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대중문화의 소설적 교란

by  현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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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의 제명으로 쓰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진술은 마치 상업광고의 문안처럼 인상적이다. 만약 이 진술을 광고 문안으로 쓴다면 어떤 광고에 어울릴까. 소설 속의 주인공인 `자살 안내업자'의 슬로건에나 쓰일 법한 이 도발적 진술의 성격은 이 진술이 담보하고 있는 소설의 형식을 고찰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재미있게도 현대 소비사회에서 `광고'가 파생시키는 갖가지 언설들은 김영하의 장편을 하나의 대중적 매체로 이해하기에 충분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실제로, 장 보드리야르가 행한 대중매체문화 분석, 특히 `팝 아트'와 `광고'에 대한 비판적 분석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형식적 특성에 가해질 수 있는 `소설의 형식에 대한 분석'과 닮아있다. 나아가, `매체는 메시지이다'라는 마샬 맥루한의 명제를 염두에 둔다면 `이미지'와 `가상 현실', 그리고 `혼성모방'이라는 분석적 주제는 고스란히 김영하의 소설쓰기가 기획한 미적 측면과 일치한다. 팝 아트의 성격, 가령 `사실주의가 아닌 기호 시스템'은 그대로 `소비의 논리'로 옮겨와 `광고'에 이른다. 광고의 문안은 모든 사람의 동의를 강요하고, 사람들은 이 `기호 조작의 몽타주'에 의해 메시지의 전달을 깨닫지 못한다. 미디어 자체가 바로 메시지임을 무의식중에 해독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형식적 기법으로 채택하고 있는 `사실주의가 아닌 이미지에 의한 가상 시스템'은 그대로 소설의 메시지일 수 있고, 죽음을 종용하는 듯한 소설의 제명은 `소비의 형식'이 아닌 `사유의 형식'을 제공하는 하나의 매체에 대한 역설적 언급일 수 있다.

    그렇지만 현대의 문화적 특성이 광고와 문학을 하나의 매체로 묶어준다 할지라도 그 변별성에 대한 기대는 쉽게 가시지 않는다. 더군다나 `문학의 종언'을 운운하는 이즈음에 소비의 논리가 문학의 논리에 다름없다면 그 낭패감은 문학의 폐기에 대한 올곧은 실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고급 문학 혹은 고급 예술의 기반이 축소해가는 문화는 결국 하나의 시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거기에다 소비의 논리가 지배하는 문화적 환경에서 빚어지는 예술의 대중성은 저급한 통속성을 부채질하기 마련일 것이다. 김영하의 소설은 대중성에서 통속성으로 넘어가는 경계의 아슬아슬한 위치에 자리하고서 현대의 문화적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먼저 `대중문화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대중문화적이다. 그리고 `이미지', `가상 현실' 등 새로운 형식에의 시도를 통해 대중매체적이다. 그러나 `문학은 작가와 독자의 소통 수단'이라는 귄터 발트만의 말을 참고하지 않더라도, 이 `대중성'의 근간에 `소통의 욕구'가 도사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문화적 관습의 하나로서 문학은 새로운 문화에 응당 새로운 관습을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특히 형식의 새로움을 통한문학적 소통에의 노력은 마치 전통처럼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변전하는, 인간처럼 유한한 생명력을 과시하는 일종의 서사적 질문에 다름아니기에, 이런 일련의 시도들은 일단 긍정적이다. 이 시도들은 또 `죽음(자살)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소설 형식적 대답이기도 하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인상적인 소설의 제명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소설의 제재가 `죽음(자살)'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은 곧 `삶'에 대한 기본적인 알레고리이기에 소재의 파격성에 그다지 놀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 제명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물음에 우회적으로 환원한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 철학적 물음은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물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앞의 물음이 `인간은 소통이 가능한가'라는 변용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뒤의 것은 `문학은 소통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옮겨간다.

    이 모든 물음들, 엄밀히 말해서 `현대'에 이르러 부각되는 이 물음들은 바로 소설의 형식에 회귀하고, 그 형식들과 소설의 치밀한 구성은 소설이라는 매체의 특성으로서 독자의 무의식에 `의미'를 전달한다. 이 `의미'는 `소비의 논리'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문학의 논리'이자 `소통의 논리'로 부상한다.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직업은 `자살 안내업'이다. 자살의 욕구를 가진 자를 찾아내어 스스로를 죽이도록 도와주는 일, 그것이 바로 그의 직업이다.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에게는 창작을 하거나 살인을 하는 두 가지 길이 있을 뿐'이라고 간명하게 확신하는 그는 고객의 자살을 도와주고 그것을 소재로 글을 쓴다. 그가 컴퓨터에서 불러낸 두 편의 소설은 두 명의 여자고객에 관한 것이다.

    `유디트'라는 여자가 있다. 끊임없이 어디론가 떠나고자 하는 그녀는 애인(K)의 형인 C와 관계를 가진다. C와 함께 동해안으로 떠나보기도 하지만 그녀에게는 여전히 "멀리 다녀왔는데도 바뀐 게 없" 다. 또한 `미미'라는 여자가 있다. 그녀의 직업은 행위 예술가이다. 죽은 유디트의 재생처럼 보이는 그녀는 행위 예술을 통해 타인과의 소통을 적극적으로 시도한다. 그렇지만 그녀 역시 소통의 형식에 집착함으로써 삶의 공허함에 역행할 수는 없다. 비디오 예술가인 C는 미미를 자신의 카메라에 담고자 하지만 결국 `소통의 욕망'만을 복제할 따름이다. C와는 표면적으로 대립적 성격으로 구분된 K 또한 죽음을 향한 질주를 통해 삶의 불가역성을 확인하는 데 그친다. 그리고 두 여자의 이야기를 둘러 싼 두 액자의 사이에 등장하는 `에비앙'을 마시지 않는 홍콩 여자, 그녀 또한 일방적 소통에의 두려움을 떨쳐내고자 할 뿐, 소통의 욕구를 회복하려 하지 않는다.

    자살 안내업자, 그는 `작가'이기도 하다. `예술가'로서 그는 사명감과 고통 속에서 타자를 사랑하며 연민한다. 자신의 작품을 통해 독자와의 소통을 시도하는 그는 타인의 죽음을 지켜본 뒤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몬다.

    두 편의 독립적인 이야기에 겹쳐서 등장하는 C와 K, 그리고 `미미의 이야기' 속에 스치듯 등장하는 자살 안내업자를 보건대 이 소설은 언뜻 『펄프 픽션』이나 『중경삼림』의 짜임새를 흉내낸 듯한 영화적 감각이 내비친다. 그러나 이 소설의 짜임새는 보다 복합적이고 독특하다.

    `Ⅰ. 마라의 죽음, Ⅱ. 유디트, Ⅲ. 에비앙, Ⅳ. 미미, Ⅴ. 사르다나팔의 죽음'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자살 안내업자의 시점으로 된 Ⅰ·Ⅲ·Ⅴ장, 그리고 자살 안내업자가 쓴 두 편의 소설로서 전지적 시점으로 쓰인 Ⅱ·Ⅳ의 두 장으로 뚜렷이 구분된다. 독자는 소설을 다 읽기까지 두 개의 액자 속에 마련된 가상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나와야 한다.

    그러나 액자의 바깥은 액자 내의 설정보다 가상의 밀도가 더 높다. 독자는 맨 처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온전히 가상인 공간에 발을 디디지만 그 공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두 개의 액자로 들어가는 순간, 반사적으로 `리얼함'을 느끼고 다시 액자의 밖으로 나올 때도 마찬가지이다. 작가가 기획한 서사적 전략의 독특함은 `열린(offen) 액자 두 개가 나열된 연작적 액자소설(zyklische Rahmenerz hlung)' 을 기획함으로써 일단 어느 정도 성공적인 셈이다.

    이러한 소설적 짜임새에서 등장 인물들의 소통 가능성은 거의 절망적이지만 그 절망이 소설쓰기라는 소통 지향의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는 점은 우의적이다. 이 우의성은 문학의 운명에 대해 흥미로운 논변을 가능케 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자살 안내업자의 소설쓰기는 김영하의 소설쓰기로 은밀하게 확장될 수 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제명은 이러한 태도에 대한 의미심장한 진술임에 틀림없으며, 이에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이 시대 문학의 운명에 대한 한 편의 착잡한 우화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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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이라는 언어적 공간은 언제나 시공간 감각이 조밀하게 뒤섞여 성립한다. 즉 소설은 시간적 사유와 공간적 사유의 결집체이다. 소설의 공간에서 이미지는 공간적 사유의 기제로서 작용하고, 다시금 시간적 사유의 매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이미지의 역할은 문학적 형상화에 보다 진일보한 가능성을 가져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렇다고 해서 이미지가 소설이라는 소통 양식에 혁명적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며, 서사성을 지닌 예술로서 기능하는 소설의 형식에 대해 그 개념적 재고를 요구하는 단계에 이른 것도 아니다. 단지 이것은 포스트-모던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유 양식에 보다 들어맞는다는 의미에서 서사체계를 좀더 탐미적으로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는 새로운 언어이다. 이 진술은 이미지가 언어의 메커니즘을 그대로 따른다는 표현이다. 아니, 언어를 뛰어넘을 수도 있다. `이미지는 선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가 체계인 텍스트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장-루이 셰페르의 통찰을 되새기지 않더라도 우리는 언어와 결탁하면서, 즉 서술되면서 단숨에 서사 구조를 대체해버리는 이미지를 쉽게 고찰할 수 있다. 김영하의 판타지 서사는 나름의 이미지 구축에 기초한다. 작품의 정조를 아우르는 다비드의 그림 「마라의 죽음」에서부터 등장 인물 `세연'에 투영된 클림트의 그림 「유디트」의 이미지는 곧바로 판타지 서사의 형태로 탈바꿈해 드러나며,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 「사르다나팔의 죽음」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이를 완결짓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소설은 거대한 하나의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한다. 이러한 소설 공간의 확장은 회화적 공간 구성과 묘사를 문제삼는 데에서 더 나아가 회화의 `이미지'를 소설적 공간에 투영하여 얻은 소기의 결실이다. `소설은 회화를 포함할 수 있고 어떤 순간에는 그래야만 한다.' 는 언급을 이제는 새로운 관점에서 확대 해석해야 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 소설에는 회화 그 자체가 등장하고, 그 그림들은 소설의 진정한 제재이고 주제의식의 출발점이며 도달점이기 때문이다. 이 명화들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단순한 실마리 구실로 그치지 않는다. 소설은 다비드가 그린 한 편의 그림에 대한 읊조림으로부터 시작한다.

    1793년에 제작된 다비드의 유화, 「마라의 죽음」을 본다. 욕조 속에서 피살된 자코뱅 혁명가 장 폴 마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머리에는 터번처럼 생긴 수건을 두르고 있고 욕조 밖으로 늘어뜨려진 손은 펜을 쥐고 있다. 흰색과 청색 사이에 마라가 피를 흘리며 절명해 있다. 작품 전체의 분위기는 차분하고 정적이다. 어디선가 레퀴엠이 들려오고 있는 것만 같다. 그를 찌른 칼은 화면 아래쪽에 배치되어 있다.(7쪽) 마치 영화 도입부의 한 장면(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라는 영화의 도입부를 떠올리면 되겠다. 재미있는 것은 그 도입부에서도 레퀴엠이 흐른다는 사실이다.)을 연상케 하는 이 대목은 어떤 그림에 대한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화자의 의식을 거친 채 무엇인가를 의도하고 있는 그림의 이미지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화자의 내면에 대한 이미지화로서 화자의 문체를 결정짓는 데 치중하고, 나아가 소설의 서사구조에 개입한다. 이렇게 기능하는 그림의 이미지는 결과적으로 소설의 주제의식에 다름아닌 괴괴하게 가라앉은 소설적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그림의 이미지는 곧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소설적 공간의 이미지이다. 이 이미지는 서사적 공간을 거쳐 다시 이미지로 회귀한다. 결국 이미지의 중층화이다. 소설은 다시 한 편의 낭만주의 회화에 시선을 고정한 채 끝나간다. 「사르다나팔의 죽음」. 성도의 함락을 눈앞에 둔 바빌로니아의 왕이 무사들을 시켜 그의 왕비와 애첩들을 살해하는 장면이다. 한 건장한 무사가 냉정한 표정으로 몸을 한껏 젖힌 전라의 여인을 등뒤에서 껴안고 위로부터 수직으로 칼을 내리꽂고 있다. 가로 5미터, 세로 4미터의 화면은 살육의 잔치로 가득하다. 화면 왼쪽에는 왕의 애마를 끌어내는 흑인 무사의 모습이 보인다. 말도 곧 살해될 운명에 처해 있다. / … 마지막에 사르다나팔 왕을 발견하게 되는 관람자들은 숨을 죽이게 마련이다. 냉정하게 자신의 패배를 지켜보는 왕과 몸을 뒤틀며 죽어가는 여인들의 대조가 이 그림의 백미이다. …(137쪽)

    이 그림은 자살 안내업자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드러내는 매개이다. 화자는 서사의 욕구를 머금은 채 그림의 이미지를 강조해낸다. 흥분과 격정을 가라앉힌 채 타인의 죽음을 지켜보며 자신의 죽음까지를 기다리는 화자의 태도는 이 그림을 통해 드러난다. 화자는 결국 유디트가 했던 말을 독백조로 바꾸어 반복하며 자신의 죽음 혹은 삶을 권태롭게 바라본다.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141쪽) 여기에다 클림트의 그림 「유디트」는 등장 인물 `세연'의 이미지를 그려낸다. 첫 등장에서부터 `유디트'로 호명되는 그녀는 마치 「사르다나팔의 죽음」에서 묘사된 `몸을 한껏 젖힌 전라의 여인'처럼 죽음에 근접해 있으면서도 충분히 관능적이다.

    … 여자는 그제서야 눈을 떠 그를 바라보았다. 정염이 채 가시지 않은 눈동자에선 푸른빛이 났다. 그녀에 대한 첫인상은 클림트의 그림, 「유디트」를 닮았다는 것이었다.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여 잠든 틈에 목을 잘라 죽였다는 고대 이스라엘의 여걸 유디트. 클림트는 유디트에게서 민족주의와 영웅주의를 거세하고 세기말적 관능만을 남겨두었다.(20∼21쪽) 유디트는 「유디트」처럼 관능의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이 소설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는 관능적 장면들은 소통에 절망한 자들의 공허한 몸부림을 보여준다. 특히 스스로가 선택한 죽음 앞에서의 관능성이라는 설정은 소통이 지닌 비극적 운명의 아이러니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들이 하나 하나 흩뿌려지는 것은 아니다. 김영하의 전략에 있어서 이미지는 서사와 균형을 이루는 이미지들로서 하나의 서사 체계에 기여한다. 이 이미지는 새로운 종류의 서사적 사유를 가능케 한다는 의미에서 `3차원에서 4차원으로 진격해 들어가는 전략적 이미지로서의 서사적 이미지'이다. 근본적으로 시간의 제약 속에서 표출되는 이 이미지는 곧 서사적 상상력에 개입한다. 그리하여 이 이미지는 곧장 새로운 서사의 체계로 우리를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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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에서 끌어올려지는 서사의 세계는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긴장을 유지하려 한다. 그리고 그 긴장의 세계가 현실과 멀어져 갈수록 상상력은 소통에 더 주력하고자 한다. 가상의 현실은 그 소통의 공간에 배치된다.

    가끔 허구는 실제 사건보다 더 쉽게 이해된다. 실제 사건들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다 보면 구차해질 때가 많다. 그때그때 대화에 필요한 예화들은 만들어 쓰는 게 편리하다는 것을 아주 어릴 적에 배웠다. 나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을 즐긴다. 어차피 허구로 가득한 세상이다.(61쪽, 굵은 글자는 필자의 강조표시임)

    실제와 허구의 거리를 무시해 버리는 태도는 그 출발점에 있어서 소통의 대상을 염두에 둔다. `허구로 가득한 세상'에 소설은 `말짱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소설 속의 공간은 역설적으로 진실의 공간이다. 이 공간은 소통의 매개 역할을 하는 이미지가 시간의 흐름을 확보하는 장소이다. 이는 다시 `허구로 가득한 세상'에 대한 직설적 드러냄의 수단이 된다. 하지만 이미지로부터 얻은 소통에 관련한 모든 것은, 자유로운 반면 현실에 견제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가상의 공간이 의미있는 것은 단지 소통의 사적인 경험으로서이다. 이것은 곧 소설의 묘미로 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상 현실의 공간과 실제 현실의 공간이 만나는 지점, 즉 독자의 현상학적 사유가 머무는 공간이 긴장을 잃어버린다면 이 소설은 대중소설로 전락할 위험을 스스로 불러들인다. 이것은 소재가 주제를 압도해 버리는 위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소설이 독자들로부터 주제와 관련한 반성적 인식을 이끌어 내지 못할 때 소설은 마냥 순진한 유희적 글쓰기로 전락한다. 김영하 소설의 성과로서 언급되는 `나르시시즘'이 그럴듯한 주제로서 문제화되고 반성적 인식을 제공하느냐, 그렇지 않고 그저 하나의 소재로 전락하고 마느냐는 김영하의 소설이 마련한 소설적 공간이 실제 현실과의 관계에서 긴장을 확보하는 수준에 달려 있다. 이미지가 자기자신의 순수한 시뮬라크르 라 할지라도 회화의 이미지로부터 출발한 `가상 현실'은 순전한 가상일 수 없다. 이미지가 서사화할 때는 현실의 `체계'에 기반해야 하는 까닭에 그것은 그러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김영하의 글쓰기가 `시각 이미지의 소설적 착종'으로 확보한 가상의 세계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다. 가상 현실의 공간, 즉 이 소설의 공간은 너무나 순진한 허구이기에, 자신의 속임수에 철저히 거짓말을 할 경우에만 그것이 사실과 맺고 있는 긴밀한 관계들을 설득시키게 될 것 이기 때문이다.

    가상의 세계를 성공적인 문학적 형상화로 가늠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세계가 타당성이 뒷받침된 진실을 담보하고 있을 때이다. 김영하의 장편이 그 진실로서 삶에 대해 `죽음(자살)'이라는 기제를 확보하고 있음에도 그 타당성은 희미하고 모호하며 제명의 도발성에 비추어 부실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마치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면서 이유없이 비행기를 쳐부수는 것과 같다. 죽음에 이르는 등장 인물들이 삶을 거부하는 것은 `권태' 때문이다. 이 일상적 감정에 대한 극복은 오직 `삶에 대한 극단적 거부'로서만 시도된다. 작가는 죽음 혹은 죽음에 대한 막연한 전망만을 오직 실존의 에피파니로서 제시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두 개의 액자와 액자의 밖, 세 편의 에피소드들은 한결같이 주체의 죽음을 서술하지는 못한다. 유디트와 미미의 죽음은 자살 안내업자의 시점으로 옮겨가서 형상화될 따름이고, 자살 안내업자는 한 장의 그림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암시할 수 있을 뿐이다. 목전의 죽음에 이르러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따위의 건방을 떠는 그는, 결코 멀리 떠나오지 않았다. 끝내 죽음 그 자체를 서사화할 수는 없었기에 그것은 그러하다. 죽음은 그저 한 장의 그림으로 이미지화할 뿐이다. 이처럼 이미지에서 출발한 세계가 끝내 이미지로밖에 환원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자신도 그의 의뢰인과 다름없이 죽음에 자신을 내맡길 뿐인 자살 안내업자의 운명이자 작가의 한계이다. `나를 파괴할 권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 물음은 이미지에서 출발한 서사적 구조물에 대한 한계, 그리고 서사화하는 이미지의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마치 파스텔톤의 직조물처럼 갖가지의 원사가 서로 규칙적으로 교차하며 일구어 내는 이미지처럼 보인다. 소설적 공간에서 이미지가 담지하는 것은 결국 모방적 서사이며 언제나 되묻는 근원적 물음이다. 이 물음은 소통의 형식, 곧 소설의 형식이라는 직조물과 그것을 가로지르는 주제라는 또 하나의 직조물이 교차하며 형상화된다. 여기에 그것들이 교차하는 하나의 선이 만들어지는 셈인데, 바로 소설의 형식이자 주제이며 문체이기도 한 그 교차선의 형상화는 앞서 밝힌 것처럼 가상 현실의 공간을 빌어 이루어진다. 하나 하나의 원사들이 가진 이미지들이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는 현실의 체계를 닮고자 하지만, 서사의 얼개가 흐릿하게 짜여져 마치 쓰러져 가는 허상의 세계처럼 보인다. 등장 인물들의 휑뎅그렁한 죽음만이 난무하는 이미지의 자기도취는 소설의 결말에 이르기까지 절제를 모른 채 독자를 도발한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제명은 작품의 한계를 뚜렷이 드러내 보이는 공허한 주장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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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련의 평자들은 김영하의 장편에 등장하는 몇몇 `댄디적 성향'이라 지칭될 수 있는 것의 사례가 단순히 이 시대의 대중문화적 정보의 나열이 아닌 작품의 유기적 구조에 기반한 것임을 강조한 바 있다. 물론 그러한 이해는 문학작품이라는 하나의 텍스트는 성공적으로 흡수한 사회적 가치와 맥락으로 인해 문화적이라는 관점 에서 긍정적 태도를 취한다.한편 작가중심적 관점을 취한다면 김영하의 대중문화적 요소를 끌어들인 소설쓰기는 마치 중력의 힘과도 같은 작가의 사회적 자의식이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문화적 요소가 대상의 원래 모습으로 드러날 수는 없기에 차용의 곤혹스러움이 빚어진다. 대중문화의 대사들은 셰익스피어의 그것들처럼 빈번하게 인용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김영하는 가령 `쳇 베이커'의 의미를 의도한 대로 조작한다. 이렇게 마련된 소설의 배경은 오히려 작가 자신이 경계하는 스노비즘에 근접한다. 역설적으로, 자연스럽고 대등한 관계를 통한 창조성을 위해서 대중문화의 요소는 오히려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정보를 전달하는 듯한 설명적인 형상화는 텍스트를 건너뛰어 독자를 의식하는 작가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명시하고 있을 뿐이다. 요컨대 문제는 단순한 문화적 요소가 아닌 소설쓰기의 도구로서의 그것들이다.

    문제를 보다 진지하게 풀어 본다면, `기호의 추출보다 산출되는 기호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소설 속의 캐릭터와 사물, 그리고 그것들 상호간의 관계에 녹아드는가'가 문학의 대중문화적 요소의 수용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기본적이다. 비평의 차원에서, 단순히 문화적 기호를 추출하는 것과 기호·주제간의 관계에 긴장된 의미의 공간을 부여하는 것,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을 희생해야 하는가는 적어도 독자의 성향을 넘어서서 문학적 소통의 가능성을 기준으로 할 때, 보다 명백해진다. 실제로 독자는 자세히 읽기를 통해 기호의 추출을 넘어서 좀더 풍부한 텍스트를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읽기의 경계가 텍스트의 내적 질서를 넘어선다면 그 곤혹스러움은 스노비즘에 다름아니다. 이러한 관점에 있어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대중문화적 요소가 단순한 문화적 배경을 넘어서 소설에 관여하는 방식에 있어서 조율을 필요로 하는 몇 가지 문제점을 드러낸다.

    … 내 차에 올라탄 그녀는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시동을 걸자 쳇 베이커의 거친 저음이 깔려나온다. / -이 사람 알아요? / 그녀는 아주 천천히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땅 속에서 내 몸을 잡아끄는 것 같네요. 깊이깊이 꺼져버릴 것 같아요. / -쳇 베이커라는 재즈 뮤지션이죠. 별볼일 없는 인생을 살았지요. 이름을 날린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재즈사에 남을 만한 인물은 아니었죠. 노래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트럼펫 연주가 탁월했던 사람도 못 됐죠. …(62∼63쪽)

    작가가 가상 인터뷰 형식의 한 글 에서 밝힌 바 있는 `조심스럽고 친절한 설명'이 덧붙여진 대목이다. 인용한 부분은 그 대목의 첫 부분인데, 쳇 베이커의 음악은 유디트로 하여금 "깊이깊이 꺼져버릴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작가의 의도는 유디트가 죽음에 이르는 서사적 설정을 한 예술가(쳇 베이커)의 음악을 통해 환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보면 자살 안내업자가 소개하는 쳇 베이커 의 죽음은 유디트의 죽음과 혼돈을 일으킬 뿐이며, 이 대목이 그저 죽음의 모티프(자살의 경우) 하나를 상기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소설의 짜임새에 대한 설득력은 부족하다. 몇 걸음 물러서서 보더라도 쳇 베이커와 유디트의 죽음에 대한 태도에서 찾아지는 공통점은 오직 의미를 상실한 `태도'에 한정된다. 상실한 `의미'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권태는 더 이상 내 사랑이 아니다'(93쪽)라는 랭보의 싯구만이 에피그램으로 떠돌아다닐 뿐이다.

    미미는 욕조로 들어가기 전 레너드 코헨의 〈Everybody Knows〉를 틀어놓고 오랫동안 춤을 추었다. 레너드 코헨의 거친 음색과 육중한 베이스 음이 그녀의 춤과 잘 어울렸다. 욕실 쪽에서는 한껏 틀어놓은 물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물은 계속 흘러 넘치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열 번쯤 〈Everybody Knows〉를 듣고 욕조로 걸어 들어갔다.(139쪽)

    여기에서도 대중문화의 요소가 이미지화하고 그것이 다시 이야기의 골격으로 작용하는 짜여진 긴장감을 맛볼 수는 없지만, 소설에 영화적 감각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므로 문자 기호의 영상기호 만큼이나 심원한 성격에 기댄다면, 이 대목은 어느 정도 효과적이다. 몇 줄에 걸친 하나의 고유명사와 한 곡의 노래제목 으로 지탱되는 죽음의 전야는 막연하게 드리워진다. 독자의 상상력에 긴장이 지탱되는 단계는 어디까지일까.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기법은 작가의 중요한 전략인 이미지가 문체로써 드러난다는 점에서 웬만큼 감각적이다. 또 다음의 대목은 발군이다.

    그가 굴신을 계속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지루한 표정으로 추파춥스를 빨고 있었다. 그녀의 추파춥스가 아직 남아 있을 때, 그는 사정을 했고 그러자마자 일어나 샤워를 하러 욕실로 걸어갔다. 그는 그때 어렴풋하게 등뒤에서 낄낄거리는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었던 것 같고 그 웃음소리를 듣자 모차르트를 듣고 싶어졌던 게 기억난다.(38쪽)

    유디트의 지루함에 대한 C의 반응은 모차르트로 드러난다. C의 의식 속에서만 드러나는 모차르트라는 고유명사의 효과는 사실 매우 감각적이고 탐미적인 것이다. 의식의 현상에 대한 직접적 기술은 독자에게 대유로서 작용하는 시적인 것인 동시에 서사적 진술을 포함하는 전략의 핵심적 역할을 해낸다. 왜냐하면 현실적 소통의 부조리함을 스스로의 방식으로 거부하는 캐릭터를 가진 C에게 있어 모차르트 음악의 본질로서의 `비애'나 모차르트의 천재로서의 삶은 소통 포기의 징후가 드리워진 유디트의 비웃음에 대한 방어기제로써 드러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풀어 읽기는 독자 반응의 다양성을 염두에 두더라도, 어쩌면 새로운 텍스트만큼이나 생뚱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독의 과정은 과연 문학작품의 문화적 요소가 의식의 바깥만을 향해 열려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하게 상기시키는데, 바로 이러한 점이 의미의 풍요로움을 통한 텍스트와 독자간의 문학적 소통의 가능성을 내비치는 것이랄 수도 있겠다.

    문학작품은 당대와의 교통에 발판을 둔다. 그러한 면에서 대중문화적 요소의 도입은 소통적이며, 따라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예술 형식의 하나로서 문학은 시대에 대한 긴밀한 문학적 형상화를 통해 다시금 시대의 상황에 회귀하는 성격, 다시 말해 문화분석의 대상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그러하기에 문학의 대중문화적 요소의 적극적 도입은 문학작품의 내적인 질서 속에서 그것을 압도하지 않는 채 기능해야 할 것이다.

    이 맥락에서 보아, 김영하의 영화적 감각이 스민 댄디적 성향은 위험스럽다. 작가의 문화적 배경은 오직 화자와 캐릭터의 시선에 의해 형상화됨으로써 소설적 완성도에 기여해야 한다. 그것이 작가에 의해 교란될 때 문학은 가제트 로 전락한다. 김영하가 의도하는 `애들은 가라'식이 아닌 `조심스럽고 친절한 제시'는 보다 더 조심스러워져야 한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적어도 부분적인 자전 취향의 소설이 아니라면 더군다나 그러해야 한다. 작가는 오직 독자의 반성적 읽기를 염두에 둔 예술가의 본연적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문학적 소통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5
    가상적 현실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등장 인물들의 소통에의 노력은 문학적 소통에의 노력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이는 자살안내업자가 `소설을 쓰는 작가'이기도 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자살 안내업자가 의도하는 창작 행위는 곧 소통의 어려움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런데 등장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본다면 김영하가 다루는 소통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다면 문학의 운명 또한 등장 인물들의 운명과 동일한 선상에 있는 것인가. 문학은 문학을 파괴할 권리가 있는가.

    소설의 액자식 구성은 소통의 관점에서 이중적이다. 하나의 액자는 소설의 주제의식과 작가의 글쓰기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설 속의 화자가 가지는 태도와 그의 소설쓰기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이 이중적인 액자의 틀은 소통이 어려운 현실에 대해 다시 소통을 위한 하나의 형식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며, 하나의 우의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다시 현실을 재현하고 그것의 소통을 꿈꾼다는 면에서,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근대 혹은 이성의 기획과 닮아 있다. 다시 말해서 이성이 파편화한 삶의 모습들은 단지 하나의 사태로서 이해될 따름이며, 그것은 이미지의 강조나 소설 구조의 변형을 통해 역설됨으로써 유통되는 하나의 형식에 담긴 채 여전히 소통을 꿈꾼다.

    인간적 절망의 메시지를 소설쓰기의 형식을 통해 재해석해내고 전망하는 이 기획이 품고 있는 하나의 담론은 내용과 형식을 통해 보다 구조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되 그러한 주장들은 여전히 소통의 가능성을 지닌 삶의 모습들이라는 것이고, `문학은 문학을 파괴할 권리가 있'되 그것은 형식 자체를 그 범주로 상정할 경우에 그치는 것이어서 `글쓰기'라는 소통 지향의 원리가 끊임없이 회귀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새로운 형식적 시도는 재고의 여지가 다분하다. 맥루한의 진술처럼 죽음에 대한 형상화는 `죽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휑뎅그렁한 막연함'을 전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서사'라는 소설의 기본적인 소통 구조에 대한 믿음은 `소설'이라는 형식만큼이나 여전히 유효하다. 작가의 가능성은 이 시점에서 더욱 열려질 것인지도 모른다. 곱씹을 만한 작품 속의 한 구절,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진정 스스로를 파괴할 힘을 작품 속에서 구축할 수 있다면 김영하는 그 열린 가능성을 더욱 유려하게 펼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멀리 떠남'은 곧 삶의 과정이며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기에, 그 `변하지 않음'에 대한 정치한 통찰은 삶과 죽음 사이의 매개를 단지 원인모를 `권태'로만 한정시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진현

    현진현

    1974년 경북 경산 출생

    계명대학교 철학과 졸업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전공 재학

  • <대중문화의 소설적 교란>을 뽑고나서
    김성곤


    2000년을 맞아 문학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일까? 끊임없는 `문학의 위기설'에도 불구하고,금년도 응모작들은 질적 및 양적 측면 모두에서 풍성했다.여전히 작가론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지만,그 중에는 단순한 작가론이나 작품분석을 벗어나 심층적인 시대비평이나 문명비평까지도 시도하고 또 성취한 응모작들도 있었다.

    예컨대 김문주의 `역사와 개인이 만나는 자리'는 시가 어떻게 개인의 실존을 통해 역사적 현실을 파악하고 암울한 시대의 삶에 대한 성찰을 수행할 수 있는가를,그리고 이진의 `대담한 육체와 수원(水源)을 향한 글쓰기'는 시의 분석을 통해 근대와 탈근대의 문제를 설득력 있게 천착한 작품들이어서 눈에 띄었다.

    현진현의 `대중문화의 소설적 교란'은 김영하의 작품을 논의대상으로 삼아,대중문화와 문학의 상관관계와 그 문제점을 심도 있게 성찰하고 대안까지 제시했다는 점에서 단연 돋보이는 평론이었다.이 글은 김영하 소설의 비판적 책읽기를 통해 이 시대에 필요한 문학론 정립과 글쓰기에 대한 성찰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보여 당선작으로 뽑기로 했다.문학평론이란 모름지기 작가나 작품 연구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동시대의 정신을 파악하고,당대의 문제점들과 씨름하며,미래의 전망까지도 제시해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근소한 차이로 당선작에 이르지 못한 미래의 평론가들에게도 격려를 보낸다.
  • 현진현

    현진현

    1974년 경북 경산 출생

    계명대학교 철학과 졸업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전공 재학

    내 심연에 차가운 바람 한 줄기 불어주었으면 좋겠다. 며칠 사이 놀라움, 기쁨, 두려움, 부끄러움이 두서없이 교차했다. 지금 내게 남아있어야 할 것은 두려움과 부끄러움이어야 함을 깨닫는다. 모자란 공부에 대한 두려움, 미흡한 글에 대한 부끄러움. 적어도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은 더욱 분명해진 셈이다. 섬뜩한 자신감이 심연의 한 모서리에 들끓기도 하지만 보다 진지하게 삶과 문학에 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문학을 하고자 맘먹은 지는 좀 되었지만 비평에 눈을 돌린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고전의 안목에서 현대의 문학을 바라보고자 공부를 시작하던 차에 김원우 선생님의 따듯한 격려로 용기를 얻어 분에 넘치는 작업을 시작했다.

    김원우 선생님께 진심을 다해 감사드린다. 계명대 문예창작과로 부임하신 첫 해, 분주한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용기를 북돋워 주신 선생님의 은혜는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문학을 공부한 이래 여러 가지로 많은 도움을 주신 최미정 선생님께 고마움의 인사를 드린다. 또 철학과와 국문과의 여러 선생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모자란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과 좋은 기회를 마련해 준 동아일보사에 고마움의 마음을 여쭙는다. 분에 넘치는 이 상이 지금까지 뒷바라지하느라고 고생하신 부모님께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쑥스럽지만 이 말도 덧붙이고 싶다. 삼 년을 넘게 못난 내 곁에 머물며 좋은 친구가 되어준 사랑하는 정경, 언제까지나 내 곁에 머물러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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