기에 많은 이들은 삶을 묻는 대신 삶을 살아가고, 사랑이 무엇인지 물어보기보다는 사랑을 한다. 그리고 많은 영화들은 영화가 무엇인지 물어보기 보다는 이것은 그냥 영화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정향은 영화에 대해 질문한다. 그러나 그녀가 질문을 던지는 방식은 너무나도 부드럽고 경쾌하다. 존재에 관한 무거운 문제는 밑으로 가라앉고 영화의 표면 위에는 춘희와 철수의 사랑의 이야기가 흘러간다.

    그 본질에 있어 영화는 짝사랑을 닮았다. 영화 속의 인물들과 영화를 보는 우리의 만남은 짝사랑하는 연인의 관계와 같이 서로 비껴간다. 영화를 찍을 때 관객인 우리는 부재 한다. 영화 속의 인물, 배우들은 우리의 시선을 간절히 바라며 우리의 사랑하는 눈빛을 그리며 영화를 찍지만 관객인 우리는 그곳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시선을 던지려 할 때,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영화 속의 배우들은 벌써 떠난 후이다. 그들의 흔적만이 스크린 위에 남을 뿐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시선은, 연인이 떠나고 난 뒤 간절히 그 흔적이라도 찾으려는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과 같다. 영화의 스크린은 이처럼 짝사랑하는 연인들의 시선처럼, 부재와 현존의 시선이 부딪치고 스쳐 가는 장소이다. 영화는 부재와 현존이 항상 어긋나고 비껴 가는 애달픈 짝사랑과 같다.

    영화는 짝사랑을 닮아 있기에, 사랑의 이야기로 영화의 존재론적인 질문에 접근하려 한 이정향의 방법은 설득력이 있다. 「미술관 옆 동물원」은 짝사랑하는 춘희와 애인에게서 버림받은 철수의 사랑 이야기이다. 춘희와 철수는 그들의 일방적인 사랑이 가져온 아픔을 잊기 위해 함께 시나리오를 쓴다. 두 사람은 그들의 사랑의 대상이었던 인공과 다혜를 주인공으로 사랑 이야기를 만든다.

    그리고 이들이 만드는 시나리오는 곧 이 영화 자체의 줄거리가 된다. 시나리오란 영화의 토대가 되는 이야기, 영화를 만드는 이야기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이다. 영화가 되기 전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시나리오는 우리 누구나 마음에서 꿈꾸는 이야기들, 만들어지지 않은 우리들 마음속의 영화와 같다. 춘희와 철수가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말, 하고 싶은 것들을 시나리오 속에서 표현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누구나 저마다 자신들만의 영화를 만든다. 이루지 못한 꿈들, 가지 못한 길, 붙잡지 못한 연인을 생각하며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마음속에서 영화를 찍는다.

    춘희와 철수가 써나가는 시나리오는 만들어져 가는 중의 영화를 의미한다. 또한 밤에는 시나리오를 쓰고, 낮에는 결혼식 비디오를 찍는 춘희는 이야기를 이미지로 바꾸는 사람, 감독에 대한 은유적인 인물이다. 회화 속에 등장하는 붓을 든 화가의 모습은 무기를 들고 있는 군인에 비유된다. 붓은 현실이라는 전쟁터에 나가기 위한 무기이다. 화가의 붓처럼, 군인의 무기처럼 이정향은 이 영화의 처음부터 카메라를 아무 거리낌없이 우리들에게 내민다. 이러한 그녀의 과시는 자신의 작업에 대한 신념의 표현, 자신감의 표현이다. 또한 자신의 전투에 대한 의지의 표명이다. 이정향은 영화라는 존재론적인 질문들, 그 힘겨움 싸움을 어떻게 치를 것인가?

    2.

    영화는 빛의 움직임으로 현실의 시뮬라크르를 만든다. 우리들을 웃고, 울게 만드는 것은 스크린이라고 부르는 하얀 막 위에 펼쳐지는 빛의 파장들이다. 그러나 이 파장들은 그 움직임만큼 자유로운 공간을 갖고 있지는 않다. 빛의 움직임은 네모난 틀 속에 갇혀있다. 우리는 이 틀을 흔히 프레임이라고 부른다. 프레임은 영화의 이미지를 경계짓는 틀이다. 그림과 사진, 영화를 보는 우리의 지각은 프레임이라는 이러한 사각의 틀에 길들여져 있다. 춘희의 방은 이러한 사각의 틀들의 전시장이다. 방의 곳곳에 걸린 네모난 액자, 부엌과 방 사이의 벽에 뚫려있는 네모난 틀, 침대 옆벽에 붙은 네모난 세계지도, 책장 위의 네모난 그림엽서, 그리고, 심지어 이불의 무수하게 많은 사각형의 무늬들. 이 영화는 이러한 사각의 틀들을 고의로, 끊임없이 노출시키며 우리들에게 그 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틀은 왜 사각인가?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눈은 둥근데 왜 그림들은 사각의 틀 속에 담겨있을까? 카메라는 둥근 렌즈로 세상을 포착하고, 영사기는 둥근 입으로 빛들을 뿜어내는데 왜 사진이나 영화는 네모 칸 안에서 이미지들을 전달하는가? 사각의 틀은 가시적인 공간, 자연의 있는 그대로의 공간을 기하학적인 공간으로 만든다. 리오타르는, 글을 쓰는 것이 그러하듯, 이미지를 사각의 틀 속에 담는 것은 세계를 재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 세계를 추상화시키는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춘희는 철수에게 손가락으로 네모난 틀을 만들어 보이며, 이렇게 보면 세상이 다 의미 있어 보여 라고 말한다. 틀은 눈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제한한다. 그러나 틀은 틀 안의 세계를 재배치하고 구성하면서 그 세계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 영화는 틀이 갖는 이러한 의도를 충분히 드러낸다. 다혜와 철수 춘희가 만나는 장면에서 다혜는 철수, 춘희와 한 프레임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춘희와 철수는 한 화면 속에 잡히지만, 다혜는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다혜는 변심했고 철수는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실은, 더 중요한 이유는 앞으로 다혜는 다른 세계, 철수와 춘희가 만드는 시나리오의 세계, 허구의 세계에 속하게 될 인물이기 때문이다. 인공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춘희와 인공은 한 화면 안에 잡히지 않는다. 인공에 대한 춘희의 사랑이 일방적인 짝사랑이듯, 인공은 춘희의 카메라 속에 담길 뿐이지 춘희와 인공, 두 사람이 나란히 한 틀 안에 들어오지 못한다.

    이 영화의 제목 또한 틀 속의 공간을 상징한다. 미술관과 동물원은 모두 가두어 두는 공간이다. 미술관은 틀 속에 담긴 그림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동물원은 날 것의 짐승들, 길들여지지 않은 것들을 가두는 공간이다. 자유로운 들판을 질주하던 야생의 동물들은 철창 속에 갇혀, 인간이 강요하는 규칙에 따라, 길들여 져야한다. 마치,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한 순간 화가의 눈이나 카메라에 포착되어 -포착과 포획은 결국 같은 의미이다-, 틀 속에서 우리들에게 보여지는 것처럼. 길들여진다는 것은 인간의 코드에 맞게 재배치되는 것이다. 틀 안에서 길들여진 동물들은 사람들에게 보여진다. 아니, 보여지기 위해 틀 속에 담긴다. 틀은 이처럼 날 것들을 가두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영화의 이미지에는 회화의 틀처럼 금속이나 나무로 만들어진 가시적인 분명한 틀은 없다. 그러면 영화와 현실을 가르는 틀은 무엇일까? 그것은 컴컴한 동굴 속 같은 극장 안의 어두움, '익명의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찬 수많은 어두움', 확산된 에로티시즘의 색채라고 바르트가 말하는 그 어두움이다. 어두움은 영화의 매혹 그 자체이다. 시나리오 속의 인공이 밤마다 관찰하는 어두운 우주의 빛나는 별처럼, 혹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을 동일시하는 다혜의 달처럼, 영화의 이미지들은 검은 공간을 가로지르며 하얀 영사막 위로 쏟아지는 빛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영화의 아우라는 밤이다. 밤 동안 춘희의 시나리오가 만들어진다. 인공과 다혜는 밤에 자전거를 타고, 사랑의 이야기를 나눈다. 밤에 산책 나간 춘희는 고장난 철수의 차에 갇혀 보름달을 보며, 인공과 다혜의 사랑 이야기를 상상한다. 달은 스크린에 대한 훌륭한 비유이다. 달이 항상 한 면만 보여주듯 우리는 스크린 뒤의 모습은 볼 수 없다. 낮에는 보이지 않는 달, 태양 빛을 받으면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달처럼, 스크린 위의 이미지들은 밝은 빛 속에서는 창백해지고, 변질되고, 지워진다. 어두움은 영화의 이미지를 붙잡고, 이미지를 현존케 하고, 틀을 만들어주며 형상을 제공한다. 그 어두움이 만든 사각의 입방체 안에서 영사기의 빛들은 춤을 춘다.

    틀은 작품을 열고 닫는 것이다. 틀은 선택이고 의미의 부여이다. 그러나 틀은 질주하는 우리의 시선을 구속하고 우리의 사유를 추상화시킨다. 철수는 춘희의 사랑이 액자 속의 그림처럼 갇힌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가두는 것으로서의 틀의 개념에서 더 나간다. 영화와 그림의 틀은 같지만 다르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틀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춘희의 방에 있는 액자나 사진, 다혜가 있는 미술관의 그림들이 갖고 있는 틀이다. 그림의 틀은 날 것의 세계, 구체적인 세계를 그림의 세계와 구분 지어 준다. 다른 하나는 춘희 방의 창문이나 자동차의 유리의 틀이다. 창문의 틀은 사각의 프레임에 담긴 이미지라는 점에서는 그림의 틀과 동일하지만 창문 밖의 세계, 그 틀을 둘러싼, 창문 너머의 더 넓은 세계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난다. 창문은 그 뒤에 우리의 시야에서는 감추어져 있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그것의 부분만이 우리에게 보여질 뿐인, 그 무엇인가가 있다. 숨겨져 있는 것, 보여지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것을 만든다는 의미에서 영화의 프레임에는 창문의 개념이 들어있다. 영화의 세계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보여주지는 않는다. 창문으로 보여지는 풍경이 보여지지 않는 풍경의 일부뿐인 것처럼, 영화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들은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만들어 내는 허구라는 세계의 일부일 뿐이다. 영화의 이미지를 만드는 보이지 않는 공간은 보여지는 공간보다 더 많고 그러기에 더욱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공간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드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프레임에서 쫓겨 난 다혜는 목소리로만 존재한다. 현실의 다혜는 전화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현실의 인공은 처음에만 얼굴을 보여줄 뿐, 시나리오 속의 인물이 된 후 현실에서는 춘희와 철수의 대화 속에만 존재한다. 우리는 춘희와 철수가 사는 세계 속에서 인공과 다혜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영화를 본다. 영화의 화면에서는 사라졌지만 영화 속의 세계 어딘가 에서 전화를 거는 다혜를 상상한다. 우리 눈앞에 그들은 부재하지만 여전히 영화의 어느 곳에선가에 살면서 그들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러한 우리의 순진한 믿음은 영화를 존재하게 하는 힘이다. 영화는 비워져있는 이 공간들을 채우는 관객의 상상력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영화가 상상적인 것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은, 감추어져 있는 이 공간 - 외화면(hors-champ)이라고 부르는 - 때문이다. 외화면은 믿음의 공간, 상상의 공간이다. 영화의 담론은 무수한 외화면의 공간들을 통해 만들어지고 읽혀진다.

    춘희와 철수는 창문 앞의 멋진 전망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곳은 우리들에게 보여지지 않는다. 춘희 방의 창문 밖 전경은 어떤 것일까? 둘이 멋있다고 말하는 과천의 동물원과 미술관의 갈라지는 그 길 앞의 전망은 또 어떠할까? 춘희가 구두 가게 앞에서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는 구두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 철수와 춘희는 우리에게 그곳들의 멋진 풍경과 모습들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지만, 그곳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여주지 않는다. 감추어져 있는 것은 더욱 보고 싶어지고, 부재 하는 것은 더욱 우리의 욕망을 자극한다. 시나리오 속의 다혜가 인공을 생각하며 내다보는 창문의 전경은 숨겨진 화면에 대한 얼마나 탁월한 비유인가! 그곳, 다혜가 바라보는 그 창문 앞에는 아무 것도 없는, 하얀 막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비어있는 스크린, 영화의 빈곳이다. 그곳을 보며 사랑하는 인공을 생각하는 다혜처럼,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화의 공간 위에 사랑하는 사람들처럼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3.

    영화에서 프레임은, 의미를 담고 구성하는 경계, 틀로서의 기능과 그 경계 밖의 풍요로운 상상의 공간을 전제로 하는 창문으로서의 두 가지 기능을 모두 한다. 영화는 보여주는 세계와 보여주지 않는 세계, 드러난 세계와 숨어있는 세계가 동시에 만드는 공간이다. 이 영화에서 끊임없이 보여주는 여러 종류의 프레임들은 이처럼 영화의 기본적인 장치들에 대한 메타적인 담론들을 만든다. 그런데 이정향이 이 영화 속에서 고의로 노출시키는 무수한 프레임들은 실은 단 하나의 현실적인 프레임- 극장 안의 어두움이 만드는 것이든, 혹은 익명의 어두움이 지워진 집안에서, 친숙한 가구들과 나란히 있는 텔레비전의 프레임이든지- 즉, 우리가 실제로 보고있는 「미술관 옆 동물원」이라는 영화의 프레임 속에 담겨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실제 영화의 프레임과 영화 속에서 재현된 여러 프레임들을 동시에 만나게 된다.

    춘희 방의 창문과 미술관의 그림, 춘희와 철수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보던 텔레비전은 프레임 속의 프레임, 격자구조(mise en abyme)가 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이러한 격자구조의 장치는 이중적이다. 화면의 구성 즉, 미쟝센(mise en sc ne)의 차원에서도 이루어지고 춘희와 철수의 이야기 속에 들어가 있는 시나리오 속의 인공과 다혜의 이야기, 이야기 속에 박혀진 이야기처럼 서술의 차원에서도 이루어진다. 격자구조는 거울과도 같이 서로를 비추는 자기 반영적, 자기 반성적 장치이다. 철수와 다툰 춘희가 액자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장면은 틀 속의 틀이 보여주는 반영의 기능, 반성적 장치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화면 가득 잡힌 춘희 방의 액자 속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액자 속의 그림이 아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그림과 겹쳐져 있는, 그림의 유리로 비춰진 춘희의 모습이다.

    그림 속의 사랑을 한다는 철수의 비난을 생각하며 춘희는 액자의 유리 속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자신을 대상화시키는 것은 자신에 대한 반성적 작업의 시작이다. 우리는 액자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후 그리고 비디오에 찍힌 자신의 모습을 본 후 변화된 춘희를 만난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 더 이상 괴상한 소리도 지르지 않고,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있지도 않고 맨발로 다니지도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춘희는 철수를 사랑하는 자신을 깨닫게 된다.

    영화 속의 영화, 그림 속의 그림, 틀 속의 틀들은 바로 이러한 반성적인 자기 성찰의 기능을 수행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영화에서의 틀의 제시는 자신의 존재양식을 드러내기 위한 한 장치, 영화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위한 장치이다. 그것은 어디까지가 영화이고 영화가 아닌지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이다. 그림을 통해서가 아닌 영화라는 장치를 통한 이러한 제시는 더욱 노골적이다. 울적할 때 보려고 모아 놓은 비디오의 끝 부분에는 철수가 찍은 춘희의 영상이 담겨있다. 춘희는 비디오에 찍힌 자신의 모습을 보고 당황한다. 그런데 두 춘희를 바라보는 관객인 우리는 더욱 당황하게 된다. 비디오 속의 춘희는 처음에는 텔레비전 속에서, 영화 속의 또 다른 틀 속에서, 우리에게 보여진다. 텔레비전이라는 틀은, 자신의 모습을 보는 춘희와, 비디오 화면 속의 춘희를 구분한다.

    그러나 곧 이 구분이 사라진다. 두 춘희를 나누는 틀, 찍힌 춘희와 바라보는 춘희의 경계가 없어진다. 두 춘희는 영화 속에서 동등한 위치를 갖는다. 그리고 두 춘희는 서로를 바라본다. 스크린 가득 담긴 두 춘희 시선, 정면을 응시하는 두 시선은 숏 - 역숏으로 제시된다. 그런데 두 춘희가 정말로 바라보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 속의 논리를 따르자면 비디오를 보는 춘희의 시선은 비디오 속의 춘희를 향해 있다. 그리고 비디오 속의 춘희의 시선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향해있다. 그렇다면 비디오 속의 춘희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인가? 비디오에 찍히는 순간 그것은 카메라의 눈이었지만, 지금은 찍힌 자신을 보는 춘희, 혹은 스크린 위의 춘희를 바라보는 우리이다. 비디오에 찍힌 춘희가 비디오를 보는 자신과 현실의 세계에 있는 관객 모두에게 말을 건네는 순간이다. 비디오 속의 춘희는 단번에, 단 한번의 눈길로, 현실과 허구라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영화에서의 자의식적 질문은 궁극적으로는 현실과 허구에 관한 질문이다. 틀 안의 틀, 이야기 속의 이야기, 영화 속의 영화는 허구와 현실이라는 각각의 세계가 갖고 있는 경계에 대한 우리의 주의를 요구한다. 비디오를 바라보는 춘희와 비디오 속의 춘희 두 사람 사이에서, 두 세계 사이의 어떤 구분도 어떤 경계도 사라져버린 두 춘희 앞에서, 우리는 어떤 춘희를 선택해야하는가? 어떤 춘희가 진짜인가? 이처럼 우리는 영화가 있는 세계, 영화라는 존재를 만드는 것에 대해 자문하게 된다. 영화라는 허구의 세계는 어디까지인가?

    프레임의 차원이 아닌 이야기의 차원에서 제시되는 격자구조도 결국은 현실과 허구의 이 경계를 말하기 위한 장치이다. 춘희와 철수의 사랑 이야기 속에 동물원의 인공과 미술관의 다혜의 이야기가 박혀져 있다. 인공과 다혜의 이야기는 컴퓨터의 네모난 화면 위에서, 보란 듯이 틀 속의 틀을 보여주면서, 우리를 그 안으로 빨려들어 가게, 박히듯 시작된다.

    박혀진 이야기, 시나리오의 이야기는 현실의 반대편에서 시작한다. 각자의 연인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두 사람은 영화 이야기, 상상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면서 슬픔을 달랜다. 서로의 연인의 이름으로 주인공을 만들어 사랑의 이야기를 엮어가고 이내 두 사람은 이야기 속의 연인들처럼 사랑을 하게된다. 사랑은, 우리들의 욕망은 환유적이다. 욕망은 욕망을 낳고 사랑은 사랑을 만든다. 환유는 인접하는 말들이 만드는 수사적 장치이다.

    인접하는 것들을 닮게 만드는 환유는 그러기에 전염병과도 같다. 사랑은 서로를 서로에게 전염시키는 것, 서로를 닮아 가는 것이다. 밤하늘을 관찰하는 인공을 닮기 위해 다혜는 우주에 관한 책을 열심히 본다. 다혜를 사랑하는 인공은 열심히 미술관을 드나들며 그림을 본다. 철수는 춘희를 흉내내 손가락으로 프레임을 만들어 본다. 자신이 늘 가던 동물원대신, 춘희를 생각하며 미술관으로 그림을 보러 간다. 그리고 춘희는 인공을 만나러 동물원으로 간다.

    환유적인 욕망, 전염병과도 같은 사랑의 구조는 바깥의 사랑 이야기와 박혀진 사랑 이야기 사이에도 이어진다. 현실의 철수와 춘희는 시나리오를 쓰면서 자신들이 만든 다혜와 인공을 닮으려한다. 시나리오 밖의 춘희와 철수가 시나리오의 인공과 다혜의 말과 행동을 조종하는 것 같지만, 이들이 점점 자신들을 이야기 속의 두 인물들에게 동일화시킬수록, 거꾸로 이들은 다혜와 인공이라는 허구의 인물들을 따라가게 된다. 둘이 함께 영화를 볼 때에, 철수가 춘희에게 생일카드를 전해주면서, 두 사람은 자신들의 진실을 시나리오 속의 인물들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현실보다 허구가 진실해지는 순간, 허구는 현실을 이긴다. 춘희와 철수가 자신들의 진실을 허구의 다혜와 인공을 통해서 표현하는 순간, 이들의 사랑이야기는 이야기 속 인물들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이제 허구의 인물이 두 사람을 대신하게되고 두 사람의 사랑의 이야기에 간섭하게 된다. 허구의 이야기는 현실에 종속된 것이 아니다. 두 이야기는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 준다. 허구와 현실은 공생의 관계가 된다.

    두 이야기가 연결되는 고리, 한 이야기에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는 방식 또한 환유적, 연상적이다. 춘희와 철수가 나누는 대화의 한 단어 - 별자리에 대한 철수의 설명은 이내 별자리를 관찰하는 인공의 모습으로 바뀌는 것처럼-는 이내 시나리오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현실의 사소한 사건들, 사물들 -고장난 자동차나, 자전거, 보름달 등-은 시나리오의 플롯을 만드는 모티브가 된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정말 흥미로운 것은, 그 고리가 모두 현실에서 허구로 넘어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춘희와 철수는 시나리오가 진행되어감에 따라 현실과 허구를 혼동하고 - 이것은 이들이 현실에서 나누는 대화와 시나리오의 대사를 혼동하는 데에서 잘 알 수 있다-, 놀랍게도 시나리오의 이야기가 현실의 세계로 넘어오는 일이 생긴다. 미술관의 다혜가 동물원의 인공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장면, '제 이름은 다혜예요, 다혜' 라고 말하는 장면에 뒤이어 바로 현실 속의 다혜가 춘희에게 '춘희씨 저 유다혜인데요' 라고 말하며 전화를 건다. 다혜라는 이름을 고리로, 이야기는 허구에서 현실로 넘어온다. 현실의 이야기는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고 허구는 다시 현실 속으로 흘러 들어와 현실의 것들을 변모시킨다. 이처럼 두 사랑의 이야기는 하나의 같은 이야기,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주는 이야기가 된다.

    4.

    영화 속의 프레임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영화 자체의 프레임을 잊게 되고, 영화의 프레임을 인식하게 되면 영화 속의 프레임들은 그 힘을 잃게 된다. 영화의 틀, 프레임은 현실과 허구의 힘이 만나는 헤게모니의 장이다. 이정향이 보여 주려한 영화 속의 틀들, 격자구조의 모습들은 영화에 대한 자기 반성적인 작업이면서 동시에 현실과 허구가 맺는 관계에 대한, 영화가 만들어지는 모습에 대한 자기반영이다. 이정향은 이 영화를 통해 현실과 허구는 분명 다른 차원의 것들임을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현실과 허구는 서로를 유혹하고, 서로를 질투하며, 서로를 닮으려하는 사랑하는 연인들과 같다고 말한다. 서로가 서로를 만드는, 공생하는 그 곳, 힘의 균형이 이루어진 그곳에 영화에 대한 이정향의 미학이 존재한다.

    그곳에 이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던지는 영화라고 하는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그녀의 답이 있다. 그리고 그녀는 영화 속에서 이러한 순간들을 실천한다. 이 영화는 현실과 허구가 힘을 겨루며 만들어 내는 아찔한 균형의 순간, 그 찰나의 미학을 곳곳에서 아름답게 보여준다. 현실의 틀과 허구의 틀이 힘을 겨루는 그 순간,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은 바로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무화되는, 두 세계가 나란히 공존하는, 그래서 두 세계에 놓여 있는, 두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 관객을 당황하게 만드는, 우리를 주저하고 머뭇거리게 하는, 그리하여 수많은 생각과 상상을 만들게 하는 황홀한 순간, 마치 우리가 있는 바로 이곳이 영화인 듯, 그리고 스크린 저곳이 현실인 듯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이다.

    시나리오 속의 이야기가 시작될 때 인공과 다혜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갖지 못한다. 화면 밖의 공간에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철수와 춘희의 목소리가 두 사람을 설명하고 두 사람을 대신한다. 이미지는 시나리오 속의 세계, 허구의 세계에 있지만 소리는 시나리오의 바깥, 현실에 있다. 이미지와 소리의 이러한 분리는 한꺼번에 두 개의 다른 공간, 다른 층위를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그러나 두 영역을 가르는 가시적인 틀은 없다. 또한 외화면에서 흘러 들어오는 춘희와 철수의 목소리들은, 소리가 부재 하는 우리의 눈앞의 이미지에 단지 정보만을 제공하거나, 그 이미지들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인공이 음악을 들으려하자, '그는 음악을 싫어해'라는 철수의 목소리가 끼어 들고, 화면 속의 인공은 카세트 테이프를 다시 뺀다. 소리가 이미지를 제어함으로, 소리로 존재하는 외화면의 공간이 어떻게 이미지로만 제시된 화면의 공간에 끼여드는가, 현존하는 이미지와 부재 하는 이미지, 현존하는 소리와 부재 하는 소리들이 어떻게 서로 만나는가를 보여준다. 소리와 이미지, 현존과 부재의 변증법이 이루어지는 이 공간은 현실과 허구가 만나는 접점이기에 더욱 빛난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가장 황홀한 순간은 마지막에 춘희와 철수, 인공과 다혜가 모두 한 곳에서 만나는 장면일 것이다. 이 장면은 「카이로의 붉은 장미」에서 스크린 밖으로 걸어나와 세실리아에게 다가오던 영화 속의 배우처럼, 우리를 아찔하게 한다. 그것은 현실과 허구의 두 세계가 일순간이나마, 경계를 허문 그런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서로를 스쳐갈 뿐이다. 스쳐간 풍경, 스쳐간 연인이 그러하듯. 스쳐 가는 것들은 아름답다. 미술관에서, 아마도 춘희를 생각하며 그림들을 보는 철수는 다혜 옆을 스쳐간다. 춘희는 철수를 찾으러간 동물원에서 인공의 옆을 스쳐간다. 동물원에서 미술관으로 이어지는 길, 그 길에서 다혜와 인공이 만나고 그 옆을 철수가 지나간다. 그리고 자전거를 탄 두 사람이 춘희 옆을 지나간다. 여기에 현실과 허구를 가르는 경계는 어디에도 없다. 두 이야기를 나누던 틀도 더 이상 없다. 틀도 경계도 사라진 세계. 현실의 춘희와 철수가 시나리오 속의 인공과 다혜와 한 화면에 들어오는 이 장면은, 그림을 나누던 틀이 사라지고 다혜와 그림이 하나가 되는 장면의 동어반복이다. 인공이 바라보던 그림처럼 자신도 인공의 시선의 대상이 되고 싶어하는 다혜는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그림 속으로 들어간 다혜의 모습은 그 세계가 뜻하는 바를 잘 암시한다. 그림과 합쳐진 다혜는 놀랍게도 날개를 단 다혜가 된다. 날개는, 다소 진부하지만 여전히 아름답고 낭만적인 상상에 대한 한 은유이다. 다혜의 날개는 빛의 날개, 날아다니는 빛들이 만드는 공간, 영화의 공간, 상상의 공간을 말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질 때 남아 있는 것은 우리의 상상뿐이다. 아니다. 있을 수 없는 그 공간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상상뿐이다. 춘희와 철수, 인공과 다혜는 바로 옆을 스쳐가지만 서로를 볼 수 없다. 서로 스쳐 가는 아름다운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특권은 관객인 우리에게만 있다.

    5.

    다혜와 인공의 이야기가 만들어 놓은 그 길에서, 서로가 서로를 보지 못하고 스쳐가던 그 길에서, 현실과 허구가 스치는 그 순간에 이 영화는 정지했어야한다. 철수와 춘희 다혜와 인공의 이야기는 현실과 허구가 힘을 겨루는 아찔한 그 사이, 흔들거리는, 우리를 망설이게 하는 그 공간, 매혹의 그 공간에서 멈추었어야 한다. 춘희와 철수가 이 곳을 빠져 나와 다시 우리들 앞에 섰을 땐, 그들은 비루한 연인이 된다. 그들은 사랑을 구걸하는 추한 연인을 닮을 뿐이다. 우리의 환심을 사려는, 우리의 사랑을 억지로 얻으려는.

    행복하게 끝을 맺는 많은 영화들은 실은 우리의 삶을 기만하는 것들이다. 우리의 삶은 영화처럼 모두 행복한 결말로 끝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약과도 같은 그것의 힘에 이끌려 극장으로 간다. 그러나 변치 않는 엄연한 사실은 영화는 허구이고 우리의 삶은 현실이라는 점이다. 많은 영화들은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자신이 허구의 존재임을 숨기려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처음부터 허구와 현실은 엄연히 다른 세계라고 말해왔다. 그리고 현실이 어떻게 허구를 만드는가 또한 허구가 어떻게 현실의 영역에 들어오는가를 줄기차게 보여준다.

    이 영화가 빛나는 것은 현실과 허구가 경계를 버린 짧은 그 순간, 순간 속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 황홀한 미학을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계의 접면에서 빠져 나온 춘희와 철수는 시나리오의 주인공처럼 해피엔딩을 요구한다. 사랑의 황홀감에서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채 맞게되는 애인의 배신과도 같이, 철수와 춘희의 행복한 결말은 우리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 그것은 허구에 대한 현실의 비굴한 굴복이다.

    그러나 우리의 진짜 현실로 넘어 오면 사실은 모순되게도 정 반대에 위치한다. 영화의 현실은 많은 관객을 모으는 일에 있고, 영화의 성공은 흥행의 성공에 있다. 아주 많은 영화들, 아니 거의 모든 영화들은 이러한 현실에 복종한다. 영화는, 허구는, 현실의 논리, 시장의 논리를 따를 때에만 살아남을 수 있다. 춘희와 철수의 행복한 결말이 영화 속에서는 허구에 대한 현실의 복종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현실, 영화의 현실에서는 흥행을 위한, 삶의 무거움을 잊으려는 사람들을 극장으로 유인하기 위한, 현실에 대한 허구의 참혹한 굴복이다.

    흥행에 성공한 모든 영화들이 모두 현실의 논리에 충실하게 복종한 결과물들인 것은 물론 아니다. 또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허구물이란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다. 문제는 항상 여기에 있다. 어느 순간에 타협을 하는가. 어느 지점에서 멈추어야하는가.

    이정향은 이 순간의 선택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그녀는 이 영화 내내 이러한 존재론적인 질문에 집착한다. 철수와 춘희의 행복한 결말은 아마도 그녀에게는 쉽지 않은 결론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빛나게 만드는 것은 곳곳에서 보여주는 관객에 대한 믿음, 우리의 상상력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러한 믿음이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해답, 영화라는 존재의 일차적인 조건이 될지도 모른다. 이정향이 「미술관 옆 동물원」을 통해 보여주려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녀는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자신의 신념과 애정이 무엇보다도 관객에 대한 믿음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보는 이가 없으면 영화는 존재할 수 없다. 보고자하는 욕망, 바라보는 자의 상상력이 없으면 영화는 단지 빛의 유희일 뿐이다.

    그녀의 첫 영화가 우리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앞으로 그녀가 보여줄 선택들에 대한 우리의 기대와 시선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그녀의 선택이 얼마나 힘들 것인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논의는, 적어도 그녀가 현실에 대한 안이한 굴복은 피해 가리라는 우리의 믿음에서 출발한 것이다.
    심은진

    심은진

    1964년 서울 출생

    1997년 이화여대 불문과 문학박사

    이화여대 불문과 강사

    199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영화 수학중

  • < 틀, 세계,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 >을 뽑고나서
    최민, 강한섭


    부산의 18세 고등학교 2학년 학생으로부터 아직도 원고지를 사수하는 40줄의 중년 그리고 미국 시카고에서 날라 들어온 이메일 원고에 이르기까지 정말로 다양한 예비 평론가들의 글이 심사위원들에게 전해졌다.그러나 IMF를 조기 졸업한 탓인지 응모편수도 줄어들고 전반적인 수준도 고만고만했다.반면 교조적이고 규범적인 '재미없는' 글들은 줄어들고 다양한 시각을 자랑스럽게 뽐내는 개성적인 글들이 많아졌다.그 중에서도 국내의 거의 모든 영화상을 휩쓴 '아름다운 시절'을 사정없이 몰아세운 박준씨의 '박제화된 시선의 틀 안에 갇힌 정서,그 색 바랜 건조함'과 기성평단이 그저 꽤 잘 만든 로맨틱 코미디 정도로 치부했던 '미술관 옆 동물원'의 숨겨진 비밀의 코드를 찾아내 재평가한 심은진씨의 '틀,세계,영화'가 단연 돋보였다.

    그러나 앞의 응모작은 평론가가 갖추어야 할 전투적인 문제의식은 뛰어났지만 작품에 대한 총체적인 평론을 포기하고 지나치게 몇 개의 개념에 함몰된 점이 치명적이었다.이에 비해 심은진씨의 글은 논쟁은 약했지만 집요한 관찰과 예리한 분석력을 뛰어난 문장으로 표현하는데 성공했다.이 정도의 글은 일급의 프로 평론가도 일생에 몇 편 쓰기 힘든 수준의 평론이었다.이밖에도 고경범씨의 '도시영화,모더니티의 수사학'과 임화인씨의 '서글픈 웃음,해체로서의 코미디 전략'도 인상적이었다.
  • 심은진

    심은진

    1964년 서울 출생

    1997년 이화여대 불문과 문학박사

    이화여대 불문과 강사

    199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영화 수학중

    자신이 쓴 글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항상 부끄럽고 두렵다. 그것은 은밀한 나의 욕망과 미처 검증 받지 못한 척박한 나의 논리를 들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뻔뻔스럽게도 나는 다시 한번 일을 저질러 버렸다. 이 뻔뻔함이 주변 사람들에게 작은 즐거움을 준 것으로 나는 위안을 삼는다.
    사람들을 울고 웃게 만드는,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영화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요즘 나의 생각을 붙잡고 있는 것은 이 질문이다. 그리고 이 평론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나의 미미한 중간 보고서인 셈이다.

    한편의 영화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일은, 진실된 우리의 모든 사유가 그러하듯, 삶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항상 주변의 사람들, 그들의 삶을 떠올린다. 영화는, 아니 모든 예술은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한 이들, 나를 이해 못해 등을 돌린 사람들, 눈을 흘기며 내가 떠나온 이들을 영화 속에 만난다. 그리고 영화를 보며 나는 그들과 화해한다.


    내가 남들보다 이러쿵저러쿵 떠들기를 좋아해 영화 평을 썼고, 더 많이 떠들고 이야기해보라고 이렇게 뽑혔다 생각한다. 볼품없는 글을 선택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공부하고 생각하는 길의 어려움과 즐거움을 알려주시는 김치수 생님께 감사드린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나의 가족,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두분, 부모님에게 이 글이 기쁨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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