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중간자 작가의 탄생(『핑퐁』)

by  이광진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박민규의 신작 『핑퐁』(창비, 2006)은 집단 따돌림과 구타에 시달리는 못과 모아이가 탁구를 배우면서 어른이 된다는, 지극히 평범한 성장소설이다. 그럴 리가. 사실은 우주로부터 경고를 받은 인류가 두 소년들에 의해 포맷된다는, 어이없이 끔찍한 공상과학소설이다. 박민규의 지구는 시뮬라시옹, 즉 프로그래밍 된 세계이다. 따라서 지구의 생성원리는 복제된 이미지들이다. 지구는 한 조각의 카스테라로 반죽되거나, 한 마리의 거대한 개복치로 납작해지거나, 너구리나 대왕오징어 따위의 외계생명체가 출몰하는 모형의 세계이다. 하나의 세기와 세계를 정리하고 무화시킨 냉장고가 스스르 열리듯이, 세계의 원형이며 집약인 탁구대가 못과 모아이 앞에 슬그머니 놓인다.

    박민규의 주인공들은 모두 좀 덜 자란 사람들이다. 육체적 발육이나 정신적 성장의 의미만이 아니라, 사회적 의미에서 조금 쳐지는 사람들인 것이다. 세계를 끌고 나가는 건 2퍼센트라던데, 못과 모아이는 나머지 98퍼센트에마저도 들지 못하는 인간이다. “누락도 아니고, 소외도 아니다. 어떤 표현도 어떤 동의도 한 적 없”다.[핑퐁, 19쪽] 단지 세상이 그들을 ‘깜박’했을 뿐이다. “세상을 박해하는” 2퍼센트의 “프로”들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한계레신문사, 2003), 243쪽] 그렇다고 듀스포인트의 세상을 1할 2푼 5리의 승률로 살아가는 98퍼센트가 될 의지도 없었다. 어느 날 운명처럼 ‘아마추어 탁구인’으로 거듭난 못과 모아이는 ‘비지구인’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찾게 된다. 세계가 강요하는 “자기만의 산수”는 그렇다 쳐도, 자신들을 ‘깜박’한 ‘지구의 수학’에 굴복할 순 없었던 것이다.[카스테라(문학동네, 2005), 73쪽]

    상상력에도 문법이 있고 검열이 있다. 마찬가지로 복제 세계에도 규율이 있고 감시자가 있다. 지구를 관리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언제나 수상해하고 궁금해하는 ‘관계자 외 출입이 금지된 방’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어쩌면 “아메리칸 히어로들”이 세계를 모니터링 하는 “정의의 본부, 중앙통제실”일 지도 모른다.[지구영웅전설(문학동네, 2003), 38-40쪽] 박민규의 인물들은 그 방에 들어가 보고 싶어한다. 이를테면 “협회의 〈관계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카스테라, 269쪽] 세상의 비밀을 알고 있는 관계자란 “몸에서 사람의 귀가 자라는 쥐”와 같은 중간자이며,[카스테라, 273쪽] “여기, 저기, 그리고 거기”의 문지방에 발을 걸친 경계인이다.[핑퐁, 213쪽] 니체(신의 대행자)는 짜라투스트라의 목소리(신의 관계자)를 빌어 신의 죽음을 선언하고, 세 가지 변용을 통해 초인의 탄생과정을 설명했다. 타율적인 낙타, 자율적이되 고독한 사자, 긍정적이고 궁극적인 어린아이가 그것이다. 여기서 못과 모아이는 낙타의 단계(잉여인간), 사자의 단계(탁구인), 초인의 단계(비지구인)를 거치는 일인칭의 인간형을 환유하며, 세끄라탱은 우주적 비밀과 세계의 허상을 폭로하는 삼인칭의 짜라투스트라를 은유한다.

    박민규는 스스로를 신이나 니체보다는 짜라투스트라로 여긴다. 말하자면, 세끄라탱은 소설 속에 틈입해서 하고싶은 말은 많지만, 소설 밖에서 뒷짐지고 ‘쿨한 포즈’를 취하고도 싶은 작가의 소설적 장치라 할 수 있다. 작가 관찰자 시점(탁구 선생)과 전지적 작가 시점(우주의 관계자)에 두루 충실한 세끄라탱은 ‘중간자 작가 시점’을 대변한다. ‘낮말을 듣는 새 밤말을 듣는 쥐’로 자기를 명명하고 “탁구계(卓球界)의 간섭자”로서 자기를 선언하면서, 세끄라탱은 두 시점을 교묘하게 혼합하고 교차시킨다.[핑퐁, 119쪽] 그의 존재 자체가 작가의 외피이며 서술전략인 셈이다. 결국 세끄라탱은 인류의 운명을 담보로 탁구 시합을 주관하고, 비지구인들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지구/소설의 시뮬라시옹을 유지할 것인가 삭제할 것인가. 소설의 안과 밖에 두 다리를 걸친 작가는 소설 밖 독자에게 결정권을 떠넘긴다. 지구/소설이야 어찌 되더라도 당신은 살아남을 것이라 위로하면서. 고마워, 과연 박민규야.
    이광진

    이광진

    1976년 서울 출생

    중앙대 불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파리8대학 불문과 DEA 학위 및 박사 과정

  • 오생근(평론가·서울대 교수), 최동호(평론가·고려대 교수)

    응모작 중에서 이광진의 ‘비로소 내가 되며 진실로 집에 있는 듯이’(배수아론), 이도연의 ‘<길없는 길> 그 시적 사유의 여정: 이성복론’, 황현진의 ‘언어의 엘리시움을 향한 관념의 탈주기’(배수아의 ‘독학자’론), 허연실의 ‘2000년대 <난쏘공>의 근황 - 박민규론’, 김운욱의 ‘몸과 우주의 역동적 카니발리즘-김혜순론’ 등을 본격적인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중 주제의 집중도와 비평적 논리의 밀도가 떨어지거나 비평 방법으로 동원된 지식의 이해와 분석의 설득력이 부족한 작품 등을 제외하니 이광진의 ‘배수아론’과 이도연의 ‘이성복론’이 남게 되었다. 심사위원들은 이 두 작품 중에서 어느 쪽을 당선작으로 결정해도 좋다는 열린 마음으로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논의하였다. 두 작품은 비평적 시각이나 방법, 논리와 문체 등에서 비슷한 수준을 보인 것이 사실이다.

    심사위원들은 오랜 논의 끝에 이광진의 ‘배수아론’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이 작품이 감각적이고 가독성 있는 문체를 통해 좀더 새롭고 깊이 있는 시각과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도연의 ‘이성복론’이 기존의 이성복론과 비교해 볼 때 새로운 점이 부족하다는 것도 상대편을 결정하게 만든 한 요인이었다. 이광진의 ‘배수아론’에서 보이는 소설에 대한 섬세한 분석과 평가, 정확한 지식의 표현과 균형 잡힌 작품분석, 유연하고 탄탄한 문장 등도 장점으로 꼽을 수 있는 요소다. 그러나 간혹 보이는 성급한 단정적 평가는 주의해야 할 점이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길 바란다.
  • 이광진

    이광진

    1976년 서울 출생

    중앙대 불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파리8대학 불문과 DEA 학위 및 박사 과정

    나는 저녁형 인간이다. 늦은 밤 읽는 책과 새벽에 꾸는 꿈 때문이다. 꿈을 글로 쓰고 싶지만, 꿈의 문법은 매번 글의 운명 아래로 미끄러진다.

    배수아의 주인공은 외국어로 언어의 틈새를 목도했다는데, 나는 모국어로 그 운명적인 틈새에 빠져버렸다. 처음 외방에서 과제보고서와 논문을 쓸 때 우리말로 먼저 생각하고 외국말로 번역했다. 그러면서 우리말식의 생각을 외국말로 써내는 일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았다(이럴 때 나는 모국어에도 외국어에도 이방인이다).

    우리말의 표현력은 완벽할 정도로 명징하고 세목 또한 한없이 풍요로워서, 배우고 익히는 데 끝이 없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은 하진 않았지만 소박한 꿈을 다 담아내고 싶은 욕심은 버릴 수 없다. 언젠가는 글이 내 꿈을 용납해주리라 믿는다.

    사랑하는 이주호 윤미선님, 이은정 이애리 이광용, 조카들, 어여쁜 벗들(하나라도 빠뜨릴까 소중한 이름들을 쓰지 못한다), 모교의 박영근 김순경 장근상 윤우열 서명수 이산호 김예숙 선생님, 파리의 피에르 바야드 선생님, 그리고 미진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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