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신춘문예

문 없는 집

by  임나진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
  • <등장인물>

    큰아기 (치매노인, 양수의 시어머니)
    임양수 (49)
    임양규 (37)
    윤설희 (17)
    쇳덩어리 (20)

    <무대>
    시골 외딴 동네, 판잣집. 물길을 트지 않으면 비가 조금만 내려도 집 안으로 물이 들어오는 곳이다. 이 집은 ㄱ자 형태로 마루 한칸과 방 한칸이 이어져 있다. 왼쪽에는 따로 간이 변소가 마련되어 있으며 중앙 앞쪽에는 평상이 있다. 평상 앞쪽에는 비닐로 꽁꽁 싸매져 있는 수도꼭지가 보이고 옆으로 작은 장독대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변소에서부터 방까지 빨랫줄이 길게 이어져 있고 그 위로 걸려있는 몇 가지 옷들과 수건, 이불이 눈에 띈다. 이 집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대문을 비롯한 모든 문들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에 상황에 따라 발이 처져 있거나 나무 판자등으로 임시로 가려져있다.


    1.

    양규가 집 안으로 들어온다. 더운지 연신 손부채질이다. 인기척을 내보지만 아무 반응이 없자 커다란 가방을 평상에 올려두고 앉는다. 평상 다리가 서로 맞지 않아 삐그덕거린다. 고치려다 그만두고 다시 손부채질을 한다. 큰아기가 방안에서 나오다 양규를 본다.

    큰아기 (소리치는) 입작은 귀신이다.

    재빠르게 방으로 들어간다.

    양규 저기요.

    아무런 소리가 없다.

    양규 할머니.

    큰아기가 방안에서 나온다. 두리번두리번 무언가를 찾는 눈치다. 빨래줄에 걸린 이불을 발견하고 달려가 빼려고 애쓰지만 쉽지 않다.
    양규가 큰아기를 도와 이불을 빼 준다. 큰아기가 이불을 끌고 마루위로 올라와 얼굴만 빼꼼히 내민다.

    큰아기 벌려봐.
    양규 네?
    큰아기 입. 더 크게 벌려.
    양규 (이상한 걸 느끼고) 여기 혼자 있어요?
    큰아기 혼자 있으면 삼키려고? 저리 가. 여긴 하나는 없어. 둘이야. 셋이야.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엎드린다)
    양규 둘이요? 셋이요?
    큰아기 (꼼짝 않는다)
    양규 (유심히 보다가) 맞죠?
    큰아기 (아무 말 없다)
    양규 옛날에 웅남동에서...
    큰아기 (살짝 고개만 들어) 입이 작으면 아무것도 못 삼켜. 못 삼키면 아무도 겁을 안낸 다. 사람들이 겁을 안내면 귀신이 아니야.
    양규 왜 여기 있어요? 누나는요?
    큰아기 귀신이 아니면 귀신들이랑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입작은 귀신이 자기 얼굴에 난 구멍이란 구멍은 다 입에다 갖다 붙였다. 쫓겨나지 않을려구 눈도 귀도 몽땅 떼 서 갖다 붙였어.
    양규 대낮부터 귀신타령은.
    큰아기 입작은 귀신은 눈도 안 보이고 귀도 안들린다.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고 돌아다 녀.
    양규 (짜증스럽게) 그만해요. 난 눈도 있고 코도 있고 귀도 있으니까.
    큰아기 눈을 보고 코를 보고 귀를 보니까 누굴 닮은 것 같은데.
    양규 알아보겠어요?
    큰아기 (한참 생각하다가) 입작은 귀신. (다시 엎드린다)
    양규 독하던 양반이 독하게 정신을 놨네. 해가 머리위에 걸렸는데 이부자리를 끼고.
    큰아기 해가 머리위에 걸리면 언니가 온다. 꼬리가 보일 때쯤이면 설희도 와. 언니가 오 면 둘이고 설희가 오면 셋이야. 셋은 하나가 아니다. 하나가 아니면 입작은 귀신 도 못삼켜.
    양규 언니가 언제 온다고요?
    큰아기 언니는 예뻐. 입작은 귀신도 언니가 얘기해줬다. 입작은 귀신이 구멍을 다 입에 다 갖다붙여도 그래도 입이 작아서 한번에 하나씩밖에 못 삼키니까, 부모형제 귀신들이 배가 고파졌다. 그래서 입작은 귀신을 버리구 갔다. 눈도 코도 귀도 없 는 입작은 귀신만 놔두고 도망을 갔어. 밤마다 울었다. 부모 형제가 보고 싶어서 엉엉 소리 내서 울었다고 언니가 똑같이 흉내를 냈지. 우는게 예뻐서 나는 입작 은 귀신 이야기를 자꾸 자꾸 해달라고 했다.
    양규 그러니까 지금 어딨냐구요.
    큰아기 누구? 입 작은 귀신? (생각 난 듯이 숨으며) 여기 있잖아.
    양규 언니 말이에요. 언니는 어딜 갔어요?
    큰아기 (고개만) 언니? 해가 저기 걸리면 오는데, 왜 안 오나. 오다가 입작은 귀신을 만 났나? 아이고 무서워.
    양규 허, 나 참.
    큰아기 입이 커져야 형제 귀신을 만나지? 자꾸자꾸 삼켜야 자꾸자꾸 커지지. 훠어이 훠 어이 돌아다녀라.
    양규 난 두 다리 땅에 딱 붙이고 걸어다니는 사람이에요.
    큰아기 다리 두 쪽 땅에 붙이고 걸어 다니면 다 사람인가.
    양규 여기 김양수가 사는 건 맞아요? 같이 살아요, 둘이?
    큰아기 내가 아니라 양수를 삼키려고 온 거야? 안돼. 차라리 나를 삼켜. 걔는 내 속에서 나서 나보다 겁이 많아.
    양규 누가 누굴 낳아요?
    큰아기 내 아들을 내가 낳았지, 누가 낳아.
    양규 무슨 소리에요. 할머니 아들은 그 때 (하다가 그만둔다)
    큰아기 나는 걔를 스물이 안 돼서 낳았었는데.
    양규 알았으니까 일단 나와요.
    큰아기 혼자 밖에 나가면 큰일난다.
    양규 그거 다 뻥이에요. 노인네한테 무슨 그런 얘길.
    큰아기 뻥 뚫린 입으로 한입에 삼킨다. 혼자 밖엘 나가면 입작은 귀신이 삼켜버려.
    양규 (큰아기와 자신을 가리키며) 이렇게 하면 둘이죠? 됐죠?
    큰아기 둘?
    양규 입이 작아서 둘부터는 못 삼킨다면서요.
    큰아기 셋도 못 삼킨다.
    양규 그래요, 둘도 셋도 못 삼켜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어딨는지나 말해요.
    큰아기 난 넷부턴 못 센다. 우리집엔 셋뿐이야.
    양규 날 새겠네, 날 새겠어.
    큰아기 그래도 열은 셀 줄 알지. (손가락을 다 접어 보이며) 이걸 다 접으면 돼.
    양규 (짜증이 나서 평상을 발로 찬다)
    큰아기 입작은 귀신이 화가 났다. 화가 났어.(이불을 뒤집어쓰고 납작하게 엎드린다)

    큰아기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도무지 이불 밖으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엎드린 모습이 꼭 무덤 같다. 양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쉰다.

    양규 입만 한번 벌리면 되죠?
    큰아기 (빼꼼히 고개를 든다)
    양규 (입을 대충 한번 열었다 닫는다)
    큰아기 작은데.
    양규 커요.
    큰아기 작아. (이불을 다시 쓰려고 한다)
    양규 (입을 크게 벌린다)
    큰아기 사탕 냄새가 나는데.
    양규 가지가지하네. (보다가) 나와요. 하나 드릴테니.
    큰아기 (고개를 젓는다)
    양규 그럼 말든가.

    큰아기가 이불을 뒤집어 쓴 채로 계속 양규를 쳐다본다.
    양규가 어쩔 수 없이 주머니에서 막대사탕을 꺼내 내민다.

    큰아기 눈깔사탕이 아닌데.
    양규 ......
    큰아기 뭔야, 이게?
    양규 춥파춥스요.
    큰아기 춥다추워?
    양규 춥-파-춥-스-.
    큰아기 추파줬으? 이름 참 얄궂다. (먹으며) 얼만데?
    양규 삼백원이요.
    큰아기 눈깔사탕은 백원에 세 개씩이야. 백원에 세 개인 눈깔사탕을 파는 데는 우리 동 네 밖에 없다.

    더 이상의 대화를 포기한 양규가 평상에 앉아 다시 손부채질을 시작한다. 큰아기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땀에 흠뻑 젖어 꼼지락대며 사탕을 먹는다. 양규가 그런 큰아기를 가만히 보다가 손을 들어 손부채를 해준다.
    설희가 학교 수업을 마치고 쿵쾅거리며 들어온다. 양규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설희가 그런 양규를 힐끗 보더니 신발을 뱉듯이 벗어서 가방과 함께 마루위에 던져둔다.

    설희 (여전히 이불을 쓰고 있는 큰아기를 보고) 죽겠다, 죽겠다, 그러더니 쪄죽기로 결 정 했어?
    큰아기 나쁜년.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지.
    설희 가만히 있어도 저승사자들이 매일 그 이불자락을 들었다 놨다 할텐데 뭐하러 그 래?
    큰아기 데리러 와? 누가? 입작은 귀신이?
    설희 그건 언니가 할머닐 혼자 밖으로 못 나가게 하려고 지어낸 얘기라니까.
    큰아기 아니다. 진짜로 왔어.

    큰아기와 설희의 시선이 양규를 향한다.

    양규 많이 컸다.
    설희 ......
    양규 나 모르겠냐?
    설희 ......
    양규 몰라?

    설희가 대꾸 없이 방안으로 들어간다.

    양규 (방에다 대고) 언니는 어디갔냐? (아무 인기척이 없자) 어디갔냐니까?

    여전히 조용하다.

    양규 (큰아기 가리키며) 이 양반은 왜 여기 있냐? 왜 여기서 저러고 있어?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양규 입이 붙었냐? 아님 너도 이불 뒤집어쓰고 누웠어?

    설희가 나온다.

    설희 (양규를 보고) 소리지르지 마요.
    양규 ......
    설희 이사 온지 얼마 안됐어요. 이제는 할머니까지 있어서 이사하기도 힘들어요.
    양규 누가 이사하랬냐?
    설희 양곡동에서 봤을 때도 창문이랑 다 깨져서 이사 갔었어요.
    양규 그 때는,
    설희 그 때도 똑같이 물어봤었어요. 쟤가 왜 여기 있냐고. 왜 여기서 저러고 있냐고.
    양규 ......
    설희 엄마랑 살다가 양곡동으로 처음 와서 밥 먹고 있을 때요. 그 때 날 보고 그랬었어 요.

    양규가 아무 말 없이 평상에 앉는다.

    설희 (큰아기가 여전히 이불속에 있는 걸 본다) 그만하고 나와. 이불에 땀 냄새 배.
    큰아기 ......
    설희 계속 그러고 있을거야?
    큰아기 귀신 때문에 못 나간다니까.
    설희 할머닌 머리가 커서 삼키지도 못해.
    큰아기 머리는 니가 더 크다, 이년아.
    설희 노망났다고 거울도 안 봐? 귀신이 이 동네 사람 다 삼켜도 할머니 머린 절대 못 삼켜.
    큰아기 (들고 있던 사탕을 던져 설희를 맞춘다) 오늘도 학교안가고 놀다왔지?
    설희 아니야.
    큰아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양규에게) 오늘이 몇밤이야?
    양규 (당황한다)
    큰아기 (양손가락을 다 접어보인다) 다 접으니까 열밤이지? 학교가면 열번 불러다가 칠판 에다 문제풀라고 시키니까 안 갔지.
    설희 ......
    큰아기 또 애들이 낄낄거리고 웃었어?
    설희 조용히 해.
    큰아기 사람들이 노망난 할머니 손주딸, 손가락은 굽었어도 누구한테 허리 굽히는 꼴은 못 봤다고 하길래, 내가 변소에 가서 똥을 퍼다 뿌렸다. 마주보고 깔깔거리는 면 상들에다가 골고루 뿌렸어.
    설희 그 덕에 여기까지 온 거 아냐.

    양규가 설희의 손을 본다. 설희가 양규의 눈길을 의식하고 손을 주머니에 넣는다.

    약이 오른 설희가 큰아기에게서 억지로 이불을 뺏으려고 한다. 양규가 설희를 말리려 하지만 쉽지 않다. 그 때 머리에 커다란 바구니를 이고 들어오던 양수가 양규을 보고 놀란다.
    암전

    2.

    양규가 평상에 앉아 메밀국수를 먹고 있다. 맞은편에서는 양수가 큰아기를 데리고 앉아 국수를 먹이고 있다. 큰아기는 여전히 이불을 뒤집어 쓴 채다.

    양규 (먹으면서) 얼마 만에 보는 건데. 쇠고기 좀 넣어주지, 계란고명이야.
    양수 얼마 만에 보는 건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대로야?
    양규 한번을 그렇게 안주니 별 수 있나.
    양수 여기서 난 메밀을 사다가 직접 빻아 뽑아낸거야. 육수도 시원하다. 여름나는데 이 만한 게 없어.
    양규 그러면서 왜 본인은 안 잡수고? 아직도 그 버릇 못 고쳤어?
    양수 ......
    양규 (젓가락으로 면을 들어보인다) 세월이 흘러서 얘도 늙었나? 까맣던 메밀이 하얘졌 네.
    양수 못살던 시절에나 기계가 안좋아 그랬지. 요즘에 메밀이라고 까맣게 나오는 것들은 다 색 탄거야.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입에 들어가는 걸 가지고 장난질을 해?
    양규 (웃는다)
    양수 왜 웃냐?
    양규 못살던 시절? 그럼 지금은 잘사는 시절이야?
    양수 (아무 말 없이 양규에게 국수 덜어준다)
    큰아기 내 껄 왜 줘, 이년아.
    양수 어머니껀 여기 많이 있어요. (큰아기에게 국수를 먹이려 한다)
    큰아기 (이불안으로 고개를 집어넣는다)
    양수 (달래며) 더운데 진까지 빼니까 입맛이 없지. 이제 그만 해요. 덥잖어.
    큰아기 싫어.
    양수 예쁘지도 않은 걸 뭐하려고 뒤집어쓰고 있어. 줘요. 더 좋은 걸로 하나 가져다 드 릴게.
    큰아기 싫다니까.
    양수 사탕 드릴까?
    큰아기 눈깔사탕은 안 먹는다. 삼백원짜리 추파주는걸 먹었어.
    양수 그럼 국수 드세요. 땀은 그만하면 실컷 빼셨으니까 이젠 열 좀 빠지게 그거 좀 벗 고요.

    큰아기가 다시 고개를 빼서 국수를 받아먹는 듯하다가 다시 이불안으로 들어가서 장난을 친다.

    양규 (큰아기 보고) 잘못 찾아온 줄 알았어.
    양수 오년 됐다.
    양규 어떻게 연락이 돼서?
    양수 하나 남은 딸이 멀리 나가게 돼서.
    양규 제 발로 왔다고? 누나랑 살겠다고?
    양수 나이가 들면 기억력도 흐려지는거야.
    양규 정신이 흐려진거겠지.
    양수 (나무라는) 다 듣는다.
    양규 그러니까 노망난 노인넬 떠맡은거네? 그것도 옛날에 잠깐 살다 원수 돼서, 연락 끊고 산지 이십년이 다 된 시어머니를?
    양수 ......
    양규 살던 남자는?
    양수 울산서 차 떼다 판다더라. 장사가 제법 된대.
    양규 그 남자랑은 살 것도 같더니. 이것도 유전인가? 아님 살림차리고 살 팔자가 아닌 가.
    양수 지금 사는 건 소꿉놀이냐?
    양규 저 손에 머리채 잡혀서 죽일년 쳐죽일년 소리 듣던 거 기억 안나?
    양수 기억력도 좋다.
    양규 나름대로의 첫사랑에의 순정이야? 아님 죄책감?
    양수 (물을 마신다)
    양규 (양수가 마시는 물을 뺏어 마당에 뿌린다) 한여름에 이렇게 물을 끓여 마시는 사 람이 어딨어? 이 집 사람들은 전부 더위를 못 먹어 환장을 했나?
    양수 국수나 먹어. 불면 못 먹는다.
    양규 아직도 꿈 꿔?
    양수 꾸고 싶어도 못 꾼다. 이젠 얼굴도 생각이 안나.

    서로 말이 없다. 방안에서 설희가 나와 마루에 앉는다.

    양수 (설희에게) 안먹고 어딜 가.
    설희 안고파.
    양수 한숟갈이라도 떠. 오빠 오랜만에 왔는데.
    설희 나중에.
    양수 오빠 기억은 나?
    양규 무지하게 잘하고 있던데.
    설희 (말없이 신을 신는다)
    양수 (설희에게) 너 또 그 쇳덩어릴 만나러가지?
    설희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앨 보구 쇳덩어리가 뭐야.
    큰아기 여기서 그 놈을 다르게 부르는 입들이 있어? 진짜 쇠면 무게 재다 팔아먹기나 하 지.
    설희 가벼운 것보단 무거운 게 낫지. 그럼 사내자식이 단단칠 못하고 흐물흐물 늘어져 야 할까.
    큰아기 그 놈은 몸뚱이가 아니라 머리통이 쇳덩이야. 쇳덩일 끼고 있어봤자 독만 오른다. 설희 대장장이가 쇠 독 오를까 겁내는 거 봤어? 솜씨 좋게 잘 만 다듬어놓음, 평생 가.
    큰아기 솜씨 좋은 대장장이는 달궈진 쇠만 두드리는 법이다. 몇 번 두들긴다고 다듬어지 면, 그게 쇳덩이간디? 데이지나 말아라. 그런 건 된장을 발라서 나을게 아니야.
    설희 된장은 할머니한테나 발라. 오이 사올테니까.
    양수 (보다가) 주머니에서 손 빼고 걸어. 딸애가 그렇게 걸으면 보기 흉하다.
    큰아기 (고개 내밀고) 딸? 내 딸년은 어딨나. 국수라면 씹지도 않고 들이키는 년인데.
    양수 제제작년에 왔잖아요. 동오랑 동연이도 데리고 와서 같이 밥 지어 먹었지요?
    큰아기 그년은 밥을 와구와구 퍼먹지. 제 오빠 주려고 끓여놓은 라면을 훔쳐 먹다가 부 지깽이로 얻어터지면서도 국물 한방울 안 남긴 년이다. 먹는거라면 제 자식 입에 들어가는 것도 아까워할걸. (양수에게) 그래도 국수는 좀 남겨줘라. 특별히 좋아 하니까.
    설희 소식 끊긴지 삼년이 다 돼 가는데 남겨서 뭐하게?
    큰아기 (설희가 신 신은걸 보고) 어딜 가?
    설희 오이 사러가요, 왜.
    큰아기 누가 땀띠가 났어?
    설희 (기가 막혀 웃는다)
    큰아기 나도 가자.
    설희 그걸 뒤집어쓰고 어딜 가겠다고.
    큰아기 혼자 밖엘 나가면 큰일난다. 입작은 귀신이 잡아가. (양수를 보며) 그렇지?
    설희 잡아가도 갈 때가 다 된 노인네를 먼저 잡아가지. 어린애들을 잡아가면 그 귀신 도 갈 때가 다 된거야.

    설희가 나간다. 큰아기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맨발로 설희를 따라 나간다. 양수가 큰아기를 말리려 따라가지만 이미 늦었다. 돌아와 부엌으로 들어간다.

    양규 (바깥에 눈길을 두고) 손가락은 왜 저래?
    양수 (소리만) 뭐라고?
    양규 구부러진 것 같던데.
    양수 (나오면서) 날 때부터 그랬단다.
    양규 왼쪽도?
    양수 새끼손가락만.
    양규 ......
    양수 사람마다 약간씩 못난 부분은 있다. 나는 왼쪽 팔마디가 조금 짧고. 너도 코뼈가 약간 휘어졌잖니.
    양규 (생각에 잠겨서) 그런 게 흔한가?
    양수 그래도 손이 얼마나 야무진지 모른다. 나보다 나아.

    (사이)

    양규 뭐 좋은 얘기라고 그걸 써먹어?
    양수 뭘?
    양규 자꾸만 입을 벌려보라더라. 나보고 입작은 귀신이래.
    양수 기억하냐?
    양규 얼마나 심각하게 얘길 했는데, 잊을 수 가 있나.
    양수 입담이 좋으셨다. 이야길 아주 재미나게 지어내서 밤이면 이부자리에 누워 실감 나게 들려주셨지.
    양규 절실했던거지. 도망은 가야하는데, 어린애가 혹시나 따라 나와서 발목이라도 잡을 까봐.
    양수 ......
    양규 하여튼 누나네 엄마고 날 낳은 엄마고 참 대단들 해? 어린애한테 문고릴 잡아당기 게 해서 이를 뽑질 않나, 되지도 않는 이야길 지어내서 혼자 밖엘 못나가게 만들 질 않나. 그래도 이편이 좀 낫네. 난 이제는 실컷 혼자 돌아다니며 살지만 누나는 아직도 문고릴 못 잡잖아?
    양수 ......
    양규 엄마야 도망가려니까 날 밖에 못나오게 하려고 그랬다지만, 누난 도망갈 일도 없 는데 그런 얘긴 왜 했어?
    양수 어머니가 자꾸만 밖을 돌아다녀서.
    양규 그러니까 문 좀 달고 살아. 양수 나이 든 노인네를 혼자 잠궈 둬?
    양규 나이 든 노인네 이불 안에 가둬 놓는 건 괜찮고?
    양수 ......
    양규 누가 들면 어쩌려고 그래. 여자만 사는 집에.
    양수 아무도 안 온다.
    양규 아무도 안 오는거야, 아무나 들어오라는거야?
    양수 들고 날 때 거치는 것이 없으니 얼마나 편하냐.
    양규 퍽도 편하게 산다.

    양수는 시장에서 떼 온 물건들을 늘어놓고 다듬기 시작한다.

    양규 오늘은 그런 것 좀 안하면 안 돼?
    양수 멀쩡한 손발 놀리면 벌 받는 법이다.
    양규 손발 놀리는 사람들 상줘야 하는 세상이야. 손발 놀리기 싫어 그 손으로 나쁜짓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양수 한포대에 만사천원에 받아온 걸 다듬어다 만육천원에 판다. 복분자 절인 건 이만 한거 한통에 이만원을 받고. 언제 비가 오거나 단속이 뜰지 몰라. 빨리해서 팔아버 려야지. 아니면 금방 상해버리니까.
    양규 만육천원?

    양규가 지갑에서 만원짜리 한 장과 천원짜리를 꺼내는데, 천원짜리가 세장밖에 없다. 할 수없이 만원짜리 두장을 꺼내 양수에게 내민다.

    양규 이만원에 살게. 됐지?
    양수 너는 사내자식이 통이 그게 뭐냐. 값을 더 쳐주겠다면서 기껏 사천원이야?
    양규 알았어요. 알았어. (지폐를 더 꺼내며) 더 줄게. (아예 지갑 통째로 내민다) 그냥 다 가지셔. 됐어?

    양수는 양규를 쳐다보지도 않고 부지런히 손을 놀린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양규도 같이 푸성귀를 다듬는다.

    양수 놔 둬.
    양규 손발 놀리면 벌받는다며.
    양수 망치기나 하려고.
    양규 어려서부터 손은 야무졌어.
    양수 엄마를 닮아서 그래.

    (사이)

    양수 어떻게 살았냐.
    양규 밥 먹고 살았지. 뭐 그런 걸 물어.
    양수 뭘해서 먹고 살아?
    양규 도둑질이라도 했을까봐? 걱정마. 일해서 먹고 살았어.
    양수 도둑질이라도 할 만한 인사면 걱정도 안하지. 넌 너무 여려.
    양규 (웃는다)
    양수 왜 웃어?
    양규 나 예전에 장안동서 쌩노 뛸 때, 거기 십장이 성질머리가 고약해서 씹장이라고 불 렀거든?
    양수 쌩노가 뭐야.
    양규 아, 쌩 노가다. 노가다 말이야. 그 땐 건설 쪽이 한창 호황이라 일거리도 많았거든. 근데 그 아저씨가 처음에 날 보고는 뜨내긴데다가 허연게 멀거죽죽하게 생겼다고 써주질 않는거야. 외국애들은 데려가면서도.
    양수 멀거죽죽이라니. 훤한 인물을 가지고.
    양규 거기선 귀티나게 생기면 그렇게 얘길 해. 여튼 그 때야 뭘 아나.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일주일을 그대로 공쳤네. 있던 돈도 다 떨어지고 삼일 굶으니까 죽겠더라. 마지막으로 작정을 하고 찾아갔더니 쉬는 시간이야. 소주를 까고 있더라. 날 보더 니 가서 공부나 하지 술맛 떨어지게 왜 왔녜. 아마 욱하는 마음에 가출한 샌님으 로 봤나봐.
    양수 인물은 몰라봐도 사람은 잘 봤구나.
    양규 이대로 가면 죽을 것 같고. 분하기도 하고. 뭐라도 보여줘야겠다 싶어서 날 고삐리 취급하면서 얼굴에 멸치 대가리를 던지던 아저씨한테 달려들었어. 공사판에선 젊 고 자시고가 없대. 힘이 어찌나 좋은지 몇 대 맞으니까 위에서 위액이 올라오더라. 한참을 웩웩거리는데 옆에 그라인더가 눈에 띄는거야. 그걸 들고 막 휘둘렀어. 아 무도 다친 사람이 없었는데 그라인더는 박살이 났지. 알고 봤더니 내가 달려들었 던 아저씨가 십장이야. 눈물범벅이 돼서 악을 쓰는 나를 보고서야 일을 시켜주더 라. 박살난 그라인더값 물어내라면서. 그 정도 장비는 개인이 사서 들고 다니는거 였거든. 진짜로 첫 일당을 받아 챙기데?
    양수 벼룩의 간을 내먹지.
    양규 그래도 만원은 떼어줬으니까. 오랜만에 고기도 배터지게 집어넣었고. 그 때부터 친 해졌어, 그 아저씨랑. 파업도 같이 하고 쇠파이프 든 새끼들이랑 숱하게 치고받았 다. (보다가) 각목가지고 사람 뒷통수 쳐본 적 있어?
    양수 (놀라서) 너.
    양규 걱정마. 아직까진 나도 없으니까.

    (사이)

    양수 양욱이는 신학대학엘 가서 신부님이 됐단다. 이름도 바뀌었어. 바우로래.
    양규 둘로도 모자라서 하느님까지 아버질 삼기로 한거야?
    양수 까만 신부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더라. 양미가 사진을 가지고 와야 볼텐데. 애 낳 은지가 얼마 안돼서 오기가 쉽지 않나봐.
    양규 아마 걘 신부도 잘할거야. 애초에 여자가 안 따르니 유혹이 없잖아. (실실 웃으며) 걔가 왜 그렇게 인물이 없는 줄 알아? 걔 엄마가 인물이 없거든. 우리 오입쟁이 아버지께서 돈이 다 떨어졌을 때 만난 여자였단 말이지.
    양수 동생이지만 이젠 신부님이 됐으니 말을 높여.
    양규 왜? 교회도 다닐까? 아, 교회는 신부가 아니라 목사지?
    양수 애 낳고 난데는 가물치랑 늙은 호박을 삶아 먹어야 하는데, 양미한테 좀 가져다주 고 싶어도 주소를 몰라서. 전화번호부 같은 걸 찾아보면 알 수 있을까?
    양규 에미가 버린 자식 실컷 키워놓고, 배다른 형제 있는 줄 알면 책잡힌다고 식장출입 도 못했어. 그걸로 연 끊는 거지 뭘 그렇게 질질 끌어?
    양수 연 끊을 기운 있으면 담배나 끊겠다.
    양규 담배 끊는 것보다 연 끊는 게 훨씬 오래 사는 길이야.
    양수 담밸 오래 살려고 끊어? 돈 드니까 끊는 거지.
    양규 담배 값도 아까운 사람이 피도 살도 안 섞인 저 혹들은 왜 붙이고 살아?
    양수 피도 살도 섞인 내 혹은 너 하난데. 쉽사리 붙을 거 같지가 않구나.
    양규 (보다가) 누난 아버질 닮았어야 해. 아님 날 낳아준 엄마를 닮거나.
    양수 ......
    양규 누나네 엄마는 돌아가셨지? 양욱이, 양미네 엄마야 아버지가 워낙 패니까 어쩔 수 없이 도망간거고. 날 낳은 엄마는 그렇게 구질구질 안 그랬어. 맨날 여자 울리고나 다니던 아버지를 유일하게 울린 여자야. 시원하게 바람나서 쿨하게 떠났지. 그랬더 니 지금 봐. 나가서도 살고 싶은 대로 살고. 그러다 그 나이에 애비도 없는 늦둥이 도 보시고. 그 늦둥이는 지금 친자식도 아니고, 한 때 같이 살던 의붓자식이 키우 고. 한 때 같이 살던 친자식은 그런 에미를 이렇게 무지무지 멋있어하기까지 하고. 이런게 편하게 사는 거야.
    양수 ......
    양규 한번 버렸음 뒤도 안돌아봐야 하는 거야. 지나간 세월은 무심하고도 편한거라고.
    양수 콧구멍 두 개 가지고 세상사는 것들치고 삼백육십오일 내내 시원하게 숨 쉬면서 사는 것 없다. 다들 숨 졸이고, 드물지 않게 헐떡거려.
    양규 누난 콧구멍이 열 개쯤은 됐어야 해.
    양수 소용없다. 구멍치고 막히지 않는 구멍 있다든.

    (사이)

    양수 송탄에다 뿌렸다. 욕심 없이 사시던 분이라 그런지 재가 한줌이 안되더라.
    양규 그랬을거야. 워낙 마음대로 살아서 안에 쌓인 게 없었을테니까.
    양수 찾아봬라.
    양규 걱정 마. 우리 엄만 무지무지 쿨해서 그런 걸로 섭섭해하지도 않을테니까.
    양수 ......
    양규 십장이 말이야, 물탱크 공사를 하러 들어갔다가 가스를 마셨어. 아저씰 업고 병원 으로 달렸는데 도착하기도 전에 죽었어. 근데 아무도 책임이 없대. 멀쩡하던 사람 이 한순간에 죽어버렸는데, 아무도 책임이 없다는 거야.
    양수 ......
    양규 우린 도대체 왜 여깄는걸까.
    양수 (보다가) 사람 여린 건 어린 것보다 더 위험하다. 그걸 알아야 해.

    암전

    3.

    새벽에 비가 내리다 막 그쳤다. 양규는 물길을 트러 맨발로 나갔다. 양수는 방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받아내고, 설희는 마루에 책을 펼쳐둔 채 누웠다.

    설희 (자기 왼쪽 가슴 아래를 짚으며 크게) 여기가 어디야
    양수 (물이 가득 든 바가지를 들고 나와 비운다) 조용히 해라. 할머니 깨신다.
    설희 여기가 어디냐니까.
    양수 어디 말이냐.
    설희 (양수에게 달려들어 왼쪽 가슴 아래를 짚는다) 여기, 가슴 아래, 갈비뼈 아래 말이 야.
    양수 가슴 아래, 갈비뼈 아래지.
    설희 (벌러덩 눕는다)
    양수 (설희의 머리를 허벅지에 눕히고 쓰다듬는다) 왜? 거기가 아파?
    설희 아무래도 난 여기에 심장이 있나봐.
    양수 (어루만져주며) 뭐 때문에 그러나. 강둑이 넘칠까봐 겁이 났나.
    설희 비만 오면 넘치는 게 강둑인데 뭘 놀라.
    양수 (바깥을 보고) 맨발로 나갔는데. 다치지나 않을란지 모르겠다.
    설희 (있다가) 담배를 엄청 피더라.
    양수 누가?
    설희 ......
    양수 양규가?
    설희 어제도 사다 줬는데 아침에 또 사오라대. 입이 열 개씩 달린 것도 아닌데 언제 그 렇게 피워대는지. 옛날엔 담배 냄새도 싫어하더니.
    양수 니가 어떻게 알아?
    설희 내가 양곡동으로 처음 왔을 때, 오빠가 언니랑 싸웠잖아. 날 보고 쟤가 왜 여깄냐 고. 왜 여기서 저러고 있냐고. 이제는 계모가 낳은 자식까지 키우려고 하냐고 소릴 지르고. 언니가 아무 말도 안하고 담배만 피우니까, 오빠가 숨 막힌다고 재떨이를 던졌어.
    양수 그걸 기억해?
    설희 ......
    양수 오빠를 미워해서는 안된다. 오빠는 너무 여려서 그래.

    설희, 돌아눕는다.

    양수 설희야.
    설희 엄마 보고 싶다.
    양수 엄마얘기 해줄까.
    설희 그래.
    양수 좋은분이셨다. 언닐 낳은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 오빠랑 너를 낳은 엄마가 들어오 셨지. 사정이 있어서 오래 있지는 못하셨지만 우리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는지 모 른다.
    설희 어떻게 잘해줬는데?
    양수 아침에도 갈비를 지글지글 구워서 먹고, 장에 가서는 예쁜 옷도 골라 입고. 주말 에는 극장구경도 갔지. 아주 멋쟁이셨다. 손을 잡고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다 쳐다 봤어. 입담이 얼마나 좋았는지 밤마다 옛날이야길 해주셨다.
    설희 나랑 살 땐 할머니였는데.
    양수 너랑 살 땐 그랬어도 언니랑 오빠랑 같이 살 때는 아주 젊었지.
    설희 젊었어?
    양수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고 나가면 다들 처녀 같다고 했어.
    설희 언니네 엄마는 안 그랬어?
    양수 우리 엄마? 우리 엄마는 아파서 그러질 못했지.
    설희 아파? 어디가?
    양수 머리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팔도 아팠지. 그 중에서 가슴이 제일 아팠는데 이가 썩어서 나중에는 것보다도 이가 더 아팠어.
    설희 치과엘 가야지.
    양수 돈이 없어서 참았어. 처음에는 썩은 이가 하나였는데 번져서 세 개다 됐다. 결국 참지를 못하고 뽑아버렸어.
    설희 자기 손으로?
    양수 팔이 아파서 얼굴 위로는 들지도 못했는데.
    설희 그럼 친구가 뽑아줬어?
    양수 아니. 동네에서 우리집을 상대해주는 사람이 없었거든.
    설희 그럼 어떻게 했는데?
    양수 실을 이에다 동여매고 나한테 힘껏 잡아당기라고 했지.
    설희 그래서 뽑았어?
    양수 아니. 그 땐 언니가 너무 어렸었거든. 겁을 먹고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보다가 그냥 나가서 놀라고 그랬어. 다행이다 싶어 뒤도 안돌아보고 나갔지. 실컷 놀다가 엄마 가 부르는 소리에 달려가 문고리를 잡고 문을 왈칵 열었어. 근데 엄마가 쓰러져 있더라.
    설희 이가 너무 아파서?
    양수 얼굴을 가리고 엎드린 엄마의 손가락사이로 피가 눈물처럼 뚝뚝 떨어졌다. 문고리 에는 썩은 이 세 개가 대롱대롱 매달려있고. (생각한다) 참 아팠을텐데.

    (긴 사이)

    쇳덩어리가 들어온다.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잔뜩 젖었다. 설희가 책을 펴고 앉는다.

    양수 (책보고 있는 설희에게) 내가 뭐랬어, 이왕 이사를 하려면 다른 도시까진 아니래두 몇 동네 다리는 건너야한다고 했지?
    설희 등잔 밑이 어두울 줄 알았어.
    쇳덩어리 오다가 보니까 물길이 시원하게 나 있습니다.
    양수 설희 오빠가 와서 냈다.
    쇳덩어리 오빠요? 오빠가 왔어요?
    양수 그래, 왔다. 넌, 이왕 올거면 일찍 와서 일손이나 도와주지, 뭐한다고 다 끝나고 나서야, 와?
    쇳덩어리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질 때 출발해서 빗방울이 땅을 적시기 전에 도착하려고 했는데, (배를 가리키며) 이 안에서도 동시에 이상기후가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땅 보다 바지가 먼저 젖을 것 같아 일을 보고 오는데 누가 이미 물길을 내셨더라 구요. 좍좍-
    양수 (설희에게다 대고) 쇠 독 오를까 겁내는 대장장일 봤냐고? 똥독이나 조심해라. 대 장 장애야. (부엌으로 들어가며) 오빠가 다 젖었을텐데, 씻을 물을 좀 뎁혀놔야지.

    쇳덩어리가 마루에 오른다. 설희는 모른 척 하고, 책만 들여다보며 앉아있다.

    쇳덩어리 오빠가 왔어?
    설희 무슨 일이야?
    쇳덩어리 무슨 일이라니. 어떻게 이럴 수 가 있어?
    설희 뭐가.
    쇳덩어리 어떻게 말도 없이 이사를 가?
    설희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앞으로 보기 힘들 거라고 했잖아.
    쇳덩어리 괜히 그러는 말인 줄 알았지 이사 가는 줄은 몰랐어.
    설희 (책만 본다)
    쇳덩어리 뭘 하고 있어?
    설희 복습.
    쇳덩어리 하면 학교서 돈 좀 깎아주나?
    설희 수염이나 좀 깎아라.
    쇳덩어리 왜 이래. 내가 너 만나느라 새벽부터 목욕도 하고 왔는데.
    설희 이빨도 닦았다고 자랑하지 왜.
    쇳덩어리 이빨은 짐승한테나 쓰는 말이다. 넌 학교 다니는 애가.
    설희 이빨이나 닦어, 냄새나.
    쇳덩어리 너, 내가 너 땜에 새벽부터 얼마나 죽을 고생을 했는지 알아?
    설희 대장장애가 나 때문에 생겼어?
    쇳덩어리 듣고 나면 놀랄걸.
    설희 또 개 팔았어? 한번만 더 그럼 정말 멀리 가버릴거야.
    쇳덩어리 이번엔 기가 막힌 거야.
    설희 난 너 하는걸 보고 있으면 기막혀.
    쇳덩어리 안 궁금해?
    설희 모르는게 약이야.
    쇳덩어리 학교만 졸업해. 그럼 젤 큰 병원에 가서 수술시켜줄게.
    설희 아직도 그 소리야? 왜? 이번엔 동네에 있는 개가 아니라 소라도 훔쳐 팔았어?
    쇳덩어리 (귓속말로) 이 동네 맨홀뚜껑을 다 갖다 팔았다.
    설희 (놀라서) 미쳤어.
    쇳덩어리 종이는 뭉치로 가져가도 오백원을 줄까 말까지만 쇠는 오만원을 줘.
    설희 오만원으로 손가락을 펴?
    쇳덩어리 키로당 오만원이다. 뚜껑 하나에 몇키로짜린 줄 알기나 해? 그걸 다 들어 옮기 느라 서방님 허리 나가실 뻔 했단 말야.
    설희 누가 보면 어쩌려고?
    쇳덩어리 모두 다 제집 물 새는 거 막느라 정신이 없는데 날 어떻게 봐? 그리고 봤음 어 쩔거야? 이미 난 나라를 지키느라 바쁜 몸인데.
    설희 큰일 나기 전에 당장 갖다놔.
    쇳덩어리 맨홀에 일부러 들어가는 사람은 없어. 이 동넨 시골이라 어린애들도 없고. 이제 날도 밝았고, 사람들이 보고 신고를 하면 구청에서 와서 새로 맞춰 놓겠지. 어디 집에 있는 걸 훔친 것도 아니고, 누가 사고가 나고 손해를 본다는거야?
    설희 .....
    쇳덩어리 이렇게 꾸준히 모으면 졸업하고 나서는 수술을 할 수 있을거야. 좋지?
    설희 ......
    쇳덩어리 내가 알아봤는데 말야, 수술만 받으면 감쪽같대. 완전히 굽어있었다는데도 멀쩡 하게 펴졌더라구.
    설희 나 같은 사람이 있어?
    쇳덩어리 응. 아니, 그 사람은 손가락이 아니고 발가락. 하지만 발가락을 폈는데 손가락을 못 펴겠어? 손가락은 발가락보다 훨씬 길어서 수술하기도 쉬울텐데.
    설희 ......
    쇳덩어리 수술만 받으면 더 이상 주머니에 종일 손을 집어넣고 다니지 않아도 돼. 그럼 손에 습기도 안차고.
    설희 그리고?
    쇳덩어리 겨울에 장갑도 예쁘게 낄 수 있고.
    설희 또?
    쇳덩어리 코 파기도 쉽겠다.
    설희 (째려본다)
    쇳덩어리 피아노를 치자. 넌 손가락이 길어서 피아노도 잘 칠거야.
    설희 안 쳐. 기다리는건 딱 질색이야.
    쇳덩어리 학원엔 시간에 맞춰서 가면 기다리지 않아도 돼.
    설희 잘 칠 때까지 연습해야 하잖아.
    쇳덩어리 연습하지 않고 바로 할 수 있는 건 없는데.
    설희 악수도 연습이 필요해?
    쇳덩어리 아니.
    설희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하는 건?
    쇳덩어리 그런 건 지금도 할 수 있어.
    설희 연필을 꼭 쥐고 편지를 쓸거야.
    쇳덩어리 나한테 써. 아침마다 큰소리로 읽을게.
    설희 아침마다 커피를 마실거야. 새끼손가락을 곧게 펴고.
    쇳덩어리 물도 그렇게 마셔.
    설희 (웃는다)
    쇳덩어리 졸업을 하고 나면 일단 오른손부터 수술을 하는 거야. 그동안 나는 돈을 벌고.
    설희 ......
    쇳덩어리 그럼 또 그 돈으로 왼손도 수술을 받는거야.
    설희 그럼 넌 뭘하고?
    쇳덩어리 돈을 벌겠지. 연필이랑 편지지도 사야하니까.
    설희 그리고 또 돈을 벌어서 커피를 사고? 으이구, 바보. (조용히) 해가지면 요 다리 밑으로 나와.
    쇳덩어리 누님한테 뭐라고 하려구?
    설희 아침에 비가 와서 오늘은 시장이 저녁에 열린단 말이야. 언니는 시장에 가고 없 어.
    쇳덩어리 (좋아한다)
    설희 어서 가. 괜히 여기 더 있다 일이나 실컷 하지 말구.

    암전

    4.

    설희가 조심스럽게 신을 신는다. 철기와의 약속장소에 나갈 참이다. 큰아기가 방에서 나와 마당에 신발을 던진다. 양규의 신발이다.

    큰아기 자다가 골이 아파 깼다. 이 물건 냄새가 코만 썩히는 게 아니라 내 골까지 썩혀.
    설희 조용히 해.
    큰아기 그 냄새 나는걸 왜 농 안에다 숨겨.
    설희 숨기긴 누가. 밖에 두면 들쥐가 물어 뜯을까봐 넣어 둔거지.
    큰아기 우리 집엔 물이 많아서 들쥐가 얼씬도 안하는 걸 몰라?
    설희 물 무서운 줄 모르는 쥐들이 아직 남아있어.
    큰아기 들개들이 내려와 다 잡아버린 걸 니가 모른다구?
    설희 있어. 쥐가 있다니까. 어젯밤에도 쥐가 물어뜯어 양말에 구멍이 났어.
    큰아기 보자.

    설희가 신고 있던 발을 들어 보여준다. 정말 구멍이 나 있다.

    큰아기 정말 쥐가 있네. 이 놈의 쥐새끼, 당장 잡아버려야지.

    큰아기가 쥐를 찾아다니는 척 하다가 설희의 엄지발가락을 꽉 잡는다.

    큰아기 잡았다. 요놈의 쥐새끼. 어젯밤 양말에 구멍을 뚫고 도망간 놈이 바로 너렷다.
    설희 아파, 놔.
    큰아기 싫다.
    설희 노라니까.
    큰아기 못 놓는다. 이번엔 어디에 구멍을 뚫으려고?
    설희 사탕줄테니까 놔.
    큰아기 추파주는거야?
    설희 그게 뭐야?
    큰아기 (크게) 추파주는거.
    설희 그런 건 몰라.
    큰아기 그럼 나도 모른다.
    설희 쇳덩어리한테 말해서 구리 반지 하나 만들어줄게.
    큰아기 있는 금가락지만으로도 열손가락이 모자란데 그깟 구리조각이 뭐야.
    설희 할머니가 무슨 금가락지가 있어. 손가락에 끼울거라고는 골무도 하나 없으면서.
    큰아기 내가 왜 금가락지가 없어. 함 가득 있다.
    설희 거짓말.
    큰아기 거짓말이긴.
    설희 그게 어디서 나서?
    큰아기 우리집이 인물 좋기로 동네에 소문이 났었다. 그 중에서도 막내인 내가 제일 인물 이 좋아서, 엄마 아부지가 갈수록 기술이 좋아진다고, 배가 이렇게 부른 여자들이 그 기술 배우러 우리 집에 줄을 섰다.
    설희 동네 총각들은 안서고?
    큰아기 우리 동네 사내놈들은 변소 간엘 안 갔어. 나만 보면 길에서 오줌을 질질 지리는 통에 변소간에다 눌 오줌이 모자랐지. 그래도 나는 고개 한번 안 돌리고 서방만 보고 살았다. 그러니까 내가 을매나 이쁘겠나. 서방이 철마다 금가락지를 사다가 끼워주는데 내가 돈이 아까워 사지 못하게 했다. 그래도 말을 안 듣고 자꾸만 사 오길래, 계속 그러면 아예 반지 낄 손가락을 잘라버릴꺼라고 칼까지 들었어. (손에 상처를 보여주며) 보이지?
    설희 거 이상하네.
    큰아기 뭐가.
    설희 그 상처는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애가진 걸 알구 억지로 떼내려고 하다가 생긴 상 처라던데.
    큰아기 어떤 년이 그런 소릴 해?
    설희 접때 할머니 딸이 와서 그러던데.
    큰아기 윗구멍이 성치 않은 걸 밑구멍이 빠지도록 낳았구나, 내가.

    큰아기가 분을 참지 못해 벌떡 일어난다. 그 순간에 설희가 이불을 낚아챈다.

    설희 땀띠 난 것 좀 봐. 내가 시원하게 씻겨줄테니까 조용히 해.
    큰아기 씻기긴 내가 그년 입을 시원하게 씻겨 놀 참인데.
    설희 아유, 씻겨줄 때 가만히 있어.
    큰아기 싫어.
    설희 무슨 말만 하면 싫대. 싫으면 시집가.
    큰아기 시집가? 씻으면?
    설희 씻어봤자 얼굴이 너무 커서 못가.
    큰아기 (설희를 때린다)
    설희 알았어, 알았어. 깨끗하게 씻고 시집가자. 됐지?

    설희가 수건을 받아다 큰아기 목에다 대주고 물을 떠다 씻긴다.

    큰아기 껍질 벗겨지겠다, 이년아.
    설희 껍질이 아니라 때야, 때.
    큰아기 손 가는 곳에 눈을 둬야지, 엇따가 눈을 두고 손만 왔다갔다하냐.
    설희 내가 언제.
    큰아기 눈알을 가만히 두라니까. 왜 자꾸 희번덕거려.
    설희 또 생사람 잡네.
    큰아기 이년아, 잡긴 니가 내 목덜밀 잡고 있지.
    설희 조용히 해. 깨겠다.
    큰아기 아무도 없는데 누가 깨?
    설희 안에서 자잖아.
    큰아기 없어. 갔어.
    설희 신발이 여깄는데 어딜 가?
    큰아기 (물장난을 친다)

    설희가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간다. 정말 아무도 없다. 옷장을 뒤져본다. 가방이 그대로다. 다시 나와 큰아기의 얼굴을 씻긴다.

    큰아기 지갑을 훔쳐선 안된다.
    설희 뭐?
    큰아기 지갑을 훔쳐봐선 안돼. 하지만 이왕에 훔친거라면 안에 있는 돈을 꺼내서 제 주 머니에 넣어야지, 제 주머니에 있는 돈을 꺼내서 훔친 지갑에 넣으면 그건 더 안 돼.
    설희 담배 값으로 한번에 만원씩 주더라. 지갑을 열어보니까 그렇게 주다간 열댓갑만 사면 한푼도 안 남겠던데. 그런데 또 담배가 없으면 못 사니까 두세갑씩 심부름 을 시키는거야. 내일이면 열갑 살 돈 밖에 안 남겠더라. 그래서 삼만원을 쥐어주 면 만원을 넣어뒀다. 만원을 주면 잔돈을 모았다가 다시 만원짜리로 바꿔서 넣어 두고.
    큰아기 심부름이 좋아?
    설희 ......
    큰아기 주머니에서 손 꺼내기가 싫어 가게도 안 가던 게.

    (사이)

    설희 나 같은 손가락을 본적이 있대.
    큰아기 뭐?
    설희 엄마랑 살 때 말이야, 둘이 송탄에서 살 때. 엄마가 그러는데 나랑 똑같이 생긴 손가락을 본 적이 있대. 나랑 아주 똑같이 새끼손가락이 굽어져 있었대.
    큰아기 굽어져있어?
    설희 그래도 예뻤대. 추운 겨울날 잔뜩 얼어가지고는 눈물 콧물이 범벅이 돼서 하얀 강보를 끌어안고 있는데도 참 예뻤대. 그래서 내미는 강보를 엄마도 모르게 끌 어안았대.
    큰아기 너보다 예뻤어?
    설희 ......나처럼 예뻤대.

    (사이)

    큰아기 쉬 마려.

    설희가 수건으로 큰아기를 닦고 옷을 가지러 들어간다. 큰아기가 변소로 가 문을 연다.
    안에 양규가 있다. 서로를 그대로 보고 서 있다 양규가 문을 닫는다.

    큰아기 쇠도 썩는다. 꽃도 썩고 나무도 썩고 결국엔 몸뚱이도 썩듯이 쇠도 언젠간 썩어. 쇠도 썩히는 게 세월인데, 한 계절 나기도 시린 나이에 그 세월을 어찌 견디려고 그러나.

    암전

    5.

    어두운 저녁이다. 큰아기가 강아지를 아들처럼 업고 걸어간다.

    큰아기 작은입 귀신은 부모형제가 보고 싶어 엉엉 울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울고 또 울 다가 자기도 모르게 입이 커지고 커졌다. 그래서 맘만 먹으면 사람 머리통을 열이 고 백이고 한입에 삼킬 수 있게 됐다. 부모 형제 귀신들은 그걸 알고 있었다. 자기 들도 다 그렇게 울다가 입이 커진거니까. 그래서 기다렸다. 이제는 큰입이 된 작은 입 귀신이 돌아올 때까지. 그런데 작은입 귀신은 지가 그렇게 입이 커진지도 모르 고 혼자서 자꾸자꾸 돌아다녔다. 입을 키울라구 낮이고 밤이고 훠어이 훠어이 돌 아다녔어. 아마 알았어도 돌아가지 않았을거다. 자길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몰랐으니 까. 그래서 이번에는 부모형제가 울었지. 밤마다 울고 또 울었다. 입작은 귀신을 생각하면서. 엉엉 울었어.

    큰아기가 까만 맨홀구멍 앞에 멈춰서 주저앉는다.
    암전

    6.

    양수가 방안에서 장에 내다 팔 것들을 손질하고 있다. 설희가 마당에서 들어온다.

    설희 강아지 밥을 주고 왔다. 삼만원짜리 똥개라 그런지 아무거나 잘 먹어.
    양수 (대답이 없다)
    설희 집을 지키려면 진돗개를 사왔어야지. 저 조그만 한건 우리가 지켜줘야겠는데.
    양수 ......
    설희 아마 급해서 아무거나 골랐을거야. 되게 급했나봐. 가지고 온 가방만 가지고 사라 졌어.
    양수 ......
    설희 하긴 저런 건 금방 큰다니까. 지금은 조그만 해도 금세 나만해질거라던데.
    양수 사람들은 다 갔어?
    설희 부엌이고 변소고 실컷 뒤지다가, 지쳤는지 가버렸어.
    양수 ......
    설희 어디로 갔을까?
    양수 ......
    설희 사람은 왜 죽였을까? 실수였겠지?
    양수 ......
    설희 아니면 너무 미워서 그랬을까?

    멀리서 들개 우는 소리가 들린다.

    설희 강아지 한 마리 들어온 걸 어떻게 알고, 들개들이 늑대처럼 우네.
    양수 무서워?
    설희 왕왕 짖는 건 무서워도 우는 건 안 무서워.
    양수 짖는 것 보다 우는 게 더 무서울 때가 많은거야.

    (사이)

    설희 가끔씩 할머니가 멀쩡한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노망난게 맞았나봐.
    양수 ......
    설희 개를 사람으로 치는 사람이 어딨어?
    양수 ......
    설희 할머닌 자기가 개를 업고 있어서 둘이라고 생각했던거야. 둘이면 입작은 귀신도 못 삼킬거라고 생각한거라고. 아무리 노망이 들어도 그렇지 어쩜 그렇게 바보 같 을 수 가 있어?
    양수 사람만 삼킨다고 한 적 없다.
    설희 ......
    양수 혼자서 나가면 안 된다고만 했어.
    설희 (보다가) 할머니 이불을 안태우길 잘했어.
    양수 ......
    설희 태웠으면 아마 거기서도 종일 그걸 뒤집어쓰고 있었을거야.
    양수 그 사람을 만났을 테니까 이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진 않을 거다.
    설희 (보다가) 그럼 태워버릴까?

    설희가 밖으로 나가려다가 양수를 본다.


    설희 언니네 엄마가 이를 뽑았을때말이야. 왜 그렇게 한꺼번에 뽑았을까? 훨씬 더 아팠 을텐데.
    양수 ......
    설희 언니 때문이었을까? 하나씩 뽑으면 더 무서울까봐?

    설희가 밖으로 나간다. 돌아온 설희의 손에 양규의 가방이 들려있다.

    설희 오빠는 갔지?
    양수 ......
    설희 간 게 맞지?
    양수 ......
    설희 그런데 왜 이게 빨래감안에 넣어둔 이불속에 있어?
    양수 ......

    설희가 가방을 열어본다. 안에 있던 담배갑 하나를 든다. 포장지도 뜯지 않은 새거다. 한참을 그대로 있던 설희가 가방을 거꾸로 들어 쏟아버린다. 안에서 새 담배갑들이 떨어진다.

    설희 어떤 아버지가 있었다. 딸한테 말을 붙여보고 싶어서 피지도 않는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아버지가 있었다. 딸한테 용돈을 쥐어주고 싶어서 꼭 지폐로만 담배 심부 름을 시키는 아버지가 있었다. 그렇게 심부름을 시키는 동안 딸의 이름은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어떤, 아버지.

    어두워진다.
    임나진

    임나진

    1986년 부산 출생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재학중

  • 윤호진 연출가·한국뮤지컬협회 회장, 김명화 극작가·연극평론가

    구십여 편의 후보작품들을 읽으면서 세상이 힘들다는 것이 실감났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망가진 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어 신종 플루 보다 더 치명적인 고통의 인플루엔자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희곡은 르포가 아니다. 많은 후보작들이 적당한 연극적 재치에 신문에서나 볼만한 사건들을 짜깁기하거나 냉소적 상상력으로 비트는 수준에 멈추었다. 게다가 정제되지 않은 언어의 범람은 희곡의 미래가 걱정될 정도로 조악했다. 연극은 필멸의 예술이고 희곡만이 그 흔적을 남길 뿐인데, 후대에 우리는 어떤 언어를 남겨줄 것인가. 반면 알레고리 형식의 문학적인 몇 작품이 눈에 띄었으나 아직 피상적인 수준이었다.

    심사위원들은 큰 갈등 없이 임나진의 ‘문 없는 집’을 수상작으로 결정하였다. 정상적이지 않은 가족을 그린 이 작품 역시 방만한 구조와 지나치게 의도를 숨기는 등 몇 가지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개념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을 육화시키는 단단함이나 감정을 남용하지 않으면서도 감동을 주는 세련됨이 돋보였다. 고통을 치유해 줄 백신을 간신히 발견한 기분이라고 할까. 그 외 구조의 유희에 능란했던 ‘연극’, 한국 사회를 반어적으로 풍자한 ‘Are You OK?’, 싱싱한 독백의 언어가 돋보였던 ‘0.5초’가 최종후보작으로 거론되었다. 수상자에게 축하를 드리고 모두 정진하시기 바란다.
  • 임나진

    임나진

    1986년 부산 출생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재학중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말을 잘 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부모님께조차 나는 입만 산 놈이었으니까. 곧 그 조차 변변치 못하단 걸 알게 되었지만, 차마 당신 자식이 입조차 살아있지 못한 놈이라고 말할 수 가 없어서 이제껏 계속 입만 산 놈으로 살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주관적으로 생각해봐도 죄송스러워야 할 이 이야기의 당선소식이 부모님께 어느 정도의 위로가 되어주지 않을까 싶어 참 기쁘다.

    이만희 선생님, 이종대 선생님, 박광현 선생님, 김현진 선생님을 비롯한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문예창작학과 선생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정신 못 차리는 나를 인내심 있게 견뎌내 주는 친구들과 선후배님들께도, 무조건 이번 한번은 시도해보라고, 그리고나서 안했다, 말고 못했다로 말하라고 갖은 욕설 퍼부어준 친구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심사위원님께 편안한 마음으로 감사드릴 수 있도록, 다음 이야기는 정말 열심히 써 볼 참이다. 그래서 기차타고 내려가는 손에 프린트 말고 제본집을 건네주고 싶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때 그 농담처럼 이대연님께 용기 내어 싸인 받을 수 도 있겠지.

    미안하고 고마운 수진이, 영진이와 보면 죽겠고, 안 보면 더 죽겠는 엄마 김민주씨와 아빠 임남철씨께 이 영광을 돌린다. 올해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일만 생겼으면 좋겠다.
  • 작품전문
  • 심사평
  • 당선소감