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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박한 관객들 -홍상수 영화를 대하는 관객의 시선들-

by  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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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사평
  • 당선소감
  • 경박한 청취’에는 ‘해석’이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미니멀 뮤직이나 환경음악의 경우에는
    그런 청취법이 어울린다.
    왜냐하면 음악가의 의도적인 ‘표현’과는 무관한 지점에 서 있는
    이런 음악에는 ‘해석’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와타나베 히로시, 『청중의 탄생』 중에서

    1.

    지금까지 홍상수 영화는 하나의 문법을 추구해 왔다. 작가로 보이는 한 인물이 등장하고, 그 인물은 일상의 남루한 거리에서 방황하기 일쑤이다. 그러다가 여자들을 만나고 그 여자들은 곧 작가로 보이는 남자들과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헤어지고,두 사람은 멀쩡한 얼굴로 ‘일상’으로 복귀한다.

    홍상수 영화를 설명할 때 지금까지 키워드가 된 단어가 이 '일상‘이다. 많은 영화 평론가들이 입을 모아 “홍상수 영화는 일상의 영화이다”, “홍상수 영화는 날것 그대로이다”, 혹은 “홍상수 영화는 지금까지 영화와는 다른 형식을 보여주는데 그 이유는 일상을 화면에 담기 위해서이다” 등등으로 의미를 부여해왔다.

    이러한 지적과 평가는 그르지는 않다. 그러나 옳다고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막연하게 일상의 문제를 다루었고 그래서 가공하지 않은 느낌을 준다고는 평가했지만, 왜 그랬는지 혹은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어떠한 가치를 지니는지는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는 평가도 있다. 가령 정성일의 경우에는 홍상수 영화중에 《강원도의 힘》을 최고의 수작으로 꼽고 있다(정성일은 이 영화를 한국 의 10대 영화로 꼽고 있다). 문제는 《강원도의 힘》이 좋은 영화인가 아닌가가 아니다. 《강원도의 힘》은 가장 홍상수답지 않은 영화이다. 이 영화는 인위적으로 짜여 진 플롯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상당히 세련되게 짜여 있는.

    서로 다른 루트와 시간으로 강원도를 여행하는 남자와 여자는 엇갈러 가지만 그들의 자취는 교묘하게 겹치는 파문들을 만들어 내는데, 이러한 파문들은 플롯을 구성하려는 작가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러한 설정을 높게 읽어내는 비평가와 관람객에 의해 상찬되었다. 그러나 홍상수의 다른 영화에서는 이러한 설정과 배치와 장치를 읽어낼 수 없다.


    그렇다면 정성일은 홍상수의 영화를 잘못 읽어낸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다만 정성일은 작가주의시각에서 홍상수를 읽어내는 오류를 저질렀을 뿐이다. 근대적 의미의 영화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가치관과 논리 그리고 개성과 의도에 의해 통일된 형식을 갖추기 마련인 예술 장르였다. 작가주의란 영화를 통해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전언을 완성하며 자체적인 형식과 미학을 배치하는 손길을 의미한다. 이 손길은 보이지 않은 힘으로 영화를 탄생시키고, 또 유통시키며, 그 소비자인 관객들에게 감상법을 압박해왔다.

    여타의 영화와 홍상수의 영화가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그는 스스로 ‘작가’의 입장에서 떠나려 한 사람이다. 보이지 않는 힘으로 영화를 조율하는 손길을 거부하려 한다. 그는 전통적인 의미의 ‘권위적 작가’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와 관객에 걸맞은 ‘동시대의 동료’가 되려고 한다. 그런 홍상수에게 작가주의의 멍에를 씌우는 것은 그 자체로 오류이며, 그의 영화를 제대로 판독하는 길을 가로막는 잘못된 이해이다. 이제는 이 점을 지적할 때가 되었다.


    다시 ‘일상’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홍상수의 일상이 주목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기존의 평론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전에는 다루지 않았던 소재여서일까. 아니면 그의 영화―더 정확히 말하면 그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가 그 이전의 영화와는 달리 거칠고 조악하고 남루한 형식을 견지하고 있어 소위 말하는 ‘날것 그대로’의 생경한 인상을 주어서일까.

    혹여, 홍상수의 일상이 변화하는 관객의 욕구, 즉 보는 이들의 새로운 관람법을 자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짜여 진 것을 거부하고, 누군가에 의해 완성되는 것을 경계하며, ‘거장’이라고 불리는 감독들만의 미학으로 영화가 채워지는 것에 식상한 이 시대의 관객에게 새로운 요구와 기호를 충족시켰기 때문은 아닐까. 지금까지 쓰여 진 홍상수의 영화론은 모두 근대적 의미의 영화관에 입각하고 있으니, 앞의 가정이 타당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 홍상수에게 가는 길은 전반적으로 재고되어야 한다. 이 글은 이 작고 도발적인 자문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2.

    1960년대 한국 영화계는 시나리오를 구하는 획기적인 방안에 열광하고 있었다. 문학작품을 각색하여 시나리오를 구성하고 이에 근거해 영화를 촬영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작품의 문학성을 염려할 필요도 없었고 시나리오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많은, 그리고 검증받은 문학작품을 골자로, 극장 상연 시간이 충분하지 못하면 뒤에 이야기를 붙이고, 중심 이야기가 평면적으로 흘러가면 평행 플롯을 설치하고, 소재가 인상적이지 않으면 사건 몇 가지를 삽입하기만 하면 되었다.

    《오발탄》은 둘째 아들의 이야기를 인상 깊게 확대하는 방식으로 각색되었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식모와 계란 장사의 사랑을 첨부하여 두 개의 플롯으로 증폭시키는 방식으로 각색되었으며, 《갯마을》은 이야기가 다소 부족해 뒤편의 이야기를 길게 늘이는 방식으로 각색되었다. 원작은 얼마든지 있었고, 필요한 작품을 골라 필요한 부분을 첨부하거나 일부를 확대하면 그만이었다. 우리가 70년대의 걸작이라고 부르는 《삼포가는 길》 역시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홍상수는 달랐다. 홍상수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원작과 전혀 다른 형태로 구성했다. 이 영화의 원작은 구효서의 《낯선 여름》이다. 일상의 권태로움에 빠져있던 가정주부가 파격적인 외도를 저지른다는 이야기로, 사실은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오히려 엽기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본다는 것은 일상에서는 좀처럼 꿈꾸기 어려운 방종한 외도와 그 긴장된 설렘을 구경한다는 의미였는데, 홍상수는 그 안에 지리멸렬한 일상을 가두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어느 날 온 동네를 휘졌던 돼지가 우물에 빠졌을 때처럼,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몰려와 구경하도록 만들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신기한 체험이었다. 영화가 신기했던 것이 아니라, 이러한 영화를 한국 사람들이 영화관에 가서 본다는 것이 신기했다. 약 10만 명 정도가 보았다고 하는데, 그 연유가 어디 있는지 지금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홍상수는 기본적으로 원작의 완결성을 지키지 않았다. 부분을 확대한다거나 플롯을 새로 첨부한다든가 혹은 인상적인 삽화를 넣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작품을 읽은 자신의 느낌을 전혀 다른 캔버스 위로 가져갔다. 변화된 주제는 일상이었고, 형식은 기존의 일탈이었다. 한 가지 더 있다면 옮겨 그릴 때 원작의 작품성, 완결성, 원본성을 무시한 행위였다. 그는 다시 그려질 캔버스 위에서 이것을 지켜볼 관객들만 생각했다.

    홍상수는 기존의 영화인과는 달리 원작에 대한 존중이 약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자유로운 관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완결된 작품에 대한 맹신이 없었고, 그러한 작품을 재창작(영상화)하는 것에 대해 흥미가 없었다. 그가 필요했던 것은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펼쳐낼 수 있는 ‘담론의 장’이었지, 높은 성취도를 가진 작품에 종속되는 ‘반복의 시간’이 아니었다.


    1960년대의 관객은 영화의 줄거리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 영화를 보러 갔다. 그들은 자신이 읽은 소설이 어떻게 영화화 될 것인지를 궁금해 했다. 설령 미처 소설을 읽지 못한 경우라 할지라도,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 자신이 먼저 읽었어야 했을 소설과 자신이 보았던 영화의 느낌을 비교해 보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홍상수, 혹은 홍상수로 대변되는 90년대 이후의 달라진 관객들은 원작과 자신의 느낌을 일치시키기를 바라지 않는다. 원작이 아무리 높은 권위와 완결성 그리고 자체적인 미학을 선취했다고 하더라도, 영화를 즐기는 입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이 놀랍도록 ‘경박한 태도’는 바로 홍상수 영화와 그 영화의 마니아들이 공유하는 의식의 한 지점이다. 홍상수는 90년대 이후 부각되기 시작한, 영화에 대한 일정한 자신감을 갖게 된 ‘신흥 관객’ 출신이었던 것이다.


    3.

    다른 관점에서 홍상수의 영화에 접근해 보자. 홍상수의 영화는 흔히 이분구조를 취한다. 《생활의 발견》은 경수가 춘천과 경주를 여행하는 이야기이다. 경수는 춘천과 경주에서 서로 다른 여자를 만나 섹스를 하지만 결국에는 비슷한 상황을 연출하고 만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역시 두 남자 이야기이다. 한 여자에 대한 기억을 공유한 두 남자는 여자를 만나러 가는 여행을 통해, 다르지만 역시 비슷한 인상을 남긴다. 《강원도의 힘》은 강원도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여행하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이고, 《오! 수정》의 에피소드 역시 몇 개로 분할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두 개의 시선으로 묶을 수 있는 영화이다.

    이러한 이분구조는 이중섭의 그림처럼 인위적이다. 오히려 영화 형식이 오랫동안 발전시켜왔던 세련된 평행 편집, 혹은 교차 편집에 의해 의연하게 이야기 흐름을 좇아가는 방식에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조악한 이야기 방식을 과연 ‘일상적’이라는 관점으로 평가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이러한 이분구조 역시 참신하게 이야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구조는 실제로 유려함이나 참신함과는 거리가 먼 기법이다. 홍상수는 전체적인 통일성을 고려하지 않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김기덕과 마찬가지로 낙제점에 가까운 영화 대본작가이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부족한 서사 문법으로 인해 외면당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서사 문법이 ‘전체의 통일성’이 아닌, ‘부분의 독자성’을 옹호하는 탈구조적인 양식(확산구조)을 따르기 때문이다.

    18세기 이후 가장 중요한 미의 원리는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다. 예술 작품을 이루는 각종 요소는 불규칙하게 산포되어 있는 것 같지만, 이를 제어하는 주체의 보이지 않는 조율 속에서 일정한 원리와 논리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한다는, 또한 환원되고 있다는 개념을 신봉해왔다. 그래서 많은 문학 작품과 연극 작품, 음악과 미술 작품들은 이러한 논리와 문법을 체화할 방도를 모색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적 요소들(다양성)을 제어하는 정신 혹은 의도(통일성)를 ‘작가의식’이라고 존숭(尊崇)해 왔다.


    영화는 19세기 이후 장르이다. 영화는 탄생 이전에 명멸했던 숱한 장르와 양식적인 실험을 압축된 시간 내에 경험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영화는 ‘다양성’에 대한 별다른 이견이나 숙고를 거치지 않고, 다양성을 ‘통일하는 의식’의 중요성에 대해 먼저 배워야 했다. 영화는 그래서 어떤 장르나 양식보다 빠른 시간 내에, 예술작품으로 승화되는 기염을 토했다.

    우리나라 영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나리오 작가, 제작자, 감독들은 갈등과 위기와 해소라는 영화의 다양한 국면들을 통일시키고 조율하는 방식에 대해 우선 고민해 왔다. 1960년대를 넘어서면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고민이 일정한 성과를 거두며 한국적 선례로 남았고, 그 이후 한국 영화를 발전시키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홍상수는 이러한 주도적 흐름의 반대편에 서 있는 영화인이다. 그는 ‘고난/해결/더 큰 고난/잠재적 해결’이라는 구성의 원리를 숭상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는 누적되어 점증하는 갈등이 애초부터 없다. 고난의 양상도 신기하거나 획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시간 시간에 부딪치는 사소한 말다툼 이상이 아니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이러한 요소들을 통일시키려는 내적 일관성을 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사소한 다툼들을 반복시킨다. 그는 영화를 통해 그저 그런 다툼들을 병렬적으로 늘어놓는 것에 주로 천착한다.

    한 에피소드 내에서 늘어놓고, 그 에피소드를 반복해서도(대부분 한 번 더 제시해서 이분구조를 이룬다) 늘어놓는다. 뿐만 아니라 다른 영화를 만들 때도 비슷한 방식을 사용한다. 최근에 개봉된 《해변의 여인》에서 영화감독이 두 여자를 만나는 방식, 접근하는 요령, 그리고 헤어지는 방식은 《생활의 발견》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경수가 춘천과 경주에 가서 서로 다른 여자를 만난다는 줄거리는, 영화감독이 서해안 해변에 두 번 와서 서로 다른 여자를 유혹한다는 줄거리와 다를 바 없다. 《생활의 발견》에서 서로 다른 여자임에도 비슷한 행동 양상을 보이는 것이나, 《해변의 여인》에서 서로 다른 여인이 비슷한 구석이 있다고 우기는 감독의 태도는 결국 동일한 것이다.


    홍상수는 결국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셈이다. 그 이유는 관객의 반응에 있다. 관객의 관람 태도 중에 인위성을 거부하고 무심하게 화면 안을 바라보는 반응도 포함되어 있다. 위대한 거장이 ‘정신’ 이나 ‘의도’로 조율시키지 않은, 무심한 기호들이 뒤죽박죽 부딪치고 예측하지 못할 방향으로 선회하고 무한히 반복되면서 만들어지는 이상한 파장을 구경하는 반응을 일컫는다.

    근대의 영화(관람) 양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을 가다듬고 하나의 영화를 의미 있는 요소들의 집합체로 관람하도록 관객들에게 강요해 왔다. 이른바 영화를 해석하는 행위란 의식을 집중하고 꼼꼼히 보았던 각종 요소들을 결합해서 그 안을 실처럼 관통하고 있는 ‘만든 이의 정신’을 발견하여 음미하는 행위였다. 그러다보니 영화를 본다는 것은 ‘상상력의 자유로운 발산’이기보다는 누군가가 정한 원리나 규칙에 강제되고 구속되는 수감 행위일 수밖에 없었다.


    근대를 넘어서려는 관객들은 이러한 폐해를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체감하고 있다. 그들은 권위 있는 영화 해석자들의 깊이 있는 의견을 믿기보다는, 차라리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동시대 관객들의 평을 선호한다. 최근 한국에서 유행하는 가벼운 영화잡지나, 네티즌의 평점들은 이러한 변화된 관객들의 반응이자 모습이며 또한 선택이다.

    홍상수의 관객들은 우발적으로 드러나는 홍상수의 영화적 요인들에 감동받거나 공감하기를 바란다.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가 ‘바람피우려다 실패하는 이야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경수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기쁨은, 통일된 해석을 바탕으로 보편적인 군중의 모습(시대상)을 발견해야 한다는 (전)근대적 관객의 당위를 앞서는 것이다. 이야기 속의 경수가 이 시대의 대표적인 남성형인지 아닌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경수의 모습 속에서 지금―여기서―동시대의 영화를 보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만인 것이다.


    홍상수의 관객들을 통해 본 영화는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거나 ‘내면을 투시하는 창’일 필요가 없다. 우리 주변을 흘러 다니는 일상의 한 배경음악처럼, 영화는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를 내며 우리 주변에 잠복해 있다가, 어쩌다 눈에 띠어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일러줄 수 있으면 다행이다. 그러다가 그 광경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가 처해 있는 사회나 집단에 대해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니면 그냥 소음이거나 공허한 침묵이어도 할 수 없다.

    홍상수의 영화가 일상적인 것은 그의 영화가 ‘일상의 모습’을 담아서가 아니다. 그러한 영화는 그 이전에도 있었다. 홍상수의 영화가 일상적일 수 있는 것은 일상처럼 ‘그냥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중해서 그 안의 이야기를 읽을 필요도 없고 기억할 필요도 없으며 현실의 흐름과 별도로 분리할 필요도 없다. 의식의 흐름처럼 스쳐 지나가고 어쩌다가 우리의 주변 혹은 자신의 모습과 비슷한 측면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고, 아니어도 그만이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19세기 이후의 영화가, 1960년대 이후의 한국 영화가 그토록 염원하던 ‘표현성’에서 벗어나고 있다. 작가의 어떤 의지를, 사회의 어떤 의미를, 작품으로서의 어떤 가치를, 영화라면 응당 가져야 하는 어떤 자세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아니 거부하기보다는 집착하지 않으며, 체계와 의미와 가치와 평가를 의연하게 넘어서려고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사람의 의식부터 타자의 판단까지, 만든 이의 의도부터 해석하는 이의 자유까지를 전적으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빗소리를 들을 때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들을 필요가 없으며,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지 신경 쓸 필요가 없으며, 어떤 의미와 규범을 깨달아야 하는지에 구애받지 않는다. 일상을 살다가, 영화관에서 다시 한 번 바라보는 일상은, 그냥 무시해도 좋을 인상이다.


    4.

    관객의 성향을 바꾸어 보자. 관객 중에는 영화란 7천원을 내고 2시간 동안의 행복을 사는 것이라고 믿는 경우도 상당하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하늘을 날고 싶고 사업에 성공하고 싶으며 멋진 이성과 감미로운 사랑에 빠지고 싶어 한다. 그리고 영화관에서 이러한 꿈을 대신 충족하려 한다. 무엇보다 현실의 고난과 고통 그리고 고민들을 어두컴컴한 영화관에서 이겨내려 한다. 그 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보고 새로운 희망을 보고 새로운 위안을 얻고 반대로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 이들에게 홍상수 영화는 어떤 의미일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전체를 거부하고 부분을 보려는 고집 센 관객들과 같은 반응을 기대할 수 있을까. 실제로 대다수의 관객들은 홍상수 영화를 보지 않는다. 그들 중에는 홍상수가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도 적지 않고, 설령 홍상수가 누구인지 안다고 해도 그냥 ‘골치 아픈 예술가’ 정도로 간주하는 경우도 많다.


    《해변의 여인》을 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감독은 해변에서의 적적함을 메우기 위해 인터뷰를 가장하고 해변의 여인들에게 접근하다. 자신이 아무개 영화감독인데,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제의하자, 해변의 여인들은 아무개 영화감독을 알고 있다고 말하며, 그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응한다. 해변에서 짝이 없는 남녀들이 만나는 상투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흥미로운 것은 아무개 영화감독이라고 했을 때 그 감독을 안다고 대답하는 여인들이다. 그리고 그 여인들은 감독에 대한 호기심과 그 이상의 존경심을 내비친다. 별거 아닌 질문에 속뜻을 담아 대답하거나 질문 바깥의 의미를 궁리하는 태도가 그러하다.

    이러한 태도는 서해안에 먼저 동행했던 문숙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 문숙은 처음 보는 남자임에도 영화감독인 중래에 대해 정도 이상의 친밀감을 드러내어, 이를 경계한 남자 친구 창욱(조감독)에게 심정적인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들은 영화감독이라는 존재가 가진 특별한 ‘판타지’를 의미한다.


    따지고 보면 《생활의 발견》에서의 경수도 배우라는 직업 때문에 춘천의 여자(명숙)와 경주의 여자(선영)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경수가 배우이기 때문에 두 여자 모두 그와의 섹스나 친밀감을 손쉽게 받아들인다. 어떤 여성 비평가는 이러한 홍상수의 인물 창조를 두고, ‘남성 판타지’의 산물로 몰아 부친 바 있다. 확실히 극중 상황만 놓고 본다면 홍상수 영화 속의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매력에 빠져 있다는 나르시시즘의 혐의를 지우기 힘들다.

    그러나 남자 주인공들이 남성 판타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해도, 이것을 표현하는 감독의 태도까지 남성 판타지에 사로잡혔다고는 볼 수 없다. 경수가 비를 맞으며 선영(경주의 여자)의 집을 걸어 나오는 장면이나, 영화감독인 중래가 문숙에게 이별 통보를 받는 장면(《해변의 여인》)은,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남성 우월성(자신의 매력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이 얼마나 위선적인가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남성 판타지의 허위성을 증명하는 우수한 체현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남성 캐릭터와 관객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홍상수의 영화는 환상을 심어주는 영화가 아니다. 홍상수의 영화는―가령 남자들로 볼 때―남성의 성적 환상을 막연히 긍정해주고 현실의 부족함을 2시간의 꿈으로 채워주려는 영화가 아니다. 홍상수의 영화는 영화를 보는 이들의 환상을 부풀려 줄 생각이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


    여자 경우를 예로 들어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문숙이 만난 영화감독 중래는 기대 했던 이미지의 남자가 아니다. 남자 친구였던 창욱을 버리다시피 하고 중래의 곁에 있으려고 했지만, 그 역시 허사였다. 외국 남자에 대한 콤플렉스는 일반 사람보다 더 심각하고, 여자를 하룻밤의 섹스 파트너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 고질병도 다를 바 없다. 문숙은 중래의 그런 모습에 차츰 실망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러한 남자에게 집착하는 문숙, 자신의 보잘것없는 모습에 더욱 실망한다. 다른 여자와 잤느냐 안 잤느냐를 따질 수 없어, 방문을 열고 넘어갔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따지는 자신은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속물인 셈이다. 홍상수 영화를 보는 여성 관객들―이렇게 정의하고 제한할 수 있다면―은 자신들의 마음속에 그려지고 있던 자신에 대한 환상을 지울 수밖에 없다. 자신이 꿈꿔 온 사랑이나, 자신이 기대했던 남성상이 허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홍상수의 영화는 여성들의 꿈과 환상 역시 사정없이 짓밟고 있다.


    과연 그러한 영화를 볼 필요가 있을까. 그 대답은 이 자리에서 당장 대답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 관객들에게, 가상으로 이 질문을 던져 보자. 2시간의 행복을 사는 것에 지친 것이냐고.

    그들은 2시간의 헛된 행복이, 나머지 일주일의 불행과 불안을 지탱할 수 없다고 믿는 눈치이다. 영화의 2시간이 삶과 현실의 주변부를 눅눅하게 녹이는 역할을 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2시간의 곁불로 인해 혹독한 고통의 폭풍이 몰아치는 일상의 황야에서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런 그들은 확실히 과거와는 다른 관객들이다. 그들은 슬픈 영화를 보면서 서럽게 우는 관객이 아니다. 물론 대책 없는 로맨틱 코미디에 함뿍 웃지도 않는다. 그들은 비극도 희극도, 현실의 어떤 사정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냉막한 얼굴로 무표정하게 서 있는 인물들이다. 그들에게 홍상수 영화는 세상에 자신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신호일 것이다. 그 신호를 찾아 그들은 홍상수의 영화관으로 간다. 그곳에서 적당한 거리로 벌려 서 있는 현실의 냉막한 바람을 확인하기 위해서.


    5.

    홍상수의 영화는 화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화면 뒤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화면 앞에 앉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을
    상상하게 만드는 행위이다.

    근대라는 생활 방식은, 현상 너머의 질서를 찾는 의식을 기르고 습관화시켰다. 우리는 의미라는 자질을, 형식이라는 자질보다 더 중요하게 인식하고 성장해왔다. 사회적인 현상이 일어나면 그 현상을 구경하는 것으로 우리의 근대 의식은 만족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온갖 예술로, 현실 너머의 가치로, 이성으로, 본질로, 본질에 대한 탐구와 진지함으로, 체계와 학설과 판단으로 둘러싸인 삶은, 숨 막히는 의미의 밀집 지대를 이루게 되었다. 그곳에는 의미가 내뿜는 강고한 기능으로 빽빽하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토록 견고하던 한국 사회의 ‘의미’ 벽에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섬겨야 거대 이념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앞 다투어 체면치례를 거두어 내고 ‘형식’으로 내달렸다. 더 아름답게, 더 자유롭게, 더 솔직하게 자신들의 삶을 치장하고 가꾸고 내달리도록 종용했다. 의식의 지배에서 풀려난 감성들은 거리와 옷차림과 직업과 예술과 말과 생각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그토록 견고하게 자아를 가두던 논리와 이성의 벽은 속절없이 허물어졌다.


    홍상수의 영화는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흐름의 중요 지류를 대변한다. 그의 영화는 의미를 생성하지 않음으로써 기교를 가꾸는 형태로 이 흐름에 뛰어들었다. 홍상수 영화에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주제 혹은 작가의 전언이 없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구태여 기교로 충만할 필요가 없다. 기교는 단순화된 형태로 하나의 주제가 되려고 한다. 인위적인 편집이나 상투적인 결말을 배격하고, 보이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제시되는 화면의 흐름을 기교이자 주제로 파악하라고 넌지시 종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시는 엄격하게 말해서 홍상수의 내실은 아니다. 홍상수는 현실의 자극을 활용해 능숙하게 장난을 친다고 말하는 편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홍상수는 ‘무기교의 기교’를 가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어떤 기교를 설정할 만큼 현실에 천착하지 못한다. 따라서 유희를 격상시켜 주제로 삼는 것은 올바른 관람법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의 기교가 상당히 현실적이라는 평가는 가능하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살짝 살짝 사용했던 부감(俯瞰)은, 마치 우물 안을 들여다보는 듯 한 느낌을 주어 현실과 그 주변부를 내려다보게 했다. 《생활의 발견》에서 지루하게 이어지는 롱-테이크(long-take)는, 지루하게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작품 《해변의 여인》에서는 롱-테이크에 슬쩍 슬쩍 클로즈-업을 감행하고 있다. 중래와 문숙과 창욱이 이야기를 나눌 때, 카메라는 중래와 문숙만 슬쩍 오려낸다. 중래의 연애 작업이 지향하는 바를 보여주는 것일 텐데, 이러한 교묘한 카메라 워크를 통해 능수능란한 중래의 모습을 각인시킬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의미의 획득과 파악’이 아니라, 보는 이들을 희롱하는 듯 한 ‘자극과 유희의 서핑(surfing)’이다. 홍상수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과 장난을 치듯 슬쩍슬쩍 보아야 할 곳을 바꾼다. 이와 관련지어 음악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등장인물의 어설픈 속셈이 드러날 때마다 매우 경쾌한 음악이 울리기 시작하여, 영화 여기저기를 함께 흘러 다닌다. 어릴 적 누군가를 약 올릴 때처럼, 홍상수는 자기 영화 속의 인물들을 놀리고 있다.


    나는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가끔 그의 영화를 보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도 나처럼 난처해하고, 재미있어할까. 그들도 나처럼 그의 영화를 보면서 안절부절못하고, 그의 영화를 보고 있는 ‘다른 나’들을 흘깃흘깃 보려 할까. 혹은 먼 영화관에서 여기저기 듬성듬성 흩어져 있지만, 나의 얼굴을 기억하려 하거나, 누구와 같이 보고 있는지 상상하려 하지 않을까.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화면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전통적인 영화처럼 화면 뒤의 글자(의미)를 찾아도 안 된다. 즉 ‘에크리튀르 문화’로 간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 때 가장 궁금한 인물은, 홍상수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얼굴이고, 그 얼굴을 상상하고 즐거워하고 있을 홍상수의 얼굴이다.

    연극 연출가들은 자신이 만든 연극을 지켜보는 관객들의 반응을 극장 뒤편에서 즐겨 훔쳐본다. 태생 상 연극 연출가는 객석 한 구석에서 관객과 만나야 하는 숙명이지만, 영화감독은 이러한 숙명을 굳이 이행하지 않아도 좋을 터인데, 왠지 홍상수는 기꺼이 그 숙명을 기꺼이 감수하려는 인상이다. 그러니까 그는 많은 관객들과 함께 놀기를 원하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대중과 함께 하는 ‘대중감독’이다.


    6.

    지금까지 홍상수는 근대적 영화관(映畵觀)이나 작가주의 입장에서 다루어져왔다. 그의 영화가 기존의 영화와 다른 것은 더욱 치열한 완성도를 구가했기 때문이라고 믿어져왔다. 그래서 홍상수에게는 이 시대의 상업영화 감독이 하지 못했던 예술 작품을 다루는 감독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니곤 했다. 또한 홍상수의 영화가 기법과 형식면에서 많은 영화감독 지망생들에게 전범이 되어 오곤 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와 인식은 전폭적으로 재고되어야 한다. 홍상수의 영화는 발달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는 영화도 아니고, 세련된 촬영 형식이나 편집 기술을 선보인 경우도 아니다. 보통 그의 영화를 옹호하는 ‘일상’과 ‘날것 그대로’의 효과도 이제는 냉정하게 재평가해 볼 때가 되었다.


    홍상수의 영화가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홍상수의 영화가 기존의 영화를 바라보던 관객과, 질적으로 다른 관객들에게 둘러 싸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홍상수 개인으로서는 대단한 행운이지만, 한국 영화사를 통시한다면 다만 개인적인 행운으로만 치부하기 힘든 부분도 상당하다.

    일단 홍상수의 세대는, 영화에서 주는 행복을 마냥 만끽하는 ‘행복한 관객’을 벗어나는 시점에서 탄생했다. 또한 대다수의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대중감독의 개념이, 대중의 삶과 요구를 담아내는 대중감독의 개념으로 바뀌고 있는 시기에 서 있다. 영화 산업을 둘러싼 대자본 구도는 근대적 영화 개념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완결된 구조를 지니고, 보는 이들의 해석적 지침을 완벽하게 끌어낼 수 있는 영화에, 영화계 전체가 함몰되고 있다.

    그러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정해진 관람법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와타나베 히로시의 말처럼 예술 작품이 이제 해석이라는 도구에 종속된 나머지, 해석이라는 도구적 기능만 제외하면 예술이 사라져 버리는 현상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아니 어떻게 대처하고 이해해야 하는가?


    이제 영화를 본다는 관객들은 누구나 영화의 소재를 분류하고 양식적 특성으로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으며 주제와 세계관을 논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관객들은 어딘가에 있을 이러한 분류와 판단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예술의 미지의 영역을 갈구하지 않을 수 없다. 홍상수는 그러한 요구와 탐색의 결과로 대두된 감독이다. 이미 그 자체가 기존의 영화 읽기에 식상한 경우였고, 같은 의미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관객층과 같은 시대의 영화인이었다. 홍상수와 그의 동조자들은 근대적 영화 개념에 틈입하여 관객층을 바꾸고 영화의 환상을 제거하며 현실과의 차이를 무화시키고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거행되는 낯선 횡포를, 기꺼이 그리고 함께 구경하고자 했다.

    이 새로운 관람법은 잘 짜인 그리고 세련된 일관성을 구축한 기존의 방식과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러한 관람 방식을 ‘경박한 관람법’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경박한 관객들은, 의미가 아닌 이미지의 서핑을 즐길 태세가 되어 있고, 재미가 아닌 곤혹을 감수할 의지를 기꺼이 내비치고 있다. 그들에게 영화를 본다는 것은 현실과 일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일상의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 이상한 가학 증세를 즐긴다는 것이다. 결국 경박한 관객들이 홍상수를 만든 셈이다.
    김남석

    김남석

    1973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 김영진(영화평론가), 이상용(영화평론가)

    올해 응모작들은 전년도에 비해 상당한 교양과 이론적 식견을 갖춘 글이 많았다. 20,30대뿐만 아니라 다수의 40대 응모자들도 눈에 띄었다. 그만큼 영화비평의 저변이 넓어진 점을 짐작할 수 있어 반가웠다. 글의 대상이 된 영화들은 ‘괴물’ ‘왕의 남자’ ‘해변의 여인’ ‘시간’ ‘가족의 탄생’이 주를 이뤘다. 올해 100 편이 넘는 한국영화가 개봉됐지만 관심의 대상이 되는 작품은 되레 줄어드는 것은 아닐까.

    응모작들 상당수가 지젝과 들뢰즈의 이론에 기대어 있는 것도 영화비평의 화술들 역시 점점 협소해지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장문 비평의 경우 보통 수준 이상의 평론이 많았다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각을 드러내거나 안정된 문장의 호흡을 보여주는 것은 드물었다. 단평의 경우 정해진 매수를 지키지 않거나 용두사미로 끝나는 글들도 적지 않았다. 독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흡입력은 자기 생각에 매몰된 글의 호흡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심지어 영화를 보지 않은 독자에게도 자기 글을 이해시키려는 배려나 배짱 대신, 아카데미의 폐쇄성이나 자기도취의 한계를 어쩌지 못하는 글들은 아쉬움을 줬다.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것은 송효정 씨의 ‘이상한 가족 수학’과 장민수 씨의 ‘경박한 관객들’이다. 송효정씨는 ‘가족의 탄생’을 탄력 있는 문체로 풀어냈고, 장민수씨는 홍상수 영화에 대해 관객성의 문제를 끌어들이면서 달리 보기를 시도했다. 결국 정확하게 자기 관점을 전달하는 장민수 씨의 평론을 높이 사기로 했다. 단평의 경우에도 장민수씨의 글이 더 돋보였다. 김영진 영화평론가 이상용 영화평론가
  • 김남석

    김남석

    1973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영화는 나에게 세상이었고, 만남이었고, 때로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였으며,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 중 하나이다. 그러던 지금, 이 길에 새로운 의미 한 겹을 덧씌우려 한다. 나는 영화(이론)를 깊이 공부하지 못했다. 그래서 영화만을 위해 살겠다는 말도 함부로 못하겠다. 영화평론가가 되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 모르겠다. 다만 주어진 길을 덜 후회스럽게 걸어가고 싶다는 결심만 밝힐 수 있을 따름이다.

    신춘문예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안다. 하지만 정작 더 힘든 일은 그 다음이다. 지금까지는 마음껏 영화를 볼 수 있었지만, 이제 세상에 대해 무엇을 할 것인가도 조금쯤은 생각해야하기 때문이다. 책임 있는 발언을 해야 할 때도 올 것이다. 그 때마다 소신 있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내가 실망시켰던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서연호 윤석달 송명희 선생님, 새로운 길을 열어 준 지인들, 어려울 때 곁을 지켜준 사랑하는 이들과, 이 글에 대한 영감을 불어 넣어준 책들의 저자에게 감사한다. 그러고도 남은 기쁨이 있다면 서울에서 빈집을 지키고 계실 어머님께 모두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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