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계, 주체, 그리고 언어
오규원은 첫 시집 『분명한 사건』(1971) 이래 생전의 마지막 시집『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문학과지성사, 2005, 이후 『새』로 약칭함), 그리고 유고 시집 『두두』(문학과지성사, 2008)에 이르기까지 열 권의 시집을 통해 시를 ‘살아 왔다.’ 짧지 않은 시 인생인 만큼 그의 시 세계는 몇 번의 뒤척임과 도약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러한 분절점은 비평가들에 의해 분석되고 규정되기 전에, 시인 스스로의 고백과도 같은 이론적 선언을 통해 보다 선명하게 제시되곤 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세계를 투명하게 드러내려는 노력, 관념과 현실에 대한 해체와 재조명, 현상적 의미의 재발견으로 이어져 온 세계 대 주체의 도저한 투쟁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물의 의인화 기법, 아이러니와 패러디, 환유적 시 쓰기와 날이미지의 시적 방법론으로 나아간 언어 대 주체의 치열한 씨름이었다. 세계, 주체, 언어의 삼각형 속에서 가장 첨예한 꼭짓점을 이룬 것은 언어였다. 오규원만큼 치열한 자의식을 갖고 자신의 언어를 날카롭게 벼려, 시를 통해 언어 철학적 수준에까지 도달한 시인은 흔치 않았다.
세계를 투명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시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세계와 자아 사이에 끼어 있는 언어였다. ‘그냥 있을 뿐’인 세계를 잡으려고 언어를 들이대는 순간, 세계는 곧바로 왜곡된다. 그것은 언어에 달라붙어 있는 온갖 심리적, 도덕적, 형이상학적 의미들 때문이다. 그것을 간파한 시인은 개념화되거나 관념화되기 이전의 현상을 붙잡아내고자 한다. 그리고 그러한 ‘날이미지’를 얻기 위한 전략으로 ‘환유적 체계’와 ‘동사적 접근’을 선택한다. 무한한 치환과 대치 관념을 통해 세계를 쪼개고 부수는 은유적 체계에 대한 응전으로, 그는 인접성에 의한 결합과 접속을 축으로 하는 환유적 체계를 작동시킨다. 은유가 관념적 의미를 적극 수용함으로써 사물을 ‘죽이(殺)’는 것이라면, 환유는 ‘살아 있는 의미들’을 함께 껴안음으로써 사물을 ‘풀어놓(放)’는 것이다.(오규원, 「조주의 말」, 『날이미지와 시』, 문학과지성사, 2005, pp. 42~44. 앞으로 특정한 언급 없이 괄호 속에 소제목과 쪽수만 제시한 것들은 모두 앞의 책에서 인용한 것임) 한편 ‘동사적 접근’은 세계를 생성과 변화를 간직하고 있는 대상으로 보자는 것이다. “세계는 동사인데, 언어는 명사”(「언어 탐구의 궤적」, p.143)라는 문법적 비유는 그 의도를 간명하게 드러낸다. 시인은 “진리는 동사로 발견되고 서술되기도 한다”(「은유적 체계와 환유적 체계」, p.25)라고 말하면서, 명사로 명명된 은유적 체계보다는 환유적 체계를, 그리고 그것의 ‘굳은’ 의미를 풀어줄 동사적 접근을 요구한다.
1990년대 초 분명한 이론적 선언으로 제시된 ‘날이미지 시론’은『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문학과지성사, 1995, 이후 『길』로 약칭함)에서 본격적으로 구현되기 시작하여『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문학과지성사, 1999, 이후 『토마토』로 약칭함)에 이르러 한창 무르익는다. 그 후 6년 만에 나온『새』와 다시 3년의 시차를 두고 시인의 죽음과 함께 묶여진 유고 시집『두두』역시 환유적 체계와 동사적 접근이라는 일관된 시 정신 아래에 놓일 수 있다. 그러나 일견 느슨한 자기 복제로 읽힐 수도 있는 오규원의 후기 시들은 그가 ‘날이미지’ 시론으로 의도했던 지점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2. 살아 있는 것, 살아 있는 것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정(定)입니까?/ 정(定)하지 않은 것이다./ 무엇 때문에 정하지 않은 것입니까?/ 살아 있는 것,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조주, 『조주록』, 장경각, 1991) 오규원은 반성 없이 개념화함으로써 ‘정(定)’하는 행위를 경계하고자 한다. 그러나 세계와 대응하기 위해서는 ‘정(定)’하는 것에 준하는 언어 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정(定)하지 않으면서 정(定)하는 언어’가 시인이 꿈꾸는 언어다. “모든 존재는 현상으로 자신을 말한다. 그리고 모든 존재의 그 현상이 그 ‘존재의 언어’다.”(「풍경의 의식」, p.79) 그것은 개념화되고 사변화되기 전, 살아 있는 사물의 현상인 ‘날(生)이미지’이다.
그러나 인식 주체의 감정과 판단이 배제된 순수 날것으로서의 ‘사물의 현상’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그것은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이남호는 사물의 진짜 맨얼굴과 날이미지 사이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두 번의 굴절을 정확히 지적한다. 오규원의 시가 제시하는 날이미지는 “인식 주체의 주관성이라는 프리즘과 언어라는 매체의 프리즘을 통과해서 얻어진 이미지”(이남호,「날이미지의 의미와 무의미」, 『오규원 깊이 읽기』, 문학과지성사, 2002. p. 273)라는 것이다. 정과리 역시 “존재의 드러남에 주관이 가담하는 광경”, “시의 무대에 언어가 구성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을 보고야 말았다고 하면서, “‘환유적 태도’라는 용어를 폐기하고 싶”(정과리, 「‘어느새’와 ‘다시’ 사이, 존재의 원환적 이행을 위한」,『새』)은 심정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결국 오규원은 자신이 세운 엄정한 이론을 시 속에서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그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임무를 자신의 시에게 요구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결국 그는 기존의 낡은 관념을 벗겨낸 참신한 관찰의 결과―날이미지가 아니라 단지 또 하나의, 다만 새로운 주관적 이미지―를 통해 경험을 재구성하는 데 그친 것인가?
오규원의 시론과 시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모순과 균열은 자주 목격되었으며, 그에 대한 애정을 지닌 평론가들에 의해 그러한 균열을 메우기 위한 이론적 작업 또한 진지하게 시도되어 왔다. 특히 그러한 작업의 대부분은 현상학의 힘을 빌려 시도되었다. 그것은 일찍이 시인 스스로 ‘현상’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해 왔던 데 기인하기도 한다. 날이미지시에 있어서 균열의 진앙은 결국 ‘의미화가 아닌 주관적 구성’의 가능성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지점에서 유고 시집 『두두』에 붙인 이광호의 해설 중 한 문장이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오규원의 ‘두두시’가 보여주는 것은 언어 너머를 통해 다른 진리의 차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의 이미지를 통해 ‘두두’의 동사적 사건성 자체를 드러내는 작업이다.”(이광호, 「‘두두’의 최소 사건과 최소 언어」,『두두』) 물론 이러한 작업의 의미를 ‘사물의 존재방식에 대한 상상적 공간의 제시’에서 찾는 데 그친 것은 아쉽지만, 사물의 ‘동사적 사건성’이라는 지적은 매우 유효하다. ‘사건’은 A나 B가 아니라 A에서 B로 넘어가는 짧은 시간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은 물체들로부터 발생하되 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본성을 지닌 비물체적인 것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사건’은 A나 B의 고정된 상태를 지시하는 명사나 형용사가 아니라, 그것들의 변화와 생성을 표현하는 동사에 관련된다.(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한길사, 1999, p.50) 결국 명사와 명사가 결합, 접속, 연쇄하는 ‘동사적’ 순간에 그 물체들의 표면에서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길』이래 『토마토』, 『새』, 『두두』의 대부분의 시들은 ‘A와 B’라는 명사들의 합언(connection) 형식을 제목으로 갖고 있다. 이것은 인접성의 원리에 따른 환유적 전략을 내세우면서, A와 B 사이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한 동사적 접근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의미화가 아닌 주관적 구성’의 가능성을 탐구함에 있어, ‘현상’이라는 용어보다는 ‘사건’이라는 용어가 훨씬 유효함을 기대하게 되는 지점이다.
3. 심층에서 표면으로
『새』의 해설에서 정과리는 ‘서시’라는 부제를 단 첫 시, 「호수와 나무」에 대해 ‘서시’로서의 존재론적 지위에 근거하여 비유적 독해를 시도한다. 즉 이 시를 ‘시 쓰기에 대한 시인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읽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독법에 따라 필자 역시 이 시를 오규원의 시 세계에 대한 ‘압축 상징도’로 읽어보고자 한다. 그러나 그 방향은 ‘존재의 원환적 이행’(정과리)이 아니라 ‘심층에서 표면으로의 이행’, 즉 사건의 철학을 향할 것이다.
잔물결 일으키는 고기를 낚아채 어망에 넣고
호수가 다시 호수가 되도록 기다리는
한 사내가 물가에 앉아 있다
그 옆에서 높이로 서 있던 나무가
어느새 물속에 와서 깊이로 다시 서 있다.
「호수와 나무―서시」(『새』, p.9)
이 시에는 두 계열의 사건이 존재한다. 첫째 계열은 ‘고기가 잔물결을 일으킴’, ‘고기를 낚아채 어망에 넣음’, ‘호수가 호수가 됨’, ‘한 사내가 앉아 있음’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 사건은 단순하다. 한 사내가 한 마리의 고기를 낚은 후, 다시 고기를 낚기 위해 호수가 잔잔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풍경 속에서도 호수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어느 순간 ‘고기’와 ‘호수’라는 물체들 사이에서 ‘잔물결 일어남’이라는 사건이 발생한다. 특히 그것은 호수의 표면에서 일어난 변화라는 점에서, 순간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표면 효과(effect de surface)’라는 사건의 특성을 전형화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호수는 다시 ‘(잔잔한) 호수’로 돌아온다. 물론 여기서 ‘잔물결 일어난 호수’ 또는 ‘잔잔한 호수’ 어느 것도 호수의 본질은 아니다. 다만 양방향 사이에서 이행하고 있는 사건들의 반복과 생성의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내’는 이러한 살아 움직이는 ‘표면 효과’를 잡아내지 못하고, 그것의 원인인 ‘고기’ 자체를 포획한다. 하지만 물 밖으로 나온 고기는 더 이상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낚시질 하는 사내를 바라보던 화자의 시선은 돌연 사내 옆에 있는 나무와 관련된 둘째 계열의 사건으로 향한다. 그것은 ‘나무가 높이로 서 있음’과 ‘나무가 깊이로 서 있음’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높이’를 ‘깊이’로 바라보고 있는 존재는 ‘사내’가 아니라 사내가 포함된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화자다. 하지만 ‘높이’에서 ‘깊이’로의 변화가 단지 화자의 주관적 시선이나 내면적 차원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잔물결 일어난 호수’에서 ‘잔잔한 호수’로의 물리적 변화에 수반된 것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사내’와 달리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들이 일으킨 표면 효과에 주목하고 있다. 나무가 호수를 만나 ‘높이’에서 ‘깊이’로 변화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화자는 하나의 사건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 행위’는 오규원이 그토록 경계했던 개념화, 사변화하는 인간 중심적인 언어 행위와 구별된다.
사건은 언어를 통해서만 표현 가능하다는 점에서 곧 의미 자체이다. 그것은 언어 이외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건은 어디까지나 사물들과 더불어 발생한다. 들뢰즈는 이러한 사건의 본성에 대해 “사물들과 명제들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것”(『의미의 논리』, p.78)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러므로 한 쪽에는 고정된 사태를 ‘지시’하는 명사들과 형용사들이 존재하며, 다른 한 쪽에는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사건들을 ‘표현’하는 동사들이 존재한다. ‘지시된 것’은 두꺼운 관념들이며 ‘표현된 것’은 한없이 얇은 표면 효과, 즉 의미-사건이다. 결국 「호수와 나무」는 제목과 화자의 시선이 동시에 집중하고 있는 둘째 계열의 사건을 통해, 심층에 숨겨져 있는 존재의 본질을 지시하는 행위로부터 표면에서 발생하는 사건-의미를 표현하는 행위로의 이행을 보여주고 있다. 의미는 호수의 표면 아래에서 원인으로 작동하는 ‘고기’가 아니라, 호수의 표면에서 효과로 발생하고 있는 ‘나무가 높이로 서 있음’이라는 사건에 있다. 이것은 오규원의 다음과 같은 진술과 정확히 일치한다. “‘맨 얼굴’, 굳은 개념을 벗겨낸 ‘내면’은 처음부터 사물에 내재한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표현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수사적 인간(homo rhetoricus)인 우리가 그렇게 명명함으로써 존재하는 사물의 얼굴인 것이다.”(「수사적 인간」, p.54) ‘명명함으로써 존재하는 사물의 얼굴’이란 바로 ‘정(定)하지 않으면서 정(定)하는 언어’가 드러내는 얼굴이며, 그것은 곧 ‘사건의 표현’이다.
4. ‘됨’, 그리고 아이온의 시간
사건은 ‘임(etre)’의 존재성이 아니라 ‘됨(devenir)’의 생성과 통한다. 따라서 오규원의 시는 온통 ‘됨’의 사건들로 가득하다. 시의 제목을 이루고 있는 A와 B는 서로 접속하고 결합하며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변화, 생성하면서 무언가가 ‘되’느라 바쁘다. 새 한 마리는 “하늘을 열고 들어가/ 뚫고 들어가/ 그곳에서/ 파랗게 하늘이 되”(「하늘과 두께」,『새』)기도 하고, 어치는 “날다가/ 갈참나무가 되”(「숲과 새」,『새』)기도 한다. 이러한 사건은 견자(見者)인 시인의 눈에 포착된 시각적 진실에 기인한다. 즉 시인의 눈에 포착된 어치가 허공 속에서 날고 있는 움직임이었다가 갈참나무에 내려앉는 순간 갈참나무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됨’의 사건이 반드시 시각적 관찰에 포착된 외부 현상만은 아니다. 견자 또한 ‘됨’의 사건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둑이 있는 강변길로 산책을 나간 ‘나’는 “엉겅퀴로 가서/ 엉겅퀴로 서 있다가 흔들리다가” 이번에는 “나비가 되어 허덕허덕 허공을 덮”치더니, “새의 그림자에 밀려 산등성이에 가서 떨어”진 화자는 “어느새” “미루나무의 그늘이 되어 어둑어둑”해진다.(「둑과 나」,『새』) 이것은 단지 비유적으로 묘사된 것이 아니다. 공간의 이동에 따라 실제로 ‘엉겅퀴’가 되었다가 ‘나비’가 되었다가 ‘미루나무의 그늘’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됨’의 사건과 깊이 연관된 시어가 바로 ‘허공’이다. 오규원 시에서 ‘허공’은 『길』을 시작으로 『두두』까지 꾸준히 등장해 왔고, 『새』이후로는 ‘침묵’, ‘적막’, ‘구멍’, ‘공기’, 특히 ‘사이’로 변주되기도 했다. ‘허공’은 ‘그림자’와 함께 오규원의 시 세계에서 그 출현 빈도만큼이나 중요성을 차지해 왔으며, 비평가들에 의해 ‘존재의 근원’(심덕룡) 또는 ‘사물의 양감’(조강석)과 관련되어 주목받아 왔다. 그러나 오규원의 후기 시를 사건 개념으로 접근할 때, ‘허공’은 사건이 옮겨 다니며 발생하는 ‘빈 자리’로 드러난다. ‘빈 자리’는 과잉이자 곧 결핍이다. 즉 담쟁이덩굴이 “허공에서/ 허공으로 이동하고 있”(「하늘과 돌멩이」,『토마토』)을 때 혹은 “빗줄기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는 허공”(「골목과 아이」,『새』)일 때 허공은 순간순간 사물로 가득 찬 과잉의 자리이다가, “잎이 가지를 떠난다 하늘이/ 그 자리를 허공에 맡긴다”(「나무와 허공」,『두두』)고 할 때 그것은 아무것도 없이 존재하는 여분이 된다. 또한 그것은 과잉과 결핍의 경계가 되기도 한다. “배경은 모두 허공입니다”(「새와 집」,『토마토』)라고 진술할 때는 일상적 의미의 배경이 되고, “허공은 사내의 등에서 가파르다”(「하늘과 침묵」,『새』) 혹은 “옷에 붙은 허공이 바람에 펄럭인다”(「길」,『두두』)라고 할 때는 사물과 만나는 경계 또는 겹침의 자리가 된다.
‘빈 자리’는 끊임없이 자리를 옮겨 다니는 우연적 계기와 더불어 나타난다. 표면으로 솟아오른 우연은 결핍을 과잉으로, 다시 과잉을 결핍으로 만들면서 사건들을 조합, 배열하고 다시 계열화한다. 예컨대 다음 시를 보자.
나무가 있으면 허공은 나무가 됩니다
나무에 새가 와 앉으면 허공은 새가 앉은 나무가 됩니다
새가 날아가면 새가 앉았던 가지만 흔들리는 나무가 됩니다
(중략)
방안에 침대가 있으면 허공은 침대가 됩니다
침대 위에 남녀가 껴안고 있으면 껴안고 있는 남녀의 입술이 되고 가슴이 되고 사타구니가 됩니다
여자의 발가락이 되고 발톱이 되고 사타구니가 됩니다
삐걱이는 침대를 이탈한 나사못이 되고 침대 바퀴에 깔린 꼬불꼬불한 음모가 됩니다.
(중략)
얼마 후 새로 생긴 봉분 앞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달라져 잠시 놀라는 뱀이 됩니다
뱀이 두리번거리며 봉분을 돌아서 돌 틈의 어두운 구명 속으로 사라지면 허공은 어두운 구멍이 됩니다
어두운 구멍 앞에서 발을 멈춘 빛이 됩니다
어두운 구멍을 가까운 나무 위에서 보고 있는 새가 됩니다
「허공과 구멍」부분 (『새』)
시선의 이동에 따라 연언(conjonction) 형식으로 나열된 인과관계의 계열들은 끊임없이 자리를 옮기는 우연적 사건들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는 ‘허공’을 보여준다. “나무에 새가 앉”는 우연의 개입으로 허공은 “새가 앉은 나무”가 되었다가, 다시 “새가 날아가”는 우연의 개입으로 “가지만 흔들리는 나무”가 된다. ‘허공’은 ‘새’와 ‘나무’의 계열에서, 다시 ‘침대’와 ‘침대 위의 남녀의 정사’와 ‘침대를 이탈한 나사못’의 계열로 이동하가 하면, 어느새 사람의 죽음과 ‘봉분’, 그리고 ‘뱀’과 ‘구멍’, ‘새’의 계열로 뛰어넘는다. 여기서 사건들은 선형적으로 계열화되며, 각각의 계열들은 서로 교차, 수렴, 발산, 이어짐과 끊어짐 등의 가변적 관계를 맺으면서 역동적으로 변화한다.
그런데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는 시간은 현재가 아니다. 사건은 막 일어난 것인 동시에 곧 일어날 것일 뿐 결코 일어나고 있는 무엇은 아니다. 사건에는 과거와 미래만이 존속하며, 현재는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분할되면서 지워져버린다. 따라서 사건들의 시간은 그 양극이 과거와 미래로 끊임없이 멀어지는 순수한 직선,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것들의 터전이 되는 시간, 즉 아이온(Aion)의 시간이다. 오규원의 시에서 이러한 사건의 시간성은 ‘허공’의 또 다른 얼굴인 ‘사이’를 통해 잘 드러난다. “붉은 양철 지붕의 반쯤 빠진 못과 반쯤 빠질 작정을 하고 있는 못 사이 이미 벌겋게 녹슨 자리와 벌써 벌겋게 녹슬 준비를 하고 있는 자리 사이 퍼질러진 새똥과 뭉개진 새똥 사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또닥또닥 소리를 내고 있는 봄비와 또닥또닥 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 봄비 사이”(「양철 지붕과 봄비」, 『새』)에서, 시간은 이미 “반쯤 빠진” 과거와 “반쯤 빠질 작정을 하고 있는” 미래 사이, “퍼질러진” 전(前) 과거와 “뭉개진” 후(後) 과거 사이에서 한없이 늘어지고 있다. 그 사이를 메우고 있는 것은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분할된 현재들이다. 게다가 “(양철 지붕 위에서) 또닥또닥 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 봄비”란 언젠가 미래에 내릴 봄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이처럼 생성 중에 있는 시간은 특정한 시제로 표현될 수가 없다. 그것은 영원한 중성이다. ‘사이’의 나열로 이루어진 오규원의 몇몇 시들에서 공통적으로 동사가 생략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5. 우주적 사건의 단순화
온갖 광고와 물신 사회의 다양한 이미지들이 넘치던 이전 시들에 비해 오규원의 후기 시가 그려내는 세계는 매우 단출하고 소박하다. 그야말로 새, 나무, 꽃, 풀, 돌멩이, 강, 나비, 잠자리, 그리고 사내, 여자, 아이로만 이루어진 하나의 고립된 세계 같다. 이것은 오랜 병 때문에 전원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시인의 환경이 변화한 데에도 그 원인이 있겠지만, ‘사건’이라고 하는 살아 움직이는 것 자체를 즉물적으로 보여주기에는 도시의 복잡성보다 자연의 물상들이 더 적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본래 사건의 속성은 반복과 복수화(複數化)에 있다. 하나의 순수 사건, 예컨대 ‘박수를 침’이라는 사건은 각각의 개인들에게서 현실화할 때 반복해서 구현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수를 침’이라는 사건은 개인들에게서 약간씩 다르게 수행되지만 여전히 닮아 있다. 따라서 사건은 원본 없는 복제, 즉 시뮬라크르의 논리를 따른다. 오규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러한 사건의 시뮬라크르적 속성을 표현해 왔다. 이미 주목받았듯이 『토마토』의 「시작 혹은 끝」과 「처음 혹은 되풀이」라는 두 편의 시는 시작도 끝도 없이 되풀이되는 사건의 변주를 보여주고 있다. 즉 동일한 하나의 장면을 두 시에서 의도적으로 다르게 계열화함으로써 원본 없이 반복되는 사건의 속성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새』에서 나란히 배치된 세 편의 시는 고유 명사를 활용한 사건의 반복 양상을 서로 복제하고 있다. 예컨대「타일과 달빛」에서 “현관 앞 타일 바닥에 좌아악 깔린 달빛을 밟”는 하나의 사건은 ‘정성수’, ‘이남경’, ‘유방숙’, ‘김찬제’ 등의 개체들에게서 반복적으로 구현된다. 그러나 남편과 같이 왔는지, 혼자 왔다 가는지, 아니면 “신발을 신자마자 성큼 성큼” 가는지, “느릿 느릿 신발을 신은 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가는지 등등의 이웃한 사건들과의 연쇄에 따라 차이화한다. 이러한 양상은 다시 「사람과 집」, 「봄밤과 악수」에서 고스란히 반복된다. 그런가 하면 사건은 동물과 사람을 가리지 않고 반복된다. 『두두』에서 역시 나란히 배치된 「겨울a」와 「겨울b」를 보자. 여기서 ‘뒤짐’과 ‘묻음’이라는 사건은 ‘콩새’, ‘오목눈이들’, ‘지빠귀’, 그리고 ‘나’에게서 반복적으로 일어나지만, 그 대상이 ‘산수유나무’냐 ‘발자국’이냐 아니면 ‘식탁 위의 감자튀김’이냐 ‘배추김치’냐에 따라 다르게 계열화된다. 이 두 편의 시는 제목과 마찬가지로 그 양상도 닮아 있다.
위와 같이 의도적으로 배치된 ‘쌍둥이’ 시편들 외에도 오규원의 후기 시들에는 일정한 ‘순수 사건’들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예컨대 ‘그림자를 몸 안으로 집어넣기/몸 밖으로 꺼내기’, ‘그림자를 길로 밟기’, 혹은 ‘허공을 솟구치기’, ‘하늘을 지우기’, ‘집들이 길에 매달려 있기’, ‘몸을 부풀리기’ 등 일련의 비슷한 사건들이 동일한 동사의 반복을 통해 여러 시들에서 변주된다. 이처럼 오규원의 시들이 서로 닮아 있는 데에는 하나의 의도가 자리 잡고 있다. 그 의도가 지향하는 곳은 수평적 상사성(相似性)의 세계, 그 안에 응축된 우주적 단순성이다. 모든 사건은 우주적이다. 그것은 해와 달과 나무와 새, 그리고 인간 사이에서 태고부터 지금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반복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은 일종의 보편성, 우주적 잠재성이 구현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사건은 단순하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복수적이며 단지 하나의 동사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오규원의 시 세계는 단순하고 복수적이며, 그런 의미에서 우주적이다. 그것은 원본의 권위 아래 도열하는 수직적 재현의 세계가 아니라, 원본 없는 복제물을 무한히 반복 생산하는 수평적 상사성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곧 ‘새로운 사실성’이다.
오규원의 시 세계는 단순 소박하고 평화로우며, 차라리 동양적이고 선(禪)적이다. 특히 짧은 시 형식을 시도한 『두두』에서 아주 짧은 순간의 사건이 단발마의 ‘소리’로 형상화될 때 그 단순미(單純美)는 절정에 이른다. 예컨대 오후 4시, 식빵을 썰고 굽고 버터를 바르고 한 조각을 덧씌우고 냅킨으로 감싸고 입에 넣고 깨무는 행위들의 연쇄는 “바싹!”이라는 한 순간의 소리로 응축된다.(「식빵과 소리」) 그런가 하면 빗방울이 각각의 사물들과 부딪히는 사건이 “솝-솝-솝-솝”, “롭-롭-롭-롭”, “톱-톱-톱-톱”, “홉-홉-홉-홉”, “돕-돕-돕-돕”(「빗방울」)의 소리로 형상화될 때에는 어느새 동화적 세계가 펼쳐지기도 한다. 하지만 백미를 이루는 것은 다음 시에서처럼 소리의 사건을 통해 지극한 명상의 세계에 직면하는 순간이다.
잠자리들이 허공에 몸을 올려놓고 있다
뜰에는 고요가 꽉 차 있다
잠자리들이 몸으로 부딪쳐도 뜰의 고요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쓰르라미가 쓰― 하고 울려다 그만두어버린다
「강변」(『두두』)
이 시는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한 적이 있을 법한 일상의 한 순간으로 우리를 이끈다. 잠자리들의 가벼운 움직임이 허공을 고요로 꽉 채운 가운데, “쓰―” 하다 말아버리는 쓰르라미의 울음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가 순간 다시 적막으로 내려놓는 그 찰나로 말이다. 이 찰나의 사건에 참여할 때 우리는 명상과 평상심을 허락하는 ‘아이온의 시간’으로 초대 받는다. 선불교를 관통하는 주요 개념은 바로 ‘평상심(平常心)’이다. 깨달음이 깃든 일상! 그것은 어떤 대단한 진리를 깨우치는 돈오(頓悟)의 순간도 아니고 현실의 배후에 도사린 본질을 꿰뚫는 통찰의 순간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눈앞에서 펼쳐지는 일상의 차원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사유다. 과거와 미래로 흩어지는 시간의 파편들 속에서 유희하는 사건을 사유하는 것. 이러한 사유가 인도하는 곳에 “살아서 팔딱거리는 우주가 한 알의 언어로 집적되는 기적 같은 찰나”, 즉 “날(生)” 이미지가 있다.
주체와 언어는 어떤 굴절과 왜곡의 주범이 아니라, 사건 자체를 탄생시키는 생성의 어머니다. 오규원은 날이미지에 대해 “나의 의지에 관계하기보다 세계의 의지에 관계한다”(「나는 ‘이미지의 의식’이다」, p.86)라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주체에 의해 명명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자, 동시에 주체가 아닌 세계의 의지로부터 부대하는 것, 그것은 그의 시가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건’이다. 사물의 맨얼굴이라는 게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사물에 덧붙여진 관념을 벗겨내고,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던 은유적 체계를 내몰고, 황량한 사실들의 세계에서 ‘환유’와 ‘동사’라는 조촐한 지팡이를 짚고 오규원이 도달한 곳은 놀랍게도 ‘사건의 사유’라는 오아시스였다. 선불교적 바탕에서 세계, 주체, 언어의 관계를 치열하게 탐구했던 한 시인의 세계가 최근 주목 받고 있는 현대 철학과 만나는 장면은 경이롭다. 그러나 이미 “지상에서 지하로 주소를 옮긴”(「집과 주소」,『새』) 시인은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잣나무 앞에서 나는 입이 있”(「잣나무와 나」,『두두』)으니 한 그루 잣나무가 속한 사건의 우주를 표현할 수밖에. (*)
오연경
1974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어교육과 졸업
서울대 미학과 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