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배오2동사무소

by  박정우

  • 작품전문
  • 줄거리
  • 심사평
  • 당선소감
  • - 등장인물 -
    이종근 (남, 47) : 배오2동 예비군 중대 동대장
    김미자 (여, 26) : 배오2동사무소 주민등록계원
    오경숙 (여, 32) : 배오 2동사무소 호적계원
    권영주 (남, 30) :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
    최경희 (여, 30) : 영주의 아내
    윤혜미 (여, 26) : 미자의 친구
    박희영 (여, 23) : 새로 들어온 주민등록계원
    김일병
    포장마차 아줌마
    창문의 여인
    그 외

    - 참고사항 -

    이 글은 크게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두 편으로 나눠져 있다. 각 편에서 미자와 영주의 나레이션이 연극의 방백역할을 한다. 배경음악은 거의 없으나, 간혹 단순한 멜로디가 사용된다.

    1. 동사무소 - 옥상 (해질 무렵)

    동사무소 옥상의 국기 게양대. 미자가 태극기, 새마을기, 시기를 내리고 있다. 시커멓게 더러워진 기를 내리고 깨끗한 새 기를 다시 올린다. 미자 너머로 동네 전경이 둘러 보인다.

    2. 동사무소 - 사무실

    동대본부 상근예비역 유병장이 여기저기 악수하며 인사를 하고 있다. 덕분에 사무소 안은 다소 시끌시끌하다.

    유병장 : (미자를 발견하고) 어, 미자씨. 아직 퇴근 안했구나.

    미자 : 어머, 정말 제대하는 모양이네.

    유병장 : 그럼. 내일부터 말년 휴가고, 갔다 오면 땡이야. 미자씨, 그동안 고마웠어. 그리고, 내 쫄, 그 녀석 말야. 아직 밥값 하려면 멀었거든. 한동안 미자씨가 우리 대빵 좀 도와줘야겠는데.

    미자 : (등을 두드리며) 축하해, 아무튼.

    3. 동사무소 - 전경

    미자가 가방을 메고 나온다. 그녀가 해를 뒤로 하고 걸어 나오는 모습과 해질 무렵의 동네 풍경이 멀찍이서 보인다. 검도복에 죽검을 들고 학원을 향하는 아이들, 야채트럭의 확성기 소리, 츄리닝 바람으로 야채를 고르는 아주머니들, 떡볶이, 오뎅을 파는 포장마차와 가방을 멘 채 먹고 있는 중학생들 등이 보인다.

    4. 열차 안

    - 화면 전체가 완전히 어두워있다. 단지 지하철 소음과 승객들이 내는 미세한 잡음들만 들린다. 카메라가 포커스 아웃 하면서 까만 화면 위로 지하철 차창에 비친 미자의 얼굴이 나타난다. 처음의 어둠은 터널 속의 어둠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포커스 인 되면서 화면이 완전히 어두워진다. 방금 처럼 소음만 들린다.

    - 이어 열차가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햇빛이 튕기듯이 열차 안으로 쏟아진다.

    - 정차하는 열차. 출입문이 열리면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어둡다가 갑자기 밝아져서 그런지 햇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들이 선명하다.

    - 부유하는 먼지들이 클로즈 업 되며 화면을 덮는다.

    메인 타이틀 "배오2동사무소"

    자막 "PROLOGUE"

    5. 도로 (아침)

    (M) 경쾌한 피아노 음악

    - 군복차림의 동대장이 자전거를 타고 있다. 아파트 단지를 가로지른다. 신도시 아파트 단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전거 전용도로 표시의 파란 줄을 충실히 따른다. 타고 있는 자전거는 학생용인 듯 사람 덩치에 비해 좀 작은 느낌이고, 경쾌한 배경음악과는 거리가 있는 무뚝뚝한 표정이 다소 우스꽝스레 보일 수 있겠다.

    나레이션(미자) : 우리 동네 동대장 아저씨예요. 제가 있는 동사무소 2층에 계시죠. 뭐, 꼭 가까이서 일한다고 자주 대하는 건 아니구요, 음, 외삼촌 뻘이나, 아니면 제가 처음 다니던 회사로 치면 부장님 쯤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죠.

    - 아파트 단지를 이웃한 외곽 도로를 달린다. 아침 햇살이 정면에서 눈부시게 한다. 비포장의 좁은 골목에 접어드니 주변에 간간이 상점이나 총포사가 눈에 띈다.

    - 동대장의 얼굴이 클로즈 업 된다. 안경 사이로 깊게 팬 주름골이 선명하다. 전투모에 붙어있는 예비역 휘장이 뚜렷이 부각된다.

    6. 연병장

    파란 하늘이 화면을 채운다. 다소 과장된 파란 빛깔에 듬성듬성 흰 점이 있어 하늘임을 알 수 있다. 카메라가 내려오면서 화면 하단에 보일 듯 말 듯 전투모들의 행렬이 줄을 잇는다. 전부 예비역 휘장이 달린 전투모다.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린다. 동대장이 화면으로 들어온다.

    동대장 : 이종근입니다. 아, 예, 충성. 지금 부대 들어 왔어요.... 예? 명함 만든 지 얼마나 된다고 그걸 다시 만들어요? (한참 듣고만 있다가) 이메일이요?

    7. 동사무소 - 사무실(점심시간)

    동대장이 동사무소 안으로 들어선다. 점심시간이지만 여러 가지 민원으로 사람들이 꽤 북적거린다. 동대장이 미자에게 다가선다.

    동대장 : 미자씨, 밥도 아직 못먹었겠다.
    미자 : 안녕하세요. 교대가 와야 밥을 먹겠네요.
    동대장 : 이따가 오후에 좀 한가해지면 나랑 커피 한 잔 하자구.

    8. 동사무소 - 2층 인터넷 방 (오후)

    키보드 옆에 놓인 종이컵. 동대장과 미자의 말소리가 들린다. 미자가 모니터를 가리키며 설명을 하고 있고, 동대장은 미자 옆에 간이 의자를 가져다 놓고 설명을 듣고 있다.

    미자 : 요즘은 공짜로 이메일 주소를 주는 데가 많거든요. 먼저 그 중 한 곳에 들어가서 신청을 하셔요. 요길 눌러서, 이런 화면이 뜨잖아요.
    동대장 : 응
    미자 : (가입 양식의 성명란에 입력한다) '이'자, '종'자, '근'자, 이렇게 하고.... 동대장님, 아이디를 뭐로 하실래요?
    동대장 : 아이디?
    미자 : 아이디는요, 그러니까 이름하고 비슷한 거예요. 인터넷 속에서 다른 사람하고 구별하려구 자기 혼자만 쓰는 이름같은 거죠. 보통 자기 이름 영문 이니셜로 많이 하는데요, (ljg, ljk, leejonggeun 등을 입력해 보지만 '이미 존재하는 아이디입니다'란 메시지가 자꾸 뜬다) 벌써 다른 사람들이 쓰고 있네요. 동대장님, 뭐 다른 거 없으세요?
    동대장 : (골똘히 생각한다) 가만있어 보자.
    미자 : (물끄러미 보며 기다리다가) 아니면, 동대장님이 좋아하시는 거나, 옛 추억이나, 가수나 노래 제목이나, 그런 것 중에서 기억하기 좋은 걸로 해보세요.
    동대장 : (멋적은 듯 웃으며) 그럼, (머뭇거리다) 신카나리아 한 번 넣어봐.
    미자 : (영어로 shincanaria를 입력하며) 이게 뭐예요?
    동대장 : 넌 임마 신카나리아도 모르냐? 가수야. 옛날 옛적의.
    미자 : 신카나리아는 안들어가고, 카나리아 하니까 들어가네요. 그런데, 카나리아가 샌가요, 꽃인가요?
    동대장 : 글쎄. 아무래도 가수 이름이니 새지 않겠냐?
    미자 : 동대장님, 그런데 좀 웃겨요. 동대장님이 카나리아라니......(활짝 웃는다)
    9. 동사무소 (며칠 후)

    - 동사무소의 분주한 아침. 미자가 컴퓨터로 워드작업을 하고 있다. 비상연락망이라는 제목 하에 직원들 주소와 전화번호가 도표로 나와있고, 여기에 한 열을 더 만들어 그곳에 '이메일'이라는 란을 만들어 넣는다. 카메라는 나레이션에 따라 동사무소 직원들의 모습과 각자의 이메일 아이디가 입력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레이션 (미자) : 저희 동사무소에서는 여직원들이 유니폼을 입어요. 남자분들도 양복을 입으니까 사실 모든 직원이 유니폼을 입고 있는 셈이죠. 모두 비슷비슷한 옷을 입고 별 말없이 모니터만 보고 있는 것 같지만 남들한테 얘기 안하고 따로 떼놓아 두는 뭔가가 있는 모양이에요. 그런 게 가끔 회식자리나 전화통화 할 때 흘러서 들리면 아,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구나, 저 사람도 저런 면이 있구나, 할 때가 있어요. 저희 부주사님 있죠? 이 분 이메일 아이디가 heelove인데요, 알고 보니 사모님 성함이 영희란거 있죠? 우리 여직원들이 넘어갔다는 거 아닙니까.

    - 전화벨이 울린다. 박 서기가 눈은 모니터에 두고 팔을 뻗어 전화기를 찾고 있다. 재산세 담당 허 웅씨는 못들은 척 모니터에 머리를 파묻고 있다.

    나레이션 (미자) : 박서기님 아이디는 manbang, 바둑에 나오는 말이라는데 전 잘 모르겠구요, 죽어도 남의 전화는 받아 주지 않는 허 웅 씨는 뭐, zerg(스타 크래프트 게임에 나오는 부족)jjang이래나요.

    - 멀리 있던 경숙이 전화를 댕겨 받는다.

    경숙 : (큰소리로) 안녕하십니까. 배오2동사무소입니다.
    나레이션 (미자) : 경숙 언니는 ssikssik. 언니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그렇게 부르셨대요. 경숙 언니 집은 딸만 다섯인데, 그래서 좀 사내아이 같이 키우신 모양이에요. 언니는 학교 들어갈 때까지 자기가 아들인 줄 알았대요. 저는요, 하하, 제 아이디는 pyramid예요. 무슨 고고학에 관심이 많냐구요? 그런게 아니라 제가 하체로 갈수록 살이 많다고 동생이 저를 피라밋이라고 불렀거든요. 제 동생은요, 제가 얼굴만 내 놓고 사무실에 앉아 있을 때는 퀸카인데, 목욕탕 가면 코끼리래요.

    - 때맞춰 한 할머니가 조용히 미자에게 다가온다.

    할머니 : 사람 좀 찾아줘.
    미자 : 할머니, 무슨 일이신데요?
    할머니 : (종이 쪽지를 내밀며) 우리 막내야.
    미자 : 전화 해 보셨어요?
    할머니 : 이사갔대. 어디로 갔는지 한번 알아봐.
    미자 : 죄송한데요, 할머니. 법이 바뀌어서 이런 거 함부로 못 가르쳐드리게 되었어요.
    할머니 : 내 올해로 여든이야. 장지 가기 전에 한 번이라도 봐야 할거 아녀.
    미자 : 사정은 잘 알겠는데요...... 제가 윗분들한테 말씀 드려 볼께요.
    경숙 : (미자 뒤에서 듣고 있다가 큰소리로) 할머니, 호적 등본 한 통이요? (작은 소리로) 제가 찾아봐 드릴테니, 제가 가르쳐 드렸다고 다른 사람한테는 말씀하지 마셔요.
    10. 동사무소 - 옥상

    - 옥상 난간에 기대어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경숙과 미자.

    미자 : 장동건이 고소영이랑 키스를 했어. 그런데 장동건 어깨 너머로......
    경숙 : 차인표가 보여.
    미자 : 차인표가 보여. 고소영이 달려 나갔지. 차인표가 아무 말 없이 있다가 하는 말이, 이젠 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경숙 : 널 소유하기로 했다.
    미자 : 널 소유하기로 했다. 언니, 어제 이 드라마 봤어? 이젠 도사가 되었구나.
    경숙 : 미자야, 내가 드라마 인생만 30년이다.
    미자 : 이제MBC 얘기 해봐
    경숙 : 그래. 강석우랑 심혜진이 사귀는 걸 시어머니도 아는 거야. 그래서......
    - 시간 경과.

    미자 : ......우피 골드버그가 어쩔 수 없이 수녀가 된거야
    경숙 : 나도 수녀 될 뻔 했는데.
    미자 : 말도 안돼. 정말?
    경숙 : 어린 마음에 연속극에 나오던 노주현이 너무 멋있는거야. 그런데 엄마한테 물어 보니까 그 아저씨는 벌써 결혼했대. 노주현 아니면 다 싫다, 그럼 결혼 하지말고 수녀가 되자, 그렇게 생각한거지. 그런데 이 나이가 되니까 수녀보다 되기 힘든게 신부더라구.
    미자 : 신부? (웃는다) 이렇게 웃긴 여자를 남자들은 안 잡아가나.
    경숙 : 하긴 신부든 수녀든 나랑은 어울리지는 않구나.
    미자 : (갑자기 크게 웃으며) 언니, 카나리아가 새야, 아니면 꽃이야?
    경숙 : 그거? 꽃이잖어. 카나리아꽃, 카나리아꽃...
    미자 : 그럼 그게 누구 아이딘줄 알어? 언니도 알고 나도 아는 사람 중에.
    경숙 : 영란씨? 남자거야? 허웅씨? 무영씨? 최주사님? 김일병? 도대체 누구야?
    미자 : 한 사람 빼먹었잖아. (웃는다)
    11. 동대본부 (저녁무렵)

    - 예비군들이 여기저기 걸터 앉아 프로야구 중계를 보고 있다. 김일병은 신분증을 확인하고 출석을 체크하느라 분주하다. 문이 열리면서 동대장이 들어 온다. 실내를 한번 쭉 훑는다.

    김일병 : 출결체크 했습니다. 67명 참석에 11명 불참입니다.
    동대장 : (아랑곳 않고) 여기들 봐요.

    - 예비군들이 그제야 자세를 고치고 동대장을 바라본다. 동대장이 위장크림 통을 집어 들고 두 손가락에 듬뿍 찍어다 양 볼에 거침없이 바른다.

    동대장 : 거, 왜 위장크림 바르라고 했더니 다들 그냥 있네. 나보다 군번 빠른 사람 있으면 안 발라도 좋아요.

    - 예비군들이 궁시렁 대면서도 돌려가면서 바른다. 전부 바른다.

    12. 옥상

    - 옥상 아래로 이동하는 예비군들의 모습이 보인다. 미자가 멀리 하늘을 본다. 구름이 잔뜩 찌푸렸다. 황사 때문인지 황혼 무렵의 하늘이 부옇다.

    - 내려가려다 동사무소 옆집 창문에 사람의 상체가 보인다. 한 여인이 창문을 열어놓고 옷을 벗은 채 아래위를 왕복하고 있다. 마치 여성상위의 정사를 연상케 한다. 얼굴이 빨개진 미자. 그렇지만 옆집 여인은 마치 보란 듯이 미자와 눈을 맞추며 웃고 있다. 꼭 야구장에서 환호하는 관중처럼 위로 뛰어오른다.

    13. 탈의실

    유니폼을 갈아 입는 여직원들. 밖에서 남자 직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남자직원(목소리) : 미자씨, 지금 등본 뗄 수 있어요?

    14. 동사무소

    - 옷을 갈아 입은 미자가 자리에 다시 앉는다. 주민등록 등본 신청서를 보니 꽤나 익숙한 이름이다. 신청인은 안경을 쓰고 애를 업고 있는 둥글둥글한 아주머니다. 주민등록 등본을 출력하여 건네준다.

    미자 : 혹시 설국 초등학교 나오셨어요?
    혜미 : 네.
    미자 : 혜미야, 너 나 알겠어?
    혜미 : 아, 참 오랜만이다.
    미자 : (업힌 아기를 보고) 너 일찍 결혼 했구나. 딸이니?
    혜미 : (카운터 아래서 놀고 있는 아이를 안아 올리며) 아들도 있어.

    15. 주변 공터 (밤)

    - 바람이 꽤 분다. 공터에 먼지바람인지 중국에서 건너온 황사인지 부연 바람이 일고 있다.

    - 동대장이 총기를 지급하며 끊임없이 말한다. 간간이 흥분을 하면 지급을 멈추고 이야기에 열을 올리기도 한다. 예비군은 쓸모 없어야 한다, 그게 평화다, 그런데 전쟁이 나면 다 죽는다, 그러니까 오늘 훈련 열심히 해야 된다, 월드컵 공동 개최해서 괜히 일본만 덕을 본다, 등등. 반말로 했다가 말을 높였다가 한다. 김일병은 옆에서 한 족장 길이의 노끈을 나눠 준다.

    16. 동대 본부

    - 직속 상관 서중령이 담배를 피며 프로야구 중계를 보고 있다. 이어 동대장이 들어온다.

    동대장 : 어이구, 오셨어요.
    서중령 : 어서 와. 춥지? 아직 음력으로는 3월이니까, (TV를 보고) 안타다, 안타!
    - 동대장, 윗주머니에서 담배케이스를 꺼낸다. 가지런히 놓인 것 중 하나를 꺼내 문다
    동대장 : 이번엔 예비군들 불참이 꽤 되네요. 날짜를 잘못 잡았나, 이놈의 꽃샘추위는 훈련 날짜만 잡으면 몰려오고. 황사는 이런 날 더 성화네요.
    서중령 : 날씨가 춥기도 춥고, 또 저 번 가을, 겨울 사이에 동네 인구가 많이 줄었잖어.
    동대장 : 전출이 많았나 봐요.
    서중령 : 이봐,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1동하고 2동하고 행정구역을 통합한다는 말이 있더라구. 확실한 건 아니지만. 사람도 줄고, 위에서도 군살 빼라, 인원 줄여라, 자꾸 채근대니까 그런 말이 도는가 봐.
    동대장 : (미간을 약간 찌푸린다) 예, 어째 밑에 (동사무소를 가리킨다) 사람들이 그런 비슷한 말을 하더니만......
    서중령 : 그래, 그렇게 되면 동대 본부도 하나는 없어질 수 있대. 아직 결정된 건 없지만 무슨 변동이 생길지도 모르니 염두에 두라구.
    - 동대장, 손가락을 꺾으며 멍하니 TV를 바라보고 있다.

    17. 메밀국수집

    -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식당. 미자와 혜미, 그리고 아이가 들어가니 자리가 없다.

    주인 : (혼자 앉아 있는 여자 손님에게) 죄송하지만 옆 분과 합석을 좀......

    - 주인이 혼자 앉아 있는 손님에게 다른 테이블과 합석을 요청하여, 옆 테이블에 혼자 않아 있는 여자 손님과 합석하게 한다. 마주 앉은 미자와 친구 혜미. 주문을 하고 마주 보니 약간 어색하다.

    미자 : 남편은 늦나 보네.
    혜미 : 응, 예비군 훈련이래. 동사무소까지 같이 왔었어.

    - 잠시 침묵.

    혜미 : 사귀는 사람 있니?
    미자 : 아직 없어.
    혜미 : (한참 있다) 공무원 되려면 시험 봐야 되지?
    미자 : 응.
    혜미 : 오빠는 잘 있어?
    미자 : 응? 동생말이야?
    혜미 : 아, 동생이었나?

    - 잠시 침묵. 미자, 옆자리 앉은 - 혼자 와서 합석한 - 손님이 자신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고개를 돌려보니, 두 사람 다 미자네 테이블을 가로질러 냉장고 위에 있는 TV를 멍하니 보고 있다. 혜미가 테이블 밑에서 장난치고 있는 아이를 야단친다.

    미자 : 얘는 이름이 뭐야.
    혜미 : 형준이. 황보형준. 얘들 아버지가 성이 황보야. 황보중만, 웃기지, 이름?
    미자 : (쿠쿡 웃는다) 미안, 미안. 나는 니가 이름이 이뻐서 금방 넌 줄 알았어. 시골 학교에는 흔하지 않은 이름이잖아. 그러면 황보중만씨와 윤혜미가 결혼을 한 거네.
    혜미 : 그래. 결혼식 때 하객들이 많이 웃었대. (웃는다)

    - 종업원이 음식을 가져온다. 메밀국수 접시와 소스 그릇을 갖다 놓고 냉면을 가위로 잘라 놓고 간다. 종업원의 팔이 지나가자 다시 어색한 침묵이다.

    - 두 사람, 음식 먹고 TV 올려다 보고, 그러기를 반복한다. 카메라가 TV쪽에서 두 테이블을 바라본다. 두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 모두 TV를 본다. 서로의 눈길을 피한다.

    18. 전철역 주변 도로

    동대장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입을 다물다 못해 입술이 앞으로 삐죽 튀어 나왔다. 모래바람이 앞을 가린다.

    19. 전철역 입구

    - 각자 떨어져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예비군들이 동대장을 보고 자세를 바로 한다.

    동대장 : (형식적인 투로) 다들 자리 비우지 말고 암구어 꼭 숙지하고...... (무엇을 발견한 듯) 총을 잃어버리면 그건 구속사유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총은 놓치지 말라고. 그런데, 왜 노끈은 묶지 않고 있나들?

    - 이전에 나눠 준 노끈으로 동대장이 직접 총과 허리띠를 묶어 준다.

    예비군1 : 하하, 이 끈이 그거 하라고 나눠 준 거였어요?
    예비군2 : 동대장님, 아유, 어린애도 아니고.
    동대장 : (계속 묶는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여. 총 잃어먹는 놈만 죄 받는 게 아니야.
    예비군1 : 제가 할게요. 내참.
    20. 메밀국수집 앞

    혜미 : 정자야, 앞으로 동사무소 들릴 때마다 볼 수 있겠구나.
    미자 : (놀라며) 응?
    혜미 : 어머, 너 김정자 아니니? 미안해. 아직 네 이름이 생각 안 난다.
    미자 : (애써 웃으며) 미자야. 김미자.
    21. 전철역 주변 상가

    - 황사 섞인 바람이 강하게 분다. 사람들 대부분이 몸을 움츠리고 다닌다.

    - 뾰루퉁해진 미자, 다른 행인들 보다 느린 걸음으로 걷는다. 전철역 부근 의류 쇼핑몰에 들어간다.

    22. 의류 쇼핑 몰

    - 옷을 고르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대부분이 여자이고, 옷 갈아 입는 탈의실 수가 적어서 대부분이 점포에서 준비한 통 넓은 치마를 이용해 매장 곳곳에서 옷을 입어보고 있다. 그러니까, 통 넓은 치마를 먼저 입은 다음 그 속에서 자기 하의를 벗고 사고자 하는 바지나 치마를 입어보는 그런 방식이다.

    - 미자, 자신이 고른 바지를 한 켠에 놓고, 통 넓은 치마를 입는다. 그리고 바지를 벗는다. 새로 고른 바지를 입어 보려다가, 통치마를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쳐 본다.

    - 미자가 그 통 넓은 치마를 들고 계산대로 향한다.

    미자 : 이것도 파는 거죠? 이건 얼마죠?

    23. 전철역 앞 - 횡단보도

    종이가방을 들고 신호를 기다리는 미자. 옆에서 머리에 커다란 바구니를 이고 있는 할머니에게 어느 경찰관이 다가가서 말을 건다. 두 사람의 얘기는 잘 들리지 않는다.

    24. 설국 전철역

    미자가 전철에서 내린다. 설국역은 지상에 있는 역이어서 내리자마자 어둠에 묻힌 산과 불빛 두 세 개가 보인다. 서울 도심의 전철역과는 달리, 전철역 주변에 상점 몇 개와 몇 채의 집만이 있다. 저 멀리 뛰엄뛰엄 있는 불빛이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더 먼 곳에 고층 아파트 건물이 공사중이라는 것을 공사용 대형 크레인의 빨간 표시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전철역이 아니라, 마치 시골 기차역과 흡사한 모습.

    25. 설국 전철역 앞

    - 전철역을 빠져 나오는 미자. 양복을 입은 남자가 전철역 앞 2차선 국도변에 앉아있는 것을 발견한다. 술이 취한 듯 고개를 무릎 사이에 파묻고 정신 없는 모습이다. 미자, 남자를 지나쳐 가다가 매서운 바람에 옷깃을 여민다. 잠시 생각하다가 남자에게 돌아온다.

    미자 : 여보세요, 괜찮아요?
    남자 : (반응이 없다)
    미자 : 집이 어디에요? 이 동네 사셔요?
    남자 : (눈을 뜬다) 어, 당신은......?
    미자 : (영문을 모른다)
    남자 : 아! (괴로워한다) 이런 씨팔, 이런......
    미자 : (영문을 모른 채 술 냄새에 고개를 돌린다. 얼굴을 확인하려 하지만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남자 : (혀가 꼬인다) 내, 내가 술이 취해서 또 당신한테루다가 와버렸네요, 잠깐만 있어봐요.
    - 남자, 미자의 손을 뿌리치고 차가 질주하는 도로를 위험하게 건넌다. 그리고 길가 우체통의 뚜껑을 열려다가 열리지 않자 우체통을 부여잡고 게워 내기 시작한다. 등을 두들겨 주는 미자.

    남자 : (손으로 입을 닦고는) 남자새끼가 말이야, 한 번 뜻을 뒀으면 씨팔, 뜻을 계속 쭈욱 둬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제가, 내가, 아니 제가 또 여기 온 건 순전히, 수운저언히 저 놈(전철역을 가리키며) 때문이에요, 저놈. 주인이 씨팔, 술 좀 먹고 깜박 졸 수도 있는 것이지, 네 놈이 나를, 뜻을 쭈욱 두고 있는 주인인데, 니가 나를 일루 데리고 오냐, 임마! 내 이놈을 당장......

    - 남자, 전철역을 향해 달려가려 한다. 미자가 남자의 손을 잡아 제지하고는 택시를 기다린다. 한참을 지나 모범택시를 잡아 남자를 태워 보낸다. 미자, 한 숨을 돌리고 종이가방을 찾는다. 길 건너편에 아무렇게나 내버려진 종이가방.

    26.주변 공터 (같은 날 심야)

    - 공터 옆 시계탑 시침이 새벽 한 시를 가리킨다.

    - 여전히 황사가 거세게 분다. 예비군들이 다시 모여있다. 동대장의 얼굴에 긴장감이 돈다.

    동대장 : (김일병에게) 다시 세어봐.
    김일병 : (총기를 센다) 핫, 둘, 셋, 넷, 다...... 동대장님, 66정인데요.
    동대장 : 알았어. (예비군들에게) 주목! 지금 한 사람이 모자라는 게 최종 확인이 됐어요. 총기도 하나 없고. 누구 이사람 핸드폰 번호 아는 사람?
    - 시간 경과. 여기 저기 지쳐 않아 있는 예비군들.
    김일병 : (핸드폰을 귀에 대고) 아무도 안 받습니다. 집에도 없는 것 같습니다.
    동대장 : 담배나 하나 줘봐라.
    - 시간 경과. 도로변 쪽에서 예비군 몇 명이 돌아온다.

    예비군1 : 없는데요. 저희가 술집이나, 식당들 다 훑어 봤는데 그런 사람 못봤다고....
    동대장 : 알았어요. 수고 했어요. (예비군들에게) 여러분들은 이제 들어들 가봐요.
    27. 전철역 주변

    대부분 불이 꺼진 식당과 주점. 동대장이 앞장서고 김일병이 자전거를 끌면서 불이 켜진 곳마다 들어간다. 둘 다 아무 말 없다.

    28. 어느 아파트 (새벽)

    - 동대장과 김일병이 아파트 단지 정문을 지난다. 먼 곳에서 부옇게 밝음이 새어나고고 있지만 아직은 대체로 어둡다.

    - 시간 경과. 어둠이 거의 걷히고 하늘이 파란 새벽. 경비실 앞에서 동대장, 김일병, 아파트 경비, 그리고 없어졌던 예비군이 츄리닝 바람으로 집에서 내려와 이야기하고 있다.

    예비군 : (김일병에게) 얌마, 내가 분명히 말했잖어. 급한 일 생겨서 30분 전에 들어간다고 동대장님한테 전해달라고. 총은 동대 본부 냉장고 옆에 놔뒀다고. 어이구, 미치겠네.
    김일병 : 언제 그랬습니까. 선배님이 저 전화 받고 있을 때 들어와서 아무 말 안하고 쓱 나가버리시면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예비군 : 이런 병신같은 새끼가 다 있네. 내가 냉장고 옆에 있다고 적어 놓았잖아.
    김일병 : 선배님이 적어 놓았는지는 몰라도 저한테 말씀은 안하셨습니다.
    - 동대장, 아무 말없이 듣고 있다.

    29. 동사무소 앞 골목 (아침)

    - 동대장,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거기다 모래바람까지 거세어 동네 전체에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돈다.

    - 동대장 얼굴의 클로즈 업. 안경 너머로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꽉 다물었다. 바람에 날리는 모자를 눌러 쓰고 계속 달린다.

    30. 동대장 집 앞

    미리 나와있는 동대장의 아들이 교복을 입고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가 내린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향한다.

    31. 동대장 집

    -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내가 동대장의 어머니를 모시고 외출 채비를 하고 있다.

    아내 : 국은 지금 금방 데운 거니까 덜어 드세요. 밖에 비와요?
    동대장 : 아니.

    - 아내와 어머니, 나간다.

    - 군복을 입은 채로 집 여기 저기를 둘러 본다. 텅 빈 집. 아침의 분주함을 짐작케 하는 옷가지들과, 드라이기, 화장품 등이 어질러져 있다. 거실 겸 동대장 부부의 침실처럼 보이는 마루방에는 TV가 윙윙 거리고 있다.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는 방 2개, 마루방 하나 있는 집이다.

    - 시간 경과. 동대장이 군복 야전상의만 벗고는 따뜻한 국물을 덜어다 밥을 말아 먹는다. TV에서는 아침뉴스가 한창이다. TV화면 아래 부분에 기자들의 이메일 주소가 나온다.

    - 시간 경과. 동대장이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에 들어선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위장크림을 지운다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찬바람에 얼굴이 많이 상해 있다. 비누칠을 몇 번 씩 한다.

    - 얼굴을 닦으며 마루방으로 들어온다. 수건 너머로 TV를 보던 동대장이 흠칫한다. TV화면에는 일기예보 코너가 진행 중이다. 그리고 기상 캐스터가 소개된다. 눈꼬리가 쳐지고 어질게 생긴,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 캐스터다. 그녀가 시청자들에게 인사한다.

    - 동대장의 환상. 화면 아래에 '심선미 기상 캐스터' 라는 자막 아래에 canaria@ ... co.kr 이라는 이메일 주소가 나온다. 갑자기 이 자막이 점차 확대되며 Extreme Close-up 된다. 위성사진 속에 있던 구름이 빠르게 움직이며 화면을 가득 채운다.

    기상캐스터 : 중국 대륙에서 날아온 황사로 인해 어제 하루 안과를 찾으시는 환자들이 배로 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우리 지역에 황사를 씻어낼 고마운 비가 내릴 전망입니다. 벌써 지역별로 내리는 곳도 있다고 하구요, 특히 배오동에는 강한 바람과 함께 천둥번개를 동반한 거센 비가 예상됩니다.

    - '천둥 번개를 동반한..' 이라는 말과 동시에 실제로 천둥이 콰쾅, 울린다. 동대장, 눈동자가 커지고 자리에서 꼼짝 할 수 없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 이어지는 환상. 기상 캐스터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니, 노래를 시작한다. 브라스 밴드의 음향이 다분한, 그리고 음질은 옛날 LP판의 거친 음색으로 신카나리아의 '강남달'을 부르기 시작한다. 그녀를 감싼 구름 속에서 반짝이 붙은 옷을 입은 백코러스들이 나타난다.

    - 동대장, 얼어붙은 듯 꼼짝 못하고 있다. 어느새 화면이 아니라 어수선한 동대장의 마루방에 그녀와 백코러스들이 나타난다. 마루방에는 소반과 요란한 색깔의 상 덮개, 아이들의 속옷, 드라이어, 할머니의 성경, 아령 같은 운동기구, 손쉽게 바닥먼지를 제거 할 수 있는 손잡이 달린 걸레, 구식 쌀통 등과 같이 여느 집에서 볼 수 있는 소품들로 가득 차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것들과 노래를 부르는 그들의 모습이 무난히 어울린다. 그녀가 쳐진 눈으로 동대장을 향해 너그럽게 웃는다.

    - 같은 시간 동대장 아들의 모습.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향하는 아들의 이마 위로 굵은 빗방울이 투둑 떨어진다. 그리고 그가 타고 달리는 자전거 바퀴가 도는 모습. 아들의 흰 교복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교복이 누렇게 변해가는 모습. 계속해서 울리는 천둥소리와 세찬 빗줄기. 그리고 동대장의 얼어 붙은 표정이 반복해서 교차된다. (O.L)

    - 동대장의 안경너머로 눈물이 한줄기 흐른다. 주름골을 타고 흐른다. 계속되는 천둥과 번개.

    32. 미자의 방

    - 앞 씬의 천둥과 번개 음향 (O. L)

    - 무서운 꿈을 꾼 것처럼 이불 속에서 눈을 번쩍 뜨는 미자. 몸을 반만 일으키니 어제 사온 통치마가 정면에 걸려 있다.

    33. 동사무소 - 현관

    동사무소 현관에서 미자와 경숙이 손바닥으로 비를 가늠한다. 약해진 빗줄기를 확인하고 우산 없이 길 맞은 편 편의점으로 냅다 달려간다.

    34. 편의점

    - 컵라면과 꼬마김치를 집어드는 손. 김밥이나 주먹밥 쪽으로 가다가 멈추는 손. 그리고 정수기 꼭지를 눌러 뜨거운 물을 받는 손들.

    - 미자와 경숙이 컵라면을 먹으면서 이야기한다.

    미자 : (심각하게) 그, 왜 꼭 마술에 걸린 것 같다는 거 있잖아.
    경숙 : 응? 무슨 말이야?
    미자 : 언니는 경찰관이 할머니한테 길 묻는 거 봤어?
    경숙 : 봤지, 할머니가 교통경찰한테 길 묻는 거. 아니 실제 본게 아니라 TV 같은 데서 그런 장면 많이 봤잖아.
    미자 : 아니. 반대야. 경찰관이 머리에 큰 바구니 이고 있는 할머니한테.
    경숙 : 경찰이 할머니한테? 짐을 이고 있는 할머니한테?.
    미자 : 새파란 옷 입고 어깨에 번쩍거리는 호루라기 줄 매단 교통경찰 있지? 그런 젊은 경찰관이 할머니한테 어디어디로 가려면 어떻게 가느냐고 물으니까 할머니가 이리저리 해서 가라고 가르쳐주는데, 그 왜 두 사람이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바라보는 그런 사진 많이 봤잖아. 경찰서 벽에 걸려 있을 만한.
    경숙 : 그런데. 사실 내용은 반대라 이거지.
    미자 : 응. 언니는 그게 안 웃겨?
    경숙 : 웃겨. 그런데 드물기는 하지만 그럴 수도 있지 않니?
    미자 : 그렇지.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왜 그렇게 낯설지?
    경숙 : 뭐가 낯설어. 지나가는 경찰관한테 물어봐. 아저씨는 길 모를 땐 어떻게 해요? 아저씨는 평생 길을 몇 번이나 물어 보셨나요?
    미자 : 아무튼 어제는 정말 마술이었어.
    경숙 : 이렇게 창가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봐봐. 세상에 낯선 게 천지야.

    - 갑자기 미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편의점 창 밖으로 어제 저녁 옥상에서 창문으로 뵈던 여자가 지나가고 있다. 어제와는 다르게 상당히 우아한 모습이다. 이국적인 스카프에 라틴 풍의 강렬한 색상의 치마 차림이다. 라틴 계통 사람들과 비슷한 오똑한 콧대와 날카로운 눈빛이 두드러진다. 이 동네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 라면 용기에 젓가락을 담궈 휘휘 젓고 있는 경숙. 조금 남은 면발까지 건져 먹고 있다.

    미자 : ('창문의 여인'을 뚫어지라 보면서) 언니, 낯선 게 천지라구?

    35. 동사무소

    돌아 온 사무실이 어수선하다. 형사 두 명이 최주사와 이야기 하고 있다. 다른 직원들도 웅성거리며 일손을 놓고 있다가 들어 오는 두 사람을 향해 일제히 시선을 모은다. 한 쪽 소파에는 지난 번 아들을 찾던 할머니가 수갑을 찬 남자와 함께 조용히 앉아있다.

    형사 : 김미자씨 맞아요?
    미자 : 네. 전데요.
    형사 : 주민등록 등/초본 하고 전입신고 담당 맞죠?
    미자 : 네.
    형사 : (그때의 종이 쪽지를 내보이며) 저 할머니한테 이사람 주소 가르쳐 준 적 있어요?
    경숙 : (미자의 말을 가로막으며) 그건 제가 가르쳐 드렸는데요.
    인써어트 - 빗방울이 다시 거세게 창문을 두들긴다.

    36. 동대장의 집 (다음 날) - 외경

    황사비로 인해 흰 페인트칠의 연립주택이 황토빛 얼룩으로 더러워져 있다. 경비원이 호수로 물을 쏘아 건물 벽의 얼룩을 지우는 작업을 하고 있다.

    37. 동대장의 집

    - 분주한 아침풍경. 동대장의 아내와 어머니가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고 아들과 딸이 화장실과 방을 오가며 등교 준비에 바쁘다. 동대장이 마루방의 침구에서 일어나 분주한 풍경을 넋놓고 보고 있다.

    - 조금 한가해진 시간. 동대장이 낮은 상에서 아침을 먹고 있다. TV에서 일기예보를 알리는 시그널 뮤직이 나온다. 어제 그 기상 캐스터가 시청자들에게 인사한다. 여전히 화면 아래 부분에 canaria라는 이메일 아이디가 나오고, 위성사진도 변함없다. 그러나 어제와는 달리 별 특이한 것 없이 그냥 진행된다. 동대장이 밥숟갈을 뜨는 둥 마는 둥 하며 멍하니 보고 있다. 아내가 옆자리로 쓱 들어와 앉는다.

    아내 : 무슨 일 있어요?
    동대장 : (짐짓) 일은...... 왜 그래?
    아내 : 어제 저녁 드시라고 깨웠더니만, 몇 숟갈 푸다 말고 금방 드러누워 주무시대요.
    동대장 : 며칠 피곤했던 모양이지. 날씨도 갑자기 쌀쌀해졌고, 밤을 새워 버렸더니만 그랬던 거겠지.
    아내 : 어머님이 당신 약 한 채 지어야 되는 게 아니냐구 그러시던데. 요 앞에 잉어로 약짓는 집이 생겼어요.
    동대장 : 잉어는 무슨 잉어. 어머니 병원 가셨던 건 어떻게 됐어?
    - 동대장이 양복을 입고 출근하려 한다. 그리고 한 손에는 스포츠 가방을 들었다. 현관 신발장에서 축구화를 찾아 가방에 싸 넣는다.
    아내 : (담배 케이스를 건네 주며) 이젠 담배도 끊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38. 동사무소 (토요일 오전)
    (M) 차분한 음악

    -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분주한 사무실. 햇빛이 비가 그친 후 더 화사하게 사무실 안을 비춘다. 미자도 민원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꽤나 바쁘다. 그렇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직원들의 표정이 다소 굳어 있다. 미자의 뒤편에 주사, 부주사, 그리고 경숙언니가 부지런히 동장실을 들락날락 거리고 있는 것이 포커스 아웃 된 흐린 모습으로 보인다.

    나레이션 (미자) : 어제 저녁 직원 회의 때 어쩌면 우리 동사무소와 1동 동사무소가 합쳐질 거라고 동장님이 말씀하셨어요. 그러면 자연히 중복되는 인력은 줄이든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날 거라고 하셨어요. 그동안 이런 저런 얘기들은 들었지만 막상 동장님 입으로 직접 들으니까 사람들 표정이 어두워 졌지요.

    - 경숙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 온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민원업무를 처리한다.

    나레이션 (미자) : 어제 경찰이 다녀 가면서 비가 그쳤습니다. 경숙 언니의 일을 끝으로 어제까지의 마술은 그 화려한 막을 내린 셈이네요. 그 수갑을 찼던 사람이 할머니를 협박해서 할머니 아드님을 찾아내라 그랬대요. 그래서 결국 상해사건이 일어났구요. 저번에 간첩이 동사무소에서 주소를 알아내 사람을 죽였다는 일 있었잖아요. 그 일 후로는 경찰 수사에 필요하거나, 아니면 재산 관계 때문에 법원에서 판결해주지 않으면 개인 정보를 함부로 가르쳐주지 못하게 되었어요. 아무리 경숙 언니가 가르쳐 줬더라도 그건 전적으로 제 책임인데, 그리고 이 일로 사람이 다쳤다는데 경숙 언니만 동사무소를 그만 두기로 했어요. 자기는 안그래도 그만 두려고 했대요. 그만 두고 시집 갈꺼냐니까, 사업을 하기로 했대요. 무슨 사업이냐니까, 안가르쳐 준대요.

    39. 탈의실 (토요일 1시경)

    옷을 갈아입는 여직원들. 평소같이 잡담이나 깔깔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경숙도 들어와서 옷을 갈아 입는다. 미자가 유니폼 위로 전날 샀던 속이 풍성하고 통 넓은 치마를 입는다. 그리고 손을 치마 속으로 넣어 유니폼 치마를 벗겨 낸다. 동료들이 기도 안 차다는 듯이 보다가, 결국 실소를 금치 못한다.

    경숙 : 야, 김미자. 너야 말로 낯선 년이야. (웃는다)

    40. 시민 공원 - 운동장

    - 축구장 한 켠 스탠드에 '배오2동 번영회 연합 - 배우회' 라고 적혀 있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그 아래 중년이 대부분인 선수들이 짐을 풀고 체조를 하고 있다.

    - 다른 사람들보다 미리 준비를 마친 동대장이 담배케이스를 연다. 여느 때처럼 담배 10개피가 가지런히 있고, 빈 자리에 니코틴 흡수용 플라스틱 파이프가 들어 있다. 동대장, 파이프를 끼우지 않고 그냥 담배 한 개피를 태운다. 이어 주장 격인 소방대장 권씨가 선수들을 불러 모은다.

    권씨 : 다들 시간 내어서 이렇게 오셨는데, 웬만하면 이기는 게 안 좋겠습니까. 잘 아시다시피 축구는 전투야. 전투는 못 이기면 두 말 할 것 없이 다 죽는 거라고. 제가 어쩌다가 주장을 맡아버렸으니까, 경기 잘하자고 잔소리 좀 하고 큰소리 쳐도 다들 꾸욱 눌러 주시고, 오늘 죽도록 한 번 해보자구요. 자, 모여요. 파이팅 한 번 합시다.

    - 손을 모으는 선수들. 순간 북천옥(고깃집) 주인 양씨의 유니폼 색깔이 빨간색인 것을 알아 차린다.

    권씨 : 어이, 북천옥. 당신 유니폼 빤스 색깔이 왜 그래? 오늘은 우리 파란 색이잖아.

    양씨 : 깜박 했네요. 어떻게 하죠?

    권씨 : 누구, 다른 옷 없어요? 아무거나.

    - 하프라인에 양팀 선수들이 마주보고 도열해 있다. 다들 뚱뚱한 상체에 비해 볼품없이 마른 다리로 서 있는 모습이 다소 우스꽝스럽다. 북천옥 양씨는 혼자만 흰색 긴 츄리닝 바지를 입고 있다.

    - 경기가 시작되었다. 다들 열심히 뛴다. 소방대장 권씨가 선수들을 독려한다. 거의 반말 투에다가 이새끼, 저새끼 하는 욕도 나온다.

    - 동대장도 수비수로서 열심히 뛴다. 상대 공격수와 사이드를 달리며 공을 다투다가 코너킥이 선언된다. 무릎에 양손을 얹고 고개를 파묻는다. 숨을 헐떡인다.

    - 서로 사인을 해가며 패스를 주고 받는 선수들. 서로를 부를 때 이름 대신 북천옥, 동대장, 종로김밥, 미성당, 대성슈퍼, 유원장, 장사장 등과 같이 점호나 직함을 주로 부른다.

    권씨 : 야, 미성당, 안뛰어!

    장사장: 북천옥, 북천옥! 뒤를 받쳐! 따라가 주란 말야!대성슈퍼 : 동대장님, 앞으로, 자!

    - 동대장, 상대 공격수를 일대일로 막고 있는 상황. 상대는 공을 잠시 멈추고 요리 조리 기회를 보고 있다. 동대장이 거기에 따라 몸을 움직인다. 상대가 큰 동작으로 오른발을 뒤로 뺀다. 머뭇거리는 동대장. 상대가 센터링으로 강하게 찬다. 동대장의 눈에 공이 갑자기 크게 보인다. 얼굴에 정면으로 맞는다. 동대장, 쓰러진다.

    - 쇠를 가는 듯한 효과음. 동대장의 귀에 들린다.

    - 동대장의 시선. 하늘만 보인다. 날씨가 더없이 청명하여 파란 하늘과 구름까지도 돋보인다.

    - 갑자기 동대장의 시선 속에 예전 기상 캐스터의 얼굴이 쑥 들어온다. 눈꼬리 쳐진 눈으로 애처로이 동대장을 내려다 본다. 그리고 그녀 주위로 같은 팀 선수들의 얼굴이 속속 들어 온다. 다들 그를 가엾다는 듯이 애처롭게 내려다본다. 어느새 기상 캐스터의 얼굴은 사라지고 없다. 북천옥 양씨가 그를 일으킨다.

    양씨 : 괜찮아? 자, 이리 나오라구.

    - 그라운드 밖 스탠드로 나가 앉는 동대장. 양씨가 깨진 안경을 전해주고 다시 들어간다.

    41. 동사무소 - 앞 길 (토요일 오후)

    미자와 경숙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뒷모습.

    42. 식당 - 중국집

    - TV에서 프로레슬링이 중계되고 있다. 주인 아저씨가 의자에 기대고 방송을 보고 있다. 미자와 경숙의 테이블 위에 간짜장 2개와 군만두가 놓여 있다.

    미자 : (프로레슬링 중계를 보다가) 어머, 저것 봐. 피나네.
    주인 : (돌아보며) 에유, 저거 다 가짜에요.
    미자 : 피 까지 흘리는데 가짜에요?
    주인 : (웃는다) 다 짜고 하는 거예요.
    경숙 : 아나운서 소리 들어보세요. 아나운서도 그럼 거짓말 해요?
    주인 : 그럼 진짜라고 해요. 보는 사람이 진짜면 진짜고 가짜면 가짜 아니겠어요. (씩 웃는다)
    나레이션 (미자) : 정말 아나운서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정말 서로 짜고 하는 걸까요. 만일 그런 거라면 아나운서까지 거짓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미자 : (몇 개 남지 않은 만두 접시를 내밀며) 언니, 만두 먹어.
    경숙 : 알았어. 너, 간장에 식초 넣었니?

    나레이션 (미자) : 저는 매번 돼지처럼 만두부터 먹고 나중에 내 짜장면 먹고, 언니는 자기 짜장면 다 먹고 나중에 남는 만두 먹고...... 어른이 되어서도 좀 쉬어 갈 데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음, 어릴 적 크리스마스 같은 거 있잖아요. 산타 할아버지가 있다 그래 놓고 정말 있는지 없는지 누구 하나 정색하고 딱 부러지게 말해주지 안잖아요. 산타가 있다는 어른도 웃으면서 있다고 하고, 없다는 어른도 웃으면서 없다고 하고. 이게 도대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어린 나이에 그렇게 웃으면서 이야기들 하면 너무 헷갈려요. 그래도 어른들이 웃으니까 은근히 기대하게 되잖아요. 뭔가 좋은 게 있겠구나, 하면서요. 혹시 아직도 어른들을 속이고 있는 게 있을까요? 그런 게 있었으면 해요. 나이 들고 힘든 어른들도 기분 좋게 속을 수 있는 그런 게 있었으면 좋겠어요. 거기서 좀 쉬고 싶네요. 경숙 언니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서인가요. 아, 이제 경숙 언니 없으면 누구랑 밥을 먹죠? 누구랑 옥상에서 커피 마시고, 남자 직원 흉보고 그러죠......

    - 만두를 먹다 눈물이 그렁그렁 해지는 미자. 경숙 언니는 그런 미자를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만두만 먹고 있다. 그들의 뒤로 배달하는 청년과 철가방, 우스꽝스런 모자를 쓴 조리장 아저씨, 계산대의 아줌마, 빈 양념통에 양념을 채워 넣는 주인아저씨 등이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자기의 일에 열중한다. 미자, 혼자만 그렁그렁 하고 있다.

    경숙 : (만두를 먹다 뭔가 생각난 듯) 미자야, 언니랑 쇼핑이나 하러 가자. (심각하게) 소비자 조사도 해야 되고, 상권도 좀 파악할 겸.

    43. 전철역 주변 번화가

    미자와 경숙이 전철역 주변 상가를 돌아 다닌다. 어제의 비로 먼지가 깨끗하게 씻겨 나가고, 젊은 연인들과 보행기를 타고 나온 아기들로 인해 거리는 말 그대로 싱싱하다.

    44. 식당 - 삼겹살집 (토요일 저녁)

    - 고기를 구워 먹으며 얘기를 나누는 미자와 경숙
    미자 : 언니, 그럼 언제까지 나오는 거야?
    경숙 : 다음 주 까지 인수인계 마치고, 금요일 날 회식한대.
    미자 : 언니 일은 내가 맡고, 그럼 내 일은 누가 한대?
    경숙 : 영란씨랑 너랑 나눠서 하든지, 아니면 새로 누가 오겠지 뭐.
    미자 : (조심스레) 어제 퇴근하고, 뭐했어? 같이 가자니까 먼저 가구.
    경숙 : 뭐했을 것 같냐?
    미자 : (머뭇거리며) 글쎄, 그......
    경숙 : 너 혹시 내가 바다를 보러 갔다 왔을 거 같지 않냐?
    미자 : 바닷가에 갔었어?
    경숙 : 아니면 친구하나 불러다가 춘천으로 한바퀴 쏘구, 포장마차에서 소주 빨구, 뭐, 그런 짓 했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냐, 그치?
    경숙 : 술먹었어? 술 먹었구나. 그렇지?
    경숙 : 울었다.
    미자 : (놀라고 측은한 감정이 섞여) 언니!
    경숙 : 이불 싸 짊어지고 엉엉 울었다. 나도 여자야, 임마. 10년을 생활한 곳이야. 하루 만에 정리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 웬만하면 버텨 볼까도 했는데, 안그래도 1동 동사무소하고 통합된다는 둥 얘기가 분분하길래, 누군가는 책임을 져서 일을 빨리 끝내는 게 좋을 것 같더라구. 그리고 자식 있는 사람들 밥줄은 좀 신경 써 줘야잖아. (진지해지면서) 그것도 그렇구, 정말로 몇 년전부터 계획한 사업이 있었거든.
    미자 : 뭔데. 이제 말 좀 해봐.
    경숙 : 아까 내가 사업차 여기 저기 둘러 봤잖냐. 지금 생각해 보니까 정말 잘 될 것 같아. 그냥 넌 정보통신과 환경공학이 결합한 새로운 사업이다, 이정도만 생각해 둬.

    - 식당 문이 열리면서 일단의 사람들이 들어 온다. 일렬로 붙여 놓은 테이블 맨 안쪽에서 먹던 두 사람 옆으로 그들이 들어오는 순서대로 앉는다. 가만히 보니 미자의 맞은 편 즈음에 앉는 사람이 동대장이다. 축구시합을 마친 배우회 회원들이 식사하러 온 모양이다.

    미자 : 어, 동대장님 아니세요.

    - 동대장, 안경이 없어 쉽게 알아 보지 못한다.

    동대장 : 가만 있어 봐라. 내가 안경이 없어서.
    양씨 : 어, 동사무소 아가씨들이네.
    동대장 : 아, 미자씨구나. 그리고 여기는, 여긴......

    - 동대장, 경숙의 이름이 금방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다. 눈치를 챈 양씨가 거든다.

    양씨 : 이 아가씨는 호적등본 떼주던 아가씨 아냐.
    동대장 : (그제야 조금 생각이 난 듯) 그렇구나. 미스 오 아냐. 미스 오.
    경숙 : 안녕하세요. 오경숙 입니다.
    동대장 : 미안해, 맨날 미스 오, 미스 오, 하다 보니 이름이 금방 안 떠올라서.
    경숙 : 괜찮아요. 저두 동대장님, 동대장님 하다 보니 함자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죠.

    - 술자리가 무르익어 간다. 얘기 소리가 시끌시끌한 중에 미자와 경숙이 이야기 한다.

    미자 : 언니, 동대장님이 언니 이름 몰라서 좀 섭섭했지?경숙 : 조금. 근데 뭐, 나도 몰랐으니까.

    미자 : 나 저번에 동창 만났잖아. 그런데 헤어질 때 되서 그 친구가, 정자야, 다음에 보자, 그러는거 있지. 나는 속이 많이 상했는데.
    경숙 : 그렇지. 너는 친구니까 속이 상했겠다. 근데 뭐, 나는...... 아니구나. 나도 이제 속이 상하는데. 속상하기 시작했어.
    미자 : 그렇지. 잘 생각하면 그럴 만한 일인데, 슬며시 속상하지?경숙 : 정리해 보자. 그러니까 너는 니 친구를 가슴에 담고 있었는데, 니 친구는 안 그랬다, 그래서 속이 상하다, 이런 거니?미자 : 그러니까 걔는 나란 애를 지금까지 잊어먹고 살았다는 말이잖아. 그러니까 걔 인생엔 내가 없었다는 거잖아.

    경숙 : 그럼 난 왜 섭섭하지? 동대장님 인생에 내가 없어서 섭섭한 건 아니잖아. 나도 동대장님 이름도 모르고, 알려고도 안했고. 그 왜, 내 인생에 조금도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은 사람 있잖냐.
    미자 : 언니..... (망설이다) 아냐, 아무것도.
    경숙 : 알겠다. 떠날 때가 되서 그런 모양이지. 내가 주변 사람들한테 그 정도 밖에 안되었나, 싶고.....

    - 잠시 침묵. 미자가 말을 돌린다.

    미자 : 그도 그렇고, 왜 꼭 친구들이 정자랑 나랑 헷갈려 하지? '자'자 돌림이라서 그런가. 그게 그렇게 웃기나.
    경숙 : 나 집에서 부르는 이름이 상욱이야. 아버지가 이번엔 꼭 아들 낳는다고 이름까지 지어 놓으셨대. 어릴 때 아버지가 사람 많은 데서 상욱아, 상욱아, 그러시면 그게 그렇게 부끄러웠는데.
    미자 : (웃는다)
    경숙 : 뭐 임마, 이젠 상욱이가 더 잘 어울린다고?

    - 그 때 옆 테이블이 왁자지껄 해진다. 소방대장 권씨가 명함을 가지고 동대장을 놀린다.

    권씨 : 젊은 애도 아니고, 카나리아가 뭐야, 이메일이. 하하하.(크게 웃는다)
    동대장 : (당황하며) 원래는 신카나리아로 했다가, 안돼서 그냥 한거야. 신카나리아 알잖어.
    양씨 : (웃으며) 카나리아라, 우리 동대장이 카나리아라......
    권씨 : (웃으며) 간첩 잡으러 댕기던 우리 동대장이 카나리아라......

    - 별안간 옆자리서 듣고 있던 경숙이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린다. 굳어지는 동대장의 얼굴. 정색을 하는 동대장을 보고 사람들이 놀리는 것을 그친다. 경숙도 웃음을 참으려고 노력을 한다. 그렇지만 잘 안 된다. 콧물이 나올 것 처럼 웃음을 못 참고 계속 쿠쿡 거린다.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쿠쿡 거린다. 얼굴이 화로처럼 벌개지는 동대장. 안경 쓰던 사람의 안경 안 쓴 퀭한 눈언저리가 마치 주눅 든 사람 같다. 경숙은 이제 우는지 웃는지 모를 정도다.

    경숙 : 죄송해요, 아이구, 죄송해요. 어떻게 하나. (웃음이 그치지 않는다)

    - 시간 경과. 모두들 거나하게 취했다. 술자리가 차분하게 가라 앉고 진지한 말들이 오간다. 1동 앞으로 외곽도로가 나서 땅값이 들썩거린다느니, 2동이 강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해서 도로가 1동 쪽으로 나버렸다느니, 앞으로 통합이 되면 2동은 별 볼일 없을 거라느니, 다들 한 마디씩 던진다. 술이 많이 오른 소방대장 권씨가 한 마디 쏜다.

    권씨 : 뭐 하나 제대로 하는게 있어야지. 하다못해 유니폼 하나 맞추는 것도 그렇지. 꼭 한 놈씩 이상한 옷 입고 와서......
    양씨 : (은근히 기분 나쁘다) 지금 저보고 그러세요?
    권씨 : 뭘 하든 통일이 돼야지. 그래야 강해 보이지. 그래야 질서가 잡혀요.
    양씨 : (아무말 않고 듣고만 있다)
    동대장 : 됐어, 이제 다들 일어나.
    권씨 : (양씨에게) 이새끼야. 우리가 공 차서 이겨 본 게 언제야. 단결이 돼야 이기든가 말든가 하지. 너 하나 땜에 질서가 다 깨진다구, 임마
    양씨 : (담배를 재떨이에 던지듯 끈다) 저 먼저 갑니다.

    - 양씨가 일어난다. 사람들이 따라 일어선다.

    45. 식당 앞

    - 사람들이 인사를 하고 헤어진다. 동대장이 양씨와 이야기 하고 있다. 분위기 탓에 어쩔 줄 몰라하던 경숙과 미자가 와서 인사를 한다.

    경숙 : 동대장님,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동대장 : 응? 아, 괜찮아.

    - 동대장과 양씨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길을 걷는다.

    양씨 : 동대장, 한 잔 더 먹자.

    46. 노래방

    - 미자와 경숙 둘 다 마이크를 잡고 신나게 노래 부른다. 미자가 큰 소리로 묻는다.

    미자 : 언니! 자주 놀러 올거지?
    경숙 : 그럼! 밥만 많이 사!

    - 미자가 경쾌한 댄스곡을 부르면서 어설프나마 진지하게 춤을 흉내낸다. 보고 있던 경숙, 그냥 뛴다. 껑충껑충 위로 뛴다. 음악에 맞춰 계속 뛴다.

    47. 룸 까페 - 전경

    - 주택가 조금 못 미친 도로변에 핑크빛 네온사인을 단 카페가 몇 개 있다. 모두 검은 접착지로 창문을 가려서인지 우중충한 느낌이다. '갈대의 순정'라는 이름의 카페가 보인다.

    48. 룸 카페 - 카페 안

    - 동대장 옆에 마흔 줄의 마담이 앉고, 양씨 옆에 젊은 아가씨가 앉아 있다. 동대장과 양씨 모두 이젠 많이 취했다.

    양씨 : (아가씨에게) 야, 요년아. 여기는 노래방 기계 없냐. 저 아저씨가 노래 얼마나 잘 하는 줄 알어?아가씨 : 어머, 카페에 노래방 기계 있는데 봤어요? 언니, 장사 끝나고 정말 노래방이나 갈까?
    마담 : 애한테 욕좀 하지 말아요. 요년아가 뭐야.
    양씨 : (장난스럽게) 아이 씨팔, 내 입 가지고 욕도 내 맘대로 못해?
    마담 : (정색을 하며) 누군 입 없어서 욕 못하는 줄 알아요?

    - 아가씨가 테이블 밑으로 마담을 쿡 찬다. 마담이 실룩거린다.

    양씨 : (아가씨에게) 너 신카나리아라고 알어? 그게 저 아저씨 애인이래.
    마담 : (퉁명스럽게) 거짓말 좀 마요. 신카나리아가 나이가 몇인데.
    동대장 : (술에 취해서 자꾸 웃기만 한다) 흐흐, 흐흐흐.
    아가씨 : 언니, 신카나리아가 뭐야. 가수야?
    마담 : 가수야. 옛날 가수.
    동대장 : 흐흐흐, 가수가 아냐.
    양씨 : 에이, 이사람아. 가수 맞잖아. ('나는 열일곱살이에요'를 부르며) 나는 가슴이 울렁거려요~ 아르켜 드릴까요, 열 일곱살이에요~
    아가씨 : 아, 그 노래. 나도 그 노래는 알겠다.
    동대장 : (웃으며) 신카나리아가 아니라 카나리아라구.
    양씨 : (계속 노래를 부른다. 아가씨랑 장난을 치며) 나는 얼골이 붉어 졌어요~ 가만히 가만히 오세요~ 요리조리로~ 아가씨 : (따라 부른다) 가만히 가만히 오세요~ 요리 조리로~
    동대장 : 그냥, 그냥 카나리아라구. 씨, 에이, 엔, 에이....

    - 노래 중에 양씨의 핸드폰이 울린다. 양씨, 손가락으로 조용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양씨 : 응. 곧 들어간다. 술 많이 안 먹었어. 알았어, 알았어.

    - 갑자기 동대장 옆에 앉아 있던 마담이 얼굴을 싸안으며 뛰쳐 나간다. 이어서 들리는 훌쩍이는 소리. 양씨, 통화를 끝낸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다.

    양씨 : 미안해. 잠깐만.

    - 양씨가 나간다. 동대장과 아가씨 둘 만 남았다. 대각선으로 마주 앉아 있다.

    아가씨 : 죄송해요. 놀래셨죠? 언니랑 양사장님이랑 원래 친해요. (생각을 하다가) 언니가 정말로 사랑하는 것 같아요.

    - 동대장, 술이 확 깬다.

    49. 주택가 골목

    - 동대장과 양씨가 나란히 걷는다.

    양씨 : 아직 두 집 살림할 형편은 안되고. 자꾸 정은 들고. 큰일이야.
    동대장 : (고개를 끄덕인다)

    - 잠시 침묵.

    동대장 : 언제부터 그랬어?
    양씨 : 한 1년 됐지.
    동대장 : 누가 먼저 그랬냐?
    양씨 : 그런 건 몰라.

    50. 경숙의 방

    - 같은 시간. 라디오에서 진행자들이 이야기 한다. 무슨 영화음악을 틀어주는 프로그램인 모양이다. 미자와 경숙 나란히 누워 깊이 잠들어 있다. 미니 콤포넌트의 사운드 표시등이 음악에 따라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며 얼굴을 비춘다.

    - 다음날 아침. 교회의 차임벨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윽고 아파트 복도에서 나는 '세탁~' 하는 소리에 미자가 눈을 뜬다. 경숙은 벌써 일어나서 감은 머리를 말리고 있다.

    미자 : 언니, 저기 세탁~, 그러는 아저씨가 망태 할아버지 맞어?
    경숙 : 망태 할어버지?
    미자 : 그 왜, 우는 애들 잡아 간다는......

    - 밖에서 '상욱아' 하고 경숙을 부른다.

    경숙 : (나가면서) 들었지?

    51. 동대장의 집 (같은 시간)

    - 경숙의 방에서 들리는 교회 차임벨 소리가 똑같이 들린다. 할머니와 아내가 성경을 옆에 끼고 집을 나선다. 동대장은 츄리닝 차림으로 인사한다.

    - 동대장이 벽장 상자를 열어 노래 테이프를 뒤적이고 있다. 한 테이프에서 신카나리아의 노래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 카셋트에 테이프를 넣고 튼다. 이리 저리 맞추니 신카나리아의 '강남달' 이라는 노래가 나온다. 그런데 신카나리아가 부른 노래가 아니라, 관광버스용으로 만든 메들리 테이프다. 뿡짝뿡짝 야호, 하는 소리가 계속 되자 동대장이 스톱 버튼을 누른다.

    52. 마을버스

    - 마을버스 안에서 밖을 보는 동대장. 봄바람이 시원하게 들어온다. 라디오에서는 귀에 익은 진행자의 목소리로 시청자의 사연이 소개되는데, 진행자가 자기 일처럼 분개해 하고 있다.

    진행자 : ...... 그건 아버지가 아니라 동네 아저씨라도 그렇게는 안하죠. 사람이 동물이랑 다른게 뭐가 있겠어요. 사연 보내주신 이명희씨는 마음을 독하게 드셔야죠. 아이들부터 살려놓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또 남편이 손을 대거나 그러면 경찰에라도......

    53. 안경가게

    - 안경테를 고르는 동대장. 이것 저것 가격을 물어 보다가 단순하게 생긴 어느 것을 선택한다. 점원이 테를 가지고 가는데, 동대장이 불러 세운다.

    동대장 : 이걸로 해봐요.

    - 먼저 것 보다 좀 더 무늬가 있는, 그래서 조금 화려해 보이는 테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54. 동사무소 - 사무실

    (M) 경쾌한 음악

    - 동사무소 직원들이 출근한다. 미자와 경숙은 일찍 와서 나란히 붙어 앉아 업무 인수인계를 하고 있다.

    나레이션 (미자) : 언니는 호적관련 일을 해왔어요. 언니 말로는 호적은 철학이래요. 호적계 10년이면 인생을 알 수 있대요. 그럴 만 하기도 해요. 호적계에서 하는 일이 혼인신고, 출생신고, 사망신고, 이혼신고, 그런 것들이거든요.

    - 미자의 기억장면. 간결한 템포로 제시된다.

    = 신혼부부 두 사람이 경숙 앞에 앉아 있다. 둘 다 웃고 있다.

    신혼남 : 그러니까 증인 2사람은 직접 올 필요가 없다 이거죠?경숙 : 네, 그리고 양식은 여기 비치되어 있는데요, 신고는 구청에서 하셔야 돼요. (미자를 돌아보며 작은 소리로) 혼인신고는 꼭 손잡고 해야되냐?

    = 임산부와 남편이 앉아 있다.

    경숙 : 미국 가셔서 출산 하시더라도 영사관에서 민원업무를 해주거든요. 출생신고는 거기서 하시면 아무 상관 없어요.
    부부 : (함빡 웃는다)

    = 40대 아주머니가 초췌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아주머니 : (작은 목소리로) 이혼을 했는데, 그러면 제 호적은 어떻게 되나요.

    = 2층 휴게실. 경숙과 방금 전의 아주머니가 이야기 하고 있다.

    아주머니 : ......몇 달을 집에 안 들어오다 어쩌다가 들어와서 내 머리거댕이 흔들고, 때리고, 부엌에서 칼 들고 모가지에다 대고 다 죽자 그러고, 그래서 경숙씨, 내가 식칼 끝을 다 부러뜨려 놨어. 나는 죽어도 괜찮아. 차라리 죽여. 그래도 저 죄없는 것들은 살아야 되잖아. (흐느껴 운다)경숙 : (눈물이 맺혔다. 분개하며) 너무 한다, 정말 그런 놈이 다 있냐.

    = 아직 어린 티 나는 여대생이 사망신고서 2장을 경숙에게 내민다.

    경숙 : 두 장 맞아요?
    여대생 : (고개를 끄덕인다. 눈을 크게 뜨고 울음을 참으려 한다) 교통사고예요. 두 분이......
    나레이션 : 경숙 언니 말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동사무소를 한 번 씩 들리게 된다고 해요. 그러니까 사는 동안 고비고비 마다 동사무소에서 점 하나 씩 찍고 간다는 거죠.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호적등본이라는 곳에다 일기를 쓴다고 생각하면 되겠죠. 언니는 10년 동안 참 별일을 다 봤대요. 언니는 관상이니 사주니 그런 거 다 거짓말이라는데요, 정말 그렇게 안 생긴 사람도 철면피 같은 짓을 하고, 신혼 때 손잡고 와서 혼인신고 했던 사람들이 인주가 마르기도 전에 원수가 되고는 그런대요. 어디로 튀는게 사람 사는건지, 또 어떻게 변하는게 사람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헷갈려지고. 그래서 무서워서 시집을 더 못가는 지도 모르겠다는군요. 저보고 조심하래요.

    - 어느새 동대장이 미자 자리 옆에 서 있다.

    미자 : 오셨어요? (동대장의 바뀐 안경을 보고) 어머, 안경 새로 하셨네요. 이쁘다.
    동대장 : 그날 잘 들어갔어?
    미자 : 네.
    동대장 : (조용히) 미자씨, 나 하나 물어보자. 그 컴퓨터로 편지 보낸다는 거 있지?

    55. 2층 인터넷 방

    미자가 열심히 인터넷 화면을 가리키며 설명을 하고 있다. 동대장이 귀를 기울이지만 영 이해가 안되는 표정이다.

    56. 동대 본부 - 동대장실

    동대장 : 김일병아, 우리 관제엽서 남은 거 몇장 가져와라.

    - 김일병이 몇장 갖다 놓는다.

    - 받는 사람 난에 '심선미 기상 캐스터'라고 쓴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글을 적는다. 한자도 섞고, 그리고 글씨체에 각별한 노력을 들인다.

    = 住民들에게 유익한 情報를 提供코저 東奔西走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人相이 훌륭하고 어질게 보이셔서 아침마다 편안한 마음으로 방송을 시청하고 있습니다.

    - 마음에 들지 않는지 다른 엽서에다 그대로 쓴다. 또 버린다. 다시 쓴다.

    = 住民들에게 유익한 情報를 提供코저 東奔西走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비록 아이들 둘에 노모를 모시고 사는 가장이지만, 지난 방송을 보고 감명을 받아서 이렇게 편지를 띄웁니다. 나이 마흔 줄에 들어서 뭘 바래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진짜 어디선가 뵌 분 같고, 또 그것이 저를 한없는 설렘으로......

    - 동대장, 엽서를 다시 읽는다. 그리고 또 버린다. 다시 쓰기 시작한다.

    57. 동사무소 - 사무실

    - 자리로 돌아가는 미자. 그런데 누가 자기 자리에 앉아 있다. 조금 어려 보이는 여자가 일어서면서 인사를 한다.

    희영 : 안녕하세요. 새로 발령 받았어요. 박희영이라고 해요.

    - 미자, 동전을 넣으려다 지폐를 넣는다. 그리고 캔커피 두 개를 뽑아 희영과 옥상으로 오른다.

    58. 옥상

    - 미자, 경숙 언니와 그랬던 것처럼 캔커피을 들고 난간에 기대어 희영과 이야기를 나눈다.

    미자 : 저 공원 옆 도로에서 뒤쪽 외곽 순환 도로까지가 배오2동 이거든요. 꽤 사람이 많이 살아요.
    희영 : 넓네요, 되게.
    미자 : 주민등록계는, 뭐랄까, 철학이에요. 몇 년 정도 일하면 사람이 산다는 게 뭔가를 알 수 있죠.
    희영 : (고개를 끄덕이기만 한다)
    미자 : 그런데, 갈수록 모르겠어요. 사람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는데 저렇게 되는 경우가 더 많더라구요.
    희영 : (웃으며) 언니, 우리 말 놓아요.

    - 미자, 옥상을 내려오려다 한 곳에 눈길이 머문다. 예의 그 '창문의 여인'이 그때와 비슷한 동작으로 아래위로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이번엔 두 손을 들어올려 내지른다. 마치 환성을 지르는 듯 하다.

    59. 동사무소 등

    - 인수인계를 하고 있는 경숙과 미자, 혹은 미자와 희영의 모습, 탈의실에서 여직원 들이 옷갈아 입는 모습, 퇴근하는 모습 등이 빠르게 지나간다.

    - 미자와 희영의 모습. 카메라가 책상 위 노트를 잡는다. 노트에는 주민등록 번호가 하나 쓰여 있다. 대사와 나레이션에 맞춰 장면들이 바뀐다.

    미자 : 앞의 여섯 자리는 뭔 지 알지? 그래 출생 연월일이야. 그리고 뒤 일곱 자리 중에 첫 자리는 남자 혹은 여자를 나타내고, 그 다음 네 자리 숫자는 출생신고를 한 지역의 번호야. 그러니까 나는 3982 지역에서 태어났다는 얘기지. 그 다음 숫자가 신고한 순서이고 그 다음은 검증번호. 주민등록 번호는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이 말씀이야.
    나레이션 (미자) : 주민등록계원을 몇 년 하다 보면 주민등록번호를 보고 그 사람을 정의내리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저는 75년 2월 11일에 3982지역에서 태어난 여자다, 이런 식이죠.

    - 미자가 아침을 먹으며 TV를 보는 장면. 심선미 기상 캐스터가 나와서 날씨를 전해준다.

    기상캐스터 : 오늘 새벽 영동 산간지방에는 34밀리의 큰 눈이 왔습니다. 이 영향으로 영동고속도로가 통제되고 속초행 항공기가 회항하는 등......
    나레이션 (미자) : 그냥 그냥 하루 하루가 흘러 가고 있었어요. 벌써 경숙 언니가 이 곳을 떠나기 전날, 강원도에 큰 눈이 내렸다는 그 날, 이 곳은 완연한 봄날씨였습니다.

    60. 동사무소 - 사무실

    - 사무실 밖은 햇빛이 눈부시다. 동사무소 정원에는 진달래꽃이 함빡 폈다. 누가 미자를 부른다. 고개를 드니 김일병이다.

    미자 : 안녕하세요. 웬일이예요?
    김일병 : 이 분 주민번호 좀 봐봐요. 이럴 수도 있어요?

    - 김일병 뒤에 서 있던 영주가 앞으로 나선다. 플라스틱으로 바뀌기 전의 비닐 커버로 된 주민등록증에는 710931- ......이라는 번호가 펜으로 적혀있다.

    나레이션 (미자) : 71년 9월 31일생...... 9월 31일에 태어났다..... 강원도에 큰 눈이 내렸다고 했죠.? 제가 이럴 줄 알았어요. 이런 이상한 일이 생길 줄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대하고 보니 어떻게 이렇게 말이 안될 수 있을까요. 71년에는 9월이 큰달이었다구요?

    - 미자, 웃음을 참으려 먼산을 본다. 괜히 미간을 좁히고 시선을 멀리하고 이를 악문다. 그러다 멀뚱히 서 있는 영주의 모습을 본다. 미자,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쿠쿡 하는 소리를 터뜨려 버린다.

    나레이션 (미자) : (웃음을 참지 못하며) 저 사람이 9월 31일 태어났다구요? (웃는다)
    김일병 : (몸을 숙여 미자에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동대장님이 이 주민등록증 혹시 위조된 거 아닌가 확인해 보래서요.
    나레이션 (미자) : 1971년 9월 31일 3982지역 출신의 권영주라는 남자...... 응? 그런데, 3982지역이라구요?
    미자 : 어머, 저랑 같은 동네에서 태어나셨네요?

    61. 동사무소 - 박서기의 자리

    - 시간 경과. 미자와 영주가 박서기 자리에서 영주의 호적등본과 주민등록 등본을 올려놓고 이야기하고 있다. 거기에도 물론 710931로 기록되어 있다.

    미자 : 호적등본에 이렇게 되어있다는 말은 출생신고부터 잘못되었다는 얘기에요. 제 생각에는 아마 권영주씨 보호자께서 출생신고서를 잘못 기입을 하셨거나, 해당 동사무소, 그러니까 설국 동사무소 직원이 실수했거나, 아니면 주민등록증을 발급한 동사무소에서 실수 했거나 하는 경우 중 하나예요.
    박서기 : 또 있어요. 혹시 이 민증 분실한 적 있어요? 아니면 누구한테 빌려 줬다거나.
    영주 : 그런 적 없는데요.
    박서기 : 아니 그런데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지금까지 한 번도 수정이 안되었는지, 이해가 안 가네. 그 동안 사회생활 안 했어요? 학교는 다니셨을 거 아니예요.
    영주 : 네.
    미자 : 회사도 그렇고, 군대도 갔다 오셨어요?
    영주 : 그럼요. 지금 예비군 훈련 때문에 이쪽으로 온 거예요.
    미자 : 결혼도 하셨어요? 혼인신고는 어디서, 어떻게 했어요?
    영주 : 관할구청에다 했죠.
    미자 : 거기서 아무 말 안하던가요?
    영주 : 네.
    박서기 : 진짜 생일은 언제예요?
    영주 : (난처한 듯 말을 않는다)
    박서기 : 실제 생일이요. 9월 30일이에요, 아니면 10월 1일이예요?
    영주 : (머뭇거리다) 9월 30일이요.
    박서기 : 그러면 이렇게 하자구. 신고지가 미자씨 동네랬지? 그럼 내가 전화 걸어 놓을 테니까 퇴근할 때 거기 동사무소에 들려서 출생신고서 사본 하나 받아와요. 그걸 보고 내일 얘기를 하자구요..
    - 미자, 고개를 끄덕인다.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미자 : 그럼 내일 오후에 잠깐 나오세요.
    영주 : 아니요, 지금 같이 가죠. 그렇지 않아도 한 번 가려 했거든요.

    62. 전철 - 열차 안

    - 열차가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고 있다. 저녁 햇살이 열차 안으로 쏟아진다. 해가 뜰 때나 질 때는 시선과 정면이어서 눈부시게 느껴진다. 거기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온 직후에는 열차 안의 햇빛은 밝은 느낌이 더한다.

    -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 미자와 영주.

    미자 : 그러면 설국은 언제 떠나신 거예요?
    영주 : 어머니 말씀으로는 한 두 살 때래요. 아무튼 저를 낳고 또 다른 데로 옮기셨어요. 장사가 잘 되는 곳으로.
    미자 : 배오동으로 이사 오신 건 언제예요?
    영주 : 1년 조금 넘었죠. 결혼하면서 왔으니까.
    미자 : 그럼 전입신고 하셨어요? 저한테?
    영주 : 누구한테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하긴 했어요.
    미자 : 혹시, 번호가 잘못된걸 본인도 모르셨어요?
    영주 : 알았죠.
    미자 : 그럼 왜 안 고치셨어요? 귀찮으시더라두......
    영주 : (망설이다가) 잘못된 게 아니구요, 실제 이 날 태어났대요, 9월 31일에.
    미자 : (전철 소리 때문에 잘 안 들린다) 언제요?
    영주 : 9월 31일.
    미자 : (웃으며) 하하, 왜 그러세요.
    영주 : 아뇨. 정말 호적에 나와 있는 대로 1971년 9월 31일 축시생이라고 그러셨어요. 어머니가요.
    미자 : 아까는 왜 30일이랬어요?
    영주 : 설명하기가 귀찮잖아요.
    미자 : (얼굴을 찌푸린다)

    63. 설국역 - 플랫폼

    - 열차가 둘을 내려놓고 지나간다. 전동차의 세련된 외양과, 전철역의 촌스러움이 확연히 대비된다. 열차의 소음이 멀어지면서 이상하리만치 고즈넉하다. 플랫폼을 걷거나 맞은편에서 기다리는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도 태평스럽다. 신록을 더하는 산들이 그윽한 정취를 풍긴다. 계단으로 향하는 미자.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숨을 크게 쉬어 보는 영주.

    64. 설국

    - 역 앞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미자와 영주. 길 옆 작은 건물에 식당과 상점 두어 개, 그리고 부동산이 눈에 띌 뿐 사람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들의 뒤로 역명을 나타내는 간판이 보인다. 그 뒤로 더할 수 없는 파란 하늘.

    - 2차선 국도를 건너 골목을 지나니 마을이 나온다. 재래식 가옥들이 대부분이고 주민들이 함께 사는 연립주택 한 채도 보인다. 3층짜리 주택 앞에는 소형 자동차들이 주차되어 있고, 그 앞으로는 파, 상추 등 야채를 숨궈 놓은 밭들이 보인다. 자동차 옆 우사에 소와, 그리고 강아지들이 뛰어 놀고 있다. 비닐하우스를 지나 언덕을 오르니 설국 동사무소가 보인다. 동사무소 마당에 철쭉이 한껏 피어있다.

    65. 설국 동사무소

    - 미자와 영주가 들어서니 서너 명의 직원이 자리해 있다. 계원 1명이 이들을 휴게용 소파로 안내하고 차를 내온다. 서류를 탁자 위에 올려 놓는다.

    계원 : 아시겠지만, 출생신고서는 보통 아기의 부모님이 작성을 합니다. 여기 출생신고서에 보시면 1971년 9월 31일 새벽 2시에 출생했다고 나와있네요.

    - 미자, 눈이 휘둥그레 진다.

    계원 : 그리고 출생증명서라는 것은 병원이나 조산소에서 발급을 하는 겁니다. 여기 첨부된 출생 증명서에도 9월 31일로 되어 있어요. 이것 참 믿기 힘든 일이네요.
    미자 : ......
    영주 : ......
    계원 :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아마 출생증명서에 잘못 기입된 것을 부친께서 그대로 옮겨 적으셨고, 그게 지금까지 온 게 아닐까 생각 되네요.
    영주 : 출생신고를 하면 호적에 그대로 올라가나요?
    계원 : 이걸 보세요. (자기 책상에서 서류 파일을 가져온다) 출생신고가 되면 두 군데에 기록이 됩니다. 하나는 말씀하신대로 호적에 그대로 올라가구요, 다른 하나는 (가져온 파일을 열며) 개인별 주민등록표라는 것인데, 주민등록증이 발급 되기 전까지 여기 등재되어 있다가 스무 살이 되면 이것을 근거로 주민등록증이 발급되는 거죠.
    미자 : 혹시 그 때 출생신고를 처리하신 분이 계신가요?
    계원 : 벌써 퇴직하셨죠. 그보다도 출생증명서를 작성한 조산소에 가서 한번 여쭤보세요. 산파 할머니가 아직 계실 거예요. 국도 건너편 마을 입구에 식당이 하나 있을 거예요.

    - 설국 동사무소 현관. 계원이 배웅을 한다.

    계원 : 제 말이 아마 맞을 거예요. 9월 30일부터 진통이 시작되어서 10월 1일 새벽 2시에 낳았는데, 그 할머니가 9월이 큰 달인지 작은 달인지 헷갈리신 거겠죠. 그럼 안녕히 가세요.

    - 영주가 마을을 휘휘 둘러본다. 마을 너머 멀리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그 앞에 도로 공사가 진행 중이고 벌써 부동산 중개소가 여러 개 영업중이다.

    - 미자가 앞장 서가는 영주를 뒤에서 본다. 아니 훑어 본다. 이해가 안되는 표정으로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훑는다.

    - 둘이 나란히 걷는다.

    미자 : 그럼 철 들고는 처음 오신거예요?
    영주 : 모르겠어요. 그런 것 같기도 하구요.
    미자 : 어릴 때 어디 살았는지 기억도 안 나겠네요.
    영주 : 길가 집에서 살았대요. 아버지가 장사를 하셨으니까.
    미자 : 그런데, 정말 생일이 9월 31일이라고 생각해요?
    영주 : 어느 쪽이냐 하면, 저는 우리 어머니 말씀을 믿는 쪽이예요.
    미자 : 어머니가 정말 31일이래요?
    영주 : 제가 어릴 때 내 생일잔치를 언제 할거냐고 물으면 엄마는 9월 31일이래요. 30일이 되서 언제하느냐고 물으면 내일이래요. 그 다음날 오늘이 생일잔치하는거 맞냐고 물으면 어제 지나갔대요.
    미자 : 에이, 그건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거랑 똑같잖아요.
    영주 : 언제였든지 태어 났으니 지금 걷고 있겠죠.
    66. 식당, 조산소

    - '화정식당'이라는 간판 앞에 도착한 두 사람. 간판 아래에 조그만 수제 간판으로 '산파'란 글과 전화번호가 조악하게 적혀있다. 식당 안에는 40대 아주머니가 야채를 다듬고 있다.

    미자 : 조산소 찾아 왔는데요.
    아주머니 : (미자에게) 산모세요?
    미자 : (얼굴을 붉히며) 그런게 아니라요, 뭐 좀 여쭤볼게 있어서요.
    아주머니 : 그래요. (주방쪽을 향해) 엄마!

    - 주방쪽 선반 아래에서 한 노파가 고개를 든다. 키가 꽤나 작지만 몸놀림은 그리 둔하지 않다.

    - 노파의 뒤를 따라 식당 뒤를 거쳐 본채로 들어간다. 노파의 방인 듯한 곳으로 들어간다. 노파가 작은 장을 열어 공책 몇권을 꺼낸다. 그 안에 영수증과 같은 것이 다닥다닥 풀먹여 붙어 있다.

    노파 : 이것이 날짜여. 이 옆이 산모 이름. 그 옆이 보호자의 이름. 그리고 이 옆에다가 인감도장을 찍는데, 그려야 산모나 아기나 다 아무일 없다는 걸루다가 증명을 하는 것이여. 그때만 해도 애 낳아서 업고 가다 죽어버리는 애가 더러 있었거든.

    - 미자와 영주, 귀를 기울인다. 노파가 종이를 넘긴다.

    노파 : 71년 9월이라...... 자, 이것이 부모님 함자가 맞나 함 봐봐.
    영주 : (확인한다) 네, 맞아요.
    노파 : 여기 나와 있네. 31일 축시생이네.
    미자 : 할머니, 9월이 작은 달이잖아요. 30일까지가 마지막인데. 이거 잘못 적으신거죠?
    노파 : (순순히) 어구야. 그렇구나. 내가 잘못 적었던 모냥이네.
    - 미자와 영주의 얼굴에서 약간의 미소가 번져나간다. 노파가 공책을 다시 넘긴다.

    노파 : 가만 있어봐라. 아냐, 9월 31일이 맞어.

    미자 : (놀라며) 네?
    노파 : 이 보소. 내가 9월 30일에도 애를 받았고, 10월 초하루날도 애를 받았어.

    - 미자와 영주가 직접 공책을 넘겨가며 확인한다. 분명히 다른 이름과 다른 도장이 찍혀 있다.

    노파 : 내가 그 때 이마을 저마을 댕길 때라서 하루에 둘은 못받어. 가만히 있어봐라. 몇 년 생이라고 했지?
    영주 : 71년이요. 1971년.

    - 곰곰이 생각에 잠긴 노파. 손가락으로 셈을 해본다. 잠시 후 희미하게 웃는다.

    노파 : 맞어 자네가 31일에 태어난 게 맞어.

    - 미자와 영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67. 식당 (밤)

    - 어느덧 땅거미가 깔렸다. 미자와 영주가 조산소와 붙어 있는 '화정식당'에서 닭도리탕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다. 미자가 영주의 얼굴을 빤히 쳐다 본다. 빤히라기 보다는 찬찬히 뜯어 보고 있다.

    영주 : 뭘 그렇게 봐요.
    미자 : (깜짝 놀라며) 네? 아무것도 아니예요.
    영주 : 드세요.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어요.

    - 미자가 무슨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한다. 은근히 흘려 본다.

    미자 : 저기 저 할머니 말을 믿어요?
    영주 : 예.
    미자 : 어떻게요?
    영주 : 저 할머니도 그러시고, 서류에도 그렇게 되어 있으니 9월 31일이 맞나 보죠.
    미자 : 어떻게 9월에 31일이 있을 수 있어요. 없던 하루가 생겨 난 것도 아니고.
    영주 : 그럼 아닌가 보죠.
    미자 : 참 신기해요. 어떻게 자기 생일에 그렇게 무심하세요?
    영주 : 저는요, 제 생일 보다도 이 설국이라는 동네가 너무 신기해요. 도시에서 전철을 탔는데 내리니까 시골이잖아요.

    - 노파가 부추전이라며 한 접시를 갖다 준다.

    미자 : 혹시 남다른 점이 뭐 있어요?
    영주 : 왜요?
    미자 : 있지도 않은 날에 태어난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를 거 아녜요.
    영주 : 없어요.
    미자 : 한 가지는 있네요. 참 웃기게 생겼어요. (웃는다)
    영주 : 아, 하나 있다. 저 남들보다 필름 잘 끊겨요.
    미자 : 예?
    영주 : 술이 좀 들어갔다 싶으면 어디로 어떻게 집에 왔는지 몰라요. 그래도 꼭 집에서 일어나더라구요.
    미자 : 그거 참 유익한 거네요. 기억하기 싫은 것도 기억 못할 거니까.
    영주 : 에이, 그래도 증거가 다 남잖아요. 아침에 일어나면 속쓰리죠, 신발에는 오바이트 자국 다 묻어있죠, 때때로 상처도 나 있죠.
    미자 : 그런데, 정말 필름 끊기면 아무것도 생각 안나요?
    영주 : (진지하게) 컷트 컷트로 기억이 난다, 그러면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기억이 영화처럼 주욱 연결되는 게 아니라 사진처럼 한 장면 씩 남아 있는 거예요. 말하자면 노래방 컷트가 한 장 기억이 나요. 그럼 틀림없이 노래방을 들렸다는 말인데, 어떻게 갔다든지, 얼마나 있었다든지 하는 건 기억이 없는 거죠.
    미자 : 어머, 저도 그런 적 있어요. 저는 술 먹어서 그런게 아니구요, 이런 부추전을 보면, 옛날 우리집 마당에서 곤로에다 굽던 부추전이 색깔까지도 분명하게 기억이 나요. 그 때 분위기며, 들렸던 소리며, 냄새까지 다 또렷해요. 그런데 더 이상은 기억이 안나거든요.
    영주 : 맞아요.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먼저 의심을 하는 거예요. 내가 정말 노래방에 들렀나, 아니면 내가 그 때 부추전을 구웠나, 그건 한 달 전에 본 부추전이 아닌가, 이런 의심이요.
    미자 : 맞아요, 맞아. 그래서 나이 들수록 의심만 늘고, 추억은 사라지고, 그러는 모양이에요. (술잔을 들고 수줍게 영주를 바라본다) 한 잔 하실래요?
    - 두 사람 다 소주 한잔씩 비운다. 갑자기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들어, 실소가 퍼진다.
    미자 : 혹시 오늘 강원도에 눈내린 거 아세요?
    영주 : 눈이 왔어요? 이런 봄날씨에요?

    68. 설국역 앞

    볼이 발그레하게 달아 오른 미자. 전철역으로 올라가는 영주에게 인사한다.

    69. 동대 본부

    - 퇴근하려는 동대장이 우편물 수령함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 중 하나를 들고 자리로 온다.

    - 봉투의 겉봉에 발신자는 심선미 기상 캐스터라고 적혀있고 하단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다. 칼로 반듯하게 오려 개봉한다. 속지를 펴보니 상단에 동대장의 이름이 타이핑 되어 있다. 편지를 주셔서 감사하다, 성실히 노력하여 더 좋은 정보를 제공하겠다, 더 상냥하고 편안하게 진행할 예정이다, 등과 같은 내용과 그녀의 모습과 닮은 캐릭터가 깨끗하게 인쇄되어 있고, 맨 하단에 본인의 사인이 적혀 있다. 다른 종이들이 나온다. 방송국의 인터넷 사이트를 이용하는 방법, 회원이 되면 받을 수 있다는 물품정보 카탈로그, 그리고 회원 가입 신청서 등이 동봉되어 있다. 사람의 글씨는 싸인 한 군데 뿐이다.

    70. 동대장의 집

    - 동대장은 마루방에서 발톱을 깎고 그 옆에 아내가 빨래를 개고 있다.

    아내 : 오늘 의사가 그럽디다. 이제 환자한테도 숨기지 마라구요.
    동대장 : (말이 없다)
    아내 : 드시고 싶으신 것, 하고 싶으신 것 다 해드리라고. 그리고 자식들도 마음 단단히 먹어야 된대요.
    동대장 :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 톡톡 하는 발톱 깎는 소리가 정적을 깬다. 동대장, 발톱을 다 깎고 난 다음 발 뒤꿈치를 들여다 본다. 뒤꿈치와 발바닥에 붙어 있는 굳은살을 손톱깎이로 뜯는다.

    71. 미자의 방

    - 자고 있는 미자의 모습. 어제의 술 때문인지 약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감고 있다. 마루에서는 TV에서 아침뉴스가 한창이다. 심선미 기상 캐스터가 일기 예보를 전한다.

    기상캐스터 (목소리) : 스키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어쩌면 봄스키를 즐기실 수도 있겠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새벽에 또 강원도에 눈이 내렸습니다. 4월에 눈이 이틀 에 걸쳐 내린 것은 기상대가 생긴 이후 처음 있는 일입니다.....

    - 이불 속에서 눈을 번쩍 뜨는 미자

    인써어트 - 동사무소 전경

    72. 동사무소 - 사무실 (아침)

    - 출근하는 사람들 사이에 미자가 보인다. 동대장도 출근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출근하는 그 시간이다.

    - 사무실의 분주한 아침 정경. 그 중 경숙의 자리에 미자가 앉아 있고 미자의 자리를 희영이 대신하고 있다.

    나레이션 (미자) : 오늘은 경숙 언니의 송별회가 있는 날 이에요. 이제 경숙 언니는 여기서는 볼 수 없게 되었네요. 그리고 저는 오늘부터 호적업무를 시작합니다. 오늘도 강원도에 눈이 왔다고 합니다. 어제는 9월 31일에 태어난 사람이 다녀 갔습니다. 오늘은 또 어떤 사람이 찾아 올까요.

    - 미자의 동창생 윤혜미가 들어온다. 초췌한 모습이다.

    미자 : 안녕하십니까. (혜미를 알아본다) 어, 혜미야.
    혜미 : (참담한 표정으로) 미자야!

    73. 동대본부 - 동대장실

    - 동대장이 담배 케이스를 꺼낸다. 니코틴 흡수용 플라스틱 파이프를 필터에 끼우고 불을 붙인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경숙이다.

    경숙 : 동대장님, 안녕하세요.
    동대장 : 어, 미스 오. 웬일이야?
    경숙 : 저 작별 인사 드릴려구요.

    74. 동사무소 - 2층 휴게실
    - 휴게실에서 커피를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미자와 혜미. 이야기가 아니라 혜미가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고 있고, 달래주는 미자의 눈에도 눈물이 계속 흐른다. 이들 뒤로 유니폼을 입고 탁구 연습에 열중인 아줌마들의 기계적인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똑딱 거리는 탁구공 소리와 기합 소리가 얼얼하게 울려서 미자와 혜미의 울음소리를 묻어버린다.

    나레이션 (미자) : 호적계에서 저의 첫 업무는 친구 혜미를 위로하는 것이었어요. 혜미는 며칠 전 5살짜리 아들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 화면에 놀이동산의 광경이 펼쳐진다. 노란 옷을 입은 유치원생들이 놀이기구 개찰구 앞에 줄을 지어 서 있다. 미자의 나레이션에 따라 장면이 바뀐다.

    나레이션 (미자) : 어린이들은 재미있는 놀이기구를 빨리 타고 싶어합니다. 그래도 선생님은 질서를 가르치기 때문에 항상 줄을 서게 하죠.

    - 혜미의 아들이 줄 서 있는 모습. 천진난만하게 장난을 치고 멀뚱하니 돌아가는 놀이기구를 올려다 보는 모습.

    나레이션 (미자) : 참 우연히도 혜미의 아들이 앉을 좌석은 바로 직전에 앉은 녀석이 고장을 내버렸어요. 혜미의 아들은 비행기가 빠른 속도로 공중에서 꽈배기를 틀 때 하늘에서 떨어졌습니다. 천사가 하늘로 올라 간 거죠. 혜미의 아들이 조금만 한눈을 팔아서 줄에 늦게 섰더라면, 아니면 조금만 더 일찍 섰더라면, 최소한 혜미는 아들을 잃지 않았을텐데요. 이 녀석이 태어 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사이에 어떤 변수가 하나 생겨 그 녀석이 그 자리에 서지 않게 되었더라면 지금 혜미는 이렇게 서럽게 울지 않을 겁니다.

    - 혜미의 아들이 친구들과 장난을 하고 있다. 뱅글뱅글 돌다가 선생님한테 야단을 맞고 열을 맞춘다. 먼저의 친구와 자리가 바뀌었다. 신나게 비행기를 타는 아이의 얼굴.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아이가 떨어진 곳으로 선생님과 어른들이 달려 간다.

    나레이션 (미자) : 몇 년 전 어느 다리가 무너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다리와 함께 떨어진 버스와 자동차들, 그리고 떨어지기 직전에 멈춰서 다리에 대롱대롱 걸려 있던 자동차의 주인들은 심정이 어떨까 하구요. 앞에 떨어지는 차를 보면서 겨우 급정거 했는데 뒤에서 추돌하는 바람에 추락한 사람도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진 운전자, 이 두 사람은 어떤 운명으로 태어났길래 이렇게 결과가 다를까요. 혹시 두 사람이 추월경쟁을 벌이지는 않았을까요. 그리고 떨어지지 않고 마지막으로 건너간 자동차의 주인은 차를 세우고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니면 집에서 뉴스를 보고 자신의 행운을 알았을까요.

    - 미자의 상상. 사고 당시의 재현. 추락한 다리 상판 위에 자동차와 버스가 망가져있다. 그리고 남은 다리부분에 급제동 하여 겨우 대롱대롱 걸쳐져 있는 자동차들. 그리고 그 중 따라오던 자동차의 추돌에 의해 결국 떨어지는 자동차. 한편 마지막으로 지나간 자동차의 주인이 백미러로 뒤를 본다. 그리고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 모든 장면을 TV중계로 보고 있는 미자.

    나레이션 (미자) : 요즘 저를 움직이는 것은 날씨예요. 그리고 어딘가 마법사가 살고 있어서, 제가 이 쪽으로 가려 하면 저쪽으로 가게 하고, 일이 이렇게 될 것 같다 하면, 메롱, 이런 게 아니라 저런 거야, 약 오르지? 하고 놀리는 거 같아요. 제가 앞으로 한 남자를 선택해서 결혼을 한다고 생각해 봅니다. 틀림없이 그 남자도 지금 어디서 숨쉬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그 사람을 만나고 또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를 선택하기까지, 그 순간까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과 우스꽝스런 해프닝이 도사리고 있을지, 그 마법사가 얼마나 장난을 칠지, 얼마나 저를 울리고 웃길지요.

    - 현실로 돌아 온다. 경숙이 동사무소에 들러 직원들과 인사한다. 그리고 미자와 손을 잡고 회식 장소로 향한다. 식당 한 켠 방에는 동장, 주사, 부주사, 동대장 등 연배가 있는 사람들이 먼저 자리잡고 있다. 젊은 직원들이 신발을 벗고 올라가고 있다. 관객은 신발을 벗는 순서로 보아 미자가 동대장의 옆자리에 앉는다고 예상한다. 그러나 갑자기 미자가 다시 신발을 신고 화장실을 향한다. 그 덕분에 경숙이 동대장의 옆자리에 앉게 된다.

    - 동장이 건배를 제의한다 일어서서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경숙에게 여기저기서 잔이 돌아 온다. 경숙 앞에 쌓이는 잔. 장난삼아 잔 몇 개를 동대장이 대신 마셔준다. 점점 무르익는 술자리. 경숙과 동대장이 몇 잔을 주고 받는 듯 하더니, 서로 이름을 부르고 난리다. 모두다 술이 거나하게 취했다.

    75. 노래방

    - 2차가 노래방으로 이어진다. 노래보다는 소리를 지르는 경숙. 그리고 이에 어설픈 춤으로 화답하는 동대장.

    경숙 : (큰소리로) 카나리아 아저씨!
    동대장 : (역시 큰소리로) 왜 부르냐, 상욱아!
    경숙 : 이렇게 재밌는 아저씬 줄 몰랐어요.
    - 노래방 앞. 미자와 경숙이 서로를 안고 있다.

    경숙 : (많이 취했다) 미자야. 나 간다. (눈물을 글썽인다) 미자 : (애써 눈물을 참는다) 언니가 우는 날도 다 있네.
    경숙 : 아이씨, 나는 이불 쓰고 엉엉 우는 스타일인데. 사람들 많은 데서 이거 원...
    미자 : 자주 놀러 와. 밥 많이 사줄게.
    경숙 : 글쎄다, 이거 사업이 바빠서......(웃는다)

    - 직원들, 인사하고 모두 흩어진다. 양쪽으로 갈린 사람들 중 한 쪽에 경숙과 동대장이 함께 있다. 또 하나의 갈래길에서 그들 둘 만 같은 방향이다.

    76. 도로변

    경숙이 길을 걸으며 동대장의 팔짱을 낀다. 그리고 기댄다. 동대장, 술이 확 깬다. 슬며시 팔을 뺀다. 그랬더니 경숙이 장난처럼 더 강하게 팔짱를 낀다. 나무토막같이 뻣뻣하게 걷는 동대장.

    77. 전철역 주변

    - 전철역으로 향하던 미자. 근처 편의점 옆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를 유심히 본다. 영주다. 어저께 9월 31일에 태어났다는 그다. 술이 많이 취한 듯하다. 흔들어 깨운다. 눈을 뜨고 미자를 흘끗 쳐다보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떨군다. 미자가 어쩔 수 없이 영주를 부축한다. 골목을 얼마 지나니 오뎅을 파는 포장마차가 나타난다. 미자, 영주를 그 곳으로 인도한다.

    - 포장마차의 간이 의자에 앉아 국물을 먹는 영주. 문득 아줌마한테 묻는다.

    영주 : (꼬부라진 말투로) 아줌마, 포장마차에는 왜 말(馬)이 없어요?

    - 손님들이 키득거린다.

    영주 : 마차라면서 왜 말이 없냐구요.
    미자 : (황급히) 아저씨, 이거 제가 계산했으니까요, 집에 들어가세요. 아셨죠?

    - 미자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 때 영주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엎어진다. 뺨을 상에 대고 의식을 잃는다.

    78. 시민 공원 (같은 시간)

    시민 공원의 야외 무대에 조명이 휘황하게 밝아 있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다. 지나가던 경숙의 얼굴이 어린 아이처럼 호기심에 차있다. 동대장의 팔을 이끌고 무작정 달려간다.

    79. 영주의 아파트

    영주의 아파트 현관. 경비아저씨에게 호수를 물어 엘리베이터에 버튼을 눌러 준다. 문이 닫히려는데 영주가 스르르 바닥으로 무너진다. 어쩔 수 없이 미자가 같이 탄다.

    80. 시민 공원

    - 경숙이 앞장서 사람들 숲을 헤치고 무대 쪽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서 보이지가 않는다.

    경숙 : 아저씨, 죄송해요.

    - 느닷없이 경숙이 동대장의 어깨를 짚고 올라선다. 동대장, 비틀거리면서 중심을 잡으려 한다. 동대장이 경숙의 다리를 딱 잡아주니 균형이 맞는다. 경숙이 동대장의 목마를 탄 꼴이 되었다. 목마를 탄 경숙이 환호한다. 동대장도 환하게 웃는다.

    81. 영주의 집 앞 (같은 시간)

    - 영주의 집 앞 복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미자가 영주를 깨워보지만 영 의식이 없다. 미자가 영주를 업는다. 그리고 영주의 집을 찾는다. 한참을 가서 집 앞에 영주를 내려 놓고 보니 집에 불이 꺼져 있다. 그 때 엘리베이터 쪽에서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미자, 윗층으로 급히 몸을 숨긴다. 영주의 아내가 쓰러져 있는 영주를 발견하고 집안으로 데려 들어 간다.

    - 주변 경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미자. 아파트 앞 시민 공원이 내려다 보인다. 무대에서는 어느 가수가 열창을 하고 있고 주위에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 들었다.

    나레이션 (미자) : 영주씨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렇게 술을 먹었을까요. 무엇 때문에 저렇게 괴로워할까요. 혹시 어제 다녀온 고향에서의 일이 충격을 준 것일까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체 했던 저 남자에게 혹시 무슨 드라마 같은 사연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82. 버스 정류장

    - 동대장과 경숙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각자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다. 버스가 도착한다. 순간 경숙이 동대장의 허리를 꼭 안는다.

    경숙 : (웃으며) 동대장님, 건강하세요.

    - 경숙이 버스에 오른다. 동대장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멀어지는 버스를 바라본다.

    자막 "PROLOGUE - 끝"

    자막 "EPILOGUE"

    83. 민속주점 (지난 봄)

    - 양복에 줄이 긴 가죽가방을 멘 영주가 주점으로 들어온다. 그의 선배 민정이 반갑게 맞는다.

    민정 : 옷하나 사고 계산하려구 카드를 꺼내는데, 니 명함이 나오잖아.
    영주 : 전화 잘했어요. 안 그래도 궁금하더라구요.

    나레이션 (영주) : 지난 봄 뿌옇게 황사가 날리던 날이었습니다. 대학 때 학회 선배였던 민정 선배가 회사로 전화를 했습니다. 선배는 매사에 열정이 있었던 한편 지나치게 열정적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후배들은 선배를 '치열'이라는 두 글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민정 : 요즘은 책도 안 봐. 뭘 쓰지도 않구.
    영주 : 그럼 뭐해요?
    민정 : 그냥 봐. 보고 자꾸 용서를 해. 하나씩, 하나씩.
    영주 : 선배도 시집 갈 나이가 된 모양이다.
    민정 : 시집? (웃는다) 시집은 나 혼자 가나. 내가 그걸 견딜 수 있겠냐.
    영주 : 아무나 가는 게 시집이고 장가요.
    민정 : 다 용서하고 딱 한 놈만 남겨 놓을 거야. 그게 누군지 알어? 나야, 나 (문득 핸드폰을 꺼내며) 나 요 앞에서 핸드폰 샀어. 너 액정화면에 글 넣을 줄 아니? 그럼 여기다 '시집가자'라고 넣어 줄래?
    84. 명동 전철역 (늦은 밤)

    수많은 사람들과 휘황찬란한 쇼핑 몰 불빛. 바람이 빌딩 사이를 새차게 휘몰고 다닌다. 그 사이를 지나고 있다. 약간 흐트러진 옷매무새와 걸음으로 그가 술이 상당히 올랐음을 알 수 있다. 쇼핑몰과 연결된 전철역 입구로 들어간다.

    85. 열차 안

    - 난간에 기대 정신없이 졸고 있는 영주. 영주의 뒤 창으로 열차가 지하에서 지상으로 진입한 것을 알 수 있다.

    - 몇 정거장이 지난다. 갈수록 불빛이 줄어든다.

    - 열차가 어느 역에 멈춰 선다. 그제야 영주가 눈을 뜬다. 술이 덜 깬 듯 어기적거리며 내린다.

    86. 설국역

    - 열차가 지나간다. 누가 봐도 한눈에 도심에서 흔히 보는 전동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열차가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플랫폼에 서서 졸고 있는 영주. 영주의 뒤로 검은 산과 들판, 그리고 불빛 몇 개가 보인다. 먼지를 머금은 탁한 바람이 플랫폼을 새차게 쓸어 내린다. 플랫폼에 같이 내린 몇 안 되는 사람도 어느 새 사라지고 없다. 영주, 그저 주위를 둘러본다.

    - 계단을 내려가 굴처럼 생긴 복도를 지난다. 카메라도 비틀거리며 따라간다. 개찰구를 지나니 조그마한 대합실과 매표소가 눈에 띈다. 매표소에 불이 꺼진다.

    - 역을 지나 내리막을 걸어 내려온다. 여느 전철역 앞의 풍경과는 완연히 다르다. 식당과 상점 몇 개, 그리고 이들 건물의 2층에 위치한 다방이 전부이나, 그나마 불이 꺼져 있다. 뒤를 돌아보는 영주. 설국역이라는 역명이 시골 기차역의 입간판 처럼 붙어 있다.

    - 머리를 무릎 사이에다 묻고 자고 있는 영주.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 여자가 자신을 일으켜 세운다. 그 여자의 모습이 그림에서나 볼 수 있던 고대 기녀의 모습으로 바뀐다.

    영주 : (놀라며) 아니, 그대는 천관이 아니오. 아, 내가 다시는 이곳을 찾지 아니한다고 굳게 언약을 했거늘...... 내 이놈을 그냥!

    - 영주, 여자의 손을 팽개치고 소리를 지르며 전철역 쪽을 향한다.

    87. 택시 안

    - 여자의 도움으로 모범택시에 오른 영주. 뒷자리에서 꼬박꼬박 졸고 있다. 택시기사는 영주가 잠들지 못하게 자꾸 말을 건다.

    기사 : 전철 잘못 내리셨죠?
    영주 : (귀찮은 듯) 예.
    기사 : 아저씨는 이 차 만나서 다행인줄 아세요. 이 시간에 이 곳 지나는 택시는 없어요.
    영주 : (그냥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다)
    기사 : (경기 사투리로) 서울 주변에 신도시가 많이 맹글어졌잖아요. 신도시를 만들면서 전철을 좌악 깔았죠. 그런데, 신도시들 사이가 엄청 멀어요. 또 사람도 많이 안 살아요. 저기 설국역이 왜 생긴지 알아요? 이전역 하고 다음역하고 거리가 너무 멀어요. 그래서 그 사이에 역을 맹글어 놓은 게 저 설국역이에요.
    영주 : (말이 없다)
    기사 : 사람들이 놀래죠. 왜, 보통 전철역이라 하면 생각나는 모습이 있잖아요. 그런데 저기는 꼭 시골 기차역 같거든요. 그래서 제가 손님들한테 그러죠. 그냥 신도시들 사이에 쉬어가는 별장 한 군데 있더라, 이렇게 생각하라구요.

    - 졸고 있는지, 듣고 있는지 모를 영주의 얼굴이 close-up 된다.

    88. 영주의 집

    - 아파트 열쇠를 돌리려는데 철컥 하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안에서 열리는 문. 아내 경희가 문 앞에 서 있다.

    경희 : (안타깝게) 술 많이 먹었구나.
    영주 : (술 취한 목소리로) 경희야, 경희야, 내가 지금 전철의 목을 베고 오는 길이다.

    - 영주, 변기를 안고 꿇어 앉은 자세로 토사물을 뱉어내고 있다.

    89. 전철역 (다음날 아침)

    - 풀린 눈에다 한 쪽 머리는 붕 뜬 채로 전철역 플랫폼에 서 있는 영주. 노란색의 대기선에 발을 맞춰 서려다 자신의 구두를 본다. 전날 토사물의 흔적이 말라붙어 있다. 계단 밑 구석으로 가서 휴지로나마 구두를 닦는다.

    90. 회사, 당구장

    - 영주의 회사 사무실. 영주의 옆자리에서 핸드폰이 울린다. 옆 의자에 걸린 양복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찾았으나 곧 신호는 끊긴다. 영주, 핸드폰의 액정화면에 눈이 간다. 화면에는 핸드폰의 주인이 입력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지와 사랑'

    - 나레이션에 따라 장소가 당구장으로 이동한다. 당구장의 문이 열리면서 부장, 과장, 대리, 사원의 순으로 사람들이 입장한다. 차례로 윗도리를 벗어 걸고 핸드폰을 옆 당구대에 나란히 놓는다. 핸드폰 액정화면에는 'Do My Best', '내일은 없다', '  아빠꺼' 등과 같이 몇 단어로 된 문구들이 찍혀 있다.

    나레이션 (영주) : 회사에서는 사람들이 사적인 이야기는 잘 않해요. 그저 꺼낸다면 가족 이야기 정도죠. 주로 일에 대해 이야기 하고, 또 신문에 나온 이야기 정도지, 개인적인 얘기는 술자리에서도 잘 안합니다. 그래서인지 핸드폰 액정에 입력한 단어를 보구서 조금씩 놀라죠. 마치 속옷을 본 느낌이 듭니다. 아, 이 사람에게 이런 게 있었구나.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 많은 것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조금씩 흘리 듯 보여 줍니다.

    - 핸드폰 중 액정화면에 '알프레드 큐브릭'이라는 글귀가 찍힌 핸드폰에 빨간 불이 반짝인다. 영주가 전화를 받아 든다.

    영주 : 네, 권영주입니다. (잠시 후) 지금 곧 갈게.

    91. 영안실

    - 영주의 선배 민정의 영정사진이 붙어 있다. 앳된 얼굴에 걸맞지 않게 진지하게 입을 꽉 다물고 있는 얼굴이다. 영주와 친구가 향을 피우고 절을 한다.

    - 영안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 담배 한 대씩 문다.

    영주 : 어떻게 된 일이야?
    친구 : 야, 너는 민정선배가 뭣땜에 죽었을 것 같냐?
    영주 : 혹시, 그전처럼......
    친구 : 약 먹지 않았냐고? 약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영주 : 그러니까, 자살이야, 아니야?
    친구 : 하도 꼴같잖아서 말이 안 나온다. 민정 선배가 주일학교 반사선생을 했나 봐. 왜, 교회 같은 데서 애들 행사하면 풍선 많이 불잖아. 풍선 불다가 목구멍이 막혔대. 망자한테는 미안한 소리지만, 참 웃기지 않냐?
    - 영주, 먼 곳을 보며 담배를 크게 한 모금 핀다.

    영주 : 저 영정사진, 우리 시화전 때 팜플렛 사진 맞지?

    92. 영주의 집 앞 (심야)

    택시에서 쫓기듯 내린다. 휘청휘청하며 걷다가 보도에 내려 앉는다. 고개를 무릎 사이에 떨어뜨린다. 길 건너편 아파트 정문에서 아내 경희가 마중 나오다 영주를 발견한다. 그를 부축해서 들어간다.

    93. 영주의 집

    - 아내가 분주하게 출근 준비를 한다. 잠옷 바람의 영주는 출근하는 아내 경희를 배웅한다. 신문을 들여 놓고 문을 닫는다. 현관 바닥에 놓인 자신의 까만 구두를 신장에 넣고 운동화를 꺼내어 놓는다.

    - 소파에 앉아서 멍하니 집 구석구석을 바라본다. 봄의 따스한 햇살이 커튼사이로 스며드는 노곤한 오전이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던 오전의 한가로움이다. 하는 일 없이 이방 저방을 어슬렁거린다. 다시 침대로 가 눕는다. 잠이 든다.

    - 영주의 꿈. 민정이 웃으며 아이들과 장난을 치는 모습이 보인다. 아이들에게 둘러 싸여 풍선을 부는 민정. 그러다 풍선이 목 안으로 쑥 넘어간다. 뒤로 벌렁 넘어지는 민정의 모습. 아이들은 선생님이 장난을 치는 줄 알고 까르르 거리며 재미있어 한다.

    나레이션 (영주) : 저는 회사를 그만 두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잠만 잤어요. 그러던 어느날 오후였습니다.

    - 벨 소리가 울리자 잠을 깨는 영주. 문을 열어보니 동대본부 김일병이다.

    김일병 : 동원미참 훈련 통지섭니다. 저 번에 안 나오셨더라구요.
    영주 : (수령인 난에 사인을 한다)
    김일병 : 그리고 선배님. 죄송한데 말입니다, 이 주민등록번호 말입니다, 이거 맞는 겁니까?
    영주 :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요.
    김일병 : 0931이 맞는 겁니까? 죄송한데 말입니다, 시간이 나시면 동대본부에 한 번 들려 주시겠습니까?
    - 문을 닫고 나가려는 김일병을 영주가 잡는다.

    영주 : 잠깐만요. 같이 가요.

    94. 동사무소

    - 영주와 김일병이 소파에 앉아 있다.

    나레이션 (영주) : 제 주민등록번호 처음 여섯 자리는 710931입니다. 그러니까 71년 9월 31일 생이라는 거죠. 이 날짜 때문에 이사 가는 곳 마다 동사무소와 동대 본부에서 한바탕 확인하는 소란을 겪습니다. 그리고는 꼭 '성가시게 해서 죄송하다'는 요지의 인사말을 듣고는 집으로 옵니다. 언젠가는 한 번 겪을 일이라 지금처럼 시간이 많을 때 처리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지금 이 사람을 따라 왔습니다. 그리고 이 참에 저도 정확하게 알아 놓아야 다음에 좀 수월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 미자가 민원인과 상담을 끝낸다. 김일병이 미자에게 다가간다.

    김일병 : 이 분 주민등록번호 좀 봐봐요. 이럴 수도 있어요?

    - 영주, 미자와 눈이 마주친다. 미자가 웃음을 터뜨린다.

    미자 : 어머, 저랑 같은 동네에서 태어나셨네요?

    95. 설국 - 동사무소 앞길

    설국 동사무소에서 나오는 영주와 미자. 영주가 미자보다 한 발 앞서 걷고 있다. 동사무소 건너편 야산에서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들린다. 중년의 남녀들이 나무 둥지를 끌어안고 발성 연습 할 때 내는 소리를 지르고 있다. '아에이오우' 혹은 '음치 안녕' 혹은 '나는 할 수 있다' 등과 같은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보아 음치 클리닉 회원들임을 알 수 있다. 안경을 쓴 지도선생이 이들 사이로 돌아 다니며 사람들의 배에 귀를 대본다. 영주와 미자가 그들과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데 따라 그들의 소리가 작게 혹은 크게 들린다.

    96. 식당 - 화정식당

    미자 : 저기 저 할머니 말을 믿어요?
    영주 : 예.
    미자 : 어떻게요?
    영주 : 저 할머니도 그러시고, 서류에도 그렇게 되어 있으니 9월 31일이 맞나보죠.
    미자 : 어떻게 9월에 31일이 있을 수 있어요. 없던 하루가 생겨 난 것도 아니고.
    영주 : (난데없이) 1971년에 9월 31일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뭐예요? 미자 : (어이없다)
    영주 : 그 때 세상에 없었잖아요. 그러면 그 때 살고 있었던 사람 말을 믿는게 당연하잖아요.
    미자 :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정리가 잘 안된다) 아무튼 말이 안 돼요.
    영주 : 에이, 세상에 말 안 돼는 일이 한 두개에요? 이상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미자 : 그러니까, 9월 31일에 진짜로 태어났다는 거예요?
    영주 : 그러니까, 31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런 말씀이예요.
    미자 : 그런 게 어딨어요.

    - 미자, 새초롬해진다. 영주가 소주 한 잔을 마신다.

    미자 : 그리고 참 신기해요. 어떻게 자기 생일에 그렇게 무심하세요?
    영주 : 저는요, 제 생일 보다도 이 설국이라는 동네가 너무 신기해요. 도시에서 전철을 탔는데 내리니까 시골이잖아요.

    - 영주, 반찬 그릇을 움직여가며 설명한다.

    영주 : 보통 도시에서 전철을 타면 도시에 내리잖아요. 그런데 이 도시와 저 도시 사이에 시골이 있더란 말이에요. 제가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출퇴근 하는 사람이면 꼭 여기 내려서 화장실 들렀다 갈거예요. 공기도 좋고 조용하니까 한 5분 동안만 변기에 앉았다가, 담배하나 피구 출근하는 거죠.
    미자 : (웃는다)

    - 노파가 부추전이라며 한 접시를 갖다 준다. 영주, 노파를 유심히 본다.

    영주 : 그리고 저 산파 할머니도 신기해요. 세상에는 하느님 일을 돕는 사람이 두 사람 있대요. 하나는 산파 할머니, 하나는 장의사. 산파 할머니는 세상으로 나오는 입구에서 일하구요, 장의사는 세상에서 나가는 입구에서 일하구요. 사람들이 다 잘난 맛에 살지만 다 똑같은 구멍으로 들어오고 나가는가 보네요.

    97. 영주의 집 (아침)

    - 늦은 오전. 영주가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깬다.

    영주 : 예, 회사 그만 두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집사람이 벌고 있으니까 당분간은 별 문제 없을 거예요. 밥은 해먹기도 하고, 사먹기도 하구요. (잠시 있다가) 그런데, 엄마. 내가 9월 31일 태어난 게 맞아요? 맞다구요?

    98. 지하철 - 열차 안

    의자 옆 난간에 몸을 꼭 끼운 채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다. 나레이션에 맞춰 사람들의 모습이 비춰진다.

    나레이션 (영주) : 저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면 시간이 잘 갑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 스타일, 염색을 했나 안했나, 무엇을 읽고 있는가, 그리고 핸드폰 액정에 찍어 놓은 글 같은 것들을 유심히 보면서 그 사람의 히스토리를 상상합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이 출연하는 영화의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99. 씨네마떼끄

    - 회원 가입 신청서를 쓰고 있는 영주. 회원증을 받아 들고 시사실로 들어선다. 몇 명의 사람들이 뛰엄뛰엄 앉아 있다.

    - 영화를 보고 있는 영주의 얼굴.

    100. 식당 - 삼겹살 집

    - 집으로 돌아 오던 영주가 식당 앞에서 메뉴를 확인한다. 식당 안으로 들어간다.

    - 사람들로 가득 찬 식당 안. 신발을 벗고 잠바를 벗어 자리 옆에 놓는 영주. 종업원 아줌마가 물그릇과 물통을 내려 놓는다.

    종업원 : 주문 하실래요? 일행 또 오세요?
    영주 : 아니요. 된장찌개 하나 주세요.
    종업원 : 지금 시간에 식사는 안 돼는데.
    영주 : 메뉴에 나와 있던데요.
    종업원 : 고기 드시고 밥 드실 때 시키는 거죠.
    영주 : 그럼 삼겹살 하고 소주 한 병 주세요.

    - 시간 경과. 삼겹살을 가지고 와서 굽기 시작한다. 혼자서 쌈을 싸 먹는다. TV에서는 프로야구 중계가 한창이다. TV를 보며 소주를 자작한다. 영주가 종업원 아줌마를 부른다.

    영주 : 상추 좀 더 주세요. 고기가 많네요.
    아줌마 : 2인분이에요. 1인분씩은 안 팔아요.

    - TV에서는 이제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다. 아직도 많이 남은 고기.

    영주 : 아줌마, 그럼 소주도 한 병 더 주세요.

    - 영주,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 전화를 한다. 하지만 응답이 없다. 고기를 철판에 올려 놓는다.

    -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일제히 TV쪽으로 눈을 돌린다. TV드라마에서는 어떤 여자가 남자에게 매달려 애원하는 모습이다. 여자들이 혀를 찬다. 술자리의 화제가 저 드라마로 넘어 간 모양이다. 영주, 소주를 한 잔 씩 마시며 드라마에 열중한다.

    101. 편의점 옆

    - 영주가 술이 취한 듯 엉성하게 걷고 있다. 편의점 옆 커피자판기를 발견하고 500원짜리 동전을 넣는다. 커피는 나오지 않고 동전도 나오지 않는다. 영주, 편의점으로 간다. 손님들이 카운터에 줄을 서 있다.

    영주 : 아저씨, 자판기가 동전 먹었거든요.
    주인 : (다른 손님들 계산을 해주며) 네, 잠깐만 기다리세요.

    - 영주, 자판기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고개가 점점 내려가더니 무릎 아래로 떨어진다. 잠이 든다.

    102. 영주의 기억

    영주가 잠들었을 때의 기억. 고대 기녀의 얼굴 모습, 말이 끄는 포장마차, 그리고 고대 기녀의 등에 업혀 하늘을 나는 모습 등이 스틸 사진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인써어트 - 영주의 아파트 주변의 모습.

    103. 영주의 집

    - 화면에 선풍기 한대가 돌아가고 있다. 영주의 손가락이 버튼을 눌러 선풍기를 끈다. 영주가 선풍기 커버를 씌우고 다용도실 선반 높은 곳에 올린다. 그 때 벨이 울린다. 김일병이다.

    영주 : 훈련이 또 나왔어요?
    김일병 : 저번 것은 전반기 훈련 미참자였구요. 이번 것은 하반기 훈련입니다. 올해 마지막 훈련이예요.

    - 영주가 소집 통지서를 받아 든다. 9월 xx일 이라고 적혀 있다.

    104. 동사무소 (저녁)

    -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 입는 미자. 화장을 고친다.

    - 가방을 들고 동사무소를 나서는 미자의 뒷모습.

    105. 동사무소 앞

    - 군복을 입은 예비군들이 여러 명 모여있다. 미자가 그들을 유심히 살핀다. 미자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영주와 마주친다.

    영주 : 어, 안녕하세요.
    미자 : (얼굴을 약간 붉히며) 어머, 오랜만이네요.

    -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영주 : 오늘 예비군 훈련이예요.
    미자 : 네, 그럼.

    - 총총 사라지는 미자.

    106. 경숙의 가게

    - '중고 가전제품 교환/판매'라고 적힌 간판이 보인다. 미자가 포장지에 싼 화분을 들고 점포 안으로 들어간다. 예쁘게 단장한 경숙이 미자를 반갑게 맞는다.

    미자 : (경숙을 끌어 안으며) 언니, 너무 멋있다.
    경숙 : (웃으며) 오사장이라 불러.

    107. 피자하우스, 영화관

    - 피자와 스파게티를 시켜놓고 재미있게 이야기 하는 미자와 경숙의 모습이 피자하우스 창문으로 보인다.

    - 시간 경과. 미자와 경숙이 영화관 앞에 줄을 서있다. 영화관 곳곳에 영화 '어너더 데이 무료 시사회'라는 표시가 여기 저기에 붙어 있다. 미자와 경숙이 떠밀려가며 좌석 교환권을 받는다.

    - 영화 시작 전. 스크린에는 광고필름이 상영되고 있다. TV에서 보던 CF가 아니라, 주로 배오동에 있는 갈비집이나, 레스토랑, 안경점 등이 소개된다. 모델의 어설픈 연기에 사람들이 키득거린다. 화면에 커다란 갈비집이 소개되면서 옆쪽에 조그맣게 경숙의 가게가 비친다. 경숙이 좋아한다.

    - 안내등이 한 줄 씩 꺼지며 영화가 시작된다. 스크린을 바라보는 미자와 경숙의 얼굴.

    108. 전철역 주변 (같은 시간)

    - 예비군복을 입고 총을 어깨에 멘 영주와 다른 두 사람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영주, 고개를 숙인 채 전철역 입구를 왔다 갔다 한다. 뭔가 생각에 빠진 모습이다.

    나레이션 (영주) : 지난 여름동안 저는 영화를 봤습니다. 서울에 있는 시네마떼끄라는 곳에 찾아가 그 곳 시사실에서 거의 여름을 난 셈이죠.

    - 왔다갔다 하는 영주의 군화. 이어서 나레이션에 따라 장면이 전개된다. 시사실의 모습이다. 열 평 남짓한 방에 단을 쌓아 올려 그 위에 의자를 놓고 프로젝터를 놓은 곳이다. 단의 가장 높은 곳 중앙에 프로젝터가 있고 그 양쪽으로 의자가 세 개 씩 놓여 있다. 그 중 한쪽의 가운데에 앉아 있는 영주의 모습이 보인다.

    나레이션 (영주) : 이곳에는 그리 많은 사람들이 오지는 않습니다. 한 회에 서너 명 씩, 어떨 때는 열명이 넘을 때도 있죠. 그러니까 몇 안 되는 사람들이 한 방에서 두어 시간을 같이 보내고 또 헤어집니다.

    - 시사실에서 영화를 보고, 또 나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현실의 모습. 영주의 군화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곳으로 정신없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레이션 (영주) :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을 때는 묘한 균형이 느껴집니다. 거리의 균형이지요. 사람들은 웬만하면 정삼각형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으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죠. 네 명일 때도 그렇고, 아무튼 여러 명일 때도 적당하게 서로 떨어져 앉습니다.

    - 두 사람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는 시사실. 한 사람이 들어와 적당한 곳에 앉는 모습. 이 화면에 마치 보드 펜으로 설명을 하듯 삼각형을 그린다. 네 명일 때 사각형, 다섯 명 일 때 별 모양을 그린다.

    나레이션 (영주) : 사람들이 많을 때는 어쩌다가 붙어 앉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는 의자를 약간 물려서 떨어져 앉죠. 그렇지만 자리가 많은데도 옆 자리에 붙어서 앉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 현실에서 총을 메고 어디론가 걷고 있는 영주의 모습.

    나레이션 (영주) : 저는 보통 맨 뒷줄 오른쪽 의자 세 개 중에서 가운데 앉습니다. 그러면 제 옆 자리에는 보통 아무도 앉지 않기 때문이죠. 다음에 들어오는 사람이 어디에 앉는 가를 봅니다. 제 앞줄에 앉는 사람이 짝수번째 의자에 앉으면 그 날 제 앞에는 사람이 앉지 않습니다. 그런데 홀수번째 의자에 앉으면 제 앞에 사람이 앉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꼭 한 칸 씩 떨어져서 앉기 때문이죠. 옆 자리에 붙어서 앉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 맨 뒷줄 오른쪽 의자 세 개 중에서 가운데 앉아 있는 영주. 그리고 그 앞 줄에 한 칸 씩 떨어져 앉는 사람들의 모습.

    나레이션 (영주) : 간혹 늦게 와서 아래 줄에 앉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 칸을 건너 뛰고 자리를 잡습니다. 그런데 늦게 온 여자가 이 두 칸 사이에 앉으려고 할 때 은근히 신경이 쓰입니다. 이 여자가 내 쪽으로 붙어 앉을까, 아니면 저쪽일까. 그리고 내 쪽에 앉으면 좋을까, 나쁠까.

    - 영주와 다른 남자 사이에 있는 두 칸의 자리 중에서 다른 남자쪽에다 앉는 여자의 모습. 얼굴도 분명하지 않은 여자의 모습과 짐짓 신경을 쓰는 영주의 모습.

    - 현실의 영주. 정신없이 생각에 잠겨 걷는다. 어느 대학교의 교문을 통과한다.

    나레이션 (영주) : 좌석버스에서 자리에 앉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죠. 왜냐하면 입석버스보다 비싼 요금을 내고 탔으니까요. 보통 사람들은 버스에 타서 아무도 앉지 않는 좌석에 우선 앉습니다. 그게 없으면 그 다음으로 이미 한 사람이 앉아 있는 좌석의 옆자리를 찾게 됩니다. 그 날 저는 창가쪽에 앉아 있었고, 반대편에도 창가쪽에 남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늦게 탄 여자가 비틀비틀 이 곳 까지 왔을 때 은근히 신경이 쓰입니다. 이 여자가 내 쪽 자리에 앉을까, 아니면 반대쪽에 앉을까. 그리고 내 옆자리에 앉으면 내가 편할까, 편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 여자가 내 옆에 앉으니 슬며시 기분이 좋아졌었습니다. 그 비슷한 느낌이었을까요.

    - 좌석버스 안의 영주. 통로를 비틀거리며 와서 머뭇거리다 영주 옆에 앉는 여자는 미자다. 영주, 창밖으로 먼 곳을 보는 듯 하지만 은근히 신경을 쓰는 모습이다. 여자가 먼저 내려 영주가 있던 창 바로 밑을 지나간다. 그제서야 미자였음을 알아차리는 영주.

    - 현실의 영주. 어느 대학 캠퍼스 뒷 길을 걷고 있는 영주. 한 곳에 휘황한 불빛이 보이고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나레이션 (영주) : 제가 시사실의 뒷자리를 좋아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프로젝터가 윙, 하고 돌아가는 소리 때문이죠. 그러면 아, 나는 지금 영화를 보고 있구나 하고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맨 뒷자리에서는 고개를 젖히고 잠을 자도 아무도 모르거든요.

    - 시사실 스크린에는 영화 '아이다호'가 상영되고 있다. 리버 피닉스가 길 위에 쓰러진다. 영주가 반쯤 감긴 눈으로 보다가 잠이 든다.

    나레이션 (영주) : 영화 '아이다호'에서 리버 피닉스는 기면발작증으로 쓰러집니다. 갑자기 잠이 쏟아져 쓰러지는 것입니다. 리버 피닉스는 잠이 들면서 어머니를 만납니다. 그렇게도 찾던 어머니는 꿈속에서 나타납니다. 잠이 깨면 리버 피닉스는 잘 쉬었다는 듯이, 마술에서 깨어난 듯이 벌떡 일어납니다. 그리고 또 어느 곳으로 떠납니다.

    - 현실의 영주. 조명이 훤한 곳으로 가 보았더니, 야외 무대에서 대학생들이 연극공연을 하고 있다. 영주가 객석 제일 높은 곳에 앉는다. 무대를 내려다 보니 흰 천을 두르고 뛰어 다니는 배우들이 마치 요정들 같다. 가을밤의 환상적이니 분위기다. 객석에서는 이따금씩 박수가 터지고 환호성이 나온다.

    나레이션 (영주) : 기면발작증은 아니지만 저는 술 마시면 필름이 잘 끊기는 버릇이 있습니다. 필름이 끊긴 동안 저는 어딘가에 있었고 무엇을 했겠지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음날이 되면 그저 사진 몇 장만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 혹시 저는 어떤 곳을 다녀 왔을 수도 있는 거죠. 누구를 만났다든가, 아니면 가고 싶던 곳을 다녀 왔다든가. 평소에 못한 것을 하고 왔다든가. 그리 대단한 것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노래방 점수가 100점이 나왔다든가, 싸웠던 친구랑 화해를 했다든가, 기억 못하고 있던 받을 돈이 생각이 났다든가, 아니면 옛날 학교 때 미팅했던 애 얼굴이 생각이 난다든가 하는 것 말이죠. 아무래도 제 말이 맞을 겁니다. 그 시간 동안 희한한 일이 있었을 겁니다. 술 깨면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을 겁니다.

    - 그 때 야외 극장 뒤편 길에 경찰차와 경찰 기동대의 차들이 미끄러지듯 선다. 사이렌이 울리고 경고등이 돌아 간다. 차에서 경찰들이 잽싸게 내린다. 그리고 영주를 에워 싼다. 영주의 눈이 휘둥그레해 진다.

    - 뒤를 돌아본 관객들이 박수를 친다. 환호성을 울린다. 이들은 아마 연극의 일부로 착각한 모양이다.

    109. 영화관 (같은 시간)

    - 영화를 보는 미자와 경숙의 얼굴.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해 진다.

    - 스크린 위 영화의 장면. 주인공 역의 가수가 어느 야외 공연에서 마지막 노래를 부르다가 쓰러지는 장면이다. 팬들로 분장한 엑스트라들이 절규하는 컷트. 이들 뒤로 실제 구경을 하던 배오동 주민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 중 동대장과, 그의 어깨 위에서 목마를 타고 있는 경숙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카메라가 날리는 눈발을 쫓아 따라가면서 무대 주변을 훑는다. 그 참에 아파트 복도에는 영주를 업고 뛰어가는 미자의 모습이 역시 희미하게 보인다. 그러니까 경숙의 환송 회식 날 그들의 모습이 우연히 이 영화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미자와 경숙.

    - 시간 경과. 영화관 입구에서 미자와 경숙이 나온다.

    미자 : 언니, 어떻게 하지?
    경숙 : 너도 봤니?
    미자 : 그럼. 우리 동네 아파트였잖아.
    경숙 : 무슨 소리야. 시민 공원이지.
    미자 : 아니, 내가 동네 아파트 복도에서 어떤 남자 업어서 데려가는 게 나왔잖아.
    경숙 : 그랬니? (잠시 생각하다가) 나도 나왔단 말이야. 내가 동대장님 목마타고 있더라.
    미자 : (놀란다)

    110. 동사무소 (다음날)

    - 생각에 잠겨 있는 미자. 동대장이 현관을 지나 2층에 오르는 것이 보인다. 어깨를 움츠린 모습이 보기 안 좋다. 옆자리 희영이 말을 건다.

    희영 : 미자 언니.
    미자 : 응?
    희영 : 무슨 일 있지?
    미자 : 일은 무슨......
    희영 : 얼굴에 써 있는데? 남자 문제야?

    111. 포장마차

    - 미자와 희영이 유니폼을 입은 채 떡볶이를 먹고 있다. 미자, 골똘히 생각한다.

    미자 : 남자 문제라기도 그렇고, 아니라기도 그렇고.
    희영 : 그게 무슨 말이야?
    미자 : 남자가 관계된 문제긴 한데, 그렇다고 나랑 별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야.
    희영 : 그럼 신경 안쓰면 되잖아. 언니만 떳떳하면 되었지.
    미자 : 그런데 희영아, 또 그렇게 떳떳하기만 한 것도 아니거든.
    희영 : 머리 아파. (아줌마에게) 아줌마, 달걀 하나씩 주세요.

    - 아줌마의 손놀림이 기계적이다. 국자와 집게를 이용해 국물 한 방울 안 흘리고 이들의 접시에 달걀 두 개를 놓는다.

    희영 : (별안간) 아줌마, 여긴 왜 포장마차죠?
    미자 : (놀란다)
    아줌마 : (경상도 사투리로) 말도 없는데, 무슨 마차인교, 이 말이지예?

    - 그 때 영주가 골목을 지나간다. 동사무소 2층 동대 본부로 올라가는 모습을 미자가 보고 있다.
    112. 동대 본부

    - 김일병이 영주를 동대장실로 안내한다. 동대장과 마주 앉는다.

    동대장 : 권영주씨 맞죠? 자꾸 귀찮게 오라 가라 해서 미안합니다만...... 이번이 몇 년차예요?
    영주 : 4년차일겁니다.
    동대장 : 그럼 알 만한 것 다 알 양반이 왜 근무지는 이탈해서 문제를 일으키는지, 원 참.
    영주 : ......
    동대장 : 동대장이 노끈도 나눠 주고 그랬어요. 나이 이 만큼 먹은 사람이 할 일없이 웃음거리 되려고 그런 짓 하는 줄 알아요?
    영주 : 동대장님, 죄송합니다. 별 생각없이...
    동대장 : (버럭 화를 낸다) 별 생각없이 근무를 서니까 그런 것 아니에요. 군인이 경계에 실패하는 것이 젤루 나쁜 짓 아니에요? 안 그래도 지금 우리 동 분위기기 안 좋잖아요. 통합이 된다니, 어떻게 된다니 말들이 많은데, 이런 일이 자꾸 생기면 이 동대장은 어떻게 해라구 그래요. (짜증을 낸다) 아니, 누가 우리 식구들 맡아 준대요? 책임 질거냐구요.
    영주 : (아무말 없다)
    동대장 :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날은 신고가 들어간 모양입디다. 군인이 총 들고 학교로 들어갔다고, 아마도 탈영한 군인인 모양이라고. 그래서, 위에도 보고가 되고 해서 어쩔 수 없어요. 이번 훈련에 불참 처리가 되었어요. 여기 싸인 하나 해 줘요.

    113. 동사무소 - 옥상
    - 미자가 초조하게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다. 동대 본부의 문 쪽을 유심히 본다. 아무도 없다. 무심결에 고개를 드니 예전 윗도리를 벗고 아래위로 움직이던, 그 '창문의 여인'이 나타났던 그 창문이 보인다. 창문은 열려 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미자가 조금 가까이 가서 그 창문을 들여다 본다. 어느새 그 여자가 나타났다. 미자를 보며 웃으면서 여유있게 웃옷을 벗는다. 그리고는 아래위로 요동치기 시작한다. 얼굴이 붉어지는 미자. 앗차, 하고 아래를 내려다 보니 영주가 동대 본부를 나와 내려가고 있다.

    미자 : (영주에게) 저, 잠깐만요!

    114. 동사무소 - 2층 휴게실

    - 영주와 미자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뒤편으로 보이는 탁구장에는 유니폼을 맞춰 입은 아줌마들이 탁구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 똑같은 폼으로 스매싱을 연습하고 있다. 라켓이 귀에 붙는다.

    영주 : 그러니까, 그날 제가 미자씨한테 업혀서 집에 들어갔다는 말이죠?
    미자 : 네.
    영주 : 그리고 그 모습이 영화에 나온다 이거죠.
    미자 : 네. 그래요.
    영주 : (놀라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한,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으로) 나 참.

    - 영주, 긴장이 되는 듯 손가락을 꺾는다.

    영주 : 영화에는 어떻게 나와요?
    미자 : 얼굴이 뚜렷이 나오지는 않아요. 그런데 여자가 남자를 업고 간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어요.
    영주 : 그럼 누군지는 모르겠네요.
    미자 : 그래도 어느 동 어느 아파트 몇 동인지는 알 수 있어요. 우리 동네 사람이면요.
    영주 : (화를 내며) 짜식들, 영화를 찍으려면 제대로 찍어야지.

    - 미자, 영주의 눈치를 살핀다.

    미자 : 저, 제가 부인되시는 분한테 직접 말씀을 드릴까요?영주 : 일단은 기다려 보자구요. (조심해서 말을 꺼낸다) 그리고요, (생각하다가) 미자씨, 미안해요.

    115. 영주의 집 (밤)

    - 경희가 문을 열어준다. 처음 보는 정장 차림이다. 새옷을 샀다고 집에서 패션쇼 중이다.

    - 시간 경과. 영주는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다. 경희는 전화로 옷가게 주인과 다툰다.

    경희 : 아니, 바느질이 처음부터 잘못 되어 있는데, 그걸 왜 못바꾼단 말이예요? (잠시) 아, 다른 말 필요 없어요. 주인 바꿔요. 사장 바꾸란 말이요.

    - 집에 경희의 큰 목소리가 쩌렁쩌렁 하다. 굳어지는 영주의 표정.

    116. 영화관 (아침)

    - 영주, 영화관 매표소에 만원권 지폐를 내민다. 티켓과 잔돈 4천 5백원을 돌려준다.

    - 대기실에서 '어너더 데이'의 광고전단을 본다. 요절가수 누구누구의 영화화라느니, 평론의 극찬이라느니, 하는 문구들이 보인다.

    - 영화를 보고 있는 영주의 얼굴. 이전 미자와 경숙이 보았던 장면이 나오고 있다.

    117. 병원

    - 대학병원 조제 대기실. 동대장과 그의 어머니가 앉아서 순서를 기다린다. 번호판 숫자가 바뀐다. 동대장이 일어나서 약을 탄다.

    - 병원의 지하주차장.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동대장이 조심스레 어머니를 부축하며 자신의 차로 인도한다.

    - 동대장의 차가 지하출구의 나선형 도로를 달리고 있다. 가도 가도 나오지 않는 출구. 계속 나선을 그리며 돌아 올라가지만 출구가 나오지 않는다.

    118. 동대장의 집

    - 저녁 무렵. 동대장이 소반을 들고 어머니가 누워 있는 방에서 나온다.

    - 동대장과 아내가 식사를 한다.

    아내 : 어머니 요즘 통 안 잡수시네요.
    동대장 : 약이 좀 독한 모양이야.
    아내 : 애들 한 방 쓰게 하든지 우리 방에 같이 자든지 하구요, 어머님 방 좀 깨끗하게 치워드려야 겠어요.
    동대장 : 그냥 가만 있어. 노친네들은 갑자기 뭐가 바뀌면 외려 안 좋은 거야.
    아내 : 애들 학교 갔다 늦게 와서 불 켜고, 씻고 하다 보니까 어머니 겨우 잠드셨다 깨시고 그러신대요.
    동대장 : 알았어.

    - 시간 경과. 다음날 아침. 때마침 뉴스에서 일기예보가 진행되고 있다. 심선미 기상 캐스터가 날씨를 전하고 있다. 동대장, 리모콘으로 채널을 바꾼다.

    119. 영주의 집 (아침)

    출근하는 경희를 배웅하고 신문을 주워 가지고 들어온다. 방바닥에 펴놓고 한 장 씩 넘긴다. 문화 섹션에 영화 '어너더 데이'에 대한 기사가 크게 났다. '대박 조짐' , '주말 관객 서울에서만 40만 넘어' 등의 부제가 붙어 있다.

    120. 전철 안 (같은 시간)

    미자가 출근 길 전철을 타고 앉아 있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읽고 있는 신문에 눈이 간다. 영주가 읽고 있는 기사와 똑같은 기사를 발견한다. '어너더 데이'가 주말 관객 서울에서만 40만을 돌파했단다.

    121. 동사무소

    -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미자. 옆자리 희영에게 넌지시 물어본다.

    미자 : 희영아, 너 그 영화 봤니?
    희영 : 뭐?
    미자 : '어너더 데이' 라는 거 있잖아.
    희영 : 아니.
    미자 : (안심하는 듯한 표정)
    희영 : 그런데 언니, 거기 우리 동네 나온다는데.
    미자 : (놀란다)
    122. 동대 본부

    - 동대장실에 노크 소리가 난다. 문을 열고 미자가 들어 온다.

    동대장 : 어, 미자씨. 아침부터 웬일이야.
    경숙 :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123. 영화관

    영화 '어너더 데이' 를 보고 있는 동대장의 얼굴. 입을 다물지 못하는 동대장.

    124. 아파트 주변

    - 아파트 단지와 공원 사이에 난 긴 도로. 영주가 산책을 하고 있다. 가끔 뒤를 돌아본다. 볼 때마다 손녀 손을 잡은 할머니가 자꾸 보인다.

    나레이션 (영주) : 지금 저와 같은 속도로 걷는 사람은 저 할머니 뿐이네요. 다른 사람들은 다 지나쳐 갑니다. 백수와, 자식을 다 키워 놓은 할머니는 걷고 생각하는 속도가 비슷한 모양입니다.

    - 아파트를 지나 전철역으로 가는 골목길에 접어 드니 한 여자가 목욕바구니를 들고 걸어 오고 있다. 머리엔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았다. 영주의 시선을 의식한 듯 더 느적느적 걷는다.

    나레이션 (영주) : 여자들은 화장실 갈 때 아무 말 없이 사라집니다. 화장실 갈 때 연상되는 자기 모습이 부끄러운 모양이에요. 하지만 목욕탕 갔다 올 때는 츄리닝 바람으로 잘도 돌아다닙니다. 그런데 저는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 영주의 상상. 목욕탕 샤워기 앞에서 엉덩이를 쭉 뺀 여자가 비누를 묻힌 손으로 똥구멍을 씻고 있다. 그곳에 샤워기 물을 지린다.

    - 연속되는 영주의 상상. 영화 [원초적 본능] 에서의 샤론 스톤과 비슷한 모습의 여자. 변기에 앉아 다리를 꼰 채로 담배를 피워 문다. 다리를 바꾸기도 한다.

    나레이션 (영주) : 생각을 바꿔본다는 것..... 가만있자, 제가 어떤 처녀한테 업혀서 집에 왔다는 것이 그렇게 잘못 되었을까요.

    125. 전철역 부근

    - 퇴근길의 미자가 전철역을 향하고 있다. 무심결에 어느 빌딩을 올려다 본다. 한 창문이 열려 있고 어떤 여자가 어깨를 드러낸 채로 아래 위로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다. 미자의 얼굴이 붉어진다. 마치 예전의 '창문의 여인'이 연상된다. 그런데 그 옆에도 그렇게 오르내리는 여자가 하나 더 있다. 아니, 하나 더가 아니라 여러 명이다. 그제서야 미자는 그곳이 헬스 클럽인 줄 깨닫는다.

    - 누군가 미자의 어깨를 툭 친다. 영주다.

    영주 : 퇴근하세요?

    126. 포장마차

    - 포장마차 안. 별 말없이 오뎅을 먹고 있는 영주와 미자.

    미자 : 신문 보셨어요?
    영주 : 그 영화 때문에 그러시죠?
    미자 : 사람들이 그 영화를 많이 좋아하는 모양이에요.
    영주 : 못 보게 할 수도 없고...
    - 미자는 묘한 기분이다. 꼬치 작대기로 간장 통 속 파를 하나 건져 먹는다. 맛있다. 하나 둘 씩 몇 개를 더 건져 먹는다. 묘한 기분 보다는 이제 파가 너무 맛있다. 아줌마가 갑자기 꼬치 작대기를 휙 낚아 챈다. 아줌마는 말이 없다.

    - 당황한 미자. 아줌마는 경상도 사투리로 뭐라 뭐라 한마디를 쏜다. 잠잠해진 포장마차 안. 갑자기 아줌마가 또 한마디 욕지끼를 한다. 미자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영주가 있는 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져서 당황스럽다. 모른 척 하는 영주.

    - 갑자기 아줌마가 요즘 젊은 가스나들은 싸가지가 없다는, 다소 자극적인 말을 뱉는다. 미자, 참다가 참다가 민망해서... 눈에 힘을 주지만 부끄러워서, 굵은 눈물 한방울이 툭 떨어진다. 눈물을 보니 눈물이 더 나온다.

    미자 : 아줌마.... 정말.... 정말....
    아줌마 : (대꾸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넘들은 뭐무라꼬 파를 다 건지무믄 ... 젊은 가소나들이 마카 지생각뿐이 몬하고... 지하철을 타봐도 그렇고.....
    미자 : (울먹이며) 아줌마... 정말.. 파... 몇 개 건져... 먹었다고....
    - 영주는 멋적어 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쩔줄을 모른다. 아줌마의 입에서는 더 험한 말들이 나오고, 다른 손님들이 하나 둘 계산하고 자리를 뜬다. 미자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127. 경숙의 가게

    경숙이 손님들을 상대하고 있다. 고개를 문쪽으로 돌려 보니 동대장이 가게에 들어선다. 콤비 수트에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동대장의 모습이 평소와 좀 달라보인다.

    경숙 : 어머, 동대장님. 어서 오세요.

    128. 식당 (저녁)

    - 해물탕집.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두 사람. 각자 찌개를 덜어 먹는다. 두 사람 다 게에서 살을 골라내느라 마냥 말없이 먹는 데에만 열중한다.

    동대장 : 사업은 잘 돼요?
    경숙 : 중고 제품은 많이 들어오는데요, 중고를 사 가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 다시 침묵. 먹는 데에만 열중한다.

    경숙 : 동사무소 식구들은 잘 있죠?
    동대장 : 그럼요.
    경숙 : 한 번 인사드리러 가야 될텐데......

    - 다시 침묵. 동대장이 어렵게 말을 꺼낸다.

    동대장 : 오늘 미자씨가......
    경숙 : (말을 가로 막으며) 미자는 가끔씩 봐요. 전화도 하구요.
    동대장 : 네에.
    경숙 : 걔는 애가 정이 많아요.
    동대장 : 그런 거 같아요. 마음 씀씀이가 넓더라구요.
    경숙 : 저는 제가 없으면 동사무소 문 닫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잘만 돌아가는 것 같아서 좀 섭섭한거 있죠?동대장 : (웃는다) 허허허.
    경숙 : 떠난다는 것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애요. 그 때 제 이름 몰라주셨을 때 은근히 속이 상했던가봐요.
    동대장 : 허허허.
    - 시간 경과. 두 사람 다 술이 얼큰해 졌다. 동대장이 말이 많아졌다.

    동대장 : 제가 신카나리아라는 가수를 참 좋아했어요. 그래서 언뜻 드는 생각이 인터넷에서 내 이름을 카나리아로 하자,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나 말고 누가 또 카나리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더라 이거예요. 아, 저 사람 마음이 나하고 참 통하겠구나, 싶더라구요.
    경숙 : (장난스럽게) 누굴까? 여자예요?
    동대장 : 여자죠, 당연히.
    경숙 : 우리 동사무소 사람이에요?
    동대장 : 에이, TV에 나오는 사람이예요.그런데, 전혀 쓸 데 없어요. 내가 마음에 든다고 어떻게 하겠어요. 편지를 보낼까 하다가 그만 뒀어요. 이 나이에 청승이잖아요, 하하하 (마른 웃음을 웃는다)경숙 : 나이가 뭔 상관이예요. 그럼 저는 어떻게 하라구요. 동대장님은 장가라도 가셨잖아요.
    동대장 : 어, 그렇게 되나? 에이, 그래도 TV에 나오는 사람인데.
    경숙 : 저두 TV에 나온 적 있어요. 지나가다 우연히 나왔지만요.
    동대장 : ......
    경숙 : (얼굴이 붉어 진다)
    129. 식당 앞

    - 동대장이 계산을 마치고 늦게 나온다. 아까 못한 말을 다시 꺼낸다.

    동대장 : 오사장, 오늘 미자씨가...
    경숙 : (말을 가로막으며) 그 영화 때문에 그러시죠?
    동대장 : 그래.
    경숙 : 안 그래도 제가 먼저 연락을 드릴려고 했어요. 저는 아무 상관 없어요. 남이 뭐라는 건 원래 잘 신경을 안 썼구요. 술이 올라서 지나치긴 했지만, 솔직히 집에 와서도 기분 좋았어요. 그런데 가족이 있으신 동대장님은 문제가 될 것 같더라구요. 제가 그날 술을 좀 많이 먹었죠? 동대장 : 나도 많이 취했었나봐.
    경숙 : 술 핑계 대는 게 아니라 전 그날 처음으로 동대장님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알았었거든요.
    동대장 : 내 말은......
    경숙 : 걱정 마세요. 제가 동대장님 가정에 부담을 줄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요.
    동대장 : ......
    경숙 : 그리구요, 동대장님. 술 핑계 대지 마세요.
    동대장 : (진지하게) 오사장. 아까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고 그랬지? 우리나라 대부분 사람들한테는 나이가 문제가 돼. 나이가 들면 이상한 일에 말리고 싶지 않아.
    경숙 : 이해돼요. 전부요.
    동대장 : 그래.
    경숙 : (웃으며) 동대장님, 안녕히 가세요.
    - 두 사람, 식당 앞에서 정중하게 인사한다. 그리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간다.

    130. 영주의 집 (아침)

    - 영주가 현관문을 열고 신문을 가져 온다. 신문에는 '최단 기간 서울관객 100만 돌파'라는 활자가 보인다.

    131. 동사무소 - 옥상 (점심시간)

    - 옥상에서 커피를 마시는 미자. 어제 포장마차의 일이 남아서 그런지 약간 뾰루퉁하다.

    - 또 예전의 '창문의 여인'이 보인다. 이번에는 그 여자가 미자에게 인사를 한다. 엉겁결에 미자도 인사를 한다. 그 여자가 일어나서 옷을 입는다. 그리고 미자에게 묻는다.

    창문의 여인 : 점심 먹었니?
    미자 : (놀라며) 네.
    창문의 여인 : (기지개를 켜며) 나도 먹어야 겠다.
    미자 : (가만히 있는다)
    132. 동사무소 - 사무실

    - 미자가 자리에 돌아와 앉는다. 옆의 희영이 미자에게 물어 본다.

    희영 : (앞에 앉은 할머니를 가리키며) 언니, 이 분 좀......
    미자 : 왜, 무슨 일이야?
    희영 : 생년월일이 35년 9월 31일이래. 내일이 생신이라서 생활보호 대상자 신청을 하러 오셨다는데.
    - 미자, 눈이 커진다. 신청서를 보니 정말 주민등록번호가 350931- 2.....이렇게 기재되어 있다. 달력을 보니 오늘은 9월 30일이다.

    미자 : 할머니, 정말 9월 31일 태어나신 거예요?
    133. 병원

    - 병원 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는 동대장. 뒷자리에서 그의 아내가 그의 어머니를 간호하고 있다. 지하 주차장의 층층에 만차를 나타내는 붉은 등이 켜져 있다. 그래서 동대장은 나선형 도로를 끝없이 돈다.

    - 지하 주차장. 동대장이 어머니를 업고 뛴다. 아내가 그 뒤에서 가방을 들고 따른다. 긴장으로 일그러진 동대장의 얼굴.

    134. 영주의 집

    - 별안간 인터폰이 울린다. 영주가 받으니 미자의 목소리다.

    미자 : 놀라셨죠? 전화번호를 몰라서요.
    영주 : 미자씨, 무슨 일이 있어요?
    미자 : 미안해서요. 제가 잘못 알았나봐요.
    영주 : 무슨 말씀이세요?
    - 유니폼을 입은 채 경비실에서 인터폰으로 통화하는 미자의 모습이 보인다.

    135. 술집 (밤)

    - 유니폼을 갈아 입은 미자와 츄리닝을 입은 영주가 마주 앉아 있다. 미자의 얼굴이 화로의 열을 받아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미자 : (혼자말로) 그랬었구나, 그랬구나......
    영주 : (영문을 모른다)
    미자 : 저는 그냥 미안해요. 자꾸 미안해요.
    영주 : 미자씨, 왜 그러세요?
    미자 : 제가 술을 못 마셔요. 안 그랬으면 정말 오늘 한 잔 하고 싶네요.
    영주 : 그래요. 술 시키지 마요. 그게 미안하단 말이예요? 미자 :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저 원래 사람을 잘 믿거든요. 남들이요, 사람 너무 잘 믿으면 곤란하게 될 수 있다고 말릴 정도구요, 아무튼, 저는 사람들을 웬만하면 믿을려구 애쓰구요.....
    영주 : 미자씨가 저를 의심한 적 있어요?
    미자 : (답답하다는 듯) 아니 그게 아니구요, 아이 참, 제 말은요, 영주씨를 의심한 게 아니란 말이예요. 영주씨가 아니라, 9월에 31일이 있다는 걸 의심했다는 거예요.
    영주 : 그건 의심이 아니죠. 그건 뭐랄까......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죠.
    미자 : 그렇죠? 9월 31일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없죠? 영주 : 그럼요.
    미자 : 그런데요, 9월 31일이 있더란 말이예요.
    영주 : (놀란다) 무슨 말이예요?
    미자 : 영주씨만 9월 31일에 태어난 게 아니예요. 우리 구(區)에만도 여러명이래요.
    영주 : 예?
    - 영주, 입을 다물지 못한다. 물을 한 모금 삼킨다.

    미자 : 오늘 동사무소에 어떤 할머니가 오셨어요. 그런데 그 할머니는 35년 9월 31일 생이고, 내일이 생신이래요. 그래서 구청에다 물어봤죠. 혹시 주민등록번호 첫자리가 0931로 끝나는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그랬더니 열명도 넘는대요.
    영주 : 그럼 몇 년마다 한 번씩 있다구요?
    미자 : 미안해요. 제가......
    영주 : 잠깐만요. 우리 소주나 한 병 시키자구요.
    - 영주가 한 잔을 들이킨다. 미자나 영주나 벌써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미자 : 제가 은근히 영주씨를 놀렸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사람들이 얼마나 놀렸겠어요. 저도 그 중에 하나죠.
    영주 : 미자씨가 뭘......
    미자 : 마음 고생이 많으셨죠? 그래서 술도 많이 드시고, 그러시는 거죠? 영주 : (할 말이 없다)
    미자 : 다 알아요. 지난 봄에 설국에 다녀와서 괴로우셔서 그렇게 술도 많이 드시고 그러셨죠? 그게 어떻게 영화에도 나오고, 왜 일이 이렇게 자꾸......
    영주 :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
    미자 : 지난번 포장마차에서 오뎅 먹을 때도 미안하다고 말하려 했는데, 그렇게 사람 꼴이 우습게 되구......
    - 미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영주가 냅킨을 뽑아 준다.

    미자 : 저 아저씨 좋아요.

    - 영주, 이젠 표정이 아예 굳어 버린다.

    미자 : 그냥요. 그냥 좋아요.

    136. 시민 공원 (깊은 밤)

    - 시민 공원의 스탠드에 앉아 있는 영주와 미자. 따뜻한 캔음료를 양손으로 부비고 있다. 저 멀리 농구코트에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농구에 열중하는 중학생들이 보인다.

    영주 : 그 영화 말이예요.
    미자 : 어머, 혹시 부인되시는 분이 뭐라 그랬어요?
    영주 : 그게 아니구요, 재미있었어요?
    미자 : 네. 감동적이더라구요. 그 사람처럼 드라마틱하게 살다 간 가수가 없잖아요.
    영주 : 그게 감동적이라구요? 세상에 무대 위에서 노래 부르다 죽는 가수는 없어요.
    미자 : 그건 그렇죠.
    영주 : 가수들이 어떻게 죽는 줄 알아요?
    미자 : 글쎄요.
    영주 : 병원에서 죽어요.
    미자 : (웃는다) 말도 안돼. 아니, 너무 당연한 거 아니예요?영주 : 어떤 가수는 술 먹고 싸우다 죽고요, 어떤 가수는 부부싸움하다 죽고요, 어떤 가수는 치질로 고생하고 있다구요.
    미자 : 안 어울리잖아요.
    영주 : 안 어울리죠. 세상에는요, 어울리는 것 보다 안 어울리는 게 훨씬 많아요. 이상하게 보이는 게 얼마나 많은데요. 저 봐요. 저도 이상한 놈이잖아요. 9월 31일에 태어난 놈.
    미자 : (웃으며) 어머, 저 애들 봐요.
    - 두 사람 정면에 있는 공원 시계탑이 0시 5분을 가리킨다. 그 옆 농구 코트에 있던 중학생들이 덩크슛을 한다. 모두가 덩크슛을 한다. 자기들도 너무 신기한지 계속 한다. 두 사람도 놀란다.

    137. 공원 옆 도로

    - 영주가 택시를 잡으려 하고 있다. 택시가 서자 미자가 불쑥 손을 내민다. 두 사람이 악수를 한다. 미자가 탄 택시를 향해 영주가 손을 흔든다.

    138. 영주의 집

    - 경희가 문을 연다. 화장실로 들어가는 영주.

    경희 : 나 그 영화 봤거든.
    영주 : (얼굴에 비누칠을 한 상태로 눈을 뜬다)
    경희 : 그게 너야?
    영주 : (고개만 끄덕인다)
    경희 : 별 일 아니지?
    영주 : (역시 고개만 끄덕인다)
    경희 : 빨리 씻고 자자.
    - 경희, 방으로 들어간다.

    139. TV 화면

    - TV의 일기예보 시간에 심선미 기상 캐스터가 등장한다. 단정하게 인사를 한다.

    기상캐스터 :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오늘은 29년 만에 찾아 온 9월 31일 입니다. 아무쪼록 그간 작은 소망들이 다 이루어 지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나라는 하루 종일 따뜻하고 시원하며 상쾌한 날씨가 되겠습니다.

    140. 전철역 주변

    - 출근길의 미자. 사람들이 평소와는 다른 모습으로 출근하고 있다.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아저씨가 머리 뒤에 걸리는 이어폰을 한 채 걷고 있다든지, 아이들은 편의점 옆 무료 솜사탕 기계에 나무젓가락을 갖다 대고 마음대로 솜사탕을 만들어 먹는다. 동네 노인들이 운동복을 입고 줄을 맞춰 뛰고 있는 모습이 마치 젊은 군인들처럼 생기 넘친다. 갈비집처럼 큰 식당에는 아침부터 가족들끼리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운다. 그렇게 큰 웃음은 아니지만 사람들 얼굴에 평온한 웃음이 슬쩍슬쩍 보인다.

    - 미자가 담담히 걷는다.

    141. 동사무소

    - 동사무소의 아침 풍경. 희영이 스탬프의 날짜를 9월 31일로 맞춘다. 커피를 뽑으러 갔더니 자판기 관리하는 아줌마가 기계를 열어 단추를 조작하고 있다. 기계를 닫고 가니 남은 금액을 나타내는 곳에 FREE라는 불이 들어와 있다.

    142. 병원 - 입원실

    - 동대장이 그의 어머니 옆 간이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다. 어머니가 먼저 일어나 앉아 있다. 그리고 동대장이 자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병세가 상당히 호전된 모습이다. 뒤늦게 동대장이 몸을 일으킨다.

    동대장 : 어머니, 어떻게... 좀 괜찮으세요?
    어머니 : 머리가 개운한 게 기분이 좋구나.
    동대장 : 앉아 계시지 말고 누우셔요.
    어머니 : 곰탕 국물이 먹고 싶다. 파를 어슷어슷 썰어서 넣은.
    동대장 : (놀란다)
    어머니 : 그리고 작은 애하고 다 불러, 오늘.
    143. 시민 공원

    - 공원에 마련된 야외 예식장.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신랑과 신부가 나이가 많다. 나이 들어 자식 낳고 치르는 뒤늦은 결혼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 촬영이 끝나니 또 다른 늙은 신랑과 신부가 하객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 신랑과 신부가 풍선이 달린 차에 오른다. 자식들의 환송을 받는다. 가방을 메고 어디로 가고 있던 영주가 이들의 모습을 본다.

    - 농구 코트 옆을 지나는 영주. 어제처럼, 아니 오늘 새벽처럼 젊은 사람 몇몇이서 시합을 즐기고 있다. 사람들이 우르르 이 골대로 몰렸다가 다시 우르르 저 골대로 몰려 간다. 영주가 옆에 있는 공을 쥐고 뒷걸음질 친다. 3점슛 라인을 훨씬 벗어나 슛을 해본다. 만화처럼 공이 골대로 빨려 든다. 오늘은 이상한 날이다.

    144. 식당 - 곰탕집

    - 병원 근처 곰탕집. 옷을 껴입은 동대장의 어머니와 동대장의 식구들, 그리고 동생 내외를 비롯한 모든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아이들이 뛰어 놀고 가족들이 즐거워하고 있다. 어머니가 마치 병이 나은 사람처럼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145. 동사무소 - 현관

    - 현관을 나서던 미자. 맞은 편에서 오는 여자를 본다. 인도풍의 실크 블라우스에 옥빛 긴 치마를 두른 그 여자는 미자가 옥상에서 보던 그 '창문의 여인'이다. 주변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이국적인 정취를 풍긴다. '창문의 여인'이 미자에게 눈인사를 한다. 미자도 엉겁결에 인사를 한다.

    - 미자가 멍하니 현관에 서 있는 동안 골목 한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의 환성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것은 말이 끄는 포장마차다. 예의 경상도 아줌마가 말을 이끌고, 그 말이 포장마차를 끌고 오고 있다. 마치 축제의 한 장면 처럼 말과 포장마차에는 요란스런 깡통과 리본을 달았다. 아줌마는 입 안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있고, 마차를 따르는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따라 붙는다. 동네 주민들이 문을 열고 나와 박수로 이들의 행진을 축하한다.

    146. 스틸 사진 장면들

    - 앞 씬의 장면이 스틸 화면으로 정지된다. 그리고 연속해서 야외 결혼식 장면, 아이들이 덩크슛 하는 장면, 지나가는 행인들이 미소짓는 장면, 동대장 어머니의 흡족해 하시는 표정 등이 스틸 화면으로 보여진다. 마치 자동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처럼 보인다.

    자막 "EPILOGUE - 끝"

    147. 영주의 집 (다음날 아침)

    - 영주가 잠옷 바람으로 신문을 들고 들어온다. 날짜는 10월 1일로 되어 있다. 영화 '어너더 데이'가 칸 영화제 경쟁부분에 진출했다는 헤드라인이 선명하게 부각된다.

    148. 동사무소 - 사무실

    - 미자를 비롯한 직원들이 평상시 근무하는 모습이 보인다. 각자 분주한 모습이다. 미자의 나레이션에 따라 장면이 바뀐다.

    나레이션 (미자) : 9월 31일이 지나고 10월 1일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이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어제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 날에 대해서 말이 나오면 다들 씨익 하고 웃고 맙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날의 기억은 그저 몇 장의 사진처럼 남아 있습니다.

    - 병원 영안실. 동대장 어머니의 영정 사진이 보인다. 동대장과 아내가 상복을 입고 문상 온 교인들과 찬송을 부르고 있다.

    나레이션 (미자) : 바뀐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고민했던 문제가 드라마틱하게 해결되는 기적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날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조그마한 소망들이 이루어졌지만 세상 일은 물이 흐르듯이 제 길을 찾아갔습니다.

    - 젊은 남자와 여자가 동사무소 한 켠에 있는 디지털 사진기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그리고 새로 발급되는 주민등록증을 손에 쥔다. 거기에는 3과 4로 시작되는 번호가 찍혀 있다.

    나레이션 (미자) : 참, 여러분들 아세요? 2000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의 주민등록번호는 남자는 3, 여자는 4로 시작을 한답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다음, 제 딸과 아들이 TV에서, 엄마의 짧은 로맨스를 영화로 볼 겁니다. 그리고 동대장님의 손자 손녀는 추석이나 설날에 TV에서, 할아버지의 마술같았던 한 때를 영화속에서 볼 수 있을 겁니다.

    - 미자의 나이든 모습. 크리스마스 트리가 집을 장식하고 있고, 미자가 아들, 딸과 함께 TV로 영화 '어너더 데이' 중 문제의 그 장면을 보고 있다.

    - 동대장의 집. 동대장의 사진이 그의 어머니의 사진과 나란히 마루방 중앙에 걸려 있고, 이제 나이가 많이 든 동대장의 아내가 자식들과 제사를 드리고 있다. TV에서는 역시 영화 '어너더 데이' 중 문제의 그 장면이 방송되고 있다.

    149. 동사무소 - 옥상

    - 미자가 옥상 난간에 기대어 있다. 예전 처럼 '창문의 여인'은 오늘도 벗은 채 아래위를 오가고 있다.

    - 미자가 먼저 인사한다. '창문의 여인' 이 답례한다. 카메라가 멀리 동네의 모습을 비춘다.

    나레이션 (미자) : 그러니까, 산다는 것은 마술같은 일로 가득 차 있는 모양입니다.

    (F.O.)

    엔드 크레딧이 올라 온다.
    박정우

    박정우

    1970년 경북 경산 출생

    1989년 대구 대건고 졸업

    1990년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입학

    연세대학교 극예술연구회 활동

    1998 동남아해운 입사

    2000 영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시나리오 작업 참여

  • 미자는 배오2동사무소의 주민등록계원이다. 이 일을 몇 년 하다 보니 사람들을 주민등록번호로 되새겨 보는 버릇이 생겼지만 그렇게 별날 것 없는 평범한 처녀이다. 그런데 미자에게 희한한 일이 생긴다. 동사무소 옥상에서 우연히 어느 집 창문으로 한 여인이 윗옷을 벗은 채 환호하는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그때부터 이 창문의 여인은 미자에게 눈인사를 한다. 황사가 자욱했던 어느 봄날, 그만큼은 아니지만 평범치 않은 일들이 미자에게 계속 일어난다.

    같은 날 미자와 한 건물에서 근무하는 예비군 중대 동대장도 이상한 일을 겪는다. 황사가 심하고 모래바람이 세차게 불던 그 날 밤 예비군훈련을 지휘하던 동대장은 동사무소가 통합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거기다 사고가 겹쳐 밤을 새고 다음날 아침에야 집에 돌아와서 위장크림을 채 지우지도 못한 초췌한 자신의 얼굴을 본다. 우연히 TV에서 기상 캐스터의 이메일 아이디가 자신의 것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치 그녀와 자신이 깊이 통하는 것 같은 환상에 빠진다. 일기예보 대로 천둥이 울린다.

    천둥이 울리고 황사를 씻어내는 비가 온 그 날 미자와 친한 경숙언니는 업무과실로 10년을 다니던 동사무소를 그만두게 되었다. 경숙의 환송 회식 때 지금껏 상대방에게 무심했던 동대장과 경숙은 술이 올라서인지 무척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돌아가는 길에 시민공원에서 화려한 행사가 있는 것을 보고는 무작정 구경하러 간다. 사람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자 경숙은 동대장의 어깨 위로 목마를 탄다.

    같은 시간. 미자는 술에 취한 영주를 만난다. 영주는 어제 동사무소에 왔던 사람인데 주민등록번호가 710931-, 그러니까 1971년 9월 31일에 미자의 동네인 설국에서 태어나서 결혼 후 이사 온 남자다. 사실 확인차 미자와 함께 설국에 들린 영주는 자기 생일 보다 오히려 설국이라는 동네가 더 신기했다. 도시와 도시 사이에 별장처럼 푸근한 곳.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은 영주는 사람들에게도 설국역과 같이 쉬어 갈 수 있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영주가 지금 술이 취해 무릎사이에 고개를 떨구고 자고 있다. 미자는 영주를 업고 아파트 문까지 데려다 준다.

    가을이 되었다. 미자와 경숙은 우연히 영화 <어너더 데이>를 보게 되고 거기서 경숙이 동대장의 목마를 탄 모습과 미자가 영주를 업고 아파트 복도를 달리고 있는 장면을 보고 경악한다. 네 사람이 이렇게 희한한 일을 받아들이고 서로의 관계를 되짚어 보는 와중에도 이 영화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중이다. 어느덧 9월 30일. 미자는 동사무소에 찾아온 어느 할머니가 9월 31일 생인 것을 알고는 놀란다. 그리고 영주를 믿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하다. 미자와 영주는 그날 밤 술자리를 하면서 9월 31일의 새벽을 맞는다.

    아침이 되어 예의 그 기상캐스터는 수 십년 만에 9월 31일이 돌아왔음을 알린다. 사람들이 평소와 다르게 조금씩 들떠 있다. 그렇다고 기적이 일어나거나 어려운 문제가 드라마틱하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평소에 소망했던 소박한 꿈들이 이날 9월 31일에 실현된다. 아이들은 솜사탕을 공짜로 마음껏 먹고, 어른들은 자판기 커피를 맘대로 뽑아먹는, 그 정도다.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하루이다.

    영화 <어너더 데이>는 흥행 뿐 아니라 불후의 명작으로 인정 받게 되었다. 미자의 아이들도 추석 같은 명절에 특선영화로 엄마가 다른 유부남을 업고 가는 것을 본다. 동대장의 손자들이 동대장에게 차례를 지내는 동안 동대장의 짧은 로맨스가 TV에 방영된다. 미자는 옥상에서 만나는 그 창문의 여인에게 이제 먼저 인사를 건낸다.
    박정우

    박정우

    1970년 경북 경산 출생

    1989년 대구 대건고 졸업

    1990년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입학

    연세대학교 극예술연구회 활동

    1998 동남아해운 입사

    2000 영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시나리오 작업 참여

  • <배오2동사무소>을 뽑고나서
    김홍준(영화감독)

    100편 가까운 응모작 전체의 특징이라면 두 가지를 꼽을 수 있겠다. 첫째. 특정한 경향, 장르, 소재, 스타일에 편중됨이 없이 백가쟁명이라 할만큼 다양하다는 점.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문예작품에 요구되는 서사성과 통찰력, 그리고 영상매체에 대한 장악력을 고루 갖춘 시나리오는 드물었다는 점. 어쩌면 이것은 최근 몇 년 사이에 갑자기 부쩍 자라 버린 한국 영화 전체가 겪고 있는 과도기적 현실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성숙과 안정을 추구하기보다는, 열정과 패기로 앞만 보고 달려나가고 있다 고나 할까. 당선작으로 선정한 <배오2동사무소>는 새로움과 상상력의 풍요함, 그리고 전체적 완성도에서 본심에 오른 다른 응모작들보다 반 발짝쯤 앞서 있는 작품이다. 특히 '동사무소를 둘러싼 서민들의 애환을 잔잔히 그린 소품'이리라는 첫 인상이 확신으로 굳어질 즈음,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숨겨둔 속내와 만나는 즐거움이 있었다. 익숙한 것과 낯선 것, 현실성과 판타지를 뒤섞는 연금술에서 힘과 기술을 고루 갖춘 작가의 정진을 기대한다. 20 자평식으로 요약하면, <집시의 시간>이 <오! 수정>을 만나다? 진심으로 축하를 보내며, 아쉬움을 삼키실 모든 분들을 위해 한 시나리오 작가의 경구를 소개한다. "퇴짜맞은 것은 당신의 재능이 아니다. 단지 당신이 쓴 한 편의 작품이 거절당했을 따름이다." 김홍준(영화감독)
  • 박정우

    박정우

    1970년 경북 경산 출생

    1989년 대구 대건고 졸업

    1990년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입학

    연세대학교 극예술연구회 활동

    1998 동남아해운 입사

    2000 영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시나리오 작업 참여

    우리 집 강아지 덕배는 제가 변기에 올라앉아 신문을 볼 때면 어김없이 제 앞에 자리잡고 앉습니다. 가끔 제가 신문을 접고 물어 봅니다. 넌 고어가 이길 것 같으냐, 부시가 이길 것 같으냐. 덕배는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자기도 좀 어려운가 봅니다.

    당선을 알리는 핸드폰이 울리는 순간에도 저는 변기에 앉아 있었습니다. 기쁜 마음이 솟아오르는 동시에 아,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같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극적인 순간을 지지리도 어정쩡한 포즈로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마술을 다룬 제 글은 우리 주변이 똑부러지게 설명할 수 없는 희한하고 신기한 것으로 채워져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편으로는 드라마처럼 멋있다기 보다는 다들 촌스럽고 어정쩡하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졸업식 날 양복에 흰 운동화 신고 오신 우리들 아버지처럼 생겼을 것 같습니다. 그 우스움이 세상에 정이 들게 합니다.

    무척 기뻤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절 믿어주신 부모님과 가족들, 특히 씩씩한 마누라가 너무 고맙습니다. 친구들과, 영화에 조금이나마 눈을 뜨게 해 주신 흥식형에게 고맙습니다. 신정7동 사이버 동지기 문재두님 덕분에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글을 읽고, 글을 쓰려 합니다. 그리고 영화를 한편 만드는 꿈이 있습니다. 영화가 끝나면 화장실에 줄 서 있는 사람들 얼굴이 이뻐보이고, 밖에 눈이라도 소복 왔을 듯 마음이 달뜨는 그런 영화 한 편을 만들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못난 글을 선택해 주심에 깊이 감사드리고, 지금부터 모질게 해보라는 뜻임을 명심하겠습니다.
  • 작품전문
  • 줄거리
  • 심사평
  • 당선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