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by  허혜란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아귀는 입술 끝에 독이 있다. 시장 남자가 한 말이다. 건성으로 지나가듯 내뱉은 말인데도 그 말을 들었을 때 목덜미가 서늘했다. 고작 팔뚝만한 생선에게 주둥이도 아니고 입도 아니고 '입술' 이라는 단어를 붙여서일까. '독' 이라는 말 때문일까. 입술 끝에 있다는 독, 달콤하게 느껴진다. 얼음조각 위에 아귀가 몸을 뒤집고 누워 있다. 아귀의 뱃살이 통자루마냥 크고 납작하다. 남자는 꼬챙이로 아귀의 흰 배를 콕 찌른다. 아귀의 몸이 뒤집힌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든 배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시커멓고 우둘투둘한 등판, 두꺼운 턱뼈 위로 사정없이 벌어진 입, 그 속을 가득 메운 뾰족한 이빨이 한눈에 들어온다. 물 좋은 놈입니다, 맛도 영양도 그만이죠. 남자는 꼬챙이에 꽂힌 아귀를 내 앞으로 바짝 내민다.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선다. 남자는 다시 얼음조각 위에 아귀를 내려놓는다. 남자의 무릎 근처에서 휘둘리는 꼬챙이가 쉭쉭, 소리를 내지른다. 대천산이라 맛이 특별하다느니 이건 커서 이만 원은 넘게 받아야 되는데 싸게 해주겠다느니 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등을 돌린다. 빠른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의 물기가 튄다. 비린내가 튀어오른다. 여러 개의 수족관과 어패류들을 지나친다. 검은 앞치마와 장화를 신은 가게 주인들이 내 옷깃을 붙잡는다. 그들이 가리키는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매콤한 아귀찜 먹고 싶다, 그의 목소리만 발 밑에 감겨든다. 갈수록 수북해지는 그의 재떨이가 떠오른다. 뒤돌아 선다. 지갑을 꺼내어 몇 장 안 되는 지폐를 헤집어본다.

    아귀는 여전히 흉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멀찌감치 서서 손가락으로 아귀를 가리킨다. 잘라줄까요, 그냥 줄까요, 남자가 묻는다. 나는 준비한 지폐를 건네면서 앞뒤 생각하지 않고 건성으로 대꾸한다. 그냥 주세요, 대충. 남자는 아귀의 시커먼 등판을 쿡 찔러 비닐 봉지에 넣는다. 밥주걱 같은 지느러미가 검은 봉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남자에게서 건네 받은 비닐 봉지를 몸에서 멀찍이 떨어뜨린 채 손에 들고 수산시장을 빠져나온다. 후두둑, 빗방울 하나가 손등에 떨어진다. 습기를 먹은 바람이 짧은 머리카락을 휘젓는다. 금세라도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질 것 같다. 걸음이 빨라진다. 아랫배가 살살 아파 온다. 이사오고 나서 긴장을 하면 연거푸 설사를 하는, 신경성 장염이 생겼다. 심할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화장실을 들락거린다. 화장실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나도 모르게 비닐 봉지를 와락 움켜쥔다. 저릿한 통증이 손가락 끝에서 온몸으로 번져간다. 봉지를 바닥에 떨어뜨린다. 피다. 손가락 몇 군데에 핏방울이 맺힌다. 이슬처럼 맺힌 핏방울을 빨아댄다. 나란히 찔린 세 손가락을 집어넣느라 입을 옆으로 넓적하게 벌린다. 아귀처럼. 맥박이 빨라진다. 어서 집에 가고 싶다. 시커먼 등판과 야성의 입에 번뜩이는 칼날을 긋고 싶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주택가이고 다른 한쪽은 아파트단지다. 낡은 아파트 단지는 재건축 사업이 진행되느라 어수선하다. 단지 앞에 대형 광고판이 세워져 있다. 여자 모델이 다리를 길게 벌리고 있는 광고 사진이다. 그녀의 다리 사이에 새 건물과 도로, 쇼핑몰의 풍경이 들어가 있다. 여러 종류의 가게들이 즐비했던 상가는 대부분 부동산 가게다. 가게 유리창마다 아파트 시세를 적은 종이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13평 급매 3억 5천, 17평 매매 5억 3천. 15평 전세 5천. 등등. 액수가 가리키는 수치를 헤아려본다. 밤하늘에 총총 떠 있는 별들이 떠올라 픽 웃어버린다. 엊그제까지 있던 치킨집도 식당도 반찬 가게도 없어졌다. 아직 남아 있는 미장원과 과일 가게와 중국집은 어딘지 스산하다. 슈퍼마켓 출입문에 구인 광고가 붙어 있다. 가게에서 일 할 아주머니를 구합니다. 망설이지 않고 가방에 손을 넣어 팬을 찾는다. 전단지 돌리는 일만으로는 수입이 부족하다. 집 근처 가게라 다니기도 수월하다. 가방 속에서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펜이 없다. 전화번호를 몇 번씩 반복해도 도무지 외워지지 않는다. 펜 대신 매끄럽고 뭉툭한 것이 손에 잡힌다. 립스틱이다. 손등에 두 개의 숫자를 적다가 멈춘다. 아무래도 좁다. 스웨터와 티셔츠를 걷어 부친다. 팔꿈치 안쪽에서부터 손목까지 여덟 개의 번호를 길게 적는다. 35793816. 마지막 숫자가 적힌 퍼런 맥박 위에 커다란 빗방울이 투둑, 떨어진다.

    주택가를 향해 길을 건넌다.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의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한다. 공터를 지나 구불구불한 골목을 걸어간다. 49호, 라고 적힌 큰 대문을 지나 쪽문으로 향한다. 볼 때마다 닫아도 드나드는 사람이 많은 쪽문은 항상 열려 있다.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먹다 남은 짬뽕그릇에 코를 박고 있다. 인기척에도 도망가지 않는다. 아귀가 들어 있는 비닐 봉지를 힐끔힐끔 바라본다. 쪽문을 통과하고 비뚤비뚤한 일곱 개의 가파른 계단을 내려간다. 길고 좁은 통로가 이어진다. 통로에는 세 개의 문이 있다. 활짝 열린 첫 번째 문 안쪽에서 아이들 노는 소리가 왁자지껄하다. 두 번째 문을 지나칠 때는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진다. 푸르스름한 소주병들이 일렬 횡대로 주욱 서 있다. 사십대 남자가 혼자 사는 집이다. 닫혀 있는 문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쉰다. 세 번째 문 앞에 선다.

    열쇠 구멍에 열쇠를 밀어 넣고 지그시 돌린다. 이 문의 열쇠는 아무렇게나 찔러 넣으면 잠기지도 열리지도 않는다. 힘으로 하면 더 안 된다. 너무 깊지도 않고 얕지도 않은, 열쇠와 열쇠 구멍이 서로 꽉 맞물리는 절묘한 지점을 찾아야 한다. 처음에는 고역이었다. 문 한번 잠그려면 손가락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한참을 매달려야 했다. 지금은 능숙해져서, 너무 쉽고 빠르고 아무렇지 않게 열쇠 구멍을 채울 줄 안다. 열쇠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찰크락. 정교한 열쇠 구멍이 쇳덩이 하나를 완전하게 삼키는 소리다. 돌처럼 가만히 엎드린 채 물고기를 날름 삼키는 아귀의 커다란 입이 뇌리를 스친다. 오로지 그 하나의 짝이 아니면 결코 열어주지 않을, 정교한 움직임이 아니면 쉽게 풀어주지 않을 완벽한 어우러짐의 소리를 확인하자 손잡이를 비튼다. 문이 열린다. 계단은 집 안에도 있다. 세 칸의 계단을 밟고 내려가야 바닥이다. 턱없이 높은 화장실과 바닥 사이에도 큼직한 벽돌이 쌓여 있다. 우리 집은 밖이나 안이나 순 계단투성이야, 딸아이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비좁은 부엌과 어질러진 방과 현관 옆에 붙은 옹색한 화장실이 한눈에 들어온다. 치워도 금방 어수선해지는 방안이 거미줄 같다. 축하해요오오, 축하해요오오, 첫 번째 집에 모여 있는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시끌벅적하다.

    신발을 벗고 싱크대 위에 비닐봉지를 올려놓는다. 평소에도 눅눅한 방안은 비가 오자 더욱 습하다. 부패하고 비릿한 시멘트 냄새가 벽을 타고 오른다. 끕끕한 장판을 걷어본다. 물기가 있다. 춥지 않아도 난방 스위치를 올린다. 몇 종류의 구인신문이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다. 매콤하고 쫄깃한 아귀찜 먹고 속이나 확 뚫렸으면, 남편의 메마른 목소리가 되살아난다. 돈 많은 사장 기사로 들어가든 전쟁터로 가든 하루라도 빨리 이 눔의 택시를 때려 쳐야지, 원…… 중얼거리며 밤새도록 신문을 뒤적거렸다. 주간지 밑에 깔린 지도와 서류 몇 장이 눈에 들어온다. 판교 신도시 지도와 이민설명회에 관한 광고지다.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오디오 리모콘을 집어든다. 침대며 소파, 화장대, 장식장 등의 대부분의 가구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오디오다. 오 단 서랍장 위에 올려 있는 오디오를 향해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오디오 속에는 아직 갈아 끼지 않은 석 장의 시디가 그대로 머물러 있다. 유행했던 노래를 모아 만든 컴플레이션 음반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시장 남자의 설명이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요리는커녕 한 번도 먹어보지 않았다고 하자 남자는 전문 요리사처럼 아귀찜 만드는 법을 조목조목 일러주었다. 아귀찜을 만들려면 일단 미더덕이며 콩나물, 미나리 등이 필요하죠. 그 다음에는 양념이 문젭니다. 고춧가루와 찹쌀가루, 간장, 다진 마늘이며 파, 생강에 깨와 후춧가루와 참기름을 섞어 매콤하고 기가 막힌 양념을 만들어야 합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되살아나고 머릿속에는 어설픈 요리방이 펼쳐진다. 이미 말했다시피 아귀는 입술 끝과 내장에 독성이 있죠. 이걸 가위로 잘라내는 겁니다. 손에 힘이 들어간다. 가위가 들려 있다. 두 조각의 가위 날이 아귀를 향한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눈을 감고서 아귀의 입과 내장을 도려내기 시작한다. 슬걱슬걱. 다 잘랐으면 아귀의 커다란 입에 물을 붓는 겁니다. 입으로 들어간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뱃속을 훑어 내려와 잘려진 내장으로 빠져나오면 쭈그려 있던 몸이 편평해지죠, 그 다음에는 도마 위에 놓고 본격적으로 자르기 시작합니다. 착실한 조수처럼 나는 그의 지시에 따른다. 위와 아가미를 떼어낸다. 가슴지느러미를 잘라낸다. 꼬리지느러미도 댕강 잘라버린다. 턱밑부터 껍질을 벗긴다. 본격적으로 아귀의 몸통을 토막내기 시작한다. 탱크 같은 머리를 자른다. 넓적한 배를 삼 등분한다. 뼈도 버리지 않는다고 남자는 말했다. 살 속에 숨은 뼈와 가시를 베어내려면 손에 힘을 가득 실어야 한다. 마치 사람의 굵은 손가락을 자르듯이. 눈을 뜬다. 깔깔대고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나는 제정신이 아니다. 기껏 팔뚝만한 물고기 한 마리에게 이토록 잔인해질 수 있다니. 아직까지도 이런 분노가 남아 있다니.

    전화벨이 울린다. 남편이다. 분당 가는 손님 내려다주고 오는 길인데 영서 없지? 지금 들를게…… 준비하고 기다려. 왁자지껄한 아이들의 소리에 급히 말을 잇는다. 저, 영서 옆집에 있는데, 전화는 이미 끊겨버렸다. 너절너절한 방을 정돈하기 시작한다. 세 사람이 눕기에도 비좁은 가운데 공간을 빼고는 빈틈이 없다. 청소도 금방 끝난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빗발은 더 거세다. 남편의 머리카락과 어깨가 축축하다. 첫 번째 집을 가리키며 웬 소란이야? 묻는다. 딸아이가 그 집에 있다고 하자 남편은 더욱 급해진다. 황급히 잠바와 웃옷을 벗어 던지고 허리띠를 풀어 바지를 내린다. 창문을 닫고 불을 켜도 어두컴컴한 방안의 형광등 스위치를 끈다. 그는 민첩하게 움직인다. 팬티 한 장만 입은 채 화장실로 가서 간단히 씻고 나와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느릿느릿 옷을 벗는 내 손길을 다급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방 한 칸에 빼곡이 들어 있는 장롱이며 텔레비전, 책상과 컴퓨터, 옷장 등이 누워서도 한 눈에 들어온다. 낮인지 밤인지 분간이 안 되는 방에 남편의 숨소리가 차 오른다. 창가에 검고 둥근 형체가 아른거린다. 야아아오옹, 고양이 울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린다. 오늘밤에도 우리는 저 귀기스러운 짐승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잠들어야 할 것이다. 습기를 잔뜩 먹은 이불 속이 후텁지근하다. 끈적거리는 살과 뼈를 더듬어 나간다. 빳빳한 머리칼과, 뒷목과, 등과, 허리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린다.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것이 손안에 잡힌다. 고양이 울음소리와 아이들의 왁자한 소리가 간간이 빗소리에 섞인다. 남편의 땀이 뚝, 뚝 떨어진다. 초조와 불안이 뒤섞인 숨소리가 불규칙하다. 그의 움직임이 일시에 멎는다. 눈을 질끈 감은 표정이 침통하다. 에이,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이불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허둥지둥 옷을 꿰차고 방을 나간다. 현관문이 쾅 닫힌다. 집안에 정적이 한 움큼 쌓인다. 야아오옹, 고양이가 또 한번 신음소리를 내지른다. 새끼를 배었던지 아니면 어딘가에 깊은 상처가 있는 병든 고양이라고 짐작한다. 차에 시동이 걸리고 급 출발하느라 도로와 바퀴가 거칠게 맞물리는 소리가 들린다. 젖은 아스팔트를 거침없이 내달리는 타이어가 점점 멀어진다. 준비하고 기다리라던 남편은, 그러나 오늘도 실패했다. 좀처럼 발기되지 않는 그의 아랫도리보다 아스라한 절망이 감도는 그 눈빛을 떠올리자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진다. 일곱 살이나 된 딸아이 옆에서 행위를 치르기가 부담스러워 짬짬이 시간을 내보지만 소용없다. 끝내 내 몸을 뚫지 못하고 패잔병처럼 물러서는 그에게 괜찮아, 피곤해서 그러지 뭐,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그도 나도 잘 알고 있다. 하루 열 시간 이상 운전대를 잡는 육체의 고단함을 탓하기에는 아직 젊다. 사고가 나고 스페어 기사로 밀려나면서부터 초조한 빛이 역력했지만 그런 대로 잘 견디고 있었다. 종잡을 수 없는 타인을 향한 증오심과 멸시감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한 걸까. 아니면 강 기사의 갑작스런 죽음이 여태 그를 붙잡고 있는 걸까.

    일어서서 주섬주섬 옷을 추슬러 입는다. 흐트러진 이불을 개고 삐딱해진 전기 장판도 똑바로 놓는다. 짓뭉개진 베개 두 개는 이불 위에 나란히 올려둔다. 옆방 문이 열리는 기척이 들린다. 반사적으로 현관문을 본다. 열려 있다. 문을 잠근다. 옆방 남자가 이사온 후부터는 집안에 있어도 문을 꼬박꼬박 잠그는 습관이 생겼다. 까르륵 까르륵,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요란하다. 쿵쿵 뛰기도 한다. 창문이 바르르 떤다. 아귀를 비닐봉지에서 꺼낸다. 손가락을 찔리지 않도록 조심한다. 이놈의 이빨은 작지만 매섭다. 스치기만 해도 피부를 깊이 뚫는다. 아귀를 씻는다.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끝을 겨눈다. 전화벨이 울린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이번에는 주인집 할머니다. 온 가족이 레스토랑에 있는데 생각해보니 장독대 뚜껑을 열어두었노라고, 이 비를 다 맞으면 안 된다고 흥분한 새된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마구 쏟아진다. 창문 너머 거센 빗줄기를 본다. 방에 뚫린 창문에는 쇠창살이 막혀 있다. 싱크대 위에 뚫린 작은 창문을 연다. 간신히 몸이 빠져나갈 정도의 크기다. 싱크대 위에 발을 올린다. 다리가 부실한 싱크대는 기우뚱한다. 조심스럽게 몸을 싣고 창문 너머로 손을 내 민다. 담벼락에 손이 닿는다. 머리를 들이민다. 어깨를 빼고 상체를 담벼락 위에 걸친다. 내리치는 비 때문에 눈도 제대로 뜰 수 없다. 다리가 창문을 통과하자 담벼락을 타고 주인집 마당에 내려선다. 마당 귀퉁이에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모여 있다. 뚜껑 없이 비를 맞고 있다. 크기에 맞는 뚜껑을 찾아 덮기 시작한다. 커다란 뚜껑은 몹시 무겁다. 자칫 잘못하면 발등 위에서 산산이 부서질 것만 같다. 순식간에 온몸이 젖는다. 허연 곰팡이가 껴 있는 까무스름한 고추장 항아리에도, 시커먼 간장이 찰박거리는 항아리에도 뚜껑을 덮는다. 비 맞은 간장에서 짠 냄새가 물씬 풍긴다. 매콤 쌉싸름한 양념이 준비되면 토막낸 아귀를 넣고 버무리는 겁니다. 시장남자의 설명이 느닷없이 이어진다. 간이 잘 들어야 하니까요. 이제 거의 다 된 거나 마찬가지죠. 준비된 재료에 아귀를 냄비에 넣고 끓이십쇼. 처음에는 센 불에서, 그 다음에는 약한 불에서 오래오래……. 남자의 목소리가 사그라들면서 퍼런 불이 일렁인다. 아귀찜을 맛있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장독대 한 가운데에 서서 뚜껑을 덮지 않은 항아리가 있는지 살펴본다. 고추장 된장 간장들은 이제 안전하다. 싱크대 쪽 작은 창문과 주인집 대문을 번갈아 본다. 어느 쪽으로 갈까 망설인다. 창가에 웅크린 고양이가 비에 젖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고양이 뒤로 우리 집 방과 부엌이 보인다. 들짐승이 사는 어두컴컴한 동굴 같다.

    큰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전세 값을 건넬 때 들어온 후 처음이다. 쪽문을 밀고 계단을 내려온다. 흠뻑 젖은 맨발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세 번째 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긴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 옆 집 남자의 기척에 문을 잠갔던 것이다. 어떻게 하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첫 번째 집은 여전히 떠들썩하다. 빗속에서 더 시끄럽다. 방법은 남편이 올 때까지 기다리던가, 생일잔치가 한창인 첫 번째 집에 들어가 있던가, 주인집 대문으로 가서 마당을 돌아 싱크대 창문으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버린 몸 깊숙이 한기가 든다. 사람이 왜 그렇게 아둔해, 남편은 분명 한소리 할 것이다. 신나게 놀고 있는 딸아이와 아이 친구들 앞에 이런 모습을 보일 수도 없다. 쪽문을 나선다. 다시 49호 대문으로 향한다. 조심스럽게 대문을 밀어본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잠겨버린 것이다. 비는 점점 더 거세게 내리 붓는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머리통을 두서너 번 쥐어박는다. 부아가 치민다. 내 자신에게,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장독대에게, 쏟아지는 비에게.

    등뒤로 사람들이 지나간다. 호기심 어린 눈초리가 비에 젖은 맨발과 착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흘깃 본다. 나는 엉거주춤 서서 담 너머만 힐끔힐끔 쳐다본다. 담만 훌쩍 넘으면 우리 집 창문인데, 이 커다란 대문만 열어주면 잠겨버린 집 안에 들어갈 수 있는데 싶어 안절부절못한다. 담벼락에 손을 뻗는다. 싱크대 위에 올라가 작은 창문으로 몸을 빼고 담벼락을 탔던 것을 생각해보니 별것 아닌 것같이 생각된다. 담벼락에 두 손을 올리고 힘껏 발을 굴린다. 담장이 높아 쉽지 않다. 두 개의 손바닥을 짚고 다시 한번 풀쩍 뛰어오른다. 발이 공중에 뜬다. 그 순간 빠리바리리, 경적소리가 귀청을 울린다. 눈부시게 밝은 불빛이 나를 에워싼다. 9인용 승합차 한 대가 내 뒤에서 멈춘다. 애기 엄마, 여기서 뭐해! 톤이 높은 주인 할머니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린다. 나는 횡설수설한다. 장독대 뚜껑을 덮고 나왔는데, 우리 집 문도 잠겨 있고, 이 대문도 잠겨버려……. 중얼거리는 동안 여러 가지 상념이 한꺼번에 되살아난다. 카페트와 소파를 함부로 짓밟던 사내들의 흙 묻은 신발들, 크고 작은 모든 가구에 붙는 종이 딱지들, 남편을 설득해 고액의 투자를 이끌어낸 시동생의 달콤한 목소리, 고스란히 빚만 떠맡기고서 돈 없으니 몸으로 때우겠다며 의기양양하게 유치장으로 들어가 버린 투자꾼들의 넓은 등판, 경매에 넘어가 버린 15평 아파트, 오늘 아침에도 내 손을 떠나자마자 획 획 뿌려져 전철역 근처에 함부로 흐트러지는 전단지들, 시도 때도 없이 술에 취해 아랫도리를 벗어 던지고 잠이 드는 옆방 늙은 총각의 발딱 선 성기. 이 모든 것들이 테트리스처럼 줄기차게 내려온다.

    그들이 열어주는 대문으로 다시 들어간다. 장독대를 지난다. 주인 할아버지 내외와 젊은 아들 부부, 조그마한 아이들 셋이 마당에 서서 나를 본다. 미안하게 되었네 그랴, 혀를 차는 주인 할머니의 목소리가 뒤따른다. 담벼락을 타고 작은 창문 안으로 발을 들이민다. 싱크대가 기우뚱한다. 중심을 잃고 방바닥으로 쓰러진다. 담벼락에 긁힌 손바닥과 무릎의 살이 찢어져 피가 흐른다. 아프지도 않다. 바닥에 물이 뚝뚝 떨어진다. 화장실과 방 사이에 거울이 걸려 있다. 거울을 보며 흠칫한다. 젖은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군데군데 피 묻은 여자가 거울 속에서 넋을 놓고 앉아 있다. 여자가 손을 뻗어 수건을 잡아당긴다. 머리카락과 팔 다리를 오래오래 닦는다. 거울 속에 있는 여자를 한동안 바라본다. 고개를 가로젓는다. 자두 밭에 가면, 자두 밭에 가아면, 아이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빗속에서 요란하다. 물기가 흥건한 옷을 쥐어짜다가 퍼뜩 수퍼마켓 전화번호가 생각난다. 옷을 걷어 부치고 팔 안쪽을 들여다본다. 뭉툭하게 적힌 적갈색 번호들이 뭉개져 있다. 몇 번이었더라. 흐릿한 숫자와 기억을 헤집으며 수화기를 집어든다. 서네 번의 오류 끝에 가게의 소음이 전해진다. 구인광고를 보았다고 말하자 분주한 목소리는 누군가를 찾더니 한 시간 후에 다시 걸든지 직접 방문해 달라고 한다. 벽에 걸린 달력의 빈 여백에 슈퍼마켓 전화번호를 적어둔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오디오의 버튼을 누른다. 며칠동안 반복되던 시디가 다시 돌아간다. 춤을 추고 싶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점잖은 체하다가 어둠 속에서 말없이 부딪치는 눈빛에 춤추고 싶다, 고 가수가 중얼거린다. 비음이 섞인 낮은 목소리가 유혹적이다. 스피커 구멍에서 새나오는 노랫소리가 기타 선율을 타고 눅눅한 좁은 집안을 자박자박 걸어다닌다. 볼륨을 높이고 부엌으로 간다. 아귀의 크고 넓적한 몸이 도마 위에 있다. 무심코 쇠 젓가락으로 입술 천장을 들어 올린다. 입이 워낙 커서 쉽지 않다. 한가운데 있는 커다란 이빨을 집어 입을 벌린다. 아귀의 넓적한 입이 옆으로 위로 사정없이 벌어진다. 분홍빛 속살이 드러난다. 남편의 절친했던 동료, 강 기사의 운전석이 생각난다. 분홍색 등받이와 방석을 보고 십대 소녀 취향이냐면서 남편과 나는 그를 놀렸었다. 전철역 앞에서 차를 세우고 대기 중이던 그는 잠깐만 쉬어야겠다면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운전석에 앉은 채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그의 나이 사십 하나였다. 뻥 뚫린 목구멍 너머에서 남편의 긴 한숨이 새나오는 것만 같다. 톱니 같은 이빨은 입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윗몸 중간과 옆, 목구멍 근처에도 이빨이 숭숭 박혀 있다. 칼을 집어 든다. 입술 끝에 있는 독을 먼저 잘라내십쇼. 시장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차, 가위로 자르라고 했지. 싱크대 서랍을 뒤져 주방용 가위를 집어든다.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가위를 쥔다. 춤을 추고 싶다, 고 중얼거리던 가수는 후렴구에 이르자 흐느끼듯 격렬하게 웃어댄다. 그 소리가 아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만 같아서 나도 모르게 칼끝으로 아귀의 입을 치켜든다. 집 안에 웃음소리가 가득 찬다. 방으로 들어가 리모콘 버튼을 눌러댄다. 내린다는 게 잘못 눌러 볼륨이 사정없이 올라간다. 음량이 표시된 칸에 블록이 쌓인다. 한 칸, 두 칸, 다섯 칸, 열 칸. 남자 가수의 목소리가 찢어진다. 드럼과 기타와 피아노 소리가 거실 벽을 두드려 댄다. 서랍장 위에 있는 오디오 파워 버튼을 눌러버린다. 일순 집안이 고요하다. 낯선 정적이 차곡차곡 쌓인다. 주위를 둘러본다. 검은 복면을 하고 칼을 들이댄 도둑이 성큼 들어선 것만큼이나 이 조용함이 느닷없고 두렵다. 습기 먹은 집안에 비린내가 가득하다.

    엄마아아,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정신을 추스르고 문을 열어준다. 아이에게서 매콤한 양념 냄새가 난다. 무얼 먹었는지 입가가 지저분하다. 엄마, 생일파티 다 끝났어. 햄버거랑 치킨이랑 피자를 실컷 먹었더니 아, 배부르다. 아이의 배가 불룩하다. 아이는 조르르 부엌으로 달려간다. 맛있는 거 있나 볼까, 하면서 냉장고를 열고 닫는다. 호들갑스런 목소리가 이어진다. 엄마, 이거 뭐야? 되게 웃기게 생겼다. 어디…… 아야, 아이의 비명을 듣고 부엌으로 달려간다. 도마 위에 있는 아귀를 건드리다 찔린 모양이다. 아이의 검지손가락 끝에 핏방울이 맺힌다. 피를 보자 아이는 몸을 떨며 울기 시작한다. 아이를 진정시킨다. 아이는 금방 상처를 잊고 거울 앞에서 아귀 흉내를 낸다. 입술 끝을 손가락으로 넓게 벌린다. 촘촘한 이빨을 드러난다. 만화영화에서나 들릴 법한 목소리가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나는 아귀다, 맥도널드 햄버거와 케이에프씨 닭고기와 미스터 피자를 좋아하는 아귀다. 김치 같은 것은 절대로 안 먹는다. 보기 싫으니 관두라고 소리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현관문 앞에 서 있다가 들어서는 제 아빠에게도 아귀 흉내를 낸다. 거세게 내리던 비가 그쳐 있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남편은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아예 리모콘을 숟가락 과 국그릇 사이에 올려놓고 수시로 눌러댄다. 뚜렷한 채널 없이 이리저리 리모콘을 누른다. 화면의 장면들이 순간순간 바뀐다. 검은 세단에서 개 한 마리가 풀쩍 내려오는 광고, 입가에 마스크를 쓰고 시위하는 군중들, 활짝 웃으며 웨딩드레스를 펼치며 빙그르르 돌고 있는 드라마 속 여주인공, 상장을 입힌 검은 사진을 붙들고 오열하는 장례 행렬, 푸른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기, 폭탄이 터지고 건물이 내려앉는 해외 통신. 촛불을 들고서 거리에 모인 군중들. 느닷없이 끊어지고 아무 연관 없이 이어지는 소리가 한동안 계속된다. 리모콘을 쥔 남편의 손동작이 피곤하고 무료해 보인다. 차라리 텔레비전을 끄지 그래! 나는 한마디한다. 남편은 내 얼굴을 멍하게 바라본다. 당신, 봉제 기술 배워볼래? 난, 요리 배우고. 지루한 노랫말을 읖조리듯, 억양 없는 목소리다. 뜨악한 얼굴로 그를 본다. 그의 눈빛이 무심하다. 우리 떠나자. 아무런 표정이 없이 다만 그는 그렇게 중얼거린다. 떠나다니. 어딜? 도대체 무슨 말인지 싶어 한참동안 그가 한 말을 헤아려본다. 거무튀튀한 그의 눈 밑을 보면서 문득 십여 년 전의 신혼여행을 떠올린다. 배낭을 메고 등산화를 신고 땀을 닦아내며 둘이서 올랐던 무등산과 금란로. 플래카드가 붙어 있던 학생회관과 인문대학 뒤 쪽 후미진 계단과 동아리방……. 그가 신혼여행지로 원했던 곳은 제주도도 아니고 동해바다도 아니었다. 한 학기를 남겨두고 제적당한 대학과 그 근교였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본다. 빨리 씻고 자, 내일도 새벽부터 나가야하잖아.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고개를 돌린다. 깍두기와 콩나물국이 맛없어서 못 먹겠다는 아이와 실랑이를 벌인다. 남편은 그런 나와 아이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담배 갑을 집어들고 벌떡 일어난다. 그의 발길에 아이의 플라스틱 블록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쏟아진다. 남편이 나가버리자 아이도 나도 입을 다물고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만 본다. 문득 스산해진다.

    아이는 이십 분 넘게 변기 위에 앉아 있다. 얼굴이 시뻘겋다. 심한 변비다. 먹을 때는 맛있다고 하더니 햄버거 미워, 피자 미워, 소리소리지른다. 나는 아이의 통통한 엉덩이를 잡고 양옆으로 힘껏 벌린다. 아이는 울부짖는다. 아프다고 난리다. 항문이 벌어진다. 굵은 대변이 툭 떨어진다. 딱딱하게 굳은 덩어리를 내려다보며 차라리 아이를 굶겨야겠다는 모진 마음을 먹는다. 도마 위에 팽개쳐 둔 아귀를 다듬기 시작한다. 처덕처덕 칼을 내리쳐 몸통을 자른다.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정신은 이제 맑다. 고요하다. 시장 남자의 설명을 되새기지 않아도 손길이 거침없다. 양념장을 준비하고 아귀를 버무린다. 그릇에 담아 랩을 씌운다. 냉장고에 넣으며 중얼거린다. 아귀찜을 만들어야지. 입안이 얼얼하고 뭉쳐진 속이 다 풀어지도록 맵고 맛있는 아귀찜을 만드는 거야.

    문가에서 큭큭,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어보니 아이들이 두 번째 문에 매달려 있다. 딸아이와 첫 번째 집 두 아이들이다. 계집아이들을 헤집으며 열린 문틈을 본다. 시큼한 술 냄새가 훅 달려든다. 옆집 남자가 방바닥에 대자로 뻗어 있다. 아랫도리를 벌거벗은 채다. 늙은 총각의 거웃과 발딱 선 성기가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나는 딸아이의 등짝을 후려치며 문에서 떼어낸다. 아이 손목을 붙들고 무작정 쪽문을 나선다. 난, 안 보려고 했는데에에 언니들이……. 매섭게 쏘아보자 아이는 울 것 같은 표정이다. 비가 갠 동네는 한바탕 물 청소를 끝낸 직후처럼 말짱하다. 날선 바람 한 자락이 잽싸게 등허리를 파고들어 어루만진다. 아이는 손목이 붙잡힌 채 어정거리며 뒤따른다. 마을 입구에 큼직한 공터가 있다. 군데군데에 빗물이 고여 크고 작은 웅덩이를 이루고 있다. 공터 안 쪽에는 비닐로 덮어씌운 건축물이 쌓여 있다. 그 옆으로 두 개의 포장마차가 있다. 붉은 포장에 옹기종기 앉은 이들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남편의 뒷모습으로 짐작되는 그림자는 없다. 잡힌 손목을 풀어주자 아이는 공터에 쌓아둔 모래더미로 달려간다. 나는 좌회전 깜박이를 켜둔 차량을 살펴본다. 헤드라이트 불빛을 쏘아보며 낯익은 택시를 찾는다. 공중전화부스가 공터 입구에 있다. 다들 핸드폰이 있으니 공중전화 안 쓰는 것처럼 택시도 그래. 집집마다 자가용 있고 어떤 집은 두 대 세 대 굴리고 다니니 누가 영업용 택시 타냐고. 걸핏하면 남편은 그렇게 말했다. 전화부스 안으로 들어간다. 유리가 깨져 있고 전화기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수화기를 들고 주머니를 뒤져 백 원짜리 동전을 넣는다. 손가락이 향하는 대로 번호를 꾹꾹 힘주어 누른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낮에 손바닥에 적고 몇 번씩 걸었던 슈퍼마켓 전화번호다. 아무런 소리가 없다. 댕강 잘려 있는 수화기 선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수화기를 꼭 쥔 채 귓가에 바싹대고 있다. 절대로 연결될 리가 없는 상태라는 사실을 뒤늦게 실감한다.

    아이는 모래더미 근처에 웅크리고 앉아 여전히 모래집을 짓고 있다. 작은 손등 위에 모래를 수북히 쌓고 한 손으로 토닥토닥 다진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주께 새 집 다오, 노래 부르며. 아이의 노랫소리가 낭창낭창하다. 모래집이 꽤 견고하다. 모래에 파묻힌 작고 통통한 손을 살그머니 뺀다. 구멍이 뻥 뚫린다. 아이는 빼꼼히 뚫린 공간에 풀잎도 뜯어 넣고 작은 돌 몇 개도 집어넣는다. 제 손으로 모래집을 파삭 무너뜨린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두껍아, 두껍아. 노래 부르며. 나는 두꺼비 집 속에 있던 작은 돌멩이를 만져본다. 축축하지만 따뜻하고 매끄럽다. 아이의 체온이 느껴진다. 두꺼비 알 같다. 헌 집 줄게 새집 달라며 일부러 뱀에게 잡아먹힌다는 옴두꺼비에 대하여 들은 적이 있다. 알을 낳기 직전의 두꺼비는 뱀에게 먹힘으로써 스스로도 죽고 독을 퍼뜨려 뱀도 죽인다고 한다. 죽어버린 두꺼비 뱃속에서 알은 어미와 뱀을 먹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완전한 소멸과 완벽한 존재가 한자리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니. 신기했었다. 소멸과 존재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두꺼비의 모성이 아니라 어쩌면 '독' 때문이라고 생각해본다. 허물어지고 다시 세워지는 모래집 위에 늦은 저녁의 달빛이 부서진다. 아이는 지치지 않고 두꺼비를 부른다. 모래집을 짓는다. 되풀이되는 단순한 노랫말을 나도 함께 중얼거린다. 다가오는 차량을 살핀다. 남편은 어쩌면 장거리를 뛰고 있는지도 모른다. 외투에서 쇳조각이 찰랑찰랑, 몸을 부딪힌다. 열쇠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작은 쇳조각을 움켜쥔다. 아이를 데리고 집에 가야겠다 싶으면서도 늙은 총각의 벌거벗은 아랫도리를 지나치기가 싫어 미적거린다. 아이는 싫증이 났는지 모래집을 발로 부순다. 광고판 앞으로 달려간다.

    가로등 불빛을 받은 대형 광고판은 푸르게 빛난다. 짧은 스커트를 입은 모델의 다리가 낮보다 더 길어 보인다. 스타킹에 감싸인 다리 사이에, 그 세모꼴의 공간에 들어가 있는 몇몇의 풍경들이 선명하다. 대형 쇼핑몰의 반들거리는 실내, 높고 정교한 새 아파트, 바다와 닿는 쭉 뻗은 고속도로. 여자의 다리 사이에 있는 그것들이 아늑해 보인다. 아이는 고개를 광고판에 바짝 들이댄다. 모델의 다리 속에 아이의 머리가 쏙 들어간다. 아이는 소리내어 광고 문구를 읽는다. 가치의, 절정에서, 입주합니다. 오토바이 몇 대가 굉음을 내며 달린다. 온 거리에 울려 퍼지는 엔진소리가 아이의 목소리를 묻어버린다. 아이가 옷자락을 잡아당긴다. 모델의 다리 사이에 있는 새 아파트를 들여다보던 내게 쇼핑몰을 가리킨다. 쇼핑몰 안에 아이가 좋아하는 피자 집과 햄버거 집이 주욱 늘어서 있다. 즐비한 식당가를 보면서 나는 아귀를 떠올린다. 내일 저녁에는 아귀찜을 만들어야겠다. 매콤하고 쫄깃하게.
    허혜란

    허혜란

    1970년 전북 전주 출생

    1994년 전주대 국어교육과 졸업

    2004년 서울예대 문예창작 졸업예정

  • 박완서(소설가) 김화영(문학평론가)

    엄청난 수의 응모작 중 예심을 통과한 10편, 그 가운데서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여 정독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작품은 불과 4편 정도였다.

    '버그'는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사이보그 인간의 소외라는 첨단 기술시대의 주제를 무리 없이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주제의 처리 방식은 주제가 첨단적인 만큼 이 보다 더 독창적이어야 할 것 같다. '의자와 망원경'은 떠돌이와 붙박이, 꿈꾸는 자와 현실주의자 사이의 대위법을 다룬 균형 잡힌 작품이다. 그러나 창조의 세계에 있어서 모범생의 균형은 장점인 동시에 약점이다. '사막을 나는 하늘소'는 마지막까지 당선 후보로 남았다. 여러 면에서 탁월한 문학적 자질이 엿보인다. 그러나 신인의 작품치고는 너무 멋을 부린 듯한 비약과 잡다한 소제목들로 나뉘어진 단편들의 모자이크 형식이 신인의 작가적 장래에 대한 신뢰에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고 차분히 노력하면 반드시 역량을 인정받을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

    '독'은 독, 피, 칼 같은 단음절 속에 고도로 압축된 폭발력을 서술의 행간에 적절하게 충전시켜 전 작품을 팽팽하게 긴장된 상상력의 자장으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하고 있다. 처음으로 아귀를 등장시키는 도입부, 열쇠를 삼키는 열쇠 구멍, 실패로 끝나는 남편과의 정사, 세계로 통하는 저 인색한 통로인 창문과 자기 소외, 옆방 총각의 무의미하게 저 혼자 발딱 선 남성...이 주목할 만한 순간들에 고압의 전력을 실어주는 독은 곧 생명력과 표리를 이루는 힘이다. 이 힘은 곧장 이 작품의 힘이 된다. 작가의 대성을 빈다. 다만 새해 벽두부터 이처럼 음울하고 날카로운 풍경을 선보이는 것에 대하여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 허혜란

    허혜란

    1970년 전북 전주 출생

    1994년 전주대 국어교육과 졸업

    2004년 서울예대 문예창작 졸업예정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갔다. 명절에도 한자리에 모이기 힘든 많은 가족들이 좁은 방안에 모였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던 차라 어린 조카들에게 두둑한 선물보따리를 풀고 푸짐한 외식을 하러 집을 나섰다. 공교롭게도 메뉴는 아귀찜이었다. 하필이면 왜 그 많은 식당 중에서 내 어머니는 그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시는지. 당선소식을 듣는 내게 스무 개가 넘는 눈망울이 쏟아졌다. 축구공 하나가 공중을 휘몰아치며 골대를 통과하느냐 마느냐를 바라보는 바로 그 눈빛이었다. 그들의 눈에 깃든 소망과 염원의 빛이 앞으로 글을 쓰는 동안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급히 서울로 다시 오는 길, 새로 뚫린 천안 논산간 민자고속도로에 안개가 가득했다. 가시거리가 30미터 정도 될까. 보이는 거라고는 모락모락 감도는 뿌연 안개뿐이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핸들을 잡고 고개를 바싹 들이대며 운하를 헤치며 나아갔다. 백미러 속에는 흐릿한 불빛을 깜박이면서 뒤따르는 몇 대의 차가 보였다. 덜컥 겁이 났다. 나는 그 순간 간절히 원했다. 저런 불빛 하나 내 앞에 있으면 좋을텐데. 그러면 저 불빛만 보면서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뒤따를텐데. 당장이라도 갓길에 멈춰 서서 뒤따르는 차들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 맨 꼴찌로 따라붙고만 싶었다. 동시에 내 속에는 또 다른 욕망이 안개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막막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 길을 향해 엑셀러레이터를 꾸욱 누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모르게 오른 발에 힘이 실렸다. 붉은 바늘이 아무 내색 없이 110, 120을 넘어서고 있었다. 당선소감을 듣고 신문사로 향하는 길 위에서 나는 그렇게 두 욕망의 틈바구니에 보잘것없이 서 있었다.

    다만 열심히 하겠노라는 진부한 말밖에 나는 할 수 없다. 작품을 선택해주신 동아일보사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소설이 무언가를 고민하게 하고 내 앞의 세상이 어떻게 보여지는지 노려보게 하신 교수님들에게 감사 말씀을 전합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주고 믿어준 가족들에게 기쁨을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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