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장인물
이장, 길수부친 상출, 길수모친, 길수, 중길, 종국, 상구, 송씨, 병두에미, 경자네, 수복네, 낚시꾼 1, 2, 그 외 마을사람들
○ 무대
여느 시골에 있을법한 마을입구.
세 갈래 길 중간에 큰 은행나무가 섰고 그 앞으로 평상이 놓였다.
한켠에 언제 말랐는지 모를 우물터가 흉물스럽다.
1. 기운
까치울음소리 들리더니 멀리 흰 까치 한 마리 훌쩍 날아간다.
종 국: 저거이 까치 아닌가.
상 구: 허연 까치가 있소. 첨 듣는구마.
종 국: 돌연변이네 저거. 또 우리마을 일 나것다. 큰 일 나것어.
상 구: 허연 까치랑 백사는 뭔 차이요.
종 국: 안꼴 점쟁이 송가 입 닳는 소리 못들었냐.
상 구: 10년 넘어 지난 일 왜 자꾸 들춘대요.
종 국: 비행기 하늘 날고 땅속으로 기차 다니믄 뭐하나. 옛것 죄 버리고는 허울좋은 껍데기 벙어리 맞장구치는 얘기여.
상 구: 그런다고 베 버린 나무 살아나요.
종 국: 보통나무냐. 우리마을 수호신이여. 조금만 비틀면 될걸 가지고 그냥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심보 어서 나와. 군사독재 끝난 지가 언젠데.
상 구: 큰 길 뚫렸다 제일 좋아했던 사람 성님이요.
종 국: 여서 지리산이 지척이냐. 엎어지면 코 닿아? 거그 등산객이 뭔 지랄났다 저그 뒷산서 죽냐 이 말이여.
상 구: 길 잃고 헤매다 보믄 어딜 못가겄소. 일만 터지믄 당나무 노염이다 헌소리 또 하고― 이제 그만 좀 허시오. 종 국: 양봉하던 윤가 말벌 쏘여 비명횡사 할 때만 해도 이런 생각 털끝만큼도 없었다 나. 상출성님 약초 캐러 산에 오른 지 1년 다 되느만 살았는지 죽었는지 종무소식이여. 무서서 산에 오를 엄두 나. 뭔가 대책을 세워야지 이러다 동네사람 죄 고향 등지게 생겨부렀다.
상 구: 객사한 등산객 발견한 사람 성님이오.
종 국: 허구헌 날 불러내 헌소리 또 하고. 답답하믄 지들이 오던가.
상 구: 여 있을라우.
종 국: 경 치고도 정신 못차렸냐. 달랑 남은 집 날려야 시원허것어.
상 구: 그런 소리 마시오. 화투장 끊은 지 언젠데. 저 독재 넘어 낚시터 안있소. 주인 바뀌고 외지사람들 줄을 선다네요. 종 국: 조화네. 향어 잉어 그리 풀어도 파리만 날리더만.
상 구: 소문에 거그 주인이 대통령하고 아주 가깝데요.
종 국: 어찌 가까워.
상 구: 대통령하고 악수하는 사진 대문짝만하게 걸렸으니 보통사이 겄어요.
종 국: 악수 두 번 했단 국무총리 되것다.
상 구: 파리 날리는 거랑 주인 바뀐거랑 뭔 상관입디여. 아니 땐 굴뚝 연기 나는 것 봤소.
종 국: 혀서 눈도장 찍게. 군수라도 출마 헐라냐.
상 구: 거그 회 맛이 일품이요. 잡일이라도 거들면 몇 마리 거저 얻어요. 안가실라우.
종 국: 거렁뱅이여. 읍내 나가 사먹고 말지.
상 구: 일석이조라 안했소. 눈도장 찍어 나쁠 것도 없고. 알아요 또. 현지인으로 낚시터 관리인 자리 하나 내줄지.
종 국: 일 없어야.
상 구: 싫음 마슈. 평상에 앉아 낚시 귀경하며 먹는 술맛도 쏠쏠합디다. 술값은 지가 내요.
종 국: 그려. 그럼 나서 봐.
두 사람 나서는데 이장이 자전거 끌고 모습 보인다.
종 국: 어디 댕겨 오시오.
이 장: (자전거 한켠에 받쳐놓고 담배 물더니 불 당긴다) 지난달인가 뒷산 텃밭 김매러 갔다 뭣에 홀렸는가 혼이 빠져갖고 앓아 누웠담서.
종 국: 안꼴 병두에미 말이요.
상 구: 두어 달 됐지요 아마. 그러고는 반병신 됐다더만.
종 국: 반병신이냐 실성이지.
이 장: 아 읍내 터미널서 비실비실 웃고 앉았더라고. (담배 길게 빨고) 인사라도 건넬 요량으로 곁에 갔더니만 내가 저승사자로 보였는가 괌 빽빽 지르더니 장터로 줄행랑을 쳐.
상 구: 겁탈 당했다는 말이 돌드마요.
종 국: 이눔이.
상 구: 지어낸 얘기 아니고 안꼴 정길이 섞언 하는 소리요.
종 국: 경친다. 그런 소리 함부로 말어.
안꼴 점쟁이 송씨 모습 보인다.
송 씨: 안녕들 하시오.
종 국: 안꼴서 여까지 뭔 바람 불었댜.
송 씨: 길수가 댕겨 갔구만요 지난 밤.
이 장: 뭐라든가.
송 씨: 풍수에 책 빌어 사주팔자나 가늠허지, 행방불명된 사람 생사 어찌 알겄어요 지가.
종 국: 지 애비 생사 궁금허니 찌푸리기라도 잡고싶은 심정이겄지.
송 씨: 꿈에 자꾸 지 애비 보인다네요. 뼈만 남아 저 보고 우시는데 차마 눈뜨고 못보겠드래요. 그래 가묘라도 쓰는게 어떨지 의논하더구만요.
종 국: 그게 죽었다 확신 아니여.
송 씨: 비명횡사라면 저승문턱서 얼매나 배고프것나 길수 생각이요.
이 장: 허마고 했어.
송 씨: 묘자리 봐줄 요량인게 먼저 모친허락 받아오라 했구만요.
종 국: 넘 일 감놔라 대추놔라 거들입장 아니지만 서도 내달이믄 꼭 1년이구만요.
이 장: 그래서.
종 국: 천하장사라도 저 산자락서 1년 버티기 힘들지요. 길수도 자식으로 헐 만큼 했고.
상 구: 도네 경찰서 안다닌데 없을 거구만요. 사진 전단 뿌린게 또 얼마여.
이 장: 그러다 살아오믄 뒷감당 자네가 헐란가.
종 국: 산 사람 살아야지 언제까지―
이 장: 자네 자식 잃고 그런 소리 헐 수 있는가.
종 국: 그거하고는 경우가 틀리지요.
이 장: 아직 인심 살아 넘의 부엌 숟가락 몇짝인지 아는 동네여 우리 능꼴이. 행여 길수 모친 앞에서 그런 입방정 말어.
잠시.
이 장: 묘자린 봤는가.
송 씨: 며칠 둘러봐야지요.
상구가 종국에게 눈짓한다.
종 국: 야그들 나누시오.
이 장: 어디가나.
종 국: 저 재 넘어 귀경가요.
상 구: (종국 잡고 나가며) 해질녘 와요.
이 장: 조심들 혀.
종 국: 나이가 몇인디 그런 소리 허시오.
이 장: 횡사에 나이 있는가.
상 구: 예. 명심허지요.
두 사람 퇴장.
이 장: 자네도 곤할 테니 어여 가 보게.
송 씨: 이장님도 들어가시오.
이 장: 그려.
송씨 퇴장하면 이장 받쳐놓은 자전거 끌고 퇴장.
2. 가묘(假墓)
길수가 평상에 앉아 생전 부친이 산을 탈 때 쓰던 지팡이 닦고
망태기 손본다. 손길 하나하나가 정성스럽다. 모친 모습 보인다.
모 친: 뭔 꿍꿍이냐.
길 수: 왜 또 시비요.
모 친: 에미 죽는 꼴 보고잡냐.
길 수: 나 아무소리 안했어요.
모 친: 안꼴 점쟁이가 언제부터 니 벗이냐.
길 수: 예?
모 친: 꿈에 돌아가신 니 할머니 봤다. 광목자루 쥐어주며 가져가래. 손을 넣었더니 사람 허리굵기 구렁이가 이 손을 덮석 물어. 놓으라고 괌 지르고 악썼더니만 슬그머니 놓고 사라지더라. 광목자루 이 손에 든 채 꿈에서 깼어.
(잠시)
니 아버지 저 어디 살아 계시다. 실지여.
길 수: 제 꿈 얘기 또 해요. 아버지 피골상접 눈뜨고 못보겠어요 저. 하루 이틀이여야 말이지 그 배고픔 어찌 달래요.
모 친: 그래 일 벌려야 시원허겄어.
길 수: 아버지 살아 돌아오시면야 그보다 좋은게 어딨슈. 헌디 만약에요 참말로 만약에 그런일은 없어야지만 서도 참말로 만약에 이 세상 다시는 못 볼 운명이시라믄 그럼 어쩌요.
(잠시)
엄니 끼니마다 아부지 밥 묻어두시지요. 혹여 저 세상 분이시믄― 그걸 낼 순 없잖유. 가묘라는게 말 그대로 가짜 묘지요. 이 지팡이 묻는 게 뭐 대숩뗘. 살아만 오시면 삽들고 갈아엎으면 그만이요.
한켠에 섰던 이장이 나선다.
이 장: 껴도 되것소.
모 친: 놀래라. 기척이나 허시지 않고.
이 장: 얘기 다 들었구만요.
(잠시)
이 장: 저 산자락 지리산 꽁지 잡아 험하기로 둘째 가람 서럽지요. 평지걸음 떼기도 힘들구만 저속에선 오죽허것소. 아무리 날고 기는 산꾼이라도 1년을 버티기 힘들다는 생각 드누만요.
모 친: 이장님꺼정 왜 이러신대요.
이 장: 상출이랑은 평생지기요 지가. 소싯적 상출이랑 담력내기 한답시고 달 없는 밤 행상집 물건 빼오기 내기 했었구만요. 어찌나 무섭던지, 둘 다 지 옷자락 찢어 행상집서 가져왔다 멱살잡던 기억 엊그제 같네요. 변할게 따로있지 꽃가마 썩혀두고 버스타고 무덤가는 세상이요 지금이.
(씁쓸하게 웃는다)
내 꽃가마 예쁘게 꾸미지요. 꽃도 달고 만장도 늘고.
길 수: 이장님.
이 장: 길수 성품이 불같지만 서도 잔정 많은 거 동네사람 다 아느만요.
모 친: 약초 캔다 평생 저 산자락 타고 살았어요 그 사람.
헐 말이사 목구녕에 차는디 뱉을 수가 없네요.
(나가려 한다)
길 수: 어디 가시게요.
모 친: 멀쩡한 육신 놀리는 것만큼 큰 죄 없다. 잡초라도 뽑아야 곡식 한 알 더 건질 거 아녀.
(퇴장)
잠시.
이 장: 송씨 만나고 오는 길이다. 자네 집 들렀다 허탕치고 모친 만나 황망한 꼴 당했다더만.
길 수: 뭐라던가요.
이 장: 좋은 자리 찾았다 자네랑 같이 봤으면 하드만.
길 수: 이장님.
이 장: 니 아버지 내 벗이다. 평생 벗 잃었다 생각허니 못내 서럽구마.
(잠시)
길한 날 잡히기 전 상여 손봐야 헐 것이다. 행상집 쐤대 회관에 있은게 부지런 떨드라고.
길 수: 예.
이 장: 장정들 다 떠난 마을, 상여타는 니 애비 뿌듯하것다.
두 사람 쓸쓸하게 웃는다.
3. 상여
마을사람들 낡은 상여 매고 들어온다. 잔칫집 모냥 시끌벅적하다.
한켠에 상여 내려놓고 각기 자리한다.
종 국: 이거 얼마 만에 보는 물건이여.
경자네: 타고싶소.
종 국: 반 백년 지나야지.
경자네: 지나믄 누가 짊어집뎌.
종 국: 작년인가 물레기 반씨어른 나가는 상여 봤소.
중 길: 금딱지라도 입혔던가.
종 국: 바퀴 달았습디다. 상여 가운데 구루마 바퀴 외로 달아 밀고 끌고 그래요.
중 길: 훌륭하네. 마을에 장정들이 없으니 그런 요령이라도 있어야지.
종 국: 이참에 우리도 달까요.
중 길: 재주 있음 자네가 허소.
경자네: 매일 쓰는 물건도 아니고 바퀴 달 것 같으면야 트럭 빌려 저 상여 얹으면 될걸 뭔 수고래 그게.
종 국: 그랬단 명부 들기도 전에 멀미 해갖구서 십전대왕 못알아보고 황망한 꼴 당하기 십상이네.
경자네: 구루마 바퀴는 바퀴 아니요. 멀미 안할 재간 있간디.
상 구: 어쩌요. 먼지라도 털어내요.
종 국: 꽃이라도 붙일라믄 송씨가 와야지. 함부로 손대지 말어.
이장이 자전거 끌고 모습 보인다.
이 장: (자전거 받쳐 놓으며) 병두에미 봤는가.
종 국: 뭐요 또.
이 장: 매재미 지났나. 그려 토끼재 넘었을 거구만. 내리막길이라 몰랐는갑네 내가. 누가 뒤에 앉은거 메로 묵직혀. 요상타 싶어 돌아본게 언제 앉았는가 병두에미 자전거 뒷판에 앉아 제물 까먹고 있드만. 얼매나 놀랬는가 하마터면 보뚝에 처박을 뻔 했어 내가. 자전거 받쳐놓고 겨우 한숨 돌리는데 본게 빤히 나를 봐.
경자네: 그래서요.
이 장: 나도 뚫어져라 봤지.
경자네: 그랬더니요.
이 장: 갑자기 젖맥이 경기하는 것 모냥 입 속에 쑤셔넣은 제물 죄 뱉어내더니만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듣도 못한 소리 내지르더니 줄행랑 쳐.
종 국: 여편네 이장님만 보믄 줄행랑일세. 혹시 이장님 병두에미헌티 해코지했소.
이 장: 허는 소리라니.
중 길: 아 행상집 쐤대 끌르는데 개구녕으로 뭣이 아른거려. 고양인가 그랬구만 병두에미 거서 나오드란게. 얼매나 놀랬는가 이 사람 없었음사 선 채로 오줌 내지를 뻔 했구만.
종 국: 행상집 안에다 살림 차렸습디다. 어서 들고 왔는지 이부자리며 냄비에 소쿠리 하나가득 감자 고구마 쟁여놓고― 상여 들놓기 전 치워야 겠지요.
경자네: 그랬다 병두에미 뭔 일 벌이믄 뒷감당 허실라우.
종 국: 그렇다고 내둥 거서 살게 냅둬.
상여가 미미하게 움직인다. 종국과 경자네가 돌아본다.
종 국: 봤소 시방.
중 길: 뭘.
경자네: 상여요. 상여가 움직이느만요.
상 구: 내둥 곁에 있었구마 뭐가 움직인다 그러시오.
종 국: 참말이란게.
상 구: 성님이 씌었구만.
종 국: 싸래기 밥을 먹었나. 참말이여. 내 두 눈으로 봤다니까.
삐걱 나무소리 들리는가 상여가 크게 움직인다.
수복네: 무서라. 뭐요 저거.
상 구: (작대기 집어들고) 바람이것지요.
종 국: 살펴보드라고.
상 구: 성님이 허시오.
종 국: 작대기 들지 않었냐 너.
상 구: 벌건 대낮에 귀신은 아니것지요.
(서서히 다가간다)
경자네: 조심허소.
상구가 상여 곁으로 가 살피는데
상여가 크게 움직이더니 안에서 병두에미 나온다.
산발한 머리에 성의 없이 겹쳐 입은 옷이며 얼굴에 눌러 붙은 때로
무덤 박차고 나온 시체인가 모두 놀라 나자빠진다.
병두에미 비실비실 웃으며 한켠에 자리한다.
상 구: 놀래라. 언제부터 저 있었댜.
병두에미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 스님 염불 외듯 되뇌인다.
수복네: 아줌니 나 아시것소. 수복이요.
병두에미: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
수복네 병두에미 손잡아 끌려하니 병두에미 순간 무엇을 보았는가
괴성 내지르며 도망간다.
수복네: 아줌니.
(따라가려 한다)
이 장: 냅두소. 괜히 쫓았다 낭패라도 보믄 어쩔라 그려.
길수모친 모습 보인다.
모 친: 상여 도로 넣으시오.
경자네: 성님 허락한 일 아니라우.
모 친: 일언반구 안했은게 저 물건 치우시오 들.
중 길: 쐤대 끌러 어렵게 왔구만 반나절 들인 공 도로아미 타불이네.
종 국: 마을사람 죄 상의해 갖고 벌인 일이구마 어찌 함부로 덮소.
경자네: 그래요. 결정 나고 벌인 일인 게 성님 그저 따라만 오시오.
모 친: 아닌 것을 어찌 기다 허겄냐. 헌디 이건 하늘이 두 쪽 나도 아니여. 아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 냅두고 뭐 하는 짓이래 이게.
중 길: 허마고 했음사 끝까지 따를 것이구마 어찌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시오. 경우가 아니지요.
모 친: 경우건 경운기건 그때사 내가 뭣에 홀렸는가 내뱉은 헛소리 였은게 이제라도 주서 담소.
길수가 수의 들고 모습 보인다.
길 수: 마을 대사 어찌 함부로 뒤집을라 허시오. 참을 인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 안합뎌. 제발 맘 가라앉히시고 모른 척 저 앉아 계시오. 그럼 다 해결 나요.
모 친: 해결이 뭣이냐. 인륜 천륜 똥물에 던져버리고 뭔 얼어죽을 해결이여.
길 수: 안뵈요. 마을 어르신들 죄 나섰구만 이래라 저래라 엄니 할 처지 아니요 이제.
모 친: 사죄로 돼지 잡는다. 그걸루도 모질라면 소 잡고, 나락털믄 관광버스 불러다가 물놀이에 단풍귀경 가.
순간 길수가 들고있던 수의 내던진다.
길 수: 갑시다 가요. 소양강 가서 물놀이하고 단풍귀경으로 금강산 만한 산도 없지요 아마. 내 평생 금강산 언제한번 댕겨오나 했구만 잘 됐네요. 천하의 장길수 복 터졌네 복 터졌어.
(잠시)
상 구: 어쪄. 참말로 치워 이거.
길 수: 엎질러진 물이요. 번거롭지만 한번 더 수고해 주셔야겠네요.
종 국: 안골 싱꼴 사람들 죄 달겨드는 일이구만 어찌 쉽게 번복한다요. 우리 능꼴 체면이 있지.
중 길: 체면이 밥 먹여 줘. 도로 넣어. 넣고 쐤대 두 개 세 개 걸어 잠궈.
경자네: 대못으로 박지 그러시우.
중 길: 염장 지를라우.
모 친: 죄송허구만요 들.
잠시.
이 장: 헐수 없네. 먹기 싫은 밥 억지로 먹었단 체하는 법이지.
중 길: 똥개 훈련도 아니고 뭔 짓인지 모르겄네.
이장이 독려하니 마을사람들 일어나 상여 맨다.
모친 나서서 거들려니 중길이 제지한다.
중 길: 아녀자 손 타는 물건 아니오 이거.
경자네: 부랄 두 짝 유세요.
중 길: 입방정 하고는.
종 국: 구루마 바퀴라도 달믄 편하겠구만.
상 구: 지금 달아야지 또 꺼내요.
중 길: 구루마 타령 그만하고 힘들 써 이 사람아. 자꾸 한쪽으로 기우느만.
병두에미가 낡은 망태기 어깨 매고 지팡이 들고 모습 보인다.
병두에미: (알 수 없는 소리 염불 외는 것 모냥 외더니 갑자기 매고있던 망태기, 지팡이 한켠에 던진다)
종 국: (들고있던 상여에서 손떼며) 가만.
상 구: 갑자기 놓으면 어쩌요. 그러다 다치믄 성님이 책임 질라우.
종 국: 저 망태기 상출성님 거 아니오.
병두에미: (알 수 없는 소리)
중 길: 긴 것도 같은디.
종 국: 길수 뭐허냐. 저거 니 아부지 망태기 아녀.
모친이 다가가 망태기 살펴본다.
마을사람들 조심스레 상여 놓고 다가선다.
모 친: 맞네 맞어. 자네 이거 어서 났는가. 어서 났어.
병두에미: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에 손짓 발짓)
모친 순간 무슨 느낌이 왔는가 황급히 뛰어나가면 길수 뒤따른다.
수복네: 뭐요. 왜 그러시오 들.
경자네: (병두에미 손잡아 끌며) 나 좀 봅시다. 저거 어디서 났소.
병두에미: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
경자네: 참말로 길수 즈그 아부지 살아왔소.
병두에미: (순간 눈빛이 무섭게 변하더니 뿌리치고 상여 속으로 숨는다)
경자네: 무시라.
중 길: 가 보자고. 실지로 살아 왔음사 경사 아닌가.
종 국: 그래요. 가 봅시다.
마을사람들 우루루 몰려 나간다.
잠시.
병두에미 상여 속에서 고개 내밀고 사방 둘러보더니 나온다.
한켠에 던져진 망태기, 지팡이 들고 바람개비 모냥 빙글 돌아본다.
바람이 지나간다. 상여가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병두에미 망태기와 지팡이 가슴에 안고 마치 제집 들어가듯
상여 속으로 들어간다.
4. 낚시꾼
까치 울음소리가 시끄럽다. 낚시꾼 둘이 모습 보인다.
낚시 1: 아까 왔던데구만 여기.
낚시 2: 설마.
낚시 1: 저 상여 안보여.
낚시 2: 뭐여 그럼. 빙빙 돈겨 우리.
낚시 1: 전설의 공향인가 밤새 걸었구만 동트고 보니 그 자리 내둥 맴돌았다더니만 꼭 그짝이네.
낚시 2: 우리가 이 마을 원한 살 일 뭐 했간. 기왕 이렇게 된 거 저 앉아 쉬었다 가.
낚시 1: 그려 그럼.
두 사람 배낭 내려놓고 평상에 앉는다.
낚시꾼1이 사방 둘러보며 고개 갸웃거린다.
낚시 1: 이상하네.
낚시 2: 뭐가.
낚시 1: 저 상여.
낚시 2: (주위 둘러보며) 그러네.
낚시 1: 뭔 동네가 사람 그림자도 안보인댜.
낚시 2: 요새 농촌 그렇잖어.
낚시 1: (상여 가리키며) 아무리 그렇기로 흉물스런걸 왜 저다 둬. 귀신 안나올란가 몰러.
낚시 2: 귀신 타령 그만하고 어쩌다 일루 든겨 우리.
낚시 1: 되짚어 보자구. 고개 넘어 큰길 따라 가다보면 젓소 키우는 우사 지나 방앗간 있고 그 모퉁이 돌아 독잰가 뭔가 암튼 그거 넘으면 낚시터가 보일 것이다. 빼 먹은 데 있나 우리.
낚시 2: 모퉁이 돌아 아랫길로 갔어야 됐나. 왜 일루 오자 그랬어.
낚시 1: 언덕 넘었잖아.
낚시 2: 희안하네. 뭣에 홀린 것도 아니고.
(주위 둘러보며)
여기 사람 사는 동네 맞어. 코빼기라도 뵈야 물어나 보지. 염병. 뽑은 지 1년도 안됐구만 왜 퍼지고 지랄이여. 올라가서 봐. 새차로 안 바꿔 주면 내 가만 안둬.
낚시 1: 기다렸다 택시 탈 걸 그랬나.
낚시 2: 걷고 싶단 게 누군데.
낚시 1: 이렇게 고생할 줄 알았나. 아랫길로 가볼까.
낚시 2: 거도 아니면.
낚시 1: 내둥 여깄자구.
낚시 2: 그래 가자. 거도 아니면 서울간다 나.
낚시 1: 그려 같이 가.
두 사람 배낭 매는데 상여 속에서 병두에미의 알 수 없는 소리 들린다.
낚시 2: 무슨 소리여. 들었어 지금.
낚시 1: (고개 끄덕인다)
낚시 2: 저 상여 속에서 나는 소리지.
낚시 1: 그냥 가.
낚시 2: (상여 곁으로 다가가며) 대낮에 귀신은 무슨.
두 사람 상여 주시하는데 병두에미 소리 더욱 커진다.
두 사람 상여 곁으로 다가가는데 병두에미가 불쑥 모습 보인다.
낚시꾼들은 병두에미 몰골에 시체가 일어난 것이라 착각했는가
기겁해서 도망친다.
병두에미 또한 낚시꾼들이 내지른 비명에 놀라 달아뺀다.
5. 우정
길수가 평상에 앉아 담배 길게 빤다. 상구가 모습 보인다.
상 구: 병원서 뭐려.
길 수: 서울 큰 병원으로 옮겨야겄어. 식물인간모냥 누워만 계신데 병원서는 이상 없다니 달리 방법 없잖어.
상 구: 읍내 병원 용허다 소문 자자허드만.
길 수: 서울 가보라 병원서 그랬구만.
(상여 가리키며)
헌디 저건 언제 치운다냐.
상 구: 그러게. 왜 아무 말들이 없지.
길 수: 가면 얼마나 있을란지 모르는데 저거라도 후딱 치우고 갔으면 싶구만.
상 구: 둘이 재간 있간.
길 수: 죄송혀서 말도 못붙이것어.
상 구: 니 탓 아니니 맘 쓰덜 말어. 모친 판단 옳았은 게― 좋은 게 좋은 기지 안그냐.
잠시.
길 수: 헌디 너 요새 수상하다.
상 구: 또 뭔 소리 들은겨.
길 수: 논일 밭일 팽개치고 어딜 쏴다니냐.
상 구: 마누라가 찔렀냐.
길 수: 내년이믄 너도 학부형 소리 들어.
상 구: 그래 그러는 것이여 내가. 하늘같은 서방 큰 뜻도 모르고.
길 수: 있을 때 잘 혀. 있다 없은 게 휑한게 엽구리여. 그거 누가 어루만져 줘.
상 구: 학교 들어갔는데 아버지 직업 농사 그거 애한테 얼매나 상처것냐. 그래 내 관리인 뭐 그런거 쓰게 헐라고 동분서주한다. 이게 다 자식 가진 부모 맴이여.
길 수: 제수씨한테 언질 주던가 그럼. 걱정하잖어 또 화투장 손대는 줄 알고.
상 구: 고시도 아니고 낚시터 관리인이 뭐 대단한 감투라고 사방팔방 떠벌리냐. 그도 되야 말이지 하루걸러 눈도장 찍는구마 일언반구 없네.
길 수: 용허다. 난 또 골방에 틀어박혀 화투장 손에 쥔 줄 알았구만.
상 구: 나도 내일 모레면 사십줄이여. 길 수: 노름에 나이 있간.
상 구: 무시하덜 말어.
길 수: 벌써 우리가 사십을 봐. 세월 참 유수 같네.
(잠시)
살짝 이장님께 찔러 봐. 저거 못 옮기고 가면 내둥 찝찝허것어.
상 구: 걱정 붙들어 매고 아버님 간호나 잘 허드라고.
길 수: 뭔 일 있음사 전화 혀.
(나선다)
상 구: (만 원짜리 몇 장 건네며) 얼마 안되는디 여비로 보태 쓰더라고.
길 수: 괜찮어.
상 구: 많이 못 줘 미안허구만.
길 수: 그려 그럼. 어디가냐 넌.
상 구: 눈도장. 다녀 와.
길 수: 그려.
두 사람 퇴장.
6. 미궁
마을사람들 몰려 들어온다.
중 길: 행상집은 잘 치우것지.
종 국: 보통내기요 경자네가. 거다 수복네, 웃뜸 아줌니까지 나섰으니 열 장정 안부럽지요.
중 길: 설마 전에 모냥 병두에미 저 들어앉은 건 아니것지.
종 국: (상여 속 들여다보며) 여편네 요 며칠 통 뵈질 않네. 사고라도 난 거 아닌지 몰러.
중 길: 병두애비도 그러믄 안되는 것이여. 자식새끼 서울서 코빼기도 안비친다 쳐. 마누래 험한 꼴 당했음사 젤루 먼저 들쳐업고 병원 데려가야 인지상정 아닌가. 허구헌날 술에 쩔어 갖고 뭐 하는 짓인지. 낯짝 뵈믄 흠씬 두들겨 패고 싶구먼 내가.
종 국: 그 아저씨 마음도 오죽 허것어요. 외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게 금지옥엽 했구만 출세하드니 뵈는 게 없어. 아 지 결혼식날 못 봤소.
중 길: 말세여 세상. 인륜 천륜 버리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겄어.
상구가 송씨 앞세우고 모습 보인다.
송 씨: 곡절 있구만요 다.
상 구: 오는 길에 만났구만요.
송 씨: 처음 병두에미 그리되고 그 아저씨 얼매나 애닳았는지 모를 것이구만요. 들쳐업고 병원만 가려면 발악하는 데 안꼴 사람들 죄 달겨들어도 못 당해요. 포기허고 좋다는 약 다 써봤지만 무용지물이요. 입에 대야 말이지요. 헌디 그 병두란 놈 지 결혼식 부모 챙피허다 쏙 빼버리고 해버리니 억장 무너지지요 열불 안나겄어요. 안꼴 사람들 다 이해하느만요.
중 길: 그래도 그렇지. 허구헌날 술에 쩔어 위아래 몰라보믄 되나.
송 씨: 술기운이라도 못 빌면 그 양반 벌써 이 세상 사람 아니오.
중 길: (말 돌리며) 상출성님은 차도가 있댜.
상 구: (고개 저으며) 내일 내려 온다네요.
종 국: 저 산 속에서 1년 동안 뭘 먹고 살았을까나이.
중 길: 타고난 산꾼인데 뭔들 못 찾아 먹어.
종 국: 그류 산꾼. 지 손금 보슷 훤헌게 산이구마 어찌 1년 동안 소식이 없다 이제사 나타났냐 이말이지요. 긍게 내 말은 저 산 속에서 뭘 했을까 이거요.
중 길: 하긴 뭘 했다 그랴. 길 잃고 헤맸으니 이제 나타난게지.
종 국: 말이 되요 그게. 나무 선 모양새만 봐도 어디쯤인지 훤헌게 성님이요.
중 길: 다리라도 부러져 산 속 어디 누웠던가.
종 국: 병원서 외상 내상 아무이상 없다잖아요.
중 길: 뭔 말을 하고픈데 이렇게 사설이 길댜.
종 국: 병두에미 말이요. 한날 보뚝 길 막고 앉은 모습이 평시하고 생판 다르더란게. 양반다리 하고 앉았는데 주위에 풀벌레 소리가 갑자기 뚝 끊겨. 섬뜩하드만. 산에서 귀신 나타나면 벌레소리 끊긴다잖어 왜.
상 구: 갑자기 병두에미 얘긴 왜 꺼내시오.
종 국: 근게 병두에미 허는 짓거리는 정신이 아예 나가버린 거 아니여. 휘까닥 돌았든가. 그리고 1년 동안 산 속을 헤매다 나타난 성님은 그 정신이란게 아예 잠들어 버린거고.
중 길: 대체 하고잡은 소리가 뭐여.
종 국: 근게 저 산 속에서 성님은 정신을 잠들게 하는 귀신이 씌인거고 병두에미는 휘까닥 돌게하는 귀신이 씌었다 이말이여.
모두 침묵.
중 길: 내일 온다잖어. 오면 물어봐. 별것도 아닌걸 갖다 분위기 심란하게 만들어.
상 구: 식물인간모냥 누워만 있다는디 말귀 알아 듣것어요.
중 길: 그렇게 궁금하믄 저 산에 올라 1년 2년 살아보든가.
경자네가 모습 보인다.
경자네: 내둥 기다리는구만 뭐 하길래 이렇게 뜸을 들인댜.
중 길: 가려고 했네. 어여들 나서더라고.
종 국: 병두에미 물건 다 치웠소.
경자네: 거미줄까지 몽땅 걷어냈으니 가거들랑 개구녕만 막으면 돼요.
중 길: 수고했네.
경자네: 누가 그딴 소리 듣고 싶대요.
사람들 상여 매고 나가려는데 길수가 부친 상출을 태운 휠체어 밀고
뒤미처 모친이 모습 보인다.
휠체어에 앉은 상출의 모습은 사람의 모습이라기보다 바싹 마른
미라를 연상시킨다.
상 구: 뭐여. 내일 온다잖았어.
모 친: 서울 사람들 우리랑 허파가 틀린가벼. 내사 마 숨이 턱턱 막히는 게 하루도 견디기 힘들드마 용하데 다 들.
중 길: 차도는 있소.
모 친: 이러다 뒤지믄 그만이오. 다행히 육신 객사 안허고 돌아온 것만도 다행이지요.
종 국: (상출 곁에 다가가 손 잡아보며) 성님 나요 종국이. 알아 보것소.
상 출: (미동도 없다)
종 국: 대체 이게 뭔 난리라우. 성님.
모 친: 석고상 따로 없소. 미음이라도 안 뱉어내니 다행이오.
종 국: 사람도 몰라봐요?
모 친: 내둥 천장만 보구 있은게 그 속내 어찌 알겄소.
종 국: 어쩌다 이리 되셨소. 성님.
경자네: 수척해 뵈시네. 병자야 그렇다지만 서도 옆에 있는 사람이 더 고생이지요. 얼른 들어가 뉘시고 성님도 발 뻗으시오.
모 친: 그려 얼른 들어가자.
사람들 물끄러미 상출을 쳐다본다. 길수 휠체어 밀고 모친 따라 퇴장.
불쑥 경자네가 나선다.
경자네: 아 뭣들 허시오. 수복이랑 웃뜸 아짐니 기다리느만.
중 길: 그려. 얼른 나서드라고.
사람들 상여 매고 퇴장.
7. 낫과 호미
길수가 평상에 앉아 부친이 갖고 다니던 낫과 호미를 유심히 살핀다.
송곳 모냥 닳아 그것이 낫이나 호미의 형체가 아니다.
이장이 보자기 한 손에 들고 모습 보인다.
이 장: 뭐여 그거.
길 수: 누가 믿겄어요. 이게 낫이고 이게 호미요.
이 장: 알뜰하게 썼네.
길 수: 아버지 허리춤에 차고 계시던 물건인디 저도 처음엔 이게 낫이고 이건 호미라 생각지도 못했구만요.
이 장: 부친은 어뗘.
길 수: 엄니 넣어주는 미음만 겨우 삼키시고 연명하시네요.
이 장: 거 참 모를 일이네.
잠시.
길 수: 대체 산 속에서 뭘 하고 계셨을까 자꾸 그런 의문이 드네요.
이 장: 누가 알겠나 그 속내를.
길 수: 이 낫이며 호미가 이렇게 송곳 모냥 닳을 정도면 구덩일 파더라도 얼매나 팠을 것이며 이 낫이면 작은 야산 깎아도 이리 닳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드는데 이장님은 어떠셔요.
이 장: 산을 깎았다면야 민둥산이 보일테고 구덩일 팠으면 표시가 있겄지.
길 수: 그래서 말인데 한달 묵을 요량으로다가 저 산에 올라 봐야겠어요 지가.
이 장: 그러다 잘못되믄.
길 수: 아부지 살아오셨잖아요.
(잠시)
원인을 알아야 방법이라도 찾을 거 아녀요.
이 장: 병원서도 병명 못찾고 포기했다믄서 원인 찾으믄 나을 수 있는 방법 있어. 저 산서 등산객 둘이 죽고 양봉하던 윤씨아제 비명횡사했어. 뿐이여. 니 부친이랑 병두에미 반병신 됐는데 자네 모친 산송장 둘이나 건사하라고.
길 수: 그렇다고 맥놓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이 장: 산이 노한거여. 그러니 입 닫아. 행여 오를 생각 꿈도 꾸지 말어.
길 수: 노했음사 뭣에 노했는지 원인 찾아 달래야지 평생 안오를 순 없잖아요.
이 장: 자식같아 하는 소리다. 포기해.
길 수: 이 낫, 호미 왜 이렇게 닳았는지 밝혀야겠구만요.
이 장: 밝히믄 뭐가 달라져.
길 수: 최소한으로다가 다른 인명은 구하겄지요. 이장님 말씀대로 산이 노한거라믄 굿이라도 해서 달래고. 아버님 억울함도 달래고. 노력은 해야 될 거 아녀요.
이장 들고있던 보자기 내민다.
이 장: 자고로 약이란 다리는 사람 정성이라 혔다. 용하다는 한약방서 지은거여. 비닐봉지에 들어 먹기 좋게도 나온다만 정성이 들어있지 않으니 맹물하고 뭐 틀리것냐 쓰기만 쓰지. 조석으로 드시게 허고 차도 보이믄 다시 지어주마.
길 수: 이러실 필요까진 없는디.
이 장: 상출이 니 애비 이전 내 벗이다.
길 수: 저 살아올 수 있구만요.
잠시.
이 장: (깊게 한숨 내쉬며) 인명제천이라 자고로 사람목숨 하늘 뜻에 달렸다 했다. 니 굳은 심지 놓지만 안는다면야 큰일 나겄냐. 첫눈 내리기 전에 내려와야 한다.
길 수: 예.
이장 퇴장하면 길수 한참을 넋 놓고 이장 떠난 길을 바라본다. 보자기 가슴에 품어보며 한없이 고마움을 느낀다.
8. 허수아비
바람이 불고 지나가니 색바랜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다.
멀리 까치 우는 소리 들린다.
병두에미가 어디서 구했는지 50년 세월이 보이는 낡고 떨어진 인민군 군복
걸치고 머리에는 털모자 쓰고 모습 보인다.
하얀 까치 하나가 평상에 앉았다가 놀라 날아간다.
병두에미 평상에 앉아 스님 염불 외는 소리 되뇌인다.
낚시꾼 둘이 모습 보이자 병두에미 몸 숨긴다. 낚시 1: 어찌 니 차는 여기만 오믄 퍼지냐.
낚시 2: 서울 정비소 끌고 가는 거 봤잖아. 이상 없다는데 나보고 어쩌라구.
낚시 1: 다음엔 내 차로 와야지 고생스러워 같이 다니겄어.
낚시 2: 제발 그러자. 여기만 오믄 불안혀 나도.
낚시 1: 헌데 또 길 잘못 들었네. 저 아래로 갔어야잖아.
낚시 2: 니가 앞섰잖어. 말릴까 했구만 딴에 볼일 있는갑다 헌기지.
낚시 1: (주위 둘러보며) 사람 사는 동네 맞어 여기.
낚시 2: 집들 멀쩡허니 폐가는 아닌갑만.
낚시 1: 뭐가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구만. 어여 가.
낚시 2: 그려.
두 사람 퇴장하면 병두에미 고개 내밀어 주위 살피다 평상에 앉는다.
뒷길로 상출이 탄 휠체어가 보이며 평상으로 다가온다.
병두에미 놀라 숨으려다 상출임을 확인하고서 뛰쳐나가 휠체어 평상 앞으로 이끈다.
여전히 상출의 눈은 촛점이 없는 미라처럼 보인다.
병두에미 품에서 과일 꺼내 상출에게 건네나 상출 미동도 않는다.
잠시.
바람이 지나간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의 행동은 마치 정상으로 보인다.
상 출: (고개 들어 하늘 보며) 첫눈이 오겄어.
병두에미: 아드님 걱정 되요.
상 출: 저서 지리산이 어디라고. 올해 넘기기 전 돌아올 것이여.
병두에미: (자신이 입은 군복 가리키며) 그 군인이 줍디다.
상 출: 멀리도 왔구만.
병두에미: 그 사람 아직 전쟁 끝나지 않은 줄 알아요.
상 출: 해골이 계곡을 덮었드만. 그거 묻니라 고생 좀 혔어.
마을사람들이 들어온다.
그들 눈에는 상출과 병두에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 장: 구름 봐서는 첫눈 내리겄는디 길수 여직 소식 없소.
모 친: 아이고 무시라. 내 팔자 왜 이렇댜. (쓰러지려는 것을 경자네가 부축한다)
경자네: 성님 걱정 마시오. 길수 분명 살아 있을 거구만요.
수복네: 그려유. 심지 굳잖아요. 조금만 참고 기다려 봐요.
종 국: 이놈은 또 어디로 달아뺀겨.
중 길: 저기 오네.
상구가 물고기 담긴 어망 들고 모습 보인다.
상 구: 왜들 나와 계시오.
종 국: 기세로 봐서 큰 눈이 내릴 것 같은디 길수가 걱정이여.
눈이 내린다.
모두 하늘 쳐다본다.
종 국: 참말로 쏟아지네.
중 길: 어여 들어가시오 들.
상 구: (어망 들어뵈며) 향언디 매운탕으로 끓이면 끝내줘요. 생각있음 회관으로 오시오 들.
종 국: 소주는 내가 준비혀.
중 길: 집에 뱀술 남았는데.
종 국: 내둥 혼자 자셨소. 얼른 가져오시오.
모 친: 아이고 길수야.
경자네: 성님.
모두 퇴장.
잠시.
병두에미: 눈이 어찌 저리 곱대요.
상 출: 따듯허겄어. 저것이 쌓이면 바람막이 아닌가.
병두에미: 편히 잠들겄지요.
상 출: 아직 전쟁 끝나지 않았는데 잘 수 있겄어.
무대 서서히 어두워지면서 두 사람 한 장 사진모냥 정지.
주혁준
1970년 강화 출생
서울예술대학 극작과 졸업
현 극단 목화레퍼터리컴퍼니 단원
‘만파식적’ ‘백마강 달밤에’ ‘용호상박’ ‘로미오와 줄리엣’ 등 출연
한태숙(연출가), 김태웅(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연출가)
선택의 고민은 기뻤다. 아니, 행복했다.
100 여 편이 넘는 응모작이 그려내는 세계 안에서 행복한 꿈을 꿀 수 있는 시간이었다. 반짝이는 사유를, 새로운 가능성을 만나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자본을 숭앙하는 이 시대에 연극에, 희곡창작에 매달리는 영혼은 얼마나 무력한가? 아니 얼마나 위대한가?
응모작 중 강경은의 ‘마중’, 김지훈의 ‘설명서 클럽 종신회원’, 김특영의 ‘잠’, 홍지현의 ‘변기’, 주혁준의 ‘허수아비’, 최호종의 ‘돼지들의 아침식사’가 최종 거론되었다. 이들 희곡은 당선작이 될 저마다의 장점과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마중’은 다소간의 상투성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깊이 있고 성숙한 의식이 돋보였다. ‘설명서 클럽 종신회원’은 독창적인 주제와 극을 끌어가는 솜씨가 돋보였으나 무리한 설정과 대사의 사변성이 문제였다. ‘잠’은 현실과 환상의 설득력이 있는 결합이 좋았으나 상징이 지닌 자폐성이 지적되었다. ‘변기’는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반전과 아이러니의 묘미를 살렸고, 무엇보다 ‘신=변기’ 라는 설정이 지닌 풍자의 폭발성이 좋았다. 그러나 반전이 다소 무리라는 평도 받았다. ‘허수아비’는 대사나 지문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오래 공 들인 흔적이 쉽게 발견됐다. 역사적 상상력이 돋보였다. ‘돼지들의 아침식사’는 관계의 인위적 설정에도 불구하고 상징의 그로테스크함을 통해 자본의 폭식성, 어처구니없음을 코믹하게 그려낸 작품이었다.
결국, 심사위원들은 ‘변기’와 ‘허수아비’ 두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주혁준
1970년 강화 출생
서울예술대학 극작과 졸업
현 극단 목화레퍼터리컴퍼니 단원
‘만파식적’ ‘백마강 달밤에’ ‘용호상박’ ‘로미오와 줄리엣’ 등 출연
언젠가 신문 한 귀퉁이 제 시선을 끄는 사진이 실렸습니다.
2차대전 패전국인 일본의 한 병사가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줄 알고 필리핀 어느 산 속에서 살며 종지부 찍은 전쟁에 대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의 전쟁은 60여 년 전에 끝났건만, 무엇이 그 병사로 하여금 전쟁의 진행형을 평생 의식 속에 심었을까요.
우리는 지금 전쟁이 끝나지 않은 세계유일 분단국가에 살고 있습니다. 지역 계층 간 갈등이 이제는 진보?보수, 친미?반미로 서로의 목청 높이며 전쟁을 망각하고 있지만, 실상 우리는 그 일본군이랑 다를 바 하나 없지요.
과거를 잊고서는 장밋빛 미래 없습니다.
과거란 바로 선조들이 살아온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벌초하다 낫에 손가락을 베인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께서 쑥 뜯어다 돌로 찧어 제 손가락에 얹어주니 피 금새 멎더군요. 할머니의 지혜가 그리운 밤입니다.
제 인생, 헛길 가지 말라 밝혀주는 등불 있어 행복합니다. 때론 아버님이자 스승님 그리고 동료로 항상 채찍질 아끼지 않으시는 오태석 선생님께 사랑하고 감사하다는 말 외에 수식어 있다면 붙이고 싶습니다.
동고동락하는 극단 목화 가족께도 감사하다는 말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