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갈대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들판을 헤치고 한 중년의 여인이 화면 속으로 걸어 들어온다. 그러더니 그녀 또한 갈대처럼 몸을 흔든다. 춤사위라기엔 조금 엉성하고 싱겁다. 마치 기타 선율에 맞춰 추는 것 같지만 사실 음악은 우리에게만 들린다. 우리와 마주보는 이 여인의 표정도 가늠할 수 없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놀랍고 압도적인 ‘김혜자의 춤’은 영화를 함축 하는 빛나는 오프닝 시퀀스다. 앞으로도 보기 힘든 명장면으로 기록될 것이다.
영화 <마더>는 이미 이 춤 하나로 모든 걸 말해 버린다. 어느 날 살인죄를 뒤집어 쓴 아들 도준(원빈)을 구하기 위한 엄마(김혜자)의 고독한 사투, 장르적 관점에서도 이 스토리는 간결하고 명확하다. 그러나 모성이라는 뜨거운 에너지를 극단으로 밀어 붙이는 이 영화의 실험은 그리 간단치 않다. <마더>를 단순히 모자란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바보 같은 사랑’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아들 혹은 대리 남편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한 판의 굿, 제의처럼 느껴진다. 살인사건을 풀어가는 서스펜스의 방식, 가족을 지키려 스스로 괴물처럼 변해가는 엄마의 모습은 <살인의 추억>, <괴물>과 겹쳐진다. 혹은 <피아니스트>(미하엘 하네케)의 전복적인 내러티브와 가혹한 모녀관계를 연상 시킨다. 그러나 스릴러로 봤을 땐 영화 속에 제시된 단서들이 조금은 허술하고 석연치 않다.
반면 엄마가 무엇을 지켜야 하며, 무엇을 희생해 왔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명백하게 도드라진다. 엄마는 하나 뿐인 아들(심지어 남편과도 같은)을 지키기 위해, 사회라는 괴물에게 제물을 바치고 위로해야 하는 무녀(巫女)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극중 혜자는 침술로 민간치료와 출산에 관여하는 주술사다. 동네 아낙들은 그녀들의 남편이 아닌 혜자의 침술과 약재로 아이가 생기길 기다린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어둡고 음울한 동굴-터널-골목으로 치환되는 약재상이야말로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장소인 것이다.
또한 우리는 봉준호 영화를 통해 번번이 제물로서 누가 희생돼 왔는지도 알고 있다. 연쇄살인범에 의해 살해된 것도, 괴물의 손아귀에 끝까지 들려있던 것도, 생계를 위해 매춘으로 이끌리는 것도 바로 소녀들이다. 항상 괴물들은 강인한 엄마가 될, 아직은 여린 처녀를 제물로 원한다. 아니면 순수한 상태의 아이를 잡아먹는다. 그들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보호 받아야 하는 먹이사슬 최하단에 위치해 있는 존재다.
이제 엄마는 눈을 질끈 감고 아들을 위해 타인의 아들딸을 제물로 바친다. 또 다른 도준과 같은 바보 종팔이를 바치고, 모든 사건의 목격자인 고물상 노인을 죽인다. 희생양의 피로 아들을 구하는데 성공을 거두지만 이미 엄마는 반은 미친 상태다. 모성으로 모성을 반하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이 연출된다. 영화에서 가장 공포를 주는 대목은 바로 이 미친 모성이다.
아들 도준은 아정에게 돌을 던졌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5살 때 엄마가 건넨 박카스 병을 기억해내고, 엄마의 범죄를 목격한 듯 침통을 건넨다. 죄가 또 다른 죄로 돌아오는 순환 고리 속에서 엄마는 구원받지 못한다.
엄마는 고통을 잊게 만드는 그 침을 결국 자신의 허벅지에 찌른다. 그리곤 다시 일어나 춤을 춘다. 이것은 자학의 행위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위의 춤이다. 마치 고통을 잊고자 하는 처연한 몸부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관광버스 바깥에서 담아낸 이 눈부신 엔딩 시퀀스는 그래서 어쩌면 착각이 아닐까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흥겹게 춤을 추고 있는 어머니들의 저 막춤이 알고 보니 춤이 아닌 게 아닐까. 사실 우리가 잘못 본건지도 모르겠다. 영화 <마더>는 엄마의 착각과 오해를 통해, 우리의 판단 오류를 보여주는 이상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어찌됐든 피와 광기로 물든 엄마의 축제는 끝났다. 춤인 듯 아닌 듯 소리 없는 몸부림과 함께.
유지원
본명 유종수
1981년 서울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영화평론가 정지욱
해마다 12월이면 한반도 최고 문청의 글들이 세종로에 모여든다. 올해도 그중 서른여덟 편의 평론들이 한자리에 모이니 바로 이곳이 영화평론가의 새로운 탄생을 예고하며 그 시작이 잉태된 엄마의 품이라는 상념에 빠져든다. 일주일여 기간 동안 쉼 없이 이 글들을 꼼꼼히 살피며 옥석을 가려내는 작업은 순탄치 않다. 여느 산모가 치르는 숭고한 산통에 감히 비교하겠느냐만 허나 이 중 한 편을 고르는 작업은 산통에 비견될 만한 것이다. 짧지 않은 시간의 힘든 고통 속에 얻어진 당선작의 확정은 경인년 첫 아침을 맞아 세상에 선보일 한 평론가의 탄생을 예고할지니 그저 축하할 따름이다.
이번 응모작 중에는 올 한해 화제에 올랐던 작품을 올곧게 칭송만 하는 글들이 간혹 눈에 띄었다. 진정한 평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다. 또한 장평과 단평에서 공히 반드시 분석과 감상을 적절하고 간결하게 담아내었는지를 살피며 심사를 진행했다.
유지원의 장평 ‘길 위에 '사랑'을 묻다’는 영화 ‘파주’에 앞서 박찬옥 감독의 작품들에서 일관된 작가성과 영화적 성장을 분석했다. 또한 단평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엄마의 '축제'’를 통해서 한판 굿판처럼 간결하고 신명나게 영화 ‘마더’를 들려줬다. 마치 그의 표현처럼 '춤인 듯 아닌 듯 소리 없는 몸부림'같이 찰나에 펼쳐진 날카로운 분석이 탁월했다.
유지원이 영화를 보며 두 시간의 짧은 꿈을 통해 희망을 얻는다면 독자들은 그의 평론을 통해 영화를 이해하고, 인간을 읽어내며 사회를 인식하는 통찰력을 얻게 되기를 빌어본다.
유지원
본명 유종수
1981년 서울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격한 심장박동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꼈다. 나, 아직 살아있구나. 학생시절 처음으로 영화를 매개로 글을 쓰게 됐을 때도 그랬다. 누군가에게 영화를 이야기한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흥분되는 일이었는지. 그 달뜬 감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의 두근거림이 29세 12월을 맞는 내게 찾아왔다.
일하기 바쁘단 핑계로 글쓰기와 영화는 점점 내게 멀어져 갔다. 하지만 어떤 예감처럼, 이번이 아니면 안될 것 같다는 의지로 책상에 앉았다. 더 이상 미루지 말고, 회피하지 말고 가보자. 풀릴 듯 풀리지 않는 언어의 숲에서 고독한 사투를 벌였다. 자책하는 나와 갈망하는 나 사이에서 갈등했다. 이 갈등은 분명 앞으로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걸 안다. 그 또한 피하지 않고 가야 하는 길이라는 걸 이번 기회를 통해 알았고 이겨갈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사실 숱하게 스스로에게 질문하기도 했다. 대체 왜 이렇게 글쓰기와 영화에 골몰하는 것일까. 왜 항상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자꾸 맴도는지. 영화 ‘파주’의 은모가 던졌던 질문처럼 이 일이 나에게 어떤 보람을 주며, 어떤 위로가 되는지 자문했다. 아직은 모르겠다. 글로써 그 대답을 찾아가고 의미를 보태는데 치열하게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미욱한 글 속에서 진심을 봐주신 심사위원께 깊이 감사 드린다. 믿음으로 봐주신 박범신 선생님을 비롯한 은사님들, 나와 함께 걸어오며 자극이 되었던 친구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언제나 내 글을 냉정하게 읽고 조언해준 '나의 동료' 어머니께 당선의 기쁨을 선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