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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고향을 상실한 현대인을 위한 노래

by  장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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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음의 고향을 상실한 현대인을 위한 노래
    (한국 현대미술에서 불교미술의 역할과 가능성)


    예술은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예술작품 본질에 관한 물음으로서 예술은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며 삶의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예술 창작에서 종교적 동기·의미가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경우가 있음이 주목된다.

    톨스토이는 "가장 위대한 예술은 그 시대의 종교적 지각을 반영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예술 창작을 통하여 삶의 실체와 인간 존재의 가치를 깨닫고, 종교적 형태를 통하여 현대적 감각을 지닌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종교 예술적 승화가 새로운 삶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인생의 방향 제시와 영적인 계시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우리 미술사를 통하여 볼 때 우리의 전통종교와 미술은 불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재로 지정된 우리 나라의 문화 유산 중 상당수가 불교문화재일 정도로 불교의 영향은 커서, 한국인의 사고 방식이나 인생철학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불교미술은 우리 민족의 생활의식을 표현하고, 미의식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치면서, 우리의 역사에서 일관되게 각 시대를 나타내는 미술로 이어져왔다. 또한 불교미술은 우리의 사상이나 전통 및 조형 의지와 예술성, 신앙심 등과 조화를 이루며, 수준 높은 종교성이나 대중성을 견지하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서 한국적 모습으로 정립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가치관과 정신 세계·삶 속에 스며들고 뿌리내린 전통미술을 '미술'이라 하지 않고 굳이 '불교미술'이라 하여 좁은 의미로 한정하여 부르고 있다. 더욱이 오늘날 진정한 의미에서의 불교미술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손재주에 의한 옛 것의 모방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대의 미감이 결여된 형식 위주의 창작과 조형의식의 퇴보는 전통의 단절이라는 위기를 말해준다. 이에 대한 자각과 반성은 한국미술을 발전시키는 시금석이 됨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전통 불교미술에 대한 논의는 미흡했으며 현대 미술에 발전적으로 기여하지 못하여 왔다. 따라서 불교미술이 어떠한 형태로 한국인의 삶과 융화되며 현대적 불교미술로 승화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한 우리 한국인의 삶의 뿌리와 마음의 고향을 발견하는 일이 될 것이다.



    예술이 마음의 고향을 상실한 현대인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한국인의 삶의 종교적 차원을 선명하게 해결해 줄 수 있는 한 방법으로서 불교미술을 상정할 수 있겠다. 불교미술은 절대적 존재의 진리 및 신의 빛을 투시해보려는 인간의 갈구와 노력에의 직관적이고 심미적인 참여이며, 자의식을 가진 인간의 가장 순수한 형태이다. 그것은 또한 순수하게 인간임을 절실히 느낄 수 있도록 혼을 불어넣어 주고 삶의 의미를 표현하는 작업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불교미술은 일시적인 호도책이나, 가시적인 자연 세계의 단순한 미메시스, 또는 숙련된 소수 예술가들의 활동만은 아니다. 또한 단지 작품이나 인간의 삶 또는 사물이 갖는 현상에 대한 해석 차원의 단순 투시도도 아님은 물론이다. 여기에 불교미술의 종교 예술적 가치가 있으며 이를 통하여 인간 내부에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절대적 진리, 즉 존재의 근원을 살펴볼 수 있다. 하이데거는 '근원이란 본질의 유래이며, 본질 가운데 존재자의 존재가 생성하게 되는데 예술은 현실적 작품 가운데서 그 본질을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한국인에게 있어 '본질을 찾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불교적 미술 행위에서 비롯되며 이는 우리 삶의 근원적 실체를 발견하는 것이고, 삶의 자화상을 실제적으로 명료하게 투영시키는 일임에 분명하다. 불교적 진리가 우리 삶을 통하여 투영되고 미적으로 표현되는 데는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으며, 그것을 온전히 서술하기에는 다소 한계가 있겠으나 대체로 첫째, 불교적 전통을 계승·표현하려는 미술, 둘째, 비 불교적이면서도 궁극적으로 불교적 본질에 참여하는 미술, 셋째, 예술 창조와 삶의 과정에서 추출되는 불교적 심미성 등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먼저, 불교에서 흔히 경배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의식적인 전통 불교미술을 들 수 있다. 관음보살도, 나한도, 영산회상도 등 불교를 소재로 한 그림이 여기에 해당된다. 전통 불교미술은 구체적인 불교적 소재 등을 사용하여 종교적 의식 전환의 체험을 이루며 더 나아가 상징적이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진실한 삶의 표현을 창출해낼 수 있다. 따라서 전통적인 불교미술이 도해적·서술적·묘사적이라고는 하나, 더 나아가 암시적이며 상징적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교미술에서는 '마음속에 참뜻을 갖추고 있음(菩堤心)'을 의미하는 회화 세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외적인 면과는 달리 무한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불교적 내용을 직·간접으로 나타내든 상징적으로 나타내든 신의 계시와 능력들을 순수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체험되지 못하였을 때 불교미술적인 것들이 단순한 도해식의 묘사나 혹은 무의미한 것으로 끝나버릴 가능성도 있다. 그러기에 불교 미술가들은 단순한 도해나 도식의 차원이 아닌 신격을 지닌 불교적 계시와 환상적 상징을 가능한 한 가장 완벽한 방법으로 표출해야만 한다. 전통 종교미술의 참 목적은 참된 존재를 가장 완전한 이미지와 형상으로 표현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과 함께 자신의 삶에서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감추어진 신성한 본질을 자각할 수 있게 하는 데 있을 것이다.

    둘째, 불교미술적인 힘은 전통 불교미술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미술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다시 말해 불교미술적인 힘은 특정한 불교적인 전통의 내용을 담은 예술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풍경화나 정물화, 인물화 등 외적으로는 순수 미술의 영역을 표방한 작품을 통해서도 불교적이면서도 영적인 체험이나, 또 다른 세계로의 접근이 가능하다. 이러한 유형의 예술 창조는 반드시 불교적 진리를 바탕으로 할 필요성을 지닌다. 불교적 이치와 미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는 直指心 見性佛 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불교적 본성이 제대로 수용·이해되어야 할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예술 창작이 이루어질 때 갈증난 현대인들의 삶에 영적 생명수를 공급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영적 가치와 불교적인 것을 자각한다는 것은 사물의 내적 진리를 깨닫는 것으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형체나 색깔 등을 통해 자신과 인간의 의미 등을 깨닫고, 그것의 순수 형태나 이미지를 통하여 근본적인 특질을 묘사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자각한다는 것은 불교적 의미에서나 영적 의미에서 사물의 내면을 자각하는 것이다.

    셋째, 현대인의 삶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심미적인 태도로서, 이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진솔한 예술일 것이다. 삶이란 자연과의 융화와 인간간의 교류, 신과의 교감 등을 통하여 거듭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정리하는 과정의 순환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주변의 복잡 다단한 현대인의 삶 자체에서 심미적인 결정체는 발견되는 것이며, 여기에는 우리 삶의 모태라 할 수 있는 불교적 진리가 자연스럽게 배어 있다. 이는 곧 인간의 삶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道나 氣를 바탕으로 하는 동양예술철학, 茶道, 그리고 현대의 연극이나 전통 초가집 등에서도 이들이 갖는 속성과는 관계가 없이 불교적 예술 세계로의 승화는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 예술은 단순히 심미적 삶을 즐기는 경험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시·공간 안에서의 삶의 영원한 근원 및 영적이며 불교적인 본질을 창조하려는 상징적 의미도 지닐 것이다. 가령 茶道는 禪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고, 차를 따르거나 마시는 것 등 현대인의 일상적인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다도의 일련의 행위 속에서도 無我의 境界, 虛靜淨命한 인간의 수행, 사물의 진정한 본성 등을 표현하는, 자발적인 어떤 힘이 존재함을 자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각 개인의 기능적 움직임이라 볼 수 있으며, 현대인은 그러한 태도 등을 통하여 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정기를 여러 아름다운 형태로 삶 자체에서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헤겔은 '아름답고 자유로운 필연성(die schone freie Notwendigkeit)'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는 곧 아름다움과 화합하는 자유스런 삶의 법칙을 말한다. 즉 예술은 삶과 시간과 공간에서의 영원한 원형, 혹은 영적·종교적 본질을 이룩하려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적 진리를 자각하는 것은 불교적·영적 의미에서 사물의 내면을 자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러 형태에서 표출되는 소재나 행위 등을 통해 인간의 내적 진리나 불교적인 영감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세기를 맞이한 오늘의 한국인과 한국미술은 스스로의 삶 자체에서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한국인에게 있어 아름다운 형태는 무엇이며, 불교미술이 어떤 유형의 삶을 전통적으로 우리 자신들에게 부여하고 있는가? 타인의 삶, 희석된 삶, 마음의 고향을 상실한 현대인의 삶―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불교미술은 구시대의 유물 또는 화석이거나 보존 가치가 있는 예술의 한 부류 정도로 치부되고 있다. 더구나 여기에 상업주의까지 가세하여 투철한 작가의식보다는 물량 위주의 작품이나 단순한 복제품의 양산을 불러왔다. 이같이 불교미술 문화가 침체하게 된 원인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일련의 상황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의 결여 및 무관심이 우리의 불교미술을 퇴보·경직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불교미술의 문화적 특징들은 우리 민족의 삶 곳곳에 깊숙이 배어 있다. 우리 선조들은 한때 외국 불교를 받아들여 한국 불교미술 문화를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미술로 발전시켰음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와 비슷한 상황의 중국에서는 선종적 사상과 노장적 사상의 자연스러운 융화로 불교가 중국미술과 예술이론에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불교 특히 선적 성향을 지닌 수묵 작업 등은 그들의 삶과 예술 철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전통 산수화로부터 중국 현대화 등에 이르기까지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이 같은 흐름에서는 불교미술이니 무슨 미술이니 라고 분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들은 불교적 성향을 바탕으로 그들의 작품을 대중화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며 자연을 일반적으로 묘사하고 음유하였음에도 그 바탕에는 불교적 철리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구미술이 급속히 유입될 무렵의 한국 근대미술은 미술계의 밑뿌리가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그 때문에 서구 현대미술사조에 대한 철저한 검증 과정과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전통으로의 수용을 위한 모색 기간을 거쳤다기보다는 단지 서양식 미술의 수용자체가 마치 현대화인양 간주되어 민족정서와 불교적 성향의 사회 현실을 외면한 채 서구 취향에 맞춘 왜곡된 미술로 흐르고 말았다. 따라서 우리의 전통 미의식과 불교미술에 대한 관심은 적어지고 서구의 미술과 사상이 마치 우리 미술을 평가하는 기준인 듯한 풍조가 널리 확산되었다. 對自的으로 서구미술에 대한 고찰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에 오히려 서구미술 문화구조가 우리의 불교적 전통과 사상, 현실 등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고 만 것이다.

    둘째, 불교미술가들과 불교인들의 편협성을 들 수 있다. 한국 불교미술과 불교는 불교인들과 스님들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虛, 空, 曠, 沖, 無, 無所有 등은 모두 '비어있음' 내지는 '世欲이 없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불교미술 문화구조에서 '소유'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일 수 있으나 불교미술이 불교인들만의 고유 영역인 것처럼 종종 생각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불교미술은 너무 편협하며 답습적이고 폐쇄적이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현대인들의 삶과 사상은 급속도로 변하는데 불교미술은 그들만의 것, 속세에 있는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차원의 것쯤으로 간주되고 있다. 즉 一卽多 多卽一, 個卽全 全卽個의 세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중생들의 삶과 무관하게 불교인들만의 미술로만 치부된 인상이 강하다.

    셋째, 불교가 중생들의 구원에 목적이 있음에도 한국의 경우는 불교미술의 대중성과 삶의 예술로서의 가치 활용이 매우 빈약한 면이 있다. 서구에서는 중세미술 이후에도 종교미술이 양식사적으로든, 미술문화사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꾸준히 발전하여 왔다. 예를 들어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지오토의 샘의 기적 등 여러 종교적 색채가 짙은 미술이 있는 반면에 16세기 무렵의 봇티첼리의 종교적 미술인 성모자상과, 그의 작품이긴 하지만 비종교적 성향인 비너스의 탄생을 그린 그림이나, 다빈치의 종교적 미술인 크리스트의 세계와 비종교적 경향의 그림인 여인상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한 작가의 작품 속에서 기독교적인 작품과 세속적인 작품 등이 종교적 경향들에 관계없이 자연스럽게 하나의 '삶의 미술'로서 이야기되며, 음으로든 양으로든 기독교의 정신을 간직하고 있다. 종교미술의 특성과 대중적 삶의 이미지를 예술로 승화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즉 대승적인 보살정신이 실천으로서의 삶의 미술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이다. 중세기독교미술이 수도원 중심의 폐쇄적 미술에서 벗어나 점차 민중들의 구원을 위해 대중의 종교미술로서 거듭난 것과 비교해 볼 때 한국불교미술이 가야 할 방향은 정해져 있는 듯 하다. 마음의 고향을 상실한 현대인들의 아픔을 함께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제 불교미술은 현대인들의 삶에 어떠한 형태로 영향을 미치고, 얼마만큼 성장된 모습을 하고 있을까. 오늘의 한국 현대 미술에서 불교적 삶의 생명수는 마음의 고향을 찾는 고독한 현대인의 '파랑새'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오늘의 작가 정신으로 무장된 종교적 색채를 지닌 전통 미술의 계승은 삶의 생명수로서 가히 필수적일 것이다. 종교는 영적이며 정신적인 구도자의 길을 걷는 삶의 가장 중요한 엑기스임에 틀림없다. 예술은 굳이 고갱처럼 '인간은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사라지는가'를 절망적으로 고뇌하며 죽음을 노래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고독한 현대인의 영혼의 문제, 삶의 문제를 들려줄 수 있는 몸부림일 것이다. 새로운 세기를 맞는 오늘, 영혼의 遊永이나 영생의 애환을 심장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피를 토해내듯 토호해내는 오늘의 한국의 작가들은 어떠한 유형과 예술적 시각으로 그들만의 창작 세계를 이루며 고뇌의 몸부림을 하고 있을까. 먼저 불교의 세계와 삶의 애수를 생활 속에 영위했던 박생광의 예술 세계와 영혼의 울림을 들어보자. 그의 예술 세계는 현재, 과거, 미래의 인생 역정과 상황 등을 동시에 노래하고 있으며, 우리의 전형적인 전통회화 특히 불화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불교적·민중적 색감과 강렬한 톤의 처리로서 대상을 적멸의 세계로 압축하고 있다. 세계의 그 어느 작가가 박생광과 같은 영감과 정명함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의 '명성황후' '혜초 스님' '청담 스님' 등의 일련의 작품들은 현재와 과거, 미래 인간불의 해탈의 노래로서, 역사적·인간적·철리적 진리를 깨우치고 체험할 수 있는 더 없이 유효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그의 텁텁한 한 인간으로서의 삶, 말년까지 이어지는 진지한 예술적 면모로 보아 가히 어두움 속에 몸부림치는 영혼들을 치유해 주는 구도자였음에 분명하다. 그는 불교에서 말하는 고행과 같은 일련의 여러 행위를 통하여 마음으로부터 예술을 느끼고 삶을 느끼며 인격과 영혼의 세계를 더욱 승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은 자연스럽다. 불교 그림이 되었든, 토속적이든, 일상적이든, 한국인의 삶의 정서가 물씬 배어나는 것이다. 이는 불교적 요소와 한국적인 현대미술과의 융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선의 수행은 종교적 고행의 의미도 있지만 인생 수양이나 정신 수양을 의미하기도 한다. 박생광의 예술 세계도 선적인 요소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선은 한국적 자연주의와도 통하며, 마음의 고향을 상실한 현대인의 향수병을 치유할 수 있는 생명수이자 예술적 매개체가 될 수 있다. 휴정스님은 "본 바탕이 천진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첫째 가는 정진이다." 라고 하여 화법에 앞서 선의 경지에 들어감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불교와 선사상을 배경으로 한 절대 무의 경지이며 하이데거의 존재의 물음으로 이루어지는 초월적 본질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선적인 예술 세계는 자연의 비례를 배우거나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오직 마음과 혼과 영이 直指心 見性眞하여 회화의 구도를 이루려는 것이다. 서양의 미술처럼 계획적·구체적·이론적이거나 머리로 그려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불교적·선적인 요소를 띠는 한국 미술은 내적 체험을 명상과 고행, 좌선으로 구도하고 정신의 내면 세계를 발견하고자 한다. 이에 선사상은 예술가들에게 현실의 명리를 초월하여 인간의 내면과 정신의 해방을 추구하는 계기를 부여하고 있으며, 단순한 시각적 표현에서 벗어나 예술 혼에 바탕을 둔 작품을 창작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 한국 불교의 현대적 수용의 다른 한 방법으로서 의식 전환 체험이 회화의 형식으로 표현된 '만다라'를 예술적 모티브로 한 경우도 있다. 여기에는 불교의 菩提心, 혹은 시바(Siva)와 샥티(Shakti)로 귀결되는 영적 체험이 내재된 빛의 의식 세계가 전개되고 있다. 만다라의 예술적 수행자는 내재하는 정신 우주도의 영감을 받아 자신의 내면 세계에 무의식적으로 존재하는 신비스러운 영적 체험과 생명을 ?覺하게 된다. 무의식의 영역을 상징적으로 접목시키고 있는 구스타브 칼 융과 같은 경우는 만다라를 '개성을 부여하는 과정의 표상(Figure of individuation process)'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는 곧 인간의 내면의 근원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 의식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또 다른 법칙을 따라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원형적 이미지(Archetypal image)와도 같다. 칼 융은 과정 속의 표상의 단계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원형으로서의 자기 인식의 단계로 원형적 이미지나 원형의 심상을 추구하는 만다라이다. 이는 인간 내적 세계의 선험성(apriority)을 추구할 수 있는 좋은 불교적 요소임에 틀림이 없다. 결국 만다라는 실재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진리에 대한 시각적 인식 방법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비록 우리의 전통불교적 특성은 아닐지라도 오늘날 현대 미술을 추구하는 데 있어 어떠한 회화 양식에라도 좋은 예술 철학적 바탕을 마련해 줄 수 있는 근원적 모티브임에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중희의 만다라는 불교적 소재를 바탕으로 현대인의 삶에 접근하고 있다. 그의 투박하고 거친 형태의 묘미는 자신의 내면 세계에 무의식적으로 깔려있는 끈질긴 생명력을 화폭에 반영하고 있다. 비록 만다라의 기본인 도식적 형태는 아니지만 변형된 표상들이 오히려 만다라적 느낌을 갖게도 한다. 그러나 그의 캔버스나 아크릴들의 사용은 색이나 재료에 내재되어 있는 한국의 전통 오행사상이나 불교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되고 있다. 이는 좀더 불교에 대한 이해와 진리에의 바탕을 필요로 한다. 불교적 이치와 미술에 대한 올바른 자세가 병행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만다라의 이야기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 외도 하린두의 말기작품이나 이희중의 그림에서 만다라적 요소들을 찾아볼 수는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볼 때 오늘날 한국 화단에서의 만다라의 경우는, 단순한 소재주의에서 벗어나 현대 예술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한 작가가 거의 없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현대인에게 있어 삶과 불교적 요소를 형식과 내용적 측면에서 생활 속의 미술로 끌어들인 경우를 들 수 있다. 앞에서 소개한 선과 만다라가 불교적 철리와 내적 영험의 세계를 바탕으로 하여 존재한다고 전제했을 때, 이 경우는 인간 삶의 치열한 생존의 현실 속에서 불교적 요소와 결합·융화하는 경우라 하겠다. 일찍이 조선시대 후기 〈甘露幀畵〉나 〈十王圖〉 등에서도 이와 같은 불교적 요소와 삶이 직결되는 모습이 보인다. 이는 불교적 색채를 지니면서도 대중의 삶과 함께 하는 경우라 하겠다. 민중의 삶의 모습을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하면서도 불교 지향적인 체취가 묻어나는 이와 같은 미술 형식들은 민족의 종교미술인 불교미술이 일반 민중들의 삶 속에 뿌리내려 있다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특히 오윤의 〈마아케팅―지옥도〉의 경우는 불교적 요소와 서구 지향적 현대인의 삶의 애환이 잘 드러나 있다. 이〈마케팅―지옥도〉는 불교 미술에서 지옥도의 내용과 형식을 바탕으로 오늘날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서구 지향적 삶의 모순과 생활 형태 속에 드러난 자본주의적 과소비의 열기와 비인간적 상혼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두렁'의 공동 작품인 〈조선 수난 민중 해원탱〉의 경우도 우리 나라의 역사적 아픔을 불교적 소재와 형식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고독한 현대인의 삶에 충만함을 줄 수 있는 진정한 미술은 신뢰와 애정을 느끼게 하는 진실이 존재해야 한다. 삶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신심, 그리고 민족적 정서와 배경을 바탕으로 하는 불교적 차원의 미술이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데 일익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전통종교인 불교미술은 교리에의 깊은 이해와 신심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바로 이런 특성이 현대인의 삶 속에 곧바로 투영되며 고독한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이나 예술가라도 종교적 차원을 넘어 삶의 근간으로서의 불교미술을 이해하고 우리미술의 대의를 긋는 전통미술인 불교미술을 아끼고 사랑하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이럴 때 불교미술이 지니는 여러 특징들이 우리의 생활과 전통 신앙에서 발현되고 그 바탕이 되는 예술철학과 삶의 철학이 대중화의 길을 갈 수 있다고 여겨진다. 불교미술이 대중과 함께 하는 미술로서 거듭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술철학과 삶의 철학, 즉 사상적 측면에서의 불교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로써 우리의 전통미술을 이해할 수 있고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 현대인의 삶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정서와 의식을 표현하는 데 있어 우리의 취향과 체질에 부합되는 색감과 안료에의 관심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미술이 현대인의 삶 속에서 고뇌와 아픔을 함께 하기 위하여 다양한 불교의 색채로서 먹과 채색의 활성화는 필수적이다. 고구려 사신총 등 여러 불화에 나타나는 綠靑, 唐銅綠, 唐朱紅, 石間朱, 石靑, 靑, 眞靑, 靑花, 群靑, 銅靑, 石黃, 黃丹, 石錄, 白堊, 墨, 松烟 등의 다양한 색은 五方에 나타나는 五色(赤,靑,黃,黑,白)을 바탕으로 한 우리미술만이 지니는 한국 전통 자연의 색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미술에서 가장 완벽한 투영이 가능한 가장 한국적인 색, 한국인의 심금과 감성을 구수하게 울릴 수 있는 구수한 큰 맛의 색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끝으로, 과거의 전통 속에 묻혀 있던 다양한 장르의 불교미술을 오늘에 접목시키려는 노력은 매우 의미 있는 일로서 현대인의 삶에 새로운 靈氣와 정신적 교감을 발흥시킬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이 인간 삶 속에 나타나는 창조적 조형 세계를 의미한다고 볼 때 우리 선조들의 예술 철학이 깃들여 있는 조형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오늘에 살아있는 전통 불교미술이기 위해서는 우리 시대의 삶과 민족정신·시각과 함께 하는 미술이어야 하며 이 시대에 맞는 고유의 미적 감각이 발휘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미술에 들어 있는 선조들의 조형의지와 예술세계를 훌륭한 전통으로 계승해야 할 것이며 그것의 현대적 수용을 통해 자생력을 갖춘 독자적인 우리 미술로 거듭나야 한다. 또한 작가의 예술세계가 투철히 확립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불교미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끊임없는 탐구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장준석

    장준석

    1961년생

    중앙대학교 회화과·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동양미학)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 박사 과정

    충북대 대학원·성신여대 조형대학원·중앙대 예술대학원 강사

  • <마음의 고향을 상실한 현대인을 위한 노래>을 뽑고나서
    윤범모


    금년도 미술평론 부문의 응모작은 모두 12편이었다.이들 원고를 정독했다.그럴 수밖에 없었다.무엇보다도 현학적인 내용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었다.서구이론의 설익은 발설은 짜증스럽게도 했다.미술평론은 서구의 현대미술 사조를 요약하는 레포트가 아니기 때문이다.물론 서구이론의 수용은 중요하다.다만 주체적 시각에서의 소화력이 관건일 것이다.이 대목까지만 해도 이해 못할바도 아니다.문제는 비평적 관점의 부재였다.평론과 현대미술사 시간의 과제물과 혼동하지 않았으면 한다.

    서구 현대미술의 이론을 토대로 하여 집필하고자 한 대다수의 글에 비해 3편의 고미술 관련 평문도 있었다.여기서도 평자의 비평적 관점이 문제로 드러났다.관점이 없거나 아니면 논리전개가 지나치게 주관적이어서 설득력이 미약했다.

    고심 끝에 '마음의 고향을 상실한 현대인을 위한 노래'를 당선작으로 선정하기로 했다.이는 우리 현대미술 속에서 불교미술의 역할을 논한 이색적인 평문이었다.구체적인 사례들을 좀 더 소개했으면 보다 설득력이 있었겠다는 아쉬움도 없지 않다.하지만 전체적으로 매끄러운 논리전개와 평자의 분명한 비평적 관점이 호감을 갖게 했다.거기다가 전통미술의 창조적 계승문제를 다룬 것이어서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많은 주제이기도 했다.현금의 우리 사회는 이른바 밀레니엄이란 서구적 열풍으로 과도하게 들떠 있는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이번 당선자의 건투를 빌며,특히 응모자 여러분의 지속적인 도전을 당부하고 싶다.그만큼 가능성을 읽었기 때문이다.
  • 장준석

    장준석

    1961년생

    중앙대학교 회화과·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동양미학)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 박사 과정

    충북대 대학원·성신여대 조형대학원·중앙대 예술대학원 강사

    12월이 끝나가고 있었다. 1999년을 그냥 넘기나보다 했는데, 당선 소식을 듣고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지금까지 온 정성으로 보살펴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리고, 오랜 기간 묵묵히 참아주고 내조하였던 아내가 고맙다. 그리고 졸고를 당선작으로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더욱 열심히 정진하리라는 새 마음가짐으로 새 천년을 맞이할 것이다. 서구 일변도로 획일화되어 가는 듯한 안타까운 미술 문화의 현장에서, 한국미술과 한국화의 위상을 바라보며 한국화와 서양화는 그 시작도 뿌리도 다르다는 것을 불교미술이라는 한 단면을 통해서 직·간접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전자오락, 멀티미디어, 컴퓨터, 첨단공학, 서구의 선진 지식들이 과연 우리에게 진정한 삶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마음의 고향을 상실한 한국인들의 마음의 병을 치유하고자 하는 바람으로 고민했다. 점점 메말라 병이 들대로 든 한국화의 현 주소는 어떠한가. 문득,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성경구절이 생각난다. 한국 미술 문화의 발전을 위해 좋은 씨를 뿌리는 농부이고 싶다. 오로지 아름다운 결실을 바라는 농부의 마음으로 미술계에 미약하나마 작은 힘을 보태고 싶다. 그 동안 가르침을 주신 여러 은사님들께도 감사드리며, 끝으로 인생의 새 장을 열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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