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헤이, Mr. 차페크!

by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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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사평
  • 당선소감
  • 1

    햇빛에서 비린내가 나는 것 같아.

    풀죽은 나무들의 긴 행렬이 차창 밖으로 연이어 지나쳐갔다. 얼마 전, 군(郡)의 시책에 의해 새로 옮겨 심었다는 가로수들이었다. 9월의 이른 가을날, 그런 기운이 그대로 옮겨지기라도 한 듯 한참만에야 들린 형의 목소리는 힘이 쭉 빠져있었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아직은 비포장인 찻길의 한쪽을 달리는 버스 안에 형과 나는 앉아있었다. 우리의 집이 있는 동네로부터 해안선을 끼고 빙 돌아 버스터미널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굳게 닫힌 채 먼지가 잔뜩 낀 차창 위로 햇빛이 내리비치고 있었다.

    입대 석 달여 만에 첫 휴가를 받은 형이었다. 내겐 여전히 어색해 보이기만 하는 군복을 입고, 차창 쪽 좌석에서 제법 의젓한 모습이었다. 창밖 허공을 멍하니 향한 시선 탓에 갑자기 내 귓속을 파고든 그의 말이 내게 하는 것인지, 혼자서 무심코 내뱉은 것인지 나는 가늠할 수 없었다. 물론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내게 생긴 탓도 있었다. 그런 말에 오래 신경 쓸 생각 따윈 이미 없었다.

    기실 나의 신경은 온통 내 멜빵바지의 오른쪽 호주머니에 쏠려 있었다. 호주머니 속에 손가락 두 개는 족히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려 있다는 사실을 안 건 방금 전이었다. 버스에 오르기 전부터, 나는 호주머니속의 캬라멜을 하나씩 계속 꺼내 입에 넣으며 우물대고 있었다.

    동네입구의 버스정류장에서 형은 늘 그래왔듯 내게 장난을 쳤었다. 버스 기다리는 게 지루했던지 형은 또 어딘가를 갔다가왔다.

    긴 그림자가 먼저 나무그늘처럼 내 앞에 흐릿하게 드리워졌다. 곧이어 등 뒤에서 이상하게 변해버린 형의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형이 또 싱거운 장난질을 시작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장난을 칠 때마다 입가에 웃음기 가득한 형이었다. 웃음은 마치 염소울음소리 같았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나도 그런 소리를 따라해 본 적이 있었다. 숨을 잠시 참고 동시에 잔뜩 목구멍에 힘을 주고 좁히면서 노인네 같은 소릴 내는 건, 내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낸 소리는 차라리 신음이라고 해야 적당할 듯했다. 그러나 형의 입에선 별로 힘들이지 않아도 영락없이, 우스꽝스런 목소리가 나오곤 했다.

    형이 내 한쪽 귀에 크게 손뼉을 쳐 나의 시선을 반대편으로 쏠리게 했다. 초콜릿이나 캬라멜 따위를 내 호주머니에 조용히 넣어두는 것은 다음 행동이었다. 정말이지 장난도, 뭣도 아니었다.

    호주머니가 두툼해진 걸 확인했으므로 나는 재미없는 장난을 끝내기로 했다. 부러 입을 삐쭉 내민 다음 돌아서서 눈을 흘겼다. 형은 고개를 삐딱하게 옆으로 꺾은 채로 두 팔을 만세라도 하듯이 쳐들었다. 그리고는 활짝 편 손바닥을 좌우로 흔들어댔다. 피에로처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전혀 웃지 않았다. 형은 자신의 장난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지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나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바보같이. 비웃기라도 하듯 딴청을 부리던 나는 버스가 앞에 도착을 때에야 비로소 캬라멜을 꺼내 형의 눈앞에 흔들어주었다. 그때서야 형은 머리를 긁적이며 원래의 목소리로 무안한 듯 웃었다.

    네모난 케이스에 열 개 들이로 개별 포장되어 있는 캬라멜을 뜯자마자 두 개를 형의 손에 쥐어줬었다. 그러나 그는 입맛조차 다시지 않았다. 나이도 나보다 여덟 살이나 많고, 대학에다 군대까지 갔으니 자기도 어른이다, 이거였다. 나는 그래서 형이 캬라멜 따위는 먹지 않으려한다고 생각했다. 분명했다. 어른들은 캬라멜이 맛없고 입안에서 찝찝하게 끈적거리기만 한다고 내게 말하곤 했다. 캬라멜의 맛은 다른 어떤 먹을거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인데, 그 맛을 모르는 어른들이 늘 왠지 측은했다. 쫀득한 캬라멜이 혓바닥에 착 달라붙어 있을 때 우물거리며 퍼뜨리는 달콤한 맛과 향이 나는 좋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형도 어른이 됐으므로 그런 걸 느끼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형은 진정 어른이 되고 만 것일까.

    겨우 열두 살인 내게도 싫은 것을 인정해야 할 때가 차츰 많아지고 있었다. 저학년일 때는 학교에서 받아쓰기를 잘하거나 구구단을 잘 외우는 아이들이 나보다 집에 빨리 가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고, 학년이 높아져서는 집에서 술독에 빠져 지내는 이가 내가 붙인 별명처럼 ‘꼰대’가 아닌 아버지란 사실을 인정해야 했던 것이 그런 일들이었다.

    내가 캬라멜을 맛이 없다고 생각할 날이 과연 있을까. 터미널이 멀찍이 보이는 산모퉁이 비탈길에서 버스의 덜컹거림을 느끼며 나는 고개를 연신 가로저었다.

    대신에 형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입대 후, 달라진 모습이었다. 며칠간 지켜보니 꼰대보다도 더 많이 태우는 것 같았다. 아직 익숙하지는 않은 듯 간혹 숨이 넘어가게 콜록거리곤 했지만, 거기에서 좋은 맛이 느껴진다는 건 형의 기꺼워하는 표정만 봐도 분명 알 수 있었다. 버스에 오르기 전에도 형은 담배를 몇 대나 연이어 피웠다. 그러면서 음미라도 하듯 눈을 감은 채로 허공에 연기를 훅 하고 뿜어댔었다. 입가에 미소를 띤 형의 모습이 나는 무척 신기했다. 내가 메케한 연기를 멋있게 보는 건 이상하지 않았지만, 담배가 맛있어 보이기까지 하는 건 내 스스로가 좀 의아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캬라멜보다 맛이 좋을 리는 없었다. 그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내 손이 호주머니 속으로 조금 깊이 들어갔다. 앞에 서 있는 이가 없길 다행이었다. 차 안의 누가 봐도 우스운 모양새였다. 호주머니에 구멍이 난 것을, 나는 캬라멜과 같이 있던 동전들 중 하나가 살갗에 차갑게 미끄러져 내리는 걸 느끼면서 알았다. 그리고 지금은 또 다른 캬라멜 한 개가 허벅지와 바지자락 사이에 걸려 있었다. 바지 아래로 떨어지길 기다리기보다 손으로 꺼내는 것이 개운할 듯했다. 버스의 진동이 심해서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내 그런 기척엔 아랑곳없이 형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거친 길에서 버스가 덜컥 뛰어 올랐을 때도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난 탓인지 많이 피곤해 보였다.

    엄지와 검지를 집게 모양으로 우겨넣은 뒤 구멍은 더 넓어졌다. 이마에 땀방울까지 송글송글 맺혔다. 터미널 바로 건너편 정류장에서 버스가 마지막 하차를 위해 몇 분간 멈춰 섰을 때에야 비로소 캬라멜을 꺼낼 수 있었다. 허벅지의 더운 기운 탓에 캬라멜은 눅눅해져 있었다. 캬라멜의 끈적거리는 느낌이 손에 묻어나 찝찝했지만, 기분은 조금 나아졌다. 겉을 감싸는 흰 포장지엔 옅은 커피색 물이 들어있었다. 잘 떼어지지도 않는 포장지를 겨우 벗겨냈다. 일그러진 형체로 아몬드향이 진하게 풍겨오는 캬라멜을 입안에 넣었다.

    쩝쩝거리는 탓인지 형은 언제부턴가 눈을 뜨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이 내 목뒤에 가볍게 얹혀졌다. 거친 감촉과 함께 땀이 내 목덜미를 끈끈하게 적셨다. 형의 땀 냄새는 알싸했다. 나는 또 아랫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형은 잘 보이지 않는 미소를 머금고 내 볼을 손등으로 톡톡 쳤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에 그대로 쥐고 있던 두 개의 캬라멜 중 하나를 포장까지 직접 벗겨 내 입에 넣어주었다. 그것도 역시 눅눅해져 있었지만 맛은 아주 좋았다. 나는 곁눈질로 형의 눈치를 봤다. 그러다 킥, 하고 웃으며 그 손에서 나머지 한 개 남은 캬라멜까지 낚아채듯 빼앗아버렸다. 조금은 멋쩍어졌다. 나는 형의 얼굴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이놈의 자식, 이가 몽땅 썩었네. 형은 내 입을 억지로 벌리고 안을 위아래로 마치 치과의사처럼 훑어봤다. 그리고는 내 볼을 약간은 아프게 꼬집는 것이었다.

    이즈음 신작도로로 닦인 세 갈래 길에서 좌측으로 빠지면서 버스는 터미널로 들어섰다. 형은 또 차창 밖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형의 첫 휴가는 나흘에 지나지 않았다. 원체 말수가 적고 속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나흘간 나와 나눈 말이 몇 마디에 불과한 것은 이상스러웠다. 그뿐이 아니었다. 형은 자신의 네 평 남짓한 방에 틀어박혀 화장실을 갈 때 빼곤 꼼짝하지도 않았다. 그냥 책상 앞에 무연한 표정으로 앉아서 휴가의 대부분을 흘려보냈다. 거긴 낮에도 불을 켜야 할 만큼 어두운 방이었다. 방 안에 앉아 담배를 태우면서, 형은 뜨거운 재가 방바닥에 떨어지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는 듯했다. 형의 얼굴은 부대에서 긴 여름을 난 탓인지 검게 그을려 있었다. 작은 창문을 통해 비치는 햇빛 아래에서 묵묵히 손톱과 발톱을 손질하는 그의 뒷모습은 긴 시간 사막을 혼자 횡단해온 낙타처럼 축 늘어져 보였다.

    휴가 첫 날, 형이 술에 취한 꼰대와 다툰 것은 나로서는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사춘기 때도 반항은커녕, 가출 한 번 하지 않았던 그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우리 형제는 꼰대의 술주정과 행패에 나름대로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일일이 반항한다는 것도 새삼스러운 거였다. 또 그렇게 할 수 있다 해도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기도 했다. 꼰대가 행패를 부리면 응당 한두 대쯤 맞아주고 일을 수습하거나 그냥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고 그 순간을 넘어가는 것이, 언제나 우리 형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삼일 전에 형의 태도는 여느 때와 많이 달랐다.

    개자식. 형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욕이었다. 그의 표정은 너무 차가워서 무서울 정도였다. 꼰대의 얼굴은 총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경직되었다. 나는 사람의 표정이 그렇게 순식간에 바뀌는 걸 처음 보았다. 형의 얼굴 앞까지 올라갔던 꼰대의 손이 확연하게 비친 신산한 표정과 함께 떨어진 건, 그 다음이었다.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집안을 침통하게 만들었다. 마당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내게도 그런 기운이 오롯이 전해졌다. 나는 형이 곧 사죄를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형은 더 이상의 말도 없이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나는 그 방으로 향한 어리둥절한 시선을 한동안 떼지 못했다.

    그 날 이후 형이 복귀하는 오늘까지 꼰대는 집안에 그림자도 비추지 않았다. 그가 고개 너머의 여자 집을 드나드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이혼을 하고, 자식까지 시댁에 두고나와 혼자 사는 여자였다. 형과 나도 그 여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눈매가 여우처럼 날카롭고, 누구에게나 쉽게 친한 척하며, 거들먹거리기 좋아하는 사람인 듯했다. 여자를 처음 대면한 날, 나는 별로 유쾌한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형을 따라서 공손히 고개를 숙였었다. 그러나 데면데면 대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성격상 드러내서 표현은 안 해도 형의 생각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꼰대는 우리 형제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넌지시 여자를 집에 들이려 이야기를 꺼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우물쭈물 형의 눈치만 봤고, 형은 꼰대를 빤히 쳐다보며 가타부타 대꾸를 안했다. 그것이 우리의 대답이었다. 그러나 장남인 형의 눈치 때문에 집에 들어앉힐 생각만 못했다 뿐이지, 꼰대와 그 여자는 이미 부부나 다름없이 지내고 있었다. 자식들에게 교재 한 권을 제대로 사준 적이 없는 꼰대가 선산 근처의 논밭을 팔아 읍내 목 좋은 곳에 그 여자의 옷가게를 내줬다는 소문은, 그러므로 충분히 믿음이 가는 이야기였다.

    꼰대는 형이 교내에서 우수 장학금을 받던 날에도, 전국미술대회에서 특상을 받은 날에도, 내가 그의 지갑에서 훔친 돈으로 수업 시간에 군것질을 하다가 주임선생님에게 잡혀 학부모와의 동행 등교를 요청 받은 날에도, 또 내가 같은 반 여자아이를 계단에서 밀어 이마에 족히 세 바늘은 꿰매야 할 상처를 입힌 날에도, 어김없이 모른체해버렸다. 그런 일들이 벌어지건 말건 술에 곤드레가 되게 취해 있거나, 우리 형제에게 새엄마가 돼주겠다고 밤낮 설쳐대는 그 여자의 집에서 진종일 누워있거나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솔직히 그런 술주정뱅이에게 홀려든 여자가 있다는 사실이 어린 내 생각에도,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쩌면 꼰대의 그런 무관심이 나로서도 편한 건지 몰랐다. 나는 가까운 친구들 앞에서도 곧잘 아버지를 ‘꼰대’ 라고 부르곤 했다. 무슨 뜻인지는 나도 잘 몰랐지만, 꼰대가 들으면 당장 내게 손찌검을 할 만큼 나쁜 뜻인 건 분명했다. 당연히 꼰대가 된 아버지도, 또한 형도 내가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런 일이 아니어도, 나는 학교에서 무수히 많은 말썽을 일으키고 다녔다. 형이 언제나 꼰대 대신 우리 학교를 다녀가곤 했다. 교복 차림으로 앞에 서 있는 형을 볼 때마다 담임들은 나보다도 더 난감해했다. 그 때문인지 나는 학교로부터 이렇다 할 처벌을 받은 적이 없었다. 재작년인가, 이틀간 과학실과 도서관 청소를 한 것 말고는. 자식들 일에는 늘 무관심했던 꼰대가 우리 학교에 찾아온 적이 한 번 있었다. 그러나 그건 나 때문이 아니었다. 꼰대는 술에 잔뜩 취해 버젓이 교문으로 들어왔고 때마침 운동장에서 체육수업 중이던 우리 옆 반의 담임과 한바탕 싸움을 벌였던 것이었다. 내가 우리 담임의 호출을 받고 교무실로 달려갔을 때는 싸움이 이미 끝나서 옆 반의 담임은 여전히 흥분으로 씩씩거리며 개에게라도 물린 듯한 잇자국에 선혈이 선명한 오른팔을 치료 중이었고, 꼰대는 인사불성으로 교무실 안의 출입문 바로 앞에 대자로 뻗어 있었다. 담임선생의 말에 의하면 싸움이 끝난 뒤에도 다른 선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 이름을 학교가 떠나가도록 불러대며 교무실로 밀고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교무실을 전세라도 낸 듯 코를 골아대는 꼰대의 뺨에는 긁힌 상처와 함께 검붉은 혈흔이 말라붙어 있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나는 허둥지둥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형은 나타났다. 형은 우리 학교에서 삼십 분 거리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나마도 수업시간에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온 것이었다. 형은 마치 자기가 잘못한 것처럼 선생들을 찾아다니며 소란에 대한 사죄의 말을 하고 다녔다. 일관되게 자신의 신발 등 위에 시선을 두고 있는 눈동자에는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물기에 흔들리는 동공을 애써 감추려 그는 연신 코를 훌쩍거렸다. 손은 반복적으로 머리를 긁적이다가 콧등에 얹혀 지기도 했다.

    내가 꼰대를 흔들어 깨웠고 형은 일으켜 옆에서 부축을 했다. 수업 시간이 남았는데도 나는 책가방을 들고 형의 뒤를 따라갔다. 담임은 만류했지만, 창피한 생각에 학교에 남아 있을 수가 없다고, 앙탈을 해서 겨우 허락을 받은 일이었다. 형은 내가 그렇게 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었다. 복도를 다 지날 때까지 창문에 아이들의 얼굴이 무수히 달라붙어 있는 것을 봤다. 나는 아래만 보고 걸었다. 버스를 타지 않은 것은 흐느적거리는 꼰대 탓이었다. 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는 해가 저물고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멀리 만조로 출렁이는 바다가 보였다. 어느새 꼰대도 술이 다 깨어서 형의 도움 없이 혼자 걷고 있었다. 앞서서 기우뚱거리며 걸어가는 꼰대와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졌을 때 형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는 형의 미소를 보고도 웃지 않았다. 그저 조금은 심통이 나 있었다. 내일 학교에 갈 일이 또 걱정이었다. 내 무심함에 형은 말없이 쳐져서 걸어왔다. 느긋하게 걷는 것 같지도 않은데, 늘 그렇듯 형은 내 걸음을 따르지 못했다. 형의 신발 뒤축이 느닷없이 길게 끌리는 소리를 나는 듣고 있었다.



    외부로 나가는 버스들은 반드시 약국 앞을 경유해서 터미널을 빠져나갔다. 승차장까지 갈 필요는 사실 없었다. 그냥 거기서 기다렸다가 나오는 버스를 손짓해서 타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형은 15분 간격으로 오는 버스를 벌써 몇 대나 그냥 보내버리고 있었다. 우두커니 서서 버스가 떠나는 것을 마냥 지켜보고만 있는 그를 나는 의문스런 얼굴로 지켜봤다. 여기에 도착한지도 두 시간 가까이 되어가고 있었다. 터미널은 버스들의 경적소리와 시동소리로 소란스러웠다. 말은 터미널이라고들 하지만 별다른 시설이 없었다. 시골학교 운동장만한 공터에 5,60여대의 버스들이 운집했다가 떠나는 곳에 불과했다. 족히 몇 십 년쯤은 되고도 남을 낡은 건물들이 타원형으로 에워싸듯 늘어서 있어서 그렇지 않아도 초라한 그곳을 한층 더 누추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버스가 드나들 때마다 풍겨오는 타르와 휘발유 냄새가 젖은 쓰레기 냄새와 뒤섞여 역하게 코를 찔러왔다. 날이 서늘해진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여름날처럼 곳곳이 깨어진 콘크리트 바닥에서 후끈한 연기가 올라와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던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별안간 형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나는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차표를 사면서 멀미약을 같이 사는 걸 깜박 잊었다고 나는 말했었다. 형은 다음 차는 타야만한다면서, 멀미약은 지금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차멀미는 예전보다 더 심했진 것 같았다. 아까부터 두 손으로 머리와 가슴을 각각 거머쥐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겨우 삼십분쯤 차를 타고 왔을 뿐인데도 그랬다. 나는 힘겨운 듯 몸을 수그리고 있는 형의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가만히 빼들었다. 이마를 짚은 채 눈을 꼭 감은 그는 가만히 있었다. 지폐를 한 장 꺼내들고 지갑을 다시 그 자리에 넣어두었다. 형은 잠시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캬라멜? 그는 여전히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억지로 웃었다. 나도 씽긋 웃어주고는, 약국을 향해 달려갔다.

    약국 앞의 계단을 오르는데 버스 한 대가 내 옆을 지나쳐 형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형을 봤다. 버스는 곧 떠나갔다. 그는 자리에 남아있었다. 손짓하는 형이 보였다. 날더러 오라는 건지, 가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멈칫했지만, 나는 그대로 약국 쪽으로 달려갔다.

    벽돌로 지은 약국의 외벽에는 손바닥만 한 정사각형의 하얀색 타일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그것도 너무 오래되어 군데군데 떨어진 곳이 보였다. 그 회색빛 콘크리트가 드러난 자리에 검붉게 녹이 슨 철근이 돌출되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흉물스럽게만 보였다.

    계단을 올라가면 약국 정문 앞이었다. 먼지가 뿌연 유리문 안쪽 정면으로 보이는 벽에는 어른 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은회색 목판이 걸려 있었다. 목판엔 검은 매직펜 글씨로 내외버스의 시간표가 빈틈없이 빼곡했다. 오래됐지만 큰 건물의 일층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어서 약국은 공간이 굉장히 넓었다. 표를 사려고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광경이 보였다. 약국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이곳 소읍에서 버스표 판매 역할까지 대행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근방에서 제일 오래된 건물인데다가 터미널로 들어서면 하얀색으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탓이었다. 약국의 주인인 예순 살쯤 먹은 남자 약사는 이십 년 전, 터미널이 생긴 뒤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약과 차표를 함께 팔아오고 있었다. 그래서 그게 무슨 날이든 그곳은 다른 약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이 북적였다. 대부분이 도시로 나가는 버스승객들이었다. 거기에서 사람들은 약사가 편의를 보아 갖다놓은 길쭉한 나무의자에 앉아 버스 시간을 기다리며 근처의 중국집이나 분식집에 배달을 시켜 밥을 먹거나 잠깐씩 낮잠을 청하기도 했다.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조급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차례를 기다리는 데까진 10분 가까이가 소요되었다. 늙은 약사는 피곤에 찌든 표정으로 멀미약과 거스름돈을 내주었다. 나는 왠지 모를 급한 마음에 약국 문을 소리 나도록 닫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바로 형에게 눈길을 주었다. 저쪽 멀리서 또 버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형은 이번에도 버스를 타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나는 안심하고 천천히 걸어갔다.

    노란색이 선명한 차표를 손에 꼭 쥔 형의 흐려진 눈빛은 하늘에 닿아 있는듯했다. 일기예보대로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차표가 바람에 나풀거릴 때마다 그의 눈동자도 맑아지는 것 같았다. 버스 안에서의 뜬금없었던 형의 말이 떠올랐다. 형은 지금 무었을 찾는 것일까. 해는 먹구름 너머 어딘가에 있을 것이었다.

    다시 온 버스가 형의 모습을 완전히 가리면서 멈췄다. 무심코 하늘을 쳐다보고는 나는 나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꼰대가 시킨 술심부름은 늘 내 몫이었다. 가끔은 형이 동행했다. 그러나 형은 걸음이 너무 느렸다. 한 번도 나보다 앞서 갈 때가 없었다. 성격 급한 나는 할 수없이 늘 앞에서 걸어갔다. 그러다 무심코 돌아보면 형은 한참 뒤에서 겨우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심통도 많은 편이었다. 곧잘 그런 형을 보면서 바보라고 놀리곤 했다. 키도 크고 나이도 많으면서 나보다 걸음이 느린 형이 이상했다. 길에 멈춰 서서 다그치면 형은 무엇이 그렇게 재밌는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곤 했다. 그건 장난칠 때와는 사뭇 다른, 소리 없는 웃음이었다.

    저녁 실바람이 불었던 어느 날인가는 형의 웃음소리가 바람결에 실려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우우우, 우우우, 나는 울음인줄만 알았다. 다행스럽게도 가까이 다가온 형의 표정은 웃고 있었다. 바람소리와 함께 내 귓전에 매달려 있던 기이한 음성도 곧 사라져버렸다.

    술이나 안주가 든 비닐봉지를 늘 형과 맞잡았다. 간혹 닿아오는 형의 손등은 차갑고 거칠었다. 등나무껍질 같은 그 느낌이 집에 도착할 때까지 내 손등에 날인처럼 남아 있었다. 어스름이 내리고 이슥해져가는 길이었다. 달은 언제나 아주 멀리 있었다. 손바닥으로 가리면 달은 숨어버렸다. 나와 나란히 걸어가는 형의 그림자는 내 것보단 훨씬 길었지만, 바람에 나부끼듯 달빛 아래 자꾸만 흔들렸었다.



    버스가 지나가자마자 나는 망연해진 얼굴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형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버스를 탄 것일까. 눈을 의심했다. 장난이 분명했으므로, 나는 목청껏 웃으며 당장 나오라고 소리 질렀다.

    하지만 공허한 메아리만이 돌아왔다. 낡은 회색 건물들이 주위가 무섭도록 우뚝해 보였다. 어느새 시간이 꽤 많이 흘렀다. 돌아왔어도 벌써 왔을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번엔 장난이 아닌듯했다. 형은 정말 가고 없는 것이었다. 바람이 스쳐 지나가면서 마음이 휑해졌다. 약을 꼭 쥔 손에서 땀이 났다.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형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애써서 사왔는데 약이라도 갖고 갈 것이지……. 형이 야속했다. 오랜 버스길에선 멀미가 더 심해질 것이었다. 이 정도로 짓궂게 장난을 한 적은 없었는데. 나는 손가락으로 날을 헤아렸다. 다음 휴가에 오면 말도 섞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어쩌면 버스에 앉아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보지 못한 게 아닐까. 쓸데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봤던 형의 얼굴이 머릿속에 잘 떠오르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문득 뭔가가 생각이 나서 호주머니를 뒤졌다. 이내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형에게서 빼앗은 마지막 캬라멜조차 주머니 속엔 남아 있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먹어버린 기억이 어렴풋하게 났다.

    머리 위가 별안간 차가워졌다. 새까매진 하늘을 올려다봤다. 빗방울이 쏟아지고 있었다. 입안에는 아직도 눅눅한 캬라멜 맛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서늘한 저녁바람이 내 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한참을 그 자리에서 서성이다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올랐다. 집에 다다랐을 때는 날이 이미 많이 어두워져 있었다.



    그리고 이틀간이나 비가 계속 내렸다. 장마도 다 지났는데, 뜻밖의 큰 비였다. 거친 빗줄기 속에서 세상이 내려앉아 버릴듯했다. 빗방울이 주룩주룩 쉬지 않고 떨어지는 지붕 끝의 차양 아래에 이른 아침부터 나는 서있었다. 앞이 터진 슬리퍼를 신고 있었으므로 두 발이 금세 빗물에 젖어들었다.

    마당 건너편에 방이 보였다. 나는 발을 질척이며 방 앞까지 걸어갔다. 방 옆으로는 조금 떨어진 곳에 뒤란으로 통하는 커다란 나무문이 있었다. 빠끔히 열려 바람을 따라 흔들거리는 문밖으론 울울창창한 대숲이 보였다. 폭우와 거친 바람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는지 대나무들의 절반 가까이가 한편으로 꺾일 듯 눕혀져 있었다.

    굳게 닫힌 방문을 열었다. 주인이 사라진 방 안은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어둠속으로 발을 들여놨다. 문을 닫았다. 빗소리가 조금은 멀어진 듯했다. 방 안은 깨끗했지만 꿉꿉한 냄새가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풍겨왔다. 마치 오래된 암실에 갇힌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벽에 기대어 웅크리고 앉았다. 형이 불과 이틀 전에도 이곳에서 있었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형은 정말 이곳에 살아서 있었던 것일까. 형 같은 건 애초에 없었던 거라고, 나는 믿고 싶었다. 책상 아래 공간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거긴 어두웠다. 왠지 아늑해 보이기도 했다.

    갑자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어쩌면. 나는 황급히 창문 밖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그건 비가 들이치는 소리였다. 단지, 비일 뿐이었다. 방에 나는 혼자였다. 빗방울이 계속 흘러내리면서 낡고 작은 창문은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창문이 아니면 그나마도 볕도 들지 않는 방이었다. 북향이라 겨울에 몹시 추운 곳인데도 형은 여기를 좋아했다.

    먼지가 쌓이기 시작한 책상 위엔 이틀 전, 내가 산 멀미약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책상 위 한 줄짜리 책꽂이에는 형이 즐겨 보던 책들이 가지런했다. 책상 밑의 쓰레기통은 말끔히 비워진 상태였다. 사면을 둘러싼 파스텔 톤의 노란색 벽지는 어둠 때문에 하얀색 격자무늬가 잘 보이지 않았다. 도배를 한 지가 2년이 넘었는데도 책상 앞에다 형이 고등학교 시절, 시간표를 붙였다가 뗀 흔적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 방금 새로 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방바닥엔 동그랗게 눌러 붙은 검은 담배자국이 몇 군데 있었다. 손가락을 그곳에 대보았다. 온기가 아직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코를 훌쩍였다.

    책상의 의자는 철로 된 네 개의 다리 중 하나가 약간 휘어져 있었다. 책상은 고사하고 방의 어떤 것과도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아주 오래 전에 술에 취한 꼰대가 식탁에 있던 의자를 마당으로 던진 적이 있었다. 형은 그것을 자기 방으로 가져갔다. 사실 다리가 그렇게 된 것만 아니면, 의자라는 것 자체로 썩 훌륭한 물건이었다. 집안의 누가 처음 사용했었는지 모르지만 비취색이 선명한 안장과 은회색의 꽃무늬가 반짝이는 허리 받침대는 여느 의자의 그것과는 격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됐든 간에 평범한 책상과 짝을 이루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한 외양이었다. 생뚱스럽게도 형은 그 의자를 늘 쓸고 닦으며 애지중지했다. 방바닥엔 바퀴 달린 의자가 편할 거라고 내가 여러 번 말해줬지만, 형은 의자만큼은 무슨 고집인지 결코 버리지 않았다. 그가 의자에 앉을 때면 무게를 겨우 견디는 휘어진 다리가 신음처럼 삐거덕거리곤 했다. 형은 그 의자에 기대어 자주 잠이 들었다. 잠이 든 모습이 평온해보여서 나는 곧 깨우려다가도 단념해버렸다.

    벽에 기대어 방에서 얼마의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집을 나서야 할 텐데. 꼰대는 아직도 안방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새벽에 갑작스럽게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집 안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되어버렸다. 이 방으로 찾아들기 전까지, 나도 꼰대도 전화속의 이야기를 도통 믿을 수 없었다.

    팽팽하게 감도는 집 안의 침묵을, 질기고 질긴 빗소리가 차츰차츰 날카롭게 갉아먹고 있는 듯했다.



    형이 죽었다. 국군병원에서 우리 부자가 본 것은 눈처럼 하얀 천에 덮인 그의 싸늘한 주검이었다. 영안실에서 확인절차를 마치고 나온 꼰대는 내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2년 정도만 지나면 형은 돌아온다고 했었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탄 뒤 형은 어딘가로 숨어버린 게 아닐까. 군대는 아주 견디기 힘든 곳이란 이야길 들은 적이 있었다. 내가 아는 한, 말만 어른이지 형은 겁쟁이, 엄살쟁이였다. 겁이 많아서 죽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나보다 키도 두 뼘이나 훌쩍 크면서 걸음은 느려터지고, 하나도 웃기지 않는 장난만 치는데다가 사람들에게 붙임성도 없는 바보 같은 성격이었다. 그러므로 형은 군대가 무서워서 달아난 것이 틀림없었다. 정말 바보 같이, 사람들 말 못 들었어? 남자는 누구나 가야하는 곳이라고.

    그러다가 2년이 지나면 별안간 내 앞에 나타날 것이 분명했다. 군대에서 아주 고생했다고 잘난 척을 하겠지. 난, 다 안다고. 형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형은 죽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형은 죽지 않았다. 아주 먼 곳으로 가서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었다. 우리 집도, 군대도 아닌, 형만이 알고 있는 어떤 곳에 꼭꼭 숨어 살아있을 것만 같았다.

    담당 군의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벽에 기대 서 있던 꼰대를 붙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복도 끝의 모퉁이로 데려갔다. 나도 그들을 따라서 바로 옆인 위로 통하는 계단의 맨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음성은 낮고 차분했지만, 그곳이 워낙 고요했으므로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

    휴가를 마치고 복귀한 지 이틀 만인 어젯밤에 형은 내무반에서 잠을 자다가 갑자기 숨을 멈춰버렸다고 했다. 형의 죽음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불침번을 서던 선임이었다. 교대시간이 되었는데, 아무리 흔들어도 형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군의관은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꼰대는 쇠파이프에 머리라도 힘껏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런 저런 말들을 두서없이 군의관에게 주워섬기고 있었다. 군의관은 난처함이 표정에 역력했다. 그러나 이미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난 사람인 듯 보였다. 최대한 억지스러움을 감추고 짐짓이라도 미소를 보이려는 인상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꼰대에게 이 죽음이 결코 의문사가 아니라고 말했고, 형이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고, 그걸 다시 꼰대에게 의문이라고 되물었고, 신체검사 때 그런 것이 왜 문제가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고, 군대란 곳은 밖에선 미처 생각할 수도 없는 온갖 형태의 죽음이 늘 있어왔지만 그러한 일이 있을 때마다 의사 장교의 한 사람으로서 무한한 책임감을 느낀다고 약간은 흥분된 어투로 말했고, 실내에선 절대 담배를 피울 수 없으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달라고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꼰대는 입에 물려던 담배의 중동을 분질러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비는 그쳤지만 창문을 통해 공중으로 수증기가 뿌옇게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꼰대는 햇빛이 막 들기 시작한 창문 앞으로 다가가 있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문드문 드러난 새치가 오늘따라 도드라져 보였다. 몇 시간 사이 십 년은 늙어버린 얼굴이었다. 지금 보니 검은 가을점퍼 속에 입은 흰 와이셔츠의 단추가 위아래 아귀가 서로 안 맞게 채워져 있었다. 꼰대는 침묵했다. 군의관은 굳은 표정으로 어울리지 않게 한숨을 몇 차례쯤 내뱉었다. 그리고는 반대편 복도 끝으로 표표히 사라져 버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꼰대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연거푸 두 대를 피운 그가 창문 앞으로 나를 불러 세웠다. 아직 불씨가 남은 꽁초를 잡고 있는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초점을 잃은 눈빛으로 꼰대는 지갑에서 5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곤 그걸 내게 내밀면서 창밖으로 턱짓을 했다. 나는 두말없이 돈을 받아 쥐고 계단을 내려왔다.

    큰 비로 땅 곳곳이 패여 흙탕물이 흐르고 있었다. 병원 앞 도로 건너편으로 음식점과 상점들이 줄이라도 맞춘 듯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도로 위를 질주하는 자동차들의 바퀴에서 수증기와 함께 빗물이 뿜어졌다. 그 바람에 내 바지는 흠뻑 젖어버렸다.

    횡단보도를 건너서 어떤 분식집 앞에 섰다. 그러나 잠시 망설였다. 사실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았다. 침이 말라버려 입에서 쓴맛이 났다. 분식집을 지나쳐 조금 걸어가니 슈퍼가 있었다. 슈퍼에서 나온 내 손에는 열 개 들이 캬라멜이 여러 개 쥐어져 있었다. 다시 걸어와 계단 같이 생긴 분식집 옆 난간에 앉았다. 길 건너로 다시 병원이 보였다. 캬라멜을 장난감 블록처럼 옆에 쌓아올렸다. 젖은 바지에서 서늘한 기운이 올라와 몸이 으스스 떨렸다. 그 탓에 팔꿈치에 맞아 쌓은 것이 무너져버렸다. 쓰러진 캬라멜들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그 중에 하나를 들었다. 포장을 뜯었다.

    캬라멜을 입에 물었다. 깨물어도 입안에 침이 고이지 않았다. 해는 병원 뒤편에 걸려있었다. 날은 무심하게 밝았다. 병원 옥상 위에 서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나는 용수철이 튕기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러나 곧 힘없이 그 자리에 주저 않고 말았다. 그냥 잘못 본 것이었다. 사람은 없었다. 입 안이 썼다. 캬라멜이 녹지 않고 있었다. 손에 쥔 캬라멜 중 또 하나를 넣었다. 그리고 씹었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게 아니었다. 울컥하고 뭔가 넘어 오는 것이 있었다. 정신없이 다른 캬라멜을 또 입에 넣었다. 삼킬 수가 없었다. 한참 뒤에야 입안에 침이 고였다. 그러나 아무리 삼키려 해도 삼킬 수가 없었다. 목 주위와 두 볼이 견딜 수 없이 화끈거렸다. 난간을 더듬거리며 하늘을 봤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열려 있었다. 목이 떨려왔다.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발밑에 떨어뜨린 하얀 속 포장지들이 바람에 흩어졌다. 매운 것에 닿은 듯 콧날이 시큰해졌다. 캬라멜이 입에 가득차서 더는 씹을 수가 없었다. 침 범벅인 캬라멜 덩어리를 토하듯 난간 밑으로 뱉어버렸다. 바람이 불었고 추위가 왔다. 포장을 뜯고 또 캬라멜을 입에 물었다. 그걸 삼키기도 전에 꾸역꾸역 계속 다른 캬라멜을 넣고 씹었다. 아무리 씹어도 입안이 달콤해지지가 않았다. 캬라멜은 또 덩어리로 입안에 가득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모든 동작이 나도 모르게 내 의도에서 멀어진 듯 갑자기 멈췄다. 난간을 짚었던 손이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살얼음이라도 든 것처럼 온몸이 떨려왔다. 얼마인지 모를 시간을 그곳에 그냥, 그렇게 있었다. 귓속이 내내 먹먹했다.



    2



    집 안팎이 엄숙하도록 숙연해진 가운데 형의 장례는 끝이 났다. 장지는 선산이었다. 이미 비가 온 뒤라지만 발길이 잘 닿지 않은 굳은 땅이라 삽으로 깊은 구덩이를 파는 것이 녹녹치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형의 고등학교 동창들이 관을 멨다. 하관이 끝난 뒤에 집에 남은 이는 꼰대와 나뿐이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꼰대는 집 마당에 불을 피웠다. 서산으로 해가 떨어질 무렵이었다. 내가 방으로 가서 형의 물건들을 정리해가지고 나왔다. 불길 옆으로 그가 입던 옷가지와 신발, 공책과 책 따위를 가지런히 쌓아두었다. 나는 옷들을 불에 넣기 시작했다. 꼰대는 체념한 표정으로 옷이 타들어가는 광경을 지켜보다가 바다가 보이는 먼 곳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형이 대학교에 다니면서 필기한 노트들은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깔끔히 정서되어 있었다. 땅위의 습기 탓으로 잠깐 사이에 책과 노트는 모두 눅눅해져 버렸다. 찢어서 넣은 노트의 습기를 먹어 불이 여러 차례 잦아들려고 해서 입으로 바람을 불어 넣었다. 불길이 살아나면서 노트들이 서서히 타들어갔다. 책은 노트에 비해 양이 훨씬 많았다. 입대를 하면서 갖다 놓은 대학교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시집이나 소설책, 수필집 따위도 몇 권 있었다. 전공서적이 아닌 책들은 읽은 흔적이 없진 않았지만, 접은 곳이나 볼펜 자국도 하나 없을 만큼 깨끗한 상태여서 조금 전에 태운 노트와 마찬가지로 죽은 이의 성격을 말해주는 듯했다. 오랫동안 쭈그리고 앉았던 탓에 다리가 아팠다. 잠시 일어섰다가 다시 앉아야 했다.

    책을 태우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한쪽에 나동그라져 있는 책 한 권이 이제 마지막이었다. 나는 그 책을 손에 쥐었다. 소설책인 듯싶었다. 책을 찢으려고 표지의 앞날개를 펴서 잡아당겼다.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벼락처럼 터진 외마디소리에 놀라 나는 하마터면 벌렁 뒤로 넘어갈 뻔했다. 동시에 들고 있던 책도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발밑으로 떨어졌다. 주위에 있는 누구라도 다 들을 수 있을 만큼 단호하고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주위엔 꼰대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낸 목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주위를 다시 살폈다. 뭔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떨어뜨렸던 책을 집어 올렸다. 아까 전과 마찬가지로 표지를 뜯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다시 벌어진 똑같은 상황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과 다름없는 비명 소리가 너무나 또렷하게 귓속을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혈관의 피마저 딱딱하게 굳어지는 기분이었다. 두려움과 당혹스러움으로 범벅이 되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손에 든 책을 내려다봤다. 비명은 책속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다시 깜짝 놀랐다. 책 표지에 그려진 삽화가 사람이 정말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러자 그림은 자기가 더 놀랐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나를 향해 조금 전과 같은 비명을 질러댔다.

    놀란 가슴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믿기지 않는 일인데도 꼰대에겐 말할 수가 없었다. 입을 꾹 다물었다. 놀라서가 아니었다. 그 목소리에는 내가 소리를 지를 수 없게 만드는,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힘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나는 이마를 짚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시 삽화를 들여다봤다. 어딘지 낯이 익은 그림이었다.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형이 군에 입대하기 전인 어느 한낮의 기억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진작 돌아와 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서 형은 책을 읽고 있었다. 방바닥에 엎드린 채 나도 한동안은 숙제에 열중했다.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몹시 따분하고 심심해졌다. 그래서 형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형은 알았다고 건성으로 대답만 할뿐, 도무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안했다. 나는 더 조를 수가 없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형은 책을 보면서 웃었다. 형의 웃음소리는 크고 맑았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설령 가족 앞일지라도 타인 앞에서는 목청을 높여 크게 웃는 경우가 드문 형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릴 정도로 계속해서 깔깔거리고 있었다. 내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다시 바라봤을 때, 나는 형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책에 아주 파묻혀 있었다. 책을 책상에 세워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기 때문에 뒤통수만 보일 뿐이었다. 어쩌면 형은 내게 자신의 웃음을 감추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남의 마당을 담장 너머로 몰래 구경하듯 형의 얼굴을 장난스럽게 넘겨다봤다. 그러나 형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웃음소리만 책 너머에서 연이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소리가 잦아들길 기다려 나는 형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졸랐다. 형은 어려워하지 않고 책장을 앞으로 넘기더니 책 속의 짧은 이야기 중 하나를 또박또박한 음성으로 내게 읽어주었다.

    이야기의 제목은 『푸른 국화』였다. 주인공은 클라라라는 이름의 소녀였다. 루베니츠 거리에 사는 클라라는 피리 부는 것을 좋아했고, 지나가는 아무에게나 달려들어 입을 맞추는 등 천진난만함이 있었지만, 글도 못 읽는 바보에 귀머거리였다. 또 다른 등장인물인 그 지역의 정원사는 클라라가 푸른 국화를 꺾어서 가지고 다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나는 책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얀색 바탕에 그려진 제목과 그림을 제외하고는 별다를 것이 없었다. 책을 펼치자 그 사이에서 책갈피가 떨어져 나왔다. 생전의 형은 이 책을 절반 정도밖에 읽지 않은 듯했다. 간단한 선으로만 그려진 삽화의 인물은 만화영화에나 나올 법한 인상이었다. 정면에서 거꾸로 서 있는 그림속의 사내는 멍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얼굴이 막대풍선처럼 긴, 아주 우스꽝스럽게 생긴 사내였다.

    삽화가 이 소설의 작가를 그린 것임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카렐 차페크(Karel Capek)라는 이름의 작가였다. 발음하는 순간, 마치 초코 시럽에 부드러운 캬라멜을 버무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안쪽의 책날개에는 그의 생전 사진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단 앞에 삽화로 그려진 얼굴에 더 눈이 쏠렸다. 그다지 잘 그린 거란 생각은 안했지만. 묘하게 정이 가는 얼굴이었다.

    불길이 점차 잦아드는 것을 눈치 챈 꼰대가 빨리 끝내라고 호통을 쳤다. 옆모습으로 있던 책속의 차페크가 고개를 돌려 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가 입을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뻐끔거리자 물고 있는 담배에서 방금 전엔 그려 있지도 않았던 희뿌연 연기까지 피어올랐다. 나는 어처구니없어진 표정으로 지켜봤다. 차페크는 치켜세운 검지를 장난스럽게 흔들면서 입안에 가득 물고 있던 담배 연기를 내게 훅 뿜어댔다. 나는 캑캑거렸다. 책을 품에 감추었다. 꼰대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 꺼져가는 불은 입으로 불어 되살렸다. 불길이 이는 주위가 마침 불어오는 바람 탓에 환해졌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하던 일을 계속했다. 다른 유품들을 던지면서 나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멍하니 바라봤다.



    방 안에는 이제 오래된 책상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안방에 있던 내 짐들은 전부 형의 방으로 옮겨 놨다. 일을 끝내는 데 반나절이 넘게 걸렸다.

    창문 바로 아래쪽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아서 책을 펴들었다. 내 어깨를 걸쳐 내려온 햇빛이 방 안을 비췄다. 따스했다. 내 앞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나는 그림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차페크였다. 언제부턴가 차페크가 책에서 빠져나와 내 그림자에 자신의 몸을 겹쳐두고 있었다. 차페크의 길쭉한 담배가 그림자에서 두드러져 보이도록 튀어나와 있었으므로 나는 금세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주 골초인 듯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 탓에 좁은 방 안이 곧 뿌옇게 흐려졌다.

    책의 제목은 《단지 조금 이상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서른여섯 편의 짤막한 이야기가 열여덟 편씩 두 부분으로 나뉘어 각각, ‘오른쪽 호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와 ‘왼쪽 호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다. 오른쪽은 뭐고, 왼쪽은 또 뭔가 싶어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책을 끝까지 한 번 읽고 나니, 의외로 그 제목이 꽤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동화처럼 쉽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확실히 실제 사진보다 표지의 그림이 더 차페크란 사람과 어울린다는 생각도 했다. 흐리멍덩한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좀처럼 참을 수 없었다. 그럴 때면 차페크는 붉으락푸르락 잔뜩 부아가 치미는 얼굴로 시종일관 나를 노려봤다. 그렇다고 내게 뭘 어쩌지는 못하는 상황이라, 결국엔 씩씩거리며 줄담배만 피워대는 것이 고작이었다.

    형의 방은 뒤란으로 통하는 문 옆이었으므로 집안에서 가장 어둡고 외진 곳이었다. 혼자서 그런 비밀스러운 책을 읽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장소였다. 나는 거의 매일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내가 책을 읽을 때면 어김없이 차페크의 담배 연기가 방 안을 짙게 덮곤 했다. 그리고 각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들이 한두 명씩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처음엔 그저 검은 선으로 그려진 희미한 환각에 불과했지만, 읽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들의 윤곽이 차츰 뚜렷해졌고 곧 보통의 사람과 거의 같은 모습이 되었다.

    클라라는 기분 좋을 때면 햇빛이 비치는 창문 아래를 깔깔 웃으며 서성거렸고, 루브너는 언제나 먹장구름처럼 침울한 얼굴로 창문 밖에서 시선을 거둘 줄 몰랐고, 리브카는 체스에서 돈이라도 딴 얼굴로 희희낙락하다가도, 별안간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운데로 모은 자신의 두 발끝을 내려다보곤 했다. 차페크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어림잡아 서른 명에 가까웠다. 한꺼번에 책 밖으로 뛰쳐나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들이 모조리 나다니기에 방은 너무 비좁았다.

    『푸른 국화』는 책의 맨 앞쪽에 실려 있었다. 나는 여러 인물들 중에서 클라라를 가장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내 앞에 가장 또렷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도 클라라였다. 클라라를 책 밖에서 본 것은 책을 두 번째로 읽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의 저물 무렵이었다.

    『푸른 국화』를 읽으며 몇 페이지를 넘겼을 때, 나는 갑작스레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창문을 잘 열어두지 않는 나였기에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일은 다음 순간, 내가 창가를 쳐다봤을 때 일어났다.

    자주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아이 하나가 열린 창문 틈에 앉아서 양 다리를 안팎으로 걸치고 있었다. 드레스 바탕에는 하얀색의 손톱만한 동그란 점이 가득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아이의 치렁치렁한 머릿결은 윤기가 흘렀다. 저물녘의 햇빛 때문에 얼굴과 드레스가 모두 짙은 진홍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그 아이가 클라라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두려움보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클라라를 좀더 가까이에서 보려고 일어섰다. 그리고 창가로 다가서며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발을 떼기 무섭게 눈부신 햇빛이 내게 쏟아졌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바로 눈앞에 클라라가 서 있는 것을 봤다. 시간이 정지해버린 것 같았다. 내 손보다 먼저 클라라의 두 손이 내 볼에 와 닿았다. 햇살처럼 따뜻한 기분을 한참 느끼고 있을 때, 클라라는 특유의 깔깔거리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내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까불면서 뛰어다니는 클라라의 옷에서 풍기는 향기가 왠지 낯설지 않았다.

    그날부터 내가 방에 있을 때면, 클라라는 어김없이 내 옆으로 와서 기대앉아 있곤 했다. 클라라의 허리에는 피리가 한 개 꽂혀 있었다. 플루트처럼 길고 은회색이 감도는 피리였다. 나는 클라라에게 방 안에서 피리를 불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클라라가 귀머거리였기 때문에 나는 의사전달에 손짓을 동원해야 했다. 내 한 손으로 피리가 매달린 그 아이의 허리를 살짝 쥐고 다른 손의 검지를 세워서 입술에 대고는 눈 감은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클라라는 잠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크고 맑은 두 눈동자를 깜빡거리면서 헤벌쭉하게 웃어보였다.

    푸른 국화는 세상에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꽃으로 알려져 있었다. 나는 클라라의 옷에서 풍겨오는 향기가 푸른 국화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설에 의하면 오직 클라라만이 푸른 국화를 지닐 수 있는 이로 묘사되어 있었다. 푸른 국화가 자라고 있는 유일한 집은 철로 근처에 있어 인적이 드물었다. 주인 또한 지나칠 정도로 외부인을 꺼리는, 까칠하고 음습한 성격이었다. 주인은 자신의 집 입구에 출입금지 표지판까지 세워두고 있었다. 사람들 대부분이 표지판에 쓰인 위협적인 문구에 놀라 집안으로 들어설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클라라는 글을 몰랐으므로 표지판의 문구를 읽어낼 수가 없었다. 읽지 못했으므로 못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클라라는 그래서 푸른 국화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글을 모른다는 것이, 남이 누구나 가진 것을 홀로 못 가졌다는 점이 클라라에겐 푸른 국화를 발견하는 힘이 된 셈이었다. 클라라가 들고 온 푸른 국화의 행방을 찾지 못해서 루베니츠의 꽃집에서 쫓겨난 정원사는 고향으로 돌아가던 도중, 그 집에서 푸른 국화를 발견하고 자신의 고향으로 가져갔다. 그가 세상의 어느 누구도 존재 여부를 알지 못할, 푸른 국화의 이름을 ‘클라라’ 라 이름 붙이고 애지중지 기르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고 있었다.



    형이 죽은 뒤에 집에는 변화가 생겼다. 꼰대의 재혼이었다.

    집으로 들어온 그날부터 여자는 안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나에 대해 이런저런 참견을 하고, 오래된 집안의 물건을 제 멋대로 치워버리기도 했다. 그 여자에게 있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식탁과 장롱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건 결코 긴 시간을 요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었지만, 내 방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요란한 사람이었다. 죽은 이 때문에 부정을 탄다고, 내 방은 물론이고 온 집안에 부적을 사다가 붙일 만큼 겁을 냈다. 어지간한 꼰대도 그 일에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나로서는 그게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적어도 내가 그 방에 있는 동안은 아무 간섭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클라라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어야했다.

    클라라가 나와의 약속도 까맣게 잊은 채 밤중에 제멋대로 방 안에서 피리를 분 적이 있었다. 옆에 있던 내가 황급히 클라라를 막으려했지만, 이미 때가 늦어 버렸다. 마침 화장실을 가려고 문 앞을 지나던 여자가 그 소리를 듣고 혼비백산했다. 그리고 집 안에 있던 꼰대에게까지 말이 전해진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그 겁에 질린 말에 못이긴 꼰대가 내 방까지 와서 짜증스런 얼굴로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런 짓을 다시 했다간 쫓겨날 줄 알라며 그가 내게 으름장을 놓았다. 내가 방 한구석에서 무릎을 껴안은 채 앉아 꼰대에게 혼이 나는 동안, 클라라는 내 등 뒤에 안보이게 숨어 있었다. 클라라가 내 등을 간질이며 장난을 치는 바람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웃음을 간신히 참아냈다. 꼰대가 클라라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방문이 다시 닫히자 나는 굳은 얼굴로 클라라를 내 앞으로 불러 세웠다. 그러나 그 아이의 천진한 얼굴을 보자마자 조금 전의 불쾌한 일은 눈 녹듯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 뒤로도 비슷한 일이 자주 있자 여자나 꼰대도 더 이상 내게 다른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클라라는 방에서 마음껏 피리를 불었다. 정말로 못 말릴 아이였다.



    그런 클라라도 가끔 뜬금없이 우울할 때가 있었다. 조용히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마냥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지만, 우울의 정도가 지나치면 손가락으로 방바닥의 담배자국을 지그시 누르거나, 형의 시간표가 뜯겨나간 자리에 갖다 대면서 나에게 슬픈 듯 그윽한 눈길을 주는 것이었다. 그런 클라라의 눈에는 이슬처럼 맑은 눈물이 고여 있곤 했다. 나는 그때마다 애달픈 생각이 들곤 했다. 도대체 그 아이가 무슨 말을 내게 하고 싶은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랬다. 내가 도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으면 클라라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 그러다가 창문에 어스름마저 감돌면 책상 아래로 도망치듯 들어가 버리기가 일쑤였다. 책상 아래의 어두운 공간에 클라라가 웅크리고 있으면 나는 정말 숙제며, 독서며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두 손을 뻗어 나오라고 하면 클라라는 갖은 앙탈로 내 손을 뿌리치면서 달팽이 모양으로 더욱 몸을 움츠렸다.

    나도 그런 모습에 토라져서 뒤돌아 누워버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클라라는 기척이 없었다. 결국 클라라의 심통에 지고 말았다. 화는 덜 풀렸지만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말을 걸었다. 클라라는 대답 대신에 자신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형이 죽은 뒤로 줄곧 그곳에서 지냈지만, 나는 의자에 앉은 적이 없었다. 방바닥이나 벽에 기대는 것이 습관이 된 탓도 있었다. 혹 그렇지 않다손 치더라도 다리가 얼먹어 정상이 아닌 의자에 굳이 불안한 느낌을 갖고 앉을 이유는 없었다. 여러 번 의자를 갖다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었지만, 형이 아꼈던 물건이라 내버려 둔 것이었다.

    주인이 사라져버린 의자에는 먼지가 두껍게 깔려 있었다. 손으로 먼지를 털었다. 내 손이 쓸고 지나간 등받이는 먼지가 짙게 묻어나며 반질거렸다. 어울리지 않게 화려해서 도리어 촌스러워 보이는 꽃무늬였다. 클라라는 어느 틈에 책상 밖으로 나와, 멀거니 서 있는 내 손을 억지로 끌어 의자에 앉혔다.

    등받이에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알 수 없는 느낌이었다. 콧날이 매워졌다. 아주 오랜 시간 전에, 내가 나의 몸이란 것의 느낌을 정확하게 갖기 전에, 하지만 내가 분명히 경험했을 어떤 느낌 같은 것이 있다면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나는 나를 낳은 이를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죽은 형은 나보다 여덟 살이나 많았으므로 엄마란 사람에 대해 충분히 알았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아무도, 하다못해 형조차도 엄마에 대해서는 내게 일언반구도 말을 해준 바가 없었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에 눈물을 찔찔 짜면서 유난을 떨 만큼, 내가 잔망스럽진 않다고 생각했는데 의자에 앉자 그것과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형이 왜 그토록 이 의자를 소중하게 여겼는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때부터 방 안에서 책을 읽을 때면 나는 꼭꼭 거기에 앉았다. 피리를 불며 주위를 맴돌다가도, 내가 의자에 앉으면 클라라는 책상 아래에 꼭 마치 거기가 제자리인 양 웅크린 채 있곤 했다. 클라라. 나는 더 이상 그 아이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자아, 눈을 크으게 뜨고 눈동자를 움직여 봐요. 아니, 아니, 고갯짓 말고 눈동자만. 옳지, 그렇지. 착하네.

    의사는 자신의 한쪽 입꼬리를 살짝 치켜 올리며 말했다. 그의 입 근처의 주름살이 늘어나며 미소가 떠올랐다. 내 눈꺼풀을 밀어 올리는 그의 손에는 소형 랜턴이 들려 있었다. 나는 요구대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의사는 내 동공 안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차트에 알아볼 수도 없는 글씨체로 뭔가를 끼적거렸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들고 내 옆에 앉은 새엄마란 여자에게 최근의 내 행동에 대해 물었다. 여자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골방에만 들어앉아 잠을 제대로 못잔지가 이미 두 달이 넘어간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이어, 학교에서도 멍하니 앉아 있다는 소리를 나의 담임으로부터 전해 들었다고도 덧붙였다.

    형에 관한 이야기까지 전해들은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온화한 얼굴로 내 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나는 여자나 의사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진 채, 그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했다. 창밖에는 아름드리 버드나무 한 그루가 솟아 있었다. 초겨울이라 잎은 완전히 떨어졌고 앙상한 가지가 바람에 살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조금 놀랐다. Y자 모양의 굵은 나뭇가지 사이에 낯익은 여자 아이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클라라였다. 여기까지 쫓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싸늘한 기운의 햇빛이 클라라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바람에 흔들렸다. 그러다가 갑작스러운 일이 생겼다. 클라라의 몸이 급격히 앞으로 쏠리면서 몸이 기우뚱했다. 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던 의사도 그 바람에 놀라 내 몸을 잡으며 따라서 일어났다.

    그러나 바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악, 하고 소리를 지르려는 때에 다행스럽게도 클라라가 나무 위에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놀란 마음을 겨우 진정하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의사는 밖에 누가 보이냐고 물었다. 나는 다시 클라라를 쳐다봤다. 클라라는 입속에 바람을 잔뜩 넣어 부풀리고는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무심코 씽긋 웃으며, 아무 것도 안 보인다고 대답했다. 의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귀신에게라도 홀렸는지, 캄캄한 방에 진종일이고 앉아서 혼잣말을 하더라구요. 도대체 무슨 얘길 누구에게 하고 있는 건지. 형이 갑자기 그렇게 돼서 잠시 저러나 싶었는데…… 하여튼 간에 점점 더 심각해지니깐. 이러다간 어린 애 하나 때문에 집안에 있는 사람이 다 이상해질 것 같다니까요.

    여자는 시종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보면서 의사에게 마치 하소연이라도 하듯 지껄여대고 있었다.

    클라라는 드레스에 묻은 부스러기 같은 나무껍질을 털어내는 중이었다. 그러나 또 뭔가가 제대로 뜻에 맞지 않았는지, 드레스를 비비적거리며 무척이나 속이 상한 얼굴이 되었다.

    클라라, 거 보렴. 나무에 진액이라도 남아있으면 어쩌려고 거길 앉니. 옷이 많이 더러워졌겠구나.

    여자가 의사를 채근하듯 말했다.

    저것 좀 보세요.

    그리고는 동시에 내 눈앞으로 길게 뻗은 손가락을 들이댔다. 여자는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또 혼자 실실 웃잖아요. 아우, 소름끼쳐. 어린 애가 왜 이래 진짜!

    의사는 다시 내게 밖에 누가 보이냐고 물었다. 이번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의사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다만 알았다고 말했다. 진단결과는 곧 들을 수 있었다. 충격으로 인한 일시적인 환각증상인데, 수면장애로 인해 더 심각해질 수 있으니 마음을 편하게 하고 되도록 깊게 잠을 자도록 해보라고 의사는 내 눈동자를 꾸준히도 바라보며 여자에게 당부했다. 경과를 계속해서 지켜봐야하니, 삼 주 간격으로 통원하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여자를 쫓아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걷는 동안 뒤에 따르는 클라라가 자꾸만 혁대 뒤쪽을 잡아당겼기 때문에 몇 번이나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귀찮은 생각이 들어 클라라에게 눈치를 좀 주었다. 터미널로 향하는 길 중간의 한쪽 넓은 공터에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자갈과 흙을 싣고 덤프트럭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고 공사장 인부들의 작업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시끄럽게 들려왔다.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십일 층짜리 복합 건물을 지을 거란 이야길 들은 적이 있었다. 수십 개의 상점과 오락시설이 갖추어진 건물이 완성되면 터미널이 새로이 이곳으로 자리를 옮길 거라는 이야기였다. 거긴 현재의 터미널에서 걸어서 십 분 정도 되는 거리였다. 지금의 낡고 오래된 터미널 부지에는 체육관과 해양박물관이 지어질 거란 소문도 있었다. 우리가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하늘은 추위로 구름까지 얼어붙은 것 같았다. 내일 눈이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다. 여자로부터 돈을 받아 쥐고 약국으로 가서 차표를 사왔다. 노란 색 테이프 조각도 함께 얻어왔다. 여자는 테이프를 손에 말아 쥔 채 자신의 밤색 코트에 묻은 보푸라기와 먼지를 떼어내느라 부산을 떨었다. 버스가 지나가도 땅이 얼어붙어 먼지가 그렇게 많이 일지 않았다.

    여자는 손목에 찬 시계를 자꾸만 내려다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우연히 만난 동네 아는 사람으로부터 버스가 한 시간 정도 늦을 거라는 말을 전해 들었으므로 여자와 나는 약국 안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다른 노선의 버스들도 한두 시간씩 정차가 되어서 약국 안은 평소보다 더 번잡했다.

    나는 약국 안을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다. 클라라가 보이지 않아서였다. 어디로 간 것일까. 조금 전, 아이의 행동에 내가 너무 무심하게 반응해서일까. 아마도 집으로 혼자 가버린 모양이었다. 버스도 없을 텐데, 걸어서 간 것일까. 나는 시무룩해졌다.

    안이 시끌시끌해서인지 유리문을 통해 본 밖은 반대로 고요해보였다.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여자의 급한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겨울바람이 몸을 에우듯 하고 지나갔다. 나는 정신 나간 이처럼 한 곳만 뚫어져라 보며 앞으로 걸어갔다. 하마터면 발을 헛디뎌 약국 앞의 계단에서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버스 오는 소리는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차페크였다. 약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시외로 떠나는 버스를 타는 자리에 차페크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내게로 와서 멈춰 있었다. 책 표지의 흐리멍덩한 표정 그대로였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걸음을 빨리 했다. 그에게 가서 물어보고 싶었다. 지금 어딜 가려는 것이냐고, 그러나 아무리 급하게 걸어가도 차페크의 모습은 멀게만 보였다. 나는 거의 뛰었다. 멀어지면서도 나를 보는 차페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마음이 흐무러지고 있었다. 저쪽에서 버스가 새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온몸에 힘이 빠졌다. 버스가 자신의 앞에 다다르기 직전, 차페크는 나를 향해 환한 웃어 보였다. 그 탓에 또다시 나무토막처럼 굳은 자세로 멈춰서고 말았다. 이윽고 버스는 떠났고, 웃고 있던 차페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바람이 다시 내 몸을 에워쌌다. 뒤따라온 여자가 내 뒷덜미를 낚아채며 울화통을 토해내기까지 나는 그곳에 붙박인 듯이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 뒤로 사흘을 꼬박 앓았다. 안방에 누워 몸을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열병이라도 난 것처럼 온몸이 들끓었다. 이틀이 지나서야 양철 지붕을 흔드는 거센 바람소리를 들었고, 클라라의 깔깔거리는 소리를 들었고, 새엄마란 여자의 앙칼지게 하소연하는 목소리를, 어렴풋하지만 분명히 들었다. 그리고 그 저녁 무렵, 나는 신음 속에서 깨어났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내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은 먹을 것을 찾는 일이었다.

    이튿날, 아직은 신열이 남아 있는 몸을 이끌고 방으로 건너갔다. 마당의 눈은 거의 다 녹아 있었다. 비워둔 채로 겨우 사흘이 지났을 뿐인데도 방은 오래 버려둔 창고처럼 싸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방바닥은 차갑고 공기는 왠지 낯설었다. 성에가 낀 창문은 먼지까지 엉겨 붙어 더욱 흐려 보였다. 길 잃은 관람객처럼 나는 방 안을 서성거렸다. 갑자기 시야가 흐려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책상 위의 책꽂이에 꽂힌 스무 권에 이르는 책들 사이로 유독 낯익은 책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책을 거기다 둔 기억이 없었다. 나는 이마에 손을 댔다. 식은땀이 묻어났다.

    책을 꺼내들고 표지 그림 부분을 손가락으로 밀었다. 엷게 깔린 먼지가 묻어났다. 차페크는 그러나,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당황했다. 이럴 수는 없었다. 책을 더듬거리는 내 손이 가늘게 떨렸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 그림을 향해 넋 나간 표정으로 도리질을 했다. 그건 그저 여느 그림과 다를 바 없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수개월 동안에 나만이 알고 있었던 사실이, 모조리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들의 말처럼 헛것을 보는 병에 걸렸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입안의 마른 침도 삼키지 못하고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차페크.

    응답은 없었다. 다리에 힘이 착 풀렸다. 나는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시선을 한 곳에 두고 있었다. 책상 아래였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클라라는 없었다. 클라라는 그날 이후 돌아오지 않은 것이었다. 가슴 속에서 응어리처럼 터져 나오는 것이 있었다. 나는 방바닥에 내려둔 책을 집어 들어 벽을 향해서 힘껏 던져버렸다. 단지 모든 것을 환각이라고 생각하기엔 모든 기억이 너무 또렷하기만 했다. 사실이 아니었어, 라는 생각은 신음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한참을 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바람에 양철지붕이 너덜거리는 소리만이 이어서 들려왔다.



    내가 살던 소읍은 이제 예전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변해버렸다. 몇 년의 공사 끝에 새로운 터미널과 신작대로가 완공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약국에서 차표를 구입할 필요가 없었다. 오래된 약국은 구식 터미널과 더불어 곧 사라져버렸다. 그 자리엔 들리던 소문대로 해양박물관과 거대한 체육관이 들어섰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할 즈음, 여기 촌구석에도 충전식 교통카드란 것이 등장했다. 편리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가끔은 늙다리 약사가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 초라한 구식 건물의 약국이 그리워질 때가 있었다. 형을 마지막으로 보낸 자리도 사라졌지만, 내 마음속에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근처라도 가게 되면 한동안을 서성이다 돌아오곤 했다. 시간은 무심히도 흘러갔지만, 기억 속의 형은 나이를 먹지 않았다. 내게 형은 어울리지 않는 군복을 입고 작별 인사도 없이 버스를 타고 사라져버린, 스무 살의 장난기 많은 청년이었다. 그러나 내가 열두 살에 머물 수만은 없었다. 형의 죽음은 내가 인정할 수 있기 전에 기억 저편에서 마치 헛소문인 것처럼 무뎌져버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보름여 만에 나는 간단한 짐을 챙겨서 터미널로 갔다. 때는 아직 삼월 초라 겨울 기온이 완연했지만 마음은 홀가분했다. 나는 고향을 떠날 작정이었다. 차창에 비치는 햇빛에 몸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끼며 좌석에서 깜빡 선잠이 들었다. 잠시 뒤 누군가 옆자리에 앉는 기척에 잠에서 깬 나는 그 옆얼굴에 얼결이지만 무척 놀랐다. 옆의 사람을 잠시 동안 빤히 봤다. 그는 내 시선을 깨닫지 못했다. 아니었다. 그 사람은 단지 말상일 따름이었다. 무척 노곤했으므로 실망감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촌구석을 떠난다는 사실에, 두 발이 땅에 닿지 않은 것처럼, 나는 잠속에서조차 들떠 있었다. 눈을 뜨면 세상모르는 곳에 나는 서 있을 것이었다. 두려움이 아주 없진 않았으나, 그 두려움 때문에 마음이 우울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버스는 내가 잠든 사이 대교(大橋)를 건너 도시로 나를 실어 갔다. 두 곳을 이어주는 커다란 다리 하나로 십 년 가까운 긴 시간을 순식간에 횡단해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기억 속의 형과 같은 나이가 되었다.



    3



    만약에 세상 어디든 자기와 닮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그리고 자신과 닮은 것이 비단 외양뿐이 아니라면, 그걸 단지 즐겁거나 신기한 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곧잘 내겐 일어나곤 했다. 사람들의 말처럼 내가 정말 미친 것일까. 내가 본 것을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다. 나 이외엔 아무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때때로 나 자신도 나를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니라고 하기엔, 다른 이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기엔, 그들의 모습이 너무 선명했다. 한밤중에 홀로 깨어나 암흑 속을 더듬듯 두려운 일이었다.



    병이 어느 정도 나은 후에도 나는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꼰대도 그런 나를 외면했고, 새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나는 언제 터질지 모르지만 안고 갈 수 밖에 없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나는 방학만 되면 꼰대의 형제, 즉 친척들의 집으로 보내졌다. 그들이 대놓고 내색은 안했지만, 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 또한 물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친척들은 나를 불쌍하게는 여겨주는 것 같았다. 그들이 형에 대해 가졌던 좋은 감정과 안타까운 감정이 그 부분에서 어느 정도는 기여를 했으리라 생각되었다.

    방학에 도시의 친척 집을 전전하면서도 나는 되도록 집안에는 있지 않으려 애를 썼다. 사촌인 형이나 누나, 동생들이 은연중에라도 나를 특별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부담스러웠지만, 무엇보다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부러 애쓰지 않는 나의 외곬 성격이 그런 행동을 스스로 하게끔 만드는 가장 큰 이유였다.

    밖에서 시간을 보내면 그런 면에서 좋았다. 밖의 도시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갖거나 말을 걸어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해가 떨어질 때까지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있거나 길거리를 배회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관찰하곤 했다. 대부분이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이상한 얼굴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내가 그들을 이상하다고 단정한 이유는 실제로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이유였다. 그들은 얼굴이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이지만 너무나 흡사해서 전혀 다른 부분조차 흡사하게 보일 정도로 내가 이미 아는 사람들과 닮아있었다. 어쩔 때는 너무 흡사해서 까무러칠 듯이 놀란 적도 있었다. 본가에서는 상대적으로 그런 일이 적었다. 조그만 시골이고 조그만 학교들이라 보는 사람이 매번 같은 사람들인 탓이었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달랐다. 그들은 하나같이 낯설었다. 그런데도 누군가와 닮았다고 생각되는 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막상 주위의 사람들을 직접 다시 보면 내가 관찰했던 사람들과 실제로 얼굴이 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그게 좀 이상했다. 그런 걸 보는 나도 이상했지만, 시치미를 떼고 다른 얼굴로 지나치는 그들도 이상했다. 이상한 얼굴을 가진 이들을 볼 때마다, 비밀스런 왕국으로 통하는 구덩이에 빠진 동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곤 했다. 차차 나이를 먹어도 그런 내 생각은 좀처럼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꼰대나 새어머니와 친척들의 생각처럼 내가 약을 먹어야 하고, 병원에 가야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물론 그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도 나는 일언반구 다른 이들, 특히 일가 사람들에겐 말하지 않았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되는 것이 얼마 남지 않은, 겨울방학에 도시에서 생긴 일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도를 따라 내려가는 중이었다. 새해가 멀지않은 연말이고 퇴근시간이라 지하철 타러가는 길은 몹시도 혼잡했다.

    개찰구를 지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던 중, 나는 무심히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위에는 스틸 재질인 듯 보이는 은회색의 맑은 금속이 공간의 굴곡을 따라 반타원형으로 부착되어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이 약간은 일그러진 형체로 거기에 비춰졌다. 내가 무언가에 놀란 것은 그곳을 반쯤 내려갔을 무렵이었다.

    나는 정말로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반대편에서 올라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비친 형상 중에 낯익은 여자아이의 모습이 스쳐갔기 때문이었다. 나는 황급히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려 아이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를 발견했다. 그 아이도 이미 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맑게 웃는 얼굴엔 생기가 흘렀다. 예전의 드레스를 아직도 입고 있었다. 자주색 빛깔에 하얀색의 손톱만한 동그란 점이 무수히 찍혀 있는 드레스. 여자아이는 분명 클라라였다.

    나는 뒤로 돌아서 위쪽으로 다시 뛰어올라가려 했다. 그러나 에스컬레이터 위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발을 구르며 조바심쳤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단은 에스컬레이터가 다 내려갈 때까지 참아야만 했다.

    클라라는 다행히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찰구를 빠져나가는 사람들로 붐볐지만, 나는 단번에 클라라를 찾아냈다. 클라라는 벽 앞에 두 손을 뒤로 한 채 오도카니 서 있었다. 겨울인데도 강렬한 꽃향기가 먼저 코를 찔러왔다. 옷은 똑같았지만 얼굴 생김새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키가 특히 많이 자라서 어엿한 숙녀처럼 보였다. 정말 이젠 아이라고 부르면 안 될 것 같았다. 클라라.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녀는 내 얼굴을 보며 마냥 웃기만 했다. 말을 듣지 못한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예전처럼 두 손을 이용했다. 클라라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다 이해한다는 듯이, 내 손동작 끝엔 어김없이 웃어보였다. 눈에는 그전처럼 맑은 눈물이 괴어 있었다. 그렇다고 슬퍼보이진 않았다. 그녀의 표정에 나는 약간 안심했다. 사실 그녀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 걱정을 많이 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보던 날, 뒤에서 혁대를 잡아당겼을 때 핀잔을 준 사실도 내내 마음 한켠에 미안함으로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일을 또한 손짓으로 사과했다.

    등 뒤로 감춘 클라라의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는 것 같았다. 숨기고 싶은 눈치가 보여서 나는 그것이 뭐냐고 묻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싶었다. 클라라는 내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왜 사라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런 뜻을 전하자 클라라는 갑자기 슬픈 빛을 띠더니 수그린 고개를 연신 가로저었다.

    생각지 못한 반응에 크게 당황했다. 내가 손을 잡자 앙탈하듯이 뿌리쳐버린 것도 의외의 상황이었다. 조금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클라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클라라는 이미 뜻을 굳힌 듯 보였다. 내가 그녀를 보내줘야만 하는 게 과연 좋은 일일까 싶었지만 강요하는 것은 안 된다고도 생각했다. 나는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다시 손짓을 이용해 가도 좋다는 뜻을 전했다.

    작별을 하고 개찰구 쪽으로 가던 클라라는 웬일인지 바로 통과하지 않고 다시 돌아서서 한동안 내 얼굴을 뚫어져라 봤다. 그녀의 얼굴에는 다시 웃음이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두 눈에선 맑은 것이 금세 떨어질 것 같았다. 그 눈을 보자 나는 왠지 그녀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미웠고 야속했다.

    그녀는 다가와 한 손으로 내 볼을 쓰다듬었다. 나는 울음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그녀가 내 귀에 입을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나는 별안간 간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졌다. 그녀의 말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취할 것 같은 꽃향기는 너무나 또렷하게 풍겨왔다. 정신이 더 산란해졌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때마침 터진 그녀 특유의 웃음소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참지 못해 쓰러졌을 것이었다. 희한한 일은 내가 눈을 떴을 때 일어났다. 그녀는 마치 연기처럼 내 눈앞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이리저리 정신없이 고개를 돌렸다. 없었다. 그러나 왠지 그녀가 어딘가에 숨어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여운처럼 내 귀전에 여전히 남아 있었는데 그걸로 증거는 이미 충분했다. 그리고 어느 샌가 나도 그녀의 웃음을 따라 웃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의 맑고 깨끗한 웃음이 끝자락엔 슬프게도 들려왔다. 나도 슬픈 듯 따라 웃었다. 그녀가 슬프게 웃으니 내가 슬픈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라지는 클라라의 뒷모습을 나는 끝내 보지 못했다. 귓전의 웃음이 완전히 잦아들고 나서야 클라라가 뒤에 숨긴 것이 무엇인지 내가 무척 알고 싶어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이젠 영영 알 수 없게 됐다는 사실에 나는 곧 다시 쓸쓸한 기분이 되었다.



    4



    고향을 떠나기 전, 내가 합격한 대학에 결국 등록하지 않은 건 잘한 것도, 못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앞날에 대한 뚜렷한 계획조차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또 대학이라는 곳이 그런 생각을 어느 정도 해결해 주거나, 지연시켜 주리란 생각을 못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꼰대, 아니 아버지란 사람에게 손을 벌리고 싶은 마음이 내겐 전혀 없었다는 점은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는 무엇보다 확실한 이유가 되었다.

    다른 가족과 유독 내왕이 없는 도시의 삼촌 집에 기거하기로 한 것도 그런 내 뜻과 무관하지 않았다. 2남 2녀 중 막내로, 맏이인 아버지보다 열세 살이나 어린 삼촌은 마흔이 다된 나이인데도 결혼은커녕, 연애도 한 번 못하고 있었다. 모시고 살던 할머니가 9년 전에 돌아가신 후, 오랫동안 혼자 지내온 것을 생각하면 의외로 씀씀이가 좀 헤퍼 보이긴 했다. 하지만 자질구레한 일에 신경 쓰는 걸 무척이나 싫어한다고 호언하는 것을 보니, 같이 지내는 일이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런 말이 무색하리만치, 삼촌은 내가 얹혀 지내는 조건으로 그가 집을 비운 사이 집안 청소를 해놓을 것과 자신이 집에서 작업 중일 때는 발소리를 크게 내지 말 것 따위를 당부하긴 했다. 그러나 그것 또한 특별히 힘들 건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래도 나는 자리가 잡히는 대로 최대한 빨리 거길 나올 생각이었다.

    일단은 취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르바이트조차 해본 경험이 없었으므로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몰랐다. 집 근처에서 조그만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 삼촌에게 기대어 그쪽의 일을 좀 배워볼까도 했지만, 나는 곧 그 생각을 그만두었다. 운을 떼자마자 삼촌이 일언지하에 딱 잘라 거절을 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굉장히 바쁘다. 너 같은 꼬맹이들까지 신경 쓸 여가가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너는 내게 별 도움이 안 될 거다, 라는 거절의 이유와 함께였다. 그건 사실 맞는 말이었다.

    직업인 출판업 이외에 삼촌은 혼자서 글을 쓰기도 했는데,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해 보이진 않았다. 시를 쓴다는 그는 국문학과를 졸업한 해부터 응모한 크고 작은 문예공모전에서 벌써 십몇 년째 낙선만을 거듭하고 있었다. 칠팔 년 전인가는 꽤 유명한 축에 드는 시인들이 심사를 하는 국내유수의 신문사 신춘문예 본심에 딱 한 번 올라간 적도 있었다. 물론 그 일을 제외하고는 데뷔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 내 생각엔 그것도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었는데, 삼촌은 그걸 자신의 경력 중 그 무엇보다도 더 자랑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사건 아닌 사건 이후, 삼촌은 벌써 다섯 권이나 되는 자신의 시집을, 그것도 자비로 출판하고 있었다. 물론 출판사는 그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는 시집이 새로 나올 때마다 늘 명함을 새로 만들었는데, 안쪽에는 언제나 처음부터 최근까지 나온 그의 시집 제목들이 이름보다 더 명료하게 적혀 있었다.

    더부살이 첫 날, 나는 내 것으로 정해진 방에 있는 책장에서 책을 하나 빼들었다. 책이 채 삼십여 권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띄었다. 그건 다름 아닌 삼촌의 최근 시집이었다. 책날개에 있는 작가 프로필에는 시인으로서는 별 상관없는 삼촌의 잡다한 경력과 더불어 십여 년 전의 그의 사진이 고스란히 인쇄되어 있었다. 사진 속에서 빵모자를 삐딱하게 눌러쓴 그는 약 십오도 각도 위로 허공을 응시한 채, 어딘지 객쩍은 표정이었다. 입에 문 오징어를 쩝쩝거리면서 나는 이별이 어쩌고 아픔이 어쩌고 하는 신파타령조 같은 그의 시를 몇 편 읽었다. 연애도 제대로 못해본 사람이 쓴 것 치고는 사설이 길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나는 시라는 것을 잘 몰랐다. 잠시 뒤에 나는 길게 꽂혀 있는 책들 위에 책을 그대로 눕혀놓고 남아있던 짐 정리를 했다. 다음 날, 밖에 나갔다 늦게 돌아온 내가 무심코 시선을 책장으로 향했을 때, 눈앞에 먼저 걸린 것은 어느 틈엔가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 있는 삼촌의 시집이었다. 물론 나는 그것을 다시는 읽지 않았다.

    삼촌은 병원에서 가슴에 병이 있다는 진단을 받은 적이 있었다. 말은 안했지만, 울화병임을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만나는 사람에게조차 명함을 건네면서 자신이 시집까지 가진 시인인 것을 자의든, 타의든 위안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였지만 정작 혼자 있을 때는 다음 공모전을 위해 날밤을 새우는 일이 잦았다. 그러다가 뭔가가 뜻대로 써지지 않으면 책이 너무 많아 발 디딜 틈이 없는 그의 방에서 잡히는 대로 책을 집어 던지면서 마치 산짐승처럼 소리를 지르곤 했다. 처음 내 방에 앉아 그 소릴 들었을 때는 겁이 덜컥 났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봐온 게 있는 터라 곧 면역이 되었다. 누가 형제 아니랄까봐, 초록은 역시 동색이었다.

    아무튼 생각지 못한 막내 삼촌의 거절이었다. 나는 내 방 의자에 앉아 자못 멍해졌다. 잠시 거실에 나갔다들어온 삼촌은 조금 전 자신의 무심함이 못내 걸렸던지, 한동안 나처럼 생각을 깊이 하는듯했다. 그리고는 또 약간은 심드렁한 얼굴로 어디 학원이라도 들어가서 기술이라도 배우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별다른 이의 없이, 나는 삼촌의 그 의견에 동의했다.

    결국 찾아낸 것은 학원이 아닌 직업학교였다. 삼촌의 집에서 걸어서 삼십 분 정도 거리였고, 학비는 국비가 지원됐기 때문에 무료였다. 다수의 컴퓨터 관련학과와 전자통신, 전기, 산업설비 등의 다양한 기술학과가 있었다. 이미 새 학기 모집이 모두 끝나 월 초에 이미 모든 학과가 개강을 한 뒤였다. 공짜이긴 하지만, 수료 후 대부분이 그냥 단순한 공단의 노동자로 취업을 했기 때문에 직업이 없는 사람들도 어지간하면 기피하려는 듯했다. 정신건강에 비춰 그다지 바람직한 생각은 아니었지만, 미달인 그곳 전자통신과에 입학하게 된 것은 그런 이유가 크게 작용했을 거라는 것이 내 추측이었다. 다른 학과보다 상대적으로 짧은 6개월 과정이었고 무엇보다 야간에 수업을 진행한다는 점에서 전자통신과를 선택한 것은 옳은 선택인 듯했다. 밥은 먹여주겠지만, 삼촌이 용돈까지 대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설사 가능하다 해도 그런 것으로 인해 삼촌이 가진 특유의 허세와 거만을 지금보다 더 오롯이 받아주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서 들었다. 별로 오랜 생각을 요하진 않았다. 역시 야간의 직업훈련만 오로지로 할 순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르바이트는 직업학교를 다니면서부터 곧바로 시작했다, 편의점 파트타임 판매원을 한 달 반쯤 하다가 계산대 앞에 서 있는 것이 힘겨워 가구회사 텔레마케터로 옮겨갔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전화번호부를 북북 찢어가지고 아무데나 덮어놓고 전화를 걸었다. 고객신상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가볍게 하다가, 종국에는 슬그머니 신용카드의 소지여부를 묻는 속셈이 빤한 상술과 냉랭한 사람들의 반응에서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을 참는 것은 한 달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불법 성인오락실의 종업원은 눈치와 달리기가 빨라야했다. 사장은 면접 때부터 내가 그런 일에 초짜라는 사실을 미덥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다. 처음 나는 시골에서 왔고, 고등학교를 갓 졸업했고, 성적은 중간 정도였다는 말을 했었다. 그 말에도 사장은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뭘 잘하는 게 있느냐고 묻기에 게임을 잘한다고 말했고, 담배나 술심부름을 잘했다고 말했고, 과목 중엔 국어와 국사를 잘했다고 말했다. 사장은 약간 기꺼워하는 눈치였다. 달리기는 잘하냐고 묻기에 고등학교 체력장에서 달리기와 공 멀리 던지기는 전교에서 일등을 했다고 말했다. 사장은 눈빛까지 번뜩이며 내일부터 당장 나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곳에서 빠른 달리기는 두 가지 사실에서 크게 유용했는데 첫 번째는 재빠른 눈치와 함께 최고 배당이 터진 이에게 달려가 박수를 치고 환호를 보내는 것에 쓸모가 있었고, 두 번째는 단속이 떴을 때 뒷문으로 달아나는 데 쓸모가 있었다. 사장은 종업원들의 느린 걸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만약 ‘짭새’가 떠서 누군가 잡혀간다면 그건 종업원 중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고 말하곤 했다. 뒷문은 종업원들이 쉬는 방 안에 있었다. 무슨 시대극영화에서처럼 방 한구석에 옷장을 치우고 장판을 치우면 맨홀뚜껑 같은 동그란 나무판자가 드러났다. 구멍은 몸을 억지로 구겨 넣어야 겨우 드나들 정도로 비좁았는데 아래로 길쭉한 사다리가 하나 걸쳐 있었다. 거기서 일하는 내내 시대극에서 일경을 피해 만주로 달아나는 도망자와 같은 모습을 상상해보곤 했다. 복장도 내 생각엔 맞춤이었다. 짭짤한 팁을 생각하면 첫 번째 경우만 발생해야 좋았을 것이었다. 일을 시작한 지 두어 달 만에 생각지도 못한 단속이 떴다. 동네 산길에서 걸음이 단련된 나는 다른 두 명의 종업원들보다 훨씬 빨리 달아날 수 있었다. 현실은 상상과 같지 않았다. 그 길로 나는 세 번째 일자리를 잃었다. 다시 편의점 판매원으로 돌아가 두어 달을 일했을 때는 이미 직업학교의 수료가 멀지 않은 상황이었다.



    전자통신과의 수업은 지루하기가 짝이 없었다. 쉬는 시간을 제외하고 밤 아홉 시 삼십 분까지 세 시간을 이론 두 시간과 실기 한 시간으로 쪼개서 수업을 받았는데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온 탓에 생소하기가 그지없는 이론 강의도 그랬지만, 역한 납 냄새를 킁킁 맡아가며 초록색 기판을 지져대야 하는 실기 시간은 정말이지 고역이었다. 그런대로 한 달간은 참아냈지만 그 뒤로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삼촌의 서가에 즐비한 책은 그런 상황에서 꽤 유용했다. 칠팔 년 전에 읽은 카렐 차페크의 소설 이후 거의 처음으로 나는 소설책 한 권을 완독해냈다. 같은 학과를 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수업 시간은 이내 내가 앉아 있기가 어색해졌다. 그러나 나는 수료증이 필요했다. 나이 많은 사람들부터 고등학교 자퇴를 하고 들어온 어린 사람들까지 두루두루 내게 멸시의 시선을 던졌다. 나는 조용히 책을 읽었다. 나는 수료증이 필요했다. 내가 하는 행동이 그 사람들에게 무슨 피해를 주는 지 잘은 몰랐다. 수업 듣는 인원이 적다보니 공연한 집중을 받는 거라고 생각했다. 따가운 눈초리는 별 것이 아니었다. 곧 강사들은 나의 딴 짓을 공공연하게 허용했다. 사실은 포기했다고 말해야 옳았다. 나는 조용히 책을 읽었다. 책에 대해 결벽증이 유난한 삼촌이었지만 내가 빌려가는 것은 허용해주었다. 다만, 책장을 접지 말고 낙서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가 붙었을 뿐이었다.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세 번째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후로는 되도록 내가 번 돈으로 책을 사서 읽었다. 집에서 버스를 타고 삼십여 분을 가면 중고헌책방이 즐비한 골목이 있었다. 정리가 잘된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책을 마치 쓰레기처럼 쌓아놓고 있었다. 그 쓰레기 같은 책들을 나는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면서 번 돈으로 수십 권씩 사다 읽어 치웠다. 불법 게임장에서 일하는 그 두어 달 동안에 나는 헌책방 골목에서 가장 책을 많이 사는 사람 중에 하나가 되고도 남은 듯했다. 물론 확인된 사실은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헌책방 주인들을 이모나 삼촌이라고 불렀다. 그들 중 몇몇은 정말 나를 조카처럼 여기는 듯했다. 절판된 시집이나 소설책이 나오면 다른 이들에겐 팔지 않고 두었다가 내게 내주는 이들도 있었다.

    카렐 차페크의 소설은 좀처럼 구해볼 수 없었다. 가끔 나는 불현듯 뇌리에 찾아드는 과거에 연연해 할 때가 있었다. 모두가 절판이었다. 출간을 했던 몇 군데의 출판사에 전화도 걸어봤지만 결과는…… 없었다. 몇 년 전에 나는 그의 단편집마저 이미 잃어버린 상태였다. 내 풀에 나는 지쳐버렸다. 그건 마치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건 같았다. 헌책방을 몇 번쯤 순례하고 나서 나는 그 소설들을 찾는 일을 포기했다.

    삼촌이 가져다놓은 몇 권의 책을 제외하고 곳곳이 비어 있던 내 방의 5단 책장은 곧 비좁아졌다. 직업학교 사람들의 멸시와 강사들의 한심해하는 눈빛은 한층 더 짙어졌다. 그들의 눈빛은 내 책장의 빈틈처럼 비좁았다. 수료일은 다가오고 있었다.



    직업학교 수료 직전에 있었던 자격증 시험에서 필기를 통과했다. 그리 어려운 시험은 아니었다. 운전면허 필기처럼 예전에 출제된 답만 줄줄 외우면 합격이 가능했다. 외우는 건 자신 있었다. 문제는 대충 보고 답만 외웠다. 필기를 통과하면 실기를 2년 안에 합격해야 했다. 그렇게 못하면 필기부터 재시험이었다. 귀찮은 일이었다. 실기시험은 1년에 네 번이 있었다. 직업학교를 수료하고 일주일 후, 처음 실기 시험을 봤다. 검. 갈. 빨. 주. 노. 녹. 파. 보. 회. 흰. 금. 은. 리드타입의 저항(Ω)에 표시되어 있는 색깔선의 배열순서는 그렇게 외워야했다. 그 각각의 값은 0, 1, 2, 3, 4, 5, 6, 7, 8, 9, 0, 1 순이었다. 그걸 이용해서 저항 값을 구하는 방식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먼저 앞의 두 개의 줄 색깔을 숫자 순서대로 그냥 배열하고 세 번째 색깔은 앞의 값의 소수점 이하의 0의 개수로 생각하면 되는 것이었다.

    한 개의 기판을 4시간 안에 납땜해야 했는데, 많을 때는 이삼십 개의 저항을 읽어서 조립해야만 했다. 부족한 시간과 서툰 납땜질은 실상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내 자신한테 있었다. 나는 지독한 색맹이었다. 저항의 값을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건 이미 직업학교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지만, 멍청하게도 나는 처음부터 그것이 문제가 되리라곤 여기지 않았었다. 옆의 사람이나 강사에게 저항 값을 물어볼 때마다 그들은 하나같이 우스워하는 눈치였다. 특별히 누군가가 검사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애초부터 전자자격증은 누가 일부러 가르쳐주지 않아도, 색맹이 따서도 시험을 봐서도 안 된다는 걸 모르지 않는 것이 상식이었다. 나는 그걸 몰랐다. 모를 뿐만 아니라 의아해하기까지 했다. 보기 좋게 첫 번째 실기에서 미끄러졌다. 재시험은 석 달 후에 있었다. 나는 대책을 강구했다. 직업학교 출신 중 납땜을 제일 잘하는 사람을 찾아냈다. 나이는 나와 비슷했다. 그도 나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는 뜬금없이 만나자는 나의 말을 산뜻하지 못하게 수락했다. 음식점에서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는 그에게 나는 거래를 제안했다. 한참만에야 허락한 그 친구의 요구조건은 생각보다 그렇게 비싸지 않았다. 나는 즉시 수락했다.

    두 번째 실기시험에 나는 그 전보다 일찍 도착했다. 다행히 심사 보는 이들은 옆자리에 누가 앉아 있든 그렇게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LED전구에 불만 들어오면 한 시험장에서 수십 명씩 합격하는 시험이었다. 실기시험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거나 나처럼 신체적 결함이 있지 않으면 통과하기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실 시험관들도 관리가 엉성하고 소홀했다. 나는 그 점을 십분 활용했다. 시험이 두 시간 남짓 진행되었을 때 나는 옆의 그 친구와 작업 중이던 기판을 재빨리 바꿔치기 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 친구는 급히 자기의 것을 작업하기 시작했고, 나는 납땜만 몇 번 더하고 엎드려서 잠을 잤다. 두 시간 후 시험은 끝났고 시험관은 내 기판에 전원을 연결시킨 후 채점을 시작했다. LED전구에 불은 들어왔다. 시험이 끝난 후 나는 곧바로 인터넷으로 자전거를 한 대 주문했다. 그리고 발송지로 그 친구의 집 주소를 적어 넣었다. 며칠 후, 그에게서 고맙다는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는 응답하지 않았다. 조금은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편의점에서 일주일 정도만 일하면 충분히 벌 수 있는 값이었지만 직업학교 때부터 당해온 모멸감을 잊고 자존심까지 얹어준 걸 감안하면, 결코 싼 가격이라 볼 수 없었다. 자격증 발급은 한 달 후에 있었다.

    발급 받은 자격증은 예상보다 훨씬 쓸모가 없었다. 이력서에 단 한 줄이 더 추가됐을 뿐이었다. 처음 아르바이트 구할 때 처음 얼결에 썼던 것을 포함하면 두 번째로 작성하는 이력서였다. 컴퓨터로 작업을 하면서, 나는 시집에 있던 삼촌의 프로필과 그의 명함을 떠올렸다. 자격증을 작성하는 란은 글씨와 선을 좀 굵게 했다. 고등학교 졸업과 직업학교의 입학과 수료를 합치면 내 이력은 네 줄에 지나지 않았다. 이력서를 낸 몇몇 전자회사들로부터 차례로 퇴짜를 맞았다. 그 사실을 몇은 면전에서, 몇은 전화로 전해 들었다. 그런 전화는 보통 내가 먼저 걸어 확인을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직업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수료한 지 두 달이 훌쩍 넘어가는 어느 날의 오후였다. 강사는 자기가 전화를 먼저 걸어놓고도 한참을 뜸을 들였다. 그냥 전화를 끊어버릴까도 생각했다. 강사의 첫 마디는 취직은 했느냐는 것이었다. 직업학교에서 수료생들에게 책임지고 취업을 주선해 준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강사의 목소리에서는 어쩔 수없이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이 짙게 배어 있는 듯했다. 나는 다소 퉁명하게 대꾸를 했다. 강사는 이번 주 안에 시간이 되면 학교로 한 번 찾아와 달라고 말했다. 나는 조금 전과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는 화요일 오전에 받았는데, 내가 방문을 한 것은 금요일 오후였다. 날이 짧아져서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저녁 빛은 붉었다. 직업학교 내의 플라타너스들은 이미 앙상한 가지로 서 있었다. 십일월 말이라 약간은 쌀쌀했지만, 크게 춥지는 않은 날씨였다.

    저는 전자통신과를 다녔는데요. 강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볼멘소리를 했다. 내 그런 어투에 강사는 마뜩치 않아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내가 직업학교를 왜 다녀야했는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못마땅함을 누른 강사는 전화를 이미 해놨으니 돌아오는 월요일 오후쯤 가보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떤 과에서 수료를 했든지 간에 꼭 그 계통으로 취직하는 걸 보장하는 건 아니니, 너무 서운해 하지 말라고도 덧붙였다. 사실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란 생각은 그 말을 듣기 직전, 나도 이미 하고 있었던 터였다. 내 누그러진 표정에 강사는 짐짓 위로하는 투로 운동용품이지만 아주 예민한 물건이고, 모든 공정이 다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니까, 경험 쌓는 셈치고 열심히 해보라고도 말했다. 수작업이란 말에 또 한 번 놀랐지만, 어쨌든 나는 고분고분 대답을 하고 자리에서 무겁게 일어섰다.

    직업학교를 나가는 교문 앞에는 마른 낙엽이 두텁게 깔려 있었다. 나는 거기에 힘껏 발길질을 했다. 낙엽 여럿이 허공에 떠 나풀거렸다. 날이 좀 추워진 것 같았다. 몸을 움츠리며 집으로 향했다.



    내가 내리자 뒤로 긴 연기를 내뿜으며 버스는 그대로 내달려갔다. 공단 입구에서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입구에는 굵직한 철주가 이차선 도로 양쪽에서 솟아올라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 사이에는 아주 높다랗게 강철을 두드려 펴서 만든 팻말이 도로를 가로질러 박혀 있었는데, 아주 오래된 듯 전체가 붉게 녹슨 팻말 안에는 굵고 커다란 글씨로 ‘XX지역 국가산업 단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고 내리누르듯 적혀있어서, 가뜩이나 내키지 않는 걸음을 한 이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었다. 크고 작은 이런저런 공장들이 우후죽순으로 키를 맞대고 서 있는 공단 안은 공기조차 혼탁해 보였다. 마치 하늘에서 한꺼번에 쏟아 부은 시커먼 흙먼지를 뒤집어쓰기라도 한 듯, 공장건물들은 하나 같이 어둡고 칙칙한 느낌이었다. 집에서 나오기 전부터 이곳으로 오는 것을 몇 번이나 망설였는지 몰랐다.

    나의 면접을 본 과장이란 이의 이야기는, 며칠 전 강사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강사와는 나를 대하는 행동부터가 달랐다. 그는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고 공손히 질문을 했다. 공장 라인작업의 작업반장을 겸하고 있다는 그의 손은 흉터로 가득했다. 머리는 조금 헝클어져 있었고 근무복이라고 입고 있는 짙푸른 색 작업복에는 기름때가 꼬질꼬질하게 묻어 있었다.

    그는 내 나이를 묻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이내 무언가를 결심했다는 듯 위아래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잠시 작업 라인 쪽에 다녀오겠다며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내 앞의 탁자에는 경리로 보이는 여자가 갖다놓은 자판기 커피가 올라와 있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 향내를 맡으며 나는 잠결 같은 나른한 느낌이었다. 나는 이층으로 올라와 가장 먼저 둘러보고 앉았던 사무실의 풍경을 다시 한 번 훑어봤다. 직사각형 모양의 그리 좁지 않은 평수인 사무실은 늦가을 낮 채광으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커튼을 창문 양쪽으로 묶어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 빛의 기운을 나는 온전히 몸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한쪽 벽면에는 커다란 브로마이드가 걸려 있었다. 사진 속의 주인공은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도 TV에서 여러 번 본 기억이 나는 프로야구선수였다. 타석에 선 그는 사진 밖 창문을 향해 쏘아보는 시선과 입가의 시니컬한 듯한 미소를 동시에 보내고 있었다. 야구공은 이미 거의 다 날아와 있어서 나무배트는 반쯤 홈플레이트 쪽으로 돌아가 있었고 왼쪽 발은 끌려올라간 듯 약간 들려있었다.

    아직 사무실에 난방을 가동시키지 않았는지 추위가 약간 느껴지는 것을 커피를 홀짝거리며 달랬다. 커피를 반쯤 비웠을 때 과장은 자리로 돌아왔다.

    그가 내 앞에 가져다놓은 것은 동그랗게 말린 양모(羊毛) 실 한 뭉치와 고무가 재질인 듯 보이는 골프공만한 둥근 덩어리였다. 고무 덩어리에는 옆의 양모보다 세 배쯤 더 굵은 다른 양모 실이 얼기설기 둘러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과장의 앞에도 똑같은 것이 놓여있어 나를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었다. 한쪽에서 이십 대로 보이는 경리 여직원이 피식 웃으며 또 저러신다, 라고 말했다. 경리와 달리 과장이라는 사람은 꽤 진지해 보였다. 다시 자리에 돌아온 뒤부터 그는 내게 반말 비슷하게 말을 내리고 있었다. 그것이 특별히 기분 나쁘거나 부담스럽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이런 거, 한 번도 안 해봤지? 부드럽게 물어 본 그는 여유 있는 표정과 동작으로 고무에 양모를 감아 돌리기 시작했다. 양모는 방향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다시 이쪽으로 바뀌면서 고무에 감기고 있었다. 얼마쯤 그런 행동을 계속하던 그가 동작을 멈추고 내게 부드러운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에는 그러나 뭔가 알 수 없는 긴장감과 섬세함이 배어 있었다. 나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과장을 따라 내 앞에 놓였던 양모를 감기 시작했다.

    한 오 분쯤 지나 하던 것을 멈추고 다시 과장이 말을 걸었을 때는 그 앞에 정말 야구공만한 크기로 양모가 감긴 물건이 놓여 있었다. 뜨개질에 쓰는 털실처럼 잘 감긴 듯 보였다. 쉽지? 그는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나는 내가 방금 전에 따라 감았던 것을 내려다보며 객쩍은 미소를 지었다. 과장은 야구공이 처음 이런 것부터 시작해서 열 번이 넘는 다른 공정을 거친다고 말했다. 그리고 강사의 말처럼 모든 공정이 수작업이라는 사실도 강조를 했다. 방금 전의 자기가 한 것을 눈높이로 쳐들고 아주 만족스런 표정을 짓던 그가 일어나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내 앞의 것을 손바닥위에 올려놓고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더니, 이건 짱구공이네, 라고 말하며 또 조금 전처럼 웃었다. 그의 다음 말은 일주일 뒤부터 출근할 수 있겠냐는 물음이었다. 내가 조금 망설이자, 그는 일주일 뒤에 출근 안해도 그런 줄 알 테니 전화는 굳이 안 줘도 된다고 짐짓 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와 악수를 했다.

    사무실을 나와 일층으로 가는 계단을 내려가던 나는 급히 따라온 경리직원 때문에 멈춰 섰다. 그녀가 내 앞으로 불쑥 내민 것은 한 장의 메모지였다. 과장이 전하라고 했다면서, 덧붙여 지금 많이 바쁘셔서 직접 데려가진 못하시는데 거리가 회사에서 아주 가까우니 혼자서도 갈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소규모 회사라 기숙사에 빈 방이 여럿 있는 모양이었다. 나중에 뵙자는 과장이 시키지도 않았을 인사까지 덤으로 얹은 경리가 사무실로 돌아간 뒤에야 나는 메모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메모지에 적힌 것은 어느 곳의 주소와 전화번호였다. 그 주소 뒤에는 볼펜글씨로 ‘우리 회사 기숙사’라고 삐뚤빼뚤하게 적혀 있었다. 글씨체도 글씨체지만 ‘기숙사’ 앞에 굳이 써넣은 듯 보이는 ‘우리 회사’라는 단어가 방금 전 과장에 대해 느낀 선한 이미지와 이상하게 어울려서 나도 모를 웃음이 나왔다. 경리가 한 마지막 말에 귀가 당겨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그곳을 빠져 나왔다.

    회사를 나와 다시 보니 메모지 안의 주소는 ‘산(山) 5-2’ 라는 번지수로 끝나고 있었다. 출근할지 말지도 확실히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기숙사가 있다는 그곳으로 일단 가보기로 했다. 사실 삼촌의 집에 그대로 사는 것이 요즘 부쩍 부담스러워지고 있었다. 삼촌의 알다가도 모를 불퉁한 성격도 이유가 됐지만, 그가 가끔씩 아버지와 새엄마에게 전화해서 하는 말들도 내겐 부담이었다. 아버지가 나의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과정과 이유가 어찌됐든 내 얘기가 다른 이의 입을 통해 다른 이에게 전해지고 그 이야기를 옮겼다는 사실 자체가 어떤 방식으로든 내 귀에까지 들려온다는 것은 피곤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물론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작은 회사, 그것도 공장에서 운영하는 기숙사라는 곳이 일반적으로 여관 깔세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찌됐든 기숙사라는 곳을 한 번 보고 결정을 내릴 생각이었다.



    기숙사는 정말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오래 기다려 버스를 타고 온 것이 후회됐다. 곧 헐리기 직전으로 보이는 달동네의 바로 아래 있는 기숙사는 짐작한 것보다 훨씬 허름했다. 삼 층짜리 회색 건물로 제대로 닦지도 않았는지 유리창이 더러워 보였고 군데군데 거미줄마저 쳐 있었다. 관리도 제대로 안하는 모양이었다. 건물 정면에서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메모지를 힘주어 구겨버렸다. 그러나 이미 메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한 상태였기 때문에 정말 이대로 돌아갈 것인지를 잠시 망설였다. 이내 건물에서 남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잠이 덜 깬 얼굴의 그는 서른 살쯤으로 보였다. 나를 보자마자 내 이름부터 물으며 자신의 눈곱 낀 눈을 비벼댔다. 자신은 야간조라 저녁 아홉시나 되어야 출근을 한다는, 특별히 캐묻지도 않은 말까지 해주었다. 지금 사원이 백칠십 명쯤 되는 데, 예전 기숙사가 없을 때는 달동네에 방을 구해 살았고 지금도 거기 사는 사람들이 사원들 중 과반수라고 했다. 프로야구 시즌이 끝났어도 요즘은 수출품 물량이 많아 주야 풀가동으로 운영되고 있다며 사람들이 이런 일을 기피하기 때문에 들어오는 사람보다 나가는 사람이 더 많다고도 말했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저녁 빛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정류장으로 가려면 도로변 옆으로 폐교된 학교 건물을 지나쳐야 했다. 내가 짐짓 가던 걸음을 멈췄다. 도로변까지 아이들의 왁자한 웃음소리와 환호성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도로변을 지나는 몇몇 사람들도 폐교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가 지나치고 있었다. 교성이나 들릴 법한 어둡고 칙칙해 보이는 동네에서 어울리지 않는 경쾌함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상하게 여길 일은 아니었다. 길가에 빙 둘러쳐진 폐교의 담장을 따라 나는 다시 걸었다. 가장 가까운 버스정류장은 폐교의 교문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삼 분쯤 걸어가야 했다. 환호성이 다시 들려와서 나는 교문 안쪽을 힐끔 봤다. 여기저기 잡초가 돋아난 운동장 한쪽 구석에 열두서 명쯤 되는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초등학생 저학년 또래의 아이들이었다. 그중 키가 작은 한 아이가 자기의 키보다 조금 더 작은 막대기를 들고 한곳을 어설프게 노려보며 서 있었다. 그런데 내 눈에 확실히 각인된 이는 반대쪽에서 공을 던지는 남자였다. 나이가 족히 마흔은 넘어 보였다. 어른은 무리 중에서 그가 유일한듯했다. 표정은 다른 어린 아이들 못지않게 천진난만했다. 잠시 후, 타석에 있던 아이가 들고 있던 막대기를 내동댕이치며 억울해했다. 그런 아이와 반대로 남자는 허공으로 펄쩍펄쩍 뛰어오르면서 마치 인디언처럼 와와와, 탄성을 내질렀다. 남자와 같은 편으로 보이는 아이들 또한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다녔다. 아이들도 남자에 대해서만큼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그들의 부자연스런 조합이 너무 자연스럽게 어울려보여서,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 나는 교문 쪽으로 몇 걸음 다가섰다. 아이들은 다른 여느 또래의 아이들처럼 정구공이나 테니스공을 쓰지 않고, 진짜 야구공을 사용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아이들과 남자가 내 존재를 알게 된 건 내게로 한 아이가 친 공이 날아오면서부터였다. 아이의 막대기에 공이 맞고 직선으로 뻗어 나올 때 나는 즉시 그것이 바로 나에게 전속력으로 날아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피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정면으로 날아드는 공에 나는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할 정도로 놀랐다. 마구 소리 지르던 아이들의 소란도 땅으로 꺼진 듯 잦아들었다.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다행이었다. 나는 부끄러움과 안도를 동시에 느꼈다. 몇 발짝 뒤에 떨어진 공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공을 집어 들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마치 내 처분을 기다리는 것처럼 아이들과 남자가 숨을 죽이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손에 쥔 공을 한동안 멍하니 들여다봤다. 공의 상표는 아까 사무실에서 본 것과 같았다. 야구공은 분명했는데 모양이 한쪽으로 약간은 납작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방금 전 내 앞으로 떨어졌던 공의 모습을 떠올렸다. 원바운드로 떨어졌다가 솟아오른 공은 내 몸으로 튀지 않고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방향을 틀어 크게 몇 번 튕기면서 굴러갔었다. 지금 공의 모양새를 보니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갔다. 그 공은 그러니까 아까 낮에 과장이 말했던 이른바 짱구공, 즉 불량품이었다. 아이들의 웃음과 환호성이 다시 터진 것을 확인한 건 내가 던진 공이 포수를 보는 아이의 손으로 날아간 다음이었다. 고맙다는 뜻으로 남자가 나에게 팔 동작을 크게 해서 손을 흔들자 아이들도 나를 향해 휘파람을 불어댔다. 나는 겸연쩍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철봉 앞에 있는 잔디밭에 가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야구 시합은 계속 되었고 뒤로도 나는 내 근처로 날아온 야구공을 열서너 번쯤 더 주워서 전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던져주었다. 그들은 벌써부터 내 행동을 전혀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가던 길까지 잊은 채로 나는 그들의 경기를 관전하는 하나뿐인 관중이자, 유일한 볼보이가 된 셈이었다.

    어느새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아이들은 남자 주위로 모여들더니 한꺼번에 와아아, 소리를 내면서 교문 밖으로 썰물처럼 밀려나갔다. 옷에 묻은 흙을 털며 나도 교문을 빠져 나왔다.

    한데 어울려 있는 그들의 검은 그림자가 도로를 길게 휘젓고 지나갔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도로 건너편을 걸어가던 남자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아이들은 그 모습에 아랑 곳 없이 조금 앞서 걸어갔다. 남자와 나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약속이나 한 듯 마주섰다. 나를 향한 남자의 웃음을 발견하고 잠시 멈칫했다. 그가 내게로 손을 흔들었다. 나도 엉거주춤 손을 들었다. 그의 그림자가 도로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나는 갑자기 머리가 아파 와서 이마에 손을 얹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가 아이들 틈으로 다시 들어간 뒤였다. 하늘에 둥근 달이 떠올라 있었다. 오랜만에 달을 본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순전히 나의 착각이었다. 생각 속의 달은 그리 아득하지 않았다. 며칠 전에도 밤거리에서 달을 본 기억이 났다.

    그러나 지금의 달은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애매하게 이지러져 있었다. 아이들과 남자가 같이 몰려간 곳은 달동네 방향이었다. 나는 한동안 마치 밀교(密敎)의 교묘한 사술(邪術)에 걸린 이처럼 그들을 붙좇으며 시선과 걸음을 자꾸만 옮겨갔다. 달이 자꾸만 나를, 아니 사실은 그들을 따라가는 것 같았다. 덕분에 나는 버스정류장에서는 조금씩 멀어졌다. 벼랑 끝에 처한 오래된 서양의 수도원처럼, 아니 크고 작은 이러저러한 장난감들을 어울리지 않게 다닥다닥 붙여가며 빙빙 둘러놓은 것처럼 달동네는 서 있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왁자지껄 소란을 피우면서 그 옆의 구불거리는 길을 통해 동네로 오르고 있었다. 그 위의 달은 내 눈에 기괴할 정도로 크게 보였다. 나는 두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봤다. 그리고 마치 내 몸속에서 누군가 다른 이가 있어 시킨 것처럼 무심코 한 팔을 달을 향해 뻗었다. 손바닥 하나에 달은 다 가려지지가 않았다. 나의 입이 달을 향해 한껏 벌어졌다. 마치 무슨 설화 속의 풍경 같이 달은 동네를 교교히 비추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어느덧 달동네의 입구가 무너질 듯 내 앞에 도착해 있었다. 아이들과 남자의 흔적은 없었다. 대신에 달동네 입구에는 붉은 글씨로 휘갈긴 크고 작은 팻말과 플랜카드가 무슨 성대한 피로연 뒤의 장식물처럼 여기저기 꽂혀 있었다. 무릎을 움츠렸다 펴며 길게 심호흡을 했다. 다시 이마를 짚었다. 현기증이 났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목이 말랐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잔상처럼 살아 귀에 울렸다. 손에 일그러진 야구공의 촉감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커다란 달 아래 그 동네는 놓여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착각이라고, 내내 중얼거렸다.



    5



    삼촌은 내가 집을 떠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더군다나 아직 제대로 다녀본 적도 없는 회사 때문에 무작정 짐을 꾸려가지고, 회사에서 해준다는 기숙사 시설도 아닌, 철거민들이 우글거리는 달동네로 사글세를 얻어 들어간다는 말에는 못마땅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삼촌의 배배꼬인 말과 배배꼬인 말들보다 더 배배꼬인 것 같은 그의 침묵을 참아가며 반나절 동안 내 짐을 모조리 쌌다. 집안을 발칵 뒤집긴 했으나 대부분을 폐품으로 팔아버리고 남겨 둔 이백여 권의 책을 제외하곤, 계절 별 옷상자가 넷, 잡동사니를 넣은 큰 가방 두 개에 불과해서 한 사람의 이삿짐 치고는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었다. 삼촌은 자기 차로 이사 가는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별로 내키진 않았지만 승낙했다.

    그러나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 생겼다. 달동네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걸 갑자기 깨달았다. 동네의 경사가 너무 가팔라서 짐이 없는 차도 올라가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내가 잊고 있었던 거였다. 더군다나 새로 얻은 방은 그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불과 몇 미터 아래인 급경사 지역이었다.

    자동차는 몇 번이나 경사면에서 헛바퀴 질을 하다가 내려왔다. 삼촌도 내심 당황한 기색이었다. 삼촌에게 일단 짐을 내리겠다고 했다. 짐은 땅바닥에 그냥 내려졌다. 생각 끝에 나는 삼촌에게 이제 돌아가 보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한동안 실랑이를 했으나 그는 곧 내 생각에 따랐다. 자기 차에서 시동을 걸려던 그가 짐을 내려다보고 있는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내 내밀었다. 나는 두 말 없이 받았다. 그의 차가 이내 입구를 빠져나갔다.

    삼촌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 나는 동네를 지나는 노인에게 리어카를 대여할 수 있는 곳이 있느냐고 물었다. 예순에 가까워 보이는 그 노인은 약간은 무심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내 말에 아무런 표정 없이 길에 쌓아둔 짐을 보던 그는 달동네 위쪽인 자신의 집에 갔다 온다고 하더니, 조금 후에 허름한 리어카를 한 대 끌고 나타났다.

    나는 뼈가 앙상해 보이는 노인의 득달같은 재촉에 따라 리어카에 짐을 모조리 실었다. 노인은 리어카를 앞에서 끌었고 나는 뒤에서 밀었다. 보기보다 노인은 힘이 좋았다. 절반 정도 되는 거리를 순식간에 올라갔다. 중간 지점에서 잠시 쉬기로 하고 바로 앞의 가게로 달려갔다 왔다. 나무 등걸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사온 캔 음료수를 내밀었다. 음료수를 마시며 노인은 내게 왜 하필 이곳으로 이사를 오느냐고 물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노인은 길옆 어느 집의 금이 길게 가있는 벽에 둘러치듯 걸려 있는 붉은색 현수막을 가리키며, 곧 여기를 떠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여기가 좋은 곳이란 생각이 든다고 말해주었다. 노인은 한동안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곧 그 시선을 하늘로 향하면서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노인은 이곳을 떠날 때도 자기에게 부탁을 해달라고 말했다. 삼촌에게 받은 지폐를 세어 미리 노인에게 내밀었다.



    그나마 창문이라도 있는 게 다행인 방이었다. 삼촌의 집에서 지냈던 방보다, 시골에서의 내 방보다 훨씬 좁았다.

    가방에서 필수품만 꺼내어 제자리에 두고 책은 이삼십 권씩 줄에 묶여진 상태 그대로 한쪽 벽면에 쌓아두었다. 다행히 전에 살던 사람이 쓰던 옷장이 있어서 겨울옷상자에 담긴 옷은 풀어서 걸었고 나머지 상자는 한 줄로 쌓아 다른 구석으로 밀쳐두었다. 대충 그렇게 해놓고 보니, 정리가 거의 끝난 셈이 되었다. 아침에 삼촌 집을 나와 아직 정오였다. 배가 좀 고팠지만 며칠간 이사에 신경을 쓰던 것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졸음이 몰려왔다. 베개를 아직 사지 못했으므로 묶인 책을 몇 권 풀어내 대신 베고 누웠다. 그대로 깊은 잠이 들었다.

    잠이 깬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너무 오래 잔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벌써 일곱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오래된 먼지로 뿌옇게 흐려진 창문이라 자세히 봐도 밖이 낮인지 밤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일어나 기름보일러의 가동버튼을 눌렀다. 그을음소리가 좀 심했다. 그 소리에 쓴웃음이 났지만 갑자기 밀려드는 배고픔 때문에 잦아들었다. 지갑을 챙겨들고 집밖으로 나갔다. 집 옆의 벼랑 같은 길을 돌아 밑으로 내려가는 큰길로 나올 때까지도 나는 잠에서 덜 깬 두 눈을 비비적거렸다. 날이 많이 어두워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로등도 하나 없는 길이 어찌된 셈인지 앞이 터져보이도록 훤히 밝았다. 나는 그게 주위의 집들에서 새나오는 불빛 때문일 거라고 단순히 생각했다. 식료품가게는 근방에 있었다. 과자와 라면, 세제 따위를 샀다. 봉투에 담아 들고 올라오는 길은 숨찼다. 길이 밝아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저녁하늘을 올려다본 나는 놀라서 하마터면 아랫길로 굴러 떨어질 뻔했다.

    내가 본 것은 달이었다. 또 달이었다. 입이 크게 벌어졌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길가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바로 내 머리 위에 엄청나게 커다란 달이 도착해 있었다. 이번엔 초승달이었다. 웅장한 크기의 경기장에 매달려 있는 물고기 모양의 애드벌룬처럼 거대한 초승달이었다. 시선을 조금만 위로 하면 바로 보이는 곳에 그것은 있었다. 아니, 풍선이나 열기구 따위라기 보단 차라리 비행선이라고 생각해야 맞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정말 비행선처럼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내 귀도 의심을 했다. 윙윙. 위잉위잉위잉. 위이잉위이잉. 내 귓속으로 마치 이명처럼 괴상한 금속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그건 분명 달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마침 위쪽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있어 나는 그 사람을 불렀다. 그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다가왔다. 부른 이가 자신보다 어려 보이자 약간은 마땅치 않은 기분이 된듯했다. 오십 대로 보이는 남자였다. 어쨌든 그는 나를 일으키며 괜찮으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떨리는 손가락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그리고 저기, 저기하면서 말을 더듬거렸다.

    저기 뭐? 달 말이오? 달이 뭐 어쨌다는 거요? 젊은 사람이 실성을 했나?

    나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의 면전에다 고함이라도 치듯이 말했다. 달이 엄청 커요! 남자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혀를 차면서 말했다.

    아, 오늘 처음 여기 이사 오셨군 그래…… 여긴 원래 달이 굉장히 크게 보인다오. 하늘과 너무 가까워 그런 거지. 이상할 거 하나 없네.

    금세 말을 내린 그는 마치 철없는 어린 동생이라도 다독이듯 내 어깨를 몇 번 톡톡, 치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 자리를 떠났다. 이젠 신기하기보다는 당혹스러웠다. 헛웃음이 났다. 달은 굉장히 밝아서 그 동네를 온통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우두커니 한동안 달을 봤다. 겨우 다물었던 내 입이 다시금 저절로 벌어졌다. 불현듯 일주일 전의 그 일을 떠올렸다. 남자와 아이들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듯했다. 정말, 사실일까. 나는 혼자 읊조렸다. 일주일 전의 그 일이 그럼 전혀 환각이 아니었던 셈이었다.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한 손을 펴서 달을 가렸다. 모자랐다. 허파에 바람이라도 든 것처럼 또 헛웃음이 났다. 아무래도 손이 두 개가 필요할 듯했다. 쫙 편 두 손바닥을 붙여서 달을 가렸다. 그러나 역시 모자랐다. 길게 뻗은 팔을 조금 내 눈 쪽으로 당겼다. 달은 겨우 가려졌다. 붙은 손가락 틈 사이로 달빛이 비집고나와 눈을 환하게 찔렀다. 빤히 보고 있어도 나는 도무지 알딸딸해서 믿을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한참 동안이나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날 이후, 나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두 눈이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으면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건 분명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어느 누구도 내 속을 알 리 없었다.



    전화를 닷새 전에 미리 한 상태였지만, 과장은 출근한 나를 보자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물론 그가 나만을 특별히 대우하는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야구공 제작 라인에는 작업을 능률적으로 하게 할 만 한 기계는 공정마다 제품을 실어 보내는 각 작업대 앞의 컨베이어뿐이었다. 정말 모든 작업은 전부 손으로 이루어졌다. A에서 D라인까지 각각 스무 명씩 배정이 됐는데, 열 개가 넘는 세분화 공정으로 각 공정 당 두세 명씩 사람이 정해져 있었다. 세 번에 걸친 각기 다른 굵기의 양모 감는 공정이 끝나면 야구공의 표면에 하얀색 소가죽 재질을 대고 붉은 면실로 꿰매는 작업이 이루어지는데 그런 일은 네다섯 명의 다소 많은 수의 여자들이 맡고 있었다. 물론 여자들이 남자들에 비해 손이 섬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여자들은 그 일을 백팔 번뇌 혹은, 백팔 고뇌라 부르고 있었다. 붉은 면실로 땀을 만드는 일은 백여덟 번의 바느질을 필요로 했다.

    이 주야교대로 한 달에 두 번, 이 주에 한 번꼴로 야간 팀과 주간 팀이 교대를 해야 했다. 나는 B라인에 배정되었다. 가죽을 꿰맨 후에 생기는 쭈글쭈글해진 표면을 인두로 지져서 평평하게 펴는 공정이었다. 내가 직업학교에서 납땜을 배운 것이 도움이 될 거라며 과장은 헤헤, 웃었다. 과장의 말에는 선뜻 동의할 수 없었지만 나도 조금은 웃어주었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라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내 또래의 남자나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대부분이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었다. 아주머니들은 내 나이를 묻더니 ‘영계가 다 떴네.’ 하며 자기들끼리 낄낄거렸다. 크게 우습거나, 기분 나쁘게 들리지는 않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인사를 간 곳은 완제품의 포장 작업을 하는 그 라인의 끝이었다. 두 명의 남자가 일을 맡고 있었는데, 둘 다 사십 대로 보이는 인상이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자마자 나는 그 중 한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는 하마터면 그날처럼 손을 흔들 뻔했다. 그러나 나의 미소 띤 시선에 남자는 시종 무표정이었다.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조금 무안해졌다. 첫 날이라 크게 한 눈을 팔 순 없었지만, 자리에 앉아 내내 그를 힐끔거렸다. 그도 내 시선을 느낀 듯했지만 결국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그는 다른 사원들과 달리 한참 떨어진 자리에서 밥을 먹었다. 다른 이들이 그렇게 따돌린 것이 아니라, 그가 처음부터 그랬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말이 거의 없고, 웃는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일주일 전의 그의 웃음이 내 머릿속에서는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와 내가 서로간의 무슨 비밀스런 언약이라도 맺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많이 생각할 필요 없었다. 나는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로 혼자 결심했다.

    수저로 밥을 떠 넣으면서 나는 그를 계속 바라봤다. 작업복 때문인지 그날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머리카락이 과장보다 더 심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포장 작업이라 그런지 다른 이들보다 옷에 때와 먼지가 많이 묻어 있었다. 퇴근 시간에도 그는 회사에서 마련해준 통근 버스를 타지 않고 십 분쯤 걸리는 달동네까지 걸어서 갔다. 그는 내가 사는 동네에 살고 있었다.



    그믐을 제외한, 거의 매일 밤을 뭔가에 이끌린 듯 달을 보러나갔다. 퇴근 후, 야식을 먹고 책을 한 시간 정도 읽다 보면 희뿌연 창밖이 약간은 환해진 것 같이 보이는 때가 있었다. 나가보면 어김없이 달이었다. 커다란 달은 한두 시간쯤 달동네를 환하게 비추다가 산을 넘어 다른 곳으로 가버리곤 했다. 보름이면 달은 어딘지 이지러져 보였다. 잠들기 전에 두어 시간은 반드시 동네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달을 따라갔다.

    그렇게 혼자서 달동네의 밤길을 오르고 내리다 보면, 혼자 지내는 외로움 따윈 어렵지 않게 떨쳐졌다. 나는 한 번도 삼촌이나 공장에서 친해진 사람에게 따로 전화를 걸거나 만나자고 제안한 적이 없었다. 가끔은 삼촌이 열 몇 권씩 소포로 책을 보내주었다. 그것에 대해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난 내가 괴팍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철저히 혼자여야 했고, 이미 혼자였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그래야만 한다고 여겼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형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들에게 아무 것도 원하는 게 없었는데, 그들은 나를 떠났고, 멸시했고, 죽어버렸다.

    가끔은 형이 미치도록 생각날 때가 있었다. 형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예전 사진을 봐도 나와 관계가 없는 타인처럼 보이곤 했다. 형이 군 복귀를 위해 떠나던 날과 형이 죽었던 날의 기억은 절대로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하얀 천에 덮인 것이 형의 시신이란 것을 나는 인정해야 했었다. 그리고 스무 살, 인정할 수 없는데 인정해야 할 것은 자꾸만 많아졌다. 앞으로 더 많아질 거라는 걸 나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사람들과 만나고 부딪히고 싸우고 깨지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화해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걸, 세상이 무너져 있고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조금씩 인지해가면서 살고 있었다. 그게 늘 좋은 건 아니었다. 어떤 부당한 일에 짜증이 나서, 화가 나서, 밥도 안 먹고, 방 안에서 전전긍긍하고, 심하면 베개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짤 때도 있었다. 그러다 좀 기분이 나아져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그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견딜만해지면 밥도 먹고 책도 읽었다. 책을 읽으면 세상 견딜 수 없는 것들은 온전히 사라지고, 견뎌지고 견뎌야 하는 것들만 오롯이 가슴속에 남아 있곤 했다. 나는 혼자 견딜 수 있을 만큼은 견디고 있었다.

    책이 많이 쌓이면 그 중 다시 읽을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을 버렸다. 그런 일은 처음 이삿짐을 날라 준 노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겨울의 달빛 아래서 그렇게, 나의 스무 살이 지나고 스물한 살이 시작되고 있었다.



    일 년이 넘는 시간을 야구공 제조공장에서 보내면서 내가 남자에 대해 알아낸 것은 그의 석씨(昔氏)성과 이름, 아내와 내 또래의 딸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전부터 알고 있던 그의 어딘지 범상치 않아 보이는 행동들이 전부였다. 말을 나눈 적은 거의 없었다. 워낙 속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보니 내가 아는 그것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닐까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이른 봄의 그 사건이 터지기 전까진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 날 오전, 웬 낯선 여자 하나가 회사로 들이닥쳤다. 사십 대 중년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몸은 비만으로 살이 올라 있었고 얼굴은 마치 연극배우가 도드라진 주름살을 일부러 표현하기 위해 진하게 분장한 것처럼 험상궂었다. 사무실도 거치지 않고 라인작업장으로 그대로 밀고 들어온 여자는 뭐 맡겨 놓은 것을 찾기라도 하는 양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한참을 그렇게 서성거리며 작업장 안을 휘젓고 다니던 여자의 눈이 멈춘 곳은 바로 라인 끝의 포장 작업대가 있는 곳이었다. 여자는 한달음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의아했지만 아랑곳없이 일에 열중하던 라인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이유는 여자의 다음 행동 때문이었다. 여자는 남자 앞에 싸늘한 시선으로 서더니 다짜고짜 그의 얼굴에 주먹을 안겼다. 퍽, 하고 소리가 나고 남자가 제자리에서 비틀거렸다. 옆의 다른 아저씨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여자는 곧이어 그 남자의 머리채를 잡아당겨 작업장 한복판으로 끌고 갔다. 남자는 비명도 제대로 못 지르고 그대로 끌려갔다. 모두 다 갑자기 벌어진 폭력사태와 여자의 완력에 놀라서 어안이 벙벙해져 있었다.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여자는 남자에게 계속해서 주먹세례를 안기면서 울부짖기 시작했다. 라인의 사람들이 작업을 멈추고 한꺼번에 그곳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물론 나도 그 틈에 끼여 있었다. 웬일인지 남자는 저항을 거의 안하고 있었다. 남자의 코가 깨져 피가 흘렀고 한쪽 눈은 찢어졌다. 여자의 울음에 뒤섞인 말들은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인간, 통장, 월급, 자식, 거지, 야구, 멍청한, 돈 따위의 단어들만 파편적으로 내 귓전에 울려왔다. 다음은 거의 사네 못사네 하는 곡소리였다. 여자의 울음은 서러워 보이기보단 우스웠다.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 중에도 아예 대놓고 피식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같이 일하던 아저씨와 아주머니 몇이 한참이 지나서야 싸움을 말리고 두 사람을 떼어놨다. 사무실에서 과장을 포함해 몇 사람이 나타났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여자는 아직 분이 덜 풀렸던지 남자에게 고래고래 욕을 하면서 사무실 직원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남자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하던 일을 계속 했다. 피가 터진 남자의 코에는 경리 직원이 준 흰 휴지가 엉성하게 말려 박혀 있었고, 얻어맞은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눈은 붉은 물감이 번지듯 충혈이 된 상태였다. 사람들의 쑥덕거리는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인두질을 다시 하면서 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내가 그를 밖에서 다시금 본 것은, 사건 이후 일주일 정도가 지난 뒤인 어느 일요일의 저물녘이었다. 그날은 집에 떨어진 필수품이 많아 일부러 시간을 내어 대형할인마트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리고 그때처럼 폐교근처를 지나는 중이었다. 삼월 말이라 봄기운은 이제 완연했지만 폐교 담장의 넝쿨은 아직 잎조차 제대로 못 틔우고 있었다. 재개발이 한창이라 달동네를 뺀 주위는 온통 포크레인과 트럭 소리로 요란했다. 소음들 때문에 나는 폐교 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못 듣고 지나칠 뻔했다.

    봄이긴 해도 저녁이면 아직 겨울의 쌀쌀한 기운이 남아 있었으므로 나는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소음들 사이로 아이들의 환호성이 들려온 것은 내가 횡단보도를 건너 달동네로 통하는 도로변을 걸어갈 때였다. 갑자기 들려오는 높은 웃음소리와 환호성에 나는 발을 멈추고 이미 지나온 폐교 쪽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뭐에 자연스럽게 이끌린 것처럼 길을 건너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저녁의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내 얼굴을 치고 달아났다. 폐교는 담장의 그림자 탓인지 바깥보다 조금 더 어두워 보였다. 한 아이가 운동장에 마름모형으로 길게 그어진 흰줄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또 야구 시합이었다. 사각형의 귀퉁이마다 루베이스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아이들의 복장이 말쑥해졌다는 것도 알아챘다. 어디서 구했는지 아이들은 모두 야구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한 편은 온통 파랗고, 한편은 온통 하얀 아이들의 유니폼이 이른 저녁빛에 반짝거렸다. 공격 쪽 아이들의 손에는 알루미늄으로 된 야구 배트가 하나씩 쥐어져 있었고 수비 쪽 아이들도 야구 모자를 쓴 채 글러브를 끼고 있었다. 수비를 보는 하얀 유니폼 입은 아이들은 한꺼번에 약속이나 한 듯 땅바닥을 보며 풀이 죽어 있었다. 공격 쪽의 아이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러 운동장이 곧 떠나갈 듯했다. 그리고 그 아이들 사이에서 기괴한 함성을 지르며 허공으로 연신 뛰어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파란 유니폼의 그는 석씨, 바로 그 남자였다.

    아이 하나가 나를 발견하고 소리와 더불어 손가락질을 하자 다른 아이들과 남자가 일제히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는 왠지 조금 어색해져서 손을 엉거주춤 흔들었다. 나는 예전의 앉았던 철봉 앞에 가서 다시 앉으면서 시장 본 봉투는 아래로 던지듯 밀쳐두었다.

    남자는 한동안 나를 쳐다보더니 그대로 시합을 계속했다. 잠시 관전을 한 나는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를 더 발견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남자에게 반말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건 마치 친구나 동생을 대하는 투였다.

    남자가 속한 아이들이 시합을 주도하는 것 같았다. 연속으로 안타가 터졌다. 그리고 마침내 어떤 아이가 받아친 공이 학교 담장을 넘어가자 수비 쪽 아이들의 얼굴은 망연자실해졌다. 한 쪽의 함성만 자꾸 높아졌다.

    내 앞으로 그때처럼 또다시 공이 굴러온 것은 파란 유니폼 입은 아이들의 공격이 좀처럼 끝나지 않을 때였다. 나는 공을 잡았다. 촉감이 예전과 많이 달랐다. 짱구공이 아니었다.

    나는 별 망설임 없이 홈을 향해 공을 던졌다. 와아, 하는 수비 쪽 아이들의 함성과 함께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포수의 글러브 속에 그대로 박혔다. 3루를 돌아 들어오던 아이가 포수 아이의 재빠른 동작에 걸려 아웃이 되었다. 그러나 당혹스러운 일은 다음에 일어났다. 누구도 먼저 나서서 아웃을 선언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끼어들자 수비를 보는 아이들이나 공격을 하는 아이들 모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 운동장에 돌연 침묵이 흐르는 것을 감지한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팽팽한 긴장과 침묵을 깨뜨린 것은 남자였다. 그가 내 앞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적잖게 당황했다. 짧은 시간동안 그와 시선이 여러 번 부딪혔다. 눈길을 먼저 피하는 건 나였다. 발걸음을 멈춘 남자는 내 얼굴을 굳은 표정으로 뚫어져라 봤다. 나도 그를 멍하니 쳐다봤다. 얼마 전의 상처로 눈에는 거무스름한 딱지가 앉아 있었고 볼에는 맞아서 생긴 붓기가 아직은 덜 빠져 있었다.

    그의 손에는 야구공이 들려 있었다. 갑자기 그가 독수리가 병아리를 덮치듯 와락 내 손과 어깨를 잡더니 마구 흔들었다. 잠시 뒤, 서로의 몸이 떨어졌을 때는 내 손에 무언가가 쥐어져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야구공이었다. 다시 마주본 그의 얼굴은 조금 전의 굳은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환해져있었다. 나도 얼떨결에 따라 웃었다. 남자가 아이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아웃! 수비 쪽 아이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시합이 끝나자 남자와 아이들은 일제히 유니폼을 벗었다. 남자는 스무 개가 넘는 알루미늄 야구 배트와 스무 개가 넘는 글러브를 챙겨서 준비해 둔 열 개의 가방에 차근차근 챙겨 넣었다. 배트와 글러브에는 아이들의 이름이 각각 적혀 있었다. 루베이스도 모조리 가져왔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폐교 운동장 귀퉁이에 있는 오래된 창고 안에 모조리 숨기듯 밀어 넣었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남자가 며칠 전에 모든 용품들을 구입해가지고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자의 아내가 며칠 전 행패를 부리면서 마구 내뱉은 말들이 머릿속에 고스란히 떠올랐다. 나는 시장 본 봉투를 챙겨가지고 교문을 빠져나가는 그들의 뒤를 따랐다.

    나와 아이들이 줄줄이 걸어가면서 만든 검은 그림자의 행렬이 도로를 가로질렀다. 남자는 이번엔 행렬에 끼여 있지 않았다. 남자는 뒤에 한참이나 쳐져 따르고 있었다. 나는 발길을 멈추고 내 뒤를 돌아봤다. 남자의 몸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그의 그림자가 보였다. 기이하게 길쭉해진 그림자였다. 그러나 그것은 마르고 초라해 보였다. 무심코 나는 그에게 빨리 좀 오라고 소리 지르고 싶어졌다. 밤이 되자 포크레인이나 덤프트럭 소리도 멎어 있었다. 밤만 그대로 깊어갔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달은 아주 가까이 있었다. 커다란 달이 따르는 곳은 왠지 더 어두워 보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스물두 살이 멀지 않은 겨울이었다. 일도 이제 완전히 손에 익었고 적지 않게 돈도 모았다. 돌아오는 봄부터 그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군대를 먼저 갔다 온 후엔 장사를 할까 생각 중이었다. 무슨 장사를 어찌할지는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 끝에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어차피 그 일은 군대를 다녀온 다음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일이었다. 일단 나는 대학 입학시험을 보기로 결정했다. 시험은 11월에 있었고 대학의 원서접수는 12월 중반부터였다.

    원서 접수가 시작된 날은 새벽부터 눈이 많이 내렸다. 회사에는 전 날 월차를 냈다. 마음에 드는 대학 두 곳과 안전하게 합격할 만한 대학 두 곳에 원서를 내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이미 날이 많이 어두워져 있었다. 눈발은 좀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그칠 기미가 안보였다. 동네로 올라오는 입구의 팻말과 플랜카드는 오래되어 얼어붙은 땅에 마치 누군가에 의해 잡아 뽑혔던 것같이 헐겁게 박혀있었다. 내년에는 이곳도 완전히 재개발에 들어갈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때문에 회사 직원 중에 몇몇은 벌써 다른 곳으로 이사 간 사람도 있었다. 진학이 되면 나도 내년쯤엔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짓이기고 지나간 눈으로 오르막길은 아예 빙판이 되어있었다. 몇 번이나 몸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릴 뻔했다. 나는 엉거주춤하며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중간쯤 올라와 나는 늘 그렇듯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갓길로 난 곳 맨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집을 바라봤다. 석씨의 집이었다. 조금 친해졌지만 한 번도 그 집에 가본 적은 없었다. 근처만 오면 이상하게 신경이 쓰여 한동안 서성이다 집으로 올라가곤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호주머니에서 껌을 꺼내 씹었다. 씹는 내내 입안에서 찬 입김이 새어 나왔다. 머리위에서 눈이 녹은 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점퍼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은 채, 다른 손으로 머리를 쓸어내렸다. 손이 시렸다.

    바로 그때였다. 나는 별안간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하필이면 어두울 때 듣는 거라 기분이 더 그랬다. 소리가 나는 쪽은 바로 석씨, 그의 집 근처였다.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음성이 귀에 익었다. 설마, 하는 느낌으로 소리가 나는 담벼락 아래를 봤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석씨였다.

    남자는 담벼락 아래 혼자 웅크린 채 울고 있었다. 어깨를 심하게 들썩여서 거기에 쌓인 눈이 마치 한 줄기인양 잇따라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억지로 울음을 참느라 신음은 약간 기괴하게 들렸지만 그 남자의 목소리인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다가서는 기척을 느꼈는지 남자는 잠시 울음을 멈추고 눈을 들어 나를 봤다. 남자 뒤에 달이 있었으므로 나는 그 남자의 형체가 어느 정도는 보였지만 남자는 아닌 것 같았다. 남자의 시선이 똑바로 내 얼굴을 향하여 있지 않고 아득해 보였으므로 나는 그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남자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나 나를 확인하자마자 곧 다시 울기 시작했다. 가까이 가서보니 나도 조금 전에 미처 확인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남자의 얼굴이 방금 크게 얻어맞은 듯 퉁퉁 부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전, 봄의 것보다 상태가 더 심각해 보였다. 목 부위에 푸른 멍 자국이 명징했다. 나는 아연실색했다. 한숨을 쉬며 그 옆에 앉았다. 울면서도 그는 주춤주춤 옆으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를 웃음이 나왔지만 입술을 깨물어 참았다. 거친 바람이 불어왔다. 쥐어뜯긴 듯한 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그의 울음이 더 높아진 것 같았다. 나는 다시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물었다. 아저씨, 왜 울어……. 물론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남자는 숨을 헐떡이며 꺼이꺼이 울었다. 바람이 몸을 거세게 휘감아 내 귀까지도 나의 한숨이 들리지 않았다. 남자가 그냥 울게 내버려 두었다. 잠시 후, 그는 파묻히듯 내게 어깨를 기대왔다. 담벼락 앞에 내리비친 두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둘은 거의 겹쳐져 있었다. 그림자를 우두커니 내려다봤다. 갑자기 미열이라도 난 듯 이마가 뜨거워졌다.

    내 머리에 쌓였던 눈이 얼굴 아래로 툭툭 떨어졌다. 꼭 감은 두 눈에 눈이 눈물처럼 고였다.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의 울음소리가 잦아드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떴다. 앞의 두 그림자를 다시 내려다봤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 그림자들의 울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게, 하지만 분명하게 내뱉었다. 형.

    무슨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남자는 일어섰다. 나도 따라 일어났다. 남자는 자신의 집이 아닌 아랫길 쪽으로 터벌터벌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가게는 몇 미터 아래였다. 몇 걸음 걷다가 그는 돌아서서 나를 쳐다봤다. 그가 손을 흔들며 나더러 들어가라는 시늉을 했다. 어둠 속이라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곧 돌아온다는 표시 같았다. 하얀 눈발을 맞고 홀연히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산기슭에서 방금 나온 전설 속의 설인 같았다. 다시 몸을 돌려 그는 이내 어둠 속으로 총총 사라져버렸다. 어둑한 길을 오랫동안 응시하며 그를 기다렸다. 가게에서 술이라도 오래 자작하는지 많이 늦을 모양이었다. 나는 집을 향해 돌아섰다. 무거워진 머리를 의식하며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날 밤부터 나는 크게 앓았다. 신음 속에서 눈을 감으면 마치 꿈인 듯 물속인 듯 아득한 길이 자꾸만 떠올랐다. 몇십 년 전의 길인지, 몇달 전의 길인지, 아니면 어제나 오늘의 길인지…… 대낮의 길인지, 밤길인지. 그러나 분명 길이었다. 그래 그 길이었다. 터미널…… 약국…… 버스…… 그래, 분명했다. 버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내게 손짓을 했다. 누군가 서 있었다. 손에는 노란색 차표를 들고. 그런데 얼굴이 너무 낯설었다. 멍한 표정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도…… 자꾸만, 자꾸만 멀어졌다.

    새벽까지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집에서 종일토록 누워서 지내야 했다. 감기몸살이 심하게 난 것 같았다. 회사에도 겨우 전화를 걸었다. 추위가 뼛속까지 시리게 하는 듯했다. 보일러 온도를 자꾸만 높여야했다. 등에는 땀이 흥건했다. 오래된 보일러의 그을음 내는 소리가 귓속에 쟁쟁했다.



    이틀이나 더 쉬고 난 아침에도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통근버스를 타지 못했다. 결국 택시를 잡아탔다. 머리가 계속 아팠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택시기사의 모습조차 눈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사람의 윤곽만이 뚜렷할 뿐이었다. 달리는 택시 안에선 눈을 감고 있었다. 내릴 즈음엔 어느 정도 어지러움이 가시는 듯했다.

    작업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나는 놀란 눈으로 멈칫했다. 작업장 안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달라져 있었다. 얼굴이 그전과는 사뭇 달랐다. 모두 낯이 익긴 했지만, 그래도 황당한 일이었다. 또 현기증이 났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조금 전과 똑같았다. 뒤에서 작업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 그래요? 경리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어 그녀가 급한 걸음으로 휘청하는 내 어깨를 잡아 부축하는 것 같았다. 그녀를 돌아보면서 나는 까무러치듯 놀랐다. 미할요바. 나는 신음처럼 내뱉었다. 오래 전에 읽은 카렐 차페크 소설의 미할요바였다. 경리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한동안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더니 생각났다는 듯 내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아하, 요즘 새로 나온 영화가 있나보군요. 거기 주인공 이름이에요? 무슨 영화를 그렇게 많이 봐요? 그러니깐 이러시지……. 그녀는 까르르 웃으며 문을 닫고 사라졌다. 나는 바로 지금의 사태가 도무지 안 믿겨서 고개를 연신 가로저었다. 그리고 몸을 겨우 가누며 담당하고 있는 작업대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작업장 안을 전체적으로 둘러보며 나는 여러 번 놀란 눈을 감추지 못했다. 1공정에서 푸른 작업복의 본드라체크는 고무로 된 레드코어에 굵은 양모를 얼기설기 두르고 있었고, 2공정의 야니크는 몹시 언짢다는 표정으로 본드라체크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오합 양모 실을 요즘 새로이 들여온 기계에 자꾸만 밀어 넣고 있었다. 붉은 면실로 바느질에 열중하는 이들은 루브너, 리브카, 마르코, 히르쉬였다. 그들은 마치 부녀회에 모인 여자들처럼 왁자하게 수다를 떨면서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 먼지와 기름때가 선명한 푸른색의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작업하면서 나는 자꾸만 두 눈을 비볐다. 하마터면 인두로 손을 지질 뻔했다. 포장 작업 쪽에 있어야 할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메이즈리크 형사만이 혼자 그곳을 서성이며 완제품이 된 야구공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작업복에선 자꾸 이상한 냄새가 맡아졌다. 인두 때문에 생기는 고무 냄새가 아니었다. 이제 면역이 되긴 했지만 인두질한 냄새가 역하지도 않고 이렇게 좋을 리가 없었다. 무슨 향수 냄새 같았다. 분명히 어디선가 맡아본 냄새인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내 코를 의심해 연이어 킁킁거렸다.

    잠시 뒤,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뒤돌아본 나는 흠칫 놀랐다. 거기엔 기에르케가 서 있었다. 내가 뒤로 몇 걸음 물러서자 그가 당황하며 내 팔을 붙들었다. 다행히 그의 다음 말이 당혹해하는 나를 안심시켰다. 과장의 목소리였다.

    왜, 그래? 아직도 몸이 그래? 몸이 안 좋으면 연락하고 좀더 쉬지 그랬어. 어차피 얼마 뒤엔 학교에 다닌다면서…… 젊은 사람이 너무 고생이라 안쓰러웠는데…… 잘됐지. 그나저나 자꾸 사람이 빠져 나가서 큰일이야. 오늘도 다섯 사람이나 결근이네. 다른 사람은 다 전화라도 줬는데…… 석씨……?, 잘 알아? 자네랑은 그래도 얘기를 좀 하는 것 같던데. 오늘도 결근을 했네. 벌써 사흘째야. 좀 우직하긴 해도 결근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된 일인지…… 마누라한테 또 얻어맞아서 병원 신세라도 지고 있는 거 아닐까? 세상에 난, 그렇게 드세고 힘센 여자는 본 적이 없으니, 원…….

    기에르케, 아니 과장은 혀를 끌끌 차더니 작업장을 나갔다. 나는 이틀 전 밤에 봤던 남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눈도 제대로 털지도 않은 채 그는 아랫길로 휘적휘적 내려갔었다.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는 쫓아가 묻지도 않았었다. 물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거란 생각에서였다.

    작업이 끝나는 내내 내 시선은 그가 일하던 곳에 가있었다.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다. 한 달쯤 지나자 눈앞의 헛것들은 말끔히 사라졌다.

    남자는 뒤로도 회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무단결근이 한 달이 넘자 회사는 그를 퇴사 처리했다. 회사로서는 많이 봐준 셈이었다.

    조퇴를 하고 병원을 가던 어느 날, 나는 병원보다 먼저 남자의 집을 들렀다. 남자의 집에는 그의 아내만이 있었다. 머리를 제멋대로 헝클어뜨린 채 그녀는 마루에 걸레질을 하는 중이었다. 남자에 대해 묻자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걸레를 마당 쪽으로 집어 던졌다. 그리고 가슴을 쥐어 뜯어가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나는 도망치듯 그의 집을 나왔다. 뒤로도 몇 번을 다시 찾았지만, 그는 역시 집에 없었다. 나는 생각날 때마다 그날 밤을 크게 후회하곤 했다. 최소한 어디로 가는 지는 물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그를 본 마지막인 셈이었다.

    내가 아래로 내려가는 그를 오랫동안 바라봤듯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도 내게 그러지 않았을까. 그런 식의 후회는 때때로 내게 이상한 상상을 하도록 충동질하곤 했다.

    상상 속 퍼붓는 눈발 속에서 남자는 몇 번이고 나를 돌아보며 웃고 있었다. 뜻을 파악할 필요가 없는 해맑은 웃음이었다. 그런 상상이 지나치게 깊어질 때면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장소가 방이든 골목이든 회사든 간에 넋 나간 얼굴로 손을 번쩍 쳐들곤 했다. 입은 그럴 때마다 허공을 향해 벌어졌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막상 하려 들면 그 말들은 마치 조합이 엉성한 문장처럼 어눌하게 입안에서 맴돌다 사라져버리곤 했다. 그리고는 곧 다시 현실이었다.



    해를 넘기고 대학생이 되면서 나는 달동네를 떠났다. 회사는 사직했다.

    그 해, 여름방학 즈음에 나는 신문 기사를 통해 그곳의 철거 소식을 들었다. 갑자기 달동네가 생각났고, 달이 생각났고, 석씨성의 그 남자가 생각났다.

    버스를 타고 예전에 달동네가 있던 곳으로 갔다. 산이 깎여나간 자리엔 여러 개의 주택 건물이 호화로운 모습으로 들어서 있었다. 예전 동네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렇게 철저하게 사라질 수 있는지. 나는 거기에 다시 온 것을 후회했다. 혀를 차며 버스 정류장으로 가려던 나는 문득 또 한 곳을 생각해냈다. 나는 폐교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이차선 도로엔 예전과 달리 차가 많이 지나다녔다. 4차 선 도로로의 확장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라 주변은 번잡하기만 했다. 폐교에 다다르자 교문 옆 담장에 붉은색 스프레이로 마구 갈겨쓴, 낙서 같은 글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철거 예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예전보다 녹이 더 많이 슨 교문에는 전에 없던 굵은 쇠사슬마저 굳게 걸려 있었다. 잠시 앞에서 머뭇거렸지만, 결국은 폐교의 담장을 넘어서 운동장으로 들어갔다.

    운동장은 잡초가 예전보다 더 무성했다. 마음이 신산해졌다. 바로 앞의 창고는 눈에 익은 곳이었다.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잘 안 열리는 철문을 힘겹게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가 뿌옇게 올라와서 기침을 했다. 남자가 숨겨둔 가방들이 창고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중에 하나를 꺼내서 밖으로 들고 나왔다.

    가방 안에는 물건들이 그때 그대로 들어 있었다. 유니폼은 오랜 시간에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알루미늄 배트나 글러브는 거의 멀쩡했다. 야구공도 가방 구석에 박혀 있었다. 야구공을 눈앞까지 들어 올려서 쳐다봤다. 동그란 윤곽을 따라 눈동자를 굴려가며 나는 쓰게 웃었다.



    운동장 위에 달이 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허공을 향해 야구 배트를 계속 휘둘러댔다. 아동용이라 글러브는 아주 간신히 손에 들어갔다. 조금 손이 욱신거렸다. 벽에다 공을 힘껏 던져 글러브로 받아보기도 했다. 벽에 맞고 튕겨 나올 때 야구공 소리가 경쾌하게 귓전에 울려왔다.

    얼마쯤 흘러 나는 시계를 봤다. 이젠 그만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가방에 그 물건들은 다시 챙겨 넣었다.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옷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잠시 쉬고 싶었다. 다 챙긴 가방을 운동장에 그대로 두고 계단 중간쯤으로 올라가 앉았다. 헐떡거리는 숨을 고르며 텅 빈 운동장을 내려다봤다.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하늘을 봤다. 먼 달이었다. 달 주위에 몇 안 되는 별들이 총총히 어려 있었다. 문득 나는 조금 쓸쓸하단 생각을 했다. 내 검은 그림자가 계단의 반듯한 각을 따라 온몸에 모가 난 것처럼 되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나는 혼자였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문득 드는 섬뜩하고 생경한 느낌에 무심코 옆을 봤는데 사람 의 그림자 하나가 내가 있는 장소에서 약간은 거리를 둔 곳에 늘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놀라서 황급히 눈을 피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폐교에 나 이외에 다른 누군가가 들어있다는 생각이 들자 왠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겁은 났지만, 못 본 척 운동장을 바라봤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이 온몸의 신경은 곤두섰다. 세상에 귀신 따위가 있을 리는 없다고, 당연히 생각했다. 내 나이 스물둘, 무엇보다 폐교의 귀신 소동 따위 이야기를 믿을 때가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내심 용기를 내어 그 그림자를 뚫어지게 봤다. 그림자는 여전히 있었다. 내 것보다 훨씬 긴 그림자였다. 머리털 나고 그렇게 길쭉한 걸 본 적이 없었다.

    어둠이 더 짙어지자 그 그림자는 내 앞으로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슬그머니 다가왔다. 희한한 사실은 가까이 올수록 그 모습이 작아진다는 거였다. 겁을 집어먹은 와중에 저러다 아예 사라져버리는 게 아닐까하는 걱정마저 드는 것은 내 스스로도 이상한 일이었다. 정말 그건 알 수 없는 생각이었다.

    내 앞에 이제 두 개의 그림자가 서로 버티듯 늘어져 있었다. 매우 낯익은 모습이었다. 나는 하마터면 아저씨, 하고 크게 소리쳐 부를 뻔했다. 그러나 곧 멈칫했다. 처음 부르려했던 건 석씨였으나 진정 생각한 이가 누구인지, 내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인데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다가온 그림자는 키 크기도 모양새도 내 것과 거의 닮은꼴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눈까지 연신 껌벅거렸다.

    얼마 뒤, 내 등 뒤에서 전해지는 분명한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바로 뒤에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다시 그림자를 내려다 봤다. 그새 그림자는 겹쳐진 듯 하나가 되어 있었다. 조금은 당혹스러운 광경이었다. 남아있는 검은 형체가 그의 것인지, 내 것인지를 판별하기조차 어려웠다.

    거기서 희뿌연 담배 연기가 피어오른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그걸 바라보는 내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그림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달빛 아래 검게 내리비쳐진 그는 얼굴이 막대풍선처럼 긴, 아주 우스꽝스럽게 생긴 사내였다.

    차페크. 내 목소리가 나직하게 떨렸다. 그는 듣지 못한 듯 미동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입에서 튀어나오자마자 나는 스스로 약간 당황했다. 너무나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었다. 당황도 했지만 입안에서 초코 시럽에 부드러운 캬라멜을 버무려 먹은 듯한 여운이 감도는 것도 사실이었다.

    뒤에 서 있는 그에게 말을 건네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없었다. 뒤돌아 그를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내겐 없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그가 아주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 내 뜻을 알아챈 것일까. 무슨 영문인지, 그도 내게 전혀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긴 침묵 속에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같이 있었다. 나는 그림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너무 작아져서, 지치고 외롭게만 보였다. 마음이 울적해졌다. 언제부터 그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기억할 수 없는 아주 오래 전부터가 아닐까 싶었다. 그가 왜 그토록 긴 세월을 내 앞에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서 있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오랜 시간 그는 그래왔다. 왜 그래야만 했는지 늘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었다. 언제나 그가 영영 사라질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젠, 한 가지 생각만이 분명해졌다. 그를 그만 보내줘야 한다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이 그 순간이었다. 솔직히 아직 조금은 두려웠다. 어린 날부터 차페크 그는 내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는 나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가 가고나면 나는 영원히 혼자 남게 될지도 몰랐다.

    한껏 작아진 그림자는 그냥 우두커니 나를 보며 서 있었다. 멀리 떠 있는 달처럼 그 또한 혼자였다. 그리고 그건 나와 같은 모습이었다. 둘이 서 있어도 우린 결코 각각의 모습이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문득, 그의 외로움까지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겨졌다. 그리고 그에게 단호하게 말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가도 좋다고. 나 혼자 견디도록 내버려두라고, 그러니…… 이제 떠나가도 좋다고. 그러나 돌아서서 당당하게 말할 용기가 내겐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시선을 그대로 그림자에 두고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차페크…… 아저씨, 차페크 맞죠?

    내 목소리는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마치 울먹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다음 반응은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것이었다.

    별안간 그가 운동장이 떠나가도록 크게 웃어댔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당혹스러움이 어느 정도 가신 까닭은 그 웃음이 아주 오래 전부터 귀에 밴 듯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염소울음 같기도 하고 허탈한 웃음 같기도 하고, 아무 의미 없는 빈 웃음 같기도 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 또한 언제부턴가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 몸이 내 뜻과는 전혀 무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한참만에야 겨우 웃음을 멈출 수 있었다.

    불현듯, 지금 그를 보지 않으면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결코 이 세상에 잡아둘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더 그러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꼭 한 번은 그의 진정한 얼굴을 봐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다잡았다. 바닥을 굳게 딛고 일어섰다.

    그러나 내가 뒤돌아섰을 때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후각을 압도당할 만큼의 알싸한 꽃향기였다. 예기치 못하게 벌어진 상황에 놀라서 하마터면 계단에서 발을 헛디딜 뻔했다. 머리가 띵하도록 현기증이 났다. 향기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참다못해 나는 아예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정신을 차리면서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에 불쑥 나타난 것을 확인한 나는 놀란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다. 그건 어둠 속에서도 파란 빛깔이 선명한 꽃 한 다발이었다. 호흡이 가빠졌다. 온몸의 감각이 식물의 촉수처럼 예민해지는 것 같았다. 태어나 이제껏 그런 꽃을 본 적이 없었다.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누구도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분명 그것은 푸른 국화였다. 내 바로 앞에 푸른 국화가, 유일하게 클라라만이 가질 수 있었던 그 푸른 국화가, 차페크의 큼지막하고 거칠기 짝이 없는 두 손에 들려 내 앞으로 내밀어져 있었다.

    떨리는 두 손으로 나는 푸른 국화를 덥석 받아들었다. 때마침 밤바람이 잔잔하게 불어왔다. 강렬한 향기가 다시금 콧날을 시큰하게 했다. 취한 듯 잠시 꽃다발 속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시간이 좀 흐른 후, 정신을 차리고 앞을 올려다봤을 때는 눈앞에 있어야할 차페크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곧 그를 발견했지만 이미 그는 이곳에서 멀찍한 폐교건물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려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놓칠까봐 계단을 후다닥 뛰어올라갔다. 그리고 목청 높여 소리쳤다.

    차페크! 당신 정말 차페크 맞죠? 카레엘― 차페크!

    내 목소리를 분명 들었을 텐데, 그는 끝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그곳에 나는 다시 혼자였다. 그러나 어느 사이엔가, 폐교의 운동장 위로 가득가득 떠오른 별들이 이제 막 그려낸 음표들처럼 제각기 밤하늘에서 번쩍거리고 있었다.

    한밤이 다 가도록 나는, 푸른 국화에 얼굴을 묻은 채 그 무수한 별들이 지껄여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





    * 註 : 이 소설에 등장하는 차페크의 삽화와 클라라를 비롯한 여러 외국인명의 캐릭터는 보헤미아 출신의 체코 작가인 카렐 차페크(Karel Capek: 1890~1938)의 국내번역판 소설집, 《단지 조금 이상해 보이는 사람들》(민음사, 홍성영 譯 - 1995년 초판)에서 참고했음을 밝힌다.
    이정민

    이정민

    1980년 경기 동두천 출생

    서울예 대 문예창작과 졸업

    서울예대 전공심화과정(문예창작전공) 재학 중.

  • 심사위원 조남현(문학평론가), 이승우(소설가)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은 내용과 스타일이 다양하고 목소리에 개성이 있었다. 몇 편은 이야기의 현실 환기 효과가 의심스러웠고, 몇 편은 시선을 끌려는 과도한 포즈가 불편했다. 길게 논의한 작품은 '디스코 팡팡'과 '허물', '헤이, MR. 차페크'였다.

    죽음의 그림자에 붙잡힌 영혼들의 비이성적 행동을 통해 존재의 불안을 그려 보인 컬트 무비풍 소설 '디스코 팡팡'은 인물들의 이상심리에 대한 공감을 불러내는데 성공하지 못해 소설 속 사건들을 이해시키지 못했다. '허물'은 미용사를 주인공으로 아름다움과 욕망, 혹은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라는 문제를 꽤 집요하게 다뤘다. 낯선 소재에 대한 취재도 성실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주요 인물이 만들어내는 갈등이 평면적이고 진부한데다가 같은 자리를 맴도는 듯한 서술의 지루함도 아쉬움을 주었다.

    '헤이 MR. 차페크'는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형의 사라짐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 세계(이해할 수 없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에 입문하는 십대 소년의 성장 과정을 다른 텍스트 속 세계의 인물들에 의지해서 보여주는 소설이다. 할 말이 많은 듯 절제되지 않은 문장이 걸리지만, 세계에 대한 자세가 진지하고 고통을 내면화시켜서 표현하는 능력이 상당하다고 느껴졌다. 우리는 이를 당선작으로 뽑는 데 어렵지 않게 동의했다.
  • 이정민

    이정민

    1980년 경기 동두천 출생

    서울예 대 문예창작과 졸업

    서울예대 전공심화과정(문예창작전공) 재학 중.

    뚜렷치도 않은, 동두천의 어두컴컴한 새벽길이 떠오른다. 그 새벽 불현듯 눈을 떴을 때 외가에 간 어머니가 그리웠다. 잠든 아버지와 동생 몰래 집을 빠져나와 길을 달렸다. 몇 번인가 길모퉁이 담벼락에 기대 숨을 골랐다. 그 길을 달려 마침내 찾은 어머니의 품. 지금 가장 원하는 일에 대한 열망이, 그날 오로지 한 가지 마음으로 새벽길을 달려가던 것과 다르지 않다고, 믿고 있다.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소설 속 상상의 자유로움을 일깨워주신 박기동 선생님, 마음의 사표로서 새기는 김혜순 선생님, 문학에 대한 동경 속에 서계신 이광호 선생님, 소설 쓰는 자의 끈기를 당부하신 한강 선생님, 글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해주신 장석원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가진 것은 치기뿐인 내가 오늘까지 열의를 밀고 오게 된 건 온전히 박성원 선생님 덕이다.

    동생 정욱이와 안성호 선배님, 이성원 군과 유림이, 가영 누나, 그리고 현아선배, 혜영 누나 태윤 재우 승희 건영 민정 지혜 소아 민경 혜진이를 비롯한 문예창작과 사람들, 조언을 아끼지 않은 영애누나와 내 소설을 성심성의껏 읽어준 동기 현정이에게 고마움을 전하겠다. 친구인 임호연과 전광호, 그리고 지난 7월 세상을 떠난 규대에게도….

    길은 여전히 하나뿐인 것 같다. 좋은 작가로, 좋은 소설로 보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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