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표절'이라는 용어를 쉽게 사용하고 있는 우리는 이 단어가 지시하고 있는 의미를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표절'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러한 오해는 더욱 합리화, 정당화된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표절'이란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확언할 수 있을까? '표절'이 누구나 인식할 수 있는 명석판명한 개념이라면, 표절작의 판별 기준이 개인마다 천차만별의 차이가 있음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표절'이 한 사회의 예술 윤리 규범에 어긋나는 비도덕적인 행위라는 '사회적인' 전제에 동의한다면, 실제의 구체적 사항에서 사회구성원 개개인이 저마다 다른 준거의 틀을 제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특수한 상황에서의 준(俊) 전문 용어처럼 사용되었던 '표절'이 요즘같이 단순한 일상어 차원에서 광범위하게 쓰이게 된 사회 문화적 맥락을 고려해볼 때, 이 용어 안에 내포된 문제점들과 적용상의 한계를 고찰해보는 것은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우리는 이 용어를 매우 적대적, 공격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역사적으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이론화, 개념화 작업이 예술 실제보다 뒤쳐진 실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고는 하지만, '표절작(剽竊作)'이라고 하면 막대한 관심이 모아지고 큰 논란이 야기되는 우리 현실을 고려해볼 때 '표절'이라는 특정 행위를 나타내는 용어에 대해 이 개념이 사용되고 있는 제 분야에서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연구된 바도 없으며, 이에 대한 학적 접근조차 미비한 상태라는 사실은 반성의 여지가 있다.
사회적으로 한 개인 혹은 집단의 창작물에 대해 논할 때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지는 '표절'에 관하여 올바른 개념 정의가 필요하다. 만일 '표절'에 대한 보편타당한 정의를 내릴 수 없다면 그 까닭은 무엇일까, 수많은 하위개념들이 중첩된 포괄적인 이 용어 자체 내에 본질적으로 정의되어질 수 없는 성질을 함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근 몇 년 전부터 대중음악계의 화두로 대두된 표절시비론 이 가진 의의와 한계를 보다 효과적으로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2. '표절'의 사전적 정의와 개념 분석
'표절(剽竊)'의 어원은 '빼앗다, 훔치다, 겁주다, 협박하다'라는 의소들을 가진 '표(剽)'와 '좀도둑'이라는 뜻의 '절(竊)'이 합성된 것으로, 사전상의 정의는 '남의 시나 문장을 훔치어 제가 지은 것처럼 발표하는 일'이다. '표절'이라는 단어는 이미 중국 당나라 문장가 유종원(柳宗元)의 문집과 『제북집』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시경>의 싯귀를 따서 자기 작품에 인용하는 것이 전통적인 작시법으로 간주되었던 동양 한자문화권에서도 이미 천여 년 전부터 '표절'이라는 개념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사실이다.
'표절'을 뜻하는 영어 단어에서도 같은 현상들을 찾아볼 수 있다. 'plagiarism'은 '유괴하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plagiari'에서 유래했고, '장물(臟物)'의 의미를 가진 'plunder' 역시 '불법 점유, 무단 사용'의 뜻에서부터 '표절'을 의미하게 되었다. 'piracy'는 '해적질'이라는 그리스어 'peirates'에서부터 '표절'의 의미도 함께 지니게 되었다.
'표절' 개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도덕적인 행위라는 점을 강조한 철저한 윤리적 개념임을 알 수 있으며, 그 구체적인 판단 기준은 언급되고 있지 않음을 볼 수 있다. '표절'의 사전적 정의 안에 내포된 핵심은 표절이 '도둑질'이라는 비도덕적인 범죄 행위라는 사실이다. 여기에서는 한 개인이 타인의 창작물을 '베꼈고', 그 출처를 명시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것이 마치 자신의 창작품인 양 '속이려'했다는 몇 가지 전제들이 인정된다. '표절'이라는 단어 자체가 '도둑질'이란 표현이 동어 반복적으로 쓰인 것임을 앞서 살펴보았다. 위의 문맥에서 해석해볼 때 그것은 남의 것을 무단으로 제 것으로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또한 그로 인해 부당한 경제적 이득을 취하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중첩된 도둑질'이라 힐 수 있을 것이다. 일상언어 차원에서 우리가 이 용어를 그처럼 적대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표절'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로 들어가보면 이 용어가 가진 가장 뚜렷한 특징은 바로 '애매모호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표절'의 정의 안에는 '어디까지가 표절인가'라는 범위와 기준이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표절'의 정의는 우리에게 표절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있다고 볼 수 없다.
'표절'이란 작가성의 문제와 근본적으로 연관된다. 표절작에는 그 행위 주체가 되는 '표절을 저지른 작가'가 전제된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작품이 그 작가의 소유이자 정신적인 자식으로까지 간주되는 근대의 예술관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한 작품이 특정 작가로부터 탄생했기 때문에 그의 전유물이라는 사고방식은 다분히 가부장적인 발상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이것을 단순히 전근대적인 사고에서 출발한 권위주의적 예술가 지상주의라고 단정해버리기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 더욱 막강한 지지기반 위에 자리잡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이 예술을 "청중들이 소비할 수 있는 상품을 생산해내는 자본주의적 산업"으로 간주함에 따라 예술의 상품성은 더욱 주목받게 되었고, 이때 독자적인 개별 예술들의 가장 큰 경쟁력이 되는 '독창성'이 전면적으로 부각되게 되었다. 최근 표절시비가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는 대중음악에 있어서 표절의 문제는 윤리나 도덕적 차원보다는 저작권과 관련된 경제적인 문제와 직결되는 양상을 보인다.
윤리적인 의미에서 볼 때, 표절은 작자 개인의 양심의 문제이다. 이렇게 볼 때 한 작품이 표절인가 아닌가의 진위는 오직 그 작가 당사자만이 알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표절'을 쉽게 정의할 수 없는 가장 큰 한계가 여기에서 드러난다. 작가 자신이 일부러 고의에 의해 표절행위를 했을 때를 제외하고, 어떤 작가라도 자신의 활동이 순수 창작 활동인지 아니면 표절 행위인지 인식론적으로 명석하게 인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인 표절'은 창작 행위를 하는 어떤 인간에게도 가능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표절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i) 작가에 의해 의도된 표절 - 작품에서 드러난 경우
ii) 작가에 의해 의도되었으나 타인은 알아볼 수 없도록 변조된 경우 - 완전범죄
iii)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으나 작품에서 드러난 경우
iv) 작가도 의도하지 않았고 타인도 알아볼 수 없으나 표절이 성립된 경우
네 번째의 경우는 순전히 이론적인 상황이지만, 우리는 이에 대한 가정을 충분히 해볼 수 있다. 작가가 작품을 창조해내는 과정은 천지창조에 비유되기도 하며, 고대로부터 예술가를 신적인 개념에 대입시키는 유비를 가능하게 할 만큼 언어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몇몇 미학자들의 이론을 따라 작품 감상의 과정도 창조의 차원에 포함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작가에 의해 작품을 매개로 우리에게 전달된 메시지를 재구성하는 과정도 그리 논리적인 것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위의 유형들 중에서 첫 번째와 세 번째의 경우-실증적 근거인 결과물을 보고 우리가 명백하게 표절이라 부를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표절'을 완전히 수용자의 입장에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표절'의 개념이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므로 각 사회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는 점과, 당대에 미처 발견되지 않았던 어떤 외부적 사실이 후대에 가서 발견될 수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표절'의 정의와 그 적용범위는 동시대인들의 인식 범위 이상으로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3. 음악에서의 사용(使用)
서양 예술음악 역사에서 '표절'은 낯선 용어가 아니지만, 그 개념을 정의하는데 있어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전통적으로 서양음악에서는 모방과 차용 기법을 정당한 작곡 기법으로 인정해왔다. 이것은 넓은 의미의 패러디(parody) 기법으로, 그 기원은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양 음악 자체가 기존의 그레고리안 성가 선율을 정선율로 두고 그를 바탕으로 해서 작곡을 하는 일종의 패러디에서부터 발전된 장르이므로, 역사적으로 서양음악은 '차용'에 대해서 매우 관대한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인정된 이러한 차용에 대해서 과연 '표절'이라는 명칭으로 불러도 될 것인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앞서 강조했듯 표절이란 분명한 도덕적 가치판단을 함의한 개념이다. 바흐나 헨델을 가리켜 '표절 작곡가'라 칭한다면, 이들의 '범죄 행위'를 증명할만한 논리적인 근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설사 '표절'은 작품에 내재한 미적 가치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해도, 다시 말해 표절작이 원작과 비교해 미적 가치가 월등히 뛰어날 수 있다고 해도 이들이 차용한 작품에 대해서 이것들을 표절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표절 개념이 분명 사회적인 것이고 사회가 변함에 따라 그 기준이 변함을 인정한다면, 바흐와 헨델이 살았던 동시대의 음악 사회적인 기준으로 보았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표절의 개념보다 훨씬 더 광의적인 표절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대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정당한 작곡기법을 우리의 관점으로 해석해서 표절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옳지 않다.
음악에서 전통적으로 패러디 기법을 인정했다는 사실은 음악에서의 표절 범위를 설정하는데 있어 근본적인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다. 일단 위에서 살펴보았던 '표절'의 개념에 충실하여 음악에 있어서의 표절을 정의해본다면 다음의 개략적인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표절은 '1)남의 것을 2)무단으로 3)자기 작품인 양 발표하는 것'이므로, 이 정의에 충실한다면 "자기 표절"이란 말은 어불성설이다. 바흐가 자신의 작품을 수도 없이 개작하고 차용해서 만든 작품들은 그 정의에 입각해서 볼 때 표절이 아니다. 다만 마테존, 프레보스트, 샤이베, 예넨스 등 당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차용하여 그들로부터 공개적인 비난을 받았던 헨델의 경우는 다른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음악에 있어 '인용'의 출처를 밝히는 것은 작품 자체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작곡가가 굳이 따로 글을 써서 자신의 인용 사실을 밝히기 전에는 작품 안에 내재한 음악 어법만으로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그가 의도적으로 누구나 아는 선율을 써서 청중으로부터의 특별한 효과를 누렸다해도 이 '누구나'라는 개념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 설득력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주지하다시피 대중음악은 기법과 양식상으로 서양음악적인 것이다. 서양음악이 가지고 있었던 '표절'의 문제점, 즉 작곡에서 '차용'을 본래적으로 허용한 데 따른 표절 개념 설정과 판단의 어려움이라는 근본적인 한계가 고스란히 대중음악의 영역으로 넘어오게 된다. 이에 더하여 대중음악은 서양 조성음악이 보다 단순화된 형태를 띄고 있기 때문에, 일정 틀에 맞춘 구조화된 음진행이 더욱 빈번하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문제들이 첨가된다. 비슷한 멜로디 진행을 놓고 표절인가 우연인가를 밝히는 것은 이러한 대중음악의 구조상 매우 어려운 일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표절 시비가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는 대중음악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의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특히 댄스음악의 경우 기존의 패러디나 패스티쉬(pastish)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발달로 샘플링이나 리믹스 같은 보다 직접적인 짜깁기 기법이 이미 일반적으로 실행되고 있는 우리 대중음악 현실에서 '표절작'을 규정한다는 것은 많은 논란의 여지를 내포하고 있다.
4. 법적 제한과 판단기준의 미약성
한국 공연 윤리 위원회에서 만들어졌던 국내 창작곡의 표절 기준에 관한 규정은 공윤이 공연예술 진흥협의회로 바뀐 후 무효화되었고, 그 이후 음악의 경우에 있어서의 표절은 저작권자가 직접 고소를 해야만 그 혐의가 법적으로 인정되는 친고죄(親告罪)로 바뀌었다. 1999년 공연예술진흥 협의회가 해산되었지만 개인끼리의 소송으로써 표절 여부를 판가름하는 이같은 표절의 법적 판단 원칙은 유효하다.
표절이 저작권법에 의해 저촉을 받으려면 일단 원작이 저작권상으로 보호받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표절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 저작권법의 한계이다. 수용자의 입장에서의 표절에 대한 추정으로 저작권법에서 사용하고 있는 방법론은 표절 판단의 객관적 기준을 제시한다기보다는, 사실상 '표절작'의 판단이 개개인의 주관에 상당 부분 의지한다는 사실만 강조해준다.
저작권법에서 말하는 아이디어와 표현의 이분법 역시 표절의 문제에 있어 많은 논란의 여지를 제공한다. 우리나라 대법원에서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되는 저작물은 (중략) 사람의 정신적 노력에 의해 얻어진 사상 또는 감정의 창작적 표현물이어야 하므로 저작권법이 보호하고 있는 것은 구체적으로 외부에 표현한 창작적인 표현 형식이고, 그 표현되어 있는 내용, 즉 아이디어나 이론등의 사상 및 감정 그 자체는 원칙적으로 저작물이 될 수 없으며 창작인격권, 저작재산권의 보호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한 판례는 미학적인 논쟁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특히 음악의 경우에 있어 그 아이디어와 표현형식을 구분지어 말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한슬릭의 "음악의 내용은 음으로 울리는 형식이다"라는 정의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서양음악의 입장에서 이러한 법적 전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실상 "창작이란 무엇인가" 더 나아가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까지 귀결된다고 볼 수 있다.
저작권법이 정의하는 '표절'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으며, 더구나 이것이 친고죄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소송을 통한 표절시비의 해결 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일반 소비자들의 '표절시비'가 표절문화 근절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5. 대중음악 표절시비론의 현 상황 -그 한계와 의의
'정보사회의 도래'라는 말이 회자되기가 무섭게 각 가정마다 PC가 빠른 속도로 보급되었고, 불과 5년 남짓한 시간동안에 인터넷 문화가 우리 사회 속속들이 파고들었다. PC통신과 웹 상에서 이루어지는 담론은 이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여론 형성의 장 가운데 하나로 부각되었다.
90년대 들어서 표절시비는 이러한 PC통신의 위력을 등에 업고 급부상하게 된다. 이전까지 표절시비론이 각 분야 전문가들의 전유물이었다면, 인터넷 문화가 보급된 이후의 표절시비는 완전히 불특정 일반 개인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PC통신의 동호회나 각종 홈페이지의 게시판이 이러한 표절시비론의 장 역할을 하고 있다. 컴퓨터 전원을 켜는 것만으로 누구든지 사회적 쟁점이 되는 '표절시비'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90년대 들어서 갑자기 각 분야마다 표절시비가 불거지게 된 데에 대한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더욱이 '표절'이라는 엄연한 사회적 범죄행위에 대하여 법적인 제재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시점에서 이들의 관심과 감시는 더욱 중대한 임무를 띄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과거 수년 동안 표절시비에 휘말린 가수가 은퇴선언을 했고, 한 TV 드라마는 일본 드라마를 표절했다는 이유로 중도하차했으며, 해당작가는 작가협회에서 영구제명된 바 있다. 이전까지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이러한 사건들은 일반 대중들이 적극적인 표절작 감시자로 대두됨에 따라 가능하게 된 일들이다.
그러나, 과거 전문가들의 영역이었던 '표절시비'가 일반 대중의 손 안으로 내려오게 된 것은 몇 가지 심각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한 작가와 작품이 표절시비에 올랐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매장당할 수 있는 우리의 사회적인 인식과 풍토에서부터 기인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표절'의 어의 안에는 명백한 범죄행위라는 함축이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결과물인 표절작보다 그러한 '범죄 행위'를 범한 표절작가에 대한 사회로부터의 비판이라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창조성을 생명으로 하는 작가정신이 전제되는 예술가가 표절시비에 휘말린다는 사실 자체가 작가로서의 삶에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적인 표절시비 논의가 하나의 권력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대중문화 평론가 김지룡의 지적대로 이제는 조금만 비슷하면 '베꼈다'고 몰아붙이는 태도가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창조적 모방이 아닌 '표절'의 엄격한 단속과 처벌에 대해서는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동의하고 인정하지만, 그 기준에 대해서는 어느 쪽에서도 뚜렷한 대안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불특정 다수가 표절시비의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그들이 비전분가 집단이기 때문이 아니라, 표절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중가요의 표절을 고발하고 있는 많은 사이트들에서 단정적인 판단을 자제하고 '표절 의혹곡'이라는 식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표절 작품 판정이라는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기 전에 얼마나 많은 주관이 개입될 소지가 있는가 하는 점 역시 사회적인 공감을 얻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6. 결론 -대안적 모색으로서의 표절 시비
"법으로 표절을 단속할 수 없다"는 말의 의미는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뚜렷한 법적 기준으로 표절을 명문화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을 대중음악에 적용시킨다면, 법으로는 최소한의 분명한 극소수 표절작만을 가려낼 수 밖에 없다는 한계를 말한다. 적어도 대중음악에 있어서는 법에 저촉되지 않았다고 해서 표절이 아니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표절이 성행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것은 근절되어야만 할 어떤 것이다. 표절은 범죄 행위지만 법의 그물망으로 해결되지 않는 표절작들이 있다. 아마 앞으로도 그의 법적 기준은 마련되지 못할 것이다. 법적 기준으로 표절 진위를 가리는 것은 불가능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표절의 혐의가 있는 작품들은 존재한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러한 현실을 놓고 볼 때 현재로서 대중음악의 표절 근절을 위한 가장 강력한 대안으로는 '표절 시비론'의 활성화에 기대하는 수 밖에 없다. '표절'이 사회적인 개념인 이상 그 옳고 그름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서는 독단적이고 일방적인 설교보다 의견의 주고받음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그 과정에서만 사고의 성숙과 발상의 전환을 기대할 수 있다. 여기서 표절시비론이란 단순히 한 작품의 표절작 여부를 판단하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체적인 작품을 바탕으로 '표절' 개념에 대한 끊임없는 재해석 작업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현 대중음악 표절 관련 논의들은 진정한 표절시비론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본다.
한편, 대중음악 변화에 따른 시류에 맞추어 '표절'이라는 개념의 탄력 있는 적용이 필요하다. 대중음악에서의 표절곡을 청자의 관점에서 도덕적인 '의도'로써만 파악한다는 것은 인식론적으로 불가능한 것일 뿐 아니라, 창작자의 의욕을 북돋움으로써 문화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본래의 표절 근절 목적과는 달리 반대로 독창적인 작품 생산의 가능성마저 저해할 수 있다. 현재의 대중음악 표절시비는 "이 곡은 표절인 것 같으니 한 번 들어보시오"라는 식이다. 이러한 접근은 표절작 판단을 위한 단초가 될 수는 있으나 피상적이고 비논리적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위험한 것이라는 자각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판단만 있고 근거는 없는 현재의 대중음악의 표절시비가 '표절 문화 근절'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에 얼마나 이바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표절작을 판단하는 작업은 미학적이고 전문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좋은 예술 작품'을 판단하는 것과 비슷한 정신활동 영역이다. 표절작 여부를 가리기 위해서는 그 작품 분석과 이해에 정통해 있어야하고 그러한 가치 판단을 내리게 된 뚜렷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기준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좋은 예술'을 법으로 정의할 수 없듯이 '표절작'의 법적 기준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표절을 법이 아닌 미학적인 문제로 보는 관점은 그에 대한 논의가 현재 실행되고 있는 표절시비론의 차원을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 특히 현재의 대중음악 표절시비가 비논리와 무책임으로 인하여 도리어 폭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시점에서 '표절 혐의작'들에 대한 체계적이고 진지한 담론의 교환이 절실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최현영
1974년 서울 출생
1993년 서울 명지여자고등학교 졸업.
1997년 이화여자대학교 불문학과 졸업(철학 부전공).
2000년 12월 월간 평론가상 입선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음악학과 재학중
'표절'이라는 용어를 쉽게 사용하고 있는 우리는 이 단어가 지시하고 있는 의미를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우리가 정말 '표절'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확언할 수 있을까? '표절'이 누구나 인식할 수 있는 명석판명한 개념이라면, 표절작의 판별 기준이 개인마다 천차만별의 차이가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특수한 상황에서의 준(俊) 전문 용어처럼 사용되었던 '표절'이 요즘같이 단순한 일상어 차원에서 광범위하게 쓰이게 된 사회 문화적 맥락을 고려해볼 때, 이 용어 안에 내포된 문제점들과 적용상의 한계를 고찰해보는 것은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우리는 이 용어를 매우 적대적, 공격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90년대 들어서 표절시비는 PC통신의 위력을 등에 업고 완전히 불특정 일반 개인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 여기서 불특정 다수가 표절시비의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그들이 비전문가 집단이기 때문이 아니라, 표절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표절'이라는 단어는 '도둑질'이란 표현이 동어 반복적으로 쓰인 것으로, 그것은 남의 것을 무단으로 제 것으로 만들고 그로 인해 부당한 경제적 이득을 취하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중첩된 도둑질'이라 할 수 있다. '표절'의 정의는 결과물인 표절작보다 그러한 '범죄 행위'를 범한 표절작가에 대한 비판임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창조성을 생명으로 하는 작가정신이 전제되는 예술가가 표절시비에 휘말린다는 사실 자체가 작가로서의 삶에 치명적일 수 있다.
이는 사회적인 표절시비 논의가 하나의 권력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표절에 대한 법적 기준이 부재한 현 시점에서 대중음악의 표절 근절을 위한 가장 강력한 대안으로 '표절 시비론'의 활성화에 기대할 수 밖에 없으나 현재의 대중음악 표절시비는 "이 곡은 표절인 것 같으니 한 번 들어보시오"라는 식이다. 이러한 접근은 표절작 판단을 위한 단초가 될 수는 있으나 피상적이고 비논리적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위험한 것이라는 자각이 항상 필요하다. 판단만 있고 근거는 없는 현재의 대중음악의 표절시비가 '표절 문화 근절'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에 얼마나 이바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표절작을 판단하는 작업은 미학적이고 전문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좋은 예술 작품'을 판단하는 것과 비슷한 정신활동 영역이다. 표절작 여부를 가리기 위한 판단기준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좋은 예술'을 법으로 정의할 수 없듯이 '표절작'의 법적 기준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표절을 법이 아닌 미학적인 문제로 보는 관점은 그에 대한 논의가 현재 실행되고 있는 표절시비론의 차원을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 특히 현재의 대중음악 표절시비가 비논리와 무책임으로 인하여 도리어 폭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시점에서 '표절 혐의작'들에 대한 체계적이고 진지한 담론의 교환이 절실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최현영
1974년 서울 출생
1993년 서울 명지여자고등학교 졸업.
1997년 이화여자대학교 불문학과 졸업(철학 부전공).
2000년 12월 월간 평론가상 입선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음악학과 재학중
<"표절"개념을 통해본 대중음악 표절시비의 문제점>을 뽑고나서
김춘미(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연구소장)
우리는 사람들이 음악적 관심사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감지하고 있었다. 제도권에 자리하고 있는 음악보다 모두가 공유하는 대중의 음악에 대한 관심이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었다. 특히 인터넷 사용의 확산과 더불어 거기엔 가속도가 붙고 있다.
이번 심사를 통해 대중음악에 대한 관심은 이제 담론의 차원을 넘어 본격적인 언어화의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체 응모작의 3분의 2가 대중음악에 대한 본격적인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 김병오씨의 '디지털 시대의 음악을 위한 소곡-인터페이스의 변화를 중심으로'와 '월북작사가 조명암 대중가요의 수용양상과 문제점'은 어느 학술지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잘 다듬어진 훌륭한 논문이었다. 문제의식이 뚜렷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풍부히 인용돼 이들이 들어내고자 하는 문제의 중요성에 전폭적으로 설득 당했다. 문장도 잘 정리되어 큰 무리가 없었지만, 당선작으로 선택되기에는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쟁점과 그에 대한 논쟁적 요소가 약했다.
한편, 정우진씨의 '미래의 한국 창작오페라론'과 김상현씨의 '더 나은 대중음악을 위하여'도 수작이었는데, 전자는 너무도 당연한 결론으로 가는 과정이 허전함을 안겨주었고, 후자는 대중음악을 둘러싼 인식뒤집기는 참신했지만 대안부분이 꼼꼼하게 다져지지 않아 설득력을 충분히 가지지 못해 아쉬웠다.
결국 올해의 당선작으로는 현재 대중음악계의 뜨거운 감자로 종종 붉어지는 표절시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파헤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는 최현영씨의 ''표절' 개념을 통해본 대중음악 표절시비의 문제점'을 선택했다. 올해의 당선작은 가작으로 선택했는데, 이 필자의 경우, 표절의 경계선들을 차분히 눌러주는 장점에 적확한 예들을 보안한다면, 앞으로 복잡한 문제를 제자리에 갖다 놓는 중요한 평론가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최현영
1974년 서울 출생
1993년 서울 명지여자고등학교 졸업.
1997년 이화여자대학교 불문학과 졸업(철학 부전공).
2000년 12월 월간 평론가상 입선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음악학과 재학중
'표절'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어디서 누군가가 "표절..."이라고 하면 귀가 번쩍 트이고, 세상의 온갖 것들이 다 표절과 연관된 것으로 보였다.
처음에는 표절이 마땅히 근절되어야만 하는 것이라는 도덕적인 당위성만 가지고 덤벼들었는데, 그것은 결국 이러한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사회의 문제로 환원되었다. 그 과정에서 '잘 이해하지 못한 채 비판부터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는'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가톨릭 교회에서 고해성사를 할 때 마지막에 덧붙이는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해서도 용서를 청하오니…"라는 말이 '표절'의 개념과 결부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당연히 무의식적인 표절도 표절이니까 단죄되어야 마땅하다는 자신만만하던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표절은 정신적인 도둑질이라고들 하는데, 모르고 한 도둑질이 '도둑질'로서 성립하는 것인가의 문제는 각 개인의 '관점의 차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의 기간동안 '표절'이 내 삶을 온통 지배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 많은 부분에 대해서 판단 유보 상태다. 더 성실하지 못했던 점이 아쉽지만, 앞으로 계속 파고들만한 가치와 매력이 있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마감날 원고를 접수하면서 딱 하루만 더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내 인생을 마감할 때도 그런 비슷한 생각이 들겠지 싶어 가슴이 서늘해졌다.
올해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데 크리스마스에 이런 글을 쓸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모든 분들과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과, 그리고 무엇보다 지도해주신 허영한 민경찬 선생님께 깊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내게 과분한 상이지만,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이제부터 시작이라 생각하며 계속 나아가는 것이 그분들께 대한 나의 작은 보답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