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순도에 대해 생각하는 밤이다.
이것은 증류수처럼 고요한 시간의 기록이다.
그 속에서 나는 물방울처럼 웅크린다.
나는 킬러다. 내 시력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의사가 내게 한 말이다.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나는 내 절망의 활자를 표적에게 찍는다. 표적들은 하나같이 차갑게 무너진다. 하지만 내 표적들은 나를 모른다. 그녀는 수족관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내 진심을 알 것이다.
표적에 집중해 있는 망원경. 그 안에서 나는 숨을 멈춘다. 너무 오랫동안 숨을 멈추고 있으면 모든 사물이 파랗게 보인다. 그리고 파란색은 위험하다. 그녀는 파란색이다. 총알을 감싸 쥘 때마다 생각한다. 총알은 나의 심장처럼 차갑다.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을 하나씩 오른다. 계단은 규칙적이다. 표면에는 마블링 무늬가 녹아 있다. 계단 위로 발을 디딜 때마다 청량한 발자국소리가 좁은 통로에 울린다. 어쩌면 이 소리들은 계단에 녹아 있다가 내 구두가 닿을 때마다 밖으로 깨어나는 것 같다. 발자국 소리를 따라 얼굴이 천천히 굳어진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는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조그마한 철문이 있다. 철문은 굵은 자물쇠를 물고 있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자물쇠를 딴다. 이 빌딩은 주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옥상에는 대형 에어컨 실외기와 커다란 물탱크가 있다. 물탱크는 노랗고 거대한 무당벌레처럼 보인다. 나는 입김을 불어 손가락을 조금 녹인다. 가방의 지퍼를 열어 라이플의 부품들을 하나씩 결합한다. 갑자기 실외기가 작동한다. 덕분에 나는 그 소음에 묻힌다. 옥상 가장자리에 라이플을 얹어 놓고 거리를 내려다본다. 퇴근시간이 지난 거리는 비교적 한산하다. 오늘은 올 겨울 들어 가장 낮은 온도를 기록했다고 한다. 밤하늘 위로 스케이트 날 같은 바람이 미끄러진다. 바람이 스친 자리마다 별이 고인다.
옥상에서 별을 볼 때마다 누군가 우주 한가운데서 크게 울부짖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주파수의 영역 밖에서 부글부글 타오르는 목소리 같은 것을 나는 느낀다. 구름이 비켜나자 달빛이 환하게 쏟아진다. 나는 그 빛에 노출된다. 라이플의 총구로 달빛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나는 조준경을 따로 떼어내 눈 위로 가져간다.
달의 표면으로 실패한 감정이 무수한 탄착흔처럼 쌓여있다.
며칠 전 나는 이곳에서 L을 처리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실패했고 실패한 킬러에게 남은 것은 없었다. 연락책은 일단 피해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소식을 끊었다. 이 세계에서 적과 친구는 아무 의미가 없다. 오직 목표와 단계가 있을 뿐이다. 나는 그 단계였고 실패한 단계는 얼마든지 교체가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며칠 후 연락책은 내게 은퇴를 강요했다. 그는 내가 저지른 실수를 만회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그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조직에선 이미 나와 L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쳤다. 그 조건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작은 햇빛이 커튼의 틈새를 채우고 있었다.
반대편 건물 밑으로 또 다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그가 다시 이 거리에 나타날 확률은 희박하다. 눈의 초점이 다시 희미해진다. 곧이어 바늘로 눈알의 뒤쪽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한차례 지나간다. 의사는 통증이 있을 때 눈을 비벼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더듬거리며 약병을 찾는다. 나는 내 눈의 시력이 점점 떨어진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를 놓친 것은 내 첫 실수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를 왜 죽이지 못했는지 알 수 없다.
킬러에게 저격할 장소는 일회용 성소(聖所)와 같다. 나는 유령처럼 그곳에 존재해야 하며 어떤 흔적도 남겨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다시 그곳을 찾아서는 안 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짓단에 묻은 먼지를 턴다. 라이플을 분해 한 뒤 케이스에 담는다. 도시의 수많은 빌딩과 자동차, 가로등, 도시의 불빛은 움직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뿐이다.
건물의 비상계단을 통해 가로등이 없는 골목길로 접어든다. 골목길을 빠져나오기 전 나는 잠시 뒤를 돌아본다. 나는 이 빌딩 옥상에서 그를 죽이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실패했고 이곳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그녀의 목덜미에는 물고기가 산다. 내가 그것을 발견한 것은 돌아누운 그녀의 목덜미에서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릴 때였다. 머리카락 사이에서 부분적으로 보이는 물고기는 수초 속에 몸을 숨긴 모습처럼 보였다. 크지는 않았지만 물고기 문신치고는 정교한 솜씨였다. 물고기의 이름이 궁금했지만 그녀를 깨우기 싫었다. 나는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댄 채 손을 뻗어 그녀의 가슴을 만졌다. 밀도가 높은 물속에 손을 집어넣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잠시 몸을 뒤척였다. 우리는 수족관 속에 죽어 있는 두 마리 물고기처럼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를 처음 집까지 데려다 주던 날이었다. 그녀는 고층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아는 언니가 외국에 가 있는 동안 잠시 살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높은 곳을 좋아 한다고 했다. 복도에서 몇 명의 사람을 마주쳤지만 그녀는 아무에게도 인사를 하지 않았다. 열쇠가 잘 맞지 않는지 그녀가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복도에 불이 꺼졌다. 나는 그녀를 위해 몸을 조금 움직여 주었다. 불이 켜졌다.
"…왜요?" 그녀가 물었다.
"불을 좀 밝히려구." 내가 말했다.
다시 불이 꺼졌다.
그리고 우리는 어둠 속에서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문득 살과 섞인 그녀의 화장품 냄새가 맡아졌다. 좋은 냄새였다. 그녀가 말했다.
"… 잠깐 들어왔다 갈래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복도에 불이 꺼졌다.
그리고 그날부터 우리는 만났다.
킬러에겐 항상 희망이 필요하다. L이 내게 해준 말이다. 그는 탁자 위로 담배 한 개 피를 거꾸로 들어 톡, 톡 치면서 말을 이었다.
"심각하게 생각할 거 없어. 우리도 남들이 하는 건 다 하고 살아야지."
그는 한 쪽 코에 찡긋 힘을 주고는 얇은 입술의 한쪽 끝으로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는 창밖으로 턱을 돌렸다. 나는 테이블 옆을 지나가는 종업원에게 리필을 부탁했다. 그녀는 옆 테이블의 주문을 잊지 않으려고 입 모양으로 커피의 이름을 외우면서 내 찻잔을 가져갔다. 그녀가 몸을 숙일 때 체크무늬 에이프런이 살짝 접히며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담배연기를 뿜었다. 연기는 대부분 천장까지 닿지 못하고 중간에 사라졌다. 그는 조직에서 내게 소개시켜준 일종의 '멘토'였다. 물론 경험에 따른 노하우는 그가 나보다 훨씬 풍부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받아 해결한 일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가끔 그가 두려웠다. 그는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이고 짧게 한 모금을 빨았다.
출입문에 달린 작은 종이 흔들렸다. 한 사람이 들어오고 잠시 후 두 사람이 되어 나갔다. 커피숍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그는 안경을 벗어 한 쪽 손에 들고는 다른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리고 말했다.
"자네, 오로라를 본 적 있나?"
그의 꿈은 오로라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사진 속에는 편협해 보이는 침엽수림이 성냥개비처럼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를 어떤 무늬가 지나가고 있었다. 오로라를 사진으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오로라의 무늬는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처럼 초록색이었다. 사진의 오른쪽 하단 부에는 날짜가 찍혀 있었다. 나는 사진의 출처를 묻지 않았다. 나는 손끝으로 사진 속의 무늬를 따라가 보았다. 미끄러웠다.
"오로라를 직접 본 사람들 말로는 눈이 멀 정도로 아름답다고 하더군. 자네가 관심 있으면 비행기 옆자리 정도는 양보할 수 있는데. 어때?"
나는 테이블 위로 사진을 밀어주었다.
"잠은 좀 자는 거야? 얼굴이 말이 아닌데."
라이플의 조준경으로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L은 그것이 내가 집중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요즘 나에게 새로 생긴 꿈은 모았던 돈이 정리되는 대로 비행기를 타고 북극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두껍게 옷을 껴입고 뒤뚱뒤뚱 눈밭을 걸어 갈 것이다. 그리고 적당한 언덕을 골라 자리를 잡은 뒤 오로라를 기다릴 것이다. 그 다음에 …… 무엇을 해야겠다는 계획은 아직 없다. 다만 그 빛 아래에서 누워 한때 듣던 음악을 떠올리거나 그동안 내가 죽인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해보면 괜찮을 것 같다.
북극에서는 오로라를 '여우의 빛'이라 부른다. 좋은 이름이다. 하지만 L은 여우의 빛을 보기 전에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럴지 모른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체력이 중요하다. 그 중에서도 정확한 조준을 위해서 호흡 조절이 가장 중요하다. L이 내게 해준 두 가지 충고이다. 나는 이목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헬스장을 3개월 단위로 다닌다. 물론 일이 생길 경우 사전답사를 위해 작업할 지역을 시험 삼아 뛰어보기도 하지만 가급적이면 정지된 공간에서 달리는 것을 좋아한다. 한참을 달리다 보면 머릿속이 백지처럼 환해지는 기분을 느낀다. 호흡이 어떤 임계점을 돌파하는 순간이다. 나는 그 백지 위에 점을 하나 찍는다. 곧 내 몸은 그 소실점을 향해 돌진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을 알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의 표정을 지켜보는 일이 나는 불편하다.
그녀와 헤어지던 날 우리는 각각 아이스티와 커피를 주문했다. 종업원이 가져온 유리잔에는 얼음이 너무 많았다. 재떨이 위에는 담배꽁초가 두 개 버려져 있었다. 나는 세 개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녀의 아이스티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변두리의 커피숍은 주말인데도 손님이 거의 없었다. 우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음악 소리가 그치자 우리는 완전하게 침묵했다.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달그락."
그녀의 유리잔 속에서 얼음이 녹으며 다른 얼음 아래로 떨어졌다. 달그락. 다시 실내에 음악이 흘러 나왔다. 나는 얼음이 녹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조그맣게 어깨를 들썩였다. 그때 처음 알았다. 때로 물고기도 눈물을 흘린다.
그녀가 자고 있는 내 얼굴을 만진 적이 있다. 창틈으로 새벽 공기가 새어들어 왔다. 여름이 희미해지는 냄새가 났다. 그녀는 조용히 이불을 들추고 일어났다. 그녀가 치마 속으로 다리를 집어넣는 것이 보였다. 가로등빛에 그녀의 허벅지가 환하게 드러났다가 곧 치마 속으로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수증기처럼 움직였다. 내 집에서 지상까지 이어진 철제계단은 모두 12개. 그녀가 계단에 발을 디딜 때마다 위태로운 마찰음이 났다. 나는 누워서 그녀가 내려가는 소리를 하나씩 손가락으로 짚으며 세어보았다. 손가락이 부족해지자 나는 어둠 속에서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그녀와 헤어지던 날이었다.
얇은 창문에 손바닥을 대어본다. 창밖으로, 겨울의 깊은 냉기들이 풀리지 않는 저주처럼 잔뜩 몰려와 있다. 나는 잠시 손바닥의 온도를 낮추며 다시 방아쇠에 검지 손가락을 건다. 이 순간의 짜릿한 감정은 중독이다. 바람이 지나간 다음 몇 장 남지 않은 가로수 잎들이 속눈썹처럼 파르르 떨린다.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의 부피가 늘어난다.
그는 다시 그 장소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빌딩에서 내려온 나는 한 때 우리가 사용하던 안전가옥 근처로 장소를 옮겼다. 마침 그 맞은편 사무실은 임대 광고를 내고 있었다. 졸고 있던 수위를 깨워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20평쯤 되는 공간에 책상과 의자, 소파 같은 집기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수위는 전에 이 사무실을 쓰던 사람들이 유령회사나 사채업을 하던 이들이었고 어느 날 낯선 사람들이 몰려와 사무실을 온통 뒤집어 놓은 뒤 아직까지 아무도 쓰지 않았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저리주저리 해댔다.
"근데, 뭐하시는 분이슈?" 나는 잔금처리를 위해 건물 주인에게 연락을 했다.
"조그마한 사업을 합니다." "뭐, 내가 참견할 문제는 아니지만, 저번 사람들처럼 이상한 일 하는 건 아니지? 나야 뭐 관리만 하는 처지지만 매번 그런 일이 터질 때마다 형사들이 찾아온단 말이지. 한두 번도 아니고 귀찮아 죽겠어. 보아하니 청년 인상이 좋아서 그런 걱정은 안하지만. 나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요즘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 암튼 잘 좀 부탁허이."
슬쩍 말을 놓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것보다 형사들이 들락거린다는 말이 더 신경 쓰였다. 어쩌면 아직 이 근처에서 잠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되도록 인상 좋게 웃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건물 사무실 열쇠들은 비상용으로 모두 갖고 계시죠?" "그럼. 저번처럼 사람들이 문을 때려 부수고 난리를 치면 내 입장이 곤란하거든." 그는 아까부터 허리춤에 차고 있던 열쇠꾸러미를 자랑스럽게 두드렸다. 나는 사무실 열쇠부터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접이식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20평 넘는 사무실은 혼자 쓰기에 남는 공간이 너무 많다. 종일 불을 켜지 않고 난방도 돌리지 않는다. 관리인에게는 내가 나중에 떼겠다고 하고는 건물 외벽에 붙어 있는 임대 광고 플랜카드도 그대로 붙여 두었다. 낮 동안 나는 구석에 굴러다니는 생수통에 소변을 보면서 창밖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며칠 째 같은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쯤 말이 많던 그 수위도 1층 구석에서 건물 출입문을 바라보며 앉아 있을 것이다. 그는 건물을 지키고 나는 L이 찾아올 순간을 지킨다. 이제 허리 아래로는 소변을 볼 때 외에는 감각이 없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힘들다는 수위의 말을 거들어 줄 것을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이대로 사무실에 뒹구는 부서진 가구가 되어 버릴 것 같다. 어쩌면 나는 누군가 눌러주기만을 기다리는 폭탄의 작고 빨간 스위치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주머니에서 알약 하나를 꺼내 물 없이 천천히 씹는다. 이 약이 당분간 내 시력을 보호해 줄 것이다. 입안에 금세 까칠해진다. 이렇게 오랫동안 타겟을 기다리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보름가량을 작은 방에 앉아서 정해진 타겟을 기다린 적이 있었다. 보름이라는 기간은 예정에 없던 것이었다. 오랫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었던지 방심한 상대는 경호원도 없이 여자를 데리고 모텔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조준경 가득 그의 살찐 얼굴을 잡아당긴 뒤 그의 미간에 총알을 박았다. 성공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다리가 펴지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관절은 아무리 주물러도 감각이 없었다. 쓰지 않는 근육이 낡아가듯이 어느새 내 관절은 한쪽으로 굳어 있었다. 마치 내가 그곳에서 보낸 시간들이 모두 내 관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보름 동안 나는 외롭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서 나는 울었다. 보름 동안 비어 있다고 생각했던 공간에 내 울음소리가 가득 찼다. 창 밖에는 여자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잠시 후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손바닥으로 가린 입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났다. 나는 그때의 기억을 조심스럽게 L에게 얘기했다.
L이 말했다.
"자네는 혼자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은가?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지. 고독이란 우주선을 잃어버린 우주인 같은 거라고."
그는 나를 비웃지 않았다.
"생각해봐. 아무것도 없는 우주공간에 떠서 그는 차츰 떨어져가는 산소량을 확인 하겠지. 그때 그가 점점 멀어져가는 지구를 바라보면서 말이지. '제길, 담배나 한 대 피워 봤으면.' 하고 우주를 향해 날리는 유머 같은 것 말이야. 참 쓸쓸하지. 그래도 괜찮아. 그의 쓸쓸한 유머들로 헬멧이 부옇게 흐려지면 우주도 그의 눈물을 보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고독을 믿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L이 해준 마지막 충고였다.
내 절망의 순도는 갈수록 낮아진다. 나는 더 이상 순수한 의미의 절망을 알지 못한다. 나는 종교가 없고, 보험에 가입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나는 더 많은 것들을 버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깥이 필요하다. 나는 자주 혼자 침대에 누워 이런 말들을 중얼거린다. 그러다 문득 천장이 한없이 높아지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북회귀선이나 날짜 변경선 같은 것들이 지구를 둘러싸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실을 감고 있는 실패처럼. 실이 풀리면서 돌고 있는 지구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실을 끊으며 다른 대륙으로 이동하는 새들의 생소한 이름을 생각하려 한다. 생각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주 안타깝다.
이곳에서 버틴 지 보름이 넘어가고 있다. 아마 그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 역시 자신만의 우주로 돌아간 것일까. 한 달 가량을 계약했지만 내일쯤에는 철수해야 될 것 같다. 나는 내가 버려놓았던 잡다한 쓰레기를 한 곳에 모은다. 말이 많던 관리인은 다행히 그동안 한 번도 사무실을 찾지 않았다. 나는 바뀐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사무실을 나선다. 적어도 이 달 말까지 아무도 이곳을 찾지 않을 것이다. 내가 숨 쉬던 공기도 그 안에서 천천히 썩어 갈 것이다. 관리인은 조그마한 수위실에서 TV를 켜놓고 잠들어 있다. 나는 잠든 그의 얼굴을 오랫동안 내려다본 후 걸음을 옮긴다.
시내버스는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달리고 있다. 버스 창문을 조금 연다. 비가 그 친 창밖의 차가운 공기. 새벽까지 내리던 비는 공기를 좀 더 공허하게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심호흡을 할 때마다 공기 속에선 무언가 가득 차 있었던 것들의 흔적이 맡아진다. 사무실에서 철수했지만 나는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창밖을 향하던 시선을 거둔다. 출근 시간을 넘긴 버스 안에는 등산복을 입은 노인과 교복을 입은 여학생. 그리고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전부다. 우리는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버스의 구석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있다. 라디오에서 이번 겨울비가 그치면 기온이 한층 더 떨어질 것이라고 한다.
버스는 직사각형이다. 문득 나는 고개를 돌려 버스의 네 각을 확인한다. 시력이 나빠진 이후 모서리를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모서리는 점점 커진다. 나는 점점 작아진다. 그리고 작아진 내 몸이 조금씩 그 속으로 빨려든다. 아늑한 착각이다. 나는 적당히 흔들리는 버스의 진동에 맞춰 눈의 초점을 감았다가 다시 풀어 놓는다.
그녀와 시내에서 간단히 술을 마시고 함께 택시를 탄 후였다. 사람들은 예전보다 일찍 찾아온 추위에 옷깃을 더욱 촘촘히 여미며 지나갔다. 술기운이 오르는지 그녀는 손바닥으로 발그레해진 얼굴을 문지르며 말했다.
봐. 자동차는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잖아.
그녀는 손톱으로 창문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내가 그랬지. 사랑은 유리 같은 거라고.
창문에 입김이 조그맣게 붙어 있었다.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그러면 …… 우리는 지금 사랑 안에 있는 건가?
택시는 내부순환도로를 막 벗어나고 있었다. 거리는 한산했고, 차가웠다. 우리를 태운 택시는 목젖을 통과하는 따뜻한 알약처럼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나는 자동차를 좋아하게 되었다.
버스에서 내려 그녀의 집을 찾아간다. 열쇠는 아직 바뀌지 않았다. 방에는 그녀가 급하게 나간 흔적이 역력하다. 보일러는 꺼져 있다. 이불은 침대 구석에 몰려 있고, 바닥 여기저기에 입다 벗어 놓은 옷들이 구겨져 있다. 나는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낸다. 찬장을 열어 잔을 하나 꺼낸다. 가장자리에 물때가 묻어 있다. 나는 잔에다가 물병의 물을 옮겨 담는다. 물 잔을 들고 침대에 걸터앉는다. 침대에서 화장품 냄새가 살짝 일어난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신다. 그리고 삼키기 전에 충분히 입안을 적신다. 그녀는 지금쯤 오전 업무를 끝내고 점심을 먹고 있을 것이다.
책상 위에는 간단한 기초화장품과 낡은 노트북, 필기구들. 그리고 메트로놈이 있다. 화장품의 마개를 열고 가만히 코를 가져다 댄다. 화장품의 냄새 속에는 그녀의 귓불이 있다. 목도리가 빠져나간 목덜미와 음식을 씹을 때마다 드러나는 보조개가 있다. 나는 눈을 감고 이런 것들을 하나씩 조립한다. 하지만 마개를 닫으면 그녀는 사라진다.
그녀는 피아노를 칠 줄 모른다.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으레 다녔을 피아노 학원도 다니지 못했다. 그녀도 피아노에 흥미가 없었다. 대신 메트로놈이 좋았다. 작은 추를 매달고 일정하게 좌, 우로 흔들리는 걸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 진다고 했다. 그녀의 메트로놈은 추를 달고 있는 아날로그 식이었다. 전체적으로 원뿔형 구조에 나뭇결무늬를 한 플라스틱이 외장을 덮고 있다. 군데군데 손때가 탄 흔적이 있지만 오히려 그것이 오래되었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친구를 따라 피아노 학원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학원 문을 열자 피아노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학원에는 피아노가 놓인 방이 여러 개 있었다. 하지만 방음처리가 된 소리는 아주 멀리서 흔들리는 깃발처럼 희미했다. 친구는 그녀를 소파에 앉히고는 평소 자기가 연습하던 방으로 들어갔다. 학원 선생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다른 방에서 먼저 온 아이를 가르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소파 위로는 몇몇 음악가의 사진이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다. 한동안 소파에서 발장난을 하며 놀던 그녀는 잠시 후 신발을 신고 일어났다. 학원을 좀 둘러볼 생각이었다. 생각보다 방이 많았다. 창가 쪽으로 다가가던 그녀는 문이 반쯤 열려 있는 방을 발견했다. 조심스레 문을 밀어 보았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검은색 피아노가 고집스러운 노인처럼 방구석을 차지하고 있었고 벽에는 자주색 스펀지가 올록볼록하게 돋아나 있었다. 바닥에는 하늘색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가 자기도 모르게 방문을 닫았다. 두꺼운 문이 닫히고 나자 방 안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사위가 조용해지자 그녀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보슬보슬한 양탄자의 느낌이 좋았다. 그녀는 피아노 의자를 빼서 앉아 보았다. 그녀는 그 작고 조용한 방이 마음에 들었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잠시 후 그녀를 태운 작은 방은 하늘 높이 떠 있었다. 그녀의 눈에 식당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엄마가 보였다. 유모차를 지팡이 삼아 밀고 다니는 할머니와 분식집에 모여 있는 친구들이 보였다. 출석을 부르는 선생님도 보였다. 그녀가 태워 버린 일기장이 바람에 흩어지고 있었다. 그녀를 태운 작은 방은 점점 지상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괜찮다고 손을 흔들었다. 아무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메트로놈은 피아노 위에 있었다. 작은 추가 가운데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아무도 몰래 메트로놈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집으로 돌아와 그녀는 메트로놈을 자신만의 비밀상자에 넣어 두었다. 오랜 후에 그녀가 집에서 독립한 다음에야 메트로놈은 상자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책상의 한 구석을 차지하는 일 말고 메트로놈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세상엔 박자를 맞추며 해야 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이사할 때마다 메트로놈을 잊지 않고 챙겼다.
나는 케이스를 벗기고 태엽을 감는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메트로놈의 추를 왼쪽으로 가볍게 기울인다. 손가락을 떼자마자 추는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며 한 박자를 센다. 그리고 왼쪽으로 기울어지며 다시 한 박자를 센다. 그리고 다시 한 박자. 그녀는 요즘도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닐까. 그리고 조용하게 다시 한 박자.
언젠가 나는 그녀가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그녀의 가슴에 손을 얹은 적이 있다. 손바닥 안으로 그녀의 심장소리가 전해졌다. 나는 메트로놈을 가져와 그녀의 심장소리에 맞게 박자를 조정했다. 잠든 그녀의 심장은 생각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은 안단테(ANDANTE)였다. 나는 이걸 그녀에게 말하지 못했다.
아주 미세한 차이로 사람들의 맥박은 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L은 죽을 것이다. 지금 그의 심장은 어떤 빠르기로 뛰고 있을까. 나는 흔들리는 추를 잡아 세운다. 순간 방 안이 조용해진다. 어디선가 깃털을 떨어트리며 새가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도 이 방을 타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진다.
가로등이 하나씩 켜진다. 구름 위에서 보면 마치 누군가의 커다란 생일 케이크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가로등의 둥근 유리관으로 눈알만한 나방이 제 몸을 부딪치고 있다. 그때마다 유리관이 좌, 우로 흔들린다. 나방의 무서운 습관이다. 때로 잠이 들기 전 침대에 누워서 창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바로 옆에서 누군가의 숨소리가 들린다. 내 숨소리다. 너무 조용하면 세상의 모든 소리들이 내 조그마한 귓속으로 몰려드는 것 같다. 그러면 내 호흡이 조금 더 낯설어진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양파를 키우는 중심의 빈 공간이다. 나는 아무 의미 없이, 눈물이 마를 때까지 냄새를 피우는 작은 입자다. 지금도 내 몸은 부글부글 끓고 있다. 세균과 같이.
새벽의 마트에는 언제나 질서가 있다. 불면증에 시달릴 때면 나는 늘 근처에 있는 24시간 할인마트로 간다.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새벽의 마트에는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정돈 되어 있다. 무례하게 어깨를 치고 가는 사람도 없고 부모에게 떼를 쓰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도 없다. 나는 지갑을 챙기고 집을 나선다. 불을 끄고 나올까 하다가 그냥 문을 잠근다. 큰 길로 나서기 전 뒤를 돌아본다. 내가 켜 놓은 불이 아직 집 안에 있다. 안심이 된다. 버스가 지나가지만 걸어가기로 한다. 거리의 공기는 두부처럼 부드럽다.
자동문을 통과해 지하로 내려간다. 비가 왔었는지 바닥 여기저기에 물기가 흩어져 있다. 애완동물 코너는 매장 구석에 있다. 토끼는 잠을 거의 자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토끼가 들어 있는 투명한 유리 케이스를 살짝 두드린다. 토끼의 빨간 눈동자를 보고 싶었지만 토끼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토끼는 팔짱을 끼듯 앞발과 뒷발을 모두 품 안으로 집어넣은 채 케이스 구석에 동그랗게 말려 있다.
수족관은 자주색 천으로 덥혀 있다. 매장의 형광불빛이 너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주위를 살핀다. 그리고 살며시 천의 한 쪽 끝을 들춰낸다. 열대어들. 크고 작은 열대어들은 햇빛에 드러난 먼지처럼 천천히 물속을 떠다닌다. 나는 수족관 유리에 입술을 대고 물고기처럼 입을 뻐금거려본다. 수족관 바닥에는 모래가 깔려 있고 조그마한 벽돌집 굴뚝으로 공기방울이 올라온다. 나는 수족관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밀어낸다. 발돋움을 해서 수족관 속으로 손을 짚어 넣는다. 물은 생각보다 따듯하다. 작은 물고기들이 먹이가 들어온 줄 알고 내 손 주위로 모여든다. 주둥이를 내밀어 내 손에 대어 본다. 순간 나는 주먹을 쥔다. 주먹 안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진다. 꺼내어 펼쳐본 손바닥 위에는 총알만한 물고기가 누워 있다. 아가미를 헐떡일 때마다 무지개 빛깔의 비늘이 반짝거린다. 나는 물고기를 바지주머니에 넣고 서둘러 매장을 빠져나온다.
거리에 가로등이 꺼지고 출근하는 사람들로 거리가 분주해져 있다. 물고기를 넣어둔 주머니가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다. 나는 걸어가면서 물고기가 주머니 속에서 녹아내리는 상상을 한다. 피와 내장이 분해되고 살이 뼈에서 떨어진다. 눈알이 흐물거리며 녹는다. 마지막으로 무지갯빛 비늘이 하나씩 벗겨지면서 내 몸을 덮어간다.
나는 골목길에서 고양이가 뜯다 도망간 쓰레기봉투 속으로 물고기를 던져 넣는다.
불이 꺼진 긴 복도. 그 끝에 L이 있다. 통유리로 안이 훤히 비치는 사무실 안에서 그는 혼자 앉아 있다. 그의 자리 위에만 하나의 형광등이 켜져 있다. 그는 외로운 섬처럼 보인다. 나는 머뭇거린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문득 그가 나를 돌아본다. 죽음의 공포로 가득 찬 눈은 불결해 보인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은 쉽게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의심이 없는 눈에서 나는 죄의식을 느낀다.
나는 품에서 칼을 꺼낸다. 왼손으로 그의 목젖을 잡고 뒤로 젖힌다. 그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기도가 막힌 탓인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서서히 가라앉는 그의 심연을 나는 끝까지 지켜본다. 대상이 사라진 살의는 다른 감정이 개입하지 않는 순수한 의지이다. 순수한 살의에는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서 너무 많은 냄새를 맡았다.
비가 내리면 꽃이 핀다. 며칠 동안 나는 거리를 하릴없이 돌아다니다 다시 그 거리를 향기처럼 빠져나간다. 그러다 간혹 실패한 의미로 우주 속을 부유하고 있을 말들에 대해 생각 한다. 우주는 지금도 빛의 속도로 팽창하고 있다. 그 속에 L도 있을 것이다.
"밤하늘은 왜 어두울까?" 그가 물었다.
나는 술값을 치르고 남은 돈을 지갑을 넣다가 그를 쳐다봤다. 가로수 가지마다 작은 전구들이 감겨 있고 곳곳에서 캐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젖혀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목젖이 위로 크게 튀어 나와 있었다. 금방이라도 꿈틀거릴 것 같았다. 스르륵. 미닫이문을 열고 누군가 술집에서 나왔다. 왜 그런지 입안에 침이 고였다.
"태양이 없으니 그렇지." 내가 말했다.
우리가 보는 별들은 모두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들이다. 우주의 크기가 무한다고 한다면 이런 별들 또한 무수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밤하늘은 이런 별들로 빽빽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가정이다. 이렇게 따지면 밤하늘은 태양보다 15만 배나 더 밝아야 정상이다.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지구는 너무 뜨거워서 인간을 비롯한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을 것이다.
밤하늘이 어두운 이유는 우주의 모든 별들은 지구로부터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주가 스스로 팽창하고 있다는 것이다. 별이 지구로부터 계속해서 멀어지기 때문에 별빛의 세기는 점점 약해져 희미하게 보이거나 소멸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멀리 있는 별일수록 멀어지는 속도는 빛의 속도에 가깝다. 별과 별 사이의 거리 역시 멀어진다. 따라서 빛이 없는 공간이 더욱 커져 결국 검은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구에서 살 수 있는 이유는 우주가 팽창하기 때문이지."
그가 말했다.
"어떤 물질이든 팽창을 하면 팽창하는 동안 에너지를 사용하지. 우주는 팽창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별빛에서 얻어. 그래서 우주는 내내 어두운 거야."
"언제부터 천문학자가 된 거야?"
그가 웃었다. 고인 침을 삼키며 나도 웃었다. 목젖이 꿈틀거렸다. 겨울인데도 바람이 푸근하게 불어왔다. 눈이 내릴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여우의 빛'을 얘기했고 나는 최근에 만난 여자 얘기를 할까 하다 그만 두었다. 조직에서 알아서 좋을 게 없었다. 우리는 곧 서로의 안부를 챙기고 헤어졌다.
집으로 가는 동안 내 머릿속으로 검은 풍선이 들어왔다. 풍선의 표면으로 두 개의 점이 찍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나였다. 내가 숨을 쉴 때마다 풍선은 커졌다. 풍선이 커지면서 두 개의 점도 서로 멀어졌다. 풍선이 커지면서 다른 한 점은 누구인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풍선의 반대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 점은 처음엔 물고기처럼 보이다가 다시 총알처럼 작아졌다. 풍선이 커질수록 나는 점점 어두워졌다.
L의 집을 찾아간다.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던 공간은 왠지 청동빛을 띄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집은 발굴 되지 않은 무덤처럼 서늘하고 조용하다. 나는 작고 반짝이는 숟가락을 꺼내 싱크대를 두드려 본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물을 내린다. 비누가 딱딱해져 있다. 수건은 바싹 말라 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에는 발자국이 남는다. 책상 위에 빈 액자가 놓여 있다. 나는 그 액자를 그녀의 얼굴로 채워본다. 가까운 곳에서 트럭이 지나가는지 창문이 잠시 부르르 떨린다. 식탁에 유리잔을 놓고 나는 천천히 물을 따른다. 갑자기 눈앞이 다시 따끔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더듬더듬 약병을 찾는다. 약병이 손에서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병의 입구에서 하얀 알약들이 우르르 쏟아진다. 알약들 위로 오후의 햇살이 내려앉는다.
빈 방의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있다. 오랫동안 집을 비운 뒤 다시 문을 열면 알 수 없는 냄새가 난다. 내가 없는 사이 벽이 참았던 호흡을 한 것일까. 그 냄새가 낯설어 나는 잠시 촛농처럼 문 앞에 서 있곤 했다. 그녀는 사랑이란 서로의 호흡을 감정하는 일이라고 했다. 나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알약을 하나씩 병에 담는다. 그녀는 내 진심을 알 것이다. '여우의 빛'은 오로라의 다른 이름이다. 북극에서는 오로라를 그렇게 부른다. L도 알고 있었을까.
나는 안부를 묻듯 벽에 볼을 대고 조그맣게 숨을 쉬어 본다.
이동욱
1978년 포항 출생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 석사 수료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심사위원 오정희(소설가), 정과리(문학평론가)
예심을 거쳐 올라 온 열 편의 소설은 대체로 구성이 안정됐고 제가끔 독특한 문체를 보여줬다. 한국 소설의 기초가 탄탄하다는 사실의 증거로 여겨도 좋으리라.
박하의 '오션 파라다이스', 오윤서의 '그 섬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가 마지막까지 논의됐다. '오션 파라다이스'는 투기성 오락에 중독된 사람의 시시각각으로 돌변하는 정신적 상황을 생활상의 궁핍에 비춰 절박함과 비루함을 동시에 임계점까지 끌고 간 작품이다. '그 섬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는 배가 끊긴 섬에 남겨진 여인과 두 등대지기 사이에 조성된 관계의 미묘한 심리적 긴장과 그것을 미리 판단해 버린 여인의 불행한 파국을 재치 있게 연결시킴으로써 생각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의 어리석음을 일깨웠다.
당선작 '여우의 빛'은 청부 살인업자라는 이색적 인물을 내세워 산다는 것의 근본적인 잔인함과 사는 자의 본질적인 외로움을 치밀하게 반추한 작품이다. 심사자들은 당선작을 뽑는 데 쉽게 합의했다. 다른 작품들도 일정 수준에 도달했으나, '여우의 빛'은 소설이 문학인 이유를 가장 확실하게 입증하고 있었다. 다른 작품에서는 문체가 상황을 정서적으로 강화하는 보조적 장치라고 한다면, 이 작품에서 문체는 상황과 길항하면서도 상황을 정돈하고 동시에 상황을 움직인다. 당선을 축하하며, 아쉽게 탈락한 분들에게도 격려를 보낸다.
이동욱
1978년 포항 출생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 석사 수료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책상을 주문했다. 인터넷으로 계좌이체를 한 뒤 담배를 피운다. 담뱃갑을 버리며 지금 쓰는 책상을 만져본다. 이 위에서 밥을 먹고 일기를 쓰고 TV를 보았다. 그리고 잠언이 가득한 글을 쓰고 버렸다. 책상 한 켠엔 메모지와 필기도구가 엉켜있다. 맞은편 벽 포스트잇 한 장이 책상 뒤로 떨어진다. 찾을 수가 없다. '지상의 짧은 삶에서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자는 결코 고통과 헤어질 수 없다.' 그런 글귀가 있었을 게다.
읽지도 않은 책에 먼지가 가득하다. 손가락으로 먼지를 벗겨낼 때마다 다른 종류의 후회와 위안으로 손톱을 바짝 세웠다. 생활은 불규칙했고 꿈 없는 잠은 지하로 뚫린 터널처럼 길었다. 깨어날 때마다 아찔했다.
건반을 누르듯 책상을 만져본다. 그동안 많은 무게를 견뎌줬다. 연애에 실패했고 시험에 번번이 떨어졌다. 한번 충전한 휴대폰을 일주일 동안 썼다. 불어난 허리로 맞는 바지가 없었다. 외로우면 시를 썼고 다음날 버렸다. 그즈음 남에게 보여주지 않으면 치욕도 달콤하단 걸 알았다.
허리에 맞는 바지를 살까 하다가 헬스장에 등록하기로 한다. 이제 감당해야 할 당신들의 사건이 저 밖에 가득할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해외에 나가 있는 동생과 지방에 계신 부모님이 같이 웃어줬으면 좋겠다. 처음 소설을 써 보라고 하신 서종택 선생님과 내 글을 소설이라고 인정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책상을 하나 더 주문했다. 빨리 그곳으로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