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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임수 사이로 자기 정체성을 향해 - 박찬욱,올드보이

by  박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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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선소감
  • 단평: 박찬욱의 「올드 보이」, 그가 고백하는 방식, 그와 대화하는 방식

    -차례-
    1. 프롤로그
    2. “넌 누구냐?” 그 대답을 찾아서
    3. 이 영화는 복수극이다?
    4. 이 영화는 근친상간 문제에 대한 것이다?
    5. 대답이 아니라 질문을 찾아라!
    6. 에필로그

    1. 프롤로그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대화가 있다. 대화는 인간의 삶을 가능케 하는 방편이자, 인간으로 하여금 관계 속에서 자기정체성을 확인하게 만드는 존재론적 형식이다. 영화도 그 중의 하나라고 하면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영화는 그 중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대화 형태이다.

    일반적으로 대화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를 전제로 하며 그들의 소통 속에 그 생명이 유지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떠올릴 수 있는 대화 형태로는 천주교의 고해성사가 있다. 누구나 알다시피 고해성사란 자신의 밝히지 못할 부끄러움이나 양심에 걸리는 일을 신부와 둘만의 공간에서 고백함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찾는 행위이다. 영화는 복잡하고 대중적이어서 은밀한 소통 형태인 고해성사와는 다르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본질적으로는 공통적이다. 고해하는 화자는 자신의 세계를 청자인 신부에게 밝힌다는 점에서, 영화감독으로 대표되는 영화의 고백자(이후 영화감독)와 유사하다. 신부가 고해를 듣는 것도 영화의 관객의 역할과 유사하다. 영화감독은 혼자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작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성취하고, 관객이 영화를 보는 행위도 공공장소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는 하나, 결국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인식을 드러내는 자와 그것을 보는 자의 대응적 소통으로 이루어지는 대화형태라는 점에서는 영화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영화감독은 관객에게 자신의 세계 인식을 고백할 때 고해성사의 화자와 같이 단순하지 않다. 고백을 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쉽사리 밑천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관객의 주의를 지속적으로 끌 수 있는 우회적인 방법을 고안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고안에는 영화감독이외에도 여러 두뇌들이 참여할 수 있다. 또한 영화감독은 고백을 통해 평안을 얻으려 하지도 않으므로, 앞으로 고해할 만한 일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하지 않는다. 관객도 신부의 역할과는 다른 성격의 역을 맡는다. 고백을 들음으로써 화자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 진다는 것은 동일하지만, 짐을 나누어 지는 속셈과 이야기를 들은 후에 나타나는 반응은 신부와 큰 차이를 갖는다. 관객은 지루한 시간과 경험의 간극을 메우고 나아가 세계인식 확대의 실마리까지 찾으려 한다. 또한 신부는 한 번 고백한 신자가 다시 죄를 짓기를 원치 않는 것과 달리 관객은 영화감독이 새로운 영화를 통해 계속 보다 은밀하고 중대한 죄를 짓기를 원한다. 영화 「올드 보이」는 관객의 요구에 힘입어 중대한 죄를 고백하면서도 낱낱이 자백하지 않고 장물을 여기저기 숨겨 놓은 음흉한 고백이다. 이 글은 그 고백을 구성하는 속임수를 가려내어 그 진실을 밝히고 고백자의 정체성을 탐색하는 작업이다.



    2. “넌 누구냐?” 그 대답을 찾아서

    「올드 보이」는 시작하자마자 질문을 던진다. “넌 누구냐?” 고층 아파트 옥상 난간에 넥타이만 잡힌 채 매달린 한 남자가 오대수에게 하는 말이다. 이 질문은 이 영화의 서사가 진행할 방향을 집약적으로 제시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구하는 데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다음 시퀀스에서 술에 취한 오대수가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밝히며 주정을 하는 모습이 경찰이 보는 각도에서 프리즈 숏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친구 주환 덕분에 경찰서에서 나와 딸에게 줄 천사의 날개를 들고 딸과 통화하던 오대수는 수화기를 친구 주환에게 준 뒤, 카메라가 오대수를 벗어나 주환의 둘레를 180도 도는 사이 우산만 남긴 채 사라진다. 이 장면은 “왜 사라졌을까?”라는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지며, 첫 번째 질문을 강화한다. 남겨진 우산 주위를 헤매며 찾는 주환의 모습과 목소리 위로, 관객을 약올리는 듯 뒤집어지고 갸웃거리며 올라가는 활자들-배우와 스텝들의 이름-은 관객의 궁금증을 자극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오대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더욱 집착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질문이야말로 이 영화의 첫 번째 속임수이다. 15년간 이유를 모른 채 갇힌 오대수는 감금방에서 나오게 되자마자 자신을 가둔 사람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그 사람은 찾아 나서지 않아도 될 만큼 너무나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관객은 이미 오대수를 가둔 자의 시선으로 오대수가 찾아 헤매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오대수가 왜 갇혔는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15년 동안 감금되었다 나와 있는 현재의 상태, 그리고 찾아 헤매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중요한 것이다. 오대수는 연속되는 자신의 행동이 괴물[monster]로서의 현재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인 줄을 모른 채 계속 헤매고 다닌다. 그 과정에서 미도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오대수의 운명과 정체성은 확정되고, 과거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게 되며, 결국 ‘넌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형성되는 것이다.

    즉, “넌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 그 질문은 일반적으로 이미 형성되어진 것, 과거의 것에 대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관객은 오대수와 함께 과거를 헤매게 된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현재에서 미래에 이르는 시간에 준비되어 있다. 그 속임수를 깨닫는 순간 관객은 반전을 체험한다. 이것은 고백자가 한 가지 기표에 두 가지 기의를 기획하는 데서 연유한다. 하나의 기의는 미시적 단위의 맥락에서 볼 때 관객이 예상할 수 있는 것으로 설정되고, 다른 하나는 전체적인 텍스트의 맥락에서 추론을 통해야만 드러나는 것으로 숨겨진다. ‘너는 누구냐?’고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표면적으로는 ‘과거의 나’를 묻는다는 의미와 그 이면에는 ‘현재부터의 나’를 묻는다는 의미가 처음부터 들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전자는 속임수이고 후자는 진의(眞意)이다. 그 진의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조금씩 드러나는 것이기에 미시적 단위의 축적을 통해 의미를 파악하는 관객은 계속적인 반전을 체험할 수밖에 없다. 「올드 보이」는 이러한 반전의 반복으로 진행된다. 「올드 보이」의 정체성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텍스트의 맥락에서 이러한 속임수와 진의를 해체하는 작업이 선결되어야 한다.



    3. 이 영화는 복수극이다?

    「올드 보이」의 속임수와 진의를 파악하려면 이 영화가 드러내는 기표에 대해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기의부터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이 영화가 복수극인가?’라는 것이다. 복수극의 역사는 길다. 그러면 우선 전통적인 복수극의 기초 문법부터 짚어 보겠다. 전통적인 복수극은 인생을 결정지을 만큼 매우 소중한 사람들, 예를 들면 아버지, 어머니, 동생이나 누이 등의 혈육, 또는 연인을 잃은 주인공이 뼈를 깎는 고통을 참고 견디며 재주를 연마한 끝에 자신에게 고통을 준 장본인을 찾아가 파멸시키고 명예를 되찾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소설 ?유충렬전?부터 현재 개봉중인 ?킬 빌?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복수의 서사가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올드 보이」에서 서사의 대부분은 오대수가 자신을 15년 간 감금한 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찾아 헤매는 과정으로 이루어지므로 일종의 복수극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누이를 잃은 이우진이 누이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려 누이를 자살로 이끈 장본인을 찾아 고통을 준다는 점에서도 전통적인 복수의 서사를 따르고 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게다가 박찬욱 감독은 전작 ?복수는 나의 것?에서부터 ‘복수’가 매우 흥미로운 모티브임을 밝혀왔고, 「올드 보이」는 많은 부분에서 전작을 연상시키곤 한다. 이러한 점도 이 영화를 복수극으로 파악하는 데 일조한다.

    「올드 보이」가 진정 전통적인 복수극이라면 마지막에 이우진이 오대수의 손에 죽임을 당하거나, 오대수가 이우진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한다. 그러나 복수의 마지막 문턱에서 오대수는 무릎을 꿇고 자신의 혀를 자르고, 누이를 잃은 동생은 그러한 오대수를 죽이는 게 아니라 자기를 죽인다. 여기에 이르러 이 영화가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런 게임이 있다. 페르시아의 왕자는 모래시계의 시간이 다하기 전에 마법사의 수중에 있는 자신의 연인인 공주를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주는 마법사와 결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왕자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지하 감옥으로 잠입해 들어가 그녀가 갇혀 있는 성의 맨 꼭대기까지 가려 한다.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성 꼭대기로부터 두세 단계 아래에 가면 왕자는 거울을 통과하게 된다. 그런데 그 거울을 통과하면 왕자의 그림자가 생긴다. 그리고 마지막에 힘센 장수들을 모두 물리치고 나면 그 그림자가 왕자를 막아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왕자가 그 그림자를 찌르면 찌를수록 왕자 자신의 에너지가 줄어들어 간다. 결국 그림자가 죽으면 왕자도 따라서 쓰러진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왕자는 이 단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림자를 찌르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그림자를 만나자마자 칼집에 조용히 집어넣고 그에게 다가가 그를 껴안는다. 그러면 그림자와 왕자는 다시 합체되며 그 단계는 저절로 극복된다. 마지막은 생쥐의 도움으로 공주가 감금된 방을 열고 그녀와 상봉하는 것뿐이다.

    이 게임은 단순한 격투기 게임에서 벗어나는 설정을 통해 게임을 하는 사람에게 기발한 재미를 준다. 「올드 보이」도 이 게임과 유사한 재미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거울을 마주보고 서 있는 형상과 같이 이우진과 오대수를 대비시킴으로써 단순한 복수극을 넘어서는 것이다. 마지막에 이우진이 오대수를 죽이지 않는 것은 이우진과 오대수가 실체와 그림자의 관계와 같이 이미 동일한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우진에게 오대수를 죽이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 된다. 오히려 그를 남겨두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복수인 동시에 자신의 분신을 세상에 남기는 의미 있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우진이라는 인물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볼 필요가 있다.

    우진은 지독하게 외로웠다. 그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존재는 누이뿐이었다. 그러나 그 누이와의 관계 때문에 그는 두려웠다. 누이를 잃게 되자 두려움은 없어졌지만 지독한 외로움과 함께, 두려움 때문에 누이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죄책감이 찾아온다. 그는 외로움과 죄책감을 동시에 상쇄할 수 있는 게임을 고안한다. 우선 누나를 상상임신으로 자살까지 이르게 한 소문의 연원인 오대수를 잡아 15년 간 감금하는 것이다. 우진은 대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그가 자신에 대해 복수의 칼을 가는 것을 지켜본다. 우진이 복수하는 세월과 대수가 복수를 꿈꾸는 세월은 이렇게 겹친다. 그리고 그 세월 동안 두 사람은 복수만을 생각하며 산다는 점에서 점점 닮아간다. 마지막에 미도가 대수에게, 우진의 사과를 받고 나면 떠나자고 말하자, 대수가 ‘잘 모르겠다. 이제는 복수가 내 성격이 돼 버렸다’고 말한다. 이는 펜트하우스와 감금방에서 서로만을 생각한 15년의 세월이 두 사나이를 얼마나 닮게 만들었는가를 보여준다.

    이우진은 오대수를 응징하며 자신의 죄책감을 상쇄한다. 따라서 대수에 대한 응징은 결국 자신에 대한 응징과 통한다. 대수를 가두는 것은 자신을 가두는 것이며 대수를 죽이는 것은 자기를 죽이는 것이다. 우진의 행위는 누이를 자살하게 만든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기의 죄책감에 대한 일종의 마조히즘적 복수로 수렴된다. 또한 마조히즘적 복수는 지독한 자기애의 표현이기도 하다. 따라서 오대수는 원수이자 이우진 자신이다. 즉, 외로웠고 이해받고 싶었기에 대수로 하여금 자기와 같은 근친상간의 운명으로 끌어들여 복수를 실현함과 동시에, 자신의 분신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오대수는 이우진이 설계한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제2의 이우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4. 이 영화는 근친상간 문제에 대한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해 의심할 만한 또 하나의 일반적 기의가 ‘근친상간’에 대한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박찬욱은 누이에 대한 남동생의 남달리 극진한 사랑, 딸에 대한 아비의 지독한 사랑을 매개로 복수극을 이어 나간다. 「올드 보이」에서도 같은 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수는 나의 것?은 근친상간에 대한 영화라고 하지 않으면서, 「올드 보이」는 근친상간에 대한 영화라고 말한다. 그 기준은 성관계 여부일 것이다. 단순히 육친 간의 성관계만을 기준으로 이야기한다면 「올드 보이」는 근친상간에 대한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가둔지 15년이 지나자 우진은 대수를 풀어주고 자신을 찾아오게까지 만든다. 그리고 미도라는 여자를 만나 사랑하게까지 한다. 결국 미도는 대수의 딸이라는 사실이 마지막에 밝혀지고, 대수는 그 사실을 미도에게만은 알리지 말아 달라며 자신의 혀를 자른다.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오열인지 대소(大笑)인지 모를 표정을 짓던 우진은 대수의 간청을 들어주고 자살한다. 우진은 왜 미도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을까? 여기에 이 영화가 단순한 근친상간의 영화가 될 수 없는 실마리가 있다.

    이우진은 오대수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만큼 미도와 수아를 동일시한다. 오대수와 도망친 미도를 두고 ‘미도가 정말 오대수를 사랑하게 된 걸까? 그렇게 빨리?’라고 하며 연인을 빼앗긴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은 우진이 미도를 수아와 동일시한다는 것에 대한 단서가 된다. 여기에서 우진이 미도를 해치지 않는 것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우선, 우진은 자신과 누이의 분신이 되어 버린 오대수와 미도를 죽일 이유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과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는 한 쌍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애의 발로이며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생물학적 본능과도 통한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우진의 수아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다. 우진과 수아는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 사랑했다. 그러나, 또한 그래서, 수아는 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 “우진아, 그동안 너도 무서웠지? 그러니까 이 손 놔.”라고 수아가 죽기 직전에 하는 말은 이를 증거한다. 사랑했지만, 알고 있었기에, 죄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러나 너무나 함께 살고 싶었던, 수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우진은 미도에게 비밀을 알리지 않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 악역 이우진에 대한 관객의 공감이 유발된다. 그리고 관객의 공감은 마지막에 우진이 누나의 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다 결국 놓치고 오열하는 모습에서 증폭된다. 이 공감의 정체는 그것이 근친상간이라는 인류 최고의 금기이든 어떻든 간에 지독한 사랑과 연관된다. 그 진정성 앞에서는 이데올로기나 규범과 상관없는 수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로써 이 영화는 매우 에둘러서 제도나 관습, 그것이 무엇이든 결국 진실한 마음 진정한 사랑이 중요한 것이 아니냐는 메시지를 던진다. 이는 그의 첫 장편 ?JSA?를 상기시킨다. 또한 이를 통해, 갖가지 지적인 속임수에도 불구하고 박찬욱의 눈이 제도와 규범을 뛰어넘는 낭만적 열정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따라서 이우진이 “우리는 알면서도 사랑했어요. 너희도 그럴 수 있을까?”라고 하는 것은 고백자의 직접화법에 해당한다. 한편, 이우진과 같은 운명에 놓인 오대수가 살아 남아 관객을 바라보며, “사랑해요, 아저씨”라고 말하는 미도를 껴안는 마지막 숏은, ‘이것도 사랑이라면,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껴안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만이 대수는 아니지 않습니까?’라는 간접화법적 고백일 것이다.



    5. 대답이 아니라 질문을 찾아라!

    이우진은 말한다. “아직도 모르겠어요? 내가 왜 가뒀는지를 묻지 말고 왜 풀어줬는지를 물어야죠.” 이 말에는 이 영화에 대한 독법의 단서가 들어 있다.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답이 아니라 질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의 속임수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서는 오대수와 함께 대답만 찾아 나설 게 아니라 오대수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선을 의심해야 한다. 이 영화의 대부분은 이우진의 시선을 통해 드러난다. 오대수의 행동과 그를 보는 이우진의 시선, 그 시선에 잡힌 프레임의 미장센, 더 나아가 그들을 비추는 고백자의 기획을 함께 의식할 때 이 영화의 저변에 깔린 진의가 드러날 것이다.

    이 영화는 치밀하게 기획된 미장센을 보여준다. 화면을 구성하는 벽지의 무늬나 소품 등이 상징적 암시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예를 들면 오대수가 감금당한 방의 벽에 걸린 인디언 예수의 초상과 미도가 갇힌 방에 걸려 있는 기도하는 천사의 초상, 반복과 관계를 드러내는 기하학적 무늬의 벽지, 만화의 허황된 결투 장면을 연상시키는, 그로 인해 리얼리티에 대한 기대를 접게 만드는 오대수의 망치 결투 장면의 구도, 몇 번에 걸쳐 비쳐지는 가위의 설정 등. 그러나 이러한 미장센을 지나치게 의식하다 보면 텍스트의 진의와 고백자의 정체성을 놓치게 된다. 왜냐하면 이 미장센에는 과대해석을 유발하는 치밀한 속임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장센을 포함하여 「올드 보이」가 보여주는 의장(意匠)의 특징은 대비(對比)이다. 우선, 화면 분할에 의한 대비와 유사한 장면의 대조적 설정이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예를 들면, 화면 분할을 통해 오대수가 복수를 위해 신체를 단련하는 모습과 십여 년 동안의 역사적 사건이 순차적으로 흘러가며, 시간의 경과를 알려줌과 동시에, 일상에서 일탈하여 복수의 일념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제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대비된다. 또한 첫 장면에서 오대수가 잡고 있는 넥타이, 후반부에서 우진이 잡고 있는 수아의 손은 같은 구도의 장면 설정을 통해 대비를 이룬다. 화소 상으로도 대비되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오대수는 ‘말이 많다’는 이유로 15년 동안 감금당하고, 그의 친구 주환은 수아에 대해 떠벌리다 우진에게 살해당한다. 반면, 오대수를 15년 간 감금한 박철우는 우진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다 이빨을 열두 대나 뽑히고, 이우진은 오대수에게만큼은 오대수보다 더 말이 많다. 서사의 진행에서도 예측이 전도되며 앞과 뒤가 대비되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관객은 ‘미도는 우진의 사람이다’, ‘아니다’, ‘박철우는 대수편이다’, ‘아니다’, ‘우진이 누이를 죽였다’, ‘아니다’ 등의 전도를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대비를 이루는 두 요소의 충돌은 끊임없이 의혹을 유발하며 관객을 긴장시키고 당황시킨다. 이것은 코끼리 맴을 몇 번 돌고 나면 어지러워서 비틀거리며 방향을 찾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경험과 유사하다.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다 보면 이 영화는 난해한 텍스트라고 오인되기 쉽다.

    그러나 이 영화는 대비와 전도, 그로 인한 반전이 반복되면서 일정한 패턴을 이룬다. 알고 보면 그 패턴은 단순하다. 미장센도 대비적 구도로 패턴을 이루며 전체 구성에 충실하게 복무한다. 결국, ‘그렇다, 아니다’의 단순한 대비가 반복됨으로써 오대수와 이우진의 쌍생아적인 자기동일성을 향해 수렴되어 가는 것이다. 제목 ‘올드 보이(Old Boy)’는 이러한 패턴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올드 보이(old boy)란 다양한 함의를 가지는 말인데, 이 영화와 연관되는 의미로는, 첫째, 명문 출신의 사람이나 과거의 사람, 둘째, 졸업생, 교우, 동창생, 셋째, 악마, 넷째, 친근하게 오랜 친구를 부를 때 쓰는 ‘여보게, 이봐’ 정도의 호칭이다. 대비적 요소를 끊임없이 충돌시키는 이 영화의 형식을 축약하기에 이보다 더 적당한 제목은 없으리라 판단된다. 즉 지금까지 말한 이중적 속성과 속임수의 규칙이 제목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6. 에필로그

    오늘을 대충 수습하면 산다는, 평범한 오대수가 감금방에서 쓰는 악행의 자서전은 대여섯 권에 이른다. 그 앞에는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사필귀정(事必歸正).

    오대수는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했기에, 그리고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되는 죄를 지었기에 스스로 혀를 자른다. 주환은 오대수가 말한 것을 부풀려 말한 장본인이기에 죽는다. 수아와 우진은 인류 최고의 금기 중의 하나를 알면서도 어겼기에 자살한다. 미도는 희생자이기에 아무것도 모른 채 아저씨(?)를 계속 사랑한다. 이러한 설정은 박찬욱의 전작(前作) ?복수는 나의 것?을 다시 연상시킨다. 장기판매업자들은 류를 속여 그 누이를 죽게 했기에 류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류에게 신장을 먹힌다. 류와 영미는 유괴를 했기에 아이의 아비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그 아비는 노동자를 학대한 자본가이기에 노동자들에게 살해당한다. 박찬욱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미시적으로는 무죄지만 거시적으로는 모두 유죄이다. 그들은 사회적 관계 안에서는 필연적으로 유죄가 될 수밖에 없다. 「올드 보이」에서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나, ‘모래알이나 바윗돌이나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은 인간이 불가항력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박찬욱은 사회적 관계를 인간의 존재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인물들은 모두 관계 속에서 숨쉰다. 그리고 그 관계는 개인의 의도나 의지와 상관없이 얽히고 충돌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미한 말이나 행동, 선의에서 비롯된 악행도 결과적으로 죄악이 될 수 있으며 아무리 평범한 사람도 ‘악행의 자서전’을 대여섯 권 쓰는 일이 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시 그는 숨쉴 구멍을 터놓는 듯하다. 즉, 다음과 같은 말이다. “내가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 그러나 이것 또한 봉쇄된다. 이 말을 남긴 사나이는 결국 강아지와 함께 투신하고, 비록 오대수가 이 말로 최면술사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짐승같은 자신을 외면 내지 부정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살기 위해서는 짐승으로서의 자신을 모른 척하거나, 아니면 잊어버린 척 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완강하게도, 그리고 냉정하게도 박찬욱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짐승만도 못한 놈의 살 권리’는 인정하지 않고 만다.

    영화 「올드 보이」는 대답과 함께 질문을 찾아야 하고, 반전의 속임수를 끊임없이 읽어내야 하며, 충돌과 어긋남에서 비롯되는 아이러니를 분석해야 하는 영리한 영화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현란해 보이는 구성, 구도, 장치, 심지어 화려한 소품에까지 현혹되다 보면 「올드 보이」는 매우 기교적인 영화만이 된다. 물론 그것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속임수가 많으면서도 그 저변은 단순하다. 단순하기에 속임수가 많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박찬욱의 난해하고 치밀한 고백 밑에는 ‘이것이 왜 안 됩니까?’와 ‘적어도 이것만은 지켜져야 되지 않겠습니까?’라는 두 가지 질문이 들어 있다. 여기에서 ‘이것’은 바로 ‘경계 없는 사랑’과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알고 보면 다소 허망하게도 질문 안에 이미 그 답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낭만적 열정과 치열한 복수, 추리극적 반전이 혼융되며, 거시적으로는 도덕성의 회복을 말하고 있는, 많은 미덕을 지닌 이 영화에서, 허전함과 함께 헐리우드 키드를 떠올리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박유희

    박유희

    1968년 서울 출생

    1991년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2002년 고려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현재 고려대·대진대 강사

  • “속임수 사이로 자기정체성을 향해”
    강한섭 (서울예술대학 교수, 영화평론가)

    영화평론 부문도 영화흥행 시장에 못지않게 시류와 유행에 민감하다. 금년에도 변함없이 응모자들은 당해연도의 작품들 중 가장 화제가 된 최신 영화를 주로 비평의 대상으로 삼았다. 흑백 고전영화들은 물론이고 1970년대와 80년대 그리고 심지어 90년대의 작품들도 빠르게 잊혀지고 있다. 한국영화는 극장에서 상영이 끝나면 리바이벌 되지 않는 일회용 상품이다. 금년 응모작 29편중 거의 8할이 최신 흥행작 몇 편에 쏠려 있었다. 한국 영화평론의 시야와 관심은 더 넓고 깊어져야 한다.

    커다란 신문사 봉투에 담겨져 택배로 전달된 응모작들을 일별한 다음 봉투를 닫고 이틀을 보냈다. 빨리 읽고 싶다는 가슴 두근거림보다는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다는 무의식의 방어기제가 기승을 부렸다. 영화는 쉽고 재미있는데 평론은 왜 어렵고 지루할까? 물론 영화평론은 감각적인 이미지 안에 숨어있는 의미의 망을 밝히는 이성적인 작업이다. 그러나 요즘 영화평론들에서는 영화라는 생명체는 사라지고 생경하고 난해한 관념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경우가 많다. 평론가가 세상과 영화의 진짜 문제를 끄집어내 목숨을 걸고 승부하면 영화평론도 영화 못지않게 재미있을 것이다.

    당선작으로 [올드 보이]를 평한 박유선의 [속임수 사이로 자기 정체성을 향해]를 골랐다. 응모작들 중 가장 안정된 논리와 글쓰기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 이론가들의 개념에 빠지지 않고서도 지적이면서도 진정성이 보이는 살아있는 평론이었다. 차연우의 [미친 희망의 노래]와 허병민의 [동상이몽의 논리 안에서 꿈으로의 탈주]를 반복해서 읽었다. 전자는 화려하면서도 개성적인 문체가 빛났다. 하지만 정작 분석의 대상이 되는 영화는 잘 안보였다. 후자는 아주 집요한 논리가 돋보였다. 하지만 당선작만큼 흥미롭지는 않았다.
  • 박유희

    박유희

    1968년 서울 출생

    1991년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2002년 고려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현재 고려대·대진대 강사

    기대하지 않았는데 당선이 되어 참 기쁘다. 뽑아주신 심사위원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문학 연구자로 활동하면서 신춘문예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망설여지는 일이었지만, 영화는 나에게 새로운 탐색의 대상이기에 그 출발선을 다시 그어보고 싶었다.

    그동안 문학 공부를 하면서 언어와 소통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 왔다. 이러한 관심은 점차 서사의 수사학에 대한 것으로 확장되면서 다양한 매체의 표현이 나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특히, 현대의 대표적 서사 매체인 소설과 영상 텍스트를 연계하여 탐구하는 것은 나의 학문적 궤적으로 볼 때나, 현재의 문화적 상황에서 볼 때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제, 이 일을 계기로 문화 현장과 보다 직접적으로 소통하고 싶다. 그리고 그 소통을 통해 나의 문제의식을 구체화시켜 나가겠다고 다짐한다.

    고마운 분들을 떠올리니 내 삶이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 새삼 느껴진다. 그 누구보다도 친정 엄마께 감사드리고 싶다. 나의 인문학 활동은 그 분의 노동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어머니의 노동에 조금이라도 누가 되지 않기 위해 항상 성심을 다하려 한다. 그리고 지도교수이신 송하춘 선생님을 비롯한 고려대학교 은사님들, 둘도 없는 가족, 선배와 친구들께 감사드린다. 그 분들의 배려와 관심은 언제나 내게 큰 힘이었다. 그 빚은 살면서 갚겠다. 인문학자로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그 길임을 안다.

    어려서부터 영화는 나에게 큰 즐거움이자 잡히지 않는 꿈과 같았다. 이제 영화를 실컷 볼 수 있는 빌미를 찾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다시 한번 참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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