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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은 기억이라고 생각했다. 앞의 방식이 갈라진 두개가 하나의 이야기로 모아지는 것이지만, 이번엔 하나가 두개의 다른 이야기로 갈라지는 것이다. 기억을 통하면 사람의 정체성이란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 홍상수
홍상수 감독은 「오! 수정」이 기억에 관한 영화이며 기억의 왜곡을 통해 우리의 일상이 객관적인 형태로 보여질 수 있도록 의도했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리고 그 기억은 구체적으로 수정에 관한 기억이다. 기억은 신체에 각인된 과거의 흔적이며, 흔적은 주체의 의지를 통해 선별된 이미지들이다. 우리는 「오! 수정」을 통해 무한하게 복제되는 수정의 이미지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기억의 이미지들은 섬세한 디테일을 가지지 못하는 동시에 분절되어 있다. 동일하게 조각난 쇼트들은 외부의 영향과 무관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공허한 빈자리를 점하고 있다.
다른 의미로 「오! 수정」은 마녀 심판에 관한 은유로 충만하다. 수정은 어쩌면 무고한 피고인 일수도 있고 어쩌면 사악한 마녀일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무고한 피고인인 동시에 사악한 마녀일수도 있다. 홍상수 감독은 마녀 선별의 검증보다는 마녀 심판이라는 게임의 법칙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이야기는 두 갈래로 갈라진다. 두 가지의 상반된 사실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야기가 두 갈래로 갈라질 수 있는 것은 시간의 또 다른 차원을 통해서이다. 홍상수 감독이 기억의 객관성에 대해 이야기했듯이 두 가지의 기억들은 서로 다른 차원의 시간에서 동시에 발생한다. 그러므로 두 가지 기억이 파생시키는 부조리한 사건들(떨어진 것은 포크인 동시에 스푼이었다.)은, 동일한 차원의 시간 안에서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모순되지만 그 자체로 사실인 수정의 다양한 측면들을 모두 긍정해야 되는 아이러니에 빠지게 된다. 수정이라는 이름의 비밀은 오직 시간의 거미줄을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첫 번째 챕터 '하루종일 기다리다'에서 재훈은 욕망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장소는 우이동의 어느 호텔. 극히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용도로 이용되는 폐쇄적 공간 안에서 그를 하루종일 기다리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수정이란 인물이다. 이제 우리는 수정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수정의 무엇이 재훈을 하루종일 기다리게 만들었을까?
두 번째 챕터 '어쩌면 우연'은 재훈의 수정에 관한 기억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억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그것은 주체가 발생시킨 이미지가 아니다. 기억은 형상을 가지지 않는다. '그녀의 미소'를 회상했을 때 우리는 그녀의 입술에서 반짝거리는 립스틱의 색깔이나 입가의 주름 등을 동시에 보지 않는다. 더욱이 그것이 움직이는 형상이라면 사태는 더욱 복잡해진다. 그러므로 형상을 얻기 위해서는 기억되지 않는 부분이 역시 의식의 빈자리를 메워야한다. 그리고 기억은 주체의 회상 속에서 태어나서, 이미지로 가득한 객관적 사실로 기능하게 된다.
재훈의 기억 안에서 재훈은 순수하고 예절바른 38세의 독신 남으로 등장한다. 그는 재력가이기도 하고 미술을 전공한 예술애호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보충된 객관적 이미지로서의 그는 어눌한 말투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에도 불구하고 상류 계층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악덕을 보여준다. 즉, 그는 물신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속물근성을 통해 자신의 순수성을 메워 나아가려고 하는 모순된 인물이다.
재훈은 자신의 선배 영수에게 영화제작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한 후에 수정이라는 이름을 전해 받는다. 재훈과 영수사이에서 영화제작비와 수정이 상징적으로 교환된 것을 알 수 있다. 그 날 영수는 무척 취한 후 수정을 남겨놓고 사라진다. 재훈에게 있어 수정의 등장은 자본의 흐름과 관련된 체제 순응적 사건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탁구로 영수를 이긴 재훈은 더욱 의기양양해진다. 왜 영수는 패배에 대해 그토록 과민하게 반응한 것일까? 수정은 자본의 논리에 포획된 뇌물이거나 스포츠 경기를 통해 얻어지는 상품으로 전락한 듯이 보인다.
재훈과 수정이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재훈의 기억에서는 다른 것으로 대체된다. 재훈의 기억에서 영수는 촬영기사와 화해하지만 그것은 영수에게서 전해들은 내용이다. 하지만 적어도 재훈의 기억 속에서는 사실로 존재한다. 앞으로 등장하게될 수정의 기억이 거짓을 폭로하고 진실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재훈에게 속한 주관적인 동시에 객관적인 경험세계는 그 자체로 완벽한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 세계가 착각하고 있고 또 정정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조차 진실은 외부(수정의 기억)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 안에서 발생된다.
재훈이 수정에게 계속해서 요구하는 것은 성적욕망이다. 재훈은 수정을 매춘부 대하듯이 이야기한다. 이와 같은 재훈의 태도는 끊임없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외제차를 타고 가는 중에 수정은 자신도 옛날에는 부자였다고 말한다. 재훈의 집에 도착한 후에 재훈은 함께 샤워하지 않겠느냐고 물어본다. 재훈이 샤워하는 동안 수정은 브레지어를 벗는다. 그것은 물론 재훈의 상상이며, 수정을 이해하는 그의 방식이기도 하다.
친구의 생일 축하파티 장면에서는 영수가 수정을 매춘부처럼 다룬다. 이것이 영수를 이해하는 재훈의 방식이다. 그리고는 영수를 카메라 도둑으로 몰아 부친다. 그에게 있어서 카메라와 수정은 동일한 대상을 지칭한다. 또 자신과 수정의 관계가 밝혀지기 싫어하면서도 내가 결혼까지 생각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라고 묻는다. 자신의 성적욕망이 상품교환을 통해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와중에서도 순수성을 지키려는 자체 모순적 의지가 냉소적으로 그려지고 있어서 서글퍼지는 장면이다.
재훈은 수정을 만나기 위해서 전혀 가보지 못했던 고잔에 간다. 그리고 고잔이라는 낮선 장소에서 재훈과 수정은 제주도에 함께 가기로 약속한다. 제주도는 신혼부부들의 최초의 여행지라는 상징을 지니고 있는 희망의 섬이다. 그들은 과연 제주도로 갈 수 있을까? 어쨌든 '어쩌면 우연'은 희망에 부풀어 있는 남녀를 뒤로하고 자신의 기억들을 지운다.
우선 검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재훈이 수정을 파악하는 방식이다. 재훈은 자신이 순수한 동기를 통해 사랑을 실현해 간다고 믿지만 그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기억의 실체는 퇴폐적이고 암울한 여운만을 남길 뿐이다. 그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계급적 질서가 강요하는 사회적 타부에 매몰되어 간다. 빠져 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진 듯한 인상을 남기며 재훈은 기억의 노예가 되어 가는 것이다. 기억의 실체가 자신에게 속해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우리들은 자신이 기억이라는 본질적인 삶의 영역이 만들어낸 무수한 환영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좋든 싫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형성되는 기억의 여백을 통해 우리는 낮선 풍경과 대면하게 된다. 어느 순간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정을 자신의 성의 노예로 전락시켜 버리는 재훈처럼 말이다. 기억은 개인의 삶을 치유해 주는 동시에 삶의 노예로 만드는 이중의 순환운동을 통해 우리들에게 본질적인 차원을 형성해 준다.
2
'서로 접근하기도 하고, 서로 갈라지기도 하는, 서로 단절되기도 하고, 또는 수백 년 동안 서로에 대해 알지 못하기도 하는 시간의 구조는 모든 가능성을 포괄하게 되지요. 우리는 이 시간의 일부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어떤 시간 속에서 당신은 존재하지만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시간 속에서 나는 존재하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 다른 시간의 경우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존재합니다. 호의적인 우연이 내게 부여한 현재의 시간 속에서 당신은 나의 집에 당도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시간, 그러니까 정원을 가로지르던 당신은 죽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또 다른 시간에 나는 지금과 똑같은 말을 하지만, 나는 하나의 실수이고, 유령일 겁니다.' - 보르헤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중에서
세 번째 챕터 '허공에 매달린 케이블카'는 네 번째 챕터 '어쩌면 의도'를 괄호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케이블카의 정지는 상징적이다. 차단된 의식의 흐름은 새로운 국면을 마련해 준다. 괄호로 묶여진 '어쩌면 의도'는 동일한 차원의 시간이 적용되어지지 않는 새로운 영역을 요구하는 챕터이다. 그리고 「오! 수정」의 전체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는 특권적인 챕터이다. 심리적 주관성이 닫히고 형이상학적인 시간의 차원이 열리게 되는 것은 정확히 케이블카가 멈추는 그 순간부터이다.
또 다른 진실이 있다. 서로 침투 불가능한 또 하나의 세계는 수정의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수정의 진실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수정의 기억은 재훈의 기억 못지 않게 허위 적이고 동시에 사실적이다. 수정의 기억은 재훈의 기억을 보충하지도 않고 반박하지도 않는다. 대안도 아니고 희망사항도 아니다. 어떠한 은유도 없다. 단지 하나의 객관적 실체로 존재하는 완벽한 세계이다.
이제부터 수정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대상화된 수정이 아니라 수정 자신의 기억에 의한 수정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수정이 만들어낸 수정의 이미지는 또 다른 사실을 통해 드러난다. 그녀는 재훈의 재력에 관심이 있고 유부남인 영수를 사랑하고 오빠의 자위행위를 돕는다. 하지만 이러한 그녀의 행동이 '어쩌면 우연'에서의 재훈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충만한 세계는 외부를 가지지 않으며 따라서 외부와의 소통도 전혀 없다. '어쩌면 우연'과 '어쩌면 의도'는 다른 시간의 차원에서 동시에 공존하는 서로 무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두 가지의 기억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상호 간섭에 의한 효과들은 단지 다양한 속성들로 표명되는 의지와 표상으로부터의 세계를 일관된 논리적 흐름 속으로 가두어 두려는 불순한 시도일 뿐이다.
「오! 수정」에는 한정용법의 기능이 제거되거나 고유명사가 무규정적인 지시대명사로 대체되곤 한다. '어쩌면 의도'에서 재훈은 수정에게 피가 뭐냐고 물어본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그 회사'가 어디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그리고 '저기 있잖아요'라는 말을 듣고 어디로 가야 할지 주저하게 된다. 행위는 다음의 행동으로 넘어가기 위해 요구되는 상황의 불명료함으로 인해 항상 좌절된다. 그래서 그 간극을 메워 주는 것은 항상 무의미한 행동이나 대사들이다.
얼려진 뽀뽀 껌 종이를 발견하고 키스하게 되는 장면이나 수정의 친구가 문제를 내자 재훈이 전화를 걸어서 틀린 답을 말하는 장면 등은 행위의 일관된 정서나 습관 등을 가혹할 정도로 차단한다. 비적절한 연결을 통해 보여지는 기억의 세계는 수정을 이해하려는 우리들의 의도를 다양한 각도로 분산시키기에 충분하다. 수정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다양한 실체이다. 수정의 의미는 반복해서 변한다. 재훈이 수정의 이름을 잘못 부른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이름이 그렇게 중요하냐고 묻는 장면은 상당히 유희적인 발상이다. 수정은 단지 이름에 불과할 뿐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세상의 모든 여자가 수정일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수정이 그토록 화를 낸 이유는 정당하게 두 번째 의미에서 찾을 수 있다.
사건이 시간의 또 다른 차원으로 갈라진다는 개념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것은 다르게 말해서 수정이 기억하는 세계가 아닌 기억된 세계가 수정을 만드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기억된 객관적 세계는 무한히 증식한다. '그것은 포크인 동시에 스푼이었다.'라는 명제에서 '그것'은 결코 보여질 수 없지만 '그것'은 분명 다양한 시간의 차원에서 동시에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재훈과 수정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것은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필연이었을까? 서로 소통 불가능한 기억의 단편만을 가지고 그들의 행적을 동일한 차원 안으로 끌어들이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부조리하다. 우리는 그것이 포크였는지 스푼이었는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동시에 거짓이고 진실한 삶을 받아 들여야 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지독한 선택의 강요 앞에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엄중한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신비주의적인 영감을 통해 구현된 물질의 이면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포크인 동시에 스푼이다'라는 문장은 동시에 현실화 가능한 모든 상태들을 긍정하려고 시도하는 욕망인 동시에 권리 적인 선언이다. 문제는 그것이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서 시작되는 비극에 있다. 포크인 동시에 스푼인 '그것'을 우리는 볼 수 없다. '그것'으로부터 포크와 스푼이 현재 시점의 공간으로 떠오르는 형이상학적인 회로가 존재한다고 가정했을 때조차도 우리는 '그것'을 형상으로 인식할 수 없다. 그것은 영상매체를 통한 예술의 한계를 극화 시켜주는 비극이다. 비극은 항상 보여지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점에 있다. 보여지는 것은 감상자의 환상을 드러내는 2차 적인 영상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형상 속에서 구현되었다는 점을 감안하였을 때 또 다른 진실이 된다. 진실은 중층 적으로 재현되는 심층적 이미지들이다.
영화에서의 과거 이미지 역시 현재라는 준거 점으로부터의 차이를 나타내는 형식적 문법들을 통해서 자신의 속성을 확립한다. 클로즈업된 얼굴로부터 오버랩 되는 이미지, 또는 화자의 내면적 울림을 재현시킨 듯한 보이스 오버 등은 이제부터는 누군가의 회상장면입니다, 라고 알려주는 경보 장치처럼 작동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이미지는 현재 재현되고 있는 또 다른 의미의 현재이다. '재훈과 수정이 이야기하고 있었다'라는 문장이 형상을 가지는 순간 '재훈과 수정이 이야기하고 있다'로 바뀌는 또 하나의 비극이 그것이다.
우리들은 요구된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본다. 또는 더 적은 것을 통해 전체를 작위적으로 구성할 뿐이다. 형상은 그 자체가 은유가 되어 버리는 시점에서 자신을 지우고 다른 무엇을 가리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상은 그 자신을 재현한다는 이중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보여지는 것은 보여지는 것 자신인 동시에 자신이 보여지게 된 비밀을 희미한 빛으로 드러내는 순환운동을 통해 유지된다.
시트에 묻어진 흔적은 수정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굳어진 것 이상으로 불신의 해소인 동시에 짙은 회색의 얼룩이다. 그러므로 다의적 해석이 가능한 문제의 영역에서 어느 차원에 인식의 대상 점을 고정시켜야 할 것인가가 중요한 국면을 규정하게 된다. 「오! 수정」의 의도는 경험되어진 세계를 그 자체로 닫혀진 다양성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다양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과거는 현재 나의 의식이 작용하고 있는 흐름의 연속적 실체 이상으로 실재적이다. 더 이상 주관적 시점을 통해 나타나는 2차 적 이미지가 아닌 그 자신을 통해 객관성을 자체 내에 부여하는 물질세계의 또 다른 차원이다. 재훈의 기억, 또는 수정의 기억은 그러므로 현재와 동시에 진행되는 또 다른 이야기인 동시에 서로에 대해 닫혀진 실체로 드러난다. 무엇이 사실인가? 그것은 포크였는가 스푼이었는가 라고 하는 실증주의적 문제는 포크인 동시에 스푼인 그것은 어떻게 형상으로 감춰진 막을 찢고 전면에 등장할 수 있는 가로 바뀌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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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본질은 심리적 상태에도 심리적 주관성에도 그리고 상위의 주관성의 어떠한 형태로서도 환원되지 않는다. 본질은 한 주체 안에서의 최종적인 성질이다. 그러한 성질은 주체보다 근본적인 것으로서, 주체와는 또 다른 질서를 형성한다. 주체가 본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가 본질에 둘러싸이는 것이다.' -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중에서
수정의 의미는 무엇인가? 수정을 둘러싼 기억의 세계는 리듬감을 상실했고 처참할 정도로 조각나 있다. 이 조각난 현실들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꿰어 맞추려는 노력은 결국 준엄한 심판자의 입장으로 진실을 가려내려는 윤리적 시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는 수없이 많이 존재하는 해석의 무덤 위로 또 하나의 해석을 보탤 뿐이다. 수정의 의미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기준을 적용해서 풀어 낼 수 없는 시간의 거미줄에 편재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에서 수정은 자신의 처녀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확연히 드러난 처녀성은 해피엔딩을 의미한다. 재훈은 자신의 기억 전체가 신경증 적으로 몰두해 있었던 수정의 처녀성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서 쩔쩔맨다. 사실 처녀성은 지워야할 불길한 흔적에 불과한 것일까? 하지만 처녀성은 폐기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오! 수정」은 분명 해피엔딩을 가지지만 그것은 불길한 해피엔딩이다. 재훈은 행복한 미래를 예감하는 듯한 다짐을 한다. 자신의 모든 결점들을 고쳐 나아가겠다고 꿈꾸는 듯이 말하는 재훈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하지만 「오! 수정」의 어디에서도 드러나지 않은 또 하나의 결말이 잠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또 하나의 줄기로 갈라져 나가고 있는 또 다른 차원의 시간 속에서 재훈과 수정이 어떤 결말을 보여 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수정과 재훈은 침대 위에서 수정의 이름을 반복해서 확인한다. 그들은 수정의 의미를 깨달은 것일까? 수정이라는 고유명사 앞에 감탄사가 붙어야 하는 이유가 그곳에 있는 것일까? 재훈은 고잔에서 이름이 뭐가 중요하냐고 말했지만 우이동에서는 수정의 이름을 끊임없이 부르고 확인한다. 수정의 이름이 해피엔딩으로 가는 은밀한 통로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수정의 이름은 잃어 버려서도 안되고 잘못 불러도 안 되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진실이 아닐까?
하지만 진실한 사랑이 수정이라는 기표를 가지고 있는 점은 상당히 냉소적이다. 수정의 이름은 오빠의 자위행위에도, 영수의 욕구불만 해소를 위한 성적 탐닉에도 관여하기 때문이다. 수정은 자신의 깨끗함을 증명하는 동시에 자신을 더럽힌다. 수정의 이름은 우리가 그 이름을 잘못 부를 수 있는 만큼 무한히 반복해서 나타날 수 있다. 수정의 이름을 통해 진실의 순간을 기대하는 우리들은 해피엔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진실의 베일이 벗겨지는 순간에 또 다른 무수히 많은 진실의 순간이 동시에 갈라져 나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은 형상의 힘을 빌려서 존재하는 논리적 합목적성이다. 진실은 사실적이면서 당위적인 전체구조를 상정했을 때에 비로소 드러나는 체계의 완벽함이다. 모든 요소들이 자신의 장소에 배치되어 있을 때 비로소 진실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은 이미 만들어진 상품과도 같다. 진열된 시계는 진실의 완벽한 은유로 기능할 수 있다. 시계의 부속품들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초침을 정확히 1초에 단 한번 이동시킨다. 시계가 언제까지나 60초에 60번의 운동을 한다면 우리는 시계의 앞에 진실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무방할 것이다. 진실한 삶 또한 과거의 윤리적 행위를 통해 현재의 도덕적 신념을 지킬 수 있을 때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은 전체주의 적인 꿈의 실현, 행복한 유기체를 실현시키기 위한 각 요소들의 조화를 의미한다.
영화에서 완벽한 유기체의 실현은 몽타쥬를 통해 완성된다. 몽타쥬는 하나의 쇼트가 다른 쇼트를 조건으로 기능하는 종합적인 효과를 창출해 내는 영화 고유의 문법이다. 쇼트 내부의 의미를 동일한 쇼트 안에서 변형시키기보다는 또 하나의 외부 공간을 요구한다. 「오! 수정」이 몽타쥬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점은 정확히 이러한 이유에 있다. 적어도 '어쩌면 우연'과 '어쩌면 의도'는 유기적 결합을 거부한다. 형식적인 외적 요소와 그것의 효과는 서술 가능한 형식으로 자신을 발전시키지만 부분을 이루는 요소 적인 성질의 차이, 또는 상호 이질적인 기호가 교환 가능한 다면적인 기능을 자신의 내부에 가지는 것은 분명히 정지된 쇼트의 안에서이다.
쇼트는 영화의 특별한 국면을 지시할 때 몽타쥬의 효과를 내재화하는 특유의 방법을 행사할 수 있다. 몽타쥬가 또 다른 쇼트들을 외부에서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처럼 쇼트는 자신의 내부에서 또 다른 쇼트를 끌어낸다. 그것은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또 다른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포크가 동시에 스푼일 수 있는 것은 나란히 놓여있는 포크와 스푼을 외부의 개념장치를 통해 재통합한 결과이기보다는 포크가 자신의 내부로 통하는 비밀스러운 회로를 통해서 스푼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밀스러운 회로는 등질적 공간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무한히 두 갈래로 갈라지는 시간의 심연 속에서 형성되는 형이상학적인 통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무엇이 진실을 거짓으로 타락시키는가 알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한정되어 있다. 각 요소들이 제대로 기능하는가 알아보는 일이다. 하지만 아직 전체의 목적이 확립되어 있지 못한 상태에서 진실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오! 수정」의 세계는 무엇을 위해 봉사하기보다는 인물들의 사소한 충동에 에너지가 소비되어 버리는 비합리적인 세계이다. 인물들은 전달하기보다는 상대방을 쳐다봄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현실화한다. 자체 소비적인 인물들의 운동은 진실의 판단여부에 있다기보다는 진실의 가능성에 대한 소란스러움으로 형상화된다.
그러므로 무가치하다고 생각되어지는 혼란스러운 상념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물의 거울이 되기도 하고 물 표면의 미끄러운 흐름이 되기도 하는, 바로크 적인 열림과 닫힘이 교차되는 순간들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전체를 위한 봉사는 더 이상 기능을 정지 당한다. 심지어 초연함을 가장한 침착함마저도 이러한 세계에서는 숨을 죽이게 마련이다.
진실의 가능성을 탐구하기 위한 모델이 「오! 수정」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시켜주는 메타 구조를 찾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역을 최대한 개인적인 것으로 만드는 인물들의 자기 만족 성을 통해서도 진실은 아직 발화되지 않은 잠재성의 영역 안에 남아 있는 것이다. 통합을 향한 지향적인 화살표들을 감금하고 지우는 자체의 운동이야말로 자신을 창조하는 또 다른 자신을 통해 자신을 긍정하는 자체 폐쇄적인 회로를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수정의 이름은 자신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기억 속에서 행복한 합일을 이루지 못한다. 사실 수정의 이름은 원래부터 자신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수정이라는 이름은 원본 없이 떠도는 무한한 이미지들의 세계에서 해석의 증식만을 의도한다. 결국 마녀 심판의 정당성은 폐기되고 수정의 이름은 마치 공기처럼 가벼워진다.
처녀성은 행복한 결말을 보증하는 해피엔딩과 교환되지만 재훈은 끝내 수정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만다. 그래서 그에게는 수정이라는 이름이 더없이 소중하다. 하지만 그가 지시할 수 있는 유일한 실체로 기능하는 수정의 이름은 수정의 기억 속에서 존재하는 수정의 이름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했다고 믿지만 사실 그들은 다른 것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꿈결 속에서 희미하게 나타난 한줌의 빛을 잡기 위해서 그들은 또 다른 이야기로 자신만의 기억을 채워 나아갈 것이다.
하지만 재훈과 수정은 자신의 기억을 통해 진정한 사랑을 이루려고 노력한다. 재훈은 자신의 모든 결함을 고치겠다고 말하고 수정은 젓가락 교습을 받으며 자신의 잘못된 점을 고치겠다고 말한다. 우리들은 그들의 이러한 다짐이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또한 그것이 진실이기를 바란다. 우리들의 기억이 우리들을 지치게 하고 오해하게 하고 거짓된 사랑을 하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기억은 우리들의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김영찬
1970년 경기 동두천 출생
1988년 서울 북 공업 고등학교 전기과 졸업
1996년 금오 공과 대학교 전자 계산기 공학과 졸업
2000년 일본 사이타마 대학 문화연구과 석사과정 졸업
<수정의 이름 -'오! 수정'>을 뽑고나서
최민(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원장), 강한섭(영화평론가)
영화평론분야 올해의 응모작들은 모두 26편으로 작년보다 편수도 약간 줄었고 전반적 수준도 더 못한 것 같았다. 작년과 달리 바로 이거다 할 작품이 얼른 눈에 뜨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보니 괜찮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 신춘문예에 응한 평론 다섯 편이 다같이 홍상수에 관한 것인데 그중 홍상수 영화의 작가적 개성을 꼼꼼한 텍스트 분석을 통해 조명하고 있는 '수정의 이름-'오!수정''이 뛰어났다.
특히 시간과 기억에 관련된 영화 메카니즘의 복잡미묘함에 대한 들뢰즈의 이론을 숙지한 바탕에서 이 영화텍스트가 발생시키는 독특한 의미효과를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 자칫 현학취미나 과잉해석으로 빠질 수 있는 까다로운 문제설정에도 불구하고 되도록 평이한 서술로 핵심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논지를 발전시켜가려는 점 역시 돋보인다.
다만 치밀한 분석력에 비해 문장의 맛이 뒤떨어진다. 영화평론도 문학의 한 장르이기 때문에 문체(文體)가 매우 중요하다. 논의의 필요상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짐작되지만 추상적 관념어들의 나열 때문에 번역투의 생경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목들이 군데군데 있다. 당선작으로 뽑고 싶었지만 이런 점 때문에 망설이다 다소 유보하는 의미에서 가작으로 했다.
김영찬
1970년 경기 동두천 출생
1988년 서울 북 공업 고등학교 전기과 졸업
1996년 금오 공과 대학교 전자 계산기 공학과 졸업
2000년 일본 사이타마 대학 문화연구과 석사과정 졸업
무엇인가를 대상으로 글을 쓴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가 나의 글을 읽어 준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의 글에 호의적인 입장을 표명해 준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의 글을 타인에게 공개하는 것은 동시에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글이란 원래 너무 당연해서 진부해지기 쉽고, 너무 엉뚱해서 이해를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냉소적이고 적대적인 독자들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적인 글들을 읽고 있노라면 다시 글쓰기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글쓰기에 대한 유혹은 계속해서 자신의 능력에 회의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나는 자신의 글을 공개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인문학적인 교양과 감성, 그리고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회의는 다시 글쓰기를 체념하게 만든다.
이처럼 자신감 없이 주저하다가 응모한 글이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어 한편으론 기쁘고,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선다. 부족한 점이 많은 글이기 때문이다. 논점이 명확하지도 않았고 전체적인 흐름도 일관적이지 못했다.
이러한 결함에도 불구하고 좋게 보아주신 심사위원께 감사 드린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 그동안 아껴주시고 격려해 주신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