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변기

by  홍지현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ㅇ 등장인물 ㅡ 모두 남자

    * 젊은 수도승 ㅡ 수도원 산하의 고아원에서 자라남. 신심이 독실함.

    * 고위 수도승 1

    * 고위 수도승 2

    * 주교


    무대 중앙에 변기가 있다. 젊은 수도승은 왼쪽 끝에 단정히 무릎꿇고 앉는다. 기도하는 듯 하다. 조명은 젊은 수도승만을 집중적으로 비춘다. 변기의 모습은 살짝 보인다.

    젊은 수도승 : 신이시여. 당신은 저의 전부이십니다. 봄의 햇빛이 따스하게 눈부신 것도, 겨울의 눈이 하얗게 찬란한 것도 온전히 당신의 덕이십니다. 여름의 잎사귀가 바람에 살랑거리며 소곤거리며 반짝반짝 빛나는 것도, 가을에 열린 송알송알의 포도를 무심히 깨물었을 때 입 안에 가 득 퍼지는 그 향기ㅡ 그것도 온전히 당신의 덕이십니다. 신이시여. 당신이 계시지 않으면 저도 없습니다. 세상에 저를 내놓아 주신 것 도 당신이시고,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저를 길러주신 것도 당신이십 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당신을 평생동안 섬기기로 맹세해 수도승이 되었습니다. 부족한 점이 천가지 만가지도 넘지만, 운좋게도 주위 분 들께서 좋게 봐주시어 꽤 높은 위치에 자리하게 되었고, 드디어 내일 당신을 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떨리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복잡한 심경입니다. 피곤하기도 합니다. 이제 그만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겠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밤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늘의 별들이 손에 닿을 듯 많은 것도, 달이 조용히 빛나는 것도 온전히 당신의 덕이십니다.

    (조명 점점 어두워지면서 꺼진다)


    무대 중앙에 여전히 변기가 있다. 고위 수도승 1, 2 엄숙하게 서 있다. 젊은 수도승은 놀란 표정을 짓는다. 조명은 서서히 밝아진다. 등장인물들은 무대가 완전히 밝아질 때까지 정지 상태로 있는다.

    젊은 수도승 : 농담이시죠?

    고위 수도승 1 : 농담이라니.

    고위 수도승 2 : 불경한 소리 말게.

    젊은 수도승 : 이건, 이건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고위 수도승 1 : 신을 뵈었으면 마땅히 경배를 해야지,

    고위 수도승 2 : 농담이라니, 말도 안되는 말이라니.

    젊은 수도승 :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제게 신을 참배할 기회를 주신다 하셨지, 이런 변기..

    고위 수도승 1 : 지금, 변기라고 했나?

    고위 수도승 2 : 자네, 농담이 지나치군.

    고위 수도승 1 : 신께서 노하시겠네. 그 전에 어서 경배를 드리자구.

    고위 수도승 2 : 신은 자비로우시나 모독받길 원하진 않으시네.

    젊은 수도승 : (변기를 가리키며) 정말로, 정말로 이 분이 신이십니까?

    고위 수도승 1 : (주위를 둘러보며) 그러면, 딱히 다른 누가 있겠는가.

    고위 수도승 2 : 신심 진실하기로 이름난 자네가 오늘따라 왜 그러는가.

    고위 수도승 1 : 자네의 그 진실한 신심이,

    고위 수도승 2 : 자네의 그 신심의 진실함이,

    고위 수도승 1, 2 : 자네를 이 자리에서, 신을 두 눈으로 뵐 수 있게 도와준 것이 아니겠는가?

    젊은 수도승 : 저는 신을 믿습니다. (주먹을 쥐며) 굳게 믿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위 수도승 1 : 무엇을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인가?

    고위 수도승 2 : 이것이 진실일세.

    젊은 수도승 : 하지만, 하지만.... 사실, 두 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교단 본부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고위 수도승 1 : 그랬지.

    고위 수도승 2 : 수도원장께서 자네를 무척 아끼셨고.

    젊은 수도승 : 추운 겨울날 강보 한 장에 의지하여 바들바들 떨고 있는 저를 지금까지 거두어 주신 것도 신의 은총이십니다.

    고위 수도승 1 : 오, 신이시여.

    고위 수도승 2 : 오, 오.

    젊은 수도승 : 제가 5살 무렵때 심한 병에 걸렸을 때에도 아무 탈 없이 살아난 것도 신의 덕이십니다.

    고위 수도승 1 : 그렇지.

    고위 수도승 2 : 그렇고 말고.

    젊은 수도승 : 아마 고아원에서 자라날 수 없었다면 학교도 못가고 평생 변변찮은 일이나 맡아야했을 제가 학교도 가고 저 분이 신이시든 아니든, 이렇게 신을 직접 뵐 수 있는 위치까지 왔으니, 이도 신의 덕이십니다.

    고위 수도승 1 : 자네도 잘 알고 있구만.

    고위 수도승 2 : 알고 있으면서 왜 무례를 저지르고 있는가?

    젊은 수도승 : (흥분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신을 뵙고 싶었습니다. 그 분의 넘치는 영광, 은혜, 은총! 부모님이 없으셨던 제게 부모님이 되어 주신 분이 신이십니다. 항상 목말랐던, 어머님 아버님의 애정으로 절 키워주신 분이십니다. 그 분이 세상을 만드셨으니, 저 또한 만드 신 분이 아니십니까? 제 뿌리가 바로 그 분이 아니십니까?

    고위 수도승 1 : 맞는 말이지.

    고위 수도승 2 : 아, 그렇고 말고.

    젊은 수도승 : 그런데 이게 무엇입니까. 저는 며칠 전부터 신을 직접 뵐 수 있다는 생각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을 만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두 분은 저를 가지고 장난이나 치시다뇨, 이건 신이 아니라ㅡ

    고위 수도승 1 : (말을 끊으며) 쉿, 자네 신께서 보시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ㅡ

    젊은 수도승 : (말을 끊으며 큰 소리로) 이건 신이 아니라 변기입니다.

    고위 수도승 2 : 오, 맙소사.

    고위 수도승 1, 2 : (변기에다 절을 하며) 무례를 자비로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옵시고....

    젊은 수도승 : 한 가지 묻겠습니다.

    고위 수도승 1, 2 : (절을 하다말고 일어나 젊은 수도승을 돌아보며) 무엇을?

    젊은 수도승 : 태어나실 때부터 신의 곁에 있었던 것은 아니니, 이 변기, 아니 말씀대로 신이라고 합시다. 이 신을 처음 뵌 때가 있으셨을 텐데, 그 때 아무런 생각도 드시지 않으셨단 말씀이십니까? 당황하지도 않으셨어요?

    고위 수도승 1 : 달리 무슨 생각을 하겠나?

    고위 수도승 2 : 더 높으신 분들께서 신으로 여기시니 신으로 여겼지.

    고위 수도승 1, 2 : 모두가 이 분이 신이시라고 인정하고 있네.

    젊은 수도승 : (잠시 생각하다) 하지만, 경전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신께선 자신의 모습을 본따 인간을 창조하셨다'구요. 경전이 틀렸다는 말씀이십 니까?

    고위 수도승 1 : 물론 그렇지 않지. 다만,

    고위 수도승 2 : 경전은 '인간이 변기를 닮지 않았다' 고도 말하지 않았네.

    고위 수도승 1 : 자네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고위 수도승 2 : 인간이 변기를 닮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가?

    고위 수도승 1 : 자, 잘 보게.

    고위 수도승 1, 2 : (기도하며) 신께 직접 접촉하는 저희의 무례를 잠시동안 용서하여 주옵소서.

    고위 수도승 1 : (변기에서 오물 내려가는 곳을 가리키며) 이곳은 입.

    고위 수도승 2 : (물을 저장해 두는 곳을 가리키며) 이곳은 두뇌.

    고위 수도승 1 : (물 내리는 누르개를 가리키며) 이곳은 눈일세.

    고위 수도승 2 : (변기 밑의 본체를 가리키며) 그리고 이곳은 몸통이지.

    젊은 수도승 : 좋습니다. 두 분 말씀이 옳다고 가정합시다. 그렇다면 팔은 어디에 있습니까? 다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또 귀는 어디에 있습니까?

    고위 수도승 1 : 그건 너무 편협한 생각이군.

    고위 수도승 2 : 팔, 다리, 귀가 없으면 사람이 아닌가? 전쟁터에 나가보게. 팔 없고 다리 없고 귀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젊은 수도승 : 그렇다면, 지금 신의 완전성을 부정하고 계신 겁니까? 신이 팔이 없고 다리가 없으시다니. 신성모독을 하고 계신 것은 오히려 두 분이 십니다.

    고위 수도승 1 : 아니지. 신의 완전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위 수도승 2 : 인간의 힘으로 신을 파악하는 데는 확실히 무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야.

    고위 수도승 1 : 우리는 예를 들었을 뿐이네.

    고위 수도승 2 : 그 곳에 실제로 신의 신체부위가 존재하는지는 알 수가 없지.

    고위 수도승 1 : 우리가 머리일 것이라고 가리킨 곳에

    고위 수도승 2 : 신의 눈이 있으실 수도 있지.

    고위 수도승 1 : 하지만 어떻게 우리 같은 인간이, 신의 신체부위가 어디에 존재하는 지

    고위 수도승 2 : 어떻게 알 수 있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나.

    젊은 수도승 :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인정할 수 없어요! (자신의 팔을 붙잡으며) 팔은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어도 팔을 움직여 물건을 잡을 수 있어야 팔이 되는 것인데, (변기를 가리키며) 저 신에는 팔로 간주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움직일 수 있어보 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고위 수도승 1 : 그걸 자네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고위 수도승 2 : 신이 팔이 있으신데 움직이시지 않고 우리에게 숨기고 계신 것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나?

    젊은 수도승 : 그렇다면, '신께서 이 세계를 창조하셨나니'란 경전의 구절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변기를 가리키며) 신께서 이런 모습으로 이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고위 수도승 1 : 물론이네.

    고위 수도승 2 : 신께서는 전지전능 하시니까.

    젊은 수도승 : 어떻게, 대체 어떻게 말입니까?

    고위 수도승 1 : 좋아, 설명해주지.

    고위 수도승 2 : 많은 신학자들이 비밀리에 이 문제를 연구했지.

    고위 수도승 1 : 자네도 살아봤으니 알겠지.

    고위 수도승 2 : 물건이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먼지가 쌓이는 법이거든.

    고위 수도승 1 : 마찬가지로 신의 안에 있는 (변기의 물이 담긴 곳을 손을 모아 가리키며) 이 성스러운 성수에도 날이 가면 갈수록 먼지가 쌓인다네.

    고위 수도승 2 : 이 먼지가 일정한 정도 이상 쌓여 무거워 지게 되면, 자동적으로 성수가 먼지를 휩싸고 나가 우리들의 세계로 뿌려지지.

    고위 수도승 1 : 그러면 새로운 생명체들이 태어나게 되네.

    고위 수도승 2 :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이런 방법으로 태어나게 되었네.

    젊은 수도승 : 저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습니다. 말씀대로라면, 어째서 아기들은 한날 한시에 태어나지 않고 제각기 다른 시간에 들쭉날쭉 태어나는 것 입니까?

    고위 수도승 1 : 솔직히 말해서, 자네는 별로 영리하지 못하군.

    고위 수도승 2 : 성수가 내려갈 때도, 먼저 내려가는 먼지가 있고, 나중에 내려가는 먼지가 있는 법이지.

    고위 수도승 1 : 그리고 하루에 한 번씩 저절로 변기의 물이 내려가지.

    고위 수도승 2 : 그렇게 내려간 물에 들어있는 먼지는 다음날 태어나는 생명들의 씨앗이 되고.

    젊은 수도승 : (변기의 물을 빤히 쳐다보며) 하지만 먼지는 보이지 않는데요.

    고위 수도승 1 : 먼지가 너무 작아서 그런 것이네.

    고위 수도승 2 : 이 세상 모든 것들 생명의 씨앗을 다 담으려면 먼지의 크기들은 작을 수밖에 없지.

    젊은 수도승 : 그렇다면, 그렇다면... 다 같은 먼지덩어리에서 태어난다면, 인간과 다른 동물들은 왜 하필이면 그 모습으로 태어난 것입니까?

    고위 수도승 1 : 그야, 먼지의 크기와 모양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이지.

    고위 수도승 2 : 해변가의 모래알들도 제각기 다르다네.

    고위 수도승 1 : 생물 수만가지 종류마다 해당되는 먼지의 크기가 모두 다르네. 같은 정도의 크기 안에서 먼지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각 개체의 특징도 달라지는 거고.

    고위 수도승 2 : 이처럼 신의 섭리는 놀라우시네.

    고위 수도승 1, 2 : 오, 신이시여.

    젊은 수도승 : .....좋습니다. 그렇다고 치자구요. 하지만, 왜 신자들을 속이고 계십니까?

    고위 수도승 1 : 신자들을 속이다니?

    고위 수도승 2 : 제멋대로 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무리들이 불경스러울 뿐이지.

    고위 수도승 1 : 우린 신자들에게, 신이 인간과 완벽히 똑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없네.

    고위 수도승 2 : 사실 완벽하신 신께서 하급인 인간과 똑같이 같아서도 안되는 것이고.

    젊은 수도승 : 좋습니다, 좋아요. 하지만 적어도, 두 분이 거짓말을 하며 신자들을 속이신 것은 아니더라도, 왜 신이 변기 모양을 하고 있다고 솔직히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고위 수도승 1 : 솔직히 말하지 않았다니? 지금 우리들을 거짓말쟁이 취급하는 건가? 물어보는 사람도 없는데 굳이 말해야 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 가?

    고위 수도승 2 : 신은 비밀스럽고도 고귀하신 분이라, 여러 신자들의 입에 그분을 오르내리게 하는 것은 죄악이네.

    고위 수도승 1 : 보통 사람들의 입에서 어떤 존재가 자주 오르내리면 오르내릴 수록

    고위 수도승 2 : 그 존재의 위엄은 땅에 떨어지고 마네.

    젊은 수도승 : 신의 위엄을 땅에 떨어뜨리고 계신 것은 두 분이 아닙니까. 어떻게 위대하고 위대하신 신께서 이 세상의 찌꺼기, 배설물을 받아 내시는 도구의 모습을 닮으셨을 수 있습니까?

    고위 수도승 1 : (화를 내며)자네 말이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자네가 바친 시간의 몇 배의 세월을 신을 위해 바쳐왔어. 그런데 우리더러 신의 위엄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겐가?

    고위 수도승 2 : 그리고 신께서 말씀하셨네. 나는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임한다 ㅡ라고.

    젊은 수도승 : 이 사실이 새나가는 날이면 오히려 교단이 끝장입니다. 우리의 전지전능하신 신을 믿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당당하고 떳떳하시다 면, 왜 솔직히 신자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혹시 신께선 실제로 계시지 않기 때문에 저에게ㅡ

    고위 수도승 1 : (말을 끊으며) 그만하면 되었네. 말조심하게.

    고위 수도승 2 : 도대체 왜 자네에게 신을 뵐 자격을 주었는지 모르겠어.

    고위 수도승 1 : 그 진실하다던 신심은 어디에다 팔아먹었나?

    고위 수도승 2 : 자넨 자격 박탈이야!

    젊은 수도승 : 믿을 수가 없어요. 이 변기가 신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이 변기가 신이라고 생각하느니 차라리 신이 계시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편이 마음 편하겠습니다.

    고위 수도승 1 : 지금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겐가?

    고위 수도승 2 : 그것도 신의 면전 앞에서, 지독하군.

    고위 수도승 1 : 자넬 키워주신 부모님과 같은 분이 존재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겐가?

    고위 수도승 2 : 은혜도 모르는 자.

    젊은 수도승 : 그렇다면 한 번 말씀해 보세요. 왜 이 변기가 신인지.

    고위 수도승 1 : (화를 내며) 그 무례한 말 어떻게 못하겠나!

    고위 수도승 2 : 이대로 끝날 일이 아닌 것 같으이.

    고위 수도승 1 : 자네같은 젊은 수도승들 중에서 신을 뵈고 깜짝 놀라는 사람은 있었지만

    고위 수도승 2 : 자네, 더 이상 묵과할 수가 없네.

    고위 수도승 1 : 신을 뵐 수 있는 자네의 자격에 대해

    고위 수도승 2 : 주교님과 상의해 보아야겠네.

    젊은 수도승 : 제 교육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저는 신을 굳게 믿습니다. 다 만 이 변기가 위대하신 신의 본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뿐입니다.


    주교 등장한다. 주교 변기에게 예를 표한다. 젊은 수도승, 고위 수도승 1, 2 주교에게 예를 표한다.


    주 교 : 무슨 일이십니까, 두 분.

    고위 수도승 1 : 유감스럽게도 이 젊은 수도승의

    고위 수도승 2 : 자격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함입니다.

    주 교 : 자격이라 함은...?

    고위 수도승 1 : 우리의 위대하신

    고위 수도승 2 : 신을 뵐 수 있는 자격말입니다.

    주 교 : 저 수도승이 자격을 얻은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고 기억하는데.

    고위 수도승 1 :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고위 수도승 2 : 어제의 일입니다.

    주 교 : 음.. 그렇군. 그런데 불과 어제 내려준 자격을 오늘 빼앗겠다니, 저 젊은 수도승이 무슨 중대한 잘못이라도 저질렀소이까?

    고위 수도승 1 : 그렇습니다, 예하.

    고위 수도승 2 : 불행하게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고위 수도승 1 : 저 젊은 수도승이, 우리의 신을 부정했습니다.

    주 교 : 오호...?

    고위 수도승 2 : 그것도 신을 뵌 자리에서 말입니다.

    젊은 수도승 : 신을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저 변기, 아니 신께선 변기 모양을 하지 않으리라 믿는 것뿐입니다. 그것뿐입니다.

    고위 수도승 1 : 자네, 지금 모순되는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르겠나?

    고위 수도승 2 : 자네는 너무 오만하네, 그게 문제야.

    고위 수도승 1 : 실지로 위대하신 신의 모습에 대해 우리 인간이 왈가왈부 할 자격조차 있을지 모르겠네.

    고위 수도승 2 : 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시든 조용히 수용하는 것, 그것이 수도 승의 자세네.

    젊은 수도승 : 그러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두 분, 아니 전체 교단의 분들께선 어째 서 저 변기가 신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증거가 있습니까? 저 변기가 기적을 일으킨 적이라도 있습니까?

    고위 수도승 1 : 자네는 보아하니 과학을 했으면 좋았겠군.

    고위 수도승 2 : 수도승으로서의 기본 자세는 의심이 아니라 경외심이지.

    젊은 수도승 : 저절로 물이 내려간 적은 없습니까? 아무도 물을 내리지 않았어두요. (변기를 가리키며) 호위병들이 주위를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물이 내려가는 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했답니까?

    고위 수도승 1 : 좋아, 대답해 주지. 호위병들은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하네. 이건 내가 젊은 시절 직접 보초를 서봤기에 알지.

    고위 수도승 2 : 하지만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물이 내려가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가 될 수도 없는 것이네.

    젊은 수도승 : 아까는 분명 물이 내려가면서 떠내려간 먼지들이 이 세상 생명들의 씨앗이 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고위 수도승 1 : 몇 번을 말해야 알겠나. 우리는 신에 대해 알 필요가 없네.

    고위 수도승 2 : 우리가 할 일은 신을 잘 모시는 것, 그뿐이지.

    고위 수도승 1 : 신을 미처 믿지 못한 불쌍한 중생들을 구제해 주기만 하면 우리의 역할은 끝이야.

    고위 수도승 2 : 신이 어떤 원리로 움직이시는지, 전혀 탐구할 필요가 없네. 해서도 안 되는 것이고.

    주 교 : 자, 두 분의 의견도 알았고, 젊은이의 의견도 알았습니다. 우선 내가 젊은이에게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젊은 수도승 : 말씀하십시오.

    주 교 : 젊은이의 주장대로, 이 존재가 변기에 불과할 뿐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하지만, 이 변기의 존재 자체가 기적이라는 생각은 해 보지 아니했습니까?

    젊은 수도승 : 그것은 어째서 그렇습니까?

    주 교 : 답은 간단합니다. 선지자께서 다녀가신 이후로 창시된 우리 종교는 도대체 몇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젊은 수도승 : 정확히 천 오백년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주 교 : 그것 보세요. 이 존재가 변기를 닮았다는 것만으로 기적이 아닙니까? 변기가 발명된 지 몇 년이나 지났습니까? 한 몇 십년이나 되었나요. 기록에 의하면 이 존재를 우리 교단에서는 창시된 후부터 성심성의껏 신으로 모셔 왔습니다. 천 오백년 전부터 불과 몇 십년밖에 안 된 발명품이 존재하 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위 수도승 1 : 주교님의 말씀은 참으로 옳으십니다.

    젊은 수도승 : 그것은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옛날에도 변기는 없었던 것은 아니지요. 그리고 변기의 형태도 옛날과 지금과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옛날에도 변기는 이런 형태로 존재했었습니다.

    주 교 : 적어도 물로 내려가게 했지는 않았겠지요.

    젊은 수도승 : 안타깝게도 우리 종교가 창시되기 이전에도 물로 배설물을 내려보내는 변기가 존재했었습니다, 주교님. 주교님의 근거는 틀린 것입니다.

    주 교 : (할 말이 없자 망설이다) 자네는 정말로 건방지군. 그렇게 함부로 말해도 되는 건가.

    고위 수도승 1 : 그것 보십시오.

    고위 수도승 2 : 그냥 묵과해서는 안 될 젊은이입니다.

    주 교 :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보겠네. 이 존재가 자네 말대로 변기가 아니라면, 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나?

    젊은 수도승 : 그럴 수도 있겠지요.

    주 교 : 그렇다면 한 번 시험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젊은 수도승 : 무엇을, 어떻게 시험해보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주 교 : 자네 말대로, 이 변기가 변기일 뿐인지 아니면 신이신지 알아보면 된다는 이야기네.

    젊은 수도승 :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주 교 : 자네도 지금까지 인간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근거로 삼아서 (변기를 가리키며) 이 신을 부정하고 비판하지 않았나? 불경한 언어를 마음껏 사용하며 말이야. 그러니 시험을 해 보자는 걸세.

    고위 수도승 1 : 좋습니다. 저는 찬성입니다.

    고위 수도승 2 :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젊은이에게 신의 위대함을 스스로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고위 수도승 1 : 저는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고위 수도승 2를 가리키며) 이 사람과 함께 매일 신의 본체를 깨끗이 닦곤 하였습니다. 더러운 수건으론 신의 본체를 닦을 수 없다 하여 매일 아침마다 몇 십개의 새 수건을 가져다 놓고 꼭 한 번씩만 닦고 그 수건들을 전부 태워버렸습니다.

    고위 수도승 2 : 만일 저 젊은이의 주장대로 저희가 닦아온 것이 신의 본체가 아니라 변기라면 저희의 인생은 무엇이 되는 겁니까. 저 젊은이는 저 희들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신 앞에서 불경스러운 마음이지만, 저 젊은이를 설득시키기 위해선 무엇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주 교 : 두 분의 주장에 공감하네. 나 역시 신의 본체를 닦는 일을 맡은 적이 있어 그 고충을 십분 이해하고 있네.

    젊은 수도승 : 하지만 주교님, 신인지 변기인지 어떻게 시험하실 생각이십니까?

    주 교 : 변기란 무엇인가?

    젊은 수도승 : 더러운 배설물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우는 것입니다.

    주 교 : 맞네. 저 자네 말대로라면 변기를 닮은 존재가 더러운 배설물을 옮기는지 아닌지를 알아보면 되는 문제가 아닌가? 그러면 저 존재가 자네 말대로 변기인지, 아니면 신인지 알 수 있잖은가.

    젊은 수도승 : 그렇다면 설마,

    주 교 : 그렇지. 배설물을 넣어보고 물을 내려보면 알 수 있지. 특히 변기는 인간의 배설물을 내려보내는 존재이니, 배설물은 꼭 인간의 것이어야만 하네.

    젊은 수도승 : 하지만..... 지금 설마 농담하시는 겁니까?

    주 교 : 전혀, 절대로.

    고위 수도승 1 : 저도 동의합니다.

    고위 수도승 2 : 저 건방진 젊은 수도승을 정신차리게 하기 위해서라면 신께서도 이해해 주실 것입니다.

    젊은 수도승 : 하지만... 그래도.... 어쩌면 신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주 교 : (벌컥 화를 내며) 자네는 지금까지 신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여러 사람 피 곤하게 만들지 않았나.

    고위 수도승 1 : 이제와서 발뺌하는 겐가?

    고위 수도승 2 : 자네 말대로 신이 아니라 변기라면, 배설물이 그냥 내려갈 텐데 무엇이 문제인가?

    젊은 수도승 : 지금까지 세 분께선 이 존재가 변기가 아니라 신이라고 주장해 오셨 는데 어떻게 신이라고 생각하는 분에게 배설물을 묻혀보자고 주장하 실 수가 있는 겁니까?

    고위 수도승 1 : 그러니까 말하지 않았나.

    고위 수도승 2 : 건방진 자네를 혼내주기 위해서라면 신께서도 이해하실 거라고.

    주 교 : 두 분은 너무 흥분하실 필요 없네. 흥분해 봤자 더 우스워지기만 할 뿐. 자, 그럼 시작해보지.

    젊은 수도승 :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주 교 : 어째서지?

    젊은 수도승 : 좋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변기가 아니라 신입니다. 제 주장을 취소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시험은..

    고위 수도승 1 : 아니, 따져볼 건 따져 봐야겠지.

    고위 수도승 2 : 너무 늦었네.

    젊은 수도승 : 신일 가능성도 높지 않습니까? 신께서는 저를 낳으시고 길러주신 분입니다. 신이 계시지 않았다면 저도 없습니다. 저 때문에 신에게 배 설물을 묻히기보단 차라리 제가 자격도 박탈당하고 모든 멍에를 안고 가는 편이 낫겠습니다.

    주 교 : 자네는 정말로 알 수 없는 사람이군.

    고위 수도승 1 : 언제는 절대 신일 리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나?

    고위 수도승 2 :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말을 쉽게 바꿀 수가 있나?

    주 교 : 자, 그럼 준비해주게.

    고위 수도승 1 : 알겠습니다.


    고위 수도승 1 변기에 앉는다. 고위 수도승 1 힘을 준다.


    젊은 수도승 : 아니, 안 됩니다. 다 제 잘못이니, 이제 그만 하세요.

    주 교 :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아느니. 옳고 그른 것도 시험을 해 봐야 아느니.

    젊은 수도승 : 수도승에게 필요한 자세는 의심이 아니라 경외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두 분이 아니십니까?

    고위 수도승 1 : 나는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는가? 자네처럼 신을 의심하는 무리들에게 신의 위엄을 다시 세우고자 함이네.

    주 교 : 이보시게. 아직인가?

    고위 수도승 1 : 제가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아침에 화장실을 들르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고위 수도승 2 : 신의 위엄을 되찾느라 고생하시는군.

    고위 수도승 1 : (힘을 주는 표정을 지으며) 음... 음... 하...

    주 교 : 다 되었나?

    고위 수도승 1 : 예. (일어선다)

    젊은 수도승 : 이건 말도 안됩니다. 절대로.

    고위 수도승 2 : 자네 원하던 대로 확실한 증거를 알아보고자 함이 아닌가? 아까부터 궁시렁 궁시렁 뭔 불만이 그렇게 많나?

    젊은 수도승 : 그래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주장을 취소한다고요. 그랬는데도 세 분께서 이런 시험을 강행하지 않았습니까. 이건 말도 안 됩니 다, 안 되고 말고요.

    고위 수도승 1 : (화를 내며) 자네는 좀 조용히 있게!

    주 교 : 자, 그럼 한 번 물을 내려보도록 하지.

    고위 수도승 1 : 예, 알겠습니다.

    젊은 수도승 : (고위 수도승 1을 막으려고 하며) 안 됩니다!

    고위 수도승 1 : 이제 와서 무어이 두렵겠는가? 배설물을 묻혔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네. 신의 자비로우시다는 증거야. (젊은 수도승을 밀쳐 내며) 이거 놓게.


    고위 수도승 1 물을 내린다. 물 내려가는 소리 "쏴아ㅡ"가 크게 난다. 일동 잠시 정지해 있는다. 정지한 채 변기를 본다. 인물들이 조금씩 조심스럽게 움직이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천둥소리가 난다. 조명은 켜졌다 꺼졌다 함으로써 번개가 치는 상황을 표현한다.

    모두들 : 으아악


    모두들 비명지르며 머리를 감싸고 몸을 웅크린다. 다들 눈에 안 띄게 노력한다. 변기에게 절을 한다.

    주 교 : 자네, 이제 저 분이 신이시란 걸 믿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젊은 수도승 : (두려운 듯한 목소리로) 물론이죠, 그렇고 말고요.

    고위 수도승 1 : 신이시여, 저를 용서해주세요. 악한 뜻은 없었습니다.

    고위 수도승 2 : 아, 우리를 태어나게 하신 근본이시여. 주교님, 신께서 노하신 것같습니다. 이러다 우리들 죄다 죽겠습니다. 경배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위 수도승 1 : (젊은 수도승에게 손가락질하며) 자네가 의심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게 아닌가?

    젊은 수도승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 신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고위 수도승 2 :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신께서 노하신 것 같아요. 경배를 드립시다. 어서요.

    주 교 : 좋네. 그렇게 하자구.


    모두들 일어선다. 변기에게 계속 절을 하기 시작한다.

    고위 수도승 2 : (절을 멈추고) 그러고 보니 오늘 원래 천둥번개가 친다고 기상청에서 발표했던 걸 뉴스에서 봤었던 것 같은데요.

    젊은 수도승 : 이러시면 안 되요. 신이 정말로 노하실 거에요. 어서 경배하자구요.


    모두들 : (절을 계속하며) 신은 위대하십니다ㅡ 신은 자비로우십니다ㅡ 신은 저희들에게 크나큰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ㅡ


    조명 점점 어두워지며 암전.

    소리 삽입 “젊은 수도승은 몇 년 뒤 높은 자리로 승진했다.”
    홍지현

    홍지현

    1988년 서울 출생

    경기도 여주여중 졸, 대입검정고시합격

    성균관대 약학부 1학년 휴학 중

  • 한태숙(연출가), 김태웅(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연출가)

    선택의 고민은 기뻤다. 아니, 행복했다.
    100 여 편이 넘는 응모작이 그려내는 세계 안에서 행복한 꿈을 꿀 수 있는 시간이었다. 반짝이는 사유를, 새로운 가능성을 만나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자본을 숭앙하는 이 시대에 연극에, 희곡창작에 매달리는 영혼은 얼마나 무력한가? 아니 얼마나 위대한가?

    응모작 중 강경은의 ‘마중’, 김지훈의 ‘설명서 클럽 종신회원’, 김특영의 ‘잠’, 홍지현의 ‘변기’, 주혁준의 ‘허수아비’, 최호종의 ‘돼지들의 아침식사’가 최종 거론되었다. 이들 희곡은 당선작이 될 저마다의 장점과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마중’은 다소간의 상투성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깊이 있고 성숙한 의식이 돋보였다. ‘설명서 클럽 종신회원’은 독창적인 주제와 극을 끌어가는 솜씨가 돋보였으나 무리한 설정과 대사의 사변성이 문제였다. ‘잠’은 현실과 환상의 설득력이 있는 결합이 좋았으나 상징이 지닌 자폐성이 지적되었다. ‘변기’는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반전과 아이러니의 묘미를 살렸고, 무엇보다 ‘신=변기’ 라는 설정이 지닌 풍자의 폭발성이 좋았다. 그러나 반전이 다소 무리라는 평도 받았다. ‘허수아비’는 대사나 지문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오래 공 들인 흔적이 쉽게 발견됐다. 역사적 상상력이 돋보였다. ‘돼지들의 아침식사’는 관계의 인위적 설정에도 불구하고 상징의 그로테스크함을 통해 자본의 폭식성, 어처구니없음을 코믹하게 그려낸 작품이었다.

    결국, 심사위원들은 ‘변기’와 ‘허수아비’ 두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 홍지현

    홍지현

    1988년 서울 출생

    경기도 여주여중 졸, 대입검정고시합격

    성균관대 약학부 1학년 휴학 중

    어린 나이로 당선이 되었습니다. 젊은 날에 일찍 지쳐 시들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니, 절대로 그러지 않겠습니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습니다. 고대 그리스나, 중세 영국의 사회제도는 지금의 대한민국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하지만 저는 오이디푸스를 동정하고, 줄리엣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그것은 정말로 신기한 일입니다.

    하늘이 있고 달이 있습니다. 별이 있고 바람이 있습니다. 소리가 있고 쓰레기가 있습니다. 낙엽이 있고 택배 배달 아저씨도 있습니다. 지하철이 있고 친구가 있습니다. 우정이 있고 구멍가게가 있습니다. 김광섭 시인의 말마따나, 사람이 산다는 것입니다. 이는 정말로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모두 아름답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지금 창 밖에는 아무래도 추운 바람과 차가운 공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 제가 사랑하는 사람. 저를 고마워하는 사람, 제가 고마워하는 사람. 저를 미워하는 사람, 제가 미워했던 사람. 저를 원망하는 사람, 제가 원망했던 사람. 저를 싫어하는 사람, 제가 싫어했던 사람.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어떻게든 마주쳤던 사람들, 오늘 아침 버스에서 본 해해 웃으셨던 할아버지까지, 그리고 제가 미처 만나지 못했던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모두들 행복한 한 해, 더 나아가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그러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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