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메모

by  박선영

  • 작품전문
  • 시놉시스
  • 심사평
  • 당선소감
  • 프롤로그. 장예식장 밖- 밤 (타이틀 백)

    검은 화면, ‘자막- 2008년 12월 25일’
    화면 열리면 누군가의 시점인 듯 어두운 하늘 위에서 하얀 눈이 하염없이 쏟아진다.
    곧이어 들리는 숨소리… 화면 가득 쏟아지는 뜨거운 입김…
    카메라 빠지면 상처투성이 얼굴에 붕대 감긴 두 손, 검은 상복에 맨발로 하얀 눈 위를 걷는 여자가 보인다. 그 모습이 추워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시원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 때, 멀리서 들리는 사람들의 곡소리
    하염없이 눈을 맞으며 멀리 점이 될 때까지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
    화면 천천히 암전되고,
    티이틀- 메모

    1. 은하의 방/ 오프닝 시퀀스- 아침

    방 안을 비추는 햇살
    감추고 싶은 치부가 드러나듯 협소한 방의 전경이 들어온다.
    좁아터진 방 안에는 책상과 책장, 작은 비키니 옷장, 싱크대와 작은 화장실까지 딸려있다.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수납장, 정리정돈의 흔적이 역력하지만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힌다.
    그때 핸드폰이 울리고 방 한가운데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는 은하. 꿈쩍 않는다.
    이에 질세라 끈질기게 울리는 핸드폰. 그제야 움찔, 더듬거리며 전화를 받는 은하.

    은하: …여보세요?
    (영주): (대뜸) 어디야?
    은하: 어, 언니?
    (영주): 아직도 자구 있어?

    은하, 고개 들어 벽시계를 바라본다. 11시 40분이 조금 넘은 시각.

    (영주): 택시번호 불러.
    은하: 어?
    (영주): 니가 외웠잖어.
    은하: 뭘?
    (영주): 택시번호!
    은하: 내가?
    (영주): 무슨 소리야! 수첩에 적기까지 하구선!
    은하: ……
    (영주): (심각) 장난하지 말고 얼른 불러. 수아가 집에 안 들어왔대.
    은하: 순천 38…
    (영주): (누군가에게) 거기 메모지 좀 주실래요?

    택시번호를 부르며 방안을 이리저리 훑는 은하의 시점,
    드디어 책상위에 놓인 가방을 발견. 가방 안을 이리저리 뒤져 수첩을 꺼낸다.
    수첩을 빠르게 넘기는 은하.

    (영주): (따라 적는 듯) 순천… 38, 또?

    표정이 어두워지는 은하. 수첩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다.

    은하: (고개 들고) 언니. 내가… 진짜 적은 거 맞아?
    (영주): 그래에~ 맞다니깐!
    은하: …근데, 없어.
    (영주): 뭐어?
    은하: (심각) 언니. 거기 어디야?

    2. 경찰서 안- 낮

    다급하게 숨을 헐떡이며 경찰서 안으로 들어서는 은하. 급하게 나온 탓인지 실내복차림차림(#1의 옷)에 슬리퍼를 신었다.
    입구에 걸린 벽시계, 11시 50분이 조금 넘은 시각을 가리킨다.
    은하의 시점, 누군가를 찾는 듯 이리저리 훑는 카메라.
    잡범들로 가득 찬 유치장.
    취조에 열중인 형사와 험상궂고 덩치가 큰, 혹은 열등감에 범행을 저지른 듯 작은 체구 소심한 모습의 용의자들.
    합의가 잘 안 되는지 악을 질러대며 싸우는 피해자와 가해자, 말리는 형사들의 모습이 어지럽다. 생전 이런 곳이 처음인 듯, 불안해 보이는 은하.

    영주(E): 은하야!

    은하의 시선에 들어오는 세 사람. 은하에게 손짓하는 영주와 최형사에게 사정사정하는 평범한 촌부인 수아 모(母), 태연하게 자판을 두드리며 모니터만 응시하는 최형사.

    3. 경찰서 화장실- 같은 시각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는 형사1. 열린 문틈 사이로 강반장의 얼굴 클로즈업.

    형사1: (놀라) 반장님?!
    강반장: 똥 쌌냐?
    형사1: (당황) 예?
    강반장: (고개를 쑥 빼고 킁킁대며) 안 쌌네? (그제야 형사1에게) 요새 바쁜가봐? 통 안 보이데? 애들은 잘 크지?
    형사1: (긁적) 하하. (못 본지 오래다.)
    강반장: (툭 치며) 몸 좀 사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형사1: 글쎄 말입니다. 요새 정신이 있어야죠. (화장실 문을 여는 강반장에게) 반장님! 언제 술한잔 하셔야죠?
    강반장: 술? 나야 조오치~

    4. 동 장소- 낮

    좁은 화장실 안.
    화장지를 돌돌 마는 강반장.
    세워진 변기 뚜껑을 탁 소리가 나게 내리고, 그 위를 휴지로 닦는다.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휴지.
    다시 휴지를 말기 시작하는 강반장.

    5. 경찰서 안- 낮

    성의 없이 휘리릭 넘어가는 수첩.
    표정없이 수첩을 내려다보는 최형사. 책상 위로 수첩을 던진다.

    최형사: 없네요… 택시 번호가.
    영주: 어? 그럴 리 없는데? (의자에 앉아 있는 은하를 내려다본다.)
    은하: 안 적었어요. 적었음, 내가 기억을, 에취!
    영주: (갸웃) 아닌데…

    인서트 컷: 택시번호판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은하. 택시 라이트 켜지고 불빛이 은하의 얼굴로 달려든다. 눈이 부신지 손으로 차양막을 만드는 은하.

    은하: 에취! 술을 너무 먹었나?
    수아 모: (불안) 형사님! 그럼 우리 수아는요?!

    이 때, 경찰서 안으로 들어오는 짱게
    .
    짱게(E): 짜장요! 어디다 두까요?
    최형사: 한 두번이냐. 새꺄!

    탁자위에 음식물 쏟아내는 짱게.

    최형사(E): 걱정 말고 댁에 가 계세요. 실종신고 됐으니까, 기다리면 곧 들어올 겁니다.
    수아 모: 실종신고만 야물딱지게 허믄 집으로 온가요?
    영주: (웃겨서) 풋!

    벽시계를 힐끔 보는 최 형사. 12시 10분이 조금 넘은 시각.

    최형사: (건성) 예예. 옵니다. 와요.
    은하: 근데요, 형사님, 이걸로, 끝인가요?
    최형사: (은하보며) 예에.
    은하: 아, 글구나…
    수아 모: (바닥에 주저앉는다.)
    은하, 영주: (놀란다.)

    그 때 경찰서 안으로 들어오는 강반장.

    강반장: 뭐야?
    최형사: 가출 신고요.

    대답과 함께 책상위에 놓인 실종 신고서를 들어 올리는 최형사. 실종신고서 위에 있던 수첩이 미끄러진다. 수첩을 집어 이러저리 넘기는 강반장.

    수아 모: 가출? 뭔놈의 가출! 우리 아는 그럴 아가 아니여라!
    영주: (다 들리는 혼잣말) 남자 때문이면 또 모르지…
    은하: 언니!
    영주: (외면)
    은하: 어머니. 수아, 에, 에취! …착하니까 별일 없을 거에요.

    최형사의 시점, 12시 20분을 가리키는 벽시계와 탁자위에 놓인 짜장면을 번갈아보며,

    최형사: (짜증) 신고접수 끝났으니까. 여기서 이러지들 마시고요, 자자!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들 나누세요.

    세 여자를 미꾸라지 몰이하듯 밖으로 내모는 최 형사.
    밀려나가던 은하, 뒤를 돌아본다.

    은하: 제 수첩은?
    최형사: (강반장을 쳐다본다.)
    강반장: (미소) 나중에 찾으러 와요.
    은하: ……

    경찰서 밖으로 쫓겨 나가는 세 여자. 그 뒷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는 강 반장...

    6. 경찰서 안- 낮

    비어있는 자장면 그릇. 카메라 팬하면
    자장면을 먹고 있는 최형사.

    최형사(E): 그 수첩, 은근히 기분 나쁘던데요.

    의자에 기대앉아 수첩을 넘겨보는 강반장.

    7. 허름한 구멍가게 문구사- 낮 (과거회상)

    '자막- 1993년'
    낡고 조악한 문구사 내부. 먼지가 쌓인 진열대위에 놓인 몇 안 되는 필기구들. 구석에 놓인 작은 트리에는 이 빠진 전구들이 빈약하게 감겨 깜박인다.
    이 때‘딸랑’하고 들리는 종소리.
    끼익하는 소리를 내며 힘겹게 열리는 미닫이 문. 열린 문 사리로 머리와 몸을 반쯤 내민 초췌한 할머니의 모습.

    할머니: 누구요?

    문 앞에 서 있는 어린 은하와 소녀1

    (시간경과)

    소녀1: 딴데루 가자! 동현이 줄껀데, 이쁜 카드가 한 개두 없어.

    불쌍한 할머니의 얼굴을 보는 은하. 이내 낡은 카드를 하나 집는다.

    8. 대형 문구사- 낮

    큼직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오는 어린 은하와 소녀1. 경쾌한 캐롤 멜로디가 들린다.

    아줌마(E) : 어서 오세요.

    화려한 트리와 산타인형, 예쁜 문구제품, 많고 다양한 카드로 가득 찬 문구사.
    신이 난 소녀1. 매장 안을 돌아다니며 카드를 고른다.
    은하의 시점, 카운터에 앉아 TV를 보는 주인아줌마와 앞에 쌓일 문제집을 번갈아 힐끔거린다.
    아줌마를 주시하며 문제집 사이에 카드를 끼워 넣는 은하.

    소녀1: (카드 보이며) 너무 예쁘지?
    은하: 으응, 이뿌다.
    소녀1: (아줌마 보며) 이거 얼마에요?
    아줌마: (TV에서 시선 떼고) 1500원

    은하의 시점, 카운터에서 계산하는 소녀1과 아줌마.
    문제집사이에서 카드를 꺼내 잽싸게 등 뒤로 감추는 은하.
    문구사를 나가는 두 소녀. 그 때

    아줌마(E) : 잠깐만!

    움찔하는 은하.

    9. 초등학교 5-3반- 아침

    교실 뒤로 전부 밀어진 책걸상. 청소도구를 들고 장난하는 아이들 사이로 너댓명 가량의 아이들이 모여 있다.
    무리 중 가장 키가 큰 남자아이가 들고 있는 카드를 열자, 경쾌한 멜로디가 들린다. (곡명: 캐롤 ‘울면 안돼)

    모인아이들: 우와!!

    이 때, 무리에서 벗어나 프레임 아웃하는 소녀2, 소녀1에게 다가간다.

    소녀2: 저 카드 니가 준거지?
    소녀1: (엎드려 있다.)
    소녀2: 고백했구나? 뭐래?

    고개든 소녀1, 얼마나 울었는지 두 눈이 퉁퉁 부어있다.

    10. 대형문구사- 낮 (플래시백)

    씬 8과 이어지는 장면.
    무릎에 덮인 숄을 걷는 아줌마.
    고개 숙인 은하. 등 뒤에서 구겨지는 카드. 영문을 모른 채 두 사람만 번갈아보는 소녀1

    아줌마: 뒤에 뭐 감췄어!
    은하: ……
    아준마: 어서 말해!
    은하: ……

    거칠게 은하를 돌려세우는 아줌마.
    구겨진 카드를 발견하고 은하의 머리를 사정없이 후려진다.
    바닥으로 쓰러지는 은하.
    은하와 함께 바닥에 나뒹구는 구겨진 카드.

    소녀1: 어? 이거 요 앞 구멍가게에서 산건데? (쌩글 웃으며) 아줌마, 실수하셨다!
    아줌마: (무색한 표정)
    은하: ……

    (시간 경과)

    대형문구사 밖, 손에 든 카드를 천천히 열어보는 은하. 캐롤송 울면 안돼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11. 초등학교 5-3반- 아침

    소녀2를 부둥켜안고 엉엉 우는 소녀1.

    소녀1: 딴 데서 산 게 미안해서 숨긴 거였대…!

    12. 초등학교 5-3반- 아침

    부끄러운 표정의 은하. 화면위로 우렁찬 박수소리가 들린다.
    카메라 팬하면 상장과 꽃다발을 든 은하와 은하의 어깨를 따스하게 감싼 여선생의 모습이다.

    여선생: (목소리 높여) 여러분도 은하처럼 착한 일 많이 할 수 있죠?
    아이들: 네!
    여선생: 자. 다시 한 번 박수!

    고함을 지르며 박수를 치는 아이들.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엉터리박수를 치는 소녀1.

    13. 여고 2-9반- 낮

    칠판 모퉁이에 적힌 글씨. ‘주번- 이은하, 김지연’
    카메라 팬하면 텅 빈 교실 안 전경.
    학생들이 벗어둔 교복으로 책상 위가 어지럽다. 교실 이곳저곳을 비추던 카메라가 무심코 지나치다 다시 포착한 화면.
    가방을 뒤지고 있는 도둑녀다.
    지갑을 열어 지폐를 자신의 치마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그 때 화면위로 문 열리는 소리 들리고 놀란 도둑녀, 지갑을 도로 가방에 넣는다.
    도둑녀의 시점, 교실문 앞에 서 있는 체육복차림의 은하.

    은하: 여긴, 9반인데?
    도둑녀: 아, 교과서 좀 빌릴려구,
    은하: 빌렸어?
    도둑녀: 아니,
    은하: 내가 빌려줄게. 무슨 과목이야?
    도둑녀: 미술.
    은하: ……
    도둑녀: 없지? 다른 반으로 가봐야겠다.

    교실 문을 나서는 여학생의 얼굴 위로

    은하(E): 설마, 도둑질 같은 거… 한 건 아니지?
    도둑녀: ……
    은하: 나쁜 짓이니까.
    도둑녀: (피식) 너, 나 알어? 난, 너 아는데.
    은하: (?)
    도둑녀: 너, 착하잖아. 그래서 말인데,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도둑녀.

    도둑녀: 나 여기 온 거 비밀이다?
    은하: ……
    도둑녀(E): 약속을 어기는 것도 나쁜 짓인 거 알지?

    14. 여고 2-9반- 밤(야자 시간)

    의자를 들고 기합받는 여학생들의 모습, 분단과 분단 사이를 오가는 남선생. 힘에 부쳐 팔을 내리거나 의자 받침을 머리에 얹어 요령부리는 여학생들.
    그 중, 유난히 힘들어 하는 여학생1. 땀을 흘리며 팔을 심하게 떨고 있다.

    남선생: (학생들에게) 이래도 안 나오지!

    그 때, 바닥에 떨어진 의자. 누가 떨어뜨렸는지 기웃거리며 웅성거리는 아이들.
    고개숙인 여학생1, 의자를 집는 남선생.

    남선생: (여학생1에게) 들어!

    아이들의 웅성거림. 울어버리는 여학생1, 받아든 의자를 집어 던진다.

    여학생1: (고함) 왜에! 우리한테 그래요!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체육시간이었는데에! 교실엔 아무도 없었다구요!
    남선생: ……
    아이들: 맞아요!! 교실엔 주번만 있었어요! 문단속도 주번이 했구요!
    남선생: 주번 누구야.

    빠르게 은하를 비추는 카메라, 놀란 은하의 얼굴에서
    암전되는 화면.

    15. 경찰서 밖 계단 위- 낮(현재)

    F.I
    경찰서 계단을 내려오는 세 여자.
    이내 울음을 터트리며 계단에 주저앉아 버리는 수아 모. 경찰서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자 수아 모에게서 살짝 떨어지는 영주.
    수아 모를 부축, 위로 하면서 계단 아래로 데리고 내려가는 은하.

    16. 경찰서 안- 같은 시각

    창가에 서 있는 강반장. 화면 위로 들리는 경찰서 내부 소음들.
    강반장의 시점으로 창 너머 작게 보이는 은하일행. 택시를 잡으려는 은하. 멈춰선 택시, 수아 모를 부축해 택시에 태우는 은하의 모습이 이어지고, 그런 은하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강반장의 손가락.
    은하의 움직임이 멈추자, 순간 정적이 감돈다.
    강반장의 손가락이 동작을 멈춘 은하의 모습을 완전히 가려버린다.
    창 너머에서 시선을 거두고 수첩을 넘겨보는 강반장. 처음으로 공개되는 수첩 안.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보이는 일기처럼 빼곡히 적힌 작은 글씨들과 휘갈겨 쓴 씨발년, 나쁜년, 갈보년 따위의 욕설들, 무언가를 썼다가 지운 듯 까맣게 칠해진 흔적과 낙서들, 괴상한 그림들…
    다시 창 너머를 보는 강반장의 시점, 텅빈 거리, 은하는 없다.
    이 때, 정적을 깨는 요란한 전화 벨소리.

    최형사(E): 예. 순천경찰서 강력반 최경식입니다. 뭐라고? 알았어! 지금 간다! (전화 끊고) 젠장! 반장님!

    17. 영안실 안- 낮

    싸늘한 실내등이 켜진 영안실.
    침대 위에는 시신한구가 놓여있다. 시신을 덮은 흰 천을 걷는 최형사.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는 중년여자(50대). 무신경한 표정의 강반장.

    최형사: 보세요.
    중년여자: (외면)
    최형사: 아, 왜 이러세요. 진짜! 보셔야 확인을 하죠. 남편분이 맞냐고요!

    화장이 얼룩진 중년여자의 얼굴, 끝내 외면한다.

    18 경찰서 안- 낮

    길이를 표시하는 엄지와 검지손가락 클로즈업.

    최형사(E): 직경이 한… 요정도 쯤?

    카메라 팬하면,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있는 강반장과 책상위에 걸터앉은 최형사다. 화면위로 인터넷 고스톱 효과음이 들린다.

    최형사: 칼에 찔렸는데 사인은… 심장마비고요. 에, 또… 별다른 저항흔적이 없는 걸로 봐선, 면식범이거나 (괜히 흥분하며) 그, 있잖습니까. 저항할 수조차 없는 긴박한 상황같은…
    강반장: (말 자르며) 됐고! 사망추정시간.
    최형사: (서류 뒤적이며) 부검결과로 봐선, 한 열흘정도 (갑자기) 반장님! 제 생각엔,

    모니터에 열중하는 강반장의 모습위로

    최형사(E): 보험금을 노린, 단순자살 아닐까요? 여기 보니까, 쪼그맣게 개인사업 하는 걸로 나와 있는데, 부도나기 직전이었다고.

    19. 경찰서 안- 밤

    아무도 없는 경찰서.
    책상에 쌓인 서류뭉치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훑어보는 강 반장.
    한 장을 넘기자 수아의 얼굴사진이 붙은 실종신고서가 보인다.
    강반장. 잠깐 보더니 이내 넘긴다. 또 다른 서류뭉치를 뒤적거린다.

    20. 박동식의 아파트 현관 앞- 낮

    열린 현관문 사이로 얼굴과 상체를 내민 평범한 얼굴, 깡마른 체구의 박동식(50대)
    경찰 신분들을 제시하는 강반장.

    강반장: 박형식씨가 형님 맞죠?

    한참을 대꾸없는 박동식, 갑자기 잽싸게 문을 닫는다. 놀란 강반장, 반사적으로 문고리를 잡지만 이번에 문을 열어젖히는 박동식. 나가떨어진 강반장.
    재빠르게 도망가는 박동식의 뒷모습을 보고 욕설을 뱉으며 일어나는 강반장. 그 때 아파트 단지 아래쪽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비명소리.
    아래를 내려다보는 강반장의 시점,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 떨어져 죽은 박동식과 주변에 몰려있는 아파트 주민들의 모습이 보인다.

    21. 경찰서 취조실- 낮 (플래시 백)

    천장에 매달린 채 흔들거리는 조명등.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아있는 강반장과 중년여자. 책상 위에는 서류뭉치들이 쌓여있다.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취조하는 강반장.

    강반장: 남편이 집에 안 들어온지 얼마나 됐어요?
    중년여자: …열흘하고도 이틀정도 됐어요.
    강반장(E): 다행히 기억은 하네. (서류 밀며) 이거 그동안 접수된 실종신고서에요. 근데, 박형식씨는 없드라구요. 집에 안 들어온지 열흘이 넘었는데.

    침묵하는 중년여자, 이내 울음을 터트린다.

    (시간 경과)

    눈물을 닦는 중년여자. 얼마나 울었는지 몰골이 말이 아니다.

    중년여자: 시어머니 제삿날이었어요. 어머니를 모신 사람이 동서라 시숙님 집에서 제사를 모셨죠. 젯상을 물리고 남편이랑 시숙님이 술을 먹었는데, 그게 화근이었어요.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양반들이라, 술을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22. 박동식의 아파트, 주방- 늦은 밤(과거회상)

    중년여자가 식탁에 앉아 사과를 깎고 있고, 박동식의 처는 싱크대 조리대에서 남은 음식들을 정리하고 있다. 화면위로 박형식과 동식이 티격태격하는 목소리가 얼핏 들리자,

    중년여자: (과일 깎으며) 또 시작이네. 하여간 박씨 집안 종자들은 알아줘야 돼. 어찌된 집구석이 만나기만 하면 싸움질이야!
    박동식의 처: 그러게요. 형님. 우리만큼만 하면 좀 좋아요?
    중년여자: 맞어! (사과 한 조각을 깔로 찍어 베어문다) 달다. 동서! 설거지는 내가 할테니까. 이리와서 이것 좀 먹어봐. 너무 맛있다~.
    박동식의 처: 기왕 손에 물 묻힌거 마저 할게요. 형님.

    사과를 다 깎은 중년여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칼을 식탁위에 세워본다.
    중년여자: 어머니 살아계셨을 때 그러시는데, 칼을 이렇게 세워두면 귀신이 집안에 얼씬도 안한다고.
    박동식의 처: (뒤돌아보며) 어머! 형님! 그러다 어머님 못 들어오시면 어떡해요.
    중년여자: 에이~ 동서는 그걸 믿어? 미신이지…!

    설거지하는 동서에게 사과를 먹여주는 중년여자. 그 때, 화면위로 들리는 두 형제의 고함소리, 안방 문이 꽝하고 닫히는 소리 들린다. 놀란 중년여자의 시점, 식탁위에 세워둔 칼이 없다.

    23. 박 동식의 아파트, 안방- 새벽

    시어머니 초상화, 꺼져버린 향.
    카메라 팬하면, 제사상위에 음식들이 군데군데 비어있고, 바닥에 엎어진 술상과 음식찌꺼기, 깨진 접시조각들. 그 사이에 고인 피와 바닥에 떨어져있는 피묻은 칼. 울면서 걸레질 하는 박동식의 처. 차마 피 묻은 칼은 만지지 못한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물이 말라 얼룩진 얼굴의 중년여자, 넋이 나간 표정이다. 카메라 빠지면 중년여자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박동식.

    박동식: 아니야. 형수. 내가 한거 아니야! 마귀! 그래! 마귀가 한거야. 귀신이 시켰어! 내가 한게 아니야. (갑자기 애원) 형수. 형수니임. 나 좀 살려줘. 알잖아요. 저 이럴 놈 아니잖아요!
    중년여자: (외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바닥에 놓인 피 묻은 칼을 집는 박동식. 벌떡 일어나 미친놈처럼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전화선을 잘라 버린다.

    박동식: 씨이바알!
    박동식의 처: 여보! 여보오!!

    덜덜 떨며 동식이 손에 쥔 칼을 빼내려 하는 박동식의 처.
    처를 밀치는 동식. 주저앉아 바닥에 칼을 꽂는다.

    박동식: 다 같이 죽어. 이제 무서울 것도 없어. 그래! 다 죽이고! 나도 죽어!

    바닥에 꽂힌 칼.

    박동식: (중년여자에게) 그동안 해준 게 뭐있어. 엄마도 내가 모시고! 엄마 죽고 나서 받은 그 돈 몇 푼? 그거 챙겼다고? 왜! 내가 그거 못 가질 이유가 어딨어! 다했어. 내가! 알어? 이런 나한테 해준 게 뭐야!

    서럽게 우는 박동식의 처.

    박동식: (처에게) 그만 우세요. 누가 죽었어요? 동네 챙피하게 울고 지랄이세요. (불현듯) 그래!! 형수! 동생이 형 죽였다고 소문나면 동네 챙피해서 고개들고 다니겠어? 보험금은? 형수. 보험금 타먹을 수 있을 거 같애? 형수! 딱 한번만!! 내가 이 은혜는 두고두고 갚을께. 한번만, 한번만 눈 감아줘요. 형수!
    중년여자: …
    박동식: (다리를 바닥에 비비면서) 한번만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어~~!! 형수우우~~~~!
    중년여자: (기가차서 피식 웃는다.)
    박동식: (형수가 웃자 박수치며) 아이고! 웃네! 웃어! 우리 형수가 웃네! 아이고 좋아라~~!

    일어나 박수치며 춤추는 박동식의 모습위로

    중년여자(E): …사람이 아니었어. 돈 몇 푼에 형을 죽인 시숙이나, 남편 팔아먹은 나나… 사람이 아니었어요……

    천천히 암전되는 화면.

    24. 경찰서 취조실 밖- 밤 (현재)

    의자에 앉아 담배 피우는 강반장. 그 때 복도 끝에서 들리는 여자의 울음소리.
    강반장의 시점, 최형사를 물고 늘어지며 사정하는 수아 모다. 수아 모를 달래며 밖으로 내보내는 최형사.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강반장.

    25. 연탄구이 전문 대포집- 늦은 밤

    매캐한 연기로 가득한 대포집. 연탄불에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는 사람들로 붐빈다.
    술 마시고 박수치고 젓가락 놀리며 노래 부르는 사람들. 이야기 해대는 사람들.
    술 달라. 물 달라. 물수건 달라. 고기 달라. 소리치는 손님들. 주문을 받아 주방에 소리치고, 쟁반을 들고 바쁘게 움직이는 종업원들.
    그 때 낡은 대포집 문이 열리고 일용직 노동자로 보이는 세명의 중년남자가 들어온다.
    옷깃에 묻은 빗물을 털어내며 난로 앞에 몸을 녹이는 세 남자.

    중년남자1: (발 구르며 난로에 손을 내민다.) 아, 춥다. 추워. 무슨 놈의 겨울비가, 청승맞게스리. 이리도 많이 내린데.
    중년남자2: 그러게 말이여. 날도 쌀쌀한 것이. 기분도 영~ 아니올씨다네.
    중년남자3: 일도 없고, 이런 날엔 술이 최고지. 어이! 아줌마!
    아줌마(E): 에에.
    중년남자3: 여기 쏘주 일병하고 고기 좀 주소!

    불판 옆에 놓이는 소주 한 병.
    강반장이 뚜껑을 열어 비어있는 최형사의 소주잔에 붓는다. 최형사 두 손으로 예를 갖추고 술을 받는다. 소주를 한 입에 털어넣고 잔을 탁 터는 최형사. 소주 그 쓴맛에 김치 한 조각을 먹는다.

    최형사: 때깔 좋고 뽀대나길래 까우잡을려고 형삿밥 먹었더니만, 이거야 원.
    강반장: 아직 멀었어. 임마! 얼마나 먹었다고.

    강반장이 자신의 빈 잔에 술을 부으려 하자, 최형사가 얼른 병을 낚아채 강반장의 잔에 술을 붓는다.

    최형사: 반장님. 근데, 어떻게 아셨어요? 범인이 가족 중에 있는지?
    강반장: 너는 니 부모, 니 마누라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냐?
    최형사: 에 무슨?
    강반장: (웃음) 나는 아무도 안 믿는다.

    술잔을 비우는 강 반장.

    26. 산 중턱에 위치한 약수터- 이른 아침

    잿빛 하늘.
    비가 온 다음날이라 그런지 날씨가 우중충하다. 약수통을 들고 산길을 따라 힘차게 뛰어 올라가는 약수터남(40대 중반) 오랜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몸과 어울리게 혈기왕성한 모습으로 약수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그의 곁을 따르는 덩치 큰 개 한 마리. 피하는 약수터 사람들. 약수터남에게 가볍게 항의하지만, 안 문다고 우기는 약수터남. 동네 유지 느낌이 나는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다.
    약수터 내 소운동장, 일찍부터 나와 배드민턴을 치거나 가벼운 맨손체조, 기구를 만지는 사람들. 약수를 뜨기 위해 줄지어 있는 사람들.
    운동장을 열심히 뛰는 약수터남. 그를 따르는 개. 그렇게 한참을 뛰어 가다가 질퍽한 땅에 빠지는 약수터남의 운동화.

    약수터남: 에이~ 씨

    운동화에 매달린 묵직한 흙덩이를 계단 모서리에 쓱쓱 문지르는 약수터남.
    다시 운동장을 뛰기 시작하는데 개가 보이지 않는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약수터남의 시점으로 저 멀리 풀숲에서 땅을 파헤치고 있는 개.
    다가가는 약수터남, 개를 쫓자 파헤쳐진 땅속에 있는 검은 봉지가 보인다.

    약수터남: (사람들 들으라는 듯) 무식하게! 그깟 봉투가 얼마나 한다고. (봉지를 집어드는데) 윽! 뭔 냄새야!

    바닥에 팽개쳐지는 검은봉지. 다시 달려드는 개.
    돌아서서 가려는 약수터남.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개가 있는 곳으로 다시 다가간다. 개를 쫓고 봉지 안을 열어보는 약수터남.
    잿빛 하늘위로 울리는 비명소리.

    27. 경찰서 안- 아침

    인터넷 고스톱에 열중인 강반장. 누군가와 통화 중인 최형사.

    최형사: 네네. 알겠습니다. 지금 곧바로 나가겠습니다. (전화 끊고) 반장님!
    강반장: (고스톱 삼매경) 왜에?
    최형사: 저번에 실종신고 된 여자요.
    강반장: 누구?
    최형사: 왜, 그… 엄마가 무지하게 들이대고.
    강반장: 어. 그래그래. 찾았대?

    화면위로 들리는 고스톱 효과음.

    28. 전화 상담실- 같은 시각

    헤드셋을 착용하고 상담 준비하는 은하. 그 때 울리는 핸드폰 문자수신음. 폴더를 여는 은하의 시점, 실종미아센터에서 온 엠보경고다.

    -문자 내용: ♠실종자 찾기♠ 이름: 조수아(여) 생년월일: 1983년 6월 12일 발생년월일 2008년 12월 13일 발생장소: 전남 순천시 연향동 사거리 유흥가 키: 165 몸무게: 45 체격: 날씬하고 호리호리한 편. 얼굴형: 계란형 두발색상: 검정 두발형태: 긴 생머리, 실종당일 웨이브형태 상의: 코트 하의: 치마 신발: 구두 신고: 경찰청, 국번없이 112.-

    핸드폰 버튼을 누르는 은하. 문자가 아래로 내려간다. 맨 아래 보이는 마지막 문자 내용. -상세사진 확인, 본 정보 확인시 통화료 무료-
    폴더를 급하게 닫아버리고 뒤를 돌아본다.
    비어있는 수아의 자리.

    29. 산 중턱에 위치한 약수터- 아침

    극부감으로 내려다 본 사건현장.
    정차된 경찰차량들. 사이렌을 울려대며 프레임 인하는 앰뷸런스. 쌈구경하듯 사건현장 주변을 기웃거리는 약수터 사람들. 폴리스 라인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감식반과 경찰들. 카메라 내려오면, 저 멀리 형사와 인터뷰 중인 약수터남의 모습이 보인다.

    약수터남: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저의 예리한 직감 때문에 저는 봉지를 열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엉말! 참혹했습니다. 썩은내가 어찌나 진동하던지. 얼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잖아요. 그, 외국인이 여자를 죽여서 가방에 넣고 다닌 사건! 바로 그거에요. 그거! 피가 철철 흐르는 가방과 어눌한 말투!! (흉내내며) “돼이지고기이에요오~” 그게! 생각이 났던 겁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봉지를 열어!

    흰 천으로 덮여진 시신. 주변에서 증거수집에 한창인 감식반원들. 정신없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폴리스 라인 넘어 현장으로 들어오는 강반장.

    강반장: 뭐야, 저거?
    최형사: 최초 목격잡니다.
    강반장: 존나 말 많네. 실종된 그 여자 맞아?
    최형사: …네.
    강반장: 보호자 연락했어?
    최형사: 그게 좀…
    강반장; 왜?
    최형사: …시신이, 머리만 있어요. 머리털도 죄다 뽑혔고, 또.
    강반장: 또, 뭐?

    최형사의 시선을 따라 빠르게 이동하는 카메라. 인터뷰하는 약수터남 곁에서 킁킁대는 개.

    최형사: 얼굴도 쫌…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

    흰천을 걷어보는 강반장.

    강반장: 에이 저 개새끼가!

    30. 경찰서 안- 낮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경찰서 안.
    여기 저기 울려대는 전화 벨소리. 경찰서 안으로 들어오려는 기자들. 막아서는 형사들과 순경들의 격렬한 몸부림.

    최형사: (기자들을 막으며) 너무들 하는 거 아닙니까? 비공개사건에! 아직 수사착수도 안 했습니다! 이런 끔찍한 사건을 알려서 뭐 좋을 게 있습니까? 이런건 기자님들이 알아서 막아주셔야지. 안 그래요? 국민들 불안해서 뭐 좋을 게 있습니까!

    최형사가 일장연설을 하는 동안,

    강반장: 핸드폰 위치추적 의뢰하고! 택시번호. 그래. 택시번호!! (형사들에게) 택시번호 없어? 저번에 이 여자 주변인물 조사 안했어?
    이형사: 그게. 최형사님이 하신 거라…

    기사들과 대치상태에 있는 최형사.

    강반장: (한숨) 젠장! 부검결과는?
    이형사: 다음 주중에 나올 거라고…
    강반장: (혼잣말) 머리 하나 부검하는데 다음 주는 무슨! 씨… (사이) 이 여자 주변인물들 내가 직접 만나볼테니까. 이 여자 실종당일 동선이랑, 이 지역 강도, 강간 전과자들 뽑아놔!

    이 때 들리는 최형사의 목소리.

    최형사(E): 이러시면 안됩니다!
    수아 모(E): 이거 놔아!!

    기자들도 쩔쩔매던 순경들과 최 형사라는 바리게이트를 밀어붙이고 경찰서 안으로 들어오는 수아 모. 책상에 있는 서류들과 컴퓨터, 잡다한 물건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한다. 미친 상태와 다름없어 보이는 수아 모의 모습에 기가 눌러 말리지도 못하고 망연자실 보고만 있는 형사들. 먹잇감이라도 찾은 양 촉수를 세우듯 카메라를 치켜들고 지켜보는 기자들. 수아 모와 눈이 마주치는 강반장.

    수아 모: 너지? 니가 여기 대장이지?

    강반장의 멱살을 쥐고 늘어지는 수아 모. 프레임 인하는 최형사. 수아 모를 떼어 내려하지만 그런 최형사를 저지하는 강반장. 기자들의 촬영을 막는 순경들. 여기저기서 터지는 플래시.

    수아 모: 니들이 팔짱끼고 구경만하다가 우리 수아는! 세상에에~~우리 수아는! (바닥에 주저앉는다.) 아이고! 아이고! 수아야! 수아야! 얼마나 무서월을까. 엄마도 없는데. 지 혼자서, 얼마나!!
    최형사: 어머니 진정하세요. 저희가 꼭 잡겠습니다.
    수아 모: (악을 쓰며) 죽었잖아! 살아있었을 때, 그 때 찾았어야지!

    31. 전화 상담실 복도- 낮

    긴 복도를 걸어가는 은하의 뒷모습.

    32. 경찰서 안- 낮

    수마가 할퀴고 지나간 자리처럼 침울한 분위기의 경찰서. 어지러운 책상 위를 정리하고 바닥을 쓸며 치워나가는 순경들. 소파에 앉아 있는 형사들의 시선이 한 곳을 향하고 있다. 화면 위로 들리는 기자의 목소리. 카메라 형사들의 시선을 따라 이동하면 TV보인다.

    기자(여): 제가 나와 있는 (배경인 약수터를 손으로 가리키며) 이곳은 숨진 조모씨가 발견된 장소입니다. 직장동료들과의 회식자리 이후 실종된지 6일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조모씨는 발견당시 모습이 참혹하여 우리를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실종신고 이후 6일이라는 시간동안 경찰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관계당국의 시급한 대책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갑자기 꺼지는 TV화면. 최형사 리모컨을 집어던진다.

    최형사: 우리가 무슨 슈퍼맨이야? 하느님이야? 실종자를 어디서 어떻게 무슨 수로 찾어! (형사들에게) 안 그래? (강반장에게) 안 그래요! 반장님?

    자리에 앉아 신문을 보는 있는 강반장. 신문의 헤드라인.
    “한국경찰 실종자 수사 무엇이 문제인가?”“대책 없는 실종자 수사”“실종자 수사! 남의 집 불구경인가.” 따위의 헤드라인과 기사들. 기사 아래에는 수아 모에게 멱살 잡힌 강반장과 울부짖는 수아 모의 사진이 나란히 실려 있다.
    신문을 집어 던지는 강반장. 짜증이 밀려오는지 윗옷을 뒤져 담배를 찾는다. 담배가 없는지 애꿎은 책상만 걷어차는 강반장.

    33. 전화 상담실 문 앞- 낮

    웅성거리는 직원들. 길 부장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수아 모, 진땀 빼는 길 부장.

    34. 직원 휴게실-낮

    의자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는 세 여자.

    영주: 진짜야? 안 믿어져.
    종숙: 난 어제 9시 뉴스 봤는데, 조모씨라고 하는 순간, 팍!! 하고 감이 오드라구! 아… 죽었구나… 이젠 이 세상에 없구나…
    영주: 그럼, 보험금 나오나? 나오겠지??
    종숙: 당연하지! 보험금만 나오겠어?? 아까 수아 엄마 하는 거 보구두 그래?
    영주: 우리도 뭐. 해야 되는 거 아닌가? 회사차원으루다.

    두 사람의 대화를 말없이 듣고만 있는 은하.
    문득 고개를 든 은하의 시점으로 저 멀리 세 여자에게 다가오는 강반장이 보인다.

    (시간 경과)

    강반장에게 실종당일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세 여자.

    영주: 저희가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서, 괜히 긴장되고, 떨려서요.
    강반장: (웃음) 아이구! 당연히 이런 경험은 처음이셔야죠. 마직막이면 더 좋구요. (수첩에 메모하면서) 세 분 다 택시기사 얼굴 확인 못하셨고, 택시번호도 못봤고,

    한숨 쉬는 강반장을 쳐다보는 은하의 얼굴위로.

    강반장(E):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전혀 없네요.

    35. 강반장의 수사 시퀀스: 몽타주1

    -부검의를 인터뷰하는 최형사.
    -약수터남을 인터뷰하는 이형사.
    -수아가 택시를 탄 유흥가 사거리를 대낮에 돌아다니는 강반장과 최형사.
    -술집의 닫힌 셔터문을 두드리는 최형사.
    -술집 주인과 인터뷰하는 강반장.

    36. 경찰서 안- 낮

    경찰서 안으로 들어서는 강반장. 지친모습이다.
    강반장의 시점으로 사건회의를 하고 있는 형사들의 모습보이고,

    강반장: 뭣 좀 나왔냐?
    최형사: (서류 보이며) 실종지역에 사는 강도,강간 전과있는 놈들 뽑은건데, 수법이 동일한 놈은 없어요.

    서류를 꼼꼼하게 뒤적거리는 강반장. 그 위로,

    이형사(E): 전단 나왔습니다!

    강반장의 시점, 수아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실린 목격자수배전단지.

    -몽타주 전단지 내용-
    목격자를 찾습니다.
    2008년 12월 13일 02시 유흥가 사거리에서 직장동료들과 택시 동승 이후 실종.
    사례금: 500만원.

    37. 강반장 수사 시퀀스: 몽타주2

    -골목골목 목격자 전단지를 붙이고 있는 순경들.
    -기사식당주인에게 전단지를 보여주는 이형사.
    -늘어져있는 택시들 사이를 오가며 기사들에게 전단지를 보여주는 강반장과 최형사.

    38. 택시 타는 곳- 낮

    즐비하던 택시들이 어느새 전부 사라지고 휑한 거리. 녹초가 되어 길가에 앉아있는 강반장과 최형사.

    최형사: 에이씨! 택시번호만 있어도 이 고생은 안 하는 건데. 아! 우리 마누라 궁딩이 보고싶다아! 미자야!
    강반장: ……
    최형사: 이런다고 택시기사가 제 발로 나타나나?
    강반장: 초치지 마! 새꺄!
    최형사: 아, 반장님! 그래도 명색이 유력한 용의잔데…
    강반장: 기다려 보면 알어. 임마!

    프레임 인하는 택시. 일어서 택시로 다가가는 강반장.

    최형사: 씨발! 이게 무슨 개고생이야.

    39. 기사식당- 점심시간

    뉴스앵커 클로즈업.

    앵커: 얼마 전, 보도해 드렸지요. 경찰의 실종자 수사 미진으로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그 사건. 현재 어디까지 수사가 진행 중일까요. 현장에 조남식 기자 나가있습니다. (모니터보며) 조남식 기자!
    조남식 기자: (경찰서 앞에 서있다.) 네. 조남식입니다! 저는 현재 경찰서 앞에 나와 있습니다. 경찰은 강력한 용의자로서 택시기사를 지목! 목격자 확보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실종 사건이 발생했던 지역을…

    기자가 보도하는 동안 카메라 뒤로 빠지면 식당 안에서 밥을 먹고 있는 기사1, 2.

    기사1: (수저 과격하게 내려놓으며) 썅! 밥맛 떨어지게. 저런 거 터지면 꼬옥 우릴 들먹여! 만만한게 기사야? 우리 같이 선량하고 전투적으로 사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기사2: 밥이나 먹어. 임마. 코 찍찍 흐르는 애들 핸드폰이나 돌려줘라. 남의 전화기나 팔아 쳐먹는 놈이. 선량은 무슨…!

    그 때 식당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는 때 묻은 흰색 운동화. 주인아줌마의 반가운 인사 들리고, 카메라 운동화를 따라 이동하다 이내 멈춘다.
    소주광고모델인 여자연예인 사진 따위를 붙여두는 식당 벽이다.
    위로 이동하는 카메라. 여자연예인 사진 사이에 붙은 목격자 수배전단지. 활짝 웃고 있는 수아의 얼굴이 보인다.

    40. 경찰서 안- 늦은 저녁

    아무도 없는 경찰서 내부.
    홀로 앉아 은하의 수첩을 보고 있는 강반장. 이 때 프레임 인하는 최형사.

    최형사: 또 보세요. 그 수첩?
    강반장: 어어. (딴소리) 퇴근 안 해?
    최형사: (능청) 대장이 집에를 가야 말이죠.
    강반장: 위치추적 결과는?
    최형사: 아직요. 내일이나 나오겠죠. (서류, 책상에 올리며)
    강반장: 뭐야?
    최형사: 목격자제보요. 봤단 놈은 많은데, 오는 놈은 없네요.

    서류를 훑는 강반장. 그 때 화면위로.

    남자(E): 실례합니다아.

    경찰서 입구로 이동하는 카메라. 씬 39의 때 묻은 흰색 운동화다. 위로 이동하면, 한 손에 전단지를 꽉쥐고 기사 유니폼을 입은, 사람 좋게 생긴 남자가 웃고 서 있다.(택시기사 50대)

    41. 동장소- 늦은 밤

    컴퓨터 앞에 앉아 진술서를 작성하는 최형사. 책상을 사이에 두고 택시기사와 마주앉아 있다. 곁에서 카세트로 육성녹음 하는 강반장. 택시기사의 현란하고 디테일한 진술이 한창이다.

    택시기사: 여자만 세 명이었는디. 몸집이 이~렇게 (제스쳐 보여준다) 퉁퉁한 여자는 이미 술이 떡이 되갖꼬, 자빠져불고, 야무지게 생긴 여자가 낑낑댐시롱 택시에 태왔어. 둘이는 중간에 내려불고, (몽타주 손으로 가리키며) 이 여자만 남았는디 (심각) 이 여자는 쫌 달랐어… 첨에는 매곡동으로 가자고 하더니 나중엔 방향을 빠꾸드라고. 그래서 내가 똑똑히 기억하제 (딴소리) 사실, 내 머리가 보통머리가 이니여. 나도 소싯적에는 순사가 되고 싶었응께. (다시본론) 나야 뭐. 신나부렀제. 심야 시간이겄다, 할증에, 거리도 멀고. 좋타고 겁나게 밟았제. (팔짱낀 강 반장을 힘끔) 아… 근다고, 나가 신호를 드립따 무시하고 쌔캐 분거는 아니고 (갑자기 표준말) 주행속도를 지켜 가면서, 승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
    강반장: (말 자르며) 편하게 하세요.
    택시기사: 아. 그라까요? 음… 어디까지 했제?

    42. 택시 안- 새벽 (플래시 백)

    룸미러에 비친 택시기사의 웃는 눈.

    최형사(V.O): 주행속도와 승객의 안전까지요.
    택시기사(V.O): 아. 맞어맞어! 도착하고 본께 차비가 겁나게 나와부렀어. 근디,

    58340원을 표시하고 있는 미터기.

    택시기사: 58340원인디, 뒤에 꺼 까불고 58300원만 주씨요.

    뒷좌석에 앉아 있는 수아. 술이 과했는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지갑을 뒤적이더니 이내 당황한다.

    수아: (시원찮은 발음.) 아저씨이~ 돈이 쪼옴 모자라는데요. 제가요… (손가락질) 위에 올라가서 가지고 내려오면 (애교섞인) 안 되까요…?

    CUT TO
    택시기사의 시점. 사이드 미러에 비친 수아의 뒷모습. 비틀비틀거리며 아파트입구로 들어간다.

    43. 택시 안, 택시 밖- 새벽

    비틀대는 수아를 뒤로 하고 떠나는 택시.

    44. 경찰서 안- 늦은 밤 (현재)

    틱하고 정지되는 카세트 녹음기.
    모니터너머로 택시기사를 어이없이 쳐다보는 최형사.

    최형사: …끝이에요?
    택시기사: 끝인디?
    최형사: ……
    강반장: 어딥니까?

    45. 병원 접수과 - 낮

    어딘가에 전화하면서 자꾸 옆을 흘끔거리는 간호사

    간호사: 이원호 선생님 계세요? 여기 접수꽌데요.

    옆을 힐끔 쳐다보는 간호사의 시점,
    안내 데스크에 삐딱하게 기댄 채 커피를 마시고 있는 강 반장.

    46. 수술실 앞- 낮

    수술복 차림의 남자와 강반장.
    강반장의 시점으로 보이는 남자의 수술복, 피가 튀어 온통 지저분하다.

    강반장: 굉장히, 합법적이네.

    47. 경찰서 취조실- 밤

    어두운 실내, 조명등이 흔들거린다.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강반장과 이원호.
    오랜 시간동안 취조를 했는지 두 사람 다 지친 모습이다.

    이원호: 안 왔어요! 오지 않았다구요!
    강반장: 그 시간에 어디 있었어?
    이원호: 집에요. 집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강반장: 집에 있었는데, 조수아는 오지 않았다?
    이원호: 네.
    강반장: 죽은 조수아가 들어간 걸 본 사람이 있어.
    이원호: ……

    취조실 문이 열리고,

    이형사: 반장님!

    48. 휴대폰 종합대리점 앞- 같은 시각

    ‘휴대폰 종합 대리점’이라고 쓰인 낡은 간판. 카메라 팬하면, 대리점 문이 열리고 나오는 기사1.(씬 39)
    기사1이 프레임 아웃하고 난 뒤에도 한참 대리점 입구를 보여주는 카메라.
    다시 열리는 대리점 문, 전화통화를 하면서 나오는 최형사가 보인다.

    최형사: 반장님! 핸드폰 위치추적 결과 나왔는데요! 에이 (침 뱉는) 퉷! 기사새끼가 이빨깐 거 같은데요?

    49. 택시 안- 새벽 (플래시 백)

    씬42와 같은 장면,

    58340원을 표시하는 미터기.
    급하게 지갑을 이리저리 뒤지는 수아.

    수아: (머리 치며) 아~! 술값!! (아저씨보며) 아저씨, 차비가 모자라는데, 위에 잠깐 갔다 와서 드릴게요.
    택시기사: (백미러에 눈만 보이며) 아가씰 우찌 믿고? (눈짓) 그거래도 맽겨!

    가방 옆에 놓인 핸드폰.

    CUT TO
    택시에서 내리는 수아. 아파트로 걸어가려다 부웅하는 소리에 돌아보니
    이미 저만치 멀어지는 택시.

    50. 경찰서 취조실 밖- 낮

    의자에 앉아 있는 강반장의 시점으로 보여지는 복도 끝.
    택시기사가 이형사에게 연행되어 끌려가고 있다.
    의자에 기대는 강반장. 그의 뒤쪽에 나 있는 창문 너머로 화가 난 이원호와 곁에 서 있는 정장차림의 변호사. 그들과 삿대질하며 싸우는 최형사의 모습이 보인다.

    (시간경과)

    담배 피우는 강반장과 불안한 듯, 취조실 복도를 안절부절 서성거리는 최형사.

    강반장: 붕알 떨어진다. 앉어라. 임마.
    최형사: (흥분) 수사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개새끼가 소송한다고 지랄이야.
    강반장: (담배만 피운다.)
    최형사: 기사새끼는 폰이나 팔아처먹고!
    강반장: 이제 확보된 목격자 없지?
    최형사: 아무것도 없어요. 공중에 부웅 떴어요. 떠!
    강반장: 원점이라…
    최형사: 맨땅에 헤딩해야죠.

    여전히 담배만 피워대는 강반장의 얼굴위로,

    최형사(E): 원한관계, 치정관계, 있는 거 없는 거 죄다 뒤집어서 죽은 사람 얼굴에 똥칠 한번 하고! 후… 젠장!!
    강반장: (중얼거림) 원한, 죽일만한 사람…?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무섭게 얼굴이 굳어지는 강반장.

    인서트 컷- 온갖 욕설과 낙서들. 괴상한 그림들로 가득한 은하의 수첩안.

    51. 경찰서 안- 낮

    다급하게 책상을 이리저리 뒤지는 강반장. 책상 위 서류들을 뒤집어엎고, 서랍을 열어 안을 뒤적이다 이내 멈칫한다.
    서랍에서 수첩을 꺼내는 강반장. 조심스럽게 천천히 수첩을 한 장 한 장 넘긴다. 일기장처럼 빼곡하게 적힌 글씨들.

    52. 모텔- 낮(플래시 백)

    ‘자막- 2008년 11월’
    유니폼인 듯한 윗옷의 단추를 아래서부터 차근차근 채워나가는 여자의 손. 카메라 손을 따라 올라가면, 가슴 언저리에 달린 명찰, ‘이은하’ 클로즈업 .
    치마를 꿰어 입고 지퍼를 올리는 은하의 손을 잡는 누군가의 두툼한 손.
    카메라 손을 따라 이동하면 얼굴에 홍조를 띈 채 웃고 있는 번들번들 대머리 중년 남자.

    길 부장: 고마워요.
    은하: 아니에요. 저 먼저 갈게요. 천천히 쉬다오세요.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길 부장의 얼굴위로 문 닫히는 소리.

    53. 전화상담실 복도, 게시판 앞- 낮

    힘겹게 까치발로 서 있는 누군가의 굵은 다리, 알이 툭 불거져 나왔다.
    카메라 굵은 다리를 따라 천천히 위로 이동하면 씬52의 은하와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게시판에 붙은 '업무능력평가표'를 유심히 보고 있는 뚱녀.
    수많은 이름을 쭈욱 훑고 내려가다‘박종숙'에서 우뚝 멈추는 손가락. 이내 옆으로 쭉욱 이동하면,‘64점'이다.
    한숨쉬는 뚱녀. 다시 이동하는 손가락. 이번엔‘이은하'에서 우뚝 멈추고 또 옆으로 이동한다.‘100점’이다.

    뚱녀: 잘났어.

    게시판을 바라보는 길 부장의 시점, ‘업무능력 평가표‘ 옆에 붙은 ‘이달의 친절 상담원- 이은하’ 해맑게 웃는 은하의 얼굴사진 클로즈 업.

    54. 전화상담실 안 -낮

    씬53의 사진이 실사화 되면서 실제 은하의 웃는 얼굴로 변한다.
    카메라 팬하면, 헤드셋을 낀 은하가 주위가 온통 유리칸막이로 둘러싸인 자리에 앉아 고객과 상담하는 모습이 보인다.

    은하: (상담원 특유의 하이톤 목소리) 사랑과 즐거움을 드리는 미래로 통신 상담원 이은하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고객님? (…) (통화하면서 고객의 불편사항을 수첩에 메모하는 은하) 아, 그동안 불편하셨을 텐데, 지금 제가 고객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대리점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 네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보류버튼을 누르는 은하. 보류음이 나오면서 고객과의 통화가 일시 차단되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대리점 위치를 검색, 모니터상에 약도가 뜬다. 수첩에 연락처를 기록하는 은하. 다시 보류버튼을 누른다. 고객과 통화 연결된다.

    은하: 고객님.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대리점 위치가 한 군데 나왔습니다. 혹시 남부생명 사거리 아십니까? (…) 네에. 거기서…

    고객과 통화하는 은하의 목소리가 점점 아련하게 들리면서 카메라 팬하면,
    전화 상담실에서 고객과 상담중인 수많은 상담원들의 모습이 극부감으로 보여진다. 화면 위로 그들의 통화내용이 엉켜 들린다. 평범한 직장이지만 왠지 아비규환의 생지옥처럼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55. 직원휴게실- 낮

    자판기 지폐투입구에 심하게 구겨진 천원을 넣으려 애쓰는 종숙. 들어가나 싶더니 이내 지잉하고 나와 버리는 지폐.

    종숙: 아쭈? 돈을 뱉어?
    은하: (웃으며 빳빳한 지폐를 넣어준다.)

    잽싸게 콜라버튼을 누르는 종숙. 덜컹하고 떨어지는 음료수. 푸쉬하는 소릴내며 시원하게 올라오는 콜라거품. 그것도 아까운지 핥아먹는 종숙.

    영주: (종숙에게) 너 억지로 구겨진 돈 가지고 댕기지?
    종숙: 아니야.
    은하; (웃음) 거짓말.
    종숙: 아니라니깐!

    영주에게 음료수를 건네는 은하.
    그 때 멀리서 들리는 여자의 웃음소리 은하의 시점, 남자 직원들과 시시덕거리고 있는 수아의 모습.

    종숙(E): 불여시!
    영주(E): 냅둬라. 얼굴이 이쁘시잖냐.

    두 사람의 대화에 아랑곳 하지 않고, 따스한 햇빛으로 물든 창가에 기대 창밖 풍경을 바라보는 은하. 한가로이 거리를 거니는 연인들과 밝은 모습의 대학생들.
    평화로운 기분에 빠져드는 은하.

    은하: 아, 이런 날은, 진짜 일하기 싫다.

    56. 전화상담실(전화상담 업무 시퀀스) - 낮

    상담중인 영주

    영주: 알겠습니다. 고객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여자1): 네.

    보류버튼 누르는 영주. 자판 두드리고 엔터. 모니터에 뜨는 여자1의 개인정보. 다시 통화하는 영주.

    영주: 고객님. 기다리게 해서 대단히 죄송하구요. 이번 달에는 미납된 요금이 없습니다. 도움이 되셨습니까?
    (여자1): 네. 감사합니다.
    영주: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구요. 지금까지 상담원 차...
    (여자1): (다급) 저, 저기요. 잠깐만요!
    영주: 네에. 말씀하십시오.
    (여자1): 저, 과젠데요. 설문조사거든요? 쉬워요. (버벅댄다) 그, 그냥 답변만, 해주시면 되는데…
    영주: 고객님. 지금은 업무 중이라.
    (여자1): (말 자르며) 제발! 한 번만요…!
    영주: (마지못해) 네. 알겠습니다.
    (여자1): (돌변) 자아!! 우리나라 성인남녀의 성도덕 의식구조에 관한 질문입니다.
    영주: 네? 아, 네에.
    (여자1): 자. 그럼. 준비되셨죠? (읽는 듯) 당신은 성인이십니까? 만19세 이상인(혼잣말) 아, 이건 됐고, 음… 아! 당신은 혼전순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주: (말려드는 듯 골똘히 고민) 결혼이라는 것은, 남녀가…
    (여자1): (정색) 저기, 보기가 있는데요.
    영주: (벙찐) 네?

    (시간경과)

    기가 막힌 표정을 짓는 영주.

    (여자2): 이름만 치면 될 거 아냐!!
    영주: (표정과 다른 밝은 목소리) 네에. 고객님 맞습니다. 맞는데요.
    (여자2): 당연하지! 난 틀린 말은 아예 안하는 사람이야.
    영주: 근데 그렇게 처리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아.
    (여자2): (버럭) 맞대매? 뭐야 또!!
    영주: 다른 고객님의 개인정보는 함부로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여자2): 그럼 니가 내 돈 대신 갚아 줄 거야?
    영주: (한숨)

    (시간경과)

    지친 표정의 영주. 목소리만은 밝다.

    영주: 고객님의 요금제를 일반에서 원하시는 지정번호할인으로 변경해 드렸습니다. 도움이 되셨습니까?
    (남자1): 아니.
    영주: (당황) 네?
    (남자1): 시간 있어? 오늘 날씨 죽이지. 오랜만에 드라이브라도 하까?

    헤드셋을 거칠게 벗어버리는 영주.

    57. 동장소- 낮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상담중인 종숙.

    (여자3): (버럭) 아, 글쎄!! 이 아가씨야! 내 남편인데 왜 내가 알면 안 되냐구!!
    종숙: (목소리는 밝게) 명의자가 남편분이시기 때문에 본인이 아니면 통화내역은 조회가 안 됩니다. 고객님.
    (여자3): 그럼. 명의를 나로 바꾸면 되는 거네?
    종숙: 네. 고객님.
    (여자3): 간단하네? 그럼 지금 바꿔줘. 내 이름, 주춘희니까. 지금 바꿔.
    종숙: (어이없음) 고객님? 명의 변경은 명의자와 직접 지점에 가셔야 변경 가능합니다. 남편분과 신분증 챙겨서 지점으로 가십시오.
    (여자3): ……
    종숙: 고객님?
    (여자3): (애원) 아가씨이. 우리 남편이 바람이 난거 같아서 그래. 좀 도와줘. 응? 증거가 있어야 남편을 족치든지 그 년을 족치든지 할 거 아냐.

    종숙, 한숨 쉬며 의자에 몸을 기댄다.

    (시간 경과)

    (여자4): (울먹) 시도 때도 없이 전화가 걸려 와요. 받아도 대답이 없고, 그냥 끊어버려요. 정말 너무너무 무서워요… 누굴까요?
    종숙: (건성) 그러세요? 저희가 제공하는 발신번호표시제한 수신차단 서비스를 신청해 드릴까요? 고객님?
    (여자4): ……
    종숙: 무료입니다. 고객니임.
    (여자4): ……
    종숙: 지금 바로 신청해 드리겠습니다.
    (여자4): 아니! 잠깐요!! 신청하지마세요!! …실은 얼마 전에 남자친구랑 헤어졌거든요? 혹시 걔가 전화한건 아닐까요? (갑자기 울음) 어어엉. 난 정말 헤어지기 싫었거든요?

    짜증나 보류버튼 눌러버리는 종숙. 보류음이 들리고

    종숙: (혼잣말) 지랄하네.

    아까부터 그런 종숙 뒤에 서 있는 누군가.

    길 부장(E): 박종숙씨. 녹음 중입니다. 주의하세요.

    (시간경과)

    통화대기 상태의 종숙. 콜이 들어오자 통화버튼 누른다. 지친표정이다.

    종숙: 행복과 즐거움을 드리는 상담원 박종숙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남자2): 거기, 119죠? 여기 불이 났어요!!
    종숙: (자포자기) 어디에요?
    (남자2): 내 마음에요!! 히힛.

    툭 끊기고 뚜뚜뚜. 하고 들리는 신호음. 어이없는 종숙. 내뱉는 한숨에 앞머리가 한번 올라갔다 내려온다. 통화대기 상태에서 다시 콜이 들어온다.

    종숙: 네. 행복과 즐거움을 드리는…

    58. 전화상담 콜센터 앞-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앙상한 나뭇가지들만 매달린 가로수 즐비하고, 꽤 쌀쌀한 바람이 부는지 옷깃을 여미며 계단을 내려오는 상담원들.
    그 사이에 퇴근이 마냥 좋은지 어깨동무하고 으쌰으쌰 계단을 내려오는 은하, 영주, 종숙. 저 멀리 화려한 옷차림의 수아도 보인다.

    영주: (한을 풀듯이) 술 마시러 가자!!
    은하: 오케바리!!
    종숙: 먹고 죽자아~

    거리로 나온 세 여자.
    그 때 뒤쪽에서 비추는 자동차 불빛. 빠앙하는 클렉션소리 들리고 돌아보는 은하의 시점으로, 고급 자동차에 탄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씬46, 이원호)

    수아: 오빠아!

    수아를 반기는 남자. 자동차 조수석에 타는 수아. 화면 위로.

    은하(E): 누구야?
    종숙: 의사래.
    영주: 이름이, 의사?
    종숙: (영주를 천천히 쳐다본다.)
    영주: (시선무시) 쟨 도대체 남자가 몇이냐?
    은하: ……

    59. 조개구이 전문 술집- 밤

    화면 가득 짠하고 부딪히는 세 개의 소주잔. 그 아래 거품을 품어대며 노릿하게 익어가는 굴구이. 소주를 쭈욱 들이키는 은하.

    종숙: (술이 좀 된듯 자세도 흐트러지고 발음도 꼬인다.) 남자야 많으면 많을수록 조오치~! 나두 돈 악착같이 모아서 대학 갈꺼야! 가서 멋찐 남자도 만나고! (갑자기) 아흥. 나두 남자 만나서 연애하고 싶어. 언니이… (운다.)

    육중한 몸으로 징징대며 난동부리는 종숙. 소주병과 컵이 깨져 요란한 소리를 낸다. 주위 사람들의 원성이 이어지고, 종숙을 말리는 영주. 일어서 사람들에게 사과하는 은하.

    (시간경과)

    언제 그랬냐는 듯 테이블에 엎어져 자는 종숙. 은하에게 술을 기울이는 영주.

    은하: 그만그만. 언니 나 오늘 당직조라 야간근무 서야 돼.
    영주: 니도 참, 독하다. 독해.
    은하: 아직 멀었어. 더 벌어야지.

    한잔 들이키는 영주.

    (시간경과)

    비좁은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는 종숙의 시점, 저 멀리 카운터에서 서로 계산하려고 실랑이 벌이는 은하와 영주가 보인다.
    종숙에게 다가오는 은하.

    은하: (흔들어 깨우며) 종숙아, 일어나, 집에 가야지.

    슬쩍 눈 감는 종숙.

    60. 은하의 자취방- 밤

    검은 화면. 누군가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 형광등 줄잡아 당기는 소리 들리면, 여러번 깜빡이는 불빛. 이내 화면 밝아지면, 형광등 아래 선 은하와 한눈에 들어오는 비좁은 방안.(씬 1에 나온 방.)
    책상위에 핸드폰을 올려놓고, 외투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꺼내는 은하. 돼지 저금통에 넣는다. 벗은 외투를 옷걸이에 걸고 화장실로 향하는 은하.

    61. 화장실 안- 밤

    비좁은 화장실. 변기위에 앉아 있는 은하. 그 때 은하의 얼굴 옆에 난 조그만 창문에 언듯언듯 비치는 그림자. 이내 창문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남자의 얼굴 실루엣.
    늘 있는 일인 듯 태연한 은하. 당황하지 않고 변기 뒤로 손을 뻗어 몽키를 집어 든다.
    창문에 몽키를 툭툭 치면서

    은하: 아저씨이. 머리통을 박살내 버릴 거예요.

    꿈쩍 않는 그림자. 오히려 얼굴을 더 창문으로 들이밀어 얼굴이 찌그러진다.

    은하: 경찰 부른다구요!

    그때서야 후다닥 사라지는 그림자. 도망치듯 뛰어가는 발자국 소리. 점점 멀어지면 웃고 마는 은하.

    62. 은하의 자취방- 밤

    수건으로 머릴 말리며 화장실에서 나오는 은하. 수건을 바닥에 던지고 그 위에 발을 쓱쓱 문지르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린다.

    은하: 네에. 행복과 즐거움을 드리는 미래로 통신…(!) 엄마아아!(…) 아냐아냐! (…) 응. 몸은 좀 어때요? (…) 어 다행이다. (…) 안 돼. 지금 또 나가야 돼. (…) 뭐얼~ 열심히 벌어서 좋은집 구하고 울 엄마 모셔와야지. (…) 응. 밥 잘먹구 있어. 에이~ 걱정 마요.

    63. 전화 상담실- 새벽

    화면 가득, 눈물범벅인 은하의 얼굴.

    은하: (울먹)힘내세요. 고객님.
    (빛나 아빠): 고맙습니다. 들어주셔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는 은하. 그 때 은하의 얼굴 앞으로 내밀어진 체크무늬 손수건.

    민석(E): 닦아요.

    64. 전화 상담실 복도- 새벽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진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 속에 차 티백을 넣는 민석.

    민석: (은하에게) 마셔요.
    은하: 고마워요. (냄새 맡으며) 음. 향이 좋아요.
    민석: 케모마일이에요. 허브차 일종인데. 카페인이 없어서 마시고 나면 마음이 좀 진정될 거예요.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은하.

    민석(E): 왜 그렇게 운거에요?
    은하: (웃음) 그러게요. 창피하게. 손수건은 제가 세탁해서 드릴게요.

    한참을 서서 담소를 나누는 두 사람.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는 누군가.
    길 부장이다.

    65. 전화 상담실- 낮

    상담중인 민석.

    (여자5): (호들갑) 어머? 남자 상담원이랑은 처음 통화해 봐요. 신기해라. 목소리도 참 좋네요. 호호호!
    민석: (틈을 주지않고 빠르게) 네에. 원하시는 대로 서비스 변경해 드렸구요.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지금까지 상담원 한민석이었습니다.
    (여자5): 어? 벌써? (눈치) 아. 끊으라고?

    뚝 끊기는 신호음. 통화대기 상태. 다시 콜 들어오고 통화버튼 누르는 민석.

    민석: 행복과 즐거움을 드리는 상담원 한민석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꼬마):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민석; (벙찐) 고객님?
    (꼬마): 고객님?

    모니터에 뜨는 수신자(꼬마) 고객의 전화번호. 개인정보를 조회하는 민석.
    상담원들이 고객의 특이사항이나 문제점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팝업창이 뜬다.
    팝업창에 적힌 내용: ‘따라쟁이 꼬마, 주의 할 것.’

    민석: (한숨) 너, 죽는다.

    그 때 민석의 어깨에 얹어지는 손. 길 부장이다.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는 길 부장. 민석의 시점, 액자가 걸려있다.
    액자에 적힌 글씨.‘친절한 미소’

    66. 직원 휴게실- 낮

    쓰레기통을 발로 걷어차는 민석. 바닥에 쏟아져 나뒹구는 쓰레기들.

    67. 전화 상담실- 낮

    자리에 앉는 민석. 모니터를 켜자 메일 수신음 소리가 들리고 상담원들이 서로 대화할 수 있는 메모창이 뜬다.

    -메모창 내용: ‘지난 번 일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어요. 이번 주 주말에 동강 문화센터에서 다도 시범이 있대요. 같이 안 갈래요? -은하*^^*-’

    은하를 바라보는 민석.

    68. 전화 상담실- 같은 시각

    상담중인 수아.

    (남자4): 바람도 사알며시 쉬어가건만 그 얼마나~~(클라이맥스에서 살짝 삑사리) 참았던(목에 힘주며) 사무친 상처기일래~~ 흐느끼며 길 돌아서는~~ 마지마악 잎쉐에~~(심한 바이브레이션) -곡명: 배호의 마지막 잎새-

    실실 웃고만 있는 수아. 이내 보류버튼 누른다. 보류음 들리고 헤드셋을 벗는 수아.

    수아: 염병! 웃기구 있네.

    그 때, 메일수신음 들리고 수아의 모니터에 메모장이 뜬다.

    ‘주말에 좋은데 가자.’ -민석-

    민석을 보는 수아, 메모를 삭제한다.

    69. 동강 문화센터- 아침

    ‘마음을 깊게 하는 차의 향기(香氣) - 한국 전통차의 맥을 찾아서’
    라는 내용의 플랭카드. 카메라 빠지면 주말이라 사람들로 북적이는 센터 안. 각종 차의 재료들이 전시되어 직접 보고 만지고, 달인 차를 마실 수도 있는 오픈, 참여전시관이다. 다도시범이 한창인 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고, 그 곁에서 차나무를 보고 있는 은하와 민석.

    민석: 이게 인도산 잇삼종인데, 보세요. 열대성이라 잎이 굉장히 크죠? (또 다른 차나무를 들고) 이건 중국산 대엽종.
    은하: (감탄)

    민석과 은하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배경음으로 들리는 다도시범 진행자의 목소리.

    진행자(E): 현재 우리가 즐겨 마시는 녹차는 우리 전통차가 아니에요. 일본식으로 쪄서 말렸기 땜에 어때요? 비린내가 나죠?
    일동(E): 아…
    진행자(E): 하지만 우리 전통차는 비린내가 없어요. 지금부터 여러분에게 전통차 만드는 법을 알려드릴건데요. 먼저, 차나무의 종류부터,
    민석: 이건 일본식 아부나기종인데, 우리가 즐겨 마시는 녹차라고 생각하면 쉽죠.

    민석과 은하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진행자. 민석의 설명에 놀라,

    진행자: 우와! 차에 대해 굉장히 많이 아시네요?
    은하: (자기가 더 뿌듯한 듯) 목을 많이 쓰는 직업이라서요.
    진행자: (민석에게) 아! 선생님이시구나.
    민석: ……

    70. 은하의 집 앞- 밤

    은하: 오늘 즐거웠어요.
    민석: 네에.
    은하: 덕분에 차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됐구요.
    민석: 네에.
    은하: (어색) 갈게요.
    민석: 네. 들어가세요.

    돌아서는 은하. 멈칫. 허름한 현관문이 신경 쓰이는지

    은하: (뒤돌아보며 괜히) 저 곧, 이사 가요.
    민석: ……
    은하: 안녕히 가세요. (꾸벅)

    71. 은하의 집 안, 현관문- 밤

    현관문에 기댄 은하. 점점 멀어지는 민석의 발자국소리.

    72. 길거리- 같은 시각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민석의 뒷모습.
    전화를 받지 않는 듯 길게 이어지는 신호음. 짜증나는 표정의 민석. 곧이어 들리는 안내 멘트.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중입니다. 연결된 후에는…’
    휴대폰을 길바닥에 던져 버리는 민석.

    73. 은하의 자취방 안- 아침

    체크무늬 손수건을 조심스럽게 다리는 은하. 허밍이 절로 나온다. 손수건을 예쁘게 접어 또 다리고 그 위에 향수를 뿌린다.
    손수건을 코에 대고 향기를 맡아보는 은하의 행복한 표정.

    74. 전화 상담실 -아침

    전화 상담실 안으로 바쁘게 들어서는 은하. 놀라는 직원들.

    영주: 왠일? 안 하던 지각을 다하고?
    은하: (웃음)

    자리에 앉아 다급하게 짐정리를 하는 은하에게 다가온 영주와 종숙.

    종숙: 언니. 요즘 수상한 냄새가 나.
    은하: (놀라서 자신의 소매를 들어 냄새를 맡아본다.) 냄새?
    영주: 어? 그러고 보니 (킁킁) 무슨 냄새야? 향수?
    종숙: 요즘 이뻐진 것도 같고. 혹시, 우리 몰래 연애하는 거 아니지?
    은하: (정색) 아니야! 연애라니!!

    말과 동시에 민석의 자리를 힐끔 보는 은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민석.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급하게 상담실을 빠져나간다. 민석의 뒷모습을 쫒는 은하의 시선.

    75. 전화 상담실 밖, 복도와 연결된 계단- 아침

    복도를 빠져나가,
    정신없이 계단으로 내려가는 민석. 누군가의 손을 잡아 돌려세운다. 수아다.

    수아: 이거 놔!

    수아를 끌어안는 민석. 격렬히 반항하는 수아. 다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은하.

    76. 옥상- 아침

    여기저기 자그마한 손톱자국 사이에서 피가 배어나오는 민석의 얼굴.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내는 은하. 어색한 두 사람. 은하의 시선을 피하는 민석.

    77. 전화 상담실- 아침

    울 듯한, 웃을 듯한. 기묘한 표정의 은하.

    은하: (밝은 목소리) 상담원 이은하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고객님?
    (남자): (반가운) 이제야 겨우 통화가 됐네요.
    은하: ?
    (남자): 저에요. 빛나 아빠.

    78. 병실 안- 낮

    병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은하. 침대 위에는 머리에 붕대를 감은 어린 여자아이와 아이의 아빠라고 하기엔 너무 젊어 보이는 남자가 보호자석에 앉아있다.

    빛나: (아프지만 밝은) 안녕하세요? 윤빛나입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남자.

    79. 병원 밖 벤치- 낮

    휠체어에 탄 빛나를 밀어주는 간호사. 벤치에 앉아 그 두 사람을 바라보는 은하와 빛나 아빠.

    빛나 아빠: 그날은 그냥.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었어요. 이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거든요.

    아프지만 밝은 표정의 빛나. 간호사와 장난하는 모습이 너무 해맑다.

    은하: 몇 살이에요?
    빌나 아빠: 6살이에요. 얼마 전까지는 할머니가 빛나를 돌봐주셨는데,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다니던 음식점 배달일도 그만뒀죠.
    은하: 빛나 엄마는요?
    빛나 아빠: 15살에 처음 만났어요. 임신하고. 빛나를 낳고. 도망가 버렸어요. 이해해요. 아무래도 버거웠겠죠. 저도 마찬가지였으니까.

    80. 병실 안- 낮

    빛나의 팔, 다리를 부여잡고 있는 간호사와 빛나 아빠. 울며불며 발버둥치는 빛나. 커다란 철제 주사기를 빛나에게 놓으려 하지만 빈번히 실패하자 진땀 빼는 의사.

    빛나: 으어어엉~~! 아빠! 아빠! 무서워요! 무서워! 살려주세요오!! (얼마나 울었는지 곧 넘어갈 듯 숨을 헐떡이며 꺽꺽거린다.) 앞으로는 아빠 말도 잘 들을께요! 에? 아빠아~!
    의사: (달래며) 자자. 빛나야. 쪼금만 참자. 쪼금만…
    빛나: (목청껏 울며) 나 이거 안 할래. 안 할래에.
    빛나 아빠: (서러움에 북받쳐 울먹인다.) 빛나야. 이거 해야 돼. 이거 해야, 우리 빛나 금방 나을 수 있어.
    빛나: 으아아앙!!

    빛나의 살갗을 찌르는 주사기.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빛나와 최대한 막으려 빛나의 손, 발을 움켜쥐는 아빠. 슬픔을 감출 수 없어 서러운 눈물을 흘린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은하. 차마 볼 수 없어 터져 나오는 울음을 손으로 틀어막는다.
    화면 천천히 암전.

    81. 병실 밖- 낮

    고개를 푹 숙인 채, 의자에 앉아있는 빛나 아빠와 그 곁에 넋 나간 표정으로 앉아있는 은하.

    82. 은행 앞- 낮

    통장을 넘기며 은행 계단을 내려오는 은하. 그 때 주머니 안에서 울려대는 핸드폰.

    은하: 네네. 행복과 즐거움을 드리는 상담원 이…
    (영주): (다급) 은하야! 어려운 부탁 한 가지만 하자!
    은하: 어. 언니?
    (영주): 적금 탔지?
    은하: 네. 오늘 만기여서.
    (영주): 돈 좀 빌려주라. 급하게 쓸데가 있어서, 금방 갚을게.
    은하: 언니. 근데, 저 아파트 잔금도 치러야 되고,
    (영주): 은하야. 사정 좀 봐주라. 엄마 수술이 급해서 그래. (버럭) 종숙이 고년한테 빌려달라고 했더니 없다고 딱 잡아떼는거 있지! 지 대학 간다고 꼼쳐둔 돈 있는거 내가 다 아는데! 진짜 걔는 못 쓰겠더라! 나쁜년이…!
    은하: 이번에 제가 도와줘야 될 사람이…
    (영주): 당연히 알지. 그래도 어쩌냐. 니가 좀 도와줘야지. 부탁한다. 금방 갚을게.
    은하: ……
    (영주): 은하야아.
    은하: ……
    (영주): 너, 착하잖아.

    영주의 말에 우뚝 멈추는 은하. 옆에 있는 전봇대를 올려다본다.
    은하의 시점으로 보이는 대부업 대출광고 스티커.

    83. 길 부장의 사무실- 아침

    결재서류를 덮는 길 부장.

    길 부장: (감격)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은하씨.

    84. 전화 상담실 복도- 낮

    수아의 시점, 복도 게시판에 걸린 빛나의 얼굴사진. 동정심을 자극하는 아이의 표정과 빛나 아빠의 사연이 자보형태의 호소문으로 걸려있다.
    웅성웅성 거리며 게시물을 유심히 살펴보는 직원들.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수아.

    85. 길거리- 밤

    사람들로 붐비는 길거리.
    유니폼을 입고 어깨띠를 두른 상담원들이 빛나를 돕기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다. 옆에는 확대된 빛나의 사진과 사연을 적은 피켓 형식의 글들이 게시되어 있고, 두꺼운 외투 차림의 사람들, 가던 길을 멈추고 그것들을 읽고 있다.
    마이크를 쥐고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은하.

    은하: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6살 빛나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도와주세요. 빛나에게는 여러분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모금함에 돈을 넣는 행인들. 연신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해 인사하는 은하.
    행인들을 직접 거리에서 만나며 행사의 취지를 설명하는 영주와 종숙
    이 때, 그들에게 다가오는 누군가.
    마이크를 들고 다가오는 여자와 카메라를 어깨에 짊어진 남자다.

    리포터: 안녕하세요? DBS 방송국에서 나왔는데요.

    86. 전화 상담실- 밤

    행사를 마치고 상담실로 들어오는 상담원들.
    “그럼, 우리 이제 TV 나오는 거야?”“그래봤자, 지역방송국인데 뭘.”“그래도 TV출연이 라니!”“살 빼라 종숙아아~”“화면빨 잘 받아야지.”“카메라 봤냐? 나 그런 거 첨봐. 캠코더만 보다가 그런 거 보니까 무지 떨리드라." “리포터 얼굴 봤냐?”“그 정도면 나도 리포터 하겠드라.”“은하 덕에 TV출연두 다하구, 고맙다. 은하야아~” 식의 대화를 주고받는다.
    동료들과 상당실 안으로 들어오는 은하. 순간 멈칫한다.
    은하의 시점으로 상담실 안에 단 둘뿐인 민석과 수아.

    수아: 착한 척은 혼자 다해요.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는 상담실.

    은하: 뭐?
    수아: ……
    은하: 방금 뭐라구 했어?
    수아: (차분하게) 불쌍한 애 사진 걸어놓구 (비꼬며) 지들끼리 좋다고.
    은하: (말을 더듬으며) 너, 너, 넌, 모금행사에 참여도 안했잖아!
    수아: (혼잣말) 동정이나 구걸하러 다니구, 그지들 같이.

    화가 난 은하. 수아의 뺨을 때린다. 은하의 그런 모습에 놀라 웅성거리는 상담원들.
    수아의 긴 머리를 휘어잡는 은하. 비명 지르는 수아. 서로 뒤엉키는 두 사람.
    이 때, 급하게 프레임 인하는 민석. 은하를 사정없이 밀치고, 수아의 손목을 잡아챈다.
    바닥에 쓰러진 은하에게 몰려드는 상담원들.
    수아의 손을 곡 잡은 민석을 바라보는 은하.

    87. 전화 상담실- 아침

    일손을 멈추고 자리에 앉아서 한 방향을 응시하고 있는 직원들의 시점, 앞에 서 있는 길 부장이 보인다.

    길 부장: 본사에서 후원금이! 나왔습니다. (직원들의 웅성거림) 모금행사가 TV에 나오고나서 회사 이미지가 아주 좋아졌어요. 이 모든 게,

    옆으로 손을 뻗는 길 부장. 카메라 팬하면, 곁에 서 있는 은하.

    길 부장(E): 다 이은하씨 덕분입니다. 자! 여러분!! 은하씨에게 박수우~!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를 치는 직원들 사이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엉터리박수를 치는 수아가 보인다. 상담실 안을 가득 메운 박수소리.

    88. 병실 안- 밤

    씬87의 박수소리가 이어지며 방송국 카메라로 촬영하는 화면.
    길 부당이 빛나 아빠에게 성금을 전달하는 모습이다. 감격해 박수치는 직원들과 그들의 주변을 바쁘게 움직이며 촬영하는 방송국 스텝들.

    빛나 아빠: (길 부장의 손을 부여잡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변을 이리저리 훑는 빛나 아빠의 시점, 직원들 틈에서 박수치는 은하를 발견하고 와락 껴안는다. 놀라는 은하.

    빛나 아빠: (울먹) 누나 고마워요.

    빛나 아빠의 등을 토닥여주는 은하. 이제야 무거운 짐을 덜고 자신의 나이에 맞는 모습으로 편하게 울어보는 빛나아빠의 모습에 눈시울을 붉히며 운다.

    89. 길거리- 밤

    유흥주점과 노래방이 즐비한 길거리 한복판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고함을 지르는 길 부장. 지나가는 행인들. 길 부장을 흘끔거리자. 일행이 아닌 척 외면하는 직원들.

    길 부장: (혼자 신난) 자자! 가자! 2차! 가자! 이 기분, 그대로 데리고 2차로 가자아!!

    비틀대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길 부장. 속이 안 좋은지 꺼억 거리며 이내 모퉁이로 달려간다. 꺽꺽거리며 토하는 길 부장의 뒷모습을 한심스럽게 바라보는 직원들. 서로 눈치주며 팔꿈치로 툭툭댄다. 직원들의 시선이 은하에게 향하자 길 부장에게 다가가는 은하.

    은하: 부장님. 저희가요. 너무 늦어서 이제 그만…

    길 부장의 등을 토닥여 주는 은하.

    90. 치킨 전문점 호프집- 밤

    비좁은 테이블위에 엎어져 자는 종숙. 주변에는 닭뼈들이 널부러져 있고, 깨끗하게 비워진 접시, 구겨진 휴지들도 지저분하게 널려있다.
    카메라 빠지면 술에 취한 세 여자. 영주의 곁에 앉아있는 은하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수아. 어색함이 감돈다. 그 때, 불쑥하고 나오는 수아의 손.

    수아: (은하에게) 화해하자. 우리.
    은하: (멀뚱)
    수아: 손 부끄럽게 할거야?
    영주: 얼른.

    그 때, 화면위로 들리는 와장창 컵 깨지는 소리. 잠자던 종숙이 비좁은 테이블위에서 몸을 움직이자, 접시와 맥주컵이 떨어져 깨지고 맥주가 수아의 치마위로 쏟아진다.

    수아: 꺄악!! 휴지휴지! (티슈꽉을 흔들어 보지만, 비었다.) 난 몰라! 오빠가 사준 건데~~!! (주인에게) 여기요! 휴지 좀 주세요!
    영주: 바닥도 좀 치워 주시구요!

    수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는 은하. 은하의 손수건으로 자신의 치마를 정성스레 닦는 수아. 문든 자기 손에 들린 손수건을 바라보며,

    수아: 어? 이거 내가 선물한 건데, 민석이 한테.
    은하: (멈칫)
    수아: 뭐야? (웃음) 너 그 사람한테 관심 있어?
    은하: ……
    수아: 별루야! 그 사람. (하던 일 계속하며) 능력없구. 맨날 돈 안 되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나 해대구. (웃음) 너, 진짜 취향 독특하다?

    말을 하면서도 손수건으로 연실 치마를 닦는 수아. 그런 수아와 손수건을 바라보는 은하.

    91. 택시 타는 곳- 늦은 밤

    한산한 밤거리. 택시 타는 곳에 서 있는 네 여자. 오돌오돌 떨며 팔짱을 낀 수아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육중한 종숙을 부축하고 있는 영주, 그리고 택시를 잡기위해 대로로 나와 손을 흔드는 은하.
    한산한 대로, 은하의 손짓에 택시 한 대가 멈춰 선다.
    은하가 택시 문을 열자. 종숙부터 밀어 넣으려는 영주. 그 때 팔짱을 끼고 있던 수아가 먼저 잽싸게 택시 안으로 들어가고 영주, 그 모습을 어이없이 바라본다.

    수아: (택시 안에서 영주를 보며) 뭐해? 안 타?
    영주: (종숙을 밀어 넣으며) 정신 차려! 이 년아~!

    택시 앞에 서 있는 은하. 프레임 인하는 영주.

    영주: (혼잣말) 계속 반말질이야! (은하에게) 혼자 갈 수 있겠어? 술도 꽤 마셨잖아?
    은하: 괜찮아요.

    이 때, 들리는 비명소리.

    수아(E): 꺄악!!
    은하: (!)

    소리에 놀라 잽싸게 택시로 달려가는 영주의 뒷모습을 보는 은하, 가방에서 수첩을 꺼낸다.

    92. 택시 안- 같은 시각

    바닥에 쏟아져 있는 토사물.
    수아를 쳐다보는 영주. 코를 막고 외면하는 수아.
    이때 소리 없이 뒷좌석으로 넘어오는 걸레 든 손. 택시기사다.
    뻘쭘한 영주, 걸레를 받아들고. 토사물을 치우기 시작한다.

    영주: 우웩우웩! (눈물) 뭘 이렇게 쳐먹은 거야! (룸미러보며) 기사님. 죄송합니다.
    택시기사: (룸미러에 보이는 눈, 웃는다.)

    뒷좌석에 몸을 기댄 수아. 앞을 보면서,

    수아: (혼잣말) 뭘 저렇게 적는거야?

    수아의 말에 하던 일 멈추고 고개 돌리는 영주의 시점,
    수첩에 무언가를 적는 은하의 모습위로,

    영주(E): (대수롭지 않게) 택시 번호겠지.
    수아: 하여간, 착한 척은 혼자 다해요.

    (씬5의 인서트 컷) 택시를 유심히 바라보는 은하. 라이트 불빛이 은하의 얼굴 가득 비추고 천천히 화이트 아웃되는 화면.

    93. 경찰서 안- 낮 (현재)

    수첩 한 장을 급하게 넘기는 강반장.
    다음 페이지는 빼곡한 글씨가 아닌, 이상한 그림들로 채워져 있다.
    그 다음 이야기가 적혀있지 않은 상태, 수첩을 이리저리 넘기는 강반장의 얼굴위로, 차임벨소리 들린다.

    94. 민석의 아파트 안-아침

    소파에 앉아있는 강반장. 앞에 놓인 신문을 끌어당겨 괜히 이리저리 넘겨본다.
    그 때, 프레임 인하는 민석, 강반장 앞에 찻잔을 내려놓는다.

    강반장: 아이구! 감사합니다.
    민석: 별 말씀을요.

    대답과 동시에 소파에 앉는 민석.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수척해진 모습이다.
    찻잔 속에 든 티백을 서너번 물에 담갔다 빼기를 반복하는 강반장. 이내 티백을 꺼내 찻잔받침에 올려놓는다.
    문득 강반장의 시점으로 보이는 티백의 모양. 시중에서 판매하는 사각형이 아닌 삼각형에 재질은 나일론인 듯 광택이 난다.

    강반장: (신기해서) 특이하네?
    민석: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

    티백을 머리위로 들어 올려 천장에 있는 조명 불빛에 비춰보는 강반장.
    빛이 투과 되면서 밝은 부분은 더 밝게 어두운 부분은 더 어둡게 보이면서 티백 안, 내용물의 크기와 형태가 보인다.
    테이블 위에 티백을 내리 놓고 차를 한 모금 마시는 강반장.

    강반장: 으음. 맛있네요.
    민석: 다행이네요.
    강반장: (민석 보며) 근데, 얼굴색이 많이 안 좋네요.
    민석: (자신의 얼굴을 만진다.)
    강반장: (조심스럽게) 조수아씨 때문이죠?
    민석: 제가 용의잔가요?
    강반장: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냥 몇 가지 질문에 답변만 해 주시면 됩니다. 두 분, 연인이었습니까?
    민석: …아니요.
    강반장: (?)
    민석: 나 혼자 사랑하고, 나 혼자 미워했어요. (차를 마신다.)
    강반장: 흐음! (괜히 민망해 덩달아 차를 마시고) 그럼, 이은하씬요?
    민석: 무슨 소립니까?
    강반장: (!)
    민석: 저, 그런 놈 아닙니다!
    강반장: 아. 아니,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니라…
    민석: (말 자르며) 그 여잔 아무것도 아니에요. 직장동료일 뿐, 아부관계도 아닙니다.
    강반장: (웃음) 이거 괜한 오해가 생겼네.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이은하가 한민석씨를 좋아했냐 이겁니다. 옛말에도 있잖아요.

    민석의 얼굴위로,

    강반장(E): '질투는 살인을 부른다'

    95. 전화 상담실 안- 아침

    업무시작 전의 어수선한 실내를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누군가의 시점,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는 직원. 자리정리하며 업무시작 하는 직원. 다른 직원들과 히히덕거리며 수다떠는 직원들을 살피다 이야기하는 영주와 종숙에게 멈추고, 이내 다시 누군가를 찾는 듯 움직이는 시선.

    96. 전화상담실 내부에 마련된 간이 취조실- 낮

    화면 가득 긴장한 표정의 영주 얼굴 보이고

    영주: 착한거랑은 거리가 먼 애였어요. 자기 밖에 모르고, 욕심 많고, 그, 남자관계도 쫌 복잡한, 왜 그런 애들 있잖아요. 근데, 그렇다고 남한테 원한 살만큼 나쁜 애는 아닌데?

    CUT TO
    화면가득 종숙의 얼굴.

    종숙: 은하언니랑 트러블이 약간 있었어요. 워낙 극과극인 성격들이라 (불현듯)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실종된 날, 싸웠어요.
    강반장(E): 누가요?
    종숙: 수아랑 은하언니요.

    CUT TO
    강반장(E): 은하씨는 어디 갔습니까?

    영주: 병원에 갔다 온다고 했어요. 자주 병치레 하는 애는 아닌데. 요즘 들어 소화가 안 된다고, 밥도 잘 안 먹고 먹으면 토하고,

    심각한 표정인 강반장의 얼굴위로,

    영주(E): 택시번호 기억 못해서, 자기 땜에 수아가 죽은 거라고.

    97. 병원 진료실 안- 낮

    의사: (뒤에 있는 X-ray를 보며) 보이죠? 이게 위에요. 음, 외관상 별다른 이상은 없구요. (책상 위 차트보며) 정신적 스트레스가 많으신가 봐요? 갑상선 호르몬수치도 불안정하고 아무튼, 스트레스성 위경련이니까. 최대한 마음을 편하게…

    98. 병원 복도- 낮

    간호사들과 환자, 보호자들로 북적이는 병실 복도를 천천히 걷고 있는 은하.

    99. 전화상담실- 낮

    고객과 상담을 하면서도 어딘가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상담원들.
    아예 일을 멈추고 구경하는 상담원. 모퉁이에서 무리를 형성해 웅성거리며 구경하는 상담원들의 시점으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난동을 부리는 만삭의 임산부(40)와 땀을 뻘뻘 흘리며 힘겹게 그녀를 말리는 길 부장이 보인다.

    임산부: 이은하가 누구야? 어딨어? 안 나와!!
    길 부장: 여보오~~ 오해에요! 오헤!! 진정하세요.

    그 때, 사무실 문이 열린다. 상담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입구로 향하고, 그곳에 서있는 은하. 순간 조용해지는 실내.
    은하의 시점으로 보이는 임산부의 불룩한 배와 그 배에 매달린 길 부장.
    길 부장, 은하와 눈이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웃는다. 그런 길 부장을 내려다보는 임산부의 눈빛이 변한다.

    임산부: (은하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 너지?
    은하: ……
    임산부: 너 오늘, 죽었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길 부장을 털어 내는 임산부, 은하에게 순식간에 달려들어 바닥에 넘어뜨리고 짓밟기 시작한다. 상담원들의 웅성거림.
    악에 받친 폭력이 이어지자 참지 못해 프레임 인하는 영주. 은하에게서 임산부를 떼어내고 뒤쪽에서 손목을 잡아 저지한다. 영주에게 손이 잡히자 분해서 악을 쓰며 발악하는 임산부.

    임산부: 놔! 이거 안 놔? 놔아~~!!
    영주: 무슨 오해가 있었나본데! 여긴 직장입니다!

    영주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임산부.

    영주: 뱃속에 있는 애기를 생각하세요!
    임산부: 놔아~! 놔아아…

    한참을 발악하던 임산부가 갑자기 바닥에 풀썩 쓰러진다. 놀라는 영주.
    바닥에 누워 배를 움켜쥐고 진통을 호소하는 임산부. 놀라는 길 부장, 직원들에게 앰뷸런스와 119를 불러달라고 소리소리 지른다. 웅성거리던 직원들 그제야 정신차리고 주위로 몰려든다.
    바닥에 널부러져 그들의 움직임을 망연자실 보고 있는 은하. 몰골이 처참하다.

    100. 전화 상담 콜센터 앞거리- 낮

    들것에 실려 고통을 호소하는 임산부를 구급차로 옮기는 119구조대원과 의료진들. 주변에 몰려들어 구경하는 상담원들.

    101. 전화 상담실로 향하는 계단- 낮

    누군가의 시점으로,
    저 멀리서 들리는 119 구조차량의 싸이렌 소리. 직원들의 웅성거림을 뒤로 하고 계단을 천천히 오르는 은하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 때 화면위로.

    여자목소리(E): 야!

    소리에 돌아보는 은하. 얼굴은 온통 여기저기 작은 손톱자국들과 멍자국으로 가득하고 눈은 부었고, 입술은 피가 말라붙어있다.
    두 눈에 가득 고인 눈물. 자리에 주저앉는다. 카메라 빠지면,
    실종 당일 옷을 그대로 입고 계단 아래에 서 있는 수아다.

    수아: 나쁜 년.

    102. 전화 상담실: 교차편집 시퀀스- 아침

    이어지는 직원들의 출근행렬로 분주한 실내 전경. 여기저기 모여 수다를 떨고 있는 상담원들의 모습.
    “오늘 올까. 안 올까?”“설마 지깟께 그런 일이 있었는데 오겠어?”“짤라야 되는 거 아냐?”“어떻게 그래… 착한 척은 혼자 다하더니!”“으… 그것도 유부남이랑…" “그것도! 길 부장이랑!”“끄악! 징그러~~!” 따위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

    103. 여자화장실- 아침

    거울 속에 비친 상처투성이 은하의 얼굴. 천천히 입꼬리를 올려 웃어본다.

    은하: (밝게 웃으며) 안녕하세요? (이번엔 고개 숙이며) 안녕하세요? (손짓하며) 좋은 아침이에요~!

    104. 전화 상담실- 아침

    여전히 수다 삼매경에 빠진 직원들의 모습. 그들의 시점으로 상담실 안으로 들어서는 밝은 표정의 은하가 보인다. 순간 조용해지는 실내.

    은하: 안녕하세요.

    은하의 상처투성이 얼굴과 태연한 인사말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직원들.
    자리에 앉으려는 은하의 시점, 의자가 없다. 책상은 온통 낙서투성이고, 서류들은 갈기갈기 찢어져 있다.
    심호흡하는 은하. 담담하게 자리를 정리하는데, 화면위로 들리는 핸드폰 벨소리.

    은하: …여보세요?
    (사채업자): 야이! 썅!! 죽고 싶어! 돈을 썼으면 얼른 갚아야 될 거 아냐!

    105. 직원 휴게실- 같은 시각

    자판기 앞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수다 떠는 영주와 종숙.
    그 때, 종숙의 시점으로 멀리서 그들에게 다가오는 은하가 보이고 이내 영주의 팔꿈치를 툭 치는 종숙. 이야기를 멈추는 두 사람.

    은하: (웃음)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요? 나두 쫌 끼워줘요.
    영주: (외면) 아니, 그냥 근데 무슨 일이야?
    은하: 저기, 저번에 빌려준 돈 좀…
    영주: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어? 그거? 그래그래. 갚을게.
    은하: 미안해요. 언니. 이런 말해서…
    영주: 아니야. 당연히 갚아야지.

    두 사람을 뒤로하고 걸어오는 은하. 그 때 들리는 종숙의 목소리.

    종숙(E): 돈 빌렸어? 쟤한테?

    멈춰 선 은하.

    종숙(E): 차라리 나한테 빌려 주라구 하지이~~!
    영주(E): (또박또박 강조하듯) 했거든요?
    종숙(E): (민망) 그래?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은하의 얼굴 클로즈업. 천천히 하품을 한다.
    F.O

    106. 여자 화장실 세면대 거울 앞- 낮

    검은 화면위로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들린다.
    화면 밝아지면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 카메라 빠지면,
    거울 속에 비친 은하의 얼굴이 보인다. 여기저기 멍든 얼굴. 상처 난 입술을 천천히 만져보는 은하. 그 때, 화면위로 들리는 핸드폰 진동음.

    107. 경찰서 취조실- 밤

    어두운 실내, 흔들거리는 조명등 아래 무표정하게 앉아있는 은하의 모습.
    그 때 취조실 문이 열린다. 긴장하는 은하. 안으로 들어오는 강반장. 자리에 앉는다.
    강반장의 시점으로 상처투성이 은하의 얼굴이 보이고,

    강반장: 잘 지냈어요?
    은하: (자조적인 웃음) 네.
    강반장: 간밤에 잘 잤어요?
    은하: 네.
    강반장: 오늘, 회사는 나갔어요?
    은하: 네.
    강반장: 밥은, 먹었어요?
    은하: 네.
    강반장: 뭐 먹었어요?
    은하: (의아한)
    강반장: 조수아, 죽였죠?

    놀라는 은하.

    강반장: (웃음) 농담이에요. 농담. (사이) 조수아씨, 죽은 거, 알죠?
    은하: (끄덕)
    강반장: 친했어요?
    은하: 네.
    강반장: 슬펐어요?
    은하: ……
    강반장: 에이! 착한 척하지 말고. (수첩을 책상위에 올려놓는 강반장) 무진장 고마운 수첩이에요.

    수첩을 바라보는 은하. 손을 뻗어 황급히 수첩을 가져가려 하자, 저지하는 강반장.
    은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한 장 한 장 수첩을 천천히 넘기면서 은하에게 보여준다.

    강반장: 스트레스가 많았나봐요? 생긴 건 안 그런데, 보기보다 좀 과격한 구석이 있나?

    한참을 넘기다 우뚝 멈추는 강반장. 수첩을 펴서 은하에게 보여준다.
    은하의 시점을 따라 카메라 이동하면, 수첩 하단,
    P35에서 바로 P38로 넘어가는 수첩.

    강반장: 찢은 게 뭐야?
    은하: (!)
    강반장: 죽은 조수아에 대한 욕설? 아니면 범행수법? 동기? 범행이후 기분? 쾌감? 대체 뭐야!

    108. 여자화장실 안- 낮

    변기위에 가만히 앉는 은하.
    고개 들어 정면을 보는 은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한다.
    은하의 시점으로 보이는 화장실 벽.
    낙서들로 가득하다. “거머리 길 부장을 빨아주는 착한 여자.” “수아를 누가 죽었을까요?” “수아를 죽인 범인은 이은하” “착한 년 이은하.” “마귀 같은 년” “화냥년” “갈보 이은하” 따위의 낙서와 그림으로 까맣게 메워져 있다.
    놀란 은하의 시점을 따라 이리저리 빠르게 이동하는 카메라. 비추는 곳 마다 앞뒤좌우 할 것 없이 화장실 벽은 온통 은하에 대한 욕설과 낙서들, 야한 그림으로 가득 찼다.
    일어서 화장실 벽 위에 있는 낙서까지 보는 은하. 그런 은하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 그 때, 화면위로,

    목소리(E): 갈보야! 니가 죽였지?

    빠르게 위를 보는 은하의 시선, 화장실 칸막이 너머로 고개를 불쑥 내미는 수아의 얼굴!

    은하: 꺄악!!

    비명소리와 함께 은하에게 쏟아지는 양동이 물세례!
    물에 흠뻑 젖은 은하. 다시 한 번 위를 보지만 수아의 얼굴이 어느 새 사라지고 직장동료의 얼굴로 바뀌어있다. 역광 때문에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이내 사라져 버리는 얼굴.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온 몸이 젖은 채, 그대로 주저앉는 은하. F.O

    109. 초등학교 5-3반: 은하의 과거 회상 시퀀스- 아침 (플래시 백)

    교과서를 펴는 여선생.

    여선생: 숙제 내줬었는데, 어디였지?
    소녀1: 안 내주셨어요.
    여선생: 정말?
    아이들: 네. 맞아요.
    여선생: 분명히 내줬는데?
    아이들: 아니에요. 없었어요!
    여선생: 은하야.
    은하: ……
    여선생: 숙제 내줬지?
    은하: …네.

    은하를 노려보는 소녀1.

    110. 학교 공터-낮

    씬 109처럼 은하를 노려보는 소녀1. 은하와 소녀1의 주위를 빙 둘러싼 같은 반 친구들.
    은하의 뺨을 때리는 소녀1. 아무런 반응 없는 은하. 이내 은하의 머리채를 휘어잡는 소녀1. 뒤엉키는 두 아이와 박수치고 소리 지르며 구경하는 아이들.

    111. 어릴 적 은하의 집- 밤

    한바탕 부부싸움이라도 벌어졌는지 박살난 살림살이들로 가득한 방안.
    그 한가운데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는 남자. (은하의 아빠, 30대) 그 때 상처 난 얼굴을 가리고 들어와 남자에게 인사하는 어린 은하.
    벌떡 일어나는 남자. 사납게 은하의 손을 쳐내고 얼굴을 바라본다. 상처투성이다.
    놀라기는커녕 부엌으로 달려가 칼을 들고 다시 나타나는 남자.

    남자: 누가 쌈박질하고 댕기라고 했어!! (은하의 손을 낚아채며) 이리와!!

    은하를 부엌으로 끌고 가는 아빠. 도마 위에 올려진 은하의 손.
    악을 쓰며 버둥거리는 은하.

    은하: (숨이 넘어간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아빠! 다신 안 그럴게요!!
    남자: 아빠가 뭐라고 했어.
    은하: 훔치지도 말고!
    남자: 또!
    은하: 싸우지도 말고!
    남자: 어기면 아빠가 어떻게 한다고 했어.
    은하: (도마 위에 올려진 자신의 손을 본다.)
    남자: (은하의 손위에 칼을 올린다.)
    은하: (발버둥 친다.) 아빠아빠! 아빠아!!! 다신 안 싸울게요. 다신 안 그럴게요!!
    남자: 어떻게 살라 그랬어. 아빠가.
    은하: (악 쓰며) 착하게요!
    남자: 뭐라고.
    은하: 착하게요!
    남자: 뭐라고.
    은하: 착하게요.
    남자: 뭐라고.
    은하: 착하게!

    남자와 은하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하게 잦아든다.

    112. 여자 화장실- 낮 (현재)

    씬 108과 이어진다. 흠뻑 젖은 채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은하.

    113. 전화상담실- 낮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물. 화면위로 들리는 시끌시끌한 상담실 소음.
    카메라 위로 올라가면, 온몸이 물에 젖은 채, 상담실로 들어오는 은하의 모습이 보인다.
    일순 침묵하고 은하를 주시하는 상담원들, 물에 흠뻑 젖은 은하를 보고 이내 다시 키득거린다.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자리에 앉는 은하.
    그 때 은하의 어깨를 툭툭 치는 누군가. 은하, 뒤돌아보면 영주다.
    은하와 눈이 마주치자 종숙을 흘낏 보는 영주. 눈짓으로 영주에게 재촉하는 종숙. 이내 은하의 얼굴에 뿌려지는 지폐들.
    주변의 웃음소리. 놀라는 은하.
    그 때 고함지르는 누군가.

    민석: 무슨 짓이야!!

    은하에게 외투를 감싸주며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민석.

    114. 옥상- 낮

    빠르게 돌아가는 풍향기. 저 멀리 담배를 피우는 민석과 외투를 걸쳤지만 물에 젖은 탓인지 추위에 떨고 있는 은하가 보인다.

    민석: 은하씨.
    은하: (쳐다본다)
    민석: 자수하세요.
    은하: (!!)
    민석: 왜 그랬어요? 은하씨, 착한 사람이잖아요.
    은하: ……

    은하를 지나 프레임 아웃하는 민석. 예사롭지 않은 눈빛으로 멀어지는 민석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은하.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115. 은하의 집, 화장실 안- 밤

    변기 위에 놓인 몽키를 집어 드는 손.

    116. 은하의 집 앞, 차 안- 밤

    길 가에 세워진 차 한 대.
    실내등이 켜진 차량의 운전석에 앉아있는 강반장과 그 곁 조수석에서 눈을 부치고 있는 최형사.
    강반장의 시점, 불빛이 새어나오는 창문.
    잠깐 조수석을 보자, 눈을 부치고 있는 최형사의 모습. 다시 고개 돌리는 강반장의 시점, 창문 불이 꺼진다.
    놀란 강반장. 급하게 룸미러 아래 전자시계를 본다.
    8시 10분이 조금 넘은 시각, 잠들기엔 아직 이른 시각이다.
    그 때, 강반장의 시점으로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은하.
    다급하게 실내등을 끄는 강반장.
    세찬 바람에 몸을 감싸며 길거리를 서성거리다, 택시를 잡아타는 은하.

    117. 도로 위를 달리는 택시 안- 밤

    창문 너머를 응시하고 있는 은하. 화면위로 들리는 라디오 DJ와 게스트의 농담 따먹기식 말장난. 키득거리는 택시기사의 웃음소리. 아무런 반응 없는 은하의 모습 뒤로 보이는 강반장의 차.

    118. 아파트 단지 주차장- 밤

    택시에서 내리는 은하.
    아파트 주차장에서 돌아 나와 단지 밖 거리로 프레임 아웃하는 택시와 거의 동시에 아파트 단지로 들어오는 강반장의 차.
    한 눈에 들어오는 아파트 전경. 이내 카메라 줌인하면 아파트입구 계단을 오르는 은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강반장.

    119. 아파트 현관- 밤
    열린 현관문 사이로 새어나오는 거실 불빛. 그 불빛을 뒤로 하고 서 있는 민석.

    민석: (놀란) 무슨 일이에요? 이 시간에?
    은하: 할 말이 있어서요.
    민석: (?)
    은하: (단호하게) 나, 자수 안 해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어디선가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 휘날리는 은하의 머리카락.

    은하: (귀 뒤로 넘기며) 춥네요. 들어가도 되죠?

    120. 강반장 차안: 강반장과 은하 교차편집 시퀀스- 같은시각

    느긋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강반장과 최형사.

    121. 아파트 안- 같은 시각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은하.
    남녀 연예인들이 농담을 하면서 히히덕거리는 쇼프로다.
    TV를 보며 멍청하게 따라 웃는 은하. 그러다 순간, 뚝하고 웃음을 멈춘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본다.
    주방에서 물을 끓이고 있는 민석의 뒷모습.
    다시 TV를 보며 웃는 은하.

    122. 강반장의 차안- 같은시각

    컵라면을 먹고 있는 최형사.

    123. 아파트 안- 같은시각

    여전히 TV를 보며 웃고있는 은하.
    갑자기 웃음이 그치고 표정이 굳어진다.
    은하의 시점이 텔레비전 위로 이동하면, 작은 허브화분 아래에 깔린 무엇…
    텔레비전 앞으로 다가가는 은하.
    화분을 든다. 아래에 깔린 체크무늬 손수건.

    인서트 컷- 체크무늬 손수건으로 치마를 닦는 수아의 모습.

    놀란 은하, 고개를 돌리면, 어느새 자신의 뒤에 서있는 민석과 시선이 마주친다.
    은하가 들고 있는 손수건을 가만히 바라보는 민석, 씨익 웃는다.

    124. 강반장의 차안- 같은시각

    룸미러 아래에 놓인 컵라면과 옆에 앉은 강반장을 번갈아 보는 최형사. 이상하게 표정이 굳은 강반장.

    125. 아파트 안- 같은시각

    귀를 막고 있는 은하.
    화면위로 연예인들의 웃음소리와 수다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이 크게 들린다.
    텔레비전 화면에 보이는 연예인들의 즐거운 모습, 그 아래에 있는 볼륨 표시그래프가 오른쪽으로 점점 늘어난다.
    68… 69… 70… 71…
    점점 커지는 숫자.

    126. 강반장의 차안- 같은시각

    보온병에 든 물을 종이컵에 따르는 최형사.
    바닥에 보온병을 내려놓고, 한손엔 컵, 다른 한손엔 티백을 들었다. 잠시 고민하다 이내 컵을 입에 무는 최형사. 차 티백의 껍질을 벗긴다.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지는 티백 껍질.

    127. 아파트 안- 같은시각

    은하: (귀 막고 고함) 시끄러워요!

    은하의 시점을 따라 카메라 이동하면,
    리모컨을 쥐고 있는 민석.

    민석: 보세요. (말과 동시에 뒤를 돌아본다.)

    민석의 시선을 따라가는 은하의 시점으로 주방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끓고 있는 주전자가 보인다.

    민석: (TV를 응시하며) 잘 안 들리니까.

    128. 강반장의 차안- 같은시각

    차를 한 모금 마시는 강반장.
    그 때, 문득 강 반장 시선에 들어오는 바닥에 떨어진 무엇, 유심히 바닥을 들여다보는 강반장. 이내 바닥에 떨어져있는 그것을 들어올린다. 티백 껍질이다.
    티백 포장지에 적힌 글씨 클로즈업.
    ‘옥수수 수염차’
    놀라는 강반장의 얼굴위로,

    최형사(E): 왜 그러세요?

    인서트 컷: 조명등에 비춰보았던 삼각형 모양의 티백. 그 속에 든 입자들의 크기와 형태. 자세히 보니 꼭 머리카락 같다.

    차문을 급하게 열고 튀어나가는 강반장.

    최형사; 반장님!!

    바닥에 떨어진 종이컵.

    129. 아파트 안- 같은 시각

    등 뒤에 무언가를 감춘 누군가의 뒷모습. 화면위로 들리는 시끄러운 TV소리. 역광 때문에 보이지 않던 등 뒤에 감춘 물건이 카메라 팬하자, 서서히 드러나면서 칼을 감춘 민석임을 알 수 있다.
    TV 볼륨을 줄이고 있는 은하의 뒷모습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는 민석. 칼을 치켜세워 은하의 머리위에 겨눈다.
    아무것도 모르고 TV만 보는 은하. 문득 이상한 기운을 느꼈는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보는 순간, 눈앞에 보이는 칼.
    너무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지르지만,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벌어진 은하의 입을 향해 돌진하는 칼.
    빠르게 암전되는 화면.

    화면, 다시 밝아지면,
    눈을 감고 있는 은하. 이내 눈 뜬 은하의 시선을 따라 카메라 이동하면, 칼을 쥐고 있는 은하의 두 손. 힘껏 칼을 밀어붙이는 민석.
    쓰윽하고 베이는 손. 흘러나오는 피!

    은하: 으아악!!

    재빠르게 칼을 놓고, 몸을 피하는 은하. 힘의 반동 때문에 소파애 꽂혔다 이내 뽑히는 칼. 은하에게 칼을 휘두르는 민석. 반대편 소파 뒤로 도망가는 은하. 거친 호흡과 비오듯 쏟아지는 땀. 손에서 배어나오는 붉은 피, 손을 타고 내려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진다.
    소파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대치상태에 있는 은하와 민석,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정적만이 감도는 실내, 거친 숨소리로 가득하다. 외투 주머니에서 몽키를 꺼내는 은하. 씨익 웃는 민석.

    은하: 설마, 했는데!

    130. 민석의 범행 시퀀스- 몽타주

    130-A 원호의 고급아파트 앞- 밤

    초인종을 누르는 수아.

    130-A-1. 원호의 방- 같은시각

    안대를 하고 잠을 자는 원호. 화면위로 클래식음악이 들린다.

    130-B. 길거리- 밤

    먼 길을 걸었는지 구두를 손에 들고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걸어가는 수아.

    130-C. 민석의 아파트 현관- 밤

    현관문을 여는 민석의 시점으로 수아가 보인다.

    130-C-1. 민석의 아파트 거실- 밤

    소파에 앉아 있는 수아를 넘어뜨리는 민석. 몸 위로 올라와 키스와 애무를 시도한다. 거부하는 수아.
    다시 반복하는 민석을 사정없이 밀치고 폭언을 쏟아내는 수아.
    ‘넘볼 걸 넘봐야지! 내가 이럴려고 여기 온 줄 알아? 차비가 없어서, 니네 집이 가까워서 온거야! 이 변태새끼야. 능력도 없는게!’ 따위의 폭언이 배경음이 되어 들리고, 화가 나 급하게 프레임 아웃하는 민석. 이내 칼을 가지고 들어온다. 화면위로 수아의 비명소리. 칼을 내리 찍는 민석의 모습.

    (현재)

    (장면전환, 앞의 씬이 이어지면서) 칼을 내리 찍는 민석,
    놀란 은하. 소파와 탁자를 민석에게 밀어버리고 방어막을 세운다. 탁자에 부딪혀 넘어지는 민석.
    쓰러진 민석의 몸 위로 올라타 사정없이 얼굴을 내리찍는 은하. 정신을 잃은 민석의 손에서 칼을 빼앗는다. 민석의 처참한 얼굴과 칼을 번갈아 보는 은하.
    이내 칼을 바닥으로 던져 버린다. 저만치 소파 다리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칼.
    이 때, 은하의 손목을 턱하고 잡는 민석. 남자의 아귀힘으로 사정없이 손목을 비튼다. 고통스러워하는 은하. 이내 바닥으로 떨어지는 몽키.
    은하의 머리채를 휘어잡는 민석. 얼굴이 피범벅이다. 은하의 머리를 쥔 채 일어나 칼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소파 밑의 칼을 발견한 민석. 칼이 있는 곳으로 은하를 질질 끌고 간다.
    비명 지르는 은하. 그 소리에 짜증이 난 민석이 은하의 머리채를 잡고 이러저리 흔들며 발길질을 해댄다.
    은하, 버텨보지만 역부족인 듯 상처투성이 얼굴에 다시 피가 터진다.
    힘이 빠진 은하. 그 때, 화면위로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에 놀라 고개 돌리는 민석.
    민석의 급소를 발로 걷어차 버리는 은하.

    131. 아파트 현관 앞- 같은시각

    최형사의 시점으로 보이는 깨진 창문, 그러나 쇠창살이 가로막고 있다. 욕하는 강반장.

    132. 아파트 안- 같은시각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데굴데굴 구르는 민석을 뒤로하고 칼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리는 은하.
    소파 밑에 있는 칼을 잡기 위해 손을 뻗는다.
    그 때 은하의 발목을 잡는 민석의 손. 자기 쪽으로 천천히 끌어당긴다. 끌리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은하. 사력을 다해 손을 뻗는다. 손이 닿을 듯 말 듯 하는 사이 일어서려는 민석의 움직임.
    마음이 급한 은하, 손끝을 이리저리 움직여 칼을 살짝살짝 건드린다. 툭하고 뒤로 멀어지는 칼…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손을 뻗어 끌어당기는 은하.
    드디어 잡았다!!
    재빠르게 일어나 민석에게 사정없이 발길질을 퍼부은 뒤, 곧장 민석의 몸 위로 올라탄 은하.
    격한 숨을 내뿜으며 민석을 내려다보는 은하의 시점으로 얼굴이 온통 피칠된 참혹한 몰골의 민석이 보인다.
    자신의 손에 들린 칼과 흉측한 얼굴의 민석을 번갈아 보는 은하.
    ‘찌를까. 이대로 찔러 버릴까.’
    칼을 치켜 올렸다 내리기를 계속 반복하는 은하. 그 때 은하의 귓전을 울리는 목소리들.

    수아(E): 착한 척은 혼자 다해요.
    종숙(E): 돈 빌렸어? 쟤한테?
    영주(E): 혹시 쟤가 죽인 거 아냐?
    수아(E): 나쁜년.
    임산부(E): 너 오늘 죽었어!
    사채업자(E): 돈을 썼으면 갚아야 될 거 아냐! 이 썅년아!
    민석(E): 은하씨. 자수하세요.

    목소리들이 뒤엉켜 은하의 뇌리를 가득 메운다.
    정말 잘해주고 싶었는데, 진실로 착해지고 싶었는데…
    몸을 부르르 떠는 은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진다.

    은하: 죽여 버릴거야.

    칼을 높이 치켜세운 은하! 그 때 밖에서 들리는 총성! 벌컥 열리는 현관문. 강반장이다.
    강반장의 시점으로 민석에게 칼을 내리 꽂으려는 은하의 모습이 보인다.

    강반장: 안 돼! 그러지 마, 그러면 안 돼!

    강반장을 바라보는 은하. 두 눈 가득 그렁그렁한 눈물. 강반장이 무슨 소리를 하는 듯 하지만 은하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이내 풀썩하고 쓰러지는 은하.
    천천히 암전되는 화면.

    133. 전화 상담실- 아침

    병원입구, 경찰에게 붙들려 계단을 내려오는 민석. 캡모자에 얇은 점퍼까지 둘러써 얼굴은 알아볼 수 없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플래시와 기자들의 질문세례가 이어지지만, 아무런 대꾸 없이 경찰차량에 오르는 민석.
    카메라 팬하면, 이 모든 것이 TV화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TV에 몰입하는 상담원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무리들. 누군가를 힐끔거리는 무리들. 그 속에 있는 영주와 종숙.
    종숙의 시선을 따라 카메라 이동하면 얼굴은 상처투성이에 양손에 붕대를 감은 은하가 보인다.

    (점프)

    유리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아 상담하는 은하와 종숙의 뒷모습.
    칸막이 너머로 은하를 힐끔거리는 종숙의 시점으로 헤드셋을 만지작거리면서 혼자서 중얼거리는 은하의 모습.

    은하: (명확하게 들리지 않는 웅얼거림.) 씨발!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지랄하구 자빠졌네. 개 같은 년이.

    놀라는 종숙. 그 때 은하와 시선이 딱하고 마주친다.

    은하: 왜?
    종숙: 어? 아 (머리 굴리며) 아하! 문서 폐기 할껀데, 언니 뭐 버릴 거 있어?
    은하: (모니터보며) 이따 내가 하께.
    종숙: 아니야. 언니 내가 할게.
    은하: 내가 하께.
    종숙: 나 그거 잘해. 내가 할게에~~
    은하: (말없이 종숙을 응시한다.)
    종숙: 언니?
    은하: (버럭) 내가 한다구!! (가슴 치며) 내가!내가!내가!

    그 때 화면위로 들리는 컵 깨지는 소리. 은하의 고함에 놀란 영주, 얼른 바닥에 떨어진 컵조각을 치운다.

    종숙: (!!)
    은하: (차분히) 알아들어?
    종숙: (끄덕)

    134. 전화 상담실 복도 (파쇄기가 있는 곳)- 아침

    요란한 소리를 내며 종이를 씹어 삼키는 파쇄기.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은하. 자신의 손가락을 파쇄기 입구에 집어넣는 시늉을 한다.
    그 때 뒤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측은한 목소리.

    목소리(E) 그동안 맘고생 많았죠? 몸은 좀 어때요?

    은하의 시선, 길 부장이다. 은하를 뒤에서 안는 길 부장.
    길 부장: 내가 낫게 해줄게요.

    몸을 돌리는 은하. 길 부장의 목덜미에 팔을 두른다. 웃는 길 부장.
    팔에 힘을 주는 은하. 숨이 막히는지 약간 거북해하는 길 부장. 아랑곳없이 더욱 꽈악 조이는 은하. 당황한 길 부장. 은하를 달래며 떼어내려 하지만 쉽지 않다. 미묘한 실랑이가 이어지고 이내 길 부장의 귀를 물어버리는 은하.

    길 부장: 으아악!!

    길 부장이 벗어나려 할수록 더 세게 무는 은하의 독한표정. 새어나오는 피. 버둥거리는 길 부장. 은하의 머리채를 잡아당긴다. 은하의 머리가죽이 위로 당겨지면서 치켜 올라가는 눈.
    완력으로 은하를 떼어내 밀치는 길 부장.

    길 부장: (뒷걸음질) 이, 이, 미친, 미친년미친년미친년미친년! 미친년아!!

    도망가는 길 부장.
    주저앉아 웃는 은하. 두 눈에 가득 고인 눈물.
    화면 암전

    135. 장예식장- 밤

    화면가득 환하게 웃는 수아의 얼굴.
    카메라 팬하면, 얼굴 위에 장막처럼 쳐진 검은 띠, 영정사진이다.
    피어오르는 향, 국화꽃 향기 가득한 장례식장 전경을 보여주는 카메라. 한국의 전형적인 장례풍경이 보인다. 높은 양반들이 보낸 화환들과 검은 옷을 입은 문상객들. 음식을 실어 나르는 장례식장 직원들의 분주한 모습위로 들리는 가족들의 곡소리.

    136. 장례식장 밖- 밤

    종이컵이 툭 떨어지고 위잉하는 소리와 함께 커피가 쏟아진다. 컵을 꺼내 누군가에 건네주는 손과 받아드는 붕대감긴 손. 카메라 팬하면, 다정하게 선 강반장과 은하다. 두 손 가득 따뜻한 커피의 온기를 느끼고 향을 맡는 은하. 마음의 평화를 찾은 모습이다.

    강반장: 다친 덴 좀 어때요?
    은하: 많이 좋아졌어요.
    강반장: 다행이네. 우리가 좀 더 빨리 알았더라면 (머뭇) 미안합니다.
    은하: (당황) 아니에요.
    강반장: 우리도 예상을 못했어요. 실은, (웃으며) 은하씨를 의심했었으니까.
    은하: (웃음)
    강반장: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었다고나 할까. (불현듯) 아!!

    자켓 안주머니를 뒤져 수첩을 꺼내는 강반장. 은하에게 건넨다. 화면위로,

    강반장(E): 이제야 제 주인을 찾네요.

    은하,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신다.

    은하: 반장님, 가지세요. 전 이제 필요 없어요.

    은하를 바라보며, 수첩을 자켓 안으로 도로 집어넣는 강반장.
    그 때, 종이컵 안으로 떨어지는 눈송이. 따뜻한 커피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아버린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은하.
    검은 하늘위에서 하나둘 떨어지는 눈…

    은하(E): 눈이 오네요. 신기하지 않아요? 저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에서 이렇게 하얀 눈이 내리다니……

    137. 장례식장 안- 밤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선 은하의 뒷모습. 소음으로 가득한 장례식장 안.
    저 멀리 보이는 수아의 영정사진. 수아와 은하, 오래간만에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일순 주변의 소음 사라지고 정적이 감돈다.
    수아에게 다가가는 은하. 그런 은하를 반기듯 활짝 웃고 있는 수아.
    울고 있는 수아 모와 가족들, 그들 앞에 다가가 절을 하는 은하.
    잘 왔다며, 고맙다며, 은하를 와락 껴안는 수아 모, 서러운 눈물이 더욱 북받친다. 그런 수아 모를 보며 덩달아 울어버리는 은하. 주변의 소음과 곡소리가 다시 되살아난다.
    주변 가족들이 수아 모를 모시자, 자리에서 일어나 국화꽃을 들고 수아에게 다가가는 은하.
    영정사진 앞에 국화를 내려놓고 수아의 얼굴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본다.
    클로즈업된 은하의 얼굴. 실룩거리는 입술, 새어나오는 웃음… 남이 볼까 얼른 손으로 입을 가린다.

    은하: 잘 죽었다. 씨발년.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은하.
    종이다. 꾸깃한 그것을 빳빳하게 펴서 영정사진 아래에 놓고 돌아서는 은하.
    카메라 트래킹 이동하면 종이에 새겨진 글씨 클로즈업.

    순천 51 마 3526

    택시번호다.

    인서트 컷: 씬1과 이어지는 장면, 수첩을 넘기는 은하의 손. 갑자기 멈춘다.
    은하의 시점, 낙서로 가득한 수첩 귀퉁이에 휘갈겨 쓴 택시 번호. 이내 찢어버린다.

    은하(NA): 정말이야. 할 수만 있다면 뼈 속까지 착해지고 싶었어.

    장례식장 밖으로 빠져나가는 은하의 뒷모습. 하염없이 내리는 하얀 눈 속으로 검은 상복을 입은 채, 저 멀리 사라지는 은하.
    화면 천천히 암전.

    138. 교무실: 엔딩 시퀀스- 밤(플래시 백)

    (씬 137의 암전이 계속 이어진다.) 검은 화면위로 들리는 목소리.

    남선생(E): 진짜 니가 훔쳤어?
    은하(E): …네.

    서서히 밝아지는 화면. 선생과 학생들로 북적이는 교무실이다. 화면 모통이에는 의자에 앉아 미심쩍게 은하를 쳐다보는 남선생과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 숙이고 서 있는 은하가 보인다.

    남선생: (은하보며) 그럼 내놔봐.
    은하: (당황) 네?
    남선생: 니가 훔쳤때매? 있을 거 아냐! 돈이랑 카세트.
    은하: ……
    남선생: 나참. 교사생활 21년만에, 너 같은 앤 첨 본다. 친구들 기합받는 게 그렇게 불쌍하든?
    은하: ……
    남선생: (피식) 가봐! 임마!
    은하: (안 가고 쭈뻣거린다.)
    남선생: 허어 이놈이 (버럭) 안가?!

    쭈뻣대던 은하. 담임의 불호령에 마지못해 인사 꾸벅하고 돌아서 교무실을 나서려는데

    남선생: 이은하!
    은하: (멈칫)
    남선생(E): 선생이 아니라, 인생 선배로서 충고하는데, 너같이 착한 거는 나쁜 거다. 알간? 도둑놈을 못 잡잖아.
    은하: 네에.

    다시 인사하고 돌아서는 은하의 뒷모습위로.
    화면 암전, 엔딩 크래딧이 오른다.
    박선영

    박선영

    1983년생 고흥 녹동 출생

    순천대학교 철학과 졸업

    현, 순천대 문예창작과 3학년 재학 중

  • <기획의도>

    “인생은 선과 악으로 짠 그물이다.”

    도덕률의 딜레마, 착한 것은 나쁜 것이다.

    당신이 배 위에서 한가로이 낚시를 즐기고 있다고 하자. 그 때 독립군이 달려와 자신을 숨겨달라고 한다. 그를 숨겨둔 당신, 다시 낚시에 집중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엔 일본군이 달려와 혹시 도망친 독립군을 보지 못했느냐고 묻는다. 당신은 어떤 답을 할 것인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립군을 못 봤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반드시 독립군의 위치를 알려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도덕률은 당위성을 지니고 있으며, 거짓말은 악(惡)이고, 우리는 모든 인간을 자신처럼 존중해야 한다고 배우기 때문이다.
    ① 주제: 선과 악의 딜레마
    인간은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얼굴을 가진 야누스다. 이기적 본성과 양심을 동시에 가졌고,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도덕률'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학습한 인간은 상충되는 자신의 쾌와 타인의 쾌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고뇌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선과 악, 그 사이에서 불안한 외줄타기를 하는 광대들이 되고 말았다.
    이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것은 선과 악의 모호함이다. 선한 행동이 악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악한 행동이 선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② 소재: 왜 전화 상담원인가.
    이 시나리오의 주제인 선과 악의 딜레마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독특한 직업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전화상담원이었다. 그 어떤 고객과 상황을 만나더라도 항상 웃고, 친절하고 Yes를 추구해야 하는 아이러니, 정보화 사회가 선물한 익명성에서 오는 불안, 그리고 원만한 인간관계라는 공익아래 적당한 처세술과 가식으로 동료를 대하는 직장이라는 공간도 주제와 잘 버무려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③ 장르: 왜 심리 스릴러인가.
    스릴러라는 장르의 매력은 하나의 사건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과거와 현재, 허구와 진실, 드러냄과 감춤, 모순과 역설, 선함과 악함, 사회 부조리성을, 추리라는 형식을 통해 관객을 몰입시키고 주제의 설득력을 확보하는 것에 있다.
    또한 추리극 구성을 통해 끝없이 선을 추구하는 한 여자의 파멸과 신이 아니기에 겪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고자 했다.

    <등장인물>

    이 은하(27):
    미래로 통신 콜센터 전화상담원. 남들과는 다른 독특한 도덕관을 가진 인물. 그 어떤 고객과 상황을 만나더라도 Yes를 잃지 않는 인물. 그 이유에는 직장내 타인의 평가와 시선, 원만한 대인관계유지를 위함도 있으나 타고난 성품의 영향이 더 크다. 그러나 지나친 착한여자 콤플렉스로 인한 Yes맨 인상추구는 오히려 자신에게 악이 되어 돌아오고 결국, 보고 싶지 않은 진실을 만나게 한다. 네 번째 용의자.

    조 수아(27):
    은하의 직장동료. 직장 내에서 적을 만들더라도 자신의 주관을 굽히지 않는 성격.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상실한 존재근거를 물질로 충족시키는 인물.

    강 반장(50대):
    여기저기 영화에서 쏟아져 나오는 열혈 경찰과는 전혀 반대되는 성향의 인물.
    전형적인 한국 경찰. 철밥통 공무원이 가지는 적당한 권태와 직업병에서 오는 만성의심증. 타인에 대한 신뢰가 부재된 인물.

    한 민석(35):
    미래로 통신 콜센터 전화상담원. 선입견의 희생자. 열등감을 가진 인물. 세 번째 용의자.

    차 영주(32):
    은하의 절친한 직장동료. 야무진 성격의 소유자.

    박 종숙(25):
    은하의 직장동료. 나이는 어리지만 은하의 성품을 적당히 이용하는 영악한 인물.

    최 형사(30대):
    강 반장의 오른팔로서 다혈질적 성격.

    길 부장(40대):
    전화상담실 캡틴. 은하의 선함을 이용하는 밉살맞고 능구렁이 같은 인물.

    택시기사(50대):
    해학적이고 유머가 넘치는 전라도 사투리 구사. 각박한 세상살이에 찌들어 교묘히 자기 잇속을 채우는 방법을 터득한 인물. 첫 번째 용의자.

    이원호(30대):
    의사, 수아의 연인, 두 번째 용의자.

    그 외:
    수아 모(母), 임산부, 사채업자 등등

    <짧은 시놉시스>

    미래로 통신 콜센터 전화상담원으로 근무하는 은하는 직장 내에서 거절을 모르는 착한여자로 유명하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익명성을 이용해 상담원을 함부로 대하는 고객들에게도 절대친절을 잃지 않는 그녀는 직장에서도 알아주는 우수사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은하의 직장동료인 수아가 회식이 끝난 후 택시를 타고 귀가하던 중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수아 모의 실종신고로 경찰서에 모이게 된 수아의 직장동료들은 은하가 택시번호를 외우는 것을 봤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정작 은하는 기억을 하지 못하고, 강반장은 온갖 욕설과 낙서, 기괴한 그림으로 가득한 은하의 수첩을 보고 의아해 한다. 경찰은 조수아 실종사건의 수사가 난해하다는 것을 이유로 단순가출로 판단, 초동수사에 미진하고 다른 사건들에만 매달린다.
    그러던 중, 실종된 수아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고, 분노에 찬 수아 모는 경찰서를 발칵 뒤집어 놓는다. 언론은 실종자, 가출자 수사에 무관심한 경찰들의 태도를 비난하는 방송과 보도 자료를 내보내고, 발등에 불 떨어진 강반장과 경찰들은 부랴부랴 사태수습에 나선다. 목격자 확보, 주변인 수사에 착수한 강반장은 우선 첫 번째 용의자로 택시기사를 지목, 택시번호 화보에 나서지만 은하는 여전히 기억을 하지 못하고, 수첩 역시 택시번호는 적혀있지 않다. 할 수 없이 목격자 전단지를 만들고 사례금을 걸어 택시기사 검거에 총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그토록 잡고 싶었던 강력한 용의자인 택시기사가 제 발로 경찰서에 걸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용의자에서 목격자가 된, 택시기사의 진술을 토대로, 수아의 마지막 행선지가 연인인 이원호의 아파트임을 확인한 강반장은 수사에 착수, 실종당일 이원호의 알리바이가 확실하지 않음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종결지으려 하지만, 수아의 핸드폰위치추적 결과가 나오면서 사건은 미궁에 빠진다.
    수아의 마지막 행선지가 이원호의 아파트가 아님이 밝혀지자 수사는 제 속도를 내지 못한다. 다급해진 강반장은 사건을 원점으로 돌려, 수아의 주변인물과 원한관계를 중심으로 재수사에 착수하고, 사건의 실마리가 되는 수첩을 통해 은하의 과거와 현재, 직장동료들과의 관계를 파악, 사건의 가장 강력한 용의자로서 착하기로 소문난 은하를 지목하기에 이른다.
    박선영

    박선영

    1983년생 고흥 녹동 출생

    순천대학교 철학과 졸업

    현, 순천대 문예창작과 3학년 재학 중

  • 심사위원 정윤수(영화감독)

    심사기준은 독창성이라는 측면에 가장 비중을 뒀다. 그리고 주제나 내용에 담긴 작가의 진정성을 봤다. 세 번째로 형식적인 완성도를 눈여겨봤다. 상업성은 상대적으로 덜 고려했다. 전체적으로 감정적 쾌감을 안겨 준 작품들은 보너스 점수를 줬다. 예컨대 결말이나 캐릭터가 주는 쾌감 혹은 정서적 여운, 철학적 사유 같은 것들 말이다.

    당선작 외에도 '그림 그리는 남자' '침대 밑의 남자' '네 번째 이별' 등은 심사기준 안에 들어왔다. '네 번째 이별'은 독창성이 아쉽고, '침대 밑의 남자'는 사건의 연결 고리들이 지나치게 작위적이거나 우연에 의존한 약점이 아쉽다.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그림 그리는 남자'는 모든 면에서 탁월했으나 초·중반부의 쾌감이 중후반 이후 척척 걸어 나가지 못하고 지지부진해지는 아쉬움이 있다. 지수를 제외하면 인물들이 다소 통념적으로 결말을 맺는다.

    '메모'는 초·중반 많은 사변이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결말로 가며 인간이 지닌 양면성을 독특하고 깔끔하게 정리한다. 한정된 공간과 뻔한 인물들의 구도 안에서 흥미를 잃지 않게 하는 솜씨도 돋보인다. 선악과 인습적인 자기검열, 처세나 소심한 자기억압, 악마성의 포장 등등을 생각하게 하는 여운도 보너스로 선사한다.
  • 박선영

    박선영

    1983년생 고흥 녹동 출생

    순천대학교 철학과 졸업

    현, 순천대 문예창작과 3학년 재학 중

    학교 도서관에서 퀀터 그라스의 '양철북'을 읽고 있었는데 당선을 알리는 기자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끝이 아닌 시작임을 알기에 더 겸손히 수학하는 학생이 되겠습니다.

    세상의 부조리함에 나가떨어지더라도 소통의 끈을 놓지 않고, 자신과 사람과 치열하게 대화하는 글쟁이가 되겠습니다. 명예와 부와 권력의 반대편에 서서 상처받은 타인을 위한 작은 글쓰기를 가르쳐 주신 김길수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음 따뜻한 나의 친구 경미와 이 세상에 그 어떤 지식인보다 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관조의 시선을 놓지 않는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감사드립니다.
  • 작품전문
  • 시놉시스
  • 심사평
  • 당선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