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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몽(悲夢): 변하지 않는 꿈

by  안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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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선소감
  •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비일상적인 주제를 구현하는 강렬한 이미지와 환상적인 시퀀스로 이야기되어왔다. 통념을 초월하는 전복적인 내러티브와 이미지와 침묵, 상징성으로 나타나는 그의 영화들은 많은 해석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최근작인 <시간>, <숨>, <비몽>에 이르는 영화들은 지금 여기 우리의 보편적인 삶에 가까운 화두를 던진다. 하나의 현실 인식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영화는 단지 관념적인 이야깃거리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한 가정과 상상이 스크린을 통해 구체적인 형상들로 펼쳐지고, 그것을 관객이 온몸으로 음미할 때 관념은 현실이 된다.

    그렇지만, 영화의 모든 요소들이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이미지와 사운드는 씨줄과 날줄처럼 서로 얽히고 어우러져 하나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어떤 요소가 그 자리에 있다면 대체로 영화적 의미의 정당화가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각각의 장치들은 때로는 덧붙여지고 꿰매어진 무의미한 조각일 수도 있다. 그것은 받아들이는 관객 측의 문제이거나 제작자의 의도에 의한 것일 수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요소들 너머 영화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비몽>에 대해서 감독은 스스로 보편적인 사랑에 관한 영화라고 이야기하였다. 실제로 통제할 수 없는 꿈을 통한 남녀의 만남과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의 이야기가 몽환적인 이미지와 함께 펼쳐진다.‘나의 꿈이 타인의 현실이 된다’는 영화적 설정은 내러티브를 구성할 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영화 매체적 관점에서 본다면 일종의 영화에 대한 은유라고도 할 수 있는데, 영화란 만드는 이의 꿈과 상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실과 연관 지어 체현하는 관객의 존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몽>을 보고 각자 사랑의 경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그 속에서 부분적이나마 자신의 모습을 찾아보게 된다면 영화의 꿈은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평소에 쉽사리 남에게 열어 보이지 않고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의식의 기저에 숨어 있는 내밀한 기억을 끌어올리는 영화적 힘은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 보편 타당하게 여겨지는 심리적, 정신분석학적 접근을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어떤 한 범주로 사람들을 묶고 일반화하는 것에 대해 그다지 믿음도 흥미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미묘한 차이, 각자가 느끼는 개별적인 요소들의 의미에 집중하고자 한다. 영화의 어떤 층위가 우리를 건드리는지 어느 한 가지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켜켜이 구성된 한 층 한 층을 벗겨나가는 와중에, 영화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 그리고 그 각각이 어우러지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표현의 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1. 반복되는 꿈

    오프닝에서 우리는 남자의 꿈 속으로 들어간다. 푸른빛 가로등이 명멸하는 도로와 터널을 질주하며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따라가는 남자. 결국 앞만 보고 가던 남자는 가로질러 오는 차를 보지 못하고 충돌하고 만다. 모든 것은 남자의 꿈에서 시작되고, 진행되는 듯 보이는 것은 오직 그의 꿈뿐이다. 과거의 여자를 쫓고, 붙잡고, 가지려 하는 남자의 욕망은 점차 심화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변화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남자의 꿈과 이어진 현실 속 여자의 행동은 모두 무의미하게 반복된다.

    그러면, 영화에서 남자의 꿈이라는 설정을 없애버린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남자의 꿈은 영화의 동인이자 어쩌면 모든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마지막에 한강에서 투신 자살하는 남자의 모습에서 이 모든 것이 남자의 꿈 속에서 벌어진 일이 아닐까 생각하게 될 정도이다. 그것은 남자의 꿈이 여자의 현실로 이어지지만, 그의 꿈 안에 여자는 끝내 개입하지 못하는 점에서도 추측할 수 있다. 남자의 헤어진 그녀는 몽환적인 상대로서 늘 등장하는 반면, 그의 꿈을 대신 행해주는 여자는 그러한 잔혹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의 꿈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여자는 과연 진짜 존재하기는 했을까. 남자는 혼자 꿈을 꾼다. 꿈을 꾸는 우리는 모두 혼자이다.

    한편, 다른 이의 꿈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영화만이 줄 수 있는 판타지적 체험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다른 사람의 꿈에 관한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즐기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서 이미지의 편린들을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영화 속 꿈에 대한 이야기, 꿈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매력적인 흡인 요소이다. 어쩌면 영화 자체를 일종의 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우리는 영화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알면서도 눈감아주는 데 그칠 것이다.

    또한, 꿈이 주는 의미의 진실성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흔히 꿈을 허구이고 허망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한편으로 우리의 잠재의식을 드러내는 측면에서 솔직하고 믿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남자가 아무리 옛 사진을 찢어버리고 현실 속에서 여자와 사랑을 나누어도, 그의 꿈이 여전히 과거에 대한 집착을 나타내는 한 우리는 그의 말과 행동보다는 꿈 속 이미지를 믿게 된다.

    따라서, 결국 우리가 되돌아오는 것은 남자의 꿈 속이다. 자기 안에 침몰되어 계속해서 반복되기만 할 뿐 변하지 않는 꿈. 그런데, 영화 속 남자의 꿈과 현실 속에서 헤매다 보면 불현듯 자신의 꿈, 기억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영화는 나의 이야기로 전환되어 펼쳐지기 시작한다.

    2. 무의미한 독백

    <비몽>에서 겉으로 눈에 띄게 논란이 되는 점은 바로 남자 주인공 오다기리 죠의 일본어 대사가 그대로 영화 속에서 통용되는 부분일 것이다. 특별히 자연스러운 이유를 부과하거나 하지 않고 외국어 대사이지만 아무런 방해 없이 소통이 되는 것으로 설정하고 끝까지 밀고 나간다. 이에 대해 관객들은 처음에는 우스꽝스럽고 부자연스럽지만, 배우의 연기와 영화의 느낌상 무리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실제로 외국어 대사가 있는 그대로 소통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영화 속 대사들은 거의가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 독백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전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에서 대사보다는 침묵이 주를 이루었다면, 최근작인 <시간>, <숨> 등에서는 갑자기 많은 말들을 쏟아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시간>에서 오래된 연인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해댄다. <숨>에서 말을 할 수 없는 사형수를 찾아간 여인은 다짜고짜 자신의 경험담을 늘어놓고, 갖가지 노래와 춤을 선사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들의 언어는 상대방에게 닿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실패하고 만다.

    <비몽>에서도 마찬가지로, 두 사람은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처음에 난데없이 잠에서 깨어 경찰서로 끌려간 여자는 무고함을 호소하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여자를 지지하는 남자 역시 헛소리를 하는 것으로 치부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하면서 상황을 돌파해보려 하지만, 이들 역시도 상대방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지는 못한다. 또 다시 증오하는 전 연인을 찾아가게 된 여자는 꿈을 꾼 남자를 원망하지만, 남자는 왜 자신의 부탁대로 깨어나려고 노력하지 않았는지를 추궁한다. 같이 있지만 상대방을 헤아려 주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괴로움만 외치는 것이다.

    반면에, 두 사람이 서로를 보듬어주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말이 아닌 눈짓과 행동으로 마음을 나눈다. 함께 절에 들러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시퀀스는 그러한 무언의 소통을 보여주는 행위들의 연속이다. 함께 종을 치고 그 소리의 진동, 울림에 귀 기울이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듣는 연습처럼 보인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소원을 빌 듯 번갈아 돌을 쌓아 올리는 모습은 합일의 염원을 짐작하게 한다. 긴 불협화음에서 벗어나 아직은 하나의 아름다운 소리를 내지는 못하지만, 침묵 속에서 조용한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할 수 있다. 물론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그것이 폭풍전야의 고요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말이다.

    이렇게 어조와 소통 방식의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언어적 의미보다도 그들 사이의 감정의 교류, 마음의 흐름에 빠져들게 된다. 어느 순간 외국어가 더 이상 귀에 거슬리지 않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영화는 말이 없는 순간에 오히려 더 진정한 대화를 보여준다.

    3. 흑백의 대조적 색채

    영화에서 시종일관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두 남녀를 상징하는 흑백의 대비되는 색채이다. 이분법적인 구도는 내용을 쉽게 받아들이게 해준다. 두 사람이 입고 있는 검은색과 하얀색의 의상 외에도 이러한 색채의 대조는 여러 번 되풀이되어 나온다. 남자는 전각을 새겨 흰 종이 위에 먹빛 글자를 찍는다. 심지어 초반에 두 사람이 치료를 받기 위해 찾아가서는 ‘검은 색과 흰 색이 같은 색이듯, 한 사람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불행인 둘은 결국 이어져 있는 같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 둘이 사랑을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이야기되어, 영화의 실마리는 쉽게 풀릴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이후 서로 가까워지면서 두 사람이 입은 색채도 비슷한 빛으로 변해간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두 사람의 고뇌가 드러나는 장면에서 남자는 하얀색, 여자는 검은색으로 반대되는 상대방의 색을 입고 나타난다. 눈에 보이는 색채만 따라간다면 차츰 혼란스러워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과연 한 가지 색채로 어떤 한 인격을 나타낼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때때로 남자의 욕망이 지배하는 꿈 속에서는 붉은색으로 점철된 침실이 보이는 반면,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각자 생각에 빠져있는 곳에서는 푸른색 천 자락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붉은 색이 열정을, 푸른 색이 냉담함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은 어느 정도는 보편성을 띄더라도, 상황이나 문화 관습에 따라서 쉽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색채를 통한 감정의 전달은 다소 도식적이고 단정적이다.

    반면에, 공간과 그 속 조명의 측면에서는 좀더 자연스러운 감정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남자의 꿈속에서부터 시작하여 내러티브는 줄곧 두 남녀의 집과 밤거리, 여자의 헤어진 연인의 집 등 내부의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영화는 폐쇄적이고 갇힌 느낌의 공간들로 가득하다. 물론 그 속에서도 여자는 아름다운 색채의 옷감들을 깁는다. 마치 우리 안의 숨겨진 아름다운 소망처럼. 특히 꿈속에 본 장소를 찾아가는 밤거리의 장면들은 꿈속보다도 더욱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데, 어두운 밤거리는 밖이면서도 안과 같다. 영화 속에서 그들은 내내 갇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두 사람이 한낮에 절을 찾아가 함께 거니는 풍경은 매우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햇빛을 처음 받는 듯한 그 공간 속에서 두 사람은 꿈에서 빠져 나와 진정 살아 숨쉰다. 밝고 아름다운 건물들과 자연 풍경들. 하지만, 갑자기 여자가 사라지고 이윽고 산사에 어두컴컴한 밤이 찾아오자, 이제는 반대로 가장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여자가 컴컴한 산 아래, 하얗게 빛나는 커다란 불상을 뒤로 하고 불쑥 나타났을 때에는 순간 유령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둘의 안온한 합일이 이루어지는가 하는 사이에 다시 밤은 찾아오고, 여자는 돌이킬 수 없는 가장 어둡고 불길한 꿈 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그 후, 여자가 감금되는 병원은 흰색 페인트가 칠해진 벽과 눈부신 조명으로 완전히 새하얀 공간이다. 그리고 남자가 떨어져 죽는 강가 역시 하얀 눈으로 가득하다. 어둡고 컴컴한 현실 속에 있던 때와는 정반대이다. 흑백의 대조된 서로 다른 세상. 그렇기 때문에 이 마지막 두 사람의 죽음은 암울한 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해방, 새로운 세계로의 탈출로서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4. 촉각적 행위

    영화를 통해 전반적으로 지켜보게 되는 것은 두 사람의 잠을 쫓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잠을 자고 싶은 욕망은 원초적인 것이고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므로 잠을 자지 못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누구나 몸으로 감지할 수 있다. 스크린 속에 보여지는 두 사람의 고통은 이미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손에 잡힐 듯 가깝게 촉각적으로 다가온다.

    졸음을 이기기 위한 두 사람의 행위는 처음에는 간단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얼굴을 잡아뜯어 일그러뜨리고 눈꺼풀에 테이프를 붙여서 억지로 감기지 않도록 한다. 그러나 점점 강도가 더해지는 행위들은 더 이상 웃어넘길 수가 없다. 바늘로 찌르고 살가죽을 벗기는 참혹한 장면들이 편집되지 않은 채 흐르는 시간 속에 그대로 보여진다. 이와 함께 외부에 가해지는 충격보다도 격심한 근원적 괴로움이 온 몸을 감싸고, 클로즈업 된 얼굴 위로 세밀한 고통이 눈앞에 펼쳐진다.

    혹자는 그 동안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에서 보여진 강렬하고 참혹한 이미지들과 비교할 때, 그러한 장면들이 다소 약하고 그다지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강도 높은 응축된 한 장면이 아니라, 반복되는 고통 속에 지속되는 시간이다. 이제는 한 순간 단말마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 시간을 함께 견뎌내어야만 한다.

    한편, <시간>과 <숨>에서도 역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바로 반복되는 시간, 끝나지 않고 지속되는 시간이다. <시간>에서 성형수술과 그로 인해 결별해 있는 시간보다 무서운 것은, 그 서로의 탈바꿈을 위한 시간이 또 다시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숨>에서 가장 숨막히는 장면은 여자가 사형수와 인위적인 사계절의 시간을 경험하고 나서 결국 반복되는 일상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마치 시지프스의 신화와도 같이, 꿈 속을 헤매는 두 사람의 사투는 도무지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이제 그들의 육체적 행위는 점차 정신적 수행처럼 변해간다. 전각을 새기던 남자는 글자를 몸 위에 새긴다. 자신의 집착을 완전히 버리지 못해 결국 여자가 현실에서 살인을 저지르게까지 만들자 남자는 자신의 손과 발등을 찧으며 괴로워한다. 여기에서는 일종의 종교적 뉘앙스마저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장면들에서 현실성이나 내러티브의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허망한 시도이다. 말 그대로 정신적인 마음의 고통을 체화한 이미지로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단지 무의미하고 눈뜨고 보기 괴로운 모습으로만 남을 것이다.

    5. 배경의 초월적 시공간

    영화의 아름다움에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배경이 되는 한옥과 산사의 풍경이다. 일단 오늘날 흔하게 볼 수 없는 한옥의 모습은 시선을 잡아 끄는 힘이 있다. 이와 같은 시각적 매혹은 다른 요소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매력적인 배우들과 소품들은 의식적으로 영화를 구성한다.

    그런데, 이전 영화 <빈집>에서도 인상적으로 등장했던 한옥의 모습은 해외 시장을 겨냥하여 한국의 미를 선보이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고 한다. 하지만, 단지 해외 홍보를 위해서라거나 아름다운 화면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영화 내에서 배경의 의미를 찾아보기는 힘들 것이다. 또한, 그것이 관객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영화 속에서 배경의 비중은 생각보다 크다. 내러티브의 공간이 될 뿐만 아니라, 분위기를 장악하고 인물의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등 정서적 표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굳이 한옥과 절, 그리고 락고재(樂古齋)라는 명칭의 공간을 제시한 것은 영화적으로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여기서도 앞의 다른 요소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반복되는 삶과 변하지 않는 시간을 떠올리게 된다. 전통 가옥인 한옥은 과거의 산물이자 변하지 않고 보존되어야 할 미래의 유산이다. 유한한 인간의 생명에 비해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는 옛집의 모습은 보다 자연을 닮았다. 짧은 인간의 수명과 한옥의 긴 역사. 변하지 않고 숨결을 보존해온 집. 그것은 언뜻 시공을 초월한 판타지적 공간의 느낌을 줌과 동시에, 두 사람이 겪는 고통이 지금 여기, 현재의 시공간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의 삶에 속하는 것으로 느껴지게 한다. 절이라는 공간 역시 과거와 현재의 공존, 반복되는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특별한 장소이다.

    한편, 여자가 꿈속에서 매번 찾아가는 헤어진 연인의 집, 락고재(樂古齋)는 ‘옛 것을 즐기는 집’이라는 뜻으로, 과거의 기억이 저장되어 있는 곳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의 인물은 계속해서 과거의 기억을 다시 찾아가고 기억은 반복된다. 이처럼 기억의 흔적이 이후에 겪는 심리적 사건에 의해서 끊임없이 재조직되고 재기록된다고 하는 사후적(事後的) 기억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와 현재에 동시적으로 접근하도록 해준다.
    의미심장한 점은, 여자가 어느 순간 남자의 꿈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본인의 기억과 집착에 의해 스스로 그 곳을 찾아간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남자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움직여지는 마리오네뜨 같았던 여자는 그 순간 남자와 다르지 않은 존재, 기억과 집착과 이기심으로 점철된 또 다른 자아로서 보여진다.

    6. 나비 소품의 한계

    나비의 날개 모양(非)에 마음(心)이 덧붙여져서 제목 비몽(悲夢)의 슬플 비(悲)자가 되었다고 하는 시각적 상상력은 영화적 이미지의 시작이다.

    그런데, 나비는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을 떠올리게 하여, 영화의 의미를 단정짓게 만들기 쉽다. 게다가 이러한 나비의 모티브는 영화 속에서 너무 잘 눈에 띄는데, 여자의 목걸이, 병원에 감금되어 어깨를 움츠리는 여자의 몸짓 등을 통해 반복되고 변주된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죽어서 나비로 변한 여자가 남자의 곁으로 날아가는 모습이 의미심장하게 보여진다.

    여기서 다시 제목의 글자로 돌아가보면, 나비의 형태에서 시작한 글자가 결국 슬픔을 의미하게 된다는 점을 살펴볼 수 있다. 물아일체의 경지를 비유하는 호접지몽은 인생의 덧없음을 나타내는 깨달음이다. 그런데 그렇게 한바탕 꿈 같은 세상을 사는 데에는 그다지 비통할 이유가 없다. 영화가 단지 이 모든 것이 일장춘몽(一場春夢)에 불과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비몽>은 줄거리를 듣거나 짧은 예고편을 보았을 때와 영화 전체를 직접 보았을 때의 차이가 큰 편이다. 영화 속 인물들과 함께 고통의 시간을 견디어내고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에 비로소 영화가 진정 나타내고자 하는 홀로 선 인간의 존재, 고통스럽지만 반복해서 살아가야 하는 삶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 죽음과 나비의 환생은 영화에서 보여주는 이러한 실존적 체험을 봉합하는 도구로서 사용된 것이다.
    결국, 나비의 모티브는 외시적 의미를 형성하고 관객을 내러티브로 끌어들이는 장치, 하나의 작은 소품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7. 오픈-엔디드 미장센 (open-ended mise-en-scene)

    나비의 상징에서 한 번 헤맨 관객들은 가장 큰 혼란에 맞부딪히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꿈과 현실 속에서 각각 분리되어 있던 네 명의 인물들이 한 곳에서 대면하는 장면이다. 이로부터 그 동안 영화 속에서 보여준 모든 요소들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연극적으로 화면 안에 설정된 모든 것이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기 위해 연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갈대밭의 공간은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집 안처럼 막혀 있지도, 밖처럼 열려있지도 않은 일종의 비공간이다. 이 곳에서 두 사람은 흑백의 옷 색깔을 바꿔 입고, 즉 서로의 입장이 되어 거울 앞에 서듯이 마주 본다. 한편, 그들의 또 다른 자아,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과거 연인들 역시 갈대밭처럼 내외적 공간인 자동차 속에 있다. 정신 없이 사랑을 나누고 집착하고 의심하고 멀어지는 두 사람의 관계를 남녀는 꿈속처럼 바라본다. 깊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과거 기억의 물을 퍼 올리듯이, 혹은 극중 극, 영화를 보듯이 말이다. 관객들은 현재 두 사람의 괴로움의 원인을 알 듯하다. 그러나 점점 네 사람의 관계는 엉키고 설키며 갈수록 한 덩어리가 되어가고, 이제는 누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이 과거이고 현재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아수라장을 눈앞에 맞닥뜨리면, 처음에는 혼돈과 호기심으로 앞에 펼쳐지는 모습에 눈길을 쏟지만 이내 혼란과 고통에 눈을 감고 귀를 막게 된다. 그 순간 오롯이 남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여태껏 줄곧 남자와 여자의 꿈을 매개로 한 릴레이를 담담하게 보여주던 영화는 느닷없이 모든 것을 해체시키려 한다. 남자는 꿈꾸고 여자는 현실에서 행동하는 시나리오를 잘 따라가던 관객은 갑자기 딱 멈추고 갈 길을 잃는다. 그리고 어느 틈엔가 그 속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한다.
    화면 속에 보여지는 네 사람은 결국 한 사람, 나 자신과 같다. 나의 모습이라는 것은 본래가 하나로 규정지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들에게 보여지는 나, 남들이 실제로 보는 나는 모두 각각 다르다.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알고 있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추측에 불과하다. 더구나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과 남들이 보는 나의 모습은 어긋나게 마련이다. 결국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붙들고 착각 속에 산다.

    남자는 꿈 속에서라도 헤어진 연인을 되찾으려 노력하고 안타까워하지만, 대체 그들이 헤어지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얼핏 절실한 사랑처럼 보이는 그의 행동은 차라리 집착에 가깝다. 가장 무서운 것은, 그렇게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상대방만을 원망하고 집착하는 관계가 변하지 않고 영원히 되풀이되는 것이다. 미래에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다른 상황이 될지라도 똑같은 관계가 반복된다. 내가 달라지지 않는 한 변하는 것은 없다.
    손과 발등을 찧으며 오열하는 남자의 모습은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책망이다. 우리가 머리 속으로 그치는 것들을 영화는 붉은 피와 뜯기는 살점을 통해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생각하게 한다. 나는 저토록 자문해본 적이 있는지, 내게도 저러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닌지, 그리고 지금의 내 모습은 저이와 얼마나 다른지를 말이다.
    번뇌와 성찰 속에서도 자신의 딱딱한 껍질을 깨지 못하던 남자는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한다. 죽음으로서라도 나에게서 벗어나려 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흔히 이야기되는 소위‘나를 잊고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내어주는’사랑의 판타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녀는 이어질 수 없다. 죽어서 나비가 되어 찾아가는 모습은 그저 헛된 것이다. 현실 속 소통의 부재, 사랑의 단절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 영화는 이보다 더 절망적일 수 없다.

    0. 변하지 않아서 슬픈 꿈

    최근에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이 변했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심지어 영화를 보고 감독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걱정이 되어서 만나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도 한다. 그런데, 어찌해서 영화 자체를 영화적 구성물로서 보지 않고 자꾸 감독의 상태를 나타내는 자전적 산물로 보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김기덕 영화가 변화했는지, 변화해가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들 인간의 본질 자체는 과거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영화 <시간>, <숨>, <비몽>은 언뜻 보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변화해가는 인간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끝끝내 변하지 않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계속되는 반복과 변주로 나타나며, 결국에 가서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자신의 이기심에로, 안정된 일상으로. 혹은 그 변하지 않는 것을 뛰어넘기 위해 다른 세상, 즉 죽음에 이른다.

    아주 어렸을 적에 똑같은 꿈을 한동안 반복해서 꾼 적이 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그 꿈은 내용 자체도 단순히 되풀이되는 것이어서 마치 꿈 속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심지어는 꿈속에서 이것이 꿈이라는 것, 또다시 똑같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깨어날 수가 없어서 발버둥치기도 하였다. <비몽>을 보면서 저들의 꿈이라는 것도 그때의 경험과 비슷하지 않나 싶어 갑갑하게 목을 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러한 느낌은 어린 시절의 막연한 공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현실로서 다가온다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이 슬픈 이유는, 그 속에서 어떤 새로운 희망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여있는 물과 같다. 그런데 평범한 우리들의 일상은 알다시피 변하지 않는 단순한 반복들로 이루어진다. 소소한 사건들, 내게 큰 의미처럼 다가오는 사물들과 사람들, 그리고 그 순간에는 온통 그것으로 가득한 괴로움과 기쁨들. 이 반복되는 편린들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모든 것은 내 안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갇혀있는 기억 속을 비집고 터져 나오는 한 조각이 바로 꿈일 것이다. 변하지 않는 꿈,
    비몽(悲夢).
    안지영

    안지영

    1979년 서울 출생

    2003년 이화여대 광고홍보·방송영상학과 졸업

    2008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영상커뮤니케이션학과 재학

  • 정지욱(영화평론가)

    지난해에 비해 출품수가 늘었다고 하지만 매우 소소할 뿐이니 시나브로 어둠에 잠겨가는 한국영화산업의 현 상황처럼 느껴져 씁쓸했다. 한국영화산업의 불황이 오히려 자극이 되기를 조심스럽게 바래본다.

    올 한해 화제가 됐던 몇 영화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듯 이에 대한 글들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들 영화가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데 비해 대부분이 단순한 칭찬에 머무르고 말았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저 한 작품의 칭찬 일변도라면 기업 형 결혼식장의 전문 주례꾼들의 주례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한편 평론의 일정 형식을 파괴한 글들도 만날 수 있었다. 이미 대중화되어버린 인터넷 글쓰기의 자연스런 반영이랄까. 긍정적으로 보자면 글쓰기에 대한 어려움을 극복했다거나 사유의 자유로운 반영이라 하겠지만, 오히려 수필에 가까웠다. 좀 더 깊이 생각하고 글을 깎고 다듬는 내공이 쌓아지길.

    심사에서 마지막까지 주목 받은 송보림의 '천사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안지영의 '비몽(悲夢):변하지 않는 꿈', 이만영의 '유쾌한 소통,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길'은 작품들을 통해 보여주는 감독의 일관된 흐름을 읽어내는 품세가 탁월했다. 그 중에서 장평과 단평 모두 명확하고 간결한 문체로 자신의 분석을 정확히 전달한 안지영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 안지영

    안지영

    1979년 서울 출생

    2003년 이화여대 광고홍보·방송영상학과 졸업

    2008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영상커뮤니케이션학과 재학

    긴 터널을 지나와, 이제 새로운 입구 앞에 선 느낌이다.
    작년 이맘때가 생각이 난다. 소위 벼랑 끝에 선 듯한 경험을 했다.
    2008년은 길고 길었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해가 될 것이다.

    영화를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영화를 얼마나 잘 아는가 하는 것보다
    영화를 얼만큼이나 사랑하는가 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느껴왔다.
    특히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로 세상을 보아온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울 따름이다.
    다만, 어떤 가능성을 좋게 봐주신 심사위원 분들께 감사드린다.

    영화를 통해 삶 속을 들여다보고 숨겨진 작고 사소하고 가벼운 것들을 캐내어 그 의미를 나누고 싶다. 더 공부하고 경험해보아야 할 일들이 참 많다.
    다시 새 생명이 돋아나듯이, 앞에 주어진 모든 것들에 모든 이에게 감사한다. 무엇보다도 힘든 시간 지켜주신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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