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序
인간의 역사를 통해 한 시대를 고뇌하며 살았던 지식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졌던 고민 중의 하나는 지식(Knowledge)과 가치(Value)에 관한 인식론적 질문일 것이다. 지식이 현상과 구조를 설명하고 해석해 나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가치란 기존 체계의 극복과 함께, 그 구체적인 분석과 비판을 통한 변화의 요구라 하겠다. 결국 인류의 역사는 지식인들의 설명과 해석이 아니라, 극복과 변화에 의해 발전할 수 있었으며, 그것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은 지식인들의 양심과 도전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해석만 하고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해석의 결과를 다시 세상에 반영하는 일을 게을리 한다면, 세상은 결국 현재에서 단 한발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불운한 병자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에 있어 그 새로운 인식과 발전을 위한 '가치'의 문제는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가? 예술에 대한 가치론적 사유 없이 작품이 창작된다면, 그 결과는 예술성과 함께 정신의 황폐화도 동반될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수없이 쏟아지는 예술작품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일찍이 물었어야 했고, 늘 염두에 두어야 할 원초적 질문들을 새로이 되새겨야 할 때임을 모두가 직감하는지도 모르겠다. "대저 예술이 창조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예술을 왜 창조하며, 거기서 인간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에게 있어 예술은 무엇이며, 예술에 있어 인간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술 창작에 있어 주체와 객체는 과연 분명한가, 아니 분명해야 하는가?"
이 글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오늘의 한국음악의 현실과 관련하여 어떻게 답을 해야 할 것인가를 화두로 던지고자 한다. 유구한 한국음악사의 흐름에서 20세기 후반은 '창작음악의 시대'로 인식된다. 그리고 연주자들 사이에서 창작음악은 '신곡(新曲)'으로 불린다. 국악에 새로이 작곡의 개념이 도입되고, 많은 역량있는 작가들이 독주곡에서 관현악곡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면서, 이들이 작곡한 '신곡'이 최근 국악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세기말 한국음악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들 신곡, 또는 창작음악들을 한국적 현실과 관련하여 의미를 생각할 때, 위의 질문들을 중심으로 그 내용과 형식에 대한 반성적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2. 전통음악과 신곡(新曲)
최근 국악계에서는 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국악이란 용어 대신 '한국음악'을 사용하면서 한국음악의 범위를 한국에서 창작된 서양음악까지 포함하려는 시도가 있다. 하지만 그런 논의에 상관없이 국악과 관련한 창작음악은 의심의 여지 없이 국악, 또는 한국음악에 포함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한편, '전통음악'이란 용어는 국악과 동일한 개념으로 쓰이기도 하며, 창작음악과 대비되는 산조나 정악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한다. 여기서는 신곡, 또는 창작음악까지 포함하는, 국악과 같은 개념으로 '전통음악'을 사용하고자 한다. 서양음악이 주도하고 있는 현실에서 국악과 관련한 것이면 모두 전통음악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통이란 단순히 옛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있어 전통이란 과거의 산물이거나 역사적 진실의 의미를 넘어 오늘을 사는 이들의 삶을 규정하고 현재를 가능케한 원동력인 것이다. 전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따라서 전통은 또한 현재와 맞물려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전통음악의 논의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음악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음악, 국악에 있어 오늘의 음악은 창작음악, 혹은 신곡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그러나 신곡이란 새로운 곡이며, 새롭다는 것은 이미 전통과의 괴리를 내포하고 있는 개념일 수 있다. 전통과 새로움의 마찰은 현재 국악이 처한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동시에 국악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모색을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수 천 년간 우리 민족과 함께 해온 우리 음악은 20세기 들어 그 단절의 위협 속에 새로움을 강요받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우리음악의 앞날에 대한 모색은 자연 그 논의의 중요성이 높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통과 새로움이 반드시 상충되는 개념은 아니다. 앞서 기술했듯, 전통은 우리의 현재에 잇닿아 있으며, 옛 것을 익혀 새 것을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전통과 새로움은 오히려 잘 조화를 이루는 짝이 될 수 있다. 전통이 있기 때문에 새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통음악과 신곡을 논의함에 있어 가장 중시되어야 할 개념은 옛 것을 익혀 새 것을 알고자 하는 이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일 것이다.
조선 초기에 건국의 이념을 밝히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소위 '신악(新樂)'을 창제할 때도, 전혀 새로운 음악을 만든 것이 아니라 기존의 향악과 고취악 곡들을 변주하고 확대하여 가사를 붙였다. 기존의 곡을 기반으로 만들었으면서도 '신악(新樂)', 즉 '새로운 음악'이라 불렀으니, 결국 새롭다는 것은 없는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더욱 발전시키고 개혁하는 의미였던 것이다.
그러면, 현재 창작되고 있는 신곡들은 과연 우리의 전통을 충분히 살리고 있으며, 우리의 전통은 오늘날에도 신곡을 통해 발전하고 있는가? 오늘을 사는 이들의 삶은 오늘날 작곡된 곡들을 통해 반영되고 있는가? 신곡들이 국악으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최소한 이들이 전통에 기반하고는 있는가?
3. 국악계의 창작음악 현황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우선 작금의 신곡들의 창작현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내용적 측면에서 최근 신곡들의 공통점을 한마디로 간추린다면 경향성의 배제와 순수예술 지향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해방 이후 한국 문화예술계의 전체적인 행보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해방은 되었으나 친일파들이 전혀 축출되지 못한 채 미 군정에 의해 이들이 다시 득세하게 되면서, 그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숨기기 위한 수단으로 예술에 있어 '순수'를 지향점으로 삼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순수한 예술' 만이 일제에 항거했던 예술인들을 물리침과 동시에 자신의 치부를 감추고 현재의 위치를 공고히 해줄 열쇠였기 때문이었다. 가장 앞장서 '황국신민'을 외쳤던 현제명은 어느새 민족주의 음악가로 둔갑하였으며, 해방 이후 한국의 음악을 주도하였던 이들 중 항일 투쟁과 관련된 인물은 거의 없었다. 이는 문학과 미술 등 여타 문화예술계에서도 같은 상황이었으며, 북한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대한 반동과 맞물린 반공 이데올로기에 편승하여 이들은 한결같이 '순수'를 외쳤던 것이다.
그런데 80년대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지식인들의 새로운 각성과 함께 기존의 흐름에 대한 반성이 서서히 일기 시작한다. 소위 노동문학, 민중미술의 등장과 함께 음악에서도 민족음악에 대한 논의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민족음악에 대한 논의가 처음 시작된 것은 국악계가 아니라 양악계였으며, 현재까지도 학계가 아닌 현장의 국악계에서는 그에 대한 초보적인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물리적 해방은 1945년 되었지만, 음악적 해방은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이다. 작곡가들이 의도하든 하지 않든, 창작곡들은 한결같이 감상자들에게 정서적 안정과 평안을 주려하지만, 감상자들의 삶 자체를 노래하려 하지는 않는다. 밤의소리, 춘설(황병기 작), 일출, 달무리(정대석 작) 등 고향이나 자연을 노래한 것, 남도환상곡(황병기), 파랑새환상곡(전인평), 산조에 의한 협주곡들 등 전통 가락에 기초한 것, 추당굿(이세환), 신내림(박범훈) 등 무속신앙에 기초한 것, 수리재(정대석)등 세속을 떠난 조용한 삶을 노래한 것 등의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어설픈 민족주의에 기반한 곡은 있지만, 분단 반세기에 여전히 대치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민족의 현실과 그런 현실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미증유의 IMF사태를 맞아 경제적 궁핍에 허덕이는 우리의 이웃을 노래한 곡은 없다.
조선 후기 남도 가락의 판소리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민족적 예술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원인은 그것이 지배층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함께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삶의 모습을 우리 일상의 가락으로 묘사하였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수많은 명창들의 손을 거쳐 다듬어지고 보편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산조가 20세기 들어 폭발적으로 발전할 수 었던 것도 그런 판소리 선율의 힘과 함께 많은 명인들의 삶 속에서 우러난 가락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영산회상이 지금처럼 거대한 모음곡으로 발전하고, 여민락과 보허자가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는데는, 그것들이 궁중에서 민간으로 유입되면서 민간 예능인들의 손을 거쳤기 때문이며, 민간으로 유입될 수 있었던 것은 임진왜란 이후의 백성들의 새로운 자각과 그로 인한 민간 경제력의 성장이 기반이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모습을 떠난 음악, 자신의 생활과 이웃의 모습을 잃어버린 음악이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인지, 발전한다 해도 그것이 주는 의미는 어떤 것이 될 수 있을지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형식적 측면에서는 독주곡 외에 대형 관현악곡이 대량으로 창작되고, 아울러 이를 소화할 국악 관현악단들이 다투어 생기는 것은 일견 고무적인 일이다. 가야금으로 창작음악의 새지평을 연 황병기 이후 거문고의 정대석, 해금의 김영재 등이 많은 기악 독주곡들을 작곡하여 전통적 독주 양식인 산조(散調)와 함께 상호 발전을 추동(推動)하고 있으며, 박범훈, 전인평, 이준호 등 많은 역량있는 작곡가들이 수준높은 관현악곡을 양산하여 우리음악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음악' 혹은 '전통'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때는 반드시 바람직한 상황이라고는 할 수 없다.
우선 독주곡의 경우에는 악기의 음색을 충분히 살리려는 노력과 함께 새로운 연주법의 모색이 눈에 띈다. 얼마전 국립국악원에서 거문고 창작음악을 중심으로 펼쳐진 거문고역사축제에서도 그런 면은 두드러졌다. 거문고역사축제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신곡들 만으로 짜여진 프로그램의 문제성을 차치하고, 각각의 곡들은 저마다 다양한 새로운 시도들을 하고있었다. 술대로 현을 뜯는 전통적인 연주법외에 술대로 울림통 자체를 두드려 타악의 소리를 내거나, 여러대의 거문고로 제주를 하는 형식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아쉽게도 새로운 시도의 모습보다는 전통의 상실과 단절에서 오는 어색함과 불협화음의 모습이 더 두드러졌으며, 그것은 곧 새로운 시도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실패는 작곡가의 음악성의 부족 보다는 예술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의 부족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은 작곡자들의 음악 어법 자체가 전통과 상당한 괴리가 있는 서양적 감성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 그 원인의 하나일 것이다. 가장 전통적인 악기를 새로운 시도라는 이름하에 강제적으로 서구식 음악 어법을 접목했을 때, 그 부조화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또다른 원인은 연주법의 모색에 있다. 거문고는 이미 1500년 이상을 우리 민족과 함께 해 온 최고(最古)의 악기이다. 이 말은 거문고가 가장 훌륭한 음을 낼 수 있는 연주법은 이미 1500년을 내려오는 동안 우리 조상들에 의해 남김없이 시도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에 와서 할 수 있는 시도란 거문고 자체의 악기적 속성을 완전히 무시한 시도외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술대로 울림통을 쳐 타악기화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거문고의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오히려 거문고의 속성을 무시하고 거문고에 내재해 있는 민족음악의 역사적 특수성을 팽개친 데서 나오는 어색한 화음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두가지, 즉 창작자의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이미 국악적이거나 전통적이지 않다는 것과, 새로운 시도 속에서 오히려 두드러지는 우리적인 것의 소실은 비단 거문고 뿐 아니라 모든 창작 독주곡 양식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들이며, 이는 전통의 상실과 새로움의 왜곡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국악관현악단의 탄생과 아울러 지속적으로 배출되는 합주곡, 또는 관현악곡들에서는 그 문제점이 더욱 심각하다. 또한 여기에 대해서는 창작된 악곡들의 수 만큼이나 문제점들 또한 지속적으로 지적되어 왔다. 가장 큰 문제는 악기의 음색을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악기의 음량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악기편성과, 그 와중에서 전통 합주에서 가장 중시되었으며 동시에 충분히 제 역할을 다해왔던 가야금, 거문고 등 현악기의 소리가 전혀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음악의 공연에서는 현악기, 특히 거문고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악 영산회상은 심지어 거문고회상이라 불리기도 하며, 가곡 연주에서도 현악기가 내는 음의 깊은 맛을 우리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주 선율은 대금과 피리가 주도하지만, 전체적인 곡의 분위기와 멋은 현악기가 좌우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창작 관현악곡들에서는 음량이 작은 현악기는 관악이나 타악 소리에 묻혀 장식음 역할밖에 못하고 있으며, 현악의 중요성은 현격히 떨어진다. 오히려 관현악이라기 보다는 '관타악'이라 불러야 할 만큼 현악이 살지 못하고, 영산회상이나 가곡에서 흐르는 거문고의 깊이와 멋은 쉽게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덕분에 영산회상에서 처럼 각 파트의 연주자들의 독자적인 가락이 진행되면서 느껴지는 부조화 속의 교묘한 조화를 신곡에서는 엄두를 못내고 있으며, 지휘자가 컴퓨터가 아닌 이상 일치되지 않은 각 파트의 선율 진행을 모두 지휘할 수도 없을 것이다. 전통음악에서 지휘자의 탄생은 현악이 주는 아취(雅趣)의 퇴색과 맞물리게 되는 결과가 된 것이다.
돌이켜 보면 전통적 합주 양식이 아닌 서구식 관현악단의 체제를 그대로 모방한 현행 국악관현악단의 탄생 자체부터가 문제일 수도 있다. 우리 자체의 합주 양식이 있었고 그 속에서 우리의 악기들은 가장 완벽하게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만큼, 서구식 체제 속에서 그 멋을 제대로 살릴 수 없다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우리의 물질적, 정신적 근대화가 곧 서구화와 동일시 되면서, 우리의 문화와 정신까지도 지나치게 서구 지향적이 됨과 동시에 우리의 전통이 쇠퇴의 길로 들어섰던 역사적 실패와 마찬가지로, 음악에 있어서도 똑같은 전철을 완벽하게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화, 또는 발전이라는 미명으로 가장한 어설픈 서구화가 결국은 우리의 문화 전체를 병들게 하고 서구적 가치관으로 물들게 하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음을 우리는 보아왔고, 그것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전통적 연주 양식이 어설픈 서구화의 접목 속에서 우리의 맛과 멋이 현저히 쇠퇴하고 있는 것이 현재 창작 관현악곡들이 가진 공통적 위험인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우리의 정신적, 물질적 근대화의 길은 구한말 이후 진행되었고 현재에는 오히려 그 반성과 함께 우리의 전통을 찾으려는 노력이 경주되고 있지만, 음악에 있어 근대화, 즉 어설픈 서구식의 모방은 구한말 이후 무려 100년 이상이 지난 현재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 음악인들, 특히 전통음악인들의 정신적 나태함과 자아의식 부족, 가치관의 비정립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미 100년 이상 진행된 물질적 서구화와 달리 이제 얼마 진척되지 않은 음악적 서구화는 그만큼 빨리 우리 것으로의 회복이 가능할 것이라는 인식을 동시에 주는 것이기도 하다.
내용과 형식을 막론하고 우리음악의 발전과 우리음악의 서구화는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리음악의 서구화는 발전이 아니라 쇠퇴를 가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집박자 대신 지휘자가 등장하고, 연주자들의 마음으로 타던 관현악 양식이 이제는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인도되는 피동적 양식으로 변화하였다. 작곡된 곡들이 주는 감성도 우리 것 보다는 서양적인 것에 눈에 띄게 가까워졌다. 작곡자들이 사용하는 음계도 평조나 계면조 보다는 서양음계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쓰지 않던 음들의 출현이 잦아지자 국악기의 개량문제가 작금의 주요 논쟁거리가 되었다. 전통적인 양식들이 서구의 것을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전통과 현재는 엄청난 괴리가 생겼으며, 창작음악들은 날이 갈수록 서구적 음악 어법과 감성을 받아들이는데 집착하고 있는 모습을 띤다. 그렇다면 공연양식, 감성, 음계가 모두 서양 것이고 연주 악기만 국악기인 창작곡의 국적은 어디인가? 거기에 악기까지 개량 하면 그것은 한국음악인가? 신곡들에서는 결국 공연양식, 감성, 음계 뿐 아니라 악기의 음색과 멋 까지도 전통을 살리지 못하고 있는 셈이며, 따라서 적어도 현재의 신곡들의 창작 흐름들은 '전통'의 의미와는 어느정도 유리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4. 신곡(新曲) 또는 창작 음악에 대한 반성
현재도 계속 창작되고 있는 신곡들의 흐름에 대하여 반성이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해졌다. 그 문제점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전통 계승 및 발전의 실패와 함께, 예술 창작에 있어 주체와 객체가 심각하게 분리되어있다는 것이며, 그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작곡자들 스스로 자신들이 창작의 주체이자 객체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체와 객체는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객체를 떠나 주체가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창작의 주체도 객체도 모두 분단, 외래문화의 유입 그리고 전통단절의 위기라는 오늘의 한국적 현실 속에서 더블어 살아가는 주체이자 객체이기 때문이다.
신곡들의 내용에 있어, 작곡자들은 자신들을 감상자에게 '순수'를 통한 '안식'을 제공하는 사도로 인식하였을 지는 모르나, 자신 또한 현실을 함께 사는 동반자임을 인식하지는 못하였다. 결국 현재의 신곡은 현실이나 삶과는 유리된 극단적 순수주의의 모습을 띄게 되었으며, 이는 창작인들 스스로 "대저 예술이 창조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예술을 왜 창조하며, 거기서 인간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에게 있어 예술은 무엇이며, 예술에 있어 인간의 의미는 무엇인가?"의 물음을 게을리 한 결과일 수 있다. 한국의 음악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삶과 함께 하는 것이며, 동시에 한국 문화의 가장 지배적인 형태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한국인, 한국의 문화란 한국적 전통 및 현실과 관련한 것이다. 즉 예술은 현실과 접목될 때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며, 기존의 신곡은 이 작업을 게을리 한 것이다. 인간과 예술, 한국인과 한국의 음악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옛 것을 전혀 놓지 않으려는 극단적 보수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옛 것을 단절한 채 달려가는 급진주의자가 될 필요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형식면에서는 독주곡과 합주곡을 막론하고 우리음악의 발전과 서양화의 혼돈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앞서 기술했듯, 공연양식, 음악의 음계와 감성이 모두 심각하게 서양화 되었고, 악기만 국악기인 상태가 현재 신곡 연주의 현황이며, 그나마 악기의 멋을 한 껏 살리지도 못하고 있다. 우리의 음악은 발전해야 하지만 서양식을 따르는 것이 곧 발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의 음악이 세계화될 필요는 있지만, 서구화될 필요는 없다. 발전과 서구화의 혼돈에서 올바른 지향점을 찾기 위해서는 전통의 고찰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 우리의 양식, 우리의 음계, 우리의 감성을 가지고 창작에 임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꼭 우리 것 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 것을 익히고 나서 새로운 것을 익혀야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집박자의 집박에 따라 연주자들이 하나의 마음으로 장고 장단에 맞춰 연주하는 우리의 연주양식이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공연 양식에 비해 결코 뒤떨어진 양식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발달하고 세련된 형식일 수 있다. 우리의 3음계나 5음계가 7음계보다 음악적으로 덜 발달된 모습 또한 아니다.
굳이 일곱음을 쓰지 않고도 능히 우리의 생활을 노래할 수 있을 만큼 음악이 발달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현재의 추세로 나간다면 우리의 음악은 서양음악과 갈수롤 닮아가서, 종국에는 국악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의 음악을 서양음악과 접목시키는 것을 우리의 음악을 발전시키는 것으로 오인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전통'의 시각으로 볼 때 우리의 음악현실은 참담하다. 우리 음악은 대중들로부터 소외되었으며, 서양 고전음악과 대중음악이 '음악'으로 자리잡고 있다. 민족의 삶과 함께 해 온 음악들은 오히려 주인을 잃었으며,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하기 보다는 보여주고 들려주기 위한 대상화된 상품의 모습에 더 가깝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족의 역사 속에 눈물처럼 녹아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과 사유와 함께 흐르는 우리의 음악이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와 단절되지 않은 진정한 전통의 의미에 입각한 우리음악의 전개를 고뇌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문학에서 처럼 참여와 순수의 해묵은 갈등구조에서가 아니라, 우리 음악의 참된 위미를 찾으려는 노력 속에서 우리의 음악적 현실을 되새겨야 하는 것이다. 예술창작도 인간의 삶의 단면이요 행위의 결과라는 것을 우리는 때때로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모습을 띄어야 한다는 사실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때가 되었다. 창작이란 주체와 객체를 모두 포함하는 의미인 것이다. 진정한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 속에서 세계속의 한국음악이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5. 결(結)
20세기 후반은 국악사에서 '창작음악의 시대'로 불릴 만큼 창작 신곡들이 많이 양산되었다. 하지만 양적인 확산에 비해 질적 발전은 내용과 형식 면에서 사뭇 왜곡된 채 진행되고 있다. 신곡 창작의 전개 양상은 전통의 계승과 발전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의 단절과 함께 양식의 서구화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전통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전통은 죽어서 화석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살아있는 우리들의 삶을 규정하고 자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음악에 있어 전통의 발전이란 곧 전통과 새로움의 화해이며, 그것은 곧 예술과 인간의 화해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신곡'은 새로움의 모습 만큼 전통의 모습을 지녀야 하는 것이며, 예술적 차원에서 인간의 모습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인간의 모습이란 한국인의 정체성이며, 그 정체성이 한국음악의 유일한 토양이다. 한국의 모든 음악가들이 한국음악의 정체성과 한국인의 역사적 사유체계를 밝히려 노력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음악이 한국인의 삶 속에서 갖는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음악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와 관련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알고 이해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르다. 지식이란 이해가 아니라 지배질서를 향한 도전이며 그 변화의 노력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고 설명하는 기능적이고 도구적인 지식인이 아니라, 그것을 (헤겔이 말했듯이) 변증법적으로 극복하고 문제의 실질적 해결과 규범적 변화를 동시에 지향하는 가치 지향적 지식인에서 지식의 정체성을 인식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한국의 음악을 해설과 설명이 아니라 '가치'의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전통음악의 '신곡'들은 기존의 창작 문화의 변증법적 극복과 규범적 변혁이 동시에 요구되고 있다. 그리고 이 요구에는 '전통'과 '인간'이라는 문제가 늘 함께하는 것이며, 다음의 화두가 꼬리를 문다. "대저 예술이 창조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예술을 왜 창조하며, 거기서 인간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에게 있어 예술은 무엇이며, 예술에 있어 인간의 의미는 무엇인가?
전지영
1971년 전남 여수 출생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졸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재학 (음악학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