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우리들의 작문교실

by  조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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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사평
  • 당선소감
  • 1.
    우리 엄마에 대해서 써 보라구?
    반 페이지 정도로?
    그건 정말 바보 같은 얘기다. 어떤 애도 자기 엄마에 대해 반 페이지 짜리 짤막한 글을 쓸 수는 없다. 일단 얘기를 하기 시작하면 공책 한 권을 다 채우고도 철철 넘치게 되어 있는 게 엄마라는 사람들에 관한 얘기이다. 게다가 얘기는 아주 어지럽고 복잡해질 것이 틀림없다. 도대체 무엇에서부터 시작해서 무엇으로 끝을 내야 할지를 모르겠으니까. 우리 엄마가 작년 겨울 내내 매달렸었던 손뜨개 스웨터 정도라면 반 페이지 이내로 어떻게 해 볼 수도 있겠지만 엄마라는 사람에 대해서 쓰라고 한다면 나는 자신 없다고 말하고 싶다. 나뿐만 아니라 어떤 애도 그런 재주는 없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선생님들이란 뭘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쯤은 뻔히 알고 있을 텐데도 자꾸만 안 되는 일을 시키니 말이다.

    작년 여름 방학 작문교실이 완전한 실패로 끝났던 것도 알고 보면, 절반은 내 탓이지만, 절반은 선생님 탓이다. 선생님은 걸핏하면 할아버지 댁 과수원이라든지 고마우신 의사 선생님, 또는 대통령 할아버지께 보내는 편지 따윌 쓰게 했다. 과수원이나 병원 같은 것에 대해 할 말이 잔뜩 쌓인 애들한테는 재미있는 일이었겠지만 과수원이라고는 한 번 자세히 들여다 본 적도 없는 나, 대통령 할아버지께는 그저 모든 걸 잘 부탁드린다는 말밖엔 할 말이 별로 없는 나한테는 여간 고생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잔뜩 고생을 시켜놓고도 선생님은 야비하게시리 어느 틈에 벌써 엄마를 만나 내가 `적응에 약간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다'고 일러바쳤다. 차라리, 감당 못할 말썽꾸러기라든지 수업 내용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꼴등생이라든지, 그런 식으로 말했다면 그렇게까지 기분을 잡치지는 않았을 거다.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엄마에게 설명할 수도 있고 아니면 정반대로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는 식으로 뻔뻔하게 굴 수도 있다. 그런데 `적응에 약간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는 그 말만큼은 나를 꼼짝달싹도 못하게 하는 거다. 화를 내며, 나는 적응을 잘 하고 있다고 우기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그래, 나는 완전한 구제불능이다, 그러니 이제 날 어쩔거냐는 식으로 배짱을 부릴 수도 없다. 이 `적응' 문제에 관한 한 나는 늘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겠더란 얘기다. 어른들, 특히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방법을 수백 가지도 더 알고 있다. 나는 그 점이 끔찍했던 거다. 그래서 작문교실을 그만둬 버렸다. 차라리 글씨를 쓸 줄 몰라 동정을 받는 편이 낫지,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 소리는 다시 듣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그 말을 엄마는 무슨 뜻으로 알아들었을까? 아마 내가 맞춤법도 엉망이고 글씨를 쓸 때에 가지런히 줄을 맞추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던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생일카드 같은 걸 쓸 때에 철자법을 다 틀리는 바람에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그런 어른으로 자라날까봐 두려웠던 모양이다. 올 여름 방학이 시작될 무렵 엄마는 내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했다. 이주일 짜리 여름방학 작문 교실을 다시 다니든지 아니면 롤러 블레이드를 엄마에게 영원히 맡겨버리든지.

    하는 수 없이, 나는 이렇게 작문교실에 나와 있다.

    6학년 5반 이은아, 라고 쓴 뒤로는 한 자도 못 나가고 있지만.........

    그런 엄마에 대해 굳이 뭐든 써야 한다면 나 역시 엄마에 대해 많이 걱정하고 있다고 쓰고 싶다. 내 생각에 엄마는 TV를 너무 많이 본다. 가게에 나가 있는 동안은 보지 않지만 아침저녁으로 집에 있을 땐 언제나 TV를 틀어놓고 산다. 낮 시간에는 볼 수 없으니까 부지런히 벌충을 해 두어야 한다는 식으로, 아주 죽기 살기다. 설거지를 할 때에도, 베란다에 나가서 화분에 물을 줄 때에도, 샤워를 할 때에도 줄곧 TV 소리를 듣고 있다. 시험삼아 볼륨을 줄여 보면 엄마는 대번에 그걸 알아차리고 나, 그거 듣고 있어, 라고 소리친다. 그 놈의 TV 때문에 엄마는 잠자는 습관도 엉망이다. 불을 끄고 똑바로 누워 자는 법이 없다. 자, 이젠 잘 시간이니까, 하고 잠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잠이라는 놈이 제 편에서 덮쳐 와 줄 때까지 기다리는 거다. TV 유선 방송을 보면서 말이다. 자다가 깨어 보면 이건 꼭 타임 머신을 탄 것 같다. 어떨 땐 마마, 통촉하옵소서, 마마, 죽여주옵소서, 하는 사극이고 다시 잠들었다가 깨어보면 이번엔 장화 신은 총잡이들이 우스꽝스런 모자를 쓴 멕시코 산적들에게 쫓기느라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다. 탕, 탕, 총도 쏘고 말이다.

    하지만 여우같은 후궁들도 멕시코 산적들도 엄마에게 큰 해를 끼치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엄마는 그런 걸 건성건성 보아 넘기기 때문이다. 정작 해를 끼치고 있는 건 엄마가 고정적으로, 열심히 보고 있는 `행복의 채널'이라는 토크쇼이다.

    매일 아침 여덟 시부터 두 시간씩은 행복의 채널이다. 1부는 괜찮다. 1부엔 탤런트나 가수나 뭐, 그런 유명한 사람들이 나와서 `열애설'이나 `위기설,' 또는 뭐래더라, `재결합설'이라나? 그런 걸 `극구 부인'하느라 야단들인데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문제는 2부이다. 365일 건강비결이나 젊게 사는 주부를 위한 패션제안 따위의 시시콜콜한 얘깃거리가 뚝 떨어지고 나면 여름방학 특집으로 자녀교육상담이라는 걸 들고 나온다. 그런데 그게 나한테는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이런저런 전문가 선생님들이 엄마에게 쓸데없는 걱정거리만 잔뜩 심어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은 심각한 얼굴로 `우리 아이들은 지금 위험한 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고 몇 번 씩 강조한다. `아이들은 지금 감당하기 어려운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도 예외일 순 없습니다' 라고 잔뜩 겁을 준다. 그러면 이번엔 또 부리나케 전화를 거는 아줌마들이 있다.

    `우리 아이 서랍에서 이런 게 나왔어요.'

    `우리 아이 가방에서 이런 쪽지가 나왔는데 이 말이 무슨 뜻이죠?'

    `우리 아이는 턱없이 많은 돈을 써요. 내가 안 주면 몰래 집어 가구요,' 또는,

    `우리 아이는 도통 돈 달란 소릴 안 해요. 혹시 어디서 돈이 생기는 걸까요?' 등등.

    엄마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그런 얘기들을 듣는다. 그리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건 수첩에 메모하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나대로 걱정이 태산이다. 내가 지금 위험한 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엄마의 머리 속이 걱정으로 가득 차는 건 싫기 때문이다. 설령 내게 무슨 끔찍한 일이 생긴다 해도 그 일이 진짜로 벌어질 때까지는 엄마는 까맣게 몰랐으면 좋겠다. 왜냐면.........

    왜냐면 엄마에겐 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골칫거리라고는 나밖에 없다. 속 썩이는 다른 아이도 없고 열심히 싸워야 할 남편도 없다. 어른이니까 이제 못 살게 구는 친구도 없고 밀린 숙제도 없다. 그러므로 엄마는 다른 걱정거리 때문에 내 걱정을 잊는 일이 없다. 일단 내 걱정을 하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걱정거리란 차라리 여러 가지가 뒤섞여 있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어느 한 가지를 걱정하다가 지치면 다른 걸 걱정하면 되니까. 한 가지에 대해서만 너무 많이 걱정하면 머리가 이상해질지도 모른다. 그 점이 나는 걱정된다. 엄마는 13 년 동안이나 나 하나 때문에 골치를 썩히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뱃속에 들어 있을 때까지 합쳐서 14 년쯤.........

    내가 아직 엄마의 뱃속에 들어 있을 때, 또는 아주 작은 아기였을 때의 일들에 대해서 미주알 고주알 얘기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이모라는 사람들이다. 이모들이란 다 그런 가 싶다. 다른 사람들 앞에선 점잔을 빼다가도 이모들끼리 만나면 개학하고 만난 여자애들 같이 시끌시끌하다 (그런 이모가 내게는 셋이나 있다!). 각자의 인생을 제각각 살아갈 생각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다. 무엇이든 함께 머리를 짜내서 결정하고 좋은 게 있으면 나눠 쓰고 바꿔 쓴다. 예를 들어 예쁜 귀걸이나 모자 같은 게 있으면 이모들 사이를 돌고 돈다. 물론 우리 엄마도 거쳐서. 사촌이 여섯이나 되는데 아이들 역시 이모들 모두의 아이들인 것처럼 생각한다. 물론 나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런 이모들이 말하길 나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 받고 축복 받은 아이란다. 나를 낳기 위해 엄마는 온 세상과 전쟁을 벌였다는 거다. 큰 이모만 빼고 밑의 두 이모는 마치 그 전쟁에 참전했던 것처럼 얘기한다.

    좀 더 어릴 땐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었다. 하지만 작년쯤부터는 그게 좀 과장된 얘기라는 걸 알았다. 전쟁 같은 건 없었다. 엄마는 그저 엄마의 두 분 부모님, 그러니까 내게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되는 분들과 심하게 싸워야 했다. 그 분들은 엄마 뱃속에 잠자코 있는 나를 `없애버리라'고 했다. 그냥 얌전히 있는 나를 두고 그런 무서운 얘기를 했다. 그 역시 작문시간은 나를 힘들게 한다.이유는 간단하다. 나의 아빠가 되어 주어야 할 사람이 무책임하게도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결혼식도 채 못 올리고 떠났다면 말 다 한 거다.

    하긴, 전쟁은 아니었대도 대단한 소동쯤은 있었을 거다. 지금은 두 분 다 돌아가셔서 무덤 속에 잠자코 누워 계시지만 살아 계실 땐 무척 엄한 분들이셨으니까. 특히 우리 외할아버지. 연속극에 나오는 나쁜 아버지처럼 뭐든 집히는 대로 집어던지고 엄마의 머리채를 잡아 방구석에 패대기를 쳐댔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한 이모가 울며 바지자락에 매달리고 다른 한 이모는 엄마를 감싸안고 그랬겠지. 나라는 애는 그냥 엄마 뱃속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게 웬 소동인가, 했을 테고 겁이 더럭 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뱃속에 갇혀 있으니까 뭐라고 한 마디 거들 수도 없었다.

    그런데 만약.........

    만약에 말이다. 뱃속에 들어있는 내게도 생각을 말할 기회가 있었다면 나는 뭐라고 이야기했을까? 말썽 피우는 애는 되지 않을 테니 제발 낳아 달라고 했을까? 잘 모르겠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벌써 몇 백 번쯤 생각해 봤지만 그 때마다 다른 답이 나온다. 어떨 땐 차라리 태어나지를 말았더라면 싶을 때가 있다. 선생님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을 때에도 그런 생각이 들고 말도 안 되는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도 그런 생각이 든다. 당연한 일이다. 그럴 때엔 어떤 애라도 그런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저 사람이 너무 바글바글한 장소에 멍청히 서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든다는 거다. 예를 들어 백화점 출입구 같은 데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 야, 나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 걸, 싶은 생각이 든다. 나 같은 애 하나쯤 태어나지 않았어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겠구나, 싶은 처량한 생각 말이다.

    하지만 때론 태어나 있다는 것이 정말 다행스럽고 기쁠 때도 있다. 엄마랑 같이 목욕을 할 때 그런 생각이 든다. 엄마가 나를 우악스럽게 붙들고 비누칠을 박박 해댈 때면 아프긴 하지만 기분이 좋다. 또는 롤러 블레이드를 타고 한바탕 달리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든다. 숨이 가빠서 고꾸라질 것 같은 때에, 어지러워서 엉덩방아를 찧을 때면 이상하게도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뱃속에 든 아기일 적에 내가 뭐라고 말했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낳아달라고 했어야 하는 건지 차라리 나를 없애버리라고 했어야 하는 건지. 생각해보면 어느 쪽이나 나한테는 마찬가지일 것 같다. 나한테는 정말 마찬가지이다.

    끔찍하게 싫은 순간이 있는가 하면 또 그만큼 기분 좋은 일도 많으니까. 그 문제에 관해서는 나보다는 차라리 엄마한테 더욱 중요한 결정이었을 것 같다. 엄마의 생각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를 낳겠다고 고집을 피울 때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앞으로 나 때문에 얼마나 골치를 썩게 될지 몰랐던 걸까? 엄마가 그렇게나 소원했던 그림공부도 집어치워야 했는데, 그러고도 나를 낳고 싶은 이유가 뭐였을까?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었던 걸까? 그리고 그 보다 더 중요한 건, 지금 현재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거다.

    엄마는 정말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한참 재미있게 읽고 있는 잡지를 홱 낚아채고 용돈을 깎아버리겠다고 윽박지르는 엄마. 겉으론 짐짝 부리듯이 마구 대하지만 속으론 나를 유리그릇만큼이나 조심스러워한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우리 은아, 넌 내 보물이야, 라고 말하며 와락 안아주지만 그 순간 속으로는 나를 원망하고 있을지 누가 알아? 아무도 모른다.

    엄마에 대해선 뭐든 길어진다. 그리고 늘 끝에 가선 마음이 무겁다.

    역시 작문시간은 나를 힘들게 한다.

    2.

    오늘의 주제는 `단짝친구'이다. 나한테 죽어라 붙어 다니는 애라고는 옆 짝 위니 밖에 없으니 위니 얘길 써야겠다 (위니는 벌써 내 얘길 쓰기 시작했는데 내가 못 보게 하려고 난리다).

    위니와 내가 짝이 된 데에는 좀 복잡한 사연이 있다. 지난 학기 초, 나는 생전 처음으로 입원을 했었다. 후두염 때문이었다. 후두염이란 목감기 비슷한 것이지만 중요한 점은 감기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에 지독하다는 점이다. 열이 나고 기침이 끊이지 않으며 온몸이 쑤신다. 그리고 목구멍이 몹시 따가운데 알고 보니 그 부분이 후두라는 데였다. 이 놈의 후두염을 앓느라 학교를 열흘이나 빼먹었다. 다른 아이들은 새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갈 때에 나는 병실에서 만화책만 읽고 있었다. 처음엔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신났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걱정이 되었다. 다른 때도 아니고 학기초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던 거다.

    학교라는 델 5년쯤 다녀본 애는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지만, 1학기초의 열흘이면 2학기 전체를 합친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그 열흘 동안 대부분의 것들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자리가 정해지고 짝이 정해지는 것도 이 때이다. 처음 말을 걸고 이름을 익히는 것도 이 때이다. 친하게 지낼 아이와 두고두고 괜스레 미워할 아이를 가려놓는 것도 실은 이 열흘동안일 때가 많다. 그토록 중요한 열흘동안을 나는 병원 침대에서 빈둥댔으니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열흘만에 학교에 가 보니 과연 예상 대로였다. 내가 끼일 자리가 남아있지 않다는 걸 대번에 느낄 수가 있었다. 교무실에서 처음 만난 담임 선생님은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선생님으로 나 같은 애는 벌써 오래 전에 잊어버리신 것 같았다. 후두염 때문에 결석하던 이 은아라고 말씀드렸더니 수첩이며 출석부를 오래오래 뒤적이셨다. 무슨 착오가 있었던 모양으로, 나에 관한 아무것도 찾아지지 않았는데도 선생님은 너무나 느릿느릿, 너무나 끈질기게 뒤적이고 계셨다. 그러는 사이사이에 안경을 벗어들고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으셨는데 울고 계시는 줄만 알고 나는 덜컥 걱정이 되었다. 아이의 이름을 찾을 수가 없다고 울고 계시나? 그러나 가만 보니 울고 계시는 건 아니었다. 뿌연 눈곱 같은 게 덮고 있는 흐릿한 눈이기는 했지만 눈물이 흐르는 건 아니었다. 안경을 벗고 자꾸만 눈가를 닦는 건 아무래도 선생님의 습관인 것 같았다. 잠깐 잊었었다. 어른들은 그만한 일로 울지 않는다.

    교실에서도 내가 끼일 자리는 없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나를 몰랐고 나도 그 아이들을 몰랐다. 그렇다고 손님대접이었냐면 그것도 아니다. 아이들은 그저 내가 거기 없는 듯이 행동했다. 따로 말을 거는 아이도 없었다. 나를 미워하고 못 살게 구는 아이도 없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바빴다. 바쁜 아이들 틈바구니에 있는 건 몹시도 외로운 일이었다. 웬만큼 친하게 지내던 아이가 서너 명 있었지만 어느새 새친구를 사귀어서 마치 두 개 짜리 듀라셀 건전지같이 꼭꼭 붙어 다녔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텐데도, 그 아이들은 나와 특별히 친한 사이는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해두려는 듯 쌀쌀맞게 굴었다. 아이들은 참 이상하다. 제일 친한 친구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해 두려고 애를 쓴다.

    제일 친한 친구와 덜 친한 친구 사이에 표시나게 차별을 해 두려고 여러모로 머리를 쓰기까지 한다. 특별한 친구를 갖게 되면 일부러라도 그런 차별을 두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 바람에 아무하고도 특별한 사이가 되지 못하는 애는 언제나 외롭다. 입원과 같은 뜻밖의 나쁜 일을 겪느라 기회를 놓쳐 버렸다고 항의해봤자 누가 나서서 다시 기회를 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나는 이러다 투명인간이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투명하다는 사실이 너무나 행복한 투명인간이 아니라 다시 보통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투명인간이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과학자의 실험실에 놀러갔다가 물인줄 알고 벌컥벌컥 마신 게 알고 보니 투명인간이 되는 약이었다. 더럭 겁이 나서 불투명인간으로 되돌아가는 약을 얼른 마시려다가 실수로 그만 바닥에 엎질러버린 거다. 그러니 이젠 사람들 눈에 보이는 불투명 인간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다. 내가 꼭 그 꼴이었다.

    그와 같은 생활이 계속되고 있던 중에 내게 말을 걸어 온 애가 위니이다.

    "아직 모르고 있겠지만...... 넌...... 내 짝이 될 애야." 라며, 그 애의 말은 시작되었다.

    "우리 반 애들은 전부 합쳐서 서른 넷이야. 그러니까 네가 결석하는 동안엔 서른 셋이었어. 서른 셋을 둘씩 둘씩 짝 지우면 하나가 남지 않니?"

    나는 그 애의 숫자 계산을 또박또박 따라가 보았다. 맞는 계산이었다. 틀림없이 하나는 남게되지.

    "그 하나가 바로 나야."

    "...............?"

    "선생님이 그러셨어. 결석하는 애가 나오면 같이 앉으라고."

    더 이상 말 안 해도 알 것 같았다. 그 애는 따돌려졌던 거다. 외톨이인 채로 또 하나의 외톨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엔 왜 하필 위니가 따돌려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뚱뚱하지도 않았고 눈에 띄게 못 생기지도 않았다. 잘 안 씻어서 냄새가 나는 애도 아니고 남의 물건을 집어 간 적이 있다는 소문이 있는 애도 아니었다.

    가난한 아이가 따돌려지는 일이 흔히 있지만 위니는 전혀 가난하지 않았다. 가난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상당한 부자임에 틀림없다. 위니의 아빠는 당뇨병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는 의사 선생님이고 위니의 엄마는 연극배우이다. 결혼하기 전엔 자기도 굉장한 사람이었는데 결혼하고 위니를 낳는 바람에 모든 게 엉망이 되었다고, 위니와 위니의 아빠를 몹시 미워하는 아줌마이다. 물론 도시락에 개구리를 넣어 둔다든지 숙제장을 감춰버리는 엄마는 아니다. 위니의 엄마는 어른이니까 좀 더 복잡하고 꾀 많은 방법으로 위니를 괴롭힌다. 예를 들어 한밤중에 일어나 울음을 터뜨리거나 방문을 잠그고 이틀 씩 밖으로 나오지 않는 그런 짓을 곧잘 한다. 그러면 위니의 야단스런 이모들이 나타나서 문을 열어달라고 통사정을 한단다. 그리고 위니를 무릎에 앉혀놓고 엄마는 특별한 사람이야, 위니가 어른스럽게 엄마의 친구가 되어주어야해, 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릴 늘어놓는 거다. 남들은 그런 위니 엄마를 가엾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에 그건 위니를 괴롭히려는 속셈이다. 얼핏 봐서는 그런 속셈이 드러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못 살게 구는 것. 그것이 위니 엄마의 꾀이다.

    그러나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은 그런 아줌마도 요즘은 잠잠해졌다는 점이다. 다시 무대에 오르는 건 잊어버리기로 하고 대신 연극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있어서 예전보다 더 바쁘다고 한다. 그러니 더 이상 그런 쓸데없는 꾀를 부리지는 못하겠지. 어쨌든 위니의 아빠는 아빠대로 대단히 중요한 일을 하고 엄마는 엄마대로 잡지에 나고 그러는 걸 보면 위니는 절대로 가난할 리 없다. 겉으로 봐서는, 위니는 따돌려질 애가 아니라 차라리 소공녀에 나오는 레비니어 같이 굴어도 될 애였다.

    그러나 사흘도 못 되어서 나는 위니의 문제점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 애의 경우는 고집이 세다는 게 문제였다. 그것도 아주 철딱서니 없고 말도 안 되는 걸 가지고 죽기 살기로 우기는 거다. 이름만 해도 그렇다. 당연히, 위니의 진짜 이름은 `위니'가 아니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자 출석부에 올라있는 이름은 따로 있다. 그런데 한사코, 위니는 `위니'로 불리고 싶어했다. `위니'라고 부르지 않고 그 애의 진짜 이름으로 부르면 대답도 안 한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 안 할 땐 안 한다. 하는 수 없이, 만사 포기하는 심정으로 `위니'라고 부르면 그제서야 들은 체를 한다. 아이들은 화를 내며 그 아이를 점점 더 따돌렸다. 결국에는 위니고 뭐고 간에 도대체 그 아이를 상대하려는 애도 없었다. 멀쩡한 진짜 이름은 따로 모셔두고 별 것도 아닌 가짜 이름을 가지고 야단을 피우는 위니를 나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위니가 원하는 대로 `위니'라고 불러 줄 수밖에. 생각해 보면 누구나 자기가 불리고 싶은 이름으로 불릴 권리는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이름이란 부르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고 위니 자신의 것이니까.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위니'는 위니가 좋아하는 만화 주인공이다. (그렇다고 위니 더 푸우의 그 위니는 아니다) 우리의 위니는 멋쟁이 소녀탐정 위니이다. 겉으로는 평범한 여학생으로 살아가지만 위니는 보통의 아이가 아니다. 명탐정이다. 값비싼 보석이 감쪽같이 사라졌을 때, 유명한 그림이 가짜와 바꿔치기 되었을 때, 또는 예수님의 일기장만큼이나 중요한 비밀 서류가 마이크로 필름에 찍혀서 새어나가려 할 때에 우리들의 위니가 나타난다. 때론 재치를 발휘해서, 때론 미모를 이용해서 위니는 범인을 찾아낸다 (위니는 다른 어떤 만화 주인공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다리도 길고 머리도 길다). 하지만 그런 위니도 평소엔 보통의 아이들과 달라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소녀탐정 위니의 정체를 아는 건 오직 한 사람, 룸메이트 `펄' 뿐이다. 주근깨 투성이에 커다란 안경을 쓴 펄.

    위니는 나를 펄이라 부른다.

    위니와 펄 노릇을 한 지도 한 달쯤 지난 후에 나는 위니를 엄마의 가게에 데려갔었다. 위니에게 꼭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가게에 도착하기 전에 나는 두 가지 점에 대해서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첫째, 가게에 있는 건 도넛이든 음료수든 얼마든지 먹어도 좋은데 단, 돌아다니면서 먹지는 말 것. 왜냐면 엄마가 질색하니까. 엄마한테 좋은 인상을 주고 싶겠지? 둘째, 그럴 리도 없겠지만, 혹시라도 말야, 아빠 얘기는 꺼내지 말 것. 왜냐면 내가 싫으니까.

    위니는 궁금해했다.

    "왜 아빠를 싫어하는 거야?"

    "이 바보, 아빠가 싫은 게 아니고 아빠 얘기가 싫은 거야."

    "왜?"

    "엄마가 걱정할까봐."

    "뭘?"

    "아빠가 없다는 걸 알면 네가 날 특별한 애로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거지."

    위니, 이 바보는 기어이, 아빠가 왜 없는 거냐고까지 물었다.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없는 데에는 이유가 없어. 없는 건 그냥 없는 거야. 뭐든 있을 때에 묻는 거야. 어째서 있느냐고, 이 바보야.

    더욱 바보스런 말이 튀어나오기 전에 이 녀석 입을 닫아놔야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속력을 내서 걷기 시작했다. 내가 마음먹고 빨리 걷기 시작하면 어지간한 애들은 나를 따라 잡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 위니 정도로는 어림없다. 나는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 소녀 탐정 위니처럼 짧은 치마에 긴 양말을 신은 바보 위니가 숨을 할딱이며 좇아오고 있었다. 나는 뛰기 시작했다. 이유도 없이 전속력으로 달렸다. 이러다가는 내가 공기 중으로 사라져버리는 게 아닐까 싶어질 때까지 나는 달렸다.

    가게 앞까지 거의 다 왔을 때 불쌍한 위니를 위해 달리기를 멈추었다. 위니는 바보스럽게도 내가 걸으면 따라 걷고 내가 뛰면 따라 뛴다. 그리고 당연히 내가 멈춘 데에 와서 멈춰 선다. 우리는 마주보고 서서 학학거렸다. 홍당무처럼 빨개진 얼굴에 땀이 다 맺혔다. 괜한 짓이었다 싶기도 하고 그래도 퍽 재미있기는 했다, 싶기도 했다. 위니도 그런 생각들을 할까? 이런저런 생각들 말이다. 별로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쨌든 생각들..........

    그러고 서 있는데 레코드 가게의 아르바이트생 미나 언니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귀찮은 입씨름에 말려들고 싶지가 않아서 못 들은 체 했다. 미나 언니는 내 앞에서 뻐기고 나를 놀려먹는 재미로 사는 사람이다. 이 소문난 꾀보는 단 한 번도 나를 그냥 지나가게 놔두지 않는다. 어떻게든 말을 시켜서 속을 북북 긁어 놓거나 하지. 하지만 오늘만큼은 어림없다고, 절대로 그냥 지나쳐버리리라고 다짐을 했다. 어리둥절해하는 위니의 손을 붙잡고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애가 탄 미나 언니가 뒤에서 소리를 꽥꽥 질렀다.

    "얘, 은아야........"

    ".............."

    "어이, 비행접시. 사람 말이 안 들리니?"

    ".............."

    "어머 쟤 좀 봐. 이 말라깽이 주근깨 비행접시야아아."

    미나 언니는 목을 길게 빼고 발을 동동 굴렀다. 분통터져 죽을 맛이었던 거다. 미나 언니는 기분 좋을 땐 나를 그냥 비행접시라 불러주지만 짜증났을 땐 말라깽이 비행접시라 부른다. 그리고 머리끝까지 약이 올랐을 땐 반드시, 말라깽이 주근깨 비행접시라고 부르는 거다.

    내 별명은 비행접시이다.

    이 거리의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부른다. 그런 별명이 붙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엄마가 꾸려가고 있는 카페테리아의 바깥벽에 눈에 확 띄는 거대한 비행접시 그림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커다란 비행접시가 휘리릭 날아오르고 있고 땅 위에서는 각종 우주인들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막내 이모의 후배라는 대학생 오빠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스프레이로 그려준 벽화이다. 엄마는 말한다. 그렇게 꿈자리 사나운 그림을 그릴 줄을 미리 알았더라면 걔네들을 얼씬도 못 하게 했을 거라고. 하지만 그렇게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 생각에 그 그림은 `미래적'이라는 말을 쓰기에 꼭 맞는 분위기이다. 게다가 연습 삼아 그린다며 돈도 받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꽤나 잘 된 그림이다. 어쨌든 그 그림 때문에 사람들의 머리 속에 비행접시의 인상이 강하게 남았고 나를 보면 다들 오, 비행접시 카페, 했다. 카페의 진짜 이름은 따로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내가 비행접시인 건 아니다. 진짜 이유는 롤러 블레이드이다. 위니에게는 소녀탐정 위니가 있듯이 나에게는 롤러 블레이드가 있다.

    지난 겨울 방학, 이모 댁에 놀러 가 있을 때의 일이다. 나 보다 한 살 아래인 외사촌 명우가 어디서 롤러 블레이드를 타보고 와서는 당장 하나 사 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명우는 한번 울기 시작하면 아무도 못 말리는 애이다. 아는 체를 해 주면 점점 더 악을 쓰고 우는 애라는 걸 알기 때문에 모두들 명우가 제풀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었다. 하지만 그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명우는 온갖 종류의 듣기 괴로운 소리를 다 냈다. 빈 강당 바닥에 철제 의자를 드륵드륵 끌고 가는 소리부터 포크 끝으로 흑판을 끼익끼익 긁고 지나가는 소리까지. 상대가 제풀에 지쳐 쓰러지길 기다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그 때에 배웠다. 어쨌든 그 날의 승리자는 명우였다. 이모부는 아직도 훌쩍이고 있는 명우를 마구 끌고 가서 자동차 뒷좌석에 던져 넣고 운동구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돌아올 땐 비싼 롤러 블레이드를 두 켤레나 사 들고 왔다. 하나는 내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언제나 나를 잊지 않고 챙겨준다. 뭐든 하나 더 사와서는, 이건 우리 은아 생각이 나서, 라고 말한다. 나는 절대로 떼를 쓰며 보채는 애가 아니란 걸 알기 때문에 도리어 가엾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고마운 일이지만 때론 귀찮기도 한 친절. 그런 친절로 해서 나는 롤러 블레이드를 만났다.

    그게 나한테는 얼마나 소중한 친구가 될지를 까맣게 모르는 채로...........

    방학이 끝날 무렵엔 이미 롤러 블레이드에 미쳐 있었다. 울고불고 하던 명우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나는 이미 홀딱 반해 있었다. 방학의 마지막 이주일은 정말 멋졌다. 운동화 같은 건 신어 본 적이 없다. 매일같이 롤러를 타고 쌩쌩 달렸다. 속력이 붙으면 아찔하다. 그리고 멋지다. 한낮의 햇볕을 쬐려고 나와 있는 노인들은 방금 지나간 게 뭐였는지도 모르는 채 어지러워한다. 맨홀을 뜯고 공사 중인 아저씨들은 위험하다고 난리들이다. 고릴라 같이 울부짖으며 분통을 터뜨리지만 나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자전거를 타고 몰려다니는 남자 중학생들은 나만 보면 무조건 앞질러 보려고 한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다는 걸 곧 알게 된다. 그런 나에게 미나 언니가 붙여준 별명이 비행접시이다.


    비행접시 카페의 딸, 비행접시.
    난데없이 나타나서 쏜살같이 사라지니까, 여기에 있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저기쯤 가 있으니까 나는 정말 비행접시를 닮았다. 밉살스런 미나 언니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그 별명은 썩 잘 만들어진 것 같다. 한 번 들으면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별명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마음에 쏙 든단 말씀이야.

    하지만 엄마는 롤러 블레이드를 좋아하지 않는다. 롤러를 빼앗아서 가게에 두고 매번 엄마의 허락을 받고 갈아신게 했다. 애들 말에 의하면 엄마들은 대체로 롤러 블레이드를 싫어한다고 한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뭐든 위험한 건 엄마들에게 미움을 산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말했었다. 차라리 더욱 열심히 연습을 해서 롤러의 고수가 되면 위험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 나는 더욱 더 열심히 롤러를 타야한다고. 하지만 엄마는 그런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위험한 게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무엇이든 한가지를 너무 많이 좋아하는 건 해롭다고 했다. (아마 TV에 나오는 전문가 선생님들이 말해 준 건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롤러가 내 발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을까봐 엄마는 걱정이 될 지경이라고 했다. 며칠 전에 어떤 꿈을 꾸었는데 그 꿈속에서도 나는 롤러를 신은 채였다고 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다는 거야? 내 발이 롤러와 찰싹 붙어버리는 것. 꿈 속에서도 롤러를 타고 달리는 것.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는 거다.

    나는 달리는 거다. 별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먼 데까지 나는 계속해서 달리는 거다.

    위니는 어떻게 됐느냐구?

    위니는 그 날로 우리 엄마랑 친해져 버렸다. 위니 덕분이 아니라 순전히 엄마 덕분이다. 위니는 그저 평소의 위니처럼 맹하게 행동했는데 엄마는 평소의 엄마답지 않게 행동했다는 뜻이다. 너무 상냥하고 다정해서 꼭 놀이공원 퍼레이드에 등장하는 `도로시'가 생각날 정도였다. 오즈의 마법사의 그 도로시 말이다.

    "네가 우리 펄의 친구, 위니로구나."

    엄마가 허리를 구부리고 아주 가까이에서 위니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렇게 까맣고 예쁜 눈은 처음 봤다는 듯이 말이다. (실제로 위니는 눈 하나는 끝내주게 예쁜데 제 자신은 그걸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리고는 위니의 후드 끝에 달린 끈을 날쌔게 잡아당기는 장난을 걸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후드가 쪼그라지는 꼴을 당한 위니가 까르르 웃어댔다. 때마침 라디오에선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 `퍼프'가 흘러나왔고 엄마는 위니의 손을 잡고 빙그르르 도는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었다. 위니는 지칠 줄도 모르고 계속 까르르 웃어댔고.

    "너, 이거 아니? 이 노랜 피터, 폴, 앤 메리가 부른 노래야. 너나 나 같은 애는 세상 구경도 하기 전에 말야. 그렇죠, 엄마?"

    내 말엔 대꾸도 안 하고 두 사람은 웃으며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뭐가 그렇게 신나지? 뭐가 그렇게 신나는 거냐구?

    나도 우리 엄마를 오늘 처음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나는 우리 엄마를 아주 예쁜 아줌마라고 생각했을 거고 우리 엄마 역시 나를 지독하게 말 안 듣는 애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니까.

    그 날 나는 위니에게 나의 롤러 블레이드를 선 보였다. (그럴려고 가게에까지 데려간 거다) 가게 앞에 위니를 세워 놓고 나는 달렸다.

    나의 코스는 서점에서부터 편의점까지의 이백 미터이고 도중에 위니와 비행접시 카페를 지나치게 된다. 내가 위니 앞을 지나치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위니는 뭐라고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 애의 말은 내 귓가를 스쳐 흩어져 버렸다. 나는 날고 있기 때문이다. 위니는 내게 뭔가를 전하려 애를 쓰지만 나는 멈출 수가 없다. 위니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멈추고 싶지가 않은 거다.

    대신 나는 소리친다.

    뭐라구?

    뭐랬니?

    안들려, 위니. 나는 보시다시피 달리고 있단 말야.

    난 말야, 달리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나는 날고 있어.

    위니는 지금 내 옆에 앉아 있다. 내가 여름방학 작문 교실에 다니게 되는 바람에 위니도 다니고 있다. 방학 때에도 나를 만나고 나와 놀기 위해서이다. 그렇다고 해서 위니가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위니도 제 나름대로 열심히 글을 쓴다. 엄마에 대해 쓰던 날은 걔네 엄마가 만들고 있는 연극, `위기의 여자'에 대해서 뭔가 써냈다. (물론 다른 얘기도 쓰려고 했겠지만 연극 얘기만 써도 한 페이지를 가득 채웠기 때문에 더 이상 쓰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마 나에 대해 쓰고 있을 거다. 나에 대해 쓰고 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쓰고 있지만 그쯤은 뻔하다. 위니가 나 말고 도대체 누구 얘길 쓸 수 있단 말야?

    장난삼아, "나는 위니, 네 얘길 쓰고 있는데 넌 누구 얘길 쓰는 거니?" 라고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안 한다. 대답이 궁하니까 그냥 못 들은 체 해 버린다. 대답하기 어려울 땐 못 들은 체 해 버리기. 그게 위니의 단골 수법이다. 그런 경우 너무 몰아세우면 안 된다. 그러면 위니는 폭발한다. 위니의 폭발은 울음도 아니고 비명도 아니다. 그건 더욱 무시무시한 건데 바로 `움직이지 않기' 이다.

    정말 꼼짝도 하지 않는다. 말을 시켜도 대답이 없고 웃겨도 웃지 않는다. 웃기는커녕 숨이나 쉬고 있는지 걱정이 될 지경이다. 그건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위니가 폭발하지 않도록 늘 신경을 쓴다. 나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위니를 건드리지 못하게 한다. 조금 놀리거나 하는 건 괜찮지만 심하게 몰아세우지는 못하도록 한다. 그런 점에 대해 위니는 알고 있을까? 물론 알고는 있겠지. 하지만 그다지 고마워할 것 같지는 않다. 왜냐면 `위니의 폭발'은 위니 자신에겐 무서운 게 아닐테니까. 위니 자신이야 꼼짝 안 하면 그만이다. 그런 위니 때문에 고생하는 건 위니의 단짝인 펄뿐이지.

    아마 지금 위니는 내가 만화에 나오는 `펄'과 얼마나 닮았는지에 대해서 쓰고 있을 거다. 깡마른데다가 주근깨가 있고 또 남자애처럼 짧은 머리를 하고 다니니까. `펄'과 똑같아 보이도록, 올해 안으로 내가 안경을 끼게 됐으면 좋겠다고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위니는 그러고도 남을 애이다.

    펄의 말씀!

    3.

    작년에도 이런 제목으로 작문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아이'에 관한 글짓기 말이다. 그 때 나는 작문교실에서 만난 고현우라는 아이에 대해서 꽤나 긴 글을 썼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바보같은 짓이었다. 웬일로 내가 쓴 글이 선생님 눈에 들어 아이들 앞에서 그 글을 읽어야 했다. 그건 정말 끔찍한 경험이었다. 아이들 가운데에 고현우를 앉혀 놓고 나는 교단 앞에 불려나와 그 아이에 대한 온갖 좋은 소리를 늘어놓아야 했으니까. 그런데 그 경험의 가장 끔찍스런 부분은 그 아이가 내가 읽고 있는 얘길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는 거다. 딴 사람이 아닌 자기 얘길 하고 있는 건데 그 아이는 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글을 다 읽어 갈 때쯤에는 나의 목소리도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그 아이에게 관심을 끊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내가 좋아하는 남자아이는 누구냐구? 불행인지 다행인지 좋아하는 남자아이 따위는 없다. 그 대신 남자 어른이 하나 있다. 나는 지금 남자 어른 한 사람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 가게의 단골 손님이다. 더 이상 아이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마흔 살이 거의 다 된 아저씨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점은 그 아저씨가 `소설가' 라는 점이다. 백 퍼센트 진짜 소설가이다. 언젠가는 나도 소설을 한 편 써 봐야지, 라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은 많이 봤지만 진짜 소설가인 사람은 처음 봤다.

    지난달의 어느 날, 미나 언니가 내게 말했다. 편의점에 가서 입가심 껌을 사다 주면 놀래 자빠질 정보를 주겠다고. 그 놀래 자빠질 정보에 대해서는 별로 기대되는 게 없었지만 괜히 미운털 박히기 싫어서 두말 없이 사다 주었다. 롤러를 타면 뭐든 후딱이니까. 그런데 실은 미나 언니 자신이 정보를 주고 싶어서 입이 간질간질했던 모양이다. 나가지도 못 하게 가로막고 서서 `정보'를 술술 풀어놓기 시작했다.

    "너네 가게에 자주 오는 그 아저씨 있지? 그 아저씨가 어떤 사람인지 아니? 그 아저씨 되게 유명한 소설가라는 거 아니니. 이제 어쩌면 너네 집 도너츠는 불티나게 팔릴 지도 몰라. 팬들이 몰려오면 말야."

    나는 어지러웠다. 미나 언니가 누구 얘길 하는 건지는 알 것 같았다. 지난 봄부터 굉장히 자주 들르는 아저씨가 있기는 했다. 그 아저씨야말로 U.F.O. 같은 사람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들 거리에 처음 등장했고 그 이후로는 언제 어느 때고 난데없이 나타났다가 소리 없이 사라지는 사람이었다. 특별히 할 일도 없어 보였다. 봄날 오후의 햇빛을 실컷 쬐어보자는 정도의 목적으로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신축공사를 하는 젊은 인부 아저씨들과 잡담을 나누거나 가판대에 걸려있는 신문 머릿기사를 대충 훑어보거나, 하여튼 자기 맘대로 어슬렁거리다가 내키면 아무 때나 우리 가게로 쓱하니 들어와선 커피를 마시며 잡지를 오래오래 뒤적이는 사람이다. 하지만 소설가라니? 팬들이라니? 머릿속엔 젊은 여자들이 울부짖으며 우리 가게로 몰려 와 제발 문을 열어 달라고 외치는 그림이 떠올랐다.

    "너 놀랬구나? 순진하긴. 설마 그럴 리야 있겠니? 그 아저씬 한물 간 아저씨야. 예전엔 꽤나 유명했었다는데 이젠 아냐. 앞으론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발표를 했어."

    나는 한 시름 놓아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 채로 미나 언니의 나불거리는 입술만 쳐다보고 있었다.

    "내내 뉴욕에서 살다가 돌아왔다는데 인터뷰 사절이래. 너 인터뷰가 뭐 하는 건지 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터뷰라면야 매일같이 보고 있는 것 아닌가? 온갖 종류의 `극구 부인'들 말이다. 하지만 그깟 인터뷰를 쓱싹 해치우지 않고 사절하는 까닭은 뭘까? 그에 대해서 미나 언니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이렇게 말해 주었다.

    "인터뷰를 하면 자기 정체가 드러날까봐."

    "그 아저씨 정체가 뭔데?"

    "낸들 아니?"

    ".............."

    "자기 자신이나 알까."

    아저씨의 진짜 정체가 뭔지는 모르지만 나는 늘 그 아저씨를 얼빠진 아저씨라고 생각했었다. 나쁜 뜻은 아니다. 말 그대로의 뜻이다. 맨날 딴 생각 중인 듯했고 번지점프를 백만 번쯤 하고 난 듯이 피로해보였다 (그건 백만 개의 이삿짐을 나르고 나서 피곤한 사람과는 전혀 달라 보인다). 뭔가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걸 보고 나서, 또는 엄청나게 즐거운 일을 겪고 나서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 같다는 뜻이다. 눈앞에 벌어지는 모든 일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겠지. 아무리 나쁜 걸 봐도 그보다 더 나쁜 걸 이미 봤기 때문에 나쁘다는 생각이 안 들고 아무리 좋은 걸 봐도 그 보다 훨씬 더 좋은 걸 봤기 때문에 좋다는 생각이 안 든다면 모든 것이 얼마나 시시할까? 너무나 시시해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싸움을 건다든지 대낮부터 술을 먹고 쓰러져 잔다는 뜻은 아니다. 절대로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아저씨는 다만 그 무엇도 깊이 생각하려 들지를 않는 것 같았다. 장난을 치듯, 농담을 하고 있는 듯 굴었다.

    무엇보다도 아저씨는 너무나 쉽게, 아무에게나 말을 거는 거다.

    우리 엄마나 우리 가게 아르바이트생 언니, 또는 놀러 온 이모나 이모부, 그 밖의 온갖 종류의 사람들에게 툭하고 말을 던지는 거다. 그게 뭐 잘못 됐냐구? 내 생각엔 단단히 얼이 빠져 있지 않고는 그럴 수가 없다. 어떤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은 재미로 벽에다 공을 튀겨 보는 것과는 다른 것이니까 말이다. 아이들조차도 모르는 애한테 말을 걸 땐 두 번, 세 번 생각해 본다. 그래도 꼭 얘기를 붙여 보고 싶을 때에만 말을 건다. 한 번 말을 나누고 나면 아는 사이가 되고 결국엔 친구가 되든지 원수지간이 되든지, 어느 한 쪽이 되는 거기 때문에 처음에 말 걸기가 겁난다. 그런데 아저씨는 모든 게 너무 쉬웠다. 옷을 벗어서 침대 위에 떨어뜨려 버리는 것만큼 쉬워 보였다. 쉽게 이름을 묻고는 또 쉽게 그 이름을 잊어 버렸다. 대신 자기 맘대로 지어다 붙인 별명으로 불렀다. 그 아저씨 때문에 온 동네가 대혼란에 빠질 지경이었다.

    아저씨는 미나 언니를 `비누 방울'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야 뻔하다. 미나 언니는 잠시도 쉬질 않고 풍선껌을 불어대니까. 하지만 그런 이름을 붙일 생각을 해낸 건 아저씨가 처음이다. 약국 아저씨를 두고는 말론 브란도 선생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 잘 모르겠지만 말론 브란도란 사람을 쏙 닮았다고 한다. 우리가게 아르바이트 생 수경 언니를 눈토끼아가씨라 부르곤 하는데 그 이유는 지난 봄 내내 목감기 때문에 눈뭉치처럼 하얀 앙고라 머플러를 두르고 다녔기 때문이다. 또한 아저씨가 우리 엄마를, 안 듣는 데에선, 무용 선생님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우리 가게 위층이 무용학원인데 원장 선생님이 머리가 일찌감치 하얗게 센 뚱보 아줌마이다. 백발의 뚱보일 뿐만 아니라 무슨 비염 같은 게 있어서 숨소리가 어찌나 거칠든지 진공 청소기를 끌고 다니는 것만 같다. 그러니 아저씨는, 차라리 우리 엄마가 무용 선생님처럼 보인다는 거다.

    그게 뭐 어떠냐구? 재미있기만 하다구?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게 그렇지가 않다는 걸 알았다. 이상한 일이지만 누군가가 너무 가볍게 말을 걸면 도리어 기분이 나빠지더라는 얘기이다. 게다가 자기 멋대로 별명을 척척 만들어 붙여버리는 걸 보면 더욱 기분이 나빴다. 아무리 좋은 뜻의 별명이라도 그랬다.

    아무리 잘 어울리는 별명이라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면에서는 기막히게 잘 들어맞는 별명이 더욱 나빴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누군가가 나라는 사람을 한번 척 보고 나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딱 들어맞는 별명을 지어붙이면 더럭 겁이 나는 거다. 잘 아는 사이도 되기 전에 어떻게 그런 걸 눈치챌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리고 다음 순간, 조금 화가 난다. 왜냐하면......... 이건 정말 복잡한 기분인데, 그 사람이 나를 정말로 잘 알고 싶어하는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상대방에 대해 정말 잘 알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식으로 척척 별명을 지어 붙이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수경언니와 `눈토끼'가 그렇다. 아르바이트생 수경언니는 말도 못 하게 얌전한 사람이다. 주문을 받을 땐 그럭저럭 괜찮은데 손님이 한마디만 예상 밖의 질문을 해도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사람이다. 그런 언니에게 아저씨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름을 물었었다. `학생 이름이 뭐지?' 라고. `저는....... 김수경이라고 합니다' 라고 말하며 아저씨에게 거스름돈을 건네주던 언니의 손은 부들부들 떨렸을 거다. 하지만 아저씨는 곧 그 이름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리곤 어느새 눈토끼 아가씨라느니 산토끼 아가씨라느니 그렇게 불렀다. 아저씨는 앙고라 머플러 때문에 눈토끼라 부른다지만 수경언니는 진짜 눈토끼처럼 하얗고 약한 사람이다. 잘 놀래고 잘 울고 겁도 무지 많다. 그런 수경 언니에게 대번에 눈토끼라는 별명을 지어붙인 아저씨가 정말 신기했다. 아저씨는 척 보고 그런 걸 어떻게 알아차렸을까? 무슨 특별한 초능력을 쓰는 걸까? 어쨌든 별로 좋게 쓰이는 초능력은 아닌 것 같았다. 수경언니 자신은 눈토끼라고 불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 안해도 이유야 뻔하다. 눈토끼라고 불릴 때마다 점점 더 눈토끼같이 굴게되고 점점 더 눈토끼같이 되어갈 수밖에 없으니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누가 나를 말라깽이라고 부른다면 그건 내가 말라빠졌다는 것만을 기억해두겠다는 소리로 들리고 앞으로도 너는 언제나 말라빠져 있을 거라는 소리로 들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나는 기가 막힌 별명을 척척 지어내는 아저씨 곁에 있는 사람이 힘들어진다는 거다.

    물론 아저씨가 누굴 괴롭히려고 그러는 건 아니다. 자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도 까맣게 모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아저씨를 단단히 얼빠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그 아저씨는 꼭 좀비 같았다. 이미 한 번 죽었는데 무덤 속에서 걸어나온 거다. 지금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 지도 모르고 뭘 밟고 지나가는 지도 모르는 채로 터벅터벅 걷는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들꽃이나 풀벌레 같은 건 다 밟아 죽이고 누군지도 모르는 주인님의 명령에 따라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일을 하고 있는 거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그 아저씨를 지독하게 싫어했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는 않다. 사실은 그 반대이다. 우리들 거리의 사람들 중에서 나 만큼 그 아저씨에게 마음을 썼던 사람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 아저씨를 보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자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 놀래 자빠질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그 아저씬 남들이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들에 부주의한 대신, 남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을 마음 깊이 새겨두는 사람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거의 눈에도 띄지 않는 `롤러타는 아이' 같은 것을 말이다.

    "꼬마야, 네 이름이 뭐랬더라? 누군가가 얘기해 줬었는데......... 롤러 타는 아가씨 이름을 말야."

    아저씨가 나를 향해 그렇게 말을 걸었을 때 나는 잠시 고민했었다. 내 이름은 이은아라고 말해줘본들 아무 소용 없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만났을 때 나를 주근깨라든지 말라깽이라든지, 그런 별명으로 부른다면 정말 싫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이렇게 대답했다.

    "전 비행접시예요."

    "뭐라구?"

    "비행접시라구요."

    아저씨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 역시 아저씨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저씨와 난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딴 테이블에 각자 앉아서 마주 보고 있었다. 아저씨의 테이블은 안쪽의 그늘에 있었고 내 테이블은 창가의 햇살 속에 있었다. 내 테이블엔 온통 빛이었다. 빛과 먼지의 알갱이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내 스웨터의 털실들도 빛 속에서 반짝이며 가느다랗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저씨는 그늘 속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저씨에게서 흘러나온 연기가 그늘로부터 내가 있는 햇빛 쪽으로 서서히 움직여 왔다. 그 연기자락을 보고 있자니 그것이 마치 아저씨의 머릿속에서 흘러나온 생각과도 같이 여겨졌다. 푸르스름한 생각이 공기 중에 천천히 떠다니고 있었다. 햇빛 때문에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 정도였지만 나는 아저씨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날아다니는 거로구나, 그렇지?"

    컴컴한 속에서 아저씨의 입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조금 웃고 있었다.

    "비슷해요."

    "흠......"

    아저씨는 신음소리 비슷한 소리를 내며 연기를 뿜어 올렸다.

    "날아다니는 소녀라........."

    "날아다닌다고는 안 그랬어요. 난 그냥..........."

    "날아다니는 아이를 만나게 되면 해 줄 말을 예전에 하나 생각해 뒀었는데."

    "날아다닌다고는 안 그랬.........."

    "넌 어른이 되지 마라."

    아저씨는 또 한 덩이의 연기를 공중으로 내뿜으며 그렇게 말했다.

    "어른이 되지 말 것. 이게 내가 너에게 해 주고 싶은 얘기다."

    "왜요?"

    "날아다니는 아이는 괜찮은데 날아다니는 어른은 힘이 들어."

    "어째서요?"

    "생각해봐.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어."

    아저씨는 한 쪽 눈을 찡긋 감아 보이며 웃었다. 얼굴의 반쪽이 찌그러지는 이상한 웃음이었다. 나는 그 웃음에 정신이 팔려서 이유 같은 건 생각해보지도 않고 대답해 버렸다.

    "모르겠는데요."

    "어른은 몸이 무겁잖아."

    아저씨는 웃으려다 얼굴이 찌그러지는 그 이상한 웃음을 다시 지어 보였다.

    "그렇겠네요. 그걸 생각 못했네. 하지만 싫든 좋든 저절로 어른이 되는거잖...........?"

    "어른이 되어야겠거든 날개를 벗어던지든지."

    "하지만 난 날개 같은 건 없..........."

    "날개는 몸집에 맞게 자라 주는 게 아니거든."

    아저씨는 남의 말 같은 건 잘 들어보지도 않고 자기 할 말을 했다. 남들처럼 머릿속이 딱딱하게 굳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 다만............ 나는 그런 걸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어른들처럼 뭐든 멋있게, 간단히, 그리고 상대방이 꼼짝 못하도록 말해 버릴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말솜씨는 없다. 기껏해야 어른들이 하는 말을 잘 기억했다가 애들에게 써먹는 정도이다. 조금 고치거나 말을 바꾸어서 써먹는 거다. 그런 식으로 이 아저씨를 설명하자면, 지난 여름 작문교실을 통해 배운 문장을 써먹을 수밖에 없다.

    `아저씨는 이 세상에 적응하는 데에 약간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쨌든, 그 날 이후 아저씨는 잊지 않고 나를 비행접시라고 불러 주었다. 뿐만 아니라 나를 몹시 예뻐했다고 생각한다. 번쩍 안아올려 빙빙 돌려 주었다든지, 볼을 깨물어주었다든지 하는, 그런 얘기가 아니다. 아저씨는 그저 가게에서 커피를 마시며 내가 롤러를 타고 쌩쌩 달리는 모습을 지겨워하지도 않고 구경하곤 했다. 실은 달리 할 일도 없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속으로는 딴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르고.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건 정말 이상한 느낌을 갖게 했다. 기분이 좋은 것만도 아니고 나쁜 것만도 아니다.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팔다리가 전보다 묵직해지고 또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달리는 걸 지켜보면서 아저씨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말로 무슨 딴 생각에 골몰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상관없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든지 말라깽이 주근깨 비행접시 따위를 지치지도 않고 들여다보는 사람은 아저씨뿐이었다.

    하지만 그 아저씨가 소설을 쓰는 사람인 줄은 몰랐었다.

    미나 언니에게서 `정보'를 들은 그 날로 나는 서점에 가서 아저씨의 책을 찾아보았다. 아주 긴 것도 있었지만 단편집을 하나 샀다. 짤막한 얘기들 일곱 편이 실려 있었다. 나는 가게의 계산대 뒤에 의자를 놓고 앉아 단숨에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의 고민은 그 중 일곱 번째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사라진 고양이를 찾아 다니는 아홉 살 소년 `제제'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년 제제는 어느날 갑자기 목소리를 잃어버렸다. 아무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 소파 뒤에 기어 들어가 한 숨 자고 나왔는데 그 사이 누군가가 제제의 목소리를 훔쳐가고 말았다. 소년은 범인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그건 바로 죽은 누나의 고양이 치치였다. 누가 이야기해주지 않아도 그걸 분명히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고양이에게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을 목소리 따윌 왜 가져갔느냐구? 제제의 누나가 죽기 전 오래 앓았었는데 제제는 누워 있는 누나를 지독하게 괴롭혔거든. 무슨 짓을 해도 누나는 웃는 얼굴로 가만히 누워만 있었기 때문에 괴롭혀도 되는 줄 알았던 거다. 아니, 자기가 누나를 괴롭히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누나는 웃고만 있으니까 누나 역시 재미있어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누나가 죽고 나선 얘기가 달라졌다. 죽은 누나는 이제 아프지도 않고 훨훨 날아다닐 지경이니까. 살아있을 때 당한 일들이 새삼 분했던 누나가 충직한 고양이를 시켜서 목소리를 가져갔다는 것이 제제의 생각이다. 제제는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사라진 고양이 치치를 찾아다닌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벌써 포기하고 있다. 치치는 아마도 하늘나라 누나의 발밑에 엎드려 칭찬을 받고 있을 테니까.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 비슷한 소리가 나면 제제는 얼른 다가가 살펴보지만 속으로는 생각한다. 치치일 리가 없어. 치치는 누나가 데리고 있어. 누나는 절대로 치치를 돌려보내주지 않을거야. 내가 누나라도 마찬가지일거야. 나는 이제 다신 말을 할 수가 없겠지......... 물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양이 찾는 일을 그만 둘 수가 없다. 혹시 모르니까 수상쩍은 곳은 다 뒤져보는 거다. 제제는 늘 그 모양이다. 완전히 포기하지도 못 하고 고양이를 찾아낼 가능성도 별로 없다.

    다른 사람들은 제제가 천벌을 받았다고 박수를 칠치도 모르지만 나는 그 아이가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 나쁜 제제. 아무도 제제에게 좋은 말로 타이르지를 않았었다. 아픈 누나를 잘 보살펴야 한다고 누군가가 말해 줬더라면 제제는 착한 동생이 되었을텐데.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도 제제는 고양이를 찾지 못했다. 소파 밑이며 뒷골목이며 더러운 쓰레기통에까지 제제는 늘 주의를 기울이지만 끝까지 찾지 못했다. 그러므로 목소리 역시 되찾지 못했다. 아니, 영영 찾지 못했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왜냐면 제제는 지금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언젠가는 찾게 될까? 어쩌면 죽은 누나가 마음을 고쳐먹고 목소리를 돌려줄는지도 모른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더 바랄 게 없겠지.

    그렇지 않다면 제제는 영원히 말을 못 하게 될 뿐만 아니라 더러운 쓰레기통 따위에 마음이 쓰여서 도저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지 않을까?

    나는 그게 걱정되고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아침에 양치질을 하려고 칫솔을 집어들다가도 문득 제제 생각이 났다. 초콜릿이 녹아서 손에 묻었다고 신경질을 내다가도 문득 소년 제제에게 닥친 무서운 벌이 생각났다. 왜 아저씨는 모든 걸 확실하게 말해 주지 않았을까? 이렇게 궁금증을 일으켜서 나를 어떻게 하려는 걸까? 어쩌면 아저씨는 내가 안달이 나도록 만들어서 내게 무슨 해를 끼치려는 걸까? 아냐, 그럴 리는 없어. 아냐. 그럴지도 몰라.

    하는 수 없이 나는 용감하게 부딪쳐 보기로 했다. 아저씨를 만나 직접 물어보는 거다. 아저씨 얼굴을 보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굴면서, 나하고 별로 상관없는 일이지만 생각난 김에 묻는다는 듯이 슬쩍 말을 꺼내는 거다.

    제제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제제가 목소리를 찾게되는 2부의 얘기를 마저 썼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는 거다.

    하지만 내 계획대로 일이 술술 풀리지는 않았다.

    정말로 이상한 일, 말도 안 되는 일은 이야기 책 속에서보다 실제 생활 속에서 더 자주 일어난다는 생각이 든다. 가게에서 기다렸다가 아저씨를 붙잡고 제제에 대해서 물어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그 날부터 아저씨는 가게에 나타나지 않았던 거다. 길어야 사흘이면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몇 주가 지나도록 아저씨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자주 들락거리던 아저씨가 하필 내가 꼭 만나고 싶을 때에 발을 딱 끊고 말았다. (이런 경우를 두고 어른들이 잘 쓰는 속담이 있는데 지금 당장은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나는 별별 상상을 다 해 보았다. 혹시 아저씨가 우리 엄마랑 다퉜나? 예를 들어 아저씨가 도넛을 먹을 때 애들처럼 돌아다니며 흘린다든지 하는 이유로. 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 엄마는 어른한테는 화를 내며 뭘 가르치려 들지 않고 너그럽게 봐 주니까. 그럼 뭘까? 아저씨가 다시 뉴욕이라는 데로 훌쩍 떠나 버렸나? 그렇다면 큰일인데.............

    나는 아저씨가 보고 싶다. 제발이지 뉴욕 같은 먼데로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길 빌고 있다. 언젠가는 다시 우리들 거리에 나타나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제제 때문만은 아니다. 아저씨는 누군가가 내게 해 줬어야 할 말들을 해 주는 사람이었다. 한번은 뭐랬냐면, `선생님들은 대부분 좋은 분들이야. 조금 어긋난 사람, 조금 불행한 사람, 조금 답답한 사람들도 어쩌다 한 사람씩 있지만 대부분은 좋은 분들이야. 그걸 잊으면 안돼.' 라고 말했다. 그 말은 참 맞는 말이라고 생각되었다. 누군가 내게 그렇게 말해 주길 바랬었다. 우리 담임 선생님은 내가 2학기를 통째로 결석해도 눈치채지 못할 바보라고 말했을 때, 음악 선생님은 애들을 바퀴벌레만큼이나 싫어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누군가가 그렇게 말해 주길 바랬었다. 네 말이 맞는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좋은 분들이란 걸 잊지 말라고. 그런데 엄마는 늘상 `그 따위 못된 소릴 다시 하면 가만 안 둔다' 고만 했다. 엄마는 늘 그랬다. 내가 하는 얘기의 내용을 듣는 게 아니라 혹시 못된 말이나 쓰지 않을까 하는 점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아저씬 안 그랬다. 늘 얼빠진 듯한 사람이었지만 이 말라깽이 비행접시의 이야기를 믿어주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해 줬으면 하고 속으로 바라고 있던 말을 곧잘 해 주었다.

    그런 아저씨를 다시 만난다는 것. 나는 거의 포기했다.

    아저씨는 우리들 거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남자 어른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런 얘길 써도 되는 걸까? 다시 또 교단 앞에 불려나가 글을 읽어야 하는 일이 벌어지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된다. 이 교실 안의 그 누구라도 나를 이상한 애로 생각할 것이다. 무조건 내 편인 위니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하는 수 없다. 아저씨 얘긴 빼고 제제 얘기만 쓰자.

    동화책 속의 소년 제제 같이 멋진 애가 우리 작문교실에도 하나쯤 있었으면 딱 좋겠다고 쓰는 거다.

    4.

    `지난 주말 동안의 즐거웠던 일'

    칠판에는 그렇게 씌어있다. 오늘의 작문 주제가 그렇다는 얘기다. 엄마 아빠랑 놀이공원엘 다녀왔거나 친구들끼리 콘서트에 갔다 온 아이들은 신났겠다. 하지만 나의 주말은 전혀 즐겁지가 못했다. 즐겁기는커녕 후두염만큼이나 괴로웠다. 위니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쩌면 나보다 더 아프고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학교에 나와 앉아 있지만 위니는 나오지도 못 했으니까.

    지난 주 금요일, 그러니까 세 번째 작문교실을 마친 뒤의 일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위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 가게까지는 죽 같이 걸어가지만 거기서부터 우리는 헤어져야 한다. 나는 우리 집을 향해 10분쯤 더 걸어가야 하고 위니는 아파트단지로 꺾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헤어질 때쯤 되면 언제나 위니는 우리 가게에 가서 놀면 안 되느냐고 묻곤 했다. 가게에서 우리가 놀 수 있는 장소라고는 계산대 뒤의 작은 의자 뿐이다. 의자가 하나뿐이어서 번갈아 앉았다 일어섰다 해야한다. 그 고생을 하면서도 위니는 나와 함께 있고 싶어했다. 대개의 경우 나는 안 된다고 한다. 가게에는 손님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위니와 나 같은 아이들이 매일같이 득시글대서는 안 될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날은 어쩐 일로 위니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부탁하는 위니의 표정이 그 전 날보다도 그 전의 전 날보다도 더 심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가 유난히 심각한 얼굴로 부탁해오면 거절을 잘 못하는 게 문제이다.

    "넌 누구 얘길 썼니?"

    엄마가 전화를 받는 틈을 타서 위니가 내게 물었다. 딴에는 기회를 노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딴전을 피워봤다.

    "무슨소리야?"

    "작문시간에...... 오늘....... 누구 얘길 썼냐구?"

    "남자애 얘기 말이니?"

    "응."

    위니한테 제제 얘길 한다면 그건 바보같은 짓이 되겠지. 아저씨 얘길 한다면 그건 아예 위니를 괴롭히는 짓이 될테고, 하며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무슨 얘길 꾸며대야 할까? 하지만 위니는 뜻밖의 소릴 했다.

    "제제가 누구야?"

    가엾은 제제, 위니에게 들키고 말았구나.

    "너, 훔쳐 봤구나?"

    "아냐. 그냥 저절로 보였어. 진짜야."

    위니는 황급히 변명을 했다. 하지만 궁금증을 억누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잠시 망설인 끝에 다시 물었다.

    "혹시 나도 아는 애니, 제제라는 애?"

    "아냐. 그럴 리는 없어."

    "그럼..........?"

    "너부터 털어 놔. 넌 누구 얘길 썼니?"

    과연 위니는 어떤 남자애 얘길 썼을지 나는 아까부터 궁금했다.

    "난........ 네 얘길 썼어."

    "뭐라구?"
    "남자애 얘긴 쓰기 싫어서 지난 시간에 다 못 쓴 네 얘길 마저 썼어."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나에 대해서 할 말이 뭐가 그렇게 많단 말이야? 정말 위니, 너답구나. 하지만 한편으론 위니가 안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제목의 작문이든, 할 얘기가 하나도 없어서 엉뚱한 얘기를 해야 하는 기분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고생께나 했을 위니에게 특별히 제제 얘길 들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위니는 그 누구보다도 얘기 듣기를 좋아하는 아이니까.

    "제제는 말야. 고양이를 찾아 다니는 어린 소년이야."

    "고양이?"

    "그래. 죽은 누나의 고양이지. 그 고양이가 제제의 목소릴 가져갔거든."

    "무슨 소리야?"

    "제제의 누나가 복수를 한 거야."

    위니는 둥그런 눈을 더욱 둥그렇게 뜨고 천장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는데 그건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을 때 위니가 짓는 표정이다.

    "이 바보, 책 속의 얘기야. 명탐정 위니처럼."

    "책?"

    "그래."

    "............?"

    "하지만 우리가 읽는 그런 책은 아니야. 어른들이 읽는 소설책이지. 그 책엔 뭐라고 씌어 있는지 아니? 가책과 우수의 섬세한 교직이라고 씌어 있어. 너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니?"

    "아니. 난 모르겠어. 그런데.......... 왜 복수하는 거야?"

    "누나가 침대에 누워서 앓고 있을 때 제제가 말도 못하게 괴롭혔거든."

    "............"

    "위니로 살 수 없다면 어떻겠니? 내가 비행접시로 살 수 없다면 어떻게 되겠어?"

    "..........."

    "고양이를 찾아야 돼."

    "어떻게?"

    "아저씰 찾아가서 제제가 고양이를 찾는 걸로 써 달라고 부탁을 해 봐야지."

    "어떤 아저씨?"

    "소설을 쓴 아저씨지 누구겠니?"

    "그 아저씨를 네가 어떻게 만난다는 거야?"

    "글세, 그게 문제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가게에 자주 왔었거든......."

    "그런데?"

    "그런데 지금은 멀리 가 버린 것 같아."

    "멀리, 어디?"

    나는 선반 위에 꽂아 두었던 아저씨의 책을 꺼내어 맨 뒷장을 펼쳤다. 서른 살 때쯤의 아저씨 사진 밑으로 `현재 뉴욕 거주' 라고 씌어 있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어주며 말했다.

    "내 생각엔 뉴욕이야."

    위니는 책을 받아들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내 느낌인데, 아저씬 뉴욕으로 돌아갔어. 거기 사진 뒷 배경에 보이는 게 뉴욕이란 데야."

    한참동안 말없이 사진을 들여다보던 위니가 고개를 들고 나를 향해 물었다.

    "그래, 넌 이 아저씰 만나러 뉴욕까지 갈 거야?"

    "위니야. 제발 어린애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뉴욕까지 갈 수는 없어."

    "어째서?"

    "아무도 뉴욕까지 날 데려가 주지 않아."

    위니는 다시 한참동안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소설가치고는 상당히 멍청하게 생겼다고 생각하는거지, 너?"

    내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위니는 한 번 더 내게 물었다.

    "뉴욕만 아니라면, 꼭 만나고 싶은 거지?"

    "그래, 만날 수 있다면 좋겠어. 제제 때문에도 그렇고 아저씨한테 혹시 무슨 나쁜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걱정도 되고........"

    나는 갑자기 울적한 기분이 되었다. 위니에게 털어놓고 보니 아저씨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아저씨를 다시 볼 수 없고 제제도 구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머릿속에 확실해졌던 거다. 뭐든 입밖에 꺼내놓고 보면 무시무시할 때가 있다. 나는 울적한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위니의 손에서 녹고 있는 추파춥스를 당장 빼앗아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고는 콜라 맛으로 두 개를 꺼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껍질을 벗겨서 하나는 위니의 입에 물리고 나머지 하나는 내 입 속에 넣었다. 나는 우울해지려고 하면 얼른 막대사탕 껍질을 재빨리 벗겨서 입에 무는 습관이 있다. 그러면 방금 전까지의 우울했던 생각은 온데 간데 없을 때가 많다. 효과가 별로일 때도 있지만 그래도 그 이상 기분이 나빠지는 건 막을 수 있다.

    위니가 사탕을 빨며 책을 들여다보는 동안 나는 롤러를 타고 한 바탕 달렸다. 기분이 말끔해질 때까지 실컷 달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위니는 집에 가고 없었다. 급한 일이 생겼다며 부리나케 달려나가더라고 엄마가 말해 주었다.

    "급한 일? 위니한테 그런 게 어딨어?"

    나는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

    "나 그 아저씨 어디 있는지 알아."

    그날 밤 위니가 내게 전화해서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설마 내가 잘못 들었겠지.

    "그 소설가 아저씨 말이야."

    위니가 딱 잘라 얘기를 해 주는데도 나는 계속 어리둥절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뉴욕이 아니라 그 아저씨 우리 아파트 단지에 살아."

    그래? 하긴, 그쯤이야 짐작했었다. 근처 어딘가에 살 거라고. 하지만 아파트가 한 동 두 동도 아니고 수십 동이다. 아니, 그것보다, 대체 어떻게 알아냈지?

    "아까 사진 볼 때, 대번에 알아봤어. 우리 엄마도 그 책 갖고 있거든. 그 아저씬 우리 엄마랑 같은 대학 다녔어. 친하지는 않지만.......... 엄만 그 아저씨 잘난 체 하는 꼴불견이래. 그 아저씨가 우리 아파트에 이사올 때부터........ 그게 그러니까 지난 2월이었다는데, 그 때부터 엄마는 성가셔 죽겠대. 사람들이 그 아저씨 얘길 자꾸 묻거든. 우리 엄마는 아는 게 없는데 사람들은 자꾸 묻는다는 거지. 어쨌든 내가 그 아저씨 아파트 호수를 알아냈어."

    위니는 정말 명탐정 위니라도 된 듯 내가 모르는 많은 걸 알고 있었다.

    "그래. 고맙다. 명탐정 위니."

    나로서는 그 말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나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힘을 써주었으니까. 하지만 그 아저씨가 아직 거기에 사는지 어떻게 알지?

    "그건......, 사실은 내가 지금 가보고 왔어."

    "뭐라구?"

    나는 기절하도록 놀랐다. 아무리 고집 세고 철없는 위니이지만 그건 정말 놀랄 일이었다. 진짜 탐정노릇을 하기로 작정을 했구나, 너.

    "벨을 눌렀더니 그 아저씨가 나오더라. 외출 안 하나봐. 수염이 시꺼매."

    "맙소사. 위니야. 넌 도대체..........."

    "어려운 일도 아니었어. 그냥 가서 벨을 누르고......... 아저씨가 나오길래 위니네 집 맞느냐고 물어봤어."

    ".........."

    "미안하지만 위니네 집은 아닌데, 그러길래 죄송합니다, 그러고 내려왔어."

    위니는 뭔가에 홀려도 단단히 홀린 모양이었다. 내가 아는 위니의 모습이 아니었다.

    "너 꼭 그 아저씰 만나야 되지?"

    마지막으로 묻겠다는 말투였다.

    "그래. 그러고 싶어."

    "제제를 구해달라고 하게?"

    "그것도 그렇고.... 어쨌든 이제 어디 사는 지 알았으니까. 한 번.........."

    "하지만 나는 안 가르쳐 줄 거야."

    "뭐라구?"

    나는 내 귀를 다시 한 번 의심했다. 도대체 위니는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걸까? 힘들여 알아낸 걸 안 가르쳐 주겠다는 건 또 뭘까?

    "아저씨 사는 델 안 가르쳐 주겠다구."

    "아니, 어째서?"

    "삐이이ㅡㅡ"

    위니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위니는 무슨 마음을 먹고 있는 걸까? 고집불통 위니가 맘 먹은 일이라면 그건 반드시 이루어지는 일이다. 나는 마음이 놓이지가 않았다. 겁이 날 지경이었다. 아저씨 때문도 아니고 제제 때문도 아니었다. 그건 차라리 위니 때문이었다. 위니가 내게 무슨 해로운 짓을 할까봐?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런 이유로 위니를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그런 문제라면 위니를 쓱싹 속여 넘기든가 적당히 달래 놓으면 된다.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위니를 만난 이후로 그토록 위니가 낯설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는 거다. 지겹도록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은 겉모습만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 내겐 무서웠다. 나는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그게 그러니까 금요일 밤의 일이었다.

    "내 맘이야."

    그게 위니의 대답이었다.

    토요일 오전, 나는 위니네 아파트 마당으로 위니를 불러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속 시원하게 설명을 듣는 데에는 계속 실패하고 있었다.

    "그래. 네 맘이야. 그렇지만 설명을 해 줘야지."

    위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 단단히 화가 난 듯해 보였다. 또는 선생님에게 꾸중듣고 있을 때의 위니 얼굴과도 비슷했다. 어느쪽이든 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돼. 그렇지만 이유는 말해 줘. 모르겠니? 넌 지금 말도 안 되는......."

    "뭐가 말이 안 돼? 내가 네 말을 안 듣는 거? 그래서 아저씨를 만날 수 없는 거?"

    "아니, 위니야. 나는 네가 골이 난 이유를 알고 싶은 것 뿐이야. 아저씨는 잊어버려."

    "정말?"

    "그래."

    "그럼 제제는?"

    "...............?"

    "제제는 어쩌고? 넌 제제를 구해야 되잖아?"

    나는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위니가 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라는 게 뭐야, 위니? 내가 너한테 구걸이라도 하길 바라니?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제제는 책 속의 아이일 뿐이야. 그걸 모르겠니?"

    "그럼 아저씨는? 넌 아저씨가 보고 싶다고 했잖아. 걱정된다고 그랬잖아."

    나는 잠자코 위니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까맣고 커다란 눈이 내 눈을 똑바로 마주보지 못하고 이리 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잠시 동안 나는 그러고 있었다. 여름 아침의 햇빛이 위니의 까만 단발머리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데 위니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위니야, 네가 원하는 게 뭐니? 내가 애걸복걸하는 거니? 그거니?

    나는 위니가 원하는 대로 말해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지만 위니는 폭발 직전의 아슬아슬한 위니였다. 그 아이를 보호해 주어야 했다. 위니가 원하는대로 말해주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제제보다도, 아저씨보다도, 내 친구 위니를 구하기 위해 나는 위니에게 빌었다. 명탐정 위니, 제발 부탁이다. 나를 아저씨에게로 데려가 줘. 위니와 펄, 둘이서 힘을 합쳐 제제를 구하는 거야. 명탐정 위니. 네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알아내지 못했을 거다. 네가 아니었다면 제제도 아저씨도 나까지도 모두 엉망이 됐을 거야. 명탐정 위니.............

    하지만 위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입도 벙긋 하지 않았다. 대신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대체 이게 뭐 하는 거니? 위니, 네가 원하는 게 뭐니? 네가 우는 건 싫어. 지금껏 한 번도 울지 않았었잖아? 혜리, 그 기집애가 네 가방을 마구 밟고 지나다닐 때에도 너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어. 준우 녀석이 던진 필통에 맞아 코피가 줄줄 날 때도 너는 울지 않았어. 네가 울지 않아서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알아? 그런데 이게 뭐야? 왜 이런 일을 꾸며서 눈물을 질질 짜는 거야? 난 네가 우는 게 싫어, 명탐정 위니. 넌 나를 괴롭히려고 이러는 거야. 왜인지는 모르지만 넌 나를 괴롭히고 싶은 거야. 이유는 그것 뿐이야.

    나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사라져버리겠다고 마음먹었다. 위니, 네 앞에서 사라지겠어. 그러면 너는 내가 보고 싶을 거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잘 지낼 거야. 그러면 네가 나를 찾아오게 되어 있어.

    "만약 내가 아저씨 집을 가르쳐 주면........."

    그 자릴 떠나려는데 위니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아저씨 얘긴 더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 얘긴 그만 해. 난......"

    "내가 가르쳐 주면 너도 내 부탁 들어줄 거야?"

    위니는 온 몸이 굳어버린 듯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훌쩍이지도 않은 채로 내게 물었다. 그래, 위니. 네가 바라는 게 그거였니? 나를 부려먹고 싶었던 거야? 나는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정말 뭐든 할 것 같았다. 위니의 울음을 그치게 할 수만 있다면.

    "그래. 뭐든 할게."

    "정말이야?"

    "그래. 위니 네가 시키는 건 뭐든 할게. 그러니까 울지 마."

    "그럼......... 그걸 나한테 줄 수 있어?"

    나는 위니의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뭘? 뭘 달라는 거야? 내가 가진 것 중에 위니 네가 갖지 못한 것도 있었니?

    "그 롤러 블레이드 나한테 줘."

    ".........?"

    나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너무 화가 나서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위니, 넌 정말 날 괴롭혀 보고 싶었던 거로구나. 그 따위 말에는 대답하지 않겠어. 나한텐........... 전부라는 걸 알잖아? 나는 너한테 잘 대해주려고 했어. 그런데 넌 날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 났구나. 다 그만 둬. 다시는 너와 말하지 않겠어.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가 내 목을 힘껏 조르는 듯이 느껴졌고 햇빛이 너무 따가와서 위니를 똑바로 쏘아보고 있기가 힘들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욕이라도 해 주고 싶었는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정말 누군가가 내 목소릴 가져간 듯이 느껴졌다. 나는 그대로 돌아섰다. 그 놈의 롤러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위니도 미웠고 롤러도 미웠다. 아저씨도 미웠고 제제도 미웠다. 다들 나를 괴롭히고 싶은 거로구나.

    처음부터 알아챘어야 했어.

    아주 좋은 것들에는 언제나 나쁜 속셈이 있는 거야.

    *

    "제제는 나쁜 애야."

    나는 이미 저만큼 달려가고 있는데 뒤에서 위니가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제제는 나빠."

    ".............."

    너도 나빠. 제제 만큼이나."

    나는 돌아섰다. 그 따위로 말하는 위니의 얼굴을 한 번 봐두고 싶어서였다.

    "생각해 봤는데, 넌 한 번도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나는 위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눈물이 범벅이 된 위니의 얼굴은 낯설어 보였다.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던 위니. 우는 얼굴은 정말 낯설었다.

    "나 같은 건 아무래도 좋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니? 넌 내 친구야. 난 너하고만 놀았어."

    "그렇지만 중요하지는 않았던 거지?"

    "..........."

    "넌 날 바보라고 불렀어."

    "너도 날 바보라고 부르잖아?"

    "거짓말. 내가 언제?"

    "............"

    "난 그렇게 부른 적 없어. 어째서인지 알아? 널 바보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위니가 나를 바보라고 부른 일이 정말 단 한 번도 없었을까? 그건 알 수가 없다. 그런 일에 일일이 신경을 쓰지도 않았던 거다. 하지만 위니의 말이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고는 바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그 애의 말이 아마 맞을 거다. 그런 점에 있어서 위니는 철저하니까. 그래, 위니의 말이 맞다. 나는 걸핏하면 위니를 바보라고 불렀고 위니는 그런 짓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었다. 그렇다고 해 두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늘상 위니를 바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곧잘 바보라고 불렀지만 그 때마다 진짜로 위니를 바보취급 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라는 애는 위니와는 다른 사람인 것뿐이다. 나는 바보라고 여기지도 않으면서 바보라고 부르고, 바보라고 여기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 하는 애다. 그렇게 말해놓고 보니 내가 아주 나쁜 사람, 위선자같이 느껴지지만 사실이 그렇다. 아, 나는 위선자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거야 어찌됐든 진심으로 위니를 바보라고 여기지는 않았었다. 위니가 그 점을 믿어줬음 좋겠는데.........

    "그래, 그럼 너는....... 바보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고 이러는 거야?"

    그렇게 따지는 내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자꾸만 기어드는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내가 위니를 이길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중요한 점은 나는 이미 위니를 이기고 싶지도 않았던 거다.

    "이런 식으로 날 골탕 먹여서, 바보 위니가 아니라 굉장히 똑똑한 명탐정 위니란 걸 보여주고 싶은 거냐구?"

    "아니, 난 네가 롤러 타는 게 싫은 것 뿐이야."

    "............?"

    "난 네가 롤러 타는 게 싫어."

    위니는 작은 주먹을 꼭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위니를 바보라고 부른 건 정말 잘못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창피할 정도로 큰 잘못이다. 하지만 롤러 블레이드는 이 일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위니가 울며 몸서리를 칠만큼 나의 롤러를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모르겠어.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

    "..........."

    "바보라고 부른 건 내 잘못이야. 하지만 롤러가 무슨 상관이야?"

    "네가 롤러 타고 달려가는 걸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지 알아? 나는 영영 너를 붙잡을 수 없을 것 같단 말야. 아무리 열심히 쫓아가도 너를 붙잡을 수가 없을 것 같단 말야. 내말은 들리지도 않겠지? 롤러 같은 웃긴 물건에 미쳐서."

    "너, 지금 롤러를 시샘하는 거니? 그게 말이 되니? 너는 친구고 롤러는 네 말처럼 물건이야. 그리고, 누구나 좋아하는 게 있잖아. 너도 마찬가지야. 너한테는 `위니'가 있잖아. 내가 위니를 내놓으라고 하면 어떻겠니?"

    "네가 내놓으라고 하면 내놓을거야. 위니와 너 둘 중 하나를 가지라면 널 가질거야."

    "..................?"

    "그래. 내가 위니를 내놓을게. 너는 롤러를 내놔."

    "왜 그런 멍청이 짓을 해야하니? 각자 좋아하는 걸 갖고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잘 지낼 수가 있잖아. 나는 롤러를 타고 너는 위니 노릇을 하고. 그러면서도 얼마든지 친하게 지낼 수 있잖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싫어하는 거라면 좋아하는 걸 내버릴 수도 있잖아."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도 잃지 않고, 내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으면서 모든 사람과 잘 지낼 생각만 했었다. 특별히 소중한 사람 때문에 좋아하는 것을 포기해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같은 것은 해 본 적도 없었다.

    "아저씨 사는 델 가르쳐줄게, 그 롤러 내가 갖고 있게 해줘. 갖고만 있을게. 그러니까 내 말은....."

    위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뭔가 말하고 싶어했지만 위니에겐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애는 그저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을 뿐이었다. 위니는 빨개진 눈으로 울고 있었고 나는 목이 아파서 그 자리에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즐거운 여름 방학의 해님은 우리들 머리 위에서 쨍쨍 빛나고 있는데 우린 울며 미워하고 있었다.

    이것이 나의 주말 이야기이다.

    그 이후로 아직까지 위니와 얘기해보지 못했다. 전화를 걸었더니 위니의 엄마가 받아서 위니가 몹시 아프다고 했다. 그게 사실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어쨌든 위니는 작문교실에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위니와 펄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예전 같으면 나의 단골수법을 썼을 것이다. 위니의 폭발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는 거다. 더 이상 위니를 건드리지 않고 그저 숨어서 기다리면 된다. 위니가 먼저 말을 걸어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 뒤에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위니를 데리고 다니는 거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런 식으로 해결할 수가 없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잠자코 기다리는 것,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계속 살아가는 것. 어쩐지 그건 야비한 짓인 것 같다. 야비한 데다가 뻔뻔한 일인 것 같다. 그런 짓을 하느니 차라리 위니에게서 절교를 당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다. 나는 나의 롤러 블레이드를 포기할 수가 없다고 위니에게 대답하는 거다. 그러고 나면 우린 예전처럼 잘 지낼 수 없겠지. 위니와 나는 서로 미워하는 길밖엔 없다. 위니는 나 아닌 다른 펄을 찾아야 할 테고 나는 보란 듯이 롤러를 타고 달릴 거다. 하지만 그게 무슨 재미가 있을까? 그 때부터는 롤러 타는 일도 내겐 즐겁지 않을 것 같다. 이 놈의 롤러를 미워하게 될 것 같다. 내가 롤러를 타는 게 아니라 롤러가 나를 잡아끌고 다니는 꼴이 되지 않을까? 죽을 때까지도 롤러 타는 아이로 남아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럼 롤러를 위니에게 줘 버리면 안 될까? 위니를 지키기 위해 롤러를 버리는 거다. 아무리 소중하다 해도 롤러는 롤러에 불과하다. 위니는 그래도 내 친구이고 말이다. 하지만 롤러 없이 살아갈 생각을 하니까 눈앞이 캄캄하다. 나는 비행접시이다. 롤러를 버리면 그때부터는 무엇으로 불려야 할까? 나를 비행접시라고 부르던 사람들과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 사람들과 멀어지게 되는 건 아닐까? 롤러를 신지 않았다고 나를 멀리할 리는 없지만 어쩐지 내 쪽에서 그 사람들을 피하게 될 것 같다. 이제 롤러도 없는데, 한때는 내가 비행접시였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게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게다가, 롤러를 위니에게 줘 버리고 나서도 내가 위니를 계속 좋아할 수 있을까? 그 애가 미워질 것 같다. 분명히 그럴 거다. 둘이서 손을 잡고 다니고 위니니, 펄이니 부르며 웃고 떠들겠지만 마음속은 꽁꽁 얼어붙을 것 같다. 그건 정말 끔찍하다. 위니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던 것이 그 아이를 죽도록 미워하게 된다면 그건 정말 바보짓이다.

    차라리 이놈의 롤러 블레이드를 알지도 못했더라면, 위니라는 애를 만나지도 않았더라면 얼마나 마음 편했을까? 명우녀석만 아니었대도 롤러 같은 건 여태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다. 후두염만 아니었대도 나는 위니의 펄이 되어 있지는 않았을 거다. 정말 살아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 투성이이다. 앞으로는 아무 짓도 못할 것 같다. 추파춥스 하나를 고를 때에도 겁이 나서 벌벌 떨게 될 것 같다. 콜라 맛 대신에 바나나 맛을 고른 탓으로 얼마나 중대한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으니까.

    야, 정말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확실한 건 내가 지금 아프다는 것뿐이다.

    내가 아프고 또 위니가 아프다.

    아마도 내가 위니에게 상처를 줬는지도 모르겠다. 위니를 바보라고 부르고 위니 앞에서 롤러를 타며 뻐긴 것? 아니, 그게 아니다. 나는 언제나 위니를 좋아했고 위니하고만 놀았지만 위니 정도는 즉각 따돌릴 수 있다고 믿었었다. 귀찮을 땐 슬몃 달아나버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위니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지는 않았었다. 그리고 위니는 그걸 알게됐다. 붙잡으려하면 벌써 저만큼 달아나는 아이라는 걸 알아차렸던 거다.

    각자 좋아하는 걸 갖고 있는 채로 잘 지낼 수 있다는 나의 말은 맞다. 하지만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좋아하는 걸 버릴 수도 있다는 위니의 말도 너무나 맞는 말이다. 그런 일이 없다면 좋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뭘 내놓으라고 요구할 때가 분명히 있다. 내게 중요한 걸 절대로 버리지 않으려고 고집을 피우다간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 또는 사랑한다는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지도 모르고. 앞으로 스물 셋이 되고 서른 셋이 되어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꾸만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건 정말 무섭다. 사랑하는 사람이 뭔가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면 만사 끝이다. 그 이유같은 걸 따지며 싸우기에도 이미 늦은 거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걸 증명하기 위해 내놓으라는데, 그걸 내놓지 않고 말로 잘 설득해서 사랑하는 걸 믿게 할 도리는 없다. 위니는 정말 날 꼼짝 못하게 묶어놓은 셈이다. 바보가 아닌 줄은 진작에 알았지만 이렇게 날 아프게 할 수 있을 줄은 미처 몰랐었다. 언제나 귀찮아지면 달아나버리던 내 방식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다.

    여차하면 꽁무니를 빼버리기. 그게 내 방식이었다.

    위니뿐 아니라 다른 일에 대해서도 늘 그 모양이다. 그 어떤 것도 나를 붙잡아두도록 놔두지 못한다. 힘들어지면 놔버리고 도망간다. 위니는 내가 대단한 줄만 알지 그깟 작문교실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관둬 버린 애라는 건 모른다. 나는 정말 이대로 살아가다가는 우주미아가 될 판이라는 걸 얘기해주고 싶다. 나의 정체는 우주선으로부터 막막한 우주 속으로 떨궈지는 꼬마 에이리언인 것 같다고 털어놓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내가 불쌍해서라도 이런 무서운 고민에 빠뜨리지는 않았을텐데.

    아주 똑똑한 어른이 있다면 내가 롤러 없이도 과연 잘 살아갈 수 있을지 물어보고 싶다. 만약 아저씨였다면 어떤 말을 해 줬을까? 엄마라면? 롤러를 없애버린다는 소리에 엄마는 뛸 듯이 좋아할까? 아니다. 내가 얼마나 마음 아픈 결심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좋아하진 않겠지. 아마 엄마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답을 아는 건 오직 나 하나뿐이라고. 답은 내 속의 어딘가에 있다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답을 혼자 찾아내야한다고 대답할 거다.

    5

    작문 교실은 이제 안녕이다.

    나는 지금 가게의 테이블 위에 종이와 연필을 놓고 나 혼자만의 작문시간을 즐기고 있다. 나의 마지막 작문 제목은 `위니에게 보내는 펄의 편지' 이다. 한 페이지를 채우든 말든 그건 내 맘이다. 야, 나는 정말로 작문시간을 즐기고 있는 거다.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서 꼭 써야 할 것을 쓰고 있는데다가 그걸 아이들 앞에서 낭독해야 하는 염려도 붙들어 맸으니 말이다. 앞으로 평생동안, 작문교실은 나만의 작문교실이다. 지독했던 여름방학 작문교실은 이제 정말 안녕이다.

    제대로 마치려면 두 번 더 출석해야 하지만 사실 더 이상 배울 것은 없다고 엄마에게 말했다. 물론 엄마는 `뭐 하나 끝까지 해 내는 것이 없구나' 라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나를 어떻게 할 방법은 없다. 엄마에게 인질로 잡혀 있던 롤러 블레이드는 감쪽같이 사라졌으니까.

    나는 이제 비행접시가 아니다. 나는 그냥 걸어 다니는 사람이다. 하얀 운동화를 신고 나는 타박타박 걸어다닌다. 그런 나를 보고 사람들은 모두들 한마디씩 한다.

    웬일이니, 비행접시?

    롤러는 어쨌니?

    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속 시원해할 사람도 있고 조금은 섭섭하게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사람들은 곧 잊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한때 이 거리를 날던 비행접시를 까마득히 잊을 것이다. 나 자신도 까맣게 잊을지 모른다. 그건 알 수 없다. 먼 훗날의 일이니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위니가 보고싶다는 거다.

    고집 불통 위니, 너와 얘기하고 싶어.

    *

    네가 아프다는 얘길 들었어. 그래, 처음엔 걱정을 했다. 아무리 미워도 네가 아픈 건 정말 싫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어. 난 네가 많이 아팠으면 싶다. 그리고 나도 다시 후두염 같은 것에 걸려서 비명을 지르도록 아팠으면 좋겠다. 넌 그런 생각 들 때 없니? 차라리 죽도록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없니? 이상한 말이지만 `아프고 나면 안 아프니까' 말야. 정말 한동안은 아프지 않을 수 있어. 지금 당장의 아픔을 이겨내기만 한다면. 난 정말 병에 걸리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이건 진심이야. 죽게 되는 병이 아니라, 앓고 나면 낫게끔 되어있는 지독한 병이 있으면 내가 그 놈을 잡아다가 꿀꺽 삼키고 싶어. 야, 이건 바보짓이구나 싶은 생각도 들겠지만 끙끙 앓고 있는 동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 아니니? 난 이렇게 심한 벌을 받을 만큼 나쁜 애는 아니야, 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내 기분이 나아지겠어.

    위니야.

    사실, 난 며칠 동안이나 너를 미워했었다. 어떤 식으로 미워해야 할지 몰라 끙끙댔지만 어쨌든 미워 죽겠다는 생각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구. 네가 내게서 몹시 중요한 걸 빼앗아가려는 거라 생각했었거든. 그래, 그 롤러 얘기야.

    하지만 난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됐어. 애시당초 그 롤러는 나하고 어울리지 않았던 거야.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의 해롭기까지 했다고 생각해. 왜냐하면 나는 정말 내가 날아오를 거라고 믿기 시작했었거든. 하마터면, 높은데서 훌쩍 뛰어내리는 바보짓을 할 뻔했어. 아스팔트에 꽈당 부딪쳐서 피가 줄줄 난 뒤에야 바보짓인 줄을 알았겠지. 엄마 말처럼 롤러는 나한테 해로왔던 거야.

    그리고 또 한가지, 그놈의 롤러에 익숙해진 뒤로는 한 군데 진득하니, 붙어 있을 수가 없더라는 거야. 땅 위에 두 발로 꿋꿋하게 서 있는 사람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어쩔 수가 없어.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나는 걸핏하면 달아나고 있었어. 엄마가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나는 잽싸게 달아나지. 하기 싫은 일을 해야할 때도 내빼버려. 지겹고 싫은 사람이 나타나면 싹 뒤돌아 반대 방향으로 도망가고. 그렇게 해서 나는 아무것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없고 아무것도 제대로 배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던 거야. 그렇게나 해로왔던 거야.

    게다가 나는 롤러 블레이드를 진짜로 소중히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아. 나한텐 전부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은 그렇지도 않았어. 롤러가 사라져버리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어. 무척 놀란 건 사실이지만 한편으론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던 거야. 어느 면에선, 차라리 잘 된 일이 아닐까 싶더라구.

    아직 모르고 있겠지만 그놈의 롤러 블레이드는 감쪽같이 사라져버리고 말았어. 어제 아침 이후로 보이지 않아. 내 마음이 변한 걸 알고 화가나서 제발로 걸어나간 걸까? 그래도 발만큼은 달려 있는 녀석이니까....... 농담이야, 그럴 리야 있겠니? 누군가 집어갔겠지. 내 외사촌들 중 하나인지도 모르지. 아니면 우리 엄마가 내다 버렸거나. 위니와 펄, 우리 둘이 힘을 합친다면 범인을 잡아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굳이 그런 소동을 피우고 싶진 않아. 다만 사라질 때가 되어서 사라진 거야. 내년 2월이면 싫든 좋든 우리도 학교를 졸업 해야하듯이 말야. 어쨌든 이제 내게 롤러는 없어. 나는 이제 죽을 때까지 걸어다닐 거다.

    제제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

    생각해 봤는데 제제는 어른이 됐을 것 같아. 그게 답이야. 그 뿐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어. 목소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목소리는 잊어버리자, 위니. 어른이 되려면 뭐든 내놓아야 하는 거야. 자기한테 중요한 걸 내놓은 사람들만 어른이 되는 거야. 제제 걱정은 그만 두기로 했어. 제제는 어른이 되는 거야.

    혹시 아니? 어른이 되면 어른의 목소리가 생겨날는지. 누가 공짜로 주는 게 아니고 제제의 뱃속에서 말야.

    위니, 나는 지금 네가 보고 싶어.
    조민희

    조민희

    74년 경북 김천 출생

    97년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 <우리들의 작문교실>을 뽑고나서
    도정일, 이문열


    7편의 예심 통과작 가운데 심사자들이 토론에 붙인 것은 `공존의 조건'`망각'`늙은 비둘기똥'`우리들의 작문교실' 이렇게 4편이다. 언어,구조와 제시,주제,효과의 네 측면을 따지는 것은 어느 소설심사에서나 대체로 적용되는 일반적 심사기준이며,우리의 경우라 해서 유별난 잣대가 있을 리 없다. 다만 본심은 예심과 달리 단 `한 편'만을 골라야 하고 그 한 편의 선택이 "그래, 그만하면 당선작이 되겠어"라는 독자 동의를 얻을만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예심 때보다는 훨씬 종합적인 판단이 필요하고,이 종합 판단에서는 위에 말한 네 측면에서의 고른 성취도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변두리 다세대 주택 임대자와 임차인들 사이의 이야기를 쓴 `공존의 조건'(심규보)은 세태의 한 자락을 흥미롭게 펼쳐 보이면서도 소설이 사건 또는 인물의 차원에서 보여주어야 할 모종의 `변화'를 제시하지 않는다. 제목이 말하는 `공존의 조건'이 무엇인가도 거의 오리무중이며 암시의 내용도 허약하다. 치매노인들을 다룬 `망각'(정운광)은 기억을 상실했을 때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극히 중요하고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었지만 치매병동의 일일 보고서 수준을 넘는 통합적 `서사'의 층위를 성취하지 못하고 있다. `늙은 비둘기똥'(안휘지)은 뛰어난 언어 기량을 과시하면서도 그 기술 수준이 그에 어울릴 수준의 서사적 사유를 동반하지 않는다. 매우 아쉽게도 이 응모작은 기술이 쓸만한 곳에 쓰여야 하고 기술 이상의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요청을 잊고 있다. 소설을 `왜 이렇게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만족시킬만한 어떤 강점을 이 응모작은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 심사자들의 판단이다. 그러나 이상의 세 편 응모작들은 기대해볼 만한 미래 작가들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우리들의 작문교실'은 성장기의 두 소녀 이야기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깔끔하고 신선한 작품이다. 서사를 조직하고 전개하는 기량이 기성 작가의 수준을 능가할 정도로 탁월하다. 이 작가는 혼자 엄청난 양의 훈련을 거쳤거나 아니면 이야기꾼의 재능을 타고 났는지 모른다. 이실직고하면,본심 심사장에 들어서는 순간 두 심사자들은 `삼국지' 적벽대전에 나오는 고사의 경우처럼 서로 마음 속에 "이거다"라며 품고온 `당선작'부터 꺼내놓았는데 그것이 이 작품이다. 성장의 비밀이 제시되는 결미 부분의 제시를 다소 서두른 느낌이 없지 않지만, 이런 부분은 작가가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 전에 약간 손질해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 조민희

    조민희

    74년 경북 김천 출생

    97년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나는 지금 신촌 맥도널드의, 내가 늘 앉는 그 스툴에 앉아 당선소감이라는 것을 쓰고 있다. 뭘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모르겠으니까 딴전을 부리느라,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창밖의 거리풍경에 눈길을 던지곤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거짓말처럼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뜻밖에도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모양이다. 그리고 내겐 생각지도 못했던 이 큰 선물..... 97년 대학을 졸업하던 그 겨울엔, 앞으로 소설이 내게서 많은 것을 앗아가고 버거운 짐을 지우리라 믿었었다. 그래도 나는 이 길을 가리라고 호기롭게 말하고 다녔었다. 하지만 내가 틀렸다. 정작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서툰 인생살이였지 소설이 아니었다. 소설은 차라리 어려운 순간에 나를 지탱해주었고 또 기다려 주었다. 힘겹게 뻗은 나의 손을 잡아 쥐어 주었다. 확실히, 나는 소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 앞으로 소설은 내게 아픔을 줄 것이다. 사랑해 준 만큼 외롭게 할 것이고 기다려 준 만큼 기다리게 하겠지. 사랑 받았으므로 치러야 할 대가가 남아있다. 그 점을 결코 잊지 않겠다. 지금으로서는 그 말밖엔 다짐해 놓을 말이 없다. 끝까지 나를 믿고 지원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지난 주말, 팔순생신에 뵈었을 때, 세상 최고의 업은 누가 뭐래도 글쓰는 일이라고 말씀하셔서 이 손녀를 눈물나게 만드신 할아버님께도 감사드린다. 그리고 내 최초의 독자이자 평자인 두 동생과 기쁨을 나누고 싶다. 희망을 주는, 사랑스러운 얘길 써서 성탄 선물로 달라던 막내의 말에 쿡, 웃었었지만, 실은 그 말이 나를 움직이던 제 1 지령과도 같이 되어 버렸음을 고백한다. 이 작은 이야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드리는 작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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