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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그는 어디로 갔을까

by  노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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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환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조심했는데 그것이 다시 오고 만 것이다.

    목덜미가 뜨거워지더니 이젠 다리까지 후들거려서 영환의 발은 브레이크 페달과 가속 페달을 오가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땀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바탕 땀을 쏟고 나자,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시큼한 냄새가 코로 슬쩍슬쩍 스며들었다. 어젯밤 마신 술냄새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 정신없는 와중에도 내리려는 승객에게 문을 열어 주고, 타는 승객의 요금을 확인하고, 거스름돈 버튼을 눌러 주고, 정류장 안내 방송 버튼을 누르는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모두 몸에 밴 습관의 힘이었다. 어떻게 해야겠다는 의식이 가기 전에 몸이 알아서 먼저 간다. 지나온 시간이 고스란히 몸에 남아 있었다.

    영환이 아랫배가 사르르 아파오기 시작한 것은 밤사이 차고지 근처에 노상주차돼 있던 버스를 차고지로 올릴 때부터였다. 장염이 또 시작되는가 싶어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사실 버스를 시작할 때 가장 염려했던 것이 그것이었다. 어려서부터 장이 약해서 여름만 되면 어김없이 장염에 시달렸다. 한 번 설사가 시작되면 열흘 이상 지속되곤 했다.

    택시를 할 때만 해도 그리 문제될 것은 없었다. 급하면 아무 건물 앞에나 차를 세워 두고 일을 보면 되었다. 처음에는 화장실 문이 잠겨 있어서 낭패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건물들이 화장실 문을 열어두는지 알게 되었다. 술집이나 노래방, 오락실 등이 있는 건물은 틀림없다. 노는 자들에겐 화장실이 언제나 열려있다. 그래도 역시 가장 좋은 것은 주유소 화장실이다. 그러나 택시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사납금을 채우는 것만도 버거웠다. 사납금을 채우지 못하면 생돈을 바쳐야 했다. 더구나 어렵사리 사납금을 채운다고 해도 매달 수입이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혼자일 때는 이러구러 살 수 있었지만, 결혼 생활은 무엇보다도 계획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아내의 지론이었고, 그가 보기에도 그 생각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가 생길 무렵 버스를 시작하게 되었다.

    버스를 시작하면서 영환이 다짐하고 또 다짐한 것이 바로 술을 끊는 것이었다. 술은 장염에 치명적인 것이었다. 라면이나 커피도 되도록 먹지 않았다. 처음엔 그것들을 끊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왜 몸에 좋지 않은 것들은 입에 달고 맛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자주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일단 화장실에 가는 것 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배에서 자꾸 꾸르륵거린다. 이것은 곧 나온다는 신호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영환은 운전석 윗거울로 버스 안을 살펴보았다. 4명의 승객이 있었다. 출근 시간이 끝난 지 한참되기도 했지만, 회차지점이 가까워오기 때문에 승객이 적었다. 그는 저 사람들이 다 내리면 어디 상가 앞에라도 버스를 대놓고 화장실에 다녀올까 생각했지만, 이내 그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들이 뒷문으로 내리는 동안 앞문으로 다른 사람들이 버스에 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파트 단지와 주택가, 사무실들이 들어있는 몇 개의 빌딩들, 규모가 작은 전문 대학이 있는 회차지점을 한 블록 돌아서 다시 종점까지 가려면 1시간 반은 족히 걸릴 것이다.

    영환의 회사 동료들은 대개 회차지점에서 화장실을 이용하곤 했다. 앞차와의 간격이 벌어져서 종점에 들어가도 화장실에도 들를 사이 없이 또 다시 나와야 할 때나, 길이 막혀 여느 때보다 운행 시간이 길어질 때면 어쩔 수 없이 그래야 했다. 그 부근의 상가 건물이나 회사 사무실 등이 있는 조그만 빌딩들의 화장실을 주로 이용했다. 상점 주인들이 남의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을 싫어할 것 같아서 어떤 기사들은 식료품점에서 하다못해 껌이라도 사고 나서 화장실에 가곤 했다. 영환은 될 수 있으면 그러지 않으려고 했다. 길이 너무 많이 막히면 할 수 없지만, 앞차와의 간격이 벌어지는 일이 없도록 신호도 슬쩍슬쩍 위반하고 내릴 승객이 없으면 정류장 앞을 쏜살같이 그대로 통과하기도 했다. 물론 영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느 기사라도 조금씩 그래야 했다. 회사에서 버스 두 세 대만 더 들여오고 기사 몇 사람만 더 쓰면 모든 기사들이 조금 더 여유로와질 테지만, 회사에서 그럴 리가 없었다. 사실 그런다고 해도 배차 간격이 3분이니 더 생기는 시간이래야 10분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10분이면 밥을 다 먹고도 담배 한 대까지 피워 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물론 처음 버스를 시작할 때는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차고지에 들어갈 때까지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기사들이 자주 가는 화장실을 알려 준 것은 그보다 1년 일찍 버스를 시작한 동갑내기 동규였다.

    영환은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이미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랐다. 사실, 그건 인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태가 심각해지기 전에 손을 쓸 도리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다음 정류장을 지나면 회차지점도 거의 끝나고 다시 대로로 나가 종점으로 향해야 했다. 영환은 정류장에 정차하면서 버스를 인도 쪽으로 바짝 붙여 세웠다. 그는 운전석에서 일어서며 승객들에게,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라고 말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그 정도로만 말해도 그들은 자기가 화장실에 간다는 것을 다 알 것이라고 바쁜 와중에도 그는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아래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아 그는 뛸 수도 없었다. 괄약근에 힘을 풀지 않으면서 마음만 급히 달리고 있었다. 햇님식품과 광양철물점이라는 간판 사이에 건물 입구가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서 영환의 손은 이미 바지춤으로 가 있었다.

    그 건물은 영환이 처음 들어가 보는 곳이었다. 그렇게 작은 건물에는 대개 화장실이 1층과 2층 계단 사이, 그리고 2층과 3층 계단 사이에 있게 마련이다. 영환은 계단을 오르면서 눈앞에 화장실 문이 보이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잠겨 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철제 문은 잠겨 있었다. 동그란 손잡이가 돌아가지 않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는 몸을 돌려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2층을 지나 위쪽을 보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화장실 문이 열려 있었다. 영환은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문을 닫으니 어둠이 따라 들어왔다. 급한 나머지 불을 켜는 것을 잊은 것이다. 그는 문을 열고 바깥에 붙어있는 스위치를 누르고 다시 문을 닫았다. 오른쪽 벽에 작은 세면대가 그의 허리 높이에 달려 있고, 하얀 좌변기 하나와 휴지통이 전부인 좁은 화장실이었다. 영환에게는 좌변기와 왼쪽 벽에 휴지가 걸려 있는 것만 보였다. 그는 몸을 돌려 옷을 내리고 변기에 앉으며 미처 휴지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변기에 앉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것들이 달려나왔다. 냄새가 지독했지만, 영환은 그것마저도 반가운 지경이었다. 그는 이제야 살 것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고 나자 그제서야 영환은 변기를 닦지도 않고 앉은 것을 후회했다. 아무나 앉는 변기에 아무렇게나 엉덩이를 내밀었다는 것이 영 께름칙했다. 여느 때라면 변기 위에 휴지를 깔고 앉았을 테지만, 오늘은 그에게 그럴 정신이 없었다. 그는 변기에 앉은 채로 더 있고 싶었지만, 밖에 승객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얼른 일어섰다. 몸을 돌려 물을 내렸다. 세면대에서 손에 물도 묻혔다.

    몸이 가벼워지니, 마음도 가벼워졌다. 기분이 상쾌해진 영환은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와 문을 닫았다. 한 계단 아래로 내려서던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려 화장실 쪽을 쳐다 보았다. 무언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화장실 문에 무언가 붙어 있었다. 그는 다시 그쪽으로 다가가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흰 종이에 단정한 글씨체였다.

    물을 내리지 마시오.
    물은 모든 것을 다 쓸어가 버립니다
    마치 세월처럼.

    영환은 피식 웃고 말았다. 아까는 문이 열려 있어서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설령 물을 내리기 전에 보았다고 해도 영환은 그런 실없는 말에 귀기울일 사람이 아니었다. 어떤 객쩍은 놈이 붙여 놓았나 보다고 생각하며 그는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영환은 걸음을 재촉해 얼른 건물 밖으로 나왔다. 건물 밖으로 나온 그는 그만 그 자리에 멈칫 서버렸다. 이게 무슨 일인가. 거기 서 있어야 할 버스가 없었다. 시동이 걸린 채 서 있어야 할 버스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영환은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혹시 핸드 브레이크를 채우지 않아 차가 앞쪽으로 밀려갔나 하는 생각에 몇 미터 떨어진 곳까지 쳐다보아도 버스는 없었다.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버스가 보이지 않았다. 영환은 다시 목덜미로부터 열이 치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아까의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것은 화장실에 가서 쏟아버리면 해결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거리는 조금전과 다름없었다. 출근 시간이 지난 평일 오전의 도로에는 차들도 많지 않았다. 자동차들이 씽씽 달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정지된 화면 위에 가로로 북북 줄을 긋는 장난 같았다. 공기는 여전히 맑고 차가웠고, 하늘도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영환은 순간적으로 자기가 지금까지 살던 곳과는 다른 세상에 던져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건너편 하늘에 멍하니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영환은 문득 다시 현실로 되돌아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영환은 근처를 둘러보았다. 새벽에 급히 나오느라 핸드폰을 집에 두고 나왔던 것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전화 부스가 있었다. 그는 그 쪽으로 걸어가면서도 회사 버스가 오는지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두 대는 카드 전화기였고, 한 대는 동전 전화기였다. 송수화기를 들고 동전을 넣자 동전이 그대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전을 꺼내 다시 넣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몇 번 더 동전을 넣어보다가 포기하고 전화부스를 나왔다. 다시 부근을 둘러보았지만 전화기가 있을 만한 건물이 없었다. 그때 그가 들어갔던 건물 1층 가게 문 앞에 달려있는 조그만 전화기 한 대가 그의 눈에 띄었다. 가까이 가보니 전화기 번호판 위에 삐뚜름하기는 했지만 정성들여 쓴 글씨체로 <고장났슴> 이라고 씌인 쪽지가 붙어 있었다.

    사실 회사에 전화를 건다고 해도 영환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한 터였다. 버스가 사라져버렸다고 하면 회사에서 믿어주기나 하겠는가. 또 아무리 급했다고는 해도 버스를 길가에 세워 놓았었다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회사에서 해고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회사에 입히게 될 경제적 손실이 결국은 고스란히 자기 몫으로 돌아올 게 뻔했다.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영환은 덜컥 두려워졌다. 그것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영환은 갑자기 자신을 온통 사로잡는 두려움을 떨쳐버리려는 듯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버스가 오는지를 살펴보았다. 그제야 영환은 아직까지 회사 버스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은 것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가 화장실에 다녀온 것이 5분 정도였는데, 그러면 그동안 자기의 뒷차가 두 대 정도는 지나갔을 것이다. 여느 때는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 뒷차가 훌쩍 넘어가는 일은 별로 없었다. 웬만한 일이 아니면 앞차를 넘어가지 않는 것이 기사들 사이의 불문율이다. 그러나 오늘 같은 경우라면 영환의 차 뒤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그가 한참동안 나오지 않아서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29호나 37호가 올 차례였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회사차는 오지 않았다. 다른 노선의 버스들만 지나가고 있었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버스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택시라도 타고 얼른 회사로 가야 했다. 마침 버스 정류장을 몇 미터 지나서 택시 한 대가 섰다. 아기를 업은 여자가 내리더니, 뒷좌석에서 커다란 가방을 내리고 있었다. 영환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 아기 엄마는 뒷문을 열어 놓은 채로 잔돈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느 때 같으면 앞좌석에 탔겠지만, 그는 아기 엄마가 잔돈을 받아 들고 가버린 후 열려 있는 뒷문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개인 택시였다. 행선지를 묻는 룸미러 속의 기사는 지긋한 나이였다.

    영환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길가에 세워 놓은 버스를 훔쳐가리라고, 그것도 버젓이 회사 이름과 노선 번호가 적힌 차를 끌고 가리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는가. 세상에, 버스를 잃어버리다니. 영환에게서 탄식처럼 끙,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자기 버스인가. 거기에 버스를 대 놓고 일을 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자기인가. 영환은 자기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데 이런 일이 자기에게 생겼는지 누군가에게 따지고 싶었다. 그는 욕심부리지 않고 아내와 아이와 함께 큰 탈 없이 사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왔다. 더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딱 이만큼만, 정말이지 딱 지금처럼만 살면 족하다고 생각해왔다. 물론 때때로 불평하고 그리 대단치도 않은 일로 주변 사람들과 투닥거리기도 하지만, 그건 누구나 다 그렇지 않은가.

    어제는 영환이 택시를 할 때 같은 회사에 다녔던 명수와 술을 마셨다. 그는 회사를 옮겨 아직도 택시를 하고 있었다. 그는 개인 택시를 하는 것이 꿈이었다. 물론 그는 개인 택시를 할 자격이 있다. 영업용 자동차 3년 무사고 경력이면 개인 택시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그러나 자격이 있다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개인 택시의 수는 한정되어 있고 하려고 하는 사람이 많으니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얼마를 기다려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누구는 몇 년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십 년도 넘게 있어야 한다고도 한다. 그래서 당장 시작하려면 차 값 말고도 개인 택시를 그만두는 다른 기사한테서 소위 말하는 쯩을 사야한다. 거기에 드는 돈이 보통 중형차 값의 두 세 배는 훌쩍 넘는다. 명수는 돈이 조금 모이면 결혼 자금으로, 또 조금 모이면 월세에서 전세로 옮기느라 돈이 모일 새가 없다고 투덜거렸다.

    「명수씨도 버스를 한 번 해보지 그래?」
    「내가? 난 안돼.」
    「왜 안돼? 」
    「난 운전하다가 자꾸 졸아. 택시는 그래도 손님하고 얘기를 하거나, 혼자 졸음을 참기 힘들면 길가에 세워놓고 잠깐씩 눈을 붙일 수라도 있지. 버스는 그게 안되잖아.」

    사소한 것들이 발목을 잡는다. 차라리 어떤 큰 불행이 닥친다면 오히려 의연해질 수 있을 텐데, 늘 사소한 것들이 문제다. 그래서 생이 더욱 좀스러워지고 잡스러워진다. 그것이 더욱 견딜 수 없다. 그런 생각들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동안 몸이 많이 좋아졌으니 하루쯤은 괜찮을 거라고 방심했기 때문이었을까, 영환은 오랜만에 취하도록 마셨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회사 근처에 가까이 왔는지 택시 기사가 영환에게 좀 더 정확한 방향을 물어왔다.

    「다음 신호등에서 좌회전 신호를 받으면 됩니다.」
    그러나 잠시후 1차선으로 접어들던 택시 기사가 말했다.
    「여긴 좌회전 신호가 없는데요.」
    「네? 그럴 리가요.」

    영환은 두 개의 앞좌석 사이로 고개를 쭉 빼고 앞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멀리 보이는 신호등은 둥그런 세 개의 등만을 가지고 있었다. 노란 중앙선이 아예 끊어져 있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영환은 아침에만 해도 거기서 좌회전 신호를 받고 길건너 회사 차고지로 들어갔었다. 그곳은 교차로는 아니었지만, 매일 백 대가 넘는 버스가 드나드는 버스 회사가 있기 때문에 따로 좌회전 신호를 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없어져 버렸다. 택시는 한참 더 가서 횡단보도 앞에서 잠시 정차했다가 보행자 신호등이 켜지자 유턴을 해서 회사 차고지로 올라가는 길가에 영환을 내려주었다.

    택시에서 내린 영환은 실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자신의 삶을 뿌리부터 흔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버스를 잃어버렸을 때의 당혹감과는 다른 것이었다. 영환은 발걸음을 재촉해 회사 쪽으로 올라갔다. 회사까지 100 미터 남짓한 길을 걷는 동안 그는 회사 버스를 한 대도 보지 못했다. 여느 때 같으면, 이삼분에 한 대 꼴로 두 개의 노선 버스가 계속해서 차고지를 나올 터였다. 그런데 그가 회사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대의 버스도 지나가지 않았다.

    그는 회사 몇 미터 앞에서부터 푸른 색 타일로 외벽이 마감된 회사 건물이 보이자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건물에는 요금계와 조합 사무실과 식당이 있었다. 막차 순번들이 점심을 먹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 건물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그 뒤쪽으로 배차실 건물이 있다. 배차실 홍씨가 여느 때처럼 배차실 창구에 앉아 있을 것이다. 영환은 잠시 자기가 버스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남의 얘기처럼 멀게만 느껴졌다가 그들을 떠올리자 새삼 심란해졌다.

    영환은 서둘러 회사 입구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는 입구에 서서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차고지에는 버스가 한 대도 없었다. 길이 막히는 시간도 아니었다. 여느 때라면 몇 대의 버스는 차고지에 있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먼저 그의 눈에 띄인 것은 차고지 안쪽에 있던 간이 정비소가 없어진 것이었다. 대신 그 자리에 잡풀이 수북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동규의 버스가 브레이크에 문제가 생겼다고 정비소에 들어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배차실 앞이나 흙마당에서 서성이며 담배를 피우거나 잡담을 하는 기사들도 없었다. 여느 때와는 모든 것이 너무도 달랐다.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이 모두 없었다.

    영환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려고 했지만,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 보려고 하는데, 오래 닦지 않은 창은 뿌옇기만 했다. 흐린 창을 통해 보이는 사무실 내부는 어두컴컴했다. 한참 들여다 보자 차츰 사무실 집기들의 흐릿한 윤곽이 드러났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책상이며 의자들이 전부 뒤집힌 채 나동그라져 있었다. 사나운 무언가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폐허처럼 보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저 책상에 상고를 갖 졸업한 어린 송양이 중고생 회수권을 전화번호부에 붙이며 앉아 있었다. 언제나 풀이 시커멓게 말라붙어있던 그녀의 손이 영환에게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런데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녀도 없었다.

    영환은 창문에서 얼굴을 뗐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배차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쪽으로 가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인기척이 없는 것으로 보아 거기도 이미 폐허일 것 같았다. 문이 있었나 싶게 늘 열려 있던 배차실 문이 닫혀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영환은 배차실 쪽으로 걸어가 그 앞을 그대로 지나쳐 회사 밖으로 나왔다. 회사 안에 매점이 따로 없어 자주 드나들던 가게에 가보려는 생각이었다. 칠순의 노부부가 간판도 없이 그저 기사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던 가게였다. 여느 때와는 달리 가게의 문이 닫혀 있었지만, 미닫이 유리문 안쪽으로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가게에 딸린 쪽방에 걸터 앉아 방안에 있는 텔레비젼을 보고 있었다. 영환은 처음으로 아는 사람을 발견한 것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는 문을 열려고 미닫이 문 아래쪽을 살짝 들면서 문을 밀었다. 오래되고 낡아서 아귀가 잘 맞지 않는 문을 열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기사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문이 늘 닫혀 있는 겨울이면 가게에 다니는 것도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문은 밀리지 않았다. 분명히 잠긴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마치 문 두짝이 서로 이를 꽉 맞물고 있는 것처럼 조그만 틈도 생기지 않았다. 영환이 안간힘을 쓰느라 문이 덜컹거리는데도 할머니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문 유리를 두들겨 보았다. 그가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창창창 요란한데도 할머니는 그걸 못 듣는 것 같았다. 그는 방안의 텔레비젼 소리가 너무 큰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할머니가 고개를 돌려 얼핏 문쪽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마치 영환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뭐라고 혼잣말을 하는지 입을 움직이며 밖을 흘끗 내다보고는 다시 방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영환은 자신을 구해줄 유일한 밧줄에 손이 닿을락말락 했다가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놓쳐버린 기분이었다. 어쩌면 자신과 할머니 사이에 있는 것은 단순히 미닫이 유리문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유리문 안쪽은 딴 세상인가. 아니면 이쪽이 딴 세상인가.

    영환은 다시 회사 마당으로 돌아왔다. 회사 안은 여전히 지독한 정적뿐이었다. 요금실과 조합 사무실, 식당 등이 있던 건물과 배차실 건물, 집이 먼 기사들을 위한 숙소 건물 등을 천천히 둘러보던 영환은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비소가 있던 자리, 지금은 풀이 수북하게 자라있는 그 쪽으로 얼핏 사람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그쪽이 유난히 환해 보였다. 20여 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그 곳에 사람의 윤곽이 흐릿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선명하게 보였을 거리였는데, 볕이 환하게 쏟아져서 그런지 눈이 부셔서 자세히 보려고 하면 할수록 그 형체 위에 생긴 초록색 점이 점점 커졌다. 그 커다란 초록색 형체가 정비소 옆 기사 숙소 건물 쪽으로 가더니 벽에 기대어 앉았다.

    눈이 차츰 적응되자 그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내는 바로 영환 자신이었다. 영환은 허깨비를 보는 것은 아닌지 자꾸 눈을 감았다 뜨며 다시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자세히 보려고 하면 할수록 그 사내의 형체가 점점 까맣게 지워지는 것 같았다. 이제는 눈도 너무 따가웠다. 영환은 갑자기 왈칵 눈물이 났다. 그것은 정말 영환 자신이었다.

    영환은 오후반 근무를 위해 출근해서 배차시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 때면 그 벽에 기대어 앉아 햇볕을 쬐곤 했다. 현장 배차였기 때문에 오후 근무일 때는 배차시간을 미리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나오는 날이 많았고, 길이라도 많이 막히는 날이면 배차시간까지 오래 기다려야 했다. 다른 기사들은 배차실에 모여 잡담을 하곤 했다. 일 끝나고 술을 마시자든지, 어제 누가 막차를 했다든지, 누가 사고가 났다든지, 이승규씨가 또 대포를 놓았다든지, 그가 그렇게 자꾸 무단결근을 하다가 결국은 기사들 사이에서 똥차로 불리는 09호로 좌천당했다든지, 뭐 그런 얘기들이었다. 영환은 그런 시시콜콜한 잡담 보다는 그냥 따뜻한 담벼락에 기대어 앉아 있는 게 좋았다. 그렇게 앉아 담배를 피고 있으면 점심 도시락도 없이 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곤 했다.

    그의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만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시장에 좌판을 벌이긴 했지만 하루 세끼를 먹는 일조차 힘들어졌다. 그나마 암 말기에 발견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이렇다 할 치료 한번 제대로 못받고 돌아가셨다.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마저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 후로 영환은 자주 도시락을 싸가지 못했다. 그런 날이면 그는 슬그머니 교실에서 나와 운동장 한 켠에 있는 수돗가에 가서 수도꼭지를 물고 물을 실컷 마신 다음, 아이들이 잘 다니지 않는 강당 뒤쪽으로 가서 볕이 따뜻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곤 했다. 거기까지 걸어가는 동안 그는 몸 속에서 물이 출렁거리는 것 같았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는 그의 몸 전체로 따뜻한 햇볕이 골고루 쏟아졌다. 그렇게 눈을 감고 오래 앉아 있으면, 따사로운 햇살이 그의 갈비뼈 사이사이로 스며들어 그의 몸 안에 가득한 물기를 말려주는 것 같았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햇살이, 그저 거기 앉아 있는, 물배를 채운 허기진 아이의 허파 가득 따뜻한 바람을 넣어 주었다.

    벽에 기대어 앉아 햇볕을 쬐는 버릇은 그 때 생긴 것이었다. 영환의 허우대에는 어울리지 않게 해바라기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배차표를 받아야 할 때까지도 영환이 그러고 있으면 다른 기사들이, 어이, 해바라기, 이제 나가야지, 그렇게 영환에게 소리쳐 주곤 했다.

    영환이 찔끔 고인 눈물을 손등으로 쓱 훔치고 다시 그쪽을 쳐다보았을 때 이미 그 형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이 거기 나타났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지만,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진 것도 믿을 수 없었다. 영환은 그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햇빛 속을 허청허청 걷고 있는 것이 자기 자신인지조차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방금 전에 자신이 기대어 있던 숙소 건물의 붉은 벽돌담을 만져보았다. 햇볕에 달구어진 벽돌은 따끈따끈했다. 영환은 다시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사방은 적막으로 가득했다.

    영환은 회사를 천천히 빠져나왔다. 그러면서 자기가 무슨 최면에 걸린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최면에 걸리지 않고서야 이렇게 이상한 일을 겪을 수 있을까. 이것이 꿈이라면, 빨리 깨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끔 나쁜 꿈에서 깨어나서 꿈이었으니 다행이라고 말할 때처럼, 그저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돌아갈 곳이 집밖에 더 있겠는가. 빨리 집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이 이상한 일을 얘기하고 나면 모든 최면이 풀리지 않을까, 모든 꿈에서 깨어나지 않을까.

    영환의 집은 회사에서 택시로 5분 거리에 있었다. 새벽에 출근하거나 자정이 넘어 일이 끝나곤 했기 때문에 그의 직장 동료들도 대부분 회사 가까이에서 살았다. 영환이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짜리 주공 아파트에 전세를 얻어 들어간 것은 1년 전의 일이었다. 504호. 그나마 꼭대기층이라 다른 집보다 값이 쌌다. 그와 그의 아내는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부동산 중개인이 먼저 너스레를 떨었다. 사람들이 보통 사(死)자를 싫어해서 아파트에는 4호집이 없는 경우가 많지만 그거 다 미신이라는 것이다. 집을 계약하고 돌아가는 길에 그의 아내도 좀 꺼림칙하다고 하면서도 404호보다는 낫지 않냐면서 웃었다. 그때 그들에겐 그런 것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매달 집세가 나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전세로 옮기면서 아내는 이제 돈을 좀 모을 수 있을 거라면서 좋아했었다.

    택시가 112 동(棟) 앞에서 멈췄다. 차에서 내린 영환은 습관적으로 자기 집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단숨에 5층까지 걸어 올라갔다. 숨을 몰아쉬면서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아내가 아이와 같이 잠들었나 보다고 생각하면서 잠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서 열쇠 구멍에 넣고 돌렸다. 열쇠는 돌아가지 않았다. 열쇠를 구멍에서 뺐다가 다시 넣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열쇠를 다시 구멍에서 빼낸 영환은 문에서 한 발짝 물러나 문을 쳐다보았다. 그는 다시 한 번 놀랐다. 거기에는 505라고 씌어 있었다. 분명히 계단을 올라와서 오른쪽에 있는 집이 자기 집이었다. 문에 씌어 있는 호수를 자세히 본 것은 이사오고 며칠뿐이었지 늘상 습관처럼 문을 드나들었다. 누가 매일 자기집 문의 호수를 확인하고 들어가겠는가. 영환은 뒤를 돌아다 보았다. 신혼부부가 사는 앞집에는 여느 때처럼 503호라고 씌어 있었다. 503호의 초인종을 눌러 보았다. 그러나 맞벌이 부부가 대낮에 집에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은 그 자신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자기 집 문에다 귀를 대 보았다. 아무 기척도 없었다. 문을 두드리며 아이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역시 아무도 나와 보지 않았다. 영환은 계단을 하나 내려와 털썩 주저 앉았다.

    그는 맥이 탁 풀렸다. 이게 다 뭔가. 이게 다 뭐란 말인가. 그때 문득 영환에게 화장실 문에 붙어 있던 것이 떠올랐다. 정말 그것 때문일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 모든 일들이 그 종이 쪽지 한 장 때문이란 말인가.

    물을 내리지 마시오.
    물은 모든 것을 다 쓸어가 버립니다,
    마치 세월처럼.
    단 한 번 보았을 뿐인 그 문장이 신기하게도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이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영환은 화장실의 물을 흘려 보냈을 뿐이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모든 게 사라지다니.

    그때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영환은 얼른 몸을 일으켜 계단 사이로 난 틈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발소리가 3층에서 멈추고 문이 한 번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나고는 그만이었다.

    영환은 다시 힘이 쭉 빠졌다. 그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면서 문마다 호수를 살펴 보았다. 403, 405, 303, 305, 203, 205, 103, 105. 밖으로 나와 아파트 현관을 돌아다 보니, 112 라는 숫자를 사이에 두고 3과 5가 씌어 있었다.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서 보니 왼쪽 라인에는 1과 2, 오른쪽 라인에는 6과 7이 씌어 있었다. 더 볼 것도 없었다. 4호 라인은 모두 사라진 것이다.

    영환은 터벅터벅 아파트 단지를 걸어나왔다. 영환에게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라거나, 대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영환은 그저 허깨비처럼 걷고 있을 뿐이었다.

    아파트 입구에 이르자 공중 전화 부스가 영환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공중 전화 부스로 들어가 아는 사람들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럴 줄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그는 더 낙담도 하지 않고 전화 부스에서 나왔다.

    그가 아는 사람, 그를 아는 사람과는 아무하고도 만날 수 없었다. 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가 김영환이라고 소리쳐 봐야 그들은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고 물어올 참이었다. 그들에게 영환은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였다. 그제서야 영환은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를 증거해 주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 아내였고 아이였으며, 직장 동료들이었던 것이다. 어느날 문득 자기가 몰던 버스가 사라지자 모든 것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사라지자 자기를 증거해 줄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그가 분실한 것은 버스만이 아니었다. 그는 직장을 잃어버렸고, 집을 잃어버렸고 아내와 아이마저 잃어버렸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영환은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분실당한 것은 아닐까. 이 세상에서 내가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까. 그럼 여긴 어딘가.

    찻길에 나왔으나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휙휙 지나가는 차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환에게 불현듯 아까 그 화장실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어 택시를 세웠다. 여느 때 같으면 택시 기사와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 받았겠지만,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내내 그는 앞만 노려보고 있었다.

    아까 그 건물 앞에는 버스 한 대가 서 있었다. 택시 기사가 버스 뒤에 영환을 내려주었다. 영환은 택시에서 내려 버스 안팎을 주욱 살펴 보았다. 그 앞을 지나는 다른 노선의 버스였다. 승객 몇 명이 앉아 있고 기사는 없었다. 영환은 갑자기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가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에게 말해야 한다, 물을 내려서는 안된다고. 화장실에 도착했을 때 물 내리는 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문을 열고 나왔다.

    「물을 내렸습니까?」
    그가 아무 대꾸도 없이 영환을 이상하게 쳐다본다. 곧 닥쳐올 불행을 까마득히 알지 못한 채. 영환은 열린 화장실 문을 다급히 닫았다. 문에는 예의 그 종이쪽지가 아직도 붙어 있었다.
    아차, 버스. 그제야 영환은 버스가 어떻게 되는지, 어디로 사라지는지를 지키고 서서 보았어야 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영환을 흘끔거리며 내려가던 기사를 지나쳐 후다닥 아래로 내려와 밖으로 나와보니, 역시 버스는 없었다. 영환은 뒤돌아 보았다. 아까 그 사내의 놀란 눈이 영환의 눈에 들어온다.

    영환은 축 늘어진 두 팔에 매달려 있는 손을 들어 손바닥을 들여다 보았다. 손을 뒤집어 손등을 보았다. 그것은 분명 영환 자신의 손이었다. 그럼 이건 뭔가. 이건 뭐란 말인가. 영환은 두 손을 얼굴로 가져가 마른 세수를 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 있는 건물을 다시 쳐다보았다.

    영환은 그렇게 오래도록 멍하니 서 있었다. 마치 환영(幻影)처럼.
    노재희

    노재희

    1972년 경기 수원

    1991년 서울 서초고 졸업

    1992년 성균관대 국문과 입학, 1993년 중퇴

    2000년 고려대 철학과 졸업

  • 박완서(소설가), 김화영(문학평론가)

    예선에서 올라온 열한편의 단편은 수준이 그만그만해서 당선작을 고르는데 애를 먹었다. 경험이나 사색에서 우러난 절실함이 빠져있어 도대체 이런 소설을 왜 썼을까 감이 안잡히는 게 가장 괴로웠다.
    문학지망생들이 소설을 만드는 기교 위주로 문학교육을 받은 결과 하향평준화된 게 아닌가하는 주제넘은 걱정까지 머리를 스치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예년과 달라진 작품 경향 때문이었는지 예년에 비해 장시간 논의를 한 끝에 당선작으로 결정한 노재희씨의 '그날 저녁, 그는 어디로 갔을까' 또한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택시를 몰라다 버스로 전업한 운전기사 이야기인데 운전중 참을수 없는 생리현상으로 승객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급한 일을 해결하고 돌아와보니 버스가 승객과 함께 온데 간데가 없다. 사라진 건 버스뿐만이 아니다. 그에게 가장 익숙한 버스회사나 교통신호체계까지도 없어지거나 뒤바뀌어있다. 단골가게는 그가 익숙한 방법으로 연 문이 열리지않을뿐 아니라 유리창 밖에 선 그를 주인할머니의 시선은 마치 투명인간 보듯 무심히 스쳐간다. 이제 믿을 건 가족밖에 없다. 그러나 그가 당도한 그의 아파트 단지는 낯익었지만 4호 라인 자체가 없는 아파트이다. 그는 4호라인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섬칫하도록 치밀한 리얼리즘을 획득하고 있는 처럼 느껴지는 건 무슨 까닭일까. 그건 아마 이 사회의 부품으로 살아갈 수 박에 없는 현대인 공통의 잠재의식과 악몽을 적나라하게 들어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그에게서 사라진 사물들이 어디로 갔을까, 라고 묻지않고 그는 어디로 갔을까,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서희(본명 이순희)씨의 '남아있는 나날들'도 놓치기 아까웠다. 고부간의 갈등과 화해라는 진부하고 상투적인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요즘 소설에서 점점 희박해가는 인간에 대한 따뜻하고 연민어린 응시가 있어 뭉클하게 가슴에 와닿았다. 정진을 빈다.
  • 노재희

    노재희

    1972년 경기 수원

    1991년 서울 서초고 졸업

    1992년 성균관대 국문과 입학, 1993년 중퇴

    2000년 고려대 철학과 졸업

    나는 햇빛을 거울에 모두어 들여 장난치기를 좋아한다. 초점을 잘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거울은 세상에 두루 퍼져있는 것을 모아낼 줄 안다.
    거울은 사물을 비추어 주지만, 보이는 그대로 비추는 법이 없다. 거울은 그냥 보아서는 잘 보이지 않는 사물의 이면(裏面)을, 때로는 배면(背面)을 보여준다.

    거울을 들여다 본다.
    거울은 오랫동안 나르시시즘과 동의어였다. 사람들은 자꾸 자기를 보고 싶어한다. 거리를 걸으면서 쇼윈도를 옆으로 슬쩍 바라보는 그들은, 진열된 물건이 아니라 유리에 비치는 자기를 본다.

    언제부턴가 나는 거울 속에서 타자를 보기 시작했다. 약간 비켜 서서 거울을 보면, 거울 속에서 내가 사라지는 대신, 내가 정면으로 거울을 응시할 때 나한테 가려서 보이지 않던 타인들이 보인다. 처음엔 거울에 비치지 않던 그들이 내가 비켜 서는 만큼 거울 속으로 들어온다.

    거울은 정직하게 꼭 반사각만큼 그들을 비춰준다. 그 반사각을 넓혀 가는 것은 이제 앞으로 나의 몫이다.

    어떤 것을 오래 생각하고 오래 바라보면 그것과 가까워질 수 있다는 믿음을 확인하게 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고대문학회 형들, 소설을 읽어주신 황선생님, 따뜻한 가족과 오래된 벗들, 그리고 내 인생의 同志 승하형에게 한 소식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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