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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영화다: 타인의 시선으로 세상 너머를 보다

by  안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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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사평
  • 당선소감
  • 두 남자가 마주보고 주먹질을 시작한다. 그런데 주먹은 날아가서 아프게 꽂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얼굴을 살짝 건드리고 웃는다. 다시 천천히 때리고 맞는 시늉을 하는 두 사람. 액션영화의 한 장면을 흉내 내는 이 슬랩스틱 놀이는 영화를 함축하는 빛나는 순간이다.

    여기 다른 삶을 꿈꾸던 사람이 있다. 영화 단역에 출연하기도 했던 깡패 이강패는 액션스타 장수타의 연기에서 어떤 리얼함을 발견하고 자신의 페르소나와 같은 친밀감을 느낀다. 실제로 툭하면 싸움소동에 휘말리는 수타는 상대 배역을 구하지 못하자 강패를 찾아가고, 출연 조건으로 액션 씬에서 연기가 아닌 실제 싸움을 하기로 한다.

    이렇게 해서 강패와 수타가 찍게 되는 영화 속 영화는 반대로 그 외의 영화 장면들에 생생한 현실감을 불어넣어 준다. 관객은 영화 속 영화의 실제적 상황과, 영화 밖 두 인물의 현실적 삶에 맞닥뜨리면서 기묘한 체험을 하게 된다. 즉, 영화가 영화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몰입할 뿐만 아니라, 한 편으로 영화의 구성된 현실 속에서 다큐멘터리 같은 진실성을 느끼는 것이다. 홀로 호텔방을 전전하며 쓸쓸하게 속옷과 양말을 빨아 너는 강패와, 자신의 대형 브로마이드 앞에 똑같은 포즈로 멍하니 앉아 있는 수타의 모습. 이는 두 사람의 영화 촬영 풍경을 보여줄 때의 재미와는 또 다른 인상을 남긴다.

    영화의 긴장은 사고뭉치 수타보다는 강패라는 캐릭터의 복잡한 정체성에서 나온다. 그는 영화를 진지하지 않은 놀이로서 시작했지만, 거기에 빠져들면서 놀이를 삶의 진지함과 연결시킨다. “영화하고 현실하고, 구분 못해?” 조직의 배신자를 암살하지 않고 보내주는 결정적 실수를 하고 어쩔 수 없이 영화를 중단하게 되면서 내뱉는 말은 결국 자기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한편, 수타는 영화를 찍으면서 점점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성숙해 가는데, 영화 촬영의 마지막 싸움 장면에서 가까스로 수타가 이기는 것은 말 그대로 그가 영화 속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첫 만남부터 흑과 백 색채의 명백한 대립구도로 보여지던 두 사람은 진흙탕을 함께 뒹굴며 점점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슬쩍 같아 보이는 것은 단지 겉모습뿐이다.

    영화관을 나서서 살풍경한 현실로 걸어 들어가듯이 강패는 배신자를 처리하러 나서고, 아직 영화 속에 잠겨있는 수타와 관객인 우리는 그를 가볍게 따라간다. 그리고 대낮 거리 한복판에서 있을법하지 않은 일을 목격하게 된다. 똑똑히 보라는 듯이 흘끔 눈짓을 보내는 강패와 경악하는 수타의 시선. 여기에서 영화의 도입부분이 다시 떠오르는데, 일 처리를 하고 병원에서 상처를 꿰매던 강패는 천진한 아이의 시선과 마주친다. 강패에게 수타는 호기심 어린 그 아이와 다를 바가 없다. 그는 수타가 자신에게서 두려움을 느끼고 아이처럼 도망갈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피범벅이 된 강패의 보란 듯한 시선에 수타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안타깝고 절망적인 수타의 떨리는 눈빛과 이에 굳어지는 강패의 표정이 프레임 좌우로 나뉘며 순간 영화는 멈춘다. 이 마지막 장면은 극중 극 형식으로 처리되어 관객들이 다시 한번 거리를 두고 영화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해준다. 그렇지만 이는 다소 사족 같은 느낌이 드는데,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영화인지 아닌지는 사실 처음부터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영화다’는 두 인물간의, 그리고 인물과 관객간의 시선에 관한 영화이다. 두 남자배우의 수려한 이미지와 간간이 들리는 액션 느와르 풍의 음악, 혹은 영화촬영과 연예계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그보다는 끊임없이 서로를 지켜보는, 욕망이 투사된 시선의 교차에 주목해야 한다. 영화의 중반 즈음 고속도로에서 앞에 수타와 여자가 탄 차를 강패가 위험하게 추월하는 장면은 그러한 교차되는 시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관객은 카메라의 시선으로 두 인물을 따라가기도 하고, 한 쪽 입장에 서서 뒷모습 너머로 직접 반대편 시선을 느끼기도 한다. 질투와 경멸과 동경이 섞인 수많은 시선들. 특히, 마지막 시퀀스에서 살인을 하며 수타를 응시하는 강패의 눈은 거의 정면으로 관객을 바라본다. 수타는 관객 중 한 명을 대변하는 눈이다. 따라서, 두 인물간 시선의 부딪힘은 강패와 관객의 만남이 되고, 그것은 곧 영화와 현실의 충돌, 그리고 프레임처럼 명확한 분리로 이어진다. 영화는 영화이지만, 마주친 시선은 잊을 수 가 없다.
    안지영

    안지영

    1979년 서울 출생

    2003년 이화여대 광고홍보·방송영상학과 졸업

    2008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영상커뮤니케이션학과 재학

  • 정지욱(영화평론가)

    지난해에 비해 출품수가 늘었다고 하지만 매우 소소할 뿐이니 시나브로 어둠에 잠겨가는 한국영화산업의 현 상황처럼 느껴져 씁쓸했다. 한국영화산업의 불황이 오히려 자극이 되기를 조심스럽게 바래본다.

    올 한해 화제가 됐던 몇 영화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듯 이에 대한 글들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들 영화가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데 비해 대부분이 단순한 칭찬에 머무르고 말았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저 한 작품의 칭찬 일변도라면 기업 형 결혼식장의 전문 주례꾼들의 주례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한편 평론의 일정 형식을 파괴한 글들도 만날 수 있었다. 이미 대중화되어버린 인터넷 글쓰기의 자연스런 반영이랄까. 긍정적으로 보자면 글쓰기에 대한 어려움을 극복했다거나 사유의 자유로운 반영이라 하겠지만, 오히려 수필에 가까웠다. 좀 더 깊이 생각하고 글을 깎고 다듬는 내공이 쌓아지길.

    심사에서 마지막까지 주목 받은 송보림의 '천사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안지영의 '비몽(悲夢):변하지 않는 꿈', 이만영의 '유쾌한 소통,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길'은 작품들을 통해 보여주는 감독의 일관된 흐름을 읽어내는 품세가 탁월했다. 그 중에서 장평과 단평 모두 명확하고 간결한 문체로 자신의 분석을 정확히 전달한 안지영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 안지영

    안지영

    1979년 서울 출생

    2003년 이화여대 광고홍보·방송영상학과 졸업

    2008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영상커뮤니케이션학과 재학

    긴 터널을 지나와, 이제 새로운 입구 앞에 선 느낌이다.
    작년 이맘때가 생각이 난다. 소위 벼랑 끝에 선 듯한 경험을 했다.
    2008년은 길고 길었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해가 될 것이다.

    영화를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영화를 얼마나 잘 아는가 하는 것보다
    영화를 얼만큼이나 사랑하는가 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느껴왔다.
    특히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로 세상을 보아온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울 따름이다.
    다만, 어떤 가능성을 좋게 봐주신 심사위원 분들께 감사드린다.

    영화를 통해 삶 속을 들여다보고 숨겨진 작고 사소하고 가벼운 것들을 캐내어 그 의미를 나누고 싶다. 더 공부하고 경험해보아야 할 일들이 참 많다.
    다시 새 생명이 돋아나듯이, 앞에 주어진 모든 것들에 모든 이에게 감사한다. 무엇보다도 힘든 시간 지켜주신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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