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제 3 서고 (第 3 書庫)

by  최명훈

  • 작품전문
  • 시놉시스
  • 심사평
  • 당선소감
  • 0. Prologue

    책을 들고 읽고있는 손.
    왼손으로 견고히 책을 떠받치고, 오른손으로 책장을 넘긴다.
    한 장, 두 장... 가만 보면 책장은 거꾸로 넘겨지고 있다.
    오른쪽 페이지를 잡아 왼쪽으로 넘기는 것이 아니라,
    왼쪽 페이지에 들어간 손이 오른쪽으로 넘겨 꾹 누르는 형태...
    정상적인 책읽기를 거꾸로 돌린 것이다.
    점점 속도가 붙어, 이내 손은 책의 표지를 넘긴다.
    표지에 쓰여진 제목 "제3서고"

    1.도서관으로 오르는 계단

    도시가 내려다보인다.
    오밀조밀 빽빽이 들어찬 집들
    그 위로 매연에 가려 희뿌옇게 보이는 산과 잿빛하늘
    계단을 오르는 성진의 머리부터 발까지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커다란 가방을 어깨에 메고,
    마지막 계단을 힘겹게 올라서서 뒤를 돌아보며 숨을 고르는 성진.
    성진의 발 밑으로 200여개의 계단이 펼쳐져있고,
    그 밑으로도 한참이나 긴 내리막길을 지나서야 시끌벅쩍한 시내가 보인다.
    아침 출근시간인지 도로는 차들로 메워져있고, 시끄러운 경적소리로 가득하다.
    성진, 몸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면, 금세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
    왼편으로 정삼각형을 세로로 쪼개놓은 듯한 기하학적인 모양의 도서관 건물이 보인다.
    그 주위에 숲과 벤치로 둘러싸인 공원이 있다.
    공원 한편에는 자그마한 분수대도 있다.
    그리 화려하지 않은 아담한 공원이다.
    성진, 건물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2.도서관 앞 벤치

    더러는 쌍으로, 더러는 혼자 벤치에 앉아있는 사람들.
    성진도 구부정히 앉아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태우고 있다.
    그 앞에는 중년부부가 한가로이 배드민턴을 치고 있고,
    비둘기들이 몰려다니며 열심히 땅을 쪼아대고 있다.
    아까 보았던 저 아래 도시와는 다르게 다소 활기가 떨어지는 적막한 풍경이다.
    성진, 다 타들어간 담배불똥을 튕기고
    종이컵에 남은 커피를 아쉬운 듯 한참 들여다보곤
    도서관 출입구를 향해 걸어간다.

    3.도서관 / 2층 열람실

    책장들로 길게 늘어선 서가의 통로들이 하나하나 부감으로 지나쳐간다.
    서가를 정리하는 사람, 책을 펼쳐들고 보는 사람...
    그런 도서관의 전형적인 풍경들도 함게 지나쳐간다.
    어디서부턴가 서가가 없이 텅 빈 공간이다.
    가만 시선을 더 내려보면, 벽에 덩그러니 시계 하나가 걸려있고,
    무슨 요새처럼 서가 중간에 6인용 탁자가 하나 놓여져 있다.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의 회전소리만 들릴뿐 열람실은 적막 그 자체다.
    탁자에 앉아 책을 읽고있는 성진,
    그 주위로 몇 명의 사람들도 보인다.

    4.동 / 2층 열람실

    책을 펼쳐들고 앉아있는 성진, 꾸벅꾸벅 졸고 있다.
    이따금 고개를 쳐들어 머리를 흔들곤 다시 책을 노려본다.
    그의 시선으로 책을 보면, 또렷한 활자들이 가물가물해진다...
    책장이 선풍기 바람에 몇장 넘어가면 다시 또렷한 활자가 보인다...
    읽던 곳을 찾아 책장을 반대로 넘기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다시 가물가물해지고...
    이러기를 몇 번인가 반복하다가...

    쾅!

    화들짝 놀라 순식간에 정렬되는 활자들!
    성진과 사람들, 멍한 표정으로 소리의 진원을 쳐다본다.
    자신의 키높이만큼 쌓은 책들을 거칠게 책상 위에 올려놓은 손.
    책에 가려 사람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성진 고개를 빼 바라보면, 보통키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남자가 보인다.
    남자, 한여름인데도 몇 년 동안 빨지 않은 듯한 두툼한 잡바를 입었다.
    수염과 머리가 덥수룩하게 얼굴을 뒤덮고 있고,
    손과 얼굴은 때꾸정물이 줄줄 흐른다.
    남자,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또다시 소리내어 의자를 빼서 털썩 주저앉는다.
    옆에 있던 여자, 남자를 보더니 불결하다는 듯 코를 싸쥐고 일어난다.
    성진, 주의를 주려는 듯 남자를 쳐다보는데,
    남자도 쾡한 눈깔로 성진을 응시한다.
    성진, 순간 겁을 먹고는 도로 자신이 읽던 책 속으로 고개를 쳐박는다.

    남자, 고개를 좌우로 한 번씩 꺾더니, 쌓아놓은 책의 맨 위에 것을 빼서 펼친다.
    표지를 펼치고, 하나하나 페이지를 넘기는 남자의 때묻은 손.
    이윽고 속도를 붙여 거칠게 표지를 넘기기 시작한다.
    한 장도 빼먹지 않고 빠르게 넘기는 남자, 도통 글자는 읽지 않는 것같다.
    간헐적으로 '벅벅' 끔찍한 소리를 내며 몸 여기저기를 긁기도 한다.
    그렇게 다 넘긴 책을 자신의 왼쪽에 두고, 다시 새책을 꺼내 같은 방법으로 읽는 남자.

    옆에서 책을 읽고있던 안경 낀 남자도 못 참겠는지 신경질적으로 책을 덮고 일어선다.
    넓은 탁자에 오롯이 둘만 마주앉아있는 남자와 성진.
    성진, 인내하며 책 속에 시선을 둔다.

    한 순간, 남자의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벅벅 긁는 그 끔찍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성진, 책 너머로 눈만 살짝 치켜떠 남자를 본다.
    쾡한 눈으로 성진을 노려보고 있는 남자.
    성진, 황급히 다시 책 속으로 시선을 거둔다.

    다시 책장 넘기는 소리가 계속되고...
    다시, 뚝 멈춘다.
    성진, 다시 남자를 쳐다보는데...
    역시 남자는 성진을 응시하고 있다.
    성진, 혹시 남자가 다른 곳을 보고있는 것이 아닌지
    자신의 시선을 옆으로 살짝 돌려보지만,
    남자의 시선은 집요하게 성진을 향해 따라오고 있다.

    마침, 성진의 바지 속에서 핸드폰 진동소리가 울린다.
    진동소리를 핑계로 서둘러 일어나는 성진.
    남자의 시선은 계속해서 성진에게 꽂혀있다.

    5.도서관 주위 산책공원

    분수대가 힘차게 물줄기를 뿜고 있다.
    유모차를 끌고 온 사람들, 노인들, 하릴없이 벤치에 앉아있다.
    붉은 포대기에 손주를 업고있는 희끗한 머리의 할아버지가 이채롭다.
    전화기를 든 채, 담배를 물고 거닐고 있는 성진.

    성진 : 차라리 60년대 소설 전체를 하는게 좋지 않을까요?
    소리 : 그 사람이 굳이 김승옥만 하겠다는데 어떻게 해. 한번 만나볼래?
    성진 : 아니요. 피차 얼굴 봐서 좋을 건 없잖아요. 그냥 그렇게 하죠 뭐...
    소리 : 그래, 큰거니까 신경좀 써주고... 석달 후에 심사라니까 좀 서둘러주고... 돈은 예전 그 계좌로 넣어주면 되지?
    성진 : 예.
    소리 : 그럼, 부탁해.

    성진, 전화를 끊고 분수대의 물줄기를 바라본다.

    6.도서관 / 2층 열람실

    오전에 자신의 앞자리에 앉아있던 남자는 엎어져 잠이 들어있다.
    어린애처럼 두 손을 사타구니에 낀 채,
    고개를 옆으로 뉘여 잠들어있는 것이 약간은 귀여운(?) 것도같다.
    책상 위에는 그가 읽은(?) 책과 안읽은 책의 비율이 반반이다.
    좌우로 높다랗게 쌓인 책에 파묻혀 잠들어있는 남자...
    자면서도 이따금 몸 여기저기를 벅벅 긁는 것은 끊이지 않는다.
    남자의 냄새때문인지 6인용 탁자 주위엔 아무도 앉아있지 않다.
    성진, 조심스레 다가가서 자신이 읽던 책을 집어든다.

    7.도서관 / 도서검색대

    조그마한 모니터와 키보드로 이루어진, 도서를 검색할 수 있는 단말기가 몇 대 놓여있다.
    키워드에 '김승옥'을 쳐넣는 성진.
    몇 권의 발행년도와 출판사, 청구번호, 서가위치가 뜬다.
    옆에 놓인 메모지에 '1966, 심지출판사, 제3서고'라고 휘갈겨 쓰는 성진.

    성진 :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3서고?

    8.도서관 입구

    도서관 배치도가 나와있는 커다란 유리판넬 앞에 서있는 성진.
    구석구석 다 둘러보지만 '제3서고'는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찾아도 지하에 있는 제1서고, 제2서고뿐이다.

    9.도서관 안내데스크

    이어폰을 낀 채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남자.
    공익근무요원 특유의 연두색 윗도리를 입고 있다.

    성진 : (앞으로 다가가) 저... 수고하십니다. 뭐쫌 여쭤볼게요.
    공익근무 : (이어폰을 벗으며) 예?
    성진 : 여기 제3서고라고 어디있는지 아세요?
    공익근무 : (고개를 갸우뚱하며) 글쎄요...혹시 지하에 있는 1,2 서고 아니에요?
    성진 : 아니, 제3서고라고...
    공익근무 : 제가 알기로는 3서고는 없는 걸로 알고있는데요.
    성진 : ...그래요? 분명 제 3서고라고....
    공익근무 : ?
    성진 : ...아무튼 잘 알았습니다.

    성진, 고개를 꾸벅하고 돌아서려는데...

    공익근무 (귀에 이어폰을 꼽다말고) 저, 혹시 모르니까, 2층 열람실에 가서 한번 물어보세요.

    10.도서관 / 2층 열람실 대출대

    사서여자와 성진 마주보고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여자 : 3서고에는 너무 낡아서 볼 수 없는 책들을 보관하고 있거든요. 찾으시는 책이 아마 여기 열람실에도 있거나, 오래된 책이라면 1,2서고에 다 있을 거에요.
    성진 : 저...그게... 60년대에 나온 초판본을 봐야되는 거라서요. 꼭 필요해서요. 어떻게 안되겠습니까?
    여자 : (웃으며) 그 책에 돈이라도 끼워놓으셨어요? 정 그러시다면 할 수 없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여자, 자리에서 일어나 뒤에 케비넷을 연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열쇠들로 가득하다.

    여자 : (다가와 열쇠를 하나 내밀며) 여깄어요. 나오실 때 잠그는 거 잊지마세요.
    성진 : 예...
    (돌아서 가다말고 다시 와서) 저...그런데...그 제3서고가 어디 있죠?

    11.도서관 / 지하계단

    어두침침한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는 성진.
    널찍한 지하 계단이 보이면, 양쪽으로 철문이 하나씩 나있다.
    왼편으로는 제1서고, 오른편으로는 제2서고라는 오래된 팻말이 보인다.
    제2서고의 철문을 열고 들어가는 성진.
    끼잉~ 철문 여는 소리가 요란하다.

    12.도서관 / 제2서고

    문을 열고 들어서는 성진.
    천장으로는 갖가지 크고 작은 파이프들이 지나다니는 것이 보이고,
    푸른 빛이 도는 조명 밑에 빽빽이 들어찬 책장들과 그 속의 책들로 가득 차있다.
    뭔가 시체라도 툭 튀어나올 듯한 스산한 분위기다.
    조심스레 발을 떼는 성진.
    한발작 한발작 다가가면서 두리번두리번 양옆의 어마어마한 서가를 올려다본다.

    이윽고 또 다른 철문 앞에 서는 성진.
    '관계자외출입금지'라는 빨간 사선이 그어진 팻말과 함께
    어른 주먹만한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져있다.
    '제3서고'라고 쓰여진 표식은 어디에도 없다.
    성진, 들고있던 열쇠를 자물쇠에 맞춰본다.
    철컥~

    13.도서관 / 제3서고

    아무런 불빛도 들어오지 않는 암흑 그 자체다.
    철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푸른 빛이 사선을 그으며 드리워진다.
    다가서는 성진의 검은 그림자.
    성진, 손으로 문 옆의 벽을 훑는다.
    딸깍!
    순간, 꿈벅이며 천장의 형광등이 들어오면, 앞에 웬 남자 하나가 서있다.
    화들짝 놀라, 뒤로 자빠지는 성진.
    엉덩방아를 찧은 상태에서 자세히 보면, 앞에 깨진 거울이 하나 있고,
    그곳에 놀란 얼굴의 성진이 비춰져있다.
    휴, 한숨을 내쉬고 자신의 겁먹은 표정이 우수운지 씁쓸하게 웃어보곤 주위를 둘러본다.

    형광등은 오래되었는지 여기저기서 파드득, 파드득 깜박인다.
    여전히 천장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갖가지 파이프들이 지나다니고...
    2층 열람실의 책장보다 두 배는 됨직한 높다란 책장이 있고, 오래된 책들로 가득 차있다.
    책장 군데군데에는 높은 곳의 책을 찾을 수 있게 사다리가 놓여있다.
    성진, 난감한듯 한 숨을 내쉰다.

    14.동, 제3서고

    성진이 책을 찾고있는 것이 부감으로 보인다.
    고정된 카메라에 시간만 흘러가는 것이 오버랩으로 보인다.
    책장 여기저기에 흩어져 책을 찾고있는 성진.

    사다리 맨 꼭대기에 올라가 책을 찾고있다.
    드디어 한 권을 힘차게 골라 빼든다.
    뽀얗게 한 움큼의 먼지도 같이 따라나온다.
    손으로 먼지들을 내저으며 콜록댄다.
    성진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책을 덮고 막 사다리를 내려오려는 찰나, 사다리가 우지끈 부러진다.
    책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지는 성진.

    바닥에 머리를 부딪히고 의식을 잃는다.
    저만치 나동그라진 책은 펼쳐진 채로 있다.
    난데없이 어디선가 휭~ 바람이 불어온다.
    쾅!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책장이 후루룩 빠르게 날린다.
    깜박이던 형광등마저 '퍽' 소리를 내며 나간다.
    암전~

    15.소설 '서울 1964년 겨울' / 포장마차

    겨울의 을씨년스러운 밤거리다.
    길거리에 늘어선 포장마차들과 카바이트 불빛이 일렁인다.
    포장마차 안에서 군용잠바를 입은 남자가 목장갑을 끼고 연탄불에 참새구이를 뒤적이고 있다. 그 앞에 나란히 앉은 안형과 나(성진), 그리고 가난해보이는 사내.
    소설 속에 나오는 그대로 안형은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있고,
    사내는 깨끗한 코트를 입고, 머리에 기름도 발랐지만 가난뱅이 냄새가 난다.

    성진 : 평화시장 앞에 줄지어 선 가로등들 중에서 동쪽으로부터 여덟 번째 등은 불이 켜있지 않습니다.
    안형 : ...?
    성진 : 그리고 화신백화점 육층의 창들 중에서는 그 중 세 개에서만 불빛이 나오고 있습니다.
    안형 : 크크크... 서대문 버스정거장에는 사람이 서른 두 명 있는데 그 중 여자가 열일곱 명이었고, 어린애는 다섯 명 젊은이는 스물한 명 노인이 여섯 명입니다.
    성진 : (놀라) 그건 언제 일이지요?
    안형 : 오늘 저녁 일곱시 십오분 현재입니다.
    성진 : 아... 단성사 옆 골목의 첫 번째 쓰레기통에는 초콜릿 포장지가 두 장 있습니다...

    두 사람의 이런 알 수 없는 얘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구석에 앉은 사내는 연신 소주잔을 비우고 있다.

    16.동 / 포장마차

    카바이트 불빛이 깜박인다.
    안형과 성진, 취했는지 발그레 달아오른 얼굴이다.

    안형 : 자,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어디 따뜻한 데 가서 정식으로 한 잔씩 하고 헤어집시다. 난 한 바퀴 돌고 여관으로 갑니다. 가끔 이렇게 밤거리를 쏘다니는 밤엔 난 꼭 여관에서 자고 갑니다. 여관엘 찾아든다는 프로가 내게는 최고죠.
    성진 : (쾌활하게) 그럽시다.

    두 사람, 계산을 하려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려는 찰나..
    구석에 찌그러져있던 사내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두 사람을 쳐다본다.

    사내 : (비굴하게) 저... 미안하지만 제가 함께 가도 괜찮을까요? 제게 돈은 얼마든지 있습니다만...
    성진 : 아저씨 술값만 있다면...
    안형 : 함께 가시죠.
    사내 : 고맙습니다.

    성진과 안형, 계산을 마치고 먼저 포장마차를 나선다.
    두 사람, 어깨를 으쓱 해보이며 별일이라는 듯 눈짓을 주고받는다.
    그 뒤를 힘없이 쫓아나오는 사내.

    17.중국집

    칸막이가 쳐있는 중국집 방에 앉아있는 세 사람.

    사내 : 뭣좀 드시죠?
    안형 : 괜찮습니다.
    사내 : (성진을 바라본다)...?
    성진 : 저도 괜찮습니다.
    사내 : 그러지 말고 혼자 먹기 뭐하니까, 좀 시키세요.
    성진 : (장난스레) 아주 비싼 걸 시켜도 괜찮겠습니까?
    사내 : 네, 사양 마시고... 도...돈을 써버리기로 결심했으니까요.
    성진,안형 : ...?
    사내 : ...말씀드리고싶은 게 있는데요. 들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성진과 안형이 궁금하다는 듯 재빨리 고개를 끄덕인다.

    사내 : 사실은 오늘 낮에 제 아내가 죽었습니다.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성진 : 네에...
    안형 : 그거 안되셨군요.
    사내 : 아내와 나는 참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아내가 어린애를 낳지 못하기 때문에 시간은 몽땅 우리 두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돈은 넉넉하진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돈이 생기면 우리는 어디든지 같이 다니면서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딸기철엔 수원에도 가고 포도철엔 안양에도 가고, 여름이면 대천에도 가고, 가을엔 경주에도 가보고, 밤엔 함께 영화 구경, 쇼 구경하러 열심히 극장에 쫓아다니기도 했습니다.
    안형 : 무슨 병환이셨던가요?
    사내 : 급성 뇌막염이라고 의사가 그랬습니다. 아내는 옛날에 급성 맹장염 수술을 받은 적도 있고, 급성 폐렴을 앓은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만 모두 괜찮았었는데 이번의 급성엔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죽고 말았습니다.

    사내, 고개를 숙이더니 울먹인다.
    안형이 성진의 옆구리를 찌르며 도망가자는 듯 고개짓을 한다.

    사내 : (고개를 들어 눈물 젖은 눈으로) 아내와는 재작년에 결혼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친정이 대구 근처에 있다는 얘기만 했지 한번도 친정과는 내왕이 없었습니다. 난 처갓집이 어딘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었어요.
    안형 : 뭘 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까?
    사내 :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난 서적 외판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돈 사천원을 주더군요. 두 분을 만나기 얼마 전까지도 세브란스병원 울타리 곁에 서 있었습니다. 아내가 누워 있을 시체실이 있는 건물을 알아보려고 했습니다만 어딘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냥 울타리 곁에 앉아서 병원의 큰 굴뚝에서 나오는 희끄무레한 연기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어떻게 될까요, 학생들이 해부 실습하느라고 톱으로 머리를 가르고 칼로 배를 찢고 한다는데 정말 그러겠지요?

    안형관 성진은 고개를 숙인 채, 사내의 말을 듣고만 있다.

    사내 : (눈물을 훔치고 애써 웃으며) 기분 나쁜 말을 해서 미안합니다. 다만 누구에게라도 얘기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한 가지만 의논해보고 싶은데, 이 돈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오늘 저녁에 다 써버리고 싶은데요.
    안형 : 쓰십시오.
    사내 : 이 돈이 다 없어질 때까지 함께 있어주시겠어요?
    안형,사내 : ...
    사내 : 함께 있어주십시오. 멋있게 한번 써봅시다!

    그때 중국집 사환이 요리 한 상을 차려 들고온다.

    18.양품점

    비틀거리며 사내가 들어온다.
    사내, 뒤를 돌아보면 문밖에 안형과 성진이 서있다.
    사내 나가서 두 사람을 끌고 들어온다.
    진열대의 넥타이를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꺼내놓는다.

    사내 : (혀가 꼬여) 넥타이를 골라 가져! 내 아내가 사주는 거야!

    안형과 성진, 몹시 당황스런 기색이다.

    19.거리

    사내, 지나가는 택시를 잡으려 도로에 나와있다.
    안형과 성진은 쇼핑백 하나씩을 들고 그 뒤에 서있다.

    사내 : 택시!

    택시가 서자, 사내와 성진, 안형이 차례로 탄다.

    사내 : 세브란스로!
    안형 : 안 됩니다. 소용 없습니다.
    사내 : 안될까? 그럼 어디로?

    그때, 소방차 하나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질주한다.

    사내 : 저 소방차 뒤를 따라갑시다.
    성진 : 지금 불구경하러 가고 있는 겁니까?
    사내 : ...

    성진과 안형, 서로를 쳐다본다.

    20.화재장소

    2층짜리 건물에 불이 나있다.
    아래층 페인트가게에서 난 불이 이층 미용학원에 옮겨붙고 있는 중이다.
    소방차 호스에서 세찬 물줄기가 건물을 향해 뿌려지지만 역부족으로 보인다.
    소방차와 경찰차, 구경꾼들로 주위는 아수라장이다.
    멀리 한 켠에 세 사람이 나란히 페인트통을 깔고 앉아 불구경을 하고있다.
    세 사람의 눈동자에 건물의 불이 일렁이는 것이 보인다.
    특히나 사내의 충혈되고 쾡한 눈에 불이 번진다.

    사내 : (벌떡 일어나 불길을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내 아냅니다.
    성진 : (일어나 사내를 말린다.)
    사내 : (성진을 뿌리치고, 넋이 나가) 내 아내가 머리를 막 흔들고 있어요. 골치가 깨질 듯이 아프다고 머리를 막 흔들고 있다구요. 여보!
    성진 : 소용 없어요. 아저씨!

    사내, 이내 풀이 죽어 자리에 앉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불을 향해 던진다.
    구경꾼들을 통제하던 순경이 하나 달려온다.

    순경 : (사내를 손가락질하며) 당신! 방금 뭘 던졌어?
    사내 : 아무것도 안 던졌습니다.
    순경 : 뭐라구? 내가 던지는 걸 봤단 말이야! 뭘 던졌어?
    사내 : (체념한 듯 고개를 숙여) 돈입니다.
    순경 : 돈?
    사내 : 돈과 돌을 수건에 싸서 던졌습니다.
    순경 : (성진과 안형을 돌아보며) 정말이야?
    성진 : ...예 돈이었습니다. 이 아저씨는 불난 곳에 돈을 던지면 장사가 잘 된다고 믿습니다. 말하자면 좀 돌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나쁜 짓은 결코 하지 않는 장사꾼입니다.
    순경 : 돈은 얼마였어?
    안형 : 일원짜리 하나였습니다.

    순경, 주위를 주듯 세 사람을 둘러보곤 다시 화재간 난 곳으로 달려간다.

    안형 : 결국 그 돈은 다 쓴 셈이군요... 자, 이젠 그럼 약속이 끝났으니 우린 가겠습니다.
    성진 : ...안녕히 계십시오.

    안형과 성진, 사내를 혼자 남겨놓고 일어나서 걷는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내, 벌떡 일어나 두 사람에게 달려온다.

    사내 : (안형과 성진의 팔을 붙잡고) 나 혼자 있기가 무섭습니다.
    안형 : 곧 통금시간입니다. 난 여관으로 가서 잘 생각입니다.
    성진 : 난 집으로 갈겁니다.
    사내 : (애원하듯) 함께 갈 수 없겠습니까? 오늘 밤만 같이 지내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잠깐만 절 따라오세요.

    사내, 성큼성큼 앞서 걷는다.
    성진과 사내, 꿈쩍하지 않는다.
    사내,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한다.

    21.대문 앞
    멀찍이 가로등 아래 안형과 성진이 서있고, 사내가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른다.
    이층집에 불이 켜지고, 누군가 대문 앞으로 걸어나온다.
    식모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눈을 부비며 나온다.

    사내 : 주인아저씨를 뵙고싶은데요.
    식모 : 주무시는데요
    사내 : 그럼 주인 아주머니는?
    식모 : 주무세요.
    사내 : 꼭 뵈어야겠는데요.
    식모 : 그럼, 기다려보세요.

    식모가 안으로 들어가면,
    안형과 성진이 사내에게 다가온다.

    안형 : 그냥 가시죠?
    사내 : 괜찮아요. 받아야 할 돈이니까요.

    멀리 인기척이 나고, 중년의 여자가 다시 나온다.

    사내 : (꾸벅 인사하며) 밤늦게 죄송합니다.
    여자 : (덜 깬듯한 못소리로) 누구시죠?
    사내 : 죄송합니다. 이렇게 너무 늦게 찾아와서 실은...
    여자 : 누구세요? 술 취하신 것 같은데...
    사내 : 월부 책값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여자 : (어이없어) 예?
    사내 : (동네가 떠나갈 듯 큰소리로) 월부책값 받으러 온 사람이라구요!
    여자 : 참, 나...
    (대문을 쾅 닫으며) 내일 낮에 오세요!
    사내 : (닫힌 대문을 쾅쾅 두드리며) 월부책값 내놔! 내 월부책값 내놔!

    안형과 성진, 놀래서 서둘러 달려와 사내를 말린다.
    두 사람이 팔을 잡고 끌고가자, 발로 대문을 차며 계솟 고함을 지르는 사내.
    반항하던 사내의 몸이 어느 순간 힘이 쑥 빠진다.
    서서히 사내의 팔을 놓는 안형과 성진.

    사내 : (대문에 얼굴을 박고 흐느끼며) 월부 책값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월부 책값!... 여보!...흐흐흑....

    사내, 대문 앞에서 주저앉아 흐느낀다.
    안형과 성진, 찹찹하게 지켜보고만 있다.

    22.여관

    현관입구에 붉은 등이 켜있고,
    조그만 유리문 안에는 졸려 죽겠다는 표정의 여자가 앉아있다.

    성진 : (고개숙인 사내를 바라보며) 모두 한 방에 드는게 좋겠지요?
    안형 : 난 지금 아주 피곤합니다. 방은 각각 하나씩 차지하고 자기로 하지요.
    사내 : 혼자 있기가 싫습니다.
    안형 : 혼자 주무시는 게 편하실 거에요.

    안형이 지갑을 꺼내 유리문 안에 돈을 내밀자,
    여자가 키 세 개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드링크 세 개를 내민다.
    안형이 키와 드링크를 배분한다.

    성진 : 화투라도 사다 놓을까요?
    안형 : 난 아주 피곤합니다. 하시고 싶으면 두 분이나 하세요.

    안형이 먼저 계단으로 사라진다.

    성진 : (사내를 바라보며) 나도 피곤해죽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사내, 혼자 남겨진 채 손에 들린 키와 드링크를 바라보고 서있다.

    23.성진의 여관방

    성진, 자리를 펴고는 드링크제를 마시고, 옷 입은 채로 눕는다.
    다시 일어나 형광등에 대롱대롱 매달린 스위치를 끄고는 눕는다.
    잠이 안오는지 이리저리 뒤척이는 성진.

    성진 : (갑자기 벌떡 일어나) 이건 소설이야!

    24.안형의 여관방

    다급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안형 : (자리에서 일어나 문앞으로 다가가) 누구세요?
    성진(소리) 접니다.

    안형, 문을 열기가 무섭게 성진이 들이닥친다.

    안형 : 왜 그러세요?
    성진 : (다급히 옆방을 가르키며) 저 아저씨는 내일 아침에 죽습니다.
    안형 : 무슨 소리에요?
    성진 : 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이건 소설이에요.
    안형 : 네?
    성진 : 소설에 그렇게 나와있다구요.
    안형 : (피식 웃으며) 그래서 어쩌자는 겁니까?
    성진 : 어쩌긴요... 자살하는 걸 막아야죠.
    안형 :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을 어떻게 막습니까?
    성진 : 뭐라구요? 그럼 알고있었단 말입니까?
    안형 : 그럼요... 그래서 함께 자자고 한걸 혼자 자게 내버려둔 거 아닙니까?
    성진 : (안형의 멱살을 잡으며) 뭐? 이런 인간말종같은 새끼! 사람이 죽는다는데...
    안형 : (성진의 멱살을 맞잡고) 이거 왜 이래? 살리고싶으면 니가 가서 살리면 될꺼 아냐?
    성진 : ...!

    안형, 자신의 멱살을 잡고있던 성진의 팔을 뿌리치고 도로 눕는다.
    성진, 아차싶어 재빨리 옆방으로 달려간다.

    25.사내의 여관방

    성진, 문을 열면 사내가 가지런히 누워있다.
    사내의 얼굴은 이미 핏기가 가신 상태다.
    머리맡에 드링크제와 함께, 농약병으로 짐작되는 약통이 하나 놓여있다.
    성진, 조심조심 다가가 사내를 흔든다.
    사내, 맥없이 얼굴이 휙 쳐지더니, 입술에서 토사물들이 흘러나온다.
    성진, 놀라 뒷걸음질을 친다.

    26.거리

    어디선가 통금을 알리는 긴 사이렌 소리와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모든 가게와 집은 불이 꺼져있고, 성진 혼자만이 대로에 남아 갈피를 못잡고 방황한다.
    성진, 멀리 희미하게 불빛이 보이는 것을 보고, 그곳으로 달려간다.

    27.거리 노점 서점 앞

    리어카에 가득 책을 얹어놓고 파는 노점 서점이다.
    곳곳에 카바이트를 켜두어 주위는 대낮같이 환하다.
    구석에 조그만 낚시의자에 앉아 꾸부정하니 책을 읽고있는 노인이 보인다.
    성진이 다가가자 노인이 얼굴을 든다.
    쭈글쭈글한 주름과 온통 검버섯 투성이인 흉측한 얼굴이다.
    노인이 성진에게 책을 하나 내민다.
    성진, 어떨결에 책을 받아보면 제3서고에서 찾았던 그 책이다.
    성진, 깜작 놀라 노인을 본다.
    노인, 이빨빠진 입을 헤~ 벌리며 웃더니 어서 펴보라고 눈짓을 한다.
    성진이 책을 열자,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나온다.
    - White Out.

    28.제3서고 (현실)

    바닥에 떨어진 책은 펼쳐진 채로 계속해서 바람에 날린다.
    순간, 바람이 멎었는지 날리기를 멈추는 책.
    쓰러져 있던 성진, 손가락이 꿈틀거리더니 이내 눈을 뜬다.
    천장에는 여전히 형광등이 깜박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잠시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던 성진,
    서서히 일어나려다 이제야 통증이 느껴지는지 부딪힌 이마를 짚는다.
    계속 이마를 문지르며 주위를 둘러보는 성진.
    옆에는 사다리가 부러진 채 넘어져있고,
    한쪽에 책이 놓여있다.
    성진, 떨어진 책을 주워든다.
    그리고 멍한 표정으로 터벅터벅 걸어나간다.
    철문 앞까지 가서 잠시 뒤를 돌아보는 성진

    29.도서관 / 2층 열람실

    6인용 탁자에는 여전히 그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사내가
    더러운 잠바를 입고 책을 읽고(?)있다.
    성진이 대출대로 다가와 열쇠꾸러미를 여자사서에게 내민다.
    잠시 책에서 눈을 떼고 목을 벅벅 긁고있던 사내, 성진과 열쇠를 보더니 깜짝 놀란다.

    여자 : 책은 찾으셨어요?
    성진 : ...
    여자 : 책은 찾으셨냐구요?
    성진 : 아, 예... 여기.
    여자 : 가지고 나오셨어요? 죄송하지만, 3서고에 있는 책은 대출이 안되는데요.
    성진 : 참고할게 있어서 그러는데 어떻게 대출좀... 안될까요?
    여자 :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여서요.
    정 필요하시다면, 저기서 읽으세요.

    여자사서, 6인용 탁자를 가르킨다.
    성진, 그곳을 보면 아까 봤던 사내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사내, 성진과 여자가 자신을 쳐다보자 황급히 책 속으로 얼굴을 파묻는다.
    사내 왠지 모르게 손이 떨리고, 허둥댄다.

    성진 : 아니요...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이 책은 여기에 잠시 보관해주시겠어요?
    여자 : 그러죠 뭐.

    성진, 열람실을 빠져나가면,
    곁눈으로 보고있던 사내, 얼른 책을 덮고 성진을 따라 나선다.

    30.도서관 주위 산책공원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공원이다.
    성진,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태우며 노을이 지는 석양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그 뒤에 숨어서 가만 성진을 지켜보던 사내, 슬금슬금 성진에게 다가간다.
    그때 갑자기 울리는 성진의 휴대폰.
    사내, 화들짝 놀라 왔던 길을 도로 돌아간다.

    성진 : 어... 병관이? 웬일이야?
    병관(소리) : 오늘 동기회잖어.
    성진 : 그...그래? 난 오늘 좀 힘들겠는데...
    병관(소리) : 자식 또 뺀다. 얼굴좀 들이밀어봐. 다들 너 어떻게 사느냐고 궁금해서 난리야. 나영이 결혼식도 있고...
    성진 : ....
    병관(소리) : 내가 총무니까 너 회비는 빼줄게. 사정도 뻔히 아는데...
    성진 : 그래서 그런게 아니라...
    병관(소리) : 아무튼 너 자리까지 예약해놨으니까 꼭 나와! 이만 끊는다!
    성진 : 여보세요...여보세요...

    31.인사동 한정식집

    길다란 테이블에 십여 명의 남자, 여자들이 뒤섞여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다.
    중간 중간 술잔도 오가고 있다.
    어떤 여자는 세 살쯤 되어보이는 아이 하나를 옆에 앉혀놓고 밥을 먹이고 있다.
    구석자리에 꿔다놓은 보리짝처럼 앉아 밥을 먹고있는 성진.
    다들 양복차림이지만, 성진만 추레한 잠바를 입고 앉아있다.
    이들이 주고받는 얘기는 연봉과 자동차에 대한 얘기뿐이다.

    병관 : 자...자...자... 밥들 다 먹었지? 그나저나 주인공이 왜이리 안와?
    여자 : 기집애, 학교 때부터 유명했잖어. 나영이 때문에 기차 놓쳐서 우리 엠티도 못갔잖아.
    남자1 : 맞어. 맞어. 그래서 준비해간 라면이랑 버너랑 술이랑 잔뜩 숨겨서 학교 앞에 여관으로 갔다가... 한밤중에 여관 주인한테 쫓겨났고.
    남자2 : 캬... 그나저나 나영인 내가 좋아했는데, 도대체 누가 채간 거야?
    남자1 : 이 새끼는 동기가 결혼만 할려고 하면 좋아했대. 너가 안 좋아했던 여자가 누구야?
    남자2 : 쓸데없는 소리 말고... 누구야?
    여자 : 몰랐어? 우리 5년 선배래. 애들 말로는 내년에 정년퇴임하시는 최교수님 자리 물려받을 거라는데..

    성진, 구석에서 얼굴이 일그러진다.
    병관, 슬쩍 성진의 얼굴을 보고 화제를 돌리려고 하는데...

    남자1 : 그래? 나영이가 그렇게 박사, 박사 찾더니 소원성취했네?

    그때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영.
    그 뒤로 멀쑥한 차림에 금테안경을 쓴 제법 귀티나는 남자도 같이 들어선다.

    나영 : (호들갑 떨며) 미안해...미안! 오늘 야외촬영이었거든. 끝나자마자 바로 출발했는데 차가 어찌나 막히던지. 참 우리 자기, 첨 보지? 명준씨야! 자기야 인사해!

    사람들과 명준 서로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는다.

    32.맥주집 (밤)

    불그스레한 조명 아래 불콰해진 얼굴의 사람들 보인다.
    애기엄마는 가고없고, 아까보다 조금 사람이 줄었다.
    여전히 구석에서 맥주잔을 들이키고 있는 성진.
    중심에는 나영과 명준이 나란히 앉아있다.

    남자1 : 야...그럼 나영이가 이제 교수사모님 되는 거네.
    나영 : (흡족하지만) 무슨... 교수가 돈 버는 직업도 아닌데... 앞으로 고생길이지.
    남자1 : 그래도, 우리 중에 젤 출세했네.
    나영 : (구석의 성진을 바라보고) 성진아! 이리 와서 같이 먹어.
    성진 : 어? 어...
    나영 : 넌 어디 강의 안해?
    성진 : 강의는 무슨? 학위도 없는데...
    나영 : 왜? 너 대학원 졸업 안했어?
    병관 : (말 돌리려고) 나영아! 뭐 받고 싶어? 우리 동기회에서 축의금이나 낼 수는 없잖아!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지펠 냉장고만 빼고...
    나영 : 글쎄...자기야! 우리 준비 안한 거 뭐 있지?

    성진, 맥주만 벌컥 들이킨다.

    33.맥주집 / 화장실 (밤)

    세면대에 물을 받아놓고 가만 보고있는 성진.
    눈은 이미 붉게 충혈돼 있다.
    가만 그 안에 머리를 담가본다.

    34.카페 (회상)

    약간 주름이 있는 50대 가량의 손.
    성진 앞으로 하드커버의 논문을 하나 내밀곤 사라진다.
    성진, 논문을 펴보면 한가운데 봉투가 하나 들어있다.
    빈 봉투다.
    겉봉에 공이 여러개 붙은 숫자가 보인다.
    성진, 한참동안 봉투를 보고있다가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나온다.

    35.맥주집 / 화장실 (밤)

    숨이 차 고개를 번쩍 드는 성진.
    물에 흠뻑 젖은 성진의 몰골이 거울에 비친다.
    그 뒤로 소변기에 오줌을 갈기고 있는 명준의 등짝이 보인다.

    성진 : 요즘은 얼마에요?
    명준 : (고개만 돌리고) 예?
    성진 : 최교수한테 박사논문 받고, 교수까지 되는데 얼마 드냐고요?

    명준, 지퍼를 올리고 성진에게 다가온다.

    명준 : 취하셨군요...

    명준, 별 이상한 놈이라는 듯이 성진을 쳐다보고 나가버린다.
    성진, 주먹으로 거울을 박살낸다.
    갈래갈래 갈라지는 성진의 얼굴.

    36.병원 응급실 앞 (밤)

    병관이 담배를 태우고 앉아있다.
    성진이 손에 붕대를 감고 나온다.

    병관 : 괜찮아?

    성진, 고개만 끄덕이고 걷는다.
    병관, 담배를 끄고 성진을 쫓아간다.

    병관 : 어디 가?
    성진 : 어디 가긴 임마... 집에 가지.

    37.포장마차 (밤)

    성진과 병관 나란히 앉아있다.
    성진, 많이 취했는지 몸이 이리저리 자꾸 쏠린다.

    병관 :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그 자식 최교수한테 얼마 먹였을까?
    성진 : ...
    병관 : 씨발, 강사짓 3년만에 교수될 정도면 억은 먹였겠지?
    성진 : (혀가 꼬인 채로) 왜? 부럽냐?
    병관 : (한숨) 아니... 쓰바! 세상이 좆같아서 그러지.
    성진 : 좆같으면 너도 보따리장사 그만하고 돈이나 벌어.
    병관 : 넌 요즘 뭐 해먹고 사냐?
    성진 : 크크... 킬러!
    병관 : 킬러? 좆까는 소리 하네!
    성진 : 내가 하는 일이랑 킬러랑 공통점이 뭔줄 알어?
    병관 : ...?
    성진 : 첫 번째, 일단 의뢰인의 얼굴을 모른다는 거지.
    병관 : (궁금해) 무슨 일인데?
    성진 : 들어봐! 킬러는 일이 끝나면 다음날 신문에 자신이 누구를 죽였는지 알잖어. 나는 한 달 후에 도서관에 가보면 누가 일을 시켰는지 알 수 있어.
    병관 : 도서관?
    성진 : 작은 거는 삼백! 큰 거는 오백! 크크크... 참, 그러고보니 공통점 또 있다. 둘 다 브로커가 있다는 거지. 수수료 왕창 챙겨먹는 씨발 브로커.
    병관 : (뭔가 낌새를 챘지만 미심쩍어)...너?
    성진 : 맞어! 내가 박사 여럿 만들었다. 너네 학교도 몇 명 있어. 스바! 그거 아냐? 도서관에 내가 쓴 논문이 다른 놈들 이름으로 떡 꼽혀있으면, 얼마나 통쾌한지? 가짜박사들이 판치는 세상! 이 좆같은 세상을 내가 조종하는 거라구.
    병관 : 미친 새끼.
    성진 : 그래 스바... 미쳤다. 똥구녕 찢어지는 집에서 할줄 아는건 공부뿐인 놈이, 지랄났다고 대학원에 가서, 학위도 못받고 할 짓이 이것뿐이 더 있냐?
    병관 : 야, 그러지 말고, 최교수 한번 더 만나봐. 노인네 낼 모레가 정년퇴직인데 고집부리겠어? 눈 딱 감고 한번 만나봐.
    성진 : (대꾸도 하지 않고) 내가 그지냐? 그 새끼한테 학위나 구걸하게?
    병관 : ...

    두 사람 잠시 말 없이 소주잔만 기울인다.
    성진, 충혈된 눈으로 포장마차 알전구를 올려다보다, 갑자기 미친놈처럼 웃는다.

    병관 : 이 자식이 미쳤나? 왜 이래?
    성진 : 내가 낮에 꿈을 꿨거든! 여기 이 포장마차에서 김승옥 소설에 나오는 안형하고 그 자살하는 아저씨를 만났거든.
    병관 : 김승옥? 그 사람이 누군데?
    성진 : (성진, 벙찐 표정으로 병관을 바라본다)...? 이 자식 이거 되게 취했네?
    병관 : 임마, 취한게 누군데? 김승옥이 누구야?
    성진 : 야 씨발, 니가 대학에서 애들 가르치는 강사 맞냐?
    병관 : ...?
    성진 : (한참 병관을 바라보다가 한심하다는 듯) 됐다. 가자.

    성진,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구겨진 만원짜리 몇 장을 내팽게치듯 던지고 나선다.

    38.골목길

    성진, 휘청이며 걷고 있다.
    그 뒤를 따라오는 검은 그림자.
    낮에 도서관에서 봤던 그 기이한 사내다.
    (이제부터 이 사내를 그의 본명 재덕이라 부르자.)
    언제부터 성진의 뒤를 쫓아온 것일까?
    나름대로 미행을 한다고 하지만 아무튼 성진의 뒤를 눈에 보이게 쫓아오고 있는 재덕.
    밤이라 재덕의 시커먼 얼굴은 희번뜩이는 눈뿐이 보이지 않아 더욱 괴기스럽다.
    성진, 술김이지만 낌새가 이상한지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얼마 안가 재덕을 발견한 성진.
    재덕, 굼뜬 동작으로 전봇대 뒤에 숨는다.

    성진 : (술기운 때문인지 대담하다) 뭐야, 넌? 넌 뭔데 자꾸 쫓아오는 거야?
    재덕 : ...

    성진, 다시 내처 걷다가 다시 뒤를 돌아본다.
    재덕, 쫓아오다 다시 후다닥 숨는다.

    성진 : 야이 씨팔! 어떤 새끼야!

    성진, 주위를 두리번거려 돌멩이를 몇 개 주워 던진다.
    돌멩이는 애꿎은 밤공기만 가르고,
    적막한 골목길엔 돌멩이 굴러가는 소리만 요란하다.

    성진 : (중얼거리며) 씨팔, 까불고 있어.

    성진, 다시 돌아서려는데 그만 전봇대에 쾅 부딪혀 뒤로 나자빠진다.

    39.재덕의 방

    방이 아니라, 빌딩의 지하 보일러실이다.
    한쪽에 낡은 담요 몇 장이 깔려있고, 작동될 것 같지 않은 낡은 블루스타,
    그 위에 찌그러질대로 찌그러진 냄비가 살림살이 전부다.
    담요 위에 누워있는 성진.
    재덕, 더러운 걸레의 물을 짜서 성진의 이마를 닦아준다.
    재덕의 손길이 닿자 성진의 눈꺼풀이 움직인다.
    성진의 눈으로 보면, 희미하게 재덕의 얼굴이 보였다, 사라졌다...
    이내 확연히 보인다.

    성진 : (벌떡 일어나) 누...누구야?

    재덕, 걸레를 들고 성진의 얼굴을 마저 닦으려고 다가온다.

    성진 : (물러서며) 가까이 오지마.

    재덕, 포기했는지 걸레를 한쪽에 던져놓고 블루스타에 불을 붙인다.
    점화장치가 고장났는지 가스를 틀어넣고 옆에있는 성냥으로 불을 붙인다.

    재덕 : 그 꼰대가 또 장난을 쳤구만!
    성진 : ...?
    재덕 : 아까 낮에 지하에 내려갔었지?
    성진 : (겁먹어) ...도대체 무슨 소리야? 여기가 어디야?
    재덕 : 걱정 마, 잡아먹진 않을 테니까!
    성진 : ...
    재덕 : 지하에 내려가서 그 꼰대 만났어?...
    성진 : ...?
    재덕 : 길거리에서 책파는 노인네 말이야.
    성진 : ...그...그걸 어떻게?
    재덕 : 쯧,,쯧,쯧... 만난 모양이군!

    재덕, 한쪽에 있는 종이박스에서 싸구려 라면 두 개를 꺼낸다.
    그리고 다시 손을 넣더니 말라비틀어진 파도 꺼낸다.
    또 다시 손을 넣더니 계란도 꺼낸다.
    종이박스가 무슨 화수분단지 같다.
    냄비에 라면과 스프를 넣고 파를 대충 찢어넣더니... 계란을 푼다.

    재덕 : 배고프면 같이 먹지?
    성진 : 꿈에서 봤던 그 노인네를 알어?
    재덕 : 아직도 그게 꿈같어?
    성진 : 그...그럼? 그게 진짜였단 말이야?
    재덕 : (젓가락으로 냄비를 저으며)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야?
    크크크...

    재덕, 갑자기 젓가락을 내팽게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냄비 속에 손을 넣는다.

    성진 : (놀라) 왜그래?
    재덕 : (아무렇지도 않은 듯) 크크크... 이게 진짜야?

    성진, 달려와 재덕의 손을 빼내려고 한다.
    두 사람,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냄비가 엎질러진다.

    재덕 : 니미...
    성진 : ...!

    재덕, 바닥에 엎질러진 라면을 더러운 손가락으로 주워먹는다.

    성진 : (재덕의 멱살을 잡으며) 미친 새끼... 여기서 내보내줘!
    재덕 : (계속 주워먹으며 손가락으로 창문 하나를 가르킨다) 저쪽으로 나가면 돼.
    크크크... 내일이면 날 찾게 될걸...

    성진, 대꾸도 안하고 문을 향해 걸어나간다.

    재덕 : 다시는 거기 내려가지마...

    성진, 잠시 멈춰서는가 싶더니 창문을 열고 올라간다.

    재덕 : ...나처럼 되고싶지 않으려면...크크크

    40.빌딩지하

    지하환풍구에서 손이 하나 나온다.
    힘겹게 턱을 잡고 올라서는 성진.
    주위를 둘러보곤 낯이 익는지 곧 방향을 잡아 누가 잡을세라 뛰어간다.

    41.성진의 반지하방

    조그만 창으로 햇살이 비친다.
    어디선가 교회 찬송가 소리도 들린다.
    성진, 속옷만 입은 채 이리저리 몸을 뒤척인다.

    42.성진의 반지하방 앞마당

    머리는 까치집이고, 츄리닝을 입은 채로 쭈그려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는 성진.
    성진의 앞으로 여기저기 갈라진 블로크 담벼락이 보인다.
    블로크 구멍으로 보면 지하에 있는 교회에서 예배가 한창이다.
    그것들을 멍하니 지켜보는 성진.
    가만 자신의 이마를 만져본다.
    커다란 혹이 만져지자, 인상을 찡그린다.

    43.은행

    통장정리기에 통장을 들이미는 성진.
    지직~지직~ 오랫동안 인자를 하고있는 기계.
    낼름 뱉어진 통장.
    더도 덜도 없이 딱 500만원의 잔고가 보인다.

    44.은행 앞

    성진, 담배를 물고 전화를 하고 있다.

    성진 : 예... 조금 전에 입금했는데요. 예,예... 그럼 연체는 언제 풀리는 거죠?
    일주일 후에요? 예...알겠습니다.

    성진, 씁쓸한 표정으로 담배를 끄고는
    다시 다른 곳에 전화를 건다.

    성진 : 병관이냐? 어... 어제는 미안했다. 아니 한잔은 무슨... 그냥 들어왔어. 딴게 아니구 저번에 꾼돈 말이야. 그거 갚을려구. 계좌번호좀 불러줘봐.

    성진, 싸인펜 뚜껑을 입에 문 채, 벽에 메모지를 대고 계좌번호를 적는다.

    45.도서관 / 2층열람실

    자리에 앉아있는 여자사서에게 성진이 다가온다.

    성진 : 저...
    여자 : 아, 오셨어요?

    여자, 자리 밑에서 어제 성진이 맡겼던 책을 꺼내준다.

    성진 : 감사합니다.

    성진, 돌아서려고 하면...

    여자 : 어제 돌아가시고 그 책 읽어봤거든요. 재미있더라구요.
    성진 : 예...
    여자 : 60년대 소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문체는 좋았는데, 이야기는 영...
    성진 : (웃으며) 그래요?
    여자 : 그 마지막에 주인공 남자가 약을 먹고 자살하려는 남자를 구해주고는 홀연히 사라지잖아요.
    성진 : 예? 그럴리가요... 주인공과 그 안형이라는 남자는 자살하는 남자를 그냥 방에 두고, 그러니까 자살을 방조하고는 이른 아침에 여관을 빠져나오죠.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안 읽어보셨어요?
    여자 : 어제 읽었다고 그랬잖아요. 궁금해서 찾아보니까, 김승옥이란 작가의 마지막 소설이더군요.
    성진 : 그럴 리가 없어요. 교과서에도 실린 소설인데... 그리고 한참 후에 80년대 와서야 집필을 그만뒀죠.
    여자 : (웃으며) 뭔가 잘못 알고계신 거 아니에요? 전 김승옥이란 작가는 첨인데.
    성진 : (여자를 경멸하는 눈빛이다) 그...래요?
    여자 : 그쪽이 잘못 알고 계신 거 같네요. 다시 한 번 읽어보세요.
    성진 : ...?

    46.동 / 6인용탁자

    다행히도 어제의 그 지저분한 사내(재덕)는 보이지 않는다.
    책상에 앉아 차분히 책을 들춰보는 성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천천히 넘기다 말고 무엇에 놀랐는지,
    책에 눈을 붙여 손으로 밑줄을 쳐가며 몇 번이고 다시 읽는다.
    고개를 번쩍 들고 주위를 둘러보는 성진!

    47.동 / 서가

    책장 사이를 누비는 성진.
    급한지 책들을 빠르게 훑으며 찾고 있다.
    이윽고 '제3서고'에 있던 책과 같은 표지의 책을 찾아낸다.
    황급히 책장을 넘겨보곤, 뚫어져라 쳐다본다.
    이내, 책을 떨어트리고 벙찐 얼굴로 서있다.

    성진 : (고개를 가로저으며) 뭔가 잘못됐어...

    48.대학 캠퍼스

    강사 특유의 까만가방을 들고 걷고있는 병관.
    늦었는지 시계를 보며 바삐 걷고 있다.
    학생들 지나치면서 간혹 병관에게 목례를 한다.
    병관의 핸드폰이 울린다.

    병관 : 여보세요? 어... 돈 잘 받았다. 뭐라구? 김승옥?
    너 아직 술 안 깼냐? 어제도 그 얘기 하더니...

    49.도서관 주위 산책공원

    성진, 답답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부여잡고 있다.

    성진 : 야, 우리 같이 세미나도 했잖어. 정말 몰라? 잘 생각해봐!
    병관(소리) : 나 수업들어가야 되니까, 이따 얘기하자.
    성진 : 여보세요! 여보세요...

    성진, 전화기를 바라보다 다시 서둘러 전화를 건다.

    성진 : 여보세요? 네... 이성진입니다. 어제 논문 부탁하신 거.
    소리 : 어, 오늘 아침에 입금시켰는데. 뭐 잘못 됐어?
    성진 : 아니요. 어제 논문주제가 김승옥 아니었어요?
    소리 : 김승옥? 그 사람이 누군데?
    성진 : 어제 분명히 제가 60년대만 하면 안되냐니까, 그쪽에서 김승옥을...
    소리 : 무슨 소리야? 자네가, 맞다! 김승옥! 들어본 적도 없는 작가연구를 한다고 해서, 내가 안된다고 했잖어.
    성진 : ...
    소리 : 이봐, 자신없나? 하기 싫으면 빨리 말해. 다른 사람 알아보게.
    성진 : 아...아닙니다. 석달 후라고 그랬죠?

    성진, 전화를 끊고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도서관쪽을 바라보곤 뛰어간다.

    50.도서관 / 2층 열람실

    6인용 탁자 위에는 성진이 펼쳐놓은 책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성진, 서가와 서가 사이를 누비며 누군가를 찾고 있다.
    칸칸마다 속속들이 들여다 보지만 재덕은 보이지 않는다.

    51.도서관 외부, 빌딩지하 몽타쥬

    성진, 주위를 훑으며 뛰어다닌다.
    공원 여기저기를 샅샅이 찾아다닌다.
    벤치에 신문지를 덮고 자는 사람이 보인다.
    성진, 다가가 신문지를 확 들춰보지만 재덕이 아니다.

    산길을 빠르게 내달리는 성진.

    창문을 통해 빌딩지하의 보일러실을 내다보는 병관.
    아무도 없다.

    52.도서관 / 2층 열람실

    기진맥진한 채, 걸어들어오는 성진.
    별 기대없이 6인용 탁자를 보자, 그곳에 언제 왔는지 재덕이 앉아있다.
    여전히 책을 높이 쌓고, 책장을 넘기는 재덕.
    성진, 반가움에 재덕에게 단숨에 달려간다.

    재덕 : (돌아보지도 않고) 내가 다시 올꺼라구 그랬지?
    송진 :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재덕 : (심각하게) 지하에 다시 내려갔나?
    성진 : 아니.

    재덕, 책을 덮더니 성큼성큼 열람실을 나선다.

    성진 : ...?

    53.도서관 외부공원 벤치

    나란히 앉아있는 재덕과 성진.
    재덕, 신발을 벗고 올라앉아 가려운지 때묻은 발가락을 비비고 있다.

    성진 :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지?
    재덕 : 다 그 꼰대 장난이야.
    성진 : 그 노인네가 도대체 누군데?
    재덕 : (성진을 돌아보고)... 그건 나도 몰라.
    성진 : 도대체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돼? 분명 그 책은... 내가 알기론 그 남자가 자살해야 된단 말이야. 그런데 내가 그 남자를, 아니 그 주인공이 남자를 구했다니... 그 책뿐이 아니라, 온통 다른 책에도 그렇게 돼있어. 그리구 그 소설가가 그 책을 마지막으로 절필했다니?
    재덕 : 이해하려구 들지마. 이건 게임이야.
    성진 : 게임?
    재덕 : 그래...게임... 너가 지하에 내려가 책으로 들어가면 그때부터 모든 활자들은 바뀌게 돼있어. 물론 그 책을 읽었던 사람들의 기억도 모조리 바뀌게 되지. 그것뿐만 아니라 그 소설을 썼던 작가는 너의 활약에 무명소설가가 유명소설가가 되기도 하고, 유명소설가가 더 이상 소설을 쓸 수 없게 만들기도 해.
    성진 : 어떻게 이런 일이?
    재덕 : 이해하려고들지 말라고 그랬잖아. 그냥 게임을 즐기면 돼. 단!
    성진 : ...?
    재덕 : 절대, 게임과 현실을 착각하지 말라구.
    성진 : 무슨 소리야?
    재덕 : 소설은 그냥 소설일 뿐이라구. 절대 현실을 개입시키지 말라구. 너가 읽은 그 책 뒤에 보면 다음에 읽을 수 있는 책이 표시돼 있을 거야. 꼰대가 시키는대로 그냥 책 속에 들어가 즐기면 돼. 채털리부인과 사랑할 수 있는 산지기가 될 수도 있고, 삼국지에서 관우가 맥성에 갇혀있을 때 유비의 군사를 끌어와서 살릴 수도 있고 말이야.... 생각해봐! 얼마나 짜릿해... 난 어렸을 때부터 삼국지를 수십번 읽었는데 항상 관우가 죽는게 너무나 안타까웠어. 그런데... 내가 관우를 구했다구...
    성진 : (침을 꿀꺽 삼키고) 그 노인네가 일러준 책에만 들어갈 수 있는 거야?
    재덕 : 꼰대를 화나게 하지마. 꼰대 눈이 높거든... 아무 책이나 들어갔다가는 영영 빠져나올 수 없을지도 몰라.
    성진 : 무슨 소리야?
    재덕 : 담배 한 대 있어?

    병관, 주머니에서 잽싸게 담배를 찾아 불을 붙여준다.
    재덕, 폐부 깊숙이 한 모금을 빨더니 먼 곳을 바라본다.

    재덕 : 어렸을 때 우리 동네에 목마를 태워주는 할아버지가 한 명 있었지. 백원을 주면 딱 30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고 딱 시간을 재서 그만큼만 태워주는 거야. 난 엄마를 졸라 그 목마 타기만을 기다렸지. 그 목마가 왜 그렇게 재미있었는 줄 알어?
    성진 : ...그냥... 애들은 다 좋아하잖아.
    재덕 :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며) 아니야. 사실 목마는 재미 없어. 정해진 그 30분이라는 시간의 끝. 목마에서 내려와야하는 그 아쉬움 때문에 목마가 재미있는 거야. 어느날 난 엄마에게 목마를 태워달라고 졸랐다가 몇 대 맞고는... 그 목마 앞에서 울며 서있었지. 그런데 할아버지가 안 나타나는 거야. 몇 분이 몇 시간이 지나도 안 나타나길래, 슬쩍 목마에 올라탔지. 그리고 할아버지가 오면 잽싸게 도망갈 태세를 하고 신나게 탔어. 그런데, 좀 있다가 할아버지가 나타나 대 뒷덜미를 잡는 거야. 이놈, 하면서 나를 그 목마에 묶어놨지. 그거 알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 공포를!
    성진 : 그게 지하서고랑 무슨 상관인데?
    재덕 : ...나도 처음에 너처럼 지하에 내려갔었어. 그리구 그 꼰대가 일러준 책만 읽었지. 아주 착실히 말이야...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계속 갈증이 나는 거야. 무슨 마약같이... 지금 여기 이렇게 현실에 사는건 정말 지옥이고 재미가 없는데, 그 곳에 들어가면 난 영웅도 됐다가, 카사노바가 돼서 여자들을 후리기도 하고... 점점 빠져들었지. 그리곤 어느날 꼰대가 일러준 책이 아니라, 다른 책을 들고갔지.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어. 그런데 이제 나가야 될 때가 됐는데... 도통 꼰대가 보이지 않는 거야.
    성진 : (침을 꿀꺽 삼킨다)
    재덕 : 넌 모를 거야. 그 고통을... 아마 여기 시간으로 따지자면 수백년은 갇혀있었던 거 같아. 이야기가 인생보다 길면 말이야... 그건 더 이상 소설도 픽션도 이야기도, 뭣도 아니야. 그냥 고통 자체야. 생각해보라구... 죽지도, 죽을 수도 없는 삶을... 그건 공포야!
    성진 : 그런데 어떻게 나왔지? 지금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냐구?
    재덕 : 어느날 꼰대가 나타나더군. 목마를 탄 채, 이제 다시는 안 그럴테니 제발 내려달라구 울자, 할아버지가 나타났듯이...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이젠 다시는 그런짓 안할 거지? 그런 표정을 지으면서 나한테 책을 내밀더군.
    성진 : ...그런데... 지금 왜 여기서 이러구 있는 거야?
    재덕 : (병관을 슥 돌아보며) 아까 얘기했잖아. 여기는 정말 재미가 없다구. 선후배들 쫓아다니며 자동차나 팔아먹고 살았지만, 나도 그럴듯하게 살았다구. 그런데, 돌아와보니까 도통 이곳에서 살 자신이 없어. 그래서 찾기로 했지!
    성진 : 뭘?
    재덕 : 백년, 천년, 아니... 그 꼰대가 책을 내밀어도 싫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천국 말이야. 그런 곳이 분명 책 어딘가에 나와있을 거야.
    성진 : 그렇다면...
    재덕 : 맞어... 난 이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뒤지고 있는 중이야. 천국을 찾을려구...

    재덕, 꽁초 끝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비벼끄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성진, 멍하니 재덕을 올려다본다.

    재덕 :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야. 조심하라구... 꼰대를...

    재덕, 도서관쪽으로 발을 옮긴다.
    성진, 그런 재덕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다.

    54.도서관 / 2층열람실

    성진, 책을 조심스레 펼쳐들고 맨 뒷장을 열어본다.
    연필로 대충 흘겨쓴 필체로 '카프카의 성'이라고 적혀있다.

    서가를 뒤지고 있는 성진.
    '카프카의 성'을 집어 맨 뒷페이지를 열어본다.
    아무런 지시사항이 없다.
    갑자기 책 하나가 툭 떨어진다.
    책장 사이 틈으로 들여다보면, 건너편에 여자 하나가 서있다.
    책을 집어넣다가 반대편, 성진이 있는 쪽의 책이 밀려 떨어진 것이다.
    성진, 떨어진 책을 주워 꼽으려고 하는데...
    '찍~' 소리가 난다.
    성진, 책장사이로 유심히 보면...
    여자가 책을 펼쳐든 채로 페이지 위에 풀을 한뭉텅이 짜넣고 있다.
    성진, 숨어서 여자를 본다.
    페이지 위에 골고루 풀칠을 하던 여자, 이내 책을 덮어 다시 책장에 꼽는다.

    성진 : ...?

    몰래, 반대편에서 여자를 따라가며 관찰하던 성진...
    여자는 계속 책을 꺼내 풀칠을 하고 있다.
    여자 풀칠을 멈추고 책장사이를 살핀다.
    순간, 성진과 눈이 마주치고...
    놀란 여자, 책을 내던지고 달려간다.
    성진도 여자를 쫓아간다.

    성진 : 이보세요!

    책장을 사이에 두고 달려가는 두 사람.
    결국, 책장이 끝나는 곳에서 마주친다.
    성진, 여자의 팔을 잡는다.
    여자, 돌아서보면 정상인의 눈빛이 아니다.
    텅 비어있는 그런 눈빛이다.
    여자, 갑자기 성진의 목을 끌어안더니 입술을 덮친다.
    몸을 빼려는 성진과 목을 부여잡고 놓지 않는 여자.
    그러고 있는 사이, 하얀 장갑을 끼고 책을 정리하던 여자사서가 지나친다.
    성진, 여자사서와 눈이 마주치지만 어쩌지를 못한다.
    여자사서도 황급히 자리를 피한다.
    여자, 더욱 격렬하게 병관의 입술을 빨더니 성진의 입술을 깨문다.
    깨문다라기 보다는, 암사마귀처럼 뜯어먹는 것같다.
    으아~, 성진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여자를 힘껏 밀쳐낸다.
    여자는 바닥에 쓰러지고,
    성진의 입술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성진 : (소매로 입술을 훔치며) 젠장! 왜 이러는 거야?
    여자 : ...

    언제 나타났는지 뒤에서 재덕이 책을 한아름 안고 나타난다.

    재덕 : 그 여자도, 지하에 내려갔다 온 여자야.
    성진 : ...?
    재덕 : 거기서 오랫동안 갇혀있다 말을 잃어버렸어.
    성진 : (계속해서 입술의 피를 뱉어내며) 다 미쳤군!

    재덕, 바닥에 떨어진 풀을 집어 쓰러져있는 여자에게 다가간다.
    여자, 곧장 다시 달려들 태세다.
    재덕, 조심스레 풀을 여자에게 건넨다.
    재덕과 성진의 눈치를 슬슬 보던 여자,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풀을 낚아채더니
    출구로 달려간다.

    성진 : 미친년!
    재덕 : 맞아, 미쳤지... 꼰대가 일러준 책을 안읽고 이상한 책을 보더니 완전히 미쳐버렸어.
    성진 : 왜 책에다 풀칠을 하는 거지?
    재덕 : 아까 말했잖아... 공포... 다시는 마주치고싶지 않아서겠지...

    그때, 남자직원과 여자사서가 달려온다.

    여자 : (다급하게) 저기에요! 저 사람이에요!
    남자직원 : (다가와 예의바르게) 실례지만 여기서 나가주셔야겠습니다.
    성진 : 저는... 아니... (입구를 가르키며) 저 미친여자가 갑자기 달려들었다구요.
    남자직원 : (딱딱하게 사무적으로) 공공장서인 도서관 안에서 애정행위를 표시하는 건 위반입니다.
    재덕 : 오햅니다. 저 여잔 말을 못해서, 무슨 말이 하고싶으면 저렇게 달려들어 상대방 입술을 깨물어버립니다.

    남자직원, 재덕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한번 쭈욱 훑어본다.
    남자직원에겐 모두가 제정신인 사람으로 보일 리가 없다.

    남자직원 : (단호하게) 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재덕, 한두번 겪은 일이 아니라는 듯 손을 들고 순순히 나간다.
    성진, 멍하니 서있자 남자직원이 같이 나가라고 눈짓을 보낸다.

    성진 : 알았어요. 나갈테니까... 이 책좀 빌립시다.

    55.도서관 외부공원

    성진, 가방을 둘러메고 숲길을 걷고 있다.
    땅바닥을 쳐다보고 천천히 걷고있는 성진.
    뭔가 석연치 않은 표정이다.
    중간즈음 한가로운 벤치에 앉아 담배를 무는 성진.
    여자에게 뜯긴 입술이 따가워 인상을 찡그린다.
    울리는 핸드폰.

    성진 : 어... 병관이? 그래... 기억나지?

    56.학생식당

    병관, 어깨에 핸드폰을 걸친 채, 식판을 들고 자리를 찾는다.
    한눈에 봐도 궁색한 식사다.
    겨우 학생들 틈의 빈 자리를 찾아 자리에 앉는다.

    병관 : 어... 찾아봤는데, 별 볼일 없는 작가더만. 소설책도 딱 한 권 나와있고... 뭣 때문에 그렇게 집착하는데? 누가 그 사람 논문 써달래?

    57.도서관 외부공원

    성진 : ...아니다... 끊을게, 담에 보자.

    성진, 힘없이 전화를 끊는다.

    성진(E) : 게임?
    재덕(E) : 그래...게임... 너가 지하에 내려가 책으로 들어가면 그때부터 모든 활자들은 바뀌게 돼있어. 물론 그 책을 읽었던 사람들의 기억도 모조리 바뀌게 되지. 그것뿐만 아니라 그 소설을 썼던 작가는 너의 활약에 무명소설가가 유명소설가가 되기도 하고, 유명소설가가 더 이상 소설을 쓸 수 없게 만들기도 해.

    성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키득키득 웃는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머리카락을 쥐어뽑고, 뺨이며 머리를 마구 때린다.
    잠시후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는 성진.
    성진의 눈앞엔 산책을 나온 중년부부가 이상스레 쳐다보고 서있다.

    58.도서관 / 2층 열람실

    여자사서에게 다가오는 성진.
    여자사서, 일전의 일때문인지 화들짝 놀란다.

    성진 : 열쇠좀 주시겠어요?
    여자 : ...어...디...
    성진 : 제3서고요.

    여자, 주저주저하다가 캐비넷에서 열쇠를 꺼내준다.

    59.도서관 / 계단, 제3서고 몽타쥬

    성진의 시점으로 따라가보면,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
    '제2서고'라는 팻말이 보이고, 철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린다.
    저벅저벅, 안에 또 다른 철문을 향해 다가간다.
    철문에 열쇠가 꽂히고, 열리면 암흑이다.
    꿈벅이며 형광등이 들어오고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는 성진.
    가지고 온 책을 내려다보고 심호흡을 하고 펼친다.

    펼쳐진 책의 책장이 빠르게 넘어간다.
    그것을 배경으로 장면들도 빠르게 지나친다.
    무협, 액션, 멜로...
    영화들을 한대 짬뽕해놓은 듯한 장면들이다.
    그리고 항상 마지막엔 노점서점의 노인네가 다른 책을 건넨다.

    재덕(소리) : ...꼰대가 시키는대로 그냥 책 속에 들어가 즐기면 돼. 채털리부인과 사랑할 수 있는 산지기가 될 수도 있고, 삼국지에서 관우가 맥성에 갇혀있을 때 유비의 군사를 끌어와서 살릴 수도 있고 말이야.... 생각해봐! 얼마나 짜릿해... 난 어렸을 때부터 삼국지를 수십번 읽었는데 항상 관우가 죽는게 너무나 안타까웠어. 그런데... 내가 관우를 구했다구...
    흡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성진.
    어느새 얼굴에는 멋대로 자란 수염들로 덥수룩하고,
    눈은 쾡하게 푹 들어가 있다.

    60.성진의 반지하방 (밤)

    성진, 넋이 나간 모습으로 천장을 올려다보고 누워있다.
    여전히 어디선가 교회찬송가 소리가 들리고, 핸드폰 소리가 울린다.
    핸드폰도 받지 않고 그대로 누워있는 성진.

    61.도서관 외부공원

    씬 60의 핸드폰 소리 계속 울리는 가운데,
    풀잎에 이슬도 채 떨어지지 않은 이른 아침이다.
    성진, 덥수룩한 수염에 노숙자같은 차림으로 도서관을 향해 바삐 걷고 있다.
    이제야 들은 듯, 잠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찾은 성진, 폴더를 열어 귀에 댄다.

    소리 : 야, 이 새끼야! 너 왜 전화 안 받어! 너 논문 어떻게 됐어!
    성진 : ...
    소리 : 다 못 썼으면 돈을 내놓던지, 자꾸 피해다니면 너 가만 안 놔둔다. 야 이 새끼 이거 봐라! 너 대답 안해? 너 잡히면 내 손에 죽는다.

    성진, 폴더를 닫고 멍하니 전화기를 바라본다.
    급하게 다시 울리는 벨소리.
    전화기를 땅바닥에 힘껏 내동댕이치는 성진.
    아직 살아있는지 벨소리가 계속 울린다.
    성진, 전화기를 발로 사정없이 밟아댄다.
    얼마나 지났을까... 전화기 벨소리가 멈춘다.
    성진의 발밑에서 처참하게 뭉그러져버린 전화기.
    공원을 산책하던 사람들, 성진을 비껴가며 이상스레 쳐다본다.

    62.도서관 / 2층 열람실

    6인용 탁자에 앉아 노트에 무언가를 쓰고있는 성진.
    그 앞에는 역시 재덕이 앉아 열심히 책을 뒤적이고 있다.
    성진도 어느새 재덕의 외양과 꽤나 닮아있다.
    오래돼서 구겨지고, 때에 닳아빠진 옷들, 덥수룩한 수염...
    두 사람은 마치 거울같다.

    재덕 : (계속 책장을 넘기며) 지하에는 이제 안 내려가는 거야?
    성진 : (필기를 멈추며) 천국은 찾았어?
    재덕 : 느낌이 오고 있어... 이제 얼마 안 남았거든... 조만간 찾을 수 있을 거야.
    성진 : 나는 이미 찾았어.
    재덕 : (책장 넘기기를 멈추며) 진짜?
    성진 : 남들이 만들어놓은 천국에 가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내 천국은 내가 만들거야.

    재덕, 갑자기 웃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클클거리기만 하더니, 나중에는 도서관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웃는다.

    성진 : ...? 왜 웃는 거지?
    재덕 : 크...크....크.... 그래서... 지금... 쓰고 있는게... 책을 만들어보겠다?
    성진 : ...?
    재덕 : 넌 좀 다른가싶더니만, 똑같군.
    성진 : 웃지마!
    재덕 : 내가 분명 경고했을 텐데? 현실을 개입시키지 말라구...
    성진 : 상관하지 마! 지겹지도 않아? 여기서 남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에 살고도, 천국도 남이 만들어놓은 곳에서 놀아날려구? 난 여태까지 날 위해 한게 아무 것도 없어. 남들 논문이나 대신 써주고 살았다고. 이젠 나를 위해 살거야.
    재덕 : 그게 너 마음먹은대로 그렇게 쉽게 되는줄 알어? 꿈 깨!

    성진, 벌떡 일어나 재덕의 멱살을 잡는다.
    재덕, 웃음을 뚝 멈춘다.

    성진 : 니까짓게 뭘 알어? 넌 기껏 소설, 활자에 중독된 놈일 뿐이야!
    재덕 : 그러는 너는? 너는 뭐 대단한가보지?
    성진 : 난 적어도... 너처럼 여기를 피해서 도망가지는 않아!
    재덕 : 과연 그럴까? 넌 나보다 더 끔찍한 장면을 보게 될걸? 끝도 없이 반복되는 고통!, 공포!
    성진 : 상관 마! 난 할 수 있어!

    성진, 재덕의 멱살을 풀고 자리에 앉는다.

    재덕 : 꼰대를 너무 우습게 보지마!

    성진, 개의치 않고 노트에 계속 써내려간다.

    63.성진의 반지하방 (밤)

    불꺼진 방, 한 구석에 스탠드만 켜있다.
    그곳에 잔뜩 웅크리고 앉아있는 성진의 뒷모습.
    성진, 책상에 앉아 오래된 노트북에다 노트에 필기한 것을 옮겨 찍고 있다.
    꽤나 몰입해서 작업을 하고있는 성진.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성진, 재빨리 노트북을 닫고 불을 끊다.

    병관(소리) : 성진아!

    성진, 살금살금 문가로 다가가 문고리를 부여잡는다.

    64.성진의 방앞 (밤)

    병관이 계속 문을 두드리며 성진을 부르고 있다.
    고개를 갸웃해보고는 강제로 문을 열어보려 하지만 꿈쩍하지 않는다.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병관.

    65.성진의 반지하방 (밤)

    성진, 문고리를 부여잡고 꿈쩍도 하지 않는다.
    잠시후 쪽지 하나가 문틈으로 끼워진 채,
    멀리 사라지는 발자국소리가 들린다.
    성진, 그제서야 문고리를 놓고 털썩 주저앉는다.

    66.동 / 성진의 반지하방

    희뿌옇게 날이 밝아있다.
    책상 위, 노트북과 연결된 프린터에서 꽤 두꺼운 종이들이 내뱉어져있고,
    성진은 책상에 엎드린 채 자고 있다.
    어디선가 다시 찬송가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부스스 잠에서 깨어나는 성진.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프린터에서 내뱉어진 종이를 발견하곤,
    그것들을 서둘러 가방에 챙겨넣고 방문을 나선다.
    방문을 열자, 눈부신 햇살이 들이친다.
    잠시 고개를 돌려 햇살을 피한 성진, 바닥에 떨어진 쪽지를 발견한다.

    병관(소리) : 전화통화도 안되고 해서 한번 와봤다. 집에 들어오면 연락좀 해라.

    성진, 종이쪽지를 아무렇게나 접어 주머니 속에 넣고 서둘러 나간다.

    67.인쇄소

    10평 남짓한 영세한 인쇄소다.
    복사기가 빠르게 돌아가고, 내뱉은 종이를 추스르는 직원들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드르륵 가게문이 열리면 추레한 차림의 성진이 가방을 하나 들고 들어선다.
    직원들, 하던 일을 멈추고 모두 성진을 돌아본다.

    직원1 : (성진이 동냥하러온줄 알고 떠밀며) 아저씨, 바쁘니까 다음에 오세요.
    성진 : 저...인쇄좀 하러 왔는데요.
    직원1 : 예?

    성진, 다짜고짜 가방을 열어 보여준다.
    만원짜리 다발이 몇 뭉텅이 들어있다.
    이곳 책임자로 보이는 직원2가 다가온다.

    직원2 : 무슨 인쇄를?
    성진 : (웃으며, 가방에서 종이뭉치를 꺼낸다) 이겁니다.
    직원2 : 얼마나 필요하신데요?
    성진 : (손가락 하나를 펴보인다)
    직원2 : 예?
    성진 : 딱 한 부만...
    직원2 : 글쎄요... 인쇄라는게 한 부를 제작하건 천 부를 제작하건 기본비용이라는게 있기 때문에...
    성진 : (가방을 들이밀며) 돈은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필요하면 마련해 드릴게요.
    직원2 : 아...아닙니다. 이거면 충분합니다. 정말 한 부요?
    성진 : (고개를 끄덕인다)
    직원2 : ...?

    68.성진의 반지하방 부엌

    성진, 거울을 보고 수염에 면도기를 가져다댄다.
    면도기로 자르기에는 너무 긴 수염이다.
    이윽고, 면도기를 내던지고 가위로 듬성듬성 잘라내는 성진.
    잠시 멈춰 거울 속에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성진, 뭐가 우수운지 키득키득 웃기 시작한다.

    69.인쇄소

    말끔한 차림의 성진이 들어선다.
    직원1, 하던 일을 멈추고 다가온다.

    성진 : ...?
    직원1 : 무슨 일로 오셨죠?
    성진 : 엊그제 인쇄 맡긴거 찾으러 왔는데요.
    직원1 : 예?
    성진 : 아... 한 부만 인쇄해달라는 거요.

    직원1, 못믿겠다는 듯 성진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직원2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인다.
    직원2, 반갑게 다가와 성진을 맞는다.

    직원2 : 아이구, 이렇게 변신하고 오시면 어떻게 알아봅니까?
    성진 : 책은 다 됐어요?
    직원2 : 그럼요... 이제 제본만 뜨면 됩니다.

    직원2 쌓아놓은 종이더미로 다가간다.

    직원2 : 혹시나 몰라서 한 부 더 인쇄했습니다.
    성진 : (갑자기 눈에 광기를 내뿜으며) 누가 더 하라고 그랬어?
    직원2 : (깜짝 놀라) 아니...저희는...

    성진, 직원2가 들고있는 종이뭉치 두 개를 뺏는다.
    두 개를 번갈아 보더니 하나를 박박 찢어댄다.
    종이가 두꺼워 잘 안 찢어지자 이빨로 물어뜯어 찢는다.

    직원1,2 : ...?
    직원2 : 죄...죄송합니다. 진정하세요. 이거 한 부만 그럼 제본해드리면 되죠?

    직원2, 재빨리 종이뭉치의 단면에 제본용 본드칠을 한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표지까지 씌우고는, 성진에게 건넨다.
    아직 노여움이 풀리지 않은 성진, 책을 잽싸게 뺏어 나간다.

    직원2 : (손가락으로 머리 주위를 빙빙 돌리며) 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직원1 : 그럼, 첨 올 때부터 제정신인줄 아셨어요?
    직원2 : ...?

    70.도서관으로 오르는 계단

    씬1과 같은 화면이다.
    희뿌연 도시를 배경으로 성진의 머리부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말끔히 차령입고, 옆구리에 책을 꼭 부여잡고 계단 끝을 오른 성진.
    잠시 아래 도시를 내려다본다.

    성진 : (혼잣말로) 지긋지긋한 지옥이여, 안녕!

    성진, 힘차게 도서관쪽으로 발을 옮긴다.

    71.도서관 / 2층 열람실

    성진이 다가오자, 여자사서 약간 놀라는 눈치다.

    성진 : 3서고좀 이용할까 하는데요.
    여자 : (당황해) 저...그게... 잠깐만 기다리세요.

    여자, 대출대를 빠져나가 황급히 어디론가 달려간다.

    성진 : ...?

    72.도서관 입구

    경찰 형사들이 타고다니는 봉고차 한 대가 서있다.
    양쪽에 형사들에게 결박당한 채 끌려나오는 성진.
    성진, 몸부림쳐보지만 우락부락한 형사들의 팔뚝에 꼼짝 못한다.

    성진 : 안돼! 안돼! 난 가야된다구!

    73.경찰서 형사과

    한쪽에는 구치소 철창이 보이고,
    책상 여기저기에는 심문하는 형사와 심문받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그 한 쪽에 짧은 머리의 형사와 성진이 마주보고 앉아있다.
    형사, 책상 앞에 사진 여러 장을 내놓고 보고 있다.
    제3서고 바닥에 쓰러져있는 재덕을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사진이다.

    형사 : 죽은 이재덕과는 무슨 사이지?
    성진 : 그냥... 도서관에서 오다가다 만난 사람입니다.
    형사 : (책상을 탕탕 치며) 이 자식이! 똑바로 대답 못해? 이재덕하고 꽤 친했다면서? 도서관 여자사서가 다 말했어. 9월 29일 오후부터 30일 아침까시 사건 당일날 어디에 있었어?
    성진 : 29일에 도서관에 있다가 열람시간이 끝나자 곧장 집에 갔습니다.
    형사 : 이재덕은 그날 밤 제3서고에서 죽었어. 낮에도 이재덕과 만났다며!
    성진 : (번뜩 무엇인가 생각이 난 듯) ...아... 알리바이가 있습니다.
    형사 : 알리바이?
    성진 : 예... 그날 밤에 집에 있는데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형사 : 친구 누구?
    성진 : 병관이라고...

    성진, 옷 여기저기를 뒤진다.
    잠바 한쪽에서 병관의 쪽지가 나오자, 허겁지겁 형사에게 내민다.
    형사, 쪽지를 받아들고 읽어본다.

    형사 : 이게 뭔데?
    성진 : 그날, 친구가, 그러니까 병관이가 이 쪽지를 저한테 주고갔습니다.
    형사 : 이 새끼가 이거, 나랑 장난치나? 여기 집에 없다고 쓰여있잖어.
    성진 :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날 집에 있었습니다.
    형사 : 하이 참... 그 친구 전화번호 불러봐.

    74.동, 경찰서 형사과 (밤)

    제법 한가한 풍경이다.
    구치소에 들어가있는 사람들도 구석에 웅크리고 자고 있다.
    철창에 매달려있는 성진.
    테이블에는 형사와 병관이 마주앉아있다.
    형사, 노트북 앞에서 담배를 꼬나물고 뭔가를 계속 찍어대고 있다.

    형사 : 9월 29일 밤, 이성진씨 집에 갔습니까?
    병관 : 네.
    형사 : 왜 갔습니까?
    병관 : 한 달여동안 전화통화도 안되고해서 걱정이 되서 갔습니다.
    형사 : 이성진씨가 집에 있었습니까?

    병관, 구치소에 갇혀 철창에 매달려있는 성진을 바라본다.

    병관 : ...저... 문을 두드려봤지만 대답이 없었습니다...하지만, 안에 인기척이 있는 거 같았습니다.
    형사 : (책상을 탕탕 두드리며) 묻는 말에만 답해요.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병관 :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없었습니다.
    형사 : (쪽지 하나를 꺼내며) 이 쪽지 이거 당신이 쓴거 맞습니까?
    병관 : 예... 제가 쓴게 틀림 없습니다.
    형사 : 이걸 어디다 뒀죠?
    병관 : 문틈에 꼽아놓고 왔습니다.
    형사 : 잘 알았습니다.

    형사,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하자, 프린터에서 종이가 몇 장 뽑힌다.

    형사 : (종이를 병관에게 내밀며) 이거 읽어보시고 맞으면 여기에 지장 찍어주세요. 그리고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병관, 종이를 받아들고 성진을 돌아본다.

    성진 : (미친듯이) 난 안 죽였어. 제발 나좀 여기서 꺼내줘! 난 안 죽였단 말이야!

    구치소 앞에 앉아있던 의경이 철창을 곤봉으로 내리치며 조용히 하라고 소리친다.

    병관 : 저...형사님... 성진이 알리바이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형사 : 일단 국과수에서 부검결과가 나와야 알죠. 사망 추정시간하고, 사인에 따라 물증을 잡아야죠.
    병관 : 저... 실은 성진이가 한달 전쯤부터 갑자기 좀 이상했어요. 하지만 사람을 죽일 정도로...
    형사 : 어떤게 이상했다는 겁니까?

    75.구치소

    성진, 구석에 가만 앉아있다.
    술취한 사람, 여기저기 옷에 피가 묻어있는 사람, 이제 갓 스무살쯤 돼보이는 청년...
    갖가지 잡범들 속에 섞여있다.
    성진, 가만 자신의 허리춤에서 책을 꺼내든다.
    책을 보더니 미소짓는 성진.

    76.경찰서 형사과

    형사1, 책상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

    형사2 : (커피와 서류를 하나 가져와 내밀며 형사1을 깨운다) 강형사님! 강형사님!
    형사1 : 어...어....
    형사2 : 국과수에서 이재덕 사망추정시간 보내왔어요.
    형사1 : 어... 그래...

    형사1, 기지개를 켜고는 커피를 들이키며 서류를 본다.
    뭔가에 놀란 형사1

    형사1 : (형사2에게) 야, 이성진이 데려와!

    77.동, 경찰서 형사과

    성진과 형사 마주앉아있다.

    성진 : (번뜩 무엇인가 생각이 난 듯) 지금 분명 19일이 아니라 20일 아침 10시경이라고 하셨죠?
    형사 : (고개만 끄덕인다)
    성진 : ...아... 알리바이가 있습니다.
    형사 : 알리바이?
    성진 : 예... 그날 아침 일찍 충무로에 있는 인쇄소에 갔었습니다.
    형사 : 인쇄소? (짜증이 난다는 듯 메모지를 북 찢어 볼펜으로 적으며) 그 인쇄소가 어디야?
    성진 : 필동에 있는 계명인쇄소라고...
    형사 : 거짓말 하면 어떻게 되는줄 알지?
    성진 : 틀림없습니다.

    78.경찰서 앞

    성진이 혼자 뚜벅뚜벅 걸어나온다.
    잠시 경찰서를 돌아보는 성진.

    성진(소리) : 혹시 그 사람 옆에 무슨 책같은 거 없었습니까?
    형사(소리) : 책?
    성진(소리) : 예... 이런 책 말입니다.
    형사(소리) : 도서관에 책이 한 두권이야?
    성진(소리) : 아니, 분명 그 사람 옆에 떨어진 책이 있었을 겁니다.
    형사(소리) : 그런 거 없었어.

    79.도서관 / 2층 열람실

    여자사서와 성진이 마주보고 있다.

    성진 : (흥분해서) 무슨 소리예요? 제3서고에 못 들어가다니?
    여자 : 소리 지르지 마세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거기서 사람이 죽었는데...
    (생각하기도 싫은지 진저리를 치며) 제가 내려가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거긴 당분간 아무도 못 들어가요.
    성진 : (갑자기 무릎을 꿇는다) 제발...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제발...
    여자 : (당황해) 왜 이러세요? 경찰이 열쇠를 가져가서 우리도 못 들어간다구요. ... 계속 이러시면 경찰 부를 거에요.

    80.도서관 / 제2서고

    성진, 묵직한 가방을 들고 살금살금 걸어들어온다.
    제3서고로 들어가는 철문은 커다란 자물쇠로 잠겨져있고,
    그 앞에는 '촉수엄금, 출입금지'라는 푯말과 함께 노란 수사선이 쳐있다.
    주위를 날카롭게 둘러보는 성진.
    구석 서가로 가서 책장 위에 가방을 올려놓는다.
    그리고, 자신도 그 위로 올라간다.

    81.동, 제2서고

    형사들과 도서관 직원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선다.
    높은 책장 위에 올라가 숨어있던 성진, 몸을 더 바짝 붙여 숨는다.
    제3서고의 열쇠가 열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82.도서관 / 제3서고

    통로 한가운데 하얀색 락카로 쓰러진 사람자국을 따놓은 자국이 보인다.
    그곳을 중심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형사들.
    그 중에는 성진을 취조했던 형사1도 보인다.

    형사1 : 그래, 국과수에서 납중독자라고 그랬다고?
    형사2 : 예.
    형사1 : 얼마나 심각했나?
    형사2 : 정상인의 다섯 배정도... 보통 이런 수치는 인쇄소에서 몇 십년 근무하는 사람들 몸에서 나오는 수치라고 합니다.
    형사1 : 이재덕이가 인쇄소에 다닌 적이 있었나?
    형사2 : 아니요. 예전에는 자동차 세일즈맨이었다고 합니다. 가족들 말에 따르면 3년 전부턴가 갑자기 정신이상증세를 보이다가 사라져서 실종신고 상태였다고 합니다.
    형사1 : 그래? 흠...
    여자사서 : 저... 말씀드릴게...
    형사1 : 예, 사건에 도움이 되는 거면 주저하지 마시고 무엇이든 말씀해보세요.
    여자사서 : 그 사람이 좀 괴짜였거든요.
    형사1 : 안 씻고 다니는 거 말입니까?
    여자사서 : 아니요... 그것도 그렇지만 한 3년동안 매일같이 도서관에 드나들었는데요. 와서는 맨날 책만 봤어요. 책을 읽는게 아니라 대충 페이지만 넘기면서... 아마도 2층 열람실에 있는 책은 다 읽었을 걸요?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 정도면 납중독에 걸리는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형사2 : 그런데... 문제는 그 정도 납중독은 갑자기 죽을 수 있는 치사량은 아니라는게 국과수 소견입니다.
    형사1 : 참나.... 골치 아프게 됐군... 길거리에서 쓰러져 죽었으면 단순행려병자로 처리하면 되지만, 이 자식은 왜 여기까지 와서 죽은 거야?
    형사2 :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그 이성진이란 놈이... 수상합니다.
    형사1 : (짜증나는 듯) 알리바이가 있다잖아!
    형사2 : 저 형사영화 같은데 보면, 이런 거 있잖습니까? 범인이 알리바이가 있는데, 그 알리바이가 좀 특이한 거... 범인이 일부러 주위의 시선을 끄는 행동을 하는 거 말입니다. 인쇄소 직원들이 증언한 게 좀 수상하지 않습니까? 책을 단 한 부만 주문한 거며, 한 부를 직원들 보는 앞에서 북북 찢어버린 거 하며...
    형사1 : 흠...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

    형사1,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뭔가 생각에 잠긴 눈치다.

    83.도서관 / 제2서고

    도서관 직원들과 형사들이 제3서고를 빠져나온다.
    다시 단단히 잠겨지는 자물쇠.

    형사1 : (걸어나오며) 일단 그 이성진이란 놈 신변 확보하고, 감시 붙여놔.
    형사2 : 예.
    형사1 : 그리고 여기 이용하는 사람 별로 없죠?
    여자사서 : 예 그리 많지는 않아요.
    형사1 : 여기도 당분간 아무도 못 들어오게 잠궈두세요.
    여자사서 : 예. 그럴게요.

    형사1, 서고를 한바퀴 죽 둘러보고는 나간다.
    사람들 빠져나가고, 밖에서 자물쇠를 잠그는 소리가 들린다.
    책장 위에 숨어서 이것을 모두 지켜보고 있는 성진.

    84.동, 도서관 / 제2서고

    멀리 불빛이 보이고, 톱으로 무언가 썰어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린다.
    점점 다가가보면 성진이 입에 후레쉬를 물고 톱으로 열쇠를 자르고 있다.
    얼굴은 이미 땀범벅이 돼있지만, 닦지도 않고 쉴새 없이 톱질을 계속한다.

    땡그랑~

    둔중한 쇠뭉치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울린다.
    잠시후 쇠문 여는 소리가 나고, 파드득~ 형광등이 들어온다.
    형광등이 들어오면 깨진 유리에 비친 성진의 모습.
    예전처럼 놀라지 않는다.
    잠시 거울을 주시하던 성진, 제3서고로 들어선다.

    85.도서관 / 제3서고 (밤)

    깜박이는 형광등 아래 락카로 칠해진, 재덕이 누워있는 곳이 괴기스럽게 비친다.
    그 앞에 가방을 털썩 내려놓고 서있는 성진.

    성진 : 크크크... 천국을 찾았나보지? 축하해! 나도 곧 갈게.

    성진, 가방 속에서 책을 꺼내 늘상 앉던 구석진 의자로 걸어간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책을 펼치는 순간, 앞에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머리를 풀어헤친 것이 흡사 귀신같다.
    점점 다가오는 여자, 예전에 열람실에서 책에 풀칠을 하던, 성진의 입술을 깨물었던,
    바로 그 여자다!!!

    성진 : 오지마! 오지마!!! 안돼!

    86.성진의 책 / 몽환적인 세계

    동화속의 나라처럼 주위는 온통 꽃밭이다.
    벌거벗은 남녀들이 한데 어우러져 놀고 있고, 그곳에 성진도 끼어있다.
    그중 아름답고 고혹적인 여자가 성진에게 눈길을 준다.
    성진과 여자, 무리를 빠져나와 들판을 가로질로 뛰어간다.
    어느새 숲으로 둘러싸인 곳까지 온 성진과 여자,
    동물처럼 서로의 몸을 탐한다.
    성진, 여자의 다리끝부터 서서히 핥기 시작한다.
    배꼽을 지나, 가슴을 지나, 목을 지나...
    여자의 입술에 머물고 있는데, 여자의 시선은 하늘을 향해있다.
    여자의 머리 위에 사과가 하나 매달려있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손을 뻗어 사과를 집는 여자.
    성진을 밀어내더니 사과를 입에 가지고 가 베어무려는 찰나...

    성진 : 안돼!

    그러나, 때는 늦었다.
    여자가 사과를 베어물자, 나무들은 온통 구렁이로 변한다.
    여자와 성진의 몸을 휘감아 떼어놓는 구렁이들.
    두 사람, 몸부림을 치지만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한다.
    구렁이들은 어느새 거대한 촉수로 변한다.
    징그러운 촉수를 지닌 몸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성진에게 책을 건네던 노점서점의 노인이다.
    노인네, 이빨빠진 얼굴로 껄껄걸 웃고 있다.

    성진 : (몸부림치며) 안돼!

    87.병원 (현실)

    눈앞에 검버섯이 핀 노인의 얼굴이 희끄무레하게 비친다.
    성진, 계속 몸부림을 치지만 온몸이 침대에 결박된 상태다.
    형사1,2가 각각 노인의 양쪽 팔을 잡고 서있다.

    형사1 : 이 사람 맞아요?
    노인네 :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형사2 :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참, 나... 할아버진 자식도 없수? 어떻게 젊은 사람을 이 지경으로..
    형사1 : 서에 연락해서 바로 연행시켜.

    형사2, 노인의 팔을 잡고 병원문을 나선다.

    성진 : (어리둥절하게 이 장면을 보고 있다) 뭐, 뭐야... 당신들... 난 그 사람 안 죽였어. 제발... 날좀 데려다줘! 도서관으로... 제발!
    형사1 : 어이... 이성진이... 정신차려. 저 노인네 누군지 알어?
    성진 : 서...서점...서점...꼰대...
    형사1 : 저 노인네가 당신한테 약 판 사람 맞지?
    성진 : 무...무슨 소리야? 저 사람은 나한테 책을 줬다구...
    형사1 : (가소롭지도 않다는 듯이) 책? 책이 무슨 뽕의 신종 은어야?
    성진 :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뽕이라니?

    형사1, 우왁스레 성진의 팔을 걷어붙여 성진의 눈앞에 들이민다.

    형사1 : 이거 보여, 안 보여?

    한눈에 봐도 선명한 주사바늘 자국이 수십개 있다.

    성진 : ...?
    형사1 : 이미 뽕에 중독된 이재덕이 너를 끌어들였고, 이재덕이는 치사량의 뽕을 맞고 얼마전 죽었고, 너도 어제 그렇게 될뻔 했어.
    성진 : 무...무슨 소리야? 그 사람은 납중독이라고...엊그제 너네들이 그랬잖아!
    형사1 : 납중독? 납중독 좋아하네...아무튼 정신좀 돌아오면 담에 얘기하자구.

    형사1, 병실문밖으로 나간다.

    성진 : (미친 듯이 버럭버럭) 야! 이 새끼들아! 너희들이 뭔데? 빨리 안 풀어? 뽕이라니...니미 뽕이다, 씨팔! 다들 죽여버릴 꺼야. 빨리 풀어! 난 천국으로 가야돼! 빨리 풀어!

    88.동, 병원

    눈밑이 시커멓게 변해있는 성진.
    여전히 온몸이 결박된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있다.

    89.성진의 꿈 / 몽타쥬

    재덕의 방에 누워있는 성진.
    재덕이 주사기를 꺼내 성진의 팔에 꼽는다.
    성진, 온몸이 움찔거리더니 잠시후 몽롱한 눈빛으로 깨어난다.

    도서관 외부공원의 한적한 벤치.
    재덕과 성진 마주앉아있다.
    성진이 옷소매를 걷자, 재덕이 웃으며 주사바늘을 주입힌다.

    재덕(소리) : ...나도 처음에 너처럼 지하에 내려갔었어. 그리구 그 꼰대가 일러준 책만 읽었지. 아주 착실히 말이야...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계속 갈증이 나는 거야. 무슨 마약같이... 지금 여기 이렇게 현실에 사는건 정말 지옥이고 재미가 없는데, 그 곳에 들어가면 난 영웅도 됐다가, 카사노바가 돼서 여자들을 후리기도 하고... 점점 빠져들었지.

    노점서점으로 달려가고있는 성진.
    노인이 책을 내민다.
    아니, 노인이 하얀 가루가 들어있는 봉지를 내민다.
    책, 봉지, 책, 봉지...빠르게 변한다.

    90.병원

    성진, 땀에 흠뻑 젖은 채 눈이 휘둥그레진다.

    성진 : (미친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아니야! 아니야!

    91.동, 병원

    성진, 결박이 풀린 상태지만...
    침대 구석에 가서 잔뜩 웅크린채 떨고 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언가 자꾸 몸에 달라붙는지 손으로 여기저기를 긁는다.
    (마치 도서관에서 처음 만났던 재덕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때,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빼꼼히 철문이 열린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남자간호사와 함께 온 병관이다.
    성진 : (병관에게 달려오며) 벼...병관아!

    남자간호사, 성진을 붙잡아 침대로 끌고간다.

    병관 : 괜찮으니까 놔두세요.
    남자간호사 : 이러다가 사고나면 저만 목 달아나요.
    병관 : ...

    성진, 침대로 끌려가 또다시 온몸이 결박된다.

    성진 : 병관아! 나좀 구해줘, 제발!
    병관 : (울먹이며) 야, 임마! 어쩌다 이렇게 됐어.
    성진 : 제...제발 사실을 말해줘. 난 약같은거 하지 않았어. 그냥, 책에 빠졌을 뿐이라구. 넌 믿지? 그지?
    병관 :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성진 : 그리구... 나 말이야... 내가 대리로 써준 논문들... 그거 얘기해주면 이 사람들이 믿을거야.
    병관 : (고개를 돌린다)...
    성진 : 씨발... 내가 쓴 논문들 다 가지고 오란 말이야.
    병관 : (성진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며) 야, 이 새끼야 정신차려! 언제까지 이럴 거야? 넌 분명 대학원 논문심사에서 떨어졌어.
    성진 : ...그...그건 최교수 그 나쁜새끼때문이야...
    병관 : 야, 임마 이젠 제발 사실을 직시해. 너가 떨어진 건 최교수가 돈받을려구 그랬던게 아니야. 네 논문이 자격미달이었어. 최교수는 돈같은거 바라지도 받지도 않았어.
    성진 : 야....너...너까지 날 못 믿어? 그럼 내...내가 대리로 쓰...쓴거는...그건 다 뭐야? 브...브로커 그새끼 블러와봐...
    병관 : (고개를 돌리고) 너가 알고있는 그 브로커란 작자는 사채업자야. 넌 내 돈을 빌려서 마약을 샀고... 그것도 모자라 사채업자한테 꾸워서 산 거라구.
    성진 : ...
    결박된 상태에서 곧 튕겨져나갈 것같았던 성진의 몸이 순간 축 늘어진다.

    성진 : (천장을 바라보며) 아...아니야... 아니야...

    92.병실 밖 (밤)

    복도에 열쇠꾸러미 쩔렁거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건장한 남자간호사가 긴 복도를 가로질러 걷고 있다.
    각 방의 창틀을 통해 이상유무를 확인하는 간호사,
    갑자기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는지 서둘로 문을 열고 들어간다.
    남자가 들어간 방에서 몇 번인가 둔탁한 소리가 들린다.
    잠시후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나오는 성진.

    93.도서관 외부공원 (밤)

    성진, 어디서 주워입었는지 잠바 하나를 걸치고 맨발로 도서관 계단을 올라온다.
    쉴새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도서관건물쪽으로 빠르게 걷고 있다.

    94.도서관 / 2층열람실 (밤)

    녹색 비상구 표시만 불이 들어왔을뿐 암흑 그 자체다.
    대출대 뒤의 창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 하나가 빠르게 넘어온다.
    성진, 곧장 캐비넷으로 달려가 열쇠꾸러미들을 찾는다.

    95.도서관 / 제3서고 (밤)

    파드득 불이 들어오면, 여전히 깨진 거울에 성진의 초췌한 모습이 비친다.
    성진, 바들바들 떨며 서가쪽으로 다가간다.
    재덕의 시신을 따놓은 락카칠 위에 멈춰서는 성진.

    성진 : 누...누군가 나를 해치려고 해. 씨발... 난 천국을 찾아갈 거야. 그 미친년이 방해만 하지 않았어도 갈 수 있었는데... 기다려...

    성진, 서가와 서가 사이를 미친 듯이 헤집고 다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책들을 빼내며, 온통 난장판을 만든다.
    얼마나 지났을까?
    서가 한편에 자신이 만든 책이 꼽혀있는 것을 본다.
    성진, 달달달 떨며 그 책을 뽑아 펴보려하지만...
    책은 온통 풀에 달라붙어있어 펴지지 않는다.
    억지로 힘을 주자 북북 찢어지기만 한다.

    그때, 갑자기 성진의 앞에 나타난 여자.
    풀칠하던 그 여자다.

    성진 : (성난 얼굴로 여자에게 달려들며) 이 미친년! 넌 뭔데...

    여자, 갑자기 사라져버린다.
    성진, 여자를 찾아 서가사이를 뛰어다닌다.
    이쪽 편으로 달려가면 반대편에서 책들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그쪽으로 달려가면, 다른 쪽의 책들이 쏟아져내린다.
    잡힐 듯 잡힐 듯, 계속 모습을 감추는 여자.

    성진 : (서가 한가운데 서서, 어린애처럼 울부짖으며) 제발 내 책을 돌려줘! 제발!

    성진의 절규가 끝나기가 무섭게, 책장들이 떨리기 시작한다.
    미진했던 진동이 점점 커지면서, 책장에 꽂혀있던 책들이 우르르 쏟아지기 시작한다.
    성진의 머리 위로 마구 쏟아지는 책들...
    언제부턴가 쏟아지는 책들만 보이고 성진은 보이지 않는다.
    잠시후 진동이 멎자, 수북이 쌓이 책더미만 보인다.
    정적~

    갑자기 책더미가 꿈틀하는가 싶더니, 맨 위의 책 한 권이 또르르 굴러 떨어져 펼쳐진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 책장을 마구 날리면서...
    WHITE OUT.

    96.동네어귀

    봄내음이 나는 화사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고,
    어디선가 신나는 어린이동요가 울려퍼진다.
    동요소리가 나오는 곳을 따라가보면,
    노래소리는 점점 줄어들고 어린애의 울음소리가 커진다.

    목마를 태워주는 놀이기구에 올라탄 한 어린애가 자지러지게 울고 있다.
    말에 묶여있는 어린애.
    그 앞에서 낚시의자에 앉아 태연히 웃고있는 노인.

    재덕(소리) : 그거 알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공포를!


    - 끝 -
    최명훈

    최명훈

    1975년 서울 출생

    2001년 성균관대 국문학과 졸업

  • 성진은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지만 지도교수인 최교수가 돈을 요구하자 학위를 포기한다. 그는 집근처 도서관을 드나들며 책이나 읽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 가끔씩 얼굴도 알 수 없는 브로커로부터 대리논문의뢰가 들어오고, 그것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킬러는 일이 끝나면 다음날 신문에 자신이 누구를 죽였는지 알잖어. 나는 한 달 후에 도서관에 가보면 누가 일을 시켰는지 알 수 있어."

    이렇게 단조롭게 살아가는 그 앞에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나고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재덕이란 사내는 한눈에 봐도 정신이상자로 보이는 추레한 차림에, 도서관의 모든 책을 집어삼킬 듯이 읽는 사람이다. 성진은 그와 조우한 날, 1960년대 소설연구에 대한 논문을 의뢰받는다.

    1960년대 소설의 원본을 찾으러, 도서관 지하에 있는 오래되고 낡은 책들만 보관하는 '제3서고'로 처음 들어가보게 된다. 천장에 용도를 알 수 없는 갖가지 파이프들이 지나다니고, 형광등조차 제대로 켜지지 않는 을씨년스러운 곳에서 그는 겨우 자신이 원하던 김승옥 소설의 원본을 찾는다. 하지만 사다리에서 떨어져 그만 정신을 잃고만다.

    꿈속에서 성진은 '서울, 1964년 겨울'의 소설 속으로 들어간다. '나'라는 주인공이 되어 김씨와 안이라는 대학원생과 함께 소설 서사대로 모험을 하게되는데... 결국 김씨가 자살할 거라는 것을 알게되는 성진은 그의 방을 찾아가 김씨를 살려내곤 거리로 뛰쳐나온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는 떨렁 노점서점이 하나 불을 밝히고 있고, 그곳에서 노인을 만나 '제3서고'에서 자신이 찾던 것과 똑같은 책을 건네받는다.

    성진은 곧 정신을 차리고, 재미있는 꿈을 꾸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음날부터 의뢰받은 논문을 준비하려 하자, 김승옥의 소설이 자신의 꿈대로 바뀌어져 있음을 알고는 놀란다. 자신의 기억이 잘못된 것인가, 친구에게도 물어보지만, 세상 사람들은 모두 김승옥을 모른다. 꿈에서 자신의 훼방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기억이 바뀌어 있고, 김승옥은 무명소설가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성진이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는데, 재덕이 다가와 제3서고의 비밀에 대해서 귀뜸을 해준다. 그곳에 들어가면 텍스트를 변조할 수 있고, 생생하게 즐길 수 있다고, 또한 그곳에 모든 것을 관할하는 자는 꿈속에서 봤던 그 노점서점의 노인이라고... 성진은 이 말을 믿지 않지만, 차츰 제3서고의 마력에 빠지고 만다.

    점차 성진의 외양도 정신이상자로 보이는 재덕과 닮아가고, 둘은 현실세계로부터 멀어져 자신들만의 몽환적인 세계에 빠지고 만다. 재덕은 한번 들어가면 죽어도 나오기 싫은 천국을 찾아 온통 도서관을 뒤지고 있는 중이었다. 반면 성진은 자신이 만들고싶은 이상향을 직접 쓰기로 마음 먹는다.

    이 세상의 고통을 모두 제거해버린 성진의 소설이 완성되고, 제3서고를 통해 그곳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그만 재덕이 제3서고에서 죽는 사고가 일어난다. 자신의 천국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었던 도서관 문턱에서 성진은 경찰에게 끌려가고, 재덕의 살인용의자로 주목받는다.

    성진은 제3서고로 들어가려고 몸부림치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결국 제3서고를 둘러싼 진실들이 밝혀진다.
    최명훈

    최명훈

    1975년 서울 출생

    2001년 성균관대 국문학과 졸업

  • 이광모 (영화감독 영화사 '백두대간' 대표)

    신춘문예란 영화계에서 어떤 위치와 의미를 가질까, 영화제작을 목적으로 하는 타 시나리오 공모전과는 달리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것에 대한 보루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공모작들을 읽어가면서 차츰 가슴이 아파왔다. 뜨거운 산업적 열기 속에서도 우리 영화를 작품적으로 진일보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기성 작가들의 그릇된 편견과 경향이 응모작들 속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진정성이나 작품성이 도움이 안될 뿐 아니라 흥행을 방해한다는 그릇된 선입견은 재능없는 작가들에게 면죄부를 찍어주며 패스트푸드같은 얄팍한 기획영화들을 양산하게 하고 있다. 그러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 독창적이고 대안적인 실험의지, 그리고 자신의 진정성을 지켜내고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치열함 등으로 무장한 신인 작가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응모작가 중에 그러한 미덕을 갖추고 있는 신인을 찾아내지 못해 안타깝다. 응모작가들이 기성들보다도 더 현실에 순응주의적이라는 인상과 영화계의 성공신화가 그들에게서 강박증세로 나타나고 있다는 인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타 작품들에 비해 두드러졌던 <축복>, <복날>, <달빛소리>, <제 3 서고> 중에서, 기발한 착상이 용두사미가 된 듯하여 아쉬움이 크지만 도서관을 배경으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지워버리면서 인간의 심리를 해체하려 시도했던 <제 3 서고>를 가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가작이라도 낼 것인가를 마지막까지 고민하였다. 가작이라는 절반의 시상이 예비작가들에게 한편으로 용기를 북돋아주면서 한편으론 자성과 정진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 최명훈

    최명훈

    1975년 서울 출생

    2001년 성균관대 국문학과 졸업

    언제나처럼 누런 봉투에 담긴 원고는 우편물이 가득 담긴 바구니에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우체국 여직원이 건네준 등기속달 영수증을 지갑 속에 구겨넣고 유리문을 열고 나섰다. 기억하건데 그날은 아주 추웠다. 전날 내린 눈은 아직 채 녹지 않았고, 언덕을 내려가는 길은 꽤나 미끄러웠다. 더욱이 곧 닥칠 서른의 스산함 때문에 옷을 단단히 여며야 했다.

    놀이기구들이 뽑힌 생채기가 그대로 남아있는 을씨년스러운 공원을 지나서야 도서관이 보였다. 벚꽃이 필적부터 꼬박 이 길을 오르내렸다. 왠지 그날은 어디 따뜻한 구들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낮술이라도 한잔 하고픈 날이었다. 오르던 길을 내려가기란 한결 수월했고, 글쓰기라는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작업도 이쯤에서 딱 내려두고만 싶었다.

    이렇게 서른의 열병을 앓고 있을 즈음, 중국에 사는 선배로부터 한번 다녀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덜렁 여권 한 장만 들고 소풍 가듯 길을 올랐다. 꼬박 16시간을 단동행 일반선실, 몸도 뒤척일 수 없는 침대칸에 갇혀 도착한 대륙은 심히 넓었다. 그곳의 추운 날씨 때문이었는지 서른의 위기감과 조바심은 꽁꽁 얼어 온데 간데 없었다. 돌아오기 전날 취중의 한 사내에게 멱살을 잡혀 이역만리에서 불귀의 객이 될 뻔도 했지만 용케 살아 돌아왔다. 새벽녘 갑판에 올라 붉게 물든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햇덩이를 보는 순간, 내 안에서도 그것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를 다시 쓸 용기가 생겼다.

    뼛속까지 스민 중국의 한기가 채 녹기도 전에 연락을 받았다. 썩 괜찮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중국여행과 이렇듯 반가운 소식은 내게 다시 한 해를 살아갈 힘을 줬다. 당선 아닌 가작이기에, 여러 지인과 은인들에게 감사의 표현은 다음으로 미루어야겠다.
  • 작품전문
  • 시놉시스
  • 심사평
  • 당선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